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70강 형제

피/피 2012. 8. 29. 11:09

피70강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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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70강 형제

[12 대구강의 9] - [피 70] - 형제

                                                    12,05,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야곱' 이라는 가정에서 !!

오늘은 교재 217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이처럼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 인간들 속에 들어있는 '자신을 위한 사랑'의 본질을 드러내게 한다. 그런데 경쟁적으로 요셉이 받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형제들은 자신들의 죄를 알게 된다.

(창 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

여기 창세기 42장 21절에 보면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여기에서 참으로 신기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중에 보면 이 개인의 가정문제가 국가간의 문제가 되고, 이것이 급기야는 우주전쟁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이 땅의 세계인가? 아니면, 하늘나라의 문제인가?" 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야곱' 이라는 한 가정의 문제가, 그런 가정사가 그 가정에 담겨있는 어떤 프로젝트. 혹은 어떤 계획이나 청사진과 같이, 거기에 담겨있는 어떤 코드나 암호가 그만 국가로 확대가 되고, 그렇게 국가로 확대가 되면서 이스라엘과 이방나라의 싸움이 아니라,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눈에 보이는 65억 인구의 지구와, 그리고 보이지 않는 나라, 그것이 곧 인자의 나라인데, 다니엘서에 나오는 인자의 나라, 즉 예수님의 나라라는 것이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나라와 예수님의 나라와의 전쟁에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 '야곱' 가정과 '내' 가정 !!

그렇다고 하면, 이런 하늘나라와 지상의 나라와의 싸움이라든지, 즉 국가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와의 싸움이나, 교회와 다른 종교와의 싸움이전에, 이런 분쟁의 핵심이 어떤 한 가정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하면, 이 가정과 우리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자기 가정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것을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가정은, 자기의 가정으로부터 출발해서 결국은 자기 가정, 자기 가문으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즉 자기가 결혼해서 가정을 일구었다고 하면,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을 키워서 또 결혼을 시키고, 그렇게 살다가, 결국은 자기 장례식을 하는 것으로, 그것으로 그냥 끝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별 다른 의미가 없는데, 모두가 다 같은 그런 가정인데, 즉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을 키워서 분가시키고, 자기는 또 노후대책을 세워서 사는 것, 그것이 가정의 전부인데, 그런데 어떻게 해서 야곱의 가정은 그렇게 번지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신기하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사람이 "내 가정이 전부이다" 라고 하는 인식에서부터 벗어나서, 이러한 특수한 가정에 편입될 때만 하늘나라의 전쟁에 참여된 백성이라고 간주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가정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참 어려운데, 물론 자기 가정도 이혼을 하면 다 마찬가지만 말이다.

◈ 갇혀 있는 체제 !!

여기에 이렇게 '나' 라는 것이 있고, 그렇게 '나' 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 '나'를 보호하기 위한 '나'의 가정이 있고, 즉 행복을 위해서 자기 가정을 만들어 놓았고, 물론 그것은 자기의 욕구이고 욕망인데, 그래서 거기에 모든 것을 다 걸고 전폭적으로 투자를 했는데, 하지만 결국 이것은 그 안에 갇혀있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마치 계란처럼 안에 갇혀있고 닫혀있는데, 이것을 철학에서는 '닫힌 체결' 이라고 하는데, 즉 클로즈가 되어있는 그런 닫혀있는 세계, 숨통이 막히는 세계라는 것이다. 이렇게 철학에서는 숨통이 막혀있다고 말을 하는데, 그런데 사실 우리는 그렇게 숨통이 막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우리끼리만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닫힌 체제라는 말이다.

◈ 어느 가정을 믿을 것인가?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여기에 있는 이 가정은 우주까지 번지는 체제인데, 즉 나중에 보여지는 우주가 그 안에 엑기스로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과연 우리는 "이 '나' 라는 것이 담겨 있는 '나'의 가정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특수한 가정을 믿을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을,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에 성령을 통해서 말씀을 주시는데, 그렇게 해서 성경을 펼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가 교회에 오기 전에는, 혹은 말씀을 듣기 전에는 자기 가정을 주시하게 되는데, 그래서 "그래도 나중에 죽으면 천당에는 가겠지" 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데 교회에 와서 막상 성경말씀을 펼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성경을 펼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꾸만 강요하고 요청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너의 가정 말고 다른 가정을 주목하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너의 가정에 신경을 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먼저 관심을 가져야할 게 있다" 라고, 즉 "이 특수한 가정에 신경을 써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서 목사님이 오시니 갑자기 정익이가 생각나는데 말이다(ㅋㅋ).

그렇다고 하면, 이 '야곱' 이라는 특수한 가정 이전에도 가정이 있었느냐고 하면, 물론 있었는데, 바로 그것이 가정이 아니라 형제간인데, 그 형의 이름은 가인이고 동생의 이름은 아벨이라는 것이다. 즉 '가인과 아벨', 혹은 '아벨과 가인' 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 ??

물론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자기 가정에 갇혀있는 처지에 있지만, 그러면 그 갇혀있는 체제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것이다. 흔히들 하는 장난꾸러기와 같은 질문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만들었는데, 그러면 그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신학자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것을 엄밀하게 말하면 무엇인고 하니까, 여기에 대해서 먼저 정리를 해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1번은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라는 것이고, 2번이 "그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 라고 하면, 사실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하기가 상당히 난처하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분이다" 라고 답변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는 전혀 성에 차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 이미 예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별로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라고 하는 1번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게 맞는 말인데, 그렇게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는가?" 라고 하는 질문자체가 문제가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무엇을 만드셨는가?" 라는 질문은 합당한데, 하지만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는가?" 라고,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나는 이 세상을 포기하지 못하겠다" 라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편 75편을 한번 살펴보자.

(시 75:1) [아삽의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사를 전파하나이다
(시 75:2)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을 당하면 정의로 판단하리니
(시 75:3)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거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셀라)
(시 75:4) 내가 오만한 자더러 오만히 행치말라 하며 행악자더러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시 75:5)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시 75:6)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시 75:7)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시 75:8)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끼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시 75:9)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시 75:10) 또 악인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여기 3절에 보면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거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께서 땅을 만들어놓고, 그리고 거기에 사람을 만들어놓고,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들을 소멸시킨다고 하면, 그러면 "왜 우리를 소멸시킵니까?" 라고 하는 질문자체를 주님께서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땅과 그 모든 거민이 소멸되리라 !!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지요?" 라고 하는 질문자체가 전혀 정당한 질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다" 라고 하는 것은 그 뒤에는 무엇이 빠져있는고 하니, "내가 만들었기에 내 마음대로 소멸시켜버린다" 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 뒤에 있는 것은 듣기가 싫다는 말이다.

결혼식에 가보면 목사가 흔히들 뭐라고 주례를 하는가? "이 가정은 하나님께서 짝지어준 가정이다" 라고 하는데, 물론 저 자신도 그런 주례를 많이 했지만 말이다. 차마 그 뒤의 말은 하지를 못하는데, 즉 "주께서 때가 되면 갈라서게 하십니다" 라고 말이다. 왜 그런가? 신랑신부를 비롯해서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무엇인고 하니, 지금 하나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기 자신의 행복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가정에 관심이 있지 야곱의 가정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성경말씀을 펼쳐보면, 주님은 우리의 가정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데, 주님의 관심사는 무엇인고 하니, 특수한 가정, 바로 야곱의 가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억지를 부려서 어떻게 하는가? 주님께서 신경을 쓰시는 그 특수한 가정에다가, 일단 자기 가정을 챙겨놓고는, 거기에다가 억지로 자기 가정을 가져다 붙인다는 것이다. "내 가정에 행복하고, 잘 살고, 평안하고, 등등" 라고, 그렇게 하니, 이런 무리한 질문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지요?"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뒷부분이 그만 빠져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 임으로 이 세상을 조지고 부셔버린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결국은 '예수님' 중심 !!

