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58강 동반

피/피 2012. 8. 29. 10:46

피58강 동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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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11107피p178동반

피58강 동반

[11 대구강의 20] - [피 58] - 동반
                                                                                
                                                   11,11,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자 !!

오늘은 교재 178페이지를 살펴보겠습니다.

** 성도를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자'로 규정함으로서, 성경의 모든 내용에서 인간의 주관적 경험은 인정받지 못한다.

여기에 보면, 성도를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자로 규정한다고 되어있는데, 그 예수님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즉 옛날의 그 모든 일들이 모두 다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의 유물을 캐내고 고고학을 연구하지 않아도, 예수님 안에 그 모든 의미까지 다 포함해서 함께 있다는 말이다. 성도에게만 말이다.

그러니 성도는 굳이 과거의 그 에덴동산에 갈 이유가 없는데, 물론 아담을 유혹한 뱀을 보고싶어할 이유도 없고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그 예수님 안에 그 사건들이 의미까지도 포함해서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냥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따지게 되면, 우리는 지금의 이 안목을 가지고서 그때 그 사건을 하나 펼쳐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그러니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 뱀에게 유혹을 받지 않았다면…, 아담이 그런 실수만 하지 않았다면…" 라고, 매일같이 그런 소리만 하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자기 자신이 "나는 자신이 있다" 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과거의 일을 돌이켜 보기에 그러한 일이 생기는데,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그냥 단순한 하나의 과거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 역사란 무엇인가?

강의를 시작하기 이전에 질문을 한 것처럼, 즉 "역사란 무엇입니까?" 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성경해석이나 현실해석에 오류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인간 속에 들어있는 아담의 속성을 바깥으로 카페트를 펼치듯이 펼치는 것인데, 그것이 곧 '역사'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담 안에 이런 것들이 들어있었다" 라는 것인데, 즉 "아담의 새끼인 내 안에 아담과 동일한 죄의 요소들이 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죄를 짓는다는 것이 아니고, 죄 속에 인간이 태어났기 때문에, 즉 "너를 태어나게 한 죄를 역사로 펼치게 되면 이런 이런 모습으로 드러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실 때, 사실은 선택한 것이 아니고 만드셨는데, 무엇으로 만들었는가? '언약'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언약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묵시가 다 들어있는데, 그러니 언약이 이 땅에 왔다는 것은 묵시가 이 땅에 섞였다는 것이다.
 
◈ 언약 안과 언약 밖 !!

그렇게 섞이기는 섞였지만, 하지만 언약의 바깥에서는 언약을 알아보지 못하고, 언약 안에서는 바깥을 다 포섭하고 포함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모두 다 아는데, 세상의 시작과 마지막을 말이다. 하지만 언약 바깥에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즉 자기 안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스라엘' 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 속에 들어있는 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인간의 대변자로서 이스라엘을 택한 것인데, 그들이 결국 멸망을 당했다는 것은 곧 인간의 멸망이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러한 이스라엘의 손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죽임을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죽였다고 하는 것은, 죄의 끝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는데, 죄의 끝은 곧 악마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죄 앞에 인간이 있는데, 그래서 그 인간을 파고 들어가면 죄가 나오고, 그 죄를 더 파고 들어가면 악마가 나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죄와 악마는 이미 육적인 세계가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서 논의해야할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인인 인간을 파고들면 죄가 나오고, 또 그 죄를 파고들면 악마와 관련이 되어있는데, 그러한 영적세계에서 예수님은 누구를 조지는고 하니, 예수님은 인간을 박살내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이 누구와 싸우는가? 뱀의 후손인데, 그 뱀의 후손은 악마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의 자리, 죄의 자리, 악마의 자리 !!

그런데 이런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철학이나 과학이나 문학이 전혀 들어가지를 못하는데, 왜 그런가? 죄에 가로막혀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파고 들어가는 수법자체도 이미 죄가 되기 때문에, 전혀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디서 파고 들어가는고 하니, 예수님과 함께 하게 될 때, 그때 예수님께서 이런 죄인인 인간의 자리에, 죄의 자리에, 악마의 자리에 함께 서신다는 것이다.

먼저 인간의 자리에 서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네. 같이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별 것이 없네" 라고 하는데, 그래서 가룟 유다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자기가 팔아먹을 수 있는 존재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가 같은 인간이니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소위 '4대성인' 이라고 해서, 소크라테스, 부처, 공자와 같은 위치에 둔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인간수준의 예수님인데, 그래서 수모를 당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죄 속에 들어가게 되면, 예수님은 죄에 굴복을 당하는데, 죄를 이기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오히려 죄의 세력에 의해서 맥없이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

물론 예수님은 지금이라도 하늘의 권세를 동원해서 죄를 박살낼 수가 있는데, 하지만 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은, 그것조차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즉 "그래, 죽여라. 나를 죽여서 너 죄의 정체를 드러내어라" 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인간세계와 동반해감으로서, 이런 죄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 교재에도 나오지만, 수영선수가 수영을 하면 어떻게 중계방송을 하는가? 카메라가 선수와 같이 따라가면서 촬영을 한다는 것이다. 선수가 물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만 달랑 찍는 게 아니고 말이다. 박태완 선수가 수영을 할 때도 보면 카메라가 같이 따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육상대회의 경우에도, 카메라가 선수들의 발걸음과 같이 따라간다는 말이다.

◈ 같이 동반하시는 예수님 !!

그러면 지금 우리가 가는 여기에 누가 같이 간다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같이 따라가서 모든 것을 다 보여준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역사가 유보된 것 같지만,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이미 다 끝내버렸다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는 역사가 유보된 것이 아니고, 처음과 마지막을 이미 다 끝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역사를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동반하면서 모든 것을 조명하고 보여준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냥 인간이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을 알 수 없고, 반드시 무엇을 거쳐야 하는가?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세계를 거쳐야 자기 자신을 알고, 죄를 알고, 또한 마귀를 안다는 것이다. 함께 동행하시고 동반하시는 예수님을 거쳐야 말이다.

◈ 하지만, 인간의 상상의 세계에서는 !!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상상 속의 세계를 자기가 조작해내는데, 그러면 그 상상 속의 세계는 무엇이 배제된 세계인가? 예수님이 없는데,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고 자기 중심의 상상된 세계만 남게 되니, 거기서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 악마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마의 영적세계의 존재이기 때문에 누구와 결부되어있다는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와 결부되어있는데, 그래서 아까 뭐라고 했는가?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과 서로 관련이 되어있다고 말이다.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자가 누구인가? 그게 곧 악마인데, 그러면 뱀의 후손의 머리는 누가 치는가? 사람이 그렇게 하는가? 목사가 망치를 들고서 치는가? 그게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문제의 시발점과 그 해결책은 영적세계에서 다 이루어지는 것이지, 이쪽 인간세계에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여기 영적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세계는 보이는 것에게 보이는 것으로 끝나고, 있음에서 있음으로 끝나고 마는데, 어떻게 인간들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 가슴에 와닿아 !!

이순신 장군이 누구와 싸웠는가? 왜군과 싸웠는데, 마귀와 싸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귀와 싸우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를 더 좋아하는가? 예수님보다 이순신 장군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기 때문에 말이다. 안중근 의사가 누구와 싸웠는가? 예수님이 아니라 이토오 히로부미와 싸웠는데, 그것이 가슴에 와닿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 집에 그만 소송에 걸려서 다 넘어가게 생겼는데 어떤 변호사가 와서 돈도 받지 않고 무료로 변론을 해주어서 무사하게 되었다고 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좋은가? 아니면 그 변호사가 더 좋은가? 당연히 그 변호사가 더 좋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믿으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주면 천사가 되고, 반면에 손해를 끼친 자는 악마가 되고 마는데, 그것이 곧 자기 중심적인 상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믿는다는 것도 그만큼 위험한 일인데, 즉 자기 교회에 유리하면 그게 곧 천사이고 성령이고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물론 교회에 해를 끼치면 마귀이고 말이다.

