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67강 악마의 개입

피/피 2012. 8. 29. 11:05

피67강 악마의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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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67강 악마의 개입

[12 대구강의 6] - [피 67] - 악마의 개입

                                                   12,03,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뜻이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여기에서 '창조했다' 라는 말 자체가 듣기에 따라서 상당히 기분이 나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창조했다' 라고 할 때는 거기에는 조건이 붙게 되는데, 그 조건은 전혀 우리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 붙어있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는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이 그만 우리에게 덮치게 되면,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살아가는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그런 자유가 그만 애초부터 박탈되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자유롭고 싶은데,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를 마음껏 건설하면서 살아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창조의 조건이 그만 붙여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그 조건에 어긋나게 되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할 때 조건이 없이 창조되었다고 간주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은근히 들어있다는 것이다.

◈ 내 인생의 나의 것 ??

예를 들어서,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고 하면, 그렇다면 '자식' 이라는 존재가 새롭게 생겼다는 것이다. 즉 없는 존재가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아이에 대해서, 그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어른으로 커나갈 것인지, 거기에 대한 조건을 이 아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주자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부모가 계속해서 이 아이에게 간섭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아이는 독자적인 인간이 될 자유를 애초부터 박탈당한 셈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어른으로 커 가는 것, 그것을 두고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 라고 교육을 받았고, 또한 우리는 그렇게 느낀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느끼는 것을 육신의 부모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까지 그렇게 연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까지 이어나가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것은 좋은데, 그렇게 만들기만 하시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조건을 걸지 마세요" 라고 하는, 그 방식이 우리의 본성에 맞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나온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 라고 하는데, 바로 그런 식으로 출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 물론 내가 행동을 잘못했을 때는 죄인이 되지만, 처음부터 죄인은 아닐 것이다" 라고, 그렇게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그렇게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죄인은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너거들은 처음부터 저주받고 지옥에 가야 될 죄인이다" 라고 책망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은 당연히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영을 받은 자들은 어떠한가? "우리는 죄인 중에서 괴수이고, 처음부터 죄인입니다" 라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영을 받기 전에는 뭐라고 했는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오히려 이단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의 영을 받고 난 다음부터는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는 것에서 출발하면서, 이전에 알던 예수님과 전혀 다른 예수님으로, 그렇게 모든 것을 예수님으로 해석을 다 바꾸었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은 주(主)를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 라는 것으로 바꾸어졌다는 말이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내가 나를 만들어간다 ??

그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 그 이전의 상황, 즉 "예수님을 알기 이전에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라는 것을 하나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명확하게 알고 그것을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나' 라는 인간은 내가 만들어간다" 라는 것인데, 즉 다른 누군가가 자기를 만들어주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는데, 즉 "내가 나를 만들어간다" 라고 했을 때, 이게 무엇인고 하니, "어떻게 해야만 그게 나다운 것인가?" 라고 할 수가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러면 이것이 서로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목적이 없는 목적인데, 즉 정해진 것이 없는 그냥 목적이란 말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너는 이렇게 되어라" 라는 것이 없고, 그냥 "나는 나다운 대로 한다. 그런데 나다운 것이 무엇이지?" 라고 하면, 그것은 정해져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해지지 않은 목적을 거론하면서 무조건 하나님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주어진 모든 조건에서 다 탈출을 시도한다는 말이다.

◈ 신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

지난 주일아침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로마의 건국이념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곧 "신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고, 인간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지 않는다는 것은, 신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만들어내고 신을 알게 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누구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 정도는 극복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와 반대로 어떤 미지의 사람이 왔을 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 사람에 대해서 조심을 하게 되고, 자기 방어에 나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기 예상 밖의 인물이기 때문에 조심을 하게 되는데, 그 사람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는 서로 친구 먹자고 하면서 욕도 하고 그렇게 하는데, 그러면 "나는 그 사람을 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와 친하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자기 품안에 넣어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놓는다는 의미인데, 그러면 더 이상 그 사람에 대해서는 긴장을 하거나 겁낼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하나님도 친구로 삼으려는 인간 !!

그러면 사람들이 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결국에는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을 자기 손에 쥐겠다는 것인데, 그런 우상적인 심보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 교인들도 만만치 않은데, 목사가 신에 대해서 아는 전문가이니, 그 목사가 알고 있는 것을 자기가 알게 되면, 자기는 목사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그 목사가 신을 아니까, 그 신에 대한 존재에 대해서도 자기 테두리 안에 가두어놓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도 더 이상 무섭지 않게 되는가? 신도 무섭지 않는데, 왜냐하면 신에 대해서 아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로마의 중심, 즉 "인간에게도 꿀리지 않고, 신에게도 꿀리지 않는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이 세상에서 최고의 자리에는 누가 앉는다는 말인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적그리스도' 라는 것은 일종의 보편개념이라는 것이다. 즉 누구나 적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말이다.

◈ 더 멀리, 더 높이 !!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 다음부터인데, 자기가 예수님을 팔아먹었다고 한다면, 그러면 인생의 목적이 과연 그것으로 끝이냐는 것이다. 즉 더 이상 목적이 없느냐는 말이다. 그게 아닌데, 우리 인간은 뭔가 이렇게 선을 하나 넘게 되면, 그 다음에 또 다른 과제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선을 또 넘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이신바에바' 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있는데, 처음에 그녀가 3미터 얼마로 세계신기록을 세울 때 난리가 났는데, 그러면 그 선수가 그것으로 멈추었는가? 그것이 아닌데, 계속해서 자기 기록을 갱신해갔다는 것이다. 신기록을 말이다. 그리고 가수가 히트곡을 한 곡만 내면 되는가? 계속해서 히트곡이 나와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만 잊혀지고 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돈을 5천 만원을 벌면 그것으로 만족해하는가? 여러분이 어디 돈을 벌어봤어야(ㅋㅋ), 그리고 부자가 20억을 가지면 그것으로 만족해하겠는가? 끊임없이 끊임없이 욕심이 솟아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도대체 자기가 자기다운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본인도 어떻게 규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무한(無限)은 중심이 없어 !!

그것을 두고서 '무한(無限)' 이라고 하는데, 이 무한은 점점 늘어나는 것이니 결국 어떻게 되는고 하니, 물론 이런 좁은 지역에서는 한계가 있어서 중심을 이렇게 잡을 수가 있는데, 그런데 이 무한의 경우에는 중심이 없다는 것이다. 중심이 말이다.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해가 잘 되지 싶은데, 이런 조그마한 삼각형이나 사각형 안에는 분명히 중심이 있는데, 그런데 그만 이것이 계속 무한대로 늘어나 버리면 중심이 여기인지 저기인지, 그것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누가 정하겠는가? 아무도 정하지를 못하는데, 왜냐하면 너무나 넓으니 말이다.

