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68강 피조물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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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20402피p213피조물의자리

피68강 피조물의 자리

[12 대구강의 7] - [피 68] - 피조물의 자리

                                                   12,04,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예수님의 나라는 '마지막'을 주위환경으로 !!

오늘은 교재 213페이지부터 시작하겠는데, 일단 한번 살펴보자.

**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나라'만 '나라' 라고 인정했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격분한다. "네가 뭔데?" 착한 인간들은 격분한다. 물론 완벽한 신이 보기에 다소 어설프지만 그동안 인간들이 정성을 쏟아온 이 세상 나라와 교회를 그냥 개선하고 보수해서 천국화를 시켜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의 자기 나라'만이 천국이란다. 예수와 함께 죽어야 들어올 수 있단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예수님의 이 고집에 인간들마다 반발심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정말 이제는 헤어지고 싶다. 그리고 돌아서서 밀쳐 죽이고 싶다. 하지만 예수님 말씀이 천지개벽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평소에 사람들은 대자연의 변덕에 공포를 느끼며 살아왔지만 실은 그것보다 겁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예언의 말씀이다. 만약에 성도가 예수님 말씀을 접했다면 앞으로 이 우주 안에서 아무리 큰 변화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리 놀라거나 두려워할 만한 일이 못 된다는 뜻이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 나오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환경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마지막 날' 인데, 우리가 그 '마지막' 이라는 환경을 이 시간에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마지막' 이란 것을 이야기할 때, 흔히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것은 '마지막' 이라고 하면, "마지막, 그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고 여기는데,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유겠지만,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전혀 그러한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는가?

무슨 말인고 하니, "천지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지?" 라고 했을 때, 여기서 우리 인간들은 이 창조라는 말을 하나님께는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창조자가 있는데, 그 창조자에게 창조물인 우리 인간이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지?" 라고 물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게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 인간이 시계를 만들었는데, 그런데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시계가 인간에게 한다는 말이, "나는 당신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겠는데, 그러면 당신은 누가 만들었는가?" 라고 한다면, 그것이 도대체 말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계는 그러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말이다.

◈ 창조물은, 창조자에게 되물을 수 있는 권리가 없어 !!

이것을 정리해보면, '창조'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조건이 들어있는고 하니, 창조물은 창조자에 대해서 창조자의 그 원천을 규명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즉 창조물은 창조가 될 때 조건이 있는데, 그것이 곧 "당신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라고, 그렇게 창조자에게 대해서 되물을 수 있는 권리가 없는 채로 창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창조물은 무한한 자격이나 권리를 가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선악과의 경우에 있어서 "이 선악과를 왜 심어놓았습니까?" 라고, 그 선악과를 따먹을 인간이 질문자체를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자격이 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악마는 그만 인간에게 접근해서 창조물의 범주를 벗어나라고 설득을 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악마가 인간을 유혹했다는 것이다.

◈ 정녕 죽으리라 !!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선악과를 가운데 두고서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즉 "정녕 죽으리라" 라는 것과, "결단코 죽지 아니하리라" 라는 것이 말이다. 여기서 "결단코 죽지 아니하리라" 라는 것은 악마의 주장인데, 그리고 "정녕 죽으리라" 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러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맞는가?

물론 사탄의 말이 맞을 리가 없는데, 당연히 하나님이 말씀이 맞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중에서 우리 마음에 드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렇게 "어느 것이 마음에 드는가?" 라고 하는 질문은, "어느 것이 진리인가?" 라는 질문과는 반대가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는 "결단코 죽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는 것과, "정녕 죽으리라" 라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으냐는 말이다.

이것은 실험을 해보면 되는데, 여기에 난로가 있어서 아이를 보고 "너는 난로를 만지면 죽는다" 라고 했을 때,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과 아예 난로가 없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아이에게 편하겠냐는 것이다. '죽음' 이라는 부정적인 것이 아예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이, 그것이 우리에게는 훨씬 더 마음 편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인간은, 진리를 알아도 좋아하지는 않아 !!
 
그러니 우리가 "이것이 진리이다" 라고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좋아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진리인 줄로 알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구세주인 줄 알지만, 그 예수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즉 예수님의 자유보다는 자기의 자유를, 예수님의 선택보다는 자기의 선택을 선호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 모든 출발점을 창조물 자체에서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피조물은 구원을 받아야할 대상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창조물에서 출발하게 되면 반드시 오류가 발생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인간의 질문 - '마지막,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방금 강의를 시작할 때 '마지막'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인간은 "마지막,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라고 되물을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부터는 그것을 한번 설명해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라는 인간의 질문에 대해서 말이다.

◈ 피해자가, 가해자인 강도를 직접 처벌할 수 있는가?

또 한가지의 예를 들어보자면,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났다고 한다면, 즉 이렇게 강도가 있고, 또한 그 강도에게 얻어맞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강도를 만난 사람은 '피해자' 라고 하고, 또한 그런 강도짓을 한 사람을 두고서 '가해자'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면 그렇게 되었을 때, "과연 이 피해자가 가해자인 강도를 처벌할 수 있는가? 없는가?" 라는 것이 바로 오늘의 질문인데, 누가 여기에 대해서 한번 답변을 해보라는 것이다. 피해를 입힌 가해자를 그 피해자가 과연 직접 처벌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오늘 이 집사님께서 오래 만에 강의에 참석셨는데, 집사님, 어떻습니까? 과연 처벌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피해자는 가해자를 직접 처벌할 수 없는데, 왜 그런고 하니, 정답은 국가에서 처벌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법체계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보상은 해줄 수가 있지만, 처벌은 국가가 해야된다는 것이 현재 인간사회에서는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이런 것이 왜 어려운고 하니까, 자기가 상대방을 때릴 때, 자기는 상대방에게 백 만원어치 정도의 손해를 끼쳤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정작 피해를 당한 사람은 천 만원어치를 입었다고 여기고, 거기에 대한 처벌을 원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가 당한 것보다도 열 배가 더 강한 복수가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 이에는 이, 눈에는 눈 !!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임계점을, 즉 한계점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상대방에 의해서 자기의 이가 부러졌다고 한다면, 거기에 대해서 상대방의 이를 부러뜨리고, 그 보너스로 두 눈을 마구 후벼파고,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당했다고 해서, 상대방의 자식까지도 마구 조질 수는 없다는 말이다.

(레 24:20)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 니까짓 것, 그만 죽어라 !!

성경에서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이게 어려운 문제이니 정답을 미리 이야기하면, 모든 인간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모두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기 차를 들이박아서 가벼운 접촉사고를 내도 자기 마음속에 작동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접촉사고를 내었으니 10만을 받고 떨어지자" 라는 것이 아니라, "너를 죽여버리겠다" 라는 것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렇게 접촉사고를 내었던, 종이를 찢었던, 아니면 길을 가다가 가볍게 어깨를 부딪쳤던 간에, 아무튼 근원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는 그렇게 살짝 부딪쳤지만, 거기에 대한 반응은 상대방을 죽여버리겠다는 것이다. 즉 목숨자체를 강탈한다는 말이다.

◈ 신으로 군림하고 싶은 인간 !!

