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69강 질투

피/피 2012. 8. 29. 11:07

피69강 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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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20416피p217질투

피69강 질투

[12 대구강의 8] - [피 69] - 질투

                                                   12,04,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관계망을 늘 새롭게 하는 인간 !!

오늘은 교재 217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인간은 자체적인 관계망을 넓히고 이어나가려고 시도한다. 자아란 나의 과거가 흘러 보내온 산물이다. 사람이 타인과의 만남에 나서는 것도, 자신의 과거를 충실하게 현재까지 이어보겠다는 관성 때문이다. 비록 타인에게도 나름대로 과거에서 내려오는 흐름이 있지만, 대화를 통해서 타인의 과거를 일방적으로 묵살하고 자신의 과거의 흐름 속에다 강제 편입시켜, 그 타인을 자신의 과거를 장식하는 어떤 인물로 배치시키겠다는 노력의 일환이다. 누구를 만나도 주도권을 놓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미 외부에 벌려놓은 하나님의 깔아놓으신 관계망을 볼 수 있는 시선은 없다. 기껏 자기에게만 꽂히는 시선만 고집한다. 자기에게서 뻗어나가는 관계망을 늘 새로 펼친다.

여기 마지막에 보면, "자기에게서 뻗어나가는 관계망을 늘 새로 펼친다" 라고 하는데, 즉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이 곧 핵(核)인데, 양파가 자라나면 새로운 껍질을 양산하듯이, 그것을 '양생한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껍질이 추가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핵이 이렇게 가운데 있는데, 이 핵 안에 자기가 들어있다고 하면, 그러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고 일방적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핵 안에 자기가 들어있는데, 그러면 나이를 먹으면 양파껍질이 늘어나듯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말이다. 즉 나이가 들면, 10년, 20년, 30년, 그렇게 누적이 된다는 인상이나 생각을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핵인가? 반딧불인가?

하지만 이게 말이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여기 안에 '나' 라는 것이 사실상 없다는 말이다. 세월의 지층에 겹겹이 쌓여있는 것은 몸이라는 것밖에 없는데, '나' 라는 것은 그 껍질 여기에, 또한 저기에 있을 수 있고, 그리고 전체를 '나' 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생각마다 모두 다른데, 즉 교통사고가 났다든지, 병원에 누워있다든지, 그게 아니면 대통령이 되었다든지, 그런 것에 따라서 자신이 바깥에 있을 수도 있고, 또한 안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치 여기 저기서 번쩍이는 반딧불처럼 말이다.

그러니 어디에 있느냐는 것은, 그것은 자기 기분에 따라, 형편에 따라, 그때그때마다 자아의식이 새롭게 돌발적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돌발적으로 말이다. 꿈속에서는 여기에 있을 수도 있고, 꿈에서 깨어 현실이 되면 또 저기에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가 이 핵처럼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서, 겹겹이 층층이 세월 따라 겹쳐져 있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사실은 여기 핵 속에 있는 것은 '자아'가 아니고 '자존심'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자존심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중앙에 있다고 여기고 자신의 몸을 해석하는, 그런 일종의 '이해구조'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가 만들어낸 구조라는 말이다.

◈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만 그 앞에서 작아지게 되는데, 그래서 그 사람과 결혼을 해서 아이가 생기게 되면, 자기는 어떻게 되던지 간에 자기 아이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똥배가 나오고 몸이 망가지던 말던 간에 말이다. 그렇게 아이만 잘 크면 되는데, 자기가 어디에 있던지 상관없이 말이다. 자기 새끼가 어디에 있는지, 그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기 새끼가 학교에 갔는지, 아니면 골목에서 놀고 있는지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외부에 자기를 대체할 만한, 자기를 대신해서 자기가 집중적으로 거기에 헌신할 만한 그러한 것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을 어제 오후시간에 '명분' 이라고 했는데, 즉 자기 한 몸을 바칠 수 있는 명분이 있다고 하면, 자기는 어떻게 망가져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자기가 기대했던 그 명분이 자기 기대에 어긋나면 어떻게 되는가? 즉 갑자기 그 명분이 죽었다고 하면, 그때는 다시 어디로 돌아가는고 하니, 그러면 "이제는 '나' 라도 챙겨야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소에 서로 찌지든 뽁든 간에, 아무튼 그렇게 함께 하고 사랑하던 남편이 죽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하는가? 초상을 모두 다 치르고 난 다음에는, "죽은 사람은 죽고, 이제는 내가 살아야지" 라고 하면서, 슬슬 자기 쪽으로 돌아오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몸은 몸대로 계속해서 늙어가고 있는데, 즉 몸은 흙이 되어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혼자서 부지런하게 분산을 떨면서 "나는 누구인가?" 라고 하는데, 그렇게 이렇게 나이테와 같은 곳에서, 여기 저기에서 우발적이고 돌출적으로 군데군데 상황과 환경에 따라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유비쿼터스'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국회의원에 나가서 떨어지면, "이제 남들에게 어떻게 하지?" 라고 말이다. 

◈ 인간의 몸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몸은 자아와는 관계가 없는데, 사실 우리 인간의 몸은 누구와 관계가 있는가? 예수님과 관계가 있는데, 물론 우리가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가지만, 하지만 그렇게 신경을 쓰든 쓰지 않든 간에 인간은 예수님이 관리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그것이 곧 '언약 관계' !!

바로 이것을 두고 성경에서는 '언약관계' 라고 하는데, 그래서 시편의 경우에 다윗이 평화스러울 때는 신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꼭 사울에게 쫓기고, 자기를 죽이려고 현상수배령이 내리고 할 때, 그때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들이 많토소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평소에 조용할 때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제대로 감이 잘 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게 고난이 다가오고 원수들이 점점 더 많아지면, 그때는 다윗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이여, 나를 왜 이리 힘들게 하십니까?" 라고 하게 되는데, 욥이나 아가서의 경우에도 역시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 '아가(雅歌)서'의 경우에 !!

자기에게 고난이 다가왔을 때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물론 욥의 경우이고, 그것 말고 하나님의 고난 못지 않게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데, 그게 곧 아가라는 말이다. 이 아가는 '베이비' 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란 뜻인데, 즉 '우아한 노래' 라는 의미에서의 '아가(雅歌)' 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미치게 하는 여인이 생겼을 때, 그때 '나' 라는 것이 어떻게 돌발적으로, '나' 라는 인간 자체가 나의 자존심이나 인격형성에 있어서 어떻게 변화되는지, 그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죽는 것이 무서운데, 그런데 자기보다 더 자기를 사랑하는, 물론 자기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만, 그런데 그런 자기 자기 자신보다도 더 자기를 사랑하는 대상을 나타났을 때는, 그땐 죽음도 별로 무섭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사랑은 심판을 이긴다고 했는데, 즉 사랑 안에는 무엇이 없다는 말인가?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그런 두려움을 내어쫓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구약의 아가서가 보여준다는 것이다.

(요일 4: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니 인간이라는 것은 "60이 넘어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라는 것인데, "어휴, 이 마지막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지?" 라고 다방에 앉아서 고민을 하고 있다가도, 왠지 낭만을 보여줄 수 있는 화장을 짙게 한 마담을 만나게 되면 그만 눈이 '픽' 돌고 마는데, 그때는 잃어버린 청춘을 되찾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 몸에 활기가 돌면서, 그 이전에는 옷도 그냥 대충 입고 다니다가, 그때부터는 양복도 새로 맞춰서 입고, 머리에 기름도 바르고, 고급 식당도 들락거리고 한다는 것이다.

◈ 인생의 8할은 허풍이 아닌가?