이렇게 제한이 되어있으면 "자, 이제 삼각형의 중심의 한번 찾아볼까요?" 라고 했을 때, "아하, 여기에 있구나" 라고 하면서 찾을 수가 있는데, 그런데 이것이 제한된 것이 아니라 무한대로 늘어나게 되면, 그 어디를 집어도 모두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한이니 말이다. 그러니 멀고 가까운 것이 성립이 되는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만약에 이런 무한 속의 '나' 라고 하면, "나는 외롭다. 너무 미약하다.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데 생각을 달리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이러한 무한 속에 있다고 한다면, 이 무한과 자기를 그만 동일시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나를 간섭하는가? 내가 곧 무한이고, 무한이 나다" 라고, 즉 "내가 신이고, 신이 곧 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스님, 윤회가 뭐예요?

이런 이야기는 사실 절에 가면 스님들에게서 많이 듣는 소리인데, 즉 "우리는 죽고 사는 것에 대해서 한계를 지을 수 없다. 죽어도 나고, 살아도 나고, 곧 사나 죽으나 나다" 라고 하면서, 불교에서는 그런 식으로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우리가 깊이 생각하면 이런 발상이 계속해서 나오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런 모든 발상을 한꺼번에 '죄!' 라고 하면서 스톱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사건이 만약에 불교신자에게 있다고 하면, 물론 불교신자에게는 없지만 말이다. 즉 성령을 받지 않은 그들은 태어나지도 않은 존재와도 똑같다는 것이다.

괜히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설치다가 고민만 하고, 전혀 없어도 되는데 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간이 쥐가 되고 혹은 고양이가 되는 윤회설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굳이 사람이 된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데, 쥐가 되어도 그만이라는 것이다. 즉 없어도 그만이라는 말이다. (쥐??)

◈ 그것은 곧 '죄' !!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무한대로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을 단칼에 "그것은 죄다!" 라고 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이 곧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게 곧 우리 교재의 제목처럼 '피' 라는 것인데, 물론 표지 색깔도 피처럼 벌겋고 말이다.

그렇게 단칼에 죄라고 했을 때, 그러면 그것을 육적으로 이해를 하겠는가? 하지 못하겠는가? 만약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육적으로 믿는다고 하면, 우리 인간은 그것마저도 자기가 신이 되는데 있어서 하나의 요소로서 보태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십자가도 알았어" 라고 하면서 마구 까불어댄다는 말이다.

그런데 진짜로 십자가를 지신 분의 영이 임하게 되면, 그렇게 되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그 행복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이 십자가 사건을 몰랐다고 하면, 우리는 그만 불교신자가 되어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해도 괜찮은데, 아무도 자기를 간섭할 수 없고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죄인이 아니기에 말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하는 일이 신의 일이고, 자기가 하는 일이 무한의 일이고, 즉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이 넓은 우주에서의 부처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가 하는 일이 무조건 자기에게 긍정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의 초월, 또는 해탈, 혹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인데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칼빈주의의 이단성 !!

그런데 십자가의 영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러한 모든 것이 오락, 취미, 그렇게 자기에게 매료되는 모든 모습이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이 곧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칼빈주의는 무엇인가? 바로 이단인데, 즉 신을 앎으로서 신을 극복하려고 하는 인간의 타고난 악마성을 표현한 것이 곧 칼빈주의라는 것이다. 신을 앎으로서 신마저 극복하려고 하는 인간의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신학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그냥 예수님의 피를 알고 그 피를 증거하다가 피 흘리신 주님을 만나게 되면,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과 같이 되는데 말이다. 그러면 그게 곧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인데, 그러면 된 것이지 굳이 따로 신학을 해서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게 무슨 구원의 능력이 되는가? 그것은 백 날을 공부해도 "나는 이제 신학까지 알았다" 라고 하는, 그런 또 하나의 자기 자아확장의 수단으로 도용할 뿐이라는 것이다.

◈ '도(道)닦기'에 열중하는 인간들 !!

그러니 곧 '도(道)닦기' 라는 것인데, 이 사람들이 불교를 몰라서 그렇지, 만약에 알았다고 하면 칼빈주의를 버렸지 싶은데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도닦기, 즉 자기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그야말로 윤기가 나게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것인데,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안다" 라는 식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자기를 보다 더 빛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은 무엇을 해도 죄인이라는 것을, 즉 모든 것을 알아도, 십자가를 알아도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 바로 그것이 제일 중요한데,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했을 때, 자기가 알아서 자기를 죽이는 것은 불교가 되어버리고, 그러니 그렇게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게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이 나에게 있으매, 나는 날마다 죽고, 나에게 주님의 생명이 나타난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지식으로, 혹은 육으로 알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듣는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어렵도다' 라고 하면서 버티는데,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쉽든 어렵든 간에 그게 곧 현실입니다" 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 말고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 만물이,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다시금 처음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한 진정한 뜻이 무엇입니까?" 라고 했을 때, 정답을 미리 말씀드리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을 아들로서, 또한 주님으로서 알아모시는 것을 통해서 아버지께 영광이 되도록, 그런 목적을 두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골로새서 1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말이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거기 15절 말씀을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라고 했는데, 그러니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 인간을 만들었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신약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을 섬기라고 만들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인간은, 자기 창조목적을 몰라 !!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인간이 그 목적을 알았는고 하니,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자기가 만들어진 것은 아는데, 하지만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으며, 누가 만들었으며, 어떤 관계 속에서, 즉 어떤 구조로서 엮어있는지를 전혀 몰랐다는 말이다.

처음에도 이야기했지만, 창조의 조건을 전혀 우리 인간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제정하셨다는 것을, 그것을 만들어진 인간은 알았는가? 몰랐는데, 그래서 그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즉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끌기 위해서 우리 인간 속에 심어놓은 존재가 있는데, 그게 누구인가?

◈ 악마는, 길라잡이 !!

그것이 바로 '악마(惡魔)'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 속에 악마를 집어넣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주되심을 알려주시는데, 그래서 우리 인간은 악마와 서로 짝이 되고, 또한 대화상대가 된다는 것이다. 서로 서로 대화상대가 말이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가 있는데, 강의 처음으로 다시 되돌아가 보면, 에덴동산에는 우리가 알다시피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있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있었다' 라고 하는 것은 존재가 되는데, 즉 '선악과나무' 라는 존재가 말이다.

◈ 인간은, 그 '존재' 자체로서는 파악되지 않아 !!

잊어버렸지 싶어서 다시 말씀드리겠는데, 예를 들어서, 이렇게 어떤 아기가 있다고 하면, 아기가 그냥 존재로 있는데, 그래서 그 아기가 앞으로 어떻게 커서 어떻게 된다는 것은 아기가 모른다는 것이다. 즉 "나는 왜 태어났으며, 나는 어떤 조건하에서 자라게 되는가?" 라는 그것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런데 커 가면서 점점 악마적 본성이 나오는데, 그래서 "아하, 이것이 내 인생이구나. 하나님이 나를 만든 것은 좋은데,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이고 뭐고, 그런 것은 다 때려치우고, 그냥 돈이나 벌자"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꾸려간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역사 개성주의' 라고 하는데, 즉 역사를 자기 개성대로 이끌고 간다는 것이다.