◈ 그들이 예수님은 왜 죽였는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예수님은 왜 죽였는가? 예수님이 법정스님처럼 무소유를 외치면서 산에서 도를 닦고 있었으면 죽였겠는가? 전혀 죽일 이유가 없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에 와서 어떻게 하셨는가? 비둘기를 파는 것을 뒤집고, 또 돈을 바꾸는 것을 뒤집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 집은 도둑놈의 소굴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깨어지는가? 즉 그들의 모든 정신적인 이데올로기와 정신적인 지주가 누구에게 공격을 받고 있다는 말인가? 예수님인데, 그러니 그런 예수님은 그냥 두게 되면 자기들은 졸지에 도둑놈이 되고, 반면에 그런 예수님을 제거하게 되면 자기들은 진리를 사수하는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럴 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믿는데, 즉 "하나님이여,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닌, 메시야를 사칭하는 나쁜 자라고 하면 제거하게 하소서" 라고, 그렇게 자기들이 예수님을 없애는 것도 하나의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을 그 당시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했고, 또한 사울도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죽이는 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겼다는 말이다.

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모르니 죄에 대해서 모르고, 또한 죄에 대해서 모르니 자기를 조종하는 악마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그 성전이 무엇인지도 전혀 몰랐다는 말이다.

인간이 아무리 열심히 성경말씀을 본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보지 않게 되면 그러한 꼴이 되고 마는데, 여기서 예수님 중심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자기 중심으로 본다는 말인데, 제가 수백 번 이런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그 차이점에 대해서 다시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 예수님을 믿는 것, 예수님을 믿는 '나'를 믿는 것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나'를 믿는 것과 차이점이 무엇인가?" 라는 말이다. 즉 예수님을 믿는 '나'를 '내'가 믿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의 차이점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 차이점이 우리가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차이점을 말이다.

먼저 예수님을 믿는 '나'를 '내'가 믿는 것을 살펴보면, 이때는 '나'를 부인하거나 미워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믿음의 중심센터가 자기 자신이기에 말이다. 그렇게 되려면 성경말씀에 "예수를 믿는 자신을 긍정하라" 라고 해야되는데, 그런 말씀이 과연 있는가? 하지만 요한복음 12장은 오히려 뭐라고 하는가? 자기 자신을 미워하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하늘나라는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이다.

(요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 마리아와 마르다의 경우에 !!

마리아와 마르다의 경우에, 본인들은 예수님을 섬긴다고 했는데, 즉 예수님을 사랑해서 그렇게 한다고 했는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즉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그런 나 자신이 너무 미워라" 라고 말이다.

그런데 자기 오빠인 나사로가 아프니까 얼른 예수님을 모셔다가 자기 오빠의 병을 고치려고 했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곳을 수소문해서 예수님을 찾아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부러 가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지금 마리아와 마르다는 무엇이 되지 않는가? 자기들은 나름대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정작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그것이 곧 믿음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빠가 죽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오니까, 예수님을 붙잡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다는 것이다. 즉 "살아있을 때 와서 고쳐주어야지, 지금 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죽은 자도 산다" 라고 하니, "그런 것은 예수님이 재림할 때의 일이고, 그 정도는 이미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눈물을 보이셨는데, 즉 울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차이점이냐는 말이다. 

(요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요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요 11: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김성수 목사의 경우에는 이것이 되지 않는데, 교인들이 그 양반의 설교를 들으면서 마지막 끝에 무엇만 기다리고 있는가? "내가 행할 수 있는 것 하나만 이야기해다오" 라는 것인데, 즉 지금 자기가 신자가 맞다는 것을 증명해줄 것 하나만 이야기해달라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인데, 그러니 자기의 상상력을 가지고 성경말씀과 이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 중심의 상상이 되어버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여기에 포함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동반이 되어하는데 그만 포함이 되어버리니, "나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예수님의 십자가의 믿고, 그 다음에는 또 무엇이 있는가?" 라고 하는데, 즉 십자가가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부활도 있고, 성령의 열매도 있다는 것인데, 즉 성도의 삶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한번 찾아보겠다는 것인데, 누가 말인가? 자기 자신이 한번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찾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그러니 결국은 자기 자신을 미워할 수 없기에 나타나는 현상인데, 즉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평생을 예수님을 믿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 상상도 하지 못한다 !!

어제 설교시간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베드로가 자기가 물위를 걸어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려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물위를 걷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방금 이야기했지만, 그야말로 "상상도 하지 못한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 이렇게 상상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은 평소에 상상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하지 않다는 말인가?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상상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가 있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동반을 하시니, 주님께서는 그만 우리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다른 것을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전혀 기대하지 않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기도를 하면 어떻게 되는가? 평소에 상상하던 그 상상력이 동원되는데, 즉 "주여, 제가 이렇게 희생을 할 테니, 이 정도로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살아계심을 확인하면 참으로 기쁘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기도를 하지 않아서 무슨 말인지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ㅋㅋ)

◈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

그렇게 상상력을 동원하는데, 그런데 막상 주님의 인도하심은 어떠한가? 뭔가를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런데 집에 가보니 있는 것마저도 날아가고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있는 것도 빼앗겼을 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까, 현재에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 것이고, 그렇게 일단 자기 것은 챙기고, 거기에 추가해서 뭔가 더 나가려고 했는데, 그런데 있는 것마저도 빼앗아 가버리고 마니, 그것은 욥기 1장에 있는 말씀이 실현인데, 즉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라고 말이다.

(욥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상상세계에서는 없는 것인데, 즉 말씀에는 있는데 우리의 상상 속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말씀의 세계를 그만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즉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라고 말이다.

우리는 병에 걸리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하지만 성경말씀은 뭐라고 하는가? "낫게 하는 자도 여호와시요, 걸리게 하는 자도 여호와시오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하면, "부자가 되게 하신 자도 여호와시요, 가난하게 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라고 하고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러한 것을 자꾸만 빼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시는가? 저에게 욕을 하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이근호 목사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다" 라고 하는데, 균형을 맞추지 못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과연 누가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말인가? 가난하게 하시고, 아프게 하시고, 죽게도 하시는 분이 누구인가? 또한 지옥은 누가 보내는가? 왜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 집요한 오락 !!

하지만 우리 인간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을 주님께서 동반하셔서 피해버리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해야 우리의 소유가 아닌 주님으로, 그분이 바로 살아계신 주님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의 상상범위 안에서의 주님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노는 우상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을 일본말로 '오모짱(?)' 이라고 하는데, 즉 장난감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 그 단체는 그만 오락단체가 되고 마는데, 그것을 제가 두고서 '집요한 오락' 이라고 했는데, 즉 우리 인간은 매일같이 예배를 드리면서 논다는 것이다. '오락' 이라는 것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인데, 그래서 자기를 알아달라고 모인 단체를 주고 '오락단체'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타를 치는 친목회에 기타를 치지 못하는 놈이 들어오면 매일같이 욕을 들어먹는다는 것이다. 등산도 하지 못하는 놈이 등산모임에 가면 욕을 듣고, 또한 낚시도 할 줄 모르는 놈이 낚시 동우회에 가면 욕을 들어먹고 말이다. 그렇지 않는가? 그래서 그런 것을 할 줄 모르면, 그런 모임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모임에 참석한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가치를 인정해주는 곳에 가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런 모임에 간다는 말이다. 

◈ 그러면 교회는 무엇인가?

그러면 교회는 무엇인가? 자기는 십자가 앞에서 전혀 인정받을 가지조차도 없다는 것을, 그래서 오직 주님의 십자가뿐임을 인정하는, 그것이 곧 교회라는 말이다. 그런데 교회에 왔다고 해놓고서는 "니만 십자가를 아나? 나도 십자가를 안다" 라고 하면, 그렇게 십자가를 아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게 되면, 그게 십자가의 가치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의 가치인가? 그것은 자기 잘난 척을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진해서 나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만들 이유가 없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주님께서 만들어내시기 때문에 말이다. 노아의 머리 속에 "이 큰 방주 속에 들어갈 자들이 자기 여덟 식구밖에 없다" 라는 것은 그야말로 상상도 못할 일인데, 물론 방주가 자그마한 하면 그래도 이해가 되는데 말이다. 약 두 평 정도가 되면 말이다.

