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72강 하나님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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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20604피p223하나님의선택

피72강 하나님의 선택

[12 대구강의 11] - [피 72] - 하나님의 선택

                                                    12,06,0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

오늘은 교재 223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야곱이 메시아로부터 이 혜택을 입는 것이 야곱이 창세 전부터 사랑을 받기로 작정된 자라는 이유 말고는 전혀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롬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여기에 '선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런데 사람이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히 사람이 아닌 다른 분이 선택했다는 것이다. 만약에 자기가 선택했다고 하면, 그 선택한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에 왈가왈부할 수 있지만, 그런데 자기가 아닌 다른 남이 선택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관여하기가 상당히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분이 선택한 의도나 그분의 목적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조그마한 일을 하나 벌리더라도, 그것을 자기가 시작해서 설계를 하고, 그렇게 자기가 한 것이라고 하면 아는 체를 하고 가담할 수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남이 하는 일에 끼어 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심지어 주부가 하는 설거지의 경우에도, 자기가 중간에 끼어 들어서 중간에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잡채를 하나 만들더라도, 자기가 시작했으면 자기가 간을 맞추고 다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남이 중간에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만든 사람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선택 !!

그와 같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다고 하면, 뒤늦게 태어난 우리가, 그것이 자기 인생이라고 해서 관여한다는 것 자체가 당연히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떤 충돌인가? 자기는 자기 몸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자기 선택이 가동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자기 몸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하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선택과 자기의 선택이 서로 피할 수 없는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과연 우리가 원만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안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을 의도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야곱의 경우에, 야곱이 태어났을 때 야곱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살려고 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선택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야곱과 하나님 사이에는, '야곱' 이라는 몸체를 두고, 야곱은 야곱대로 자기 주장을 담으려고 하고,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 자기 계획에 끼어 맞추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힘이 들겠는가? 야곱 본인인데, 그게 바로 야곱과 야곱 사이가 아니고, 야곱과 이스라엘 사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야곱은 몰랐지만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이미 예상하셨는데, 즉 '이스라엘' 이란 이름을 말이다. 물론 야곱은 야곱대로 자기의 계획을 자기 몸에다가 덮으려고 했는데,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을 야곱이 되게 하신 게 아니라, 이스라엘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 구원여정은,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그 모든 경우 !!

여기서 나온 공식이 하나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야곱은 이스라엘과 대립하고 싸우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과정, 즉 구원여정은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그 모든 경우에, 거기에 다 소속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 그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던, 물론 그 이전도 마찬가지인데, 그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던 간에 야곱과 이스라엘이란 구성의 공식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참으로 행복한 일인데, 즉 "내 인생이 어떻게 될 것입니까?" 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답변은 간단한데 "내가 너를 이스라엘로 만들어줄게"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그 음성을 듣는 순간에 졸지에 '나' 라는 것은 사라지고, 야곱이 '나'를 대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 우리는, 반드시 야곱을 만나야 !!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공식을 만나게 되는데, 즉 이렇게 '나' 라는 것이 그냥 이스라엘로 가는 게 아니라, 그 중간 과정에서 누구를 만나는고 하니, 반드시 야곱을 만나게 되는데, 물론 야곱은 항상 에서와 같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로부터 출발한 인생이 '야곱과 에서' 라는 구조의 공식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이스라엘이 보이는 식으로,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말이다. 바로 여기서 야곱과 이스라엘로 구성된 이 구조를 두고서 '언약'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도 했지만, 리브가가 아기를 낳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두 명의 아기를 생산하도록 하셨는데, 그때 태중에 있는 야곱과 에서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서로 싸우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싸움의 배후에는, 한 쪽은 무조건 미움을 받도록 되어있고, 한 쪽은 사랑을 받도록, 즉 천국에 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야곱과 에서는 하나의 대리인에 불과하고, 이들을 제거해버리면 그 배후에는 지옥에 갈 존재와 천국에 갈 존재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야곱과 에서라는 인간이 등장하는 것은, 그것은 인간 편에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영적 싸움의 대행자로서 야곱과 에서가 등장한다는 말이다.

◈ 이스라엘과의 충돌 !!

