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66강 예정과 게임

피/피 2012. 8. 29. 11:02

피66강 예정과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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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66강 예정과 게임

[12 대구강의 5] - [피 66] - 예정과 게임

                                                   12,03,0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자리'와 '나' !!

오늘은 교재 209페이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 [나. 예정인가 게임인가] '비운(悲運)의 왕비'라는 말이 사극에 종종 등장한다. 궁(宮)에서 슬픈 나날을 보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여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각한다면, '비운'이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다.  

여기에 제목이 "예정인가? 게임인가?" 라고 되어있는데, 보통은 이렇게 "무엇인가? 무엇인가?" 라고 할 때는 서로 반대의 성질을 가진 단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그런데 여기서는 "예정인가? 게임인가?" 라고 해서, 얼른 보면 서로 반대말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게 반대말인데, 왜냐하면 '게임' 이라는 것은 승리할 때까지 자신의 자리가 결정되지 않는 상태인데, 그것이 게임이란 말이다. 한창 게임 중에 승패가 결정이 났다고 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제 반해서 '예정' 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예정은 먼저 '자리'가 있고, 그 자리에 합당한 '인물'은 나중에 만들어내는, 즉 자리가 먼저 있고, 그 자리에 합당한 인물을 뽑아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정은 그 순서가 어떠한고 하니, 1번이 자리이고 2번이 순서인데, 하지만 사람들은 예정론을 생각할 때, 특히 칼빈주의 예정론의 경우에, 그 순서를 바꾸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나' 라는 인물을 먼저 예정해놓고, "나는 예정된 사람이 맞습니까?" 라고 묻는데, 즉 그 자리를 자기가 나중에 획득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 목사님, 저는 예정이 되었습니까 ??

'예수 안' 이라는 출발점이 먼저이고, 그 자리에 합석하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 성경해서 말하는 예정론인데, 에베소서 1장 4절에 의하면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나' 라는 것부터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는 그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칼빈주의 예정론인데 말이다. 그래서 "목사님, 저는 예정이 되었습니까? 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정론에는 '나' 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굳이 예정론에서 있어서 '나'를 이야기하면, 그러한 '나' 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를 두고서 '나' 라고 자꾸만 고집을 부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정론에 있어서 이 자리의 주인공이 누구인고 하니, 예수님이 곧 주인공이고, 그 주변에 불려나온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남은 자'로 뽑혀 나온 자들이란 말이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남은 자로 뽑혀 나온 자들 말이다.

◈ 인간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 !!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가 나오는데, 인간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인간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다는 것이고, 예수님의 기도는 그대로 다 받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뜻을 알고 우리는 전혀 모르는데,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중구난방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데, 그것을 경북 의성지방의 사투리로는 '쥐낀다(?)' 라고 하는데, 즉 '씨부린다(?)' 라는 의미인데, 저는 처음에 그 말을 듣고서 욕을 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게 나쁜 말이 아니라 고상한 표현 중의 하나인데(?), 하지만 처음 들으면 당황스럽다는 것이다.

* 질문 - 목사님, 그게 별로 좋은 의미로 쓰는 말은 아닌데요?

물론 그리 좋은 말은 아닌데(ㅋㅋ), 그러니 우리의 기도는 그냥 쥐끼는 것인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그 뜻도 모르고 자기에게 땡기는 대로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기도는 무엇인고 하니,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이미 그 내용이 정해져있다는 것이다.

(요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아들을 아들답게 하는 것만이, 아버지께 영광 !!

이것은 잘 들어봐야 하는데,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바로 그 아들을 아들답게 인정하는 자들을 통해서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고 복음이고 별 다른 것이 없는데(?), 즉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고, 그 아들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이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 중에서 아버지께서 택한 자들만 아들을 아들답게 이해하고, 그렇게 함으로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아들을 거치지 아니하면 말이다. 아들을 아들답게 하는 것, 바로 거기서 스톱이 되는데, 그 이상은 없다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유일무이한 방법이란 말이다.

◈ 단, 아버지가 아들을 보는 '이해도'와 일치되어야 !!

그리고 어떤 택한 자가 아들을 아들답게 이해한다고 하면, 그 이해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아버지가 아들을 이해하는 그 '이해도'와 일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에게 복을 준다고 해서 아들을 섬기는 것은 해당사항이 없고, 오직 아버지가 아들을 이해하는 것과 동일한 이해도를 가지고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아들을 아들답게 높일 때, 그럴 때만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이해하는 이해도가 무엇인가? 아버지가 아들을 보는 것과 동일한 눈으로 예수님에게 다가설 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데, 도대체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보는 그 눈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보는 말이다.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오는데, 즉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라고 하는, 그것이 동일하게 우리 인간이 참여해서 "나는 죄인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아들을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 아들로 인해서 구원되었습니다" 라고 할 때만, 아버지가 아들을 버린 그 취지가 그 사람에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러한 현상은 성령이 아니라면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는데, 성령이 아니라면 육이라는 것인데, 육은 그 출발점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즉 '나'로부터 출발하니 육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하면서, 어떤 연극이나 소설처럼 상상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암에 걸렸는데, 기도해서 나았다" 라고 하는 스토리를 연출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그게 아니고 "울었다. 웃었다,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행복했다. 불행했다, 내 인생을 조졌다. 넉넉하다" 라고 하는, 그렇게 자꾸만 자기가 인위적으로 분위기를, 그것을 '아우라' 라고 하는데(ㅋㅋ), 그런 것을 일부러 만들어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굉장히 냉철한데, 자기에게 어떻게 울컹불컹(?)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오직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어떠한지, 그것을 아버지의 눈과 일치하도록 아는 것만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고, 그렇게 되면 천국백성이란 말이다. 그렇게 해서 천국에서는 아들에게만 영광을 돌리면서 사는데, 그것이 곧 아버지께 유일한 영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감정에 너무 휘둘리면 안 되는데, 즉 자기의 한 맺힘이나 억울함을 예수님과 결부시키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교회에 처음 나왔을 때 보면 이런 경우가 그 얼마나 많은가? 또한 '욱' 하는 성질에 신학교에 오고 말이다. 그런데 막상 와서 부딪치면 너무나도 냉철하게 되어있는데, 그게 곧 예정된 구조 때문에 그러한데 말이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

다시 말씀을 드리면, 이 예정은 자리가 먼저 있고, 거기에 합당한 사람은 주님이 알아서 만들어내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칼빈주의 예정론과 같은 아이디어는 무엇인고 하니까, '나' 라는 것이 먼저 있고, "나는 예정이 되었습니까? 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기 자리를 확인하는 식으로 들어가는 예정론은 바로 유대교의 예정론이란 말이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결국에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예정론이란 말이다.

이런 예정론은 자기가 먼저 있고, 그런 자기가 예정이 되어서 구원을 받았는지, 그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성경말씀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자기를 위한 자리가 되기 때문에 전혀 천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국에서 예정된 사람은, 자리가 먼저 있고 그 자리에 합당해서 들어간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3장 말씀에 의하면 그 자리를 두고서 '누구 안' 이라고 하는가? '예수 안' 이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의 자리가 있는데, 과연 그 예수님의 자리에 합당할 수 있는지, 즉 "니가 예수님의 자리에 들어갔을 때 예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는 인물인가?" 라는, 그것이란 말이다. 자기 혼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것을 묻는 게 아니고 말이다.

(엡 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 예수님의 시다바리로 !!

다시 말해서, "니가 예수님과 더불어, 예수님과 영원히, 예수님만을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라는 것을, 우리가 죽이 이전에 지금 이 시대에 성령께서 확인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40년이나 50년이 아니고,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성경말씀이 그러하다는 말이다.

자기 혼자서 잘살아보려고 천국에 가려는 것이 아니라, 즉 예수님의 시다바리가 되기 위해서 천국에 가는데,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을 자기의 시다바리로 여긴다면, 그것은 지옥에 가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가 거지가 된다고 해도 "예수님의 시다바리라면 그것도 감사합니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 다시, 예정인가? 게임인가?

그래서 오늘 할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교재 209페이지에 보면 "예정인가? 게임인가?" 라고 되어있는데,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이 "예정인가? 게임인가?" 라는 것은 서로 반대말이고 했는데, 즉 게임이라는 것은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에 확정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 게임에서 승리하면 비로소 그 승리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왜 남자들이 하는 게임 중에서 일명 '왕게임' 이라는 것인데, 혹시 기억이 납니까? 가위바위보를 해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의자에 먼저 앉는 게임인데 말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앉으면 신하들에게 명령을 하는데, 즉 "좌의정은 듣거라. 우의정은 듣거라" 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런 게임의 반대말이 예정인데, 왜냐하면 칼빈주의 예정론이 아닌 성경에서 말하는 예정론은 무엇인고 하니, 예정은 이미 확정된 것인데, 하지만 게임은 미확정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불안하다는 것이다. 손에 확실하게 쥔 것이 하나도 없기에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런 불안함을 제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게임을 한다는 것이다.

◈ 비트겐쉬타인 - '이 세상은 게임이다' !!

