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61강 끝 지점에서

피/피 2012. 8. 29. 10:52

피61강 끝 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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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61강 끝 지점에서

[11 대구강의 23] - [피 61] - 끝 지점에서

                                                   11,12,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끝이 좋아야 !!

오늘은 교재 190페이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 지난날의 즐겁고 보람있는 추억이 고통의 순간에는 무슨 힘이 있겠는가? 잘 나가던 시절의 희열도 마지막 때의 고통을 완화시켜주지는 못한다. 고통의 짧은 순간이 지난날의 긴 세월의 깊이보다도 더 깊다. 지옥은 이처럼 깊이로 말한다.

여기에 보면 "잘 나가던 시절의 희열도 마지막 때의 고통을 완화시켜주지는 못한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10년 동안 잘 나가더라도 단 하루에 망해버리면, 그 잘나갔던 것이 그 망한 고통을 감소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끝이 나쁘면 모든 것이 나쁘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끝이 좋으면, 그동안 아무리 고생해도 모든 것이 다 좋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시간관은 무엇인고 하니, 지금 현재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를 염두에 두고 현재를 되쏘아본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제 설교시간에 '방향타' 라고 했는데, 즉 방향을 바꾼다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사다리 타기와 비슷한데, 즉 정해진 목적의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끝이 좋다고 하는 지점은 누구만 아는고 하니, 우리 인간은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경험은 너무 짧으니 말이다.

여기서 끝이 좋다고 하는 것은 그 끝을 누구만 아는고 하니, 알파요 오메가가 되신 오직 예수님만이 아시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목자가 되셔서 양들에게 음성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또 목자도 양의 음성을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자가 양들을 데리고 가신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데리고 가는 과정에 있어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란 인도방식은 구약에 이미 나와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로 나갔을 때, 그들은 약속의 땅이 어디인줄 몰랐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약속의 땅은 만들어 놓아야만 되는 것이지, 자기들이 들어간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갈 바를 알지 못하고 !!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갈 바를 알지 못했던 것과도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본토 아비 집을 떠나서 현재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와도, 어느 곳에 정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인도함을 받는 과정에서 주님이 계신 곳, 즉 주님이 하신 일, 즉 언약을 발견하는 그것이 곧 자신의 본향이라는 말이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히 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이런 것을 설명하기가 참 힘이 드는데, 예를 들어서, "어디로 갈까요? 지묘동으로 갈까요? 지산동으로 갈까요?" 라고 해서, 그 장소가 정해지면 그것은 우리가 아는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에 오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 어느 곳도 아브라함이 갈 곳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가 갈 곳은 하늘에 있는 본향이었다는 것이다.

◈ 그런데, 왜 굳이 가나안 땅까지?

그렇다고 하면, 아브라함이 아비 집에서 하늘에 가면 되는데, 왜 굳이 가나안 땅까지 왔느냐는 것이다. 거기 본토 아비 집에서 죽어서 하늘에 가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 즉 약속의 땅에 와서 헤매고 다닐 때, 비로소 이것은 우리가 아는 장소 문제가 아니라, 오직 주님만이 아시고 있는 장소의 문제라는 것을 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데, 이렇게 본토 아비의 집을 떠나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왔는데, 즉 현재 이라크를 떠나서 터키를 거쳐서 이렇게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왔을 때, "그렇다면 이 지역의 과연 어느 곳에 정착하는가?" 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의 가족은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어느 곳도 정착할 곳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본향은 어디에 있는가? 하늘에 있는데, 그러면 처음 아비 집에 있을 때, 거기서 하늘로 가면 되는데, 왜 이렇게 팔레스타인 땅까지 와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현재 인간들이 보는 하늘이 아니라, 오직 언약 안이 약속의 땅이 된다는 것이다.

◈ 목자의 지시와 명령에 따르는 사람으로 !!

그런데 이렇게 이 언약 안의 약속의 땅이 되려고 하면, 그들이 여기 약속의 땅에서 무엇을 배우는고 하니, 목자의 음성을 듣는, 즉 지시와 명령에 따르는 사람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지시와 명령에 따르는, 그런 달라진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여기 천국에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다. 즉 사람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나름대로 길을 찾아갈 수 있는데, 즉 "천국이 여기 입니까? 어디입니까?" 라고 하면서, 그렇게 찾아서 천국에 갈 수 있는데, 하지만 천국은 인간의 그런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아시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인간 쪽에 언약이 와서, 그 안약을 받아서, 그 언약 안에서 새롭게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죄를 아는 분량만큼 점점 더 천국 좋다고 하는 것을, 그렇게 동반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자기 죄를 모르게 되면 약속의 땅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데, 즉 자기 소망대로 모든 것이 잘 풀리게 되면 미쳤다고 이 약속의 땅에 가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지금 이 땅이 이렇게 좋은데, 굳이 무엇 때문에 그 나라에 가려고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대해서 실증을(?)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다. 

◈ 이 세상에 대해서는 그 어떤 희망도 !!

그러니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은, 그 어느 곳에 가서 자기 포부를 펼치되, 그 포부가 항상 묵살이 되게 하여서, 이 세상에 대해서는 그 어떤 희망도 가지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기 가족에 대해서도 그런 희망을 접게 만든다는 말이다.

그냥 접으면 그게 자살이 되고 죽는 것이 되니 그것은 아니고, 그냥 접으면 절에 가서 도를 닦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쿠, 너무 살기 힘들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자살행위이니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천국은 자기가 가고자 하는, 지금 자기가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아서 거기에 이끌리게 된다는 것이다.

어제 오후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즉 그렇게 이끌리다가보니,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자연적으로 별 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다. 전에는 이 세상에 쇼부(승부?)를 걸었는데, 자식에게 승부를 걸고, 남편에게 승부를 걸고, 또한 목사에게 승부를 걸고 말이다. 그런데 천국에 비하면 그런 것이 개뿔도 아니라는 것을, 같이 살아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라는 것이다(ㅋㅋ). 사람들에게 무슨 기대를 하느냐는 말이다.

◈ 결혼 - '행복 시작, 불행 끝' ??

그러니 드라마를 보면, 젊은 아이들의 경우에 결혼만 하면 '행복 시작, 불행 끝' 인데, 하지만 시댁에 가서 그 집안의 유전병으로 인해서 평생을 병 수발을 하게 된다면 그게 시집을 간 것인가? 간호사로 평생취직을 한 것인데, 그것도 무보수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전에 일일이 조사를 할 수도 없고 말이다. 일단 결혼을 하게 되면 남이 아니니, 그냥 모른 척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찢어지도록 가난한 시누이가 있는데 아이를 5명이나 낳았다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중에 학교에라도 가게 되면 등록금을 모두 대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아이쿠, 내 팔자야" 라고 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의 팔자는 이 세상과 족히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18장에 보면, "우리가 이 땅에서 환난을 당하나,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됐네, 이 사람아 !!

그러니 사도바울이 "나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라고 하는 것은 마치 무엇과도 같은고 하니, 자기는 경주하는 식의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우리가 그것을 잊으면 안 되는데 말이다. 자기에게 가시와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는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됐네, 이 사람아!"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고후 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이 이러한 것을 통해서 얻은 계시가 무엇인고 하니,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라고, 즉 자기가 약한 가운데서 주님의 은혜가 더 크게 와 닿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약에 강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강한 자기 자신을 믿게 되는데, 즉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강한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즉 "나는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고 이렇게 강해졌다" 라고, 그것을 믿게 된다는 것이다.

