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57강 성령과 죽음

피/피 2012. 8. 29. 10:43

피57강 성령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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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11024피p183성령과죽음

피57강 성령과 죽음

[11 대구강의 19] - [피 57] - 성령과 죽음
                                                                                
                                                   11,10,2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에덴동산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

오늘은 교재 183페이지부터 보겠는데, 먼저 지난 시간에 한 것을 잠시 정리해보면, 선악과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만약에 에덴동산을 사람을 위해서 만들었다면, 거기에 사람만 살아도 되는데, 그런데 거기에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있었다는 것은, 그곳이 사람이 살기 좋아라고 만든 에버랜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동산을 만드는 것도 사람을 위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 형상 위주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 라고 할 때는, 만들어진 인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그 형상에 초점을 두고 인간을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형상' 이라는 것은, 인간만 연구하고 분석한다고 해서, 거기에서 하나님 형상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무엇이 있어야만 하겠는가?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앞에서 먼저 세팅이 되어있어야, 그래야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이다.

◈ 인간에 집착하는 신학 !!

하지만 지금까지의 신학은 무엇이었는고 하니까,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인간만 붙들고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즉 하나님의 형상을 뽑아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이나 전통적인 신학이 모두 다 그렇게 해왔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게 얼마나 심각한 오류냐는 것이다.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장마철에 비가 온다고 하면, 욥기에도 그런 내용이 있는데, 즉 "쓸데없이 왜 이렇게 비가 오지?"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자기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비가 오는 것도 자기에게 허락을 맡고 와야되는 줄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오늘 아침에도 터기에 7.2도의 강진이 나서, 그만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지진이 왜 일어나느냐는 것이다. 쓸데없이 말이다.

◈ 인간은, 오류와 오류의 인식으로 !!

하지만 그렇게 쓸데없다고 하는 것은 누구의 입장인가? 사실 이러한 오류는 이미 하나님께서 의도한 것인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백 날을 생각해도 오류와 오류의 인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냥 오류만 남발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왜 살아가는지도 전혀 모르고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오류가 있는 가운데 구원, 천국, 율법, 하나님, 예수님 등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런 오류 자체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오류는 "나는 오류가 없다" 라는 것 자체가 곧 오류인데, 그러니 자기는 오류가 없다고 여기고 구원과 천국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오류라는 것이다.

그러니 "잘못이다, 잘못이 아니다" 라고 하는 어떻게 알 수 있는고 하니, 자기를 철거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이, 즉 자기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와서, 그런 가운데서의 구원과 천국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 사랑의 하나님 ??

특히 그런 오류 가운데 잘못된 것이 무엇인고 하니, 눈에 보이는 시간과 공간의 이 현실세계를, 마치 자기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서 준비된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그 에덴동산을 마치 사람이 살기 좋아라고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도 그냥 하나님이 아닌 사랑의 하나님이 말이다.

무슨 사랑의 하나님이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을 거기에다 왜 집어넣는다는 말인가? 선악과를 처음부터 아예 없애야 사랑의 하나님이지 말이다. 독약을 집어넣는 것이 무슨 사랑이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이에게 마약을 먹이면서 "나는 사랑의 엄마다" 라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되겠는가? 그러니 처음부터 인간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말이다.

◈ 구원은,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 !!

특히 구원과 같은 문제는 정답이 이미 분명히 나와있는데, 즉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인데, 그런데 오류가 있는 인간은 구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으로, 그것을 구원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일단 싸잡아 놓고 구원을 따지기 시작하는데, 즉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니가 하나님이가?" 라고 하는데, 그래도 우리 인간은 "저는 구원을 꼭 받아야 하겠습니다. 생로병사로 인해서 사는 게 너무 힘듭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힘들게 살아도, 죽어서는 좋은 곳에 가야하지를 않겠습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주님은 "당신은 누구세요?" 라고 하는데, 즉 "니가 누구인데, 니 마음대로 생각해서, 어디서 감히 그런 건방진 이야기를 하느냐"?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주님께서 풀어줄 때, 비로소 자유를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과 자기 자신을 대조해서, 인간이 근원적으로 잘못된 것은 인간 스스로가 어찌할 수가 없는데, 즉 우리 인간은 스스로 자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그 뒤에 인간을 꼼짝도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영적세력의 구조에 의해서 붙잡혀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러한 족쇄를 주님께서 풀어줄 때, 비로소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자유는 우리가 평소에 원했던, 그런 마귀 속에서의 자유가 아닌데, 오직 예수님과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 자유에 우리를 동참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자유는 무엇인가? 오로지 예수님의 주되심을 찬양하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찬양하면서 살아가는 것인데, 즉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도 한번 살아보겠다고 구원을 시도하니, 그런 자들에게는 엉터리 구원과 마주할 수밖에 없고, 또한 그것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죽음조차도, 예수님을 섬기는 방편과 수단 !!

방금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오늘의 주제는 죽음인데, 그것을 우리가 계속해서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자기가 죽은 것이 안타까워서 예수님을 믿겠다는 것도 잘못이고,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우리에게 죽음이란 현상이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 즉 죽음조차도 예수님을 섬기는 하나의 방편과 수단으로서, 그 죽음이 우리에게 고맙게 찾아왔다는 것이다.

나사로가 평소에 예수님을 그렇게 잘 대접했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죽고 난 다음에 찾아가서, 그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 11장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요한복음 11장만의 내용이겠는가? 1장, 2장, 3장, 4장 등등, 모두 다 그렇다는 말이다. 모든 구절 구절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주되심을 드러내는, 즉 요한복음 전체가 그러한 내용으로 가득하다는 말이다.

◈ 요한복음 - '같이 죽자' !!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는가? "너희들이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것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라고 하는데, 즉 그렇게 해서는 예수님을 따라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라고 하시는데, 쉽게 말해서 "같이 죽자" 라는 것이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부자가, 거지 나사로의 본질을?

어제 낮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부자가 거지 나사로의 본질을 발견한 것은 언제였는가? 그가 살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그런데 죽고 나니 그 나사로 옆에 아브라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살아있을 때는 그냥 거지꼴이었는데, 그래서 우습게 보았는데, 하지만 죽고 나니 그 실체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부자가 그렇게 거지 나사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만큼이나, 오늘날 우리도 우리 자신의 가치와 그 신분에 대해서 새피하게, 즉 우습게 본다는 것이다. 남들에 우리를 우습게 보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 자신도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 자신이 우리의 가치와 존재의 이유를 자꾸만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위주로 살다보니 그러한데, 하지만 성령께서 찾아오게 되면, 우리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주께서 우리를 귀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에도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었고 말이다.

