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55강 육적 십자가

피/피 2012. 8. 29. 10:40

피55강 육적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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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10919피p178육적십자가

피55강 육적 십자가

[11 대구강의 17] - [피 55] - 육적 십자가
                                                                                
                                                   11,09,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78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성도를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자'로 규정함으로서, 성경의 모든 내용에서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은 인정받지 못한다. 성경이 품고 있는 뜻은 모두 예수님을 죽게 한 그 '십자가 못'의 작용이었다. '그 못'이 지금도 날아다닌다.

◈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자 !!

여기에 보면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자이다"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은 못 박혀 죽으셨는데, 그것은 제가 하는 말이 아니고 성경에 보면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사도가 그렇게 해석을 했다는 말이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었다는 것은 베드로전서에 나오고, 또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을 때, 그 못이 어디서 만들어진 못인가? 그건 로마시대의 어느 대장장이가 만든 것인데, 즉 예수님은 사람이 만든 못에 찔려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함께 못에 박힌 것이 성도라고 하면, 결국 성도가 이 세상 사람에게 예수님과 같은 운명으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던 그들이 그 후대에 있는 사람들을 다시 못 박아서 죽일 수 있느냐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늙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죽고 난 뒤에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자들에게 죽는 것이 성립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얘들아, 너희들도 예수님처럼 못 박힌 자가 되기 위해서, 너희들을 못 박을 자를 찾아다녀 봐라. 아니면 신문에다 광고를 내든지, 즉 '누구든지 나에게 못을 박는 자에게는 수고비를 드립니다' 라고 해봐라" 라고 해서, 그렇게 한다면 그게 과연 성도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조작한 것이고, 연극한 것이니 성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미워하는 경향성을 살려냄으로서 !!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과연 어떻게 보는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못 박은 것으로 해석해서, 거기에서 무엇을 끄집어내는고 하니, 이 세상이 예수님 쪽에 있는 자들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그 경향성을, 그것을 하나님께서 뒤에서 계속해서 살려내신다는 것이다. 그 경향성을 말이다. 

하다보니 이야기가 좀 길어졌는데, 간단하게 말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는데, 그 다음에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못에 박혀야 성도인데, 그러면 이 작업을 누가 하시느냐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못 박았던 자들을, 그들이 로마군인들인지 모르겠지만, 그 인간들을 계속 살려서 하지는 않을 것이란 말이다. 그들은 늙어서 죽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미 있는 취지는 무엇인고 하니, 그들이 예수님을 미워해서 못을 박았으니, 그런 미움을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살려내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계속 살아있으면, 굳이 손에 못을 박지 않아도, 못을 박았다는 취지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살아있게 되면, 그러한 취지 안에 있는 자들은 성도가 된다는 것이다.
 
◈ 말씀만 성취되면, OK !!

이것을 더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님께서 결혼식에 가서 밥을 한 그릇 얻어먹고 있는데, 그 집주인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접시를 가지고 때렸다고 하면, 그래서 성경에서 "밥을 먹다가 접시에 맞은 자가 성도이다" 라고 한다면, 그 접시로 때린 사람은 계속해서 살아있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접시를 던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만들어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쪽에서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계속해서 미움을 당하는 환경을 하나님 쪽에서 만들어줄 때, 거기서 무엇이 성립하는고 하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하는 그 말씀이 계속해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만 성취되면 그만인데, 즉 우리가 어떻게 되는지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성도라는 그 말씀만 계속해서 구체화되고 노골화되면, 그러면 하나님의 작업은 끝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위주이지, 인간위주가 아니기에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한 들러리에 불과하니 말이다. 성도란 예수님과 못 박힌 자라는 것만 계속해서 살아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작업에는 하자가 없다는 것이다.

◈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 말씀만 계속해서 살아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그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점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는데 말이다.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리라" 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큰일이 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믿었다가는 나중에 치매가 걸려서 잊어버리면 그만이니 말이다. 이 말씀을 위해서 여기에 뽑혀서, 거기에 맞는 역할을 담당하는 자로서 채택이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취직이 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입에서는 매일같이 이것만 나오는데, 즉 "한 명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살린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니는 어떻게 믿노?" 라고 하면, 그것은 자기가 믿는 문제가 아니고, 소속의 문제라는 것이다. 즉 "우리 집안에 아무리 환난과 핍박이 와도 주님은 잃어버리지 않는다" 라는 말씀이 자꾸만 생각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정신이나 모든 것을 이 말씀이 주관하신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말씀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인데,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말씀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어디를 가도 말씀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어떻게 이 말씀을 믿게 되었나?" 라고 하는 질문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채택이 되었으니 말이다.

◈ 당신은 어떻게 로또에 일등을 했는가 ??

예를 들어서, 로또복권이 당첨이 된 사람을 보고 "당신이 어떻게 번호를 적어서 일등을 했는가?" 라고 묻는다면, 즉 볼펜으로 적었는지, 연필로 적었는지, 아니면 꿈을 꾸었는지, 아니면 어느 가게에서 구입을 했는지,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것을 설명한다면, 그것 자체가 미신이 되는데, 그러니 설명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다보니 일등이 된 것이지 말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로또 일등에 대해서 나는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았다" 라는 것인데, 즉 자기가 구원을 받는데 자기 행동이 도움이 되었단 말인가? 되지 않았다는 말인가? 일체 되지를 않았는데, 바로 그것을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때려죽여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교회에서 하는 짓이 무엇인고 하니까, 소위 '미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미신' 이라는 것은 자기의 행함을 믿는 것인데, 자기의 믿음이 어떻게 효과가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게 바로 미신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예수님의 행함 중심인데, 그런데 미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자기의 행함 중심으로 우기면서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보다 더 큰 미신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엄청난 미신이고, 즉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취지 - '예수님은 너희들의 죄(罪) 때문에 죽었다' !!

여기부터 조금 어려워지는데, 공부는 어렵게 해야 제 맛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성도가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자가 위해서, 그렇게 못 박힌다는 취지를 어느 쪽에서 살린다고 했는가? 하나님 쪽에서 살린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나님 쪽에서 살리면, "예수님은 사람들 때문에 죽었다" 라고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약간 더 늘려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 때문에 죽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아는가? 모르는가? 당연히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하는 행동을 자기들이 알지 못한다고, 분명히 십자가에 달릴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스데반 집사도 그런 이야기를 했고, 또한 예수님께서도 그 이전에 제자들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말이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하지만 그것을 인간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떠한가? "아니, 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예수님을 죽이겠는가?" 라고 하면서 기분만 상할 뿐이지, 정작 자기 죄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그런 인간들의 죄를 보다 더 분명하게 하자는 것이다.

◈ 죄(罪)와 의(義)의 대비로서 !!

이렇게 죄를 분명히 하게 되면 어떤 효과가 있는고 하니, '의(義)' 라는 것을 보다 더 분명히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죄를 모르게 되면, 즉 죄를 두고서 자기가 사람을 해치든지 남의 물건을 훔치는 등의, 그러한 나쁜 일로만 생각하게 되면, 이 '의' 라는 것도 누가 실천에 옮길 수가 있다는 말인가? 즉 죄를 인간이 실천에 옮길 수 있다면, 또한 의도 역시 인간이 실천에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간음을 하지 않으면 되는데, 또한 마음속으로도 그런 나쁜 생각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즉 남에게 해꼬지를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인데, 그것이 곧 '의'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말려든 사람들이 칼빈이나 루터인데, 모든 신학자들이 다 여기에 말려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후손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말려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 친절한 근호씨의 '리바이벌' !!