제가 방금 이야기했지만, 이 '나' 라는 인간은 야곱과 에서라는 구조에 빨려 들어가는데, 그렇게 되면 둘 중의 하나로 갈라지게 되어있는데, 즉 "야곱인가? 에서인가?" 라는 것으로 말이다. 여기서 야곱은 이스라엘로 바뀌는데, 여기서 야곱은 에서와의 충돌뿐만이 아니라, 누구와의 충돌도 일어나는가? 이스라엘과의 충돌도 역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될 때, 야곱은 '육'의 세계라고 할 수 있고, 이스라엘은 '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야곱의 자격이 아닌 이스라엘의 자격으로 천국에 간다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다. 즉 언약장치에 의해서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바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가게 된다는 것이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야기가 아주 쉬워진다고 여길지 몰라도, 사실은 그게 아니라 더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야곱과 이스라엘, 이 둘 사이에서, 물론 야곱은 이스라엘의 미래이고, 그리고 이스라엘은 야곱의 과거라는 말이다.

여기서 과거라는 것은 하나의 재료라는 말인데, 즉 야곱이 있을 때는 이스라엘이 함께 있기 때문에, 과거라기보다는 하나의 재료가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야곱을 가지고서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지, 야곱이 없는 이스라엘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마저도 야곱이 되는데, 즉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신다는 말이다.

◈ '육'에서도 구원, 천국, 의, 율법 등의 개념이 나오기에, 디피컬트 !!

이렇게 되어서 이야기가 더 복잡하게 되는데, 그렇게 복잡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야곱이 나름대로의 무엇을 형성하는고 하니, 야곱의 경우에는 '나' 라는 것이 함께 살아있으니, 이것은 여전히 육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어려워지는데, 왜 그런고 하니, 이러한 육에서 구원, 천국, 의, 율법, 하나님, 삼위일체 개념 등등이 모두 다 나온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러한 것이 아예 나오지 않는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속속 담기면, 그것이 곧 정답이 되겠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를, 즉 언약을 주게 되면 이런 육에서 나오는 엉터리 개념들이 계속해서 우리를 휘감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생명' 이라고 하면, 이것은 육의 경우에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생명의 힘, 혹은 생존의 힘이라고 해서,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쪽으로 나아가는데, 그런데 그 생존의 힘을 현미경을 가지고 확대시켜버리면, 거기에 신구약 성경이 모두 다 나온다는 것이다. 특히 구약에서의 이스라엘의 반항과 같은 것이 말이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셨는데, 그러면 이 금식이란 것은 무엇을 포기한 것인가? 현재 육에서 나온 생명의 힘, 혹은 생존의 힘을 스스로 포기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살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즉 "나는 이제 살지 않을 거야" 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말을 그렇게 하면서 밥을 먹는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고, 그렇게 하려면 먼저 음식부터 끊어버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 모세의 경우에 !!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 갈 때 혹시나 싶어서 초코렛과 같은 비상식량을 가지고 갔는가? 아니면 과일과 같은 간단한 간식거리를 들고 갔는가? 모세가 40일 동안을 거기에 있다가 내려왔는데, 그때 방송국 기자가 와서 인터뷰를 하기를, "거기서 무엇을 드셨습니까? 그리고 하루에 잠은 얼마나 잤습니까" 라고 하면, 대답을 어떻게 해야하겠느냐는 말이다.

모세는 물과 음식을 먹지 않았고, 심지어 잠도 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기자는 "그러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라고 하지 싶은데,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말씀을 듣고 무엇을 보았는고 하니까,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법 체계에 의해서 구성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다. 즉 말씀체계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이라는 것은 그냥 들어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은 말씀의 체계로, 시스템으로, 즉 말씀의 철골 구조물로 되어있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모세는 말씀으로 짜여진 집을 보았는데, 그래서 그렇게 본 집을 그대로 따라서 이 땅에 지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성소라는 말이다. 그러면 모세의 그 미래의 영광을 모두 다 보았는고 하니, 그것은 아니고, 자기가 기껏 본 것만 전달했는데, 그것이 곧 성소라는 말이다.

◈ 낯선 것과 위기 !!

아무튼 그렇게 모세가 시내산에서 본 것은 자기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자기의 아이디어나 상상력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당연히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야만 비로소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낯선 것'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낯선 것 앞에서 이 땅의 모든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고 하니, '위기'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크라이시스'  라는 말이다.

처음에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과 이 땅에서 만났을 때 그 장치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곧 그냥 떨기나무가 아닌 불이 붙은 떨기나무라는 것이다. 산에 떨기나무가 한 두 군데 있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모세야, 니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어라" 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는가?