◈ 교회인가? 점포인가?

오늘날 교회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연말연초가 한번 되어보라는 것이다. 교인들이 헌금을 하고 나서 성경말씀뽑기(?)를 하면서 난리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뽑아서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라는 말씀이 나오면 좋다고 박수를 치고 말이다. 교회가 왜 그런 일을 하는고 하니, 연말이 되면 교회재정이 까닥까닥하는데, 그래서 목돈이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회가 아니고 하나의 점포라는 말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마지막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인데, 그 마지막 끝 부분이 지금 우리가 좋다고 하는 것보다 더 좋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께서 방향타, 즉 방향을 자꾸만 틀어주신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좋은 게 아니거든"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꾸만 몰아가신다는 것이다. 즉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광야에서 그렇게 인도하셨다는 말이다.

◈ 요나 선지자의 경우에 !!

그러한 움직임, 즉 그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교재 191페이지에서 요나 선지자를 예로 들었는데, 한번 살펴보자.

** 요나 선지자는 만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서 뒷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은 자결하려고 했다.

(욘 4: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요나 선지자에게 있어서 좋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요나는 본인이 선지가 노릇을 하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아마 목사들에게도 이러한 면이 있지 싶은데 말이다. 즉 비록 자기에게 돈은 없어도 목사라고 하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아서 기가 죽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기를 확 꺾어버리는데, 왜 그런가? 하나님이 좋고 예수님이 좋아야 하는데, 그런데 자기가 목사 된 것이 좋아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교묘한데 말이다.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교묘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그 뒤에는 마귀와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 연결부위가 있는데, 마치 플러그를 꼽으려고 하면 콘센트가 있듯이 말이다.

그 연결부위가 어떻게 발각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증거하게 되면 되는데, 그렇게 발각이 되면 그쪽에서 뭐라고 하는가? "여기까지, 이것만은 노타치!"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부셔지게 되면 자기의 자기 됨을 채울 길이 없다는 것이다. 즉 "제발 마지막 나의 나 됨만은 유지하게 해달라. 그러니 이것만은 남겨다오. 이것마저 깨지게 되면 나의 나 됨은 없다" 라는 것이다. 

◈ 삽도 휘어지는 암석층 !!

십자가마을과 우리교회를 그렇게 수십 년을 다녀도 뭐라고 하는가? "마지막 이것만은 손대지 마라. 이것마저도 깨지면 나는 미친다. 그러니 이것만은 안 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두고서 제가 '삽도 휘어지는 암석층' 이라고 했는데, 그게 얼마나 센지 말이다. 즉 삽도 휘어질 강한 암석층이 우리 인간 속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성령이 와야만 깨어지는데, 하지만 그것이 깨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복음을 외쳐도 거기서 맴돌다가 거기서 스톱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스톱이 된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처음에는 십자가와 복음을 이야기하다가도 결국 마지막에는 행함으로서 마치고 만다는 것이다. 즉 행함의 주체가 여전히 살아 남아있다는 것이다.

어디 장사를 한 두 번 하는 것이 아닌데, 그렇게 다들 아는 이야기를 들키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이 마지막 나의 남은 자존심은 좀 세워달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여기서 뛰어내릴 거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복음을 아는 사람은 너무 잔인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까지도 다 부수려고 하니 말이다. 마지막 끝이 좋으려고 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 안 되는데, 주님을 사랑해야지 말이다.

요나가 바로 그런 경우인데, 이 요나가 뭐라고 하는가? 만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니 그의 마지막 결정은 자살이었는데, 즉 "그래, 이제는 그만 죽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자기가 명색이 선지자이고, 그래서 자기 말빨이 먹히는데, 그런데 그만 자기 예언이 틀리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얼굴을 들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나는 분명히 니느웨는 망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대로 망하게 해야만 하는데, 그런데 그들이 그만 회개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지금까지 자기가 말한 것이 그만 구라가 되고 마는데, 그래서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다" 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 요나를 인도하시는 주님 !!

그러자 주님께서는 "죽여도 내가 죽여줄 게" 라고 하면서 그만 박넝쿨을 치워버렸는데, 막상 주님이 죽이겠다고 하니 요나는 죽지 않겠다고 하는데, 그러니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봐라, 니느웨도 문제이지만, 너 자신도 너의 힘으로 살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그게 무슨 은혜인가? 너의 행함이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 요나에게 니느웨라는 박넝쿨을 사용해서 요나 선지자 자신을 구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말이다. 끝은 주님만이 알고 계시니, 그 끝, 즉 천국의 사람이 되려고 하면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을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91페이지를 살펴보자.

** 신약에 있어서도 '죽음'의 개념을 놓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해석상의 차이가 난다.

(요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 11: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요 11: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요 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우리가 4복음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이것이 기본인데, 즉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생각일 것이다" 라는 것은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생각이 완전히 균열이 일어나는데,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고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라고 했겠는가?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 노바디, 노바디 !!

여기에서 사람의 일은 무엇인가? 주님을 넘어지게 해서, 주님으로 하여금 구원을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악마의 일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일 = 악마의 일"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악마의 일이란, 예수님의 일이 무효로 끝나게 하는 것인데, 실패로 말이다. 그래서 사탄은 언제나 십자가의 복음이 있어야 드러나는 것이지, 그게 아니라면 사탄은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마는 예수님의 존재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 즉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십자가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즉 무조건 예수님이 있다고 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십자가가 증거될 때인데, 그런데 그 십자가 앞에서 12제자들 중에서 남아있는 자가 있었는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유명한 찬송가가 '노바디, 노바디' 라는 곡인데(ㅋㅋ),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제자들은 전혀 구세주가 아닌데, 오직 예수님만이 구세주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은 제자들의 영이 아닌데, 이만희 교주가 여기서 실수를 했다는 것이다. 성령은 전혀 이만희의 영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만희는 자기를 보혜사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여기에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우르르 몰려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이만희가 기존의 한국교회를 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기존교회가 여기에 얼마나 시달리겠느냐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오는 것과 같이 음녀와 짐승이 서로 싸우는 격인데, 처음에는 음녀와 짐승이 하나가 되어서 음녀인 큰 성 바벨론을 이루지만, 그런데 나중에 보면 짐승이 음녀를 그만 쳐버린다는 것이다. 즉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싸운다는 말이다.

◈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상이몽(同床異夢) !!

그러면 다시 교재로 돌아가서, 예수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이 어떤 차이가 나는지 보겠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렇게 하시지 마시고, "우리 친구 나사로가 죽었구나. 그러나 내가 다시 살리러 가노라" 라고, 왜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게 지금 제가 하고 싶은 질문인데, 즉 우리 인간들이 알아듣는 말을, "우리 친구 나사로가 죽어서, 내가 다시 살리려고 간다" 라고 하는, 그런 좋은 말이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친구 나사로가 잠이 들어서, 내가 깨우려고 간다" 라고 하는 말을 왜 하시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제자들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오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인데, 그러면 왜 제자들을 오해하도록 하시는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지금 서로 나란히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데 그것이 서로 같은 노선이겠는가? 예수님에게 매일같이 설교를 들어도, 요즘 말로 하면 매일 예배를 드리고 새벽기도를 나가고 해도, 서로 노선이 같은가?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이다.