물론 부술 때는 망치로서 마구 때려부수는 게 아니라 언약으로 부수는데, 그래서 "그 언약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은 만들어졌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만들었다가, 이 세상을 부수어 버린다" 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예수님 중심이라는 말이다. 즉 언약 중심이고 말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래서 창조과학회나 현대 물리학에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 관점에서 "이 세상이 왜 만들어졌는가?" 라고 보아야 하는데, 그런데 자기가 물리학을 전공했다고 하면서, 즉 자기가 이 세상의 일부로서, 우리 인간의 신체도 물리적인 물질인데, 그래서 물질중심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내 몸' 이라는 물질과 외부의 나무들은 누가 만들었지? 신이 만들었는가? 그렇다면 그 신은 어떻게 만들었지?" 라고, 그렇게 출발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거기에서는 제대로 된 해답이 전혀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왜 만들었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왜 만들었습니까?" 라고,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이여, 나를 왜 만들었습니까?" 라고 하는 질문을 말이다. 즉 "'나' 라고 하는 물질, '나' 라고 하는 신체를 왜 만들었습니까?" 라고 하는, 그런 질문이 성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질문이 이루어지게 되면, "저로 하여금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저로 하여금 왜 교회로 오게 했습니까?" 라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예수님을 위해서, 즉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했습니까?" 라고, 예수님과 관련을 지어서, 예수님과 떨어지지 않게, 그렇게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그런 일을 하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러한 일을 시킬까?" 라는 관점에서 질문을 해야지, "내가 이렇게 일을 하는데 주님은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지?" 라고 질문을 던지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느 교회를 가는데, 그 교회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라고 한다면, 차라리 교회에 가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의 교인의 그런 것을 유도하는데 말이다.

◈ 가인과 아벨은 '껍데기' 역할 !!

그렇다면 여기에서, 즉 이러한 닫힌 체제와 특수한 가정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이 특수한 가정을 보여주셨는데, 사실은 이 가인과 아벨은 껍데기에 불과한데, 여기서 '껍데기' 라고 하는 것은, 가인과 하는 일 차제가 그러한데, 물론 우리 자체부터가 껍데기이고 말이다.

이 가인과 아벨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형제인데, 이렇게 '형제' 라는 것은 한 몸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에서 나왔는데, 나중에 결과로 보면 무엇으로 갈라졌는가? 두 노선으로 나누어진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분명히 하나였는데 말이다.

그런데 둘로 나누어진다고 하면, 즉 처음에는 한 형제라고 여겼는데, 실제로 가인과 아벨도 서로가 한 형제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당신은 나의 형이고, 당신은 나의 아우입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게 두 개의 노선으로 나누어진다고 하면, 처음에 하나라고 여겼던 그 자체가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 ??

그러니 가인과 아벨이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 라고 하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겠는가? "너거들은 어디에 근거해서 서로 하나라고 생각하는가? 한 부모에게서 나왔으면 하나인가? 너거들은 뒤에 갈라지는 두 노선을 놓치고 있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가인과 아벨 :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
* 주       님 : 너거들은 어디에 근거해서 서로 하나라고 생각하는가?
* 가인과 아벨 : 우리는 한 부모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주       님 : 너거들은 갈라지는 두 노선을 놓치고 있구나.

다시 말해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은 둘로 나누어지는데, 마치 뱀의 혀가 둘로 갈라지듯이 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아벨을 껍데기로 사용하셨는데, 그런데 그 껍데기인 주제에 자기 자신을 껍데기로 보지 않고, 자기 자신이 전부라고 여기는, 바로 그러한 발상, 주님께서는 거기에다가 약속을 집어넣어서 그것을 완전히 뒤집어버린다는 것이다.

◈ 왜 서로 싸우는가? 

가인과 그 동생 아벨은 형제간임에 분명한데, 만약에 형제가 아니라고 하면 그렇게 서로 싸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말이 재미가 있지요? 서로 형제간에 아니라고 하면 싸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남남인데 왜 싸우는가? 하나라고 인식을 하기 때문에 싸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부부가 서로 싸우는 것은, 여전히 "우리는 한 가정입니다" 라고 하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가정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싸운다는 것이다. 물론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싸운다" 라고, 이렇게 말은 좋게 하지만(ㅋㅋ), 청도에서의 강의에 의하면, 부부싸움은 자기가 생각하고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상대방을 끌어당기기 위해서 서로 싸운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하나이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싸운다는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형제간에 싸움으로 말미암아서 뭐라고 하시는가? "너거들은 스스로 하나라고 생각했나? 그것은 오해야" 라고 하시면서 깨우쳐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껍데기끼리 서로 싸우게 해서 숨어있는 노선이 나중에는 온 우주에 퍼지는데, 그렇게 해서 땅과 하늘의 싸움으로서 두 개의 노선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그 낌새, 비로 그 시발점을 가인과 아벨로부터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 주제 - '우리가 이스라엘을 아는가?'

그래서 오늘 강의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데, 즉 "우리가 이스라엘을 아는가?" 라고 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 이스라엘을 몰랐는데, 적어도 이방민족과는 차이가 나는 자기들만의 특수한 선택을 받는 집단이라고 여겼는데, 즉 자기들은 이방민족이 아니라고 여겼다는 말이다. "이방민족인데 이스라엘이 되었다" 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우리는 처음부터 이방민족이 아니야" 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껍질이 벗겨지고 그 속에 들어있는 진짜 이스라엘, 즉 열 두 사도에 의한 진짜 오늘날 교회, 즉 그리스도의 새언약에 의해서 조성되고 만들어진, 옛 이스라엘은 옛 언약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면, 지금의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피, 즉 예수님의 새언약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스라엘이 곧 교회인데, 즉 주님이 머리가 되시는 교회인데, 그 교회가 이렇게 첫 출발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새언약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스라엘이 곧 교회 !!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것을 그대로 다 믿는다고 하면, 우리가 한 평생을 살아왔던 그 가정, 즉 자기 남편, 자기 아내, 자기 자식보다는, 우리가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가정은 얼마든지 깨어질 수도 있지만, 그러다가 다시 모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님께서 책임지고 단속을 하시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갈라서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생명책의 명단에 26과 27번이 다 나란히 있다고 하면, 그 두 명은 제 아무리 싸워도,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어도, 결국에는 같이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28번도 같이 살아야 하는데, 합격자 명단에 그렇게 있다고 하면 말이다. 그러면 좋던 싫던 간에 영원히 같이 가야하는데, 그러면 26번과 27번에 천국에서 계속해서 싸우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천국에 가기 이전에 그 원인을 밝혀서, 즉 서로 껍데기를 가지고 싸운 것이지 본성은 결코 싸울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오직 '용서받음' !!

그것은 청도특강에서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우리의 직업을 비롯한 모든 세상적인 것을 다 없애버리고 남는 것은 오직 용서받음,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억이 납니까? 그러니 "나는 의사입니다. 나는 판사입니다" 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뭐라고 해야하는가? "나는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라고, 서로 그렇게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26번과 27번이 싸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다같이 용서를 받은 주제이니 말이다.

따라서 용서를 받은 자가 이스라엘이라고 이 특수한 가정에서 했지만, 하지만 정작 이스라엘은 본인들이 이방민족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용서를 받은 것을 자기들의 권리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그렇게 멸망시키는 모습을 보고, 이방인들이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들이 그러한 경우인데, 즉 '룻에게서', '라합에게서', '다말에게서',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마리아에게서' 라고 하는데, 그들이 다 누구인가? 이방인인데, 그것도 이방인 여성들이란 말이다. 이방 남성들은 여기에 해당사항이 없는데, 왜냐하면 아이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말이다(ㅋㅋ).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마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마 1: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
(마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렇게 이방 여성들을 통해서 족보자체의 방향을 둘로 쪼개는데, 그녀들이 그러한 역할을 하는데, 즉 혈통을 주장하는 인간들은 거기로 가라는 것이다. 지옥으로 말이다. 아브라함의 본 자손이고 나발이고 간에 지옥으로 쫓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지옥의 본 자손이 더 잘 어울린다고 하면서 말이다.