그러면 그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누구 손에 달려있는가? 창조주의 손에 달려있는데, 그런데 동일한 피조물이 창조주의 권위를 넘어서서,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어요?" 라고 질문하고 싶다는 것은, 창조물이 이렇게 창조가 되고 난 다음에는 창조자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새로운 신적인 요소로서 군림하고 싶어하는 때문에, 그렇게 신이 둘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조물인 인간의 평소습관은 무엇인고 하니까, "나만 신이 되어야지, 다른 사람은 신이 되면 안 돼" 라는 것인데, 그것을 평소에 항상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자기 어깨를 툭 치게 되니, 그 사람을 그만 죽여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상대방을 죽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의 하나님 됨을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던 건드린 것인데, 그렇게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은 그 일부를 건드려도, 그렇게 건드린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하더라도, 즉 자기가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건드림을 당했다는 것에 대한 아픔을, 그것을 그 사람이 어떤 식으로 보상을 해도 채워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이게, 어디서 나를 건드리는가?

예를 들어서, 이 인간의 피부전체가 하나의 신이라고 하면, 손톱 발톱 하나 하나도 모두 다 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손톱을 누가 밟았다고 하면, 그것은 "내가 손톱을 깎아서 버렸는데, 그것을 다른 사람이 모르고 밟았다" 라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늘날같이 국가에서 하는 합리적인 것이고, 그냥 그대로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즉 "이게, 어디서 나의 나 됨을 왜 건드리는가?" 라고, 즉 자기의 하나님 됨을 왜 건드리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기의 그림자를 밟았다고 하면, 그 사람도 역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그림자가 자기의 하나님 됨을 증명하는 그림자이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자기의 하나님 됨을 증명하는 것인데, 그래서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정주의 이 '국화 옆에서' 라는 시(詩)가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맞는 말인데, 왜냐하면 불교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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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옆에서]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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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것과 'The end of the world' 라는 팝송가사처럼, 즉 "나는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세상은 왜 이렇게 투표한다고 난리인가? 나는 세상에서 무슨 의미인가?" 라는, 즉 자기는 이렇게 아파하고 있는데 왜 세상 사람들은 웃고 있느냐는 것이다. 파도는 치고 햇빛은 찬란히 내리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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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d of the world]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왜 태양은 계속해서 빛나는 걸까요?
Why does the sea rush to shore             왜 저 파도는 계속 뭍으로 밀려오나요?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그들은 이 세상이 끝이라는 걸 모르나요?
Cause you don't love me anymore            당신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기에.
Why do the birds go on singing               왜 저 새들은 계속해서 노래하나요?
Why do the stars glow above                왜 별들은 하늘에서 계속 반짝이나요?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그들은 이 세상이 끝났다는 걸 모르나요?
It ended when I lost your love              내가 당신을 잃었을 때 이 세상이 끝났다는 것을.
I wake up in the morning and I wonder      나는 아침에 일어나 놀랐습니다.
Why everything's the same as it was         이 모든 것이 예전과 같다는 것을
I can't understand                          이해할 수가 없어요.
No I can't understand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
How life goes on the way it does            어떻게 인생이 예전대로 계속되는지를.
Why does my heart go on beating            왜 내 가슴은 계속해서 뛰나요?
Why do these eyes of mine cry              왜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흐르나요?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그들은 이 세상이 끝이라는 걸 모르나요?
It ended when you said good-bye            당신이 '안녕'이라고 말했을 때 세상에 끝났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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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가 양보하고 타협하지만, 그러나 !!

인간은 서로 타협과 협상을, 그것을 '사회 계약설' 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서로가 양보하고 타협해서 국가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피해자가 나서가 되면 감정적으로 흐르고 마는데, 즉 오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제3자에게 권한을 위임하게 되는데, 그래서 법률 전문가가 그것을 형법으로 만들어서 벌금을 정해서 보상을 하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데, 하지만 그런 보상을 받는다고 해서, 사람이 자기가 과거에 강도를 만나기 이전의 상태로 원상복귀가 되는가? 모든 체면과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일반 보상금은 받아놓고도 "언젠가 걸리기만 해봐라. 그때는 배로 갚아주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7배나 갚아준다고 하는 것이 창세기 4장에 나오는데, 즉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로다" 라고 말이다. 왜 7배이고 77배인가? 그것은 본인도 모르는데, 이미 인간 세상은 가인의 후손들로서, 그런 후손들은 이미 자기가 자기를 컨트롤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창 4: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물론 그렇게 컨트롤하기 위해서 국가의 법을 지키기는 하지만, 막상 로빈슨 크루소우처럼 무인도에 갔다고 했을 때, 바닷가에서 헤엄을 치다가 게에게 발톱을 약간 물렸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 게를 잡아서 삶아먹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문명사회에 나와서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게의 주인이 와서는 보상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냥 3천원만 주고 연고를 사서 바르면 될 것을, 만약에 그게 영덕대게라고 하면 무려 3만원이나 내야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도매가격으로 해서 말이다(ㅋㅋ).

◈ 인간은, 여분의 영적인 존재 !!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자체는, 인간을 아무리 연구하고 분석을 해도 잉여(剩餘), 즉 뭔가 여분의 영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인간인데, 그래서 국가가 국민들을 법적으로 어떻게 해도, 항상 기본적으로 끓어오르는 영적인 것에 대해서 국가가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보통은 조건을 맞추어서 남녀가 결혼을 하는데, 그런데 얼토당토하지 않게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판사가 된 여자가 소경인 남자를 남편으로 맞아들인다면 누가 이해를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데,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여자가 있어서 왜 그렇게 결혼하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하겠는가? "그 남자를 사랑하니까" 라고 하는데, 물론 드물겠지만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경우에, 비록 원수가문이지만 서로가 사랑하는 사이인데, 그 장르가 곧 문화장르인데 말이다. 인간의 문화라는 것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데,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끓어오르는 영적인 기운을 다 포섭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문화, 문명세계 속에 예수님이 오셔서 무엇을 했는고 하니, '마지막'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을 언급하게 되면, 결국 이 마지막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 "내가 원래 자리로 되돌려 보내겠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창조했던 원래의 자리로 말이다.

그러면 원래 창조했던 그 자리는 무슨 자리인가? 지금까지 강의한 것처럼, 그 자리는 물을 수가 없는 자리인데, 즉 "하나님, 선악과를 왜 심었어요? 심지 않았으면 따먹지 않았을 것이고, 이런 고생을 하지 않을 것인데. 괜히 심어서 이런 일이 발생하게 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모든 원천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고 싶어함으로 말미암아서, 이 세상이 태양이 둘이 아니듯이, 자기만이 하나님이고 자기만이 태양이란 점을 유지하려고 하는 그 심보와, 진짜 유일한 주님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엮이는 그 자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연결시키는 자리로 가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한 점에서 성도는 예수님의 피조물이 되고,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는 것이다.

◈ 존재가 아닌, 기능의 자리 !!

그러니 복음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애를 먹이고 부정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원래 자기 자리로 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하이데거는 '존재의 자리' 라고 했는데, 하지만 그것은 그가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거기서 존재를 끄집어내었는데, 그것은 존재가 아닌 기능의 자리라는 말이다. 우리 피조물의 자리가 말이다.

피조물의 자리는 "내가 있다" 라고 하면서 버티는 자리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일인가? 주를 위하여, 주를 말미암아,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능의 자리이지, "내가 있다" 라고 하는 존재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내가 있다" 라고 하면 말썽을 일으키는데, 선악과와를 따먹어서 서로 경쟁이 되니 말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데,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이 우리 좋아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렸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먼 옛날 이야기를 지금의 이야기로, 그렇게 같이 엮여져 있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 묵시는 모든 것이 동시성이다 !!