◈ 존재가 아닌 말씀 !!

그러니 우리는 "인간이 왜 태어났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인간의 존재에 맡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아저씨, 왜 태어났어요?" 라고 하면, "나는 내가 편하려고 태어났지" 라고 하는데, 그런 것에 귀를 기울이고, 귀담아 들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에는 반드시 '말씀'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 말씀이 오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면 무엇을 거부하는가? '나' 라는 존재에서 '나'를 끄집어내는데, 그렇게 되면 말씀이 와도 필요가 없는데, 즉 궁극적으로 누가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이 존재에서 이끌어진 '나' 라는 것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이제는 말씀이든 뭐든 귀찮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도 10년이 지나면 재미가 없고, 물론 교회에 다니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그렇게 중요한 것은 바로 '나' 라는 것인데,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여기서 피는 말씀의 완성으로서 새언약인데, 그렇게 모든 말씀의 완성이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곧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한 죄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선악과나무가 있는데, 그것을 두고 "선악과나무가 있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선악과나무의 비밀이 전혀 풀리지 않는데, 마치 "인간이 있다" 라고 해서 인간이 있는 것에 대한 비밀이 풀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 선악과나무가 있다 ??

무슨 말인고 하니, "선악과나무가 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창조의 조건, 창조의 원리를 위해서 하나의 피조물로서 있다는 것이다. 선악과가 있고, 이렇게 생명나무가 있고, 또한 뱀도 이렇게 있고 말이다. 뱀과 같이 걸어다녔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모든 배치가,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낙원 안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준, 그리고 이러한 피조물들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고 말이다.

이것도 칼빈주의와는 다른데, 칼빈주의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존재를 위해서, 삼위일체 존재를 위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말씀은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되심이라고 하는, 바로 그 기능을 위해서, 예수님의 활동을 위해서, 즉 예수님이 주로서 활동하시는 그 활동자체를 위해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일하심을 위해서 !!

이것을 "예수님의 일하심을 위해서" 라고 하는 것이 적당하지 싶은데, 왜냐하면 요한복음 5장 17절에 보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 안에 아버지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요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가락교회에서 그러한 강의를 했지 싶은데,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라는 것을 어떻게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고 하니, 물론 그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이 그림으로 그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머리 속에서 형상화를 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형상화를 시키지 못하면 인간은 그것을 믿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다.

어제도 그러한 설교를 했는데, 우리 인간이 현실을 이해하게 될 때는 하는 것은 뭔가를 머리 속에서 형상화를 시켜서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형상이 하나의 권력으로 구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고, 인간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라고 하는, 그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던 다니지 않던 간에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 자존심이 있는데, 그 자존심이 결국은 무엇인가? 신에게 무릎을 꿇는 척을 하면서도, 결국 자기가 무릎을 꿇는 그 신을 언젠가는 잡아먹고 만다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모를 줄 아나?"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인간이 천국에서 산다는 것은 죽을 맛인데, 그것은 천국이 아니라 오히려 지옥이란 말이다. 계속해서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하니 그야말로 환장을 한다는 말이다. 자기는 자기 자신이 주님이고 싶은데, 그런데 주님이 따로 있으니 자기는 졸지에 쪼다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원수의 출현으로 !!

그렇게 예수님의 주되심에 대해서 강력하게 거부하는 존재, 그 뱀이 곧 악마인데, 그것이 낙원인 에덴동산에 뛰어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주되심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원수가 출현함으로 말미암아서, 이러한 예수님의 주되심이 인간의 그런 모든 시도가 죄가 된다고 하는 것을 밝혀주는 계기가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주판을 아주 잘 놓는다고 했을 때, 사실상 누구나 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진짜로 그렇게 자기가 주판을 잘 놓는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로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주판을 제일 잘 놓는 주판 왕과 붙어서 이기면 "야, 진짜로 잘하네" 라고 인정을 받고, 또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주되심에 대해서, 우리가 "예수님은 주님이 맞습니다. 맞아요" 라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즉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삼위일체이고 간에, 내가 주야" 라고 하는, 즉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데로, 누구로부터 그 어떤 간섭도 받지를 않고, 오직 내가 주가 되고 싶어" 라고 하는 자기의 본성을 마음껏 이끌어내는 그러한 영역, 즉 자기의 모든 것이 다 완전히 까밝혀지게 되는 사건이 벌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야, 진짜로 나는 나쁜 놈이고, 주님의 원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바로 주님의 원수이고, 오직 나사렛의 그 예수님만이 주십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주되심' 이란 환경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원수가 있어서, 그 원수로 하여금 마음껏 자기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 욥의 고난과 십자가 !!

욥기에 보면 사단이 하나님과 이야기를 하는데, 그리고 거기에서 욥과 그의 친구들이 대화하는 것을 유의해서 살펴보게 되면 무슨 내용인고 하니까, "서로가 서로를 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나도 그 정도는 알거든" 라는 것인데,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서로가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다들 정도는 안다고 하는데, "니가 아는 하나님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라고 말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의 의를 드러내면서 말이다.

그런데 풀리지 않는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하지만 욥은 왜 고난을 받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칼빈주의이고 다른 종교이고 간에 신에 대해서는 다들 안다고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왜 죽었는가?" 라는 문제는 풀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이다.

신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것은 다 아는데, 그 정도는 인간들이 다 아는데,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저주받게 했는지, 그것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비밀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라면, 즉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전혀 모르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이 자기가 스스로 주가 되고 싶은 충동을 감추고 있는 이상, 물론 그것을 드러내어버리면 괜찮은데, 그런데 "누가 봐도 내가 주인이야. 나는 나에게 최고야"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상은, 아무리 복음을 알고 십자가를 안다고 해도, 역시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그 십자가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악마는 살아있다 !!

그래서 그런 방식을 위해서 '악마' 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악마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이 세상은 에덴동산의 모든 구조물의 배치와 정황이 동일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반복이 되는 것인가? 반복이 되고 계속해서 이어져나가는데, 그러니 한번도 에덴동산의 구조가 해체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에 되면 악마는 유황불에 들어가는데, 하지만 그 이전까지는 악마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말을 하고 보니 영화제목 같은데, 즉 "악마는 살아있다" 라고 말이다(ㅋㅋ). 그렇게 악마는 살아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살아있어서 계속해서 악마는 주님의 원수로서, 그렇다고 해서 악마가 하나님의 원수는 아닌데, 왜냐하면 악마도 하나님을 다 이야기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마귀의 자식들인 유대인들이 입만 열면 여호와 하나님인데,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심지어 예수님과 성령과 복음을 이야기해도, 그것들이 바로 악마라는 것이다.

그게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는데, 즉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너희들이 양을 탈을 쓰고 있는 악마의 하수인들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악마가 부리는 씨다바리, 즉 악마나라의, 악마가 운영하는 회사의 직원이라는 것이다.

(고후 11: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 에덴동산을 길다랗게 늘어뜨린 것이 곧 인류역사 !!

