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64강 이스라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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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64강 이스라엘주의

[12 대구강의 3] - [피 64] - 이스라엘주의

                                                   12,02,0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낯선 속성 !!

오늘은 교재 202페이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 마태복음 15장 26절에서 27절을 보면, 이 여인은 자신을 그냥 인간이라고 우기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낯선 속성'을 밖으로 토해놓는다. 자신을 개와 같이 취급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그런 존재가 자신이라는 것이다. 

(마 15: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 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여기에 보면 '낯선 속성' 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한 여인이 나오는데, 그 여인은 자기 자신을 두고 개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 관점이 아닌 예수님의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람=개' 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은, 사람 전체를 두고서 개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개라고 규정하는 것은 개 말고 다른 규정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이 곧 '아들' 이라는 것이다. 즉 "나는 생명의 떡을 아들에게 주었지, 개에게는 주지 않았다" 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의 관점인데, 아들과 개라고 하는 것은 말이다. 그러니 이런 개념은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고, 오직 예수님에게서만 나온다는 것이다.

◈ 나의 자리는? 멍멍 !!

그런데 믿음은 무엇인고 하니, 이 여인의 경우처럼 기존의 자기가 가졌던 개념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개념에 합류가 되는 경우인데, 그렇게 합류가 되면, 아들이 무엇이며 또한 개가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데, 그러니 사람은 누구나 다 개는 되기 싫고 아들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당당하게 "나도 아들이다" 라고 하고 싶은데, 그것이 우리 인간 본연의 모습인데, 그런데 이 여인처럼 예수님의 관점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는 아들의 자리에 들어갈 입장이 전혀 되지 못하고, 개의 입장에 들어갈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자기가 아들이든 개든 거기에 상관없이, 둘 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만 있다면, 그 은혜가 중요한 것이지, 자기가 아들인지 개인지, 즉 자기가 누구냐는 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이 여인이 아들이 되는가? 개가 되는가?" 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되어버리면, 즉 은혜를 받게 되면 이 여인은 예수님이 안고 있는 그 세계에 이미 들어가서 앉아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세계에 있다가 예수님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두고 '믿음' 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인을 보고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 믿음 - '예수님의 관점으로 다시보기' !!

그래서 '믿음' 이라는 것은 한 울타리, 즉 생각을 공유하는 것인데, 같은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 관점을 버리고 예수님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것, 그런 것을 두고서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믿음을 우리가 가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데, 그래서 로마서 14장 마지막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라고 하는데,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이다.

(롬 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물론 "나는 믿기 싫어" 라고 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유겠지만,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게 죄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를 못하는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불신의 상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아들의 관점에서 !!

그러므로 여기서 '믿어라' 라고 하는 것은 "너를 개라고 지칭해도 수용하겠는가?" 라는 의미인데, 즉 "저는 믿고자 합니다" 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러면 나는 너를 개라고 인정하겠다. 정말 그래도 좋은가?" 라고 하면, "예, 좋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 어떤 인간도 자기를 개라고 규정할 수 없는 관점에서 말이다.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여자를 보고 개라고 할 때는, 여기서는 개라는 개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개념의 규정에 의해서 이방인들은 개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들의 관점에서, 여기서 아들이라는 호칭을 쓴다는 것은 그 뒤에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어서만, 그렇게 하나님의 가족이 될 경우에만 구원과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 니가 행복해질 것이다 ??

여기에 대해서 이 세상의 모든 철학이나 윤리나 종교는, 이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언약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도(道)를 닦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도를 닦는다는 것은, 어떻게 마음을 잘 다스려서 행복을 얻느냐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비워라. 그러면 니가 행복해질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모든 종교에서, 기독교에서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종교단체가 아니라도 '선도'와 같이 자기 수양을 강조하는 사설단체에서도 주장한다는 말이다. 한참 그게 유행을 하기도 했는데, 어떤 기자가 그런 곳을 찾아다니면서, 자기가 직접 수양도 하면서 쓴 책을 제가 서평을 하기도 했는데, '나를 찾아 떠나는 …' 라고 하는데, 좀 오래되어서 책이름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말이다.

거기에 보면 온갖 종류의 수양단체들이 다 나오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사랑, 용서, 위로, 관심 갖기 등등, 그런 모든 용어들이 나오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단체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찾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고 하니까, 이 여자와 예수님 사이처럼 믿음관계가 아니라, 그저 챙길 것을, 즉 어떻게 마음을 비우고 낮추어서 이 세상에서 행복을 챙길지, 그렇게 행복하게 인생을 보낼 것인지, 그런 목적을 위해서 하나의 수단으로서 성경을 보고 교회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노림수를 가지고 있는 아닌지 자기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다는 말이다. 

◈ 인간이, 자기 편함을 추구하게 되면 !!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 인간에게 행복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편하면 그게 최고인데, 인간이게 더 이상은 없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이 편하고 육신이 편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는 것인데, 즉 그것이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 자기 편함과 행복을 추구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만 뒷전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란 어르신은 그냥 저기 뒷방에서 쉬고 계시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를 귀찮게 하고 힘들게 하면 하나님도 그만 질색이라는 것이다.

◈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

로마서 8장에 보면,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데, 그런데 하늘나라에 가게 되는데는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빌립보서 1장 끝에는 보면 뭐라고 하는가?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알고 난 다음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는데(이건 3장인데?), 그 다음에 보면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라고 하는데, 즉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면 고난도 겸하여 받게 한다는 것이다.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왜 그런고 하니, 이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믿음이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압박했고 핍박했던 그 환경과 동일한 환경 가운데서, 우리도 역시 우리의 믿음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돗대가 아닌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예수님은 힘든 가운데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이 성령을 통해서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가 산 속에 가서 독야청청 자기 혼자 편하면 최고라고 하는, 그런 식으로는 신앙생활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장이 곧 이 세상인데, 그 현장에서 온갖 핍박과 설움을 받도록, 그런 식으로 주님께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신경을 써주지 않는 험난한 세계에서, 진정으로 수고와 괴로움이 없는 것은, 오직 예수님처럼 아버지와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삶의 태도인데,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것이 곧 믿음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말이다.  

◈ 일단, 결론을 내려보면 !!

지금까지 강의한 것에 대해서 결론을 내려보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수모도 고맙게 여겨라"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새로운 신분을 가지기 때문에, 즉 아들이란 신분을 가지지 때문에 말이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라는 말씀인데, 그렇게 예수님 안에 있으니 우리의 신분자체가 독자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우리는 굉장히 다행스럽게 여겨야 하는데, 그것을 지난 시간에 '낯선 속성'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오늘은 교재 203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성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성도의 소유가 아니다. 그럼에도 성도 역시 자기는 자신의 것인 줄 알고 늘 집적된다. 타인(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이고 싶어한다. 저주받을 만한 짓을 죽을 때까지 계속 해댄다.

◈ 성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

여기서 "성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소유권이 둘이 될 수 없다는 것인데, 즉 성도는 "내 몸은 내 것이다" 라고 우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조금 복잡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을 지금부터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즉 "내가 하나님의 것이다" 라고 해서, 여기에 자기가 있고 저기에 하나님이 있다고 하면, '나' 라는 것에 대한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하나님의 소유권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만약에 사람과 사람 사이라고 하면, 여기에 'A' 라는 사람이 있고, 또 'B' 라는 사람이 있는데, 'B' 라는 사람이 "나는 하나님의 소유다" 라고 했을 때, 여기 'B' 라는 사람은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하나님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때 'A' 라는 사람이 'B' 라는 사람을 보고 "너는 누구의 것인가?" 라고 하면, 그는 당연히 "나는 내 것이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A' 라는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묻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라고 하게 되면 어떤 오해에 빠지는고 하니, 그 사람이 "너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다 나에게 주어야해.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라고 하는 너의 말은 거짓말이야"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B' 라는 사람이 말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나는 나의 것이 없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야" 라는 소리를 'B' 라는 사람이 듣자마자 "옳다구나. 니가 가지고 있는 가방을 내놔라"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A' 라는 사람이 "이건 안 돼!" 라고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면서? 나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어. 하나님이 그것을 나에게 주라고 했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너는 부자이니, 나를 도와라 ??