◈ 죽어도 사는 자 !!

지지난 주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즉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죽어도 사는 자' 라는 것이다. 주님은 바로 그런 자를 찾으신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의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그런 사람만 찾다가는 굶어죽기 딱 좋을만한데,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가 되지 않았다면 몰라도, 목사가 되었다는 그 죄로 인하여 더욱 더 주님의 일을 가리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여기서 교재 182페이지를 살펴보자.

** 성도가 영원한 죽음을 면하는 것은 하나님이 입혀준 거룩한 옷 때문이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런데 여기서 갈라디아서 3장 27절의 말씀을 거론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위에 나오는 출애굽기 28장 43절 때문인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출 28:43)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지어서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후손의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 제사장에 있어서, '죽음' 이란?

이 내용은 제사장들과 그들이 입는 옷에 관한 것인데, 제사장들이 보통 사람들과 달리 특이한 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것은 늙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일반인들이 아는 죽음이고 말이다. 제사장들이 알고 있는 죽음은, 물론 제사장도 병들고 늙으면 죽게 되는데, 하지만 그렇게 죽이시는 분이 지금 자기들과 함께 항상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숨이 끊어질 때 새삼스럽게 죽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죽음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 형편인데, 거기에서 아직도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자기가 살만한 가치가 있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일 수 있는 분이 살려내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말이다. 죽일 수 있는 분이 항상 살려내기 때문에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미 죽은 자가 살아있다는 것은, 자기가 살아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벌써 죽었어, 죽었어, 죽었어" 라는 것을 계속해서 이야기하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살게 하시고, 살게 하시고, 살게 하시는 분은 내 몫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분의 몫이다" 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제사장의 모습을 민수기에서 잘 보여주고 말이다. 

◈ 이 옷을 입어라 !!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이 너와 동행하면서 죽어야 될 너희들을 살린다" 라는 증거물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곧 '옷'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옷을 입어라" 라고 하시는데, 물론 "무엇을 해라. 하지 않으면 죽는다" 라는 것도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 중의 하나가 옷을 입는 삶이라는 말이다. 

바로 그 옷을 두고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서,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자는 산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서로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의 죽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의 어느 대목에서 자기의 죽음을 분명히 하는 것인가?

◈ 십자가에서, 우리의 죽음이 최종확정 !!

예수님이 물위를 걷는 것도 아니고, 과연 그 어느 지점에서 자기 자신의 죽음이 확정된다는 말인가? 그것이 곧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에서 우리 자신의 죽음이 최종적으로 확정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만을 증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근호, 당신은 예수님의 하신 일들이 많이 있는데, 왜 십자가밖에 모르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말하기도 좀 그러한데, 하지만 십자가가 있어야만, 우리의 오류로 인하여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최종적으로 마감처리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 대신에 무엇을 들고 나오는가? 삼위일체를 들고 나오고, 또한 어떤 교회는 예배를 잘 드리자고 하면서 절기를 들고 나오고, 그런 것으로 버티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배를 잘 드리려고 하면, 자기가 늘 죽어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어떤 사람을 부활을 강조하는데, 하지만 매일같이 자기는 죽는다는 것이 부활을 이야기하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있어야 자기가 늘 죽는다는 것이 드러나는데, 그런데 부활을 이야기하게 되면, "한 때 죽었었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한 때' 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증거할 수 없는데, 물론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 치매 시아버지를 돌보는 것이 왜 죄인가?

예를 들어서, 어느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려서 며느리가 돌본다고 했을 때, 과연 예수님의 무엇을 받아들려야 그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돌보는 것조차도 죄라는 것이 드러나겠는가? 착한 일을 하라고 하면, 그 며느리는 그만 착한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 권사님이 실제로 시아버지가 치매에 걸려서 돌보고 있지요? 제가 치과에 가서 들었는데, 그런데 권사님께서 내세우는 것이 "저는 무엇을 해도 죄인입니다" 라고 한다면,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를 돌보는 것 자체가 죄가 아니라, 시아버지를 돌보는 순간에도 권사님은 무엇을 바라본다는 말인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아서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뭐라고 하겠는가? "시아버지를 돌보는 게 무엇이 죄인가? 아하,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소리구나. 돌보면서 짜증이 난다고 성질을 부리고 하면 그것은 당연히 죄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두고 죄라고 하는 것이 아닌데, 물론 그것은 당연하고, 그 이전에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주워 모아서 죄라고 한다면 나중에 다음과 같이 되는데, 즉 "그래, 시아버지를 돌보면서 화를 낸 것은 내가 인정할게. 하지만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니고, 진심으로, 성심 성의껏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의(義)의 종으로서, 성령을 받아서 한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뭔가 또 이상한 것이 튀어나온다는 말이다.

◈ 십자가가 없으면, 자기 행동에만 !!

그러니 십자가가 없으니 무엇만 쳐다보는가? 자기 행동에 집중하게 되는데, 그러니 그것은 십자가가 아닌 자기 자신을 쳐다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예수님을 빙자한 자기 증거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증거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자기 자신에게 너무 신경을 쓰지 말고 십자가만 바라보세요" 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러면 그 양반이 뭐라고 하겠는가? "십자가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하는 말이, "그래도 시아버지를 모시고 있으면서 짜증을 낼 때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거든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십자가를 아는지는 모르겠는데, 전혀 쳐다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 묻은 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고른 자기 옷을 여전히 입고 있다는 말이다. 그게 원피스인지 투피스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왜 십자가를 이야기해야 하는가?

지금 할 것이 많이 있는데, 진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늘은 183페이지부터 해야되지만, 계속해서 그 앞부분을 살펴보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182페이지를 보자.

** 인간이라면 모두 아담이고, 아담이 아닌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곧 아담이 죄인이면 다 죄인이고, 즉 죄인이 아닌 인간은 없다는 말이다. 아담이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모든 인간은 각자 아담의 죄 값으로 죽을 아담이 된다.

** 아담이 아닌 자는 아무도 없다. 타인이 나와는 다른 운명을 지녔다고 볼 하등의 근거도 없다는 말이다. 타인과 구별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인간의 개별적 자아성이란 실은 허망한 상상의 산물이다. 아담 한 사람의 자아상이 대대로 전수되는 양상으로 진행된다.

◈ 내가, 어떻게 타인의 생각을 알 수 있는가?

