피53강 육과 죽음

피/피 2012. 8. 29. 10:35

피53강 육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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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10828피p174육과죽음

피53강 육과 죽음

[11 대구강의 15] - [피 53] - 육과 죽음
                                                                                
                                                   11,08,2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74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오래 살았다는 경험이 죽음의 장벽을 넘는 기술이 될 수 없다. 그 어떤 격언이나 사상이나 정신력도 죽음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 성경은 왜 죽음에 대해서 집중하는가?

왜 성경에서 인간의 삶보다도 죽음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는지, 즉 왜 결혼식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고 하는지, 그렇게 굳이 죽음과 연결을 시키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거기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첫째로, "교회사람 만들기인가?", 아니면 둘째로, "천국사람 만들기인가?" 라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사람으로 만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왜냐하면 이 교회사람 만들기는 얼마든지 사람의 행위로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즉 규칙과 법칙을, 즉 교회법이나 노회법을 지키면 교회사람은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교회사람과 천국사람 !!

하지만 천국사람은 어떠한고 하니, 교회사람을 천국사람으로 예수님께서 인정해준 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바로 (교회사람이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맞아 죽었는데, 그러니 서로 오히려 적대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교회가 타협적이고 우호적인 천국의 하청업체가 아니고 말이다. 그 교회 때문에 메시야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동원해서, 즉 그 사람을 교회에 등록시키면 천국에 가는 사람으로 쳐달라고 하는데, 즉 세례식이나 성만찬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한 것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달라고 하는데,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공부를 하고 성가대에 봉사하고, 그렇게 주일성수를 제대로 하면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천국사람은 그런 짓을 하는 자들에게 그만 얻어맞아서 죽었으니, 여기에서 천국사람에 대한 다른 기준이 필요하고, 또한 교회사람의 경우에도 그 나름대로의 기준이 역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각자의 기준이 말이다.

이런 교회사람을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개종(改宗)' 이라고 하는데, 즉 종교를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종교를 바꿀 때는 자기 결심으로 바꾸었다는 말인데, 즉 과거에는 절에 다니다가 이제는 교회에 다니기로, 그렇게 자기 결심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 천국은, 오직 초청을 받은 자만이 !!

하지만 천국은 자기 결심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천국은 어제 낮에 설교한 것처럼, 초청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초청을 말이다. 그렇게 초청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데 초청을 해주는 분이 목사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로지 초청은 천국의 주인공이 되시고 어린양이 되시는 예수님이 초청해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간단한 문제인데, 즉 초청장이 오지 않았으면 천국으로 전혀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는 제 아무리 가고 싶어도 말이다. 그리고 초대장이 왔으면, "가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천국으로 가야만 하리!" 라고(ㅋㅋ),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천국에 가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의 결심이 무용지물이었으며, 자기에게는 오직 주님의 초청장만 있다는 것이다.

◈ 고린도후서 1장 - '성령의 보증' !!

그런데 십자가 이후에는 이 초청장을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성령의 보증'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성령의 보증으로 이미 그 사람은 빼도 박도 못하게 초청을 받는 자가 된다는 말이다. 성령의 보증으로 말이다.

(고후 1: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고후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이것을 아는 것이지만 잘 잊어버리는 게 무엇인고 하니, 그러면 이 초청장을 가지고 천국에 갈 때 우리의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1번) 단디(야무지게?) 붙든다. 왜냐하면, 바람에 날리면 안 되니 말이다. (2번) 억수로 붙든다. (3번) 무슨 일이 잊어도 까먹으면 안 된다" 라고 하면, 그 중에서 몇 번이냐는 것이다.

과연 주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시는가? 성령께서는 초청장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당했던 그 환난과 고난과 서러움을 같이 경험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교회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즉 자기 결심과 선택으로 등록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는 이유 때문에 서러움을 당하는,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외쳤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끄집어 내어보면, 물론 그것은 성경에서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에도 다 나오는 것인데 말이다. 그 예로서 창세기 9장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참 이번 겨울수련회는 통으로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뚫어보았으면 좋겠는데, 통으로 말이다. 물론 강사는 '나'로 하고 말이다(ㅋㅋ). 그렇게 통으로 뚫되 주제를 "우상은 무엇인가?" 라고 한다면, 결론은 무엇이겠는가? 여호와가 우상이고, 하나님이 곧 우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밝혀진다는 말이다.

아무튼 여기 창세기 9장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고 하니, 첫째로 노아가 포도주를 마셨는데, 즉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노아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창세기 4장에 가인이 제사를 드렸는데, 즉 제사를 드리는 것은 가인이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벨의 경우에, 물론 그가 제사를 드리는 것은 그가 할 수 있지만, 하지만 얻어맞아서 죽은 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 인간이 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인가? (1번) 아벨이 맞아죽는 것, (2번)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과 더불어 이 땅에 있지 않고 동행한 것, (3번) 노아가 방주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것, (4) 무지개가 뜨는 것, (5) 아브라함이 자기 아버지 데라와 함께 본토 아비 집을 떠나는 것 등등, 사실 이런 것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가다보면, 사라가 이미 태가 죽었는데 임신을 한 것도 나오는데, 그런데 그 반대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하갈이 잉태하니 시기가 나서 자기 종인 그 하갈을 질투한 것, 그리고 그 종이 미움을 받아서 가출한 것, 그렇게 가출을 해서 집에 다시 와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 등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이 무엇인고 하니, 조금은 상스러운 표현이지만 새끼를 까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육(肉)'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육에 나서 육으로 가는 것은 우리 인간이 잘 한다는 것이다.

◈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

그런데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육으로 나서 영으로 변화하는 것, 그것은 전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그러니 십자가 이후에, 요한복음에 나오고 또 사도바울의 서신서들에 나오는 '육'과 '영'이라는 대비는 무엇인고 하니, 구약과 신약성경 전체의 그 복잡한 이야기를 아주 간단하게 줄이면 이렇게 된다는 것이다. 즉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끝인데, 즉 '게임오버' 라는 말이다.

지난번에 광주에서 강의를 하는데 프랑스 사람이 한 명 있어서 강의 시간에 영어를 한다고 애를 먹었는데, 물론 제대로 된 영어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그냥 "쟈스트 모우먼트, 게임오버" 라고 하면서 강의를 마쳤는데, 즉 "이제 곧 강의가 끝난다" 라는 의미로 말이다. 그게 다 녹음이 되어있다는 것이다(ㅋㅋ).

◈ 영에 속한 사람은?

아무튼 우리는 "육에서 난 것은 육이다" 라는 말을 무시하고 우습게 보면 안 되는데, 즉 교회에 와서 등록을 하고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육이 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무엇을 인정하라는 말인가? 즉 육을 가지고 교회에 와서 등록을 하고 세례를 받아도, 그것은 영이 아니고 육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 사람이 바로 영에 속한, 즉 천국에 초청을 받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비로소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저분한 육에서 고상한 육, 유행가를 부르는 육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육, 아무리 그렇게 해도 역시 육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육은 예수님의 뜻에 의하면 결코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다는 것인데, 즉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판정이 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끼리 모여서 '우샤, 우샤' 라고 하면서 제 아무리 거룩하고 고상하게 하자고 해도,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단도직입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직방으로(다이렉트?) 예수님의 말씀을 만나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바로 직접적으로 만나게 되면, 즉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안에 하나의 사건으로서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에 나오는 선배들이 갔던 그 길이 우리의 운명으로, 즉 성도의 일생으로서 그대로 반복이 된다는 것이다. 

◈ 마태복음 16장 16절 !!