이러한 것이 왜 중요한고 하니, 교회에서 소위 구제나 봉사를 한다고 할 때, 그 누구라도 상대방에게 그런 봉사나 구제를 강요할 권리가 있는가? 없는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도 부자에게 가서 그런 요구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것이니 내가 필요로 할 때 당신의 것을 내놔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나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방금 지시를 내렸다. 지금의 나의 형편이 어려우니 말이다. 그런데 왜 당신은 그 지시를 따르지 않아?" 라고 일방적으로 해석을 해서, 즉 자기가 가난하다는 것을 무기로 삼아서 부자의 재산을 탐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A' 라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나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 세상이 부럽지 않아"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무화과나무의 소출이 없고, 포도나무의 열매가 없어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한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마침 앞집 사람이 포도농사를 지어서 그만 대박이 났다는 것이다. 자기는 왕창 다 망했는데 말이다. 몽땅 망해도 자기는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한다고 하고 있는데, 그런데 평소에 같이 하나님을 믿던 앞집에 살던 김 집사가 포도나무 농사가 너무 잘되어서 부자가 되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농협대출도 다 갚고, 조합장까지 되었다는 말이다.

◈ 인간은, 같이 붙어서 살아봐야 !!

그러니 뭔가 이런 믿음이 하나의 마약처럼, 자기의 괴로움을 잊고 억누르기 위해서, 마치 아편주사를 맞듯이 "그래, 나는 하나님으로 만족해한다" 라고 백 날을 달래봐야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열 받은 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같이 붙어서 지내야 하는데, 그래야 자기 행복을 위한 입장에서 자기 마음대로 생각했다는 것이 들통난다는 것이다. 자기 혼자 산 속에서 기도하면 자기 신앙이 나타나지 않는데, 반드시 자기를 약 올리는 사람을, 즉 자기가 원하는 것을 미리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 믿음으로 버틸 수 있는 인간은 없어 !!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아하,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나의 믿음은, 내 행동의 실패를 변명하고자 하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구나" 라는 것이 발각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믿음으로 버틸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라는 것이다. 날마다 주께서 은혜를 주셔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나는 이제 믿음을 가졌다. 이 믿음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 거야" 라고 하면, 그게 또 다시 행복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교회 다니기'나 '믿음'을 가지고 자기 행복추구의 수단이니 빌미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이제는 여러분이 그것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즉 "나는 교회에 다녀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속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돈을 갈취하는, 그런 삐끼가 하는 짓이란 말이다.

아프리카에 가서 고생고생을 하면서 선교를 하고 왔다고 하면서 구라를 치는 인간들이 종종 있는데, 그런데 속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거기에 맛들인 인간들이 하는 그야말로 더러운 행세인데, 자꾸 도와주면 그 인간을 완전히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 주께서 강제로 빼앗아서 !!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도와주는가? 주께서 강제로 빼앗아서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도와주게 되면 그 도와주었다고 하는 것이 자기 의가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진작 했어야 하는데, 그러면 그동안에 그 아까운 수 천 만원도 날리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목사들이 교인들의 돈을 빼먹기 위해서 온갖 아이디어를 다 집어넣는데, 그게 점점 노하우가 되어서 쌓이게 된다는 것이다. 목회를 오래하고 노회에서 같은 목사들이 모이게 되면, 그런 노하우를 공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국의 관광지를 다 놀러 다니면서 말이다. 신참 목사들은 한 수 배우고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 사람의 이성과 양심과 윤리와 도덕에 호소하면 돈은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수련회 때 뭐라고 했는가? 돈은 내지 말고 쥐고 있으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언제까지 쥐고 있으면 되는가? 평생을 그렇게 돈만 쥐고 살면 되는데, 그래서 자기가 돈밖에 모르는 인간이라는 것을 스스로 습득하라는 것이다(ㅋㅋ).

* 질문 - 그러면 안디옥 교회가 부조를 한 것은 어떠한가요?

'은사' 라고 하는 것은, 구제도 은사인데 말이다. 그것을 로마서 12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우리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오는고 하니, 3절에서 '믿음의 분량대로'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

그렇다면 'A' 라는 사람과 'B' 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것이 되는데, 여기서 'B' 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평소에 하나님과 서로 소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말이다. 왜냐하면, 은사를 받았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방금 말한 대로 '믿음의 분량대로' 라는 것이니, "제가 500원을 낼까요? 아니면 1000원을 낼까요?" 라고 하는 것은 누구와 의논을 하면 된다는 것인가? 본인이 본인과 의논하면 된다는 말이다. 다른 누구와 의논을 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사도바울이 선교를 한다고 했을 때, 그가 사람의 양심에다 호소하는 것이 아닌데, 동일한 하나님께서 이쪽은 선교를 하게 하고, 또 다른 이쪽을 돈을 내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삼각형이 형성된다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것을 누군가가 요구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이쪽에도 성령의 은사를 받고, 저쪽도 역시 은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내가 사람의 금이나 은을 탐내지 아니했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돈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서나 로마서 끝에 보면 사도바울이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골로새서의 끝에서도 그렇고 말이다. 즉 "누구누구는 도와주고, 겨울철에도 도와주고, 감옥에 있을 때도 도와주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행 20: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하지만 그것은 "돈을 가지고 와서 나를 도와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나에게 혹해서 가지고 오는지, 아니면 성령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혹했는지, 그것은 본인이 결정할 문제이다" 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누가 요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누구를 가르치지 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 그때그때 달라요 !!

물론 성령은 받지 않은 자라고 하면 그런 성경구절 자체도 전혀 의미가 없는데, 그리고 성령이 있다고 하면 성령이 있기 때문에 더 더욱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성령이 어디 장승이나 갓바위처럼 가만히 서있는가? 즉 "너 안에 성령이 있다" 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냐는 말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성령은 늘 관여하시는데, 그리고 그것은 각자 믿음의 분량이니, 그때그때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즉 어느 특정한 누구를 롤모델로 삼아서 일률적으로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라고 하는, 그런 법적인 질서문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이스라엘' 개념 변천사 !!

성령의 은사에 있어서, 사실 이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기는 있는데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여기서 제가 여러분에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즉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선택을 받은 언약의 백성임을 알았는가? 몰랐는가?" 라는 것이다. 물론 본인들이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말씀을 볼 때 어떻게 해야 하는고 하니, 그들이 알았지만 남북이 갈라지고 하면서 결국 다 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 점을 한번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자기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데, 물론 다른 신을 섬기기도 했지만, 여호와를 섬겼다는 것이다. 만만의 제물과 수양의 기름으로 말이다. 즉 여호와의 이름으로 제사도 드리고, 그리고 산당에 가서는 다른 신도 섬겼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구원은 여호와에게 받고, 축복은 이방신에게 빌어서 받고 말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입장에서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고 하니까, "그때 그 당시 사람들이, '우리가 이스라엘이다' 라는 것을 어떤 관점에서 생각했는가?" 라는 것이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과거의 현재' 라고 하는데, 즉 "과거에 있던 사람들이, 그 당시 자기들이 현재라고 생각한 그 감각이 어떤 것인지, 지금 현재에서 살펴보자" 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보면, '이스라엘' 이라는 개념, 그리고 '여호와' 라는 개념 자체가 그때그때마다 달라진다는 것이다. 즉 한번 얻어맞고 난 뒤에 개념이 바뀌고, 얻어맞고 난 다음에 개념이 또 바뀐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개념은 그 시대 사람의, 이것을 '개념역사' 라고 하는데, 즉 개념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개념의 변천사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살펴본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과거의 개념과 똑같은 개념으로 보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시대를 무시해버리는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을 제대로 파악하려고 하면, 예를 들어서, 잠언서 3장 16절에서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라고 하는데, 목사들이 심방을 갈 때 이 성경구절 하나만 들고있으면 그것으로 그냥 끝이라는 것이다.

