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63강 무조건

피/피 2012. 8. 29. 10:56

피63강 무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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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20116피p198무조건

피63강 무조건

[12 대구강의 2] - [피 63] - 무조건

                                                   12,01,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침투하는 두 나무의 질서 !!

오늘은 교재 198페이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간보다 앞선 분의 입장에서 일하신다. 비록 인간들은 선악과 과실과 생명나무의 과실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추방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선악과나무의 실체와 생명나무의 실체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 우주 안에 펼치시려고 한다. 그것은 두 나무가 말해주는 질서가 인간보다 앞선 질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보면,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의 질서가 인간보다 앞선 질서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인간들끼리 살면, 우리 인간들이 어떤 동화를 쓰고 소설을 만들어내어도, 그것은 같은 인간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데, 그런데 인간 외에 다른 어떤 존재자가 질서를 만들어내면 어떻게 되는가? 그 질서로 인해서 우리 인간은 파괴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은 하나님 나라의 공격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것이 교재에 보면 그 뒤에 나온다는 것이다. 즉 "거룩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 세상이 무너진단다. 남김없이 무너진단다. 몰살이다. 공습이다. 폭격이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 질서의 침투는 기존질서의 파괴를 유발하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세계를 붕괴시키려고 공격을 하시는 것이다. 거룩하지 않다는 이유로, 세상이 무너진단다, 남김없이 무너진단다. 몰살이다. 공습이다. 폭격이다.

◈ 애굽의 장자의 경우에 !!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고 공격하시는 기준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거룩하지 않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그 당시에 애굽에서 살고 있던 각 집안의 모든 장자들이 모두 다 죽었다는 것이다. 각 집안의 장자들이 말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9가지의 재앙이 있었는데, 그 10가지 재앙들을 보게 되면 그 내용들이 어떠한가? 사람들은 자기가 나쁜 짓을 해서 벌을 받으면 상식적으로 수용이 되고 또한 납득이 되는데, 그런데 이 10가지 재앙들은 인간들이 나쁜 짓을 하고 말고 하는, 그런 인간들의 잘잘못의 유무를 전혀 떠나있다는 것이다.

어디 애굽에서 나쁜 짓을 맏이들만 했는가? 착하고 성실한 맏이도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말이다. 맏이가 그 얼마나 부모에게 효도를 잘 하는지, 오히려 동생들보다도 훨씬 더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부모를 잘 섬기는 맏이가 죽는다는 것은,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말이다.

인간 쪽에서 선을 행하든지, 악을 행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그러한 공습에 대비해서 착해진다고 하는 것이 전혀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어쩔 수가 없는데, 즉 공습이나 폭격과 같은 것은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냥 '무조건' 이라는 것이다. 대처한다는 것이 우습기가 그지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여기 교재 197페이지에 나오는데,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신기하게 보고 있는데 말이다.

여기서 교재 197페이지를 보자.

**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런 사랑으로 시작된 것이다.

(롬 9: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 첫째, 하나님 사랑은 '심판'을 전제로 !!

여기에 보면,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라고 되어있는데,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공습을 하는 것도 무조건이고 이유도 없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또한 구원을 하는 것도 역시 무조건, 무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 그것을 두고 '사랑' 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두 가지의 조건이 맞아떨어져서 등장하게 되는데, 먼저 조건은 무엇인고 하니까, 심판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인데, 즉 인간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 사랑은 심판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심판은 무조건인데, 나쁘기 때문에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심판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질서자체가 하나님에게 인정받지 못한, 그런 질서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질서와 바깥을 교체하는 작업을 하신다는 것이다.

◈ 나아만 장군의 망설임 !!

물론 이렇게 교제할 때 인간들의 반발이 결코 만만치 않는데, 즉 "우리가 납득할 만한 방법을 동원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나오는데, 그가 소년의 말을 듣고 엘리사를 찾아가는데, 엘리사로부터 전달이 왔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내용인고 하니, "요단강 물에다 일곱 번 몸을 씻어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듣고 나아만 장군이 단번에 순종한 것은 아닌데, 왜 그런가? 나아만은 구원하는 방법이 자기가 알고 있는 방법, 그런 세계관으로 재생을 해보았다는 것이다. 즉 "요단강에 들어가라고 한 것은 물이 깨끗하기 때문에, 그래서 들어가서 씻으라고 했구나. 그러한 논리를 엘리사 쪽에서 제시했구나" 라고 했는데, 그런데 막상 그러고 보니 자기 나라의 강이 요단강보다 더 깨끗하다는 것이다.

◈ 행함 - '내가 수용할 수 있는 구원의 방식' !!

그러니 이게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구원방법에 대해서 그냥 순응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 한번 튕겨본다는 것이다. 구원의 방식은 그냥 사랑으로 오는데,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말이다. 그렇게 구원이 무조건적으로 오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그러한 사랑이 오더라도 그 사랑을 우리 선에서 받아들일 때는 무조건이 아니라 조건적으로 바꾸게 되는데, 그런데 그 조건은 자기 행함이 개입이 되어서, 그렇게 구원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구원의 질서를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하나님의 사랑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두 나무의 질서, 즉 선악과 생명나무의 질서에서 온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두 나무의 질서가 아닌, 기존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기 질서 속에서, 그렇게 구원의 방식을 수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도입하는데, 그것을 두고 '행함'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만두를 하나 주더라도 !!

예를 들어서, 엄마가 정성껏 만두를 만들어서 먹으라고 했을 때, 그런데 아이가 진흙탕에서 놀다가 그 더러운 손으로 만두가 먹고 싶다고 하면서 손을 내밀면, 엄마가 그 더러운 손에다 만두를 덥석 얹어주겠는가? 어떤 엄마라도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내민 손의 질서는 만두라는 엄마의 질서와 전혀 부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아이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아이는 자기 질서를 스스로 파기시키고 난 다음에야 엄마가 만두를 주는데, 그럴 때에 그 만두와 더불어서 주어지는 엄마 쪽의 질서가 그대로 아이에게 주입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마음바탕을 우리 쪽에서 가지면 된다는 것인가? 가지면 안 되는데, 즉 "내가 이런 식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라는 것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버리지 않으면, 기존의 자기가 알고 있던 질서에, 거기에다가 조금의 솜씨를 발휘해서, 그것을 구원까지 수용할 수 있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 기존 항만시설은 다 부셔져야 !!

적절한 예를 들어보면, 지금 아프리카의 동북쪽 이디오피아에서 내전이 한창인데, EBS에 이 나라의 실정이 방영되었는데 말이다. 과거에는 구호물자가 배를 통해서 와도 항만시설이 없어서 그것을 내릴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나라에서 도와주려고 하면 먼저 항만시설부터 고쳐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고 하면 기존의 이디오피아 항만시설은 다 부셔져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부셔지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것인데, 즉 무엇을 포기하라는 말인가? 지금까지 자기의 행함을 유발시켰던 기존의 사고방식에서의 모든 행함의 질서는 하나님께서 전혀 인정할 수가 없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이것을 챙기고 저것을 챙기는 방식으로, 그렇게 십자가를 챙기고 또 언약을 챙기는 식으로는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다시, 나아만 장군의 경우에 !!