이 대목을 제가 설명하고 싶은데, 우선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다는 것이다. 즉 "나는 내 생각만 하는데, 그렇게 내 생각만 하는 내가 어떻게 타인의 생각을 알 수 있는가?" 라는 말이다. 아무리 타인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 이해하는 것이 정작 타인의 생각과 맞추어보면 맞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에만 갇혀있는 것이 인간인데, 그 인간이 어떻게 예수님의 생각을 알아먹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까지 갈 필요도 없이, 자기 마누라 생각도 제대로 모르지 않느냐는 것이다. 제 아무리 연구하고 탐구해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개콘에 보면 "나는 니 생각을 잘 알아 맞추거든" 라고 하는 코너가 나오는데, 형사복을 입고 말이다. 아무리 생각을 알아 맞추어도 자기의 생각과 저쪽의 생각이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각자가 지문이 다르고 DNA가 다른데, 그런 몸에서 나온 생각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변수가 다른데 말이다. 즉 생각에 집어넣는 소스들이 다른데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결국 자기 생각에만 몰두할 수밖에는 없는데,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생각을 알아서, 예수님의 생각이 자기 생각과 같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남의 생각도 제대로 모르는데, 감히 예수님의 생각을 말이다. 그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생각을 알아서 믿는 게 아니고, 자기가 일방적으로 믿는다고 우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하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

바로 여기에 가교, 혹은 다리, 즉 '매개체' 라는 것이 있어서, 즉 성령이 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무슨 영이라고 하는가? '그리스도의 영'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오는데, 즉 "사람의 깊음을 니가 어떻게 알겠는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생각을 모르게 되어있다. 그런데 성령이 오면 알 수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 다 알 수 있는 분으로 오시기에 말이다.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니 그리스도의 영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보면, 첫째로, 우리는 우리 힘으로, 우리 생각으로, 예수님을 포함한 타인의 생각을 안다는 것인가?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성령이 오면 알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성령은 무슨 영이라고 했는가?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인데, 또 그리스도는 메시야인데, 그리고 메시야는 옛언약을 달성하신 분이라는 말이다. 이 옛언약을 두 글자로 하면 구약인데, 그러면 그리스도의 영이, 즉 성령이 하신 일의 근거는 어디서 찾아야 하겠는가? 구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 성령 → 그리스도의 영 → 메시야 → 옛언약 → 구약 !!

지금 제가 전개하는 논리를 잘 봐야 하는데, 즉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인데, 그리스도는 메시야이고, 메시야는 옛언약을 완성하신 분이고, 옛언약은 구약이다" 라고 한다면, 새언약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옛언약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옛언약을 이루니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옛언약을 이루었는가? 결코 이루지를 못했는데, 자기들이 메시야가 아닌데 무슨 수로 이루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새언약 앞에서 그 새언약을 이루는가? 우리는 이루지 못한다는 정도가 아니고, "이루지 못 했었었어" 라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어떤 말씀도 지키지 못해" 라는 것에 대한 확정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피도 믿고, 나도 실천에 옮기고" 라고 해서는 구원이 안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십자가의 피 자체가 우리에게는 그 어떤 실천력도 없음을 확정하는 십자가이기 때문에 말이다.

◈ 성령께서, 그들과 동행을 함으로 !!

구약, 즉 옛언약 속에서 인간들이 그런 실천력을 시도했는데, 그러면 여기서 성령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그들이 옛언약도 지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같이 동행을 했는데, 그렇다면 옛언약 가운데서 지킬 수 없는 언약을 그들 속에 적용시키는 방식이 옛언약 속에 나와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즉 "너희들은 안 되지만, 나는 되게 한다" 라는 방식이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 이미 녹아져 있고, 남겨져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그것이 곧 '창조' 라는 것인데, 즉 창조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6일 째에 인간을 만들 때만 간섭했다는 것이 아니라, 1일, 2일, 3일, 4일, 5일, 6일 째도, 즉 해와 달과 별을 만들고, 그렇게 모든 만물을 다 만들 때도 하나님의 형상이 관여했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이 해와 달과 별을 비롯한 만물을 다스리게 되니 말이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하나님의 형상이 이미 개입을 !!

그렇게 첫째 날, 둘째 날 등등, 그렇게 해서 만든 만물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스리라고 하신 것은, 인간에게 그런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첫째 날, 둘째 날을 여섯째 날의 그 모든 날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이미 개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주어야, 창세기 1장을 가지고도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낼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다는 말이다. 성경을 해석할 때 말이다.

◈ '창조의 능력'이 발휘됨으로서 !!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어서 그 인간이 만물을 다스린다고 한다면, 그것이 곧 '창조' 라는 것이다. 이것을 숫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1이 되고, 또한 만들어진 피조세계는 7일만이 만들었으니 7이 되는데, 그래서 1이 7에게 관여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인간에게, 인간이 믿어지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것이 믿어지도록 하는 창조의 능력이 발휘되었다고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1에서 7로 말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7이 나올 때는, 항상 1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7에게 자기의 1의 속성을 보편화를, 즉 일반화를 시켰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퍼지도록 말이다.

그 예를 민수기에서 찾아보겠는데, 23장 1절을 보겠습니다.

(민 23:1)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일곱 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준비하소서 하매

◈ '7', '7', '7' !!

여기에 일곱 단, 일곱 수송아지, 일곱 수양, 그렇게 해서 '7,7,7'이 나오는데, 발람이 이러한 이야기를 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시킨 것인데,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지금 '발락' 이라는 피조세계에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와 원칙을 담으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처음에 제가 장마철에 비가 올 때 사람들은 "쓸데없는 비가 왜 이렇게 오는가?" 라고 생각한다고 했는데, 그러니 그 장마비 속에 모든 창조의 원리원칙이 담겨있다는 것을 인간들은 찾아내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자기 위주이기 때문에 말이다. 즉 농사도 짓지를 않는 황무지에 비가 왜 오느냐는 것이다. 쓸데없이 말이다. 그리고 터기에는 왜 지진이 자꾸 일어나느냐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 이유를 모르는데, 즉 만들어진 것만 창조가 아니라, 또한 만들어진 것을 부수는 것도 역시 창조의 원리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거부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기 입장만을 고수하기 때문에 말이다. 참, 오늘 조 권사님이 보이지 않는데, 어디에 갔습니까?

아무튼 우리 인간은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그 자체가 오류이기 때문에, 그런 자기 위주의 오류성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와 원칙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 형상의 안목으로 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성령이, 즉 그리스도의 영이 박혀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 계속해서 이스라엘에게 그 흔적을 !!

