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60강 죽음 속에서의 동행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1대구/죽음속에서동행111205.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1대구/HDV_0091_Edited.avi


대구111205피p188죽음속에서의동행.hwp


대구111205피p188죽음속에서의동행

피60강 죽음 속에서의 동행

[11 대구강의 22] - [피 60] - 죽음 속에서 동행

                                                   11,12,0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죽음 속에서의 동행 !!

오늘은 교재 188페이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의 평소 입장이 결코 인간들이 이승에서 저승을 보는 시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 증거가 된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일들은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 저승과 이승의 자리를 뒤바꾸어놓기 위함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죽음과 더불어 동행하기', 혹은 '죽음과 함께 세상을 다시 보기'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우리가 성경말씀을 볼 때는 살아있는 체로 볼 수 없고, 십자가와 더불어 예수님과 함께 죽은 체로 성경을 보아야 비로소 보인다는 것이다. 즉 '죽음 속에서 동행' 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성경해석은 죽음 속에서의 동행으로만 가능한데, 그러니 살아있는 자는 결코 동행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죄에서 구원한다 !!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보면 "죄에서 구원한다" 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렇게 우리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볼 때,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 어떤 성경말씀을 보더라도 성경자체의 접근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갈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이렇게 죄에서의 구원이니, "저는 죄에서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한다면 몰라도, "내가 왜 죄인이야?" 라는 식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나올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죄에서 구원이 안 되려고 하면, 성경이 아닌 불경을 보면 된다는 것이다.

◈ 반복적 학습 !!

불경은 '반복적 학습'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반복적 학습이 우리에게 학습된 기억을 제공하고, 그 학습된 기억은 인간의 의지와 의식을 주관해서, 그것이 행위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행위와 행동은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그것이 곧 불교라는 말이다.

칼빈주의도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데, 그러니 칼빈주의도 곧 불교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지주의인데, 물론 천주교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루터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이런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서 성경에 나와있는 행위와 행동을 삶으로 보여주려고 시도하는 자체를 말한다는 것이다.

이런 반복적인 학습에 대해서 인간의 두뇌가 운동을 하게 되어있는데, 즉 두뇌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반복해서 두뇌를 운동시킨다는 것이다. 우뇌가 아닌 좌뇌에다가 집중적으로 공략하게 되면, 그 좌뇌가 의지를 낳아서 그 의지로서 성경에 나오는 행위와 행동들을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론 보통 사람들은 여기까지는 모르고, 그냥 주기도문을 천 번을 외우고, 그렇게 계속해서 반복하게 되면 예수님을 닮은 삶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달리 다른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성경말씀은 무엇인가? 죄에서의 구원인데, 그런데 이 죄에서의 구원이라는 신약적인 의미가 구약에 들어가면 어디에서의 구원인고 하니, 애굽에서의 구원이라는 것이다. 즉 구약은 대부분이 애굽에서의 구원이고, 신약은 대부분이 죄에서의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달리 무엇이 있느냐는 것이다. 없다는 말이다.

◈ 하나님은 그 어디에?

구약은 누구의 역사인가? 이스라엘의 역사인데, 이 이스라엘은 어디서 나왔는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은 애굽에서 살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성경말씀에 보면 어떠한가? 하나님의 행적은 지상의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이 세상이 손을 대었다는 것이다. 그 손을 댄 자국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곧 출애굽인데, 그래서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물으면, "출애굽을 봐라.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꾸 위를 볼 필요가 없는데, 출애굽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이 아닌 다른 하나님을 찾게 되면 그것은 자기가 상상한 하나님이 되는데, 그 하나님은 우상으로서 자기 존재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자기의 미흡함을 채우려고 하는, 즉 자기가 상상한 그런 하나님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하면, 신약에서의 복음은 죄에서 구원인데, 그러니 자기가 죄인이라고 여기지 않으면 성경을 아무리 봐도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가 죄인이라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이렇게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리 반복적인 학습을 해봐도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기 때문에, 육적인 행위 외에 다른 것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죄에서 구원이 되면, 그렇게 진짜 구원이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죽음 속에서의 동행, 즉 자기가 죽은 자로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죽은 자가 무슨 이런 반복적인 학습으로 행위와 행동을 보일 수 있겠는가?

죽은 자이니 자기의 행위는 일체 나올 수 없는데, 나온다고 하면 오직 주님의 행위만 나오지 말이다. 그러니 죽은 자가 자꾸만 자기의 행위와 같은 것은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을 몽땅 다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데, 그런데 이것을 "죄인인체로 살아있잖아" 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인을 보고 살아있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죽은 자로 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죽은 자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런 죽은 자를 만들어내신 예수님은 죽은 자로 보았는데, 그분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살아있다고 여겼던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죽어있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죽은 자와 산 자의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죽은 자와 산 자의 만남은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시 비오는 날에 공동묘지에 앉아있으면 귀신이 나올지는 모르겠는데 말이다. 그런 것 외에는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그러나, 변화산의 경우에 !!

하지만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가능한데, 그것이 곧 변화산 사건이라는 말이다. 이 변화산에서는 모세나 엘리야가 다 죽었는데, 그런데 그런 죽은 자와 살아있는 예수님과의 대화가 되더라는 말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어떻게 예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가? 죽은 자들인데 말이다. 이 세상에서는 죽은 자라는 것은 입도 코도 다 썩어버려서 없는데 말이다.

그렇게 안 되는데, 어떻게 대화가 되는가? 그것이 바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산 자의 하나님으로서,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모세와 엘리야가 있는 그 동네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다 살아있다는 것이다.

(마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그러니 죽은 성도도 다 살아있는데, 물론 교회는 많이 있지만 성도가 없어서 문제이지만 말이다. 성도가 있다면, 그 성도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도 살아있는데,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가 믿지 않아서 그렇지 말이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어디에 속한 자들인고 하니, 이승에 속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승에 속한 자들은 이승에 속한 자들끼리의 습관이, 즉 반복적인 학습에 의해서 그런 것이 몸에 박혀있는데, 즉 기억이라는 것이 두뇌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두뇌에서 나오는데, 즉 두뇌가 지시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뇌를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의 신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고 말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계속적인 반복으로 인해서 습득이 되는 것이 있는데, 그렇게 습득된 것이 인간의 신체, 즉 인간의 두뇌 속에 들어가게 되면, 이 두뇌 속에서는 반복된 것이 서로 서로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서로 서로 영향을 준다는 것이 조금 어려운 말인데 말이다. 

◈ 엄마, 저게 뭐야?

그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아이가 장미를 처음 보았다고 하면, 아이는 엄마에게 "엄마, 저게 뭐야?" 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엄마는 "응, 그것은 장미야" 라고 하면, 아이는 "아하, 그렇구나. 참 예쁘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보고 다시 묻지 않는데, 그래서 다른 꽃을 보고 "엄마, 집에 있는 것은 장미인데, 저것은 뭐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이미 기존의 자기 자기 기억 속에 있는 장미를 염두에 두고서 "왜 꽃은 장미뿐만이 아니라 다른 꽃도 있는가?"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기존의 들어있던 장미라는 기억과 새롭게 추가되는 백합과의 그 차이점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차이점 하나 하나에 언어로서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다. 즉 "저것은 장미가 아니고 백합이야" 라고 말이다. 그렇게 그 모든 언어에는 반드시 "무엇 무엇이 아니요" 라는 것이 전제되어있다는 것이다.

다시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커피와 녹차가 있는데, 누군가가 "녹차를 마시겠습니까?" 라고 하면, 그것은 "커피가 아닌 녹차를 마시겠습니까?"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물론 대답을 "예, 녹차를 주세요" 라고 하면, 그것도 역시 "커피가 아닌 녹차를 주세요" 라는 의미이고 말이다.