그렇게 해서 신약성경은 에덴동산의 구조를 전혀 놓치지를 않고 그대로 이어오고 있는데, 다만 다른 차이점이 있다고 하면, 구약의 에덴동산에 있었던 그 상황 속에 무엇을 집어넣는고 하니, 장치 오실 예수님의 약속을 집어넣게 되는데, 그러니 에덴동산을 길다랗게 늘어뜨린 것이 곧 인류의 역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류의 역사는 무엇인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주님과 주님 원수 사이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거기에 하나의 들러리로서 말려들도록 되어있고 말이다. 주인공이 아닌 들러리로서 말이다.

◈ 모든 창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고 하니, 모든 창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그 창조자체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계속해서 인간은 죽고 또 태어나야 하고, 또 죽고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집에 딸이 세 명이고 아들이 두 명이라고 하면, 그들도 다 주님을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이다.

아들이 일곱이고 딸이 셋인 집안이 성경에 있는데, 누구의 집안인가? 바로 욥인데, 그들은 태어나고 또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태풍이 불어서 기둥이 무너져서 다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 다시 딸 셋이 예쁘장하게 태어나는데, 그런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짜놓은 구조 속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은 나타났다가 소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때'가 있다는 말이다.

◈ 모든 것이 '때'가 있나니 !!

그게 전도서 3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즉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라고, 그렇게 그 모든 때가 다 적당하게 정해져있다는 것이다.

(전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 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 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전 3: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전 3: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전 3:7)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전 3: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그렇게 모든 것이 다 '때가 되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 때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때는 일방적으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정해진 것인데, 그러니 주님의 원수에 해당되는 인간들이 이 때를 알아버리면, 그러면 또 하나의 자기가 주님처럼 행세하기 위한 요건으로서 자리를 잡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때에 어긋나야 하는데, 그런데 "이때다, 이때다♪" 라고 하면서 찬송을 부르는데, 하지만 그때는 주님의 때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그때를 위해서 기도를 빡시게 하지만, 그러니 그런 기도는 모두가 다 빗나간 기도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만이 아시는 그 때를 인간들이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악마의 씨다바리들이 하는 일인데, 그 악마의 종님들이 바로 무당과 박수들인데, 손뼉을 치는 박수가 아닌(ㅋㅋ), 박수무당이라는 말이다. 관상을 보고, 점을 치고 하는 말이다.

◈ 교회인가? 점(占) 집인가?

예를 들어서, 눈꼬리가 내려가면 나중에 부모에게 재물운이 있고, 하지만 절삭구(?)가 되면 돈이 모이지를 않고, 그리고 인생의 초반운은 이마에 있고, 청년 때의 운은 얼굴의 중간이고, 그 밑에 입 주위에 말년운이 있는데, 그것이 좀 올라가야 돈이 모이지 내려가면 돈이 다 쏟아져서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ㅋㅋ).

이러한 것이 곧 관상(觀相)인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주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성경말씀이나 복음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교회에서 듣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즉 "내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라고, 그렇게 점치는 버릇을 그대로 가지고 교회에 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식을 그런 교회에 보내놓고,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점을 치는 버릇이 그대로 있어서 "주님, 내 자식은 어떻게 잘 되겠습니까?" 라고 하니, 그것은 점을 치려고 점 집에 가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대해서 교회는 "이렇게 기도하시고 헌금을 하시면 앞으로 자식이 잘됩니다" 라고 점을 잘 쳐주어야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리면 이 세상은 누구의 세상이 되는가? 주님의 세상이 아닌, 주님의 원수노릇을 하는 인간의 세상으로 전환이 될 때, 그때 그것이 우리의 본성과 일치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 목사님, 땅값을 좀 올려주세요 !!

그렇게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것을 마치 점 집에 가듯이 하고 있는데, 그래서 "목사님, 제가 이번에 땅을 사놓았는데, 땅값이 오를까요? 말까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목사는 "이번엔 오르겠따" 라고 하는데, 즉 "여러분들이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나오시면 응답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 식이란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자신이 바로 주(主)인데, 그런데 그 주가 이 세상일을 제대로 몰라서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이 세상 것을 미리 당겨서 알아야만, 자기가 주로서 체면과 자존심을 세울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게 아니고 내일 일도 제대로 모르면서 자기가 주라고 하면, 조금은 멀쑥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미리 당겨서 알게 되면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인생이 되니, 쉽게 말해서, "신이시여, 나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것만 채워주소. 그래서 같이 동반성장을 합시다. 제가 신을 높여드릴 테니, 당신도 나를 좀 키워주소"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목사의 할 일이 무엇인가? 아마샤와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이 세상에서 말이다. 아모스는 주저앉히는 이야기를 하고, 아마샤는 키우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혼자 외롭게 있는 아모스는 미워하고 떼거리로, 즉 권력을 가지고 있는 아마샤는 높여준다는 것이다. (여기 아마샤는 요아스의 아들이 아닌, 아모스 당시 벧엘의 제사장을 의미함)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게서 외롭게 죽으셨는데, 하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외롭게 희생했음을 안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예수님을 동정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의 영이 오게 되면, 예수님을 동정하든 어떻게 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는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 끝까지 자기는 주님의 원수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 그런 사람이 바로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고 하는 말씀이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 선악과나무는, 누군가가 터치를 해야 !!

이 이야기를 조금만 더 길게 하면, 악마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악마가 배치를 해버리면(?), 선악과나무의 열매가 참 신기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런 것이 어렵지만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여기에서 제가 질문을 하나 던지겠는데, 즉 "선악과나무의 열매가 나무에 매달려있을 때, 그것 자체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인가? 아니면 따먹었을 때 지식이 되는 것인가?"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도 따먹지 않고 선악과나무의 열매가 그냥 그대로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을 때, 그때 그 열매 안에 선악의 지식이 소복이 담겨있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고, 누가 뭔가 터치를 해야만, 즉 누군가가 관여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피조세계는 서로서로 엮여야 "주를 위해서 창조했다" 라고 하는 효과가 거기서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레몬의 향과 그 맛은 터트려야 하듯이, 그렇게 깨어질 때 레몬의 본래 맛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뭔가가 깨어지면서, 즉 판도라 상자를 열어야만 온갖 것이 모두 다 튀어나오게 된다는 말이다.

◈ 열린 판도라의 상자 !!

그리스로마 신화에 보면 그게 나오는데, 열지 말라고 했는데 그만 열어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선악과나무처럼 말이다. 따먹지 말라고 하니 더 따먹고 싶다는 것이다. 분명히 열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데 열어버리니 거기서 무엇이 나왔는가? 소망이 나왔는데, 그 소망이 그만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정박아의 경우에 암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지만 그런 말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소망이 없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게 없다는 것이다. 주면 주는 데로 그냥 '감사합니다' 라고 하니, 무슨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생기겠느냐는 말이다. 물론 살은 좀 찌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절대자가 되고 싶어하는, 즉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되려는 그 자체가 그 사람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과 악에 대해서 안다고 했을 때, 문제는 인간이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알았는데, 그런데 그 선과 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알아가야 하는 것이지, 한꺼번에 모두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선과 악은 예수님이(악마가?) 도와주어야만 알 수 있으니 말이다.