물론 그때는 아내가 되는 사람에게는 감이 오는데, 즉 "저 양반이 청춘을 되찾는 것을 보니, 청춘유발요인이 생겼구나" 라고 말이다. 그래서 서정주 시인이 뭐라고 했는가? "내 인생의 8할은 바람이었다" 라고 했는데, 즉 자기 인생의 8할은 허풍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시인이니 그런 표현을 했겠지만, 그런 아무런 실속도 없는 허풍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허풍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가 자기보다 더 자기를 사랑하는 대상을 찾아다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 몸이 '나'를 만들었기에 !!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가 자기 몸을 사랑할 수가 없다는 것인데, 왜 그런가? 늙어 가는 자기 몸이 만들어낸 아고라와 같은, 즉 어떤 영향과 같은 것이 곧 '자아' 라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만약에 '나' 라는 것이 자기 몸을 만들었다고 하면 굉장히 자기 몸을 아낄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몸이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 몸이 발휘하는 본성에 따라서 살아가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같이 자아만으로는 살아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이런 몸이 주는 고통과 아픔과 괴로움, 즉 부처가 말하는 생로병사가 바로 그런 것인데, 그런 고통을 것을 잊을 수 있는, 왜냐하면 자아는 매일같이 자기 몸에 시달려서 병들고 아프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밥을 주고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야하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에 시달리지 않는, 자기 상상력을 뛰어넘는 대상을 찾게 되면, 그 순간만큼은 자기 몸이 시달리지 않으니, 자기 몸에 예속되지 않고, 자기 몸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 불교 -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서' !!

바로 그것을 불교에서는 도를 닦았다고 하면서 소위 '해탈' 이라고 하는데, 즉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발견했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해탈을 어떻게 하는가? 그 방법을 불교에서는 어떻게 보는고 하니, 자기 몸에 대해서 자기가 엮어지는 것을 강제로 끊어야만 하는데,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끊는가?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변동이 심한 도시에서 살지 말고, 변동이 가능한 한 적은 곳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도시는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생각의 변화가 많을 수밖에 없는데, TV나 스마트폰 등도 그렇고 말이다. 그런 것은 일일이 다 생각을 해주어야하기 때문에 힘들지만, 그래서 고요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깊은 산 속이나 깊은 호숫가에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나무들도 가만히 있고 호수도 그냥 가만히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동물이 많이 있으면 안 되는데, 그것들은 촐랑거리니 말이다. 그런데 고요한 호수를 바라보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 마음에 변동이 없는데, 그렇게 변동이 없으니 자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가 '살았다' 라고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이런 변동에 의해서, 즉 사건과 그 다음사건의 차이, 바로 그런 차이로 인해서 사람들은 살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런 변동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죽으면 안 돼. 살아야지" 라고 하는, 그런 변동에서조차도 그만 해탈이 된다는 것이다.

산사에서 중들이 모여서 똑같은 생활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데, 새벽 4시에 일어나서는 새벽예불을 드리고, 그리고는 마당을 쓸고 말이다. 그렇게 다하고 나서는 다시 오후에는 디비져서 진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잠을 제대로 못 잤으니 말이다. 밤에는 절간에도 유선방송이 들어와서는 밤새도록 개콘을 보고 말이다.

그렇게 하니까 그 양반들이 그만 살이 디럭디럭 찌는데, 낮에 디비져서 그렇게 잠을 자대니 말이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내려와서는 심방을 한답시고 마을을 한 바퀴 돌고, 그리고 나서 저녁에 배가 고프면 돈까스나 사먹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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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님이시여 ]
             - 노래 김연숙 (이은하)

외로움으로 나 여기섰네
허전한 마음 나 여기에 섰네
부풀어 오르는 이 가슴의 물결과
그대 사랑은 아직도 내 것이네
아~ 나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님이시여! 님이시여! 님이시여!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한마디만 당신 곁에 남겨두고
나도 이제는
연화당 저 바다에 돌아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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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해서 '내 몸은 내 것이다' !!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는 찾을 수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내 몸은 내 것이다" 라는 관계를 제 아무리 도를 닦아도, 도를 닦던 그 몸은 누구의 몸이란 말인가?

도를 아주 멋있게, 즉 반들반들 아주 예쁘게 닦던 그 몸도 돌아보면 누구의 것인고 하니, 역시 자기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마치 고무줄을 놓으면 다시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듯이, 그렇게 자기에게로 돌아오니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그렇게 고생해서 도를 닦지 말고, 그냥 "내 몸은 내 것이다" 라고 하는 '나',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바로 그 '나'를 하나님께서는 집중적으로 공격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욥기이고, 또한 아가서라는 말이다.

◈ 몸의 전쟁 !!

다시 말해서, 몸은 하나님 것인데, 그런데 그 몸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고집,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니 고집이 세나? 내 고집이 세나?" 라고 하시면서 붙어보자고 하는 바로 그 전쟁, 그러니 전쟁과도 같은 사랑이라는 말이다. 즉 인간의 몸에 대한 사랑이 전쟁과 같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몸의 소유를 내 소유로 할 것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언약, 즉 주님의 소유로 할 것인가?" 라고 하는, 바로 그 싸움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이 몸을 가지고 '나' 라고 하는데, 그것이 세월을 따라서 펼쳐진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218페이지를 살펴보자.

** 그래서 본인이 납득할 수 없는 운명노선을 떠안게 된 것이다. A-B의 관계를 따지자면 A-B나 B-A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방향성을 부여하면 완전히 다르다. 즉 A→B하고 B→A하고는 확연히 다르다. 

◈ 언제나 '나'로부터 출발하는 인간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내 몸에서 유발된 요인이기 때문에, 즉 하나의 환경이기 때문에, 그렇게 몸이 있다는 것은 항상 내가 먼저 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몸이 있는 이상 어떻게 되는가? 언제나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나'로부터 말이다.

이것을 이전에도 했지만 여기서 다시 한번 더 하면, 그냥 '배고프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 앞에 반드시 무엇을 하나 넣는데, 즉 "내가 배고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길을 가고 있다" 라고 하면 될 것을, "내가 길을 가고 있다" 라고 하고 말이다.

만약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동행하고 있으면, 그 사람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자기가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상대방이 묻기를,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는 거야?" 라고 한다면, "내가 길을 가고 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상대방이 물어주면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 인간을 향해서 '질문'하시는 하나님 - '네가 어디 있느냐' !!

바로 이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그래서 처음 창세기부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도 아담이 그냥 존재해주면 그냥 살아있고 존재하는 것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아담아, 니가 어디에 있는가?" 라고 하심으로서, 지금 하나님께서 언약과 약속을 전수하시면서 환경을 문제삼는 것이 아닌데, "아담아, 니가 어디에 있는가?" 라고 해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시작한, 하나님께서 그런 질문을 함으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목적의 일부로서 포함이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서 물으셨다는 것이다.

(창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그러면 우리는 그 아담 자리에 누구를 집어넣으면 되는가? 바로 우리 자신을 넣으면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면 되는가? "하나님이여, 지금은 나에게 무엇을 묻고, 또 무엇을 시킬 겁니까?"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묻는 것이 언약적인 동행관계라고 볼 수가 있다는 말이다.

◈ 하나님께서 배고프게 하셨기에 !!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몸에게 무엇을 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배가 고프게 하셨는데, 즉 "얘야, 너는 지금 배가 고파야 돼" 라고 하는 일을 시켰는데,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그런 습관이 배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어, 내가 배고프네. 그러니 내가 밥을 먹어야지" 라고 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누가 빠졌는가? 그렇게 하나님이 빠져버리는 순간, 우리는 갑자기 언약관계에서 벗어나면서, 그때부터는 두려움과 걱정근심과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배가 고프게 했으면 밥을 먹을 때도 감사히 먹으면 되는데, 그런데 자기가 배가 고파서 밥을 퍼먹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짬뽕을 좋아하는데, 짜장면이 왜 나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실시한 환경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니, 그만 자기 몸을 그만 닦달을 내게 된다는 것이다.

◈ 인간에는 왜 감사가 없는가?

그렇게 닦달을 내면서 뭐라고 하는가? "내 몸아, 지금은 짬뽕이 없어. 그러니 짜장면이라도 처먹어" 라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강제로 나가게 되니 하나님께 감사할 일도 당연히 없다는 것이다. 분명히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는데 말이다. 물론 항상 기뻐하지도 않으며, 또한 쉬지 않고 기도도 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도는 바치는 것을 의미하데, 즉 "하나님이여, 이 몸을 바치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바치기는커녕 짬뽕이 아닌 짜장면이 나왔다고 불평이 가득하니, 전혀 그러한 감사와 기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기쁨도 없고 말이다.

