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65강 심판

피/피 2012. 8. 29. 11:00

피65강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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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65강 심판

[12 대구강의 4] - [피 65] - 심판

                                                   12,02,2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왜 아비가 자식을 낳아야 하는가?

오늘은 교재 205페이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 십자가의 피 흘리심에 대해서 단순히 감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심판이라는 참혹한 실제 상황까지도 하나님의 예언에 준해서 동의하는 것이다.

여기에 '심판'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심판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 때, "아비가 자식을 낳고, 아비가 자식을 낳고" 라는 식으로 하셨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한번에 다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모든 인간을 한꺼번에 만들고, 한꺼번에 없애버리면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왜 "아비가 자식을 낳고, 아비가 자식을 낳고" 라는 식으로 하셨느냐는 것이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지 싶은데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시고 피조물인 인간을 만드시는데 있어서 한꺼번에 모두 다 만들면 되는데, 그런데 왜 인간이 인간을 만드는 식으로, 그렇게 하셨느냐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낳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이 심판과 관련되어 있는데, 오늘 심판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그 점을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창세기 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셨는데 하나님의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담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즉 아담이 자기 형상과 같은 자식을 낳았다고 한다는 것이다.

(창 5: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창 5: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 5:3)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 5:4)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5)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창 5:6) 셋은 일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 하나님의 형상과 아담의 형상 !!

이 관계를 한번 살펴보면, 먼저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을 만드셨고, 그리고 아담 이후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아담의 형상대로 셋을 낳았다고, 즉 자식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셋은 셋의 형상대로 자식을 낳는가? 그게 아니고, 셋이 자식을 낳을 때는 누구의 형상인고 하니, 아담의 형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6절에 보면, "셋은 일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자기 형상대로 아담을 창조해놓고는, 그 다음부터는 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아담의 형상으로 이어지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과 아담의 형상 사이에서 장차 누가 오시는고 하니, 아담의 형상을 띠면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 오신다는 것이다.

◈ 아담의 후손을 통해서, 아담을 만드신 분을 !!

알다시피 예수님은 사람의 자손인데, 왜냐하면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으니 말이다. 여기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고 하니까, 아담을 만드신 분을 다시 소급해서 그때 그 시절의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아담의 후손을 통해서 아담을 만드신 분을 만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가운데 '나' 라는 개인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그것은 찾을 수가 없는데, 즉 '나' 라는 것은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 라는 대표자로서 이미 아담이 꽉 쥐고 있는 입장에서, "하나님, 저는 어떻게 됩니까?" 라고, 그렇게 '나' 라는 주체를 성경말씀에서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은 자기가 잘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증거하려고 하면, 하나님과 누구의 만남이어야 하는가? 하나님과 아담의 만남인데, 그러한 만남을 통해서 누가 나온다는 말인가? 주님께서,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온다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라고 하고 나서, 그 다음이 중요한데, 16절에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만물이 다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예수님의 주(主)되심에 !!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지금 신경을 어디에 바짝 쓰시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예수님의 주(主)되심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모든 여력과 능력을 다 동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에게 말이다. 즉 예수님에게 모든 형상을 다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불교신자의 경우에, 우리가 잠시 불교신자가 되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면, 굳이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보통 사람이라고 했을 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겠는가?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인데(?), 상식적으로 말이다. 그러니 그들이 불교신자이든 믿지 않는 자들이든 간에, 하나님이 어떤 뜻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 !!

다시 말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신(神)이란 것은 천지를 만들고 천국이라는 것은 하늘나라가 천국이라고, 그렇게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굳이 성경말씀을 들춰보지 않아도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다 나오는 것이란 말이다. 이방민족들도 죽어서 좋은 곳에 가고 싶어하는데, 그래서 이슬람교를 봐도 천국이 있고, 또 불교에도 죽어서 가는 극락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신은 누구를 위한 신인가? 인간을 위한, 즉 인간이 좋으라고 있는 신인데, 물론 그들도 양심이 있어서 자기만 챙기는 게 아니고, 인간도 양심이 있기 때문에 신에게 돌려드릴 영광은 드리고, 그렇게 신에게 잘해주면 신도 인간에게 잘해준다는 것인데, 그러니 남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 그 이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 우상은, 부담이 없어 !!

교회에서 바로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면 교인들이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데, 왜냐하면 바로 그것은 그들이 익히 교회에 나오기 이전에 다 알고 있던 이야기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잘해주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것을 알기 위해서 굳이 복잡한 성경을 펼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거론할 이유가 말이다. 자기 나라의 역사도 제대로 모르는데 말이다. 그런 것은 뻔히 다 아는 이야기인데, 굳이 교회에까지 나오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 어떻게, 33살 먹은 나사렛 청년 예수가?

그러나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곧 우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펼치면 무엇이 나오는가? 누가 등장하는가? 하나님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예수' 라고 하는 33살 먹은 나사렛 청년이 온통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누구를 만났는가? 사도바울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하면서, 자기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여겼지만, 그러나 정작 그가 만난 분은 누구인가?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음성인데, 즉 나사렛에서 살던 33살 먹은 청년 예수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다시 말해서, 우리 동네에서 같이 살던 33살 먹은 청년이, 그분이 우리를 만들었고, 또한 산천초목도 그분이 다 만들었고, 그리고 하나님도 그분의 주되심에 관심이 있다고 하는 종교를 믿으라고 한다면, 그게 도대체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 예수님인가? 하나님인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  라는, 그것뿐인데 말이다. 물론 부록으로 삽입이 된다면 몰라도,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 이란 구조 속에 말이다. 그렇게 추가해서 하나 더 집어넣자는 식으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집어넣는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인데, 그래서 한국교회는 예수님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이 납득이 되고 마음에 부담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 이라는 것은 목사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 하나님이여, 제가 지은 죄가 많아서 집안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굳이 목사가 가르쳐주지를 않아도 인간들의 양심 속에 박혀있는, 그렇게 태생적이란 말이다.

◈ 죽음의 DNA가 복제되어서 !!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이 이미 아담의 형상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담이 무엇을 따먹었는가? 선악과를 따먹어서 아담에게 주어진 운명과도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정녕 죽으리라" 라는 것인데, 그러니 죽음의 이유와 그 원인이 이미 아담의 형상 속에 대대로 전달되어 있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DNA로 내려온다는 말이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니 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죄 때문인데, 그 죄가 무엇인가? 다른 게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어서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곧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미 인간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자식새끼를 낳으면서 뭔가 아담의 형상이란 동질성을 유지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 동질성은 계속해서 무엇을 품고서 자식을 낳으면서 밑으로 밑으로 내려오는고 하니, 죽음이란 것을 쏟아내면서 내려오게 된다는 것이다.

◈ YOU ARE '사라짐' !!