서로가 같은 노선이 되려고 하면 예수님 쪽에서 조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조치를 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이 오해했다는 증거가, 즉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다고 하는 실패담과 같은 것들이 팍팍 생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믿음 - '나는 예수님을 믿는 것에 실패했어'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에 실패한 그것이 곧 예수님을 믿게 하는 예수님의 제대로 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구원은 그 사람이 믿음이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하기 때문에, 자기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는 그것도 역시 잘못된, 예수님을 오해한 데서 나온 믿음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이, 즉 예수님의 십자가가 계속해서 개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믿음은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다음에 보면 항상 두 종류로 나오는데, 먼저 하나는 자기가 믿을 만해서 믿는 것이고, 그 다음에 진짜 믿음은 무엇인고 하니,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그렇다고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죄인이 되게 하기 위한 믿음이었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이 바로 진짜 믿음이 있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소유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자기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주신 은사로서의 믿음이고, 소망이고, 또한 사랑이라는 말이다.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하기 위한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죄인이 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언약은 죄인과 무엇의 만남인고 하니, 죄인과 용서하시는 분의 만남이 하나의 세트가 되어서 언약을 이룬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무엇이 목적이란 말인가? 그것이 곧 새언약인데, 즉 언약의 완성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목적이란 말이다.

성도는 언약의 완성됨에 참여한 자들이고, 그래서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무엇인고 하니까, '내 안'에서의 믿음을 '예수 안'에서의 믿음으로 바꾸는 것인데, 예수 안에서의 소망, 예수 안에서의 사랑으로 말이다. 그것을 주께서 하시는데, 그러니 '내 이름'으로는 천국에 가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내 이름'으로 천국에 가게 되면, 그 천국은 당연히 '내 나라'가 되고 마니 말이다. 
 
◈ 유기체(有機體) - '중심이 없어' !!

여기서 잠시 어려운 것을 하나 하겠는데, 아마도 부산강의에서 했지 싶은데 말이다. '유기체(有機體)' 라는 것은 중심이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불교에서 화엄경과 같은 관계망들인데(?), 즉 평등한 용종(?)들이라는 것이다. 누가 더 높은 사람이 없고, 누가 더 높은 사람이 없는 말이다. 다같이 존중을 받고, 다같이 인정을 받는 우리들끼리의 모임, 그것이 곧 유기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몸이 유기체라고 한다면, 그것은 머리만 있고 손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고, 또한 손은 있어도 머리가 없으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가 다 필요한, 즉 서로가 '하나' 라고 하는 추상적 개념 안에서 같이 돌아가는 것을 두고 '유기체'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들뢰즈 - '인간은, 부속품들이 모인 기계' !!

그런데 현대 생물학에서 이것을 따져보면, 그게 곧 '기계' 라는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인간은 기계로 보았는데, 즉 "인간은 욕망의 기계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과학을 모르는 경우에는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제가 이렇게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칠판 지우개인데, 분명히 딱딱하고 형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전자 현미경으로 보면 어떠한가? 분명히 딱딱한 이게 분자로서 구성이 되어있고, 그 분자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 본래의 성질이 그만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원자인데 말이다. 그러니 원자는 본래의 성질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원자가 모여서 분자가 되면, '너 분자'와 '내 분자'가 따로 구별이 되지만, 더 이상 들어가게 되면 다 휘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자보다 더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는 놀랍게도 빈 공간이 있어서, 즉 전자와 핵 사이에는 엄청난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지구전체의 마당에 야구공을 하나 놔두는 것과도 같은데, 즉 저기 대기권이 전자라고 하면, 이 지구 안에는 텅텅 비어있고, 그 안에 야구공이 하나 달랑 놓여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 인간 내부는, 텅텅 빈 공간 !!

아무튼 그렇게 텅텅 빈 공간이기 때문에, 왜 병원에 가면 초음파 검사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검사를 하면 어떻게 사람의 몸 속을 그렇게 잘 아는가? 그것은 바로 빈 공간을 분자보다도 아주 짧은 파가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기 때문에, 그래서 내부를 속속들이 다 구경을 하면서 돌아다니면서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초음파가 아닌 다른 것으로 찍게 되면 그냥 시커멓게 되어서, 그게 간인지 심장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밀한 칼을 가지고, 즉 초음파를 가지고 후비니까 암세포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그런 것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만큼 빈 공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빈 공간이 왜 이렇게 딱딱해지는고 하니, 이 빈 공간에 에너지가 이동하는데, 그래서 우주는 에너지의 장(場)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 인간에게 적용시키면, 우리 인간도 역시 에너지의 장이고, 하나 하나 돌아가는 그런 기계라는 말이다. 부속품들이 모인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 무슨 영혼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영혼은 에너지가 동반해서 나오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니 환원론적, 혹은 물질 결정론적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결국 인간은 분자들의 움직임에 의해서 일어나는 바깥 이미지와 같다는 것인데, 즉 "인간은 이미지이다" 라는 것이다. 어떤 비치는 상(象)인데, 실제로 손에 잡히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손에 잡히는 것은 기계만 잡히는데, 즉 피부라는 기계, 머리카락이라는 기계, 그렇게 기계만 있다는 것이다. 분위기 상 이렇게 냄새가 나고 하면(?), 멀리서 보면 사람이 하나 걸어다니고 있고 말이다.  

바로 이런 시대를 지금 젊은 아이들이 보내고 있는데, 그러니 신(神)과 같은 것은 그들의 머리 속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주님이 보시기에 그렇게 인간을 보도록 한 연결부위에 악마가 있어서, 그 악마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독자적으로, 즉 "너 자신을 잃어버리면, 너 자신을 찾을 데가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33살 먹은 나사렛 청년이 말씀으로 창조 !!

물론 그 악마의 말이 맞기는 맞는데, 우리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닌데, 하지만 예수님은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담을 말씀 안에서 창조하신 분인데, 물론 처음 창세기 1장에는 그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그냥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그 형상이 누구인지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죄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십자가를 지신 그분이,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33살 먹은 청년 그분이 바로 창세기 1장에서의 창조를, 즉 자신의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창세 전에 예수 안에서, 예수님 덕분으로, 예수님의 에너지 덕분으로, 예수님의 창조 덕분으로 우리를 만드신다는 것이다.

◈ 영원토록 주님만 섬기면서 !!

그렇다면 무엇으로 만드는가? 오직 말씀으로, 즉 새언약으로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으로 우리를 새로 만들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땅에 속한 형상이 아니라, 아담처럼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더 이상은 후패하고 연약한 몸은 없고, 예수님처럼 부활된 영광된 몸으로 영원토록 주님만을 섬기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아멘 !!)

이러한 내용이 참으로 희한하게 들릴지 몰라도, 여기에 대한 증거가 있느냐고 했을 때, 여기에 대한 증거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이야기한 그 증거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서의 죽고 부활하심인데, 즉 예수님의 존재가 증거가 아니고 말이다.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다같이 죽었다는 것이다. 메시야가 죽었다는 것은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죽고 다시 살 때, 그 예수님에게 주어진 모든 공로가 바로 우리가 죄 없이 탄생할 수가 있도록 우리에게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복음인데, 기독교라는 종교를, 즉 개인의 어떤 신념을 가지고서 교회라는 친목단체를 만들려고 소설로서 지어낸 것이 아니고 말이다. 바로 이러한 복음과 인간이 마주치게 되면, 물론 인간은 처음에는 마귀를 인정하지 않는데, 하지만 인간은 본인도 모르게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 복음은,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

그런데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 아는고 하니, 복음이 전파될 때 비로소 안다는 것이다. 복음을 인간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정상인데, 고린도후서 4장의 말씀처럼 말이다. 즉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세상 신이 망하는 자들을 망하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고후 4: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리고 고린도후서 2장에 보면, "우리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라고, 즉 어떤 사람에게는 향기가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악취가 된다는 것이다.

