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54강 지혜 안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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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10905피p177지혜안의죽음

피54강 지혜 안의 죽음

[11 대구강의 16] - [피 54] - 지혜 안의 죽음
                                                                                
                                                   11,09,0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77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인간은 '죽음'의 의미를 일단 자기 존재의 후패를 기점으로 해서 파악을 하는데, 이 자체가 바로 오류의 시작이기도 하다.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의 진정한 의미는 오직 십자가에서 찾아야 한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 출발점이 과연 어디인가?

지금 우리가 계속해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에 보면 "인간은 죽음의 의미를 일단 자기 존재의 후패를 기점으로 해서 파악하는데, 이 자체가 곧 오류의 시작이기도 하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내가 살고 죽는 것이 출발점이지 무슨 다른 출발점이 있겠는가?" 라고, 얼마든지 그렇게 되물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는데, 이 문장이 우리가 지어낸 문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자기가 구상하고, 즉 "나는 이러이러해야 인간답다. 인간일 수 있다" 라고 하는, 그렇게 인간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 (말씀으로부터) 거부당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인간 자체가 오류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은데, 즉 여기에 이렇게 사람이 있고, 또한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여기 사람에게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이 말씀과 일치점을 가지지 못하고 언제나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자체가 오류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거기서 나오는 모든 생각도 역시 오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의 생각이 당연히 잘못인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 잘못을 진리처럼, 혹은 잘못을 진리라고 사수하려는 것을 통해서 더욱 더 말씀과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즉 틀렸으면 틀렸다고 해야하는데, 우리 인간은 틀렸다고 해도 어디가 틀렸는지 본인이 그것을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틀리고 맞고 하는 기준을 누가 만든다는 말인가? 본인이 만들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자기가 죽는 줄을 알면서도 왜 죽는지를 모르고, 또 죄라고 이야기를 해도 정작 그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데, 즉 진리를 이야기해도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자기 안에 갇혀있는 상태라는 말이다.

◈ 인간을 제거하시는 하나님 - '정녕 죽으리라'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시는데, 여기서 '죽으리라' 라고 하는 의미는 바로 '제거' 라는 것이다. 즉 없애버리겠다는 말이다. 흙이 되어버리면 그 인간은 없는 것인데,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죽은 자를 위해서 제사를 지내지 말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고전 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분명히 없는데, 그런데 거기에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실제로 있어서가 아니라 과거 속에, 즉 자기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을 자기가 자기에게 스스로 회상하는 것으로서, 그러니 결국에는 자기가 자기에게 절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즉 '내가 알고 있던 아버지'에게 자기가 절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아버지는 지금 없는데, 그런데 자기의 과거 속에 있는 아버지의 조각난 기억들을 주워 모으고 편집해서, 거기에다 경배를 한다는 것이다. 즉 "참 좋았던 아버지, 사랑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죽은 날을 기억해서 이렇게 추석을 맞이하여 음식을 차려놓았습니다. 그러니 이 제사를 받으옵소서" 라고 말이다. 이것은 결국 무엇인가? 자기가 자기에게 절하고 자기가 자기에게 복을 주고, 그야말로 난리를 피운다는 것이다.

◈ 마귀 - '너 자신을 사랑하라' !!

성경에 보면 이렇게 죽은 자에게, 즉 귀신에게 절을 하는 것은 누가 시킨 것이라고 하는가? 당연히 마귀가 시킨 짓인데, 그러니 마귀는 "마귀를 신봉하라" 라는 쪽으로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즉 "너는 너에게 순종하고 너에게 복종하라. 너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불교라는 것이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이 그렇고, 또한 한국 기독교가 그렇고, 오늘날의 교회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세상에서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은 말이다.

◈ 인간은 '금지'에 대해서 추궁을 받고 있는 대상 !!

아무튼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을 제거할 때, 그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처음에 인간이 생명나무가 아닌 선악과와 관련된 것을 봐서, 인간은 이런 금지에 대해서 추궁을 받고 있는 대상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금지에 대해서, 즉 "하지마! 따먹지마!" 라고 말이다.

그러면 인간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양심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양심을 율법적으로 다루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율법적' 이라는 것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금지와도 맥락을 같이 하는데, 즉 "하지마!" 라고 말이다.

◈ 가인 -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가인이 자기 동생인 아벨을 미워할 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죄가 너를 지배하고 있다. 너는 동생을 다치게 하면 안 된다" 라고 했는데, 그때 가인이 하나님에게 제일 먼저 한 이야기가 과연 무엇인가? 즉 가인이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최초로 나온 것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때 가인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라고 했는데, 그러니 지금 가인은 누구를 변호하고 있는가? 자기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가인과 인간들의 하나님의 금지 앞에서 맞서는 하나의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창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그러면 이렇게 금지가 있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즉 이렇게 금지가 자기에게 저촉을 받는다는 것은, 그렇다면 이 금지를 제거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금지하는 어떤 쪽을, 즉 자기에게 "이것을 하지마" 라고 하는 상대방을 제거하게 된다면, 그러면 누가 신이 되겠는가? 자기 자신이 곧 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말씀의 금지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아서, 그러면 아벨을 죽이라고 누가 지시했는가? 지금 죄가 아담을 덮치고 있는데, 그런데 이 죄는 궁극적인 노림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관련된 자를 죽여버리는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아벨과 사가랴의 흘린 피의 값이 너희들에게 적용될 것이라" 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아벨과 사가랴와 같은 노선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 편에서 서서 이 세상을 향해서 금지를 외쳤다는 말이다.

(마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 이 세상은 예수님을 제거함으로서 !!

그런데 이 세상은 그 예수님을 제거함으로 말미암아서, 더 이상 자기에게 금지를 요청하는 그 어떤 것도 두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서로 상대방을 제거함으로서 그 제거한 자리마저 누구의 자리로 편입이 되는고 하니, 자기의 영토를 넓히는, 그런 자기 자리로 편입이 되는 식으로, 그렇게 전쟁은 도입된다는 것이다.

◈ 여보, 당신을 죽여버릴 거야 !!

조금은 당황스럽고 냉정한 말일지 몰라도, 사람이 누군가와 관계를 가지게 될 때, 즉 아주 좋게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라고 해도, 그 한 마디의 말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나는 당신을 제거하고, 당신이 있는 그 자리의 나의 자리로 차지하겠다" 라는 욕망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무섭지 않나요? 부부간에 침대에서 서로 다정하게 "자기, 사랑해!" 라고 해도, 그 속에도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죽여버릴 거야!" 라고 하는 말이다. 즉 상대방을 죽이고 그 자리를 자기의 자리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대방을 죽인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상대방이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자기에게 율법적인 기능, 즉 금지하는, 잔소리처럼 들리는 것은 모두 잘라버리고 싶은, 즉 가지치기를 하듯 그렇게 다 잘라버리고 싶은 충동이 우리 인간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인간을 누가 말리겠는가? 하나님은 그것을 말리기는커녕 확산을 시켜버리는데, 그렇게 확산을 시켜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입을 막고 율법 앞에, 즉 저주와 심판 아래에 두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저주와 심판 아래에 말이다.

◈ 궁극적인 금지는 곧 '십자가' !!