어제 낮에 설교를 하면서 스치고 지나간 것이 있는데, "묵시는 모든 것이 동시성이다" 라고 말이다. 스치고 지나간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이야기하면 설교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말이다. 그래서 설명은 하지 않고 지나갔는데, 아무튼 "묵시는 모든 것이 동시성이다" 라고 하면, 그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따먹었던 사건이 마지막 묵시의 세계에 가게 되면 지금의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즉 같이 일어난 사건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 대구와 울산은 상당한 거리가 있는데, 그런데 저 우주 멀리에서 보게 되면, 같은 지구에서 하나로 지점으로 표시할 수 있는 가까운 곳이란 말이다. 즉 공간도 멀리 위에서 바라보게 되면 점점 더 가까운 하나의 지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의 경우도, 묵시의 세계에서 보면 시간도 역시 그러한데, 즉 순서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모세가 먼저 태어나고, 그 다음에는 엘리야가 태어나고 말이다. 누가 나이를 몇 살을 더 먹고 덜 먹고 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선악과 사건이 언제 발생했는지, 지금부터 몇 천년 전인지 하는 것 등이 말이다.

그리고 지구의 나이가 몇 살인지, 진화론자와 창조론자가 그런 것을 가지고 싸우는데, 창조론자는 6천년이라고 하고, 진화론자는 47억 년이라고 하는데, 우주나이는 150억 년이라고 보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시생대, 고생대, 중생대, 그렇게 나간다는 것이다. 반면에 창조론자는 6천년에서 길어야 일 만년이라고 하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B.C. 4500년경에 노아의 홍수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면, 화석이나 미국의 그랜드캐년에서 물이 쓸려나간 흔적과 같은 것을 가지고, 그런데 그러한 동일한 증거를 가지고 4500년을 이야기할 수 있고, 또한 2000년을 주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동일과정설과 급변 !!

'동일과정설' 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진화론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즉 현재 일어난 사건을 같은 시간대로 해서 과거나 미래에서 동일한 시간을 요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진화론자들의 철썩같은 신앙인데, 그러니 그들이 믿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현재 일어난 것과 똑같은 시간대를 요구하는 것이 과거에 있었으니, 시간이 그만큼 죽죽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창조과학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급변'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갑자기 일어난 말이다. 화석도 갑자기 일어난 것이고, 또한 지진이나 융기도 갑자기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런 갑자기 일어난 사건은 성경에서 노아홍수밖에 없는데, 그 노아홍수 때 모든 것이 갑자기 변했기 때문에 화석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물고기가 먹이를 막 먹으려고 하는 화석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갑자기 그렇게 화석이 되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물고기가 먹을 것을 다 먹고 편안하게 돌아가시면 되는데 말이다. 창조론자들은 그런 것을 증거로 댄다는 것이다. 

◈ 그런데, 마지막 때가 되면 !!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마지막 때가 되고 나면,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간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어떤 위치에 어떻게 있는지, 또한 어떤 배열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주가 보실 때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지는가?" 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것이 아니고 "우리 쪽에서 창조주를 어떻게 이해해서, 그 이해한 것을 근거로 해서 구원받는가?" 라고 하는, 그러한 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래서 이 두 가지의 문제, 즉 우리가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시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그래서 우리와 같은 피조물의 자리에서는 "창조주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선악과는 왜 만들었습니까? 마지막 때라면, 마지막 다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라고, 그렇게 질문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모든 일은 오직 복음에 필요한 조치 !!

그런 자리가 피조물의 자리라고 하면, 오늘날 묵시의 세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오직 복음에 필요한 조치이다" 라고 말이다. 우리가 갑자기 팔이 부러져서 깁스를 한다든지,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진다든지, 아이가 시험에서 떨어졌다든지, 자기 머리에 편두통이 생긴다든지, 또한 갑자기 암에 걸려서 죽는다든지, 그런 모든 일들이 복음에 필요한 조치들이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창조주에게 필요한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그것이 나에게 왜 필요합니까?" 라고, 우리의 자리는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데, 우리는 그러한 자격도 없고 권리도 없는데, 그런데 그런 질문을 자꾸만 하니, 그 다음부터는 그만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 다시 이야기해보면 !!

다시 이야기를 해보면, 어떤 강도가 와서 우리 집에 피해를 입혔다고 하면, 강도는 우리 집에 백만원의 손해를 입혔다고 여기는데 자기는 천만원의 손해를 입었다고 여기는데, 사실은 그 정도가 아니고 강도가 천만원을 갚아주어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본인도 모르는데, 그것은 본래의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미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 가인의 후예처럼 죄가 지배하는 자리에 있다가 보니까, 그 사람이 "정말 미안합니다. 제가 먹과 살려고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천만원을 받으시고 용서해주세요" 라고 하면, 우리는 그 천만원을 받고 화를 풀고 없는 일로 해주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국가가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국가가 소용이 없는 무인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 천만원을 받고 나서 그 사람을 죽여버리고 마는데,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국가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선이나 악에 대해서 말이다. 그게 로마서 10장(13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롬 13:3)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인간들이 너무 개인적인 감정에, 즉 누구의 가인의 후예이고, 죄의 자식이고 악마의 자식이기 때문에, 자기가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으면 복수를 하고 싶어하는, 그것이 자기 대에서 안 되면 자식을 통해서라도 하고 싶어하는데, 그래서 무협영화를 보면 "아비의 원수를 잊지 마라" 라고 하면서 숨을 거주는 장면들이 종종 나온다는 것이다(ㅋㅋ).

◈ 나찌를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말자 !!

유대인들에게도 거기에 대한 유명한 교훈이 있는데, 즉 "나찌에 대해서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말라" 라고 말이다. 잊어주어야 용서가 되는데 말이다. 그러니 사실 그것은 "언젠가 걸리면 제대로 복수를 하겠다" 라는 의미인데, 그렇게 잊지 않고 지켜보고 있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ㅋㅋ)

우리는 당해보지 않아서 그런 것이 좀 심하다 싶지만, 막상 본인의 일이 되면, 위안부 할머니들처럼 말이다. 그렇게 자기의 청춘을 다 날려버렸다는 것이다. 남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할 꽃다운 나이에 말이다. 그야말로 나훈아처럼 땅을 치면서 "청춘을 돌려다오♪" 라고 절규할 수밖에 없는데, 그 가해자가 바로 일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일본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때 왜 그렇게 당했는가?" 라고 하는데, 힘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 그것으로 그냥 끝나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때는 힘있는 나라가 힘없는 나라를 다 쳤는데,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말이다. 그 당시 중국의 만주사변은 수십만 명이 희생을 당했는데, 그러니 살아남은 것도 고맙게 여기라고 한다는 것이다. 일본놈들이 말이다.

여기 창세기 4장에서 가인에게 해를 가하면 7배로 갚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개인적으로 "나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내가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 일어났다" 라고 인정해버리면, 결국은 "모든 것은 복음을 위해서 일어났다" 라는 것과 철저하게 원수지간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성경말씀의 깊이를 발굴해서 끄집어내게 되면, 전혀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주께서 내 주에게 !!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주께서 내 주에게" 라고 말이다. 즉 한 분의 주어는 감추어져 있고, 다른 한 분은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그렇게 기능적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분이 기능적으로 계시는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너거들은 나대지 말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즉 "너거들이 나대서 너거들 자신을 구원하는 천국은 애시당초에 없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그것은 교회가 만들어내었는데, 즉 자기가 설쳐서 좋은 나라에 가고 하는 것은, 그것은 인간의 문화가 조작하고 만들어낸 것인데, 실제로 우리 인간들이 설쳐서 가는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나라이지 우리나라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교재 213페이지를 보자.