하지만 자기가 고생해서 그렇게 큰 방주를 만들어놓았는데, 그런데 달랑 자기 여덟 식구만 들어갔을 때 노아는 얼마나 실망을 했겠느냐는 것이다. 또한 남들이 그것을 보고 얼마나 비웃겠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전도를 해도 단 한 명도 하지 못하고 달랑 자기 식구들만 들어갔다고 얼마나 놀렸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한(?) 것은 조롱한 그들이 모두 다 물에 빠져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인들이 몇 명이고 또한 목사가 월급을 얼마나 받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아직도 예수님께서 함께 계셔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이 곧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상상에 그만 자기가 지치고 낙담하고 실족하고 교만하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에 상관없이 모두 다 이룬 것이 교회이니 말이다.

그러니 교회에 나오지 않겠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여전히 자기 나름대로의 상상의 세계를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것인데, 즉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곳에는 결코 자기도 나가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를 해보면, 인간이 자기 혼자서 연구한 '죄'는 무엇인고 하니, 그게 여기 교재에도 나오는데 말이다. 즉 인간은 선악적인 요소를 가지고서 자기가 자기를 파악해서, 거기서 천국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동반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그 대표적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들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동반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나오는데, 즉 유대인들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웃기지 마라. 너거들은 모두 죄의 자손이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 죄의 자손이 된 적이 없다" 라고 분명히 예수님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 증표가 바로 할례이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들은 너무나도 선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할례' 라는 것은 남자들의 고추의 끝이 잘려져 나가듯이 죄가, 즉 수치가 떨어나갔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유대인들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여, 말씀을 가지고 서로 이야기하자. 율법에 보면 할례를 행하면 거룩한 백성이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왜 당신은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을 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거들의 아비는 마귀인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너거들이 나를 믿지 않으니 마귀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요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요 8: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요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까, "지금 너거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서로 상반된 성질을 가진 두 개의 자녀를 낳겠는가? 진짜 하나님은 내 아버지인데, 그런데 너거들은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진짜 아들인 나를 믿지 않으니, 그러니 어떻게 그분이 너거들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가? 그러니 너거들은 뱀의 자식이다" 라는 것이다.

◈ 너희의 아비는 누구인가?

그러니 여기에 무슨 윤리가 있고 도덕이 있는가? 이웃을 사랑하고 구제를 많이 하면, 여기에 "너희의 아비는 누구인가?" 라는 이 중요한 논지에 끼여들 여지가 있는가? 아무리 아침에 일어나서 골목길을 쓸고, 동네 쓰레기를 모두 줍고 해도, 그렇게 제 아무리 구제, 헌금, 봉사, 선교를 열심히 해도 전혀 끼여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너거들의 아비는 누구인가?" 라는 것인데, 그러므로 여기에 "내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라는 것은 전혀 끼여들 여지가 없고, 누구를 동반시켜야 하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것뿐이라는 말이다. 즉 오직 예수님 앞에서 "너야? 나야?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라는 문제라는 것이다.

◈ 저는 마귀의 자식입니다 !!

여기에 대해서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귀의 자식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어떠한가? 때려죽여도 "나는 마귀의 자식입니다" 라는 소리가 입에서 스스로 그렇게 튀어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마귀가 자식이 되어야, 그렇게 마귀의 자식이 되면 예수님께서 동반해서 어디로 가시는가? "그래, 마귀의 자식이 맞아" 라고 하시면서 악마의 정체를 드러내시는데, 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비교해보면 "아하, 나는 진짜로 마귀의 자식이 맞았구나" 라고 하면서, 그것이 '인간, 죄, 악마'로 되어있는, 그 마지막 '악마'의 부분에 가서, 즉 영적세계에 가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아하, 내가 율법의 선생이고 바리새인들 중의 바리새인이지만, 그게 곧 마귀의 자식이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러한 모든 내막을 다 알고 나서 하게 되는 사도바울의 고백이라는 말이다.

(빌 3: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예수님은 인간과 동반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인간을 그냥 놔두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몰고 가는가? 죄인으로 몰고 가시는데, 그 죄인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예수님은 죄에서 태어난 자식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즉 "너거들은 죄 안에서 태어났다" 라는 것이다.

◈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

다윗도 그런 고백을 했는데, 자기는 엄마의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죄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의 무엇을 행해서 죄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너희는 땅에서 났고, 나는 하늘에서 났다" 라고 할 때, 이미 그렇게 땅의 것만 생각하는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것은 어떤 특정인을 두고 욕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인데, 그런데 이런 소리를 하면 꼭 화를 내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욕을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자기는 정작 전혀 그러한 대상도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영적싸움이니 말이다. 특정 개인은 거기에 전혀 끼들 수가 없는데, 어떤 누구를 욕한다고 해서 제가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 왜 입만 아프게 그런 소리를 하겠느냐는 것이다.

◈ 천국은, 먼저 주인을 묶여놓고 !!

인간은 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 죄 문제는 어떻게 해야하는고 하니, 그러면 왜 인간은 죄에서 태어났는가? 인간은 악마의 집에 갇혀있는 가구와도 같은데, 이것은 수백 번도 더 이야기했지 싶은데 말이다. 즉 강도가 와서 먼저 주인을 묶여놓고는 가재도구를 가지고 가는 것이 하늘나라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악마의 나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그렇게 주인이 되는 악마를 꼼짝도 못하게 하고 전리품을 가지고 가는 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고, 그게 곧 '여호와 전쟁' 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약이 풀리는데, 즉 "아하, 구약성경이 그렇게 되는구나" 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게 신약성경에 들어오면 "값없이 죄사함을, 즉 속죄함을 받는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즉 "먼저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의 전리품으로서 우리를 가지고 가시는구나" 라고 말이다.

◈ 성도는 일종의 '사은품' !!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일종의 '사은품'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냥 덤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돈을 받고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줍니다" 라고 말이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사은품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교회' 라고 하는데, 그게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데, 즉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엡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엡 4: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 '몸' - 분리가 되지 않아 !!

이 짧은 말씀 속에 교회론에 다 들어있는데, 즉 교회는 예수님께서 홀로 이루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은품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사은품이기 때문에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데, 여기서 '몸' 이라는 것은 분리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즉 동일한 피가 흐르고 있는 동일한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이다. 신경도 같이 작용하고 있는데, 그래서 발가락이 아프면 손가락도 아프다는 말이다. 그렇게 온 몸이 같이 아픈데, 그래서 같이 울고 웃는 새로운 영역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와 동반해서 악마를 알게 하시는데, 이 악마는 영적인 것이기에 실체가 없는데, 그렇게 실체는 없지만 그러나 기능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그 복음의 광채를 가리우는 일을 하는데, 그러니 마귀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흐릿하게 만들고 희미하게 만드는데, 그래서 무관심하게 되고 외면하게 된다면, 그것은 모두 다 마귀의 역사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면, 그 순간 갑자기 절망이 오는데, 왜 절망이 오는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절망이 아니라, 갑자기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만드니, 그것이 바로 마귀의 역사라는 것이다. 성도라고 하면 죽는 것도 기뻐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믿어지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오 장로님의 부인이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는데, 파티마 병원 장례식장인데 말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 입장에서의 죽음이 되어버리면 우리의 상상력이 종결되는데, 그렇게 상상력이 종결되면 이미 죽은 자인데, 그렇지 않은가?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은 눈만 뜨면 아침에 계속해서 상상력을 발휘하는데, 그것을 두고 살아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의 상상력은, 곧 '죄' !!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죽은 자가 되는데, 그러니 지금 우리의 상상력은 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품고 있던, 하지만 우리가 미처 몰랐던 아담의 육적인 요소가 예수님과 동반하면서 "나는 인간이다 → 나는 죄인이다 → 나는 죄다" 라고, 그래서 결국은 "나는 마귀의 자식이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변천을 시키는데, 십자가가 그렇게 우리는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야, 마귀가 그렇게 했구나.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아직도 나의 상상력을 믿을 뻔했구나"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데, 즉 "내가 이렇게 마귀와 더불어 살았다니, 참으로 놀라워라"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동반하는, 즉 목자와 함께 하는 양들이 느끼는 풍광이라는 것이다. 