사도바울이 이런 사실을 아는데,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궁극적인 금지, 즉 자기가 그 어떤 짓을 하더라도 죄가 될 수밖에 없는 최종적 금지, 그것을 세 글자로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곧 '십자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 십자가를 의지함으로서 자기가 의인이 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 십자가를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라고 하시는데, 즉 자기 십자가를 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예수님을 따라가면 어떻게 되는가?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부자청년의 경우에, 예수님은 그에게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어라" 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되면 부자청년은 더 이상 자기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것이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빈털털이라는 말인데,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을 따르면 영생이 있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 '나'에게 명령하는 놈이 누구야?

하지만 사람의 본성이 무엇인고 하니, 주변에서 어떤 명령을 해도 어떻게 해석하는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은 경험 때문에, 자기가 하는 행동을 저지시키고 삭제시키는 금지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잔소리를 본능적으로 싫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야? 나에게 '하라', '하지 말라' 라고 하는 명령하는 자가 도대체 누구야? 죽여버릴 거야" 라고 하는, 그것이 곧 인간의 본성이란 말이다. 두 살을 먹으나 세 살을 먹으나 말이다. 그것은 나이나 성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물론 장애자이든, 비장애자이든, 그런 것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고 말이다. 일등을 하든 꼴등을 하든, 금메달을 따든 실격을 하든, 우사인 볼트이든 우사인 나사이든 간에 말이다(ㅋㅋ).

아무튼 자기를 건드리는 것은 일체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무엇인가? "내가 바로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하는 죄인이 맞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을 성령을 통해서 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서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즉 피와 살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새언약인데, 이 새언약이 되어야 성령이 주어지니 말이다.

◈ 성령은 새언약이 완성되었기에 !!

그러니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이미 저쪽에서 언약이 완성되었다는 것인데, 완성이 되지 않으면 성령이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완성이 되지 않으면 성령이 누구에게 가는고 하니, 오직 예수님에게만 온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는 성신이 오시는데, 예수님과 연결하려고 말이다. 구약의 선지자나 세례요한처럼 말이다.

그런데 성신의 차원이 아닌 성령이 올 때는 완전히 구원이 된 상태에서 쳐들어오기 때문에, 그렇게 덮쳐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저주를 받아야만 마땅한, 즉 전혀 구원이 될 수 없는 자들을 가지고 구원을 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아하,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의 경우에 !!

어제 오후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주님이 죄인을 두고 '푹' 쑤시게 되면 "주여, 저에게는 죄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래, 알고 있어" 라고 하시면서 푹 쑤셔서 그만 잡아당겨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경우에,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고 사라가 믿음이 없을 때, 그때 세 명의 천사가 아브라함을 만나서 푹 쑤셔서 끄집어내니, 거기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이삭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삭이 나올 때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구동성으로 무엇이라고 하는가? 이삭은 결코 자기들의 육에 속한 자식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이삭은, 아브라함 부부의 죄를 위해서 주께서 친히 준비하신 선물 !!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가? 이삭은 아브라함 부부의 죄를 위해서 주께서 친히 준비하신 선물이라는 것이다. 즉 이삭을 마주침으로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죄인 됨을 알고, 또한 이삭을 마주침으로서 이삭 때문에 자기가 구원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이삭의 존재를 두고 로마서 4장 25절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존재로서 일치시키는데, 즉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모든 인간은 '죽음' 이라고 하는 하나로 모아지게 된다는 말이다.

(롬 4: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롬 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 그건, 종교적 취미생활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물을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데, 그것을 모르는 불신자들은,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일종의 수많은 종교적인 취미생활 중의 하나라고 여길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이냐고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방금 이야기했던 것은 우리끼리는 아는데, 그런데 불신자들은 그것이 아니라, 물론 우리는 그들을 불신자라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전혀 그런 구분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인간' 이라고 하는데, 즉 사람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사람이 하는 일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하나가 교회에 다니는 것이다" 라고, 그렇게 처리를 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말이다.

◈ 친절한 성경씨 !!

그렇다면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성경에서는 또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친절하게도 말이다. 그러니 '친절한 금자씨'가 아니고 그야말로 '친절한 성경씨'인데(ㅋㅋ), 성경말씀이 얼마나 친절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은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가? 신자가 불신자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신자에게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역사하시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신자에게 일하시는 방식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신자라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을 모르게 되면, 우리가 오바해서 개인적인 자존심으로 그들과 다투고 논쟁하게 되는데,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정문제로서 말이다. 즉 "우씨, 내가 전하는데 믿어야지. 건방지게 그게 뭐야?" 라고 과격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런 개인적인 자존심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시는, 즉 하나님께서 죄라고 규정하는 것을 우리가 사용해서 잘난 척을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악마의 힘으로 하는 것인데, 그러니 결코 전도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 요셉의 경우에, 모든 것이 꿈의 시나리오대로 !!

그렇다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대표적인 것이 요셉의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요셉의 시작은 요셉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즉 요셉의 운명은 꿈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또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하는 것도, 역시 꿈의 내용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요셉이 동원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제가 아까 던진 질문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러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느냐고 했을 때, 꿈이 요셉을 다루면서 덩달아서 요셉 주변에 있는 불신 세력들도 같이 다루고 있음을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일단 불신세력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요셉의 형들이고 가족들인데, 그리고 애굽에 팔려가서는 보디발의 가정이 그렇다는 말이다. 요셉이 열심히 일을 하니까 보디발이 얼마나 좋아했는가? 그런데 그의 아내가 누구를 모함하는가? 요셉에게 덤탱이를 씌운다는 말이다. 즉 정작 잘못은 자기가 해놓고, 자기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요셉을 그만 희생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과연 누가 꾸몄다는 말인가? 즉 꿈의 시나리오 속에 그런 내용들이 모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요셉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억울한데 말이다. 형에게 당한 것도 억울한데, 그런데 이제는 좀 살만하니 그만 보디발의 아내에게 당하고 말이다.

그런데 또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보디발의 아내에게 성추행을 하려고 했다는 죄목으로 요셉은 감옥에 가고 마는데, 그런데 그 감옥에서 무엇을 만나는가? 물론 감옥에서도 요셉이 인정을 받아서 감옥의 제반사무를 돕게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감옥에서도 요셉은 두 가지의 꿈을 만나게 되는데, 먼저 처음 꿈은 무엇인가? 그게 창세기 40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 감옥에서도 꿈을 !!

요셉이 감옥에 있는데,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죄를 지어서 요셉이 있는 감옥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각각 꿈을 꾸었는데, 먼저 술을 맡은 관원장의 꿈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가 꿈에 보니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포도가 익어서, 그래서 자기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 왕에게 드렸다는 것이다.

이것을 요셉이 어떻게 해석했는고 하니까, "그 포도나무의 세 가지는 사흘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러니 당신은 지금부터 사흘 안에 당신이 과거에 하던 것 같이 바로 왕에게 술을 드리는 일을 하게 된다" 라고, 그렇게 사흘 안에 전직을 회복하게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떡을 굽는 관원장의 경우에는 어떠한고 하니, 자기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자기 머리에 있고, 그 광주리에 왕을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와서는 그 광주리에서 그 음식들을 먹더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무슨 의미인지, 우리가 그 뒤를 모른다고 여기고 이 신하의 꿈 풀이를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이 만든 떡은 너무나도 맛이 있어서, 당신은 삼일 안에 왕이 불러서 제빵왕 된다" 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새들까지 와서 먹을 정도로 맛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요셉이 그의 꿈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그 세 광주리는 사흘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러니 지금부터 사흘 안에 왕이 당신의 머리를 잘라서 나무에 매어 다는데, 그때 새들이 와서는 당신의 시체를 뜯어먹게 된다" 라고, 그렇게 해석을 했다는 것이다.