그러고 보니 강의시간에 에어컨을 틀어놓아서 동영상을 보는데 지장이 있었지 싶은데, 또한 시끄러워서 강의를 듣는데도 힘들었지 싶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부터 다시 하겠는데, 강사가 참 친절하기도 한데 말이다(ㅋㅋ).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인데, 그러면 먼저 예수님은 인간들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인데, 하지만 지금 우리가 그 당시에 살아있지 않았다고 해서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못 박혔다는 취지를 누가 어느 쪽에서 의도적으로 일으키는고 하니까, 하나님 쪽에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 쪽에서 일으켜서,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취지가 계속 살아있어야만 성도가 십자가에 계속해서 못 박힌 자로서, 그렇게 해서 성도가 계속해서 발생이 되고 또한 생산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과거의 십자가로 그냥 끝나게 되면, 사도바울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라고 하는 것이 거짓말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 사건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십자가는 살아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십자가라는 나무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취지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의미인데, 그러한 취지를 계속해서 살려내시는 분이 누구인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 박혔는고 하니까, 그것은 인간들의 '죄' 때문인데, 그런데 사람들이 그 죄에서 대해서 알았는가? 물론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 하나님에게 대든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무슨 죄인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렇게 죄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함으로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나는 너희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죄가 나오는데, 즉 드디어 죄가 등장하는데, 그러니 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십자가 사건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 쪽에서 되풀이를 하는 것으로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되풀이해서 죄를 끄집어내게 되면, 그러면 이 죄는 기존의 인간들이 알았던 죄와는 같은 죄인가? 다른 죄인가? 다른 죄라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들이 알았던 것과는 다른 죄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죄라고 여길 때, 인간들은 무엇을 생각하는고 하니, "이것이 죄라고 하면, 저것은 의가 된다" 라고, 그렇게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죄를 짓은 것도 이 정도라고 한다면, 죄를 짓는 것도 역시 자기들이 행할 수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당연히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하늘에서 잔소리만 조금 하시면, 하나님의 잔소리를 듣고 자기들이 이 땅에서 의를 행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즉 죄는 조금 적게 짓고, 또한 의는 조금이라도 많이 행하게 되면,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이런 잘못된 생각이 결국에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죄가 되고, 그것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 뒤의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즉 인간들이 성도를 죽이도록 미워할 수밖에 없는 그것이 하나의 사상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을 누가 일으키는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시고 몰아가신다는 것이다. 마치 닭장으로 닭들을 '우~우~'하고 몰아가듯이 말이다.

◈ 성령을 받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을 알 수 있는가?

이 정도로 대충 정리하고, 오늘강의에서 중요한 것이 슬슬 시작되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제가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지겠는데, 즉 "사람이 성령을 받지 않고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알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물론 모르는데, 그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온다는 말이다. 

(고전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그리고 1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이는데, 하지만 부르심은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고 지혜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리가 목사의 입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처참한(?) 모습인데 말이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왜 그런고 하니까, 교회라고 하는 것은 꼬드겨서 끌어 모아야 하는데, 그런데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 이라고 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주님이 찾아오지 않은 자들은 백 날 교회에 나와도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그냥 집으로 돌아가 주세요" 라는 것과 같은 소리라는 것이다.

◈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십자가를 !!

그러니 목회를 한답시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있는 사람도 내어쫓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십자가를 압니다" 라고 하는, 그 짧은 하나의 문장 안에 모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십자가를 압니다" 라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목사들이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미 목사 자신들이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목사가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교회는 신자가 아닌 자들만 다 모이게 되는데, 신자가 아닌 자들만 그렇게 모여서 뭐라고 하는가? "우리는 신자다" 라고 우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가관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목사 본인이 신자가 아닌데, 목사는 신자가 아니고 목회를 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교회에서 목사가 신자가 아닌 자들을 신자라고 해주는 것은, 그것은 바로 목사 자신이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십자가 마을이 욕을 엄청나게 얻어먹는데, 개방성이 어떻고 폐쇄성이 어떻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말이다. 그것은 목사 본인이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에 나온 사람들을 자꾸만 신자로 만들어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신자도 아닌 자들을 말이다.

◈ 목사의 입에서는 '당신은 죄인입니다' 라는 소리만 !!

만약에 목사가 신자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에게만 구원을 주신다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불렀습니다" 라고 식으로 말하면 안 되고, 그 부르신 것은 어디에서 불렀느냐는 말이다. 십자가에서 불렀는데,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부를 때, "어이 너, 이리 나와!" 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고, "너의 죄 때문에 내가 죽었다" 라고 해서, 그러니 부른 자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죄인으로 규정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죄인' 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짐승으로 여기겠다는 의미인데, 바로 그것을 용납할 수 있어야, 그게 곧 신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헌금을 하셨습니까? 잘했습니다. 기도를 했습니까? 잘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고, 또한 아까 말한 것처럼 미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배에 참석하셨습니까? 잘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것이고, 성령의 의해서 은혜로 된 것입니다" 라고, 그렇게 교회에 나온 사람들을 북돋우어 주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교회를 친목단체나 동우회로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가 고르고 말고 하면 안 되는데, 목사는 인정사정도 볼 것 없이 오직 진리만 증거하라고 성령을 주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함께 하는 목사는 오직 복음만을 전할뿐이지, 어떻게 꼬드겨서 자기 교회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목사 자신이 신자가 아니라는 말인데, 목사에게 교인 한 사람만 있어도 그 한 사람이 신자인 줄 알고, 또한 두 명이 있어도 목사는 신자인 줄로 아는데, 그런데 천 명이 목사에게 왔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갑자기 신자보다 목회자가 더 좋아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욥의 경우에 !!

욥의 경우에, 그에게 자식이 열 명이 있을 때 경건한 사람인 줄 알았는가? 사실 마귀는 그렇게 알았는데, 욥에게 아들이 열 명이 있고 부자이기 때문에 욥은 자기를 신자인 줄로 안다고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그게 아니라고, 즉 욥은 그게 없어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마귀의 주장이 무엇인고 하니, 욥은 아프지 않고 자식이 잘 되고 재산이 많으니, 그렇게 하나님에게 받아 챙긴 것이 있으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한다고 하는 것이지, 그것을 철수시켜버리면 하나님을 욕할 사람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것은 일반 사람들의 경우이고, 내가 준 믿음은 그것이 아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내기를 했는데, 그 내기에서 누가 이겼는가? 하나님께서 이겼다는 말이다. 욥이 훌륭해서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욥을 보호하셨기 때문에 말이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는데,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성도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닌데, 주께서 함께 하셔서 이기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는데, 그런데 그때마다 주께서 이기도록 해주신다는 말이다.