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가 노력을 한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닌데, 그렇다면 무엇인가? 지속적인 하나님의 창조사역으로 인해서, 즉 1이 7이 되는 과정을 쫓아서 특별한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그 흔적을 계속해서 남겨놓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7은 창조의 완전함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7이란 숫자를 앞세워서 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일들은, 인간이 전혀 손을 댈 필요도 없이 그 자체로 온전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온전하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데 대해서 전혀 하자가 없이 온전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하나님의 제단에 말씀이 임하니 발람이 하는 말이, "발락 당신이 아무리 나에게 뇌물을 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하지만, '이스라엘을 저주할까? 말까?' 라는 결정권은 나에게 없고, 나는 여호와께서 시키는 대로만 할 따름입니다" 라고 하면서, 나중에 이 제단에서 계시를 받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사 어떤 민족도 자기 백성을 공격할 수 없도록, 그렇게 축복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창조의 원리를 따라서 이미 확정된 사실이라는 말이다. 즉 그 자체가 이미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수기 23장 20절 이하에 보면.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라고, 그렇게 단정을 지어버린다는 것이다.

(민 23:20)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민 23:21)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 '제사제도'로서 창조의 원리를 !!

이것이 민수기 29장에 보면, 그러한 하나님의 취지가 이스라엘 내부에 장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데, 즉 '제사제도'로서 말이다. 1절과 2절을 보자.

(민 29:1) 칠월에 이르러는 그 달 초일일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나팔을 불 날이니라
(민 29:2) 너희는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와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일곱을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로 드릴 것이며

여기 2절에 보면,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와.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일곱이 등장하는데, 그러니 숫자가 '1,1,7'이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13절을 보자.

(민 29:13) 너희 번제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리되 수송아지 열셋과 수양 둘과 일 년 된 수양 열넷을 다 흠 없는 것으로 드릴 것이며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이제 제물에 뭔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즉 드리는 그 숫자가 바뀐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수송아지 열 셋과, 수양 둘과, 일 년 된 수양 열 넷을 드렸는데, 그런데 둘째 날부터는 수송아지 열 둘과, 수양 둘과,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열 넷을 드리라고 한다는 것이다. 수송아지가 하나 빠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셋째 날엔, 수송아지 열 하나와, 수양 둘과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열 넷을 드리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일곱 째 날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둘과,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열 넷을 드리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수송아지라는 것은 무엇인가? 월삭은 이스라엘의 전체 죄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절기인데, 그런데 그 날에는 숫자가 14에서 7이 될 때까지, 1이라는 숫자로 조정을 한다는 것이다. 줄여나가면서 말이다. 즉 7로서 7에 모인다는 말이다.

(민 29:17) 둘째 날에는 수송아지 열둘과 수양 둘과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열넷을 드릴 것이며
(민 29:18) 그 소제와 전제는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의 수효를 따라서 규례대로 할 것이며
(민 29:19)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
(민 29:20) 셋째 날에는 수송아지 열하나와 수양 둘과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열넷을 드릴 것이며 …
(민 29:32) 일곱째 날에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둘과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열넷을 드릴 것이며

◈ 제물의 인격화 !!

그렇게 될 때, 숫자로 표현되는 것이 곧 제물인데, 수송아지와 수양과 같은 제물이란 말이다. 그리고 그 뒤에 소제도 붙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제물들이 인격화가 되면 그것이 곧 누구인가? 하나님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러니 이미 예수님이 구약에서 손을 다 봐났다는 것이다.

어떻게 손을 봤다는 것인가? "너희들이 망쳐버린 창조질서를 회복했다" 라는 것인데, 누구 중심으로 말인가? 그것은 회복이 아닌데, 회복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렇게 피조물을 회복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피조물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그런 용도로서 이 세상에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 '구원을 받았다' 라는 의미는?

그러니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은 무엇인가? 피조물이 원래 해야만 될 임무를 다하는 것인데,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인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마치 스데반 집사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돌에 맞아서 죽더라도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게 되면, 그것이 곧 피조물의 원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즉 예수님과 하나의 몸이 되는 참된 이스라엘 백성이 된다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기능을 우리의 몸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전체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 다시, '내가 당신을 어떻게 아는가?'

다시 정리를 해보면, 처음 질문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당신을 어떻게 아는가?" 라는 것인데, 인간은 자기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데 말이다. 집사님도 집사님의 생각밖에 모르고, 저도 저의 생각밖에 모르는데,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양쪽에 모두 다 성령이 와야만 하는데,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이 다 "예수님은 주님이고, 우리는 무조건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할 때, 그렇게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면서, 그때 비로소 교회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교회는 '1이 7로' 되는 것이란 말이다. 

◈ 교회는 '1이 7로' !!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보면 교회가 몇 개인가? 7교회인데, 그리고 요한계시록 1장에 일곱 촛대가 나오는데, 사실은 그것이 몇 개인가? 위의 가지는 일곱 개이지만, 그 밑의 둥치는 하나라는 말이다. 즉 하나에서 일곱 개로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곱 개의 촛대를 꼽는 게 아니고, 하나의 기둥에 일곱 개의 가지가 나와있는 촛대가, 그게 영원한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등잔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인데, 그러니 교회는 하나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 아무리 교회의 숫자가 많더라도, 그것이 물론 표현상 일곱 개로 되어있지만, 그 일곱 개가 하나로 모아지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곱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인간들이 노회로 모이고 단합체육대회를 한다고 되는 것이 전혀 아니고, 그것은 오직 성령이 오게 되면, 이 세상에 교회가 천 개가 되던 만 개가 되던 간에, 한 몸인 그리스도의 교회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오잉, 교회중심 ??

그렇게 하나밖에 없는 교회로서, 그 교회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참된 교회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교회를 어떻게 역사적으로 만들 수가 있겠는가? 없는데, 그런데 개혁주의에서는 그런 교회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하는지 모르는데, 즉 "개혁주의 신학에 동참하면 하나의 교회다" 라고 구라를 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가짜 교회인데, 머리가 되시는 분이 분명히 있는데, 그런데 왜 자기들이 7이면서 1의 역할을 하려고 하느냐는 말이다. 1이 7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역순은 안 된다는 것이다. 1이 계속해서 7로 주어지는 것이지 말이다.

만약에 1에서 7로 가는 흐름이 막혔으면 몰라도, 그러면 7이 1이 되려는 것이 이해가 되는데, 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1이 계속해서 7이 되게 하는데, 7이 자기들끼리 스스로 모여서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교회가 됩시다" 라고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무슨 '교회중심'이 다 있느냐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이단인데, 예수님 중심,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 그들은 왜 제사를 드려도 죽었는가?

