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62강 외부개입

피/피 2012. 8. 29. 10:54

피62강 외부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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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62강 외부개입

[12 대구강의 1] - [피 62] - 외부개입

                                                   12,01,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이미 보고' 기뻐한 아브라함 !!

오늘은 교재 195페이지부터 보겠습니다.

** 이미 있다는 것은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에게 큰 걸림돌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걸림돌을 유감없이 사용하신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 8:57)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요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요 8: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여기 56절 말씀에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라고 하는데, 여기에 '볼 것'이 나오고, 이미 '보고' 라는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두 눈동자가 어디에 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단편적인 역사만을 생각한다면, 즉 역사를 직선으로 보면 어떠한가? 아브라함은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그의 두 눈동자도 이미 감겼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보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 그래서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런 역사적인 단편을 가지고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해석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외부의 다른 세계를 전제로 해야하는데,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위의 세계'를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위에서 났고, 너희는 땅에서 났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해석은 위로 아래, 하늘과 땅이라는 두 개의 판때기를, 즉 두 개의 판을 설정해놓고, 그렇게 서로 주고받고 주고받고 해야 성경해석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역사를 해석해도 그것은 성경해석이 아닌데,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의 역사를 실컷 이야기해놓고, 거기에다 예수님을 집어넣어 버리면, 예수님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이해하는 식으로 당신도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게 무슨 성경해석이냐는 말이다. 그것인 인간의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성경해석은 어떻게 해야하는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아브라함은 이미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의 영역에 따로 설정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 '우리들끼리'는 안 돼 !!

그런데 그런 산 자의 영역에서 자기들끼리 폐쇄적인 영역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보고 기뻐했다" 라고 했으니, 그 산 자의 영역에서 무엇을 보았다는 말인가? 아랫동네, 즉 땅의 동네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땅은 하늘을 알지 못하지만, 하늘은 이미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내려다본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막강한 외부의 시선이, 즉 외부 힘의 개입이 없이는 성경해석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들끼리'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들끼리 하는, 그런 성격해석은 없다는 것이다.

◈ 오직 '땅'의 의미만 !!

'슐라이에르마흐' 라는 신학자로부터 시작해서 성경해석에 대해서 많이 나왔는데, 수많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말이다. 철학계통에서는 '철학적 해석법' 이라고 해서, 리꾀르, 가다머, 델타이, 레비나스, 하이데거, 들뢰즈 등등, 그 온갖 것들이 인간들이 말하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의미는 항상 위의 것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그런 위의 것은 없다고 여기고, 이 땅에서 인간들끼리 소통이 되고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것들만, 그런 의미만 한번 찾아보자고 해서, 그것이 바로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타자, 혹은 타인을 통해서 자기 자기에로 돌아올 때만, 그럴 때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김춘수의 '꽃'의 경우에, 그 꽃이 전에도 거기에 있었지만 자기가 그 꽃에 관심을 가질 경우에만 자기에게 의미가 있다고, 그렇게 자기에 돌아올 때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사무실에 그렇게 꽃이 있어도, 거기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김춘수 밖에 없고, 다른 직원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먹고살려고 일을 한다고 바쁘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난초가 하나 있는데, 이것의 이름이 뭐지요? '군자란' 입니까? 아무튼 이렇게 있는데, 여기에다 신경을 쓰는 사람은 물주는 사람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언제 거기에 있었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관심도 없다는 말이다.

◈ 왜 윤리이고 도덕인가?

그렇게 인간은 자기에게 나와서 타인을 통해서 자기 의미를 찾는데, 그러한 의미의 순환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끄집어내는고 하니, 너무 악한 관계를 맺으면 자기가 살기가 불편하니, 여기서 '윤리' 라는 것을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윤리를 끄집어내어도 소용이 없는 것이, 이러한 윤리가 도대체 누구 좋아라고 윤리이냐는 것이다. 

"역시 나는 착해" 라고 하는, 즉 자기에서 발사되는 레이저 광선이 윤리를 통과해서 도덕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윤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고, 도덕은 자기 속에 자성되어있는 자기의 선함을 말한다는 것이다. 보통은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만, 서로 구분을 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착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타인에게 성의를 다하는데, 그렇게 해서 결국 돌아오는 영광은 누구의 영광인가? 그것은 곧 자기 영광인데,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나는 너무나 착한 존재이기 때문에 죽어도 천국에 갈 거야. 왜냐하면, 윤리와 도덕적으로 민감하고 감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이것은 어디만 생각하니 그렇다는 말인가? 아래동네만을 생각하니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윗동네를 집어넣게 되면, 이 위의 동네를 신의 세계라고 간주하고, 그렇게 평소의 버릇이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사람들이 윗동네에 들어오게 되면, 그 윗동네는 어디에 포함이 되는고 하니, 자기에게서 나온 타인의 일종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즉 남의 일종의 하나로서 윗동네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와도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평소에 이웃을 사랑하듯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역시 나는 예수님마저도 사랑하는, 그런 훌륭한 사람이다" 라고, 그렇게 자기는 그 정도로 잘난 사람이고 또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 왜 제사가 인간에게는 무용지물인가?

그래서 윗동네와 아랫동네의 유일한 교섭의 방법을 어제오후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제사' 라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이 제사를, 즉 히브리서 9장 14절을 언급하면서, 이제 제사가 어떻게 되는고 하니, 퍼펙트, 즉 완벽한 모든 제사는 수은제든 낙헌제든 간에 이제는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끝나는가? 오직 흠 없는 분의 죽으심, 즉 십자가로서 윗동네와 아랫동네로 연결이 되게 된다면, 자기에게 의미를 주어서 윗동네인 하늘나라까지도 자기의 것으로 포섭하려고 하는 모든 인간적인 시도가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모두가 실패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 평생 제사를 드리면서 지옥으로 !!

어제 오후설교시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엇을 했다고 했는가? 십일조를 했는데, 즉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를 3일마다 바쳐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수은제(thank offering)' 라는 것은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드리는 제사인데, 즉 특별감사헌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낙헌제(freewill offering)'는 평소에 감사하는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제사를 제 아무리 드려봐야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드리면서 지옥에 간다는 말이다.

(암 4: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 일 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암 4: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렇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 인간을 보고 "니, 잘해라" 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니 대신 다른 분이 어디에서 죽었다?" 라는 것인데, "니 말고, 니가 니 자신을 조절하지 말고, 니가 니 업적을 덧입히는 것이 아니고" 라는 것인데, 어디에 계신 분이 출동하는가? 위에 계신 분이 출동하는데, 그것이 바로 메시야라는 것이다.

그러니 제사를 드리라고 해놓고, 그런 제사법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모든 제사는 위에서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릴 완벽한 제사와, 우리 인간들이 드리는 제사를 한번 비교해보라는 것이다. 그것을 어디 감히 비교할 수 있는가? 접근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열에 !!

여기서 더 어려운 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이 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고 하니, 우리 인간은 '육'에 속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혈육에 속했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에 속했는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서, 즉 족보가 없다는 것이다. 아비도 어미도 없는 말이다. 하늘에 속한, 즉 멜기세덱의 반열에 속했다는 것이다.

(히 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그에 반해서 우리는 혈육에 속했는데, 육으로 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육이라는 것이다. 그 육에는 좋지 않은 조짐이, 즉 선악과를 따먹어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는 그 조짐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싶어도, 우리 속에는 또 다른 법이 있어서,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면서, 그 하나님의 법의 취지와 달리 우리 자신의 영광을 취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죄가 된다는 것이다.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그러니 죄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들끼리 노닥거릴 때는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오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너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웃기고 있네. 너거들은 죄의 자손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 마귀 새끼들이, 감히 어디서 !!

그것이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나오는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하는 대목인데 말이다. 간음한 여인이 잡혀왔을 때,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라고 하는데, 그 다음에 예수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너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우기는데, 내가 보기에 너거 아비는 마귀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귀신이 너거들 아비다" 라는 말이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 8: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이것은 바로 위에서 보았을 때 평가가 어떠한고 하니, 자기가 자기 자신을 보았을 때, 즉 자기가 자기 잘남을 보는 평가와는 너무나도 판이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그 출발을 어디서 하라는 말인가? 땅인 아닌 위에서, 즉 예수님의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 '위'에서 출발해서 '나'에게로 ??

그러면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위'에서 출발해서 '나'에게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노선이 있는가? 무슨 말인고 하니, 처음에는 위에서 출발했는데, 그만 도중에 자기에게로 와서,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 위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허용이 되는가? 성도에게 말이다.

전혀 허용이 되지 않는데, 그런데 목사들이 뭐라고 설교하는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해놓고는 다시 관점을 어디로 바꾸는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 행함을 가지고 열매를 맺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점자체가 도대체 어디에서 바뀐 것인가?

사실은 바뀐 적도 없는데,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는 관점자체가 누구의 관점인고 하니, 자기의 것을 챙기려고 하는 관점이고, 그렇게 하니 너무나 허전해서 뒤에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라고 집어넣어 놓고는, 즉 위와 아래를 교류하는 성경말씀을 순전히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을 해놓고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성경에 있는 대로 해석했는데, 그게 무엇이 잘못인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즉 "성경에서 '하라' 라고 해서 했는데, 그게 무슨 문제인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성령으로, 즉 예수님의 관점으로 !!