다시 나아만 장군의 경우에, 엘리사가 요단강에 몸을 씻으라고 하니까, 그것을 "아하, 나의 분둥병에 걸린 이 더러운 몸을 깨끗한 액체인 물에 씻으면 낫는다" 라고, 즉 "깨끗한 것으로 더러운 것을 씻으면, 더러운 것이 씻겨진다" 라는 식으로 이해를 했는데, 그러니 "그럴 것 같으면 이 요단강보다 우리 아람나라의 강물이 더 깨끗한데, 그러니 차라리 우리나라에 가서 씻겠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럴 때 종들이 말렸는데, 즉 "지금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면 안 됩니다. 일단 한 번만 담궈보세요" 라고 말이다. 그래서 담궈보니 깨끗해졌는데, 그렇다고 하면 거기서 나아만 장군이 알았던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가 기존의 알고 있던 질서 속에서는 그 어떤 구원의 아이디어도 결코 마중을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을 자기 쪽에서 마중을 나가는 식으로 해서는 결코 구원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왕하 5: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왕하 5:10)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왕하 5: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왕하 5:12)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왕하 5:13)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 둘째, 구원은 '무조건' !!

그렇게 마중을 나갈 수 없다는 것은, 즉 일방적인 공격 중의 하나인데, 그러니 심판은 아까 말한 것처럼 공격인데, 그런 공격 가운데 일부가 무엇인고 하니, 두 번째로 "구원은, 무조건 구원이다"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심판도 무엇인가? 구원을 무조건으로 하기 때문에, 심판도 역시 무조건이라는 말이다. 즉 무조건 심판하고, 무조건 구원하고, 그것이 바로 사랑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자기 질서 안에 상대방을 예속시키는 것인데, 즉 "내가 너를 사랑해줄 테니, 너는 무조건 내 말을 들어야해" 라고 말이다. 바로 그런 늬앙스를 담고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계속해서 기존의 자기 사고방식을 유지한다고 하면, 제 아무리 사랑을 한다고 해도 결국은 헤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안양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즉 이렇게 두 사람이 있는데, 이쪽에서 저쪽과 대화를 한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해서 자기 영역을 넓혀나가는 것인데, 그렇게 포착하고, 포함하고, 체포하고 종속시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니 저쪽에서 이쪽과 대화를 하는 것도 역시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당기기 위한 하나의 열심 있는 노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둘이 실컷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은 갈라서게 되는데, 즉 하트가 쪼개진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에게 복종한다는 조건하에서 상대방에게 배려와 자비를 베풀어줄 용의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시장에서의 거래이고 협상과도 같은 것인데,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과연 이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을 마중 나갈 수 있겠는가? 즉 공통점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없다는 것이다. 없기 때문에, 기존의 불교에서 말하는, 혹은 신학자들이 말하는 사랑은 전혀 성경말씀이 이야기하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과 협상에 나서는 것이지 말이다.

◈ 그것이 곧 '산당(山堂)' !!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여, 당신이 인간을 만들 때 다 노린 것이 있지 않습니까? 서로 좋은 게 좋다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우리가 들어줄 테니,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당신이 좀 해주소. 그런데 만약 당신이 우리의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당신을 섬길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거기에 등장하는 신이 곧 '우상' 인데, 즉 서로 좋게 지내자는 것인데, 서로가 상대방의 약점을 치지 않고 말이다. 상대방의 한계를 나무라고 지적하지 않고, 서로가 필요로 하고 편리한 것만 주고받는, 그러한 신앙관계, 그것이 곧 '산당(山堂)' 이라는 것이다. 산당, 즉 우상인데, 그런데 이 산당의 문제점은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산당에 일요일마다 다니면 재미가 나고, 자기 보람도 느끼는데, 그런데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으려면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이유가 없는, 무조건 심판을 말이다. 그렇게 무조건 당하게 되면 영혼이 완전히 피폐가 되고 작살이 나는데, 그때 비로소 그런 병든 영혼을 무조건적으로 구원하시는 그 사랑이 새롭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 삭개오의 경우에 !!

삭개오의 경우에, 그가 힘들게 뽕나무에 올라갔을 때, "내가 키가 좀 더 컸으면. 하나님께서 나의 키를 조금만 더 크게 해주었으면, 이렇게 나무에 올라가는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텐데. 남들은 그냥 보는데, 나는 왜 나무에 올라가야만 하지?" 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때 주님의 눈과 마주쳤을 때 삭개오는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까지 자기가 생각한 자기에 관한 자기의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고, 즉 "내가 조금 더 유리한 조건이었으면 구원이 수월했을 텐데" 라고 하는 것은 말이다.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무엇을 어떤 식으로 내놓을 수 있는지, 그것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라고, 즉 "오늘 네 집에 구원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니, 삭개오는 자기가 기껏해야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가 부자이니까 돈만 내놓는다는 것이다.

(눅 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눅 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눅 19: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눅 19: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눅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눅 19: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 명품만 사다주는 웬수는 물러가라 ??

지난 금요일에 의존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강의를 했는데, 즉 아줌마들의 모임에서 어떤 여자가 자기 남편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욕을 하는데,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나는 당신과 같이 돈만 벌어다주고 옷도 명품만 사주는 웬수 같은 놈과는 더 이상 살기 싫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여자를 보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무엇인고 하니까, 남편은 이미 자기 조건하에 들어가는데, 즉 "제발 하나님만 알게 하는 남편이 되었으면 좋겠다. 돈만 퍼다주는 남편 말고 말이다. 나는 하나님을 아는 기쁨이 더 큰데, 그런데 그런 기쁨은 주지 않고, 매일 같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돈만 가져다주고, 명품만 사다주는, 그런 남편은 나의 웬수이다" 라고 하는, 그런 여자들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두 나무의 질서가 아니고, 자기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놓고는, 여기에 대해서는 양보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서 무조건 자기를 구원하라고 하니, 주님께서는 거기에 폭격을 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질서는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질서가 전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198페이지를 살펴보자.

**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약속한 것이 오늘에도 유효하다.

(수 11:6)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사르라 …
(수 11:8)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고로 그들을 격파하고 큰 시돈과 미스르봇 마임까지 쫓고 동편에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쫓아가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쳐죽이고 …
(수 11:11)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또 불로 하솔을 살랐으며 …
(수 11:14) 이 성읍들의 모든 재물과 가축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탈취하고 모든 사람은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
(수 11:20)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 '붙이시매 전쟁 !!

여기에 보면 조금은 어려운 성경구절들이 나오는데, 즉 '몰살시키리니, 쳐죽이고, 진멸하여, 저주받은' 라고 하는 표현들이 있는데,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냐는 것이다. 흔히들 상식적으로 이야기하는, 즉 인자하고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 하나님에게서 이런 말씀을 받고 있었어야 하는데, 성경말씀을 볼 때 신약부터 보지 말고 구약부터 봐야하는 이유가 여기서부터 성립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붙이시매 전쟁' 이라고 하는데, (표현이 참으로 댓길인데), 이 '붙이시매' 라는 간단한 용어를 가지고 여호와 전쟁에 있어서 그 모든 핵심으로 보고 쓴 박사학위 논문들이 몇 편 나와있다는 것이다. 물론 제대로 보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붙여준다' 라는 개념은 인간들의 전쟁에서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와 내가 싸우는 것이지, 제3자가 있어서 붙어라" 라는 식으로, 그렇게 해서 전쟁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에 누군가가 그렇게 하면, 당장에 "제3자는 그만 빠져라. 싸워도 우리끼리 할거야" 라고 할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어릴 때는 동네 형들이 "잘한다. 붙어라, 붙어라" 라고 꼬드겨서 그만 싸워서 코피가 터지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기면 짱이 되지만, 그만 지게 되면 집에 가서 부모님 몰래 돈을 가져다가 갖다 바치고 말이다(ㅋㅋ).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잘한다. 붙어라, 붙어라" 라고 해서 붙어서 싸우겠는가? 떨어지라고 하면 떨어지고 말이다. 그런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붙이시매 전쟁' 라고 하는데, 그런 전쟁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똑같은 인간들을 붙임으로 말미암아서 그러한 붙임을 통해서 없는 데서 새롭게 발생되는 인상, 즉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새로운 이미지가 등장한다는 말이다.