반면에 천국의 본 자손들은, 즉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을 믿게 된, 그러한 믿음이 있는 자들만 방향을 틀어서 천국에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에 모인 자들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가라' 라고 하면 가는 자들이고, '오라' 라고 하면 오는 자들의 모임인데, 그런 자들만 모여있다는 것이다. 백부장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말이다.

(마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마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마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마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나'의 본성이 까발려지는 역할을 평생토록 !!

그래서 이러한 이스라엘 가정이나 우리 가정을 하나님께서 껍데기로 사용하실 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이 여기서 까발려지게 되는, 그런 역할을 우리는 일평생 동안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이 그대로 노출되는 말이다.

그러면 본성이 노출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이 본성은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있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지 않은가? 본성이 그렇게 감추어져있는데, 그러면 우리 인간이 자기 본성을 자기가 발견할 수 있겠는가? 권사님, 어때요?

지금 자기가 알았던, 즉 "내 성격은 이렇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2012년도의 주장이고, 2013년도에 가면 "아하, 나에게 이런 성격이 있었네" 라고 하면서, 성격이라고 판단하는 본인부터도 바뀌니, 그 본성자체도 바뀌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지방법원에서 한 판결이 대법원에서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는데,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판사가 다르다는 것이다. 즉 2012년에 자기가 자기를 판단하는 것과 2013년도에 가서 판단하는 것은, 그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결코 장담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본성은 노출이 되어야만 하고, 그런데 정작 우리 스스로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전혀 모르고,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그것은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는데, 이스라엘의 경우에, 오늘 강의주제가 곧 이스라엘인데 말이다.

◈ 이스라엘의 경우에 - '그것은 아니고' !!

이스라엘의 경우에, 이스라엘이 자기들 스스로가 죄를 안다고 해서 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다른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은 건드린다는 것이다. 성질을 건드리는데, 물론 심하게 할 때도 있고, 살살 할 때도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이스라엘의 성질을 건드리는 이방 민족들은 누가 다스리는가?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다스린다는 것이다.

그러한 예가 성경에 여러 군데 나오는데, 창세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고 뭐라고 하시는가?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아브라함의 기분을 '붕' 띄워주셨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으니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그것은 아니고"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그것은 아니고" 라는 것이 노출될 때, 그것이 곧 주께서 그 가정에 개입하신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창 22: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창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 아브라함의 경우에 !!

아브라함의 자식인 '이삭' 이라는 그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웃음인데, 그들이 왜 웃었는가? 그것은 바로 예상하지 못할 일이 벌어졌기에 웃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의 본성을 알 때,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파악하지 못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우리의 본성이 주님의 개입으로 인해서 우리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주여, 저는 주님 앞에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그게 신약성경의 마지막 결론부분에 나오는데, 즉 "주여, 제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고 말이다. 그 이전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것을 얼마나 많이 흉내를 내었겠는가? 그 이전에 얼마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내 탓이요" 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그렇게 했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즉 "제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는 것과, 성령에 오셔서 "주여, 제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는 것과는 전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가 너무나도 다르다는 말이다. 같이 "제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고 해도 말이다.

◈ 주님, 제가 저 사람을 용서합니다 ??

청도에서 강의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는데, 즉 "사람은 누구를 용서해줘도, 누구를 용서해주면서 은근히 피해보상을 하나님에게 청구하는 음흉한 노림수가 있다" 라고 말이다. 즉 "주님, 저렇게 못된 사람을 제가 용서합니다. 그러니 주님은 아시죠? 제가 본 피해를 말입니다. 그러니 30배, 60배, 100배, 알아서 좀 채워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노리고 있는데, 그것은 누가 아는가? 마귀가 알고 그 점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들도 아는데,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희생하시면, 여러분 자자손손 복을 받지 않으려고 해도 복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믿심미까? 할렐루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교인들은 자식 이야기만 나오면 그냥 넘어가니 말이다. 또 들은 것은 있어 가지고 시편의 할렐루야를 써먹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소리를 듣고 싶어서 나온 교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당연히 "아멘, 할렐루야" 라고 화답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목사님, 저기 전도사는 전혀 화답을 하지 않는데요? 물 흐리게 말입니다. 같이 할렐루야를 외치게 하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교회에 나올 때부터, 교회에 온 만큼, 교회에 헌금을 한 만큼, 30배, 60배의 피해보상을 다른 곳에 청구하겠다는 심보로 나온다는 것이다. 시간을 투자해서 성경공부를 한 만큼 다른 곳에서 매상을 더 올려주던지 말이다(ㅋㅋ).

◈ 저는 '개׳' 입니다 !!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들추어내고자 하시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세울 때, 마치 욥처럼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말이다. 그러니 재를 뒤집어쓰고는 "저는 개의 제곱 제곱 제곱입니다" 라고, 즉 "개׳" 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몇 초를 가지 않는데, 하지만 주께서 성령으로 주신 그 몇 초에는 묵시가 모두 담겨있기 때문에 그것이 2초든 3초든 간에, 즉 시간의 양이 많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짧은 순간에 자기 바닥인 자기 본성이 드러나게 되는데, 즉 주님께서 개입한 그 본성이 말이다.

그것은 바로 생명책에 자기 명단이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 인간을 그냥 그대로 놔둘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데리고 가야하는데, 어디로 말인가? 천국으로 데라고 가야하는데, 그러니 기존의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던 천국은 신상털기를 해서 모두 다 털어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진짜로 천국에 갈 때는 면류관도 반납해야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지상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저는 개의 제곱, 제곱, 제곱입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비록 그게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그런 고백이 우리 자신의 본성으로서 발현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 먼저 혼이 나는 이스라엘 !!

참으로 그런 고백이 나오기까지, 어떤 사람은 자식이 먼저 죽는 경우도 있고, 사업을 하다가 망하는 경우도 있고, 또 자기 몸이 망가지는 경우도 있는데, 물론 개척교회가 날아가는 경우도 있고 말이다. 그렇게 온갖 사기를 다 당하다가, 즉 이스라엘이 애굽의 수많은 병거와 말을 의지하다가 그만 혼이 난다는 것이다.

(신 20:1) 네가 나가 대적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민중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렇다고 하면,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나님을 거론하면서도 왜 자꾸 애굽의 힘을 의지하려고 하는가? 우리는 성경말씀을 보면서, 쉽게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구나. 전혀 일들이 안 될 사람들이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은 선악과를 떠난 적이 없어 !!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나라에게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즉 "이스라엘보다도 저 나라를 더 믿어야만 돼" 라고 하게끔, 그렇게 되도록 이스라엘 옆에 자꾸만 믿음직하고 강한 나라들을 배치하는데, 그것은 바로 결국에는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런 인간의 본성과 무엇이 만나게 되는지 밝히기 위해서, 그렇게 계속해서 매치를 시키신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무엇을 따먹었는가? 바로 그러한 선악과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요소들이 우리 곁에서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이스라엘은 결코 선악과를 떠난 적이 없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또한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를 말이다.

물론 그러한 요소가 과거에는 하나의 '선악과' 라는 과실이었지만, 지금은 일종의 미국의 문화와도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옛날에는 그것이 애굽문화이고, 앗수르였고, 또한 바벨론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였고 말이다.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 왜 보살들이 잘 사는가?