(잠 3:16)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런데 골로새서 3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그러면 우상숭배자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잠언서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골로새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서로 달라 보인다는 것이다.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지금 니가 밥도 못 먹나? 그런데 왜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탐을 내? 도대체 정신머리를 어디에 두는 거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그러면 그 심방목사는 저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나는 성경대로 하는데, 당신이 왜 시비를 걸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즘 그런 것이 참 많은데, 즉 "성경에서 행하라고 했으니 행했는데, 왜 그렇게 말이 많아? 성경에 이렇게 있잖아. 여기 성경글자를 봐" 라고 말이다.

◈ 우리는 성경말씀대로 했어 ??

네비게이션인지 네비게이터인지 몰라도, 그런 선교단체에서 뭐라고 하는가? 여호와의 증인들도 성경구절을 많이 외우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누락시킬 가능성이 있는고 하니까, 이 개념사, 즉 개념의 변천과정을 누락시키고 성경구절들을 마구 갖다 붙이게 되면, 그러면 나중에 이게 어디로 모이게 되겠는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그런 자기 잘남으로 소모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매일같이 자기는 성경대로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한번 보자고 하면 겨우 문자 몇 개 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과연 성경대로 한 것인가? 오죽했으면 사도바울이 "문자로 풀지 말고 영으로 풀라" 라고 했겠는가? 사도바울의 이런 말씀도 이근호가 이야기하면 영지주의라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 '혁명'과 '진화'의 개념사 !!

이무튼 이 '개념사(槪念史)' 라고 하는 것은 철학사에서 나오는 이야기인데, 예를 들어서, '혁명' 이란 개념 하나도 중세 때는 '회복한다' 라는 개념이었는데, 14세기에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케플러에 의해서 우주의 위성이 원이 아니라 타원으로 돈다는 것이 발견되는데, 그 타원의 궤도를 두고서 혁명이라고 했고, 근대시민혁명 이후에는 계급자체가 와해되는 것을 두고 혁명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전복이 되는 것을 두고 말이다. 그러니 같은 '혁명' 이라는 단어도 시대마다 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화' 라는 개념의 경우에도, 다윈이 말하는 진화개념이 다른데, 다윈은 이미 정해진 목적아래에서 그 목적을 위해서 다가가는 것이 곧 진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거기서 목적은 그만 없어지고 그냥 무작정 진보, 진보, 진보, 그렇게 진보개념으로서의 진화개념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진화를 무엇으로 생각하는가? 이런 진보개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래서는 안 된다" 라고 하면서, 그것을 반성해서 무엇이 나왔는고 하니, 그냥 변화하는 것을 두고 진화개념으로 본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진화의 개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화를 진보의 개념으로 본다는 말이다. 즉 "점점 더 나아진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엔트로피 제2법칙에 어긋나는 것인데, 갈수록 더 혼란스러운데 말이다. 그런데 혼란을 나아진 것으로 본다면 곤란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과연 혼란이 더 나아진 것인가?

◈ 이스라엘주의(Israelism) !!

아무튼 그런 그렇고, 이스라엘에 있어서 문제점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주의'를 만든 게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주의' 라는 것은 "이스라엘은 우리 것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위하여!" 라고 하는 것인데, 그래서 그들은 전쟁에 나가도 뭐라고 하는가? 당연히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주의로 빠지게 되면, 이것은 무엇과 같은고 하니, 이방민족들의 그런 민족주의와 똑같다는 것이다. 민족이 먼저 있고 그 뒤에 민족주의가 나왔다고 보통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민족주의라는 것이 민족이란 개념을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 교회주의가 '교회' 개념을 !!

그것을 교회에다가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는가? 성령을 받지 않은, 즉 십자가의 구원능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결국 믿음도 무슨 믿음밖에 없는가? 눈에 보이는 교회밖에 없는데, 그러니 복음을 거부하는 교회주의라는 것이 교회라는 개념을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즉 "교회를 무시하지 마라. 교회는 모독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다. 교회를 훼방하는 것은 악마의 역사다" 라고, 그렇게 교회주의가 교회개념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교회개념은 어디에서 나와야 하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와야 하는데, 즉 복음에서 나온 것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의 파생된 줄기가 교회라는 말이다. 즉 복음이 길죽하게 늘어진 것이, 복음에 마치 혹처럼 달린 것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과 교회는 끊어지면 안 되는데, 그런데 교회가 복음을 추방시켜버리면 그게 무슨 교회냐는 말이다. 교회주의이지 말이다.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구원은 십자가 복음인데, 오직 십자가의 피로, 그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이 교회라는 것은 누군가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인데, 뾰족한 종탑이 있고 건물이 있는 말이다. 하지만 십자가의 피는 누가 파악할 수 있는가? 이 십자가는 육으로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하지만, 교회는 오직 십자가 복음만을 !!

그런데 교회주의에서 교회가 나오게 되면, 그런 자들은 교회를 위해서 거기에다가 십자가를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즉 "여러분, 복음대로 살아서 교회를 잘 키웁시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복음은 성령을 받지 않아도 다 아는 것인데, 즉 교회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믿을 수 있는 십자가인데, 하지만 그건 십자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가 잘 되기 위해서 복음을, 십자가를 도입하는 것, 그것은 십자가가 아니라는 말이다.

십자가 복음으로 들어간 사람의 경우에는, 교회라는 것도 역시 십자가 복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항상 복음 안에 있는 그 자체가 결과적으로 교회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바라보게 되면, 그것이 교회라는 말이다.

◈ 너, 박지성을 알아?

우리나라에 '박지성' 이라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닌데, 전화번호부를 보면 상당하게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너, 박지성을 아나?" 라고 했을 때, 상대방은 "그래, 알아. 요즘 잘 하잖아" 라고 하는데,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잘 하기는, 교도소에 가있어" 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상대방은 "누구를 말하는가?" 라고 하는데, 그러면 "내 친구인 사기꾼 박지성 말이야" 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아는 박지성은 추구선수이지 사기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교회는 무엇을 해야한다는 말인가? 박지성은 축구를 해야만 박지성다운 것처럼(?), 교회는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오히려 사기꾼이 되고, 교회는 오직 십자가 복음만을 이야기해야, 그래야 교회가 교회답다는 것이다. 

◈ 성령은, 예수님의 육신에서 나오기에 !!

성령의 은사라고 하는 것은, 성령은 반드시 무엇을 하시는고 하니, 여기서 우리가 기본적인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데, 육체, 육신, 혹은 육은, 이렇게 다양하게 바울서신서에 나오는데 말이다. 표현이 이렇게 세 가지 정도 되는데, 이게 한 가지이든 세 가지이든 상관없이, 이것이 무엇을 전제로 할 때 육신, 즉 죄가 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육신인데, 성령은 이 예수님의 육신에서 나오기에 말이다.