'비트겐쉬타인' 이라는 철학자가 이 세상에 대해서 한 마디로 정의했는데, 즉 "진리란 게임이다" 라고 말이다. 지금도 그가 말한 "진리란 게임이다" 라는 것이, 즉 "게임이 곧 진리다" 라는 명제가 오늘날에도 정확하게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세상이 곧 전쟁이다", 혹은 "전쟁이 곧 세상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즉 세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치고 부딪치고 다투는 가운데 비로소 이 세상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즉 세상이란 것이 이렇게 있으면, 거기에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자기가 싸우면서 이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자기의 세계이고 자기의 삶의 자리라는 말이다. 그 말이 맞지 않는가?

무슨 말인고 하니, 누군가가 "여기는 당신의 자리다" 라고 해서 앉혀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투쟁하고 노력하고 애쓰고 힘쓰는 가운데, 그것이 부흥회 때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게 노력한 업적으로서, 즉 거기에 대한 성과급으로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이 곧 자기가 원했던 자기의 현실이고 세상이고, 자기의 능력이란 말이다.

이것은 비트겐쉬타인이 이미 19세기말에 한 이야기인데, 즉 "이 세상은 게임이다" 라고 말이다. 그런 게임이기 때문에 한 방만 잘하면 되는데, 주로 조폭들이 그렇게 살지를 않는가? 마약거래로 한 방만 터트리면 평생을 먹고산다는 것이다. 로또복권도 그러한데, 그런 것이 다 하나의 게임이라는 말이다.

◈ 비록 나의 벤츠 범퍼가 부서져도 !!

그런데 과연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물론 저는 이 게임을 오늘 여기서 간단하게 이야기했는데, 실제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이 게임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인지, 거기에 대해서 예를 하나 들어보자는 것이다.

만약에 제가 아주 비싼 외제차를 가지고 있다면, 살짝 긁기만 해도 견적이 500만원이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1톤 소형트럭을 가진 사람이 주차를 제대로 하지 않고 언덕길에서 물건을 내리다가 그만 차가 뒤로 굴러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는 온 힘을 다해서 자기 차가 굴러가는 것을 막았지만, 제대로 막지 못해서 그만 제 차의 범퍼를 박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때 저도 마침 볼일을 다 보고 나오다가 그 광경을 목격했는데, 아무리 봐도 견적이 500만원은 족히 더 나올 것 같은데 말이다. 그래도 그 사고를 낸 사람이 하루하루를 겨우 벌어먹고 사는, 요즘 하는 말로 소위 '생계형 영세 자영업자' 라서, 괜찮으니 그냥 가라고 하면서 선처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며칠 뒤에 무슨 소식이 들리는고 하니, 그 사람이 자기 차가 조금 긁혔다고 하면서 억지를 부리면서 상대방에게 10만원을 받아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나서 그 사람을 찾아가서 "500만원을 내놔라"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은 왜 500만원이나 탕감을 받아놓고는, 정작 자기는 별로 긁히지도 않았는데도 10만원이나 뜯는 일을 왜 했느냐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인데, ㅋㅋ)

◈ 내가 왜 그렇게 했을까?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여러분도 여기에 대해서 한번 답변을 해보라는 것이다. 즉 '내'가 그 사람을 용서했는데,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용서를 가지고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데 이용했다면, 그러면 결국 '나'는 그 사람이 죄를 짓는데 협조한 셈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약한 자, 가난한 자를 위한 자신의 배려가 그 사람의 손에 가면 어떻게 되는가? 그 사람이 남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무기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사전에 원인을 제공한 자가 누구인가? 바로 '나' 자신인데, 그러니 '나'는 본의 아니게 그 사람의 죄가 세상에 확산되는데 기여한 셈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마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마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마 18: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18: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마 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마 18: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마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나의 배려가 사회적 범죄로 돌아온다면?

그렇게 해서 용서한 사람이 그만 파탄이 나고 말았는데, 그런데 두 번째로 또 자기 차를 박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용서해주었는데, 그런데 그 사람도 역시 앞의 사람과 똑같은 짓거리를 해서 20만원을 뜯어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두 번째로 자기가 한 용서의 경우에도, 그만 그 사람의 잇속을 채우는데 이용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자기가 그렇게 상대방에 대해서 배려를 너무 많이 하다가보니, 이 세상이 정의롭게 될 줄 알았는데, 즉 "내가 용서를 베풀면, 그 사람의 마음에도 사랑이 싹터서, 그 사람도 용서하면서 살겠지. 좋은 게 좋은 거야" 라고 은근히 기대를 했는데, 그런데 세상을 너무 우습게 보았다는 것이다. 상대방은 전혀 그게 아니라, "내가 받은 용서는 용서이고, 이제 저 놈을 조져야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이 세상을 너무 우습고 만만하게 보도록 원인을 제공한 자가 곧 자기 자신이라고 하면, 그러한 자신의 용서함이 또한 범죄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공의의 차원에서, 그러한 자신의 행동이 사회적 범죄가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 베드로 - '나를 주인공으로' !!

베드로는 바로 이런 점까지 생각하는데, 지금 자신은 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제가 몇 번을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라고 했는데,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인가?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용서하는 것이 무려 490번이나 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현실은 무엇인가? 게임을 현실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예정을 현실로 보고 있는가? 당연히 예정이 현실인데,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 즉 베드로가 "제가 몇 번을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은연중에 무엇을 노리고 있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곧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납득이 되는 게임 속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다" 라고 하는 속셈이 거기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용서함을 베풀면 이 세상에 용서의 향기가 널리 퍼져서 사람들로부터 "누구야, 이런 엄청난 죄를 용서를 한 사람이 말이야. 어, 베드로네.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있음으로서 이렇게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이 되는구나" 라고 하는, 그런 사랑의 승리와도 같은 것, 즉 용서함 승리의 주인공을 누구로 삼았다는 말이냐는 것이다.

그렇게 출발점을 '나'로 삼아서 사랑이 넘쳐나는 세상을 은근히 기대했다고 하면, 그것은 과연 확정된 것인가? 아니면 미확정된 것인가? 좀 어려운가요? 미확정인데, 그러니 결국 베드로는 믿지 않는다는 말인데, 즉 자기가 일단 먼저 사랑을 해서, 그렇게 용서를 해서 좋은 결실을 맺으면, 그제야 비로소 자기의 사랑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멋진 사랑임을, 그렇게 차후에 결과를 보고 나서 자기가 결정하겠다는 뜻이란 말이다. 

◈ 진짜 게임은, '여호와 전쟁' !!

하지만 바로 그런 인간들을 상대로 해서 주님께서는 게임을 벌리시는데, 그러니 진짜 제대로 된 게임은 누가 하는가? 예정을 하신 분이 그 예정에 합당하게 하는 게임만 있다는 것이 성경말씀에서 이야기하는 게임인데, 그것이 곧 전쟁, 즉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전쟁이란 말이다. 그것이 진짜 게임이라면 게임이고 말이다. 

거기에 비해서 베드로는 무엇인가?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서, 자기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그런 자기 나름대로의 게임을 결코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나선다는 말이다. 그것도 예수님 앞에서 말이다. 이런 베드로와 같은 단체가 오늘날 어디인가? 바로 한국교회인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자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곧 개혁주의인데, 그러니 이단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믿지 않는데, 왜 그런가? 모든 것이 미확정이니 불안정하다는 말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믿음이 없으면 안정감이 없어지는데, 하지만 그렇게 안정감이 없으면 없는 채로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안정감을 찾기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사슬을 엮어나간다는 것이다.

◈ 거미와 거미줄 !!
 
예를 들어서, 이렇게 거미가 있다고 하면, 이렇게 한 마리의 거미가 존재한다는 것은 엄청난 거미줄이 양 사방에 파급되어있다는 것인데, 즉 거미망이 형성된다는 말이다. 이런 거미망의 확장 속에서 누가 안정감을 얻는가? 거미 자신이 안정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는데, 즉 여기에 있는 이 거미 하나만 보이지, 그 거미로 인해서 쳐진 그 거미망에 대해서 말이다. 즉 자기로 인해서 펼쳐진 자기 주위의 거미망과 같은 영향력을 모르고, 또한 알면 감추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예정, 즉 예수님의 거물망과 어떻게 되겠는가? 대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 있는 내용인데, 즉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만든 하나님이 대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우상숭배'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하는 것이 출애굽기뿐만 아니라, 시편과 이사야서 등에도 나온다는 것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라고 말이다.

(출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시 81:9)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사 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그런데 우리가 깊이 이 세상을 연구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물론 불교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즉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라고 말이다. 왜 그런가?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신(神)' 이라는 그 단어를 내뱉은 자기 자신만이 신이라는 것이다.

◈ 큰 바위얼굴 !!

여러분도 '큰 바위얼굴' 이라고 다들 알지 싶은데, 큰 바위얼굴과 일치되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 비교해보지만, 다들 아닌 것으로 판명이 되는데 말이다. 하지만 언젠가 자기 마을에 큰 바위얼굴과 동일한 모습을 한 사람이 자기 마을의 메시야가 되어서 부흥을 시킬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가진 그 소년이 바로, 세월이 흐른 다음에 석양에 비치는 자기 모습에서, 큰 바위얼굴이 본인임을 알게 되는데, 그래서 마을사람들이 그를 큰 바위얼굴로 추대한다는 것이다.   