◈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심은, 오직 예수님의 죽음만이 !!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은, 여기에 A와 B가 있다고 하면, 서로가 약속을 바라본다고 해서 바라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이 서로 자기의 야심과 기대와 포부를 참을 길이 없어서, 상대방을 쳐부수어야 하겠다고 하는, 그런 욕망이 발휘되는 시점에서 주님의 약속은 어떤 식으로 등장하는고 하니, '죽음'을 통해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려운데, 로마서 8장 30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단계에 있어서, 즉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라고 할 때, 여기에 어떤 것이 개입이 되어서 정하신 자가 부름의 자리까지 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구원의 절차에 있어서 말이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외에는 없는데, 바로 그 십자가의 죽음에 의해서 정한 자를 불러주시는데, 그러니 그 권한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물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는 것에도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가고 말이다. 그러니 인간의 종교적인 열심과 열정은 전혀 여기에 개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로 가는가? 인간의 열심과 열정도 하나의 욕심인데, 그 욕심이 다른 사람들의 욕심과 부딪치는 가운데, 구원은 자기 욕심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새로운 희생, 즉 새로운 약속을 그러한 가운데서 끄집어낼 때, 그것이 바로 '정하신 자를 부르심' 이란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 사업이 폭삭 망하더라도 !!

이것을 추상적이 아닌 실제적인 예를 들어서 이야기해보면 쉬운데, 즉 "나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선택하기로 정해졌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주셨다" 라고 할 때, 그것은 논리상으로는 간단한 문제인데, 문장도 길지 않으면 후다닥 외우면 끝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세상에 나가서 사업을 벌렸는데, 그런데 그만 폭삭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업을 벌린다고 하는 것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이 자기의 개인적인 취미나 재미로 하기 때문에, 그런 자기 욕망에 의해서 사업을 벌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마주치는 것들이 방해를 하니까, "그래, 좋다. 니 회사가 잘되나, 내 회사가 잘되나, 한번 붙어보자" 라고 해서, 그렇게 붙는 가운데 그만 자기 회사가 박살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박살이 났는데,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 박살난 것을 가지고 '붙이시매' 라는 것에 쏙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구약의 전쟁에 말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붙여주심으로 말미암아서 자기의 뜻이 망가지고 박살이 나는 모습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는데 있어서, 자기의 그 사업실패가 하등의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새롭게 말이다.

◈ 이제는 말씀의 현실 속으로 !!

물론 우리가 논리적으로는 그것을 잘 아는데, 즉 자기에게 사업이 망하든 그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그것이 결코 주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시는 일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온 몸과 마음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감격과 감사함으로는 말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는 상황을,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붙이시매' 유발시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열매가 많아지고 소가 늘어나는 상황보다도 구원의 하나님이 더 기쁘다고 하는 것을, 그것을 과거에는 구약의 하박국에 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실제 자기의 리얼리티, 즉 말씀이란 현실 속에서 자기가 푹 담겨있다는 것을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합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풍성하고, 또 외양간에 소가 꽉 차있다고 하면, 요즘 소 한 마리가 얼마입니까? 물론 요즘은 엄청 싸지만(ㅋㅋ), 아무튼 그런 것이 얼마나 기쁘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쁨보다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더욱 기뻐한다는 것은, 그것은 성경 안에 박혀있던 문자가 튀어나와서 자기 인생을 그만 휘감아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고 돌아서면 농협대출을 갚을 생각을 하면 앞이 까마득하지 싶은데, 즉 구원의 기쁨은 좋은데 대출은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다. 소를 키우면 키울수록 더 많은 손해를 본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면 도대체 소는 누가 키우느냐는 것이다.

◈ 대장암에 걸려서 죽더라도 !!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이렇게 "부르신 자를 의롭다" 라고 할 때, 자기는 밥 퍼주는 사랑을 베풀고, 캄보디아에 가서 학교를 세워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하는데, 그렇게 온갖 구제와 착한 일을 다 한다고 하면, 후원회비를 받아서 자기가 한 푼도 착복하지 않지 않고 철저히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했는데, 그런데 그만 그 사람이 아프리카 수단에 가서 대장암에 걸려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렇게 착한 일을 하는데, 주님께서 받쳐주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지금까지 한 의로운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욕망이고 욕심이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라고 하시는 것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피만 전하면 되는데, 그런데 인간은 자꾸만 자기의 의로움과 수고를, 즉 자기 행함을 거기에 같이 끼어 들도록 하기 위해서 시건방을 떨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수단에 가서 실패하도록 하기 하심으로서, 자기 실패가 곧 누구의 성공이 되도록 하셨는가? 주님의 구원하심에는 하등의 지장도 주지 않았음을, 즉 주님의 성공하심에 대해서만 온전하게 기뻐해야 하는 것이지,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의 사업에 성공했음에 기쁨을 해소하는 식으로는, 그렇게는 전혀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나' 라는 인간이 죽는 과정에서 !!

그것을 두고 여호수아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쳐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누구에게 하는 이야기인가? 바로 우리 자신에게 하는 말씀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나' 라는 인간을 구약에서는 전부 다 쳐죽이는데, 그런 쳐죽이는 과정 속에서, 그렇게 주님의 약속대로 죽임을 당할 때, 그것을 믿는 자는 주님의 약속대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와 생명나무, 그 두 나무가 만들어내는 질서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질서에 대해서 하나님은 전혀 양보가 없는데, 인간에게 말이다. 즉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라는 식으로 구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 개입되어야 하는데, 그것 말고 다른 것이 개입하면 우리는 마귀의 종이 되고 마는데, 즉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할뿐이라는 것이다.

(롬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 목 베인 영혼 !!

아무튼 정하신 자가 이렇게 의롭게 되고, 그 다음에는 영광스럽게 되는데, 그 영광스러움이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목 베인 영혼' 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목 베인 성도의 대표자가 누구인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의 마지막 선지자인데 말이다. 그가 곧 세례요한인데, 이 세례요한은 실제로 자기 목이 베여서 쟁반에 놓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남들이 보기에, 아니 일가친척들이 보기에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냐는 것이다.

(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니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이지만, 성령에 의해서 예언이 된 사람들은 어떠한고 하니, 왜 주위의 사람들이 어릴 때 그 세례요한을 보고 얼마나 그의 미래상에 의미를 부여했겠느냐는 것이다. 즉 "성령에 의해서 태어난 자는 나중에 일을 해도 아주 큰 일을 할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벙어리가 되어도 말이다(?).

◈ 목사님, 목이 안 보이네요 ??