저는 절에 다니면서도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화가 나는데, 차라리 종교도 없이 잘살면 자기 요령이라고 여기겠는데 말이다. 그런데 절에 다녀서 부자가 된 사람들을 보면, 물론 부자만 되도 괜찮은데, 거기에다 자식은 공부도 잘하고, 가정도 화목하고, 심지어 다이어트도 성공했다는 것이다(ㅋㅋ). 그리고 사람이 교만하지도 않는데, 즉 "저는 아무 것도 한 것도 없는데, 그냥 부처님의 은덕입니다" 라고 하면, 그야말로 미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보살이 앞집에만 사는 것이 아니고, 양 사방에 있어서 그들이 모두 다 잘산다고 하면,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을 믿는 보람이 무엇이며, 또 즐거움을 어디서 차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무슨 생각이 드는고 하니, "나중에 사업에 성공하면 그때 교회에 충성하고, 당분간은 발을 좀 끊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나중에 자기가 성공해서 십일조를 보란 듯이 많이 내게 되면 그때 교회에 나오겠다는 것인데, 즉 자기에게 주님께서 성공하게 했다는 흔적이 있을 때, 그것을 들고 교회에 나올 때까지 지금 당장은 보류하고 있겠다는 것인데, 바로 그렇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 옆에 잘 사는 보살들을 배치하신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천국에서 사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의 습관은 무엇인고 하니까, 이 세상에서 잘 살고자하는 것이란 말이다. 즉 "이 세상에서 이 정도로 살면 겸손하게 보이겠지. 기독교 신자 축에 들겠지" 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가 만들어낸 것을 가지고 하다가보니, 진짜 천국이 아닌 자들이 우글거리는 가짜 천국에, 그게 곧 죽음의 길인데 말이다. 그것을 그만 생명의 길로 착각해서 계속해서 그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교회도 이스라엘처럼 망해야 !!

요즘 부광교회의 집사님에게서 문자가 얼마나 많이 오는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그 교회의 담임목사 문제인 것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천국이란 것이, 즉 바른 교회는 없다는 것이다. 지난 청도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교회도 이스라엘처럼 망해야 한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교회가 망해야 한다" 라는 말을 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드고 "그러면 이제는 누구를 믿어야 하겠는가?" 라고 하는데, 당연히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동안 왜 교회를 믿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가 망한다는 것에 대해서 기분 나쁘게 듣지를 말고, 평소에 자기 믿음이 무엇이었는지, 바로 그런 식으로 주님께서 추궁을 하신다는 것이다.

◈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의 노선으로 !!

다시 말씀드리겠는데, 가인과 아벨의 경우에 본인들은 정작 몰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인들이 알던 모르던 간에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두 개의 노선으로 잘라서 나누어지는데, 그렇게 한 형제가 둘로 나누어질 때, 그냥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의 노선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의 노선으로 말이다.

이렇게 죽임을 당한다고 하는 요소가 들어있는, 즉 "어린양을 심어놓는다" 라고 하는 차원에서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심어놓을 때, 그 심어놓는다는 것이 한 때의 어린양의 피로서 끝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몇 날이나 몇 달 뒤에는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말이다.

◈ 주(主) - '하나님의 이름' !!

그러니 영원히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는 어린양을 반복적으로 심어놓아야 하는데, 그래서 언약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면서, 그 언약을 심어놓고 그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이 바로 그들과 함께 있는 언약궤에 계시는 분인데, 그분이 누구인고 하니까 '하나님의 이름'인데, 그분이 지상에 나타나면 한 글자로 '주(主)'가 된다는 것이다.

시편에 보면 이 주(主)를 두 개로 나누고 있는데, 하늘에 계신 주와 지상에 실제로 활동하시는 주로 말이다. 하늘에 있는 주님의 지시를 받아서, 즉 언약의 지시를 받아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활동하시는 주님으로, 그렇게 두 개의 주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녹취자 - 목사님, 시편 몇 편인가요? 그만 발음이 꼬여서 듣기가 불가합니다. ㅋㅋ)

◈ 다윗언약 - '친히 제물이 되셔서' !!

물론 다윗은 그 주에 본인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편 51편을 통해서 알았는데, 즉 "주여, 제가 모친의 죄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주의 영으로 깨끗케 해주옵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실질적 왕은 누구라는 말인가? 자기를 앞장세우신, 이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그분이 제사와 번제를 주관하시는 분으로만 알았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까 놀랍게도 실질적으로 제사와 그 예물의 제물자체가 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보고 "제사를 드려. 번제를 드려" 라고 지시만 하는 줄로 알았는데, 그래서 그분의 지시를 따르게 되면 이스라엘이 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다윗은 그분이 그렇게 지시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제물이 친히 되시는 분이 진정한 제사와 번제의 원형이고 완성임을, 바로 그것을 여기 시편 51편에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게 곧 '다윗언약' 인데, 그러니 언약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항상 숨어있다는 것이다.

(시 51: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시 51: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 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시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 51: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시 51: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시 51: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시 51: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시 51: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시 51: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 제물이 되기 위해서 방주에 동승을 !!

예를 들어서, 노아의 방주 안에 있었던 정결한 짐승들의 경우에, 만약에 방주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자기도 홍수에 빠져죽고 물론 다른 여타의 정결하지 못한 짐승들도 모두 빠져죽어야 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방주로 인해서 살았다고 하면, 그들은 방주 때문에 살았다고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창 7: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창 7: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창 7:3)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그래서 자기가 정결한 짐승인 새라고 한다면, 지금 이 새는 방주 안에 있는데, 물론 온 세상은 물로 가득하고 말이다. 그러면 "아이쿠, 저기 물을 좀 봐라. 방주가 참 고맙네. 이 방주가 아니었다면 물에 빠져죽을 뻔했구나"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홍수가 끝나고 1년 10일 이후에, 2월 28일인가 되어서 노아가 다 나오라고 하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노아가 뭐라고 하는가? "너, 이리와 봐. 정결한 너 이리와 봐"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 새는 "왜요? 저는 살았는데요? 왜 그러세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노아가 "이제 그만 죽어"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새삼스럽게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물이 되기 위해서 방주에 동승을 시켰다는 것이다.   

◈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인데, 그러니 부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전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은 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하신다" 라고 하셨는데, 그렇다고 하면 "아버지께서는 하신다" 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아들을 너희들에게 보내었는데, 그래서 너희들이 나를 믿는 게 아니고, 내가 앞으로 너희들을 철저하게 관리하겠다" 라고 하는, 즉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겨준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하는 그 숙제를, 나는 너희들을 대상으로 해서 그 모든 것을 다 실시해주겠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 1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마 19: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 19: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이렇게 되어버리면, 방주를 탈 때의 그 좋았던 기분이, 즉 "이제는 구원을 받았다. 만세" 라고 했는데, 방주에서 내리자말자 목을 따서 피를 흘리게 해서 죽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결한 짐승의 피를 흘리게 해서, 다른 것들은 전부가 무엇을 쳐다보게 되는가? "이제 살았다" 라고 하다가, 갑자기 정결한 새를 잡는, 즉 피 흘리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노아의 식구들도 당연히 피를 보아야 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내가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는데, 너희들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니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너희들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너희들이 스스로 착하게 되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이 정결한 제물의 피로 인해서 나는 너희들을 살려두겠다" 라고 하면서 하늘에서 갑자기 무지개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창 8:18)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창 8:19)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창 8: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창 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그러니 앞으로는 정결한 것을 알지 못하면, 즉 "너 대신에 죽은 분의 피를 알지 못하면, 앞으로 니가 부자가 되던, 공부를 잘하던, 다이어트에 성공하던, 그 무엇을 하든지 너는 영원히 지옥에 간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믿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말인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게 말이다.

◈ 여자의 후손 - '죽임을 당했다' !!