왜 이러한 이야기가 생겨났는고 하니, 19세기에 있었던 미국의 남북전쟁에 있어서, 이 전쟁을 통해서 미국에 수많은 신흥도시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런데 1920년의 경제공황이후에 그 도시들에 있었던 공장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그곳은 그만 황량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장 하나가 있으면 수많은 서비스업과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마을에 활기에 넘치게 되는데, 그런데 그런 공장들이 없어지면서 그만 바람만 부는 곳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기존의 마을사람들은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메시야를 기다리는데, 왜냐하면 자기 자신들의 거미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마을에 있는 교회의 목사는 어떻게 설교를 하고 기도를 하겠는가? "주여, 과거의 영화를 회복할 수 있도록, 저 큰 바위얼굴과 같은 분이 오셔서 우리가 사는 이 마을을 활기가 넘치게 해주소. 또한 아이들도 도시로 나가지 않고 다시 돌아오게 하소서" 라고 하게 되는데, 그야말로 '쥐끼는'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안정감이 없는 것이고, 안정감이 없으니 당연히 불안한데, 이것을 두고 믿음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믿음이 없으면서도, 그 안정감을 믿음이라고 여기고 자기 나름대로의 거물망을 펼쳐나간다는 것이다.

◈ 나의 믿음 없음이 들통나는 것이 곧 '믿음' !!

바로 여기에 대해서 성령께서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예정을 가지고 오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예정을 가지고 오면 무엇과 무엇이 바뀌는가? 그 이전에는 첫 번째로 자기 자신이고, 그 다음 두 번째로는 자기를 위한 멋들어진 천국이란 자리가 있었는데, 그런데 그 순서가 그만 바뀐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제는 자리가 먼저 있고, 즉 예수님이 먼저 계시고, 그 다음에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자신이 있게 되는데, 그것은 지식이 아니고 문자가 아니라 "야, 이게 진짜로구나" 라고 하면서, 만약에 자기를 기대했다고 하면, 그 자기 자신의 믿음 없음이 마음껏 발각되는 그 즐거움, 그것이 곧 믿음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믿음 없음이 발각되는 즐거움 자체가 말이다.

말이 좀 어려운가요? 자기의 믿음 없음이 들통나는 것이 곧 '믿음' 이라는 말이다. 믿음은 능력으로 오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지식으로 소유하려고 하니, "지식인가? 능력인가?"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꼭 붙들고 쥐고 있는 지식인지, 아니면 바로 그것을 때려부수는 강력한 힘의 능력인지 말이다.

◈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

그렇게 되면 주님의 그물망에 우리는 걸려든 것인데, 그물망 언저리에 말이다. 그것을 머리와 지체라고 하는데, 주님이 쳐놓은 거미줄, 혹은 거물망에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로마서에서는 '남은 자' 라고, 즉 행함이 아닌 은혜로 남았다는 것이다. 왜 행함은 안 되는가? 행함은 자기가 주인공이 된다는 것인데, 우리 인간이 행함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그 앞에 '나' 라는 것이 전제되어있기에 말이다.

(롬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하지만 성경에서는 우리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서 남은 자가 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엘리야의 경우에, 그가 '850:1'로 붙었는데, 자기를 옹호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1'이니 말이다. 그래서 엘리야는 "나만 남았구나" 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입 다물라. 니만 남은 것이 아니라, 7,000명이 남아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7,000명, 144,000명 !!

하나님께서는 숫자를 명확히 하시는데, 7,005명이나 6,998명이 아니라 그냥 7,000명으로 딱 부러지게 잘라버리신다는 것이다. 또 144,000명으로 자르고 말이다. 그것을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신 자의 숫자도 하나 틀리지 않고 내가 모두 다 구원하겠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몸이 아프고 사업이 안 되고 하는 것과 기독교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매우 깔끔하게 주님의 말씀자체가 우리의 모든 것의 배경이 되어서, 주님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그물망으로서 말씀이 '쫙쫙' 펼쳐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그물망이 펼쳐지게 되면, 여기에 엘리야도 있고, 모세도 있고, 세례요한도 있고, 또 성도들도 이렇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여자가 낳은 자식들 가운데 세례요한이 최고이지만, 천국에서는 어린아이도 세례요한보다 더 크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 거물망이 점점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통해서 말이다.

그래서 여기에 있는 거물망에 걸려들게 되면 우리는 지체가 되고, 예수님은 머리가 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세상에서 교회는 단 하나밖에 없는데, 오직 예수님께서 머리가 되시는 교회 말이다. 그것이 진짜 교회라는 것이다. 단 하나밖에 없는 말이다.

◈ 다시, 마태복음 18장을 보면 !!

여기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그러한 우려(?), 즉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라고 하셨는데, 그 신하가 임금님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졌다는 것이다. 아마도 수십, 수백 억은 족히 되지 싶은데, 그 돈을 갚을 길이 없어서 임금님이 탕감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신하는 다른 사람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을, 현재 가치로 700만원쯤 되지 싶은데, 하지만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돈을 빚진 사람에게 다 갚으라고 하면서 윽박질렀다는 것이다. 그러자 임금이 그 소식을 듣고, 소급해서 전에 자기가 탕감해준 그 돈을 다시 갚으라고 하면서 그만 옥에 가두어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직 용서할 수 있는 분은, 그 권한은 예수님에게만 일임된 것이란 말이다.

◈ 예정된 것에서 나온 게임만이 '현실' !!

여기서 중요한 것을 정리해보면, 예정된 것에서 나온 게임만이 현실인데, 이 게임은 승부, 전쟁, 전투, 싸움, 에베소서에 의하면 씨름인데, 이런 모든 것은 예정된, 즉 이미 확고하게 끝나버린, 종결된 것을 가지고 게임에 나서는 권한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고, 우리는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게임이다" 라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지만 그 게임의 주인공이 예수님밖에 없는데, 그분이 구석구석을 다니시면서 우리 인간들이 만든 게임을, 즉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우기는 게임을 엎어버리는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사가 되었으면 그 의사가 된 것이 죄라는 것을 알면 되는데, 의사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하지 않으면 자기 착함의 게임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하는데, 하지만 그것도 역시 주님이 보시기에 죄라는 것만 알면 된다는 것이다.

◈ 칼빈주의 소명론 !!

그렇게 되면 칼빈주의 소명론은 왕창 다 박살나고 마는데, 칼빈주의 소명론이 무엇인가? 평신도라고 해도 자기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하는데, 즉 판사가 판결을 하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목사는 목회를 잘하면 되는데, 농부는 농사를 잘 지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 칼빈주의 소명론이란 말이다.

하지만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는 무엇인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인정하는 것처럼, 그것과 동일한 시선으로 예수님을 인정하게 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칼빈주의 소명론과 성경에서 말하는 예정론은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자꾸만 "그러면 아무 것도 하지 말란 말인가?" 라고 하면서 덤벼들고 하는데, 하지만 이것은 자기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도, 사실은 숨은 쉬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 인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데, 무엇을 해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몸 속에 있는 세포라도 움직이는데, 그것이 암세포든 무슨 세포든 간에 말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이렇게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거야" 라고 하는 것도 일종의 행함인데, 그렇지 않은가?

다시 교재를 보자.

** '비운(悲運)의 왕비'라는 말이 사극에 종종 등장한다. 궁(宮)에서 슬픈 나날을 보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여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각한다면, '비운'이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다.  

◈ 해품달과 '비운의 왕비' !!

여자가 궁에서 슬픈 나날을 보내는 것을 남자들은 이해를 하지 못하는데, 왜 그런지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여자의 입장에서는, 궁에 들어가서 왕을 자기의 남편으로 삼아서 한 평생을 살려고 했는데, 그런데 그 남편이 처음과는 다른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서 왕비로 삼았다" 라고 해놓고는, 사실은 "당신을 사랑한다" 라는 것을, 왕비가 된 여자가 "당신만을 사랑한다" 라는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이다(ㅋㅋ).

그렇지 않은가? 왕은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는데, 그냥 "당신을 사랑해" 라고 했지 말이다. 그런데 그만 왕비가 착각을 해서 왕이 자기만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막상 궁궐에 들어가 보니 어떠한가? 이미 다른 여자들이 천 명이나 더 있는데, 그러니 자기는 천 명 중의 하나라는 말이다.

남자의 경우라면 어떠한가? "이왕 그렇게 된 것, 나도 이런 내시말고 힘이 좋은 호위무사나 또 궁에 있는 소방수(?)들과 놀면 되지" 라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여자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여자들이 남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점인데, 자기도 같이 놀고 즐기면 되는데, 여자는 그것이 안 된다는 말이다.

알다시피 궁궐에는 모든 시설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 일반 백성들이 즐기지 못하는 문화오락시설들이 말이다. 연회장도 있고, 데이트 코스도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가 똑같이 즐기면 되는데, 그런데 여자는 저기 궁궐 한 구석에서 "서방님, 보고 싶사옵니다. 흑흑" 라고 하면서, 그렇게 울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울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것인데, 다같이 즐기면 되는데 말이다. 이런 것이 남자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데, 특별히 사용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모든 것을 공짜로 그냥 쓰면 되는데 말이다.