그들은 전혀 외부의 개입을 모르는데, 하지만 그것은 그냥 외부의 개입이 아니라, 외부의 관점의 개입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의 영으로, 즉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이란 말이다. 성령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데, 우리 인간을 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기도하면 응답이 된다" 라는 것은, 우리 소원대로 기도하면 응답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니, 예수님의 관점으로 기도하면 응답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령 안에서의 기도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예수 안에 있게 되는데, 이렇게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의 표현대로 하면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이미 죽은 자로서 간주하고 작살내는, 그러한 주님의 관점 안에, 그 안에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육을 가지고 있으니, 늘 피어내는 우리의 것들이 무엇과 부딪치게 되는고 하니, 우리 안에서 피어나는 우리의 야망과 욕심과 자존심과 같은 자기 영광이 성령 안에서 무엇과 결합이 된다는 것인가? 위에 계신 그리스도의 관점과 항상 부딪치면서 우리 자신의 실상을 다시 한번 파악하는 가운데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임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지금 참지를 못하고 이번 수련회에 할 것이 미리 다 땡겨서 하고 있는데 말이다(ㅋㅋ).

◈ 철학자들 - '인간의 주체는, 타인에 의해서 우발적으로' !!

다시 정리하면, 성경해석은 항상 외부의 영역에 의해서 개입을 받아야 하는데, 즉 땅에서 우리들끼리 어떤 의미를 찾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의 의미를 찾는, 즉 예수님과 예수님을 자기의 타인으로 간주하는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철학자들에 의해서, 즉 레비나스나 리꾀르나 라캉에 의해서 이미 충분히 논의가 다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나의 나 된 것은 타인의 주체에 의해서 된 것이지 나의 주체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데, 즉 "나는 타인에 의한 사건에 의해서 우발적으로 발생된 것이다" 라고, 그렇게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이것은 이 정도로 하고 교재를 살펴보겠는데, 모르면 얼마든지 나중에 다시 하면 되니 말이다. 교재 195페이지를 계속해서 보자.

** 인간에게 있어서 '내가 여기 있다' 라는 것은, 지금까지 흘러온 모든 대자연의 역사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자에게 집중되고 집합이 되어있다는 의미이다. 유구한 역사가 만들어낸 작품이 바로 '나' 라는 존재며, 그 확실한 증거가 곧 '나' 라는 것이 대자연을 회고하듯이 살피고 있다는 그 자체이다.

◈ '내가 여기 있다' 라는 의미는?

여기에 보면 "내가 여기 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여러분 자신이 어느 정도 논리적 사고가 되는지 측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내가 여기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남이 없을 때는 그런 말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항상 뭔가가 자기보다 먼저 있을 때, "나도 여기에 있다" 라는 것이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고 하면, "내가 여기 있다" 라고 말할 필요조차도 없는데, 그런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방금 읽은 교재의 내용이기도 한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안드로메다' 라고 하는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성운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이것이 은하계 바깥에 있는데 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안드로메다 성운은 거기에 분명히 있는데, 천체 망원경으로 보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있다는 것이 의미를 가지려고 하면, "안드로메다가 있다" 라고 하는 '내'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러니 결국 "안드로메다라는 별 집합체가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고, 내가 그것을 바라봐 줄 때 비로소 안드로메다가 거기에 있으며, 거기에 안드로메다가 있다는 것을 내가 말을 함으로서 나는 역시 있는 값을 한다"는 라는 말이다.

그러니 상대가 있어서 서로 서로가 '있음' 이라고 하는 공통적인 영역을 형성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안드로메다와 '나' 사이에 빈 공간이 있다고 하면, 사실은 빈 공간이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여기 교재에서 연이어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96페이지 살펴보자.

** 곧 자연의 시간적 공간적 요인이 나를 만들었으며, 나는 대자연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인정하는 관계 속에서 결국 오로지 나만 존재하고 나 외는 없는 것이다. 

◈ 빈 공간은, '나'의 의미가 흘러가는 매개체 !!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굳이 안드로메다까지 멀리 갈 필요도 없이 태양까지만 가도 되는데, 사실은 태양도 엄청 멀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태양과 '나', 이렇게 둘이 다 있다고 했을 때, 만약 '나' 자신이 그 태양이 딱 붙어있다고 한다면, 타지 않고 말이다. 그 '나'는 태양과 따로 있다는 말을 할 수 없고, 그 태양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태양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그 태양과 '나' 사이는 무엇인고 하니, 뭔가 거리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논리적인 훈련을 하고 있는데, 아무튼 그렇게 떨어져 있어야만 하는데, 그런데 이 거리는 빈 공간이 아니고, 어디에 봉사하고 있는가?

'내'가 저것을 보고 "야, 태양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빈 공간이 마련되어있기 때문에, 이 빈 공간 자체는 '나'의 의미가 흘러가는데 필요한 일종의 매개체가 된다는 것이다. 즉 빈 공간이 아니라 "나의 의미가 충만하게 채워져 있는 나만의 위한 세계가 된다" 라는 것이다.

◈ 형수님, 참 건강하시네요 !!

이것을 논리적으로 따지면 어렵지만, 그러니 아주 상식적인 것이란 말이다. 이런 것이 우리 주위에서 굉장히 많이 쓰이는데, 예를 들어서, 어떤 아줌마가 길을 가는데, 그런데 그 아줌마가 껌을 마구 요란하게 씹으면서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아줌마라고 해도 너무 심하다. 못 보던 사람인데, 우리 아파트에는 무슨 일이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나중에 볼일을 다 보고 집에 와보니 그 아줌마가 있는데, 알고 보니 먼 친척이라는 것이다. 자주 만나지 않아서 몰랐는데 말이다.

그러니 평소에 자기의 세계 속에 들어오지 않은 아줌마는 비난의 대상이 되지만, 일단 자기 영역에 들어왔다고 하면, 즉 먼 친척인 형수라도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껌을 요란하게 씹어도, "껌을 그렇게 씹는 것을 보니 참 건강하군요"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ㅋㅋ). 

그렇게 좋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먼 친척인 형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의 세계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즉 "나의 세계에 들어온 당신을 한 편으로 인정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 세계에는 좋은 것만 남기기 위한 자기 노력의 일환으로서 그 아줌마는 이미 자기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물론 그 형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자기가 일방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형수는 자기에게 '있음'이 되어야 하는데, 누구를 위해서 인가? '나'의 있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있음의 재료로서 형수가 등장했다는 말이다.

남자들은 어디를 가면 왜 그리 허풍이 심한지, 도대체가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부산에 간다고 하면, "내가 부산에 아는 사람이 있다" 라고 하고, 또 어디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면 "내가 아는 여행사가 있다" 라고 하고 말이다. 그리고 괌에 갔다왔다고 하면, "진작에 이야기하지. 내가 괌에 잘 아는 사람이 있는데" 라고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도 아는 사람들이 많은지, 그것은 바로 자기 영역이 그만큼 넓혀서 그것을 관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본심이 따로 있어서, 이렇게 교회를 통해서 라든지 해서, 아무튼 그런 식으로 자기가 아는 사람을 많이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없음' 이라는 빈 공간을 마주 대하고 있는 주제자는 오직 '나'이다. 따라서 나는 그 빈 공간을 잠식해 나가면서 기어이 저 건너편에 있는 이웃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신이나 메시야까지 나의 것으로 끌어들여서, 나의 확장에 나서면 결국 이웃과 더불어 있든, 혹은 신과 더불어 있든 가릴 게 없이 하여튼 최종 있는 것은 '나 뿐인 것이다. 
 
◈ 과학이 곧 종교 !!

이것이 바로 '과학' 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과학이 곧 종교라는 말이다. 즉 자기가 확인할 수 있는 것끼리 모아서 자기 세계를 구축하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 몸 속에 암이 있다는 것은, 자기 몸을 자기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러니 그 암 세포에 방사선 치료를 하는 것은, "내 몸은 내 속에 들어있다" 라는 것을 철저히 확인하는 것이란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런데 만약에 저쪽에서 이쪽으로 누군가가 건너온다면, 나의 가치는 졸지에 어떻게 될까? 내가 그 동안 시도한 '내 영역 확대하기' 라는 것은, 곧 내 쪽을 점령하기 위한 저쪽의 시도를 모독하는 죄악이 되고 만다.

◈ '건너온다' 라는 의미는?

여기에 "만약에 저쪽에서 이쪽으로 누군가가 건너온다면" 라고 하는데, 여기서 '건너온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성경해석에 있어서 여기 아랫동네는 우리 인간이 장악했다는 것인데, 즉 터키와 같은 곳에도 이슬람이고, 또 아프리카에도 이슬람과 기독교가 싸우고 있는데, 아무리 그렇게 싸우고 해도 자기는 대한민국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것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의 공유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스포츠 뉴스만 보는데, 왜 그런가? 비록 자기는 축구를 잘 못해도, 하지만 축구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밤사이에 유럽에서 진행된 축구경기 결과가 궁금하다는 말이다. 즉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는 이미 자기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밤을 새워서 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만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그것이 박지성 팀이든 아니든 간에, 자기가 열심히 응원하던 팀이 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수천 키로가 넘게 떨어진 대한민국에 있는 자기가 그만 갑자기 밥맛도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이 이미 자기의 세계가 되었기 때문에, 그쪽에 패배하면 그만 자기가 괴롭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세계에 낯선 누군가가 저벅저벅 걸어온다고 하면, 그러면 '나'는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하겠는가? 그 사람이 적국인지 아군인지 구분을 해야하는데, 즉 "누구야? 암호는?"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자기가 익히 알고 있는 사고방식과 소통이 되고 납득이 된다면, 그 사람이 누구 편이 되는가? 자기편이 되는데, 그런데 만약에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 그만 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불통쟁이 !!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인간들과 소통이 되었는가? 그들은 예수님을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복음서에 보면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라는 표현들이 종종 나온다는 것이다.