◈ 먼저, '아니요' !!

그렇게 인간의 모든 언어에는 '아니요' 라는 것은 마치 띄어쓰기를 하는 것처럼 항상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어느 교회를 다닙니까?" 라고 해서, "우리교회에 다닙니다" 라고 하면, 그것은 "저쪽 수정교회가 아닌 우리교회" 라고, 그렇게 차이를 염두에 두고 잘라서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언어적인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기억 속에 수많은 체험들이 들어와도, 우리 인간은 기존의 들어있는 기억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만 일방적으로 선택해서, 그것에만 집중하고 몰입해서 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전경' 이라고 하고, 그 밑에 있는 것을 '배경'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 교회인가? 땅인가?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고 난 뒤에는,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수많은 풍경들이 스치고 지나가는데, 그런데 그 많은 풍경 중에서 교회만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한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동네들이 기억이 되고 것이다. 그래서 어디를 가더라도 "아하, 거기에는 무슨 교회가 있었는데" 라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교회를 생각하는 것은 "과연 그 교회가 복음을 제대로 전할까?" 라는 것만 생각하니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목사가 아닌 부동산을 하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 노는 땅이 없나? 개발을 하면 돈이 될텐데" 라고, 그런 생각만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가 "그 동네에 교회가 있었는데?" 라고 하면, 그 사람은 뭐라고 하는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노? 그 동네에는 앞으로 값이 나갈 포도원이 있었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이 온 풍경을 한꺼번에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선별해서, 즉 뺄 것은 빼고 자를 것은 자르고 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만, 자기가 주의를 집중해서 얻고자 하는 것만 본다는 것이다.

◈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의 안목으로 !!

그런데 만일 그 사람에게 성령이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니, 그게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오는데(?),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을 보더라도 예수님의 안목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사람들이 이 세상을 그렇게 보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받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는데, 바로 그 하나님의 깊은 마음이 곧 성령이라는 말이다.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받게 되면, 그 다음부터가 중요한데,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은혜로 주신 것들을 말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선물로 받은 것들을 구별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물로 받은 것을 구별하게 되면, 당연히 선물인 것과 선물이 아닌 것이 구별이 되는데, 여기서 선물인 것은 용서가 된 것이고, 선물이 아닌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자기 위주로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죄를 짓는 것도 선물이라고 하면 정말 곤란하다는 것이다. 즉 죄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여기면 말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죄를 선물로 주시겠는가? 우리 인간의 타고난 죄악으로 인해서 그렇게 된 것인데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면 용서가 되니, 예수님의 안목으로 보면 무엇인가? 이것은 결국에는 두 가지인데, 즉 죄에서 구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집에 김치냉장고가 들어왔다고 하면, 그렇게 김치냉장고를 기다리고 있던 의식이 있던 사람은 "야, 드디어 김치냉장고가 왔다. 됐다" 라고 여기지만, 그러나 성령이 임한 사람은 죄에서 구원이기 때문에, "'혹시 김치냉장고가 왔다고 해서 우쭐거리지는 않는가? 집에 김치냉장고도 있는데 구태여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이제 하나님을 좀 멀리 해야되겠다' 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 야, 나도 새 집이 있었으면 !!

그리고 "좋은 집에 이사를 갔다" 라고 했을 때, 그러한 좋은 집에 이사를 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번에 이 장로님이 새로 집을 잘 지어서 입택예배를 드렸는데, 손님들이 참으로 많이 왔다는 것이다. 맛있는 잡채도 하고 단술도 준비했는데 말이다.

제가 거기에서 설교를 뭐라고 했는고 하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제가 왜 그 성경본문을 거론했는고 하니까, 사람이 "좋은 집이, 우풍이 없는 집이 있어야지. 그러니 평생을 살 좋은 집을 지어야지" 라고 집중하게 되면, 그러면 반복적으로 학습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학습이 되어서 인간의 신체 속에 들어가면 하나의 기억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기억이 되면 우리 인간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의지와 의식이 발현되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것이 뭔고 하면 "내가 이번에 새로운 집을 하나 지었는데, 그러면 니가 사는 집이 내가 지은 내 집보다 좋아?" 라고, 그 다음부터는 그런 식으로 행동에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가 새 집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그러한 행동을 할 필요가 없는데, 즉 "이제 나도 좋은 집을 가졌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에 놀러가도 무엇을 바라보는가? 새로운 집을 보면서 "야, 저 집에 내 집보다 더 좋네. 나도 저렇게 지을 걸"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오잉, 편백나무로?

이 장로님이 이번에 집을 지으면서 실내를 무엇으로 했는고 하니, 아토피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요즘 유행하는 편백나무로 했다고 하는데, 캐나다에서 수입한 나무인데 말이다. 완전히 편백나무로 내부를 장식했는데, 그것을 보고 이상규 집사님은 부러워서 "우리 집 아이가 아토피로 그렇게 고생을 하는데, 우리 집 사람을 안 데리고 오기를 잘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그렇게 알레르기 때문에 편백나무로 집을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학습된 기억으로 삽입이 되면서 이 세상을 볼 때 어떻게 보는가? "어떤 집에 살아야만 알레르기가 없을까? 라고, 그러한 것을 위주로 해서 주의하고 집중하게 되는데, 그 나머지는 선택에서 배제를 했기 때문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성경말씀은 죄에서 구원인데, 그런데 성경을 봐도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백향목으로 집을 지었다" 라는 구절이 나오면, "야, 맞다. 나도 백향목으로 집을 지어야지"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성경말씀을 보면서도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골라서 보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의미를 찾아내고 싶은 것만 골라서 의미를 찾는다는 말이다.

(삼하 5:11)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자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저희가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 베드로 - '여기가 좋사오니, 집을' ??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제안한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가 이야기를 하는데 말이다. "여기가 좋사오니 집을 짓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베드로는 평소에 무슨 생각을 했는고 하니, (죄에서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시고 평생을 살아가는 것, 즉 자기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평생 사는 것, 그것에 몰두하다가 보니, 예수님도 그렇게 여긴다는 것이다.

(눅 9: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눅 9: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그래서 성경에서는 베드로는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하셨는데, 즉 '베드로=사단'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베드로가 곧 악마였다는 말이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죄에서 구원이 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죄에서는 반드시 죽음이 오는데, 처음에 제가 성경을 어떻게 봐야 된다고 했는고 하니, 성경말씀을 죽음 속에서 동행을 하면서 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그런데 베드로는 살아있으면서 주님과 동행을 하려고 하니까, 그것이 곧 예수님이 보시기에 사단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산 자의 하나님 !!

이렇게 죽음 안에서 동행을 한다는 것은, 모세와 엘리야처럼 우리가 보기에는 죽은 자이지만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고, 또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역시 죽은 자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죄에서의 구원인데, 그렇게 죄에서 구원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살아있는 것이 사실은 죽은 것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산 것으로 아는데, 하지만 구원을 받은 상태에서는 제대로 영생을 얻고, 이 세상에서는 살아도 죽은 것이고 죽어도 죽은 것이 된다는 것이다.

◈ 사단 - '너는 죽으면 안 돼'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사랑해서 죄에서 구원을 해냄으로 말미암아서,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사는, 그런 세계를 우리에게 제공하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사단이 방해를 하는데, 어떻게 방해하는가? "너는 죽으면 안 돼. 계속해서 살아있는 것을 유지해야 돼" 라고, 그렇게 버티게 하니, 그때 나오는 안목은 무엇인고 하니, "어떻게 해야만 내가 더 살 수 있을까? 그렇지, 편백나무로 집을 지어야지"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모든 사고방식들이 자기가 사는 쪽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죽는 쪽이 아니고 말이다. 즉 "돈이 얼마나 있어야 나의 남은 여생이 편안하지?" 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잘못된 것으로 주의를 하고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경말씀이 지적하는 바이고 말이다.