◈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 인간을 원래 상태로 돌리시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몸밖에 모르는 우리 인간을 어떻게 원래 상태로 되돌리시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지금부터 그 되돌리는 방법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자기 몸밖에 모르는 우리를 어떻게 원래 상태로 되돌리시는지를 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즉 아담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이미 인간은 죄를 지었는데, 거기에 대해서 이미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빠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그러한 우리의 운명에 대해서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의 대표자인 아담과 다 이야기가 끝난 상태이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뒤늦게 찾아가서 "하나님, 이제부터 착하게 살려고 합니다. 그러니 제발 복을 주세요" 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는가? "니가 왜 뒤늦게 회담장소에 끼어 들려고 하느냐? 어서 저리 꺼져"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아담의 몸은,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의 도구 !!

그러니 "나는 왜 이렇게 키가 작을까?"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것을 왜 자기가 알아서 처리를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조상의 DNA가 그러한데, 즉 자기의 몸이라고 해도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담의 몸은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의 도구로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재료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아담의 경우에도, 우리가 아담 쪽으로 가보면, 우리는 거기서 우리 자신 쪽이 아닌, 아담과 하나님과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담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는데, 그렇다면 아담이 주인공이 아닌 약속이 주인공이 되면서, 아담은 약속을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담뿐만이 아니라 딸려 나오는 자들이 다 그렇다는 것이다.

◈ 남자든, 여자든, 오직 '약속 안'에서만 !!

그래서 우리 인간의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아담의 약속 안에서는 인간의 죽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자의 경우에도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되, 약속 안에서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과 관련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여자의 이름을 하와, 즉 '생명' 이라고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창 3: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그러니 인간의 모든 배치와 그 역할은 '인간을 위해서' 라는 것이 아니라, 즉 "남자는 남자를 위해서, 여자는 여자를 위해서" 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 남자는 남자이어야만 하고, 여자는 여자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 까불지 말고, 밥해 놔 ??

예를 들어서,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 보면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구절을 가지고 와서는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니까, 여자는 남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과연 그런 주장이 맞는가? 자기 몸을 두고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성경말씀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전 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목사들이 어설프게 성경을 배워 가지고 희한하게 다 써먹고 하는데, 교인들을 그만 다 버려놓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들이 죄인인데, 성경말씀을 알아서 더 까불게 되었다는 말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말씀은 남자가 자기 몸을 자기 몸이라고 여기지 않을 때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인데, 오직 말씀만을 뚜렷하게 드러낼 때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남자가 되어서 "내 몸은 내 것이다" 라고 여기면서, "하루 세 끼의 밥을 다 해놓아라" 라고 한다면, 특히 예식장에서 목사가 그런 식으로 설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예수님 - '나의 질문에 무슨 문제가 있나?' 

조금 전에 하나님께서 자기 몸밖에 모르는 우리를 어떻게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지, 그 방법을 이야기한다고 했는데, 아직 그 방법은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대화하시고 지시할 때는 그 방법이 있는데, 지금 제가 말하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인데, 제자들과 함께 하던 무리들에게 말이다.
 
* 예수님 : 인간아?
* 인  간 : 예.
* 예수님 : 내가 너희들에게 하는 질문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 인  간 : ??
* 예수님 :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 인  간 : ???
* 예수님 : 정말 몰라?
* 인  간 : ????

조금 어렵습니까? 쉽게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인데, 즉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나는 길이다' 라고 하는 나 예수의 주장이 너희들의 안목에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그것을 한번 찾아보아라"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인들이 평소에 교회에 와서 목사에게 기대하는 것은 바로 "무엇을 하라" 라는 것인데, 그러니 사도바울의 편지를 통해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착해라, 사랑하라, 서로 권면하라" 라고 하는, 그렇게 "하라, 하라, 하라" 라는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본래 뜻은 전혀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내가 너희들을 보고 서로 사랑하고 권면하라' 라고 하는, 이런 질문자체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것을 너희들 선에서 한번 찾아봐라"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나 어렵다는 표정들인데, 많이 어렵나요?

◈ 여보, 오늘 저녁은 칼치조림이 어때요?

더 쉽게 부부사이의 예를 들어보면,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오늘 저녁에는 칼치조림을 해다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철학적으로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하는데, 즉 "내가 '칼치조림을 해달라' 라는 이 질문자체가 당신이 보기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것을 당신이 한번 찾아봐라"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ㅋㅋ). 이제 이해가 되지요?

그러면 아내는 뭐라고 하겠는가? "가만히 있어봐라. 요즘 칼치철이 아닌데, 그래서 엄청나게 비싼데, 그런데 저 양반이 칼치조림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지? 아하, 그렇구나" 라고 하면서, 즉 "당신은 그런 칼치조림을 해달라고 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 돈도 제대로 벌지 못하면서 무슨 칼치타령이고? 그냥 콩나물국이나 먹어라. 당신은 지금 당신 분수에 맞지 않는 요구를 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 남편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당신은 진정 나의 아내가 맞아" 라고 역공으로 나오면 된다는 말이다(ㅋㅋ).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사도바울의 명령이나 권면 등은, 그것은 우리 인간과 협상이나 타협을 하자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은 자꾸만 자기 잘못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 감추고 있는 것을 들춰내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 인간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 쪽에, 즉 하나님 쪽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보게 해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 인간 스스로 쳐다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 들켰다, 들켰다 !!

그렇게 쳐다보게 되면, 우리 인간에게서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평소에 '꿍'하면서 하나님께 반발하고 숨기고 있던 것들이, 즉 "하나님도 나에게 한번 걸리기만 해봐라. 이번에는 나도 가만히 있지만 않을 거야" 라고, 그렇게 준비된 것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그때 방금 이야기했듯이 남편이 "여보, 오늘저녁은 칼치조림이 어때?" 라고 하니, "아니 이 양반아, 요즘 칼치가 얼마나 하는지 아나? 돈도 벌지 못하면서" 라고 하면서, 평소에 가지고 있던 불만과 원망이 와장창 다 쏟아질 때, 그때 주님께서는 박수를 치면서 "드디어 들켰다. 니 죄를 니가 숨기지 못하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 교인들이 나올 때는 "하나님, 오늘도 목사님을 통해서 지시를 내려주시면 무엇이든지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나오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으로 복음적인 설교를 하도록 하시게 되면 목사가 뭐라고 하겠는가? "여러분, 예수님께 대해서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당신 쪽에서 찾아봐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보게 되면 슬슬 불만들이 터지지 시작하는데, 즉 "제가 새벽마다 정말이지 열심히 기도했는데, 아들이 또 재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기도를 얼마나 어떻게 해야합니까? 갓바위는 세 개를 하나면 하나는 들어준다고 하던데, 하나님은 도대체 열 개를 해도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니, 이게 뭡니까?" 라고 말이다.

◈ 악마가 인간을 사용했듯,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사용해서 !!

그러한 것이 바로 어느 창구를 통해서 나오는고 하니, 바로 십자가 창구를 통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통해서 나오는데, 그것을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 혹은 은사, 선물이라고 하는데, 모두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헬라어 의미가 그러한데, 은혜와 은사는 모두가 공짜로 준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아서 선물로 주시는 주님인데,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불만과 원망이 가득한데,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 배후에 무엇이 있는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주님에 대해서 불만과 원망이 가득하도록 사주한 세력이 있는데, 바로 그 세력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마치 악마가 인간을 사용했듯이 하나님도 인간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 그것이 곧 '언약관계' !!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그것을 뒤에서 누가 조종을 했는가? 악마가 했는데,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모르는 인간 배후에, 인간으로 하여금, 본래 하나님께서 만들었던 인간이 아니 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인간 배후에 있던 세력을 끄집어내는 식으로,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다루면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대결상태에 들어가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바로 그런 끝장을 보는 끝장전쟁에 휘말려있다는 것이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방금 제가 길게 이야기한 이것이 어떤 관계인고 하니 곧 '언약관계' 인데, 그 모든 것이 언약관계라는 말이다. 무엇을 밀고 당기고 하면서 말인가? 바로 우리 몸을 가지고 하나님 쪽에서 밀고 당기고, 또 악마 쪽에서도 밀고 당기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무엇도 싫고 무엇도 싫은가? 하나님도 싫고 마귀도 싫은데, 그냥 "내 몸만 편하면 최고다" 라는 것인데, 바로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자아를 자기 몸 안에 깊숙이 두고 말이다.

◈ 중요한 것은 '방향성' !!