20년 전에 저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는 분이 있었는데, 자기 스스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즉 "이 목사는 나중에 크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분이 바로 대덕교회의 장로님인데 말이다. 그렇게 크게 된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 이후로 교회에서 3번이나 쫓겨났다는 것이다(ㅋㅋ).  

그런데 크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요즘 곰곰이 생각해보면, 제 목이 그야말로 간질간질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목이 있는지 없는지 가끔 확인을 해보곤 하는데(ㅋㅋ), 물론 그 장로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세례요한을 보니 실감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까마귀가 시체를 뜯어먹는,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는 말이다. 

그러니 크게 된다는 것은, 세례요한처럼 예수님의 크게 드러내는 것인데, 그게 가장 큰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장 고마운 분임을 가장 낮게 되어서 드러내면, 그게 가장 큰 사람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다운 면모를 가장 많이 드러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자기 잘남이 아니고 말이다.

스데반이나 사도바울이 그러한데, 그가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이다" 라는 말을 왜 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가장 크게 드러나는 방법이 그것이란 말이다. 자기 몸에 가시가 있어서 빼달라고 했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빼주지 않아도 그는 감사했다는 것이다.

◈ 성도는, 운명의 어릿광대 !!

그러니 이것은 바로 기존의 인간질서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몰살하고 폭격하고 멸망시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질서, 곧 두 나무의 질서를 펼치기 위한 필수전제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조건에 대해서, 이것이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무조건이기에 우리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 운명의 어릿광대인데, 이게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표현인데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붙여준다' 라는 것은 제3의 인물이 개입할 때인데, 그렇게 붙여주시는 분이 개입하게 되면 양쪽이 모두가 다 어릿광대, 혹은 허수아비가 되는데, 즉 운명의 허수아비라는 것이다. 절대적 운명의 허수아비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짜증을 낸다든지 싫어하게 되면, 그것은 여전히 자기의 행함을 유지하겠다는 반항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쁘고 즐겁게 수용해야 하는데,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와 소가 없는 외양간 이야기를 말이다. 그것을 기쁘고 즐겁게 듣는 사람이 있고, 또 억지로 듣는 사람이 있는데, 왜 억지로 듣겠는가? 그런 사람은 아직도 무화과나무의 열매와 외양간의 소에 미련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99페이지를 보자.

** 완전한 거룩, 완벽한 거룩이 아니면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경지는 스가랴서 14장 20절에 나온다.

(슥 14:20) 그 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

여기에 보면 "그 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라고 하는데, 여기서 성결, 즉 깨끗함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수준에서의 것은 아닌데, 인간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그런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켜라" 라고 하면, 우리 인간들은 최선을 다해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데,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것 자체도 문제이지만, 도대체 어디까지 지켜야 말씀이 요구하는 진짜 100퍼센트 합당한 거룩인지, 그것을 인간 질서 속에서는 뽑아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시는 것이 거룩이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 거룩이 아니라는 말이다. 

◈ 가우디 - '인간은 단지 발견할 뿐' !!

'가우디' 라는 건축가가 있는데, 그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가 바르셀로나의 그 아름다운 성당을 건축했는데, 20세기초의 유명한 세계적인 건축가인데 말이다. 그는 건물전체를 곡선으로 처리했는데, 마치 찰흙으로 빗어놓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에게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을 창조했습니까?" 라고 하니, "인간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주워먹는, 즉 발견하는 겁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만 그러한가? 자기 창조를 포기한, 그러한 사람에게만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이 열린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우리 인간이 다 주워먹지를 못하는데, 그만큼 눈이 열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것은 무시하고서 자기가 한 것만 우기다가, 나중에는 걸레조각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나님의 저주성이 온 우주에 드러나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한시도 쉬지 않고 저주받을 짓을 수행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날마다 분노하신다.

(시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 분노하시는 하나님 !!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물론 사랑의 하나님인데, 그 사랑이 무엇이냐고 할 때는, 먼저 그 전제가 분노하심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분노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강조하는 의미에서 다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의 심판은 조건이 있다고 했는가? 없다고 했는가? 없는데, 무조건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하라' 라고 했을 때, 그 하나님의 거룩을 우리 인간이 알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인간이 알고 있는 질서자체가 하나님의 것과 다르다는 말이다. 즉 인간이 알고 있는 질서자체에서는 최고의 거룩을 끄집어내어도 바리새인들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선 하나님에게 당하고 보는데, 바로 당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을 맛보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의 분노를 당하는 입장에서, 또한 매일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분노하신다. 이 하나님의 감정을 인간의 감정이 따라잡을 수가 없다. 흉내낼 수도 없다. 어떻게 인간이 매일같이 분노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하나님만의 독특한 평가기준을 갖고 계신다.

(시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우리 인간이 매일같이 분노하면 "아하, 하나님도 나처럼 분노하는구나" 라고 하겠는데, 우리 인간은 늘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기분이 좋으면 헤헤거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평가는 기존의 인간 자체질서에서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평가를 거부한다는 것은 기존의 인간의 모든 바탕 자체를 거부한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질서자체가 잘못되어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나님께서 세상 밑바닥까지 낮아진다고 해서 이 평가기준이 달라지지 않는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시면서 세상에 대한 저주성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뚜렷하게 드러내셨다.

◈ 하나님, 이 정도면 저도 낮지요 ??

우리 인간이 과연 세상 밑바닥까지 갈 수 있는가? 해저 9만리인가? 어떻게 기고 어떻게 바짝 엎드리면 되는가?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스스로 낮다고 여기는 그 수준도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기존의 인간이 알고 있는 인간의 어리석은 질서에서 나온 것으로서, 즉 "하나님이여, 이 정도 같으면 저도 낮지요" 라고, 기껏해야 그런 수준으로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낮다, 높다, 거룩하다" 라고 하는 그 모든 개념은 어디에서 나오는고 하니, 오직 예수님께서 하시는 그 예수님의 일 안에서만 관계가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전혀 아무런 관계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껏 낮다고 여기지만, 한번 건드려보면 버럭 화를 내게 되는데, 그러면 "아하, 아직 덜 낮아졌구나" 라고 여기는데, 그러면 인간이 화를 내지 않을 정도로 낮아지는 위치는 어디인가?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데, 즉 접근불가라는 말이다.

◈ 중이, 굳이 머리는 왜 깎는가?

중들이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마음을 낮춘다고 하는데, 그런데 머리는 왜 깎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저의 눈에는 그렇게 머리를 깎는 자체가 교만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이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주장하는데, 하지만 머리는 왜 깎느냐는 것이다.

물론 자기는 머리카락이 자꾸 자라니 귀찮아서 깎는다고 하지만, 그러니 그것은 그저 자기 몸에 편한 대로 그렇게 했다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제가 김용옥에게 묻고 싶은 것은 "당신에게 과연 당신의 몸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자기 몸이 편한 대로 가는 것은 맞는데, 그런데 그것이 옳은 행동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따로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평가를 할 수가 있는 기준이 말이다.

물론 없는데, 그래서 인간은 자기 몸이 편한 대로 살면 그것이 무조건 진리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렇게 하면 자기 몸이 편하니 말이다. 즉 자기 자신이 곧 진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가지고서 보편적 진리라고 주장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무지한 김용옥 !!