◈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 !!

1915년에 '프로스트' 라는 시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 라는 시가 있는데, 즉 "나는 숲 속에 갔다. 그런데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나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 쪽으로 갔다. 그때부터 모든 것은 차이가 났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4단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의 마지막 대목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오래 동안 살아가면서 한숨을 쉬면서 이야기한다. 옛날에 내가 숲 속에 갔었지. 두 개의 길이 있었지. 그때 나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을 갔었지. 그것이 모든 것의 차이를 만들어내었었지" 라고 말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을 가도, 결국은 그런 차이만 남을 뿐이지, 그 차이가 아무런 차이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이 그 어떤 길을 선택하고 가더라도 결국은 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젊었을 때는 새로운 모험과  비전과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그렇게 가슴 부푼 상상력을 동원하지만,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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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프로스트 - 가지 않은 길 ]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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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십자가를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아는 순간 이미 자기의 모든 상상력은 고갈되고 하나의 죽은 자가 되는데, 그것이 얼마나 즐거우냐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그것은 복음의 광채를 흐리게 만드는 마귀가 준 상상력인데, 그래서 상상력을 발휘한 자기에게로 되돌아오고 만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데, 그야말로 꿈에서 태어나서 꿈에서 헤매다가 꿈으로 돌아가는, 즉 꿈처럼 사라지고 마는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하나의 깔때기처럼 !!

다시 말씀을 드리면, 영적세계, 즉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과 사실들이 현재 마치 카메라가 같이 동반하고 있는, 그런 주님의 의해서 지금 여기에 선악과 생명나무가 말씀사건으로서, 그렇게 하나의 깔때기처럼 모든 말씀 속에 담겨서 주어지는 양상으로 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역사적으로는 지나간 사건이지만, 즉 모세가 홍해를 건너고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이 다 옛날 지나간 사건이지만, 그런데 변화산에 가보니 어떠한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한 장소에서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초막을 3개 짓겠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는가?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초막을 3개 짓겠다고 하는 것은, 기존의 자기 상상력의 연장선인데, 즉 자기가 살던 세계의 그 버릇이 하늘나라에서도 통할 줄 알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지를 말고 아들의 말만 들으라는 하늘의 음성이 들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어느 곳이든지 변화산이니, 초막이나 궁궐이나 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마 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마 17: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제가 어제 설교시간에 "성도의 삶과 천국의 삶은 차이가 나는데, 우리는 성도의 삶이 아니라 천국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천국의 삶이란 것은, 예수님이 주인이 되셔서 우리는 그 예수님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는 관계, 그것을 두고 천국의 삶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는데, 그렇게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이라는 것이다. 

◈ 나는 죄가 없다 ??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는 죄가 없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따지고 보면 무엇인가? "나는 살고 있다" 라는 말의 더 분명한 뜻은 "나만 살고 있다" 라는 것인데, 남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만 살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나'만 살기 위해서는 남의 희생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있는 이 안경 하나만 하더라도, 우리는 이 안경을 만든 장인의 은혜를 다 아는가? 모른다는 것이다. 여기 있는 카메라, 그리고 냉장고 등등, 그렇게 모든 것을 만든 사람들의 수고를, 그들이 저임금에 시달리면서 밤을 새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값싼 중국산과 경쟁하기 위해서 바이어들을 술집에 모시고 가서 접대에 시달리다가 너무 과음에서 암에 걸리는 수고를 우리가 아느냐는 말이다.

이 칠판을 하나 만들더라도,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 마누라 집에 보증을 서달라고 해서 무리하게 만들었는데, 그런데 그만 중국산에 말려서 제대로 팔아먹지도 못하고 마누라와는 이혼을 할 수밖에 없는, 그 가슴아픈 사연을 우리가 아느냐는 것이다. 이런 칠판을 사용하면서도 그런 것을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것이다. 평소에 자기가 입고 있는 이 옷도 얼마나 노동자들이 고생해서 만든 것인데, 그리고 그렇게 힘들어 만들어놓아도 팔리지 않아서 그만 무게를 달아서 '땡' 처리를 하고 말이다. 그런 것 때문에 망해서 지금도 노숙자가 된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을 아느냐는 것이다.

◈ '나'만 살고 있어 !!

그러니 우리 인간은 남들이 얼마나 희생하고 고생하면서 살아가는지,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그냥 자기만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태생적으로, 즉 태어날 때부터 그렇다는 말이다.

지금도 이 시간에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의 똥오줌을 받아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양반들에게는 날씨가 흐리다고 몸이 쑤시고 아픈 것은 아픈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에 시달리면서 정신적으로 아프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런 분들은 오히려 친정 아버지나 시어른들이 돌아가시는 것이 훨씬 더 속이 시원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남의 희생과 남의 고생은 머리에 담아두지 않는데, 오히려 자기가 아픈 것을 확대하고 선전해서 동정을 유발시키는데, 그렇게 해서 남의 아픔을 짓밟아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옆집에 아무리 초상이 나도, 당장 자기 손가락이 가시에 찔린 것이 더 아픈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 희생과 희생을 거쳐서 !!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인데, 그러니 더불어서 살아간다는 것은 모두 다 핑계이고, 자기만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해놓고도 "그게 무슨 죄인데?" 라고 하는데, 하지만 자기에게 오는 모든 것은 다 경로를 거쳐서, 즉 희생과 희생을 거쳐서 온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밥을 먹다가 밥알을 하나 흘리면 뭐라고 하는가? "니가 그 7월의 땡볕에 농사를 지어봤나? 그렇게 곡식이 익어갈 때, 같이 일하는 농부의 머리도 익어서 그만 머리카락도 다 빠져버리고, 그렇게 고생을 해서 농사를 지었는데, 그런데 그렇게 밥이 먹기 싫다고 하면서 그렇게 밥그릇을 다 떨치고 하노? 옛날 같으면 맞아죽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북한에서는 이런 밥 한 그릇을 따뜻하게 먹으면 지상천국이라고 여기는데, 그런데 남한에서는 그러한 지상천국을 품에 안겨주어도 발로 차버린다는 것이다. 피자가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이 세상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인데,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라고 한다면, 그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냐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자는 머리를 둘 곳도 없다" 라고 하셨는데, 즉 예수님은 그야말로 밑바닥인데, 도저히 인간들이 파악할 수 없는 밑바닥으로 내려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도 전혀 따라갈 수가 없는데, 그런 밑바닥이란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고 "니는 와도 모른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마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 인간은, 영적전쟁의 장(場) 위에 !!

결국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의 밑바닥에는 영적세계가 마루짝으로 깔려있는데, 그런데 그런 영적세계에서 피오나오는 약속, 즉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투장면, 바로 그러한 전쟁의 장(場) 위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종결성으로 되어서 다 나온다는 것이다. 거기에 나오는 모든 명칭과 개념 하나하나가 영적인 바탕 위에서 다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고, 오직 십자가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바로 그 영적인 것의 초점이고 중심인데, 즉 모든 것은 다 십자가로 모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의 죽음을 선악과 의미의 완성으로 간주하여, 그의 십자가 지심을 언약대로 이루어진 의(義)로 여기시고, 그 증거로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다.