(막 9:6)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왜 예수님은 인간과 소통이 되지 않는고 하니까, 예수님은 말씀을 따라온 반면에, 인간들을 조종하는 악마는 말씀과 반대가 되는데, 그렇게 인간은 말씀에 도전하는 세력에 잠겨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말씀을 지키려고 오셨고, 반면에 마귀는 말씀을 어기는 재미로 살아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 서로 하나가 되지 않은 흔적이 곧 십자가 !!

그렇게 서로 하나가 되지 않는데, 바로 그렇게 해서 남겨진 흔적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 라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의 죽음을 들이대는 경우에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의 실상을 파악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야, 지금까지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구나. 뭔가 크게 오해했구나" 라고 말이다. 즉 자기 중심으로, 자기 의미 중심으로 살았음을 파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해석을 하고자 할 때, 그렇게 성경해석을 하고자 하는 노림수, 그러한 사고방식 자체에 대해서 문제를 삼아야 하는데, 즉 "성경해석을 왜 하려고 하는데?" 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 책제목이 '피' 인데, 표지자체도 벌겋고 말이다. 그래서 울산에서 강의를 하는데 어떤 분은 이 책을 보고 나서, "제목이 피인데, 누가 사겠노?"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결코 소통하려고 낸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이렇듯 '나' 라는 존재 자체가 끊임없이 죄악을 유발해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다가오는 작업이 곧 예수님의 '죄인을 부르러 오심'의 작업이다.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양심'이 과연 접촉점이 될 수 있는가?

이게 무슨 의미인가? 우리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오직 십자가 복음 앞에서만 그러한데, 같은 인간들끼리 비교해서 죄인이고 말고 하는 것은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제도 잠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양심' 이라는 것을 신과 인간이 만날 수 접촉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개혁주의신학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양심은 신과 인간이 서로 같이 할 수가 있는 공유적 속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양심까지 죽은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양심은 있다는 것이다. 측은지심이라든지 해서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양심을 가지고 "너와 내가 만나는 접촉점으로 삼자" 라고 하는 생각을 인간들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무시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하나님 자신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신의 약점인데, 인간들은 그것을 가지고 큰소리를 칠 수 있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이 자꾸만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이 주신 이 양심을 가지고 나는 내 마음대로 삽니다" 라고 말이다.

◈ 서로 사이좋게 지냅시다 ??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너무 그렇게 하지 마라. 양심은 내 것이니 함부로 다루지 마라. 내가 곧 찾아갈 게" 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 인간은 "진작 그렇게 하시지. 이제 서로 사이좋게 지냅시다. 인상은 쓰지 말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즉 양심을 일종의 볼모로 잡아서 이 양심의 원래 주인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가 기독교에게 큰 소리를 치고 말이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이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 느껴지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잘못된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외부에서 "어이, 너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라" 라고 윽박지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양심의 가책' 이라는 것은, 자기 내부의 독립적인 판단기준에 의해서 자기 스스로 "이건 잘못이야"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외부에서는 "그게 아니야. 너는 최선을 다했어" 라고 하는데, 그런데 자기 내부에서 "아냐, 그게 아니야. 내가 잘못한 것이야" 라고, 스스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 인간은, 양심을 '신의 소리'로 !!

그렇게 스스로 자기를 자책하기 때문에, 거기에 필요한 기준은 자기 안의 독립적인, 즉 자기만의 개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동안 이러한 양심을 '신의 소리'로 간주해왔는데, 그래서 "내 안에 신이 있다. 왜냐하면, 날마다 내 안에서 신의 소리가 울려 퍼지니 말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기 안에서 신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고 하면, 이미 신은 인간에게 장착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이 장착되어있다면, 이런 양심은 신의 속성 중에서 하나일 뿐이고, 신은 이러한 양심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 즉 따지는 것으로, 즉 학문연구와 예술적인 작품과 같이 여러 가지로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를 들어서, 모차르트의 경우에 4살 때 작곡을 했는데, 그런데 이 모차르트를 시기한 사람이 있는데, 영화를 보면 그 사람이 자살을 했지 싶은데, 그가 뭐라고 하는가? "왜 신은 나에게 그런 재능을 부여하지 않고, 왜 저 꼬맹이에게 주었는가?" 라고 하면서 삐치는데, 아무튼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김 집사님은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지 않는지 모르겠는데, 전시회에 가서 아주 좋은 그림을 보면 "하나님은 왜 나에게는 저런 재능을 주지 않고, 저 놈에게 주었는가?" 라고 말이다(ㅋㅋ). 아무튼 우리 인간에게는 그러한 시기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은 양심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수능시험을 쳐도, 자기 아이는 학원을 3개 4개를 보내도 겨우 150점이 나올까 말까 하는데, 그렇게 철야기도를 해도 말이다. 그런데 옆집 아이는 그냥 놀면서 해도 1등급에 대학교도 서로 오라고 난리라는 것이다. 교회도 나오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왜 그리 불공평하냐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저 사람에게는 어떤 신적인 것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칼싸움을 잘한다든지, 그리고 지덕체(智德體), 즉 지식과 덕행과 체력인데 말이다.

다윗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소년 다윗이 자이언트 골리앗을 이기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다" 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뜻인가? 다윗에게는 특별한 신의 재능이 있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다윗에게 그런 것이 있는가? 다윗이 잘하는 것이 여자 밝힘증인데, 그렇게 여자를 밝히는 것이 들킬까 싶어서 미필적 고의를 가장해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상한심령인데, 하지만 사람들은 "주께서 사용하신다" 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그 사람 안에 내장되어있다" 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은 조금 전에 예수님에게 붙어있다고 했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성령이 예수님에게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디에다 붙여야 자기 속이 풀리는가? 마치 혹부리 영감의 혹처럼 말이다.

예수님에게 붙어있는 성령을 자기에게 집어넣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독자적인 신의 소리를, 여기서 '독자적' 이라는 것은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인데, 즉 "내 안에만 들어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 바깥에 있는 너는 없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양심이 아닌, 십자가로 낚아채서 !!

하지만 성경말씀이 과연 그런 것인가? 성경말씀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낚시로 낚아채어서 예수 안, 즉 십자가로 끌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런 능력이 바로 성령인데, 그런데 그것을 어디 따로 뚝 떼어서 "이것은 나의 성령이다" 이라고 주장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과연 '나의 성령' 이라는 것이 있는가?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교회가 한 성령을 마셨다고 한다는 것이다.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코미디 프로에 보면 '풀 하우스' 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자식이 9명이 있는 엄마가 옆집에서 수정과를 오랜만에 얻어왔는데, 그런데 그것을 자식들에게 어떻게 먹이는고 하니, 이렇게 병에 넣어서 튜브를 9개를 만들어서, 각 자식마다 그 튜브를 빨게 하는데, 그래서 '시작' 하면 수정과가 마구 줄어든다는 것이다. 즉 모두가 한 수정과를 마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 튜브는 가늘고, 니 튜브는 굵다" 라고 하면 정말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각자의 것이 있다고 여기는고 하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평소에 자기가 간수하는 것으로, 즉 독자적인 자기만의 것으로 인하여 자기 존재의 주체성을 찾으려고 하는 버릇이 그대로 이어져서, 성령이든 무엇이든 간에 자기 것이 되어야 안심이 되지, 남의 것이 되면 불안해서 안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버릇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주도 하나고 몸도 하나고 교회도 역시 하나인데, 그러니 교회는 하나밖에 없는데 교회가 여러 개라고 여기는 발상, 그래서 "니 교회보다 내 교회가 크다", 혹은 "니보다 내가 헌금을 많이 한다" 라고 하는 발상 자체가 이미 위에서 주고받는 교류적인, 그것이 구약에서는 제사이고, 그리고 신약에서 십자가인데, 그러한 영으로 해석하지 못하게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육으로 해석하니 말이다.

다시 교재를 살펴보자.

** 그런데 만약에 저쪽에서 이쪽으로 누군가가 건너온다면, 나의 가치는 졸지에 어떻게 될까? 내가 그 동안 시도한 '내 영역 확대하기' 라는 것은, 곧 내 쪽을 점령하기 위한 저쪽의 시도를 모독하는 죄악이 되고 만다.

◈ 인간의, 자기 영역 확대하기 !!

만약에 저쪽에서 이쪽으로 누가 건너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우리 자신의 죄성이 발각되게 되는데, 즉 자기 자신의 세계만을 구축하려는 그 죄성이 말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 하는 말씀의 의미가 제대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 하는 그 의미를 알아들으라는 것인가? 못 알아들으라는 것인가? 우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그런데 주께서는 알아듣게 만드는 작업을 성령을 통해서 하시는데, 그렇게 성령이 오시려고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먼저 지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 성령이 오셔서 그 주님의 나라에 가게 된다는 것이다.