이런 죽음 안에서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들을, 특히 명령법과 같은 것에 대해서 흉내를 내는데, 즉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하면 감사하고, 그리고 "온유하라" 라고 하면 온유하겠다는 것이다. 아무튼 흉내를 잘 내는데, 바로 그렇게 흉내를 내는 목적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죽지 않으려고, 즉 살아있는 티를 내려고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 다시, '너는 아니고, 나다' !!

다시 말씀을 드리면, 우리 인간이 무엇을 볼 때는 반드시 "무엇 무엇이 아니요?" 라는 것이 모든 것에 다 포함이 된다고 했는데, 그렇게 "무엇 무엇이 아니요?" 라는 것으로 시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방식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는 나다" 라는 것도 사실은 그 앞에 무엇이 생략되어있는고 하니, "너는 아니고, 나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반드시 '아니요' 라는 것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신약에서 '죄에서 구원' 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하면, 그것을 구약적으로 표현하면 '애굽에서의 구원' 이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구약은 이스라엘 중심이기 때문에, 모든 구약성경의 해석은 애굽에서의 구원이고, 그것을 신약성경까지 연결을 시키게 되면 죄에서의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원을 둘 다 들어있으니 되었고, 애굽이 무엇이 되는가? '애굽=죄' 라고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애굽은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집단, 즉 단체를 의미한다는 말이다. 애굽은 한 두 명이 아닌데, 그러니 단체라는 것이다. 그러니 죄라는 것도 역시 어떤 개인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성질 그 전체가 곧 죄가 된다는 것이다.

◈ 우리는 이 세상의 일부로서 축 쳐져있어 !!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바로 이 땅에서 태어났으니, 우리는 이 땅, 즉 세상의 일부로서 축 쳐져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초등학교 1학년들이 코에서 콧물이 처지듯이 말이다. 그렇게 처진 그 일부가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즉 죄의 일부라는 것인데, 마치 고드름처럼 늘어난 말이다. 주님은 바로 그러한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게 되면, 그것을 사람들은 오해를 해서 어떻게 하는고 하니까, 개별적으로, 즉 "나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예수님도 여기에 있다. 그러니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자"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구원방식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의 개인으로 여기는데, 하지만 그것은 마귀가 가르쳐준 것이고, 사실은 우리 자신은 이 세상의 하나의 조직원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조직원이기 때문에 '나' 라는 것은 없고, 이렇게 '우리 전부' 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즉 조직적이고 전체로 구성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나' 개인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개인이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은 이 땅의 모든 죄를 다 동원시킨 것과 똑같은 것인데, 그런 이 세상의 대변자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세계자체를 !!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는, 그냥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지고 있는, 즉 구성되고 조직화가 된 세계전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오시니까 어떻게 했는가? 그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믿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실상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모든 이야기들과 기적들을, 그런 예수님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예수님만을 믿으면 되는 줄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시니 예수님의 몸을 만지고 밀고 모시려고 하는데, 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하신 일과 그 말씀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

그래서 여기 교재 188페이지 중간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라고 하는 마태복음 8잘 22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마 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죽은 아버지는 어디에 속한다는 말인가? '죽은 자들' 이라는 집단 속의 일부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라고 하는 게 아니라, "죽은 자들 속의 한 사람이 죽은 자의 티를 내면서 죽었다" 라고, 그렇게 보신다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아버지를 그렇게 보고 계시는데, 그런데 정작 그 제자는 왜 자기 자신을 독자적으로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있다고 오해를 하느냐는 말이다. 자기 자신 속에 학습이 된 것은 모두가 다 주변에 있는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개인의 영역에서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산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애굽이고, 그런 애굽의 일원으로서, 애굽에서 벗어나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애굽에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나라가 와서 애굽나라 전체를 다루는 방식을, 바로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여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저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다루시는 방식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를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나'와 다 사람까지 다 포함해서 다루시는 방식을 말이다. 그것을 이해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모든 사람은 다 죽었다" 라는 것에 동의를 해야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은 죽었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떼어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무엇 무엇은 아니요" 라는 식으로,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 다시, '엄마, 저게 무슨 꽃이야?'

다시 한번 더 해보겠는데, 이게 결코 쉬운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엄마, 저 꽃이 무엇입니까?" 라고 해서 "얘야, 그건 장미란다" 라고 했을 때, 그렇게 장미가 확정된 상태에서 다른 꽃을 보여주게 되면, 그러면 아이가 "그러면 저 꽃이 무엇입니까?" 라고 했을 때, "그건 백합이란다" 라고 했을 때, 그렇게 백합이라는 것은 일단 장미는 아니라는 의미가 그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장미는 아니고, 백합입니다" 라는 뜻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것이 왜 중요한고 하니, '나'가 '나'를 규정할 때, 어린아이의 경우에 처음에는 엄마와 자기가 일치가 되었는데, 그래서 엄마가 장에 가고 보이지 않으면 운다는 것이다. 엄마와 떨어져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중에 크게 되면 엄마가 시장에 가도 울지 않는데, 즉 "나는 엄마가 아니고, 나다" 라는 것이다. 

◈ 그래서, 치매에 걸리게 되면 !!

그러한 것이 인간의 두뇌 속에 남게 되는데, 그렇게 인간의 신체가 동작을 나타내니까, 그만 치매에 걸리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치매에 걸리게 되면 무엇부터 사라지게 되는고 하니, 먼저 고유명사가 사라지고, 그 다음에는 보통명사가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동사가 남는다는 것이다. 동사는 움직임에 관한 이야기이니 말이다.

동사는 그렇게 움직이니 개별자가 아니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게 무엇인고 하니, '흐름'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지속적이고 물결치는 흐름으로 말이다. 그래서 치매에 걸리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누구시더라?' 라고, 즉 "어디서 본 적은 있지 싶은데, 그 사람의 이름이 뭐더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떤 특정 사람에 대한 고유명사가 없어지고, 그 다음에는 "야, 이것의 이름이 뭐더라?" 라고, 그런 사물의 개인적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유명사나 보통명사와 같은 명사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다른 것과는 차이가 나서 구별이 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곽이 따로 짜여져서 말이다. 그럴 때 비로소 이름을 붙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아름답다' 라는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가?

하지만 동사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예를 들어서, "나는 밥을 먹고 있다" 라고 했을 때, 그렇게 밥을 먹고 있는 것을 어떻게 내어놓을 수 있는가? 그것은 그냥 보여주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름답다' 라고 했을 때도,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가? 장미에서 '아름답다' 라는 것을 따로 떼어서 내어놓을 수가 있는가? 장미를 내어놓듯이 말이다. 그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름답다' 라는 것은 동사로서 어떤 느낌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두뇌에서 무엇인가가 기억이 되고 그렇게 저장이 될 때는, 항상 온 몸으로서 자기가 자리를 잡아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개인인데, 물론 그것은 인간집단에서 그렇게 배웠다는 것이다. 인간집단에서 말이다.

◈ 인간은, 예수님을 믿는 학습을 ??