하나의 예를 들면, 마태복음 16장 16절에 유명한 말씀이 있는데, '16, 16'이니 외우기도 쉽고 말이다. 거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하는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하는, 베드로의 유명한 신앙고백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신앙고백이 왜 유명해졌는고 하니까, 그 뒤 18절에 보면 '교회' 라는 것이 나오기 때문에, 즉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고 어디에 관심이 가 있는가? 특히 목사들이 교회에 관심이 있으니, "야, 어떻게 하면 몽땅 다 천당에 갈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라고 해서, 그런 것을 찾다보니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끝내준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야, 베드로가 그런 고백을 했더니만 예수님께서 교회라고 쳐주는구나. 그러면 우리도 똑같은 문장을 고백하고 외우게 되면, 우리도 자동적으로 교회가 되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겠네" 라고 하는, 그런 아이디어가 번쩍 떠오른다는 것이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분명히 요한복음 3장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베드로가 육에서 나와서, 물론 베드로는 영이 되었으니까 천국에 갔지만 말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고 "너희들도 12보좌에 앉는다" 라고 했으니 예언을 했으니 말이다. 베드로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간 것이 아니고 말이다.

(마 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그렇게 베드로가 육에서 영으로 변했을 때,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영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런 고백을 하고 나서, 예수님께서 자기는 고난을 받아서 십자가에 죽어서 3일만에 부활한다고 하니, 그때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주님에게 그런 일이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 베드로의 본색이 언제?

여기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겠는데, 즉 예수님이 광야에서 누구를 만났는가? 사탄을 만나서 시험을 받았는데, 그렇게 시험을 받을 때, 물론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광야로 갔으니, 그게 자기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탄인 줄 알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육이기 때문에, 물론 예수님은 처음부터 영으로 태어나신 영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베드로는 육이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자기는 육에 속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즉 베드로에게 있어서 앞으로도 자기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는 육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즉 예수님이 어떤 이야기를 하실 때 베드로가 자기 본색을 확 드러내었느냐는 말이다.

여기 16장 21절에 보면,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이 자기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지금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말이다.

바로 그렇게 예수님이 자기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은 계속해서 살아있으면서 자기 일을 하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며, 그러니 예수님이 죽는다는 것은 무슨 일은 아니라는 말인가? 적어도 그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과 결부되어있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이 베드로가 살아있어서 주의 일을 하는 것이지, 이 베드로가 죽어서 주의 일을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은 이 베드로에게는 없습니다" 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그러니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생각일 수도 있고, 사실은 생각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 예수여, 제발이지 그것만은 !!

그리고 결정적으로 베드로의 경우에 "베드로, 너는 사탄이야" 라고 나타나는 경우가 언제 인고 하니, 베드로가 물위를 걸을 때가 아니고, 예수님의 설교를 들을 때가 아니고, 결정적으로 그때가 언제인고 하니, 즉 악마가 예수님에게 "그것만은 안 돼. 다른 것은 다 허용해줄 테니, 제발 그것만은 하지마!" 라고, 그렇게 사탄이 마지막으로 말리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다른 것은 다 허용을 하더라도 마지막으로 말리는 것이 무엇인가? 역시 십자가인데, 왜 십자가를 말리는가? 그것은 바로 이 십자가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일체 무가치한 것으로 돌리고 만다는 것이다.

◈ 이근호 목사 신학의 문제점 ??

일전에 십자가마을 사이트에 '이근호 목사 신학의 문제점' 이라고 올린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그대로 패러디해서 제가 다시 올렸고 말이다. 그 올려졌던 글의 주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왜 이근호 목사는 인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가?" 라는 것인데, 그게 화가 나서 그런 글을 올린다는 것이다. 왜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를, 즉 교회에서 하는 그런 경건한 행위조차도 부정하느냐는 말이다.

그 글이 올려지고 난 뒤에 전국 각처에서 댓글을 달아주셨는데, 물론 옹호하는 글을 말이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대해서 뭔가 거북스러워하는데, 울렁증이든, 그게 아니면 뭔가 토하고 싶은,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십자가 때문에 멀미가 나고, 십자가 때문에 속이 거북하다는 것이다. 파도가 심한 독도 근처에서 배를 타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반면에 십자가가 없으면 모든 것이 편안하고 안정이 되는데, 그런데 왜 십자가 근처에만 가면 그렇게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부는지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 근처에는 가기도 싫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이 다 부정을 당할 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내 것이다" 라고 하면서 건질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모든 가치가 깡그리 부정을 당하는 그런 인생을 굳이 왜 사느냐는 말이다. 차라리 자살을 하고 말지 말이다. 우리 인간들이 바로 그런 식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근호 신학의 문제점은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항상 그 출발점을 "인간은 전적으로 죄인이다" 라고 하면서, 인간을 전적으로 부정하면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인간을 전적으로 부정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제가 그 사람의 지루한 글을 압축해서 "이근호 신학의 문제점이 이것이 맞지요?" 라고 글을 올려놓으니,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맞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제가 제대로 맞추었는데, 즉 '딩동댕!' 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경우에는 그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데, 우리 인간의 전적부정을 말이다. 물론 "인간이 육이다" 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육에서 시작해서 육으로 끝난다" 라는 것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육에서 영이 되어야 한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런 인간의 노력과 열심과 경건과 양심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믿지 못하는 것을 두 글자로 줄이면 '불신(不信)'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자기가 신앙이 없다고 솔직히 말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근호 신학의 문제점은 이것이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정말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으면, 도대체 성경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바로 그것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 당신의 글은 성경말씀과 맞지 않습니다 !!

제가 만약에 어느 목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라고 한다고 하면, 먼저 그 사람이 쓴 책을 모두 다 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다 읽고 나서 "당신 무슨 책의 몇 페이지에 나오는 내용과 그 다음 책의 몇 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이 성경말씀과는 다른 모순점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답변해 보라"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성경말씀이니 말이다. 

그런데 저의 책이 무려 30권이나 나왔는데도 그런 식으로 "이 목사, 어느 책의 어디와 또 어느 책의 어디가 서로 모순이 된다" 라고, 그런 식으로 지적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희한하게도 말이다. 상대방의 문제점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그런 식으로 꼭 집어서 말씀과 서로 맞지 않다고 하면서 지적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감정이 실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이근호는 무조건 싫어!" 라고 하면서, 그렇게 복수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그런 것은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시는 문제이지, 우리에게는 그러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녹취자 - 목사님, 요즘 어느 마을에 그러한 두 증인의 살고 있다고 합니다.) 

◈ 다시 정리를 하면 !!

다시 정리를 하면, 사람들이 왜 천국에는 가는 사람보다 교회에 가는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는고 하니, 교회에 가는 사람은 언제든지 사람의 가르침과 훈계를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약점이 있는데, 그게 바로 "죽어서 지옥에 가면 어떻게 하지?" 라고 하는 것인데, 그리고 "살아있을 때 저주를 받으면 어떻게 하지?" 라고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나의 형편이 이렇게 어려운 것은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아서이지 싶은데, 그 이유를 알고 싶다" 라고 하는 약점, 그런 약점들은 얼마든지 성경을 가지고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백 날을 해봐야 교회 안에서 누구 중심인가?

주님 중심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교회에 나가서 형편이 폈다고 하면, 그 다음에 자기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어떻게 하겠는가? 자기가 과거에 어려움을 극복했던 그 방법을 또 다시 동원시킨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 최종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이 땅에서 편안하게 살고, 또한 큰 소리를 치면서 사는 것을 목표로 세워서, 즉 남에게 자랑스러워하는 '나', 기죽지 않는 '나' 라는 것이 곧 목표이기 때문에, 그래서 항상 인간적인 방법을 자꾸만 동원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천국사람은 '육'이 무엇인지를 알아 !!