◈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은 선한 분입니다"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니가 선에 대해서 알기는 아나? 뭘 안다고 나에게 선한 선생님이라고 하노? 그렇게 말하면 내가 껌벅 넘어갈 줄로 알았나?" 라고, 즉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 청년이 알고 있던 선에 대한 개념을 예수님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전혀 적용시킬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마귀가 도와주어야 선함과 악함이 제대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이 알고 있는 선악은?

그리고 "죄가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인간은 그때 그때마다 새롭게 만들어내는데, 그래서 확정지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 몸이 편하면 선이고 불편하면 악이라고 한다는 한다는 말이다. 인간의 몸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마다 달라지니 말이다.

그래서 장사가 잘 되면 자기가 무슨 착한 일을 했는지 생각하는데, 즉 "지난주에 기도를 좀 오래해서 그렇나?" 라는 식으로 말이다. 반대로 손님이 오지 않고 파리만 날리면 "하나님께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이런 벌을 받지?" 라고 하면서 돌이켜 보는데 말이다. 

우리 인간이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곧 벌인데, 그러니 왜 정박아가 되어서 살지 못하느냐는 말이다. 마치 오뉴월의 개처럼, 햇빛이 따뜻하면 나와서 발을 뻗고 자고, 또 추우면 집에 들어가서 자고 말이다. 그리고 주인이 먹을 것을 주면 먹으면 되는 말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살지를 못하느냐는 것이다.

◈ 똑똑한 것이 문제 !!

그것은 바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러한데, 그만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똑똑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똑똑하기 때문에 그만 잘렸다는 말이다. 그러니 똑똑한 것이 문제인데, 바보가 되고 등신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선악을 아는 지혜는, 피조물로서는 알면 안 된다는 것은 누구만 알면 되는가? 유황불에 들어가도록 만들어진 악마만 알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악마는 자기가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은 누구에게 그만 전염을 시켰는가? 인간에 전염을 시켰는데, 그래서 "따먹어라, 어서 따먹어라" 라고 하면서 마구 부추겼다는 것이다.

◈ 괜히 알았어 !!

악마는 우리 인간이 알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아는데, 그런데 인간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괜히 알았는데, 몰랐으면 그냥 에덴동산에서 잘 살았을 텐데 말이다. 바보등신으로 말이다. 그렇게 악마가 부추겼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제 아무리 똑똑하고 잘나도 어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악마가 아는 수준 밑에서 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세상의 신의 자식으로서, 진노의 자식으로서, 공중권세를 잡은 자의 자식으로서, 그 밑에서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우수한 지혜로서 상대성 원리가 어떻고 해도, 당뇨병 약을 개발하고, 특수한 것들을 개발한다고 해도, 그것들은 모두 악마가 가르쳐준 그 밑에서 논다는 것이다.

◈ 악마는, 헨델의 '메시야'에 반응하지 않아 !!

헨델의 메시야나 모차르트의 천재적인 작품들도 다 악마 밑에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다 구원의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모차르트의 작품들이, 악마로 하여금 악마의 정체를 드러내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안 되는데, 그러니 악마는 계속해서 숨겨진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십자가 사건은 악마의 정체를 드러내는데, 그런데 모차르트가 작품을 잘 만들었다고 해서 악마가 "어이쿠, 드디어 니가 나의 정체를 탄로 나게 했구나" 라고 하면서 놀라겠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피아노 소리에 놀라는 악마가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 질문 -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제 기능이 발휘되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따먹기 전에 악마가 꼬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인간이 "내가 따먹을까? 말까?" 라고 망설이게 되는데, 그것은 죄성이 아닌지요?

그것은 죄성이 아닌데, 그것은 하나님이 허용한 인간의 조건이란 말이다. 피조물 자체가, 즉 인간도 하나의 존재인데, 그런데 그 존재가 무엇을 위해서 있는 존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창조의 요건과 결합이 될 때 그 존재는 자기 역할을 다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존재의 주체를 퍼트리게 된다는 것이다.

◈ 존재가, 창조의 요건과 결합될 때 !!

지금 제가 존재에다가 무엇을 집어넣는고 하니, 요건을 집어넣는데, 그것이 곧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고, 더 이상은 생명나무의 과실은 먹지 못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되면서부터 갑자기 인간 주위에 배치되어있던 그 배치물들이 활발하게 자기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따먹고 싶어서 먹은 것뿐인데, 맛이 있어 보여서 말이다. 그런데 누가 갑자기 오바(?)를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오바하셔서 "너거들이 선악과를 따먹었지. 생명나무는 이제 안 된다. 그러니 이제는 에덴동산에서 그만 나가라" 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해서 주변이 마구 흔들린다는 것이다.

* 질문 - 자기 존재이유를 모르는 것보다도, 마귀가 유혹하는 것이 더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아이가 아빠 차에 가서 자기는 키를 약간만 돌렸을 뿐인데, 그런데 그만 그 차가 급발진을 해서 남의 가게를 박살냈다고 하면, 하지만 그 아이는 자기 존재만을 알았지 그 차의 존재요건과 그 바깥의 존재요건을 아는가? 모르는가? 모르는데,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말은 인간은 그렇게 몰랐어야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작전에 말려든 것인가요?

물론 그러한데, 주의 주되심을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마치 아이가 아빠 차에 가서 키를 돌리는 순간, 그만 차가 급발진을 해서 남의 가게를 왕창 다 부수어 버리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누구는 아는가? 악마는 아는데, 그래서 악마는 어떻게 하는가? "빨리 키를 돌려라, 돌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악마의 모습인데, 하지만 그 악마가 지금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금의 이 역사 속에서 에덴동산에서 했던 것과도 똑같은 작용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주님을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고생을 했던 욥의 경우에도 그렇고 말이다.

◈ 악마는 안다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알 수가 있는데, 여기에 엄마의 뱃속이 있고 그 안에 자궁이 있다고 하면, 여기에 악마가 기어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무엇을 모르는가? 그것을 점선으로 표현하면, 창조에는 반드시 창조의 조건이 있는데, "모든 창조는 예수님을 위해서" 라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걸 몰랐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조건을 말이다. 

그것을 인간이 모르는데, 그런데 누구는 아는가? 악마는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조건 가운데서 악마를 사용하셨는데, 그래서 악마와 선악과의 만남, 악마와 생명나무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모두 그렇게 진행이 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 악마는, 인간만 따로 만나서 !!

그런데 이 에덴동산에 이렇게 사람이 있으면, 악마가, 즉 뱀이 어떻게 하는가? 인간은 이러한 조건과 더불어서 자기 자신을 생각해야 하는데, "죽는 게 뭐지? 이것을 먹으면 왜 죽지?" 라고 말이다. 물론 인간은 그것을 모르는데, 그래서 뱀은 인간인 하와를 따로 만난다는 것이다. 이런 배치된 조건과 더불어서 만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인간은 그러한 조건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차에 키를 꽂아서 돌리는 순간 에덴동산에 진동이 일어나면서 그만 쫓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약속을 위해서 새롭게 배치되는, 그런 에덴동산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포함된, 즉 창세기 3장 16절이 포함된 세계에 말이다. (그러면 이 지구도 에덴동산?)