그래서 믿지 않는 자를 믿게 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 아니라, 저쪽의 구원받은 노선에서, 즉 여자의 후손에서 무엇인가를 제시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죽임을 당했다" 라고 하는, 그것도 억울하게 말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말이다. 즉 "지옥에 가야될 너희들에 의해서 천국에 가야될 분이 죽임을 당했다" 라고 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내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는 우리 안에 있는 본성이 드러나게 되는데, 즉 "나는 이 정도로밖에 되지 않는 인간이구나. 진짜로 십자가에서 말하는 그 죄인이 바로 나로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버림을 받아도 되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고 하게 되면, 죽임의 당하신 그분의 긍휼하심으로,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심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여, 저들을 제가 선택했사오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소서" 라고 대신 기도하신, 바로 그 예수님의 중보기도에 의해서 우리는 아무런 값도 없이 부름을 받아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자들이 천국에 가게 되면, 당연히 면류관이 너무 무겁고 부끄러워서 쓰고 있지를 못하는데, 그래서 당장에 발 밑에 내려놓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 앞에서, 즉 억울하게 죽으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죄가 드러나게 된다면, 평소의 우리 행동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기는 짓들을 우리가 해오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게 숨기는데 동원되는 것들이 무엇인가? 그것을 우리가 몰라서는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219페이지를 보자.

** 그런데 결과적으로 요셉이 받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형제들은 자신들의 죄를 알게 된다.

(창 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 '야곱' 이라는 특수한 가정 !!

여기에 보면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매우 특수한 가정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가정에서 흉내를 낸다고 하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형이 동생을 보고는 "동생아, 너로 인해서 내가 범죄를 했구나. 미안하다" 라고 해봐야, 나중에 뭐라고 하겠는가?

자기가 다시 회개를 했다고 하면서 주님에게 피해보상을 요구하게 되는데, 즉 "내가 동생에게 이렇게 용서를 빌었으니, 주께서 나에게 알아서 잘해주시겠지. 내 후손에게라도 말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게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이 경우는 특수한 가정인데, 가인과 아벨, 혹은 야곱은 가정인데, 즉 요셉을 통해서 말이다. 요셉이 죽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물론 형들이 죽였는데,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믿게 하는 그 현장에서 십자가 사건을 계속해서 유발되도록 조치를 하신다는 것이다.

◈ 우리 인생을 통해서 현장검증을 !!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로 인해서 예수님은 죽을 수밖에 없구나" 라고 하는 정황성을 현장감식을 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현장감식' 이란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형사들이 피의자를 데리고 가서 현장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인데, 즉 "다시 한번 그대로 찔러봐. 어느 손으로 했어?" 라고 하면서 하나하나 모두 살펴보는 것처럼,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현장감식은 형사들이 범인의 흔적을 찾는 것이지 싶은데, ㅋㅋ)

바로 그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던 현장감식을 우리들의 삶의 공간을 통해서 재현시키는데, 물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할 수 있는 근거를,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을 드러냄으로서 하신다는 것이다.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숨길 자리가 없어 !!

다시 말해서, "너는 자꾸만 너의 본성을 감추려고 하고, 주님께서는 들추어내려고 하니, 결국 주님을 밀쳐낼 수밖에 없지 않느냐?" 라고 것이다. CSI(과학수사대)에서 그런 방식으로 몰아가는데,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고, 또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등등"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왜냐하면 하늘나라의 고화질 CCTV에 모두 적나라하게 찍혀있기에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숨기려고 해도 전혀 숨길 자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숨기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창고에도, 이미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를 흘리시면서 그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보고 뭐라고 하시는가? "어서 들어와. 니가 이것을 숨기려고 했어? 망설이지 말고 어서 들어와"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이사야가 제대로 된 성전을 만났는데, 그냥 건물로서 지어진 성전은 제 아무리 왔다갔다해도 그것은 성전이 아닌데, 진짜 오늘날 그때의 그 성전, 즉 늘 보던 성전에 갔는데, 그런데 그것이 졸지에 진짜 성전으로 변해버리니 그만 이사야 선지자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사야는 그동안 가짜인 조각으로 만든 그룹들만을 보았는데, 그런데 진짜로 천사가 와서 날개짓을 한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천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조작한 것이 전부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데 진짜로 천사가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느냐는 말이다. 

(사 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사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4)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그 천사가 바로 그 천사 !!

그런데 이사야가 성전에서 만났던 그 천사가 바로, 이제는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자고 있는 베드로에게 와서는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베드로야, 문을 열어놓았어. 그러니 어서 탈출을 해" 라고 하는 천사와도 같은 천사라는 말이다. 

또한 사도바울이 로마로 끌려가는데 풍랑이 일어나서 모든 것들이 다 나자빠졌을 때, "두려워 말라. 니가 로마에 가서 전해야 할 것이 있다" 라고 천사로 바로 그 천사라는 것이다. 물론 동일한 종(種)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같은 부류의 천사라는 말이다.

(행 27: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행 27: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행 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행 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 좁은 길과 넓은 길 !!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교회에 왔다갔다하는 것이 그만 습관화가 되면, 오히려 그것이 신앙생활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 왔다갔다하면서 무엇을 느껴야 하는고 하니까, 그렇게 왔다갔다하는 것도 주님께서 작용하신 것인데, 즉 천사가 밀어 부쳐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생각이 점차 우리에게 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무엇을 없애야 하는고 하니, 천국에 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즉 자기 공로와 자기 의를 삭제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면 그게 곧 좁은 길로 가는 것이고,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교회에 왔다갔다하면서 자기의 공로와 업적이 쌓이게 되면, 즉 마일리지가 쌓이듯이 그렇게 누적이 되면 아주 커다랗고 넓은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널찍한 길로 가고 있는데, 그런데 그 길의 마지막에는 절벽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길로 가면 안 돼!" 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성령을 받지 않으니 뭐라고 하는가? "다들 이 길로 갔는데 당신만 왜 그래? 다른 사람들은 다 바보란 말인가?" 라고 하는데, 하지만 원래 인간들은 바보라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바보라는 말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하면 바보엄마이고, 조카 사업을 사랑하면 바보이모인데, 즉 무엇이든지 다 해주는 말이다. 요즘은 어린이날이 되면 바보이모들이 등장해서 아이들이 그런 이모만을 기다린다고 하는데, 엄마가 주는 용돈은 돈으로 여기지도 않고 말이다.

왜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는가? 이모들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조카를 자식 대신으로 여기다보니, 그렇게 아이들에게 값비싼 것만 사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바보가 다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대 앞에만 서는 나는 왜 작아지는가?" 라고 하는데, 바보니까 작아진다는 것이다. 바보라서 말이다.

아무튼 인간은 처음부터 다 모르는데, 그래서 바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자체가 바보인데, 그러한 다수가 가는 곳이라면 사실은 수상하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그러한데 말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인간들이 모일만한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인데, 어제 서울에서 그런 강의를 했지 싶은데, 너무 촘촘하게 심게 되면 벌레가 생긴다고 말이다. 아무튼 수상하다는 말이다.

◈ 다시, '이스라엘'의 경우에 !!

그렇다고 하면 이제 '이스라엘'로 들어가겠는데, 교재 220페이지부터의 내용인데 말이다. 이스라엘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데, 이 이스라엘의 원래 이름이 무엇인가? 야곱인데, 그래서 주께서는 "야곱을 사랑했다" 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너 말고 다른 이방민족들을 내가 어떻게 미워하는지, 그것을 니가 지켜 보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시편에 나오는데, "나는 악인을 보고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다" 라고 말이다. 그들은 범사가 다 형통하고, 죽는데도 아프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게 부러워서 미끄러질 뻔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미워한 것인데, 즉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준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다.

(시 73:1) [아삽의 시]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시 73:2)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시 73: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시 73: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시 73: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시 73: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시 73: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시 73: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시 73: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기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 한 것을 마주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악과를 마구 주시는데, 선악과를 좋아하는 놈은 선악과로 망하도록 말이다. 그러니 자기 의를 포기하지 못한 자들은, 자기 의를 옹호해주는 목사들에게 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미워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만약에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라고 한다면 결코 그 사람의 뜻대로는 해주지 않는데, 즉 "내 뜻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만 해주신다" 라는 말이다. 우리 인간의 뜻대로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하는 것이 다 아버지의 뜻이란 말이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그 모든 관계가 !!