그래서 교재 218페이지에 나오는 '방향성' 이라는 말이 매우 중요한데, 우리 쪽에서는, 여기에서 A가 인간이고 B가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A쪽에서 인간이 하나님으로 나서는 것은 전부가 다 자기가 질문을 던지고 자기가 답변하는 것인데, 그것을 '독아적(獨我的)'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쉽게 말해서 '자폐증'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방금 말한 '독아적' 이라는 말은 잘 하지 않고, 그것을 '유아적' 이라고 하는데, 즉 '유아독존적' 이라는 것이다. "나로부터 말미암아서, 나로 돌아가는 모습",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B에서 A로 나갈 때는 어떠한가? 그 B쪽이, 즉 하나님을 대신하는 쪽이 십자가로서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몸이 아니라 죄가 있는 몸이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예수님 자체가 죄 있는 몸인데, 즉 "너의 몸이 원형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몸이 너 몸의 원형이다" 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 인간 몸의 원형인데, 그러니 이근호의 원형은 이근호에서 찾으면 안 되고, 십자가에 달리신, 마치 정육점에 걸린 고기처럼 피와 물기가 '쫙' 빠진 그 몸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의 원형이고, 그 안에 이근호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 욥의 경우에 !!

그렇게 자기가 들어있음이 보이는 사람은 예수 안에 있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다면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쫙 빼버리는, 즉 모든 자기의 잘남을 쫙 빼버리는 작업을 구약 때 '지혜' 라고 해서, 욥을 통해서 그런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전히 다 빼버리는데, 하지만 그렇게 빼면서도 하나님께서는 기어이 욥의 자아만은 빼지 않았는데, 계속해서 욥으로 하여금 오바하게 만들고, 즉 "차라리 이렇게 할 바라면 태어나지 말게 할 것이지, 왜 나를 이렇게 부모에게서 태어나게 해서 힘들게 합니까?" 라고 말이다.

그렇게 욥이 계속해서 자아를 구성하니, 나중에 등장하는 '엘리후'가 뭐라고 하는가? "욥아, 너로부터 출발하지 말고, 즉 A에서 B로 출발하지 말고, B에서 A로 출발하라" 라는 것이다. 그러자 욥이 아무런 소리도 못하는데, 그러자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똑같은 소리를 하신다는 말이다. 즉 "내가 노루새끼를 배도록 할 때 너는 무엇을 했는가?" 라고, 그렇게 하나님 쪽에서 출발하신다는 것이다.

(욥 39:1)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
(욥 39:2) 그것이 몇 달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욥 39:3)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아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리며
(욥 39:4)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 들에서 길리우다가 나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
(욥 39:5)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하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욥 39:6) 내가 들로 그 집을, 짠 땅으로 그 사는 처소를 삼았느니라
(욥 39:7) 들나귀는 성읍의 지꺼리는 것을 업신여기니 어거하는 자의 지르는 소리가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욥 39:8) 초장이 된 산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것을 찾느니라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반응을 나타나게 되는데, 그런 반응 가운데서 하나가 무엇이고 하니, 평소 우리의 모든 모습을, 즉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을 완전히 노출시키는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 말씀을 풀어줄 때 뜨겁다는 이야기도 하고, 또한 로마서 10장에서, 믿음이란 것은 모든 것이 말씀으로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라고 했는데, 또한 시편에서도, 이 세상 모든 자연만물이 말씀을 따라서, 즉 보이지 않는 소리를 따라서 움직인다고 하는 것을 안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이 성경말씀에 대해서 덮어버리고, 제가 어떤 교회에 갔더니만 정말 캠코드가 있었으면 찍고 싶은 장면이 있었는데, 그 풍경을 말이다. 금요일인데 성경 찬송가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몸만 쏙 빠져나가고 성경 찬송가가 한결같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교회는 성경책이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는데 말이다(ㅋㅋ). 그런데 그 교회 교인들은 아무도 성경책을 집에 가지고 가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야말로 합리적으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냥 몸만 오면 되니 말이다.

◈ 말씀은, 평소에 사건을 통해서 !!

그런데 이 말씀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성경말씀을 본다고 해서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사건을 통해서 그 뒤에 줄이 있어서, 그 사건이 말씀사건으로서, 즉 말씀이 낳은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수시로 사건과 사건으로서 부딪친다는 것이다. 요즘 울산에도 오죽 사건들이 많은가?

그렇게 모든 마주치는 사건들이, 비록 그 사건들이 우리 몸에 직접 다가오지 않더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서 수 백키로가 떨어진 평양에서 일어난 사건도 우리 귀에 들려서, 우리를 심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평양에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강남의 전세값이 푹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주식값도 떨어지는데, 그러면 펀드를 통해서 노후대책을 마련한 사람들은 그만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야야, 노후자금을 펀드에다 넣어놓았는데, 이렇게 주식값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라고 자식에게 전화를 해서 걱정거리를 털어놓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니 한 가지, 즉 이 세상의 모든 구조가 어떠한고 하니, 어떤 사건이 하나 터지게 되면 그 사건의 여파가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그래서 물가에도 영향을 끼치고, 우리 마음의 안정성까지도 다 영향이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사건, 즉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이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는데, 그야말로 알 리가 없다는 것이다. 숨겨진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주되심으로 인해서 생긴 사건들인데, 아무도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 누구라도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람이 어떠하든, 악마가 뭐라고 하든, 사랑을 받는 당사자와의 관계는 취소가 되거나 철회될 관계가 아니다. 성도가 원해서 주님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해서 성도가 생겨난 것이다.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이미 끝, 끝, 끝 !!

이게 무슨 의미인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협약으로 끝났으면, 이제 우리는 그만 빠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 인생의 변화에 대해서 어떻게라도 시비를 걸 수 있는 입장에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 나오는 로마서 8장 39절의 말씀을 이해하기 이전에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즉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첫째 아담처럼, 둘째 아담의 경우에도 !!

그러니 우리는 그 무슨 짓을 하더라도 죄가 되는데, 감사를 하든 찬양을 하든 말이다. 그렇게 우리 몸 자체에서 죄가 뿜어져 나오고 방출이 된다는 것을 혹독하게 경험해야, 그 다음에는 이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 안에서의 관계도,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결했기 때문에, 우리가 나중에 뒤차로 와서 하나님께 까불고 어떻게 해봐야, 우리의 신분과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대신하는' 분이 계시기 때문인데, 그러니 성도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혀 자기 자신이 주체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과 이야기가 모두 다 끝난 분이 자기에게 어떤 환경 속으로 데리고 다니시면서 관리하고 있는지, 바로 그것이 성도의 몸을 통해서 발산된다는 것이다.

◈ '내 몸은 하나님 것입니다' 라는 인간의 심보는?

여기서 한 가지 어려운 것을 해보면, 이것은 애매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묘한 것인데(ㅋㅋ), 여기에 원칙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몸이 있다고 하면, 이 몸에 대해서 성경말씀은 뭐라고 하는가? "이 몸은 주님의 것이니, 주께서 알아서 관리하고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던지, 주께서 다 알아서 인도하신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몸을 내 것이다" 라고 여기는 '나' 라는 인간은 그 이야기를 듣고 뭐라고 하는가? "그러면 나는 가만히 있으면 되겠네요?" 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인간은 "나의 몸을 주님께 바칩니다" 라고 말은 해놓고는, 정작 자아는 이러한 관계, 즉 "내 몸은 하나님 것입니다" 라고 하는 관계에서, 자아는 그만 자기가 빼돌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빼돌려놓고는, "진짜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지 한번 보자" 라고 하면서, 팔짱을 끼고서 구경을 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곧장 자기를 투입해서 하나님과의 그 관계를 끊어버리고, 자기 몸을 자기 뜻대로 다루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주께서는 계속해서 죄를 발생시킴으로서 !!