그렇다면 이 세상은 무엇인가? 낙원과의 연속성인데, 즉 낙원과 계속해서 이어지는 관계라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낙원에서 쫓겨나게 된 인간은 결국 무엇인가? 그러니 인간은 '예수님 안'이기 이전에, 먼저 악마의 지배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에베소서 2장 말씀을 찾아보겠는데, 모두가 아는 말씀이지만 말이다.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그런데 여기 3절에 보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본질상' 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진노가 자녀가 출발점이 아니라고 하면, 구원은 없다는 것이다. 즉 진노의 자녀를 거치지 않고, 그것을 돌아서 가는 법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구원을 받은 자는 자기가 진노의 자녀임을 반드시 인식해야 하는데, 그것이 구원을 받은 자의 특징이란 말이다. 그러면 진노의 자녀가 되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진노의 자녀임을 들통나게 하는 구성요소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어야 하는가? 진노의 자녀가 되려고 하면 악마가 도입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 악마는 전혀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권세를 가졌는데, 즉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가 다 그 악마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데, 그래서 우리는 불순종의 아들들과 동일한 입장에 있다고 하는 것을, 그러니 그 악마의 우월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급해서 말이다. 지금은 우리가 주님 안에 있지만, 소급해서 보면 "아하, 우리가 그랬었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 그 은혜를 인하여 !!

그리고 유명한 2장 8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것들이 다 어디에서 주어지는 것인가? 누가 주는 것인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악마도 알고 계시는, 그래서 그 악마보다도 더 위에 계시는 예수님이 주시는 그 은혜로 인해서 우리가 구출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구원인데, 그러니 구원은 소유개념이 아니라 과정인데, 즉 구출되어 가는 과정이란 말이다. 그러니 존재가 아니고 기능인데, 그게 곧 창조의 능력이란 것이다. 창조의 능력이 그야말로 부실하기 짝이 없는 우리 속에 임하신다는 것이다. 그 천지창조의 능력이 말이다.

다시 말해서, 홍해가 갈라졌던 능력, 요단강이 갈라졌던 능력, 여리고 성을 무너지게 했던 능력, 즉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그 부활의 능력이, 창조의 능력으로서 '은혜' 라는 이름으로 강력하게 우리에게 역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구원받은 과정이고, 그 과정인 파이프를 두고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

그런데 그 믿음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혀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9절에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교회에서는 일체 우리의 행함을 자랑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나오지 못하도록 막을 수는 없는데, 인간이 하는 짓이 다 자기 자랑이니 말이다. 즉 예배를 드려도 자랑이고, 찬양해도 모두 자기 자랑이라는 것이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 복음적인 설교는, 곧 지적질 !!

하지만 교회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을 해야하는데, 그러면 목사의 설교가 어떠해야 하겠는가? 설교가 행함을 유발시켜야 하는가? 아니면 나오는 행함도 그것을 죄라고 지적해야 하는가? 어느 쪽인가? 지적을 해야 그것이 복음을 아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이런 삶을 사세요"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설교를 했다고 하는데, 하지만 사도바울은 이것을 모두 다 깔고 하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사도바울의 말씀을 우리가 행하게 되면, 더 이상 말씀의 기능이 떨어지고 우리의 행함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즉 사도의 말씀을 우리가 지키면 그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선악과에 있어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 무엇인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으면 과연 우리가 그것을 지배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인데, 오히려 그와 반대가 된다는 것이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에 의해서 오히려 우리가 지배를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지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물론 악마는 아는데,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선이고, 자기가 악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 사실을 알았는가? 몰랐는데, 아니 악마가 처음부터 "나는 악마인데, 선악과를 따먹을래?" 라고 했으면 인간이 따먹었겠는가? 그래서 주님은 예수님만이 선이고 악마가 악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것을 도화지에다 그려내는 작업을 시작하셨는데, 그렇게 해서 하나님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자리가 주님이 태어난 자리가 되고,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하는 것이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

예수님께서는 천상의 몸을 빌려서 온 것이 아닌데, 물론 강아지의 모습으로 온 것도 아니고 말이다. 육신의 몸으로 오셨는데, 그것도 로마서 8장에 보면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육신에 죄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 누가 관여했는가? 악마가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해서 따먹고만, 그래서 엉망이 되어버린 몸, 바로 그 저주를 받은 몸이 곧 주님이 태어난 자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그러니 악마든 인간이든 간에 전부가 주님의 꼼수에 그만 말려들었다는 것이다. 주로 말미암아, 주로 인하여, 주께로 돌아가는, 그런 주님의 꼼수에 말이다. 요즘 유행하는 "나는 꼼수다" 라는 것의 원조가 곧 주님이라는 말이다(ㅋㅋ).

◈ 성도의 말씀에 대한 반응은, 단 하나 !!

이러한 모든 배치에 의해서, 즉 주님의 주되심의 구조 가운데서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그 성경말씀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성도라고 하면, 그 어떤 성경말씀을 보더라도 딱 하나만 나오는데, 즉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말이다. 하나님이나 삼위일체가 아니고 말이다.

삼위일체 신학을 정립하기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위해서, 그것만이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아들을 아들로 인정함으로서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해서 모든 권세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라고 하시는데, 그게 에덴동산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선악과를 누가 따먹고 어떻게 되는지, 그것을 주님께서는 다 보고 계신다는 말이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질문 -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무엇이 파괴되었다는 말입니까?

성경에서 형상이 파괴된다는 표현은 없는데, 물론 형상이 있다는 말은 있지만 말이다. 아담의 형상이 죽음으로 죽게 되니까, 즉 인간의 흙으로 바뀌니 흙은 형상이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죽을 때 흙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흙이 되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 택배를 납치하시는 예수님 !!

지금 우리 인간은 그런 과정에 놓여있는데, 그렇게 배달이 되고 있는데, 그런데 그 택배를 도중에서 낚아챈 분이 계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이 개입하셔서 인간을 새로운 피조물로, 그렇게 주님의 형상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육체는 자꾸만 마귀가 작용해서 흙이 될 수밖에 없는, 주님의 형상을 잃어버리는 쪽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반면에 주님은 주님의 형상을 살리는 쪽으로 움직이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서로 오고 가는 만남을 같은 장소에서 늘 바라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건을 맡겼다고 하면, 그래서 택배기사가 그 곳에 배달을 하려고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그런데 그 곳에서 "그게 아니야" 라고 하면서 반대로 달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교착지점이 생기는데, 바로 그 교착지점을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늘 바라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나는 죄인이고, 주님은 나의 죄를 용서하신 의인이다" 라고 하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역사라는 지점에 주님께서 뛰어내려 오셨다는 것이다. 무슨 몸으로 말인가? 천상의 몸이 아닌,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말이다.