그러면 주님께서 구원을 할 때는 어떻게 하시는가? 즉 주님께서 "너는 나 예수를 믿어라" 라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예수님을 믿는 학습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해도 믿어지지 않으면 계속해서 더욱 더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자꾸만 그렇게 반복을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습관이 어디서 나왔는가? 고유명사를 외울 때는 계속해서 되풀이하고 반복하게 되면, 그것이 장기기억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만, 치매에 걸린 권사에게 심방을 가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예수고 뭐고 간에 나는 모른다" 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 말이 맞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권사가 그 동안 예수님을 어떻게 믿었는고 하니, 다른 사람의 이름을 외우듯이 그렇게 자기에게 이익이 있다고 여겨서 '예수' 라는 이름을 외웠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외우게 되면, 그것을 두뇌가 반복적인 반복학습으로 인해서 저장을 해놓았기 때문에, 그래서 나중에 치매에 걸리게 되면 예수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한경직 목사도 마지막에는 치매에 걸려서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다고 하는데 말이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성령을, 즉 예수님의 마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동안 신학을 공부하고, 또 교회에서 들었던 여러 가지 용어들이, 심지어 새벽기도와 철야기도를 하면서 누적된 것들이 고유명사로서 계속해서 반복학습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가 예수가 아니라, 자기 몸에 새겨진 '예수' 라는 이름뿐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믿은 적이 없다는 말이다. 물론 예수님에 대해서 배운 적은 있지만 말이다.

이순신 장군의 경우에 왜군과 싸우다가 마지막에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라고 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평소에는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 이라고 하다가, 그런데 치매에 걸리게 되면 그런 그 이순신 장군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가?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순신 장군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즉 이순신 장군이 동사가 아닌 명사로서 왔다는 것이다.

◈ 건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

그런데 이것이 이스라엘 속에서 나오는데, 즉 "너희들이 하나님을 안 것이 건성으로 알았다" 라고 말이다. 정규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정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는데, 하지만 실제로 몸이 땡기는 것을 바알에게 땡긴다는 것이다. 바알에게 말이다. 왜 그런가? 왜 바알에게 땡기는가? 이 바알은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만든 신이기 때문에, 즉 '나' 자신이 애굽이고, 또한 저것이 애굽에서 만든 신이니, 그러니 서로 찰떡궁합이란 말이다. 

그러니 믿지 말라고 해도 쏙쏙 귀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죄에서의 구원'인데, 그러니 우리가 먼저 죄인이 되어야 그 다음부터 이해가 되는데,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자기가 죄인인 것이 인정되지 않는데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가 자기를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그 순간에도, 즉 "이렇게 나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니 나는 훌륭한 의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즉 "남들은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지만 나는 인정한다. 그러니 나는 남들보다 더욱 훌륭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남들은 '아니오' 이지만, 자기는 '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또 두뇌 속에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저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지만 나는 예수를 믿는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탁탁 끊어서 하나의 사물로서 기억하는 애굽적인 습관, 즉 죄인의 습관을 그대로 남발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오잉, 인간이 구원을?

그러니 우리 인간이 무슨 수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인가?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우리 인간은 구원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홍해의 그 깊은 바다 속을 우리 인간이 어떻게 건너냐는 말이다. 홍수가 나서 넘치는 요단강을 무슨 수로 건너냐는 것이다. 또한 그 단단한 여리고 성을 어떻게 무너지게 하느냐는 것이다.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소경을 어떻게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어떻게 일어나게 하느냐는 것이다. 또한 죽은 자를 어떻게 살리느냐는 말이다.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과연 천지창조를 할 수가 있는가?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되는 것을 오직 예수님만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이 두뇌를 가지고 자꾸만 학습만 하려고 하지, 그 두뇌의 속속들이 모두 죄라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두뇌 속에는 '시냅스' 라는 신경조직이 있는데, 과연 그것이 죄인가? 하지만 성경말씀에 보면 죄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이 손톱자국조차도 죄라는 것이 말이다. 즉 "이 모든 전체가 죄 안에 있다" 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데, 모든 것이 다 죄라는 것이 말이다.

* 질문 - 어제 김용옥의 강의를 들으니, 그 양반이 그것을 모르던데, 그래서 언어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실제화가 되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면죄가 될 수 있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물론 그 양반은 먼 동네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뭐라고 하던 문제가 안 되는데, 그런데 지금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이 그런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가 찰 노릇인데, 그런 목사나 신학자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보기 힘든데, 그냥 애굽에서 장사하고 노닥거리는 사람들이란 말이다.

◈ 다시 정리해보면 !!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성경은 애초부터 뭐라고 하는고 하니, '죄에서 구원' 이라고 하는데, 그게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나와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죄에서, 즉 흠이 없는 분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땅이 흠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서, 그렇게 해서 흠이 없는 자에 의해서 흠이 있는 자가 흠이 없는 자가 되어서 천국에 가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께 오셨다는 것이다.

(갈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면,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해있는 온 세상 자체가 마치 구약의 애굽처럼 장자가 죽어 마땅한 동네라는 것을 받아야 들어야 하는데,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 전도 - '당신은 망해' !!

그래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반드시 전제가 있는데, 즉 "내가 전하는 복음은 망하는 자에게는 망하게 하기 위해서 전한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사도바울의 말씀을 헛되이 듣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면 한 사람들이라도 더 교회로 꼬드기기 위해서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전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렇다고 하면 전도란 무엇인가? 망하는 자에게 "당신은 망합니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을 하는 것이 전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개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자체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말이다.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았는데, 그 성령께서는 이 세상 자체를 두고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이 세상 자체를 상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돈이 있는 사람을 상대하고, 돈이 없으면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이 세상 전체를 하나의 통으로 본다는 것이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아담 안에서, 즉 죄의 왕 노릇을 하는 것에 아담이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 전체를 '너와 나'가 아닌 아담 전체로 봐버리는데, 그런데 거기서 어떻게 '너와 나'가 성립되느냐는 것이다. 결코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그루터기 !!

이사야서 6장에 보면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라고 하는데, 이사야서 전체의 흐름이 무엇인가? 십분의 일이 남아도 그것도 역시 잘리는데, 그렇게 잘릴 때 잘라버리면 무엇이 남는가? 나무의 밑둥치를 자르면 무엇이 남는가? 그루터기인데, 그 그루터기의 뜻이 무엇인가? "우리는 잘려도 산다" 라고 하는 흔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루터기라는 말이다.

(사 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바로 그렇게 둥치에서 잘려있을 때 어떻게 되는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새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즉 싹이 새로 나온다는 말이다. 이사야의 아들 이름이 무엇인가?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 남은 자는 반드시 잘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 10: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그러니 풀잎이 어떤 경우에 냄새가 나는가? 그것은 바로 잘릴 때 냄새가 온 천지에 퍼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칼을 들고 잘라버렸는데, 그런데 교인들은 잘리지 않으려고 하니 설교시간이 그만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잘려야 하는데, 그것도 싹둑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르려고 하면 교인들은 어떻게 하는가? 헌금이나 봉사를 통해서 "주님, 이것을 받으시고 저는 자르지 마세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주님은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게, 어디 선생님 앞에서 !!

선생님의 경우에, 어떤 학생들이 제일 미운고 하니, 손바닥을 내밀라고 하면 그냥 얼른 내고서 한 대 얻어맞고 들어가면 되는데, 그런데 손을 내밀지 않고 자꾸만 주춤거리게 되면, 손바닥이 아니라 그만 엉덩이를 발로 차고 싶다는 것이다. "어디 선생님 앞에서?" 라고 하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제 아무리 선생님이라고 해도 성질이 나서 말이다.

그냥 손바닥을 맞으면 되는데, 자꾸만 때리지 말라고 하면서 손을 숨기게 되면 어떻게 하는가? "오늘 수업은 이것으로 끝이다. 기분이 나빠서 더 이상 못한다. 오늘, 니 죽고 내 죽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을 가르쳐본 선생님이라면 다들 이런 경험이 있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 기어이 본래의 자리로 !!

사실 이런 것은 선생님의 화난 감정이라기보다도 그것 자체가 사랑인데, 왜냐하면 원래의 자리, 즉 "원래 너 자리는 애굽의 자리가 아니고, 니가 어떤 시도를 하고 반응을 해도 나는 기어이 너를 너의 본래의 자리로, 예수 안의 자리로 데리고 가겠다"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의 하나님에 의해서 영원히 살기 위한 자리로 데리고 가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께서는 과도하게 느껴지는 행동들도 전혀 서슴없이 해치워 버리신다는 것이다.