바로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우리 몸을 다룰 때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그것을 두고 '죄' 라고 하시는데, 즉 언약관계가 아닌, 악마와의 관계에서 나온 죄의 흔적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그것을 발생시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가 너에게 복을 준다" 라고 했을 때, 우리 인간은 뭐라고 여기는가? "어느 정도 나에게 복을 주는지 어디 보자" 라고 하는데, 바로 그러한 생각이 비언약적인 것으로서, 다른 말로 하면 그러한 것이 곧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약이 없다고 하면 그것이 곧 우상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신께서 제가 원하는 대로, 제가 편안하게 제 몸을 관리하는데 저는 구경만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이번 일에는 제가 손을 떼겠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겠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살아있음을 시험하고 측정하겠습니다. 만약에 제가 제 몸에 대해서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제 몸을 움직인다고 하면, 그제야 비로소 저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확신하고 감사를 하겠습니다" 라는 심보로 인간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 그 자아는 무엇이 빠져있는가? 하나님께서 이 몸을 품을 때, 그 몸에서 요따구로 자아가 나온다는 것까지도 품어서 언약을 이루시는데, 그런데 우리는 몸만 달랑 주고 그 동안 자기가 관리했던 자기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잘 되는지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따로 챙기는 것, 그것이 바로 주께서 우리 몸을 챙겨서 나오는 그림자인데, 검은 그림자라는 말이다. 

◈ 다시 정리해보면, '탱큐' !!

다시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관리할 때는 무엇이 나오게 하는고 하니, 죄가 나오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로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때부터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하게 되는데, 즉 "내가 이렇게 따로 챙기는 죄악된 버릇을 오늘도 이렇게 들추어주시니, 이 죄로 인해서 돌아가신 주님으로 인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라고 말이다.

◈ 시편 - '주의 의로 죄에서 저를 구원하소서' !!

그것이 바로 시편에 나오는 다윗이나 다윗의 후손들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보면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라고 하는 화답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데, 즉 "주의 의로 죄에서 저를 구원하소서" 라고 말이다.

이렇게 주님의 의(義)이니, 이 '의(義)'의 반대말이 무엇인가? 즉 이쪽에 있는 주의 의가 B라고 하면, 그 반대쪽에 있는 A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 전체가 자동적으로 모두가 다 죄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면 "주의 의로 죄에서 저를 구원하소서" 라고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저쪽에서 보게 되면, "저는 의가 전혀 없는 죄인의 입장임을 마구 마구 노출시켜주니, 주여 정말로 감사합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시 31: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시 31:2)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
(시 31:3)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시 31:4)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시 31:5)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시 31:6)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시 31:7)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시 31:8)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 '자아'에는 하나님도 접근하면 안 돼 !!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복음을 모르는, 즉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반발하는고 하니, "이근호 목사는 무조건 인간을 보고 죄인이라고 하더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안목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고 하니, 자신의 몸을 두고서, 그 자아를 그 어느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하나님도 접근하지 못하게 따로 꿍쳐 놓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동안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죄와 의라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따로 정리를 해놓았는데, 그런데 건방지게도 이근호 목사가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치고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자기가 생각한 기준에서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 따져보니, 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예배, 봉사, 헌금, 전도와 같은 것들이 있으니 말이다. 물론 간음과 같은 것은 죄로 여기지만, 헌금과 전도와 찬송과 같은 것은 성경대로 의롭게 보인다는 말이다. 

그래서 뭐라고 반발하는가? "그게 아니야. 나쁜 짓도 있지만, 착한 짓도 있다" 라고 나오는데, 그러니 자아가 따로 챙겨놓은 나쁜 것과 착한 것에 대한 기준은 결코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것인데, 그렇게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자기 속에 아직 십자가가 침범하지 않은 다른 구석이 있는데, 거기서 자기는 독야청청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자기의 최후의 보루로서 결코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말이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즉 십자가가 없으면 그렇게 되는데, 즉 이렇게 자기 아지트가 있으면, 십자가와 부활은 그 바깥에서 자기를 빙 둘러있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의 열매도 그렇게 주위에 있고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불러주면 들어오고, 신경을 쓰지 않으면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도 자기가 불러주면 충만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빠져나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항상 자기 활동의 모든 중심은 자아에 있는데, 이 자아의 활동만큼은 무조건 거룩하고 의롭다는 말이다.

◈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그러한 예가 성경에 나오는데, 그게 바로 부자청년이라는 것이다. 그가 예수님에게 와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옷에 있는 단추를 딱 잠그고 눈을 똑바로 뜨고서 이야기하는데, 즉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부자청년이 단도리를 한 그 안에는 돈이 들어있었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단추를 풀어라. 그 안에는 돈이 들어있는데, 그 돈을 모두 다 처리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 청년은 뭐라고 하는가? "아니, 미쳤어요? 그 돈 때문에 나의 자아가 있는데, 이 나의 자아는 그냥 자아가 아니고, 돈이 있을 때만 가장 나다운 겁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짜로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착하던 착하지 않던 간에,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말씀대로 지키는 그 착함이 있을 경우에만, 즉 그런 자아가 있을 경우에만 진짜로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다운 것이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 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마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 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런 이야기는 아주 친숙한데, 우리교회에서도 한 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가? "당신은 내가 나다운 것을 왜 자꾸만 치는가?" 라는 것인데, 그래서 "그 나다운 것이 뭡니까? 그것을 한번 꺼내보세요" 라고 하면, 절대로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가 그렇게 평생을 나이테처럼, 즉 "내가 수십 년을 교회에 다니고, 또한 열심히 성경을 공부한 것인데, 그것을 왜 깨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결코 깨지 못하겠다는 것인데, 물론 제가 그것을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 것인가? 자기 것인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언약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시편에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결코 나에게서는 의가 나오지 않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에게는 죄가 많은 정도가 아니라, 주께서 작용하면 항상 펄펄거리면서 죄가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에게서 죄가 나온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 슬프게 여길 필요가 없는데, 그 관계, 즉 자기의 죄를 끄집어내고, 주의 의로 용서하시는 그 언약관계가 자기보다도 더 귀하다는 것이다. 그 복잡한 관계가 이렇게 손쉽게 정리가 되고 풀리는데, 가만히 보면 그리 손쉬운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미움'을 일으키는 사랑이다. 끝까지 나오는 그 사랑의 능력으로 인하여 끝까지 자기를 미워하게 되어있다. 미움이 없이는 사랑도 없다. 미움을 모르고서는 사랑의 가치를 모른다. 왜 그런가?

◈ 십자가 사랑은, '자기 미움'을 일으키는 사랑 !!

여기에 보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미움'을 일으키는 사랑이다" 라고 하는데, 이 짧은 문장에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데 말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오게 되면, 그때부터 자기 자신이 너무나 밉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미울 때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자기가 너무 밉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느낄 수가 있는데, 즉 "그대 앞에만 서는 나는 왜 작아지는가?" 라고 말이다(ㅋㅋ). 자기가 보기에도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하고 볼품이 없다는 것이다. 추악하고 뻔뻔하고, 왜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 앞에만 서는 자기 자신이 나쁜 놈인가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진짜로 사랑했을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다.

여자가 남자에 대해서 관심이 없을 때는, 그 남자와 엮이지 않기 위해서 자기 몸을 사리는 게 여자의 본능이라는 것이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남자가 여자를 보고 "고향이 전라도입니까?" 라고 하면, 여자는 "제 고향이 보이기라도 합니까?" 라고 하는데, 그리고 "키가 얼마입니까?" 라고 하면, "제 키가 작아 보입니까?"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은 바로 "저는 당신의 관계망에 엮일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버티던 여자가 이제 결혼을 해서 자기 온 몸을 다 바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자기는 옷도 그냥 아무렇게나 입어도, 그냥 남편만 보면 좋아서 싱글벙글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도 그런 때가 있었었지 싶은데(ㅋㅋ), 그때는 아낌없이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은, 음식을 하나 해도 온갖 솜씨를 다 부려서 해주고 싶고 말이다. 물론 남편도 맛이 없어도 맛있게 먹어주고 말이다. 물론 그것이 나중에는 자식으로 다 옮겨지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런 짧은 순간에, 그것이 바로 자기 미움이 된다는 것이다. 즉 "당신은 나에게 너무 과분한 존재이다" 라는 것인데, 여기서 '과분하다' 라고 하는 것은 '헤어지자' 라는 말이 아니라, "당신이 너무 좋다" 라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자기와 같은 이런 보잘것없는 존재에 비해서 말이다.

◈ 성경에서 '과분하다' 라는 의미는?