◈ 2초, 3초의 위력 !!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믿고 싶어도, 그때마다 요한복음 6장 39절이, 즉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라는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또 십자가가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 내가 우선이 아니고 말씀이 우선이지" 라고 말이다. 그것이 2초가 되던, 3초가 되던 간에 자꾸만 생각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 짧은 순간에 하나님의 전체가 다 등장하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2초, 혹은 3초라고 하니, "아니, 무슨 그런 2초, 3초 짜리 하나님이 다 있노?" 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고, 그건 하나의 틈이고 짧은 시간이지만, 그 틈에서 하나님 전체가 다 나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부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 짧은 순간이지만 거기서 진리가 나오는데, 그 진리가 무엇인가? "아하, 나는 무엇을 해도 죄인이구나" 라는 것인데, 바로 그런 진리가 나온다는 말이다. 기존의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던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일방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기쁜 소식이냐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우리가 돈을 사랑하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그렇게 해서 죄인이 아니라, 굳이 그런 짓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말씀에 의해서 죄인이라고 하는, 즉 말씀에 입각한 죄라는 의식이 그 짧은 순간에 우리 속에 다 들어오는데, 그 짧은 순간이 우주전체의 내용을 모두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은 항상 구멍난 양말처럼 !!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항상 구멍난 양말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있어서, 하나님의 진리가 어느 새 어느 장소에서 불쑥 튀어나오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설거지를 하다가 그럴 수도 있고, 또한 운전을 하다가 그럴 수도 있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 자신이 그만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또 지식으로 조립해서 "하나님, 제가 이것은 알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데, 물론 하나님을 그것에다 구멍을 다 뚫어버린다는 것이다. "니가 알고 있는 것을 소유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 '잃어버림'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어 !!

제가 어제 낮에 '잃어버린 양'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즉 "하나님은 양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신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잃어버렸다고 하는 속성을 우리가 과연 소유할 수 있는가? 소유할 수 없는데, 그것이 어제 설교의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눅 15: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눅 15: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눅 15: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눅 15: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그런 잃어버림을 우리가 행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최초로 잃어버린 양으로서, 즉 그 당시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잃어버린 양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에게 그대로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시는데, 즉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잃어버린 그대로 종속이 되면서 잃어버린 양을 구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벌써 어지러운데(ㅋㅋ), 왜냐하면 벌써 주님의 어깨에 매여가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멀미가 마구 날 지경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목자가 어떻게 매고 간다고 했는가? 기뻐하면서, 즉 기분이 좋아서 흔들면서 어깨에 매고 가니까, 우리가 위에서 오죽이나 흔들리겠느냐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99마리는 어떠한가? 그것은 기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회개할 거리도 없는, 즉 지옥에 갈 놈들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그 당시 사람들이나 오늘날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무슨 그런 유별난 하나님이 다 있느냐는 것이다. 그냥 얌전하게 있는 99마리는 지옥에 보내버리고, 혼자서 길을 잃고 멍청하게 있는 양은 좋다고 하면서 어깨에 매고 오고 말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는 말이다.

방금 제가 어려운 것을 한다고 했는데, 무엇이 어려운고 하니, 우리가 알다시피 이 '십자가' 라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지금부터 2010년 전에 예수님이 강도와 함께 죽은 그 십자가는 단회적인데, 즉 한 번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끝이 났는데, 그런데 그것을 반복한다는 것은 이 십자가에서 나온 힘이 십자가를 반복하게 한다는 말이다.

◈ 죽었다는 사실을 되살리는 것이 곧 부활의 능력 !!

그게 무엇인고 하니, 바로 '부활' 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을 부정해서 부활이 아니고, 즉 죽은 것을 거부해서 다시 되살아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죽었다는 사실을 되살리는 것이 곧 부활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이고 말이다. 그러니 부활은 무엇인가? 죽었다는 사실이 살아있어서 부활이라는 것이다. 죽었다는 사실이 참된 현실로서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나는 살았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도 살았다" 라고 하시는데, 여기에 대해 사람들은 "에이, 예수님은 그때 죽었잖아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다시 "아니, 나는 살았어"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산 것과 예수님이 산 것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우리 인간의 삶의 끝은 저주를 받아서 죽음이 있지만, 예수님의 살아있는 것은 저주의 죽음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즉 부활로 살아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삶은 제대로 된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부활이 되지 못한, 부활이전의 죽은 상태, 즉 저주를 받은 상태라는 말이다. 어떤 안목에서 볼 때 그렇다는 말인가? 부활의 안목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바로 그 부활의 안목으로 십자가를 다시 볼 것을, 즉 "성도들아, 부활의 안목으로 십자가를 보아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부활의 안목으로 십자가를 잊어버려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은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에서 주장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부활의 안목으로 십자가를 다시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나'를 위한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되심을, 즉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활동하고 있음을 증거하기 위한 천국이, 즉 영생의 세계가 활짝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주되심의 모든 권세 !!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로부터 받았다고 하셨는데, 또한 요한복음 17장에서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고 한다는 것이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그러니 그 모든 권세가 결국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한 권세이지, 이 인간 세상을 유지하려는 권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청와대를 유지하고, 또 백악관을 유지하는 권세가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리비아의 가다피를 어떻게 하고, 김정일을 어떻게 하는 권세도 역시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주되심을, 즉 십자가에 예수님과 같이 못 박힌 성도를 만들어내고 생산해내기 위한 모든 권세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이러한 권세를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온 우주를 통 털어서 말이다.  

심지어 저기 동화사에서 예불을 드리는 것도 누구의 권세인가? 예수님의 주되심의 권세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동화사의 중이 산채 비빔밥을 먹은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닌데, 정작 예수님께서 주신 힘으로 비빔밥을 잘도 먹으면서도, 그 영광을 예수님에게 돌리지를 못하고,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이라고 하면서 어리석게도 부처에게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 최고의 저주 - '내어버려두사'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하셨는가? 로마서 1장에 보면, '내어버려두사' 라고 하는데, 즉 "니가 살았냐? 오냐 알았다. 그냥 그대로 있어라" 라고 하면서, 죽었으면서도 살았다고 우기는 그들을 그냥 방치해버리는 것, 그것이 곧 최고의 저주라는 말이다. 그리고 2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마지막 진노의 날에 쌓고, 쌓고, 쌓는다고 하는데, 즉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다는 것이다.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
(롬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 도다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내가 살았다" 라는 것이 죄가 될 줄은 상상도 할 수가 없는 것인데, 그렇지 않는가? 아이가 태어나서 엄마가 젖을 주어서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 즉 우리 인간이 태어나서 자라면서 자기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겠는가? 전혀 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살아있으니, 그런 살아있다는 의식이 든다는 말이다.

그게 데카르트가 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말이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는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비복음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생각은 자기의 존재를 위한 생각인데, 즉 예수님의 살아있음을 위한 생각은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 예수님은 이미 죽은 분이기 때문에 말이다. 

◈ 과연 누가 정상인인가?

방금 이야기한 것을 다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가 있는데, 즉 "무엇이 정상인가?" 라고 말이다. 여러분이 다음 4가지의 보기 중에서 답을 골라보라는 것이다. 

(1)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 없다.
(2) 예수님은 옛날 사람이니, 죽은 사람이다.
(3) 사람은 돈으로 산다.
(4)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더불어서 산다.

1번의 경우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 없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잘못인가? 사람들은 눈에 보이면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뿔이 하나밖에 없는 짐승을 '일각수' 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유니콘'이고 말이다. 그런 짐승이 있는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용은 있는가? 물론 그림책에는 있지만, 현실 속에서는 역시 없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어디서 용을 보았다는 말이 있는가? 그렇게 보이지를 않으니 역시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박테리아는 있는가? 있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현미경으로 보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옛날에는 박테리아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현미경이 개발되지 않아서 보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현미경으로 박테리아가 보이니 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당연히 없는 것이고, 옛날에 살았던 예수님도 지금은 보이지 않으니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3번의 경우는 돈으로 산다고 하는 당연한 이야기이고, 그리고 4번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더불어서 산다" 라는 것인데, 바로 이런 자들이 정상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없고, 예수님은 죽었으니 없는데, 즉 고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돈의 경우에는, 인간은 돈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데, 돈이 있어야 쌀을 팔던지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4번의 경우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더불어서 산다" 라는 것인데, 그런 사람이 누구인가? 그것을 두 글자로 '애인(愛人)'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리고 또한 가족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렇게 해서 살아가는 것이 '정상인' 이라는 것이다. 정상인 말이다.