그러한 적용과정에 있어서, 민수기의 경우에 이렇게 주님께서 제사를 통해서 '1에서 7로' 해주셨는데, 하지만 그들은 제사를 드려도 죽었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 쪽에서 문제가 있는가? 그것이 아닌데, 그들은 그 제사를 드리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소와 양을 다 바치고 하면서도, 마지막 계시가 올 때까지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오류가 어느 정도인지 말이다.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데, 그들은 무엇을 모르는가? 자기들이 죄 안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그래서 인간이 아무리 율법을 지켜도 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 죄에서 벗어나신 분이 인간을 죄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주어야 비로소 죄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십자가 사건과 부활인데, 즉 예수님은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 그냥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닌데, 죄를 품은 죽음, 즉 저주에서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은 부활이 아닌 소생인데, 즉 자기 목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붙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게 아니라, 죄의 무게에서 벗어난 것인데,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떤 죄를 지어도 성령을 받은 사람은 구원을 받고 죄가 없는 자가, 즉 성도가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 혼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즉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서 다 알아서 처리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가 알아서 '헥헥' 거리면서 처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그 어떤 죄고 죄가 아니라, 의(義)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약에서는 어린아이라도 구약의 어떤 자보다 크다" 라고 하시는데, 구약에서 제일 큰 자가 세례요한데, 즉 구약은 세례요한까지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들 중에 세레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는 것이다. 즉 세례요한이 훌륭해서 그런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련성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예수님 당시에 아무리 아브라함이 어떻고 해도, 예수님을 가장 근접해서 보여주는 자가 세례요한이기 때문에 가장 큰 자인데, 그런데 천국에서 어떻다는 말인가? 천국에서는 어린아이가 세례요한보다 더 크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린아이가 똑똑하다는 게 아니라, 천국은 그리스도가 완료되고 완성된 분위기 속에, 즉 세례요한의 때보다 더 완벽하고 흠이 없는 분위기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다루고 관리하게 때문에 어린아이가 더 크다고 한다는 것이다.

(마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그러면 정리가 되는데, 즉 성경에서 말하는 선악과나 죽음과 같은 모든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시켜볼 때, 비로소 그 해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진정한 죽음은 저주를 받아서 죽는 죽음인데, 그리고 선악과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하기 위해서, 그래서 선악과가 심어져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담과 하와는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 있었는데, 그래서 뱀은 그 점을 알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따먹었고, 그때부터 인간은 예수님이 죽는 죽음에, 즉 십자가의 죽음에, 그 저주받는 죽음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본인이 알던 모르던 간에 말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죄 안에서 죽었다" 라고 하는 게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183페이지를 살펴보자.

** 율법이 없는 곳에는 죄도 없다. 이 말은 인간이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를 알지 못하게 되어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 율법이 없는 곳에는 죄도 없다 !!

여기에 보면 "율법이 없는 곳에는 죄도 없다" 라고 하는데, 이 부분은 설명을 제법 많이 해야되는데 말이다. 사람은 건드려주지 않으면 그 속에 있는 죄가 나오지 않는데, 그러니 건드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무엇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라는 명령이 떨어져야만, "나는 하기 싫어" 라고 하는 본성이 그때 드러난다는 것이다. 자기의 존재감, 즉 "나는 여기에 존재한다" 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 속에는 반(反)율법적이고 반(反)복음적인 것이 가득한데, 그런데 그것을 누가 건드려주지 않으면, 자기가 얼마나 말씀과 복음에 대해서 거부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외부에서 말씀과 복음을 주게 되면, 거기에서 그만 발작을 일으키게 된다는 말이다. 평소에 자기가 생각한 그 '나'가 아니고, 진짜 '나'의 모습이 나오는데, 즉 하나님의 선한 뜻을 거역하고 싶은 충동과 같은 것을 느낀다는 말이다.

나쁜 짓도 '하라' 라고 해서 하면 재미가 없는데, 사람이 살아가는 최고의 흥미는 무엇인고 하니까, "몰래 먹는 사과가 맛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죄를 용감히 짓는데서 오는 짜릿함보다 더 확실하게 자기가 살아있다는 증거물이 없는데, 그러니 인간의 최고의 쾌감은, 자기가 하나님의 모든 선한 것을 다 거역할 수 있다는 자유가 있음을 만끽하게 될 때, 비로소 자기가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독자성' 이라고 하는데, 즉 "나는 내 혼자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는 홀로 있다는 것이, 자기는 혼자 존재한다는 느낌이 왔을 때, "나는 나에게 신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확인해주기만 한다면,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최고의 재미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재미를 느끼는가? "그것이 가장 나답다" 라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남들이 보라는 듯이 살아가는데, 물론 남들이 시키는 데로 남들을 따라가다가 그만 헉헉거리는 것 같지만 말이다. 하지만 인간의 진짜 모습은 그렇게 남들이 시키는 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있는 그 자체로 행복을 느끼게 되는데, 즉 타인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있다는 것으로서 최고의 기쁨을 누린다는 말이다. 더 쉽게 말해서, "나는 악마다" 라고 느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다.

◈ 나는 악마다 !!

어제 KBS에서 저녁 8시에 '대장경 천년특집 다르마'를 방영했는데, 이 '다르마'는 진리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인데 말이다. 즉 "인간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을 특집으로 다루었다는 것이다. 먼저 중들이 동안거(冬安居)를 하는 것이 나오고, 그리고 독일의 수도원과 수도사들을 소개했는데, 즉 인간이 행복을 찾아가는 그 과정을 다루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가장 우리 인간이 행복할 때는 언제인가? 자기가 악마라고 느낄 때가 인간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다. 물론 TV에서는 그런 소리를 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악마는 유일하게 신으로 군림하면서 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대항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뭐 재미있는 것이 없나?" 라고 하는데, 악마가 악마답게 살면, 그것이 가장 자기의 본성이 맞으니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즉 악마답게 사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려고 하니, 그게 짜증이 나고 재미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의 인생이 아니고, 타인이 만들어준 인생을 살려고 하니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악마답게 행동하면 가장 자기답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율법을 두 글자로 압축하면 무엇인가? 그것이 곧 '사랑' 인데, 그러니 아무리 십일조를 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러니 하나님이 내민 사랑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인데, 즉 자기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을 쫓아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결국 무엇을 노린 것인가? 악마가 살아가는 그 진면목을, 즉 "도저히 너의 힘으로는 구원이 안 된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는다고 하니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주여, 그리하시면 안 됩니다" 라고 했는데,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이놈의 악마야!"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나는 가수다" 라고 하면 안 되고, "나는 악마다" 라고 해야한다는 말이다.

◈ 악마는, 하나님의 창조를 취소한 세계에서 !!