그런데 이 죽음은 쉽게 말해서 사라진다는 것인데, 즉 "내가 사라진다" 라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살사라진이 아니고 말이다(ㅋㅋ). 예를 들어서, 이렇게 매직펜이 있는데, 이렇게 그냥 손에 들고 있으면 잘 보이지만, 하지만 재빨리 '휙'하고 지나가면 잘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손에 무엇을 들고 있는지 모르는데, 그것을 사라진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을 우리 자신이라고 하면, 우리 자신은 그렇게 있다가도 없다는 것이다. 야고보서 4장에서는 그렇게 있다가도 없는 것을 두고서 '안개' 라고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있다가도 없는, 이런 움직이는 것을 스톱시키는 것은 누구의 뜻인가? 오늘도 주님의 뜻에 의해서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즉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는 말이다.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 4: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이 죽는 것에 대해서 애석해하거나 애도할 하등의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왜 저를 죽입니까?" 라고 호소할 권리가 우리 자신에게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의 형상 속에는 이미 죽어야 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즉 사라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도 '후딱'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 니, 참 많이 늙었다 !!

60평생을 사니 참 지루하게 느낄지 몰라도, 자기 인생은 지루해도 남의 인생을 참으로 빨리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가 벌써 나이가 그렇게 되었나?" 라고 하는데, 본인은 그 나이만큼 산다고 고생을 하고 지루했는데,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어휴, 니 많이 늙었다. 시간이 정말 후딱 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딱 간 것이 아닌데, 오랜만에 손자들을 보고는 "참 많이 컸다" 라고 하면, 정작 그들은 하루하루를 산다고 지겨워 죽는데, "언제 어른이 될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것도 모르고 "너거들 참 많이 컸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주께서 스톱을 시킬 때만 !!

아무튼 후딱 지나가는데, 왜냐하면 사라지는 것은 주체가, 즉 그렇게 사라지게 하는 권한은 전적으로 주님에게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있는 게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언제 자기다운고 하니, 주께서 스톱을 시킬 때만 자기답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스톱시키면 그것은 우상이 되는데, 마치 그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처럼,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간에, 자기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자기가 자기를 꽉 잡았을 때인데, 그렇게 사라지는 것을 잡고서는 "사라지지 마라. 사라지지 마라" 라고, 즉 "멈춰라. 더 이상 늙으면 안 돼" 라고 하면서 스톱을 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그렇게 스톱을 시키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곧 사진인데, 즉 사진을 찍어서 스톱을 시켜서, 그 사진을 보면서 "내가 거기에 있고, 거기에 있는 게 곧 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진을 찍어서 말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할머니, 지금 무엇을 봅니까?" 라고 하면, 지금 할머니가 자기 16살 때 찍은 사진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할머니는 "응, 내 모습을 보고 있지" 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할머니, 지금 16살의 아리따운 소녀는 없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할머니는 70이 넘었는데, 그러니 할머니가 그 사진 속의 소녀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다 지나간 것인데 말이다.

◈ 청춘을 돌려다오 ♬

그렇게 주께서 지나가게 하셨는데, 우리가 감히 어떻게 브레이크를 걸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세월아, 가지 마라" 라고 하면서 급브레이크를 밟으면 세월이 가지 않겠는가? 가수 현철이 "청춘을 돌려다오" 라고 그렇게 외쳤는데, 하지만 누구에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나훈아가 그렇게 외쳤는가? (ㅋㅋ)

그러니 자기가 있고 청춘이 있는 것이지, 청춘이 있고 자기가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즉 '나' 라는 자체도 반칙인데, 아니 사라지는 주제에 무슨 '나' 라는 것이 있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나' 라는 사라지는 것을, 그러한 '나'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서 순간적으로 스톱시키는 주님만이 계실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내가 사라진다" 라고 했을 때, 무엇이 사라지겠는가? 염려와 고민과 스트레스도 모두 다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으로부터 스톱이 걸리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보면, 그야말로 세세한 일에 스트레스를 받고 고민을 하고 염려하는데, 그런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냐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자기가 자기에게 브레이크를 걸어서 강제로 붙잡으려고 하니, 가는 세월이 웃는다는 것이다. 완전히 미친 짓인데, 그래서 서유석도 웃고 말이다. 그야말로 "가는 세월 그 누가 붙잡을 수 있나요♪"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그러면, 주님은 왜 사라지는 것을 만드셨는가?

그러니 이렇게 사라져 가는 것들을 주님께서 왜 만드셨느냐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이렇게 사라짐과 사라짐을 통해서 우리 인간의 끝에 누가 등장하는고 하니, 우리를 사라지게 하신 바로 그분을 뵈옵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분을 영접하고 만나지게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사라지게 하는데, 주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느 날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의 만남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우리의 만남은 시간 속의 만남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묵시의 만남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사건' 이라고 하는데, 즉 묵시적 사건을 통해서 우리와 만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나지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받는가? 심판을 받는데, 그게 무슨 심판인가?

'나' 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즉 자기 자신이 곧 아담의 형상임에 대해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나' 라는 입장이 아니라, "내 속에 아담이 있습니다" 라고 하는, 바로 그렇게 아담의 형상이 예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누구나 다 말이다.

그런데 그 심판은 참으로 행복하고 다행스러운 심판인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심판했는데, 즉 십자가에서 저주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그 심판사건을 우리에게 그대로 미리 적용을 시킨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정말 행복이고 다행이라는 말이다.

◈ 복음 - '예수님에게 속한 그 새로운 시작' !!

그러니 십자가 안에는 이미 우리는 죽고, 우리 안에서 누가 산다는 말인가? 우리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시는 방식으로,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하시는데, 즉 우리는 과거에는 아담에 속한 형상이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의 형상에 속한, 바로 그 새로운 시작의 개시, 그것이 곧 '복음' 이라는 말이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그때 우리는 흙에 속한 형상을 입어서, 연약했고, 또한 쇠퇴했지만,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에게 속한 형상, 즉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어서, 영광되고, 또 아픈 것이나 쇠한 것이 없는 형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 말씀은 보면 볼수록 이 세상의 걱정근심을 잊게 만드는데, 설령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제가 고린도서 15장 42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고전 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 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 !!

지금 이 대목은 에베소에 있는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에게 하는 편지내용인데, 그 편지가 예배시간에 낭독이 된다는 것이다. 그 편지는 성령에 의해서 쓰여진, 즉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각자의 직업과도 관계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사도바울이 편지에서 뭐라고 하는가?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라고, 그리고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편지를 그 당시 사람들이 모두 보았는데, 그러니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이 무서우냐는 것이다. 사자굴에 있는 사자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을 입기 위한 하나님께서 파견한 충실한 종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자에게 자기가 먼저 물리려고 새치기를 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 부활에 대해서 !!