방금 말했지만 풀잎은 냄새가 나야 풀잎인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풀잎에서 냄새가 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즉 향기가 말이다. 그와 같이 성도의 향기는 언제 나는가? 그야말로 잘릴 때 난다고 할 수가 있는데, 이사야서의 흐름이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

성전에서 이사야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입술을 숯불로 찌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다음부터는 이사야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재단의 숯불로 찌진 그 말씀만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다시 말해서, 이사야의 입술을 재단의 숯불로서 찌져졌기 때문에, 이사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도 일종의 흩어지는 재단불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마치 마른 억새풀에 불꽃을 튀기게 되면 온 들판이 불바다가 되듯이, 이사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재단불이 확산되면서 가짜로, 이것을 전문용어로 '가라' 라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그렇게 엉터리로 여호와를 부르짖는 인간들을 그만 다 불살라버리고, 그렇게 씨뿌리(?)마저도 모두 다 잘라버리는데, 그렇게 잘린 그루터기에서 "처녀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의 큰 날개가 온 천지에 임해서 임마누엘의 새로운 세상이 출발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이사야서 전체의 내용이라는 말이다. 

그런 이사야서의 핵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사야는 어떻게 예언을 하는고 하니, 나중에 '고레스' 라는 이방나라인 바사의 왕이 있어서 이 유다나라가 구원을 받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바사나라 이전에 바벨론 나라에 포로로 잡혀간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은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

이렇게 성경을 이렇게 따져보면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닌데, 지금 여기를 한번 보라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약속의 땅에 유다나라가 있는데, 애굽은 여기 이쪽에 있고 말이다. 유다는 원래 이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인데, 그런데 나올 때는 하나님께서 동행해서 나왔다는 것이다. 즉 '죄에서 구원'을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유다를 애굽보다 더 큰 애굽인, 그 당시에는 바벨론인데, 그 나라에 데리고 감으로서 이 유다나라의 자리가 그 자리 값을 한다는 것이다. 그 자리는 언약의 자리인데, 그런데 그 자리는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가 있어서, 그 저주를 받을 놈을 확실하게 저주를 받아주어야 언약의 가치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다나라는 유다나라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가치를 위해서 저주를 받을 때는 확실하게 저주를 받아서 "야, 언약은 살아있네. 주님이 죽지 않았어. 그러니 이 세상 신들은 언약이 없기 때문에 다 헛것이구나" 라고 하는 것을 포로로 잡혀가서는, 나중에 고레스 왕에 의해서 다시 돌아와서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바로 다니엘서의 70년이 아닌, "70이레만에 돌아온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다니엘 자신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개혁주의학회에서 발표하니, 제 옆에 있던 신학교 교수가 무슨 말인지 몰라서 시비를 거는데, 아무튼 70년이 아닌 70이레만이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70이레가 되기 위해서는 70년이 가지고 있던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제거되어야하는데, 즉 "~은 아니고" 라고 말이다. 그렇게 제거되고 나서 70이레로 들어가게 되면, 그 70이레를 완성하신 분이 누구인고 하니,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분이 오셔서 이 세계를 이루신다는 것이다.

◈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

이것이 바로 '애굽에서의 구원' 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애굽에서의 탈출, 즉 출애굽을 전제로 한다면, 이러한 구조와 방식이 그대로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데, 그래서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러니 성경말씀은 처음부터 아예 우리를 죄인으로 몰고 가는데,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반발을 하는지 모르는데, 즉 "왜 인간을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보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은 인간전체를 두고서 죄인이라고 말씀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죄를 지을 때도 있었지"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죄를 짓지 않을 때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꾸만 개인으로 따지는데, 하지만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자체가 곧 죄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던지게 되면, 자기가 해당이 된다고 여기지 말고, 자기가 속해 있는 이 세상 전부가 다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정죄를 당한다고 여기면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제가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이다.

◈ 개인적이 구원이 아니고 !!

물론 여기에 대해서 "그 중에서도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렇게 구원을 받은 개별적인 것이 있지 않는가?" 라고 하는데, 그것이 또한 오해라는 말이다. 이 세상 전제가 다 멸망을 받아도, 그 가운데서 택한 백성이 있어서, 즉 "나는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것은 개별적이지 않는가" 라고 하는데, 그것이 또한 오해라는 말이다.

이것을 다시 그림으로 그려보자면, 여기가 애굽, 즉 죄악된 세상인데,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이것을 "죄 아래에 갇혀있다" 라고 하는데, 여기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건져내게 된다면, 그것이 마치 개인이 구원을 받아서 개인적 구원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지만 예수님은 무엇이 있다고 했는가? 예수님은 예수님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갈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구원 !!

그렇게 예수님의 세계가 오게 되면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여기 애굽에서는 전체의 일부이니 개인적인 구원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지만 이 예수님의 세계에서 보게 되면 이 사람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이 예수님 세계의 전체작용으로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데, 자기 개인의 구원이 아니고 말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의 작용으로 뽑혀 나왔다는 것이다. 자기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생을 줄 자는 다 있다는 말이다. 즉 "영생을 줄 자에게 영생을 준다. 그래서 영생을 준 자는 다 믿더라" 라고, 그렇게 모두 포함이 된다는 것이다.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렇게 포함이 되면 무엇이 날아가 버리는가? 자기의 실력으로, 자기의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다른 사람에게 "너의 믿음 말고, 나의 믿음이다' 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너의 믿음도 없고 나의 믿음도 없고, 오직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즉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만 나오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성령께서 옮겨주셔서, 우리가 예수님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질문 -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합류되었다고 할 수 있나요?

물론 그게 다 같은 말인데, 아무튼 개인적인 능력이나 자격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장치인데, 즉 아버지와 아들의 장치 속에 우리가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4대강 공사를 할 때의 자갈 하나와 같이 말이다. 만약에 홍수가 나는 것을 막는다면, 그것을 4대강 공사 때문이지 그 자갈이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말이다.

여기서 사도행전 3장 16절을 보겠는데, 여기에 보면 분명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이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사도들이 증거하려는 것은 "이 사람이 믿음이 좋다" 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계셔서 조직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싶다는 것이다. 사도들이, 즉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건져서 말이다.

(행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다시 말해서,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가 나은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런 일들은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지금 예수님께서는 살아있다. 그러니 그 살아있는 예수님을 믿어라. 그러면 그 살아있는 예수님에 의해서 지금 너는 움직이고 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성경은 왜 '집단구원' 인가?

성경말씀이 왜 이렇게 '집단적'인 것을 이야기하는고 하니까, 우리 인간들은 항상 자기에게 집중하는, 그렇게 개인적인 것에 집중하도록 애굽과 같은 이 세상에서 훈련을 받아서, '집단구원' 이라는 개념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룻기에도 보면 나오는데, 이번 겨울수련회에서 이 이야기를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누가 룻기 1장 13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룻 1:13)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룻 1: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여기에 13절에 보면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께서 나오미를 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게 다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룻 1: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 룻 - '어머님의 백성 중의 하나가' !!

알다시피 이 '나오미'에게 며느리가 두 명인데, 하나는 '오르바' 이고, 또한 '룻' 이라는 것이다. 오르바는 이것을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 개인적인 사건으로, 즉 하나님과 나오미 사이의 개인적인 사건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 이런 시어머니와 같이 있다가는 나도 박살이 나겠다" 라고 해서 떠나려고 한다는 말이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시어머니가 먼저 했는데, 즉 "며늘 아이들아 한번 계산해봐라. 지금 하나님이 나를 치려고 하는데, 그러니 다들 알아서 해라" 라고 말이다.