밤에 심심하면 십자수를 놓으면 되는데, 물론 가끔은 허벅지를 찔러 가면서 말이다. 정이 운동이 하고 싶으면 궁녀들과 축구시합을 하면 되고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밤이면 밤마다 울고, 또한 라이벌 여자가 왕과 함께 침소에는 드는 것을 상상해서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점점 미쳐 가는데, 그게 '해품달'에 보면 다 나온다는 것이다(ㅋㅋ).

◈ 그러면, 여자는 왜 '흑,흑' 인가?

왜 그런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냐는 말이다. 왕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을 일방적으로 곡해한 것인데, 왕이 자기만 사랑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렇게 착각을 했는데, 그 착각에서 본인이 전혀 헤어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헤어나올 길이 없는가?

그것이 20세기 생물학에서 밝혀졌는데, 여자가 남자와 자식을 대할 때, 그것은 마치 남자와 자기 자식을 제외하고는 다 죽여버리는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즉 남편과 자기가 낳은 자식 외에는 다른 자식들은 다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 내 아를 낳아 도 !!

그게 유인원의 세계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여기서 '유인원(類人猿)' 이라는 것은 인간과 유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즉 원숭이와 같이 말이다. 이 유인원의 세계에는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낳은 자식과 남은 낳은 자식의 경우에 있어서,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면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직 자기의 DNA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는 남자의 방식으로 게임에 나서고, 또한 여자는 여자의 방식으로 게임에 나서는데, 그것이 뭔고 하니, 자기의 DNA가 들어있는 씨만을 이 세상에 남기려고, 즉 자기 그물망을 이 세상에 펼치려고 한다는 말이다. 이런 긴긴 이야기를 간단하게 말하면, "흑, 흑", 혹은 "훌쩍, 훌쩍"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ㅋㅋ).

◈ 하지만, 너무나 냉정한 성경말씀 !!

그런데 성경말씀은 뭐라고 하는가? 너무 냉정한데, 즉 "아내가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라" 라고, 그렇게 우리 인간의 마음을 너무 몰라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돈이 있는 자도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이 세상을 살아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고전 7: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쉽게 말해서 "나는 아내도 없고 돈도 없다" 라고 여기면서 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미 이 세상은 끝장이 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무슨 새삼스럽게 자기 나름대로의 게임판을 벌리고 난리를 피우느냐는 말이다. 바둑을 두든지, 장기를 두든지, 화투를 치든지 그냥 지면 되는데, 그런데 왜 자꾸만 이기려고 하는가? 그것은 아직 이긴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새롭게 자기가 이긴 자리에 있어야 비로소 자기는 안심을 하겠다는 것인데,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자기가 행하지 않더라도 이미 이긴 자리가 여기에 없기 때문에, 그것의 대체물로서 자기가 이긴 자리를 확보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목사들이 목회에 성공하고 싶은 심보가 바로 그러한데, 즉 믿음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믿음이 없으니 자기가 솜씨를 부려서, 그것이 주님이 주신 은혜라고 하면서 확인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정주부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자기 자식이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사실 어폐가 있는데, 도대체 어느 정도로 되어야 잘 되는 것이냐는 말이다. 어느 정도냐는 것이다. 혹시 권사님은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ㅋㅋ)

◈ 아, 예뻤던 현숙이 !!

어릴 때 고향에서 시골교회를 다니면서 같은 교회에 다니던 여학생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어떻게 저렇게 예쁠 수가 있을까? 나는 앞으로 반드시 저 여학생과 결혼할 거야" 라고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그것을 그렇게 쥐끼면서 기도를 했는데(ㅋㅋ),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을 입학하고 큰 교회를 가보니, 자기 고향교회의 그 여학생은 인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릴 때는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는 여학생을 보면 그야말로 피아노의 달인이라고 여겼는데, 어떻게 그렇게 손가락이 따로 따로 놀 수 있는지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의 큰 교회에 가서 피아노 반주를 하는 사람을 보니, 시골교회의 그 반주는 정말로 촌스럽기 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석 때 고향에 가서 반주하는 것을 보고는 뭐라고 하는가? "저게 그냥 막 치는 것이지, 저것도 반주라고 하는 거야"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런가? 그 시골교회에서 반주하는 아가씨가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말이다. 성형도 하지 않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인데 말이다. 그런데 왜 이제는 가까이 오지 못하게 멀리 떨어지려고 하는가? 인간이 왜 그렇게 달라졌느냐는 말이다. 

◈ 이런, 내 속이 괴물이 !!

그것은 바로 그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면 자기 생활의 안정감을 가지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과거에는 "저 예쁘고 착한 여자와 결혼을 하면 내 생활이 안정된다" 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이제는 새롭고도 넓은 세상을 보게 되니 그 안정감이 깨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안에 괴물이 들어있음을 몰랐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이쪽 시골여자를 버리고, 이제는 저쪽 서울여자를 차지하겠다" 라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자기 안에 있는 그 괴물을 자기가 다룰 수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도저히 없다는 것이다. 그 괴물을, 악마를 자기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바깥에서 주님께서 악마와 벌리는 게임판에 더욱 넓게 접근해버리면, 자기 속에 있는 악마의 종이 되었던, 즉 악마에 의해서 사주를 받던 욕심이 활동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하게 되는데, 즉 그동안 자기가 시골 아가씨로 만족했던 그 안정감은 다 깨어지고, 또 다시 불안감에 휘말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

그래서 우리는 더 높은 곳을 보면 안 되는데, 그렇게 되면 마귀의 시험에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2장에 뭐라고 하는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게 무슨 의미인가? 우리 인간이 근접할 수 없는, 인간보다도 더 낮은 자리가 곧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라고 했는데, 즉 십자가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의 괴물 됨을 파악한다는 말이다. 즉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아하, 내가 죄인이구나" 라고 말이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하지만 우리 인간은 어떠한가? 남들이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해서 안달이 나고, 그래서 그동안 자기가 받은 행복과 축복은 다 버리고 시위하고 데모를 하면서 땡깡을 부린다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들이 십자가에서 비켜나가지 못하는데, 우리 모두가 다 그런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지만 그 여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각한다면, '비운'이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다. 어느 인간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혜택에 비해서 슬픈 인생은 없다. 감히 하나님의 은혜를 핑계치 못한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 슬픈 인생은 없어 !!

여기에 보면 "어느 인간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혜택에 비해서 슬픈 인생은 없다" 라고 하는데, 누가 '새드 무비' 라는 말을 했단 말인가? 슬픈 영화, 슬픈 인생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그야말로 낙관적이고, 우리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게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그 십자가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데, 정말이지 기가 막힌다는 것이다. 슬픈 인생은 없는데 말이다. 우리는 그저 범사에 감사할 뿐인데, 우리에게 슬픈 인생은 없다는 것이다. 이제 여러분도 약조를 해주셔야 하는데, 이제 애매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ㅋㅋ). 치매에 걸려도 슬픈 인생은 없다는 것이다.

◈ '은혜' 라는 것은?

여기서 '은혜' 라고 하는 개념을 잠시 살펴보면, 은혜는 일종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쁘장한 리본이 잘 묶여진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바깥에서 그것이 선물이라는 것만 알고 있지, 그 선물 보따리를 풀어서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거기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그 안에 우리 자신에게 좋은 것이 들어있는 줄 아는데, 하지만 그 안에는 예정된 대로 게임을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성이 선물로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이미 다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껏 져도 괜찮다. 그러니 슬픈 인생은 없다" 라는 것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선물상자를 오픈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왜 "소망을 담은 상자를 열어서 인생은 비극이 되었다" 라는 말이 있는데, 그게 곧 판도라의 상자인데 말이다. 그 열린 상자처럼 주님께서 이 상자를 열게 되면, "이제부터는 슬픈 인생이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슬픈 인생은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더 이상 나의 일은 없어 !!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일에 선물을 받아서 참여하게 되는데, 즉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일은 없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라고 하는데, 왜 그런가? "너희는 이미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더 이상 너희 것이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사도바울이 이렇게 편지를 했는데, 그런데 만약에 이런 편지가 공개되지 않았다고 하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아마도 우리는 온갖 상상을 다해서, 즉 "아마 사도바울이 어떤 교회에 가서는 교인들을 달랜다고 애썼을 것이고, 또 다른 교회에 가서는 축복을 했을 것이다" 라고 하지 싶은데 말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평소에 어떻게 설교를 했고, 그가 어떤 편지를 썼는지, 그것이 모두 공개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등에 보면 말이다. 도대체 그가 무슨 편지를 보냈는가? 막상 그것을 펼쳐보면, 도대체 교회에 나오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그것이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실천력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는 너무나도 엄청난 내용들이 나온다는 말이다. 즉 믿어야 하는 것이지, 인간의 행함으로는 어떻게 천국에 가겠다고 하는, 그런 것으로는 전혀 엄두가 나지 않는 내용들로서 그의 편지가 가득하다는 말이다.