바로 이런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부활에 대해서 오해하는 부분이 있어서 반드시 이야기를 하고 지나가야 하겠는데 말이다. 인간의 자기 부활은 부활이라고 하지 않고 '소생' 이라고 하는데, 즉 죽어가는 자기가 다시 산다는 것은 부활이 아니고, 그것은 자기가 더 살겠다고 하는 이방종교적인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활은 '나'의 세계가 아닌데, 여기에는 반드시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고 하니, 예수님의 죽으심에 의해서만 부활이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이 죽어서 부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그 죽으심의 인도를 받아서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덜렁 덜렁 자기 혼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

그러니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의 영과 함께 하지 않으면 부활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는데,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라고 하는데, 그 말씀의 순서를 잘 새겨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니 우리가 산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외부의 영이, 즉 자기가 아닌 다른 분이 들어오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당들이 신에 들린 것과 같다고 보면 되는데, 마치 최영 장군의 귀신에 들린 것처럼 말이다. 만약에 우리에게 예수님의 영이 없다고 하면, 우리는 그냥 죽어서 좋은 곳에 가려고 하는 희망만 있을 뿐인데, 하지만 그런 희망은 일종의 아집이고 고집이란 말이다. 즉 전혀 개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정리해보면, 이런 아담의 형상에서 줄줄이 내려오면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사라지는 존재인데, 그렇게 사라지기 때문에, 어떻게 자기가 다듬는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닌데, 그것조차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하다가보면 "어~어~" 라고 하는 사이에 그만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행함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믿음, 자기 소망, 자기 사랑도 같이 사라지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해서는 전혀 소용이 없고, 다만 우리 속에, 즉 아담의 형상 속에 주님의 형상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것을 구약의 표현으로 하면 언약의 힘, 혹은 성신이라 할 수 있는데, 신약에서는 성령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 성령이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때부터 우리는 빨리 죽어가는 것에 대해서 심판을 받으면서, 즉 심판하시는 예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으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부활의 영으로 말미암아 죽을 우리 몸도 주님에 의해서 살아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질적인 것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주도권을 쥐고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 심판을 받는 것이 곧 축복 !!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는가? 심판을 받는 것이 축복이란 사실을, 그리고 저주를 받는 것도 축복이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축복이 아닌 게 없다는 것이다. 지옥이 있다는 것도 축복이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이미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펼쳐내는 모든 성경의 내용들이, 우리가 보통 신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축복인데, 그러니 성령에 의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사라진다고 보면 되는데, 즉 안개처럼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말이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라고 하는 말도 있데, 그것이 디모데전서 6장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우리의 인생이 중간지점에, 즉 사라지는 지점에 놓여있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 우리집 가훈 - '부자 안 되기' ??

우리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올 때도 아무 것도 없이 와서, 갈 때도 아무 것도 없이 가는데, 그렇게 이 세상에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먹는 것과 입는 것도 현재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하는데, 즉 "주여, 지금 이것도 제게는 너무 과분합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뭔가 계속해서 구해서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자들은 어떠한가?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음에, 즉 미련이 남아서 이 지상을 떠날 수가 없는데, 죽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돈을 더 벌어야 하니 말이다. 그것이 곧 마귀의 유혹이고 덫이라는 것이다.

그 덫의 특징이 무엇인가?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점점 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물론 가만히 있어도 벗어나지 못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몸부림을 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마치 늪과 같은데, 그러니 덫이던 늪이던 간에 설치면 설칠수록 점점 더 문제를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왜 이런 늪에 빠져있는가? 그것은 바로 부(富)하게 되기 위해서인데, 이러한 것에 대해서 과연 자녀에게 교육을 시키는 가정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 곧 늪에 빠지는 것과도 같은 것임을 말이다.

그러면 부자가 되지 않는 일은 왜 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목적이라는 것이. 그냥 사라져 가는 인간에게서 목적을 끄집어낸다는 것 자체가, 그것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일체 인정을 받지 못하고 다같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머물 수 없는, 점점 더 멀어져 가는 목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허구이고 허상이고,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말이다.

◈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

분명히 성경에서는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창조주를 만나기 위해서 인데, 그래서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데, 그것을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모든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창조목적으로 여기면 된다는 말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방금 제가 심판이 온다는 것을 반겨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무엇인가? 성경에 심판 이야기가 나오면, 그 심판대로 되기를 우리는 학수고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사라지지만 말씀은 영원하니, 그 심판의 말씀이 계시니, 그 말씀대로 어서어서 시행해주옵소서" 라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전쟁이 신작로를 연다. 전쟁이 없이는 해방이 길이 보이지 않는다. 교회도 저주의 공격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유월절의 재판이다. 피 없는 자는 유리바다를 건널 수가 없다.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들이닥치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계 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 유월절이 왜 밤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지금도 벌리고 계시는데, 그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거기서 해방의 길이, 구원의 길이 열리고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보면 유월절의 재판이라고 하는데, 이 유월절이 낮이었는가? 밤이었는가? 그것이 상당히 중요한 점인데 말이다. 물론 밤이었는데, 그러면 왜 유월절이 낮이 아니고 밤이었느냐는 것이다.

야곱에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때가 밤이었는가? 낮이었는가? 분명 그것이 낮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32장을 살펴보면, 그 점에 대해서 상당히 유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일단 31절을 보자.

(창 32: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 어둠에서 빛으로 !!

이스라엘의 경우에 있어서, 이 이스라엘을 생산하는 것은 야곱이 있을 경우에만 가능한데, 그러므로 야곱이 없는 이스라엘은 없다는 것이다. 즉 죄인이 없이는 의인이 없다는 말이다. 바꾸어서 말하면, 아담이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가 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담을 통해서 나왔기 때문에 말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낮과 밤을 새로운 창조의 징후로 바라보시면서, 그 밤을 지나서 아침이 될 때, 그 존재가 어떤 존재로 달라져있고 변화되어있는지를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자체가 달라질 뿐만이 아니라, 그 인간으로 말미암아서 준비된 세계가 어둠에서 빛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야곱은 밤에 주의 사자를 만났는데, 그렇다면 야곱이나 하나님의 사자는 밤의 지배를 받는 것이지만, 하지만 야곱이 그 밤을 통해서 축복을 받고 난 뒤에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된 이 인물로 인해서 밤이었던 그 상황이, 즉 어둠이었던 것이 어떻게 되는가? 그만 빛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밤이 낮으로, 즉 어둠이 빛으로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뿐만이 아니라, 그런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마저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하시는 일을, 즉 주님이 하시는 일을 보여주는 하나의 재료로서 동원이 된다는 것이다. 하늘의 별이나 그 모든 것도 말이다. 해를 품은 달도 그렇고 말이다(ㅋㅋ).

◈ 히브리인들이, 유월절의 밤을 통과하면서 !!

유월절이 밤이라는 것은, 유월절에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도, 그때는 이스라엘은 없었는데 말이다. 그 히브리인들이 유월절의 밤을 통과하면서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라가 되는데 있어서,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회개해서인가? 아니면 뭔가가 투입이 되었는가? 외부에서 약속이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출 12: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출 12: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출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 12: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그러한 약속의 투입에 대해서 애굽인들은 아는가? 모르는가? 그들을 그 약속을 거부했다는 말이다. 물론 일부 이방인들 중에서 인정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애굽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약속을 거부함으로 말미암아서, 이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들을 보다 더 많이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특수한 목적으로, 거기에 필요한 사람들만 그때그때 알려주는 임무가 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몇 명이나 되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이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몇 명이나 되는가?" 라고 했을 때, 그럴 때 "몇 명인가?" 라는 질문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데,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게 한 명이라고 해도 수천 수만 명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아직도 예수님을 증거한다면 주님이 살아계신 것인데, 그래서 주님이 "내가 두 세 사람이 있는 곳이 함께 있겠다" 라고 하신 것은,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 지속되는가? 되지 않는가?" 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 위주가 아닌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지 말이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알려줄 그 약속의 내용을,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오직 특수한 사람들만이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려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은데, 아니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약속으로 인해서 저주받을 자와 축복받을 자를 구분하기 때문에, 거기에 충실하다가보면, 그것은 한 명이든 두 명이든, 거기에 상관없이 주님의 약속은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 약속이 아니면, 아웃 !!