그래서 예수님도 뭐라고 하셨는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셨는데, 청도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그 모든 관계가 그대로 우리에게 내장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속에서는 무엇이 일어나겠는가?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매일매일 되풀이되면서 작동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시계를 보면 그 시계바늘만 보고 있는데, 그런데 시계를 분해해보면 그 안에는 부속품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엄청나게 바쁘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그 십자가가 우리 속에서 작동이 되면, 우리는 오른 쪽으로 가려고 하면 주님께서는 왼쪽으로 몰아세우는데, 그렇게 우리의 뜻대로는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인간은, 인간의 주(主)가 될 수 없어 !!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알고 "이제는 내 뜻대로 하지 말아야지" 라고 하면, 물론 그것도 되지 않는데, 원래 자기 뜻대로 되고 만다는 것이다(ㅋㅋ). 즉 "내 뜻은 이것인데, 그런데 주님이 내 뜻대로 해주지 않으니 내가 반대방향으로 가야지" 라고 하는, 그러한 노림수를 주님께서는 훤히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원래 자기 뜻대로 다시 하려고 하면, 또 반대로 가버리고 만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결코 그 주도권을 우리 인간들의 손에 넘기는 법이 없는데, 즉 "우리가 우리의 주가 되지 못하게 하신다" 라는 것이다. 그것도 끝까지 말이다.

◈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이 곧 !!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에, 그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가, 지금 우리가 이스라엘을 알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이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러한데, 그들이 과거에 한번 써먹어서 효과를 본 것을 그대로 다시 써먹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삼손이 머리를 길렀을 때는 아주 잘 나갔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진짜 이스라엘을 보여주고자 할 때는 삼손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난 뒤에, 사실상 그의 머리카락 정도가 아니라, 그의 몸 자체가 적들에 의해서 파묻힌다는 것이다. 마치 노아방주에서 나온 정결한 짐승을 잡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곧 '나실인'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 '나실인'은 포도와 관련이 !!

이 '나실인' 이라는 것은 항상 포도와 관련이 있는데, 그렇게 포도와 관련이 된 것은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인데, 포도열매나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 안 되는데, 그리고 장례식장에도 가면 안 되고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떡과 잔을 나누고 나서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그때까지만 마시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포도나무에서 난 것은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마 26: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마 26: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니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포도와 관련된 나실인은 하나의 모형에 불과하고 그 실체, 즉 포도와 관련된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이스라엘은 그 자체가 포도를 생산하는 포도원인데, 그게 아가서에도 나온다는 것이다. 가나안 땅, 즉 이스라엘 땅에는 포도생산이 많았는데, 젖과 꿀이 흐른다는 것은 이런 포도 생산량과 관련이 있는데 말이다.

(아 1:1) 솔로몬의 아가라
(아 1: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아 1:3)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아 1: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아 1: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아 1:6)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
(아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 나실인과 어린양 !!

아무튼 '나실인'에게는 특수한 임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은 개입하지 못하고 흠이 없는 짐승만 개입되는 제사에 나실인만큼은 참여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나실인만큼은 그동안 포도와 관련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그래서 그동안 자랐던 그 머리카락을 잘라서 하나님에게 화목제물로 드리는데 첨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실인의 소원이 무엇인고 하니, "어떻게 하면 내가 주를 위해서 죽을 수가 있습니까?" 라는 것인데, 즉 "흠이 없는 머리카락을 드릴 수 있습니까?" 라는 것이란 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면 내가 죄 없이, 죄 있는 자를 위해서 대신할 수 있는 흠 없는 어린양이 될 수 있습니까?" 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민 6: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민 6: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민 6:3)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민 6:4)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민 6:5)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민 6:6)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민 6:7) 그 부모 형제 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음이라
(민 6:8)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

◈ 민수기 해석은? ①②③④ !!

이것이 바로 민수기 6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렇다고 하면 민수기의 해석은 어떻게 해야하는고 하니, 민수기에서 바로 신약성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민수기에서 언약으로 가서, 그 언약에 대해서 새언약으로 완성해서, 그리고는 새언약으로 와서는, 그 새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님에게서 거꾸로 소급해서 민수기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순서가 그렇게 되는데, 물론 지금은 다 잊었겠지만 말이다. 모세언약 부분의 동영상 강의를 보면 되는데(성경의 중심사상 수련회 강의?), 거기에서 이렇게 ①②③④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민수기에서 곧 바로 신약으로 넘어오지 말고, 민수기의 언약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가서, 민수기의 경우에는 그게 모세언약인데 말이다. 거기에서는 이미 자기가 했다는 것이 모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내가 했다" 라는 것이 말이다.

그러니 민수기에서 언약으로 올라갈 때부터 이미 우리는 닭 쫓던 개가 되어서, "나의 구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나의 행동으로 붙잡을 수가 없구나" 라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깁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렇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생활을 매일같이 하는 것이 곧 신앙생활이란 말이다. 

그래서 "주여, 이것을 몰면서 어떻게 구원이 되겠습니까?" 라고 하면, "주께 맡겨라" 라는 것인데, 즉 "언약에 맡겨라" 라는 것이다. 그런데 "언약에 맡겨라" 라고 한다고 해서, "나는 주님께 다 맡깁니다" 라고 해놓고는, 그 맡긴 결과를 두고 자기가 끄집어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맡겼다면 그것으로 끝인데,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말이다.

언약에 맡긴다고 하면 새언약인 그쪽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지, 자기가 거기에다가 무엇을 한다고 하면서 "내 명패가 어디 갔습니까?" 라고 하면서 자기 명패를 찾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주께서 결과적으로 통보하게 되면, 즉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되면, 우리가 새삼스럽게 그 절차를 밟지 않아도 이미 다 이루어진 것을 받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그 안에서 "아하, 내가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서 구원을 받았구나" 라는 것을, 즉 ①②③④로 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늘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야, 다른 사람은 의사를 해서 구원을 받았는데, 나는 이렇게 몰아서 구원을 받았구나" 라고 말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평생 주부로 살아도, 즉 설거지를 하면서 구원을 받고, 반면에 어떤 사람은 평생 목사짓을 하고도 지옥에 가고 말이다. 그렇게 불공평한데, 평생을 착한 일을 해도 지옥에 가고, 반면에 25년 동안 강도짓을 하다가 교도소에서 복음을 듣고 천국에 가지고 말이다.

◈ 도대체 값없이 구원을 얻게 한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너무나 불공평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 안에는 언약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불공평해 보이는 것들이 말이다. 즉 성령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은혜로 준 것인데, 거기에는 인간 행함의 공로가 일체 차단되어있다는 것인데, 즉 "내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값없이 구원을 얻게 한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흔히 교회에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뭐라고 하는가? '룰루랄라', 혹은 '뜨겁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성령은 그것이 아니라,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이 죄인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냥 공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그렇게 냉정하고 냉철하게 주께서 하신다는 것을, 그것이 알아지면 그게 곧 성령을 받은 것이란 말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밖에 없는가? "모든 것이 주께 나와서 주로 말미암아서 주께로 돌아갑니다" 라고 하는, 그것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고 저떻고"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실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 이스라엘은, 침몰하는 항공모함과도 같아 !!

이스라엘은 마치 서서히 침몰하는 항공모함과도 같은데, 왜 그런고 하니, 이스라엘은 온갖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보았는데, 즉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도 지켰다가 저렇게도 지켰다가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해보았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을 보고는 욕을 하는데, 하지만 당사자의 입장이 한번 되어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욕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그들이 목사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결과적으로는 자기도 지옥에 가고 남들도 지옥에 보내니 그만 문제가 되고 말았는데 말이다.