◈ 모든 것을 나에게 맡겨라 !!

그래서 주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그게 히브리서에 나오는데, 즉 "너거들이 이 땅에서 어떤 시험을 받고 무슨 고민을 하는지 내가 다 안다. 그러니 나에게 기도하라" 라고 하시는데, 다른 말로 하자면, "모든 것을 다 나에게 맡겨라" 라고,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몸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쓰여지고 사용될 몸인데,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자기 자신의 몸으로 유지하려고 하니까, 그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주님을 위한 몸으로서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사람들은 자꾸만 뭐라고 하는가? "아이쿠, 나는 살아야 돼"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데, 그러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 예수님, 우리 오빠는 말라고 ??

그런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어떠한가? 예수님께 "우리 오빠는 말라꼬 죽였습니까?" 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말라꼬' 라는 것은 '왜' 라는 표현의 경상도 전문용어인데 말이다(ㅋㅋ). ('무엇을 하려고' 라는 것의 줄임말?) 아무튼 지금 자기 오빠는 천국에서 제대를 해서 개구리복을 입고 널널하게 지내고 있는데, 그런데 자기 동생들은 "우리 오빠는 왜 죽었지?" 라고 하면서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죽지 않았다고 하시는데, 그런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다면 너거 오빠가 정말로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한번 불러내 볼까?" 라고 해서, "나사로야, 어서 이리로 좀 나오너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즉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한 것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이 성도에게 다 적용이 되도록 성령을 통해서만 그렇게 조치를 하셨다는 것이다.

◈ 놋뱀은 임시적인 것 !!

놋뱀의 경우에도, 만약에 우리교회에 놋뱀이 있어서 "여러분, 이 놋뱀을 바라보세요" 라고 하면, 아마 지금 이 공간이 엄청 비좁지 싶은데 말이다. 저기 갓바위처럼 그 놋뱀을 보려고 전국에서 다 모여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놋뱀은 장기적인 것이 되지 못하는데, 즉 근원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임시적인 것이었다는 말이다.

(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 놋뱀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미리 앞서서 보여주는 하나의 그림자인데, 즉 실체가 아니라 모형이라는 것이다. 그 놋뱀은 예레미야 시대에 불에 타버리고 없는데, 그렇게 주께서 불태워 없애버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진짜 진품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이근호의 그림자가 의자 위에 놓여있다고 하면, 그러면 그 의자 위에 있는 그림자를 찾은 것이 곧 이근호를 찾은 것이냐는 말이다. 그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냥 그림자만 놓여있을 뿐인데 말이다.

이와 같이 놋뱀을 바라보고,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보고 무엇을 믿었는가?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는데, 그러니 이삭이 존재해도 그것은 하나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모형이라는 말이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삭을 가져야 믿음의 계열에 속한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전부가 다 장가를 가서 마누라가 아이를 낳지 못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서 아들을 바치라고 하면, 그러면 달랑 딸만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말이다. 어디 양자로 데리고 와서 바쳐야 하는가? 그런 것은 하나의 그림자로 덮여있다는 것이다. 길다란 그림자로 말이다. 

◈ 죽음만이 곧 현실 !!

십자가를 믿는다고 해서 열 십자로 된 나무 막대기를 믿으면 되는가? 그것이 아닌데, 어제 오후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라는 말이다. 자기가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는 것이 현실이 아니고, 유일한 현실은 무엇인고 하니, "나는 태어나자마자, 죽음이 나를 잡아당기고 있구나" 라고 하는 것, 그것이 곧 현실이라는 것이다. 즉 죽음만이 현실이라는 말이다.

어제 장로님의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프든지, 속도위반을 2건이나 해서 10만원을 물었다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12만원인가요? 입장을 바꿔놓고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병원에서 죽기 직전에 있다고 한다면, 10만원이 문제가 아니라 천 만원이 들어도 살려내고 싶은데, 아니 집을 팔아서라도 살려내고 싶다는 것이다.

◈ 값없이 살려주셨으니 !!

그런데 주님은 어떠한가? 값없이 살려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값없이 살려주셨으니, 이제는 우리는 값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따로 챙겨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머리카락도 하나를 심는데 3천원이나 한다고 하는데, 오늘 아침에도 그만 10개나 빠졌으니 3만원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값있다' 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의 원수가 따로 없는데,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늘 주님의 원수행세를 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까불락 까불락 거리면서 말이다. 주님께서는 마귀가 와서 그런 장난을 하는 것을 훤히 다 보고 계시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야, 까불지 마라. 지금 마귀가 너를 청구를 하려고, 지옥에 데리고 가려고 그렇게 까부는데, 내가 허락하지 않아서 너는 천국에 오는 거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뭐라고 하는가? 자기 목숨을 바쳐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데, 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베드로야, 웃기지 말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지금 베드로는 자기밖에 모르는데, 자기 바깥에 마귀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마귀 위에 누가 있는가? 주님이 계시는데, 그것을 베드로는 나중에 성령을 받고 나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왜 저에게 그런 혜택을 줍니까?" 라고 하니, 주님의 대답은 무엇인가? "바로 그것은 니가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베드로가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 혜택이 주어진다는 말이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가? 그것이 곧 말씀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과거 아담처럼 선악과를 따먹도록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지켜보는 정도도 아니고 아예 품안에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예수 안에서 받는 것인데, 사도바울처럼 말이다. 날마다 죄를 짓고, 날마다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다. 주님과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닌데, 그러니 착한 일을 하고 말고 할 것이 아니라, 완전히 보자기에 싸이듯이 싸여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시므온의 경우에 !!

시므온이 바로 그런 경우인데, 그래서 그가 아기 예수를 보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나이가 들도록 죽지 않은 것은, 이렇게 아기 예수를 보고서 경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군요. 이제는 평안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므이는 아기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는데, 바로 그런 시므이가 누린 평안함을 우리도 역시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왔노라. 보았노라" 라고 하듯이(?), 그렇게 평안하게 바라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말이다.  

(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눅 2: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눅 2: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눅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 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 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눅 2: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 악마는, 십자가와 동반해서 !!

지금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고 하니, 악마를 거론하지 않고서는 성경을 전적으로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마를 볼 수 있는 눈은 오직 십자가 사건을 알려주는 이유 때문인데, 바로 그런 경우에만 악마가 개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악마라고 하면 안 되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같이 동반되는 개념이 곧 악마라는 말이다. 다른 경우에는 악마라고 하면 안 되는데, 즉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사기를 쳤다고 해서 "너는 악마야"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봐야 하는데, 그 십자가에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 곧 거짓 선지자이고, 즉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 다른 십자가라는 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십자가만 바라봐야 하는데, 그 십자가에서 그만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 악마의 일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 집안에 좋은 일이 생긴다든지, 즉 로또에 그만 일등으로 당첨이 되어서 '할렐루야' 라고 외치도록 만드는 경우에는 그만 십자가를 잊어버리게 되는데, 악마는 그런 식으로 해서 십자가에서 눈을 돌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활동을 누가 주시하는고 하니, 악마가 주시하면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도 스파이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 유명한 가룟 유다인데, 물론 예수님은 아시는데, 그렇게 아시니까 역으로 이용하신다는 것이다. "니는 니가 할 일을 해야지" 라고 말이다. 완전히 모가비인데, '초한지' 라는 드라마에 보면 그런 게 있다는 것이다(ㅋㅋ).