불이 붙은 떨기나무인데, 즉 처음에 모세가 양을 치다가 불이 붙은 떨기나무를 보고 이상해서 갔는데 바로 그 떨기나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순간 하나님은 모세의 뒤나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찾아간 그 불붙은 떨기나무, 바로 그 떨기나무에서 이야기를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것을 그대로 하늘나라로 이어보면 어떻게 되는가? 하늘나라 자체가 지상에서 보면 무엇인고 하니, 화염 속에 있는 나라인데, 그리고 막상 시내산에 올라갔던 모세는 불에 타지도 않고, 거기에서 40일 동안 멀쩡하게, 사실은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해와 같이 얼굴에 빛이 나면서 내려온다는 것이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해와 같이 빛난 것처럼 말이다.

(출 3: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출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출 3:3)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출 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 3: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인간들의 천국은 삭제를 당해야 !!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낯선 것인데, 즉 지상에는 없는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지상에는 없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지상에서 인간들이 아무리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어도 천국을 전혀 그려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평소에 그려내는 천국은 언제나 삭제를 당해야 하는 엉터리 천국이고,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계속해서 삭제를 하면 결국에는 남는 것이 전혀 없지 않겠습니까?" 라고 할지 몰라도, 그런데 그것이 바로 언약, 즉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그렇게 되어진다는 것이다.
 
◈ 제자들의 배짱은 어디에서?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베드로와 야고보를 비롯한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순교의 길을 갔는데, 그러면 그들이 무엇을 믿고 그렇게 과감하게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특별히 무엇을 본 것이 있었는가? 도대체 무엇을 믿고 그렇게 했느냐는 것이다.

만약에 본 것이 있다고 해도 문제가 되는데, 왜냐하면 매일같이 보아야 하니까 말이다. 5년 전에 본 것을 가지고 버틸 수는 없는데, 인간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설령 무엇을 먹었다고 해도, 즉 주님의 성만찬에 참석했다고 해도, 하루 이틀이 지나면 그 맛이 무슨 맛이었는지를, 그냥 입맛만 다신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인간의 육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천국의 내막을, 도저히 그것을 우리 몸이 담아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설령 겨우 어떻게 해서 담아낸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기억의 파편으로서 그만 삭제가 되고 사라져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몸은 도저히 천국을 담을 수가 없는데, 즉 우리 몸은 작고 천국은 크다는 것이다. 어떻게 작은 것이 큰 것을 모두 다 이해하고 수용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전혀 안 되는데, 그렇게 안 되니 억지를 부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설령 꿈속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해도, 제가 그때 본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즉 그렇게 본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때 필요했던 것이고, 하지만 지금 이렇게 늙어가고 부서져가고 있는 이 몸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말이다.

◈ 아니, 60대의 언니의 정수리를 누가?

여기에 오면서 60대 할머니를 보았는데, 요즘은 60대를 할머니라고 하면 곤란하고, 60대 중반의 언니를 보았는데, 머리카락을 조금 길렀는데, 그런데 뒤에서 보면 정수리 부위에 머리카락이 그만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인가 중간에 단절된 듯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것을 보니 순간적으로 "저 언니도 10대에는 저렇지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말이다(ㅋㅋ).

누가 그렇게 했는가? 본인이 가위를 가지고 그렇게 머리카락을 도려내었는가?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느냐는 말이다. 우리는 쉽게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는데, 그것을 조금 더 정답에 가깝게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 언약에 들어오게 되면 !!

그러니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늘 위기가 되는데, 언약은 낯선 것이 되고 말이다. 우리의 육은 친숙하지만, 친숙한 그것이 곧 우리에게 위기로서 찾아온다는 것이다. 기존의 알았던 신학도 나중에는 기억력이 떨어져서 다 잊어버리고, 외웠던 성경구절도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고 말이다. 또한 5년 전에 받았던 그 감격스러움의 은혜도 역시 잊어버리고 말이다.

저장고에 잘 담겨 있으면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사용하면 되는데, 그런데 저장고 자체가 같이 녹슬어 가는 입장에서 무엇을 담아낼 수가 없고 소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게 정상인데, 그러니 천국은 우리의 몸으로 담아낼 수 없다는 말이다. 즉 우리 몸은 천국을 담아낼 그릇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성도는, 그때 그때마다 만들어져 가고 있어 !!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지난주일 낮 시간에 설교한 것처럼, 주께서 언약의 활용도에 따라서 우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있음을 위해서 주께서 있는 게 아니라, 주님의 있음을 위해서 그때 그때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만들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생각한 야곱은 위기가 되고, 또한 그 야곱을 위기로 몰아넣은 이스라엘은 낯선 것이 된다는 것이다. 바꾸어서 말하면, 낯선 것은 큰 것이 되고, 위기에 처한 우리는 작은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큰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작은 것에다 믿음과 애착을 가지고 고집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건 아니라는 말이다. 