그 당시 선지자들은 그야말로 돌아이들인데, 자기 마누라가 죽어도 울지 않고 말이다. "주님이 알아서 죽였는데 울기는 왜 울어?" 라고 하면서 버티고 있으니, 그러니 목회상담을 위주로 하는 일반 목사들은 그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한 영혼 한 영혼이 귀한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아닌가요? (ㅋㅋ)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글쎄, 십자가 복음이 맞기는 맞는데, 그런 소리를 해도 한 영혼이라도 떨어지면 주께서 얼마나 섭섭해하겠는가? 그러니 복음은 나중에 전하고, 일단 지금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어야 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오른 손에는 장수, 왼손에는 부귀다" 라는 말씀을 들이대면서 말이다.

(잠 3:16)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해서든 교인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만들어서 외로움을 덜 타고 교인들간의 친목을 도모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는 것이다. 기도하면 복을 받는다는 간증들을 모아서 소개해주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심어주어서, '목적으로 이끄는 삶' 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야, 자살할 사람도 교회에 와서 살았다" 라고 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모아서 각 교회마다 데리고 다니면서 간증을 시키고 돈도 좀 챙기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그저 '기독교' 라는 교세를 키우고, 또 자기 교회의 교세를 키우고 말이다. 그렇게 라도 하면 그 중에서 몇 명이라도 천당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 거짓 선지자들의 '한 영혼 살리기' !!

그런데 그러한 아이디어가 바로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의 아이디어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신조가 무엇인고 하니 '한 영혼 살리기' 라는 것인데, 그런 휴머니즘이 무엇이 그리 나쁘냐는 것이다. 얼마나 갸륵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가짐이냐는 말이다.

로마에서 최고의 인간상이 무엇인고 하니, 덕과 지혜와 용기와 절제인데, 거기에 하나 더 보태면 겸손이고 말이다.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데, '아우렐리우스' 라고 스토아학파에서 나오는 최고의 윤리가 곧 덕과 지혜와 절제와 온유 등인데, 마치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그런 것이 이미 로마서의 역사 속에 나오는데, 그러니 기독교를 모르고 예수를 몰라도 인간이 어떻게 서로 인간이 사회적인 구성원으로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지, 어떤 요건으로서, 즉 어떤 품위와 인격으로 살아야 서로 존경을 받으면서 서로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지, 그런 정도는 인간들도 알아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성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교회주변에 있으면서 교회에도 나오지 않는 인간들이 늘 하는 잔소리가 있는데, 즉 "교회에 가는 니 꼬라지보다 내가 더 착하고 의롭다" 라는 것이다. 왜 그런 소리를 하는가? 즉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교회에 가지 않아도 다 안다. 겸손하고 남을 배려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되는데, 그 정도다. 비록 나는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가끔 기독교 TV를 보니 다들 그런 소리를 하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그야말로 '아니거든요' 라는 것이다. 지옥에 데리고 가기 위해서 마귀가 그러한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여러분이 욕심을 내지 않고 착하게 살면, 죽어서도 결코 지옥에는 가지 않습니다" 라고 꼬드기면서 말이다.

◈ 결집력 !!

그러니 한 글자로 '피' 라는 것인데, 그따위 소리를 한 우리 자신이, 그것이 왜 주님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한 원인이 되었는지, 그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 속에 그동안 얼마나 뿌리깊게 있었고, 주님께서 참아왔는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서 인간의 낼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를 다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그저 이스라엘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즉 "위 아 더 월드" 라고, 서로 손에 손잡고 화목하고 하나가 되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힘이 집결될 때, 그것을 두고 '결집력' 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결집력이 될 때는 언제인고 하니, 공통적인 사상과 정신을 거기서 끄집어내어서,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모일 때 비로소 결집력이 생긴다는 말이다.

◈ 엘리야의 경우에 !!

엘리야가 싸울 때 몇 대 몇이었는가? '850:2'도 아니고, '850:1'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엘리야 말고 '남은 자'가 있음을 보여주시는데, 결코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엘리야가 오죽했으면 자살을 다 하려고 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일을 시켰으면 좀 바쳐주든지 하지 않고 어떻게 했는가? 엘리야가 그렇게 곤경에 처했을 때 사르밧 과부가 어떻게 했는가? 떡과 참기름을 조금 가지고 있었지, 별로 도와준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엘리야가 싸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자기 싸움이 아니라, 만약에 자기 싸움이라고 하면, "우리 복음을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힘을 합치자" 라고 하면 되는데, 하지만 성도라고 하면 그러한 자기 싸움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윗의 경우에, 그가 골리앗과 싸울 때 그게 누구의 싸움이었는가? 하나님의 싸움이었지 자기 싸움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에 다시 골리앗과 싸우게 된다면, 아마 골리앗이 이마에 초방탄 강철을 붙이고 나왔지 싶은데, 돌맹이가 날아올 여지도 없이 말이다. 물론 다시 싸우면 하나님께서는 골리앗의 심장을 찌르지 싶은데, 골리앗이 투구가 너무나 무거워서 머뭇거리는 사이에 다윗의 창이 말이다. 물론 그것은 이근호의 아이디어지만 말이다(ㅋㅋ).

그러므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차피 죽게 될 인간은 허상에 불과함을 이스라엘은 알아라. 너희들은 힘이 강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고, 저쪽은 원래 죽은 자이고, 너희들도 죽은 자인데, 그런데 너희들은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즉 어린양 때문에, 그 반복되는 제사로 인해서 너희들은 죽어도 살고, 살아있어도 죽은 존재이다, 그러니 그것을 비교하면서 살아라" 라고 하는 것이 곧 언약이란 말이다. 

그러니 살아가면서 세상적으로 아무리 성공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무엇인가? 죽기 직전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광우병에 걸려서 미쳐버린 소를 잡기 직전처럼 말이다. 바로 그런 도살직전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 '결집력'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유혹 !!

아무튼 이 결집력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유혹이었는데, 즉 "우리끼리라도 힘을 합치자" 라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도와준 적이 없다" 라는 것인데, 사실 그 말이 맞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도와주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미 살았는데 더 이상 무엇을 도와주고 말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생명을 주었으면 된 것이지, 더 이상 무엇을 바라느냐는 것이다. 어디 주님께서 고무장갑이라도 끼고 설거지라도 해주기를 바라는가? 설거지를 하든 말든, 그릇이 깨어지든 말든, 천국에 가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강도의 경우에, 그 강도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물론 강도는 믿음이 좋아서 그것을 감사하게 여겼지만 말이다. 만약에 믿음이 없는 사람이 그러한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처음부터 강도짓을 못하게 하든지 말이다. 그렇게 자기를 못된 사람으로 만들어놓고는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해버리면, 그러면 자기체면은 도대체 어떻게 되느냐는 말이다.

우리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런 경우인데, 즉 "십자가 복음은 다 인정하고 믿겠는데, 진짜로 그것이 복음이라고 하면 자기를 웃음거리로 만들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것이다. 자기를 그야말로 실컷 원수로 만들어놓고는, 끝에 가서 십자가 복음이라고 해버리면, 그러면 자기는 손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교회에 와서 싸우면서 자기 성질을 왕창 다 내놓았는데, 그런데 이제 와서 복음을 믿으려고 하니 어떠한가? 그동안 자기가 한 것이 있기 때문에, 도대체 그 다음에 뒤에서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하겠느냐는 것이다.

◈ 바벨론이 보여주는 것은?

그러니 이 '결집력' 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 중심의 결집력인데, 즉 '내 편 만들기'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그동안 해왔던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서 누구를 잘라내는가? 결집력에 대해서 생각도 하지 못했던 가난한 자들은 남겨두고, 누구를 포로로 데리고 가는가? 귀족들, 왕들을 모조리 다 잡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하는가? "결집력, 꼴 좋다. 그래 너거들보다 더 센 결집력이 있다" 라는 것인데, 그게 누구인가? 바벨론인데,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바벨론이 그렇게 강한 나라가 된 것은 배후에 누가 있기 때문인가?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을 해체시킨 하나님께서 "너거들의 원하는 힘이라면, 그 힘과 힘의 대결에서 밀려서 너거들을 천하의 웃음거리로, 창피하게 만들어버리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원래부터 그런 웃음거리가 되어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이미 싸워서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들어왔으니 말이다.