◈ 정상인과 육은, SAME SAME !!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러한 것 전체를 다 모아서 한 글자로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까, 바로 '육(肉)'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육' 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말하는 육은 이 세상에서는 정상인인데, 이 정상인을 한 글자로서 표현하면 육이 되고 말이다.

이런 사람이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그 무엇을 한다고 해봐야, 이 육이 평생동안 그 사람 속에 잠복이 되어있는데, 계속해서 잠복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도 마찬가지인데, 개척교회를 하고 무엇을 해도 말이다. 즉 "진짜 하나님이 계신다 나의 이 개척교회를 이렇게 망하도록 하겠는가?" 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한 때 있었다고 여기고 말이다.

그러니 역시 중요한 것은 돈인데, 그렇게 돈이 있다고 난 다음에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돈이 중요하다는 것은 자기가 역시 제일 중요하다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나'에게 제일로 중요하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바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이 없으면 혼자 살면 되는데, 그렇게 '내'가 사랑하는 것이 바로 '내' 새끼들인데, 그것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예쁘고, 심지어 교도소에 가도 역시 예쁘다는 것이다. 그렇게 '내' 새끼, '내' 손자 등등, 이게 바로 정상인이라는 것이다. (마누라는?)

◈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시려고 하는가? 육을 영으로 바꾸려고 하는데,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가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방법이 육적인 것으로 되겠는가? 안 되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과연 정상인인가? 아닌가? 물론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나셨고, 또한 성령을 받았는데, 그런 비정상인 와서 정상인들을 보고 뭐라고 하는가? "너거들이 비정상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경이 본다고 하니 안 보인다고 하고, 안 보인다고 하니, 보인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비정상인이 정상인을 보고 비정상이라고 하니, 그만 정상인들이 예수님을 죽여버렸는데, "무슨 이런 또라이가 다 있노?" 라고 해서 말이다.
 
◈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시는 일은?

그런데 그렇게 비정상인으로 여겨져서 죽은 예수님께서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부활하셔서 어떻게 하시는가? 자기와 똑같은 비정상인들을 생산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님의 작업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곧 복음이고 말이다.

그러니 정상인이라는 그들이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회에 와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가? 그들의 요구는 정상인을 더욱 더 확대시켜달라는 것인데, 즉 자기들은 정상적으로 제대로 살고 싶으니 그것을 확대시켜달라는 것이다.

그 중심이 바로 보기에 나오는 3번인데, 즉 돈을 키워주시면 그렇게 돈을 키워주신다는 조건하에서 "야, 하나님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몸이 아팠는데 다시 건강해지면 뭐라고 하는가? "어라, 기도를 하니 몸이 낫네" 라고 하는데, 그러니 하나님을 은근히 따로 뽑아서 챙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 복 받은 정상인으로 살게 해주오 ♬

그런데 그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니, 달랑 그분만 믿으면 안되고 세트로 믿어야 된다고 해서, 삼위일체로 믿는다는 것이다. 정작 예수님이 누구인지, 성령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물론 자기들은 교회에서 세례를 받기 전에 교육을 좀 받았다고 하면서, 아무튼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은 삼위일체를 믿으나 하나님을 믿으나 마찬가지인데, 왜냐하면 제일 위에 있는 어르신인 하나님만 믿으면, 그 아래에 있는 예수님과 성령은 하수인으로서 그냥 따라온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런 부담도 없이 다 받아드리는데, 여기서 역시 중요한 것은 '내 몸'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이 땅에서는 정상인으로 살아가기가 힘드니까, 살기 좋은 정상인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정상인으로, 그런 복 받은 정상인으로 확대시켜달라는 노래를 그들은 매일같이 교회에서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 그들은 과연 어디에서 배웠는가?

그렇다면 그 다음이 중요한데, 즉 "인간들이 과연 이러한 짓을 어디에서 배웠는가? 라는 것인데, 인간들은 그냥 몸뚱아리만 태어났는데 말이다. 그런데 육인 그 몸뚱아리를 정상인이라고 여기도록 만든 그 모든 정보와 모든 교육은 어디서 받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것을 체험하는 순간,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인데, 그 모든 환경이 그렇다는 말이다.

바로 그 환경을 성경에서는 '애굽' 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나갈 때, 그 중간에 개입된 사건이 무엇인가? 애굽과 이스라엘을 분리하는 사건인데, 즉 '유월절 피'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전에 몇 가지 재앙이 있었는데, 그게 무엇인가? 아홉 가지의 재앙이 있었는데, 그러면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무엇인가? 그러니 유월절 피는 열 가지 재앙 중에서도 최고의 재앙이라는 것이다.

(출 11:5)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

◈ 애굽이, 곧 양육과 교육의 요람 !!

그러니 이 마지막 재앙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애굽 전체가 재앙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인데, 바로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육을 받고 양육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재앙을 받아야 마땅한 그 속에서, 그들은 "우리는 정상인이다" 라고 양육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뒤를 돌아보면서 뭐라고 하는가?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는데" 라고, 즉 "부추는 언제 주고 수박은 언제 주는가? 그때는 파가 맛있고 마늘이 맛있었는데" 라고, 요즘 말로 하면 "그때 짜장면이 참 맛있었는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매일같이 광야에서 먹는 것은 만나밖에 없으니 말이다. (아직도 짜장면, 이제는 돈까스로, ㅋㅋ)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도대체 우리들을 어디로 끌고 가려고 하는 거야? 여기에 물이 있나? 아니면 양식이 있나? 맛있는 고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뭐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모세, 이리 나와봐" 라고 하는데, 그러자 모세가 뭐라고 하는가? "너거들이 아침마다 받은 게 뭐지? 몰라? 분명히 있잖아? 그게 뭐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정작 '만나'도 모르면서 !!

그것이 바로 '만나' 인데, 그것을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도 그들은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계속해서 먹고 마시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예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모르면서, 즉 돈이나 자기 자신의 몸뚱아리밖에 전혀 모르면서도, 자기 자신들을 정상인이라고 자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 6: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 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그러니 오늘날 교회가 이단이고 미신인데, 즉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이 정상인으로서 더 확대시킬 수 있는가?" 라고, 쉽게 말해서 "어떻게 하면 출세하고 성공할 수 있는가?" 라고,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는 많이 따라오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정상인을 따라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께서 보시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또 죽이는 짓이라는 말이다.

◈ 다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는?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비정상인이면서도 스스로는 정상인이라고 여기는 인간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비정상적으로 보이니, 그들이 생명이신 예수님을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을 죽여버렸다는 것은, 그들은 생명이 아닌 게 되는데, 즉 하나님께서 일부러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 되신 분이 내세우니, 사람들이 그를 단칼에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무엇이 없어진 것인가? 길도 없고, 진리도 없고, 생명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길이 막힌 상태이고, 진리가 아닌 것이고, 또한 생명이 아닌 죽음이, 즉 하나님의 저주 이외의 다른 것은 없다는 말이다. 이 세상은 바로 그러한 상태로서 규정되어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로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세계에서 자기 택한 백성을 기어이 건져내시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즉 육에서 영으로 바꾸시겠다는 말이다. 물론 그 작업을 우리는 전혀 하지 못하는데, 우리는 매일같이 정상인으로서, 그것을 확대시키고 싶어서 안달인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도저히 그리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생활의 함정 !!