**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의 자기 나라'만이 천국이란다. 예수와 함께 죽어야 들어올 수 있단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 천국은, '예수의 자기 나라' !!

여기에 보면, "예수님은 '예수의 자기 나라'만을 천국이란다" 라고 되어있는데, 바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길게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의 자기 나라' 라는 것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일단 '내가 들어가 보는 나라'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들어가서, 그 속에서 자기가 이 땅에서 고생했다는 것을 보상받고자 하는, 그런 나라로 여긴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니가 무엇인데 보상을 받고자 하는가? 너에게 일어난 일은 모든 것이 복음을 위한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복음에 필요해서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일어난 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해석을 해놓고, 그 다음부터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신에 따지는데, 다른 메시야를 보내달라고 하고 말이다.

◈ 우리의 배신조차도 !!

이렇게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복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하면, 그러면 거기에 무엇도 포함되겠는가? "나는 이제 복음을 거부할래.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십자가도 믿지 않을래" 라고 하는 것도 역시 누구 좋아라고 일어난 일인가? 역시 주님 좋아라고 일어난 것인데, 그래서 주님은 "니가 그럴 줄 알았어. 니가 배신을 때을 줄 알았어"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지옥에 가는 것도 역시 무엇을 위함인가? 역시 복음을 위한 것인데, 그는 복음을 위해서 가야될 길을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야, 니가 할 일을 해야지" 라고 하셨는데, 그게 누구를 위한 것인가? 오직 예수님만이 창조주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모든 창조에는 목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위한 창조였다는 것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목적이 이끄는 삶 ??

창조된 자, 즉 피조물의 사적인 목적은 전혀 허용이 되지 않는데, 그래서 '목적이 이끄는 삶' 이라는 것이 전혀 허용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개인적인 목적과 기대와 소망과 같은 것은, 애시당초 창조 때부터 그런 것을 허용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그만 정신이상자가 되어서 그런 꿈들을 꾸곤 하는데, 하지만 피조물의 본래 자리가, 그런 피조물의 기대와 희망을 긍정적으로 인정해주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좋든 싫든 간에, 믿든 믿지 않든 간에, 무조건 모든 피조물의 자리는, 물론 지옥에 가는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그 모든 일어난 것은 다 오직 복음에 필요하기 때문에, 즉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어나야만 하는 일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보시기에 묵시 안에서 모든 것이 똑같이 동시성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악과 사건이나, 가인에게 일어난 사건이나, 노아홍수 사건이나, 모두가 같은 시간대에 일어난 일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지금 이 시간개념이나 공간개념은 인정받지 못하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입장에서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이제 이해가 됩니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주께서 창조하셨다" 라는 것도 우리가 베껴서 사용할 수 있는 용어도 아니고, 또한 "때가 되매, 이제 종말이다" 라는 것도 역시 우리가 차용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게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 오직 예수님만이 이끌고 가시면서 !!

그러면 그 모든 용어의 진정한 의미는 누가 쥐고 있는가? 예수님만이 혼자 알면서 혼자 실천에 옮기면서 역사를 끌고 지나가는 그 자국들, 그 자국들이 곧 성경말씀이라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인데, 마치 농부가 봄철에 쟁기를 가지고 논을 갈면 그 흔적들이 남듯이, 그처럼 역사라고 하는 주님께서 끌고 가신 흔적이라는 말이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앗수르 산헤립 군대의 185,000명이 하룻밤에 천사가 쳐서 다 죽었을 때, 한달 동안 나누어서 죽은 것도 아니고 말이다. 말이 185,000명이지, 그 젊은 자식들의 부모들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아마 그 중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일주일만에 전쟁에 참전한 자들도 있지 싶은데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다 일어난 일도 누구를 위해서인가? 복음을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 죽어야만 다시 사는 방식 !!

그렇다고 하면 "목사님, 우리의 자리를 어떻게 되찾아갑니까? 복잡하게 말고, 간단하게 설명해주세요" 라고 물으신다면, 저의 대답도 간단한데, 그 자리를 찾는 방법은 예수님이 이미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즉 죽어야만 다시 사는 방식, 그것 외에는 없다는 말이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옛 자리를 죽이고, 그 죽은 자리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피어나는, 그것이 곧 우리 본래의 자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주인이 바뀌게 되는데, 자기가 죽기 이전까지는 자기 자신이 주인이라고 우기고 고집을 피우다가, 즉 자기가 살아있어야, 예수님을 믿던, 천국을 믿던, 헌금을 하던, 기도를 하던, 일단 자기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살아있어야지, "헌금을 하라" 라고 하는 예수님의 명령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죽은 놈에게 그런 명령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다.

◈ '헌금하라' - '죽어라' !!

그런데 놀랍게도 그게 죽어야 말이 되는데, 즉 헌금을 한 사람이 죽어야 진정한 헌금의 의미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헌금하라' 라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헌금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너는 헌금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헌금하는 과정에서 마땅히 죽어주어야 돼" 라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서 헌금을 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모든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하게 하는가? 저주 아래에서 죽은 자가 왜 죽은 자일 수밖에 없는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었다는 것이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예를 들어서, 제가 이렇게 헌금을 한다고 했을 때, 이런 헌금을 하는 행위로 인해서 헌금은 남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한다는 인식을 본인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헌금을 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만 벼락을 맞아서 죽었다고 하면, 결국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이런 벼락을 맞는 일은, 또한 헌금을 하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헌금을 했다고 하는 그 자체에 대해서 주께서 벼락을 쳐버리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일어난 벼락은 무엇인가? 복음을 위해서 일어난 것인데, 그래서 "헌금을 하라" 라는 것은 결국 우리를 매개체로 삼아서, 일종의 시료로 삼아서, 우리가 그렇게 복음을 위해서 사용되어진다는 것이다.

방금 길게 말한 것을 간단하게 줄이면, "헌금을 해라. - 왜요? - 복음을 위해서!"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과정에서 우리는 벼락에 맞아 죽어야할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내가 헌금을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구나" 라고, 그렇게 오해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 !!

실제로 헌금을 하다가 죽은 인간이 있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천국에 갔는지, 지옥에 갔는지, 그것은 전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벼락을 맞도록 조치하시는 것은, 그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나도 진작 죽어야 된다" 라고 인정하는 자들만이, 그 사건이 묵시 안에서 동시성이 되는데, 즉 그쪽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자기에게 터진 말씀의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행 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행 5: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행 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 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그렇게 모든 성경말씀은 현재 우리 자신에게 해당되는 사건으로, 지금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으로 이해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이다' 라고 하면, "때가 되면 마지막이 오겠지" 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마지막 때를 증거하기 위해서 나를 불러서 참여시키는구나"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하시는 마지막 작업에 말이다. 그 마지막 영화에 우리를 불러서 단역배우로 집어넣어서 참여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지금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마지막을 위해서, 혹은 언약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또 다른 말로 하면 헌금을 위해서, 전도를 위해서, 그렇게 모두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용어가 비로소 예수님에 의해서 우리 자리를 되찾아 가는, 그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서, 거기에 포함된, 거기에 필요한 개념들로서 다 집어넣어진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나라를 이룬다는 것이다.