모두 같은 복음인데, 일부러 악취를 피우는 것이 아니고, 복음만 전했는데 망하는 자들은 코를 막고 똥 냄새가 난다고 하면서 도망을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악취를 펄펄 피우는 것이 곧 전도인데, 물론 같이 밥을 먹는데 방귀를 뀌는 것은 아니고 말이다(ㅋㅋ).

(고후 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후 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 전도하는 자의 기쁨은?

그러니 전도를 함에 있어서, 그 전도자체가 이미 성공이기 때문에, 실적이나 업적을 가지고, 즉 교인수를 가지고 전도를 잘했니 못했니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노아가 8명밖에 전도하지 못했다고 해서 지금 하늘나라에서 무릎을 꿇고 야단을 맞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방주를 그렇게 크게 지었는데, 도대체 이게 뭐꼬? 이것도 전도하고 했어?" 라고 말이다.

다만 우리는 무엇의 기쁨인고 하니까, 복음에 발각이 되어서, 마치 마지막 암석과 같이 발각이 되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복음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하고 외면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하, 주께서 살아 계시는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저렇게 반발할 수 있는 인간인데, 그런데 왜 반발이 되지 않지? 참으로 이상하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

복음을 듣고 나서 질문을 하는 시간에 "목사님은 왜 그렇게 인간을 부정적으로만 봅니까?"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멘!' 소리만 나온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말씀은 곧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잡담거리가 아니고 말이다. 말씀은 지금 살아있어서, "니가 내 말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 라고 하는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이 그대로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그래서 저는 항상 뭐라고 하는고 하니, 제가 전하는 것이 복음에 대해서 아니라고 여긴다면 도대체 무엇이 복음인지 한번 이야기해보라고 말이다. "사람을 기분 바쁘게 한다. 니만 복음을 아나?" 식으로 하지 말고 말이다. 왜 그런가? 복음이 중요한 것이지, 자기가 기분 나쁜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서 !!

계속해서 교재 192페이지를 보겠는데, 지금 예수님께서 죽음이 무엇인지, 거기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려고 간다" 라고 하지 않고, "잠든 자를 깨우려고 한다" 라고 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구경해야 될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예수님 사이의 대화인데, 즉 그녀들이 어떻게 오해를 하면서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지, 그것을 제자들이 목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빠 나사로는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맞는데, 이 땅에서는 말이다. 그렇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잠이 들었는데, 그 잠을 깨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잠을 자는데 깨우면 어떻게 되는가? 당사자는 엄청 기분이 나쁜데, 그렇게 예수님은 잠자는 자를 깨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끝까지도 모두 다 보고 계신다는 말이다.

교재 192페이지를 살펴보자.

** 죽음의 의미를 인간들의 일상적인 죽는 현상에서 찾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어떤 죽음을 안겼는지, 거기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은 참 생명이 되시는 분에 피를 흘리도록 조치하신다.

(요 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 오직 예수님의 생명만이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가 이 땅에서 죽고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서 스스로 결정하신 것인데, 즉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서 의논된 사항이라는 것이다. 생명이 죽음으로 바뀌고, 그 죽음이 다시 생명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의 생명은 생명 축에서 들지 못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오직 예수님의 생명만이 진짜 참 생명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제 아무리 죽고 살아나고 해도, 그것은 백 날을 해도 헛된 짓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직 예수님의 생명이 이 땅에 와서 그 생명이 죽고, 그 죽은 생명이 다시 살 때, 거기에서 딸려 나온 자들만이 영생을 얻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바로 그 생명을 참 생명이라고 증거하도록, 그렇게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도록 예정된 자들만 구원을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생명이 어떻게 얻어지는지, 그게 교재 193페이지 이후에 '(5)생명의 의미' 라고 해서 나오는데, '(가)~(아)'까지 해서, 교재 마지막까지 그런 내용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앞의 목차에다 미리 표시를 해두어야 하는데, 어디 표시가 되어있나요? 앞에 목차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일대기 !!

(5) 생명의 의미
 가, 찾아오심
 나, 예정인가 게임인가
 다, 용서
 라, 귀한 존재
 마, 법과 피
 바, 피와 성도의 만남
 사, 빼앗음과 거저 주심
 아, 무덤에서 다시 만나자
 자, 순교의 즐거움

이런 식으로 생명이 우리에게 찾아오는데, 이것을 한꺼번에 이야기한다면 '예수님의 일대기'가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자기가 살아온 일대기를 다시 우리를 붙들어서 자신의 일대기를 복사를 해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의 복사지가 되어서, 그냥 예수님의 일대기가 그대로 복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것'이 되어버리는데, 즉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된다는 말이다.

◈ 성령을 통해서 복사를 !!

이렇게 복사를 할 때, 그것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내용들과, 그리고 사도서신의 내용들이 하나가 되는데, 즉 바울서신은 앞에 있는 예수님의 일대기를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복사한 것이라는 말이다. 성령이 오셔야 복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복사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구약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다고 하면, 이 십자가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부터 십자가까지 흘러가고, 이 십자가 뒤에 있는 다시 돌아와서 앞에서 흡수가 된다는 것이다.

◈ 이미 여러 도사님들이 !!

그러니 이렇게 1층만 있는 단층이 아니라 2층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단층, 즉 단선만 있다고 주장한 신학자가 있었는데, '오스카 쿨만' 이라고 말이다. 그가 '그리스도 시간' 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는데, 제가 신학교에 다니면서 그 책을 읽고 감동을 먹었다는 것이다. "야, 참으로 도사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학교수업에 얽매이지 않고, 도서관이나 기독교 서점에서 책들을 보게 되면, 성경과 신학에 대해서 천재들이 한 두 명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도사들이 말이다. 불트만의 경우에도, 그의 책들을 보면 믿음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는 것이다. 기존 역사와 모든 것을 다 부정하고, 오직 예수님의 사건만을 믿어야 한다고 하니, 그 얼마나 믿음이 좋으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책들을 보면서 느끼는 재미가 무엇인고 하니, 불트만이 믿음이 좋은지, 아니면 바르트가 믿음이 좋은지, 그러한 것을 살펴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몰트만도 믿음이 끝내주는데,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 이라고, 그의 책제목이 멋지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마도 부인이 먼저 보았으면 말렸지 싶은데, 그런 것을 책제목으로 하지 말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너무나 과격해서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어른들 눈밖에 벗어나서 잘리면 식구들은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ㅋㅋ). 이들은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들인데, 그리고 '한스 큉'과 같은 천주교 신학자도 엄청나다는 것이다.

◈ 오스카 쿨만 - '창조 이전부터 시간이' !!