하지만 천국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그런 것이 '육' 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은 주님이 주신 초청장 때문이지, 자기가 가고 싶어서, 즉 "초청장을 좀 주세요" 라고 요구해서, 그 초청장으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천국사람이 되는데 있어서 왜 죽음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모든 용도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여기서 '육' 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살고자 하는 것이고, 천국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죽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2장에서 뭐라고 하셨는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을 보존하리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요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하지만 교회사람은 무엇인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목적이니, 즉 '나' 라는 게 없으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도 전혀 없다는 말이다. 즉 "내가 없는데 예수님이 왜 필요한가?" 라는 것인데, 그러니 하나님도, 예수님도, 모두가 자기 때문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에 지옥에 간다면 하나님도 싫은데, 자기가 지옥에 가면 다른 사람들도 다 지옥에 가야 속이 시원하다는 것이다. (마치 사탄처럼 말이다.)

◈ 부자 - '나사로, 너 잘 만났다' !!

그러니 부자가 힘든 것은 무엇인고 하니, 물론 자기가 지옥에 있는 것도 힘들지만, 자기가 비웃었던 거지 나사로가 자기처럼 지옥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약이 오르고 화가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지 나사로에게 물을 가지고 오게 해달라고 하는데, 만약 나사로가 물을 가지고 지옥에 왔다고 하면, 아마 부자가 멱살을 잡고 "니는 뭐가 잘나서 천국에 갔노?" 라고 하면서 흔들었지 싶은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목도 나사로의 목처럼 근질근질해야 하는데, 즉 누군가가 우리의 목을 조르려고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테러주의보가 내려져 있는데, 누군가가 이근호에게 테러를 가하려고 한다는 말도 있고 말이다(ㅋㅋ).

그러니 같이 가자는 것인데, 하지만 그렇게 같이 가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본인이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데 말이다. 왜 그렇게 물귀신처럼 붙잡고 늘어지는지, 혼자서는 겁이 나서 가지를 못하는가? 자기 자리에서 십자가를 믿으면 되는데 말이다.

◈ 예수님은 왜 죽음을 언급하시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왜 이렇게 죽음을 언급하는고 하니, 인간의 죽음은 바로 육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 육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죽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 성경말씀은, 십자가에서 나온 의미를 산포(散布)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십자가가 먼저 점선으로 되어있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성경말씀은 이 십자가에서 나온 의미를 산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산포(散布, dispersion)' 라는 것은 흩뿌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마치 모기약을 뿌리듯이 말이다. 물론 '살포' 라고 할 수도 있는데, 산포가 적당하다는 것이다. 살포라고 하고 보니 더 의미전달이 잘 되는데, 사실은 살포가 더 어려운 용어인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십자가의 의미를 살포하는 것이 성경전체라고 하면, 더 나아가서 온 우주전체에다가, 즉 김정일이 살아있는 것이든, 사우디아라비아에 석유가 나는 것이든, 또한 에베레스트에서 만년설이 녹는 것이든, 그 어떤 것이라도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란 말이다. 물론 북극에서 얼음이 녹는 것도 말이다. 그 모든 것이, 심지어는 지하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모두가 십자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모든 것에서 다 십자가를 끄집어낼 수 있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목사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가 무엇인가?" 라는 것이기에, 즉 모든 관심사가 진리가 무엇인지,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내가 행복한가?" 라는 게 아니고 말이다. 그것이 곧 십자가가 우리의 죽음과 관련이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같은 죽음이라도, 그 의미가 두 가지로 !!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기존의 육에서 나온 죽음의 의미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그런 육에서 나온 죽음의 의미가, 즉 인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로서 죽였는데, 그렇게 우리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 나오는 죽음의 의미가 따로 있고, 반면에 예수님에 의한 죽음의 의미가 또한 따로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새언약으로서 영생이 되고, 그리고 인간의 죽음의 의미는 저주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이렇게 동일한 '죽음' 이라는 것을 다루면서도, 도대체 어떤 것이 영생으로 이끄는 죽음의 의미이고, 또한 도대체 어떤 것이 저주가 되는 죽음의 의미인지를, 그것을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영생과 저주의 죽음을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람을 더욱 괴롭히는 것은, 죽음이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이고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막상 죽음 앞에선 각 개인들은 혼자서 죽음 전체를 다 감당해야 하는데 있다.

◈ 혹시, 나만 죽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참 어려운 말인데, 무슨 의미인고 하니, 만약에 자기가 죽을 순서가 되어서 죽는다고 한다면, 마치 자기만 죽고 다른 사람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죽지 않는 느낌을 받으면서, 그렇게 하면서 자기가 죽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다 아는데, 자기가 먼저 죽으면 다른 사람들도 뒤에 다 죽는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막상 자기가 죽게 되면, 그때는 자기만 손해를 보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들은 위로를 한답시고 뭐라고 하는가? "그래, 나도 이제 곧 죽는다" 라고 하는데, 그래도 죽는 사람은 자기 혼자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의사가 아이가? 나를 좀 살려내란 말이야" 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선아가 여인의 향기에서 말이다(ㅋㅋ).

예쁜 김선아가 그렇게 "당신이 의사이니, 3개월밖에 남지 않는 내 인생을 좀 살려내라" 라고 절규를 하는데, 그렇게 3개월밖에 남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그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래도 제법 남아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것을 하나하나씩 줄여 나가보라는 말이다. 사실은 그 자체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마치 아이스크림이 녹는 느낌이 드는데, 얼마나 비참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만큼 잘리고, 또 아침에 눈을 뜨면 이만큼 잘리고 말이다. 차라리 시간이 그만 후딱(빨리?) 지나가서 자기 죽음의 때가 오면, 그렇게 초조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마치 선생님이 학생을 때릴 때, 그냥 빨리 패면 되는데, 그냥 폼만 잡고 견주고 있으면 얼마나 겁이 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앞으로 잘해라.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내 말이 맞지?" 라고 하면서, 때릴 둥 말 둥, 그렇게 폼만 잡고 있으면 말이다. 차라리 맞는 것이 나은데 말이다. 다들 그런 경험들이 있지 싶은데, 물론 때린 경험이 아닌 맞은 경험이 말이다(ㅋㅋ).

◈ 여전히, 서산으로 해는 지고 있기에 !!

그런데 사실은 의사가 "이제 3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몸에 암세포가 다 퍼져서 우리가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집에 가셔서 하고 싶은 것을 하시고, 마지막 인사나 하시면서 정리를 하세요" 라고 할 때만 죽는 것이 아니라, 로또에 당첨이 되었다든지, 혹은 자기의 모든 일이 잘 될 때, 그때도 역시 서산으로 24시간의 해는 여전히 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날이 우리 곁에서 그만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붙잡으려고 해도 전혀 잡을 수가 없는데, 즉 아름다운 어제를 도저히 잡을 수 없다는 말이다. 누가 가지고 갔는지, 그 어떤 도둑놈이 가지고 갔는지 몰라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의 존재는, 유동적(流動的) !!

그래서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실체가 아니고, 즉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액체라는 말이다. 그러니 '흘러간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흘러간다고 표현하는고 하니, 그게 변동을 하면서 가니 그렇다는 말이다. 즉 죽음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죽음의 진동이, 즉 죽음에서 오는 세력의 힘이 점점 더 가해지니 그 파도의 높낮이가, 즉 파고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 울렁거림이 점점 심해져서 멀미가 더욱 더 난다는 말이다.

◈ 하지만, 나이가 들면 - '우야라꼬' !!

물론 젊었을 때는 자기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지겠다고 나오는데, 즉 자기가 자기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인정하면서, 그렇게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 거기에 대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하는데, 하지만 나이가 65세 정도만 지나가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때는 뭐라고 하는가? "내가 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나? 그러니 우야라꼬?(어쩌라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뻔히 알면서도 실수를 하고, 그렇게 실수를 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을 본인이 너무나도 잘 안다는 것이다. 내일이 되면 그런 증세가 더 심해지기 때문에, 도저히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물론 하고 나서 너무 심했다 싶어서 후회가 되기도 했는데 말이다. "화장실에서 조절도 잘 못하고, 나이가 들면 얼마 병신인지 모른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왕 할 것 같으면 화끈하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나이가 되면, 자기가 봐도 자기 자신이 참 한심하고 기가 찬다는 말이다. 20살 때 그렇게 하면 병원에 가서 고치기라도 하면 되는데,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래장이라도 있으면 가면 되는데, 고려장 모텔 말고 말이다(ㅋㅋ).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시설이 그리운데, 그런 것이 있으면 자기가 제일 먼저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자기가 보기에도 자기가 하는 모든 처신이 참으로 한심하기가 짝이 없는데, 즉 귀신인지 인간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5년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내가 왜 이렇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 어머니가 매일 같이 하시던 소리가 바로 그것이었는데, "야야, 내가 왜 이카노? 참, 이상하다" 라고 말이다.