이런 예수님의 육신, 육체, 혹은 몸과 대비해서 우리의 몸을 비교하게 되면, 우리는 육신이 되고, 육체가 되고, 육이 되고, 그게 곧 죄가 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지적처럼 "니가 백 날을 행해봐야, 그것은 육신에서 나왔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그게 곧 죄라는 말이다.

◈ 성령의 역할 - '예수님과의 비교' !!

그렇다면 성령의 역할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간단한데 예수님과 우리를 늘 비교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오후 2시에 성령을 받았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항상 다른 사람과 비교하다가 나는 오늘 오후 2시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비교가 되었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령이 역사하는 순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에서 사도바울에게 선교비를 보낸다고 하는데, 내가 낼까? 말까?" 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생각이고, "이번 달에 공납금도 내야하는데, 선교비를 꼭 내야하나? 돈은 없지만, 그래도 미리낸다는 기분으로 낼까? 그러면 혹시 그게 복이 되어서 돌아올까?"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돈을 내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돈을 내지 않아도 감사하게 되는데, 그런데 주님을 생각해서 돈을 내게 되면, 즉 "주님을 생각해서 돈을 냈다" 라고 하는데 관심을 두게 되면, 그것은 주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말이다. 그러면 돈을 내는 것은 전혀 큰 문제가 아니라, 그냥 사소한 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게 되면 모든 인생자체가 압축이 되어버리는데, 압축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캔이나 플라스틱과 같은 것을 재활용을 한다고 하면서 압축시켜놓은 것을 보았지 싶은데, 처음에는 어떻게 생겼던지 간에 그냥 네모반듯하게 압축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은 우리를 안개로 만들어서 짧은 압축된 판처럼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안에서 몇 십년을 살던, 몇 백년을 살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는 동일하게 육체인 것을 예수님의 피로서 뿜어버리게 되기 때문에, 동시에 그것이 같이 발휘가 된다는 것이다.

◈ 과거는 사라졌다 ♬

그런데 우리가 이 압축판을 펼쳐버리면 정말 곤란하게 되는데, 그렇게 펼치면 "지금까지 지내온 것♪" 라고 하면서 만날 역사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잊어야 하는데, 자기 과거를 잊는 사람이 곧 승리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과거는 잊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든지 과거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를 묻지 마세요' 라는, '과거는 사라졌다' 인가? 아무튼 그런 노래도 있다는 것이다(ㅋㅋ).

그런데 우리 인간이 자기 과거에 얽매이게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복수심과 울분으로 보이게 되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과거에 얼마나 충성을 다했는데, 그런데 이제 이 인간이 그러한 나를 알아주지도 않고, 도대체 이게 뭐야?"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것을 강의를 하면서 제가 수시로 이야기했는데, 물론 수시로 듣고 수시로 나갔지만 말이다.

또 다시 이야기하면, 박지성이 추구를 잘하는데, 그런데 30년 이후에 축구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데, 그러면 자기가 자기에게 지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박지성이 30년 이후에 구멍가게를 한다면, 그 구멍가게 이야기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왕년에 축구를 할 때 잘 나갔는데" 라고 하면 안 되고, "요즘 카라멜 말고 알사탕이 잘 나간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과거를 이겨주어야 하는데, 그게 함몰되는 것이 아니고 앞선다(?)는 것이다.

◈ 그것도 시간이야?

아무튼 이런 것이 모두 압축되어있기 때문인데, 우리 안에 압축되어있는 시간은 주님께서 시간으로 인정하지를 않는데, 왜냐하면 우리 육신에 흐르는 시간은 주님의 육신 앞에서는 게임도 되지 않기에 말이다. 즉 주님께서는 "그것도 시간이야? 그것도 흘러간 것이라고, 그것은 순간이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그래도 나름대로 고생을 엄청나게 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펼쳐놓으니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펼쳐놓으면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자기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매일같이 자기를 바라보니,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이 어지럼증에 걸린다는 것이다. 물론 다람쥐는 걸리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게 너무 심하면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고 무시한다고, 그렇게 귀한 존재를 말이다.

◈ 사명은 생존보다 우선한다 !!

그러니 이 세상에서 성공하겠다는 것도 정신병자이고, 또한 실패했다고 우기면서 낙담하는 것도 역시 정신병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설교를 하면서 "사명은 생존보다 우선한다" 라고 했는데, 그러한 사명이 없으니, 즉 은사가 없으니 자기 잘남만 내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을 비롯한 그 모든 사람들은 은사가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을 도와주는 것도 역시 사명이라는 것이다. 즉 믿음의 분량이라는 말이다.

◈ 다시 정리해도, '믿음의 분량대로' !!

다시 정리하면, "믿음의 분량대로 하세요"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누구에게 숙제검사를 받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에게도 말이다. 그것은 본인 안에 있는 성령님과 의논할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헌금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감사할 일인데, 헌금을 한다고 해서 복을 받는 게 아니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주신 속성이 우리 속에 자리를 잡는데, 그것을 여기 교재에서는 '낯선 속성' 이라고 했는데, 그 낯선 속성이 우리를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인간들은 대단한 이기주의자라서 온 우주와 천하의 진정한 가치를 오로지 자기 품속에서만 조금씩 끄집어내면서 확인하면서 산다. "아, 나를 위해서 신께서 이런 일을 벌리셨구나" 라고 사건을 해석하면서 은혜를 끄집어내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사는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에 있다. 성도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그 죽으신 당사자께서 오실 때까지 지속하면서 증거해야하는 자이다.

(고전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 성도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반복해야 !!

그러니 우리가 "아, 나를 위해서 주께서 이런 일을 벌리셨구나" 라는 것에 머물러버리면 자기 소유가 되어버리니 안 되고, 성도는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서, 예수님의 죽으심, 그 죽으심을 반복해서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하는 것이 성도의 최종점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계속 교재를 살펴보자.

** 현재 이 시점과 예수님의 재림의 시점이 연결되어있는 유일한 고리는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이다. 이 죽으심을 반복하는 그 노선 안에 있는 자만이 재림에 참여하게 된다.

◈ '재림'에 대해서 !!

여기에 재림이 나오는데, 이것이 이 부근에서는 제일 어려운데 말이다. 아무튼 재림이 오늘 잘 나왔는데, 이것을 한번 설명해보자는 것이다. 먼저 재림에 대한 잘못된 생각부터 말해보면,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이 여기에 이렇게 있다고 하면, 예수님의 시간대가(?) 이렇게 놓여있는데, 즉 창조, 이스라엘, 십자가, 성령, 그리고 재림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간대에 사건들을 나열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 자신 속에 있는 그 시간이 펼쳐진 것이란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다시 재림할 것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하는가?" 라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창조에는 관여할 수 없고, 이스라엘도 관여할 수 없고, 또 십자가도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지나간 과거이니 말이다.

물론 성령은 지금 우리가 속해있다고 하고, 그런데 재림은 아직까지 오지를 않았으니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이미 지나간 것은 연결이 되지 않으니 그만 두고 말이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이니 성령을 붙들었다고 하면, 즉 연결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런데 재림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이렇게 점선으로 표시할 수 있는데, 즉 어떻게 해서든지 시도를 해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재림과의 연결을 시도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고 하니, 특히 요한계시록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서, 그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우리와 예수님의 재림 사이에 어떤 계단과 같은 것을 발견해서, 그렇게 코스를 제대로 밟으면 그 코스 끝에서 재림할 예수님과 접선할 수 있는, 그러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아이디어가 우리 인간 속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하지만 이런 생각이 왜 잘못인고 하니, 그게 성령과의 관계된 부분인데, 즉 과거는 지나갔고 지금은 성령의 시대인데, 하지만 성령 안에서 관계되었다고 해서 재림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재림을 따로 챙겨서 깊이 연구해서, 그 재림을 영접할 수 있는 사람답게, 즉 행실이나 모든 면에서 자격이나 요건이 갖추어지는, 그런 요건 갖추기 작업이 따로 추가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 인간의 '시간론' !!