◈ 왜 '처소'를 마련해야 하는가?
 
그러니 베드로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가지 못하는데, 왜 그런가? 아직 하늘나라에 처소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신기한 말인데, 왜냐하면 우리 생각에는 하늘나라는 넓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하늘나라에 가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처소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냐는 것이다. 즉 성령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 인간들이 이 땅에서 바라보는 천국의 넓음으로, 그런 발상을 가지고 천국을 바라보면 천국은 타워팰리스와 같은 맨션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지만 그런 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천국은 반드시 처소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이 처소의 그 구조와 모든 시스템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서 만들어진, 그런 처소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에 의해서 만들어진 처소에 우리가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다. 다른 처소는 처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 가게 되면 "아하, 우리의 죄 때문에 이렇게 희생을 당하셨구나" 라고 하면서 우리의 면류관을 주님께 반납을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집이 세어도 천국에 가서 "놔라, 이 면류관은 내 것이다. 절대로 못 벗는다. 얼마나 고생을 해서 얻은 것인데" 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인간은 천국에 갈 수도 없지만 말이다.

혼인잔치에 왔으면 미리 준비된 예복을 입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거부하고는 자기가 얼마 전에 서문시장에서 자기 돈을 주고 산 옷으로 버티려고 하면, 주님께서 "저 인간은 지옥으로 보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주최측에서 준비한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말이다. 주최측에서 준비한, 즉 천국에서 준비한 예복을 입어야 천국에 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국은 그야말로 납득이 불가능한데, 성령을 받지 않으면 말이다.

그러니 저와 같은 목사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사람들이 천국에 가야 하는데, 그런데 전혀 천국에 대해서 모르니 항상 노심초사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겨우 하루에 10시간만 웅크리면서 새우잠을 잔다는 말이다(ㅋㅋ). 

◈ 내가 죄인이라고요? 탱큐 !!

그리고 예수님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라고 하실 때, 이러한 병든 자나 건강한 자의 개념은 땅에서 만든 것이 아닌데, 성령이 오게 되면, 자기가 병이 들고 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모르는데, 십자가뿐만이 아니라, 이 모든 말씀 자체가 다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다.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러니 "당신은 죄인이야" 라는 것도 너무 너무 기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맞습니다. 저는 죄인이 맞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날 나보고 죄인이래" 라고 하면서 삐쳐서 얼굴이 벌겋게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오히려 "누가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다 해주노. 정말로 고맙구만"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97페이지를 보자.

** 하나님의 불러주심은 인간 본인의 '기대함'을 초월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의도함'과 '기대함'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자신이 주목한 것, 뭔가 기대한 바가 없이는 움직이는 법이 없다. 

◈ '의도함'과 '기대함' !!

여기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의도함과 기대함으로 되어있다" 라는 것은 훗설의 '현상학'에 나오는 것으로서, 그가 '노에마(noema)', '노에시스(noesis)' 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었는데 말이다. 즉 모든 것에 대해서 판단을 중지시키고, 그것을 '에포케(epoche)' 라고 하는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저 사물이 나에게 비치는, 저 사물을 마주보면서, 내 안에서 나오는 새롭게 생성되는 것에서 모든 것을 다시 보자" 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시간의 과거에 집약되어있는 것에 현혹되지 말고, 과거는 과거이고 지금 자기가 느끼는 색다른 것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난로가 있는데, 그래서 "나는 이 난로가 뜨겁기 때문에 손을 데지 말라고 이렇게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았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오늘 보니 "어, 여기에 손잡이가 떨어지고 없네" 라고, 그렇게 새롭게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그 이유가 다 있는데, 왜 그런고 하니, 물론 사물도 변하지만 그 사물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기 눈의 세포구조의 관리의 차원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냄비에 물을 얹어놓고는 매일 태우고 말이다. 화장실에 들어가서도 왜 들어왔는지 몰라서 머뭇거리고, 물론 불도 끄지 않고 나오고 말이다. 그것보다도 더 심한 것은, 집에 가스를 분명히 끄지 않았다고 여겨서 다시 버스에서 내려서 집에 와보면 꺼져 있고 말이다(ㅋㅋ).

◈ 하지만, 인간이 늘 새롭게 해봐야 !!

이런 것은 뭔가가 무너질 조짐인데, 그래서 현상학에서는 "항상 현재적 의미에서 새롭게 하자"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의도조차도 사실은 추억에 속한 것이란 말이다. 즉 인간이 자기의 육적인 것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데서 나왔다는 것이다. 자기 육의 넓이와 범위를 자기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모두 캐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지, 그런 것이 영적이고 어떻고 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왜냐하면, 영적인 것은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심, 즉 말씀성취와 관련된 것이지, 자기가 신기한 것을 하나 경험했다고 해서 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도취에 빠진 삶이지, 말씀완성의 기쁨은 아니라는 말이다.

서울의 가락교회에서 강의를 하다보면, 가끔은 이상한(?) 사람들이 참석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날은 중앙일보의 기자출신이라는 사람이 그날 등산을 갔다가 하산을 하면서 바로 참석했는데, 강의시간 내내 졸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몰라서 말이다. 그러니까 신기한 것을 보는 것, 혹은 재미있는 것을 보는 것과, 또 근원적으로 "내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상관없이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 '의도함'과 '기대함'으로서의 기도 !!

여기에 '의도함'과 '기대함' 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두 글자로 하면 우리 흔히 알고 있는 기도가 된다는 것이다. 즉 기도는 기대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도하는 것도 포함이 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자기가 지금 여기에 무엇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미흡함, 즉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속성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향성'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 지향성이 나와서 기도가 되고, 그 기도 속에 기대하는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의도와 기대가 다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곧 기도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하셨는데, 뭐라고 하셨는가?

◈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될 것을 위해서 기도를 하라고 하셨는가? 하지 말라고 하셨는가? 분명히 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시는데, 그런 자기의 필요를 위해서 하는 기도는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인데, 즉 지옥에 갈 인간들이 하는 말이다.

(마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 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그렇다고 하면, 천국에 갈 사람들이 기도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곧 천국의 내용과도 관련된 것인데, 즉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게" 라고 말이다. 조금 전에 말한 대로 하면, "외부의 개입이 내 안에 임하게 하옵소서"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땅의 것을 고집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고, 땅의 것을 보다 더 확장시키기 위해서 힘을 달라고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고, 하늘의 뜻이 자기에게 임하도록 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솔로몬의 기도가 응답이 된 것도, 그가 자기가 가진 것을 확장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 백성들을 오직 하늘의 뜻에 의해서 사육되고 구석구석이 다 지배가 되도록, 그것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것이다. 즉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왕국이 되게 하옵소서" 라고 말이다.

그렇게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자기를 위하여 목숨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귀영화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을 멸하는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다른 나머지들도 다 공짜로 주겠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왕상 3: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왕상 3:11)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왕상 3: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왕상 3:13)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여기서 덤으로 주는 것은 기대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런데 덤으로 주는 것에다 신경을 쓴다는 것은, 고기보다도 불 판에 더 신경을 쓰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참으로 희한하게도 덤으로 준다고 하니, 그 덤에 더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노리고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본래의 것은 도외시하고 말이다. 그러니 어리석기가 짝이 없다는 것이다.

◈ 예수님에게도 양심의 가책이?

여기서 제가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즉 "예수님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이 있었는가?" 라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데,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자" 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도 양심의 가책이 없어야 한다는 말인데, 하지만 그러면 우리는 죄인임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또 우리 인간들은 죄인으로 산다" 라고 하는 의미는, 그것은 무엇이 없어져야 한다는 말인가? 소위 '역사' 라는 것이, 즉 역사적 해석과 같은 것이 성경에서는 결코 통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별이, 예수님을 따라와 !!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즉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으로 이 땅에 직접 오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은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한 개인인데, 그러면 모든 역사가 누구에게 집중되게 되어있다는 말인가? 오직 예수님에게만 집중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탄절에 설교를 했지 싶은데, 즉 별이 누구를 따라오는고 하니, 예수님을 따라오는데, 그렇게 오면서 태어나신 곳에 오기 직전에 예루살렘을 거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누구로부터 건진다는 말인가? 예루살렘, 정치적 주체 안에 갇혀있는 인간들을, 즉 헤롯을 아기 예수가 어떻게 하는가? 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헤롯은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헤롯은 "너거들이 거기서 빠져 나오나, 못 나오나, 어디 한번 해보자" 라고 해서, 두 살 밑의 아이들을 모두 다 죽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은 이미 어떻게 되었는가? 빠져 나왔는데, 아기 예수도 역시 빠져 나왔고 말이다.

'예수' 라는 이름 자체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한다" 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결국은 우리를 죽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선호하고 있는 헤롯과도 같은 정치적 질서자체가 우리를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우리를 살린다는 말인가? 죽인다는 말인가? 죽인다는 것이다.

◈ 정치적 주체에 의해서 십자가 사건이 !!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결국 누구의 죽음인가? 정치적 주체자로 오인이 되어서. 이미 기존의 있던 헤롯이란 정치적 주체에 의해서 살해를 당하는 식으로 십자가 사건이 터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사도바울에게 오면 어떻게 되는가? 죄에서 구원이 되는데, 이러한 죄를 프리즘으로 확대를 시키면, 그 안에는 정치적 요소들이 가득히 들어있어서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정치' 라는 게 무엇인고 하니,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혼자서는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홀로 살 수 없으니 정치적인 것이 되고, 그 정치적인 것이 역사적 존재로서 나중에는 짐승의 나라로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 이 세상은, 반(反) 그리스도적 관념체제 !!