◈ 인간은, 자기 행함을 자기가 몰라 !!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인간은 자기 행함을 자기가 모른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자기 행함에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예 책임을 질 것조차도 없는데, 왜 그런가? 육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이 육의 특징은 바로 '죽음'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육의 모든 세력은 "죽어라. 이놈아!" 라는 것인데, 그것이 육의 가장 솔직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을 보면 !!

이것을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학'에서 밝혀내었는데, 즉 인간의 본능은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하나는 '리비도' 라고 해서, 자식을 낳은 생식하는 것인데, 즉 성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남자가 여자를 보고 호감이 가고 사랑을 나누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말린다고 될 문제가 아닌데, 직업이나 나이와도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그보다 더 깊은 욕구는 무엇인고 하니, 바로 '죽음' 이라는 것이다. 리비도는 하나가 되기 위한 생식의 욕구이니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에 반해서 죽음은 증오, 혹은 미움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과 미움, 그 두 가지가 노골적으로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사람을 두고 정신병자라고 하는데, 그리고 그게 완화가 되어서 조절이 되어서 나오는 사람을 두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프로이트는 의식세계 속에서 정상적인 것은 타고난다고 본다는 것이다. 의식이 연결이 되었다면 타고난다고 할 필요가 없는데, 의식이 딱 딱 끊어졌으니, 그렇게 끊어질 때마다 빈틈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 안에는 의식을 의식이 되게 하는 엄청난 것이, 즉 의식의 기초가 되는 무의식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게 하나의 기반이 되고 기둥이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다 사랑하면 되는데, 그것은 의식이라는 것이다. 즉 어른다워야 하고, 부모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윤리 도덕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무의식으로 내려가면 그것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놈은 엄청 사랑스럽고, 미운 놈은 엄청 밉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사랑과 미움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사랑을 했는데 기대에 어긋날 때는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고, 그리고 미워했는데 기대 밖으로 성과를 낼 때는 오히려 미움이 사랑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마치 최백호의 노래처럼 말이다. 혹시 그 노래를 아십니까?

그렇게 우리 인간은 자기 마음을 자기도 모른다는 것이다. 왜 자기가 이놈은 좋아하고, 저놈은 미워하는지를 말이다. 다 같은 자식인데 말이다. 그렇게 이유도 없이 사랑하고 이유도 없이 미워하니, 자기 마음을 자기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죽음보다 더 센 사랑 !!

사실은 왜 그런고 하니, 이 사랑이라는 것이 어디서 소멸이 되는고 하니, 즉 사랑보다 무엇이 더 세냐는 것이다. 사랑보다도 죽음이 더 센데, 그런데 아가서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죽음보다 더 센 사랑'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아 8: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그러니 그것은 인간의 사랑이 아닌데, 초청장을 보낸 분의 사랑이라는 말이다. 그분이 뭐라고 하는가? "너는 죽어야 돼" 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물론 "아니, 싫어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분이 보낸 그 초청장은 죽음보다 더 센 초청장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것을 저주를 받으려고 노래를 부르는 짓이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즉 "이것 말고 다른 복음이 좋거든, 그것은 너희들이 저주를 받은 줄로 알아라" 라는 것인데, 그것이 곧 교회사람이 아닌 천국사람으로의 전환이란 말이다.

◈ 모두가 다 사랑이에요 ♬

하지만 교회사람은 무엇인가? 오직 그들이 원하는 리비도, 즉 사랑인데, 자기가 살아있으면서 쾌락을 즐기고 향유하는 말이다. 즉 '조이너스' 라는 것이다. 최고 즐거움의 끝은 사랑인데, 그래서 모든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거기에 나오는 것은 다 사랑 이야기라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해야 시청률도 올라가고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죽음을 가지고 드라마를 만드는 것을 어디 보았는가?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다. 모두가 다 사랑 이야기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사랑보다도 죽음이 더욱 더 센 것이 엄연한 현실인데, 그런데 성경은 그 죽음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보이는, 즉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만 보이는 사랑을 하나님께서는 준비하시고,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해주신다는 것이다. 죽음보다 더욱 더 센 사랑으로 말이다.

◈ 거지 나사로의 경우에 !!

비록 거지 나사로가 남들에게는 천대를 받지만, 하지만 그의 이름 자체가 '하나님을 사모하는' 라는 의미처럼, 그러니 누구의 사랑을 받았다는 말인가? 살아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 앞집에 사는 부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집 부자의 모든 돈은 나사로에게는 불소시게에 불과한데, 마치 석탄이나 휘발유와 같이 태울 것에 지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 집에 돈이 많다고 자랑하는 것은,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다이너마이트가 잔뜩 있다고 자랑하는 것과도 똑같다는 것이다. 성냥 불 하나에 그냥 다 날아가 버리고 마니 말이다. 그러니 거지 나사로나 스데반 집사님과 같이 주님 안에서 비로소 사랑을 접촉한 사람은, 그야말로 축복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생명은 어디에 있는가?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 라고, 즉 하늘에 있다는 것이다.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옆 사람이 나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유족들에게 위로가 될지 모르지만, 죽는 당사자에게는 소용이 없는 논리이다. 그것은 죽음의 세계가 인간사회에서 통하는 상식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은 반감이 되거나 분배되지 않는다.

◈ 분배되지 않는 죽음 !!

무슨 뜻인가? 자기 혼자서가 아니라 둘이나 셋이 함께 죽더라도, 그런 개인 죽음의 고통이 감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여전히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옆 사람이 자기와 함께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죽는가?" 라는 문제라는 것이다. 즉 아무리 득세해서 많은 사람들이 같이 죽어주어도, 그런 남들의 죽음이 자기 죽음을 해석해주고 설명해주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것도 자기 죽음을 대신해줄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어떤 죽음이라도 말이다.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죽음을 대신했다" 라는, 그 말로 인해서 자기의 죽음이 위로를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이고, 역시 자기 죽음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죽음마저도 신경이 쓰이지 않도록 만들어버린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하는고 하니, 우리가 죽은 것마저도 주님의 하시는 일에 그만 포함을 시켜버린다는 것이다. 즉 "이제는 글을 쓰고 - 글을 쓰고, 밥을 먹고 - 밥을 먹고, 안경을 쓰고 - 안경을 쓰고, 이제는 책장을 펼치고- 책장을 펼치고, 죽고 - 죽고" 라고, 그렇게 아주 자연스럽게 된다는 말이다.

◈ 성도는, 죽어도 주의 것으로 !!

그런데 육에 속한 사람은 어떠한가? "이제는 책장을 펼치고- 책장을 펼치고, 이제는 죽고 - 죽고??, 오잉, 그건 안 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자기 몸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인데, 즉 살 때만 주의 것이 아니라 죽어도 주의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죽을 때도 자기 것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주의 것으로서 죽어야 되는, 그런 주님의 날이 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은 '나'에는 죽음이 없는데, 왜 그런가?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기에, '내' 죽음도 그만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즉 '내'가 죽는 것은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으로서의 죽음인데, 바로 그렇게 주님의 것으로서 이 몸을 떠나야 될 그날이 온다는 것이다. 즉 "나의 인생은 없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운명으로 다루어진 존재가 곧 성도 !!