그런데 바로 그러한 생각이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 그것이 우리의 시간, 즉 "내 시간 속에 내가 갇혀있다"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나왔는데, 이 시간이 또 어렵기 때문에 이야기를 좀 하겠는데, 방금 강의한 것은 기억을 하시고 사정상 칠판에서 지우겠는데 말이다. 지금부터 인간의 시간을 다시 해보자는 것이다.

인간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우리 인간은 시간론을 펼치면서 인형과 같은 자기의 대행체(?)를 깔아놓는다는 것이다. 즉 "과거의 나는 이렇고, 현재의 나는 이렇고, 또 미래의 나는 이렇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과거의 자기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자기 기억 속에 있는데, 이 기억은 옛날에 자기가 경험한 것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경험한 것에서 기억이 된다는 말은, 물론 경험을 한다고 해서 모두 기억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니가 내 돈을 빌려갔잖아?" 라고 해도 "나는 몰라"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경험한 것들 중에서 기억이 되는 것이 있고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이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을 누가 기억하는가? 현재에 있는 자기가 그것을 결정하는데, 그게 문제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돈을 빌려주었다고 하면 그것을 언제 기억하는고 하니, 평소에는 모르고 지내다가 자기 살림이 어려워지니 "왜 이렇게 통장에 돈이 텅 비지? 맞아, 내가 그 양반에게 그때 돈을 빌려주었지" 라고 해서, 그래서 그 사람을 찾아가서 돈을 갚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 과거, 현재, 미래 !!

그러니 자기에게 압력이 들어오면, 그것을 계기로 해서 과거의 경험들 중에서 현재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골라서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과거의 인물은 누가 만든 것인가? 현재의 '내'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만드는데, 그런데 그 현재의 '나' 라는 것은 '내'가 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거쳐서 현재의 '나'로 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과거를 거친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과거에서 자기가 미진하고 또한 원한이 맺힌 것을 마저 채우는 식으로, 그렇게 과거를 거쳐서 현재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현재의 '나'로 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서 나아간다는 것이다.

◈ 흔들리는 기억의 층들 !!

그러니 기본적으로, 이것을 현상학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현재 밑에는 층층이 과거기억의 층들이 누적이 된 채로 지금의 '나'를 바쳐 올린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와, 그리고 20분 뒤의 '나'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과거의 층들이 흔들려서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 과거의 층들에 새로운 무엇이 빠지고 또한 들어가고 하면서, 그렇게 과거의 층들이 흔들리니, '나'도 역시 흔들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흔들리는 연못 위에 있는 연꽃을 보면 어떠한가? 고요하면 그대로 잘 보이지만, 바람이 불면 그 연꽃의 이미지가 일그러진다는 것이다. 즉 깨진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이미지를 비쳐주는 연못의 물분자가 다 혼란스럽게 되고, 그 혼란에 따라서 빛의 반사각도가 달라지니, 거기서 구성되는 이미지가 명확하지 않고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 괜찮아, 앞으로 잘해 !!

물론 복잡하게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도 좋지만, 이것을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무엇인고 하니까, 예를 들어서, 예상 밖의 큰 기쁨이 자기에게 생겼다고 하면, 즉 로또에 1등으로 당첨이 되었다고 하든지, 혹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큰 유산이 하늘에서 넝쿨 채로 굴러 떨어졌다든지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옛날에는 길을 가다가 누구와 부딪치게 되면 '에이씨, 손' 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는 그냥 '씨익' 웃으면서 지나간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자기 집 앞에다 주차를 하든지, 담배를 피우든지 해도 기분 좋게 넘어가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만큼 지금 자기 기분이 업 되어서 넘어가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과거의 자기 모습이라면 당연히 시비를 거는데, 공공장소에서 남이 담배를 피우면 그것을 그냥 보지 못하고 바로 빼앗아버리고 말이다(ㅋㅋ).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것을 모두 다 용납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지금 그 사람은 자기 밑에 있는 기억의 층에, 이러한 것을 모두 다 용납할 수 있는 것들이 새롭게 삽입이 되었다는 것이다. 

◈ 현재의 자기 기억이,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만들어 !!

그러면 미래는 무엇인가? 과거에서 부족한 것을 보충해서 현재를 만들면, 이 현재에서 또 미진하고 보완하고 싶고 뭔가 변형을 시키고 싶은, 그런 기대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미래인데, 그러면 미래도 결국 어디에서 만드는가? 그게 곧 과거인데, 그러면 이 과거는 어디서 나왔는가? 과거는 없고, 이 과거는 현재의 자기 기억이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과거, 현재, 미래' 라는 것이 서로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사실은 자기 기억이 날마다 연결이 되는 식으로, 그렇게 자기 속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이다. 그렇게 스토리를 만드는 상상력이 이미지로, 즉 기억의 자국들로 늘 편집하고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작가가 소설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것이 꿈속에서는 편집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떨어지는데,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매끈하게 연결이 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나' 라는 것이 성경의 역사를 본다고 했을 때, 즉 '창조, 이스라엘, 십자가, 성령, 재림' 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는 십자가가 좋아졌다가, 또 저기서는 이스라엘이 좋아졌다가, 또한 예수님의 재림이 그리워졌다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라는 것이다.

◈ 인간은, 항상 자기 정당성으로 !!

이것은 바로 성경구절을 보았을 때,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기의 기억을 가지고 성경구절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밖에 없는데, 그렇게 성령님이 하시는 것밖에 없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닌 육체가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이 곧 성령께서 하시는 것인데, 성령이 예수님의 영이니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성경을 진실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우리의 기억들이 무시를 당하지만, 그런데 그게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큐티를 할 때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익히 알고 있던 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다보니, 항상 어디로 돌아가는가? 그만 자기 자신의 정당성으로 되돌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진두지휘로, '때가 되매' !!

하지만 예수님께서 모든 사건을 진두지휘를 하시고 '때가 되매', 이런 모든 역사의 편력은 '때' 인데, 여기서 이 편력을 '편린(片鱗)'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하나의 파편이고 조각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당연히 예수님이 다루어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내가 이해하면, 그것이 나에게 사건이 된다" 라고 우긴다는 말이다. 인간이 이렇게 육체로 있는 이상 말이다.

그럴 때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예를 들어서, 이렇게 빌립보서 2장의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빌립보서 2장만 아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체로 아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뭔고 하니, 빌립보서 2장을 알면서 창조부터 이 재림까지, 여기 천국까지도 몽땅 다 집어넣어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 아하, 나는 천국에는 해당사항이 없구나 !!

그렇게 주님께서 주게 되면 남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 라는 인간은 천국에 갈 수 없는 인간임을, 도저히 십자가를 믿을 수 없는 인간임을, 또한 재림에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인간임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즉 성령을 전혀 받을 수 없는데, 그런데 오직 주님의 은혜로, 선물로 받았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꺼번에 말이다. 그 어떤 성경구절을 갖다 대도, 심지어 사탄의 말이라고 해도 그렇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악귀가 "내가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라고 했는데, 그 말씀을 보면서도 우리는 전체를 다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그 말씀을 이해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 일관된 역사 속에 우리가 동참되도록, 그렇게 주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를 불러주셨음을 말이다.