◈ 지옥에 가도 될만한 은혜 !!

다시 게임 이야기를 해보면, 이 게임을 했을 때 그 결과로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그 게임의 결과로 한 쪽은 천국에 가고 다른 한 쪽은 지옥에 가는데,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말은 "지옥에 가도 될만한 은혜를 주셨다" 라는 것이다. 즉 "지옥인가? 천국인가?" 라는 것을 결정짓는 것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갖는 감사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지옥에 가도 당연한데 천국에 가는 것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에 가고 천국에 가고 하는 것이, "나는 지옥에 가지 않을래" 라고 한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에 가라면 가야 되는데, 그야말로 까라면 까야 하는데, 그런데 그런 능력으로 천국에 보냈으니, 우리로서는 슬픈 인생은 없고 감사할 뿐이란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너의 육을 죽이려고 하거든 무서워하지 말라. 영과 육을 지옥에 넣어 멸하려 하는 자를 무서워하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눅 12: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눅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그렇게 사람이 무섭지가 않으면 이미 자기는 안정감을 얻었다는 뜻인데, 그렇게 안정감을 얻게 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변화도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안정이 되어있으니, 즉 주님이 주신 것으로서 안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제가 언제인가 그런 설교를 했지 싶은데, 즉 이미 우리 속에 있는 것이 귀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이다.

◈ 어제의 내가 곧 나의 적 !!

그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사람의 적이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어제가 곧 자기의 적이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은 과거를 이겨야 하는데, 즉 어제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계속 어제에 머물러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이미 인생을 포기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제를 계속해서 즐기게 되면 그 어제를 그만 자기의 것으로 삼아버리는데, 그렇게 되면 어제의 자기 자신이 따로 있고, 그 어제의 자기를 삼게 되는 자기가, 그렇게 어제로 연결된 자기 자신으로서 그만 스톱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어떠한가? 주님은 어제의 주님도 맞고 오늘의 주님도 맞는데, 우리는 오늘의 주님께서 만들어주신 지기는 싫어하고, 어제의 멋있던 자기 모습을 두고 "나는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하면서, 그것을 그만 오늘의 자기 모습으로 삼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진정한 적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그냥 변화에 우리 자신의 몸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미래에서 당겨야만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과거에 기대려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의 손길을 차단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우상숭배가 되고 자아도취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같이 "그때가 좋았는데" 라고 하는데, 그러면 지금은 어떠하다는 말인가?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어제의 자기가 있었는데, 그런데 오늘이 되니, 거기에다 바람을 불어넣어서 풍선처럼 만들어놓고, 어제의 자기를 거기에 집어넣어서는 "어제의 내가 오늘에 있다"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주님의 손길은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분명히 그 어제의 자기는 주님이 만들었는데, 그것이 너무 자기 마음에 들어서, 오늘의 자기로 소급시켜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주님은 내일이 되면 오늘의 자기를 또 부술 것인데, 그렇게 어제의 자기를 오늘의 자기로 만들게 되면, 그만 미래의 주님의 손길이 끊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제자리 뛰기를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주님의 예정된 곳으로 가지를 못하고 중간에 그만 스톱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예정된 곳으로 가려고 하면 언제나 게임이 있어야 하는데, 바로 그 게임의 적이 무엇인고 하니, 어제의 자기 자신이 곧 진정한 자기 자신의 원수라는 것이다.

◈ 그날의 염려는 그날로 마감해야 !!

그러니 우리는 그런 어제의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울지도 말고 너무 웃지도 말고, 오늘 웃을 것에 대해서 웃고 또한 우는, 즉 그날의 염려는 그날로 마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은행과 같은데, 문을 닫고 그냥 결산은 그날 다 마감을 해야하는데, 그게 안 되면 제대로 퇴근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철학적으로 따져보아도 이 말이 맞는데, 사람이 어제라고 생각하면 사실은 그것은 어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이 조작해낸 어제이지 말이다. 즉 인간의 과거라는 것은, 항상 현재가 만들어낸 조작되고 편집된 과거이지, 실제로 그 당시 과거는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로 그것은 실험이 가능한데, 예를 들어서, 자기가 어느 기도원에 가서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면, 다시 가서 한번 해보라는 것이다. 자기가 은혜를 받았던 그 바위 위에서 아무리 기도를 해도, 과거에 자기가 받았던 은혜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지?" 라고 하면서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할머니가 과거에 손자를 자기가 키웠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예쁘다고 하면서 그 손자의 볼을 마구 잡아당기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그 손자는 "할머니,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나는 이미 다 컸습니다. 이제는 어제의 내가 아닙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해병대는 매일같이 어제의 해병대이지만 말이다(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집 안에서 뛰노는 자식이나 자기 주변에 놓여 있는 가재도구 하나까지도 모두 자신의 과거사이다. 서럽고, 춥고, 배고프고, 힘들었던 추억의 산물이요 기념물들이다.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는 게 없다.

◈ 과거를 묻지 마세요 !!

여기에 "모두가 자신의 과거사이다"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과거사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시각적인 것을 한번 살펴보면, 그것은 바로 숨어있는 것을 점선으로 연결해서 하나로 통합해서 본다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실제로 보이는 것보다도 자기가 상상해서, 과거의 어떤 경험을 가지고 점선으로까지 연결해서 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성당이 있다고 하면, 이 성당의 전면이 삼각형인데, 거기 밑에는 굳이 삼각형이 아니더라도 삼각형으로 연결해서, 그렇게 삼각형과 유사하게 본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고 하니, 실제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그 기능을 보이는 것에 집어넣어서 말이다.

바로 그것을, 그렇게 자기 추상화를 시키는 기능적 작업을 인간의 두뇌에서 지시해서 눈으로, 즉 시각적으로 한다는 말이다. 추상적인 요소를 자꾸만 가미를 시켜서, 그 가미된 것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동일한 환경 속에서 똑같은 그림을 보더라도, 그 그림이 제 각각 달리 나온다는 것이다. 화가 집사님, 그렇지요? (동영상 참고)

◈ 잠시, 책 선전을 !!

이러한 추상화 작업에 대해서, 이번에 나오는 책 '죽음을 이끄는 삶1"에 보면, "개별인가? 보편인가?'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과거가 있다면, 5년 전의 과거와 10년 전의 과거가 한꺼번에 뒤섞여서 꿈속에서 모두 다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살아있는 삼촌이 다같이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동네도 옛날 어릴 적에 놀던 동네가,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데, 분명히 이사를 했는데도 여전히 삼촌이 거기에 살고 있고, 할아버지도 거기에 살고, 그리고 자기는 커있고 말이다. 물론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기도 이미 장성해있고 말이다. 그러니 도저히 분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꿈속에서는 추상화 작업이, 즉 의식작업이 중지가 되어서, 의식작업이 중지된 것을 무의식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무의식들이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쓰레기통처럼 분류와 정리가 전혀 되지 않아서, 그렇게 마구 뒤섞여있다는 말이다.

◈ 인간의 주체는?  

그렇게 따지고 보면,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기억들의 파편들이 조립된 것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서 '잉여(剩餘)' 라고, 즉 여분의 의미인데, 그것이 곧 '영적(靈的)' 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분산이 되어있는 기억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예정에 대항하기 위해서, 인간의 '자아' 라는 것이 그 분산된 것을 끌어 모아서, "니만 신이가? 나도 신이다" 라고 하면서 나가는 그 본성은,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서, 보이지 않은 영적인 요소에 의해서 인간의 주체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철학자들이 제 아무리 연구해도, '잉여' 라는 말까지는 갔는데, 뭔가 눈에 보이는 것을 조립하는, 주인공이 도대체 왜 그렇게 하는지, 거기에 대해서 "타인의 욕망을 흉내내서 그렇다" 라고 까지는 알았는데, 하지만 타인의 욕망인 줄 알면서 흉내를 왜 내는지, 거기에 대해서 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그들에게는 정답이 없다는 말이다.

◈ 그들은, '암묵적이다' 라는 답변밖에는 !!

그래서 기껏 끄집어낸 용어가 무엇인고 하니까, '암묵적이다' 라고 하는데, 즉 "내가 그렇게 느꼈다" 라는 것인데, 그냥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예술이고 과학이고 철학이고 간에, 마지막에 보면 항상 무엇인고 하니, '암묵적이다' 라는, 즉 "내가 그렇게 느꼈다"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은 이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런데 나는 왜 좋아할까?" 라고 했을 때, "아하, 내 속에 암묵적으로,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그런 느낌이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왜 그렇게 당신 속에는 그런 느낌이 오는가?" 라고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는 답변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기분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질문했을 때, 정답이 없어서 '암묵적이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가 알 수 없는 잉여, 이 잉여는 덧붙여지는 것인데, 더 커지는 것이란 말이다. 자기가 예상한 것보다 뭔가가 더 남아있는 미지의 큰 부분, 그것이 그때그때마다 자기를 주체, 혹은 자아로 만든다는 것이다.

◈ '육(肉)'과 '혼(魂)' !!