그런데 이 오스카 쿨만은 어떤 다른 층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냥 아래층만 있어서 상식적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고 하니까, 인간의 몸은 시간 밖으로는 가지 못하고, 오히려 시간이 인간의 몸을 장악하고 있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즉 창조 때에 시간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 이전부터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국에 가도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오스카 쿨만에 의하면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당신은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라고 물으면, 그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한번 대보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천국에 왔다고 상상을 해보면, 그러면 그 천국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시간은 영원토록 흘러가는데, 그러면 시간이 이렇게 영원히 흐르는 것과 시간이 없다는 것이 같은 말인가?

지금 제가 너무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어거스틴이 시간의 창조를 주장하고 난 다음부터는, 그 후배 신학자들은 전부가 다 어거스틴을 따라서 시간과 공간은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오스카 쿨만은 시비를 걸면서, 그게 아니라고 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그만 오해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공간은 창조된 게 맞지만, 그러나 시간은 인간의 의식 속에, 즉 인간의 몸이 있는 이상, 인간의 몸은 시간을 느끼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그러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

다시 말해서, 인간의 몸이 시간을 느낀다는 것은 시간이 있다는 말이고, 그렇게 시간이 있다는 것은 천국에 가도 그대로 시간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곧 창세 전에도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 전에 시간이 있었다고 해버리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는가?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이전과 이후가 그만 성립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나중에 "이 양반이 현상학을 공부하지 않았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말이다.

아무튼 인간의 몸에서 신을 만들고, 예수를 만들고, 삼위일체도 만들고, 그러니 인간의 몸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몸은 만져지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스카 쿨만은 예수님의 몸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데, 인간의 몸이 아닌 예수님의 몸이 따로 있다는 것을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예수님의 몸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학자이니 엄밀성을 주장해야 하는데, 즉 교회에 가면 목사의 몸이 있고, 장로의 몸이 있고, 집사의 몸이 있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몸은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데, 그러니 사람들을 설득하고 꼬시기에 있어서 난맥상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 할아버지, 예수님이 관리해주십니다 ??

"우리 교인들의 마음씨가 참 곱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는데, 그렇지 않은가? "할아버지, 우리교회에 나오시면 관심도 가져주고 참 좋습니다. 자식들보다 더 잘 돌보아드립니다. 정말이지 사랑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라는 것이 말이 되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할아버지의 몸을 관리해주십니다" 라고 하면, 그 할아버지는 무슨 말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몸을 믿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교회로 사람을 꼬드기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예수님이 좋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되고, "우리 교인들이 좋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신학도 그렇게 따라가고 말이다. 왜냐하면, 신학은 교회가 잘 되어야 하니 말이다.

◈ 교인들이 나빠요 !!

그러면 반대로 해보면, "나는 어느 교회에 안 다닌다" 라고 했을 때, "그러면 나쁜 예수인가?" 라고 하면, "그것은 아닌데, 교인들이 나쁘다. 그래서 교회에 안 나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교인들이 나빠서 교회에 안 나간다면, 그 사람은 결국 무엇을 보고 온 사람인가?

그가 바라보는 것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 그것을 살피려 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믿음이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즉 "목사가 다른 예수를 전하던가?" 라고 했을 때, "그것은 아닌데,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나쁘더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불신자들과 접촉할 때, 불신자들은 예수님이 아예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 이렇게 좋은 사람이 된다" 라는 것을 무기로 내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시댁에서 며느리를 보고 "아가야, 지금 교회에 안 다니지? 교회에 다니면 이렇게 잘 된다. 그러니 교회에 나오너라" 라고 제시하면, 그러면 그 며느리는 시댁을 이용하려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성경해석은,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겨냥해서 !!

그런데 생명이 직접 찾아오면 어떻게 되는가? 무엇을 겨냥하는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겨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난번 수련회에서 한 '70이레' 마지막 대목에 보면 나오는데, 녹매교회에 그것을 잘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어서 준 것이 있는데 말이다.

거기에 보면 마지막 부분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는데, 즉 성경해석은 생명나무 쪽에서 무엇을 건드리는고 하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자를 건드려서, 인간은 빼버리고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겨냥하는 식으로, 그것이 바로 생명이 직접 찾아와서 하게 되는 성경해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몸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인정하지 않는데, 우리 몸은 아침 먹고, 점심 먹고, 또 저녁 먹고, 그렇게 자기 몸밖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거론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아침에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고 월급을 받아서 먹고살면 되는데, 왜 굳이 성경을 건드리겠느냐는 것이다.

◈ 인간의 독자적인 영역구축 !!

그래서 생명나무가 올 때는, 사람들이 외면하고 전혀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선악과 쪽을 건드리면서 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먼저 "나는 신이다" 라는 것이고, 두 번째가 "나는 부끄럽다" 라는 것이고, 세 번째가 "나는 내 힘으로 살겠다" 라고 하는 독자적인 영역의 구축이라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을 때, "저 여자가 따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담은 여자와는 상관이 없는 자기만의 세계를, 그것을 테두리, 혹은 윤곽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혹은 울타리라는 것이다. 자기만의 울타리를 건설하는 것인데, 즉 '자아성' 이라는 것이다.

◈ 선악과를 따먹었음을 안다는 것은?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어서 분명하게 된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하나는 흙이 되는 것이고, 그 다음은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를 받는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내용을 안다고 하는 것은 이미 누가 접근했다는 말인가? 생명나무 자체가 접근해서 터치를 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드러나면서 말씀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 몸이 너무 아파서 "왜 이렇게 아프지? 교회에 가볼까?" 라고 해서 교회에 갔는데, 그런데 거기서 선악과를 따먹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와 자기 몸이 아픈 것을 연계시키게 되는데, 즉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내 몸이 이렇게 아프고 결국 죽는데,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지?" 라고 해서, 그 선악과로부터 해서 계속해서 확산을 하다보니 성경말씀에 대해서, 그 내부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 성도는, 자기 몸이 아닌 성경말씀에 관심이 있어야 !!

그러니 성도라고 하면 그 특징이 무엇인가? 성경내부의 그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그러한 성경내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고 하면 성도라고 이야기하기가 정말이지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누가 뭐라고 해도, 성도는 성경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성경의 그 내부의 세계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교회에 몇 번 다녀간 사람들이 밖에 나가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제가 설교시간에 성경말씀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니, "이근호 목사는 성경만 이야기한다"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해서도 좀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생명나무가 다가오지 않아서 선악과의 존재에 대해서 모르고, 그냥 자기 몸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오직 자기 몸뿐인데, 그런 자기 몸을 위해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있어야 하고, 크리스마스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몸 중심으로 말이다. 즉 생명나무가 다가오게 되면, 즉 생명나무가 나타났다고 하는 흔적이 무엇인고 하니, 선악적인, 즉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하는 결과가 도출되면서 그 현장에 생명나무가 출몰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재 193페이지의 '찾아오심'의 내용인데, 한번 살펴보자.

** 인간보다 뭔가 우선해서 있다는 것은, 인간의 절대성과 인간의 독자적 행동에 제약을 가하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된다.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만남은, 알다시피 그게 에덴동산에 다같이 있었던 나무인데, 그 나무가 동산의 중앙지점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동산의 한 가운데를 말이다. 그러면 물은 어디서 나오는가? 에덴동산에 4개의 강이 흐르는데, 그 강들은 동산중앙의 나무가 있는 곳에서부터 발원한다는 것이다.