노아가 8명을 전도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르는데, 왜냐하면, 방주를 타기 위해서 오려고 하는 자들을 막아낸다고 말이다. 만약에 우리 같으면 어지간하면 받아들이겠는데 말이다. 즉 "약속이 아니라면 나가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면서 밀어내는 그 힘, 그게 곧 전도의 힘인데 말이다.

먼저 약속을 이야기하고 나서, "이 약속에 부합되지 않으면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라고 하면서 밀어내는 그 강력한 의지가 곧 전도의 의지이고, 주님의 도(道)를 지키려는 의지인데, 그래서 전도상은 자기 식구에게만 열심히 전도한 노아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약속이 중요한 것이지 몇 명을 모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은데, 즉 "그 약속이 그 약속인가?" 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사도바울이 목회를 했으면 과연 교인들을 얼마나 모았겠는가? 결국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봐야 하는데, 왜냐하면 혼자서 가는 길이기 때문에 말이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라고 했는데, 다른 사람은 도와주었을 뿐이고 자기 소유의 사람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교인은 없었다는 말이다. 자기 소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누가 자기를 배신하든지 아니면 옹호하든지 간에, 그것은 자기 몫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의 양이지 자기 양이 전혀 아니니 말이다.

(딤후 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교제 205페이지에 나오는 구약성경 스바냐서 1장의 말씀을 보겠는데, 이 부분이 조금 어려운데 말이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습 1: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습 1:15)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습 1: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습 1: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습 1: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 여호와의 날 !!

여기에 '여호와의 날'이 나오는데, 그런데 이 날이 어떤 날인가? 분노의 날이고, 환난과 고통의 날이고, 황무와 패괴의 날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그 날이 오는데, 그런데 왜 일괄적으로 심판하는 날이 분노와 고통이 날인가? 그것은 심판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누구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당연히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바퀴벌레라고 하면, 집주인이 와서 보니 집안에 바퀴벌레가 우글거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주인은 당연히 약을 뿌리든지, 아니면 바퀴벌레 퇴치를 전문적으로 하는 '세스코'와 같은 회사에다가 맡긴다는 것이다. 그러면 '고스트 버스트'에 나오는, 그런 비슷한 팀이 와서 진공청소기를 가지고 마구 빨아들인다고 하면, 그러면 바퀴벌레의 입장에서는 그 날은 무슨 날인가? 애곡의 날이고 통곡의 날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신다는 것은 무엇과 무엇이 맞지 않다는 말인가? 집주인과 바퀴벌레가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주인의 입장에서, 바퀴벌레가 계속해서 자기 집에서 살아도 좋다고 하면, 굳이 비싼 돈을 들여서 그런 박멸회사를 부를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세상이 어떠하다는 말인가? 이 세상을 만드신 주인과 그 세상에서 살고 있는 바퀴벌레와 같은 인간이, 서로 뜻이 맞다는 말인가? 맞지 않다는 말인가? 맞지 않는데, 그렇게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주인의 뜻대로 하는 것을 우리가 당연히 반겨야만 한다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우리가 도대체 누구의 편인가? 우리는 자기 자신의 편이 되면 안 되는데, 주님이 만든 몸이 주님이 만든 이 세상에서 살면서 도대체 누구의 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니 당연히 우리는 주님의 편이 되어야만 하는데, 개콘에 나오는 것처럼, 정말로 그렇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스바냐, 아모스, 그리고 이사야와 같이 심판을 외치는 선지자들의 특징인데, 그들은 그날이 오기를 고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이 뭐라고 하는가? 마라난타, 즉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하는데, 그게 누구의 사고방식인가? 전혀 자기 입장이 아니고, 주님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서 어서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신랑이 너무 너무 보고 싶어요 !!

그리고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기름을 미리 준비한 이유가 무엇인가? 신랑이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는 것이다. 신랑이 너무나 보고 싶어서 기름을 미리 준비한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신랑이 오고 난 뒤에 나중에 기름을 준비해도 된다는 것이다. 즉 지금 당장에 신랑이 보고 싶다는 말이다.

소위 '달란트 비유' 라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주인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똑같이 주인을 생각하면서 자기가 맡은 일을 충실히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악하고 게으른 종은 어떠한가? "이제 주인이 없다" 라고 하면서 독자적인 자기 세계를 누리려고 하는데, 즉 자기 본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는 살짝 잠시동안 무대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종들이 어떻게 하는지, 그것을 보려고 말이다.

◈ 복음인가? 교회인가?

그래서 성경말씀을 보면서 교회는 항상 예수님을 이야기해야지, 교회자체를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만 교회사업이 되어버리는데, 그렇게 교회를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주님이 심판해버리면 얼마나 섭섭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교회는,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 지붕이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져서 홀랑 다 타버려도, 주님이 오시는 그 자체에 대해서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설교가 넘쳐나야 교회인데, 언제 주님이 오셔서 지붕을 고쳐주고 페인트칠을 해주느냐는 것이다. "교회를 믿나? 나를 믿나?" 라는 것을 확인하시지 말이다.

이번에 책을 한 권 내는데 제목을 많이 고민하다가 드디어 겨우 정해서 출판사에 보내었는데, 물론 그동안 '교회는 미신이다' 라고 한다면서 공언을 수십 번했지만, 그것은 한 방에 다 날아가고(ㅋㅋ), '복음인가? 교회인가?' 라고 정했다는 것이다. 책제목이 무난하지 않은가요? 비록 무난하지만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206페이지를 보자.

** 인류의 원대한 꿈이 최후의 날을 취소하지 못한다. 끝은 존중되어야 한다. 진행 중인 인류문명이란 크레용으로 색칠해놓은 얇은 도화지와 같고, 밤하늘을 장식한 불꽃놀이일 뿐이다. 인간의 소박한 꿈들도 무산된다. 희망도, 기대도 밤하늘의 폭죽처럼 잠시 곱게 타오르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 인류의 원대한 꿈 !!

여기에 '인류의 원대한 꿈' 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을 설명해보자는 것이다. 인류의 원대한 꿈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러면 무엇인가? 아담의 형상을 극대화시킨 것인데, 즉 아담의 형상을 계속해서 그대로 밀고 나가는, 즉 죽지 않는 아담의 형상으로, 더 멋있어지고, 더 발달하고, 더 위대해지는 아담의 형상으로 말이다.

그것이 곧 인간인데, 즉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세계, 그러한 인간의 세계는 영원히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 이름도 유명한 아브라함 링컨이 이야기를 했는데, 하필이면 아브라함이 말이다(ㅋㅋ). 바로 그러한 인류의 꿈이 있다는 것이다.

◈ 원대한 꿈인가? 주님인가?

그런데 그것을 누가 아시는가?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쭈구리, 놀고 있네" 라고 하시면서 박살을 내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류 속에서 묵시를 받아버린 사람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는 것을 하는데, 그런데 주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은 그저 인류의 원대한 꿈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케트를 타고 목성이나 다른 행성에 가려고 하는데, 도대체 그런 곳에 가서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아니, 새로운 금속을 발견해서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것을 이용해서 조금 더 오래 살아본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현재의 입는 것과 먹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의 목적과 의무를 일부러 만들어내는 것 같다는 것이다. 물론 인구가 많다가 보니 필요한 것도 있는데, 그러면 과거에 인구가 적을 때는 어떻게 했는가?