그래서 제가 어떤 글에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아마도 댓글을 달다가 그렇게 했지 싶은데 말이다. 즉 '운명으로 다루어진 사람들' 이라고 말이다. 우리 자신이 운명이 아니라, 오히려 운명이 주체가 되고, 우리는 거기에 소속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나보다도 나의 운명이 더 세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운명으로 다루어진 존재가 곧 성도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는 그 운명에 대해서 늘 감사하는데, 즉 범사에 감사한다는 말이다. 항상 그러한 일에 대해서,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 주의 일이라고 여기면서 그 일에 열심히 종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집사님도 손자를 잘 키워야 하는데, 주께서 맡기신 일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건 운명이니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잠시 결혼에 대해서 !!

여기서 잠시 결혼에 대해서 살펴보면, 옛날에는 결혼이 무엇인고 하니, 형식이 우선이었고 그 다음이 정(情)이었고 사랑이었다는 것이다. 즉 먼저 결혼을 한 부부이기 때문에 정을 나누고 또 사랑을 하는 부부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 과거의 결혼에 대한 인식이었다는 말이다. 즉 결혼은 형식적으로 해놓고, 그런 결혼을 했기 때문에 정을 나누고 사랑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결혼이란 형식이 먼저이고, 정이라는 내용은 그 형식에 맞춘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어떠한가? 내용이 먼저라는 것이다. 즉 사랑이 없이는 결혼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고 하니, 무서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ㅋㅋ). 아무튼 그 내용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형식을 갖다 부치기 때문에, 즉 결혼을 했더라도 둘로 그만 쪼개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 때문에 결혼을 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그 기대한 사랑에 충족되지 아니하면, 결혼도 의미가 없다고 본다는 말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가 않았는데, 즉 먼저 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사랑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랑 신부 얼굴도 결혼식을 하는 그날에 보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먼저 사랑을 했기 때문에 결혼도 하고 부부로서 살아가는 것인데, 그러니 사랑이 식게 되면 당연히 부부 사이도 그만 깨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그렇다면 과연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가? 물론 둘 다 옳다고 할 수 없는데, 둘 다 자기 중심이니 말이다. 아무튼 옛날 사람들은 쉬웠는데, 일단 결혼만 하게 되면 정은 저절로(?) 생겼다는 것이다. 그것은 맞고 틀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개체가 나올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정도 없으면서 얼마든지 정이 있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있으면서도 없다고 할 수 있기에 말이다.

◈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 ??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 라는 것이 말이 안 되는데, 즉 내용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형식이라고 하면, 그렇다면 그 사랑이 언제의 사랑이냐는 것이다. 즉 사랑할 때 그 시점의 사랑이지, 그때가 지난 일년 뒤의 사랑은 또 다르다는 말이다. 그래서 "5년을 살아보고 나서 결혼을 하겠다" 라고 해도,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시간은 지나가 버리니, 그때 그 사랑을 원한다고 하면 결혼은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영원히 결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은 어디에 있지?" 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사랑만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할 생각은 하지 않고 말이다. 그렇지 않나요?

◈ 천국사람 -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나는 죽어가고 있다' !!

그런데 죽음이라는 것은 어떠한가? 그런 형식과 내용을 초월해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데, 누구에게나 말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왜 내가 죽게 되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곧 "나 자신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하여 죽어야만 될 존재로서 나는 죽어가고 있다" 라고, 그렇게 정리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천국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어떻게 하다가보니 죽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맡겼는데, 그 역할이 무엇인고 하니, "살다가 죽어라. 이놈아!" 라고 하는, 그것이 우리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역할을 아주 반갑게 맞이하면 되는데,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죽든, 기침을 하다가 죽든 간에 말이다. 그런 것에 관계없이 항상 언제 죽든지 간에 주님의 것으로서 돌아가시면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죽음의 세계에서는 둘이 함께 죽든 셋이 함께 죽든, 심지어는 유다 나라를 대적했던 앗수르 군사 185,000명이 한꺼번에 죽든지, 다 같이 하나에게 주어진 죽음이 그대로 적용이 된다. 아담을 통해서 주어진 죽음이 동일하게 주어진다.

(사 37:36)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 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 죽는 엑스트라 역할을 !!

여기에 유다나라를 대적했던 앗수르가 나오는데, 무려 185,000명이나 한꺼번에 죽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개개인의 운명은 왜 이렇게 죽게 되는가? 그것도 역시 방금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은 주님의 하신 일을 위해서 죽는 역할을, 그런 엑스트라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전쟁 장면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마치 광개토태왕처럼 말이다. 그 중에서 그들이 맡은 것은 단체로 왕창 죽는 신(장면)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이것을 수용하지 않는데, 하지만 성경에 보면 무엇이라고 하는가? "유다나라를 건드리는 놈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겠다" 라고 하는데(어디 있지?), 바로 그 시나리오의 주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들은 18만이 아니라 180만이라고 해도 그날 천사에 의해서 한꺼번에 다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월절 밤에 애굽의 장자들은 왜 다 죽어야 했는가? 애굽의 감옥에 있던 죄수의 장자도 죽고, 또한 왕궁에 있던 바로 왕의 장자도 죽었는데, 아무튼 장자는 다 죽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죽어야만 했는가? 물론 우리는 그 이유를 아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일을,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은 죽는 역할을 담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방금 제가 한 이런 이야기를 동화사 주지가 받아들이겠는가? 또한 그 당시 애굽의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겠는가?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아하, 그때 전염병이 유행했구나" 라고 할텐데, 그래서 과학이라는 것이 아주 못됐다는 것이다.

◈ 그런데, 과학의 경우에는 !!

과학은 제 아무리 연구해도, "오직 십자가를 위해서 모든 피조물이 존재한다" 라고 하는 것을, 그것을 도저히 그것을 증명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은 진리가 아니라 실용적인 것에 불과한데, 즉 "3+5=8" 이라고 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진리는 무엇인가? "3+5=십자가" 라고, 그렇게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3+5"에서 무슨 십자가가 나오는가? 미쳤는가? 

그러므로 "3+5"에서 십자가를 끄집어내는 방법만 알면, 모든 성경에서 다 십자가를 끄집어낼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3+5=8이라고 하는 것이 진리라고 여기는 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진리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3+5=8" 이라고 철떡같이 믿는 자들의 손에 의해서 죽은 분이 곧 예수님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죽었는가?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다 불에 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불소시게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데,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진리라고 우긴다는 말이다.

◈ 하지만, 죽음이 닥치게 되면 !!

그러므로 과학자가 육에서 영에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데, 물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만 말이다. 그러면 과학자가 언제 진리를 접하는고 하니, 보편적인, 즉 자기 생각이 없는, 자기가 원하지도 않는데 주께서 덮치게 될 때인데, 그것이 바로 자기의 죽음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이 자기가 죽을 때는 어떠한가? 그 과학자의 과학적인 업적이 제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즉 상대성원리가 어떻고 저떻고, 또 페니실린을 발견해서 인류를 구하고 어쩌고 해도, 그 어떤 것도 자기의 죽음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죽는 사람에게 "박사님, 드디어 노벨상이 결정되었습니다" 라고 하면, 그가 뭐라고 하겠는가? 벌떡 일어나서 "그러면 니가 노벨상을 받고 니가 죽을래" 라고 하지 싶은데(ㅋㅋ), 지금 자기가 죽는데, 겨우 3개월이 남았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 사람에게 옛날에 표창장을 타고 한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 자기가 죽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엄마가 이제 죽기 직전인데 아들이 와서 "어머니, 제가 드디어 이사로 승진을 했습니다. 기쁘시죠?" 라고 하면, 물론 엄마는 "그래, 애썼다" 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죽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엄마, 이번에 제가 전문의를 땄습니다" 라고 하면, 물론 "그래, 잘했다" 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엄마를 살려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디 전문의라고 해서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가?