(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 2: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보니까 마치 요한계시록 22장과도 비슷한데, 즉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수의 강이 흐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과 서로 아주 유사한 구조를 보여준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흐르는 생명수의 강 근처에는 온갖 아름답고 귀한 보석들이 서로 자태를 뽐내면서 장식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계 22: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 에덴동산은 천국의 모형이 아닌가?

그러니 에덴동산을 설명할 때, "에덴동산에 쓰레기통이 어디 있지?" 라는 식으로, 에덴동산의 한 구석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를 이야기할 때는 항상 중앙에 있는 나무와, 흐르는 강과, 그리고 꾸미고 있는 귀한 보석들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국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모형과도 같다는 것이다. 마치 건축 설계사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작은 모형처럼 말이다. 그런 모형으로서 미리 만들어진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 활동했던 아담도 어떠한가? 장차 천국의 주인공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하나의 모형으로서 아담이 미리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도 참 이쁘게(?) 노신다는 생각이 드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미리 아담을 만들고, 그리고는 악마의 등장까지도 모두 다 도출해내신다는 것이다. 

이 악마는 그리스도에게는 손대지 못하는데, 하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섬기는 인간들은 마지막 때에 우는 사자와 같이, 마지막 택한 자까지도 미혹을 시키기 위해서 온갖 좋은 기적들은 다 동원시킨다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말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무효화시키기 위해서, 즉 그것을 희석시키고 인간들이 외면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 선악과를 따먹은 놈은 다나와 !!

그러므로 생명나무로 오신 예수님의 활동은 이미 목표가 정해져있는데, 즉 "선악과를 따먹은 놈은 다나와. 선악과를 따먹는데 가담한 놈도 다나와. 그리고 제일 배후에 있는 놈도 나와" 라고 해서, 그게 악마인데 말이다. 이 악마를 드러내기 위해서 남자와 여자를 나누는데, 그래서 여자는 남자의 지배를 받고, 즉 남자는 여자의 머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가정조차도 무엇을 보여주는가? "선악과를 따먹은 놈은 다나와" 라고 하는, 그것을 밝히는 구조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그런데 굳이 선악과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천국에 가면 무엇이 없는가?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는 없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결정권은 누구에게만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선과 악에 관계된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것이지, 피조물인 주제에 선과 악을 알아서, 자기가 선한 쪽의 인간이 되려고 하는 모든 부질없는 시도는 전혀 인간이 할 몫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생명나무가 주는 은혜만을 증거하면 되는 것이지,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고 따지는 짓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 '지장보살'을 아십니까?

어제 '지장보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게시판에 보니까 은혜를 받은 사람도 있어 보이고 말이다. 그분이 인터넷에서 지장보살에 대해서 검색을 해보고 글을 뭐라고 썼는고 하니, "왜 이근호 목사님이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서 이단이라고 하는지 이제 알겠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상보살이 상세하게 나와있는데, 즉 불교나 개혁주의 신학이나 주장하는 것이 똑같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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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장보살(地藏菩薩) - 지장보살은 범어로 크시티가르바(Ksitigarbha)이며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 관세음보살과 함께 가장 많이 모셔지는 보살입니다. 지지(持地), 묘당(妙幢), 무변심(無邊心) 등으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지장보살이 가장 잘 알려진 이름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과 미륵부처님 사이의 부처님이 안 계신 시대에 육도(천상, 인간,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의 중생을 교화하는 큰 보살님이십니다. 특히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지옥에 들어가 죄지은 중생들을 교화 제도하는 지옥세계의 구원자이십니다. "지장보살본원경"에 의하면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서원을 하였다고 합니다. "지옥이 텅 비지 않는 다면 결코 성불을 서두르지 않겠나이다. 그리하여 육도의 중생이 다 제도되면 깨달음을 이루리이다" 라는 큰 서원을 하셨기에 예불문에서는 대원본존(大願本尊)이라고 하여 4대보살님으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 네이버 지식과 답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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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곧 자기 욕심을 줄이면 업을 쌓아서 복이 온다고 하는 수법인데, 그것은 바로 선과 악을 자기 스스로 판단해서, 자기로 하여금 악을 멀리 하고 선을 가까이 하면, 자기 스스로가 신이 될 수 있는, 그런 위대한 하나의 방책이 된다는 것이다. 신이 되지 못해서 환장을 했는데, 그게 나이키 신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나이키도 여신인데, ㅋㅋ) 자기가 그렇게 신이 되려고 난리를 치는데, 그것이 곧 유기체인데, 즉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가 다 신이라고 인정해주자는 것이다. 그게 노회이고 말이다.

◈ 사도바울 - '나는 내 이름으로 세례를 준 적이 없다' !!

하지만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은 "우리는 주님 때문이 살아가는 쪼다입니다" 라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소위 복음을 안다는 자들끼리 모여도 뭐라고 하는가? "니는 어느 파에 속한 복음을 아는가?" 라고 나오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는가? "나는 내 이름으로 세례를 준 적이 없다" 라고 했는데, 즉 자기를 세례를 주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고전 1:12)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전 1: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고전 1:14)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고전 1: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교회의 모든 조직과 질서와 같은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와 성만찬도 다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 한계는 무엇인가? 그런 것들이 결국 구원이 능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온 이유는 무엇인가?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교회를 만들고, 그런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세례를 베풀고 성만찬을 하는 것은 자기 임무가 아니라는 말이다. 즉 그런 것은 전혀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 지상의 교회는, '시커먼스' !!

이미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부터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은,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그 흔적들이, 즉 복음자체가 생명나무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끊임없이 유발된다는 것이다. 교회라는 현장에서 말이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도 마귀가 들어와 있고, 에베소서, 갈라디아 등등, 그 일곱 교회에 전부 다 부정적인 것들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미 진짜 교회가 있기 때문에, 그 교회의 그림자로서 있다는 것이다. 왜 그림자는 시커멓지 않는가? 그래서 지상에 있는 교회는 시커멓다는 것이다. 그런 시커먼 교회를 통해서 진짜 교회는 따로 있음을 보여주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교회들을 개판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그만 나가 주세요" 라고 하면 안 되는데, 그러면 남아 있는 자들끼리는 괜찮은 자들이 되고 마는데, 그래서 우리교회는 나가달라는 소리를 일절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다 알아서 나갔지 말이다. 물론 다시 오고 싶으면 알아서 오면 되고 말이다.

교재 193페이지를 다시 보자.

** 인간보다 뭔가 우선해서 있다는 것은, 인간의 절대성과 인간의 독자적 행동에 제약을 가하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된다.

◈ 악마의 고유성 !!

여기에 보면 '인간의 절대성과 인간의 독자적 행동'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곧 '악마의 고유성'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만의 고유함' 인데, 마귀는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인간에게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마귀가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이 인간에게 납득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유혹한 악마에 의해서 선악과를 따먹어서, 온 몸에 그 독약이 이미 다 퍼져버렸는데, 그래서 알아듣는 것은 그 선악과의 사고방식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교회로 우르르 몰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노아의 방주에는 몇 명이 들어갔는가? 여덟 명, 달랑 한 가족만 들어갔는데, 반면 그 시대에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는가? 도저히 숫자로 비교할 바가 못되는데, 전혀 게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다가 보면 항상 듣는 소리가 무엇인가? "그렇게 전하면 몇 명이나 믿겠노?" 라고 하는데,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나중에 천국에 가면 예상외로 제법 많다는 것이다. 몇 천년을 다 모아서 그런지 몰라도 말이다(ㅋㅋ).