◈ 타인의 시선 !!

이제 교재 214페이지를 보겠는데, 이것을 살펴보기 전에 한 가지 언급하고 지나갈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이 세상 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딜레마를 느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따로 사람들을 관리하고 다루고 싶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서 '타인의 시선' 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것을 철학을 함에 있어서 핵심으로 잡은 것이 곧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타인의 시선을 모든 진리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핵심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핵심으로 말이다.

이 타인의 시선이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나' 라는 것이 있다면, 여기 주변에 있는 모든 눈들이 다 '나'에게 집중하는 것인데, 그런 눈알들을 모아놓은 것을 두고 환경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삶의 환경' 이라고 말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국가, 혹은 정치라고 볼 수 있는데, 그래서 북한의 경우에는 국가가 백성들이 탈북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 그것을 주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 자신이 이러한 눈동자들에 쌓여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는 '환경 따로, 나 따로', 그렇게 될 수 없고, 환경에 예속된 존재로서 살아가니까, 결국 인간들이 말하는 '나' 라고 하는 것은, 즉 자아, 혹은 주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자기가 원하는 그런 '나'가 아니라, 타인이 구성한 현실관 속에서 '나' 라는 것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 자살충동과 왕따 !!

그래서 우리 인간은 남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나쁘면 그만 자살충동을 느끼는데, 쉽게 말해서 남들이 자기를 보고 욕을 하면 죽고 싶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왕따' 라는 것인데, 요즘 아이들이 학교에서 많이 당하는 것인데 말이다.

그러니 왕따를 당한다는 것은 결국은 무엇인고 하니, "엄마, 친구들이 아무도 나하고 놀아주지 않아" 라는 것인데, 그러면 엄마는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뭐라고 하는가? "니는 놀 생각은 하지 말고 그냥 공부만 잘하면 돼. 그러면 다른 아이들이 너를 부러워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엄마의 논리대로 하면 아주 간단한 이야기인데 말이다.

그런데 아이는 왜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보다도 친구들이 놀아주지 않는데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는가?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도덕발달과정에 보면, 어릴 때는 부모라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 조정을 받는 존재로서 전락하기 때문에, 그것이 학교에 가면 그 부모 자리에 선생님과 친구들이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타인의 시선' 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남이 없으면 나는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고 만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잘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자기 혼자서 공부를 잘하는 것은 전혀 재미가 없고, 남들이 자기가 공부를 잘하는 것을 알아줄 때, 그때 비로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 마누라, 밥 줘 !!

특히 부부의 경우에, 그냥 혼자서 밥을 해먹으면 되는데, 꼭 마누라에게 밥상을 차려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 김춘수가 자기 아내가 죽고 난 뒤에 쓴 '고등어' 라는 시를 보면 뭐라고 하는가? "저기 부엌에서 고등어를 굽는 당신은 왜 없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내가 왜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가?

평소에 항상 그대는 그대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즉 아내가 아내의 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자기의 자리가 확인된다는 것이다. 그대가 없어도 그냥 살면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김춘수는 아내가 죽고 난 뒤에 몇 년을 지나지 않아서 죽고 말았는데 말이다. 그대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서 말이다. 그러니 "공부를 잘한다. 혹은 못한다" 라는 것을 누가 판단해주는가? 남들이 평가해준다는 것이다.

◈ 왜 인간은 혼자 살지 못하는가?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혼자 살면 최고네요" 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산 속에 혼자서 집을 짓고 똥개 한 마리와 함께 텃밭이나 가꾸면서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아프다든지, 사기를 당했다든지, 자기 차를 누군가가 훔쳐갔다고 하면, 그럴 때 자기 혼자서 해결되는가? 누가 필요한가? 자기 것을 되찾아줄 어떤 국가기관이나 사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빗속에서 운전을 하고 가다가 그만 타이어가 빵구가 났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휴대폰도 밧데리가 떨어져서 불통이고 말이다. 그러면 "제발, 도와주세요" 라고 하면서, 손을 들고 다른 차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그때 누군가가 "왜 혼자 사는 것이 좋다면서? 휴대폰이 왜 필요하고, 밧데리는 왜 필요한가?"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 야야, 무슨 의료보험이고?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제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 아내가 의료보험이 넣어드렸는데, 그때 그분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죽으면 그면 화장지로 둘둘 말아서 화장터에 넣으면 되지, 무슨 의료보험이고?"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의료보험을 들어주니까, 병원은 본인 스스로가 매일같이 자기 집처럼 애용하셨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결국 해답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는 혼자 살아가면 제일 편한데, 하지만 자기 것이 없을 때는 남의 것을 빼앗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남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래서 남이 없이는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에게 기대고 남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에는 무엇인가? 어디까지나 자기의 것이 만족스러울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자기가 약간 수고스러워할 뿐이지, 뭔가 자기 혼자서 가질 만하고 혼자서 되겠다고 여기면, 남편이고 아내고 간에 전부가 다 이혼하고, 자기 혼자서 맛있는 것을 사먹으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은, 평생 두려움과 수치심의 체험을 !!

그러므로 이러한 타인을 비롯한 모든 것이 다 우상이었는데, 이런 타인의 시선으로 인해서 두려움이 생기고,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면 수치심이 생기는데, 부끄러움이 말이다. 그래서 부끄러울까 싶어서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이 다 타인의 시선에서 오는데, 이것은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을 지독스럽게 이러한 것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체험이라고 하니, 건강 의료기에 누워서 하는 그런 체험은 말고 말이다(ㅋㅋ).

아무튼 우리는 이런 두려움과 수치심을 지독하게 체험해야 하는데, 죽을 때까지 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일어난 그 모든 일들이, 즉 두려움을 주고, 수치심을 주고, 부끄러움을 주고, 그렇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모든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위함이라는 말인가?

◈ 이스라엘의 착각 !!

다시 강조하지만, 오직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데,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지독스럽게 힘든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마지막에는 모든 해답이 다 풀리면서 하나의 프레스, 즉 일종의 압력으로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모두 주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여유가 있고 희망이 있었는데, 메시야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렇게 고생해도 메시야가 오면 모두 해결될 거야. 타인의 시선인 바벨론, 헬라, 로마 너거들이 그렇게 우리를 압제하면서 위세를 떨어도, 장차 구름을 타고 우리의 메시야가 오시면 너거들은 다 죽었어. 바벨론, 모압, 암몬, 다 어디에 갔어? 또 두로와 시돈은 어디에 있는 거야? 없지? 그때는 이 나라에 다윗이 왕이 되는 다윗의 나라가 세워지면서, 모든 나라를 통치하는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는 거야" 라고 하면서, 그렇게 유대인들이 여유를 부릴만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카비 전쟁의 경우에, 헬라와 치열하게 싸우던 그 강렬한 의지는 바로 희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메시야가 오시면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생각했던 그 공동체가 놀랍게도 저주받은 마귀의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함축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들은 마지막 때서 빠진다고, 즉 마지막 때가 자기들을 위해서 온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복음을 위해서, 메시야를 위해서 마지막이 있는데, 그런데 그들은 자기 나라의 번영과 복락을 위해서 마지막이 온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 세례요한의 경우에 !!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특히 세례요한의 경우에는 뭐라고 했는가?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말이다. 도끼와 나무뿌리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즉 "너거들은 이제 죽었어. 때가 되었는데, 바로 너거들이 작살이 나는 때가 되었어. 깜깜하고 어두운 때가 되었어" 라고 하는데, 상당히 과격하다는 것이다.