◈ 칼바르트 - '말씀을 떠난 것이 곧 위기이다' !!

그래서 칼바르트라는 신학자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우리 인간에게 위기는 다른 게 아니라, 말씀에서 관심이 떠나게 되면, 그것이 곧 위기이다" 라고 말이다. 즉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떨어지게 되면, 그 자체가 엉뚱한 길로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말씀이 없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자기에게 위기이고 작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그만 사라지고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에게 위기가 없고, 자기가 작다는 것이 그만 사라지고 나면, 졸지에 자기는 신이 되고, 자기가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것으로, 그렇게 헛된 야망과 야심에 풍선처럼 모든 마음이 부풀어져서, 그 풍선을 누가 바늘로 찌를까 걱정이 되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 인생에 누군가가 간섭할까 싶어서 말이다. 

그것은 명품 아파트나 고급 승용차를 타도 마찬가지인데, 누군가가 자기 차에다 칼로 긁고 갈까봐서 잠을 자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이런 남자의 마음을 잘 모르는데, 새 차를 사고 나면 몇 번이나 주차장에 내려온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새 차를 보고 질투심이 나서 긁을까 싶어서 말이다(ㅋㅋ). 그렇게 사람이 무엇을 하나 가지게 되면, 근심도 같이 몰려온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만약에 교회 건물이 하나 있어도 !!

지금 우리교회의 이 좁은 홀도 그러한데, 만약에 건물을 하나 덩그러니 제대로 지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노숙자, 불량배, 퇴학을 당한 불량 청소년들이 마구 몰려와서 담배를 피우고 유리창도 깨고, 또 오줌도 마구 싸고 말이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건물에 화재가 난다든지, 그러면 누가 살림을 하면서 상주를 해야하는지, 그리고 아래층에다가 가게를 내주면 그 주인이 세를 제대로 낼지, 그리고 어떤 가게를 할지도 모르고 말이다. 3층에는 교회인데, 지하실에는 나이트클럽이 있으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건물을 관리할 사람도 뽑아야 하는데, 그리고 그 사람이 삥땅을 하는지 안 하는지 그것을 감시할 사람이 또 필요하고 말이다. 골치가 엄청 아프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사는 가게세가 들어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빼먹기 위해서 하루가 멀다하고 세미나 핑계를 대고 말이다. 장로는 은행에 넣으면 이자가 적자고 하면서 펀드에 넣자고 해서 다 날려먹고 말이다. 또한 돈 냄새를 맡고 어떤 여자가 와서 사기를 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니 교인들의 머리털이 남아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ㅋㅋ).

◈ 자기 소유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면 !!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졌다고 하는 것은, 근심도 함께 가졌다는 것인데, 즉 뭔가를 가지게 되면 그 가진 것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게 되는가? 언약에서 떠나게 되고, 말씀에서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가 쓰는 전략이 무엇인고 하니, 방금 제가 한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마귀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마귀가 왜 그렇게 소유의 증가에 신경을 쓰게 하는고 하니, 그런 식이라도 억지로 그렇게 해서 낯선 것에서 떠나도록, 즉 하나님의 언약에서 구원을 받는 것을 방해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이 목숨을 바친 것은 낯선 것 때문인데, 즉 손수건으로 사람을 살린 체험을 했다고 해서, 매일같이 손수건을 들고 설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언약 안에서 낯설 게 그때 그때마다 명령과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거기에서 사도들이 얼굴을 돌리게 되면, 거기에서 나올 것은 무엇이겠는가? 전혀 그럴 분들이 아니지만,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말이다. '교회' 라는 기업체를 소유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기독교 역사인데, 즉 권력 덩어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관심이 이제는 말씀이 아니라 교회라는 기업체에 가있다는 것이다.

◈ 오호, 놀라워라 !!