하지만 이 시대로 보면 언제나 적은 자인데, 그래서 "두려워 말라. 하늘나라는 너희 것이다" 라고 하는데, 항상 그 시대에서도 적은 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반대쪽은 왜 그리 많은가? 그쪽은 흙인데, 흙은 아무리 많아도 뭉쳐봐야 하나의 흙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같은 피조물인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다는 것은, 피조물이 감히 피조물의 경계선을 의식하고 허물어서, 신의 영역까지 침범하겠다는 음모가 발생한 것이다.

◈ 에덴동산에 웬 비무장지대가?

쉽게 말해서, 악마가 하는 말이 "내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너도 협조해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반란에 동참할 줄 알고 심어놓은 것이 곧 선악과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지마!' 라고 하신 것은, 피조물은 피조물끼리, 그리고 창조자는 창조자끼리, 그렇게 경계선을 쳐놓았다는 것이다.

에덴동산 한 가운데에 무엇이 있었는가? 비무장지대가 있었는데, 즉 그 자체가 남북으로 갈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에덴동산은 분단된 국가인데, 피조물과 창조주가 말이다. 그러니 에덴동산의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까, "너희들은 이래서 피조물이야" 라는 것을 규정해주는 동산인데, 그리고 "창조자는 이래서 창조자이다" 라는 구별이 지어진 동산이란 말이다. 그게 곧 우주의 축소판이고 말이다.

그것을 명확하게 하는 동산이 곧 에덴동산인데, 그런데 그런 에덴동산을 떠난다고 해서 어디 그 원리원칙이 없어지겠는가? 그것이 아니고, 그것이 그대로 따라와서 이 세상에서 에덴동산의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 에덴동산의 원칙을 이 세상에 적용시켜 버린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194페이지를 보자.

** 만약에 인간이 절대적으로 독자성을 추구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이 세상에는 인간보다 먼저 있음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기어이 그것을 점령하고 잠식하고 삼키고 말아야 한다, 인간 말고 '있음'은 '인간 나만의 있음'에 복속이 되고 흡수통합이 되어야 할 대상에 해당되는 것이다. 정복이 되어서 오로지 인간만이 '절대적으로 있음'으로 종식되어야 한다.

◈ 인간, 나만의 있음 !!

여기에 '인간 나만의 있음' 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여기에 사람이 있고, 또한 교회가 이렇게 있는데, 그런데 이렇게 교회가 있는 것은 교회가 실제로 있어서 있는 게 아니라, 자기가 이렇게 있을 경우에만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좋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실제로 좋은 것이 있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한다는 관계 안에서만 그것이 자기에게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아무리 아름다운 들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냥 지나가면 모르는데, 그런데 집에 무슨 일이 있어서 급히 걸어가다가 그만 돌 뿌리에 걸려서 넘어졌는데, 그 넘어진 곳에 들꽃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아하, 여기에 들꽃이 있었네" 라고 할 때 비로소 그 들꽃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자기가 의미를 가지고 불러줄 때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남에게 이야기를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 사람은 다른 볼일이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 사람은 지금 바이어를 만나서 장사를 하기 바쁜데, 그러니 거기에 들꽃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들꽃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사람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조금 지저분하지만 말이다. 친구들과 같이 산에 놀러갔는데 마침 너무나도 볼일이 급해서 그냥 산 속에서 봤다는 것이다. 그런데 휴지가 없어서 그만 그 옆에 있는 나뭇잎으로 뒤처리를 했는데, 그런데 잎이 부드럽지를 못하고 까끌까끌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나뭇잎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어도 자기에게는 너무나 아프고 깊은 의미를 가진다는 말이다(ㅋㅋ).

◈ 하지만, 인간은 그 '한계'로 인해서 !!

아무튼 항상 어떤 지점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 경우에는, '나' 라는 존재가 거기에 먼저 선점을 해서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들이 자기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자기의 영역이 되고, 자기의 세계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한계가, 즉 범위가 있는데, 그러니 그것을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인생을 평생동안 살다보니 그것이 뭉쳐져서 그것이 곧 자기의 고유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의 관습이 되고, 그래서 인간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나이가 50이 되던 60이 되던 말이다. 그러니 그런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도를 아십니까?" 라는 것과 똑같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챙긴다는 것이다.

거리에서 "도를 아십니까?" 라는 것이 무슨 교인가? 천도제를 지내고 하는데 말이다. 그들이 어떻게 접근을 하는고 하니, "당신은 기가 너무 좋습니다" 라고 하면서 상대방에게 칭찬으로 붕 띄워주는데, 그렇게 해서 꼬드긴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를 칭찬해주고 자기를 기쁘게 해줄 때, 또 하나의 새로운 절대적 신의 세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즉 더 넓어진 마귀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아무리 연관된 것이 많이 있다고 해도 결국은 무엇만 있는가? 결국 '나'만 있다는 것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있는데, 사실은 그 말이 맞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있는 나만 있다" 라는 것이다.

◈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 !!

여기 교재에 보면 "인간은 나만의 있음에 복속이 되고 흡수통합이 되어야 할 대상이다" 라고 하는데, 복속이 무슨 의미인가?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 안에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좋지 않아도 남에게 좋으면 기분이 나쁜데, 그런데 하늘나라도 같은 움직임이 아닌가? 모두가 같은 움직임이라는 말이다(?).

지금 울산에서는 대게가 잡히지 않는다고 하는데, 씨가 말랐다는 것이다. 암수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다 잡아서 말이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영덕 강구 쪽이 좋은데, 손님을 빼앗기지 않아서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 자영업자가 600만이라고 하는데, 강남 청담동의 경우에 100미터 안에 커피숍이 무려 30개가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모든 것이 '나'만의 의미가 있을 때인데, 그러니 현재 대통령에 대해서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에게 이익이 있던지, 그런 의미가 있을 때는 무조건 좋은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즉 "나는 무조건 좋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 곧 인간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일종의 조직신학인데, 아무튼 자기에게 무조건 좋다는 말인데, 물론 따지지도 말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친구에게 자랑을 하니, 친구가 "저 여자가 왜 그렇게 좋은데?" 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을 하겠는가? "좋은 걸 어떻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냥 좋은데, 그것을 어떻게 표현을 하느냐는 말이다.

◈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는 어떻게 하시는가? "너를 좋아하지 말고, 나를 좋아하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자기 목숨을 사랑해서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고, 반대로 미워하면 얻는다고 말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라는 말씀도 역시 같은 의미이고 말이다.

(마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정도로 정리하면 이제 복음과 개혁주의 신학의 차이점을 제대로 알았지 싶은데, 개혁주의 신학은 일종의 자기 구원 프로젝트인데, 즉 "하나님, 나를 어떻게 구원하실 겁니까? 그 방법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라는 것이란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그 따위로 하는 니가 곧 마귀이다" 라고, 즉 "너는 너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야" 라고, 그렇게 자기 존재이유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 그게 곧 복음이란 말이다. 주님을 위해서 창세 전부터 부름을 받은 것이지, 자기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는 말이다.  

그것이 교재에 나오는데, 계속 살펴보자.

** 그래서 인간 앞에는 아무 것도 있으면 안 된다. '없음' 뿐이어야 하며, 그 '없음'을 채워나가는 것은 오로지 홀로 있는 인간이 채워주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 주님께서는, 우리의 '있음'을 '없음'으로 !!