◈ 예수님의 말씀은, 악마를 의식하면서 해석해야 !!

아무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악마가 주시하고 있는데, 또한 예수님은 그 악마가 하는 일을 잘 알고 있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해석함에 있어서 무엇을 집어넣어야 하는가? 예수님은 악마를 의식하고 있고, 또 악마는 예수님을 의식하는 가운데, 그렇게 해서 서로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섬긴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은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섬김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고 검을 주러 왔노라" 라고 하실 때, 그것은 가족도 다 해체하라는 것인가? 이혼을 하라는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복음이 아닌, "현재 내 가정, 내 새끼는 내 꺼야" 라고 하는, 그런 인식자체가 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에다 눈을 돌리게 하는 용도로서 마귀가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말이다.

(마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말을 하고 나니 어렵게 되었는데,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무슨 뜻인고 하니, 우리에게는 '내 것' 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러한 '내 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내 것이 있는데, 이 내 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잘 지켜서 내 것을 안정적으로 보장을 받으면서 키워야지" 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라고 했을 때, 만약에 자기 교회가 있다고 여기고 그 말씀을 해석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세상의 세금은 세무서에 내시고, 하나님에게 내는 세금은 우리 교회에 내세요.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을 누가 사용했는가?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동전을 내라고 하니까, 동전인지 은전인지 몰라도, 아무튼 그렇게 하니 바리새인들이 내민 동전에는 가이사, 즉 티베리우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형상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마 22: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마 22: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마 22: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마 22:18)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마 22:19)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마 22: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마 22:21)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래서 그 형상이 누구의 형상인지 물으니, 물론 그것은 황제의 형상인데, 그러니 모든 돈은 황제에게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바치면 안 되는데, 돈을 왜 하나님께 바치느냐는 것이다. 그 형상이 황제의 형상이니 말이다. 그러니 그 바리새인들의 이론이나 오늘 한국교회의 이론이라고 하면, 돈은 교회에 내면 안 되는데, 세상을 위해서 다 쓰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바쳐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황제의 형상이 있는 것은 황제에게 바친다고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이 하나님의 형상은 소멸하는 형상이라는 말이다.

◈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 곧 바치는 것 !!

그게 신명기 4장 24절에 나오는데, 즉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은 소멸하는 불인데, 그러니 우리는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죄인이 되게 하는 것은 주님의 형상이 임했을 때 아는 것인데, 그러니 그 죄인 됨을 그대로 고백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신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 자기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얼마나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할 수 있는지, 그러한 빌미가 되고 또한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돈을 바치게 되면, 그것은 자기 것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것이 따로 있고 또한 자기 것이 따로 있는 상태로, 그것이 계속해서 유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형상이 임하게 되면 자기 것이 없어져 버리는데, 그렇게 자기 것이 없으면 바칠 것도 없는데, 지금 있는 그대로가 주님의 작품이고 말씀의 결과물이란 말이다. 그러니 더 이상 무엇을 바치고 말고 하느냐는 것이다. 자기 것이 있어야 바치지 말이다. 무엇을 해도 다 주님의 것인데, 그러니 무엇을 더 바치겠느냐는 것이다. 주님께서 일부러 우리 자체를 주님의 것으로 만들어내시는데 말이다.

◈ 성도는, 있는 그대로 바쳐지는 것, 그것뿐 !!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냥 있는 그대로 바쳐지는 것, 그것뿐이라는 말이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도 동일한 차원인데, 거기에 보면 제사가 나오는데 무슨 제사인가? '산 제사' 라는 것이다. 즉 제물이 살아있는 채로 올라가고 있는데, 그런데 제물이 끄덕끄덕하면서 자기 지갑에서 돈을 꺼내서 하나님께 바친다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되겠는가?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만약에 "주님, 이 목걸이는 제 것인데, 이제는 주님이 하세요" 라고 한다면, 물론 목사는 좋다고 하면서 챙기겠지만,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하시겠는가? "내가 언제 니 목걸이를 달라고 했나? 몸 자체를 원했지 말이야" 라고 하면서, 그런 목걸이를 집어던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 몸이 죄인인데, 바로 그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주는데서 주님의 주되심이 한껏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탕자의 경우에, 탕자가 의인이 아닌 죄인이 된 것이, 그런 탕자를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실 때, 그럴 때 주님이 주님답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품행이 나쁜 여자를 구원하실 때, 그러면서 그 잘난 척을 하는 바리새인들을 질책하게 되는데, 그때 주님이 가장 기뻐하신다는 말이다. 그리고 현장에서 간통하다가 잡힌 여인을 용서할 때, 가장 주님의 주되심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개 같은 여인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모습,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 마지막으로 정리하면 !!

지금 우리가 교재 213페이지까지 넘어갔는데, 다음 시간에서는 여기서부터 하면 되는데 말이다. 이제 한번만 정리하고 마치겠는데,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함은 에덴동산의 그 정황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새로운 약속이 키워가면서, 즉 약속이 구체화되면서 그때 그때마다 새롭게 조성되는 환경은 따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환경 가운데 우리가 빠트리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악마가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노리고 말인가? 악마는 우리의 몸을 노리는데, 즉 우리의 몸이 흙으로 되는 것을 악마가 어떻게 하는가? 그런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철폐하고, 우리에게 좋게 대해주는 다정한 친구로서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속삭인다는 것이다. 즉 "그냥 따먹으면 되는데, 그 방법을 왜 놓쳤는가?" 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40일을 금식기도하면 너는 신이 되는 거야. 니가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게 되어있는데, 왜 그것을 하지 않지?" 라고 말이다. 그렇게 자꾸만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즉 "내가 나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키우면서 잘 되는 길이 있는데, 그런데 왜 그것을 마다하는가? 이 바보야" 라는 식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 풀리시하게 살자 !!

하지만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제발이지 바보가 좀 되자는 것이다. 우리 조상님만 똑똑하면 되었지, 굳이 우리까지 똑똑할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는 것이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바보' 말이다. 사실 우리는 십자가를 아는 지혜만 해도 감당하기 힘든데, 거기에 박사학위까지 더해서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것이 내 것이다" 라는 것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주님께서 활용하시는, 즉 주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사용되어지는 하나의 그릇으로서, 지금도 우리는 활용되고 있다는 것만 알아도, 주님에게 영광을 돌리는데 하등의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창조의 요건에 부합이 된다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베풀어주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성령이 아니었다면 남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뽐내기 위해서, 그저 우리의 자랑거리를 만들어내는 공장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그런 모든 자랑거리가 다 헛되다는 것을, 결국 우리는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죽음에 놓여있음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03,27 오후 5시에 마침.

                                                            이 바보야, 그게 아니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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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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