다시 적어보면, 여기서 '과분하다' 라는 것은 "너무 좋다" 라는 의미인데, 즉 '여분의 것' 인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은혜, 은사, 하나님의 선물, 혹은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소망이고 사랑이고 말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런 과분한 것이 올 때 비로소 과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되면 자기와 엮여진 모든 것이 다 과분한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지금 우리는 자기 자신이 주제파악이 되지 않으니, 즉 자기가 그야말로 개 같은 여자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에게 불만이 있지만, 그런데 "주여, 저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좋습니다" 라고 하게 되면, 그것이 곧 과분한 것임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구원은 불평등합니다 !!

제가 강의를 하면서도 은혜를 많이 받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불평등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무심코(?) 했는데, 그런데 그런 말을 하고 나니 "아하, 나의 신세가 너무나 과분하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정식으로 시합을 해서 "누가 성경을 더 많이 읽는가? 기도를 누가 많이 하고, 누가 헌금을 많이 하는가?" 라고 하게 된다면,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과분한 것이 아닌데,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은 전혀 그렇게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는 내가 사랑하기로 했어. 하지만 저쪽은 내가 미워하기로 했어" 라고 한다는 것은 전혀 평등한 것이 아닌데, 그런데도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세상에 횡재도 그런 횡재가 도대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이 자기에게 과분하다고 여겨지면, 그게 자기에게 손해인지 이익인지, 그것을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이 이익인가? 다니지 않는 것이 이익인가?" 라고, 즉 "집에서 그냥 편안하게 쉬는 것이 교회에 나가서 봉사하는 것보다 나은가?" 라고, 그런 계산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하면, 그것 자체가 무엇을 놓쳐서 그러한가? 주님이 주신 과분함을 놓쳤다는 것이다.

◈ 녹매교회의 경우에 !!

녹매교회가 저기 서울 옆에 있는 인천의 검단이라는 곳에 가면 있는데, 말이 교회이지 돈까스를 파는 가게인데(ㅋㅋ), 그런데 놀랍게도 안산에서 그곳까지 예배를 드리러 가는 분이 있다는 것이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리지 싶은데, 그것도 아침에 막히지 않을 때 시속 100킬로로 마구 달려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가면 또 예배시간은 긴장을 해야 하는데, 한 시간을 혈압을 올려가면서 말이다. 설교만 무려 50분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도 한 시간 이상이 걸리고, 요즘 기름값은 또 얼마나 비싼데, 굳이 왜 그렇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집으로 오면 그야말로 파김치가 되는데, 그러니 그냥 집에서 동영상으로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면 얼마나 좋으냐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기 전에는 "좀 쉬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어도, 그런데 일단 갔다오고 나면 "참, 잘 갔다왔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즉 가기 전에는 자기에게 이익인지 손해인지, 그것을 따지게 되는데, 그런데 갔다오게 되면, "가게 하신 것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과분한 은혜구나" 라는 것을, 그게 하나님의 은총임을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다음날 출근할 때가 되면 어제 받았던 그 은혜는 그만 쏙 빠져버리고 "오늘도 내가 이러한 짓거리를 꼭 해야만 하나?" 라고 하면서 투덜거리게 되는데,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매일같이 흔들어댄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마음을 말이다.

◈ 너는 개야 !!

그러면 주님께서는 왜 흔드시는가? 자기가 은혜 받은 것을 계속해서 붙잡게 되면 그게 우상이 되는데, 즉 "나는 어제 은혜를 받았어.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신앙인이야" 라고 하면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숭배하게 되는데, 그래서 주님은 또 다시 흐트러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가는데 그만 옆에서 차가 와서 들이박아서 기분을 잡치게 만드는데, 그래서 "오늘은 교회에 나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게 뭐야?" 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런 사건들 속에서 주님께서는 "너는 개 같은 존재이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에 !!

막달라 마리아가 그 값비싼 향수를 예수님의 발에 뿌렸는데, 그것이 성경에 분명히 나오지만, 우리는 일단 나오지 않는다고 치고, 만약에 어떤 사람이 와서 그런 짓을 하게 되면 뭐라고 하겠는가? 당연히 우리는 그런 인간을 보고 미쳤다고 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만약에 시집을 가지 위해서 그것을 분비했다고 하면, 그것을 돈으로 바꾸면 시집을 두 번이나 갈 수 있는데 말이다. 그야말로 금순이처럼 재봉틀을 밟아가면서, 잔업까지 하면서 모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남들에게도 자랑할만한(?) 과거의 역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그것을 주님 앞에서 다 쏟아 부어버리면서 우느냐는 것이다. 자기 머리를 풀어서 주님의 발을 씻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 그 흔한 파마조차도 하지 않았지 싶은데 말이다.

그것을 보고 그 잘난 바리새인들이,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그것을 나이테처럼 휘휘 감고 있는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아이쿠, 저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참 좋은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가룟 유다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즉 "저 비싼 것을 팔아서 이웃을 도와주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겠다" 라고 말이다.

◈ 예수님 앞에서는 '단독자'로서 !!

하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단독자' 인데, 주님과 '나' 사이는 말이다. 왜냐하면, 아담과 우리 사이가 바로 그런 사이이기 때문에 말이다. 아담이 다 버려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졸지에 원하지도 않는, 쌍꺼풀도 없고 말이다(ㅋㅋ). 그것은 우리가 원한 조건이 전혀 아닌데, 아담의 DNA가 유전이 되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와 똑같이 이것은 어쩔 수가 없는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데, 그런데 그 운명을 바꿀 분이 나타났으니, 그분이 바로 아담과 같은 분, 즉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그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불공평하게 구원을 받았으니, 그러니 사실 주님께 무엇을 드린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무엇을 드린다고 해고 과분한 것이 축소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드리는 것조차도 감사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과분함이 그래도 5초 정도는 유지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3초를 가다가 그만 멈추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분함을 받은 자기 자신을 우상시하지 말라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사랑과 미움 사이에 하나님의 질투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질투가 곧 사랑이다.

(신 5: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 질투하시는 하나님 !!

여기에 보면, "사랑과 미움 사이에 질투가 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사랑과 미움을 유발시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집착적인 사랑이란 것인데, 즉 하나님의 자기 택한 백성을 향한 집요한 사랑이, 즉 그러한 하나님의 질투하심이 사랑과 미움을 늘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자기 이스라엘 백성을 질투하듯이 사랑하시는가? 그 이유가 바로 창세 전의 계획 때문에 그러한데,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맺은 언약은 결코 차질이 있으면 안 되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에서가 구원을 받고 야곱이 지옥에 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그래서 야곱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은 질투하는 사랑인데, 즉 야곱이 예뻐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창세 이전에 있었던 아버지와의 약속으로 인한 사랑으로 인해서 야곱을 살리기 때문에, 야곱 안에 그 사랑을 집어넣고서는 집요하게 그 사랑을 주시하신다는 것이다.

◈ 죽음을 이기신 분을 만난 과분함 !!

어제 낮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 안에 무슨 요소가 들어있는가? 우리 안에 죽어도 다시 사는 요소를 집어넣고는, 주께서는 그것을 관찰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 몸의 껍질은 다 벗겨져도, 우리 몸은 죽음에 절여있어도, 그런 죽음에도 기어 나오는, 그것은 자살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든 우리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준 죽음인데, 그런 죽음 안에서도 기어 나왔던 가족이 바로 노아가족이라는 것이다.

제가 설교나 강의를 하면서 엠마오를 자꾸만 다메섹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어제도 그렇게 설교했다고 하는데, 물론 설교녹취는 제가 이미 다 고쳐놓았는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다메섹이 아닌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사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 그들이 알았던 예수는 어떤 예수였는가? "나는 죽어도 다시 산다" 라고, 그렇게 말로만 했던 예수님인데, 결국 죽고 나니 그들은 뭐라고 생각했는가? "예수님도 말뿐이었구나" 라고 했는데, 그렇게만 알았던 예수님께서 정말 말씀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바로 그분을 만났으니 그게 그들에게는 얼마나 과분하냐는 것이다.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아도 되고 그냥 스쳐지나가도 되는데, 즉 우리 가게에 찾아오지 않고 옆 가게를 가도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얼마나 불공평하게도 옆 가게들을 다 박살을 내놓고, 즉 애굽 가게들은 모두 조져놓고, 이쪽 이스라엘 가게들은 어떻게 하시는가?

이쪽에 있는 가게들은 모두 다 피를 바르라고 해서 구원시킨 그 불공평한 처사,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과분함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은혜를 사건과 사건 속에서 유발시키면서, 우리가 그런 주님에 은혜에 감사하도록 질투하듯이 하신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질투가 전쟁을 유발시켜 !!