제가 십자가에 마을에 오 목사님의 글을 퍼오면서 댓글을 하나 달았는데, 물론 오 목사님의 글은 그 내용도 잘 썼고 중요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아직도 말씀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이란 말이다. 그것이 목사로서는 전혀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그렇지 않나요? 말씀 자체에 관심이 있다는 것, 그것이 무슨 돈이 되는가? 물론 교인들도 같이 말씀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 다같이 '우싸우싸' 하면서 어떻게 해서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교인들이 모두 다 떠난 상태에서, 목사가 되어서 교인들을 붙잡으려고 하면 그 교인들의 관심사에 같이 뛰어들어야 하는데, 그런데 교인들이 나가던 말던 뭐라고 하는가? "마음대로 하거라. 너거들이 무슨 교인이고?" 라고 하면서, 자기는 진리와 말씀에 관심을 두게 되면, 그것은 그야말로 사도급 레벨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와 말씀에 관심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오 목사님이 글을 쓰고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제발 이 글을 보고 예수님을 믿어라" 라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주님께서 계신다" 라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는 지금도 십자가와 복음에 관심을 갖게 하는 자기 백성을 만들어내고 계신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만 외치게 되면, 그렇게 복음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그런 사람이 곧 주님이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야곱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 야곱에게서 어디로 이어지는가? '이스라엘' 이라고 하는 영적세계에 노니는 분이 된다는 것이다. (오 목사님은 참 좋겠다. ㅋㅋ)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작게 볼 것이고, 즉 자기의 머리카락이 모두 다 빠지고 대머리가 되어도, 그것이 곧 언약에 자기에게 통렬하게 가하는 인간의 운명임을, 그러니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이라는 말이다.

◈ 그런데, 진짜 위기는?

하지만 정작 그렇게 무너지는 것이 위기가 아니라, 이렇게 낯선 것이 왔을 때 우리가 계속해서 육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이 이 낯선, 즉 큰 세계에 대해서 위기를 느끼면서, 이 큰 세계에 대해서 지시와 명령에 대한 의지와 순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야곱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대변하고 있는데, 이 야곱을 하나님께서 찾아가셨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도 참 고마운 일인데, 에서에게는 하나님께서 찾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찾아오셔서 자기 계획을 이야기하셨는데, 처음에 강의를 하면서 제가 뭐라고 했는가? 우리의 선택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파괴되고 무시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야곱은 야곱 나름대로의 자기 계획이 있고 인생이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이 야곱의 선택을 압박하게 되니, 야곱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길로, 즉 이스라엘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자기에게 남아있는 그 모든 것은, 즉 "내가 나 된 것은 나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라고 하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야곱의 130년 인생은 그야말로 나그네 인생을 가게 된다는 것이다. 

◈ 우리의 육적인 지나간 흔적조차도 !!

어제 주일오후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즉 우리가 요나처럼 육으로 갔던 그 모든 흔적마저도 주님께서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어떻게 하시는가? 그것을 모두 다 수거해서, 그것을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는 증거물로 우리에게 제시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의 너 된 것은 나의 계획이었다. 심지어 니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획이 있었는데, 바로 그 계획이 너를 태어나게 했고, 그렇게 해서 일단 태어난 너는, 너는 아담의 후손으로 육인 야곱인데, 그 야곱을 이스라엘로 전환시키는 작업에 있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라는 것을 주님께서는 매일같이 우리가 느끼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이 시간에 적용해보면, 우리에게 일어난 그 어떤 일도 차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대로 된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범사에 순간 순간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난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니 감사할 것들을 일부러 찾을 이유가 없는데, 오히려 찾는 것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그냥 '감사' 라고 하는 호수에 푹 잠겨있는 것인데, 물론 우리는 가끔 감사를 하지만, 하지만 우리가 감사를 하지 않을 때도 감사 꺼리는 계속해서 은혜로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은혜가 주어질 때마다 감사하게 되면 아마 우리의 입이 남아나지 않지 싶은데(ㅋㅋ), 때로는 짜증도 내고 말이다. 물론 매일 불평과 짜증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 감사로 돌아서게 되면, 앞에서 불평했던 것들마저도,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기 위한 재료로서 그런 불평불만을 털어놓게 하셨다는 것이다.

◈ 모든 것이 감사의 내용물로 담기기에 !!