그렇다면 그것을 우리는 어디에서 배웠다고 했는가? 이 세상 자체에서 배웠는데, 그런데 아까도 말했지만 이 세상 자체를 출애굽기에서는 '애굽'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제가 주일 낮 시간에 설교한 것처럼, '생활의 발견'이 아니라, '생활의 함정' 인데, 즉 뭔가 뒤틀린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매우 단단히 말이다.

그래서 하루종일 노는 사람이든 일을 하는 사람이든 간에, 뭔가 하루일과가 뒤틀려서 그만 왕짜증이 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스트레스인데, 그런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에 계속 자기를 짓눌리고 있는, 마치 먹구름이 몰려와서 팔다리가 쑤시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기둥이 내려않고 찌그러지는 것 같은데, 물론 몸도 늙어 가면서 불편해지고 말이다. 아무튼 만사가 귀찮고 하루 빨리 도망치고 싶다는 말이다.

◈ 이제 퀴즈를, '성령을 받지 않고도 하나님을 볼 수 있는가?'

지금 제가 문제를 끄집어낸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과연 사람이 성령을 받지 않고도 하나님을 볼 수 있는지, 혹은 구원이 될 수 있는지, 혹은 영의 사람이 될 수 있는지, 혹은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는지,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 이제 그 해답을 이야기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 언약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 !!

그렇다면 우리가 그 출발을 1번과 2번부터 해야하는데, 그런데 이 1번과 2번은 모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과 예수님은 언약 안에 숨어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마약을 어디에 숨겨서 들여오다가 들켰는가? 자기 몸 속에 숨겼다는 것이다. 그것이 비밀인데, 이렇게 하나님과 예수님은 언약 속에 숨어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았는데, 하지만 그렇게 받을 때는 공포와 저주스러움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내산 밑에서 벌벌 떨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그만큼 하나님은 무섭고, 언약도 또한 무섭다는 것이다.

또한 모세가 떨기나무 앞에 있을 때도 신발을 벗으라고 했는데, 모세는 그곳이 자기 땅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게 어디 니 땅이야? 내 땅이다. 신발을 벗어!" 라고 하셨는데, 그래서 신발을 벗고 꿇고 있으니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니는 이제 내가 시키는 대로 하거라" 라고 하셨는데, 그때부터 일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출 3: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그것이 바로 언약, 즉 '모세언약'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오직 언약 안에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야말로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비정상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게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엘리야도 마찬가지이고, 아무튼 성령을 받은 사람은 비정상적이라는 것이다. 다윗의 경우에도, 자기가 간음하고, 또한 자기가 살인을 해놓고 뭐라고 하는가? 자기는 누구에게만 범죄했다고 하는가? "오직 주께만 범죄했사오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죄의 개념을 새롭게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새로운 죄의 개념을 말이다.

다윗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자기가 간음하고, 또한 자기가 살인을 해놓고는 뭐라고 하는가? 자기는 누구에게만 범죄했다고 하는가? "오직 주께만 범죄했사오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죄의 개념을 새롭게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죄의 개념을 말이다.

◈ 그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

그러니 모든 것이 비밀인데, 왜 비밀인가? 그들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목사의 할 일은 믿지 말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본인이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지면 믿어질 것이고, 반면에 정상적이라고 여기면 전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여겨지면 믿고, 자기가 사람이라고 여겨지면 믿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그렇게 정상적인 인격자로 대우하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인데, 그러니 모든 성경해석은 그런 개혁주의 신학을 다 비켜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갈 사람들이 "나도 신자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지옥에 가는 자가 신자가 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믿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 머니 머니 해도, '머니' !!

이제 이런 문제를 해결해보도록 하겠는데, 1번과 2번은 숨어있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고, 그러면 3번부터 해보겠는데, 3번을 어떻게 푸는지 보라는 것이다.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러면 그 돈은 누가 필요로 하느냐는 것인데, 즉 돈의 배후에 누가 있느냐는 것이다. 누가 그 돈을 쓰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나' 라는 것이다.

물론 다른 인간도 있는데, 그러면 인간이 왜 돈을 필요로 하는가? 그것은 곧 '교환'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농사를 짓는 사람도 옷이 필요한데, 즉 밥만 먹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옷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반찬으로 고등어도 먹고 싶고 말이다.

그런데 옷과 고등어를 사려고 하면 교환을 쌀과 해야 하는데, 그런데 쌀을 들고 가면 너무 불편하니, 그 쌀의 가치에 해당되는 것을 지폐로, 즉 돈으로 만들었는데, 물론 옛날에 그런 지폐가 나오기 이전에는 금과 은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금전과 은전이 나오는데, 물론 이 금과 은은 지금도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에 다 통하는 교환 화폐라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나' 라는 인간에게 양식이 있어야 살아가니, 즉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돈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인간은 죽고 마는데, 바로 여기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인간은 죽는다는 데서 말이다. 이것을 인간은 죽음에 시달린다고, 혹은 죽음에 갇혀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천국에 가는지, 그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만들어내고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도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어떤 식으로 천국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는지 말이다. 그 출발점이 바로 인간의 죽음인데, 즉 인간은 죽음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러한 죽음을 느낀다는 것이다.

◈ 하이데거 - '인간이 죽음을 아는 게 아니고, 죽음이 인간을 안다' !!

여기에 대표적인 철학자가 독일의 '하이데거' 라는 사람인데, 그는 "인간이 죽음을 아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인간을 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인간이 죽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그 죽음 속에 갇혀있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이데거가 굉장히 복음적이고 신앙적으로 들리지 않는가? (ㅋㅋ) 그건 그의 독창적인 주장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든 철학적인 사상을 다 집약해서 그렇게 내어놓았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이렇게 인간이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죽음을 알았으니 어떻게 해서든 그 죽음에서 도망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살고자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수월하게 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그게 아니라 살아가는데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다. 즉 힘이 드는데, 그건 마치 창세기 3장의 말씀과 같다는 것이다. 즉 "니가 이마에 땀을 흘려야 산다" 라고 말이다.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 생로병사(生老病死) - 결국 '죽음' !!

여러분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이 오지 않으면 불교를 생각하면 되는데, 불교에서 인간을 뭐라고 하는가? 즉 '생로병사(生老病死)' 인데, 그러니 태어났지만 결국은 무엇으로 끝난다는 말인가?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것이다. 태어난 존재가 결국에는 죽는다는 말이다. 그게 불교인데, 그러니 불교를 이야기한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불교가 철학이고, 철학이 곧 불교이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태어나서 그냥 자살을 하든지 해서 죽으면 편한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늙어 가면서 병이 들어서 죽으니, 여기서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고통을 어떤 식으로든 해소할 때, 이 '생로병사'가 개인적인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개인적인 이것을 가지고 고통을 완화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 아야, 아야, 아야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이 이빨이 아플 때 그냥 가만히 있는가? 그게 아니고 "아야, 아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외부로 부르는 소리라는 것이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다들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인데, 무슨 뜻인고 하니, 만약에 여기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면, "나를 좀 도와주세요" 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학교에 갔다가 그만 감기에 들어서 집으로 오는데,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와서 식구들 앞에서 생긋생긋 웃으면서 "어머니, 아버지, 학교에 잘 다녀왔습니다" 라고 하겠는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온갖 인상을 다 쓰면서 힘이 하나도 없이 들어오는데, 그러면 엄마가 "경수야, 니가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어디 몸이 아프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통을 완화하는 방법은, 같이 고통을 나눌 수 있고,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그런 공동체를 원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더불어 살고 함께 산다는 것은, 그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처음부터 그러했다는 말이다.