앞서서 이 질투라는 것은 미움과 사랑을 유발시킨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것은 자기 백성에게 해당되는 경우이고, 그렇다고 하면 그런 질투가 외부에서는 무엇을 유발시키는가? 그것이 바로 전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질투가 전쟁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 몸이 이렇게 있는데, 사단의 경우에는 베드로의 몸을 지옥으로 데리고 가려고 잡아당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좋아하는 것들을, 즉 아름다운 자기 껍데기, 또 자기가 잘난 맛으로 사는 자기 의, 그러한 것들은 베드로가 좋아하는 것들인데, 물론 아담도 좋아했었고 말이다. 베드로가 아담의 자식인데, 그러니 아담이 탐스럽고 신이 되고 싶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베드로나 우리도 역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단이 베드로를 점령해서 잡아당기려고 할 때, 주님께서는 질투하셔서 "베드로는 내 꺼야" 라고 하시면서 나서서, 그렇게 기도하셔서 사단에게 끌려가지 않도록 잡아당기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 몸을 두고 서로 자기 자식이라고 하면서 밀고 당기고 하는데, 바로 그런 와중이 곧 전쟁이라는 말이다.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계속해서 교재 219페이지를 살펴보자.

** 이런 강렬한 질투의 감정이 없으면 사이비 사랑이다. 이런 강렬한 하나님의 질투의 파장이 세상을 '질투의 전쟁터'로 몰아넣는다.

◈ 질투의 전쟁터 !!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질투의 파장이 세상을 '질투의 전쟁터'로 몰아넣는다" 라고 하는데,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어떤 여분의 것이 자기에게 과분하게 오게 되면, "이것이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 라고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지 않는 모습만 해도 그 사람은 이미 은혜 안에 푹 잠겨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이것이 나에게 이익인가? 아니면 나에게 손해인가?" 라고 하면서 따진다고 하면, 그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퇴색되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가 더욱 더 뚜렷하고 크게 보이기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전쟁터가 아니고 누구의 전쟁터란 말인가? 그만 자기 생존을 위한 전쟁터로 돌변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어떻게 하면 나에게 더 이익이 되고,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지장이 없겠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나님의 지독한 '자기 사람 사랑하기'는 세상으로 하여금 지독한 질투심을 유발시킨다.

◈ 하나님의 질투에 대한 마귀의 반응 !!

그렇다면 여기에,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독하게 사랑하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시기해서 마귀 쪽에서 무슨 반응을 나타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귀 쪽에서 반응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마귀가 어떤 식으로 하는고 하니, 마귀가 인간을 위해서, 즉 "마귀는 인간 편에 섰다" 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에 대해서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공평(公平)과 무사(無私)인데, 여기서 '무사' 라는 것은 '무사합니다' 라는 것이 아니고(ㅋㅋ), "사사로운 것이 없다" 라는 의미인데, 그런 공평과 무사, 그리고 합리성과 이성, 즉 윤리와 도덕이란 말이다. 즉 착한 일을 해야 구원을 받고, 복도 착한 일을 해야 받고, 나쁜 일을 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것을 가지고 악마 쪽에서 하나님의 질투에 대해서 공격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저 인간은 절대로 구원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강도를 보세요. 창녀를 보세요. 기생 라합을 보세요. 현미경으로 그런 인간의 한 평생을 분석해보세요. 3살 때, 7살 때, 20살 때, 또한 50살 때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보세요. 그리고 저 사람이 1926년 5월 27일 오후 7시 47분에 이불 밑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주께서 한번 보세요. 그런데도 저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마귀는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구원받은 자기 자신도 하게 되는데, 왜 그런가? 아담에 속했으니 그렇다는 말이다. 방금 마귀가 말한 그런 식으로 우리가 길들여져 있으니 말이다. 즉 "내가 이런 놈인데 구원을 받다니, 도저히 믿지를 못하겠다" 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평소에도 불쑥불쑥 터져 나오도록 마귀가 조종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 너는 아름다운 사람이야.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워지려고 하면 아름다운 행동을 해야만 하는데, 너는 아름답지 못한 행동을 했으니 구원받지 못해" 라는 이야기를 마귀가 속삭이면서 하고, 우리도 우리 자신 내부에서 한다는 것이다. "그래, 맞아. 내가 이런 짓을 하고서도 복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로 염치도 없어" 라고 말이다.

하지만 '염치가 없다' 라는 것은 잘못된 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분과 과분함과 하나님의 질투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데, 그런 하나님의 질투적인 불공평한 사랑으로 구원을 받는데,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정죄함이 없다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우리 생각은 무엇으로 자꾸 돌아가는가?

공평과 무사, 그리고 합리성과 이성과 양심과 같은, 즉 우리가 생각하는 진선미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측정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아담의 안목으로 다시 우리 자신을 측정하려고 하니, 그 측정의 방법이 곧 타인과의 대화인데, 그렇게 해서 남들과 경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공평무사한 모델은?

(어서 오세요) 이것을 다시 이야기해보면, 합리성, 이성, 공평과 무사, 이러한 것을 철학에서는 '덕(德)' 이라고 하는데, 혹은 진선미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것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비교하게 되면, 그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공평하고 무사한 모델을 어디서 찾겠는가? 그런 비교모델을 말이다.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로 합리적이고, 또한 어느 정도 착한지, 그것을 아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까, 스스로 "나는 착하다" 라고 하면 그것은 미친 짓인데, 그것은 자기에게 최면을 거는 것이니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어디서 찾겠는가? 자기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에게서 찾는다는 것이다. 이 인간이라는 몸이 과연 자기 반경을 몇 키로나 벗어나겠는가? 물론 요즘은 인터넷으로 인해서 많이 넓어졌다고 하는데,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서 만나는 것이, 실제로 그 사람을 만나서 보게 되는 인간됨됨이와는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참 존경스럽다고 하는데" 라고 하면, "그 양반에 대해서 한번 알아봤어?"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 목사님은 참 훌륭해" 라고 하면, "그 교회의 교인이 한번 되어봤어? 정말 그러한지" 라고 나오고 말이다. "이근호 목사님은 참 훌륭해" 라고 하니까, 이근호 목사의 최측근이 뭐라고 하는가? "그 양반하고 돈 거래를 해봤어? 어떻게 나오는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 인간세상에서 유행된 예수를 라이벌로 해서 !!

사실 그런 것은 부모도 모르는데, 아무튼 문제는 "내가 어느 정도 착한가?" 라고 하는 모델을 어디서 찾는고 하니, 주변에서 찾는데, 그런데 그 주변에다 예수를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는 인간세상에서 유행된 예수인데, 즉 인간들이 재해석한 예수를 말이다. 그런 예수를 집어넣어서 비교를 하는데, 일종의 모델이니 라이벌 의식을 가지는데, 그래서 따라 붙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무엇이 빠지게 되는가? 여분과 과분함이 빠지게 되는데, 그래서 따라 붙으려고 하는 악착스러움만 남아있지, "개 같은 나에게 불공평하게 선택해서 구원하셨구나" 라고 하는 여분과 감사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내가 어느 정도 따라 붙으면 나에게 이익이 되고, 또 손해가 되는가?" 라고 하는, 그런 자존심과 관련된 환경이 조성되어있다는 것이다.

◈ 악마가 만든 환경 속에서 !!

그러니 이것이 바로 인간을 매개체로 해서 악마가 이러한 환경을 만들어놓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시달리게 만들고, 걱정하게 만들고, 염려하게 만들고, 미워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람이 시골에서 살 때는 "이 정도면 되었다" 라고 싶지만, 하지만 도시에 가면 예상 밖으로 뛰어난 비교대상을 만나게 되는데, 그러면 졸지에 순간적으로 자기 자신의 초라함을 느끼면서 격차가 벌어짐을 느낀다는 말이다. 그러면 목표점이 새롭게 설정되면서, 그것을 따라잡기 위해서 헥헥거리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동네에서는 자기가 착하다고 우기고, 경건하다고 우기고, 자기 부인을 하지만, 하지만 그런 수준을 가지고 어느 시장에 내어놓겠느냐는 것이다. 티벳시장에 내어놓겠는가? 프랑스에 있는 수도원에 가면 처음부터 새로 다시 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40일 금식기도를 가지고도 폼을 잡지만, 티벳에 가면 100일 금식기도를 한다는 말이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보살폈다고 해서, 그 정도를 가지고도 우리 동네에서는 착한 권사라는 소리를 듣지만, 하지만 다른 곳에 가보라는 것이다. 그 정도는 어디 가져다가 붙이지도 못한다는 말이다. 그런 것도 성화의 열매라고 하는데, 아무튼 그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얼마나 살아야 수준이 높은 자와 만나겠는가?