◈ 유대인의 왕 ??

우리가 아무리 창피를 당해도 예수님보다 더 당하겠는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그런 것 때문에 얼마나 조롱거리가 되었는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니, 실제로 예수님에게 가시 면류관을 씌어서 '유대인의 왕' 이라고 팻말을 붙여놓고 말이다.

그야말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동네에 있는 개돼지 취급을 당했는데,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는가? 지금 일어나는 모든 것이 다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만약에 그런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25km(?) 뒤에서 마귀가 팔짱을 끼고서 보면서 "예수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메시야를 포기해라. 지금이라도 나에게 절하면, 이 세상 만국을 주겠다. 내가 진작 너에게 말했지? 하나님은 너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말이야. 내가 도와줄 게. 그러니 가기는 어디를 간단 말인가? 그냥 이 땅에서 같이 살자. 죽으면 끝이니,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야. 하늘나라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끝까지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마귀마저도 미리 아시고, 가룟 유다에게 뭐라고 하시는가? "유다야, 너거 아버지에게 가라. 그런데 아직 마지막 할 일이 남았는데, 그게 바로 나를 잡아서 죽이도록 넘기는 것이다. 그러니 그 일은 마저 다하고 가야지"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넘기게 되는데, 그것도 모르고 베드로는 칼을 빼면서 뭐라고 하는가? "도대체 누구야?" 라고 하는데, 그래도 수제자랍시고 객기를 부리는데,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칼을 거두어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말씀은, 결집력이 아닌 '해체' !!

바로 이렇게 인간은 결집력과 같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끄집어내는데, 즉 "결집력을 주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가 개입되었기 때문인데, 하지만 말씀은 결집력이 아니라 그냥 '해체'라는 말이다. 그것이 신명기 32장에 예언되어있는데, 즉 이스라엘은 저주를 받아서 멸망하게 되어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신명기 마지막에서 모세가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신명기 32장을 찾아보겠는데, 그 이전에 30장 17, 18절을 보자. 

(신 30: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신 30:18)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여기서 뭐라고 하는가? '유혹을 받아서' 라고 하는데,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주변에 유혹이 될 만한 것들을 뿌려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섬기면 반드시 어떻게 되는가? 반드시 멸망하게 되는데, 그래서 멸망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제 신명기 32장을 보자.

(신 32:15)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
(신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
(신 32:28) 그들은 모략이 없는 국민이라 그 중에 지식이 없도다
(신 32:29)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으면
(신 32:30)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어 주지 아니하셨더면 어찌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케 하였을까

◈ '나'가 해체되어가면서 !!

여기 32장 15절에 보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라고 하는데, 그리고 21절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라고 되어있고, 28절에도 보면 "그 중에 지식이 없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의 마지막 멸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놓고 12지파에 축복을 하는데, 사실상 그것은 축복인지 아닌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이스라엘은 멸망을 길로 접어들었는데, 그러니 그런 상태에서 축복이라는 것은 멸망의 코스로 몰아넣는 힘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해체되어가면서, 즉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서 고개를 들고 주님의 말씀을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는 것, 평소에 자기가 생각한 게 아님을 말이다. 그것이 바로 주께서 숨겨놓고 준비하신 구원의 수단이 되는데, 즉 자기가 말씀에 대해서 오해를 했다는 것을 점차 드러나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이제 교제 221페이지를 살펴보자.

** 따라서 성도에게는 자기 미움이 지속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말씀을 동원시키신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여기 히브리서 4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라고 하는데, 그러면 말씀자체가 이렇게 쪼개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 중심의 결집력을, 그 모든 것을 원천적으로 해체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쪼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쪼개짐을 당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 어떤 대상으로서 다시 뭉칠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주님, 쪼개봐요? 쪼개봐요?" 라고 개기지를 말고, "주님이여, 쪼개주옵소서. 난도질을 해주옵소서. 팔 하나는 무안에 가있고, 다리 하나는 제주도에 가있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것을 합쳐 '나' 라고 하지 않게 하옵소서" 라고, 그러니 모든 것을 '주님의 것' 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식으로, 말씀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안은 어떻게 되겠는가? 해체된 것을 주님의 십자가 피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재조립을 시키는 것을, 그것을 매일같이 반복하신다는 것이다. 자기는 날마다 죽고, 주님으로 인해서 날마다 사는, 바로 그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 속에 결집력으로, 즉 하나의 힘으로서 '나'가 '나'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왜 그런 식으로 하시는가? 그것은 곧 천국에서의 삶을 미리 앞당겨서 우리에게 실시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왜 야곱은 사랑을 받습니까?

이제 하나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주일오후 설교시간에 한 것인데 말이다. 이스라엘은 야곱인데, 그 야곱 맞은 편에는 에서가 있다는 것이다. 에서가 커서 에돔이 되고, 야곱이 커서 이스라엘이 된다는 말이다. 조금 전에 가정이 확대되어서 국가적인 분쟁이 된다는 했는데 말이다.

구약에서 이렇게 야곱과 에서인데, 그런데 질문이 무엇인고 하니, "왜 야곱은 사랑을 받습니까?" 라는 것이다.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되는데, 즉 이스라엘은 야곱에서 나왔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데, 그러면 "야곱은 어디서 나왔는가?" 라는 것을 우리가 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야곱에게서는 사랑이 나왔고, 에서에게서는 미움이 나왔는데, 그러니 한 쪽에서 사랑이 나오고 또한 미움이 나왔는데, 이것을 두고 '경향성'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야곱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야곱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주되심에서 나온 그 미움이 에서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시간적으로도 그러한데, 창세 전에 이미 사랑할 사람은 사랑하고 미워할 사람은 미워하도록 해놓고 그대로 만드시니,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말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말 1: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일이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면, 우리가 야곱인지 에서인지, 그것을 밟아가려고 하면, 우리가 야곱에게서 출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곱은 야곱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어서, 즉 "나는 야곱이 맞지요?" 라고 하면서 자꾸만 다가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야곱이라는 '나'를 말씀으로 해체시켜버리는데, 그 안에 언약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사랑을 받기로 작정된 것이 믿어진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점차 사랑으로 간다는 것이다. 야곱에게 준 사랑으로 다가서서, 그러면 누가 살아있는가? '내'가 살아있는데, 무엇으로 말인가? 피로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주님과 연결이 된다는 말이다. 

◈ '나'는, 주님께서 우뚝 서는 하나의 공간으로서 !!

그러니 "나는 구원을 받았어" 라고 나오지 말고, 그것은 지방교회의 워치만 니 쪽에서 말하는 것인데, 즉 "이렇게 하시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자꾸만 자기 구원을 생각하지 말고, 자기는 구원이 될 필요가 없는데, 자기를 해체시키는 그것이 주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나중에는 자기가 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뚝 서는 하나의 공간으로서의, 그런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로부터 출발해서 그 나가 해체되어서 주님께로 갔다가, 주님에 의해서 다시 나가 되어버리면, 그러면 더 이상 나는 나가 아니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된다" 라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방향성, 그러한 경향성으로 인해서 말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사는가?"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주께서 해주시는 경향성으로 인해서, 주께서 조성해주시는 분위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미움과 대조가 되는 사랑인 줄로 압니다. 그러면 저들은 왜 그것을 모릅니까? 그것은 성질이 더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식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미움을 받기로 작정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자신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 줄 압니다. 바로 그러한 것을 저희들이 보면서 날마다 우리 자신이 해체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06,08 새벽 00시 10분에 마침.

                                                          당신은 왜 사느냐고 묻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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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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