세상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는데, 즉 "그 어떤 어려움도 시간이 해결해준다" 라고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간이 해결해준다" 라는 것을 고쳐야 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나중에 주님의 은혜를 알고 나면, 그 앞의 나머지 지나간 것도 감사의 몫에 소급되는, 즉 감사의 내용물에 포함이 되고 담기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에, 남편이나 자식이 죽고 나면 물론 그 순간에는 힘이 엄청나게 많이 들겠지만, 비록 그때는 몸부림을 치고 절규를 하더라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것도 역시 감사할 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 '천국에 가서는 편히 쉰다' 라는 의미는?

그것을 총 집결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천국에 가서는 편히 쉰다" 라는 것인데, 이 세상을 그 어떤 긴긴 길로 우회해서 돌아왔다고 해도, 제 아무리 이 세상에서 롤러코스트를 탔다고 하더라도, 멀미가 나고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고 해도, 나중에 돌아보면 다 주님이 함께 하신 평탄한 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광야의 수고도 약속의 땅에 가니, 그것이 필요한 조치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들은 광야가 없었다고 하면 '만나' 라는 아주 아슬아슬한 고리를 가지고 천국에 갈 수 없는 인간들을 억지로 끄집어당기신 하나님의 수고가 있었음을, 즉 만나 속에 하나님의 희생이 담겨있었다는 것이다.

◈ 광야에서 깨어진 반석을 십자가로 볼 수 있어야 !!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에 그들은 마실 물이 없었는데, 그때 반석이 깨어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는 사건을 두고서 고린도전서 10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광야에서 깨어진 반석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도바울과 동일한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우리는 왜 그런 해석을 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설교를 하든 듣던 간에, 모든 성경해석은 십자가로 모을 수 있는, 그런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게 곧 성령을 받은 자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고전 10: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고전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 10: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 니는, 성경에서 십자가밖에 모르나?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성경에서 십자가밖에 모르나?" 라고 놀리는데,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너무 크게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크게 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낯선 세계가 엄청나게 크고, 자기 자신은 거기서 하나의 분진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심각하게 몰두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적 세계는 너무나 얄궂은 것이 있어서, 우리가 뭔가를 하나 집중하고 몰두하는 일에 대해서, 그것을 주님도 익히 아시고, 또한 마귀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가 뒷짐을 하고 와서는, "지금 뭐하노? 그것 참 재미있겠네" 라고 하면서 놀리는데, 즉 우리가 어떤 일에 집중하면, 그 뒤에 마귀가 음흉하게 다가와서는, 그것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만다는 것이다. 

◈ 이 안경을 어떻게 할꼬?

심지어 예수님의 경우에도 그러한데, 즉 예수님이 금식을 하면 마귀가 와서 뭐라고 하는가? "예수야, 배고프지? 묵고 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니가 메시야라고 목회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인기가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모여야 목회를 하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사람도 전혀 없는데 무슨 목회를 하노? 모으는 방법을 가르쳐 줄까? 그러면 여기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사람들이 니가 메시야인 줄로 알고 따라다닌다" 라고 하고 말이다. 

마귀는 지금도 그런 식으로 성도에게 접근을 하는데, 예를 들어서, 안경을 하나 샀다고 하면, 그 구입한 새 안경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게 해서, 마귀는 그것을 가지고 하루종일 고민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걸 바꾸러 갈까? 말까?" 라는 식으로 말이다(ㅋㅋ).

안경을 바꾸는 것과 천국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천국과 관련이 없고, 하나님의 영광과도 상관없는, 그냥 자기 영광만 관련이 되도록 마귀가 사태를 자꾸만 몰아간다는 것이다. "한 번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은 우리 인생을 좌우하지 않는데, 주님의 선택이 결정하지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선택을 잘못하게 되면 나락에 떨어지는 줄로 아는데, 그것은 교회나 세상에서 그렇게 사기를 치고 있다는 것이다.

◈ 부처를 믿어도 구원을 받아 ??

우리의 선택과 구원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심지어 우리가 부처를 선택해서 믿어도 구원을 받는데, 말을 하고 보니 돌발시태가 생겼는데(ㅋㅋ), 그러니 스님들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것이 다 헛짓임을 알려주시니 말이다. 즉 "니가 한 선택은 망상에 불과하고 소설에 불과하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주님의 소설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님을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언약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자기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언약으로, 새언약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새언약 안에는 무엇인고 하니, 그 안에는 예수님이 주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야곱에게서, 즉 육에서 나온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모두가 다 헛된 개념인데, 오직 성령 안에서만 주어지는 예수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만이 말이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는가?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구원한다" 라고 했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의 모든 설교는 어디로 모이겠는가?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한 것처럼, 오직 십자가로 초점이 모여진 설교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갈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것으로 선택을 끝내고, 이제 교재 224페이지를 보자.