옷을 만들어도, 물레를 돌려서 베를 짜서 옷을 만들어 입곤 했는데, 언제 옷을 한 벌 다 만들지는 몰라도 말이다. 해가 뜨면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해가 지면 물레를 돌리고 길쌈을 메고 말이다. 무슨 특별히 시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것이 불과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닌 조선후기의 이야기인데, 그렇게 살다가 일본군이 쳐들어오면 그만 아작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자기 민족 하나만이 홀로 산다고 하면, 그러면 물레를 돌리면서 여유를 부려도 되는데, 옆에 다른 나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지구는 무엇인고 하니, 아담의 형상을 입은 사람들은 결국에 하나의 페밀리인데, 즉 한 가족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들 !!

여러분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전쟁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는지 궁금한데, 잠시 그 당시의 지도를 그려보면, 물론 다 알겠지만 말이다. 여기에 이렇게 이스라엘이 있다면, 여기 지중해에는 블레셋이 있고, 또 여기 위에는 아람이 있고, 이게 앗수르, 바벨론으로 나가고, 또 여기에는 암몬, 모압, 에돔이 있다는 것이다. 그 중간에는 미디안이 있고 말이다. 이들 중에서 이스라엘을 제일 괴롭힌 것이 블레셋과 아람과 암몬인데, 에돔은 나중에 등장해서 괴롭히고 말이다. 

그런데 주변의 이방나라들이 왜 자꾸만 이스라엘을 침략하는가? 성경에서는 그것을 뭐라고 하는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려서 그렇다고 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을 버렸다는 것이다. 제가 아까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그들이 애굽을 나올 때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이스라엘이 되었다고 했는데 말이다. 

◈ 동질성(同質性)의 확대 !!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니 그들을 쳤다" 라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이들 이방나라들의 입장에서 보면, '동질성' 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가 되는 것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항상 뭔가를 더 많이 같은 동질성을 유지해서 자기를 더 확대하는 것, 그것이 곧 생명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도대체 교회부흥을 외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옆에 있는 교회를 모두 다 잠식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덩치를 더욱 더 키우는 것인데, 그것이 생명체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게 곧 동질성의 확대이고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결국은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전부가 하나가 되는데, 그렇게 해서 최후의 하나로 묶는 나라를 두고서 여기 이방나라들 중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게 곧 바벨론인데, 이 바벨론이 그렇게 하나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 큰 성 바벨론 !!

지도가 너무 어설퍼서 다시 그려보면, 여기에 지중해가 있고 이렇게 요단강과 사해바다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 오른 쪽 위가 앗수르인데, 그 옆으로 가면 메소포타미아라고 해서, 그 뜻이 무엇인고 하니, '두 개의 강 사이'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게 실제로 강이 흘러내리는데, 거기가 앗수르이고, 그리고 바벨론은 오른쪽 옆이란 것이다. 지금의 이란인데, 바로 그 바벨론이 앗수르를 침공하고, 나머지도 다 침략해버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구약이 끝나는데, 그것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앞으로 그 어떤 세상이 오더라도 그 나라는 전부가 다 '큰 성 바벨론' 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그 뒤에 나타나는 나라가 제 아무리 커지고 발전이 되어도 바벨론에 예속이 되는데, 그래서 로마도 역시 바벨론이라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바벨론 다음에 바사(페르시아), 헬라, 로마가 되지만 말이다.

◈ 큰 성 바벨론을 왜 '음녀(淫女)' 라고 하는가?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것마저도 이미 바벨론인데, 즉 이 바벨론은 인류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보여준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바벨론에 포함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바벨론을 두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음녀(淫女)' 라고 하는데, 하필이면 왜 음녀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계 17: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원래 구약에서 '음녀' 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신랑을 두고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면 음녀라고 하는데, 그게 이스라엘에게 하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스라엘의 신랑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왜 너희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섬기는가?" 라고 책망할 때 사용하는 용어가 음녀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음녀를 요한계시록에서는 누구에게 사용하는가? 큰 성 바벨론을 두고서 음녀라고 하는데, 그러면 큰 성 바벨론이 음녀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곧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릴 때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으로 전 세계가 하나로 통일이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전 세계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반대하는 적그리스도의 통치아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인류의 최후모습이란 말이다. 그래서 심판이 아주 맹렬하게 진행되는데, 그러니 인류의 원대한 꿈은 무엇인가? 결국 예수님과 하나님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인데, 물론 복음도 필요가 없고 말이다.

◈ 내 새끼여, 영원하라 ??

단지 "이 지구는 영원하리라" 라는 것인데, 그것이 그들의 모토이고 구호라는 것이다. 물론 "지구가 영원하리라" 라는 구호는 유엔에 근무하는 자들이나, 정치인들이나 환경운동가들에게 필요한데, 하지만 이란이나 탄자니아, 혹은 멕시코의 어느 작은 시골마을에는 뭐라고 하겠는가? "우리 집안은 영원하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원대하게 보면 그렇지만, 하지만 사람의 타고 난 태생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아담의 형상은 영원하리라" 라는 것인데, 즉 자기 유전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영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자기는 죽더라도 자기 새끼는 영원히 보존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이미 우리 인간 속에는 악마의 요소가 장착되어있는데, 그 악마가 무엇인가? "제발 제발 예수만은 믿지 말라" 라는 것인데, 즉 아직도 예수를 믿느냐는 것이다. 곧 바로 하나님과 교제하면 되는데 말이다. 즉 "우리 인간이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이 잘 되는 것이고, 그게 곧 하나님의 축복이다" 라는 식으로 간다는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 제발 절할 사람 나와라(?)" 이라는 말도 있듯이 말이다. 

◈ 나를 귀찮게 하지 마 ??

그러니 신앙생활을 잘할 것 같지만 나중에는 어떠한가? 지난 설교시간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나중에는 신앙생활도 재미가 없고 타성적이 되는데, 그냥 식상하다는 것이다. 즉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데, 물론 안 하면 더 편하다" 라는 식인데, 그러니 "신앙이고 뭐고 간에 내 몸 편한 것이 최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앞으로 많이 나올 텐데, 물론 지금도 적은 것은 아닌데, 그런 조짐이 군데군데 보이고 있다는 말이다. 재미로 교회에 나가는데, 그런 재미가 없으니 당연히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모두 다 무엇인고 하니, "나는 나를 위해서, 즉 아담의 형상을 위해서 버티겠다"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형상이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 아담의 형상을 계속 유지하고 키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자기 아담의 형상을 누가 건드리고 귀찮게 하고 부담을 주면, 자기 쪽에 대번에 얼굴을 돌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오직 복음만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있고, 내가 있고" 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건 아담의 형상이니 말이다. 그것은 아담의 형상을 기독교로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즉 "하나님이 있고 내가 있고, 그러니 하나님에게 잘 보여서 내가 잘 되자" 라는 것은, 아담의 형상인 자기 자신에 대한 유지보수를 위해서 하나님과 거래에 나선 것이고 교제에 나선 것인데, 그것은 일반 모든 종교에 다 있다는 말이다.

◈ 이스람교 교인들의 궁디를 보라 !!