그래서 오르바는 전봇대에 같이 붙어 있다가는 벼락을 맞을까 싶어서 그만 튀어버리고 없고, 그런데 나오미가 말한 그 의미를, 즉 "하나님께서 나를 쳤다" 라고 하는 의미를 새롭게 이해한 며느리가 곧 룻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룻이 한다는 말이, 즉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저는 시어머님의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하나가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룻 1: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이게 무슨 의미인가? 개별자인가? 단체인가? 롯은 단체로 보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나오미를 개인적으로 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룻이 놀랍게도 말이다. 성경을 어디서 제대로 배웠는지 몰라도,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ㅋㅋ). 

◈ 주님, 끼워주세요 !!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은 약속의 땅을 떠나서는 된다는 말인가? 안 된다는 말인가? 당연히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자체를 지키기 위해서 그 어떤 수단도 다 쓴다고 하는, 그런 신실성이 있는, 그야말로 믿을 만한, 일관성이 있고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신살하고 성실하게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그대로 다 진행시키는데,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 중에 자기도 끼워달라고 하는, 즉 전체 중의 하나로서 끼워달라고 말이다. 바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지 말고, "저도 예수님을 믿는 그 무리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 "주께서 만들어놓은 그 집단 속에 저도 포함이 될 수 있습니까?" 라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 질문 - "남겨 놓은 자, 즉 그 단체 중에서 하나로서 제가 포함될 수 있습니까?" 라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바로 그러한데, 그렇게 해야만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가 비로소 서로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구약 이스라엘에서 개인으로 왔다가 신약의 교회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고 구약 이스라엘에서 신약의 교회로 곧 바로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그게 곧 '장자개념' 이라는 말이다.

* 질문 - 흔히들 "죄인은 죄인인데, 예수님이 구원해준 죄인이기 때문에 이방인들과는 다르다" 라고 주장하는데, 그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물론 그건 말도 안 되는데,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전체가 모두 다 그렇다는 말이다. 자기 혼자 어쩌고저쩌고 할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자기 혼자 죄인이라고 여긴다고 하면, 그 자체가 곧 죄인의 의미를 모른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일괄적으로,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부처든 공자든 전혀 관계가 없이 말이다.

◈ 인간들은, 왜 전체가 죄인인지를 몰라 !!

그런데 아까 말한 김용옥 교수는 왜 전체가 죄인인지, 그것을 모르는데, 물론 김용옥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목사들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예 기독교 자체가 그것을 모르는데, 일단 죄인이라고 해놓고는 거기서 의인을 만들어놓고는, 그것을 중점으로 해서 성경을 가르치는 학습과 같은 것을 통해서 뭔가 새롭게 구원을 해주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다.

그러니 안 되는데 되게 하는 것, 그것을 자꾸만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아마 그들에게는 그것이 바로  교회존재의 이유가 되지 싶은데, 정 그렇다고 하면 그냥 학원이라고 하면 되는데 말이다. 아무튼 개인은 없는데, 전체에서 전체로 그냥 간다는 것이다.

◈ 나다나엘의 경우에 !!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의 경우에, 예수님이 그를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너는 참 훌륭한 인간이구나" 라고 하지 않고, "그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구나"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어떻게 보시는가? 이스라엘 중의 한 사람으로서 보신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발상을 전혀 뛰어넘는, 그야말로 성경적으로 이야기한 것이라는 말이다.

(요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다시 정리하면, 죄에서 구원이기 때문에, 구원 쪽에서 영생이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죄는 죽음의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생을 개인 자격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집단에 속했기 때문에 받는다는 것이다. 즉 '나 만의 영생' 이라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개인적인 영생을 챙기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자체가 곧 영생인데, 바로 이 영생을 위해서 인간세상은 나름대로 배치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배열이 되어야 하고, 만들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 세상의 구조가 곧 그러하다는 것이다. 영생을 위해서, 즉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다른 것들은 필요한 각자의 위치에 놓여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의 '단수' !!

그런데 이것도 모르고, 이러한 구조를 자기를 위한 구조라고 여긴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붙잡고 놓치 않으려고 하는데, 그래서 주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끄집어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아니고 그냥 하나님의 아들인데, 즉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의 단수라는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 질문 - 요한복음 1장 47절도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그러한데, 계속해서 교재 189페이지를 살펴보자.

** 예수님은 이렇게 이 땅과 죽은 자와 산 자를 구분하려고 오셨다.

(요 9: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요 9: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요 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 과연 누가 보는 자인가?

여기 39절에 '보지 못하는 자들'이 나오는데, 그들이 과연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세상 전부를 이야기하고, 또한 본다는 것도 역시 세상 전부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얼마나 어려우냐는 것이다. 분명히 본다는 것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서로 대비가 되는 의미인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하나의 탑이 있다고 하면, 그것을 반으로 쪼개어서 보는 자가 따로 있고, 또한 보지 못하는 자가 따로 있다고 한다면, 그래서 ½과 ½을 더하면 1이 되는데, 그런데 주님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전체를 보지 못하는 자로 만들고, 또한 이 전체를 보는 자로 만들어서, 그렇게 되면 "1+1=1"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 '1+1=1' !!

주님은 그런 식인데, 이렇게 전체를 소경으로 만들어서, 즉 주님이 보시기에는 이 전체가 소경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우기는가? 전체를, 즉 자기를 보는 자로 여기고, 또한 보려고 하는 자로 여긴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본다고 여기는 사람은 멀쩡한 사람이고, 그리고 보려고 애를 쓰는 자는 소경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소경은 1프로 안 되는데, 아무튼 합쳐서 전체를, 즉 보는 자와 보려고 하는 자를 전부다 보고 있는 자라고 규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무엇인가? 양쪽이 다, 즉 보는 자와 보려고 애를 쓰는 자도 모두 다 보지 못하는 자인데, 그런데 인간들은 모두 다 보려고 하고 또한 보는 자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자체가 주님과 틀리니까, 즉 죄에서 구원이니, 구원이 되기 이전에 죄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언제나 '죄에서 구원'인데, 그러니 "왜 죄에서 구원일 수밖에 없는가?" 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보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보고 있으니 무엇이 문제냐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눈을 통해서 시각신경이 두뇌에 연결이 되어서 잘 보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셨는데, 그러면 이 소경이 눈을 떴을 때, 이 소경은 보는 자인가? 보지 못하는 자인가? 소경이 눈을 뜨게 되어도 역시 소경인데, 이제는 눈을 뜬 소경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이 소경을 다시 불러서 "누가 니 눈을 뜨게 해주었지?" 라고 하니, 소경이 "글쎄요. 눈을 뜨기는 떴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안목을 가질 때, 비로소 !!

물론 눈을 뜨기 전에 예수님이 뜨게 해주었으니 예수님을 보지 못한 모양인데(ㅋㅋ),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바로 너의 눈을 뜨게 했다" 라고 하니, 그제야 비로소 "그것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눈을 떠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고 믿을 때 비로소 보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안목을 가질 때 비로소 보는 자가 된다는 말이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가 주님이 주시는 믿음을 받게 되면, 그때부터는 그는 신체적으로 앉은뱅이인지 아닌지 하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아는 것 자체가 이미 죄에서 구원을 받은 것인데, 즉 영생을 얻은 자가 된다는 것이다. 앉은뱅이가 되었던, 선뱅이(?)가 되었던,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말이다.

왜냐하면, 그 앉은뱅이가 일어났다가 나중에 다쳐서 얼마든지 다시 앉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항상 어떤 일이던지 간에 그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즉 죄에서의 구원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항상 사건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 만약에 개인구원이 되어버리면 ?