그렇다면 이 세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냥 하늘과 땅과 풀과 나무 등등을 가지고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반(反) 그리스도, 즉 하나님에게 덤벼드는 세력에 의해서 조성되고 구성되어있는 관념체제, 그것이 곧 인간세상이라는 말이다.

가족이 무엇인가? 가족은 혈육에서 나온 자식과 부부가 가족인데, 그런데 남편과 아내는 출근을 하고, 아이는 수학여행을 갔다고 하면 가족은 어디에 있는가? 한 지역에, 즉 한 공간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뿔뿔이 다 헤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헤어져도 하나의 가족인데, 그것이 곧 관념적인 체제라는 것이다. 현장에는 없더라도 말이다.

요즘 제 아무리 과학을 부르짖고 하지만 역시 인간은 추상적 존재인데, 즉 영물(靈物)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우리의 세포를 바라보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 라고 우기는 추상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두고 '죄인' 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너무 어려운 것은 넘어가도록 하겠는데, 계속 교재를 보자.

** 하나님의 부르시는 작업은 멈춰지지 않는다. 인간들이 아무리 태만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은 멈추지 않는다.

◈ 죄인아, 병든 자야 !!

하나님의 불러주심인데, 즉 하나님은 부르려고 오셨는데, 그런데 그냥 '인간아!' 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아!' 라고 부르신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병든 자야!' 라고 말이다. 그러니 죄인이라는 것은 자기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러면 고쳐주실 분은 누구밖에 없는가? 오직 예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런 외부의 개입이 아니라, 인간들끼리 고쳐준다고 하면서 역사의 판때기로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서 병이 나았다고 하면, 당분간은 병원에 갈 이유가 있는가? 없는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자기 병 때문에 의사를 이용한 것뿐인데,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하늘에 계신 주님도 그런 식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즉 한번 용서를 받았으니, 이제는 독자적으로 자기의 관점으로 되돌아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되겠는가? 물론 안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그러한 자기 자신과 주님의 관계가 아니라, 주님은 말씀 속의 주님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찾아오게 되면 기존의 '나' 라는 것은 없어지고, 이제는 말씀 속의 '나',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 속의 '나' 인데, 그렇다면 '나'는 계속해서 죄인이 되어야만 하고, 주님은 계속해서 병든 자를 고쳐주시는 의사가 될 때, 그렇게 되어서 예수님과 우리 사이는 말씀의 완성 속에, 그러한 같은 시스템 속에서 같이 굴러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 위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이용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병든 자이고, 또한 주님은 언제나 의사이고, 그렇게 되어서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주님만을 증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항상 주님만을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면, 사랑이 그 대상에 도달하기까지 포기하는 법은 없다. 말씀을 통해 미리 예언된 바가 있다.

(롬 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루시고 끝 !!

여기서 '주'는 하나님이 아닌 예수님을 말하는데, 즉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이루시고 끝냈다는 것이다. 물론 구약에서는 주가 여호와이지만,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말씀을 끝내시는 주인공이 된다는 말이다. 왜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갈 자가 없다" 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무엇을 가로막고 있는가? 모든 인간들이 아버지에게로 가는 길을 누가 막고 있는가? 예수님이 가로막고 있는데,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잽싸게 그것을 피해서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다른 길을 개발해서 가면 어떻게 되는가? 무슨 등산을 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 죽는다는 것이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요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예수님, 추가요 ??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길을 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왔는데, 그런데 거기서 누가 뒤통수를 치는데 보니까 예수님이더라" 라고 하면, 그러면 되겠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에게 가는데, 거기에다 예수님을 하나의 추가목록으로 달아놓으면 되겠느냐는 말이다. 그것 자체가 반칙이고,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선 먼저 하나님을 믿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가보니 예수님께서 있어서 추가적으로, 마치 식당에서 밥을 하나 더 추가하는 식으로,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추가해서 믿는다고 하면, 그런 것은 전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천국은, 예수님의 보좌로 마감 !!

예수님께서 오게 되면, 즉 예수님을 통과하게 되면 예수님도 믿고 하나님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게 되면 "아하, 내가 믿던 하나님은 우상이었구나" 라는 것을 느끼면서 예수님께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로 가는 것은 자기 힘으로 가지 못하는데, 예수님이 오신 것으로, 즉 예수 안에서,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 안에 있다가 가출을 해서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의 보좌가 예수님께서 계신 보좌에서 마감이 되는데, 그 뒤에 하나님의 보좌가 따로 있어서 거기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좌에서 끝나는데, 그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마실 뿐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진척이란 것은 없다는 말이다.

◈ 그것이 곧, 제사제도 !!

이것은 구약에서의 제사제도가 제사장 앞까지만 오는 것과 같은데, 즉 양을 들고 오면 제사장이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양은 성전 뜰에 있는 제단에서 잡는데, 거기서 다 태워버린다는 것이다. 그때 나오는 기름과 피는 따로 뽑아놓았다가, 그 기름과 피는 "이미 이 기름과 피를 둘러싸고 있던 고기 덩어리는 하나님의 저주로 제단에서 다 태웠습니다" 라고 하는 증거로서, 그래서 그것을 성소에 들어가지 전에 뿌린다는 것이다.

제단이 여기에 있으면 동쪽에 문이 있는데, 왜냐하면 에덴이 동쪽이니 말이다. 즉 동쪽의 문으로 들어와서 여기 제단에서 제물을 잡아서, 여기 천막 안에 들어가지 전에 피를 뿌리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향단에 뿌리고, 등잔에 뿌리고 말이다. 그렇게 온 천지에 뿌린 피는 어디서 나왔는가? 제단에서 죽었던 제물의 피인데, 산 제물이 아니고 말이다. 이 피를 내기 위해서 그렇게 죽은 제물, 바로 그 제물의 피라는 것이다.

◈ 첫 유월절의 재현 !!

이것은 바로 출애굽을 할 때의 그 첫번 유월절의 재현이라는 것이다. 즉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서 죽음의 사자가 물러갔다는 것이다. 그것을 공식적으로, 텐트로 이동을 하면서 계속해서 반복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 십자가는 되었고, 그 다음은 부활이다" 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여기서 나올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이 다 십자가의 피로 끝나는데, 어떻게 십자가 다음이 있을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들어가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커텐이 쳐져있는데, 그 안에는 언약궤가 놓여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제사장이 방울이 달린 옷을 입고 들어가는데, 만약에 소리가 나지 않으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거룩하고 무서운 곳인지 모르는데, 그래서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염소나 송아지의 피를 들고 들어간다는 말이다.

◈ 천국은, '피'의 궁전 !!

이 전체를 한 글자로 표현하면 무엇인가? 바로 '피' 인데, 세 글자로는 '블러드' 이고 말이다. 여기에 백성들이 이렇게 모두들 모여있는데, 피가 원활하게 제대로 뿌려지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올라가고 말이다. 그러니 백성들은 피가 원활하게 뿌려지기만 바랄 뿐인데, 즉 자기들이 생산한 피가 하나님을 만족시키기를 학수고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족하시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국은 피의 궁전인데, 거룩한 예수님의 생명의 궁전이 말이다.

이런 것이 그야말로 만화와 같고, 또한 스필버그의 환타지 영화처럼 지어낸 것 같은데, 하지만 전혀 그런 게 아니라,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들을 꾀더냐?" 라고 해서, 그것이 구약에서부터 흘러 들어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는, 그렇게 응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의 결정체가,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것으로 다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서 10장에도 나오듯이, "언약의 피가 있는데, 그 피를 짓밟는 자가 어떻게 용서를 받겠는가?" 라고 하는데, 이것을 단순히 사랑의 힘, 혹은 생명의 힘이라고 하면 안 되고, 그냥 간단하게 '피' 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피에 대해서 얼마나 거부반응을 나타내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히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제 교재 198페이지를 보자.

** 비록 인간들은 선악과 과실과 생명나무 과실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그 자라에서 추방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나무의 실체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 우주에 펼치시려고 한다. 

◈ 선악과가 무엇인가?

여기에 "인간들은 선악과 과실과 생명나무 과실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라고 하는데, 오늘은 이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과실에 대해서 설명하고 마치겠는데, 얼마 전에도 누가 여기에 대해서 질문을 했는데 말이다. 요즘은 뇌에 문제가 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 말이다(ㅋㅋ).