◈ 먼저 몸으로 아는 상상계를 !!

지금 어려워도 할 수 없는데, 그래도 알아야 하니 말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먼저 '몸'의 요소가 있고, 그 다음에 '언어'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몸을 이야기하자면, 아이가 태어나서 몸이 커 가면서 자기가 되고 싶은 것과 일치를 시키는데, 그게 누구인가? 자기와 만나지는 사람, 즉 엄마라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는 엄마와 일치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엄마가 울면 자기도 따라서 우는데, 즉 "엄마, 왜 울어?"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엄마와 한 몸이 되는데, 이것을 라캉이라는 학자는 '상상계' 라고 했다는 것이다. 상상하는, 즉 이미지라는 말이다. 자기와 같다고 상상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린아이뿐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서, 자기는 지금 차가 고장이 나서 추운 길가에서 떨면서 고생을 하는데, 옆에 좋은 차가 '씽'하고 지나가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아, 저 차를 가지고 싶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상상계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자기가 되고 싶은 것에다가 자꾸만 자기의 몸을 소속시키고 가져다 붙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등산을 하나 하더라도, 건강한 사람은 씩씩하게 앞에 먼저 올라가고 자기는 다리에 힘이 없어서 뒤로 쳐졌다고 하면, 그때는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나도 좀 건강해서 앞에서 갔으면 참 좋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상상계' 라고 하는데, 물론 말은 상상계이지만, 사실은 상상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본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실제로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은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상상하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상상하지 않으면 말이다.

◈ 엄마의 상상력은, 온 가족의 활력소 !!

예를 들어서, 자기 아이가 학교에 갔다가 늦도록 오지 않는다고 하면 엄마는 무슨 상상을 하겠는가? "우리가 아이가 교통사고가 났을까? 아니야, 그건 아니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는 게 아니라, "아마, 선생님이 특별히 사랑해서 교실에서 공부를 시키고 있을 거야" 라고, 그런 좋은 쪽으로 상상을 한다는 것이다. 즉 사고가 나는 나쁜 게 아니라, 상을 받고 칭찬을 받는 좋은 방향으로, 그렇게 상상하고 싶은 상상력이 동원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칸트도 마찬가지인데, 인간은 모든 자기 행동에 대한 동기유발은, 즉 사람이 힘차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무엇이든 상상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오늘도 가게에 손님이 많이 오겠지. 오늘도 아이가 백 점을 맞아오겠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사람이 그런 힘 때문에 살아가는데, 그러니 괜히 철학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왜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사람들이 자꾸만 저를 보고 왜 철학을 하느냐고 하는데, 철학을 해야 자기 잘못을 바라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자꾸 "나는 안다" 라고 하면 안 되고, 도대체 남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렇게 비교하는 가운데, 즉 "이건 내가 너무 오바하고,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구나. 주제넘게 내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구나"" 라고, 그렇게 서로 서로 수정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철학을 공부하지 않게 되면,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여튼 사람들이 웃기는데, 자기들은 정작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남들이 공부하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건다는 것이다. 공부하지 않으면 혼자서 돗대가 되는데 말이다. 

◈ 그 다음은, 언어로 아는 상징계 !!

아무튼 이런 것을 상상계라고 하는데,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런 상상을 하는데,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어떠한가? 즉 엄마는 자기 아이가 선생님에게 인정을 받아서, 선생님의 일을 도와주다가 늦게 온다고 상상을 했는데, 그런데 아이에게 물어보니 아이가 뭐라고 하는가? "선생님에게 벌을 받았어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그것이 바로 '상징계' 라는 것인데, 이 상징계는 언어를 통해서, 즉 말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어' 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언어는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사회가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언어를 '사회질서' 라고 봐도 되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런 사회질서에 순응을 해야만 하는데, 즉 "아하, 내가 상상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세상이구나" 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럴 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되면 자기 밖에 모르는 돗대가 되고 마는데, 이 상징계를 모르면 말이다.

◈ 언어를 통해서 세상질서를 배워야 !!

그러니 육교가 있으면, 육교가 무엇이며 왜 거기에 육교를 만들어놓았는지 공부를 해야하는데, 그런데 30년을 산 속에서 도를 닦고 나와서 그만 육교가 무엇인지 몰라서 그 밑으로 걸어가다가 차에 치어서 그만 죽었다고 하면, 계룡산에서 30동안 닦은 그 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으로 나올 때는 이 세상의 질서를 알아야만 하는데, 즉 육교는 왜 있으며, 저기 신호등은 왜 있으며, 또한 파란불과 빨간불은 무엇인지를 말이다. 그것도 모르고 걸어가다가 괜히 차에 바쳐서 죽으면 자기만 손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교육을 받는가? 그것이 곧 언어인데, 이 언어는 문화이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미국언어로 미국사회의 교육을 배우고, 러시아에 가면 러시아 방식으로 받아야 하는데, 거기서 미국식으로 하다가는 얻어터진다는 것이다. 또한 태국에 가서 마약을 하면 안 되는데, 물론 다른 나라도 그렇지만 말이다. 물론 어느 정도 허용하는 나라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싱가폴에 가서 함부로 길거리에 껌을 뱉고 하다가는 난리가 나는데, 교도소로 가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우는 것인데, 그래서 대학에서 '영어과' 라고 하지 않고 '영어 영문학과' 라고 하는데, 즉 영어는 영문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인데, 문학은 그 나라의 문화와 매우 밀접하다는 것이다. 즉 언어는, 그 민족의 공동체에서 나왔던 관습과 모든 것이 집약된 것, 그것이 곧 '언어' 라는 말이다.

◈ 예수님의 언어는, 하늘나라의 상징 !!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배우는 것은 하늘나라를 배우는 것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을 배우는 것은 무엇인가? 즉 "니가 본다고 하니 소경이고, 또 소경이라고 하니 본다" 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서 통한다는 말인가? 하늘나라에서 통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아, 니 자식을 나에게 바쳐라" 라는 것도 하늘나라에서 통하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언어는 하늘나라의 상징이고 하늘나라의 언어라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의 피가 너의 죄를 용서한다" 라는 것도 역시 하늘나라에서 통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그런 것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어디 돈을 주는 곳이 있는가? 그런 곳은 없다는 말이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 뭐라고 하는가? "주여, 저들은 저들의 하는 짓을 모릅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하늘나라에서 성령을 받는 자들끼리만 통한다는 것이다. 정상인들은 말고 비정상인들끼리 통하는 말이다. 하늘나라의 비정상인들끼리 말이다. 