악마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것인데, 즉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저지하는, 즉 "메시야의 길을 가지 마세요" 라고 하면서 막아선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창조세계에 개입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인데, 그러니 악마는 하나님의 창조를 취소한 세계에 살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즉 악마는 창조를 없애버리고 이미 있는 것으로, 즉 죄를 지은 것으로 영원토록 밀어 부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저지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생명나무가 같이 있는데, 그래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으니까 그만 그 자리에서 생명나무를 폐해버리는데, 즉 생명나무의 과실을 더 이상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악의 영원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즉 악이 악으로 버티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물론 저주를 받은 악은 지옥에서 영원토록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악이 악으로서 살만한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음을 온 우주에 퍼트리면서, 그렇게 악마가 설치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악의 영원성을 말이다.

◈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 먼저 !!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교회에서 설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그런 이단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영원히 그렇게 하도록 두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래서 심판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 먼저 떨어지는데, 그게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그래서 사그리 다 심판을 하신다는 것이다.

(벧전 4: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벧전 4: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요엘서를 마치고 그 다음부터는 아모스서를 설교할 예정인데, 이 아모스서는 초장부터 그러하다는 것이다. 유다뿐만이 아니라, 주변 나라들을 모두 다 싹쓸이를 한다는 말이다. 하여튼 악이 악으로서도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을, 그런 큰소리를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출발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인데, 수제자인 베드로부터 그것이 가득하다는 말이다. 

◈ 뱀에 둘러 쌓인 십자가 !!

다음과 같이 보면 되는데, 즉 이렇게 십자가 그림이 있다고 하면, 여기 십자가까지 뱀이 기어올라온다는 것이다. 여기 12뱀도 있는데, 십자가로 계속해서 기어올라온다는 것이다. 끝까지, 베드로를 필두로 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을 빼놓고는 다 뱀인데, 물론 가룟 유다도 앞장을 서고,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가고 말이다.

그러니 이런 인간들을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 이외는 방법이 없는데, 즉 성령을 받지 않으면 사도라고 해도 구원과는 요원하다는 것이다. 육으로 난 육인데, 그러니 안 된다는 말이다. 백 날을 해봐야 악마의 하수인에 지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받게 되면 무엇이라고 여기는가? "아하, 나는 악마였구나. 내가 여기에 있는 것 자체를 예수님보다 더 좋아했구나.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 더 귀하고, 그게 가장 급하고 중요한 문제이고, 확실한 문제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 데카르트 - '내가 곧 진리다' !!

그러니 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것보다 더 생생한 현실은 없는데, 예수님이 있다는 것은 성경에 그런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확인할 길이 없고, 그런 성경책을 보고 있는 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철학이란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모든 것은 의심할 수 있어도, 그렇게 의심한다는 나 자신은 의심할 수가 없으니, 그런 내가 곧 진리이다" 라는 것이다. 즉 "내가 곧 진리이고, 내가 곧 생명이고, 내가 곧 길이다" 라는 것이다. 물론 길은 좀 그러한데, 자기가 가고 말고 할 것도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자기 자신이 진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근원적인 것을 까발려주는 것이 곧 성령의 역사인데, 성령의 폭발이 아니고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아무리 교회에 다녀도 자기만 알고, 그렇게 자기 자신만을 믿으면서,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데, 그래서 입만 떼면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 나를 무시하지마 ♬

재미있는 것은 제가 녹매교회 사이트에 글을 하나 올려놓았는데, '이만희의 이단성'에 대래서 말이다. 그런데 '홍홍' 이란 분이 댓글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만희 교주의 추종자가 있다고 이근호 목사는 지적을 하는데, 그런데 왜 정작 자기 추종자는 발길로 찾지 않는가?" 라고 말이다. 아마도 관리자는 관심이 없어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지금 그 양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고 싶은데, 그 관심사가 십자가가 되어야하는데, 그런데 십자가가 아니라 "왜 누구는 챙기고, 누구는 내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관심사가 "나를 무시하지 마라" 라는 것인데, 그것을 아예 가사로 해서 찬송가를 만들면 좋지 싶은데 말이다. 

십자가 앞에서 이런 발상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방금도 이야기했지만, 십자가를 뱀이 꾸물꾸물 올라가는 이미지를 연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자신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우리 자신 속에 십자가가 있으면 뱀이 계속해서 올라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아는데, "아하, 이것이 뱀이구나" 라는 것을 말이다.

◈ 농담, 조롱, 오락 !!

하지만 아직 미련이 남아서 지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믿는 것을 집요하게 무엇으로 바꾸게 하는가? 복음을 오락으로 바꾸게 한다는 말이다. 재미있는 오락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재미가 있는가? 자기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 가장 재미가 있는데, 그때가 가장 흥미롭다는 것이다.

복음은 아무리 열심히 전해도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얼마나 섭섭한지 모르는데, 그리고 보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없는 말까지 만들어 가면서 죽으라고 녹취를 해도 누가 고맙다는 소리도 하지 않고 말이다. 특히 십자가 마을이 배너에 있는 교회들을 보면, 그 가운데 은진교회의 전용렬 목사님의 경우에, 얼마나 짜증이 나겠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글을 올려도 봐주지도 않고 말이다.

그런데 무엇을 하나 만들어서 올려놓으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그러면 기분이 째지게 좋은데, 그러니 그게 오락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렇게 힘든 세상이 구원의 소식은 오락밖에 더 있느냐는 말이다. 그것도 시시한 바둑이나 고스톱이 아닌, 오락 중의 최고 오락은 복음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인데, 그렇지 않은가요? 다들 경험이 다 있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하여튼 우리는 우리 내부에 이런 뱀이 계속해서 집요하게 달려드는데, 농담, 조롱, 오락 등등 말이다. 댓글을 쓰면 농담이고, 조롱이고, 또한 댓글을 쓰면 조롱이라는 것이다. 즉 다같이 이바구(이야기?)를 하면서 놀자는 것이다. 과연 어느 교회에 가서 누가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지, 그러한 시합을 하면서 놀자는 말이다.

이제 교재 184페이지를 살펴보자.

** 그래서 '인간 - 죄 - 율법'이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서 죽음이라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 관계성 어디에도 인간이 단독으로 주체가 되는 법은 없다. 때로는 죄가 주체가 되기도 한다.

(롬 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율법, 죄, 인간 !!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에 죽음을, 그것도 그냥 죽음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을 형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피조물들을 재료로서 거기에 모두 동원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율법, 죄, 인간' 인데, 그렇게 다 동원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마귀도 집어넣고 말이다.