** 십자가만으로 말하지 않는 사랑은 주님의 사랑이 아니다. 대속물이 되시는 분을 겨냥해야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꼭 십자가만으로 말해야만 한다.

◈ '사랑' 이란 두 글자는?

마지막에 모든 사랑이 십자가 사랑으로 가지 아니하면, 즉 '인간 대 인간'의 사랑으로 멈추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에게 무거운 율법이 주어지는데, 어떤 율법인가? "사랑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라고 하는 율법이 말이다. 지옥에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이 땅에 꾀나 고생을 한다고 하는, 그렇게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 율법이 마귀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율법이 주어지면 따라오는 것이 무엇인가? 율법에 의한 정죄가 따라오는데, 거기에 마귀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즉 "니가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올해 농사는 끝났다고 여겨라" 라고 말이다. 그런 협박과 공갈로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실은 사람이 협박과 공갈을 받는데는 이유가 다 있는데, 그것은 자기만의 것을 따로 챙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만의 것이 있으니 마귀가 달려드는데, "내 것이 있는 것에 똥파리가 달려든다" 라는 말처럼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있는 것을 없애라" 라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으로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임시로 맡겼다는 것이다. 남편이나 자식도 역시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그게 오래 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떤 분이 너무 오래동안 간다고 짜증을 내기도 하는데 말이다(ㅋㅋ).

◈ '나' 라는 것은 몸에서 나온 파생상품 !!

아무튼 주께서 그렇게 맡길 때는, 심지어 이 '나' 라는 몸조차도 자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을 알려고 하면 참으로 복잡한데, 라캉까지 와야하니 말이다. 즉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은, 즉 '나' 라는 개념은 몸에서 나온 일종의 파생상품인데, 이것은 이미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나' 라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몸은 실체가 있지만 그 몸에서 삐쳐 나온 '나' 라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 라는 것은 항상 어디에 영향을 받게 되는고 하니, 몸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는 고상하고 사랑하고 싶지만 하지만 몸이 아프면 짜증이 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몸이 우선이고 '나'는 거기서 나온 이미지이기 때문에, 즉 레이저 광선에서 나오는 이미지와도 같다는 것이다.

여수 엑스포에 가면 그런 것이 있는데, 바닷가에 동그란 곳에 소년의 얼굴이 나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실체가 없는데, 그냥 이미지뿐이라는 것이다. 이미지만으로 그런 영상이 되는데, 뉴스시간에 보면 종종 나온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미지뿐인데, 레이저 광선으로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 라는 실체는 없고, 몸에 나온 이미지가 곧 '나' 라는 것인데, 그러니 그 '나'는 어디서 항상 기분이 좋아야 하는고 하니, 자기 몸의 건강상의 컨디션에 따라서 '나' 라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그렇게 산다는 말이다. 

◈ 어이쿠, 어깨야 !!

여러분은 아직도 그런 나이가 되지 않았는데, 물론 저도 그렇지만 말이다. 옛날에 할머니들의 경우에 날씨만 흐리면 뭐라고 하는가? "어이쿠, 어깨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물리 치료를 받으면 되는데, 과거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날씨만 좋지 않으면 아프다고 하면서 주물러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자기 몸이 아프고 불편하면 만사가 귀찮은데, 즉 세계관이 바뀐다는 것이다. 암울하고 어두운, 그런 기분 나쁜 세계관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십자가에서 나온 주님의 사랑은 무엇인가? 먼저 "십자가가 이미지인가? 몸인가?" 라는 것에 있어서, 십자가는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것인데, 그러니 사랑은 추상적인 말장난이 아닌 예수님의 몸이 하신, 즉 예수님의 몸이 계시고 그 안에서 예수님의 몸과 함께 살고 있다는 확신이란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내 몸을 내가 관리한다" 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몸이 내 몸을 '지체' 라는 이름으로 현재 다루고 계신다" 라고 하는 확신, 그것이 곧 말씀에 대한 확신인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나온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랑이란 꼭 십자가만으로 말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대속물의 의미를 가리게 되고, '하나님의 미워하심의 대상자'가 드러나지 않게 하는, 그런 사랑은 가짜 사랑의 표본이다.

◈ 사인(sign)이 있는가?