(행 19: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그러니 우리가 전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웅덩이에다 풍덩 빠졌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말씀인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 바로 그 주님의 일에 우리가 말려들었음을 말이다. 하나의 엑스트라로 참여하게 되었음을 말이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렇다면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를 이끄시는 분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누구라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이끄신다는 것인데, 그것이 곧 믿음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관점인데, 바로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 개혁주의 성화론 !!

그런데 개혁주의 성화론자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자기가 신처럼 버티고 있으면서 "자, 골라, 골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치 대구서문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서 상품을 고르듯이 여기 저기에서 골라서 바구니에 담는데, 그래서 제가 그 바구니를 발로 한번 건드려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건드리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야말로 발작을 일으키게 되는데, 즉 "내 신앙역사에서 귀한 것들이 모두 나왔는데, 그 귀한 것들을 왜 발로 차는가? 내가 얼마나 성화를 위해서 노력했고, 또한 착하게 살려고 했는데, 왜 그것을 발로 차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특히 이러한 바구니에 잘 담는 자들이 누구인고 하니, 곧 목사들인데, 그 목사들의 바구니를 발로 차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가 어떻게 기적적으로 목사가 되었는지를, 즉 신학교를 다닐 때 어떤 권사가 공납금을 대주어서 공부를 했고, 또한 기도를 해서 땅을 샀는데 그 땅 값이 올라서 교회를 이렇게 지었다고 하면서, 매일같이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암에 걸려서 죽게 되었는데, 기도해서 나아서 목사가 되었다고 하고 말이다. 그러니 모든 기적들은 그 안에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 아니, 내가 왜 그런 설교를?

그러니 목사의 설교 가운데 맞는 소리가 하나도 없는데, 놀랍게도 그래도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제가 아남제일교회에 있을 때, 부활절에 예배를 드리면서 성경구절을 하나 건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율법 외에 한 의로서 십자가' 라는 것이다. 물론 목사가 무슨 의도로 그런 설교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런데 그 말씀이 귀에 들리면서, "그렇다. 의롭게 되는 것은 십자가지, 내가 이 말씀을 지킨다고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그러면 그것은 누가 한 것인가? 목사가 그것을 노리고 설교를 했는가? 사실 목사도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데, 성경구절이나 똑같은 문장이 아니라고 해도 때가 되매, 물론 그 때는 전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닌데, 즉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유발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하는 사람은 그냥 전할뿐이고,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누구의 소관인고 하니,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고 건지시는 분께서 하시는 작업인데, 그 작업을 두고서 '때'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때'는 사람마다 모두 다 다른데, 어느 한 사람을 모델로 삼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필요한 때를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때'가 되면 우리 인간의 긴 인생은 묵시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그것은 공통이란 말이다. 즉 신앙생활을 몇 년 동안이나 했고, 언제 믿었고 등등, 그런 것들이 소용이 없고, 그냥 순간으로 압축이 된다는 것이다.

◈ 재림의 '때'는? '그리스도 안' !!

그렇다고 하면 재림은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나 다 예수님의 재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림의 때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조급하게 시간을 재거나 촐랑거리지 말고, 지금 자기가 주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안다고 하면, 주님이 지금 당장 오셔도 괜찮고, 잠을 자고 있는 한 밤중에 오셔도 전혀 무방하다는 것이다.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즉 농사를 짓든지, 가게를 하든지, 회사에 다니든지, 그냥 백수로서 지내던지, 그렇게 하던 대로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한 쪽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한 쪽은 남겨두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 있다고 하면, 재림을 한다는 것이 이미 약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 약속대로 재림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시간론은 무엇인고 하니, 과거와 현재가 서로 혼돈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같이 섞여있기 때문에, 구약의 사건들이 시간배열이 아닌 사건배열로서 말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시간별로 나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지진이 일어난다고 하면서 하늘이 검어진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10가지 재앙 중에서 9번째 재앙이 무엇인가? 하늘이 날아가 버린, 즉 빛이 없는 재앙인데, 그렇게 구약 출애굽의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에 그대로 쓰여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은 바로 항상 '때'가 되는, 즉 구원이나 심판이 필요한 자에게 '때가 되매' 적절하게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일률적으로 어느 한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계 6: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해석은 우리 인간의 시간관이 지적을 당하면서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순차적인, 즉 현재 '나'를 중심으로 한, 현재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배열되어있는 모든 시간관이 요한계시록에서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닌 그리스도의 몸이 다 이루었다고 하는, 예수님의 몸 중심의 시간관으로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다 더 자세한 것은 가락교회의 강의를 참고하면 되고 말이다.

◈ 성도는, 꽃보다 아름다워 !!

그러니 이 재림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항상 재림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는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으면 언제든지, 즉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했으니, 앞으로 5천년이 지나도 상관이 없는데, 언제가 같은 때 속에 포함이 되어있기에, 이미 재림의 약속을 품고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꽃보다도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꽃은 아무리 화려해도 언젠가는 지게 되어있지만, 하지만 성도는 지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 앞에서 언제나 아름답게 피어있는 꽃이라는 말이다. 표현이 너무 썰렁한가요? (좋습니다. 굿!)

이제 교재 204페이지를 살펴보자.

** 구약 이스라엘에서 어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그 중에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한 적이 있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참으로 단호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레 24: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 24:14) 저주한 사람을 진 밖에 끌어내어 그 말을 들은 모든 자로 그 머리에 안수하게 하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지니라
(레 24:15)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요
(레 24:16)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

여기서 제가 묻겠는데, 후대에도 이것을 실천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실시할 리가 있느냐는 것이다. 계명상으로는 안식일에 나무를 하면 분명히 때려죽어야만 하는데, 그런데 느헤미야나 에스라 시대에 보면 과연 사람들이 안식일에 나무를 하면 때려죽였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십일조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면 요즘도 고신교단에서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는데, 소위 '주일성수' 라고 해서, 그들에게는 주일이 곧 안식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고신측 교회에서 요즘 안식일을 어겼다고 해서 죽어나가는 자들이 있는가?

물론 없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는 자는 무엇을 받는다는 것인가? 물론 저주를 받는다는 원칙이 변한 것은 아닌데, 그 원칙이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무엇이 바뀌는고 하니, 하나님 이름이 활동하는 그 방식이 그때그때마다 변화가 된다는 것이다. 진화, 즉 달라진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는 방식이 돌로 내리치는 방식이 있고, 또 다른 방식으로 그 시대상황에 맞추어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 예랑아, 왜 이러노?

쉽게 예를 들어서, 선생님이 학교에 처음으로 부임해서 아이들을 보니 그 하는 짓이 너무 한심해서, "내가 교사로서 월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아이들을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사표를 내겠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몽둥이를 가지고 팬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잠시동안 무서운 느낌이 드는데, 전두환이 정권을 잡아서 제일 먼저 한 것이 무엇인가? 깡패들을 잡아서 삼청교육대로 보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선생님이 설치면, 물론 처음에는 무섭지만 그러나 나중에는 선생님의 약점이 보이고, 선생님도 아이들에게 정을 느끼게 되면, 그러면 패는 것보다도 그 방법이 말로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안 되면, 더욱 정이 들어서 나중에는 선생님이 자기 자신을 때리면서 울면서 끌어않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놈아, 왜 이러노? 너 때문에 못살겠다" 라고 하면서 우는 방식을 말이다.  