◈ 꿈의 해석까지도, 꿈의 세계에서 와야 !!

여기에서 질문과 답변이 모두 나왔는데, 이 두 개를 한번 연결해보자는 것이다. 세 가지의 포도나무, 그리고 세 개의 떡 광주리가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시간적인 용어가 되느냐는 말이다. 즉 3일이라고 말이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한번 설명을 해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 해몽을 알고 난 뒤에 보니 그게 사흘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모른다고 하면 그것이 어떻게 시간개념이 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요셉이 어느 신학교를 나왔기에 감히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얼마나 제대로 잘 배웠기에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어디에 소속이 된다는 것인가? '꿈 안에서' 인데, 즉 그 꿈의 해석까지도 꿈의 세계에서 제공이 되어야 비로소 지혜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셉이 지혜자로 나타나는데, 그러니 지혜자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모두가 다 보편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사람에게만 해당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그것을 성경에서 '지혜'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십자가의 지혜는?

그러니 십자가의 지혜는 도대체 무엇인가? 오직 성령을 받은 자만이 알고, 반면에 성령을 받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전혀 풀어내지를 못하는 것, 그것이 곧 십자가의 지혜라는 말이다. 성령을 받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못하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지나게나, 이 마을 저 마을에게 다 십자가를 안다고 하니 기가 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지혜를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이 해낼 수 있고 풀 수 있는 것은 모두 없애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말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 카메라로 녹화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가 있는데, 즉 불신자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절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녹화를 할 수 있는데, 전문기사가 하면 훨씬 더 잘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어디 구원을 받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 와서 헌금을 하는 것을 불신자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는데, 흰 봉투에다 돈을 조금(?) 넣어서 헌금함에 넣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어려우냐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어떻게 되는가?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다. 지옥으로 말이다.

예배시간에 한 시간을 앉아있는 것, 그게 무엇이 힘이 드느냐는 것이다. 야구는 세 시간도 그냥 앉아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으로는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찬양의 경우에도 어떠한가? 소프라도, 테너, 알토, 베이스를 정해서 악보를 보고 그대로 부르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가끔 혼자서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말이다(ㅋㅋ).

◈ 나는 죄인이기 못합니다 !!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지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그런 없는 것이 있는데, 그 없는 것만을 골라서 증거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증거될 때 도대체 무엇을 증거하겠는가? 이것은 바로 "나는 못합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여기에 대해서 "왜 그런가요?" 라고 하면,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죄인이기 못합니다" 라고, 그냥 "나는 못합니다" 라고 하지 말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은 못하지만, 나중에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되고,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헌금을 해도 그것은 헌금이 아닙니다" 라고, 즉 자기가 한 헌금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없는,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만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나도 이만큼 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나오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무엇이 되는가? 금지가 되고, 삭제가 되고, 또한 제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아니, 내가 한 이런 고상한 일을 어떻게 감히 금지하고 제거하고 삭제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면 이제는 니가 한번 당해봐라" 라고 하면서, 금지한 이쪽을 마구 공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서 3장에 나오는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라고 하는, 그 한마디만 믿으면 되는데,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아하,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모두 거짓된 것이구나" 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롬 3: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물론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이의가 없는데, 그런데 왜 그런 쓸데없는 댓글이 많이 달리는지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자기는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즉 "나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진심으로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했는데, 왜 그런 내 것이 거짓인가?" 라고 하면서 항변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왜 거짓인지 모르겠으면 믿지 않으면 되는데, 물론 그렇게 해서 지옥으로 가면 되고 말이다.

다시 요셉으로 돌아와서, 아무튼 꿈이 바로 왕의 두 관원장들에게 개입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이겠는가? 불신자들은 항상 자기는 자기 힘으로 산다고 자신만만하게 버티는데, 사실은 그런 불신자를 움직이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데, 그래서 마귀가 욥을 시험할 때도 마귀가 스스로 알아서 시험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이 시킨 일을 악마가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내어버려두사' !!

그러니 이 세상의 그 어떤 불신자도 자력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를 닮은 자기 신에게 경배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신이니 말이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내어버려두사' 라고 되어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보통 인내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렇게 '내어버려두사' 라는 것은 하나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형벌인데, 즉 그렇게 내어버려두니 죄가 이 세상에 누적이 되는데, 그것은 이 세상이 곧 지옥이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미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이 세상이 지옥이다" 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서도, 우리 인간이 자기 자신을 신봉하도록 그렇게 방치하고 내어버려두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이 세상을 지옥으로, 애굽으로 만들어야 '출애굽'이, 즉 구출이, 다른 말로 하자면, '구원' 이란 의미가 날마다 우리에게 새롭게 새롭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20년 전에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면, 그러면 어제는 어떻게 되느냐는 말이다. 즉 20년 전에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어제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말이다. 자기는 20년 전에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그러니 지금 감사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금지하시고 매일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버리면 안 되는가? 매일 말씀으로 금지하시는데, 우리가 말씀대로 다 지켰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미흡한 것인데, 그런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말씀과 일치되지 않는데, 그렇게 말씀과 일치가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를 해보면 !!

아무튼 바로 왕의 관원장들이 사흘 안에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았는데, 여기서 정리를 해보면, 꿈은 이 세상에서 살 자와 죽을 자를 가름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술 맡은 관원장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하나의 역할이라는 말이다. 즉 "아하, 꿈이 개입하게 되면 한 쪽은 죽고 한 쪽은 사는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언약이 오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는데, 그러면 그것으로 끝인가? 그것이 아니라, 축복을 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심판 아래에 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심판 아래에 있기 때문에 말이다.

◈ 그러면, 소돔과 고모라의 떡뽁이 아줌마는?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에도, 그곳에 천사가 나타났을 때 그들을 괴롭힌 건달들이 있었는데, 물론 그런 놈들은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우리는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소돔과 고모라의 재래시장에서 떡뽁이를 팔던 아줌마는 어떻게 되느냐는 말이다. 그 조폭들 말고, 고추장을 팔던 할머니는 말이다. 즉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면서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당연히 저주를 받는데, 그러면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가? 롯을 위해서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즉 롯은 재래시장의 그 아줌마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다 같은 이웃에 산다고 해도, 구원의 지혜를 받은 롯과는 질이 다르다는 말이다. 양이 아니라 질이 말이다. 한국교회는 양으로 따지려고 하는데, 즉 "예수님을 믿고 얼마나 복을 받았는가?" 라고 말이다. 하지만 양이 문제가 아니라 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게 질이 다름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롯은 건지고 다른 쪽은 다 몰살을 당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꿈이 개입되는 것인데, 즉 하나님이 개입하게 되면, 삶과 죽음이, 죽음과 삶을 구분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진노의 'Hi-Fi'가 머리 위에 !!

요한복음 3장 26절에 뭐라고 하는가? 보면 볼수록 기분이 좋은데, 굳이 적을 필요도 없는데, 저에게서 하도 많이 들어서 말이다(ㅋㅋ). 즉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라고 하는데, 그것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는가?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있느니라"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를 가더라도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는 말이다.