(마 3:10)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오해했는가? 세례요한은 과격하게 오실 분을 소개했는데, 그런데 막상 오신 분은 세례요한의 표현처럼 그렇게 과격하지 않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당황스러운가? 세례요한도 당황스럽고, 세례요한의 말을 듣던 사람들도 역시 당황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옥에 있던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편지를 편지를 보내는데, "과연 당신이 그분이 맞습니까? 우리가 다른 분을 또 다시 기다려야 합니까? 좀 과격하시면 어떻습니까?" 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더욱 심하게 과격하신데, 즉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들리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난다" 라고 하시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마 11: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마 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마 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지금까지의 모든 절차와 질서가, 그런 이성적인 법은 전혀 적용되지 않는 마지막 때가 이미 개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옛 술은 옛 부대에 담지만, 그러나 새 술은 옛 부대에 담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 하시는데, 결국에는 무엇인고 하니, "진정한 피해자만이 복수할 수 있다" 라는 것이다.

◈ '피해 입은 나' 라는 자체가 NG !!

그러므로 '피해를 입은 나' 라는 말 자체가 전혀 성립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피해를 입었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복음을 위해서 일어난, 즉 오직 예수님만이 피해자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만약에 자기가 단독자로서, 그래서 자기 것이 있고 그것을 유지해야 한다면, 자기가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상을 해주어야만 하는데, 그런데 그 자리가 과연 원래 자기의 자리가 맞는가? 즉 주님께서 인정한 자리가 맞느냐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고 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자리라는 것이다. 즉 남들이 만들어준 자리, 남들의 곡선과 굴곡으로 인해서 생긴 자리, 즉 임시적으로 자기 자리라고 여겼던 그 자리인데, 그 자리에서 피해를 보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판은 주님께 맡겨야지 자기가 심판을 하게 되면, 그것은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한 사적인 복수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혀 복음과는 상관이 없는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욕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욕을 한다는 것은 "내 것을 되돌려다오" 라는 것인데, 즉 자기의 체면과 위신을 다시 돌려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돌려 받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사실상 방법이 없으니까 욕이 튀어나온다는 말이다. 즉 "내가 당한 만큼, 너도 이제 한번 당해봐라" 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복수를 하려고 하는가? 이 세상에서 복수를 할 수 있는 자격자는 오로지 창조주밖에 없는데, 그런데 인간은 어떠한가? 자기가 이미 창조자 행세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창조주만이 할 수 있는 복수를 말이다. 

◈ 노아홍수는, 누가 누구에게 하는 복수인가?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노아홍수에 있어서, 그 홍수는 누가 누구에게 하는 복수인가?" 라는 것이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노아가 배를 만들 때 다른 사람들은 노아가 취미생활을 하는 줄로 알았다는 것이다. "저 사람은 어릴 때부터 배 모형을 좋아하더니만, 이제는 큰배를 만드는구나" 라고 말이다.

그런데 노아가 누구에게 피해를 본 적이 있는가? "너거들, 이제 다 죽었어" 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피해를 본 적도 없는 인간을 통해서, 그 사람만 살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죽였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노아의 모든 일들은 복음을 위한 것이지, 노아의 개인적인 복수심을 위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오늘날 우리가 전도를 한답시고 설치면서 나대는 것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주의 이름을 빙자한 사적인 복수심의 발로가 아닌지, 그런 것을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사업을 하다가 망한 것을 교회에서 전도나 봉사하는 것으로 땜빵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남자에게 버림을 받아서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이 일종의 무엇인가? "그래, 인생을 누가 더 잘사는지 한번 보자. 나의 사랑을 짓밟고 다른 여자를 찾아간 니놈이 잘 되는지 보자. 하지만 나는 너무나도 착하기 때문에 너를 위해서 기도하겠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이냐는 것이다(ㅋㅋ). 자기가 테레사 수녀도 아니고 말이다.

◈ 교회인가? 쓰레기차인가?

우리의 수치심과 분노라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남들이 보기에 "야, 저 사람이 저 정도 성공했으니, 과거에 당했던 것에 대해서 충분히 보상이 되었다" 라고, 그렇게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시나리오를 본인이 현재에 계속해서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쓰면서 실천에 옮기는데, 그게 바로 '성화론' 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에서는 망했지만 교회에서는 성화가 되었다" 라고 하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정해주는 존재로서 사회에 대한 반발과 복수, 혹은 사회에 대한 도전으로서, 즉 "나는 아직도 죽지 않았어. 죽지 않았단 말이야" 라는 것을 외치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의 사적인 감정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고 해서 교회가 만들어졌으니, 그런 교회가 여름철에 음식물을 수거하는 차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야말로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데, 그래도 음식물은 재활용이라도 하지 말이다.

◈ 예수님의 '몸소 죽으심' !!

다시 이야기를 이어서 해보겠는데, 예수님은 스스로 피해자가 되셨기 때문에, 그냥 죽으심이 아니고 그 앞에 '몸소' 라는 단어가 붙는데, 즉 '몸소 죽으심' 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알아서, 몸소 죽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을 죽여야 하고, 그분은 스스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것이 우리 속에서 발생되어야 하는데, 즉 "이러 이러하니 나는 예수님을 이제 그만 믿겠습니다. 아시겠어요, 하나님?" 라고 하는, 그런 사태가 우리 속에서 일어나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렇게 믿으려고 애를 썼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는 더 이상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여력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나도 30년을 믿었는데, 더 이상 십자가를 믿지 못하겠습니다. 나는 내가 어느 정도 훌륭한 사람인지, 그것을 입증하는 쪽으로 나가겠습니다. 믿음보다도 행함 쪽으로 나가겠습니다" 라고, 즉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중요합니다" 라는 말을 우회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주님의 '몸소 죽으심' 이라는 의미는 그 사람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너무 오바하신다. 서로 좋게 좋게 지내면 되는데, 좋게 좋게 천당에 가고 말이야. 그런데 왜 그렇게 십자가에 몸소 알아서 죽는, 왜 그런 오바를 하시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겟세마네 기도와 베드로, 야보고, 요한 !!

우리가 보기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과잉적인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의 세 명의 제자인, 즉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함께 있었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그들은 주님의 결코 기도에 참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몸도 피곤했겠지만 말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런 악바리로, 즉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는 기도를 해야만 하는 이유를 몰랐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왜 모르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피조물의 기능적인 자리가 아직 거기에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경우에서 말이다.

(마 26: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마 26: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마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본인이 원하지 않는 길로 가게 되는데, 그래서 주님의 천국으로 골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생애는 항상 우리가 원하는 것과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 언제나 우리 속에 공존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치 않는 길을 알려고 하면 항상 우리 마음대로 살아야 하는데, 즉 막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 성도의 걸음걸이는, 게걸음 !!