"선악과가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70이레 논문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우리 인간은 우리 속에 선악과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역사적 존재이니 말이다. 과거는 흘러가 버렸는데, 즉 우리는 과거에 선악과 구경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미 과거는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라고 했든지 뭐라고 했든지 간에, 그건 들은 풍월이지 우리는 그 현장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지상에서의 역사관에 있어서 우리의 제한된 것이 무엇인고 하니, '현장에 없음' 이라는 것이다. 즉 현장에 없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없음에 대해서, 자기가 없었으니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가 '있고'부터, 거기서 나온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즉 "나의 운명은 나의 있음에 대해서 나의 행함으로 결정한다" 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 9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에서와 야곱이 아직 태어나기 전에 사랑하고 미워하기도 되어있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을 부연설명을 하면, "그들이 아직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행하기도 전에 한 쪽은 사랑을 받기로 작정이 되었고, 다른 쪽은 미움을 받기로 작정이 되어있었다" 라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러면 무슨 원칙이 깨어지는가? 있음이 있음을 살린다고 하는 원칙이 그만 깨어지는데, 그래서 우리의 없음에 다른 있음이, 즉 우리가 없는데, 이런 빈터에다가 있음이 먼저 있어서, 그 있음이 우리로 하여금 새롭게 없는 우리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하는데, '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성취를 위한 용도로서, 그런 새끼(?)로서 우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 생명나무가 찾아와서 선악과를 !!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고 하니, 선악과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그 선악과를 우리는 전혀 모르는데, 즉 우리는 과거에 선악과에 대해서는 구경조차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나무가 찾아와서 선악과를 건드려 준다는 말이다.

왜 톰 크루즈가 나오는 '미션 임파스블' 이란 영화를 보면, 그가 아주 값비싼 보물을 훔치는데, 거기에는 적외선 장치가 복잡하게 되어있어서, 잘못 접근하면 그 적외선을 건드리게 되어서 문이 닫히면서 벨이 울리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적외선은 그냥 눈으로 보면 안 보이고 특수안경을 끼면 보이는데, 그래서 몸을 완전히 꽈배기로 틀면서 그 보물을 훔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바로 그런 적외선과도 같이 선악과구조로 되어있어서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데, 즉 자기 성질대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생명나무가 되신 분이 오셔서 이것을 건드려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 자신에게 선악과 요소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즉 "나의 세계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세계에 갇혀있구나" 라는 것을 성경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방식이고 성경의 구조인데, 구조라고 하니 또 머리가 복잡해집니까? (ㅋㅋ)

그래서 그 논문의 제일 마지막에 보면 뭐라고 되어있는고 하니, "생명나무가 선악과를 건드려주면서, 잠자고 있던 선악과가 드디어 그 성질이, 그 본성이 깨어나게 되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마치 드라큐라가 고함을 치면서 깨어나듯이, 그렇게 악마성이 깨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죄가 있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게 다 같은데, 즉 "내가 등장하지 않았으면 너거들은 참 훌륭한 자들이다" 라는 것이다.

(요 15: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하셨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가 이 세상에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의라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그 이상은 없다는 말이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물론 그것은 예수님이 오시 전에는 그러했었는데,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오시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너희들은 온 율법을 다 지켜야 한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은 선악과가 없는 척을 한다고, 즉 잘난 척을 한다고 "우리가 언제 간음을 했습니까? 또 언제 살인을 했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 뒤집어지는 남자들 !!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형제에게 욕을 하는 것도 살인죄고,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은 것도 간음죄다. 또한 이혼을 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하는 것도 간음죄고, 이혼한 여자와 결혼한 것도 간음죄다" 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되니 그 당시에 듣고 있던 유대인 남자들은 모두가 다 뒤집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ㅋㅋ). 

서울 새문안 교회의 유명한 목사가 있는데, 지금은 죽었지만 말이다. 그가 그 당시에 누구와 결혼을 했는고 하니까, 황산성 변호사라고 이혼한 여자인데, 그래서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혼한 여자와 결혼한 것도 간음죄인데, 그러니 자기들은 본의 아니게 그만 간음죄를 지은 목사에게 설교를 듣는 셈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교회의 명예에 똥칠을 하게 되는데, 그래서 오래된 묵은디 권사들이 들고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본래의 남편을 찾아가서 또 다시 재혼을 하라는 말인가? 그럴 바에는 이혼을 왜 했느냐는 것이다.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 '맞춤계명'을 아십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어느 누구라도 이 적외선과도 같은 선악과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제설교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일명 '맞춤계명' 이라고 해서, 열 한 번째 계명인데 말이다.

모든 계명들이 모아져서 그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계명으로, 그렇게 그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쏘게 되면, 마치 방사선이 치료를 하기 위해서 암 세포를 공격하듯이 말이다. 그렇게 되면 각자 각자가 가지고 있던, 즉 "나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 라고 하는 죄악성이 폭로되는, 그런 계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서 어떻게 빠져 나올 수가 있다는 말인가? 로마서 3장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렇게 모두가 죄인뿐임을 말씀을 동원해서 들추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헤헤, 난 말씀을 지켰지롱"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의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씀이 주어졌는데 말이다.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결론을 내려보면, '말씀' 이라는 것은 생명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무엇을 만나야만 하는고 하니까, 반드시 선악과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선악과는 따먹고 생명나무는 따먹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따먹히지 않은 생명나무가 따먹힌 인간과 함께 있는 선악과와 더불어서 서로 같은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 말씀의 실효성 !!

그렇게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는지, 또한 따먹게 되면 왜 죽음이 찾아오는지, 그러한 하나님의 처음부터 내렸던 말씀의 실효성, 그것이 구라가 아니고 실제로 이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졌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가 선악과나무를 찾아오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선악과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이 따먹지 않았을 때는 선악과는 그냥 나무였는데, 그런데 따먹고 난 뒤에는 이 나무가 인간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따먹을 때부터 이미 뱀이, 즉 악마가 관여하게 되는데, 그러니 하나님의 생명나무 쪽에서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의 악마의 개입을 고려해서, 그래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란 이름으로, 물론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이고 뱀의 후손은 뱀인데 말이다.

그러한 장(場)에 누가 들러리로 동원이 되었는가? 우리 인간들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동원이 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성경해석은 무엇인고 하니,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벌리는 그 전쟁터를 어떻게 넓혀 가는지, 어떻게 확대시켜나가는지, 그것은 바로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만남에서 이루지게 된다는 것이다.

◈ '건드려준다' 라는 의미는?

그것을 두고 제가 '건드려준다' 라고 표현을 했는데, 즉 십자가 복음을 가지고 건드려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건드려주지 않으면 착한 사람이 되는데, 하지만 건드리게 되면 드디어 선악과를 따먹은 티를 내게 되는데, 즉 "니가 뭔데 나를 건드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모든 말씀은 무엇을 건드리는 것인가? 우리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그 요소들을 다 건드려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들은 "나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어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거기에는 악마가 관여되어있다는 것이다. 악(惡)이 말이다.

그렇게 악이 관여했기 때문에,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부터 죄가 왕 노릇을 하게 되는데, 그러니 인간은 죄의 왕 노릇의 하수인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말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그냥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할뿐이라는 말이다. 각 방송국의 아나운서들이 하는 말도, 또한 북한의 김정일이 하는 말도 전부가 다 마귀가 시켜서 하는 짓이라는 것이다.

제가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을 중요시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는가?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마 10: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러니 성도의 경우에는 그 속에서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데, 그러면 저쪽에서는 무엇이 나오겠는가? 당연히 마귀의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모두 들러리인데, 예수님의 들러리이든, 아니면 마귀의 들러리이든 말이다.

◈ 죄에 사로잡힌 인간,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

사람이 자기의 의사를 표시한다고 했을 때, 소위 '취중진담' 이라고 말이 있는데, 술이 취하면 솔직한(뼈있는?) 말이 나오는가? 그게 아니고, 인간은 어떤 권력에 사로잡힌 채로 말을 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죄에 묶여서 말이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어떻게 되는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라고 하시는데, 즉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보고 성령을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다루신다는 것이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모든 것이, 복음중심으로 !!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게 무엇인가? "가르치고 배우는데 협력하여 복음의 증인이 되라" 라고 했는데, 그러니 이 세상은 이미 복음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것이 다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다 이루었다고 하셨으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도 항상 복음중심으로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딤전 6: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그러니 뱃살을 빼든지 넣든지 간에 그게 복음중심이라면 얼마든지 하라는 것이다. 즉 헬스장에 가서도 복음을 전하면 된다는 말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인데, 그런데 만약에 자기의 몸을 위해서 한다고 하면, 즉 자기의 쾌락과 즐거움과 안락함을 위해서 한다고 하면,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지적을 받을 짓이라는 것이다. 즉 또 하나의 쇳덩어리를 짊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음을 위해서 돈을 벌고 재벌이 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돈을 위해서, 즉 자기 몸을 위해서 돈을 번다고 하면 그것은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 그냥 솔로로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

그러니 아내나 자식을 위해서 하면 그게 무거운 짐이 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에서 말하기를,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나은데, 그래도 하게 되면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마누라를 기쁘게 해주어야 아침에 떡국이라도 얻어먹지" 라고 말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는 것이다(ㅋㅋ).

(고전 7:8)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고전 7: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그러니 자식을 기쁘게 하려다가 주님을 놓치고, 아내를 기쁘게 하려다가 주님을 놓치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주님을 기쁘게 하라고 주님께서 주신 몸을 가지고 사람을 기쁘게 하다가보니, 즉 원래의 용도에 맞지 않게 사용하다가보니, 그렇게 전혀 현실에 맞지 않으니 힘든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막 살아도, 복음을 위해서 !!