그게 궁금하면 저기 이슬람교를 한번 보라는 것이다. 금요일마다 궁디를 쳐들고 엎드려서 기도하는 꼴을 말이다. 그리고 하루 중에서도 오후 5시가 되면 일을 하다가도 자기들 메카를 보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그것을 왜 합니까?" 라고 물어보면, "하지 않으면 찜찜합니다" 라고 하는데, 누가 찜찜한가? 본인이 찜찜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신을 도입한 것으로, 그것을 '신의 영광' 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제가 이번에 나오는 책에다가 "칼빈주의는 이단이다" 라고 써놓았다는 것이다. 신의 주권, 신의 영광,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상식적이고 이방종교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성경의 주제는 전혀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인데, 왜냐하면 그런 신의 주권은 모든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개혁주의 신학에서 얼마나 써먹었는지 모르는데 말이다.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여러분의 돈을 먼저 바치세요" 라고, 그렇게 해서 교인들로부터 얼마나 돈을 뽑아내었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물론 교인들은 신의 주권을 건드리면 저주를 받는 줄 알고 바치고 말이다. 그러니 결국 노림수는 무엇인가? 말은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고 하는데, 자기 자신의 안정, 즉 자신의 번영과 발전이고 확대이고 팽창이라는 것이다.

교재 206페이지를 다시 보자.

** 인류의 원대한 꿈이 최후의 날을 취소하지 못한다. 끝은 존중되어야 한다. 진행 중인 인류문명이란 크레용으로 색칠해놓은 얇은 도화지와 같고, 밤하늘을 장식한 불꽃놀이일 뿐이다. 

◈ 끝은 존중되어야 한다 !!

여기에 보면 "끝은 존중되어야 한다" 라고 되어 있는데, 과연 이 세상에서 끝이 존중되는가? 오늘날 사람들이 이 끝을 얼마나 무시하는지 모르는데, 학교에서 끝을 이야기하는가? 끝을, 즉 종말을 말이다. 왜 그런가? 그 마지막을 이야기하게 되면,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들이 소급되어서 모두 다 부정을 당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전도서 7장을 보면 무엇이라고 하는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라고 하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결국 마지막 너의 모습은 곧 초상집이다" 라는 것인데, 즉 '쉬욱' 하면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전 7: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전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밤하늘을 장식한 불꽃놀이라고 하는데, 불꽃놀이는 어떠한가? 터질 때는 그야말로 화려하지만, 5초만 지나고 나면 너무나도 적막하고 짙은 어둠만이 깔리게 된다는 것이다. 방금 전에도 뭔가가 번쩍했는데, 그런데 잠시 이야기한다고 고개를 한번 돌리고 나니 그 아름다운 불꽃이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불꽃이 그냥 재가 되어서 둥둥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나라에다가 무슨 인간적인 것을 가미해서 꽃을 만들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불꽃도 꽃인데 말이다. 굳이 불꽃을 이야기하지만, 그 불꽃이 바로 인간의 장렬한 최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사실 별로 장렬하지도 않지만 말이다. 그래서 윤시내가 그렇게 자신을 불꽃처럼 태운다고 노래를 했는지 모르겠는데(ㅋㅋ), 많이 태워보라는 것이다. 하여튼 대중가요는 인생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인간의 소박한 꿈들도 무산된다. 희망도, 기대도 밤하늘의 폭죽처럼 잠시 곱게 타오르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마지막에 관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인간의 저항도 극에 달한다.  

◈ '마지막'에 관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

인간은 이 '마지막'에 대해서 속이 뒤틀리면서 그 마지막 커튼을 열어제쳐 보려고 하는데, 왜 그런가? 그 마지막을 알아야 자기가 대처를 하겠다는 것인데, 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는가? 자기 자신이 곧 마지막인데 말이다. 즉 커튼 색깔과 자기 옷 색깔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인간은 그 마지막 커튼으로 자기 옷을 만들어서 입고 말았는데, 즉 인간은 그 마지막의 하나의 부분이고 부속품이란 말이다. 그렇게 인간들이 모여서 마지막을 구성하는데, 그것은 마치 얼굴에 가득히 꿀을 쳐발라놓고는 벌들이 있는 곳에 가서 "왜 이렇게 벌들이 달라드노?"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자기 얼굴에 꿀이 뒤범벅이 된 줄도 모르고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귀가 달려드는 이유가 무엇인가? 마귀가 좋아하는 것들이 자기에게 발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게 곧 죄인데 말이다. 돌이 떡이 되게 하려고 하고, 또 돈과 세상 권력과 인기를 좋아하고, 그렇게 마귀가 좋아하는 것들이 붙어있으니 당연히 마귀가 달려든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것을 씻어내면 된다는 것이다. 보통 비누가 아닌 '마지막' 이라는 상표로 된 비누로서 말이다. 성도에게는 매일 매일이 언제나 마지막인데, 그러니 늘 감사할 뿐이라는 것이다. "주여, 제가 아직도 살아있네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인간들은 마지막을 싫어한다. 그 '마지막' 이라는 문마저 열어봐서 그 뒤쪽을 보고싶어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마지막 엄포'도 사실은 마지막이 아니라 중간쯤에 날려보는 공갈에 불과한 셈이 된다. 사람들은 '마지막'이란 차단막을 믿고 싶지 않다. 아직도 여전히 남아있는 '마지막' 뒤에 있는 '마지막'을 스페이스로 갖고 싶어한다. 그러나 끝까지 인간의 착각이다.  

계속해서 207페이지를 보자.

**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마지막'은 인간들이 열어제칠 수 없는 막이다. 진짜 '마지막'이다. 그 이후나 그 이상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그런 '마지막'이다. 노아 때와 다르다. 방주의 경우, 방주 안으로 잠시 들어갔다가 얼마가 지난 후, 다시 그 방주 밖으로 빠져 나옴으로서 방주가 한시적 종말이라는 감을 주었다.

◈ 노아의 마지막 !!

여기에 노아의 마지막이 나오는데, 그 당시 노아방주에 있어서 마지막은 무엇이겠는가? 이런 것이 좀 어려운데, 이번 수련회에서도 했지 싶은데 말이다. 노아의 방주시대에도 사람들이 살았는데, 그래서 노아가 그들에게 전도했다는 것이 유다서(베드로전서?)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전도를 열심히 했는데, 마지막 날이니 사람들이 듣지 않아서 그렇지 말이다.

그 당시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그렇게 일상적인 생활을 다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다 어디로 갔는가? 그들에게 있어서 '마지막' 이라는 것은, 자기 짧은 인생이 사라지는 것을 두고서 마지막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눅 17: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그런데 노아의 마지막은 무엇인가? 한 개개인의 마지막이 아니라, 그 전체를 다 포괄해서 땅 자체가 그만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역시 주님의 마지막도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 개개인의 그런 마지막이 아니라, 그렇게 우리 개개인이 덮고 깔고 앉아있는 담요를 왕창 다 거두어 가는 것, 그것을 두고 주님의 마지막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내가 쉬는 날에 집안 대청소를 하는데, 남편은 소파에서 담요를 하나 깔고 앉고서는 리모콘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고 말이다. 그러면 아내가 처음에는 방해가 된다고 비켜달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말을 듣지 않으면 담요를 왕창 끌어당기는데, 그러면 남편은 그 담요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끝까지 붙잡고 늘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ㅋㅋ).