그런 면에서 김용옥 교수는 무지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 인간이 왜 자기 몸이 편한 대로만 하는지, 그 이유를 전혀 모른다는 말이다. 즉 "내 몸이 편한 것, 나는 그것이 왜 편하게 느껴질까?" 라는 이유를 대라고 하면 김용옥은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 앞에 있는 사람은 그 이유를 아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내 몸이 편한 것은, 나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저주를 받아서 죽었는데, 바로 그 저주를 받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 몸이 편한 대로 살아가는 것도 예수님께서 받은 그 저주의 이유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알 때, 그것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무엇을 해본다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새로운 질서가 왔고, 그 질서 속에는 우리의 행함이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행함이 바로 그 질서를 만들어가고 창조해가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단지 발견할 뿐인데, 즉 "이것도 은혜고, 저것도 은혜네.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네" 라고 하면서 발견할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일을 창조하고 말고 입장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새로운 질서가 주님의 질서라고 하면, 주님이 손을 댈 문제이지 우리 인간이 전혀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200페이지를 보자.

** 사도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일러주었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저주가 등장한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서 대충 봐줄 의사가 전혀 없다.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 사람의 기쁨을 구하면?

여기 10절에 보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라고 하는데, 이 대목이 의외로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내가 복음을 전했더니만 사람들이 기뻐했다" 라고 하면, 여기서 원인과 결과를 연결하게 되면,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고 복음을 알게 된 것을 기쁘게 유발시키는, 그러한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원인을 자기가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사도바울이 "나는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말씀과 충돌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기쁘게 한다" 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사람이 기뻐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기뻐하지 않아야 하는데, 기뻐한다면 말이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하니, 어떤 사람이 "목사님의 그 말씀을 듣고 나는 너무 기뻐요" 라고 하는데, 그래서 "이런 바보야, 내가 큰 죄를 지었구나. 어떻게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을 했을까?" 라고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되느냐는 말이다. 바로 그런 생각을 하는 자기 곧 자기 기쁨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라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사람의 기쁨 가운데는 무엇이 포함되지 않는가? 본인의 기쁨도 거기서 빠져야 한다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말씀과의 관계성 !!

다들 대답이 없는데, 논리적으로 그렇지 않느냐는 말이다. 왜 우리가 이렇게 논리적으로 들어가야 하는고 하니, 성경말씀 한 구절을 가지고 자기 주장을 우기는 자들이 있는데, 그러니 모든 성경구절들을 모아서 하나로 초점이 모아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성경구절들을 하나씩 따지게 되면, 그런 성경구절을 외우지 못한 자들과, 그리고 나중 치매에 걸려서 다 잊어버린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성경구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 자체의 중심이 자기에게 도달되도록 하는, 그러한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고 "나는 이 성경구절을 이해했다" 라고 하게 된다면, 그 이해한 것을 자기 장바구니에 담는 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중에 본인이 몸이 아파서 치매에 걸리게 되면 그 담은 것이 모두 새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빵구가 나서 흘러버리면 나중에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목사님들이 설교를 했을 때, 설교의 핵심은 기억나지 않고 재미있는 예화들만 기억나는 것과 똑같은 것이란 말이다. 초점이 없으니 다 새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만 재미있는 이야기가 초점이 되어버리면, 예수님을 향한 성경말씀들은 다 빠져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의 기쁨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사도바울의 경우에, 그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직접 내가 너희들에게 전하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나에게 관여했던 분을 통해서 너희들에게 들어가도록 하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기쁨이 나로 인해서 너희에게 전달되게 하는데, 그것은 내가 직접 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쁨이 일단 복음을 전하는 나 사도바울에게 와서, 나를 거쳐서 너희들에게 전달되고, 또한 너희들도 주의 기쁨을 받으면 그 주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된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게 데살로니가전서에도 나오는데, 즉 "환란 가운에서도 너희들이 하는 모든 신앙의 수고와 사랑의 인내가 나에게 큰 기쁨이 된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가? 너와 나 사이에 제3의 인물이 개입하고 있는 가운데 교류가 되고,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 통합이 되도록 예수님께서 하신다 것이다. 그러니 그런 통합의 질서를 우리가 앞장세워야 한다는 말이다.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렇게 주님의 기쁨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사도바울은 자기 기쁨을 스스로 미워하는데, 즉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라고 하는 인간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주신 기쁨보다도, 그렇게 예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그 기쁨을 본인이 하나의 자랑거리로 소유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주의 일을 하는데 감히 나에게" 라고, 즉 "나는 괜찮은 존재다" 라고 하면서 우쭐거릴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구원하심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의 일을 한다고 하는, 그런 보람과 같은 것으로 인해서 본인이 기뻐하게 된다면, 본인 스스로는 그만 절대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우월감을 가질 수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안 되는데, 그러면 하나의 게임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누가 누가 잘하나?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인간의 모든 게임과 시합과 투쟁과 같은 것은 모두 십자가 앞에서 무효가 된다고 말이다. 이 땅에서 "누가 누가 잘하나?" 라고 하다가, 나중에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주님께서는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인간들끼리 노는 게임에 대해서는 말이다. 우리가 무슨 게임을 했는지, 전혀 주님은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하는 게임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게임에 얼마나 목이 매여 있는지 모르는데, 심지어는 자살까지 하면서 말이다. 얼마나 쓸데없는데 힘을 쏟았는지 말이다. 남들은 잘 사는데, 자기는 이혼을 했다고 좌절을 하고 말이다. 그런 것이 다 게임에 속한다는 것이다. 

◈ 비트겐쉬타인 - '언어' !!

'비트겐쉬타인' 이라는 철학자가 이것을 간파했는데, 물론 복음을 안 것은 아니고 말이다. 그가 철학자로서 인간 사회를 연구하고 분석해보니,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자기 게임위주로 상대방을, 그렇게 자기 질서에게로 상대방을 끌어당기는 것이 있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게 곧 '언어' 라는 것인데, 즉 사람이 말을 할 때는 그냥 '가나다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하는 게임에 니도 같이 와서 놀아줄래" 라고, 자기 게임에 초청하는 입장에서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도나 설교도 마찬가지인데, 무엇을 말하든 간에 말이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아내에게 축구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너도 이제 내가 좋아하는 축구를 같이 좋아하자"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방과 같이 결합되는 본드역할인데, 그런데 그것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에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끌어당기는 식으로, 그렇게 대화가 쏟아진다는 것이다.

◈ 게임에 몰두하는 인간들 !!
 
그래서 비트겐쉬타인은 이 세상을 완전히 게임판으로 보았는데, 도박판으로 말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주식투자인데, 얼마나 흥미로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특히 그게 예측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스릴이 넘치는데, 경마처럼 말이다. 계속해서 실패를 해도 언젠가는 한 몫을 잡는다는 기대를 부풀게 하니, 지금 현재 자기 인생에 대한 활력소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있는 이유는 이런 희망 때문인데, 즉 아무도 알 수 없는 미확정된 것에 자기 몸을 걸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본성상 게임이 있으면 즐겁고, 게임이 없으면 즐겁지를 않은데, 그러니 인간은 계속해서 게임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자기가 도전할 수 있고 쟁취할 수 있는 게임을 말이다.

◈ 베드로나 12제자들도, 역시 !!