◈ 잠시, 인간의 '시간의식'에 대해서 !!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가 역사 속에서, 여기서 먼저 '역사 속' 이라는 것을 설명하자면, 역사 속에, 즉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은, 그것은 시간의식 속에 있다는 말인데, 여기서 사실 시간과 의식은 같은 말인데, 그런데 이 시간 의식은 시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이 시간 이미지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게 현재, 과거, 미래인데, 그런데 이 시간 이미지는 또 묵시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게 '70이레' 라는 논문에 포함되어있는데, 그러니 성령을 받지 않아도 얼마든지 묵시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제가 '70이레' 논문에 담아놓았는데, 그런데 신학교 교수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역사 외에 또 묵시가 있다는 것은 성령을 받지 않아도 시간 이미지 속에서 얼마든지 파악할 수 있는데, 인간에게는 그런 자질과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도 그런 것이 나오는데, 불교에서 시간 자체의 순환을 벗어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그들은 묵시라고 하지 않고 '해탈'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해탈이 곧 묵시라는 말이다. 즉 "어제, 오늘, 내일에 휘말리지 않고 거기에 탈피하자" 라고 말이다.

그러니 어제도 오늘이고, 오늘도 오늘이고, 내일도 오늘이 되는 것이 곧 인간의 시간 의식인데, 그런 것은 성령을 받지 않아도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이 '70이레'의 논문을 베껴서 묵시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제가 거기에서 묵시를 이야기한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인데, 즉 성령을 받지 않아도 우리 인간들은 지적인 아이디어 속에서 얼마든지 묵시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시간 속에서 사는 것 자체가 괴로우니 말이다.

그래서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종교적인 구원관이 누구에게든지 다 있는데, 바로 그러한 점을 제가 지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리델보스를 공격했었는데, 즉 그가 주장한 '이미, 아직' 이라는 것은 굳이 성령을 받지 않은 인간들도 얼마든지 다 주장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새생명 운동과 같은 것도 그렇고 말이다.

◈ 과거는, 현재가 조작해낸 것에 불과 !!

이러한 시간의식은 철학의 현상학에서 제대로 잘 다루고 있는데, 제가 여기서 대해서 얼마 전에 글을 하나 썼는데, '목소리와 현상(?)' 이라는 글 마지막 부분에 보면, 현상학에서 시간이라는 것을 어떻고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현상학에서 있어서 의식은 현재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래서 과거라는 것은 기억을 파지(把持)한다는 것이다. 즉 강하게 붙잡아서 그것을 과거라고 하기 때문에, 그러니 그것은 진짜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조작해낸 과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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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지(retention , 把持)  - 흥분, 경험, 반응의 결과가 장차의 반응이나 경험의 수정의 기초로서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유기체는 의식된 인지적 내용이든 그렇지 않은 내용이든 그가 경험에 의하여 얻은 내용들을 저장하는데 이를 기억이라 한다. 그러나 기억하고 있는 것이 전부 재생되지는 않는다. 기억하고 있는 것 중에 재생되는 것을 파지라 하며, 비록 재생되지 않는 것일지라도 동일한 내용을 다시 학습할 경우 기억해 둔 잠재적 효과가 나타나 학습을 용이하게 하는 현상을 파지라고 한다. 파지량은 재인법(再認法)·재생법·재구성법·재학습법 등으로 측정된다. 이 파지에 대비되는 용어는 망각(忘却)이다. - 교육학 용어사전(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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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서, "내가 옛날에 잘나갔었었어" 라고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남학생의 경우에는 "내가 17대 1로 싸웠어" 라고 하는데, 그리고 여고생의 경우에는, "내가 길을 걸어가면, 골목의 남학생들이 너무 좋아서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했어" 라고 하는데, 물론 그것만을 집중적으로 관찰했기 때문에 그게 기억 속에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ㅋㅋ). 하지만 그런 것들은 현재가 조작한 것인데, 막상 그때로 돌아가면 그런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 그때그때 달라요 !!

그러니 결국 현재 자기 몸에서 나오는 상상 속에서 과거의 기억조차도 편집되었다는 것인데, 그리고 그렇게 편집된 과거의 기억에 의해서 미래가 미리 예상이 되는데, 그것을 두고서 '예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파지와 예지와 현재가 합쳐져서 시간 의식을 구성하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간은 개인적인데, 그러니 "사람마다, 그때그때 달라요" 라는 것이다. 즉 시간이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식의 흐름이라는 것인데, 예를 들어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기다릴 때는 그렇게 시간이 더디 가다가도, 막상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 되면 금방 두 시간이 지나가고, 또한 세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다들 경험이 있지 싶은데 말이다. (녹취자 - 아인쉬타인이 누군가가 자기의 상대성이론을 물으니, 그렇게 대답한 것 같은데요?)

설교의 경우에도 어떠한가? 설교가 재미가 없으면 단 30분이라도 그냥 몸이 마구 뒤틀리는데, 그래서 성경책을 뒤적거리고 볼펜을 굴리고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설교에 몰입하게 되면, 금방 30분이 다 지나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개인적인 시간의식을 가지고서 일반화를 시키면 안 되는데, 즉 시간은 너무나도 사적인 것인데 그것을 일반화를 시켜서, 예수님도 거기에 참여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 개인적인 시간 속에 들어와야 하는가? 물론 들어오는 것은 자유인데, 그렇게 들어와서 시간의 지배를 받아야 하느냐는 말이다.

◈ 예수님은 아직도 안 오시나 ??

그렇다면 자기가 예수님을 기다라는 것이 지겨우면 예수님도 같이 지겨워야 하는가? 즉 "예수님, 왜 아직도 오시지 않습니까? 금방 오신다고 해놓고 아직도 오시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벌써 2000년이나 지났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는 지겨울지 몰라도 주님은 바쁘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렇게 오시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느낀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시간흐름과 주님의 시간흐름이 달라서 그러한데, 우리는 이런 시간의 흐름까지라도 그게 죄 안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즉 그런 우리의 시간흐름이 주님의 '다 이루심'을 훼방하고 있다는 것을, 그게 곧 복음의 광채를 가리우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가 물위를 걸을 때, 그때의 그 시간은 자기 시간이 아닌데, 왜냐하면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말이다. 이와 같이, 성령이 오게 되면 자기 시간을 잊어버리게 하고 주님의 시간으로 전환시키는데, 그것이 곧 성령 안에서의 삶이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시간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그때에는 시간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건 아래에서 모든 것이 정지된 느낌이 드는데, 즉 "아하, 지금 죽어도 천국이구나. 오늘밤이 낙원이구나" 라고, 그렇게 모든 것이 정지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게 자기 시간으로 돌아오게 되면, 1초에서 2초, 길어야 3초인데,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3초 동안만 예수님과 동행을 한다는 말인가?" 라고 하면서, 그 따위의 소리를 하는데, 하지만 시간의식 자체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은 자기 시간을 절대화시키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 사건은 역사를 부순다 !!

(택배기사로부터 전화가 와서 잠시 쉬었음) 다시 해보겠는데, 이렇게 인간이 있으면 인간은 그 속에서 자기 역사를 느끼는데, 왜 그것을 느끼는고 하니, 인간에게는 시간의식이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역사는 무엇을 절대화시킨 것인가? 자기 시간의 상상력을 절대화시킨 것인데, 그렇게 되면 자기 중심의 역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원도 할머니에게는 5.18 광주사건이 별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하지만 광주 사람들에게는 집단적으로 결코 그것을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 시간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자기에게 무슨 손익이 있을 때, 그런 사태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건은 역사를 부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로또에 당첨이 되었다고 하면 그 사건이 기존의 역사를 그 사건위주로 재편성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재정립인데, 즉 로또에 1등 당첨이 된 순간부터 다시 정립이 된다는 것이다. 소위 인생역전인데, 그러면 지금까지의 기존 인생은 인생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는데, 즉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서 분화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다고 할 수가 있는데, 이 끝이 바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과 끝이 있다고 생각하는 역사, 사실 그것은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이루는 사건과 사건의 끝이라는 말이다.