어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왜 '미션 임파스블' 이라는 영화를 보면 물건을 하나 훔치는데 어떻게 하는가? 그냥 보면 아무 것도 없는데, 주인공을 안경을 쓰고 적외선이 사방으로 뻗어있는 그 틈 사이를 지나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를 촬영할 때 다른 사람이 그 장면을 보았다면 그게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영화에서는 그래픽처리를 하니 뭔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는데 폼만 잡으면서 게걸음을 걸었다는 것이다(ㅋㅋ).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원치 않는 길로 가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복음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설치된 적외선이 양 사방에 마구 깔려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것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주님의 인도함을 매일매일 받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구원은 주께서 허락을 해야하고, 주께서 친히 나서주셔야 구원이 되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으로는 구원이 결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도 만들기는 주님의 몫이지, 우리가 스스로 성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절대로 성도가 될 수 없는데, 주께서 친히 만드심으로 말미암아서, 그래서 우리는 다만 그 예수님의 공로에만 감사하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 215페이지를 보자.

** 이처럼 십자가의 신비는 모든 신비를 다 퇴색시킨다. 십자가 외의 신비는 신비 축에도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가장 깊은 곳에는 십자가 신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고전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전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 '신비'에 대해서 !!

여기에 보면 신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천사를 보았다고 하면, 이게 골로새서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말이다. 그렇게 천사를 본 것을 거짓이라고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거짓말이라고 한 자들이 당사자가 아니니까 말이다. 즉 "내가 천사를 보았다" 라고 하면 본 것인데, 거기에 대해서 제3자가 나서서 "당신은 보지 않았어" 라고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본인이 보았다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본인이 "나는 이 비스켓이 참 맛있다" 라고 하면 그것은 맛있는 것이지, "그게 아니야. 맛이 없어" 라고, 그렇게 맛이 없다고 다른 사람이 우기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자기 혀가 느끼는 맛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느끼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나는 천사를 보았다' - 그래서?

아무튼 천사를 보았는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렇게 자기가 천사를 본 것을 의지한다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은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천사를 본 것에 대해서는 그게 아니라고 하면 안 되는데, "천국을 보았다. 지옥을 보았다" 라고 하면, 얼마든지 많이 보라는 것이다.

무당의 경우에도 구원을 받는데, 또 이런 파격적인 말을 해서 구설수에 오르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무당에게 그렇게 신이 내린 것에 대해서, "나에게 이런 신내림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복음을 위한 것이다" 라고 믿으면 구원받는데, 그런데 문제는 무당이 그런 고백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특수하게 신내림을 받았기 때문에, 그 특수한 것을 특수한 것으로 유지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골로새서에 보면 "천사를 본 것을 의지하는 자는, 그건 복음이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본 것은 맞지만, 그것을 보여주고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바로 그것을 죄라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기적을 했다고 하면, 그것은 좋은데, 하지만 그 기적체험을 죄임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을 위해서 그게 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기적을 주었기 때문에 말이다. 기도를 하다가 방언을 할 수 있는데, "^#$*&%$@&*"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죄라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 무당도, 구원받을 수 있어 !!

어떤 사람이 그만 병에 결렸는데 그것을 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알고 보니, 그게 곧 신병이었는데, 즉 가까운 친척들이 죽어서 떠나지 않고 그 사람 몸에 다 붙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천도제를 지내게 되는데, 이 천도제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속에 들어온 귀신을 편안하게 하늘나라로 보내는 제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퇴마사가 와서 목을 조르면서 뭐라고 하는가? 그렇게 해서 나가고 난 뒤에는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굿을 하고 하는데, 물론 돈은 2천만원 정도 가볍게 깨지고 말이다.

* 퇴마사 : 너,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어?
* 귀  신 : 한 달 정도 되었어.
* 퇴마사 : 너, 나갈래? 안 나갈래?
* 귀  신 : 못 나간다.
* 퇴마사 : 왜?
* 귀  신 : 배가 고파서 안 돼.
* 퇴마사 : 그러면 밥을 해주면 나갈래?
* 귀  신 : 그래.
* 퇴마사 : 여기 밥이 있다. 먹고 나가?
* 귀  신 : 그래, 고마워.

그렇게 해서 멀쩡해졌다고 하면, 그런데 그때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그렇게 귀신에게 당해야 하며, 또한 나은 것도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인데, 그런 모든 이유는 오직 복음을 위해서이다. 주께서 그렇게 나를 사용해도 십자가 앞에서는 너무 당연하다" 라고, 그렇게 인정하게 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주로 그렇게 신병이 걸린 사람이 무당이 되곤 하는데, 그러니 무당의 경우에도 얼마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때부터 귀신이 또 들어올까 싶어서 염려가 되어서 무당 짓을 그만둔다고 하면, 그건 또한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골로새에서 "내가 천사를 보았다" 라는 것이, 그게 2장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천사를 보았다고 하는 것이 말이 쉽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장 부흥사로 나서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지금 그 구절을 한번 찾아보자.

(골 2: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골 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

여기에 보면,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머리를, 즉 예수님을 붙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붙드는가? 자기는 천사를 보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천사가 있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믿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 사람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예 자기가 있는 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한 믿음이냐는 말이다.

하지만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그것을 봄으로 말미암아서, 믿음은 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인데, 그런데 그만 자기는 본 것을 믿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지 않고 믿어야되는 분을 그만 놓쳐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본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슬픈 운명인데, 괜히 보았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 것을 보지 않았다고, 즉 "주여, 저는 보지 않았습니다" 라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본 것은 본 것이고, 하지만 그 본 것을 의지하지 않겠다" 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하지만 우리 인간이 어떻게 자기가 본 것을 의지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 두 분으로 이미 보았는데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 십자가의 동시성 !!

그러니 모든 것은 십자가의 동시성인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6.25때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을 의지하게 된다면, 하지만 그것은 자기에게 일어난 특수한 사항이지, 남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빌립이 와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전도했을 때, 그런데 그 내시가 "그때 빌립이 하늘에서 와서 나를 전도했다" 라는 것을 계속해서 주장하게 되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봐야 하는가? 빌립이나 내시는 둘 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십자가 의미를 붙들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내가 그때 광야에서 우연히 어떤 사람을 만났다" 라는 것을 계속해서 의지하고, 거기에 의미를 둔다고 하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끄집어내려고 하면,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런 주특기는 한 두 개씩 다 가지고 있는데, 남들이 하지 못했던 자기만의 특수한 경험과 같은 것이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기가 신자임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충동이 다 있다는 것이다.

◈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

그런데 성경말씀은 뭐라고 하는가? "오직 십자가만을 바라보라" 라고 하는데, 즉 십자가에게 자기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예수님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즉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믿지 말고,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믿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인데,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언제나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이 우선인데, 그런데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이 우선시가 된다는 것은, 그것은 예수님의 영, 즉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런 놀라운 기적을 우리가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은,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심인데, 그게 곧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즉 공짜로, 선물로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것이다. 자기 주특기를 살리지 말고 말이다.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의사가 되어서 사람을 치료하는 것도 죄고, 피아노를 치는 것도 죄고, 그리고 목사가 되어서 설교하는 것도 죄인데, 그렇게 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복음을 위해서, 십자가를 위해서 주어진,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교재 215페이지를 보자.

** 이처럼 십자가의 신비는 모든 신비를 다 퇴색시킨다. 십자가 외의 신비는 신비 축에도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가장 깊은 곳에는 십자가 신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 오직 십자가 신비만이 !!

십자가 앞에서 이 세상의 신비는 신비도 아니라는 것인데, 왜 그런가? 십자가가 곧 말씀의 완성이니 말이다. 새언약이 모든 언약의 완성인데, 그것은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천사를 본 것이 자기 죄를 씻을 수 있는 근거가 되는가?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보상이 있는가? 그것도 아닌데, 그런데 왜 그런 것을 의지하는가? 그것은 바로 타인의 시선 때문에, 즉 자기 믿음이 좋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간증집회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죄의 시작인데, 물론 다른 것도 마찬가지만 말이다.