(요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혹시나 'Hi-Fi' 라고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는데, 왜 TV광고에 보면 사람들이 차를 타고 가던지 그냥 걸어서 가던지 간에 자기 머리 위에 'Hi-Fi' 라고 떠있다는 것이다. 이게 파스 종류가 아니라(ㅋㅋ), 어느 곳에든 다 터진다고 하는 일종의 전파망인데, 이동통신사에서 스마트폰을 선전할 때보면 그런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제가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까, 전파망 시스템이 아닌 저주의 시스템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시스템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게 곧 하나님의 지혜의 시스템이고, 십자가의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지혜의 시스템 말이다.

그러니 불신자들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무엇을 올리고 있는고 하니, 왜 우리나라 50년대에 우리 어머니들이 아이를 등에 업고는 머리에다가 항아리를 올리고는 잘도 걸어간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달인의 경지인데, 떨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불신자들이 저주를 머리에 올리고는 잘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 불신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자들을 보면서 고맙고도 감사하게 여겨야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분리작업을 지금도 하고 계시는데, 즉 저주의 'Hi-Fi'를 그들은 계속해서 착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을, 우리는 굳이 말씀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서도 짜릿하고 닭살이 돋도록 느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역할을 그들이 충실하게 아주 잘해주고 있는데, 그러니 그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바로 그들이 우리를 죽이고 싶은 것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곧 신이데, 그런데 누가 그런 자기를 간섭하느냐고, 그런 식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 다시 꿈으로 돌아와서 !!

조금만 더 이야기해보면, 즉 삶과 죽음인데, 이렇게 살아난 술을 맡은 관원장의 경우에, 여기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면, 사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 성경구절을 읽고, 하나님께서 이왕이면 술보다는 떡을 담당한 자를 살려주었으면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술 취하지 말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관련해서 생각했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막상 떡 맡은 자는 죽이고 술 맡은 자를 살려놓았으니, 술을 자주 마시라는 것인지 헛갈린다는 말이다(ㅋㅋ).

그리고 느헤미야 선지자는 무엇을 하는 자인가? 떡을 맡은 관원이 아니라 술을 맡은 관원인데, 그런 자가 무슨 하나님의 하겠다는 말인가? 그리고 얼마 전에 '진로' 라는 회사에서 일하는 분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말이다. 그래서 "아하, 술 맡은 자도 예수를 믿는구나" 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술을 맡은 관원장이 살아났을 때, 이 요셉은 꿈에 의해서 지배를 받다가 잠시 잠깐 꿈에서 벗어나서 꿈을 자기 것으로 삼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주체이니 말이다. 주체는 무엇을 끌어 모아야 하는데, 그래서 꿈대로 될 것이라고 하는 자기 신학을 따로 꿈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요셉이 술 맡은 관원이 나갈 때 뭐라고 했는가? "관원장님, 나중에 바로 왕 앞에 서거든 이 요셉 때문에 살아났다고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나는 사실 너무 억울합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그 관원장에게 다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데, 즉 요셉이 그렇게 꿈을 해석해주고 그대로 되었으면, 그 카리스마를 인정해주고, 그래서 자기가 복직했으면 요셉을 감옥에서 빼내주도록 그렇게 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 인간이 나쁜지 꿈의 내용이 그러한지 몰라도 그만 입을 싹 닦고 말았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바로의 꿈에 개입을 !!

그러니 요셉은 멍하게 졸지에 닭 쫓던 개가 되고 말았는데, 그러면 요셉이 나가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데, 또 다시 하나님이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의 꿈에 개입을 하시는데, 바로가 도대체 무슨 꿈을 꾸게 되었는가?

처음에는 아름답고 살찐 일곱 암소가 갈밭에서 뜯어먹고 있는데, 그만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그 다른 일곱 암소를 먹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꿈은 무엇인고 하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세악한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세약한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켜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요셉의 해몽을 들으니 그럴싸하지만, 하지만 그런 해답이 없이 그냥 문제만을 던져주었을 때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바로 왕의 신하 가운데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바보들만 모여있었는가? 애굽에서 다 똑똑한 자들인데 말이다.

◈ 왕도 모르고, 신하도 모르고 !!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지금 바로 왕도 해답을 모르고 있는데, 즉 꿈을 본인이 꾸었지만 정작 그 해답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도 그렇게 해답도 모르면서, 그것을 해몽하는데 있어서,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말이다. 누가 여기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해보라는 것이다.

요셉의 해몽에 대해서 "맞다. 바로 그것이야" 라고 단정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런 근거는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렇게 자기도 모르면 틀렸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꾼 경우에도 나오는데, 사실 이것은 더 황당한데 말이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가 꿈을 꾸어놓고는, 신하들을 보고 자기 꿈을 모른다고 그만 난리를 피운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즉 '불가능' 이라는 말이다.

◈ 십자가 - '불가능성' !!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셨는데, 그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인간보고 밝혀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곤란하다는 것이다. 십자가 신학을 성경을 좀 보았다고 해서 풀어낸다고 하면, 그것은 전혀 맞지 않은데, 그러면 누가 할 수 있는가? 오직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람에 한해서만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물론 고린도전서가 어떻고 고린도후서가 어떻고 하는데, 그런 것은 글자를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정작 본인은 믿지 않는데, "성경에 이런 것이 있더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목사가 설교시간에 십자가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목사 자신이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내가 설교하는 이것도 죄입니다" 라고, 그것은 본인이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지금 주의 종으로서 착한 일을 하고 있으니, 교인들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어" 라고 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

도대체 가르치기는 누가 가르친다는 말인가? 요한일서 2장 27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라고 하는데, 즉 성령께서 가르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목사가 가르친다는 말인가? 목사는 자기의 성령을 받은 삶을 드러내면 되고 말이다.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그렇게 되면, 성령을 받지 않은 교인들은 격분을 하게 되어있고, 또 목사는 욕을 얻어먹게 되어있고, 그것이 곧 분리작업이란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전혀 하자가 없다는 것이다. 명백하게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 꿈의 해몽도, 그 꿈에 속하기에 !!

제가 방금 던진 어려운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해드리겠는데, 꿈의 해몽도 그 꿈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의 경우에도 난감했는데, 그래서 자기도 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왕이 꿈을 꾸고 나서 자기 꿈을 공개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이미 그 정답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정답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해몽은, 즉 신하들이 할 수 있다고 하면 왕 자신도 그렇게 해석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바로 왕이 원하고 느부갓네살 왕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좀 내어놓으라는 것이다. 즉 인간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말이다. 만약 인간이 할 수 있다고 하면, 자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니,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때 신하들이 뭐라고 하는가?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왕이 답답해서 뭐라고 하는가? "그것이 곧 내가 묻는 취지다. 너거들이 하는 것은 나도 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요구하는 것은 사람이 못하는 것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꿈에 시달려서 죽겠다" 라고, 그렇게 신하들을 그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애굽의 바로 왕이나 그 이전의 아브라함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갑자기 밤이 무서워서 죽겠다는 것이다. 잠을 자면 꿈에 시달리니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외적인 요소가 침범했다는 것이다. 인간 외적인 요소가 말이다.

◈ 성경전체가 계룡산 이야기가 아닌가?

제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니 계룡산에서 내려왔다는 소리를 듣는데(ㅋㅋ), 사실 성경전체가 바로 계룡산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노력할 수 있는 것, 즉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고 신학박사 학위를 받는 것은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런 설교를 듣고 싶어하는 것이 아닌데, 그런 설교는 얼마든지 설교집이나 주석을 끼워 맞추고 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아니라, 목사 본인이 먼저 신앙생활을 해서, "이것은 내가 성경공부를 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나도 항상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설교시간에 하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자기가 내놓을 것이 없다면 설교를 하면 안 되고 말이다. 