◈ 여보, 로또에 당첨되었어요 !!

다시 예를 들어보면, "내가 오늘 아침에 일어났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사건인데, 그리고 나중에 택배가 온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사건인데, 그런데 갑자가 전화가 와서 떨리는 음성으로 "여보, 이번 로또에 1등으로 당첨이 되었어요" 라고 한다면, 그렇게 로또에 1등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지금까지는 아침에 일어나고 또 택배가 오는 것을 하나의 역사로 보았는데, 그런데 그만 로또에 1등으로 당첨이 되게 되면, 앞에 있던 사건들의 의미는 사라지는데, 즉 로또에 당첨되기 전과 후가 나누어져서, 이 로또에 1등으로 당첨된 사건이 그만 모두 다 지배하고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교회에서 당장 수건을 빨아야 하는데, 그런데 딸에게서 전화가 와서 "엄마, 나 이제 시집가게 되었어" 라고 하면, 그만 수건을 빨고 말고 하는 것은 그만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사님이 대신 좀 수건을 빨아주소. 나는 지금 딸이 시집을 간다고 사윗감을 데리고 온다고 해서 집에 좀 가봐야 되겠어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악마와 결부되어있다 !!

그렇게 층층이 누적된 모든 사건을 가지고 제가 70이레를 이야기하면서 무슨 사건이라고 했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건이 있다고 했는데, 즉 '7+62+1' 이라고 말이다. 그 사건의 종결이 곧 십자가 사건인데, 거기서 인간의 모든 실체가 다 밝혀지는데, 그 실체가 바로 "인간은 악마와 결부되어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악마와 결탁이 되어있음을 도출하지 않는 사건이라고 한다면 결코 최종적이 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사건들은 또 다시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흔적만 남고 모두,가 날아가게 되는데, 물론 나중에는 그 흔적마저도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안개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 살다가 잊혀진 그 이름 석 자 !!

우리 인생이 어떠한가? 처음 인생을 살 때는 자기가 점유했는데, 그런데 나중에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고 또 손자가 태어나니까 어떻게 되는가? 자식이 손자가 없을 때는 아버지를 찾다가, 그만 자기도 자식이 태어나니 그 자식밖에 모를 때, 그렇게 자식이 태어난 사건이 자기가 아버지라는 것을 그만 밀어내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밀어내고 나중에 자기가 죽게 되면, 물론 처음에는 자식들이 아버지를 그리워하겠지만, 하지만 3년만 지나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살다가 그만 잊혀진 이름, 그 세 글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질문 - 그 흔적은 데리다가 주장하는 것도 포함이 되지요?

물론 그러한데, 이 흔적이라는 것은 일종의 '차이성' 인데, 그 차이성은 이것과 저것과의 갭인데, 즉 텅텅 비어있는 속에서 튀어나오는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목사님들은 교회에서 사건, 즉 역사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그것은 새로운 사건이 추가되지 않아서 그러한데, 그 사건으로 이미 재정렬이 되어있는데, 즉 사건이 시작되면 그게 사건과 사건의 시작이 되고, 그 시작에서 과거를 파지하고 미래를 예지하는데, 그러니 이 사건으로 인해서 예지를 한다는 것이다. 그 예지가 다음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해서 유효한데, 그래서 처음 일어난 사건을 잊지 못한다는 말이다.

◈ 새로운 사건이 올 때까지 !!

만약에 어떤 장로님이 오셔서 교회가 어렵다고 하면서 50억을 내었다고 하면, 그렇게 50억을 낸 것은 예배시간마다, 기도를 할 때마다 계속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장로님이 50억을 헌금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다음 사건이, 즉 어떤 사람이 와서 150억을 내었다고 하면, 그 앞의 사건은 그만 잊혀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건은 그 다음의 150억의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계속해서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써먹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어떤 아줌마가 와서 교회에 와서 처음으로 집사 직분을 받았다고 하면, 그러면 그때 눈물을 흘리면서 고마워하고 사명감으로 넘치는데, 그런데 그 다음 사건이 어떻게 되는가? 즉 그 아줌마는 자기가 평생동안 집사로서 갈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만 같은 교회에서 남자집사와 그만 눈이 맞아서 도망을 치게 되면, 그때는 자기가 받은 집사 직분을 받은 그 사건은 그만 잊고 싶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직 그 다음 사건이 터지지 않아서 그 집사직분을 받은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

그러니 이런 사건과 사건을 일일이 다 따질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 즉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3장 1절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사건이 아렇게 있는데, 누가 너희들을 보고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가? 그러니 정신을 차려라, 이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라고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함은 자기 자신을 그만 주인공으로 삼아버리는데, 즉 "내가 기도했고, 내가 헌금했고, 내가 봉사했고, 내가 찬양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삼아서 역사의 재정렬을 이룬다는 것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 질문 - 그러니 십자가 사건을 하나의 흔적으로 보면 안 된다는 말씀이죠?

그러면 큰일이 나는데, 오히려 십자가 사건은 '반복' 이라는 것이다. 2초 내지 3초로, 그렇게 수시로 치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즉 "니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해놓고는, 결국은 니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그렇지?" 라고 말이다. 또 "주님은 연약해서 죽었는데, 그런데 너는 이 땅에서 왜 강해지려고 하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자꾸만 말씀사건이 치고 들어오는데, 이것은 정말이지 신기하고 신기한 일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사건과 사건이 재정렬하게 되면 !!

아무튼 이렇게 사건과 사건이 재정렬하게 되면, 이 사건의 주인공은 다름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데,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사건이 아니라 자기 사건이니 말이다. 그런 자기 사건이 재정렬이 되면, 여기서 역사가 되고, 또한 자기 나름대로의 의미가 생겨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재정렬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판이 편평해지고 아주 부드러운데, 바로 여기서 '도닦기' 라는 것이, 즉 "이제는 세례도 받고 했으니 도를 닦아서 성화가 되어서 하늘나라에 가야지" 라고, 그러니 이제는 과거의 육적행함이 아니라 영적행함으로서, 그렇게 나아간다는 말이다.

◈ 주님과의 '동반'인가? 아니면, '홀로서기'인가?

그러니 이것은 주님과의 동반이 아니라 홀로서기인데, 하지만 이것은 옛날의 육적인 버릇이 그대로 이어지는 것인데, 그러니 진짜 성령을 받아서 십자가를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재정렬이 아니라, 모두가 다 파토가 나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렬은 이미 십자가로서, 즉 말씀으로 정렬이 되기 때문에, 말씀 말고 따로 '나' 만이 주인공이 되어서 '나' 만의 역사를, '나' 만의 인생을 정렬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사도바울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매끈하고 반듯한, 즉 "나는 인생을 이렇게 살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애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주님의 낙서 - '너는 죄인이야' !!

물론 애를 써도 성령께서 가만 두지를 않는데, 거기에다가 그만 낙서를 해버리는데, "너는 죄인이야" 라고 말이다. 그야말로 윤기가 나게 반짝거리게 닦아놓았는데, 그런데 누가 와서 흠집을 내면 어떻게 되는가? 그야말로 난리가 나는데, 물론 자기 자신은 전혀 매끈한 인생이 아닌데, 그런데 상상력을 동원해서 자기에게 손해가 되고 수치가 되는 것들을 모두 다 그야말로 걸레로 닦고 또 닦아서, 거기에 묻어있는 티끌을 모두가 걷어낸다는 것이다.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런 칠판을 하나 만들어놓은 것도 다 은혜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러한 은혜는 모두 다 잊어버리고, "나만 살겠다" 라고 하는 집념과 집요성으로 자기를 말끔하게 청소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이렇게 열심히 살았고, 이렇게 착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정리를 하는데, 그런데 거기에 두고 "너는 죄인이야" 라고 하면,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진짜로 칼부림이 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신천지에서 성경을 배웠다고 하면, 그것이 하나의 사건인데, 그래서 역사를 따로 만든다는 것이다. 즉 "신천지를 욕하는 놈들은 가만히 두지 않겠다. 내 목숨을 걸고 막겠다" 라고 나오는데, 그것이 곧 무엇인가? 자기 역사를 매끈하게 만드는 것인데, 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라고 하면, "나는 신천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자기 매끈함이 곧 자기 종교 !!