이제 교재 216페이지를 살펴보자.

** 악마가 총력을 기울여서 대처하는 일이 곧 예수에 관한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도 끈질기다. 예를 들면, 밭을 가는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 결코 두 사람이 경쟁을 하거나 게임을 한 적이 없다. 
 
(마 24: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마 24:41)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마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마 24:43)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마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 데려감과 내버려둠 !!

여기에 밭을 가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런데 그들은 결코 경쟁하거나 게임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둘 중의 한 사람은 반드시 승자가 되는데, 하지만 주님의 뜻은 무엇인가? 어느 누구도 승자나 패자가 되지 못하고, 오직 예수님만이 주가 되시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한 쪽은 건지고, 다른 쪽은 내버려둔다는 것이다.

물론 둘 다 내버려둘 수도 있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 누가 구원을 받고, 구원을 받지 못하고 하는 것은,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의중에 속한 문제이지, 자기가 구원을 받겠다고 하면서 설친다고 해서 전혀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두 사람은 사이좋게 밭을 갈고 있었으며, 협동해서 농산물 생산에 매진했다. 묵묵히 매를 갈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둘 사이를 갈라놓으시는가? 이 두 사람의 운명이나 미래는 본인들에 의해서 결정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상대방을 이긴다고 해서 데려감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패배했다고 해서 내버려둠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그런데 왜 하나님은 둘 사이를 갈라놓으시는가?" 라고 하는데,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우리 인간이 자기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을 두고, 한 쪽은 예수 안에서 긍휼히 여겨서 데리고 가는 것이고, 다른 쪽은 그냥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다는 것이다. 그냥 그것뿐이라는 말이다.   
 
타인의 시선에 의하면, 인간도 아닌 그야말로 인간 말종인데, 즉 "아이쿠, 왜 사나? 나 같으면 죽었다" 라고, 그렇게 무시를 당해도 결코 그게 내려둠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지 나사로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해도, 하지만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게 더 실속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실속이란 표현이 좀 그러한데, 아무튼 본래 자기 자리를 찾아주는 그 은혜가 최고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건희나 이맹희의 경우에, 그 삼성의 일가들이 그렇게 서로 유산 때문에 싸우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그 맹한지 똑똑한지 몰라도 아무튼 삼성일가가 그것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복음을 전하다보면 어떤 반발이 나오는고 하니, "이 목사는 인간 자체를 의미가 없는 존재로 보고, 그것을 아예 깔고 시작한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인간이 원래 자기가 아닌 잘못된 자리에서 폼을 잡고 살고 있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모래 위에서 아무리 5층짜리 집을 지어봐도, 그게 50층이 되어도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마지막 때가 되면 다 무너지는데 말이다. 그러니 자기의 기초, 즉 바탕을 보라는 것인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무너짐이 심하니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냥 곱게 무너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마 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그런데 왜 데려감을 당하고 내버려두는지, 그 이유가 마지막 때에 최종적인 개념으로서 주어지는데, 즉 "이래서 너는 데려감을 당하고, 이래서 너는 내버려둠을 당한다" 라고, 그렇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말이다. 그게 곧 십자가의 의미인데, 즉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죽음에 근거해서 너는 구원을 받았고, 또 그 죽음에 근거해서 너는 버림을 받았어" 라고, 그것을 구원을 받은 자에게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이제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217페이지를 보자.

** 인간은 자체적인 관계망을 넓히고 이어나가려고 시도한다. 자아란 내 과거가 흘러 보내온 산물이다. 사람이 타인과의 만남에 나서는 것도, 자신의 과거를 충실하게 현재까지 이어보겠다는 관성 때문이다. 

◈ 거미망에 얽혀있는 인간 !!

이 관계망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그림으로 그린 적이 있었는데, 일명 '거미망' 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관계를 구축하게 될 때, 그것은 옆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역시 자체적으로 관계를 구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물망' 이라고 해도 좋고 말이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이 협회를 만드는데, 그런데 이 협회는 또 하나의 거미망이 되기 때문에, 여기에 가입하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또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국과 일본이 축구경기를 하는데, 우리나라의 박지성이 한 골을 넣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너무 좋아서 울고, 저쪽 일본은 슬퍼서 운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의 그 모든 원인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에게 그물망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은 두 명이 모이든 세 명이 모이든, 사천만이 모여서 국가를 이루던 상관없이, 자기를 위한 그물망과 똑같은 기능을 발휘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인류전체가 예수님을 대항하는 그물망 !!

더 나아가서 한국과 일본이 합쳐지게 되면, 나중에는 중국과 싸우게 되는데, 그러다가 결국 250개의 나라가 전부 다 합치게 되면 누구와 싸우게 되겠는가? 인류전체가 말이다. 예수님의 나라와 싸우게 되는데, 그래서 주님은 직접 그물망을 공격해버리는데, 그래서 그 그물망을 떼어버리게 되면, 주님의 그물망에 우리는 하나의 기능으로서, 즉 천국의 거지로서 하나의 기능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신 이유는 무엇인가? 개인적인 그물망의 구조, 즉 악마의 구조에서,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나라에 반대하는 총체적인 자손들에게서 빼내주기 위한 것이란 말이다. 인간의 그물망, 즉 악마의 구조에서 말이다.

◈ 노아방주도 역시 십자가 사건 !!

이제 마지막으로 노아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는데,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은 그가 취미생활로 그렇게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남에게 피해를 입어서 복수를 하려고 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계속해서 방주를 만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주께서 노아를 통해서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 즉 노아에게 언약을 주신 것을 근거로 해서 주의 심판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노아가 만든 방주 속에는 반드시 무엇이 들어있어야 하겠는가? 장차 오실 예수님의 고난이 즉 십자가의 아픔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아방주 안에는 정결한 짐승 일곱 쌍을 같이 동석시켜서, 더러운 짐승도 정결한 짐승의 혜택을 입어서 심판을 무사히 건너왔음을 표시하기 위해서, 2월 27일에 방주에서 내려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러자 하늘에는 무지개가 펼쳐지면서 불로서 심판을 받을 때까지는, 즉 마지막 심판을 받을 때까지 대기상태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안전망이 구축되면서 마지막 심판주가 올 때까지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누구도 심판주를 대신해서 미리 심판하지 못하도록, 그런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무지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위한 무지개인데, 이 집사님도 그런 무지개 그림을 그렸는데 말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전부터 무지개가 있었는데, 즉 묵시 안에서는 모든 것이 동시성이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도 무지개가 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과거 노아의 일이 지금 십자가의 마지막 때는 같은 사건으로서 하나의 덩어리를 형성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마지막 때는, 그 일어난 모든 일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일어난다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는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냥 주시는 은혜를 받은 자들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창 9:8)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창 9: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창 9:10)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창 9: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창 9: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창 9: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창 9: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창 9:15)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창 9: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자리가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주님이 우리 자신을 되찾아주셔서, 그 안에서 우리가 주를 위하여, 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그 어떤 일들이 일어나도, 그것을 딜레마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당연하다는 것을, 모든 것이 다 필요한 조치임을 깨우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04,17 오후 7시 20분에 마침.

                                           천국거지는 좋은데, 이 세상거지가 문제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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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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