그런데 전혀 내놓을 것도 없는데 자기는 신학교를 나온 목사이기 때문에, 또한 신학박사이기 때문에 설교를 해야한다고 하면, 그것은 인간들끼리 노닥거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가 아니라 그냥 친목단체라는 말이다. 그게 대체 성경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냥 사기나 치고 노는 것이지 말이다.

◈ 장자의 호접몽(胡蝶夢) -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아무튼 이 바로 왕의 꿈이 개입될 때는, 필히 살진 암소와 풍성한 곡식은 무엇에게 밀리게 되는가? 여기서 살진 암소와 풍성한 곡식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도 이제 살았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살았다' 라는 것이 무엇에게 밀리는 세상이란 말인가? '죽었다' 라는 것이 살았다 라는 것보다 더 세게 작용하는 세상에 바로 왕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꿈' 이라고 하심으로서, 곧 꿈은 진짜 현실이 되고, 현실은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것을 요셉의 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중에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데, 즉 오직 십자가만이 현실이고, 이 세상은 십자가만을 현실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꿈 같은 이 세상을 꿈인 줄 모르고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마귀가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유혹도 있고, 인기가 좋으면 떤다는 유혹도 있고, 또한 자기에게 절하면 이 세상 권력을 다 주겠다는 유혹도 있고,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유혹이라는 말이다. 그런 유혹을 총동원해서 마귀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고린도후서 4장에도 나오듯이,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흐릿하게 만들어서 보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고후 4: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바로 그러한 아주 독하고 질이 나쁜 안개가 가득한 이 세상인데, 그런 세상을 예수님께서 거쳐가면서 십자가로 나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자고 했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은 자기 밖에 모르는, 그런 죄가 넘실대는 곳이기에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겁을 내고 기가 죽고 꿀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데, 왜 그런가? 어떻게 안개에게 꿀릴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제 아무리 질이 좋지 않은 안개라고 해도 말이다. 즉 그림이 아무리 무서워도 그림은 역시 그림이란 말이다.

그래서 저는 불신자를 볼 때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데, 지금은 있다가도 없어질 존재인데, 즉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본인들은 자기들을 무시한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성령이 없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냥 짐승이고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편에도 나오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들이 무슨 주장을 하던지 간에 마귀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 성도는 왜 귀한 존재인가?

그러니 성경에서 '귀한 존재' 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이 귀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속에 들어있는 성령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해도 죄입니다" 라는 소리를 듣게 되면, 우리는 그 앞에서 카리스마를 느껴야하는데, 같은 성도라고 해도 말이다. 즉 "저 분은 보통이 아니구나"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나는 죄인이지만, 그래도 이런 것은 의롭습니다" 라고 하면, "아하, 있으나마한 존재구나" 라고 여기면 되고 말이다.

사실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미신이 심한지, 구석구석에 미신이 없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전부가 다 미신이라는 말이다. 이번 대구육상에서 매일 책자를 만드는데, 그 표지인물이 되면 아무리 유명 선수라고 해도 금메달을 따지 못한다고 해서 표지모델의 저주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아예 말을 만들어내라는 것이다.

보통 제사를 지낼 때, 특히 성묘를 한답시고 무덤에 가서 절을 할 때 보면 기가 찬데, 도대체 거기에 무엇이 고개를 숙이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 땅을 한번 파보라는 것이다. 잘못하다가 괜히 가만히 있는 벌집만 쑤시지 말이다. 거기에 무엇이 있다고 거기에다 절을 하느냐는 것이다. 도대체 그것이 뭐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 질문 - 목사님은 성령을 받은 자가 불신자를 보는 마음을 요셉을 통해서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뭐라고 하면 좋겠습니까?

◈ 불신자에게 항상 고마워해야 !!

한 마디로 "고맙고 감사하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그들을 미워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불쌍히는 여겨도 말이다. 왜 그런가? 그들이 아니면 우리가 살지 못하니 말이다. 자동차를 고쳐주고, 옷을 만들어주고, 짜장면을 배달해주고 하는 것이 다 불신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친절하게 부모님을 집까지 차로 태워다주고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육의 관계로서 살아가는데,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 무시해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주님의 복음대로 살라고 도와주는 자들이 있으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냐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주장을 할 때는 그것이 곧 마귀의 소리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항상 고마워해야 하는데, 물건을 하나 사도 깎아주는 자들이 누구인가? 시장에서 회색 몸베바지를 입고 장사하는 아줌마들인데, 기독교 신자들은 전혀 깎아주지도 않는데 말이다. 그래서 저도 절에서 입는 그런 몸베를 입은 아줌마들을 보면 기마이(?)를 막 쓰는데,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목사님, 무슨 기마이를 쓰시나요? ㅋㅋ)

◈ 댕큐, 김정일 !!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고맙지 않고 감사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는데, 북한의 김정일도 고맙고, 저에게 사기를 친 놈도 고맙고, 모두가 고마운 자들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의지하지 말라고, 그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을 모른다고 해서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 세상이 꿈과 같은데, 시편에도 깨고 나면 꿈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겠다고 아둥바둥 싸우던 모든 일들이, 깨고 나면 그야말로 꿈속에서 한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을 했다고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하지 않았다고 해서 받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쓸데없는 자존심만 살아서 예의범절이 어떻고 저떻고 한다는 말이다.

◈ 떨어진 것은 다시 주우면 되고 !!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뭐 볼트가 부정출발을 했다고 온 나라가 시끄러운데, 무슨 하늘나라에 부정출발이 있느냐는 것이다. 부정출발을 했다고 볼트가 웃옷을 벗는 것을 보고, 저는 그것이 영화에 나오는 헐크인 줄 알았는데, 런닝이 찢어지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만 불쌍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400미터 계주를 하면서 미국선수가 바통을 떨어뜨렸을 때, 미국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얼마나 기겁을 했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떨어진 것은 다시 주우면 된다는 말이다. 무엇이 그렇게 놀라운 일이냐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일에 몰두한다는 것은, 그만큼 악마의 유혹에 빠져있다는 말인데, 그래서 "나는 의사다. 나는 판사다. 이것이 주의 영광을 위한 나의 사명이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 자리는 오직 자기의 죄인 됨이 드러나는 자리이지 말이다. 그러한 것은 칼빈이 만들어낸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칼빈은 신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말씀에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178페이지를 살펴보자.

**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봐야 제대로 된 현실이 보인다는 것이다. 성경해석은 오로지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몫이다. 그는 못에 박힌 체로 성경을 펼친다. 그럴 때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인다. 예수님의 체험이 이제 자신의 체험이 된 것이다.    

여기에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봐야 제대로 된 현실이 보인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십자가에 못 박힌 현실은 성경말씀을 통해서만 제대로 파악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을 본다고 해서 모두 아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 '오병이어'의 경우에 !!

예를 들어서, '오병이어'의 경우에, 그건 사람들을 모으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내어쫓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이 떡을 원하니, 그 떡을 주시면서 쫓아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자기 속내는 감추는데, 즉 "배고프니 떡을 먹자" 라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주님은 "너희들이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떡을 주어서 배를 부르게 했느냐는 것이다. 주님께서 하셨는데, 그런데 주님은 "이전에 배가 불렀으니 또 배부르고 싶지? 그래서 나를 찾는구나"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너희들은 나에게 수가 없다고 하신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에게 올 수 없는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이 좋아하는 기적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적이 오히려 위험하다는 말이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 감사함도 모르고, 막살 수밖에 없는 인간 !!