그래서 "이 관계성 어디에도 인간이 단독으로 주체가 되는 법은 없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인간을 악마와 같은 존재로 만드는 환경이 조성될 때까지, 거기에 죄를 짓는 주체로서, 그래서 "때로는 죄가 주체가 되기도 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 17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개인적 견해라고 한다면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할 리가 없는데, 사람들을 꼬드기고 설득해서 자기 교회 교인으로 만들려고 하면, 이렇게 구태여 어렵게 이야기해서, 자기가 유식한 티를 내려고 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것이지, 자기가 얼마나 똑똑한지, 그것을 과시하려고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 !!

이 말씀을 다시 적어보겠는데, 사도바울이 "이것을 행하는 자가" 라고 한 다음에 무엇이라고 하는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행하는 자(者)' 라고 하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인물이 나와야 하는데, '자(者)'이니 말이다. 그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그렇다면 이런 상식을 어디에서 배웠다는 말인가?

우리는 인간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행동한다고 하는데, 그러니 행동하는 자(者)는 인간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 세상에서 통하는 진리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인간이 아닌 '죄'가 거기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즉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죄도 현재도 움직이고, 또한 죄는 인간이 행한 그 이상으로 확실하고 생생하게 행동화를 시키는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 로이드 존스 - '죄의 인격성' !!

이것을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 이란 책에서 '죄의 인격성' 이라고 했는데, 로마서 5장에 보면 그게 나오는데 말이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거기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죄를 인간이 행하는 것으로서, 즉 '인간이 잘못 행하면 죄고, 그렇지 않으면 의가 된다' 라고, 그렇게 죄와 의를, 선과 악을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처리했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죄는 인간 말고 죄를 짓는 다른 인격자가 따로 존재하는데, 그게 곧 악마다" 라고 했는데, 물론 맞는 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니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인간이 성령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것이다. 즉 "너희가 아니라" 라고, 즉 "손을 떼라" 라는 말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아서 내가 했다" 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데,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령을 받아서 내가 감사헌금을 했다" 라고 말이다.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 성령을 받지 않으면, '우리, 이렇게 합시다' !!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어도 알아듣지를 못하는데, 그 이유는 단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성령을 받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그 마지막은 자기 행동에 꽂히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의 출발점과 마지막 귀환점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자신의 생각과 결심과 행동에 집결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에게서 나온 생각이 자기에게 꽂히도록 되어있으니, 그 방향이 다른 곳으로 흐를 수가 없는데, 그래서 "이렇게 합시다" 라고, 매일같이 '합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숨을 쉬고 있는 것도 우리의 힘을 아니라, 주께서 친히 기르신다고 했는데, 그렇게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믿지 않느냐는 것이다. 들을 백합을, 그리고 공중의 참새를 누가 키우고 기르는가? 주께서 친히 가르고 키우시는데, 들풀도 주께서 친히 입히시고 말이다.

그런데 "친히 입히신다" 라는 것을 따로 떼 내어서 우리 인간세상에서 통하는 것으로, 그것을 부모가 자식에게 입히는 것으로 한번 해석을 해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해석이 되겠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왜 해석이 안 되는가? 인간자체에 오류가 있기 때문에 말이다.

◈ 반드시 '자기 기쁨'을 챙기는 인간 !!

우리 인간에게 어떤 오류가 있는가? 무엇을 설명하고 해석할 때는 반드시 자기 기쁨을 빼놓고 하는 법이 없는데, 반드시 자기 기쁨을 챙기면서 한다는 것이다. 그 자기 기쁨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그게 곧 자기 '독자성' 인데, 즉 "나는 신이다" 라는 것이다. 그게 "나는 악마다" 라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했는데, 즉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했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해석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살아가면 되는데, 그게 얼마나 편안하냐는 것이다. 강원도에서 감자나 캐면서 그렇게 살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서, "이것은 성령에 의한 의로운 행동이고, 이것은 전에 죄를 짓던 행동이고" 라고 하면서, 자기가 그것을 왜 구분을 하느냐는 것이다. 전혀 그런 주제도 되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인간은 계속해서 "이것은 말씀대로 지킨 것이고, 또 이것은 지키지 못한 것이다" 라고, 그렇게 판정을 하는데, 그래서 "당신이 그렇게 자신이 있으면, 당신 말대로 성령대로 한 것이 있으면 내놔봐" 라고 하면, 그만 꽁무니를 슬쩍 빼고 만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때로는 율법이 주체가 되기도 한다.

(롬 7: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 때로는 인간이 주체가 되기도 한다.

(롬 7: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 율법은 선하다 !!

여기 16절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면,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한다" 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가? 인간이란 존재는 자기 잘잘못을 따지면서 살아가는 버릇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고, 그러면 율법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렇게 "율법은 선하다" 라는 것을 통해서 "인간은 선한 놈이 아니고 악하다" 라는 것을, 즉 하나님께서는 율법은 선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마저도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아, 니 속에 있는 것을 내놔. 껍데기만 가지고 얼른거리리 말고, 어서 내놔. 니 속에 니 말고 또 다른 니가 들어있잖아? 그러니 니 정체를 빨리 드러내"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인간 속에 들어있는 놈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이 곧 악마인데, 그렇게 악마가 드러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옳지, 진작에 그렇게 하지. 그렇게 악마를 들추어낸 율법의 기능이 얼마나 선한지 이제 알겠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그 얼마나 옳고 정당하냐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기어이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주님의 자기 잘남을 드러내고 증거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를 기어이 죄인으로 만들어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주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손을 높이 들고 박수를 쳐야한다는 것이다. "옳습니다. 주님이 하신 모든 일은 다 정당하고 옳습니다. 짝짝짝!" 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하는가? 그저 자기의 정체가 발각되는 것이 싫어서, 그래서 지난주일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즉 "사랑채에서는 주님을 만나고, 안채에서는 다른 사람을 만난다" 라고 말이다. 아예 발악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의 즐거움은 자기 것이 있다는 것 자체인데, 즉 자기 것을 놓지 않겠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실컷 죄를 짓고 들키지 않는 것인데, 바로 그런 재미로 산다는 것이다.

◈ 산 속까지라도 들어가서 !!