그것도 모르고 "엄마가 치매에 걸렸는데, 기도하면 낫는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하게 하라" 라고 하시는데, 그 말씀은 하늘나라에서 통한다는 것이다. "내가 잃어버린 양만 기뻐한다" 라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것은 우리가 결코 소유할 수가 없는데, 즉 '소유 불가능' 이라는 말이다. 제가 그야말로 수십 년 동안 이런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이 알아듣지를 못하는데, 물론 그들이 성령을 받지 않아서 그런 줄은 알지만 말이다. 그래도 속이 타는 것은 탄다는 것이다.

◈ 칸트 - '인간은 상상으로 산다'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인간은 몸뚱아이를 가지고 태어나면서부터 상상 없이는 살지 못하도록 되어있는데, 그래서 칸트도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것도 "인간은 상상으로 산다" 라고 했고 말이다. 즉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라는 것인데, 인간은 그렇게 꿈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비전과 꿈이 어떻게 되는가?

예를 들어서, "나는 대통령이 될래" 라고 해서 대통령이 되는가? 그렇게 해서 되는 대통령은 없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려고 하면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게 있는데, 즉 "당신, 어느 정도 배웠는데?" 라고 하면서, 대통령으로서 현재 문화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되는지를 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상징계인데, 그러니 여기는 엄격한 법의 세계라는 말이다. 법의 세계 말이다. 그렇다면 법은 무엇인가? 법이라는 것은, 지적하는 것이고, 정죄하는 것이고, 고발하는 것이고, 고소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법이라는 말이다.

◈ 학교는 상징계를 만드는 곳 !!

요즘 아이들을 학교에서 때리지 말라고 하는데,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학생들을 방치하면 그건 학교가 아니란 말이다. 왜냐하면, 학교는 상징계를 만드는 곳인데, 그런데 학생들이 동물처럼 상상만 한다면 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상상을 조져서 상징계로 오도록 말이다. 그렇게 해야 이 상징계에서 쓸모가 있는 인간이 되는데, 그런데 선생님에게 매를 들지 말라고 하면, 그게 무슨 학교냐는 것이다. 그냥 놀이터이지 말이다.

하지만 교회는 어떠한가? 이 세상의 상징계를 위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만을 위하기 때문에, 오직 십자가 복음밖에 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살든지 말든지 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것은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는 강도든 세리든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니라는 말이다.

◈ 빠라바바 빠바방 !!

어떤 사람이 새롭게 아파트를 사서 기분 좋게 이사를 갔는데,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밤이면 밤마다 마구 '빠라바바 빠바방' 이라는 것이다. 앞에 난 도로가 그야말로 밤마다 오토바이 폭주족의 세계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파출소에 아무리 신고를 해도 안 되고 말이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들은 상징계를 모르는데, 그냥 여전히 상상계에만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징계에서도 신나게 밟으면서 마구 마구 질주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상상계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상징계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믿음도 없으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이 목사는 남들이 담배를 피는 것도 가지고 시비를 건다면서?" 라고 하는데, 하지만 상상계는 천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는 천국이 아닌 상상계를 말하는데, 즉 "니 마음대로 사세요" 라고 말이다. 그것이 상상계인데, 그런데 그게 죄가 된다는 것이다. 즉 "제 갈 길로 갔거늘, 그릇되어서" 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상징계에 살면 상상계가 사라지겠는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참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게 꿈에 나오는데, 그래서 꿈에서 "나도 돈을 벌면 보자. 더러워서 못살겠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참는 것인데, 그래서 상사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노래방에 가서 푼다는 것이다. 넥타이를 머리에다 두르고, "김 부장, 이리와 봐!" 라고 하면서 노래를 한 곡 땡긴다는 말이다.

◈ 실재계 - 몸으로도 안 되고,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

그 다음에는 '실재계' 라는 것이 있는데, 몸으로도 안 되고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말이다. 상상계에 새로운 법을 요구하는, 즉 법을 지키고도 "아냐, 이게 전부가 아니야. 아냐, 저게 전부가 아니야" 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알 수 없는 것, 그것을 '충동'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떻게 조절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철학자들은 이 충동을 죽음에서 나왔다고 보는데 말이다.

지금 제가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이 천국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는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벌써 세 번씩이나 하고 있는데, 전혀 이것은 천국과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철학자들이, 즉 인간들이 천국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 상상계,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 !!

그것이 바로 세 가지 방법인데, 먼저 '상상계'이고, 그 다음이 '상징계'이고, 세 번째가 '실재계' 라는 것이다. 이 실재계는 말 그대로 'REALITY' 인데, 즉 진짜로 있는 세계는 이런 상상계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상징계도 아니라는 것이다. 상징계의 대표적인 것이 국가이고, 학교, 병원, 가정 등도 모두 다 상징계라는 말이다.

어떻게 그러한 것이 있는가? 거기에는 공통적으로 법이 있는데, 즉 법이 있기 때문에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모두가 다 상징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교회는 상징계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 말고, 그러한 법도 소용이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실재계' 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이 실재계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공포, 그 공포를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 "신께서 사랑해주셔야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라고,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도 끄집어내었다는 것이다. 알랑 바디우, 지젝, 라캉 등등, 현재의 많은 철학자들이 여기에 해당되는데 말이다.

멋있지 않은가? 그러니 사람들이 '뿅'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태인 철학자인 레비나스도 그러한데, 그들의 결론은 무엇인고 하니까, 곧 '사랑' 인데, 그 사랑이 무엇을 이기는가? 법을 이긴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이 현대판 복음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러니 교회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 알랑 바디우가 설명하는 '로마서 7장' !!

그러면서도 그들은 놀랍게도 성경말씀을 계속해서 인용하는데, 알랑 바디우의 '사도바울' 이라는 책을 보면, 로마서 7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법이 있으면, 그 법은 죄를 더욱 더 죄가 되게 하기 위해서 있는데, 지금 알랑 바디우를 이야기하는데, 성령을 받은 사람이 아닌 말이다.

아무튼 법은 죄를 더욱 더 죄가 되게 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은 바로 욕망을 대상으로 불러내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보통 욕망은 숨어있는데, 그런데 법이 오게 되면 "욕망, 이리 나와. 빨리 나와" 라고 하면서 불러내는 작업을 이 법이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 7장에서 유대인들에게는 법이지만, 이방인들에게는 뭐라고 했는가? 바로 '양심'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아이디어를 이런 철학자들이 끄집어내는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양심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모두 있는데, 그래서 양심을 이용해서 구원에 이르겠다는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양심이 율법역할을 하고, 또한 율법은 양심을 대신한다는 말이다.

로마서 7장을 보면 인간이 둘로 나누어지는데, 즉 '나'는 양심대로, 즉 선한 법대로 살려고 하는데, 그런데 '내' 속에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즉 "내 속에 죄가 있어서, 그 죄가 나를 사로잡아서, 내가 양심대로 살려고 하는 것을 훼방하고, 그게 나를 이겨서, 나는 나의 욕망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구원은,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신의 사랑으로 !!