성경말씀에 그렇게 되어있는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는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오직 십자가뿐인데, 사도바울은 그런 신천지를 전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자기 매끈함이 곧 자기 종교가 되고 말았는데, 즉 도를 닦는 자기 자신이 그만 자기의 교주가 되고, 자기는 그 교주의 신자가 되고, 그렇게 둘이(?) 잘 놀아난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그만 교주가 되고, 또 신자가 되어서 굴복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매끈하게 도를 닦고있는 자기 자신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내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말이다.
 
이제 교재 179페이지를 살펴보자.

** 이처럼 영의 세계에서는 지상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죽고 사는 기준이 통하지 않는다.

◈ 환경인가? 적응인가?

여기에 보면 "영의 세계에서는 지상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렇게 죽고 사는 기준이 통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하는 말씀이, 그게 신명기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때 이스라엘은 어떤 환경에 놓여있었는가?

그게 곧 광야였는데, 이 광야는 곧 죽음의 환경인데, 그러면 여기에서 제가 질문을 하나 던지겠는데, 환경이 사람을 살려주는가? 아니면 사람이 환경을 바꾸어가면서, 그렇게 본인이 본인을 살려주는가? 즉 척박한 환경을 본인의 의지로 바꾸어가면서, 그렇게 환경에 적응하는 본인의 의지가 본인을 살려주느냐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쪽인가?

정답은 환경이 살려주는데, 왜냐하면 태어났다고 하는 자체가 곧 환경의 일부로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자연의 일부로서 말이다. 예를 들어서, 키가 작다고 하면, 그러면 그것을 걱정한다고 해서 키를 키울 수가 있는가? 그리고 자기가 흑인이라고 하면, 누가 그렇게 태어나게 했느냐는 말이다. 자기가 흑인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는가? 엄마, 아빠, 동생 등등, 이 모두가 다 환경이라는 것이다.

◈ 인간은, 이미 던져진 존재 !!

그러니 인간은 이미 환경에 던져진 존재인데, 이것을 두고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기투' 라고 하는데, 사실은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늘어난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즉 환경의 일부라는 말이다. 환경에서 떨어져나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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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투(企投) - 하이데거,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의 기본개념 중의 하나. 기투는 다른 한편으로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을 동반한다. 가능적이고 잠재적인 내적 존재인 실존은 현실세계 속에서 항상 자기 자신을 창조하면서, 그 가능성을 전개해 간다. 이것은 실존이 '기도한'(entwerfen) 것이고, '앞에 던져진'(projecter) 것으로, 이러한 실존의 존재 방식을 기투라고 부른다. 그러나 피투성, 즉 일정한 상태 속에 던져진 존재 방식을 취하는(결국 현실 세계 속에 있는) 것도 실존의 존재 방식이며 그것은 인간이 일정한 현실의 상황에서 발견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투는 이 피투성 속에서 성립된다. 하이데거는 이 피투성에 중점을 두어 논하고, 사르트르는 '실존은 절대적으로 자유이다'라는 입장에서 실존 가능성의 전개인 기투를 강조한다. - 철학사전(중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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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도, 그만 경쟁하는 단체로 !!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걱정하는 것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게 있는데, 즉 교회에 와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교인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왜 저렇게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했는가?" 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도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신앙생활도 더 잘하고, 그렇게 좋은 차도 타고 할 텐데, 그런데 왜 하나님은 자기를 이렇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셔서 힘들게 하느냐고 말이다. 어떤 사람은 조실부모를 하고 말이다. 그런 것으로 인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자들도 있는데, 즉 자기가 자기에게 짜증이 나서 말이다. "그래, 유복한 너거들끼리 잘먹고 잘살아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혹시나 자기를 무시할까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환경 탓을 하는데,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불평을 하는 것도 역시 자기가 탓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환경이 늘어나는 것인데, 예를 들어서, 수제비를 만들 때 보면, 밀가루를 잘 반죽해서 떼어서 넣는데, 그런데 그 떨어진 것도 역시 큰 덩어리에서 나온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짜증을 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짜증이 나는 환경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한 달에 그렇게 이삼백씩 고만고만하게 버는 사람들끼리 모여있는 교회가 있다고 하면, 그런데 그만 한 달에 천 만원을 이상을 버는 사람이 벤츠를 타고 나타나면 어떻게 되는가? 당장에 "어휴, 나도 신앙생활을 저렇게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또 다시 짜증을 내면서 환경을 탓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교회가 자기를 부인하는 단체가 아니라, 그만 경쟁하는 단체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자존심 경쟁, 위신 경쟁, 직업 경쟁 등등, 그렇게 경쟁하는 단체가 되었는데, 그러니 설교를 하는 목사의 경우에도 가슴이 매우 아프다는 것이다. 교인들이 정신을 엉뚱한 곳에 팔고 있으니 말이다.

◈ 잠시, 어제 오전설교를 !!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 인간이 환경의 일부라고 한다면, 제가 어제 오전시간에 어려운 설교를 했는데, 그것을 제대로 하려고 하면 몇 시간이 걸리는데 말이다. 지금 잠시 부연설명을 하면, 이렇게 환경이 있다고 하면, 그 환경이 약간 이렇게 쳐져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환경에서 떨어진 것이 아닌데, 계속해서 붙어있어서 자기가 배웠던 행세를, 타고난 행세를 그대로 발휘하면서 자기가 태어난 환경을 탓하고 원망한다는 것이다.

◈ 기존의 '무익함'이, 새로운 세계에서는 '유익함'으로 !!

그런데 이렇게 환경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전혀 새로운 예수님의 십자가 환경에서는 오히려 유익한 것이 되는데,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환경에서 유익하기 때문에 기존의 그 환경에서는 무익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제 낮설교에서 어려운 점이 무엇이었는고 하니, "나는 나에게, 즉 주께 충성을 하도록 다 한 것이 나에게 유익이 됨이라" 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환경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이 상상한 대로, 그것을 영적으로 해버리게 되면, 즉 "주님과 만나서 영적으로 나에게 이런 이익이 있을 것이다" 라고, 그렇게 자기 이익을 챙길만한 여지가 있는 것을, 그것을 두고서 사람들은 '성령 안' 이라고 보는데, 하지만 그것이 잘못이라는 말을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제가 왜 그런 설교를 했는고 하니, 교인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자기 행함을 찾아내어서 그런 행함을 실천하면서, 즉 "나는 이런 행함을 하기 때문에 신자가 맞습니다" 라고 하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설교를 듣고 있는데, 그런데 저는 그만 그것을 차단시켜버렸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기 때문에 !!

왜냐하면,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말씀대로 믿고 또한 십자가를 믿고 해도, 그것조차도 자기에는 무익함이었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러한 무익함조차도 주님께서 주시는 환경에서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즉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기 때문에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런 환경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주신 것인데, 실제로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고 난 뒤에 사도들은 어떻게 말했는가? "비록 나는 약하지만, 내 안에 주신 주님의 은혜가 크심이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약한 데서 누가 강하다는 것인가? 주님이 강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는 우겨쌈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그런 가운데서 자기를 산 자가 아닌 죽은 자로 만들어내시는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해도, 오히려 그런 일들로 인해서 주님을 찬양한다는 말이다.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물위를 걷는 베드로, 그러나 !!