그런데 그게 만약에 개인구원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 개인구원에서 개인역사가 나오고, 그렇게 개인의 역사가 나오게 되면, 그만 개인이 이렇게 하나의 선으로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인데, 즉 자기가 20살 때 교회에 나왔고, 24살 때 성령을 받았고, 32살 때 서리집사가 되었고, 43살 때 장로가 되었다고 하면, 그렇게 개인의 역사가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무엇을 믿는 자인가? 자기의 개인구원에 집착하고 믿게 되는데, 즉 개인구원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애굽에서 말이다. 왜 그런가? 그런 모든 것이 그대로 내부에 다 장착이 되어있으니 말이다. 이것이 바로 보지 못하는 소경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신경이 파괴된 것이 소경이 아니고 말이다. 

◈ 죄에서 구원받는 혜택이 매일같이 !!

그런데 성령이 진짜로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개인구원이 집단구원, 혹은 구조적 구원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이렇게 역사의 선이, 즉 시간이 옆으로 직선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시간이 멈추어서 둥글게 되는데, 즉 창고와 같은 곳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 이 안에서는 앉은뱅이가 되던, 소경이 되던, 또한 병이 낫던, 그리고 또 다시 암에 걸리던 간에, 그렇게 걸려서 또 낫고 또 걸리고 해도, 심지어 죽는다고 해도 그 사람에게는 매일같이 어떤 혜택이 주어지는고 하니, 죄에서 구원받는 혜택이 매일같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죄에서 구원을 받는 혜택이 말이다.

그러니 "이제 성령을 받았으니 과거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다" 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전혀 잘못이란 말이다. 주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으로서, 이렇게 은혜를 준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들추어내는 것인데, 자기가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지었던 죄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자기는 구원을 받았다고 여겼던 그 죄까지도 소급해서 들추어내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니가 니 역사 가운데 아름답고 좋은 것만 골라내어서, 자기 목에다 진주목걸이를 만들어서 걸려고 선별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내가 다 알고 있으니, 더 이상 그런 짓을 하지를 말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마치 죄가, 양파껍질이 벗겨지듯이 !!

그러니 소경이 눈을 떠서 예수님을 믿었는데,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는가?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고 하면 이제는 근원적인, 즉 자기는 하나님의 은혜로 소경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여겼던, 그렇게 평소에 자기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 대목들이 나오면서, 그렇게 그런 층들이 마치 양파껍질이 벗겨지듯이 벗겨진다는 것이다.

그 사이로 스며든 인간의 모든 죄가, 즉 자기가 살기 위해서 남들에게 비난했던 그 모든 것이, 자기 위주로 생각했기 때문에 남들을 돌아보지 않은 모든 죄가, 그런 것들이 마치 비포장도로에 차가 달리면 먼지가 일어나듯이 그렇게 먼지와 같이 뒤집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철이 바뀌면 주부들이 어떻게 하는가? 특히 겨울이 오면 장롱 속에 넣어주었던 옷들을 다 끄집어내는데, 그때 신랑이 옆에서 "뭐하노?" 라고 하면, "시끄럽다. 저리 가라" 라고 하는데(ㅋㅋ), 그때는 온갖 옷들이 다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버릴까, 말까?" 라고 하면서 망설이기도 하고, "이미 10년이나 입었으니 버리자" 라고 하면서 버리면, 옆에서 신랑이 "아직 입을만한데 왜 버리노?" 라고 하고 말이다(ㅋㅋ).   

그렇다면 왜 이러한 현상이 얼어나는가? 우리에게는 아직 겨울철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을철이기 때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그러한 일들이, 그렇게 자기 옷장을 뒤집어보면서 다시금 자기의 옛날 속으로 뒤집어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 아하, 그게 죄였구나 !!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8살 때 학교에서 책상에 선을 그어서 넘어오지 말라고 짝쿵과 싸웠던 일까지, 그렇게 남들을 무시하면서 자기 위주로 살았던 모든 죄가 성령을 받고 난 뒤에 회상이 되면서, 그렇게 다시 매일같이 까뒤집어진다는 것이다.

치매에 걸린 시부모를 모시다가 죽고 난 뒤에, 5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간 뒤에도 운다고 하면, 그런 사람에게 "왜 우십니까?" 라고 물으면, "살아있을 때 잘해준 것이 너무 없어서 웁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게 진짜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질문 - 목사님, "나는 죽은 자였습니다", "나는 죽음 상태에 있는 자입니다" 라는 표현 중에서 어느 것이 맞다고 할 수 있습니까?

◈ 성도 됨은, 이미 '완료' !!

둘 다 같은 말인데, 존재라는 것은 명사로 표현이 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연속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동사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사로 표현해야하는 것을 명사로 이야기하는 것을 두고 영어에서는 'to 부정사' 라고 하는데, 목적어나 보어역할을 하는데 말이다. '~하는 것' 이라고 번역이 되고 말이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완료' 라고 하는데, 즉 이미 신분상 성도 됨에 대해서, 그것을 명사로 해도 되고, 또한 부정사로 표현하는데, 거기에 시간은 삽입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성도 됨, 즉 "나는 이미 성도가 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매일같이 죄인으로 노출이 된다" 라는 것이다. 이미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기 그 안에서 발각이 된다는 말이다.

물론 의인이 아니면 그러한 혜택이 주어지지 않는데,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에게 숨겨져 있던, 자기도 모르고 있던 죄들이 너풀너풀, 마치 장롱 속의 옷들을 끄집어내듯이,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이게 죄가 아닌 줄 알았는데, 그런데 지금 보니 참으로 못된 짓을 많이 했구나. 그러니 어릴 때부터 나는 나밖에 몰랐구나" 라고 한다는 말이다.

◈ 반성이 아닌, 회개 !!

그런데 그것은 반성이 아닌데, 왜냐하면 반성을 하게 되면 다음부터 그것을 고쳐서 그런 짓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런데 이것은 그게 아니고, 이미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속성 자체를 끄집어내기 때문에, 반성이 아닌 회개라는 말이다. 그래서 다시 주님의 은혜만을 사모하게 되는데, 즉 "이렇게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인간을 구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것은 전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반성은 없고 회개뿐인데, 회개는 이미 이루어진 상황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는 것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예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울지마'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일반적으로 개인구원이라는 것은, 성령을 개인이 받는 것이지, 옆에 있던 사람이 같이 받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같이 합심해서 기도를 하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물론 우리 개인의 입장에서는 개인이 받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하지만 주시는 분의 입장에서는 집단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120명이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는데 성령이 임하는데, 그런데 우리의 평소 습관이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을 챙기는데 집중을 하다보니까, 항상 어떤 결과에 대해서는 자기에게 떨어져야 결과로 여기지, 자기와 상관이 없으면 결과라고 여기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 주님의 결과를 위해서, 성도는 하나의 원인으로 !!

하지만 어제 설교한 것처럼, 이미 결과라고 하는 것은 확정된 것으로, 즉 위에서의 결과인데, 그러한 주님의 결과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원인으로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성도의 역할이 무엇인고 하니, 결과를 위한 원인이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자기에게 성령이 온 것은 이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언제입니까?" 라고 했으니 말이다. 즉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위해서 성령을 주셨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도록, 우리를 하나의 원인으로 새삼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과에서 말이다.

이렇게 주님의 결과가 우리에게는 원인이 되었는데, 그런데 따지고 보면 주님이 원인이 되고, 우리를 거쳐서 주님께 다시 결과가 되는, 그러니 우리는 주님이 원인이고 결과임을 보여주는, 즉 주님이 알파와 오메가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곁다리로 끼워들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알게 되면 "나에게는 왔는데, 너에게는 안 왔지?" 라고 하는,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가 2010년 5월 25일이라고 하면, 그때 저기 파라과이나 페루에서는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 옆 사람은 받지 못해도 말이다. 그럴 때는 집단적으로 같이 받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성도는, 하나의 공방(工房) !!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와 고넬료 양쪽에 같이 천사가 오게 되어서 둘이 맞장구를 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구약 사사기에도 보면 나오는데, 삼손의 아빠인 마노아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오는데, 그때 남편이 없어서 아내가 먼저 그 소식을 받고 그 다음에 남편이 받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그 집안 자체를 하나님의 일터로, 즉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공방(工房)으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일종의 스튜디오인데, 그러니 거기서 하나님께서 사진을 찍던 암실에서 인화를 하든,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대로 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와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전혀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 말이다. 