◈ 주님의 청소용구는 '화염방사기' !!

그러니 환경자체가 찌그러지면서, 혹은 불에 타면서, 무슨 말인고 하니, 노아 때의 사람들이 땅위에서 살았는데 그런데 그만 땅만 없어지니 살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때는 무엇인? 물로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불로서 하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 그 양쪽을 짜부라들도록, 그렇게 불에 태워진다는 것이다. 아래쪽과 위쪽을 다 불로서 말이다.

우리 인간의 몸을 이루는 세포는 단백질로 되어있고, 이 단백질은 겨우 500도가 되면 다 녹아버린다는 것이다. 단백질의 구성요소인 아미노산이 그렇다는 말이다. 즉 인간의 형질이 물처럼 녹아진다는 것이다. 마치 태양을 가까이 하면 녹아서 소멸이 되듯이, 그렇게 모두가 다 없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고 하니, "주께서 청소를 하신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대청소를 하시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을 개인적인 마지막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보지 말고, 눈을 좀 더 크게 떠서 '너와 나'의 마지막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가 모두가 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게 된다는 점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마지막'이라는 찬 기운은 신체 주변만 엄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까지도 접수하여서 인간 자체를 '마지막 존재물'로 규정해버린다.

◈ 인간은, 마지막을 위한 장식물 !!

그러므로 우리 인간자체가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서 설치되어있는 구조물이고 장식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 인간들은 어떠한가? 인간은 '역사' 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 역사의 끝을 가지고서 마지막이라고 우기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의 끝을 마지막이라고 말이다. 

그런 역사의 단절이 일어나면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고, 거기서 승리를 즐기는데, 이것은 마치 육상선수가 허들을 넘듯이 그렇게 넘고자 한다는 것이다. 즉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싶어한다는 것인데, 그것을 4글자로 줄이면 '하면 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TV에 강사가 나와서 매일같이 하는 소리가 곧 이것인데, 그래서 마지막에 항상 무엇이라고 하는가? "너무 절망을 하지 마시고, 하고자 하면 반드시 이룰 겁니다" 라고 말이다. 도대체 이루기는 무엇을 이룬다는 말인가? 기껏해야 마지막 때 불에 타는 장식물을 하나 더 설치할 뿐인데 말이다.

교재 208페이지를 보자.

** 종교계도 그러했다. "종말이다, 끝이다, 이제 진짜 망했다. 하늘 저편에서 메시아가 천사들을 대동하고 곧 들이닥친다" 라고 호들갑을 떨 때에도 종교계 내부에서조차 대중들에게 희망의 대비책을 마련해주었다. 뭐든지 그릇에 집어넣고서 심하게 흔들어보면 담겨있는 무형체 속에서도 형체를 가진 덩어리가 조성되듯이 어느새 '되는 수'가 생긴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살아있는 학이 되기 위해 '종이학을 천 번' 접는 오기로 살아간다. 양이 쌓이면 언젠가는 질적인 변화를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이가 학이 되기 위해서는 999번을 접는 것에 멈춰서는 안 된다. 하나를 더 만들어 1,000번을 채우면 반드시 학이 되는 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열성 있는 추진력에 가속도가 붙으면 무엇이든 새로운 창조물이 나온다는 점을 목표로 한다.

◈ '믿음 만들기' 심화학습 프로그램 !!

종교계에서 뭐라고 하는가? 마지막 때는 믿음으로 영접해야하기 때문에, 그러한 믿음을 만들어주는 학습 프로그램이 가동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반복학습이고, 일종의 심화학습인데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목사님, 믿음이 없습니다" 라고 하면 특별교육을 시켜주는데, 즉 믿음을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언제까지인가? 믿음이 생길 때까지 말이다. 누가 그렇게 하는가? 물론 목사인데, 또 교인들은 그것을 원하고 말이다. 999번이 안 되면 1,000번을 해야만 하는데, 그렇게 1,000번을 접어서 학이 되는 사연을 전영록이 말했는가? 이것도 역시 대중가요에 있는데 말이다(ㅋㅋ).

완전히 오기수준인데, 새벽기도도 39일이 아닌 40일을 해야하고 말이다. 그것도 안 되면 금식기도를 해야하는데, 아무튼 무조건 믿음이 생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믿음이 생기는가? 생기지 않는가? 놀랍게도(?) 생긴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래서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잘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이 목표가 정해지게 되면 반드시 그 목표대로 다 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인이 목표를 정했기 때문에, 목표에 도달한 것이 어떤 상태라는 것을 누가 잘 아는가? 본인이 제일 잘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에 도달하면 자기가 결정하는데, "됐어, 됐어. 이미 목표에 달성했어" 라고 말이다. 물론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다. 즉 "이것이 믿음이야. 그러니 이제 금식을 그만해도 되겠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목사님, 감사합니다. 시키는 대로 순종했더니만, 드디어 믿음이 생겼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 교회인가? 보습학원인가?

하지만 진짜 믿음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자기가 했던 그 모든 것이 가짜 믿음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곧 진짜 믿음이라는 말이다. 즉 믿음은 자기가 행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인데, 그것이 성경말씀이 이야기하는 믿음인데, 그런데 자기가 행한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인간에게서는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언제나 가짜 믿음만 나오지만 말이다.

그러니 "해서 안 될 일은 없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여기서 교회의 존재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없는 믿음을 만들어주고, 없는 소망을 만들어주고, 그리고 없는 사랑을 만들어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천국에 보내주는, 그런 일종의 '보습학원 겸 여행사' 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해서 안 될 일은 없다" 라고 격려해왔다. 신이 비록 벌을 주는 신이라고 해도 인간의 의로움이 그것마저 축복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종교적 힘으로 지상의 세계와 영생의 세계를 연결하여 영속성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절대 거룩, 절대 선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이루는데 있어서 인간이 신에게 협조하면 신도 인간에게 타협조로 나온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

이것이 바로 무엇인가? 이것이 곧 칼빈주의이고,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말이다. 즉 "절망하지 마시고, 다시 한번 용기를 가지십시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즐겨하는 설교를 한번 여기서 해보자면 다음과 같은데, 한번 들어보자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지옥도 만들었지만 천국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만들 때부터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여러분을 구원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거기에 호응만 하시면 됩니다. 믿음으로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과 순종인데,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순종하시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여러분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러니 안 된다고 하지 말고, 된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아멘??)