예를 들어서, 도박을 할 때 처음에는 장난 삼아서 10원으로 시작해서 그 다음에는 100원으로 하는데, 그러다가 산 속에 가서 텐트를 쳐놓고 하고 말이다. 그러면 산 속에 들어가서 100원을 놓고 하는가? 과거 100원으로 할 때 그렇게 재미있던 것은 도대체 어디로 갔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자아는 날마다 달라지는데, 왜냐하면 자기 안에 있는 악마가 날마다 다른 인간을 만들어내니 말이다. 이전에 100원을 놓고 치던 고스톱은, 산 속에서 할 때의 그 기쁨과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 속에서 어떤 주부는 32억을 날려서 그만 자살을 했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것이 뉴스에도 나왔는데, 간도 크지 말이다. 그렇게 32억을 날린 사람에게는 천 만원, 이천 만원은 그야말로 껌 값에 지나지 않는데, 그런 사람은 일이 억은 돈으로 여기지 않는데, 그렇게 간 덩어리를 누가 키웠는가? 본인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속에 들어있는 악마가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 도박도, 구제도, 헌금도 악마의 일 !!

그런데 그것만 악마의 일이 아니고, 구제나 헌금도 악마의 일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김장훈이라는 가수는 구제를 했다고 하면 억대단위인데, 구제도 자꾸만 하다가보면 도박처럼 중독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은 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말이다(ㅋㅋ).

그게 나중에는 그만 미쳐서 김혜자처럼 아프리카로 가는데, 거기에서 자기 몸이 상하는 줄로 모르고 봉사를 한다는 것이다. 오드리 헵번도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다가 진짜 봉사가 되는 수가 있는데, 실제로 자기 눈도 떼 주고 간도 떼 주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재미가 있으니 말이다.

헌금의 경우에도, 처음에 천 원씩, 이천 원씩 할 때가 아까운 것이지, 금액이 점점 늘어가서 나중에 백 만원 단위가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때는 만원을 감사헌금으로 도저히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푼돈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헌금도 하던 행색으로 해봐야 헌금이 된다는 것이다.

헌금을 적게 한다고 남들이 무시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헌금을 적게 하면 자기에게 기쁨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즉 "나 정도가 되면 그래서 백 만원은 해야하는데, 만원도 제대로 못하고, 이게 뭐꼬?"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만이고 자만인데, 그래서 우리교회는 그런 일이 일어 날까봐 아예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ㅋㅋ).

* 질문 - 목사님, 제 친구가 헌금을 하는데, 자기 교회에서 3등을 했다고 삐쳐있던데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점을 목사가 노리는데, 즉 경쟁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속에 악마가 들어있는 그 악마의 종들이 교인들을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서, 즉 악마와 더불어 살라고, 그래서 악마의 일을 성령의 일로 치장해서 이끌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교회의 교인들은 이미 돈을 몽땅 다 털리고 오는데, 이용을 당할 대로 다 당하고, 진도 다 빼고, 그렇게 해서 온다는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계속 교재를 보자.

** 하지만 어쨌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죄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율법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이미 죄 아래로 팔렸다. 그것은 육신에 속했다는 운명으로서 그러하다. 

(롬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 죄 아래 팔렸도다 !!

여기 14절에 보면 "죄 아래 팔렸다" 라고 하는데, 이렇게 '팔렸다' 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이미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예수님에게 팔렸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과거와 똑같이 "죄 아래 팔렸다" 라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종의 노예인데, 그러한 노예가 되어야 출애굽이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이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출애굽은 강제로 되는 것인데, 이와 같이 우리는 매사에 주님의 강제가 없다고 하면, 무엇이라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넓은 길과 편안한 길을 찾는데, 아니 고생하면서 예수님을 믿기를 원하는 자가 누가 있느냐는 말이다.

◈ 주여, 제발 거지가 되게 해주소 ??

어제 낮에 뭐라고 설교를 했는가? "주여, 제발 거지가 되게 해주소. 그래서 나사로처럼 천국에 가게 해주소서" 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건 한 마디로 미친 인간인데, 우리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천국에 가기는 가더라도 일단 이 땅에서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우리의 속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은 항상 옳은데, 그렇게 옳은 말씀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절대 우리는 옳은 것에 대해서 항상 외면할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바로 그런 상태로 주님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매일같이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죄 있는 육신 때문에 죄 아래에 팔렸고, 죽음의 힘에 끌려 다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실정이다. 하지만 이렇게 함으로서 성도는 자신의 목숨이 곧 생명이라는 생각을 버리게 된다.

◈ '나' 자신이 아닌, 주님에게 얽매이는 인생 !!

이것이 바로 축복인데, 우리 인간은 자기가 매일같이 힘들여서 살아가는 이유가 자기 목숨을 자기가 유지하려는데 있는데, 그런데 친히 기르시고 친히 입히시는 주님께서, 어디 그렇게 기르시고 입하기만 하겠는가? 그러면 어떻게 하시는가?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궁이에 들풀도 집어넣고, 참새도 팔리게 하시는데, 그것은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는 죽어도 죽지 않는 자로, 아주 특이한 존재로서 이 지상에서 구분해내는 작업을 지금도 쉬지 않고 완벽하게 해내신다는 것이다. 즉 "제발이지 너에게 매이지 말고, 나에게 매이는 인생임을 알라" 라는 것을 모든 일들을 통해서 드러내신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선악 지식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 생명관이기에 가짜가 분명하지만, 소위 '살아있다'는 것을 기점으로 해서 영생과 줄을 대어보려고 시도한다. 지금 붙어있는 목숨을 더 오래 지탱하기 위해서 '가상 생명'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항상 자신의 목숨과 정성을 담보로 제공해서 더 크고 끈질긴 생명을 얻고자 한다. 자꾸만 죽음을 지연시키면 생명이 되는 줄로 안다. 하지만 이미 인간의 생명이란 '질적으로' 폐기처분이 되어야 할 못쓰는 생명이다.

◈ 인간의 생명은, 질적으로 폐기처분이 되어야 !!
 
여기 마지막에 보면 "인간의 생명이란 질적으로 폐기처분이 되어야 할 못쓰는 생명이다" 라고 하는데, 여기에 '질적으로' 라는 표현이 있는데 무슨 의미인가? 우리 인간은 양적으로 연약한 정도가 아니라, 이미 예수님에게 덤벼드는, 그런 질(質)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양적으로 몸이 아프고 허리가 아파서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아프고 아파서 죽어가면서도 질적으로 예수님에게 대해서 외면하는, 예수님을 믿는 것을 싫어하는, 예수님을 믿는 게 재미가 없어하는, 즉 "나는 나 혼자 있는 것이 제일 재미있어" 라고 하는 본성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죄임을 외부로 드러내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오늘도 말씀으로 모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신 축복이고, 사랑이고, 은혜임을 너무나 잘 놓칩니다. 그러니 저희들이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주께서 관리하고 있음을 항상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10,27일 오후 8시에 마침.

                                              역시 악마는 똑똑해, '박원순 후보, 서울시장 당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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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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