◈ 온 세상이 시커먼스, 시커먼스 !!

죽는 사람은 자기 눈꺼풀이 내려앉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온 세상이 다 시커멓다는 것이다. 아들이라고 해서 하얗고, 딸이라고 해서 노랗고,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다 검은 색이라는 말이다. 즉 자기가 눈을 감으면 이 세상도 다 꼴 보기 싫다는 것이다. 자기가 죽으면 말이다. 그것이 곧 '육'의 모습인데, 그러니 우리의 육은 평생 마귀에게 놀아났던 노리개감이었음이 들통난다는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말이다.

물론 우리도 그 죽음의 저주를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죽었던 우리에게 "죽은 자가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라고, 즉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죽은 것이 잠자는 것이 되는데, 왜 그런가? 주의 것으로 죽었으니 말이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처럼 말이다. 그렇게 주의 것으로 죽었으니, 살아있을 때 사용되었던 그 도구가 죽어서도 여전히 주님에게 사용된다는 것이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다시 말해서, "자, 니가 죽는 역할을 잘 했는데, 그 다음 장면은 면류관을 주님에게 반납하는 것인데, 그러니 어서 일어나야지. 일어나서 면류관을 반납해야지. 옳지, 잘했어요. 그 다음은 천사와 함께 찬양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야지. 네, 좋아요" 라고, 그렇게 모든 것이 주님에 의해서 사용되어진다는 것이다. "오늘은 대구에서 성경공부하고, 또 내일은 십자가마을 게시판에서 마구 깨지고" 라는 식으로 말이다(ㅋㅋ).

계속해서 교재 175페이지를 살펴보자.

** 성경에서 사망(죽음)이란 그 내용이 있어서 각기 다른 두 가지 실체를 띤다. 하나는 숨이 끊어지는 것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스러운 심판을 영원히 받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사망(죽음)의 표현에 있어서도 각기 다른 두 형식을 갖는다. 숨이 끊어지는 것을 '첫째 사망' 이라고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은 것을 '둘째 사망' 이라고 한다.

(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계 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
(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에 대해서 !!

이렇게 이 죽음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으로 말이다. 이게 좀 어려운데,  즉 사망이 있는데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이 있다는 것이다. 혹시 사망을 둘로 나눈 철학자를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성경처럼 이렇게 나눈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용어를 사용한 철학자는 있는데, 그가 바로 '지젝' 이라는 말이다. 그 사람은 성경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하지만 그가 말하는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육적인데, 즉 사회적으로 죽는 것을 첫째 사망이라고 하고, 자기 자신의 실존적인 죽음을 둘째 사망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게 아니라, 첫째 사망은 우리의 몸이 죽는 것을 말하고, 그리고 둘째 사망은 우리의 몸이 저주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을 어떻게 아는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와 재림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하신 일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으로 인하여 이 지상에서 사망도 두 개의 의미로 세분화가 되는 현상이, 바로 그러한 변화를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 '죽음'을 창세기 2장에 집어넣으면 !!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으로 인해서, 그렇게 구체적인 진리가 모두 드러난 시점에서, 이 사망을 창세기 2장에 한번 집어넣어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창세기 2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 정녕 죽으리라 !!

그런데 여기서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몸이 죽는 것이라고 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데, 물론 아담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마치 백설공주가 사과를 먹는 것처럼, 즉 독이 든 사과를 먹고 불에 올린 오징어처럼 몸이 뒤틀리면서 엎어지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아, 비겁하게 하나님이 선악과에 독을 넣었구나" 라고 말이다.

하지만 선악과에는 독이 들어있지 않는데, 굳이 독이라고 하면 선과 악을 아는 것이 독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은 그 독을 알고서 좋아서 난리가 났는데, 하나님의 지식을 도둑질해서 알아차렸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즉 이제는 우리도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하,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구나. 하지만 이제 우리도 알았으니, 우리의 어깨에도 힘을 좀 넣어야 하겠네. 하나님, 그렇게 해도 되지요?" 라고 하면서, 그렇게 같이 힘을 주고 있다는 말이다. 즉 선과 악을 알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알면 무엇을 하겠는가? 그것을 구체화시킬 능력이 없는데 말이다.

알다시피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했을 때, 그때 아담이 먹고 2초 뒤에 죽은 것도 아니고 말이다. 아마 하와가 먼저 먹고 몸에 이상이 있었다고 하면 자기 남편에게 결코 주지 않았지 싶은데, 그런데 자기가 먹어도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설교시간에 "용기가 있는 자는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즉 십일조를 안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얼마나 용기가 있는 행동이냐는 말이다. 그 다음에 또 하지 않아도 역시 아무 문제가 없고 말이다.

◈ 인간의 몸은 모니터와도 같아서 !!

그런데 그렇게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했는데, 그만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어디에 나타났느냐는 말이다. 이게 좀 어려운 문제인데, 그것은 바로 몸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몸은 일종의 모니터와도 같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몸을 아담은 자기의 몸인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그 아담의 몸은 아담의 몸이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그렇게 말씀의 위반과 말씀의 완성을 보여주는, 그런 말씀의 진위가 드러나는 일종의 테스트기이고 모니터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즉 몸에 전과 다른 어떤 이상한 증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펴고 !!

여기서 우리가 같이 생각을 한번 해보겠는데, 아담과 하와가 마귀에게 그런 언질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몸에 다른 증상이 생긴다고 하는 정보를 말이다. 그러면 마귀는 그들에게 뭐라고 했는고 하니, "하나님이 너를 보고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한 것은, 진짜 그렇게 죽는 것이 아니라, 니가 하나님이 되는 거야. 또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 신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마 마귀가 이런 소리를 했을 때는 다음과 같은 것까지 내다봤지 싶은데, 즉 선악과를 따먹은 채로 무엇을 먹는다는 말인가? 생명나무 과일을 따먹게 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두 가지 나무의 열매를 다 따먹게 되니, 그야말로 마귀가 보기에 선악에 대해서 영원한 지식을 알게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만이 누리는 지위를 인간도 같이 공유할 수 있다고 말이다.

◈ 마귀 - '죽음은 더 이상 없어' !!

아마 마귀가 그런 계산으로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서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라고 했지 싶은데 말이다. 그러니 죽는다는 것은 거기에 없는데, 그렇다고 하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마귀의 유혹은 무엇인고 하니, 무엇이 없다는 말인가? 죽는 것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그런 것은 헛말이라고 하는, 즉 하나님의 말씀자체를 부정하는, 마귀는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그런데 그때 마귀가 "내가 주의사항을 하나 말해줄게. 너거가 따먹고 나면 몸에 좀 부끄러운 부분이 있을 거야" 라고, 그렇게 무슨 언질을 주었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선악과를 먹고 몸에 부끄러운 부분이 있어서 가리워야 한다고 했다면, 아마 그들이 따먹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 목사들의 거짓말 !!

그러니 교회에서 목사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 것이, 즉 그들은 "성경대로 했는데 왜 거짓말이라고 하는가?"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이 항상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즉 교회 중심으로 목회를 한다고 하는 것이 왜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고 하니, 교회가 천국과 대비가 되는, 즉 그들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간다" 라고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빠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마귀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몸이 부끄러워지고 가리워야 한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처럼, 목사가 저주와 지옥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미필적 살인죄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고의성이 다분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천국사람보다도 교회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부담을 주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문제인가? 중요한 것은 진리인데, 그러니 그런 것은 목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작 성도라고 하면 진리를 찾아서 왔는데, 그런데 목사가 그것을 걱정해서 "여러분, 이렇게 말하면 상처를 입지요? 그러니 제가 말하지 않을게요" 라고 한다면, 그것은 목사의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이는 것은 죽이고, 살리는 것은 살려야 하는데,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살리는 것은 죽이고, 죽이는 것은 살리려고 하니, 반야월의 어느 교회처럼 말이다. 그러니 완전히 거꾸로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양아치 마을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억지로 살리려고 하지를 말고, 지옥, 저주, 심판, 교회, 그리고 천국에 대해서 올바른 소리를 하라는 것이다. 교회와 천국은 서로 대비가 된다고 말이다.