심지어는 베드로나 12제자들도 예수님을 이용해서 무엇을 만들려고 했는가? 자기들 위주의 게임판을 만들려고 했는데, 즉 "예수님이 이기나? 바리새인들이 이기나? 한 번 붙어봐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이 곧 제자들이 하는 짓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잡으려고 오는 말고의 귀를 베었는데, "주여, 제가 주님의 보디가드를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베드로는 지금 재미가 있는데, 즉 "우리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고 물위를 걸었는데, 예수님은 장차 오실 메시야이고 하나님인데, 그런데 니가 감히 어디서 설쳐? 니가 게임이 되겠어?" 라고 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 지금 무엇을 합니까? 한번 제대로 붙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 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하지만 인간이 생각하는 이런 질서라는 것은 비트켄쉬타인에 의하면 그야말로 게임인데, 물론 그도 처음부터 게임으로 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인간의 언어를 공부하면서 발견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언어는 바탕에 모든 것이 그림이, 즉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것이 머릿속에 먼저 편재적으로, 즉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전체적으로 퍼져서 있다는 것이다. 즉 융화가 되어서 두뇌의 기능이 나온다는 것이 곧 두뇌의 '편재성'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 반대가 '국소성' 이라고, 즉 두뇌의 일부가 활성화가 되는데, 즉 산소가 흐르면 그쪽이 발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좌뇌가 발달하고, 남자는 우뇌가 발달한다는 것이 단층촬영을 해보면 나오는데, 거기에서 언어를 만들어서 관장하고 순서를 정하는 것은 베로니카이고, 그리고 손과 발을 움직이는 운동영역과 기억영역은 해마이고, 아무튼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은, 자기를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서 매일 규칙을 !!

이렇게 처음에는 모든 것이 이미지로 해서, 즉 그림이 먼저 형성되고 난 다음에 그 그림을 적당하게 묘사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언어라는 말이다. 그런데 베트겐쉬타인이 나중에 연구를 해보니, 그것이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추상적인 게임, 즉 질서인데, 거기에는 규칙이 동원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기를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서 매일같이 규칙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아침에 눈만 뜨면 말이다. 그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은 유일하게 자기 자신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본인은 무조건 의인인데, 자기가 응원하는 팀은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데, 그래서 자기가 소속된 대한민국은 축구게임을 해도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어제 홍명보의 올림픽 대표팀이 태국을 3대1로 이겼다고 하는데, 그때 "에이, 또 이겼나" 라고 시큰둥하고 기분이 나쁘게 여긴다고 하면, 그건 분명히 한국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태국사람이든, 아니면 일본사람이라는 것이다(ㅋㅋ). 인간은 항상 그렇다는 말이다.

◈ 인간은, 장기판의 하나의 말(馬) !!

그래서 여기서 나온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자아를 한번 해체시켜보자는 것이다. 이 세상이 게임판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그 게임판에서 하나의 말과도 같다는 것이다. 서양장기에서는 그렇게 말과 기사가 있는데, 그리고 동양장기에서는 말도 있지만 포나 차나 졸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이런 전체적인 하나의 게임판에서 그 게임을 위해서 봉사해야 되는 조그마한 말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한 장기에서의 알과 같은 입장에서, 그것을 '구조론'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 구조론에 들어가게 되면, 개인의 주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본인이 자기의 생각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말이 여기 있을 때와 저기로 옮겼을 때의 주체상이 각각 다 다르다는 것이다.

◈ 비 내리는 호남선 ♬

예를 들어서, 직장인들끼리 모여서 노래방에서 같이 부르는 노래와, 그리고 교인들끼리 모여서 야유회를 가면서 버스 안에서 손뼉을 치며 부르는 노래가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사물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와 정치판에서 부르는 노래가 다르고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주체가 다 다르니 그렇다는 말이다. 즉 주체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 구조에서 자기가 말로서 끝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적응력, 그 적응력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진화를 시키고, 그때그때 변향을 시키는 식으로 인간은 생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어떤 인간인가?" 라고 물을 때는, 지금 자기가 소속된 구조가 어떤 구조인지, 거기에 맞추어서 합당하고 정당한 존재자로서의 언어를 구사하게 되니까, 그 언어는 무엇인고 하니, 결국은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구조에 끌어당기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에서 기도할 때도 그러한데, 심지어 목사들이 설교할 때도 그러한 오해를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다 ??

저의 경우에도 전에 있던 교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고 하니, 사사기나 사무엘상을 계속해서 설교를 해나가는데, 물론 그때는 교인들이 '아멘'을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대목을 설교하는데 있어서 저는 성경의 순서대로 흐름에 맞추어서 설교를 해나가는데, 그런데 교회에 어떤 문제가 일어나니, 똑같은 이야기를 똑같이 해도 내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사울과 다윗의 경우에,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다" 라고 했을 때, 그때 사울이 다윗이 자기 자리를 치고 올라오니 쫓아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마침 대덕교회에서 당회장을 쫓아내려던 때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성경말씀을 자기 자신을 옹호하는 식으로 하는가?" 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말이다(ㅋㅋ).

그래서 까마귀가 날자 배가 떨어지고, 무밭인지 참외밭인지 몰라도 그런 곳에서 신발 끈을 매지 말라는 소리가 있는데, 주로 정치판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데 말이다. 즉 수상한 행동을 하게 되면 오래를 불러일으켜서 신상에 좋지를 않다는 것인데,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사회에서는 항상 진리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피해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 십자가 - '죽어라. 이 놈아' !!

그런데 어떤 구조를 벗어난, 새로운 하늘나라의 구조에서의 진리를 이야기하게 되면, 그 사람은 당연히 오해를 받게 되는데, 왜냐하면 다들 이런 게임판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어떤 설교를 해도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삐치는 사람은 삐치는데, 그러니 도대체가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전부가 다 자기 정당성이 있으니 말이다. 누구를 부른다고 해서 해결이 되겠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 라는 것은, 우리보고 '살아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살 자격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 어떤 인간이라고 해도 모두가 다 자기 기쁨을 원하니, 즉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차라리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임으로 말미암아서, 그 아들의 죽음에 모든 인간은 저주를 받아도 마땅한 것으로, 그렇게 모두 다 집어넣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행함을, 즉 자기 잘남을 주장하는 인간들은 다 박살을 내버리신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 실제로 이 땅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진면목인데, 다른 하나님은 없다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즉 자기 좋아라고 만들어낸 가짜 하나님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진짜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오직 그분밖에 없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를 해보면 !!

여기서 다시 정리를 해보면, 사도바울처럼 미움이 자기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말이다. 여기 새로운 질서에 들어가면, 기존 구조가 아닌 새로운 구조에 말이다. 예수님은 기존 인간구조에서 살해를 당하셨는데, 이것을 '독특한 죽음' 이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은 독특하게 죽으셨다는 것이다.

이 독특한 죽음이 어디서 증거되는고 하니, 3일이라는 간격을 두고 부활함으로 말미암아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죽인 그 세계 자체가 죽었다고 판정을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인데 말이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하셨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잘 지적한 신학자가 몰트만인데, 즉 개인의 죽음에서의 부활이 아닌,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함으로 말미암아서 그 어떤 세상도 예수님의 발목을 잡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즉 "예수님, 부활하지 마세요. 우리 같이 죽읍시다" 라고, 전혀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데, 그런데 당신만 살고 우리는 죽으면, 그것은 이 게임판에서 반칙이다. 모두 같은 인간으로서 끝까지 인간으로 남아야지, 그냥 가버리면 당신은 신이 되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인간이 되자" 라고 하면서 붙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을 함으로 말미암아서,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의 이 세상은 모두가 어떠한 자가 되는가? 예수님을 욕하던 말던 간에 모두 일괄적으로 다루어지는데, 즉 모든 이 세상의 게임판은 그야말로 죽은 자들의 게임판인, 그러한 구조라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완전히 개판이라는 것이다.