이러한 것을 듣기 싫어하는 자가 있겠는가? 교인들이 평소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목사가 대신 해주는 것인데, 그러니 그 얼마나 훌륭하고 좋은 목사냐는 말이다. 하지만 진짜 믿음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주님, 어서 빨리 심판해뿌소. 왕창 다 조지뿌소" 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가? 자기는 매일같이 죽어 마땅함을 깨달으면서 살아가니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기는 진작에 죽어야 한다는 것을 진작에 접수했기 때문에, 지금 자기가 살아있는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것이지, 그것이 아니라면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즉 "주님의 은혜로 살고, 주님의 피로 용서함을 받아서 삽니다. 죄인이 십자가의 피가 아니면 어떻게 감히 산다고 하겠습니까?" 라고, 그렇게 십자가만을 증거하라고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내가 죽어서 반드시 천국에 가리라" 라고, 그렇게 자기 위주로 성경을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 구원위주로 하면 말이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예수님 위주인데, 즉 예수님을 위한 성경말씀이란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종말이니 멸망이니 하는 것은 그냥 하나님께서 인간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겁주기 멘트'로 보고 있다. 신의 존재를 알아모시면 종말 발언은 곧장 철회된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자아보호'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바로 이러한 성향자체가 죄였던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그렇게 강도짓을 해놓고 자기 보호를 하려고 하는 것이 곧 인간이란 말이다. 도대체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려면 창세기 2장에서 "정녕 죽으리라" 라는 내용이 지워져야 하는데, 그 말씀이 엄연히 있는데도, 선악과를 따먹고 살려고 설치는 것이 인간이란 말이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세상 파멸은 하나님께서 복음의 가치를 온 우주에 뽐내기 위한 수순이다. 하나님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산 정상에서는 찬바람이 세차기 불기 마련이다. 성도가 되었다면 이 종말이라는 산꼭대기에서 불게 되는 환란의 바람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 성도의 가치란 여기에 있다.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에 순종으로 합류되어있는 지점에 성도가 위치한다.

◈ 성도는 가치는?

우리가 종말을 알 때 비로소 이 세상을 알게 되는데, 즉 "아하, 이래서 이 세상은 망해야 하는구나" 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보면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에 순종으로 합류되어있는 지점에 성도가 위치한다" 라고 하는데, 이것을 한번 설명해보자는 것이다.

성도라는 것이 일단 성도 본인의 것은 아닌데, 즉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값으로 산 주의 것이다" 라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성도의 몸이 자기 것이라고 하면, 자기가 다 알아서 구원을 시키고 해야하는데, 무척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도의 몸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하면, 주님의 것이라고 하면,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려는 시도들은 다 쓸데없는 짓이란 말이다.

◈ 성도는, '주님의 것'으로서 !!

그렇다면 "성도가 되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되는가?" 라고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그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으로서 해야될 일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주님의 것'으로서, 즉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는 성도의 몸을 통해서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러한 인간도 구원될 수 있습니다" 라고, 그렇게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누구를 앞장세운다는 말인가? 그것은 성도가 된 자를 앞장세우는 일을 하시는데, 그게 바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라고 하는, 즉 "예수님은 이런 나도 구원했습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그러한 일을 누가 잘 보여주는가? 그가 곧 사도바울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전에는 훼방자고, 핍박자고, 포행자고, 그렇게 죄인 중에 괴수였는데, 바로 그러한 자기 자신을 창세 전에 주께서 택하시고 복음을 알게 하셨다고, 그런 고백을 하면서 사도바울은 이 세상을 살았다는 것이다.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하, 나 같은 인간도 구원이 되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때 말하는 '나' 라는 의미는 전혀 잘난 '나'가 아니고, 말씀 앞에서 전혀 제대로 살지도 못하는, 그러한 자기 자신을 두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즉 "아하, 나 같은 인간도 구원이 되는구나" 라고 말이다.

우리가 결코 위대한 인간이 아닌데, 자체적으로 전혀 위대한 인간이 될 수 없는 인간도, 위대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위대한 인간이 좋은가? 아니면 성도가 되는 것이 좋은가? 위대한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없는데, 오히려 세리와 창기가 되어야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바로 세리와 창기이고, 또한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안다고 하면, 그 순간에 이미 성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이 마지막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이다.

◈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예를 들자면, 그가 바로 욥인데, 왜 하나님은 욥을 사용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다 빼앗아가기 위해서인데, 사랑하는 자식과 재산을 모두 다 말이다. 그래서 욥을 사용하셨는데, 욥은 실제로 모두 빼앗겼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욥이 뭐라고 하는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라고 하는데, 즉 복을 주신 자가 저주도 주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주님께서는 저의 몸에서 주님 마음대로 들락날락하세요. 저는 그것 때문에 존재하는 놈입니다" 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모든 것을 주님께서 알아서 주님 마음대로 사용시하라는 것이다. 즉 "이러한 나 같은 죄인도 주님의 약속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용될 수만 있다면 고마울 뿐입니다" 라는 고백이라는 말이다.

(욥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그러니 하나님의 존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즉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자기는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약속이 아닌 신의 존재가 되어버리면 이슬람교가 되는데, 개혁주의 신학이 되고 말이다. 그러한 신의 존재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 즉 십자가의 복음을 위해서 쓰여지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성도의 가치란 여기에 있다.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에 순종으로서 합류가 되어있는 지점에 성도가 위치한다.

(살후 1:6)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살후 1:7)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살후 1: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살후 1: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 여러분은, 예수님의 재림이 2012년 계획에 있는가?

여기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에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우리 성도 자체를 주님께서 소자로 사용하시는데, 그러니 우리를 환난에 처하게 하는 자는 환난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난을 받는 우리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시는데, 그게 주님이 하시는 공의라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 7절에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라고 되어있는데, 오늘강의는 이것을 설명하고 마치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는 예수님의 재림이 올해 2012년에 짜놓은 여러분의 계획에 들어있는지 궁금한데, 혹시 장로님의 2012년 계획에는 들어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님께서 오십니다" 라는 약속을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성도' 라는 것을 '나' 라는 것을 따로 껍데기로 만들어놓고는, 그 안에다 성도를 집어넣어서 자기 계획의 일부로서만 품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깨트리면서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집안에 전기세가 갑자기 많이 나왔다는 것이다. 자기는 아끼고 아껴서 전기를 썼는데, 그런데 늙은 영감탱이가 그것도 모르고 춥다고 전기 히터를 많이 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짜증이 나있는데, 바로 그때 주님이 재림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기세 몇 푼이 별 의미가 없는데, 그것이 바로 성도답게 쓰여지는 모습이란 말이다. 

그렇게 늘 성령께서 책망을 하시는데, 약속의 말씀에 기준해서 말이다. 그러니 "올해 3월에 주님께서 오신다" 라고 하면서 새해계획을 잡는 사람은 없는데, "그런 것은 주께서 알아서 하시고, 저는 제가 할 것을 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 할 것을 하는데, 그런데 가운데 주님께서 전혀 우리의 허락도 없이 마치 한의사가 침을 놓듯이, 그렇게 성령을 침을 놓는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에게 길다란 탯줄이 달려서 엄마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듯이 말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말씀의 영양분을 공급받는데,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어디 가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즉 약속의 말씀에 의해서 빼도 박도 못한다는 것이다.
 
◈ 그건 '너', 바로 '너' !!

바로 그럴 때 우리는 환난을 받는데, 늙어서 전기세 몇 푼을 아낀다고 마누라와 싸우면서 받는 그런 환난이 아니고 말이다.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천사와 함께 오신다는 것으로 인해서 환난을 받는다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 주님은 안식으로 되갚아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신분자가 너희이다" 라고 지적하는 순간이고, 그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 : 당신은 무엇 때문에 욕을 들었지?
* 성  도 : 예, 예수님께서 천사와 함께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 때문에 욕을 먹었습니다.
* 예수님 : 그렇다면 너는 성도로서 안식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 성  도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주님의 심판을 즐겁게 반기면서, 우리의 입술에서 서슴없이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하는 기쁨의 고백이 항상 넘쳐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03,04 오후 5시에 마침.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나의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 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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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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