베드로가 물위를 걸으면서 "야, 내가 물위를 잘도 걷고 있구나" 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정신없이 하다보니 자기가 물위를 걷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돌아보는 순간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에게 하는 모든 것이 유익이 아닌 무익이란 것인데, 하지만 그렇게 무익한 자들인데도, 주님이 주신 환경으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게 곧 주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인데, 왜 그런가? 우리는 주님의 종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모세는 그 집에서 사환으로 일했고, 그리고 예수님은 그 집에서 아들로 일했고 말이다. 어떻게 되었든지 같은 집에 있는 것은 맞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집' 이라는 환경이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고, 또한 성도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로 설교를 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이처럼 영의 세계에서는 지상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죽고 사는 기준이 통하지 않는다. 다른 기준이 제시되어있다.

(마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

여기 마태복음 12장 31절에 보자면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예수님의 심판기준 가운데서 모든 죄와 훼방은 용서가 되는 항목인데, 여기서 죄와 훼방은 서로 같은 의미인데 말이다.

그런데 무엇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가?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즉 성령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심판을 논할 자격도 되지 못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조금 어렵지요?

이것을 쉽게 이야기해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피고가 재판장에 나가서 하는 말이 "저는 정말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라고 한다면, 즉 판사가 묻기를 "당신은 죄를 지었습니까?" 라고 하면, "예, 저는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판사가 다시 "그러면 제가 먼저 물을 것이 있는데, 당신은 이 재판하는 판사의 가치를 인정할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하니, "예, 저는 인정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판사가 하는 말이 "그렇다면 당신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그 사람이 그 어떤 죄를 지었던지 간에, 그 죄에 대해서 재판하는 판사의 권위를 인정한다고 하면, 그 사람의 모든 죄는 용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저는 정말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라고 해서, 그러자 판사가 묻기를 "그러면 당신은 이 재판하는 판사를 인정할 수 있습니까?" 라고 했을 때, "아닙니다. 당신은 전혀 그런 가치가 없습니다" 라고 했다고 하면, 그 사람의 죄는 전혀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죄사함의 기준은 성령께서 !!

그러니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죄사함과 그렇지 않음의 기준은 자기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정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성령께서 정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처음부터 아예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조차도 전혀 자기 마음대로 지어낸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성령 앞에서 죄를 지은 것이 발각 당하게 되면, 자기 죄를 밝혀낸 성령의 권위만큼은 인정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이 찾아낸 죄가 아니라,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동원해서 밝혀낸 죄라고 하면, 그런 권위를 인정하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떤 죄를 지었든지 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아닌 자기가 탐구해서 "이것은 죄다" 라고 하게 되면, 그러면 누구의 권위는 그 자리에 없다는 말인가? 십자가를 진 예수님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당연히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자기가 아무리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보고 말씀하셨는데, 즉 "죄도 모르는 주제에 무슨 죄사함을 말하는가?"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다시, 죄는 무엇인가?

그러면 죄는 무엇인가? 아까 이야기를 다 했는데, 즉 인간이 있을 때는 죄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이 어디로 가는가? 즉 율법을 통해서 말이다. 인간을 죄인으로 만드는데, 그렇게 죄인으로 만든다고 해서 전부가 아닌데, 그 다음에는 십자가를 통해서 어떻게 하는가?

인간을 보고 "니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다" 라고 하는데, 즉 율법으로 죄인이라고 하면, 그 이전에 십자가를 믿지 않으면 무엇이 되는가? 당연히 죄인이 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이다. 그런데 그 죄 안에 무엇이 들어있다는 말인가? 악마가 이미 그것을 지배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이렇게 함께 동반하지 않고 인간이 홀로 가게 되면, 죄가 드러나지 않고, 죄사함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렇게 동반해서 인간으로, 죄인으로, 또 악마에게로 간다는 것은 용서함을 받았다는 증거인데, 즉 "너와 나 사이는 이미 용서함을 받은 사이이고, 즉 용서를 해준 사이이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저는 상한 심령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하면서 십자가로 데리고 가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또한 성령이 아니고서는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 말이다.

그게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나오는데, 즉 "하나님의 깊은 것을 성령이 오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라고 말이다. 그 하나님의 깊은 것에 오직 십자가가 있는데, 그러니 십자가를 알았다고 하는 것은 결단코 인간의 힘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성령이 이미 오셨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알게 되면 거기서 새로운 죄의 개념이 등장하게 되고, 또한 영적세계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를 했지만, 이 땅에서의 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새로운 시작인데, 즉 새로운 정렬의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고 그러한 시작과 끝을 마감하는 것은 곧 사건이 투입될 때인데, 그때 마감이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 '광야생활'이 의미하는 것은?

이제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교재를 보자. 참 조금 전에 광야 이야기를 했는데, 광야에서 죽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환경자체가 곧 우리를 죽이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이야기를 하려고 광야를 말했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만 빠트리고 말았는데 말이다.

물론 우리는 환경에서 떨어지지 않는데,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보내셨다는 것은 그 어떤 인간도 광야에서 살았다고 하지 말고, 이제는 죽었다고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죽었다고 인정하면 그 다음에 살려내는 것은 누구의 몫인가? 이미 인간은 죽어서 해골이 되었는데, 그러니 살려내는 것은 누구의 몫인가? 동반하시는 분이 살려낸다는 것이다.

◈ 원망을 유도하시는 하나님 !!

그래서 광야에서 그들이 죽어야 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을 원망하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것인데, 바로 그런 원망의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서 물도 없고 양식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그렇게 원망이 튀어나오도록 유도를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원망으로 인해서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을 알게 하고, 또한 그러한 원망에 대해서 살려낼 때는 어떻게 하시는가?

주님께서는 숨겨놓은 물을 준비해놓으셨는데,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찾을 수가 없는 말이다. 그래서 깨어져야 나오는 물인데, 어디서 깨어지는가? 바로 반석인데, 그 반석을 깨는 힘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힘인데, 즉 하나님께 죄를 짓는 힘으로 깬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십자가인데, 즉 인간의 죄에 몰려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그런 죽음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면서, 거기서 죄를 용서하는 생명의 능력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반석을 깨어서 나온 물은 보통 물이 아니라 숨겨진 물인데, 은폐된 물이고, 비밀스러운 물이고, 영생의 물이라는 것이다.

◈ 만나의 경우에도 !!

그것은 만나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광야에서 인간들이 배추가 먹고 싶고 수박이 먹고 싶다고 할 때, 그렇게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고 했는데, 그러니 입맛이 애굽에서 살던 입맛 그대로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인이 아니라 그야말로 애굽인라는 것이다. 입맛뿐만이 아니라, 사고방식이나 그 모든 생각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홍해를 건넜다고 해서 구원이 된 것이 전혀 아닌데, 매일 죽이고 매일같이 살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일 만나를 주어야 하는데, 그러니 그 만나는 하루만의 양식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 다음 날에는 또 다시 새로운 만나가 주어지고 말이다. 

◈ 성도는, 매일 죽고 매일 살아야 !!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주기도문대로, 그렇게 매일같이 일용할 양식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용할 양식을 준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매일같이 죽어야만 하고, 또한 매일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이제 십자가를 알았으니 내 힘으로 산다" 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는데, 그야말로 가관이라는 말이다. 우리 인간들이 죽는 이유가 바로 죄(罪) 때문에 죽고, 또한 사는 이유는 의(義) 때문에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 매일같이 죄인이 되고, 또한 매일같이 의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이제 의인이 되었는데, 또 무슨 죄인이라고 하는가?" 라고 하면서 따지는 인간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만 살겠다고 하는 애굽에서의 버릇이 그대로 남아있고, 그 역사 위에다가 강제로 복음에 대한 지식을 잔뜩 쳐발라 놓았다는 것이다. 물론 억지로 마구잡이로 집어넣어 놓았다는 말이다.

그러한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켰고, 그것이 곧 죄라는 말이다. 물론 악마가 복음의 광채를 흐릿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짓을 했는데, 하지만 주님의 택한 자기 백성에게는 그것을 날마다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십자가를 소유한 저희들이 아닌, 십자가에 소유가 된 저희들을 만들어 주신 줄 압니다. 그러니 날마다 십자가 안에서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1211 새벽 3시에 마침.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다 가카 때문이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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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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