◈ 예수님의 '자기 죽음' !!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저주하는 방식이 무엇인가? 결국은 '자기 죽음' 인데, 예수님의 자기 죽음으로 말미암아서, 예수님의 죽음을 모르는 자는 그냥 가만히 두어도 자동적으로 지옥으로 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옥의 영토가 점점 더 확장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차라리 돌이 맞아 죽을 때가 더 나은데, 왜냐하면 돌에 맞아죽는 자만 지옥에 가면 되니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다른 방법을 사용하게 되면서, 이스라엘 내부에서 구원받지 못할 자의 범위가 점점 더 넓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것도 모르고 가면 갈수록 이스라엘주의가 되어서, 즉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것이다" 라는 식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 미가야 선자자의 경우에 !!

그래서 악신이 그 틈을 타서 제사장과 왕까지도, 심지어 예레미야 시대에는 무슨 선지자인가? 거짓 선지자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미가야 선자자의 경우에는, 그가 천상회의에 올라가서 무슨 광경을 보게 되는가? 주주총회와 비슷한 모임에서 말이다. 거기서 어떤 천사가 하나님으로부터 발언권을 얻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제가 거짓말을 하는 영들을 저 선지자들에게 한번 뿌려볼게요" 라고 해서 허락을 받는데, 그것을 미가야 선지자가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 400명과 싸우게 되는데, 말이 '400:1' 이지, 예를 들어서, 노회에 가서 목사와 장로 400명과 한번 싸워보라는 것이다. 복음을 아는 자가 한 명이라고 하면, 거기서 먹혀들겠느냐는 말이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라는 말도 있지만, 이건 계란보다 더 미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미기야는, 400명에게 거짓 영이 들어와서 아합 왕으로 하여금 전쟁에 나가서 죽도록 천상회의에서 악마가 조정했다는 것을, 그것을 솔직하게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기야가 개인적인 감정이나 복수심에 의해서 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 당신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면 이단입니다" 라고 하는 것도 역시 그런 개인적인 감정이나 복수심이 아닌데, 만약에 개입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퍼부어서 자기 속마음이 시원해지도록,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분명하게 본 것이 있고 아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즉 확실한 자기 기준을 제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라고 할 때는, 그런 기준을 말이다.

그것을 글로서 제가 얼마나 남겼는지 모르는데, 십자가 마을에서 논쟁을 할 때도 말이다. 즉 "당신이 말하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과, 그리고 진짜 예수, 진짜 복음, 진짜 영을 말할 때, 당신은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구분하는지, 그 기준을 제시하라" 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서로 논쟁을 하다보면 감정이 격해져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욕을 퍼붓고 하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호와 증인이 이단이고, 안식교는 이단이다" 라고 했을 땐 그렇게 말하는 기준이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 기준을 내놔보라는 말이다. 물론 내놓지 않는데, 있어야 내놓지 말이다. 그럴 때 우리는 "악한 영이 임했다" 라고, 전혀 감정의 개입이 없이 담대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기준이 무엇인가? 당연히 '십자가' 라는 것이다. 

◈ 기준은, 오직 '십자가' !!

악마는 본인 자신이 악마인 것을 아는데, 그 기준이 무엇인가? 사탄이 자기가 악마인 것을 아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아는 것인데, 그래서 악마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십자가를 이야기한 사도바울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나는 가수다" 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악마다" 라는 것이다. 어디에 기준해서 말인가? 십자가에 기준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악마는 이렇게 십자가를 기준으로 해서 자기가 악마임을 제대로 아는데,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런 기준도 없고, 그냥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귀보다도 더 못한데, 그래서 마귀에게 지배를 받는다는 말이다. 악마는 알고 있는데,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모르니, 자기 성질대로 하면서 그만 마귀에게 놀아난다는 것이다.

◈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

우리 주변에 착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교회는 다니지 않아도 말이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부모에게 용돈을 드리면서 순종하고, 자식들도 사랑으로 잘 키우고, 또한 마누라의 말씀도 잘 듣고, 그런 착하고 착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살아가는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아마 그런 사람들은 북한에 가더라도 역시 착하게 살지 싶은데, 김정은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기준이 없는데, 굳이 있다고 하면 자기 몸이 기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복음을 아는 사람이 북한에 가면 어떠해야 하는가? 김정은에게 충성하면서 살면 되는가? 전혀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것처럼, 이 세상이 우상이라면 멸망을 당해야만 하는데, 즉 예수님이 재림하면 공산주의든, 사회주의든, 민주주의든 간에 모두가 다 박살난다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외쳐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것을 남한에서 외치면, "이것들이 미쳤나?" 라고 하면서 잡아가지 않아서 이렇게 멀쩡하게(?) 있는 것인데, 북한에서 그렇게 하면 "동무는 사상이 이상하오" 라고 하면서 당장에 잡아간다는 것이다.

◈ 주께서는, 새로운 양식의 기준으로 !!

다시 교재로 돌아와서, 이 현실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이 말하는 현실을 주님께서는 이미 눈치를 채시고, 그 현실자체에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하게 되면, 그 현실이 하나님의 이름을 공격하는 현실로 바뀌면서 새로운 양식의 기준이 계속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돌로 쳐서 죽였는데, 그런데 나중에는 안식일에 돌로 치는 놈이 이단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롭게 주입되는 것을 모르기에 말이다. 즉 처음에는 안식일을 어기면 돌로 쳐야하지만, 나중에는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망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언약의 시대이니 말이다. 즉 모세언약의 시대가 지나고 다윗언약의 시대이니 말이다.

◈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는?

그러면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어디인가? 북쪽 10지파인데, 그래서 10지파가 망한다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유다나라의 다윗에게 한 약속, 즉 "내가 다윗의 가정에서 내 집을 짓겠다" 라고, 즉 하나님과 합류할 수 있는 집을 짓겠다고 하신 약속에 대해서, "하나님, 정말 웃기시네" 라고 하면서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삼하 7:11)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
(삼하 7: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
(삼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그 사람이 아무리 개인적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국가에 충성하고, 또한 길에 떨어진 돈도 줍지 않고, 그렇게 너무나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의외로 그런 자들이 많은데 말이다. 친구의 보증을 써서 집에 날아가도 그 친구를 원망하지 않고 말이다. 부모가 똥오줌을 바닥에 마구 싸도 다 치우면서, 교회는 다니지 않아도 그렇게 같이 순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곧 다윗언약인데, 즉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지 않아서 십자가를 모른다는 말이다. 그런 자들을 두고 성경에서는 '자기 의'로 사는 자들이라고 간단하게 말하는데, 즉 그렇게 평가를 내리는데, 그게 곧 기준이라는 것이다.

행위로 착하게 해서 불신자를 따라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우리가 어느 세월에 바리새인들을 따라간다는 말이다. 그 완벽한 바리새인들을 어떻게 추월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데, 원수까지도 사랑하겠다고 나선 자들인데,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 불쌍히 여겨주심 !!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원칙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불쌍히 여겨주심' 인데, 즉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라고 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오직 은혜와 긍휼로서만 보여지는 하나님이 진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출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역시 긍휼과 은혜를 입어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노아는 어떠한가? 노아도 역시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노아는 당대 의인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착하겠는가?" 라고 하면서, 그런 것만 찾는다는 것이다.

여기 출애굽기 33장에서 은혜와 긍휼로 구원을 받은 자들만 구원받았다고 분명히 이야기하는데, 그런데도 창세기 6장을 들먹이면서 "노아가 당대의 의인이지 않는가? 봐라. 그렇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은혜를 입었다는 의미도 모르고, 노아처럼 당대의 의인으로 살자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위선자를 양성하고 있는데, 그것이 곧 거짓 영이고, 십자가에 대드는 악마의 하수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감정싸움이 전혀 아니고, 복음을 훼방하면 안 된다고 하는 원리원칙이라는 말이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복음을 전해도 경찰이 와서 수갑을 채우지 않는데, 지금 그런 세월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고 하니, 그것은 저와 여러분이 다 마찬가지인데, 즉 "다음에 남겨서 전하면 되지" 라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우리는, '때'가 되면 모든 것을 !!