◈ 아담 - '하나님이 주신 저 여자가' ??

아무튼 인간은 이런 증상과 징후로 인해서 그야말로 그때 부터 자립적으로, 혹은 자전적으로 버티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생긴 현상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누가 따먹었어?" 라고 하니, 남자가 뭐라고 하는가? "저 여자가 시켜서 먹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비겁하게 말이다. 그것도 그냥 여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준 여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창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 3: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창 3: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그러면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는 말인가? 그 여자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인데, 즉 "하나님 당신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 나타난 악마의 '버짐(버즘? 피부명의 일종)' 이고, 악마의 징조라는 것이다. 즉 악마가 그렇게 인간 속으로 스며들어왔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 얼마나 악마성이 들어있는지 모르는데, 그 악마성이 모으고 모아져서 메시야를 십자가에 매달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추진력으로 작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예수님을 죽이는 자들인데, 예수님이 너무 밉다는 말이다. 즉 이제는 "나를 죽이는 자가 누구야? 당신이야? 그럼 당신이 죽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죽이는 자도 용서가 되지 않고, 자기를 지옥에 보내는 자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주되심을 허접한 우리 '몸'으로 !!

이런 사망의 힘이 현재 우리 몸에 작용하고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저주의 몸을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주(主)로 드러내는 용도로서 사용하시는데, 즉 이렇게 추잡스럽고 허접한 우리의 몸을 가지고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신다는 말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보여주는 매개체로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지난 여름수련회 때 그런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그때 제가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매개자가 예수님이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서는 어떠한고 하니,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주님 사이의 매개체로서, 죄인을 사용하셔서 주의 주되심을 드러내신다" 라는 것이다. 이게 여름수련회가 아니라 가락교회에서 했지 싶은데 말이다. 머리카락만 빠지는 것이 아니라, 뇌세포도 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데 말이다(ㅋㅋ).

◈ 오잉, 매개체가 예수님에게서 우리 몸으로 !!

그러므로 이제는 매개체가, 즉 중간 전달자가 주님에게서 우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주되심을 증거하는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자는, 즉 주님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은 사람은 "나는 구원받았다" 라고 하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되심이 자기 몸을 통해서 펄펄 드러나고 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냄새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사망이 자기 몸을 어떤 식으로 지배하고 있는지, 즉 하나님의 처음 창조하신 몸이 아니라 다른 몸으로 어떻게 본 때를 보여주는지, 바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뿜어내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걸핏하면 하나님 탓을 하고 예수님 탓을 하는데, 즉 "나는 잘못이 없는데, 예수님이 나를 힘들게 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얼마나 예수님을 원망하고 또한 불평을 늘어놓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특히 열심히 목회를 하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개척교회를 하려는 목사들에게는 이런 성향이 굉장히 강렬한데, 즉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몸은 주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망의 원래 의미가 펄펄 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몸을 통해서 계속해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침에 눈만 뜨면 원망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즉 "오늘 준비한 것이 안 되기만 해봐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손주를 보고 있는데 울면 뭐라고 하는가? "이놈은 오늘 따라 왜 이렇게 우는지 모르겠다. 주여, 제발 울지 않게 하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여기에서 요한계시록 20장의 말씀을 보면, 14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재 176페이지에도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제가 이 대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한번 해볼 테니까,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는지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이 요한계시록은 사도요한이 지은 것이 아니라, 요한의 제자나 요한을 사칭한 자가 그 후대인 약 A.D 100년경에 쓴 것으로서, 아마 초대교회의 어떤 유력한 장로로도 추정이 되는데, 그가 소설을 썼다는 것이다. 요한을 가장해서, 요한이 귀양을 간 것을 마치 자기가 간 것처럼 그렇게 해서 말이다.

◈ 요한계시록, 그것이 알고 싶다 !!

그러면 그가 왜 그런 소설을 썼는고 하니, 도미티안 황제 때에 워낙 박해서 심해서, 그대로 가다가는 교인들이 다 죽지 싶어서, 또 나머지 사람들은 너무 겁이 나서 다 항복을 해버리고, 그렇게 되면 교회 자체가 안 되겠다 싶어서, 따라서 여기에 대해서 분위기 반전을 시키려고 하면, "여러분, 어려울수록 천국은 가깝습니다" 라고 하는 식으로 소설을 하나 써야 되겠다 싶어서 작성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네로나 도미티안 황제의 모든 핍박을 구약에 나오는 어둠의 세력, 즉 악마로 비유해서 작성을 하고,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는 희망을 주어야 하니, "하늘이 열리고" 라고 해서, 하늘의 환상을 전부다 기록하되, 기원전과 후의 유대교에 있었던 묵시문학의 자료들이 많이 있어서, 그것들을 참고해서 거기에서 멋있어 보이고 환상적인 것들을 추려서 짜집기를 해서, 물론 서로 내용이 맞지 않는 것들을 말이다. 그렇게 짜집기를 해서 지금 네로나 도미티안 황제의, 왜냐하면 지금 '666' 이라는 숫자가 필요하니 말이다.

그렇게 그들에게 핍박을 받는 자들에게 이 글을 전달해서 "힘내라, 힘!" 라는 식으로 유도하고, 또한 "아! 대한민국, 짜작작짝짝" 라는 식으로 격려용으로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써다가 보니 핍박하는 자들에게 대한 가혹한 형벌, 즉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형벌이 무엇인지 소설을 쓴 사람이 궁리를 하다가, 그것이 지옥에 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지옥의 불을 그냥 불이 아니고, 숯불이나 장작불이 아닌 유황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유황불이 타는 지옥에 그 나쁜 놈들을 집어넣게 되면, 그것을 상상만 해도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모르는데, 그러니 순교를 당했던 자들과 함께 한 자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글을 읽게 되면, 교회가 어려운 가운데 더욱 더 힘을 낼 것이고, 그래서 교회가 더욱 더 늘어나고, 아마도 그 핍박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하지 않겠느냐고 해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전체내용이라는 것이다. 요거, 요즘 신학교 교수의 95퍼센트가, 아니 100퍼센트가 다 이것을 믿는다는 말이다.

◈ 그런데, 유황불이 실제로 있다고 하면 !!

여러분은 들어보니 어떤가요? 믿을만하지 않나요? 그러니 지옥의 유황불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 화가 많이 나서 복수할 길이 없나 싶어서, 언어인 글자로서 복수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 있지도 않은 유황불을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인데 말이다.

물론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유황불이 실제로 있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 무엇이 제일 중요하냐는 것이다. 복음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반대를 하지 않는다면(반대해서 소설이 아니라고 하면??) 이것이 실제상황이라고 하면 말이다. 이 세상에서 돈보다, 명예보다도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말이다.

뭐 "사랑이 돈보다 낫다" 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는데, 무슨 그런 거짓말이 다 있느냐는 것이다. 사랑보다, 돈보다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유황불에 들어가지 않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요한계시록이 소설이 아니라고 하면 말이다.

그런데 이 요한계시록을 쓴 소설가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이 말씀에 하나라도 더하거나 빼는 놈들은 아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미리 써놓았다는 것이다. 생명나무의 과일을 먹지 못한다고 협박을 하니 말이다. 그러니 그 다음부터는 두려워서 그 뒤에 무엇을 더 덧붙일 수도 없도록 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요한계시록을 쓴 소설가가 얼마나 천재적인지, 그가 어디까지 내다보았는고 하니, 자기가 이렇게 요한계시록을 쓰고 난 다음에 다른 놈이 또 다시 "그게 아니고 이것이다" 라고 쓸까봐서, 아예 자기가 쓴 요한계시록에의 마지막에다가 그렇게 못을 박아놓았다는 것이다.