그러니 결국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한계성' 인데, 그 한계성에 신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한계성에 신을 도입하면, 신은 그냥 맨 손으로 오면 안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인간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랑을 가지고 와야한다는 것이다. 사랑을 말이다. 그러면 그 사랑이 인간의 한계성으로 인한 욕망이라는 죄를 용서하면,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지금 이것이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목사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은혜롭고 복음적이냐는 말이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가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양심은 인간의 욕망을 상대하는데, 그 욕망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이 인간을 가지고 있다고, 그들은 그렇게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실재계인데, 그 실재계에서는 인간의 욕망의 충동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몸이나 양심이나 사회적인 교양으로 어떻게 억제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욕망의 충동은 벌어진 틈 사이로 올라오니 말이다. 바로 그러한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이 활동하는 주변에 나타나서 정리되는 것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주체', 즉 '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십자가냐, 사랑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이 없어졌는가? 성령을 받지 않은 그들의 주장 가운데서 무엇이 전혀 보이지를 않는가? 힌트를 주면 세 글자인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것이다. 십자가가 그들의 이야기 가운데 그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다. 이 십자가가 그만 '사랑' 이라는 두 글자로 변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신학교의 모든 교수들이 바로 이들의 '시다바리(하수인?)' 라고 할 수 있는데, 기존의 모든 신학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보수주의자든 자유주의자이든 말이다. 바빙크나 카이퍼, 벌코프, 그리고 칼빈과 루터도 그렇고, 전부가 다 이들의 발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과연 죄에 대해서 아는가? 모르는가?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를 인간의 욕망에서 찾는데, 과연 그러한가? 인간의 욕망이 죄인가?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죄인가? 지금 무엇과 만나야 하는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인데, 그렇지 않으면 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만나지 않으면 말이다.

◈ 결국은, 불교의 '無我思想'  !!

이러한 모든 주장들을 종합해보면, 그것이 곧 불교인데, 불교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인간이 '생로병사'에서 왜 고통스러운고 하니, 불교를 공부해보면, 불교의 경우도 처음에는 양심이 없어서 고통스럽고, 물고기가 먹고 싶어서(?) 고통스럽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고, 자기 속에 죄를 느끼는 그것이 자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다.

물론 철학자들이 하는 주장도 그러한데,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죽여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를 죽여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불교의 '무아사상(無我思想)' 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없애버리는 것, 즉 주체를 없앤다는 말이다.

그래서 저는 십자가 복음을 듣고 자기를 없앤다고 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데, 복음에 그런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을 빙자한 사이비 교주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성경말씀은 뭐라고 하는가? "기뻐하고 기뻐하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빌 2: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 다시 다윗을 살펴보면 !!

다시 다윗을 보겠는데,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난 뒤에 뭐라고 했는가? 누구에게만 죄를 지었다고 했는가? 자기는 주께만 범죄했다고 하는데, 그리고 자기는 성령(성신?)으로 기뻐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니 말이다.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놀랍게도 주께서 친히 만들어내신 상한 심령만을 주께서 받으시는데, 주께서 상황적으로 만들어내신 그 상한 심령만을 말이다. 그것이 누구인가? 바로 다윗 본인인데, 즉 본인이 상한 심령이 된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상한(?) 제사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 처리를 누가 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초점은 무엇인고 하니, 다윗은 자기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가? 초점은 성령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것인데, 다윗의 개인구원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고 하는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다윗처럼 될 수 있고, 또한 사도바울처럼 될 수 있다고, 그렇게 도전장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니가 성령을 받았다고? 에이, 나는 성령을 받지 않아도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이해하고 있어" 라고, 그것이 바로 철학자들과 절의 중들이 하는 짓이라는 말이다.

◈ 철학자들 - '성령이 아닌 양심으로 성경해석을' !!

다시 말해서, 성령을 받지 않아도 성경해석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그들은 성경말씀에 도전장을 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의 마지막 악마라고 보면 되는데, 물론 그렇더라도 한국교회보다는 훨씬 더 낫는데, 왜냐하면 한국교회도 이들 아래에 있으니 말이다. 수준이 훨씬 더 처진다는 것이다.

현대 철학자들이 성경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즉 성령이 없어도 성경을 자기들의 육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육에서 영이 되는 것은 성령이 없어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무엇을 붙잡아서 그렇다는 말인가? 양심을 통해서, 모든 인간에게는 율법이 있기 때문에, 그 율법을 잘 해석하게 되면, 율법에서 벗어난 사랑의 차원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본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혜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사랑의 하나님' 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 굳이 성령을 받지 않아도, 굳이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이런 지혜만 주시게 되면, 그것을 가지고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성경말씀을 허락해주셨다는 것이다.

◈ 신종 영지주의의 등장 !!

그러니 신종 '영지주의(靈智主義)' 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영지주의가 무슨 뜻인고 하니까, 말 그대로 "영(靈)적으로 지(智)식을 파악하면 구원받을 수가 있다" 라는 것이다. 원래 이 영지주의는 기독교가 오기 이전의 그리스 로마의 분위기였는데, 기독교가 오고 나서는 교회의 권력에 의해서 모두 다 쫓겨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쫓겨났다기보다는 이미 영지주의가 교회내부의 신학으로 자리를 잡고 말았는데, 마치 말벌을 잡으려고 벌통을 건드렸다가, 오히려 벌통이 튀어서 벌들이 골고루 퍼진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영지주의가 없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을 보면, 그게 다시 꽃을 피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령이 없이도 구원될 수 있는 신학을 체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도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런 소리는 영지주의를 포함해서 사람들이 다 그러한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것을 '다른 영' 이라고 했는데, 즉 '다른 복음', 혹은 '다른 예수'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령이 아니라 십자가의 영을 제시했는데, 즉 십자가는 육으로는 알 수 없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들은 이런 사도바울의 주장이 싫다는 것이다.

◈ 개혁주의는 버릴 수가 없어 !!

만약에 사도바울의 주장처럼 육으로 알 수 없다고 하면, 자기들이 지금까지 이렇게 한 모든 것들이 구원을 받는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의미가 없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믿어져야 하는데, 그게 싫다는 것이다. 그러니 개혁주의를 버리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자가 맞는데, 사람들은 개혁주의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버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도 죄입니다. 구원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이것 때문에 더욱 더 도움이 됩니다" 라고 나오니,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표시가 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신자가 아닌데, 그런데 자기들은 성령을 받았다고 하고, 신자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헌금을 하면서도, "성령으로 헌금을 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의 소관사항 !!

그러니 결국은 무엇인고 하니, 이 모든 것이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구원이 안 되는데, 다만 예수님께서 시켜주실 때 구원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전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집어넣을 때 이미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즉 말씀을 넣어버리면 그 상태가 구원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기뻐하고 기뻐하면서, "내가 지금 꼬라지도 이래도, 주님께서 택하셔서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주셨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 앞에다 "내가 무엇을 해야한다" 라는 것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아직도 관심사를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상상계, 혹은 상징계, 혹은 실재계로, 그런 식으로 한다는 말이다. 즉 정상인이 되고 싶어서, 예수님은 비정상인인데 말이다.

◈ 주님의 사랑은, 저주의 구체화 !!

다시 말해서, 성령을 받으면 또라이가 되는데, 즉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는가?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미쳤다고 하니, "그래, 나는 미쳤다. 하지만 미쳐도 전적으로 주님의 사랑 때문에 미쳤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고후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러니 주님의 사랑은 반드시 저주가 구체화되는, 즉 저주의 구체화라는 말이다. "저는 저주를 받아서 마땅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는 것이 말이다. "나는 사랑을 받았다" 라는 것이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고 말이다. 전적으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는 것이 사랑을 받은 사람의 고백이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살아있다고 우기고 있지만, 사실은 주님만 살아계셔서 죽어가는 우리를 날마다 살려내는 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십자가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알아서 늘 주님에게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09,25 00시 10분에 마침.

                                 너무 열강을 하셔서, 목사님의 바지가 내려오는 줄 알고 긴장했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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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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