◈ 마노아는, 다윗을 만들어내는 공방으로서의 역할 !!

그러므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자기 인생은 날아갔다는 것인데, 즉 마노아에게 주의 사자와 왔다는 것은 이제 마노아의 개인적인 인생을 날아가 버리고, 이제 마노아는 다윗을 만들어내는 공방으로서의 역할만이 남아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마노아 가문은 우리아 가문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제작소가 되고 현장이 되는데, 여기 대구의 성서공단이고 말이다. 주께서 왔다갔다하시면서 분주히 일을 하시는데, 그러니 그것을 두고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안 되고, 자기는 터만 제공한 것뿐이고, 물론 그것도 주님께서 알아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오셔서 "이제 너를 좀 사용하겠다. 너는 원래 그런 거야. 내가 너 안에서 일을 해도 너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하면서 구원은 다른 사람들에게 다 가버리는데, 물론 그런 와중에 자기도 구원을 받고 말이다. 이렇게 보면 성경전체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터가 제공됨에 있어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사건의 회수가 많고, 성도들은 회수가 적어서 차이가 나는 겁니까? 즉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많이 만나고, 사도바울의 경우에 말입니다. 그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사실은 사도바울이 특별히 하나님을 많이 만났다고 할 수 없는데, 다만 그가 만난 것만 계시로 뽑아서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일반 성도들과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사도요한의 경우에도, 자기가 아는 것을 책으로 다 기록할 수 없다고 했으니 말이다.

◈ 성도든 아닌, 모두 육(肉)으로 살아 !!

지금 질문하신 의도를 잘 알겠는데, 사람은 애굽에서 살기 때문에 오직 '나' 뿐이고,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육으로 산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밖에 모르고, 육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성도든 아니든 그것과도 상관이 없이 다들 그렇게 산다는 말이다.

그런데 거기서 성령의 열매가 나온다는 것은 그때 주께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그것뿐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지나고 나면, 다시 자기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제일로 우선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데, 그 다음에는 천국에 들어가야 되고, 그리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은 성령이 와야만 믿어지는 것인데, 물론 그게 믿어진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말이다. 그것은 양무리 마을과 같이 다른 마을에서 주장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것이 아니고 이미 주께서 사용하시는데, 어떻게 사용하시는고 하니, 우리는 평소의 버릇대로 자기의 가능성을 가지고, 자기를 원인으로 삼아서 어떤 실적을 낼지, 거기에 대해서 전혀 몰두하고 있는데, 즉 그런 육적인 사고방식이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게 있어주어야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데, 즉 "나 같은 죄인을 주께서 사용하셨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집사님,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다 전합니까?" 라고 하면, "주께서 다 하셨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평소에는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게 되니 전화를 할 생각을 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자기 생각하기에도 바쁜데 어떻게 상대방을 다 생각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전도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헌금을 제 아무리 많이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해도,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기의 공로는 의도적으로 짓밟아버리는 식으로 주께서는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도 평소에는 개판이 아닌가?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평소가 그가 한 행동을 보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 인데, 하지만 아브라함은 지금 천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강도의 경우에도, 평소에는 강도짓을 했지만, 지금은 천국에 있다는 것이다. 세리와 창녀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러니 어떤 특정 개인을 예수로 만들면 안 되는데, 지금 이것이 큰 문제인데 말이다. 이것은 이호식 스타일인데, 그렇게 사람을 예수로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한 분으로 끝이 났는데, 사람마다 다 머리가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만 지체가 될 뿐이지 말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모두 머리가 되려고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평소에 우리가 하던 대로 하면서 살아가면 어느 날 소급해서, 즉 오후 2시 45분에 은혜를 받으면, 그게 2시 45분부터 3초 동안만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건 양무리 마을에서 오해한 것이고, 소급해서 아침부터 은혜로 이끌어왔다는 것을, 바로 그것을 그 시점에서 전부를 다 포함하게 된다는 것이다.

◈ 말씀 안에 주님의 일대기가 !!

그래서 어제 오전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말씀 안에 주님의 일대기가 들어있다" 라고 했는데, 이것을 풀이하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말이다. 즉 말씀 하나 하나에 주님의 일대기가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탄생부터 해서, 성장, 십자가의 죽으심까지 말이다.

그것이 말씀 하나 하나에 모두 다 들어있는데,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 말씀을 보면서 어떻게 하는가? 자기가 그 예수님의 일대기에서 필요한 것을 흉내내어서 자기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는 방식으로, 마치 로또처럼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 생각이 아닌 주님의 일대기가 생각나도록 하는데, 3초 동안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평소에도 말씀 속에 놓여서 살아가고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3초 동안만 놓여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아까 질문한 것은 이런 그림 하나로 답변을 할 수 있는데, 이렇게 같은 판인데, 우리가 이 판을 보는 것과 주님이 이 판을 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중심으로 보게 되는데, 그런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주님 중심으로 보게 되는데, 그러면 자기 중심으로서 본 것이 죄, 곧 애굽의 속성이라는 것을 알고, 죄에서 구원을, 즉 "또 다시 오늘도 은혜를 주시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게 "오늘 은혜를 주셔서 구원을 받았다" 라는 의미가 아니고, 창세 전부터 구원을 받아왔는데, 그 순간에 이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깨달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우리 속에 기억이 되면서, 다시 육으로 돌아온다는 말이다. 즉 "나는 어제 깨달았어. 나는 잘났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 주님의 동행하심으로 !!

그래서 '동행' 이라는 것이 중요한데, 이스라엘의 경우에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것으로 끝인가? 모세와 더불어서 항상 피가 있는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매일 피 있는 제사를 드리게 되니 그것마저도 의식이 되어버렸는데, 그래서 겉으로는 피가 있는 제사를 드리고, 속으로 바알을 섬긴다는 것이다. 바알을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신세는 공방(工房)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데, 주님께서 새로운 피조물로, 공방으로, 우리의 모든 지나간 죄의 과거가 멋진 재료가 된다는 것이다. 즉 짜장면을 만드는데 있어서, 3살 때의 것은 밀가루가 되고, 10살 때의 것은 식용유가 되고, 20살 때의 것은 춘장이 된다는 말이다. 성령을 받았다고 까불던 것은 맛있는 단무지가 되고 말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금 바쁜데, 볶고 돌리고 때리고 한다고 말이다. 

그러한 것이 모이고 모여서, 그러한 죄인 속에 주님이 함께 동행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주님의 십자가 공로가, 즉 주님의 희생의 가치가 온 우주에 퍼지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의미가 늘 새삼스럽게 들리기를 소원합니다. 결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것이 어제나 오늘이나 변하지 않는 진리인데, 동시에 처음부터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도 역시 변하지 않는 진리임을 깨닫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01,28, 오후 3시에 마침.

                                                   내가 돈까스를 만드는지, 돈까스가 나를 만드는지 !!


김대식

저요 저요 저요 정답 !!! 돈까스 ㅋㅋㅋ  닭울음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가 교회를 만들듯이 ! ㅋㅋㅋ
 





 

'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62강 외부개입  (0) 2012.08.29
피61강 끝 지점에서  (0) 2012.08.29
피59강 사람의 선택  (0) 2012.08.29
피58강 동반  (0) 2012.08.29
피57강 성령과 죽음  (0) 2012.08.29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