그러니 주님께서는 우리의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어서, 그 없는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를 없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은 것을 주시고,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을 주신다는 말이다. 환난과 핍박을 언제 우리가 원한 적이 있었는가?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을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도 싫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싫고, 전도하는 것도 싫은데, 그런데 주님께서 그것을 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참 믿음도 좋네" 라고 하는데, 남의 속도 모르고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죄인에게 무슨 기도가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하겠는가? "저는 그것을 전혀 원하지 않았는데,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못된 인간인가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그래서 기도를 하게 하셨고, 전도를 하게 하셨고, 헌금을 하게 하셨습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은혜를 받아서 헌금을 했다고 하면서 자기 행함을 주장하니 얼마나 기가 찬지 모르는데, 무슨 발람도 아니고,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장보살처럼 자기만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우긴다는 말이다.

* 질문 - 인간의 보편적 욕망은 물질이나 윤리나 선과 같은 것을 다 추구하게 되는데, 그런데 개별적 욕망은, 즉 테레사 수녀의 경우에 칭찬을 해주는 것은, 그런 것은 윤리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 윤리 이전에, 그래서 제가 선악과 이전에 '있음' 이라고 했는데, 생명나무의 있음이라고 말이다. 자기가 있기 때문에 그 있음을 가지고 자기 있음에 채우려고 하는데, 그런데 주님은 무엇인가? 우리가 헌금을 해도 주님을 그것을 헌금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없게 만들게 되면, 즉 자기는 있다고 여겼는데 없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 어리석은 자여 !!

여기서 주님이 노린 것이 무엇인고 하니, "너도 없어. 너는 없는 존재인데, 그런데 내가 매일같이 살려낸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자를 보고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꾸만 이렇게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는 것은 누구만 있다는 말인가? 들풀이 있고 참새가 있는 것은 누가 있기 때문인가? '내'가 있기 때문에 아니라, 참새가 있게 하신 것은 누구인가? 주님만 있으면 되는데, 그 주님께서 참새가 있게 하듯이 오늘도 우리를 있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있음의 능력과 공로를 누구에게 돌려야 하는가? 당연히 주님께 돌려야 하는데, 그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있음과 없음으로서 결정하신다는 것이다.

◈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로 있기에 !!

그런데 우리는 있게 되면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로 있게 되는데, 그러니 어떻게 하든지 간에 현재의 이 있음을, 즉 선악의 있음을, 자기 착함의 있음을, 자기 믿음이 있음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자꾸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자기 의(義)로 끄집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영덕게를 많이 잡히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지만, 하지만 그 순간 그 사람은 울산에서 게가 없는 것을 의도적으로 차버린다는 말이다. 아무튼 자기만 복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녹취자 - 울산이나 영덕의 강구나 거의 같은 곳에서 게를 잡지 싶은데, 참고로 우리나라 근해에는 대게는 이미 거의 씨가 말랐고, 대부분이 러시아산임. 아, 먹고 싶다!)

이렇게 이 세상은 상대적인데, 즉 자기가 웃고 있으면 남들은 울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아이는 대충했는데도 이번에 또 일등을 했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을 모독하는 것인가? 하루에 단 두 시간만 자고 죽으라고 공부해서 20등한 아이를 모독한다는 것이다.

◈ 오늘의 '있음'은, 주께서 있게 하셨기에 !!

그러니 있다고 하는 것은, 없어도 되는데 있게 하셨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하셨는가? 주님이 계시기에, 날마다 베풀어주시는 그분의 은혜로 우리가 있음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주신 자도 주님이기에, 오늘밤에 데리고 가도 감사할 뿐이라는 말이다.

어제 설교시간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라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인데, 즉 나사로처럼 이 땅에서 없어지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렇게 잘 잘고 있는데, 괜히 깨워서 성질만 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 잘난 누이동생들 때문에 말이다.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194페이지를 보자.

** 이것이 이미 선악과를 따먹어버린 인간들의 '세상보기'이다. 그런데 세례요한이라는 자가 자기 상식에 어긋난 소리를 한다.

(요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 세례요한의 경우에 !!

세례요한이 어떻게 죽었는가? 그의 죽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앞부분만 이야기하고, 즉 "세례요한은 자기 아버지가 성령을 받아서 그의 이름까지도 계시를 받아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라고 한 다음에, 그 사람들에게 그 뒷부분을 한번 매워보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역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달라도 뭐가 달라. 얼마나 복음을 잘 전하는지, 사람들이 다 존경을 해서 나중에는 훌륭한 당회장이 되고 총회장이 되었어" 라고, 그렇게 끝이 나야 앞과 뒤가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부흥사들이 뭐라고 구라를 치는가? 자기는 처음에 목사가 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즉 "너는 목사가 되어라" 라고 해서 되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기적들이 쏟아지고 성공적인 목회를 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세례요한의 끝이 과연 그러한가? 그의 끝은 그야말로 비참하게 죽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는 반대로 그의 끝을 먼저 이야기하면, 즉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죽을 때 목이 잘려서 그것이 쟁반에 담겨지게 되었는데, 그것도 여자의 말 한마디에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 그 가족들도 기절을 할만큼 충격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시작은, 즉 출생의 꿈자리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라고 말이다.

만약에 그렇게 꿈자리를 비워놓고 그것을 매워보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당연히 사람들은 그가 태어나는 꿈자리가 불길했다고 이야기할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생각하는 앞뒤가 전혀 맞아떨어지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앞뒤가 말이다.

◈ 태어나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런데 !!

제가 결론은 내려보면, 세례요한은 처음부터 사무엘처럼 없어도 괜찮은 존재였다는 것이다.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데, 다만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야곱이나 그렇게 고생한 예레미야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즉 주님께서는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데 태어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욥의 경우에, 자기는 태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태어난 다음에 경험하도록 하시는데, 가진 것은 다 날라고, 몸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고 말이다. 그래서 욥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이여,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태 중에서 죽게 만들지, 이럴 것 같으면 왜 태어나게 합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이 이렇게 인간의 근원에 대해서 솔직히 이야기해주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고마울 뿐인데, 왜냐하면 그런 외침이 바로 우리 자신의 외침을 대변해주니 말이다. 우리도 평소에 그렇게 외쳐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치통이 있는 분이 실감이 나지 싶은데, 얼마나 아픈지 이빨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이 다 흔들린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죽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골치 아픈 인간이 옆에 있으면 뭐라고 하는가? "내가 빨리 죽어야지. 오래 사니 이런 꼴을 다 본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 - '있음'의 의미를 !!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이러한 '있음' 이라는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있는 것, 그것을 두고 '이스라엘'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오직 이스라엘을 주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즉 이스라엘은 주님을 위해서 있다가 멸망을 했다는 것이다.

(시 135:3)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찬양하라
(시 135:4)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그런 것을 안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말씀의 세계 속에 들어온 사람이기 때문에, 즉 이미 구원을 받은 자라는 말이다. 그렇게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행동들이 다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우리 자신의 자리를 돌아보게 하시고, 우리 분수를 깨닫게 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고 듣는 것과 말씀 속에서는 헤엄치는 것이 너무나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하셔서, 전도를 한다고 해서 전도가 아니라, 삶 그 자체가 전도가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2,11 오후 1시에 마침. 

                                                          그런데 왜 자꾸만 '지장보살'이 땡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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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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