◈ 마귀는, 여분의 것을 계속해서 삭제시키면서 !!

그러니 마귀로 하여금 여분의 것을 삭제시키는 방법으로, 즉 "개 같은 나에게 웬 횡재입니까?" 라고 하는, 그런 기쁨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너는 너 자신을 믿어야 되지, 너 말고 다른 놈은 믿을 수가 없어" 라고, 계속해서 그것을 세뇌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경쟁을 시키고 또 비교를 하게 하는데, 그것에 대한 후유증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이 이렇게 있으면,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나이테처럼, 혹은 양파껍질과 같이 계속해서 누적을 시키게 되는데, 그러면 깊은 중력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고들면 반발하고, 또 파고들면 반발하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인가?" 라는 식으로, 그렇게 반발력을 느낀다는 말이다. 그러니 모든 것에 다 자기에게 압력으로 다가오는데, 바로 그것이 조작되고 비언약적인, 즉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성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아벨을 질투한 가인이 그러하고, 요셉을 질투한 형들의 태도도 그러하다. 요셉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고, 본인의 운명은 그 계시대로 움직인다.

◈ 질투는, 숨어있는 하나님의 적을 !!

다시금 이야기를 하겠는데, 질투는 무엇을 유발시키는가? 숨어있는 하나님의 적을 불러일으키는데, 즉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너무나도 심하고 불공평하게 사랑을 해버리니, 저쪽에 있는 하나님의 원수들이 뭐라고 하는가?

그들이 말하기를, "하나님, 그것은 너무나도 심하지 않습니까?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것은 해도해도 너무 심한 사랑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일방적인 질투로 인해서, 합리적이고도 이성적인 저쪽이 반발하게 하는 계기로, 그렇게 우리를 하나님께서 활용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아벨의 제사가 보여주는데, 그 아벨이 드린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기 이전까지는 가인도 참을 만했는데, 그런데 졸지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고 자기 제사는 받지 않으니, 가인은 그야말로 분통이 터져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아벨이 제사를 드렸다" 라고 하는 사건을 상쇄시키는데, 즉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면 무엇으로 돌아가는가? 누구만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남게 되는가? "나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라는 것이 남게 되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자기가 행한 것만 남을 때까지 그 인간의 분통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착한 일을 했다고 하면, 물론 겉으로는 '축하합니다' 라고 말은 하지만, 하지만 심보는 뒤틀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대학에 갔습니다" 라고 하면, "정말 공부를 잘했구먼" 라고 말은 그렇게 하는데, 하지만 집에 가면 자기 자식놈은 이제 죽었다는 것이다(ㅋㅋ). "임마, 너는 뭐하노? 다른 집 자식들은 서울대학에 간다고 하는데, 너는 컴퓨터 앞에서 지금 무슨 짓이고?" 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자기 자식에게 심술을 부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벨의 경우에,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사건을 일으키는데, 즉 일방적으로 한쪽을 편애함으로 말미암아서 저쪽으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과도한(?) 반발을 하도록 유도를 하는데, 그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죽이도록 유도하셨다는 것이다.

◈ 요셉을 질투한 형들 !!

그 다음에 여기 교재에 보면, "요셉을 질투한 형들의 태도도 그러하다" 라고 하는데, 형들이 요셉을 보고 뭐라고 했는가? 요셉을 꿈을 꾸니, 형들이 "요셉아, 축하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구나" 라고  말을 그렇게 하면서 자기들 마음에 담아두면 되는데, 누가 그렇게 했는가? 요셉의 아버지인데, 정말로 그렇게 했는지는 만나서 물어봐야 하겠지만(?), 아무튼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요셉의 아버지는 "저 아이에게 무슨 변화가 있을 거야" 라고 했는데, 그런데 형들은 출발점이 어디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그래서 요셉은 '나'와 비교해야 되는 모델로서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나는 꿈이 없는데, 그런데 건방지게도 저 요셉은 왜 꿈을 꾸었는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어떻게 되는가? 전혀 공평하지를 않고,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불공평하니, 자기 입장에서는 그렇게 불공평한 것은 무조건 공격대상이고, 또 저주를 해도 자기에게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자기에게는 공평해야하니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요셉 주변을 무엇으로 바꾸는고 하니, 장차 예수님을 오해하게 되는 부류로, 그런 자들과 같은 자들로 배치를 시키고 배정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언약이 출몰하는 '언약출몰현상' 인데, 즉 언약이 만들어내는 파장이라는 말이다. 일종의 물결이고 여파인데, 즉 언약이 사건화를 시키게 되면, 그 언약에 대해서 불만을 터트릴 수밖에 없는 파장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들에게 밉상을 받는 쪽으로, 그렇게 주님의 사랑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을 얻고자 하는 자는 먼저 누구부터 미워해야만 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얻고자 하는 먼저 자기 자신이 스스로 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 같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감히 신의 사랑을 운운하다니, 그리고 신의 구원을, 천국을 넘보다니, 이런 못된 인간이 다 있는가? 지옥에 가도 너무나 당연한 인간이 무슨 천국을 간다고 하면서 넙죽거리면서 천국에 가는 방법에 대해서 공부를 한단 말인가? 정말 너무했어" 라고 하면서,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미워할 수 있어야,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여파가 퍼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처럼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 인간들 속에 들어있는 '자신을 위한 사랑'의 본질을 드러내게 한다. 그런데 경쟁적으로 요셉이 받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형제들은 자신들의 죄를 알게 된다.

(창 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 우리가 예수님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

여기에 보면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라고 하는데, 이런 구절을 액자로 해서 걸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아우의 자리에 예수님을 집어넣으면 되는데,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때부터 우리가 바로 예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폭로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바로 이렇게 되는데, 물론 우리들이 원하는 것은 '축복, 축복' 이지만,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축복이 아니라, "너는 축복도 받을 입장도 되지를 못해" 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러니 축복을 기대한 우리로 하여금, 오히려 희생을 당한 사건으로 나타나심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으로 유발시키는 사건이야말로, 그것이 곧 직접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개입하신 사건이라는 말이다. 

◈ 신은, 인간의 자기 투시 !!

그 외에 다른 사건은 없는데, 다른 사건으로 하나님은 나타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님은 우리가 보는 라이벌 관계인데, 즉 우리가 기대한 바대로 조작된 신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일종의 자기 투시(透視)인데, 즉 "내가 나를 하나님에게 비추어서 다시 되받아오는, 그런 내 모습의 확장을 신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그것을 인수 인계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두고서 '주문한 신' 이라고 하는데, 즉 "신이시여, 이렇게 이렇게 해주시면 저는 얼마든지 기뻐할 용의가 모두 다 되어있습니다" 라고, 그렇게 자기가 스스로 주문을 해놓고는, 그렇게 주문된 것을 두고서 자기가 신이라고 하면서 섬긴다는 말이다. 

그러한 하나님은 축복을 주는 하나님인데, 하지만 반면에 사랑을 받기로 작정되었다고 하는 하나님을 인하여, 오히려 "너는 그럴 가치도 없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바로 악마의 유혹이고 범죄인 것을 들추어내는 사건이 임하게 될 때, 그런 사건이 임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의 존재가 다 과분한 것이고, 여분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이 바로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받은 자들인데, 그러한 자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나에게 무엇이 이익이지? 또 무엇이 손해지?" 라고 하면서, 그런 것을 따질 가치도 없고 필요조차도 없다고 하는, 그러한 자유함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일을 벌려놓으셨는데,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지, 그것을 찾아내는 장소가 오직 십자가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하는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오직 십자가의 흔적만을 가지고 이 세상에 죽은 자로 나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05,12 오후 11시 50분에 마침.

                             지금 주어진 이 모든 것이 어찌 과분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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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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