아마도 모두들 여기에 공감하지 싶은데, 여러분 가운데서도 전혀 예외가 없어 보이지 싶은데 말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쓰임을 받는 도구에 불과하니, 우리가 그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막 산다고 해도 그것이 복음을 위해서 막 산다고 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시빗거리가 생겼는데, 녹취를 해놓으면 아마도 걸고넘어지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하지만 복음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 무슨 짓을 하더라도 우리는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복음을 위해서 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자기 몸을 위해서, 즉 자기의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서 한다고 하면, 그러면 마지막 때에 어떻게 되는가?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뭐라고 하는가? 그런 자들은 졸지에 망할 수밖에 없다고, 즉 자기 생활의 염려에 빠져 있다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통곡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자들에 해당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롬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롬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하지만 성도는 어떠한가? 이미 천국에 갈 몸이니,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으니, 언제나 항상 무엇을 하든지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언제 그렇게 하면 되는가? 평소에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몸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 있는 몸이 아니라, 생명나무가 건드려준 선악과가 들어있는 몸인 줄로 압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건드려주실 때마다 생명나무의 냄새가 펄펄 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02,15 오후 9시에 마침.

                                                                   나를 건드리지 마 !!

 

 

[현상학Phenomenology)]

1.현상학의 의미

현상학이라는 말은 독일 철학자 람베르트가 먼저 사용하기 시작한 말인데 이것은 어떤 실체의 외부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현상학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후설의 학문을 말하자면 그것은 본질을 직관하는 의식에 관한 학이다.'사실 자체에로'라는 말 때문에 일반적으로 잘못 이해되는 것처럼 후설의 현상학은 객관적인 사물을 경험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하는 것은 아니다. 후설에 의하면 의미나 의의를 탐구하는 본질과학은 기하학과 마찬가지로 실재적인 존재들이나 사물들이나 사실들과는 상관하지 않고 순수한 본질들과만 관계한다. 그런고로 후설이 말하는 본질과학에 있어서는 실재하는 사물들에 관한 감성적인 경험은 우선 일단 배제되고 보류되어야 한다.

그러나 후설의 현상학은 본질자체에 관한 학은 아니고 본질을 직관하는 의식에 관한 학이다. 따라서 후설의 현상은 의식에서 독립된 객관적인 현상이 아니고 의식된 혹은 후설의 말을 빌리자면 지향된 현상이다. 후설에 의하면 철학이 문제삼는 의식은 언제나 어떤 것에 관한 의식이다. 말하자면 의식의 본질은 의학적으로 의식하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무엇에 관한 의식이며 어떤 의미에서 의식하는가 혹은 그 의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있다. 그리고 또한 현상도 자존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지향된 혹은 의식된 혹은 현현하는 현상이다. 그런데 후설에 의하면 모든 사물은 그들의 본질을 갖고 있다. 이 본질들은 각각 자기에게 속하는 사물들로써 된 하나의 영역을 갖고 있다.순수한 본질의 세계를 이미 말한 지향성의 원리에 의해서 연구하는 것이 후설의 현상학이다.

인위적인 가설과 선입견들을 벗어난 인간의 그의 세계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계에 있어서의 의식을 후설의 현상학은 순수한 기억이라고 한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의식작용에 주관이 관여하는 것을 후설은 인정치 않는다. 이러한 인간의 세계가 곧 후설에 의하면 세계현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상학은 인간의 자연스럽고 순수한 의식이 지향한 인간의 세계의 이념적인 대상들로서의 존재들의 구조에 관한 학이다. 후설에 의하면 이 세계의 구성과 이념적인 존재의 구조는 인간의 순수한 의식체험과 그 의식체험에 속어서 지향된 형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2.현상학의 방법

현상학의 방법을 한 마디로 본질직관이라면 먼저 순수하게 사물의 본질을 직관하는 데 방해되는 요소들을 제거해야 한다. 먼저 사물을 수수하고 자연스럽게 직관하는 것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역사적인 요소들 곧 종래의 철학이나 과학을 통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론이나 가설, 종교적인 사회적인 윤리적인 전통에서 얻은 선입견이나 전 의견을 배제해야 한다. 이것을 역사적인 배제라고 한다.

다음으로 모든 실재적인 실존판단도 배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현상학에서는 감성적이고 실재적인 실존재가 문제가 아니고 본질적인 존재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실존적인 배제라고 한다. 이 두 가지보다 배제법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사실과 본질을 구별하는 형상적 환원인데 이 형상적 환원을 통해서 사실적인 것으로부터 본질적이 것으로 정신적인 전환이 이룩된다.

다음으로 소박한 의식 속에 주어져 있는 본질들로부터 순수한 의식 속에 있는 선험적인 주체성에로 환원하는 선험적인 환원이 마지막이다. 후설의 현상학이 숨가쁘게 끌려간 하나의 기본원리는 주관으로서의 의식과 객관으로서의 대상을 하나로 연결하는 지향성의 원리이다. 현상학의 과제는 현상들의 존재의 성격과 그 의미를 밝히는 데 있어서 그 현상들을 절대자로서의 신의 창조물로서 어떤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원리에 연연해서 설명하지 않고 현상들에서 환원적으로 그들의 존재와 의미를 구성하는 지향적 구조를 밝히려는 것이다.

종래의 철학은 늘 주어져 있는 본질이나 원리 혹은 존재 또는 신을 물었다. 그러나 주어져 있는 현상의 존재 근거와 그 의의를 묻지 않았다. 현상학은 모든 하나의 존재와 또한 그 세계가 어떻게 나타나며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묻는다. 이러한 물음에는 모든 과학이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르나 과학이란 존재의 근거를 묻지 않고 과학적인 개념만 내세우고 있고 이는 언제나 다만 2차적인 형성체들에 불과하다. 이 과학적인 것을 나타나게 하는 본원적인 기반을 후설은 삶의 세계라고 했다.

현상학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모든 존재들 즉, 현상들이 구조적으로 나타나고 모든 과학들과 법률과 예술과 국가와 종교를 포함한 정신적인 형성체들이 거기에서 나타난 일차적인 삶의 결과들로서의 삶의 세계를 다루는 것을 과제로 한다. 그런데 후설의 삶의 세계는 최종적인 기반은 아니다. 삶의 세계는 다시 우리들의 경험에 의해서 정립된다. 경험은 주관성의 기능인데 이 기능으로 인해서 모든 경험되는 존재들이 나에게 다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삶의 세계에서 이제는 다시 주관성에로 환원되어야 한다. 삶의 모든 형태들은 그들의 구성적인 근거로서 인간의 주관성에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상학적으로 가장 본원적이고 일차적인 경험이 무엇이냐는 것은 '나 자신의 주관성의 경험'이다. 후설도 언제나 명확한 출발점은 '나'라는 존재이다.

현상학은 그 원래적인 의미에 의하면 자아론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자아론에서 비로소 상호주관성이 객관적인 세계를 형성하는 주체로 연역된다. 그러나 이것은 유아론은 아니며 이것은 현상학의 주관성의 초월, 곧 주관성의 지향성에 의해 극복된다. 후설의 초월이라는 개념은 의식을 초월한 선험적이라는 뜻도 아니고 다만 지향성의 원리라는 뜻도 아니고 존재론적인 단절로서의 초월도 아니고 다만 지향성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초월이라는 것은 주관성이 자기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의식의 지향성에 의해서 삶의 세계를 이루고 존재를 구성하는 일을 말한다.

후설에게 있어서는 의식의 지향성이 삶의 세계 안에서 존재들을 구성한다. 후설에게는 존재자의 존재구성이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하면 외부세계에 실재하는 존재자들을 주관성이 구성한다는 것이 아니고 주관성이 경험하는 삶의 세계 안에서 존재자들의 존재와 의미가 구조상 주관성에 연결되고 환원된다는 뜻이다. 후설에 의하면 이 연결은 의식의 지향성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구성하는 주관성'은 전세계적이고 전존재적인 존재이다. 그는 이를 선험적인 주관성이라고 한다.

후설이 말하는 '외부세계를 보류한다'는 것은 부인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괄호 속에 보류한다는 것은 문제삼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다. 왜냐하면 주관성의 본질은 그 초월성 곧 지향성에 있으며 따라서 주관성은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괄호 속에 보류되고 또한 괄호 속에서 다시 문제되는 이 세계는 마지막 결정적인 단계에서 바로 현상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후설이 말하는 선험적인 주관성의 철학은 현상학이 되는 것이다.

현상학의 중요한 과제는 현상학적인 환원을 통해서 선험적인 주관성의 구성적인 구조를 들어내는 것이다. 후설의 현상학적인 환원이란 내부세계를 분석권 외에 남겨두고 외부세계의 구성만을 문제삼는 심리학적인 환원과는 달리 지향적으로 구성하는 주관성 자체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현상학적인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이념적인 형성체들에 비해서 더 실재성을 갖고 있는 '삶의 세계'를 다시 자연스러운 경험 속에서 존재를 구성하는 지향적인 주관성에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향적인 주관성은 필연적으로 세계적인 존재를 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그 자신은 전세계적이고 선험적이다. 이와 같은 전세계적이고 선험적인 말하자면 지향성의 원점에로의 환원으로 현상학적인 방법은 완성된다. 이 방법을 일반적으로 현상학적인 환원이라고 한다.

현상학적인 환원에는 두 가지의 단계의 환원이 있다.첫 단계는 모든 이념적인 형성체로부터 삶의 세계로 환원하는 것이고 다음 단계는 이 자연스러운 세계로서의 삶의 세계로부터 선험적인 주관성에로 환원하는 것이다. 첫 단계에서는 모든 문화와 더불어 형식적인 법칙과 수리와 공리와 논리가 탈락한다. 학문의 운명, 국가, 도덕, 법률,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둘째 단계의 환원의 참뜻은 선험적인 주체성과 그 지향적인 구조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철저한 환원은 모든 현상의 존재의미에 대한 절대적인 명증을 얻으려는 요청에 의한 것이다. 현상학적인 환원은 의식의 지향성의 원리를 근거로 한다.