왜냐하면 '때' 라는 것은 주님께서 만들어주시고, 그러니 우리는 그 '때'에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일 전하지, 모레 전하지" 라는 것은, 우리가 그런 '때'를 정하는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짓은 우리의 분수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그런 사람들을 한 두 명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창기에는 십자가 복음을 전하다가 새 생명 운동을 하고, 행함으로 돌아서는 자들이 말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 자신에게도 해당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하는데, 즉 "십자가 복음을 전하던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라고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동영상으로 녹화를 해놓아야 하는데, 나중에 꼼짝도 못하게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해놓아도 "내가 그때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라고 나올지 모르겠는데(ㅋㅋ), 그것까지도 녹화가 되었다고 하면, "그러면 그때 당신은 이렇게 될 줄을 알고 미리 예언한 것인가?" 라고 하면, "그때의 하나 둘의 의미가 또 달라졌어" 라고 핑계를 댄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마귀가 시키는 것이니 무슨 변명이든 하지 못하겠느냐는 말이다. 

◈ 애초에 하늘에서 받은 것이 없기에 !!

그것은 처음부터 하늘에서 받은 것이 없어서 그러한데, 그냥 공부만 하려고 했고, 지식만 쌓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받은 것이 없기에 언제 변할지 모르는데, 그런데 언제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무엇인고 하니까, 천상천하유아독존, 즉 "내가 최고이다" 라는 것인데, 전혀 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지 않으면 인간은 결국 육신에서 태어나서 육신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최고이다" 라는 것을 조금 더 자세하면 말하면, "내가 편한 것이 최고이다. 내가 행복한 것이 최고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 예수 이름을 이용해서 도를 닦은 것인데, "왜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가?" 라고 원망을 하면서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런데 이 저주의 벌판에서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의 개입으로 사는 자들이 생겨난다. 이들이 곧 성도이다. 하나님의 속성에 의해서 새로 생겨난 자들이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여기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하는데, 많이 알려진 구절인데 말이다. 여기에 '영접하는 자' 라고 하는데, 그런데 영접하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그 이름을 믿는 자이기 때문에 말이다.

◈ 영접하는 자 !!

목사가 설교를 다 마치고 나면 손을 들고 나오는 것이 영접하는 것이 아닌데, 그 영접하는 롤모델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것은 누구만 알기 때문인가? 남에게 전혀 선전할 필요가 없는데, 즉 "나는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남들에게 과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그게 더 수상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난로가 있으면, 그것이 난로인 것은 자기가 그냥 믿으면 되는데, 그런데 굳이 "집사님, 저는 이게 난로인 것을 믿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게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제발 자기를 좀 알아달라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러니 영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영접한 자의 특징은 그냥 조용히 믿는 사람인데, 그것이 요한복음 1장 끝에 보면 나오는데, 거기에 나다나엘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나다나엘이 기도하면서 플랜카드를 붙이고 했는가? "나는 여기 무화과나무 밑에서 기도합니다" 라고 말이다. 전혀 아무도 모르게 했는데, 그런데 아무도 모르게 한 그 일을 누가 알고 계셨는가? 예수님이 알고 계셨는데, 그게 바로 '믿음관계' 라는 말이다.

(요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그런데 복음을 전하니 자기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너무 외롭다고 하면서 찡찡거리는 분들이 있는데, 물론 외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저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복음을 전하는 재료로 주님께서 준비한 것으로 믿는데, 전혀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도 말이다.

◈ 외로움과 그리움 !!

외롭고 그리운 것, 그것이 바로 '인정교회(?)' 라는 것인데, 그것을 조선후기사회에서는 '계(契)' 라고 했는데, 그 당시에 온갖 종류의 계 모임들이 다 있었다는 것이다. 군(郡)에서 하는 군계, 동계, 이계, 그리고 양반들의 계가 따로 있고, 또 평민들의 계가 따로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것이 뭔고 하니, 모두가 다 일종의 품앗이인데, 즉 "니가 어려울 때 내가 도와주고, 내가 어려울 때 니가 도와주고" 라고 하는 말이다. 모심기를 할 때든지 말이다. 그렇게 서로 도와주는 상부상조의 정신인데, 대가도 없이 도와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기부인데, 명예로운 기부라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문화가 소규모로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번 수련회의 그림에도 나왔는데, 즉 외롭고 그립다는 것이다. 여기서 '외롭다' 라는 것은 뭔가 허전하다는 의미이고, 그리고 '그립다' 라는 것은 그 허전함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그립다는 것이지, 아무나 그립다는 말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김정일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자기가 외롭기 때문에, 그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사람이 그립다는 것이다. 아무나 오면 오히려 귀찮은데, 반드시 자기 외로움을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만 원하고 있다는, 그런 그리움이라는 말이다. 즉 외로움이 동기유발이 되어서, 그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그리움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부부생활이 원만하지를 못하면 외롭게 되는데, 그 외로움으로 인해서 새로운 그리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미국에 있다고 하는 그 아나운서라든지(?), 신성일과 엄앵란의 경우에 말이다. 특히 엄앵란이 얼마나 외로웠는지 모르는데(ㅋㅋ), 그러니 외로움과 그리움은 서로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면 '선(SUN)'은?)

이러한 외로움과 그리움이 없는 인간은 없는데, 우리 인간은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외로움과 그리움이 자기 기억 속에서, 자기 경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유발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육신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곧 육의 모습이란 말이다.

◈ 아하, 나에게 외로움과 그리움은 마땅하구나 !!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복음을 생각하게 되는데, 즉 성령이 오게 되면 "아하, 내가 얼마나 내 위주로 살았는가?" 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또한 "그것을 깨우치게 하는 분이 나와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실컷 외롭고 실컷 그리워해도 마땅한 존재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외롭지 않고, 그리워하지 않는 쪽으로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주여, 저는 이것보다 더 심하게 외롭고 심하게 그리워도, 주님은 여전히 저에게 너무나 분에 넘치는 분입니다" 라고 하는, 그것이 곧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란 말이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이제부터는 외롭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 그것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보다 더 외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영접하는 자' 라는 것은, 그것은 바로 주님 안에 자기가 합류되어서 포함된 자라는 말이다.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계속 교재를 보자.

** 하나님의 대규모 공격을 아름답게 보는 자들이 이들이다. 심판을 반긴다. 성격이 비뚤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뭔지를 알기에 그 후속조치를 고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마저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 오우, 뷰티풀 !!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파괴하시는 그 하나님의 공격을 어떻게 본다는 말인가? 뷰티풀하게 본다는 것이다. 즉 "주여, 이 불꽃놀이가 참 아름답습니다" 라고 말이다. 이 세상이 깨부수어지는 불꽃놀이를, 즉 지진과 화산폭발과 모든 질병, 그리고 마지막 빙하기와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도, "이런 모든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땅히 내릴 조치가 맞습니다. 참으로 잘 하셨습니다" 라고 하면서 손뼉을 마주치면서 박수를 친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아름다운가? 그 가운데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기에 말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기가 좋은 환경을 만드시는 것이 주님의 주특기가 아니고, 그렇게 주님을 죽음으로 내쳐버린 이 세상에 대해서 합당하게, 말씀의 약속대로 조치가 주어진다는 것 자체가 주님께서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바로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이 살아있는 것이 말로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도 다 주님의 뜻이 있어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였사오니, 주님을 면전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저희들을 마음껏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02,28 새벽 1시에 마침.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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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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