여기서 우리가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즉 여름에 태양이 내리쬐고 있는데 강가에 전혀 그늘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혀 햇빛도 피하지 못하고 온 몸이 다 타고 있는데,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구름이 나타나서 그 뜨거운 태양을 시원하게 가려준다고 하면, 그때 그 구름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감사를, 즉 평소에 구름이 그렇게 자기 머리 위를 왔다갔다할 때는 느꼈는가? 느끼지를 못했는가? 그런 일이 있기 이전이나, 그 이후에는 느끼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자기가 하는 일에 너무 몰두하다가보니, 그늘을 만들어주는 구름에 존재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전혀 감사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막산다'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 막사는 것이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먹구름이 와서 햇빛을 가려주는 그 고마움을 평소에 전혀 놓치고 살아가니, 그것이 막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막살지 않기 위해서 온갖 것을 다 따진다고 하면, 그것을 우리 인간의 머리로 도대체 어떻게 따지느냐는 것이다. 그 수많은 것들을 말이다. 그러니 결국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막살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주님의 주신 그 은혜를 다 모르기 때문에 말이다.
 
◈ 왜 요셉이 애굽의 왕으로서 적당치 않는가?

지금 교재 178페이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즉 "나의 죽음으로 나를 설명하면 안 되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나를 설명해야만 한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말이다. 자기의 개인적인 죽음이 아니고 말이다.

여기에서 하나 빠트린 게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왜 바로는 왕이고, 왜 요셉은 신하로 있는가?" 라는 점인데, 제 아무리 국무총리라고 해도 신하는 역시 신하라는 말이다. 이것을 바꾸어서 말하면 "왜 요셉이 애굽의 왕으로서 적당치 않는가?" 라는 것인데, 여러분이 성경말씀을 보더라도 아마 이런 질문은 잘 하지 않지 싶은데 말이다. (물론 전혀 하지 않습니다.)

저도 이런 질문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떤 질문이나 답변이 들어오게 되면, 그것을 통해서 이전에 미쳐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가 십자가마을 사이트에서 댓글을 다는 것은 그 사람과 상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렇게 답변을 하는 가운데서 저 자신도 몰랐던 성경에 관한 새로운 것들이 답변 가운데 계속해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더 이상 새로운 것들이 나오지 않는다 싶으면 답변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답변 자체가 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든 그런 것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왜 바로는 왕이고, 왜 요셉은 신하로 있는가?" 라는 점인데, 요셉이 복음을 알았다고 한다면 우리 생각에는 당연히 요셉이 왕이고 바로가 신하가 되어야 맞지 싶은데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 우유적 속성 !!

이것을 두고 '우유적 속성' 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우유는 밀크가 아니라 철학적 용어로서, 다른 말로 '우연적 속성'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쉽게 말하면(?), "필연적으로 될 이유를 우리 인간 쪽에서 인간 쪽에서 찾을 수가 없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즉 우리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될 이유를 찾지 못해서 우연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황 집사님이 여자인데, 그러면 "집사님이 왜 여자인가요?" 라고 하는 질문인데, 그것이 바로, 즉 누구는 남자로 태어나고 누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우연적 속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우연' 이라는 것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때 그것을 '우유적 속성'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우연적 속성, 혹은 우유적 속성이 왜 중요한고 하니, 소위 그 어떤 것에 대해서 필연적으로 무엇이든지 끝까지 이유를 따지는, 즉 "내가 그것을 따먹으면 신이 된다" 라고 하는 것은, 그러니 인간들은 그냥 따먹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하는 것을, 그렇게 뭔가 노리고 따먹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뭔가를 노리고 따먹었다는 것은, 그 필연적인 효과를 노리고 따먹었다는 말인데, 그런데 그런 필연을 무엇으로 공격하는고 하니, 필연이 아닌 우연적으로 공격을 해야만 제대로 된 공격이 된다는 것이다. 즉 "그렇다면 니가 남자가 되지 왜 여자가 되었노?" 라고, 혹은 "니가 왕이 되지 왜 신하가 되었노?" 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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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유성[Accident, 偶有性(偶性)] - 사물이 지닌 성질에는 그 성질이 없어지면 사물 자체도 스스로의 존재를 잃어버리는 것과, 어떤 성질을 제거하여도 그 사물의 존재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 있다. 후자의 성질을 가리켜 우유성(偶有性) 또는 우성(偶性)이라고 한다. 즉 비본질적인 성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개념으로서,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거쳐, 17~18세기에도 사용되었다. - 네이버 지식사전

※ 우유적속성(偶有的屬性) - 어떤 사물(事物)을 생각할 때 그것이 없어도 지장(支障)이 없는 성질(性質). 필연적(必然的) 원인(原因) 없이 일어나는 성질(性質), 예컨대, 인간(人間) 일반(一般)을 생각할 때, 그 피부(皮膚)의 빛깔, 체구의 대소(大小) 등. - 네이버 한자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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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연인가? 우연인가?

그러므로 이 세상에 깔려있는 모든 것이 필연으로 해석할 성질이 아니라, 모두가 다 하나님이 주신 우연이라는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해독이 되지 않는 우연이란 말이다. 사실은 우리 인간이 모르기에, 그래서 자기 자존심으로 내세우기 위해서 우연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즉 우연은 우연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꿈을 이루어내기 위한 필수적인 필연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하늘나라만이 진짜 현실이고, 이 세상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입장에서는 어떠한가? 그와는 정반대로 하늘나라는 요셉이 꾼 것은 꿈이고, 바로 왕에게 일어난 일은 현실로 본다는 것이다. 즉 꿈 때문에 요셉이 등장했고, 요셉이 등장했기 때문에 그들은 완전히 황폐화가 될 뻔하다가 큰 부자가 된다는 말이다. 바로 왕이 그 주변의 가나안 땅까지 20퍼센트의 세금을 받아서 다 사버리니 말이다.

◈ 요셉을 알지 못하는 !!

그런데 출애굽기에 보면 어떠한가? 은혜로 주신 그 필연적인 것들만 소유하게 되고, 우연적인 것들은 모두 다 때내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1장에서 시작하면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바로 왕이 등장해서 이스라엘을 핍박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출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애굽이 그렇게 큰 제국이 된 이유가 다 있을 것인데, 그 이유의 근원을 모두 다 잘라버리고, 현재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것만을 가지고 "야, 이것은 내 것이다" 라고 챙기는 못된 버릇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 왕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그런 짓을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에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헤헤거리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 은혜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 모세의 등장으로 !!

그때부터 꿈 같은 세상은 어떠한가? "니가 그런 짓을 해서 누가 희생을 당했는지 보라" 라는 것인데, 즉 요셉의 은혜를 모르는 바로 왕의 등장으로 인해서 희생은 누가 당하는가? 히브리인들의 남자들이 죽게 되는데, 그렇게 죽은 데서 바구니에 담겨져서 살아난 자가 누구인가? 모세인데, 그러니 모세는 이미 애굽에서 죽은 자라는 말이다. 이미 주었는데, 가라(가짜?)로 살아났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모세가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을 구출해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모세가 거쳐갔던 그 모든 과정들을 경유해야만, 그들도 역시 모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찾아오심에 동참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모세가 거쳐갔던 과정들을 경유해야 말이다.