(계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계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 신학자들의 믿음 없음이 !!

여러분, 진짜로 사도요한이 밧모섬이 가지 않고, 그가 계시를 받지 않은 것인가? 사도요한에게 천사가 나타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소위 '신학자' 라고 하는 인간들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신학을 한다는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개척교회를 하지, 무슨 자기들이 돈이 있다고 바다를 건너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말고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를 꾸미는 반창고로, 즉 신학박사 학위로 꾸미려고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육인데, 그 육은 필히 복음의 일을 훼방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해석을 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고, 또한 교회에 있는 자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결국은 교회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천국사람은 결코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신학공부를 많이 하면 믿음도 더욱 깊어진다고 여기는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그것은 천만의 콩떡 만만의 콩떡이라는 것이다. 물론 신학공부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제가 인정을 하겠는데, 하지만 그런 어려운 공부를 했다고 해서 믿음도 같이 깊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한 것으로 속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 불못은 이미 다른 성경에서도 !!

하지만 이 둘째 사망인 불못은 그렇게 소설을 쓰지 않아도 이미 다니엘서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다니엘의 친구가 몇 명인가? 세 명인데, 이미 그들은 어디에서 주님을 만났다는 말인가? 그들은 실제로 풀무불 속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즉 불못에서 말이다.

그리고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이전에는 물로 심판을 받았지만, 그러나 이제는 불로 심판을 받기 위해서 간수되고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지금의 이 세상은 불로서 심판을 받기 위해서 대기상태라는 말인데, 지금 우리가 이렇게 까불고 있어도, 이 세상은 불 위에 올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밑에서 불만 올라오면 모든 것이 다 타버린다는 것이다.

(벧후 3:6)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그러니 허리케인이나 지진이 문제가 아니라, 또한 자기가 죽는 것도 문제가 아닌데, '나'는 185,000명중에서 하나일 뿐이란 말이다. 남들이 다 죽는 그런 죽음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혼자서 죽던 단체로 죽던 간에 '주의 것으로' 죽는 것이 중요한데, 묻지마 관광을 가서 몸을 흔드는 가운데 관광버스가 굴러 떨어져서 단체로 다 죽어도 말이다.

그래서 성경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는데, 즉 "두 사람이 관광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겨둠을 당한다" 라고 말이다(ㅋㅋ). 혹시 그런 말씀을 못 보셨나요? 다같이 관광버스를 타도 그렇게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 언제나 '주의 것으로서' !!

그러니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평소에 살아있을 때 주의 것으로 살아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지금은 내 것으로서 살고, 나중에 죽을 때가 되어서 주의 것으로서 죽겠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트릭은 주님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말이다.

항상 자기 몸에서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바로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제발 교회사람이 되지 말고 주님의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데, 천국사람이 말이다. 그것은 바로 "아하, 나와 같은 허접한 놈에게도 초청장을 보내주셨구나" 라고 하는, 그런 십자가의 영을 증거하는 가운데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176페이지를 보자.

** 그런데 이 첫째사망과 둘째사망, 그 어느 것도 사망을 '과정'으로 설명한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망과의 차이점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망이란, 자기 존재의 층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두고 말한다고 하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망이란, 그 인간의 사망 사실이 사망의 참된 실체를 보여주기 위한 과정으로서 참여된다는 점이다.   

◈ 사망을 '과정'으로 설명해야 !!

이게 참 어려운 부분인데, 여기서 "과정으로 설명한다" 라고 하는 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보통 사람들이 뭐라고 여기는가? "내가 죽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망이 나를 죽인다" 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죽을 때도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서 자기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죽을 때만 사망이지 남들이 죽을 때는 사망이 아닌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죽는다" 라는 것이 아니라, "사망이 나를 죽인다" 라고 하게 되면, 사망이 자기를 죽음으로 이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과정' 이라는 것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런 과정이 계속해서 지금도 멈추지 않고 지속된다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그것을 교재 176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살펴보자.

** 이로서 인간들은 자기 존재에 입각해서 사망을 숙고하고, 그 실체를 아는데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죽어가면서도, 사망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체로 사망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 사망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인간 !!

여기에 "자신이 죽어가면서도, 사망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체 사망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가? 우리 인간은 마치 진공청소기 속으로 머리카락이 빨려 들어가듯이, 그렇게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사망 속으로 말이다. 그것을 두고서 '빨려 들어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77페이지를 살펴보자.

** 성경말씀은 인간존재를 위한 말씀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의 몸과 그 활동성을 위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는 예수님의 영적 활동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 '죽음과정'에 동원이 되어있는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자신이 죽는 그것이 진짜 죽음이 아니라, 이미 죽음이 우리의 머리 위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는 부분은 조금 전에 다 이야기한 것인데, 그러니 그 다음으로 넘어가자는 것이다.

(녹취자 - 너무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교재 177페이지를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 인간은 '죽음'의 의미를 일단 자기 존재의 후패를 기점으로 해서 파악을 하는데, 이 자체가 바로 오류의 시작이기도 하다.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의 진정한 의미는 오직 십자가에서 찾아야 한다. 인간 존재성의 변화에서 찾으면 안 된다. 진정한 죽음은 오직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그 자체이며, 오직 그것뿐이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실제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밝혔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그러나 누가 보아도 사도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현장에 없었음을 안다. 그 현장에는 단지 강도 두 사람만이 있었을 뿐이며, 더구나 예수님을 매달게 한 나무에는 엄연히 예수님 혼자였다. 하나의 같은 못에 겹쳐서 죽은 이는 없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한다. 이것은 기존의 현실감을 버리게 만드는 다른 현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 현실에 의하면 예수님의 그때 그 십자가가 사도바울 본인까지 십자가에 못 박한 자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 따라서 이 말을 알아듣는 것 또한 실제로 못 박힌 자에게만 해당이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봐야 제대로 된 현실이 보인다는 것이다. 성경해석은 오로지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몫이다. 그는 못 박힌 재로 성경을 펼친다. 그럴 때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인다. 예수님의 체험이 이제 자신의 체험이 된 것이다. 

이제 교재 178페이지를 살펴보자.

** 성도를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자'로 규정함으로서, 성경의 모든 내용에서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은 인정받지 못한다. 성경이 품고 있는 뜻은 모두 예수님을 죽게 한 그 '십자가 못'의 작용이었다. '그 못'이 지금도 날아다닌다.

◈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자 !!

여기에 보면,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자이다" 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즉 성도는 무엇과 함께 못 박힌 자라는 말인가? '예수님과 함께' 라는 것인데, 즉 예수님이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도를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한데, 그래서 이번 겨울수련회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우상임을 통 채로 모두 밝히고 싶은데 말이다. 성도는 반드시 '예수님과 함께' 라는 것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하나님을 거론한다는 것이다.

◈ 성도의 존재자체가 이미 전도의 시작 !!

아무튼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못에 박혀버린 자인데, 즉 과거라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이미 못 박혀버렸기 때문에, 성도에게서 나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과 함께 못에 박혔다고 하는 사실이 성도를 통해서 외부로 증거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전도이고 선교인데, 그러니 성도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전도의 시작이라는 말이다. 꼬시는 것이 전도의 시작이 아니고 말이다.

물론 성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왜냐하면 육의 사람이 어떻게 영의 사람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로서 산다는 것 자체가 곧 전도라는 말이다. 만약 교회에서 목사가 성도로서 산다고 하면, 그것은 목사가 매일같이 그 교회에서 전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영과 육은 확실하게 구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임해서 우리가 전혀 알 수 없었던 성경말씀을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알게 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사오니, 그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면서 십자가를 중심으로 죽음과 삶과 세상과 교회와 그 모든 것을 깨닫게 되는 지혜를 날마다 허락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09,03 오후 3시 20분에 마침.

                                                                        사망아, 너 잡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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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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