철학자들이 여기까지는 밝혀내었지만, 그러나 이것을 영적으로, 영과 결부할 수 있는 연결고리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이 '잉여'를 두고 '혼', 혹은 '영혼' 이라고 하는데, 즉 육으로서, 그 육에 대한 해답이 영혼이라는 것이다. 육에 대한 해답이 말이다. 그러니 육은 무엇을 만드는가? 육으로는 문제를 만들고, 그 해답은 영혼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방법인데,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일을 했습니다" 라고 한 다음에,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서 교제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 자기 영혼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시 146: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러니 영혼을 자기가 부풀려진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성경이 참 어려운데 말이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잉여라고 해서 부풀려진 것으로 보았는데, 자기가 이렇게 있다면 자기 머리 위에 부풀려진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 이 작은 것이 자기 몸에 맞는 전부인데, 그런데 그것이 아닌 몸에 부풀려진, 마치 아우라와 같이 자기 몸보다 더 큰 것이 자기를 덮고 있다는 것을 자기가 느낀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인간은 흙이고, 그냥 그 흙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이 계셔서 그 사이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부분으로 해서 영혼을 만들어서, 바로 그 영혼을 통해서 교제를 하시다가, 그 교제가 끊어지면 영혼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다시 주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영혼이 발생하다가, 또 교제가 끊어지면 영혼도 없어지고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감사할 것이 있으면 누가 감사하게 되는가?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자기 영혼이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이다. 전혀 자기가 감사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어디까지나 육인데, 다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자기 영혼이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하지만, '이분설'이나 '삼분설'의 경우에 !!

그러니 '영혼' 이라는 것은, 이것이 중요한데, 즉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자기 부분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부분을 두고서 영혼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 철학에서 말하는 영혼은 무엇인가? 인간을 둘로 나누어서, 영혼이 따로 있고 육이 따로 있다고 본다는 말이다. 이것을 '이분설' 이라고 하는데, 또 어떤 사람들은 영, 육, 혼으로 나누어서 '삼분설' 이라고 하고 말이다.

그런 대표적인 자들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니인데, 지방교회에서는 이 삼분설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지극히 악마적인데, 왜냐하면 자기가 하나님을 만들어내니 말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닌데, 그렇게 되면 자기가 하나님을 만들고 자기 안에다 가두어두는 것인데, 즉 하나님이 그만 자기 소유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또한 자기가 필요할 때마다 끄집어내어서 이야기하고 말이다.

이런 지방교회에서 말하는 삼분설은 미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때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났는데 말이다. 그래서 여호와증인이나 박태선 등, 모두가 다 삼분설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공부를 조금 했다고 하는 개혁주의자들은 이분설로 나가기도 하지만, 하지만 그외에는 모두가 다 삼분설을 주장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공부를 하면 이분설이 되고, 그렇지 않고 그냥 문자로만 보면 삼분설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자기를 조종하게 되면, 하나님을 늘 자기 안에 가두어둘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이분설이나 삼분설은 모두가 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녹취자 - 그래도 공부를 조금은 했다고 하면서도 삼분설을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있던데요?)

◈ 주님이 찾아오시니 영(靈)으로 !!

하지만 구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줄 때만 "내 영혼아, 주를 찬양하여라" 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주님이 철수하게 되면 육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는가? "주님과 관계가 끊어지면 나는 육이고, 나에게는 그런 육신밖에 없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찾아오시니 영이 된다" 라고, 즉 "전에는 예수님을 육체로 알았지만, 그러나 이제는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그러니 주님과 교제할 수 있는 바탕조차도 누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가? 자기 자신이 아닌, 즉 자기 안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만들어주신 것 안에서만, 즉 자기가 영으로 돌변하게(?) 될 때만 주님과 교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미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게 아니고, 또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 히브리적 사고방식 !!

바로 이것을 '히브리적 사고방식' 이라고 하는데, '보만' 교수가 이것을 '헬라적 사고방식과 히브리적 사고방식의 차이점' 이라는 유명한 책에서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제가 '신학과 철학의 허상'에서 서평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말이다. ('성경신학의 세계'에 나오는데, ㅋㅋ)

* 질문 - 예수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그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성령으로 나게 되니 성령 안에서 영적인 존재가 되는데, 그러니 성령이 없으면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워치만 니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그는 인간자체 속에 이미 영적인 요소가 있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들은 '영, 육, 혼'을 아주 엄밀하게 분류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영을 혼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이분설이든 삼분설이든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인간 속에 그런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곧 성경적이 아니란 말이다. 심지어 요즘은 사분설도 있는데, 자기도 한번 튀어보려고 말이다. 사도바울이 과거 바리새인이었을 때 자기도 이미 성경을 다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러한 것이 모두 다 육적으로 아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 사도바울의 경우에 !!

사도바울이 나중에 주님을 만나고 그것이 통 채로 다 육인 것을 알았는데, 즉 이분설이든 삼분설이든 간에 그게 통 채로 육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그 모든 것을 죄로 규정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는 그동안 죄인으로 규정받을 것을 의인이라고 우기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것으로 구원이 되는 줄 알고 말이다. 하지만 의(義)는 십자가에서 성령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자기가 구성하고 조작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의가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에 이렇게 컵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이 컵의 손잡이가 의(義)라고 한다면, 이 손잡이는 바깥에 달려있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여기 컵 안에서 손잡이도 없이 자기가 자기 자신을 끄집어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손잡이를 잡고 외부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손잡이를 잡고 외부에서 끄집어내는 것,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구약의 영혼설'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 그렇게 끌어내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컵 안에서 자기가 손잡이를 만들어내서 스스로 끄집어내려고 하는데, 바로 그것 자체가 악마적임을 나중에 사도바울이 발견했다는 것이다. 

* 질문 -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내 속에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 라고 했는데요?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거기에서 말하는 선과 악은 구성요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작용이라는 말이다. 구성요소는 존재적으로 면적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비해서 작용한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게 와서 덮칠 수도 있고, 또한 저게 와서 덮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방금 이야기했듯이, 여기에 이렇게 손잡이가 달린 컵이 있는데, 이 컵 안에서 자기가 아무리 설치고 해도 안 되지만, 그런데 이 컵의 손잡이를 잡으면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손잡이를 주님이 주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바깥에 있는 손잡이를 감사해야 하는데, 여기 컵 안에는 죄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컵 안의 것을 끄집어내려고 몸부림을 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것은, 마치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손잡이를 만들어내려고 시도하는 것과도 같은데, 그래서 인간의 시간은 주님의 묵시 앞에서 완전히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아까 과거에 대해서 연연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즉 과거는 잊어야 한다는 것이다.

◈ 기도는 우리 마음대로, 응답은 주님 마음대로 !!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영으로 만들어놓았는데, 그리고 그 영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쥐끼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이 곧 영적 사람이란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쥐끼는 기도를 할 때, 그 기도가 끝나는 순간 어떤 의미에서는 기도를 시작하는 시점은 이미 과거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라고 하는 순간 어떻게 되는가?

이미 우리가 쥐낀 기도는 과거사가 되어서 그만 날아가 버리고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 마음대로 하고, 또한 응답은 주님이 마음대로 하신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포교회의 박영선 목사가 그러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말이다.

다시 교재를 보자.

** 집 안에서 뛰노는 자식이나 자기 주변에 놓여 있는 가재도구 하나까지도 모두 자신의 과거사이다. 서럽고, 춥고, 배고프고, 힘들었던 추억의 산물이요 기념물들이다.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는 게 없다.

여기서는 과거사를 '기념물' 이라고 하는데, 즉 인간은 자기 과거를 조작해내는데, 과거 중에서 현재 자기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것들만 골라서 말이다. 즉 "나는 과거에 그런 수모를 당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라고, 그렇게 현재 자기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자기 과거를 편집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210페이지를 보자.

** 아침마다 체조하면서 툇마루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활기찬 문명도 모두 인간들이 그동안 애쓰고 힘쓴 결과물로서 이해한다. 결코 특정 영웅이나 위대한 인물에 의해 한꺼번에 주어진 오늘이 아니다. 다 같이 애쓰고 노력한 보람으로 구축된 오늘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여기에 가치를 부여한다. 그와 함께 사람들은 윤리적으로 내몰리면 영적인 영역으로 도망치는 버릇이 있다. 자신의 가치를 새로운 영역에서 정돈하려는 것이다. 어쨌든 나 위주로 정리한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라는 자가 뛰어 들어와서는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이요 상속자라고 주장한다.

(마 21:33)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 21:34)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마 21: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마 21: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마 21: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마 21: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마 21: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 내가 상속자다 !!