'모세' 라는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가? '건져낸다' 라는 것인데, 즉 물에서 건져냄을 당한 모세가 자기 백성을 물에서 건져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물에서 건져낼 때 히브리인들이 얼마나 모세를 원망하고 아론을 원망했는가? 그것이 곧 하나님을 원망한 것인데 말이다.

그러니 애굽에서 나왔다고 하는 지리적인 실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기원, 즉 그들이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 애굽에서 나왔으며, 최종적 목적지는 어디냐는 것인데, 그 목적지가 약속의 땅인데 말이다. 사실 약속의 땅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고, 물론 율법, 즉 언약 앞에서는 목적지가 맞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 봐야 율법이 주어지는데, 그러나 그러한 율법 앞에 선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다는 의미인데, 하지만 그 무서운 하나님 앞에 설 자가 과연 누가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 모세야, 신발을 벗어라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야, 신발을 벗어라" 라고 하셨는데,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냐는 말이다. 즉 "니가 있는 자리는 니 자리가 아니라, 거룩한 자리이다. 그러니 신발을 벗어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거룩한 자리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다 들어가려고 하면 모세가 신발을 벗어야 하는데, 즉 모세가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출 3: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그러니 모세는 그야말로 항상 죽음과 마주보아야하고, 그 죽음 앞에서 전혀 자기는 할 것이 없으며, 그 어떤 경우에도, 그 어떤 식으로도 죽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항상 느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고 말이다.

물론 우리가 밥을 먹으면 목숨이 보존되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은 그런 죽음 아닌데, 죄로 인한 죽음이란 말이다. 자기에게 임한 저주로 인해서 죄가 나오는데, 그것을 도대체 무슨 수로 우리가 막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누른다고 해서 되겠는가? 안 된다는 말이다. 날마다 세상적인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말이다.

애굽의 수박과 참외가 맛있고, 또한 애굽의 마늘이 맛있는데, 그런데 그런 것을 그들만이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왜 애굽이 좋은가? 아직도 하늘나라의 수박과 참외를 맛보지 않아서 그러한데, 즉 아직까지 하늘나라의 맛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구조와는 비교자체가 안 된다는 것이다.

◈ '희생'으로 주어지는 만나 !!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비교를 해주면 안 되는가?"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이 하늘나라는 광야에서 '희생' 이라는 것 말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데, 이 희생이 바로 죽어서 마땅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만나, 그리고 메추라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너희들이 죽어서 마땅한데 내 희생으로 산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담겨있는 과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애굽적으로 설명하니 그냥 맛만 보게 되는데, 그래서 "에이, 또 만나가? 정말이지 맛대가리도 없는데, 또 먹어야 하나?" 라고 하는데, 사실 우리가 짜장면도 자꾸 먹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나중에는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특이하게 짜장면을 37년 동안 먹는 사람도 있고, 콜라에 밥을 말아먹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만나가 지겨워서 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과연 그곳에 도착해서 그들이 거기의 소산을 먹고 하나님께 율법으로 영광을 돌렸는가? 즉 말씀을 지켰느냐는 말이다. 전혀 아닌데, 오히려 그것이 자기들에게 당연한 것인 줄로 알았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게 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처럼 남자를 6명이나 사귀어보아도, 물론 데이트를 하는 순간에는 기분이 좋을지 몰라도, 아무리 다른 남자를 만나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리즈는 8명의 남자를 사귀었고, 또한 마돈나는 27년 연하의 남자와 사귀었다고 하는데, 강산이 두 번도 더 변하는데 말이다. (리즈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애칭입니다. ㅋㅋ)

왜 그런고 하니, 지금 우리의 몸은 겹겹이 이 세상 것으로 층층이 쌓여있는데, 마치 삼겹살 덩어리처럼 말이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보아도 매일같이 이 세상의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그 해석은 아니거든!" 라고, 우리에게 지적을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한 것도 역시 죄다" 라고 말이다.

◈ 죽음조차도 끊어 놓을 수 없는 '사랑' !!

그것을 두고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말이다. 사는 것보다 죽은 것이 더 센데, 그런데 이 죽음보다 주님의 사랑이 더욱 더 세다는 것이다. 죽음조차도 끊어 놓을 수 없는 사랑,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곧 부활의 능력이고 말이다.

그래서 고린도전후서에는 부활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사랑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다른 계명은 없나니(?)" 라고 하는데, 즉 사랑이라는 계명이 전부라는 것이다. 그것은 요한일서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이러한 사랑 안에는 심판이 없는데, 즉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랑은 심판에서 벗어났다는 증표인데, 그것을 '사랑 안에서', 혹은 '성령 안에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랑을 알면 형제도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 조금만 더 하겠는데, 교재를 살펴보자.

**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의 죽음을 선악과 의미의 완성으로 간주하여 그의 십자가 지심을 언약대로 이루어진 의(義)로 여기시고, 그 증거로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께서 특별히 선택한 자에게만 덮쳐질 새로운 가치체제가 성사되었다는 의미인데, 이 자치 체제 안에서의 죽음은 예수님의 생명에 의해서 삼켜진바 되었다는 사실이 현실로 작용한다.

(고전 15: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전 15: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하시리니
(고전 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 수능퀴즈 -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여기 고린도전서 15장 24절에서 26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 26절에 보면, 맨 나중에 멸망을 받을 원수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이것이 하늘나라에 수능이 있다면 나올 법한 문제인데, 즉 '사망'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이전에 어디에 머물러 있었다는 말인가? 사망 안에, 즉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저주 안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냥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판단을 하게 되는데, 즉 "이것은 복을 받을 착한 행동인가?", 아니면 "사망에 이르는 저주를 받을 바쁜 행동인가?" 라고, 그렇게 구분을 하면서 행동을 나서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살이나 우울증, 알콜중독과 같은 증상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왜 그런가? 화가 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화가 왜 나는가? "나는 의롭기 때문에 복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데 이번 일로 인해서 졸지에 의로운 존재,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내 가치에 손상을 입었기에, 그래서 화가 난다" 라는 것이다.

◈ 인간은, 왜 화를 내는가?

화를 내는 것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해보면, 즉 "화를 낸다"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원래 나의 자리는 가치가 있는 자리인데, 이번 일로 인해서 이 가치가 약간 훼손이 되었으니, 그 훼손된 부분만큼은 화가 난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화가 무엇인가? 원래 자기 자리에서 뭔가가 빠져나갔다는 것인데, 도대체 무엇이 빠져나갔다는 말인가? "나의 잘남과 나의 선함과 나의 의로움이 빠져나가고, 그 빠져나간 자리가 시커멓게 죄로서 채워졌다" 라는 것이다.

◈ 종기에는 고약을 ??

그것을 제가 어제 오전설교에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하나님은 벽지로(?) 다루시는데, 우리는 페인트칠을 한다고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종기를 예로서 들었는데, 우리 몸에 종기가 볼록 났다고 하면 그 부분에만 고약을 붙이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잘한 것은 그냥 놔두고 잘못한 것에만 반창고를 붙인다는 것이다.