그런 개판인 게임판에서 이기고 지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인데, 그러니 믿음은 외부에서 수입이 되어야만, 즉 하늘나라에서 주어져야 하는 것이지, 인간들의 논리로 따져서 생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잠시 겨울 수련회를 추억하며 !!

아무튼 이 '3일' 이란 간격을 둠으로서, 이것을 잠시 그림으로 그려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가셨는데, 이건 이번 겨울수련회에서 했지만 너무 중요해서 다시 하겠는데 말이다. 지금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서 하늘나라에 가고자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올라가다가 중간의 샛길로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순간 인간들이 가고자 하는 길은, 그만 막히게 되어서 지옥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희망을 품고 하늘나라로 가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샛길로 가셨다가 다시 오시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샛길을 그만 베드로가 따라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 샛길도 그만 오지 못하도록 막아놓았는데, 그래서 예수님의 12제자들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갇혀있는 셈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된 상황에서 "누가 천국에 가는가?" 라고 하는 문제는, 이 좁은 샛길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영이 다시 와서, 여기 갇혀있는 자들 가운데서 색출하고 납치를 해서, 예수님이 가신 샛길로 오게 하는 자들만이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좁은 길이 생명 길인데, 즉 예수님의 영이 빼내주는 자들만이 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 사도바울이 말하는 '십자가' !!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여있을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여주면서 "봐라, 이거잖아" 라고 하면서, 여기 샛길로 빠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을 되풀이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바로 이것을 십자가로 보고, "십자가가 이렇게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엉뚱한 곳으로 가도록 꼬시던가?" 라고 했다는 것이다.

성령인 십자가의 영만으로 천국이 보장되는데, 그런데 어느 인간이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이 신경을 쓰도록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역사인데, 복음의 광채를 가리우는 말이다. 여기에 교회부흥, 착한 일하기, 빛과 소금되기, 난민돕기 등등, 온갖 구호들이 난무하고 있는데, 그런데 정작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가지고 죽은 자의 세계와 유일하게 접촉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한 접촉점은 양심도 아니고, 교회부흥은 더더욱 아니고, 그것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영인 성령은 십자가로 샛길로 인도해서 같이 빠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이렇게 사도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간에 십자가에 참여해서 부활의 세계에 이르려고 한다고 했는데, 부활의 세계가 바로 여기 가로막힌 세상에서 활동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십자가가 부활의 세계로 인도하는 유일한 출구가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피가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그 죽으심 외에는 우리가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 죽은 자들 속에서, 죽을 자들끼리 교류했을 뿐 !!

이러한 이야기들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볼 때 하나의 전체구조로 보는데, 즉 '너'와 '내'가 잘난 것이 아니고, 그러한 인간은 없고 하나의 구조에서, 즉 죽은 자들 속에서 죽을 자들끼리 교류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이 일괄적으로 어둠이고 죽은 자라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확연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세상 사람들의 입에서 예수의 모든 행동과 말은 어리석었다는 평으로 회자(膾炙)되게 하셨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

여기서 '회자' 라는 것은 어려운 단어인데, 유행되게 하고 퍼지게 한다는 것이다. 마치 스캔들이 번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 고린도전서 1장 18장과 19절의 말씀에서, 십자가의 도를 믿고 구원받게 된 사람은 두 번 다시 무엇을 자랑하지 못하게 되는가?

19절에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한다" 라고 했으니, 지혜를 멸하는 위력이 성도 안에서 지금 작용하는가? 않는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는 작용이 이루어지는가? 않는가? 계속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십자가의 도를, 즉 예수님의 행하심만 증거하기 위해서 말이다. 지금도 예수님의 행하심이 계속해서 있으니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수님은 사람들의 지혜와 총명의 성질을 아신다. 모두 다 자기 영광으로 집결될 지혜와 총명이다.

(요 12: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 인간들의 성질은?

여기 요한복음 12장 43절에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여기서(?) "너희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이 아닌 신약성경에도 여러 번 나오는데, 사도행전 28장에도 나오지만,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비유에서도 또 나온다는 것이다.

(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왜 그렇게 하시는고 하니, 십자가를 염두에 두고서, 그 십자가라는 것을 죽음의 사건으로 이야기하는 부분도 있고, 그리고 그 앞에는 무엇인고 하니, 말씀과 기적으로 십자가를 보여주는 패턴으로, 그렇게 해서 말씀과 사건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 떡을 주시면서, 그만 떡(?)이 되게 !!

예를 들어서, 떡을 주어서 떡을 먹게 하시고는, 왜 떡을 먹었느냐고 따지는 것과도 똑같다는 것이다. 차라리 아예 떡을 주지 말든지 말이다. 떡을 먹으라고 해서 떡을 먹었는데, 그런데 졸지에 떡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ㅋㅋ). 그 떡이 아니라면 다른 떡을 주면 되는데 말이다.

하여튼 주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는데, 그리고 한번 하신 것은 전혀 되풀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을 따라 다니는 자들은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인데, 주님은 한번 나온 문제를 다시는 출제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인간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질서를 자꾸만 새롭게 만들어내어서 자꾸만 자기 쪽으로 담아내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인간들의 장바구니를 그냥 차버린다는 것이다. 즉 "이것으로 니가 살려고 하지? 그만 치워라" 라는 의미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장바구니가 떼굴떼굴 굴러가면, 인간들은 주님의 십자가는 볼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장바구니를 다시 잡는데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난 수요일 설교에서 '신앙경력' 이라고 했는데, 다른 4글자로는 '장바구니'이고 말이다.

계속해서 201페이지를 살펴보자.

** 존재하는 것 자체가 신의 축복이라고 본 것이다. 무슨 계시적인 근거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러고 싶은 것이다. 왜 자신이 축복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른다. 무조건 자신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뿐이다.

◈ 축복이 뭐예요?

여기에 보면 "왜 자신이 축복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른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가? 구원받은 사람이 많다는 말인가? 받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말인가? 왜 자기가 축복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자기 쪽의 자기 게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러니까 축복을 받아야 돼" 라고 하는 축복은 기존의 죽은 자들의 게임에서 나오는 하나의 경품이라는 것이다. 즉 1등은 경기도 이천 쌀 한 가마니, 2등은 로봇청소기, 3등은 가습기 등등, 그러한 경품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경품을 걸어놓고 자기들이 노력해서 그것을 따내는 방식으로, 그렇게 죽은 자들의 구조가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의 손에 맞아죽은 예수님께서는 전혀 그런 인간들의 게임법칙에는 적용을 받지 않는데, 그러면 천국의 게임법칙은 무엇인가? 택한 자에게만 구원이 주어지는 것인데, 그러한 천국의 법칙을 가지고 현재 우리에게 덮치니, 우리는 막상 구원을 받기는 받는데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 정말로 황당합니다 !!