여기 포도원 비유를 보면, 포도원 농부들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르는데, 하지만 아무리 애를 쓰면 무엇을 하겠는가? 상속자가 누구인가? 그만 아들이 오게 되면, 자기들이 그렇게 공을 들여서 농사를 지어놓아도 아들의 것이 되니, 그만 기가 찰 노릇이란 말이다. 자기들이 밤잠을 설쳐가면서, 그렇게 풀을 메고 비료를 일일이 다 줘가면서 농사를 지었는데, 그런데 아들이 와서는 자기 것이라고 가지고 가면 얼마나 부아가 나겠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런 농부의 입장인데, 하지만 우리는 그런 부화를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작 화를 낼 사람은 우리 자신이 아니니 말이다. 즉 우리는 화를 낼 입장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깨닫는 것이 곧 믿음이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물을 주는데, 왜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는가?" 라는 것인데, 즉 시키는 대로 물을 주고, 그렇게 해야하는데, 그런데 그만 자기가 다 알아서 선택해서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들이 와서 가지고 가버리니까, "이건 내 껀데 니가 왜 가지고 가노?"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속에는 게임장이 자리를 잡고있는데,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라는 것과, "내 인생은 주님의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예정된 자라고 하는 게임이, 그런 전쟁이 매일같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고 또 일어난다는 것이다. 게임과 전쟁이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람들의 주장은 이것이다. "그냥 살아온 대로 내버려두라" 라는 것이다. 즉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의 자위권이 발동된다.

◈ 그냥 '내비두' !!

여기에 "그냥 살아온 대로 내버려두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것을 세 글자로 하면 무엇인가? '내비두' 라는 것인데(ㅋㅋ), 자기 꼴리는 대로 살든지 말든지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전도를 하다가 보면 항상 듣는 소리가 이것인데, "내가 부처를 믿던 하나님을 믿던 그냥 내버려둬요" 라고 말이다. 마지막에는 결국 그것인데, 우리가 그런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고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똑똑하든 무식하든, 박사든 석사든 간에, 그런 것에 전혀 상관없이 항상 마지막에 돌아오는 소리가 "제발 좀 내버려둬. 죽더라도 내가 죽을 테니 말이야" 라고 한다는 말이다. 죽더라도 자기가 용감하게 죽겠다는 것인데, 즉 "당신이 나의 죽음에 보태주지도 못하면서, 그러니 가만히 있어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결국은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왜 그러한 소리를 하는가? "제발 좀 내버려둬" 라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그동안 우리 인간이 죽음의 소유였음이, 그래서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죽을 때 죽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죽음이 그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으면 산다" 라는 복음이 증거되니, 죽음이 그 자위권을 발휘하는데, 즉 "죽으면 그만이야. 죽음 뒤에는 아무 것도 없어. 죽음 뒤에 심판이 있다고? 웃기지 마. 가보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하지마. 죽음 뒤에는 아무 것도 없는 거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 뒤에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확신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이 곧 '잉여' 인데, 여분의 것으로서, 즉 죽음 뒤에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고 하는, 그러면서도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까봐서 염려하는 그 모든 것, 그것이 악마는 주는 것이란 말이다.

◈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

그래서 히브리서 2장 15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이것이 악마의 마지막 무기인데, 그래서 악마가 "죽어도 괜찮아. 아무 것도 없으니, 정말 괜찮아"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인간은 죽기는 싫다는 것이다. 여기서 뭔가 자기 안에 서로 융화가 되지 않는, 뭔가 서로 밀치고 반발하는 두 세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

이러한 결핍이 곧 균열인데, 이 균열을 메우기 위해서 술과 도박과 여자로서, 그런 것으로 이 끊어진 것을 연결시키려고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둘이 되면 곤란한데, 자기는 하나이기 때문에 그 하나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 하나가 자꾸만 갈라진다는 것이다. 

하나는 살고자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죽고자 하는데, 이것을 누가 발견했는가? 프로이트인데, 그래서 그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우리 인간 속에는 상반된 두 가지의 힘이 존재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는 "그래도 살아야지" 라고 하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그만 죽자" 라고 하는 힘이라는 말이다.

◈ '리비도(libido)'와 '타나토스(thanatos)' !!

살고자 하는 것을 '리비도' 라고 하고, 죽고자 하는 것을 '타나토스' 라고 하는데, 이렇게 살고자 하는 것은 일종의 생식본능인데, 즉 자기 DNA를 남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성욕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보통 리비도를 성욕으로 번역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70이 넘어도 끓어오르는 성욕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마치 신성일이 처럼 말이다. 사실은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솟아나는 성욕과,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왜 살고자 하는가? 그것은 죽음이 나를 당기기 때문인데, 그러니 가만히 있으면 죽음으로 끌려가니, 나는 그 죽음을 극복하고자 사는 쪽으로 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여기 자기 똥배에 이렇게 밧줄이 하나 묶여져 있다고 하면, 누군가가 이 밧줄을 잡아당기면 자기는 어떻게 하는가? 거기에 대한 반발로서 그 반대쪽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잡아당기는 그 반대방향으로 말이다.

◈ 우주는 밸런스 !!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우주는 밸런스이다" 라고 했는데, 즉 우주는 균형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밸런스인데, 그래서 이 밸런스를 아름답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이쪽에서 튀어나오면 저쪽에는 그만큼 들어가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밸런스가 맞을 때 우리는 인간은 그것을 두고 가장 아름답다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학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우리 인간은 수소 이온수치가 서로 밸런스가 맞을 때 건강한 것이고, 그 수치가 떨어지면 아프다는 것이다. 동양의학에서는 기(氣)가 잘 흐르면 건강하고, 반대로 기가 막히게 되면 건강하지 못한데, 그렇게 기가 막혔다는 것은 한 쪽에서 과도하게 밀고 들어왔으니, 그것을 제거하면 뚫리는데, 그래서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진리는 균형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우주에는, 물질과 반(反)물질이 !!

'하이먼(?)' 이라는 현대물리학자는 뭐라고 이야기하는고 하니까, 우주에는 물질과 반(反)물질이 같이 있어서, 그러니 공간은 빈공간이 아니라 꽉 차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반물질을 증명한 사람인데, 세계적인 수학자이면서도 과학자라는 것이다.

이 반물질은 정면으로 부딪치면 폭발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마는데, 그런데 그 과학자는 무엇을 보는고 하니, 반물질이 물질과 섞여서 서로 상쇄가 되는데, 그렇다면 지금의 생물은 왜 살아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수치가 약간 많은 쪽이 살아남아서 지금의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데, 현대과학에서는 말이다.  

그러므로 결국은 밸런스와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것인데, 즉 밸런스를 희망하지만 맞지 않는 밸런스, 그리고 균형을 희망하지만 맞지 않는 균형,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틈바구니 사이에서는 무엇이 생기는고 하니, 끊임없는 변화가 생겨서 주어진다는 것인데, 그것이 또한 불교사상이라는 말이다.

◈ 불교 - '모든 것이 변하느니라' !!

그래서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정지된 게 아니라 변화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변화하는데, 그것을 태극문양으로 표시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서로 물고 물리지만 일직선은 아닌, 그렇게 하나가 아니라 변화하는, 즉 물결이 치면서 한 쪽이 올라가면 다른 쪽은 내려가는데, 그것이 모든 자연의 이치이고, 곧 생존의 역사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정도가 되면 드디어 자리를 하나 정도 깔아도 되지 싶은데(ㅋㅋ), 그러니 부적을 부친다든지, 혹은 점괘를 보는 것도 일종의 밸런스인데, 즉 기가 세면 부적을 부쳐서 다른 한 쪽의 기를 빼주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사주팔자도 여기 태극문양에 관련된 것으로서, 즉 어떤 사람의 사주팔자를 봐서 만약에 그 사람의 한 쪽의 기가 세면 그것을 완화시키는 요소를 집어넣게 되는데, 그러면 그 사람의 인생은 원활히 잘 돌아간다는 말이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너무 과도하게 착하지 말라" 라고 말이다. 물론 너무 악하지도 말고 말이다. 또한 잠언서에 보면,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참 애매한데, 가난한 자와 부자의 중간이 어느 정도 되느냐는 것이다. 즉 월수입이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느냐는 말이다.

(잠 30:8)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 밸런스인가? 예수님인가?

하지만 인간은 욕망은 그렇게 가만히 있지를 않는데, 문제는 자기의 밸런스가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아들 됨인데, 즉 자기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셔서, 그 죽으심으로 인한 생명이 우리 속에 있음으로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고 복음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연구하는 것, 물론 그게 하나의 취미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결국은 '잉여' 라는 것인데, 즉 뭔가 계산을 해보면 남아있는 것,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게 곧 암묵적인 것인데, 사실 이 '암묵적' 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가 난감하다는 말이다. "그런 느낌이 오네" 라는 식인데 말이다.

그것이 뭔고 하니, 우리 인간은 항상 선택을 하는데, "너는 왜 저것이 아닌 이것을 선택을 했는가?" 라고 하면, 결국 '암묵적' 이라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책에서 다들 그렇게 설명을 한다는 것이다. 즉 "왜 너의 DNA가 다른 사람과 달리 암세포 DNA에 연약한가?" 라고 했을 때, "그것은 나의 DNA가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와서 감기에 걸렸을 때, 누군가가 "다른 사람은 괜찮은데 왜 너는 감기에 걸렸는가?" 라고 하면, "나의 DNA가 감기 바이러스에 저항력을 키우지 못해서 그렇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당신의 DNA가 왜 감기 바이러스에 저항력을 키우지 못했는가?" 라고 하면, "그것은 암묵적이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 결국은, '암묵적이다' !!