요즘은 그런 종기에 고약을 붙인 사람들이 질문을 해서 조금 골치가 아픈데(ㅋㅋ), 즉 잘한 것은 그냥 놔두고 종기가 난 것만 어떻게 잘하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다 씻어주세요" 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발만 씻겨주지 말고 모두 씻어달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곧 인간의 본성인데, 그러니 사실 감사하고 고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지옥에 가야될 이유를 다 보여주니 말이다. 우리 인간은 기껏해야 여기까지인데, 그래서 교회에 나오고, 또한 목사는 그것을 노리고 목회를 하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가정에 불화가 있다고 하면, 목사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찾아서 하나님께 회개하세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잘못이냐는 것이다. 처음부터 잘 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잘한 것은 정말 하나도 없는가?

우리는 잘하고 잘못하고, 그런 것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벽지, 즉 '용서' 라는 입장에서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그 벽지 때문에, 그 벽지가 바로 피 묻은 벽지인데, 즉 예수님의 용서의 피 묻은 벽지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제 아무리 페인트칠을 열심히 해도,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얼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중들이, 머리는 왜 깎는가?

이렇게 사람들은 항상 선과 악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그래서 화를 내는데, 사실은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불교에서는 선과 악의 경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들을 하는데, 중들이 부처님의 이론을 가지고 그렇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는 속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는데, 즉 "머리는 왜 깎는가?" 라고 말이다. 머리를 깎음과 깎지 않음이 경계인데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산다고 하면, 사실은 머리카락이 그냥 자라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게 곧 우유적 속성인데, 또한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대머리가 되는데 말이다. 그래서 머리카락은 그대로 두면 되는데, 그런데 너무 길면 불편하니까 불편하지 않도록 깎으면 된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왜 억지로 빡빡 대머리로 밀어버리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가위도 아닌 도끼처럼 생긴 무서운 칼을 가지고 말이다. 그냥 자라도록 놔두지 않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돈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데, 그러니 솔직해지자는 것이다. 속지지 말고 말이다. 

◈ 구원은, 주님의 희생으로 !!

이렇게 이 세상은 전부가 다 사망 안에, 즉 저주 아래에 있는데, 예수님만 빼놓고서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저주에서 우리를 구출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 구출되는 꼬라지를 보면 가관인데, 그래서 주님은 성령을 보내서 "니 같은 죄인 속에 이런 의가 들어있다" 라고 해서, 그렇게 뽑아내는 식으로 주님께서는 희생하시면서 구원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대신에 희생하신 주님을 잊지 말자고 하는, 바로 그런 의미라는 말이다. 제가 입만 열면 항상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또 피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저의 설교를 살펴볼 기회가 있다면, 도대체 어디서 피가 나오는지 한번 보라는 것이다. 어떤 대목에서 피가 나오는지 말이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아하, 우리 힘으로 안 되는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자기가 지금 장가를 가는데 남의 결혼식에는 왜 참석하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안 되는데, 그런 식으로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안 되도록 하시면서 찾아오셔서 우리 속에서 주님의 자기 의(義)를 끄집어내는 작업을 하시는데, 놀랍게도 그것을 우리를 데리고, 즉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꼬락서니는 이렇지만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냐는 말이다. 그러한 과정에 있어서 우리는 죽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죽으면서 부활에 이르는 작업에 있어서 하나의 재료가 되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죽어야만 마땅하다는 것이다.

◈ 나인성 과부는 참 좋겠다 ??

그것이 누가복음 8장인가 9장에 보면 나인성 과부의 아들 이야기로서 나오는데 말이다. 7장입니까? 언제 그리 갔지요? (ㅋㅋ) 거기에 보면,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는데, 이제 인사를 다 끝내고 관을 매고 가는데, 그런데 그때 주님이 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여인을 불쌍히 여겨서 "울지 말라" 라고 하시고는, 이미 죽은 청년에게 명령을 하시는데,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라고 말이다. 그러자 청년이 일어나 앉아서 말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과부는 참 좋겠다" 라고 여기지만 말고, "지금 이것을 행한 분이 과연 누구인가?" 라는 것이 중요한데, 그리고 그분이 곧 죽으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애굽과 같은 이 세상에서 느끼는 잠시 잠깐 동안의 기쁨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과부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예수님이 내 아들을 살렸구나" 라고 하면서, 자기 아들을 살려낸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내가 내 아들만 좋아하는 나의 이러한 죄를 위하여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구나" 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눅 7: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눅 7: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눅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눅 7: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눅 7:15)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눅 7: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 하더라

◈ 주여, 나를 떠나소서 !!

베드로의 경우에도,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많이 잡은 것만 좋아할 것이 아니라, 즉 그런 잠시 잠깐 동안의 것에 마음을 둘 것이 아니라, "도대체 내가 무엇인데 나에게 이런 혜택을 주시는가?" 라고 하면서,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눅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 5: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 5: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눅 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 아하, 그것이 곧 죄구나 !!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을 찾아올 때는, 그야말로 잠시 잠깐동안의 기쁨이 목적이 아니라, 물론 그러한 것은 주시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러한 것은 바로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이 세상의 유혹에 푹 젖어서 살아왔는지, 그러한 것 자체가 곧 죄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가 개척교회를 하면서 교회가 부흥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소관이지 목사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사가 교회의 머리도 아니면서 그런 짓을 왜 하느냐는 것이다. 목사는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그것만 설교를 통해서 드러내면 되는데 말이다. 그저 장사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쪽 교인이 저쪽으로 가게 되더라도, 진정 복음을 안다고 하면 서로 신경을 쓸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목사들은 교인들이 그렇게 가는 것을 돈이 거기로 간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헌금을 적게 하는 사람들은 이동해도 목사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돈이 많은 교인이 가면 어떻게 하는가? 저쪽 교회의 목사를 보고 "왜 교인을 다시 이쪽으로 보내지 않고 붙들고 있는가?" 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나는 그 사람이 평소에 우리 교회에 있을 때 그 사람을 사람이 아닌 돈으로 보았는데, 니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잖아?"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장사를 한두 번 하나? 다 선수 아이가?"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저쪽에서 "십자가마을이 어떤 사람을 보고 오지 말라고 결정을 한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십자가마을도 역시 우리처럼 사람을 관리하는 것이 맞잖아?"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관심사가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 그것뿐이라는 말이다. 왜 그런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전부인데, 그러니 "그것이 곧 죄다" 라고 규정하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야고보서 - 알만한 사람이 왜 그라노?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가장 좋은 것은 어디에서 온다고 했는가? 하늘에서, 즉 위에서 온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동일하게 같이 대해주어야 하는데, 부자에게 잘해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두 마음을 품지 마라. 이 세상은 하나님의 원수다. 이 세상은 안개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야고보서의 전체내용이란 말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즉 "너거들이 이제는 충분히 지옥인 줄로 알잖아. 알만한 사람이 왜 그라노? 그렇게 이 세상을 지옥으로 여기고 행함을 좀 내나봐라. 아브라함을 보고 기생 라합을 좀 봐라. 처고 자식이고 간에 다 버리지 않았는가? 그렇게 이 세상은 안개이니, 그것을 내놔봐라. 만약 그러한 것을 내놓지 못하면 그것은 믿음도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배경인데, 이러한 배경과 더불어서 말씀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약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들이 이렇게 첩첩이 둘러 쌓여있는 세상적인 유혹의 층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주님께서 다 내다보시고, 우리 속에 십자가의 영인 성령을 주셔서 날마다 십자가로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영광은 오직 이 십자가를 아는 데만 있다고 하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09,14 오후 5시 50분에 마침.

                                                                  우리가 다 선수 아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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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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