다시 말해서, "저는 구원을 받는데 뭔가 한 것이 전혀 없는데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착한 일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 것이라고는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데, 그런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정말로 황당합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주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두고 '십자가의 지혜'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게 생각하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증거해야 교회인데, 경품을 걸어놓고 게임을 벌리고 시상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교회에는 어떤 사람이 빠져서 나오겠는가? 자기가 뭔가를 노리고 행했는데, 거기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서 삐친다고 하면, 그 사람은 그런 교회에는 다니고 싶어도 다닐 수가 없다는 것이다. 도저히 복음을 들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기껏 떠나면서 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나는 열심히 했는데 알아주지도 않고, 또한 앞으로도 보람도 없고, 그러니 전혀 희망이 없다.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내가 남의 뒷바라지만 계속해서 한다면, 나는 혼자 정말로 바보짓만 했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봉사란 무엇인가?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것을 뭐라고 하는가? 그것을 '봉사' 라고 하는데, 그래서 "서로 섬겨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봉사는 무엇인가? 자기 몸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제단에다 자기 몸을 바치듯이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절에서는 이것을 '산 제사'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므로 이 '산 제사'가 무엇인고 하니, 은혜를 받은 대로 남에게 봉사하는 것인데, 그런데 그 전제가 곧 제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자기 행함에다가 따로 챙길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없다는 말인가? 전혀 챙길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물이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 육신은 이 세상구조에서 놀던 버릇이 있어서, 경품이 없이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테스트도 하는데, 즉 "하나님이여, 이 정도로 봉사해도 아무 소식이 없습니까? 그러면 제가 더 심하게 하겠습니다. 그래도 변화가 없습니까? 더욱 더 극단적으로 하겠습니다. 그래도 안 됩니까?" 라고 말이다.

꼭 우리교회 교인들 같은데,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면서 서로 주고받는 게 있어야 하는데, "정말 대단합니다. 정말 믿음이 좋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서로 칭찬이라도 해야하는데, 그런데 전혀 미동도 없다는 것이다. 주님의 축복이 아니고는 이런 교회가 있을 수 없는데 말이다(ㅋㅋ). 그래서 우리교회에는 자유가 있는데, 마음대로 삐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원도 없이, 한없이 삐칠 수 있는 자유가 있는데, 단지 아는 것만 봉사하고 말이다.

◈ 목사님, 그만 저 방으로 가이소 !!

한 집사님의 경우에는 주일학교를 봉사하는데, 자기가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도 있으니 말이다. 집사님은 사회를 보고 저는 설교를 하는데, 그런데 설교가 끝나면 저에게 뭐라고 하는고 하니, "목사님은 저 방에 빨리 밥 먹으러 가이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아이들이 너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우라고 해도 외우지 않고, 찬송을 해도 그렇고, 그러니 짜증이 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성격에는 아이들이 시키면 그대로 따라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렇지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강제로 시키고 하는데, 그래도 행동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으니, "목사님은 설교만 하고 저 방에 가이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이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너무 아름다운데, 왜냐하면 자기의 본성을 감추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봉사를 하니 말이다. 그러면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은 자기 뜻대로 된다는 것이 굉장히 겁나는 일인데, 그래서 목사의 경우에도, 복음을 전해서 믿는다고 하면 겁이 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지 못할 것을 전하니 말이다. 주님의 기적이 임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설교를 해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주님의 성령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믿지 않으면 대하기가 편한데 말이다.

◈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기쁩니다 !!

그런데 만약에 믿게 되면, 설교를 하는 목사도 믿어지지를 않는데, 듣는 사람이 믿어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설교를 하는 사람은 설교를 하면서 반대급부를 챙기는데, 그런데 듣는 사람은 순수하게 그만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기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목사는 외양간에 소가 있어야 기쁜데 말이다. 그래서 목사는 그런 믿음의 가진 자들 앞에서는 항상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까, 복음이 항상 같은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100번을 해도 1번이라도 걸리게 되면, 나머지 99번은 실패가 아니고, 하나의 과정으로 모두 다 편입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과정으로서 말이다. 

어떤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즉 "내가 분명히 바른 논리로 복음을 전했는데, 그런데 교인들은 왜 기뻐하지를 않지? 그 소리가 그 소리라는 말만 하고 말이다. 물론 그것이 맞기는 하지만, 그래도 복음으로 인해서 기뻐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말이다.

여기서 '기뻐한다' 라는 것은 자기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런데 듣고 따로 걱정을 챙긴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러니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 원인이 자기 쪽에서 제공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주님에게는, 유통단계가 없어 !!

또한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목사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고, 주님이 성령을 직접 주셨다는 것이다. 전혀 유통단계가 없다는 말이다. 복잡한 유통단계를 다 까버리고, 성령으로 직접 주신다는 것이다. 그 어떤 목사도 거기에 끼어 들지 못하게 하고, 직접 주님의 성령과 교제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 라고 하는 것은, 살아있는 성령님의 연결로 인해서 건물의 기둥과 벽돌들이, 즉 그 모든 재료들이 하나가 된다고 하는, 그렇게 주 안에서 성전이 되고 함께 지어져 간다고 하는 에베소서 2장의 말씀이 그대로 현실화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굉장히 무섭고 겁나는 일인데, 그런 사람들 앞에서 복음 외에 다른 소리를 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제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202페이지를 보자.

** 마태복음 15장 26절에서 27절을 보면, 이 여인은 자신을 그냥 인간이라고 우기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낯선 속성'을 밖으로 토해놓는다. 

(마 15: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 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 예수님의 창조 - '저는 개입니다' !!

여기 26절에 보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라고 하는데, 즉 자녀의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에게 시험을 하시는데, 즉 여기에 두 개의 질서가 있는데, 하나는 개판인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의 질서인데, 이 두 개의 질서 가운데서 스스로 어디에 속했다고 여기느냐는 것이다.

현재 예수님에게 붙어있는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개라고 여기는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여기는가?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니 당연히 자녀라고 여기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보고 "너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가?" 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가 뭐라고 하는가? "저는 개판입니다" 라고 하는데, 즉 감히 하나님의 자녀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자리가 곧 내가 만들려고 하는 자리이다" 라고 하시는데, 그것이 곧 '창조' 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 여인이 "저는 개입니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그 여인이 아닌 주님께서 만들고자 하는 만듦이 공표가 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곧 창조인데,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은 창조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창세기 1장의 "빛이 있어라 라고 하시매 빛이 있었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온 창조의 기능이, 이제는 없는 개의 자리를 만드는데, 바로 거기에 먼저 아다리가 된 자가 바로 이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여인은 어떠한가? 인간을 개로 만드는 것까지도 주님의 솜씨이고, 또한 창조의 능력이라고 수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를 두고서 "저는 개입니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자기에게서 나온 능력이 아니고, 만약에 자기에게서 나왔다고 하면 겸손을 위장한 행함이라는 것이다. 즉 "내가 만약에 개라고 하면 주님이 나를 구원을 해주시겠지" 라고 하는 것은 개혁주의자들의 수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개라고 하는 것조차도 주님께서 직접 손을 대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즉 말씀에 의한 창조의 기능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여자는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있어서 질서는 무엇인고 하니,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것, 그것이 곧 천국의 질서가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저희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조건을 걸고, 뭔가 노리면서 들어갔는데, 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날마다 재료로 삼아서 주님의 천국을 창조해내시니, 거기에 대해서 항상 감사와 고마움으로 반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02,20 오후 11시 20분에 마침.

                                         떡을 먹다가 완전히 떡 된 인생들에게 경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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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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