다시 정리를 해보면, "사람은 자기가 살고자 해서 움직이고 하는데, 그런데 왜 거기에 대해서 이기지 못하는가?" 라고 하면, "그만한 능력이 없어서 그렇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왜 그런 능력이 없는가?" 라고 하면, "그것은 선택성이 없어서 그렇다" 라고 하고,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왜 그러한 선택성이 없는가?" 라고 하면, "그것은 암묵적이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 종착역은 결국 '암묵적' 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 세상은 결코 해답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냥 내비두!" 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의 자아를 수호하는 자위권을 발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교재를 보자.

**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이렇다. "그것은 원래 내가 창조한 그 인간이 아니야. 내가 보낸 자를 싫어하면서 어떻게 자신을 인간이라고 우기느냐?" 라는 것이다. 이로서 예수님은 '건축가들의 버린 돌'이 되셨다.

(벧전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그렇다고 하면 주님께서 원래 창조한 인간은 누구인가? 그가 아브라함인가? 아니면 모세인가? 그가 바로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아브라함과 모세와 엘리야 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러니 더 이상 '나' 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람일 때만 인간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창조??)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의 맏아들이 될 때만 우리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게 곧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유일한 인간이라는 말이다. 바로 그 예수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 있을 때, 우리의 모든 운명과 팔자는 주님께서 책임을 지고 주님 자신의 세계로 합류시키고 구성을 시키는데,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 아하, 그게 어둠이었구나 !!

강의를 마치면서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우리가 개인으로 출발하게 되면 '나' 외에는, 물론 그 '나'도 전혀 해결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래서 "죽은 뒤에 천당이 있고 지옥이 있는지 누가 아노? 어디 가본 놈이 있나?" 라고 하는데, 그래서 결국은 끝까지 '나' 만을 사랑하고 고수하게 되는데, 물론 이유도 없이 말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인간들에 의해서 누가 죽었는가? 예수님께서 살해를 당하셨는데, 바로 그 게임과 게임의 부딪침 속에서 십자가 복음이 부각되고,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을 사흘만에 살려내심으로서, 말짱 이러한 모든 것이 다 어둠이었음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아서 알게 된 그 십자가 복음이 우리에게 퍼져서, 우리도 오직 그 주님의 십자가 복음만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03,10 오후 2시에 마침.

                                                       아빠, 뉴밸런스가 신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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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사유와 헬라사유의 유사점과 차이점] - 비존재와 말의 영역에서 -

                           1992년 10월 6일  이근호 목사, 성경신학의 실제적용3 (p 202)

어떤 두 집단에 있어서 유사성과 상이성 비교는 "이미 두 모집단이 서로 구별된다" 라는 인식 하에서 출발한다. 서로 다른 문화가 가지는 특성들이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나 철학에서 우러나올 것이라고 예상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치점이 있다면, 그 일치점이 생기게 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야 한다. 보만 교수는 그리스사고의 대표로 플라톤을 들고 나오고, 히브리사고의 대표로 구약성경을 차용하고 있다. 또한 그 차이점을 '정적-동적'이 아닌 '정지-운동' 사이의 대립으로 보고 있다(p 66). 그렇다면 보만 교수의 주장이 옳다고 인정받으려면 앞으로 거론되는 모든 주제들 속에서 정지-운동의 대립이라는 틀에 맞아 떨어져야 하고(대충이라도), 둘째로 정지-운동이란 틀 말고 다른 틀로서 더 적합한 설명이 없어야한다. 과연 보만 교수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을까? 보만 교수의 가장 큰 단점은, 그리스사고와 히브리사고의 차이점을 그리스 개념 안에서 해명하려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비존재 개념에서 두 사고의 일치점을 찾고자 했는데, 플라톤도 비(非)존재가 결코 무(無)존재가 아니라 반(反)존재로서 이해하고 있고 구약에서도 비존재를 하나님께 대적하는 실체로 간주한다는데 공통점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비존재의 운운은 사실 신화세계관에서 규칙적 질서에 반하는 우연성을 설명하는 하나의 형식이라는 데서 인식을 같이 하는 것이다. 신화세계에서는 자연질서를 신의 우호적인 평정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 코스모스를 깨는 것은 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다. 플라톤은 어설픈 논리로 신을 부정하는 소피스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원만한 자국의 국가행정을 위한 이상적 국가관의 기반이 되는 철학으로서 [신의 나라]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즉 모든 국가내의 움직임은 절대선과 도덕과 법이라는 형식으로 제시된 절대신의 통치에 도전하는 세력이란 것이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의 비존재라는 것은, (보만 교수가 그렇게 헬라적으로 규정해서 그렇지 히브리사고에 무슨 비존재가 있는가!) 보만 교수가 주장한 것처럼 [무형의 질료](p 69)가 아니라,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형상이 되지 않는 질료, 그러니깐 가능성이 미완성 상태라는 의미가 강하므로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임) 구원사역에 반발하는 부정적 실체이다. 보만 교수의 헬라 철학적 틀은 [말] 이라는 주제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분명 p 68에서 [말]을 참존재로 보고 있다. 그런데 p 77 에서는 [창조의 매개체로서의 말]을 거부하고 있다. [말] 자체가 따로 존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창조자의 행위양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말이 활동하는 게 아닌 하나님이 말로서 활동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서 그리스사고에는 말 자체가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즉 말은 행동양식이 아니라 존재양식으로 등장한다는 데서만 차이가 난다고 보만 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불트만은 비판하기를 그리스어에도 말은 이중의미를 지닌다고 했다(p 316). 보만 교수는 구약의 내용에 있어 운동 이외에 가치판단 기능이 있음을 감안하여 [선의 표현](p 77)을 추가하는데, 꼭 이런 식의 분석이 과연 히브리 사고만을 규정하는데 필수적인지, 아니면 보편적인 [언어] 기능을 분석하는데 더 유용성이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구약성경은 창세기 1장에 분명히 밝히듯이 모든 피조물은 [말]에 예속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예속된 것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토라는 곧 구원의 계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방민족에게 있어 [언어]란 언어의 주체자를 보여주는데 그치지만 히브리인들에게서의 [말]은 계약 속에 찾아와 인간과 만나도록 중계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히브리사고를 헬라철학 식으로 분석한다고 밝혀지는 게 아니라 계약사상이 자리에 잡고있어야 알 수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플라톤 사상과 히브리사상과 같아 보이는 이유는 보만 교수 자신이 헬라 철학적 분석이해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다같이 유신론적 철학이라는 점 때문이지 결코 본질 자체가 유사성을 띠고 있는 게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언급하기를 언약은 비언약을 축출하고 배격하도록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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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혼', '육'에 대해서]
                                    이름 : 이석원 2007-06-25

2분법(몸, 영혼) 과 3분법(영, 혼, 육) 중에서 어느 쪽이 성경적인가요?
2분법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3분법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항상 헷갈립니다.
목사님의 명쾌하신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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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7-06-25 07:04  

둘 다 성경과 상관없이 고대 철학의 인간론에 해당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영의 사람이요, 성령이 임하지 아니한 자는 육의 사람입니다.
물론 성도도 육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으나,
성도는 그것은 육적인 자세인 것은 눈치 챕니다.
회개가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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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분설의 근거 
                                       송태준   2004-08-10

삼분설의 근거에 되는
살전5:23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히4:12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위 두 구절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전12:7 -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위 구절을 보면 꼭 이분설처럼 보이는데,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신(spirit)'을 생명력의 표현으로 보면 되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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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삼분설의 근거
                                         이근호   2004-08-10
 
삼분설과 인간을 세 가지의 다른 측면으로 보는 것과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삼분설이란 인간의 셋으로 쪼갤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쪼개진 하나, 하나는 단독적으로 결코 온전한 인간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영, 혼, 육' 이란,
단독적으로 인간에 대해서 온전하게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짐승들과 그리고 또는 다른 사물들과 더불어 한 자연 세계 안에 함께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영',
다른 산 짐승들과의 공통성이나 공통적 생존 본능이나 충동성에 관해서는 '혼',
다른 피조물과 같이 흙으로 환원되는 공통적 의미에서는 '육',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이 만들어내어 주신 개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들의 의식에서 통용되는 문화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그 개념 자체를 두고 옳다 그르다 혹은 정확하다, 부정확하다 고 말 할 수 없고,
그 문화 안에서 구원과 관련되어 어떤 식으로 활용되느냐 하는 면만 보면 됩니다.
예를 들면,
영혼 불멸설은 모든 인간 최후의 여망이요 기대감이긴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일체 인간들의 이런 희망을 거절하고 거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과  같습니다.
즉 복음은 인간의 문화와 상관없고,
도리어 그것을 전부 부정하는 것 가운데서, 오직 예수님의 홀로 남기신 사건 안에서만 구원이 되게 하십니다. (인간들의 분주하고 열성적인 종교 행각과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삼분설'이나 '이분설'처럼 분석하는 것은 성경적 태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을 분석해서 그 안에서 신학 체계를 담게 되면 구원이 될 것같이 여기는 종교적 열성을 이용한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사기꾼 목자들이 주로 이런 논리로 접근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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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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