3.기본 개념 '지향성'

현상학의 기본개념은 지향성이다. 일반적인 철학술어로서의 지향성은 의식의 성격 혹은 의식의 본질을 말하는 것으로서 모든 의식은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어떤 대상에 관한 의식이며 어떤 대상을 의미하고 어떤 대상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반드시 무엇에 관한 의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무엇을 의미한다는 것' 혹은 '무엇을 지향한다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의 체험을 말하는데 이 체험 속에서 의식이 구체화하고 명확해진다. 지향성에 대한 모든 관찰은 먼저 지향적인 체험으로부터 출발해서 그 체험의 생성과 생기과정을 분석해야 한다.

먼저 지향적인 체험을 관찰하면 이는 곧 어떤 대상에 관한 감성적인 감각과 이 감각을 통해서 얻어진 재료의 정신적인 처리이며 후설은 이를 '노에시스'라고 불렀는데 노에시스는 감각을 통해서 얻은 자료들을 지향된 존재자의 현상으로서 파악한다. 지향성의 구조는 감성과 정신의 양극 사이의 대립적인 통일관계이기 때문이다. 후설이 말하는 정신과 감성은 상호의존한다. 정신은 감성을 통해서만 현실성을 갖게 된다. 지향성은 이 양극을 통일하고 통합한다.

노에시스는 언제나 적극적이고 무엇을 구성하려고 하고 의미를 주는 원리이다. 이에 반해서 감성은 수동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으로서 노에시스의 기반이며 자료이다. 그러나 수동성과 적극성의 대립은 결코 절대적인 대립이 아니고 단계적인 의존관계이다.

체험은 본질적으로 그 체험이 지향한 대상을 가지고 있다. 이 지향된 대상 곧 세계는 체험의 구조 속에 어떻게든지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세계는 모든 지향적인 체험 속에 함께 들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는 곧 지향적인 체험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지향된 대상으로서의 존재자는 그것을 지향하는 체험의 하나의 요소이다. 이는 사실적인 요소가 아니라 이념적인 요소이다. 세계와 또한 존재자들은 여기서는 주관성으로 말미암아 구성된 의미체 즉 노에마이다. 곧 지향된 존재자는 지향적인 체험이 구성한 노에마라는 것이다. 이 지향적인 체험 속에 존재자가 존재하고 또한 세계가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하는 세계는 곧 현상이다. 그런 고로 현상학적으로 어떤 존재자를 문제삼을 때는 그것은 자존하는 실체가 아닌 언제나 노에마적인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향성의 세 가지 구성요소가 나타난다. 1)수동적인 자료로서의 감성과 2)이를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노에시스 3)지향적이고 이념적인 구성체로서의 노에마이다. 이 셋은 지향성에 있어서 변증법적인 통일체를 이룬다. 후설의 지향성의 성격들은 정적으로만 관찰되고  규정될 것이 아니라 이들은 사실 동적인 요소들이어서 생산적인 과정으로서 관찰되고 규정되어야 한다. 지향성이란 하나의 동적인 프로세스로서 이는 고유의 목적이 내포되어 있는 바 의 성취이다. 이 성취가 바로 진리로서 다음과 같은 이중적인 뜻에서 실현된다.

첫째로 지향된 대상으로서의 존재자 자체가 자기를 나타내는 성취이고 다음으로는 지향행위 자체의 성취이다. 처음의 경우는 존재자로서의 진리이고 다음 것은 이성으로서의 진리이다.

4.의식의 철학과 삶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비난은 의식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이는 후설을 논리학자로 보고 너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어서 생동적이고 본원적인 현실을 파악하지 못한다고 본다. 특히 삶의 철학자들의 영향아래 있는 사람들은 후설의 현상학과 같이 의식에서 출발할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전체적인 삶 자체로부터 혹은 인간 존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의식이란 감정과 의지와 심대한 무의식의 세계를 포함한 삶의 영역에서 나타난 적은 부분으로서 때로는 생동적인 삶의 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후설의 현상학은 어떤 작은 정신체로서 고정적인 조직체도 아니고 그 일방적인 기능으로서의 이성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후설의 의식은 오히려 모든 인간의 감성적이고 지성적인 체험 속에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영원한 현상들의 흐름이라는 것이다. 이 흐름 가운데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적은 일부분이지만 이 개개의 요소는 고립된 것이 아니고 전체적인 흐름의 하나의 요소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런 고로 어떠한 체험도 전체적인 연관성에 있어서 파악되어야 한다.

모든 인간의 체험은 하나의 동적인 지향적인 사실로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것의 일부로서 필연적으로 하나의 포괄적인 지평 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체험들이 그 속에 있는 이 포괄적인 지평은 모든 동시대적인 지향성을 포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으로서의 과거와 장래할 미래가 이 지평에 직결되어 있다. 말하자면 역사가 이 포괄적인 지평을 구성한다. 후설이 말하는 의식은 하나의 추상적인 인식기능이 아니고 그가 늘 말하는 바와 같이 역사성을 가진 지향적인 체험이다.

후설은 의식을 정적으로 관찰하고 감성과 노에시스와 노에마로 분석하였지만 이를 동적인 관찰로 보충하였다. 모든 체험은 하나의 동적인 프로세스이고 체험은 그 본질이 동적인 프로세스이다. 이 동적인 프로세스는 성취를 목표로 한 끊임없는 그리고 복잡한 구조의 움직임이다. 동적인 프로세스로서의 지향성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시간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후설은 그의 초기 철학에서 지향성의 시간성을 부인했으나 후기에서는 하나의 기본성격이 된다. 감성의 수동성이라고 할 때 이 수동성은 과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과거성은 지향적인 구성와 연결된다.

말하자면 우리의 지향적인 의식에 '주어져 있는 것'은 언제나 과거 혹은 전통에 의해서 획정된 경험의 지평 안에 있다. 모든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있는 광장 그 자체는 과거의 전통을 통해서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적극적인 노에시스의 시간성은 미래이다. 왜냐하면 노에시스의 목적인 성취라는 것은 현재의 시점을 넘어서는 미래적인 시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존재자 혹은 대상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언제나 그 성취를 위한 미래에 놓여있는 先取 혹은 期待 등의 요소가 있다. 따라서 우리의 자연스러운 시간은 그 자체가 지향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후설은 모든 종류의 지향적인 체험은 이론적인 것과 가치판단을 포함한 의지적인 것으로 보고 전자를 '자연적인 행위', 후자를 '인격적인 행위'라고 한다. 지향적인 체험에 있어서의 자연적인 행위의 성취를 '인식'이라고 하는데 인식을 통해서 대상으로서의 존재자는 순수하게 밝혀진다. 인격적인 행위의 성취는 만족인데 이를 통해서 존재자의 선악이 결정된다. 현실에 대한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서 현실의 계층적인 구성이 생긴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계층으로서 자연과 정신이 있고 이들은 다시 여러 가지 계층이 생긴다. 이 현실 안에서 경험하는 나에게 자신의 주체도 나타난다.

이러한 나 자신의 주체도 역시 다른 존재자들과 마찬가지로 선험적인 주관성 안에서 구성된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주체도 하나의 지향적인 계층구조이다. 나도 자연과 인격적인 정신의 통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경험하고 이를 통해서 자기를 세계 안에 있는 인간으로 구성하는 이러한 주체는 시간적이고 역사적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이러한 혹은 저러한 존재로 이해할 때 그 존재는 언제나 역사적인 성격의 존재 곧 역사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 소질은 과거적이고 동시에 이 소질은 가능성으로서 미래적인 것이다.

이러한 주체는 자유한 '나'로서 스스로 결단하면서 지향적인 프로세스 속에서 장래할 완전한 성취를 지향한다. 그는 그를 둘러싼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그의 구조는 따라서 다른 주체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 다른 주체들이란 동시대의 여러 가지 관계들로 직접 얽혀 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또한 우리가 물려받은 전통을 세운 전세대의 사람들일 수도 있고 혹은 우리의 후대의 사람들일 수도 있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작용하는 공동주체로서 구성되고 또한 '나' 자신도 이렇게 구성되는 '상호주관적인 사회'의 구성분자라는 생각을 통해서 주관성에서 상호주관성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이 전환은 전자의 지양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구조 속에 얽히는 구성적인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전 인류라는 idee가 주어진다.

후설의 지향적인 의식은 헤라클릿트적인 흐름이라고 했다. 이 흐름 가운데는 많은 체험들이 상호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연결되면서 나타났다가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 흐름은 또한 절대적인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 그 흐름 속에 살고있는 '나'를 통해서 통일된다. '나'는 모든 체험을 하나의 주관성에로 포괄한다. 끊임없는 체험의 흐름이면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체험, 이것이 후설의 의식의 지향성이다. 후설에게 있어서 흐름 속에서 나타나고 사라지고 하는 대상으로서의 현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흐름 속에 전체적인 통일성을 주관성이라고 하여 더욱 중요시하였다.

 
출처 : http://myhome.naver.com/mcs71/HUSSURL.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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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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