그런 사랑은 마치 그림이 있는데, 거기에 화가의 사인이 없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이 주님의 만든 작품이라고 하면, 우리 몸은 예수님의 흔적을 가져야 하는데, 즉 예수님의 사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니는 니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라고 하는 사인(sign),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흔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라고 이야기했는데, 즉 "너는 값으로 준 내 것이 되었다" 라고 하는 사인, 그러한 표시가 바로 "불구덩이에 들어가도 구원을 받는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 이스라엘은, 화염 속에서 피어나 !!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스라엘 자체가 화염 속에서 피어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불 가운데서 말이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존재가치가 맨 땅에서 드러났는가? 드러나지 않았는가? 드러나지를 않았는데, 그렇다면 어디에 들어갔을 때 그들의 진가가 드러났는가? 불 속인데, 그 불 속에 세 명이 들어갔는데, 그런데 '세 명 + 한 명' 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네 명' 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한데, 왜냐하면 '세 명 + 한 명' 이기 때문에, 그것은 '다섯 명 + 한 명',  '천 명 + 한 명' 라는 식이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것을  '144,000명 + 한 명' 이라고 하는데, 즉 144,000명을 구원하는 한 명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은 144,000명을 바라보지 한 명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144,000명은 144,000명을 부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를 불러내기 위한 144,000명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우리편이 많다" 라고 해버리면, 즉 "우리교회에 교인들이 많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144,000명 그 자체를 증거하기 때문에 하나와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단 하나 !!

그러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데,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자체를 증거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규정함으로서 이스라엘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 즉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구성원들이 노력하자" 라고 나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방나라의 하나로 취급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속에서 따로 끄집어낸 자가 있는데, 그것을 영어로 'RAMENT' 라고 해서, 즉 '남은 자' 라는 것이다. 이 '남은 자' 라는 것 처음 나오는 곳이 이사야서 10장인데(?), 이사야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스알야숩' 이라는 것이다.

그 이름의 의미가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 라는 의미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사야의 가정은 모두가 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계시용도로서 모두 사용되었는데, 자기의 아들마저도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 라는 것을 증거하는데 사용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 10: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사 10: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라고 하는 그 구절에서, 이 임마누엘도 역시 이사야의 아들로 보았다는 것이다. 물론 제가 보기에는 조금 오바한 것 같은데, 왜냐하면 이사야에게는 '스알야숩' 이라는 아들이 따로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무슨 처녀가 잉태하겠느냐는 것이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 7: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사 7: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

◈ 위기를 조성한 분을 바라봄으로서 !!

물론 그렇게 오바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아무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육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위기상황으로 몰아넣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위기를 해결한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그런 위기를 조성한 분을 바라보게 함으로서, 구원받은 언약적 관계를 우리를 통해서 형성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되면 늘 위기가 되고, 반면에 고개를 들어서 위를 보면 늘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성도라면 그런 생활을 당연히 하게 되는데, 물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되면, 처음에는 위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위기가 아닌 든든함이 되는데, 그런데 마귀가 와서 뒤흔들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주님도 함께 오시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공부를 한다고 모여 있으면 마귀가 와서 뭐라고 하는가? "너거들 지금 뭐하노? 성경공부를 하나? 성경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해봐도 살아가는데 별로 소용이 없을 걸. 그렇지 않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항상 이익과 손실을 따지게 되는데, 아침마다 나무에 있는 새가 조잘거리듯이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아침마다 눈을 뜨면 "오늘은 무엇을 해도 이득을 남기지?" 라고 하는데, 그렇게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살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사인으로 말미암아서 '예수님의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사랑이란 꼭 십자가만으로 말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대속물의 의미를 가리게 되고, '하나님의 미워하심의 대상자'가 드러나지 않게 하는, 그런 사랑은 가짜 사랑의 표본이다. 대속물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이 받으시는 고난이나 희생의 아픔이나 슬픔과 같은 것에 무관심한 사랑은, 실은 사랑의 영역에서 이탈되어버린 가짜 사랑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사랑의 진수는 대속물이 되시는 예수님에게 관심을 두는 것이지, 결코 사랑을 받는 본인에게 두는 것이 아니다. 이 대속물이란 죄인을 염두에 둔 대속물이기 때문에, 대속물로서의 십자가는 인간으로 하여금 본인이 '사랑 타령을 할 입장이 못 되는 죄인 됨'을 나타낼 뿐이다. 그래서 대속물과 연계된 십자가를 알았다고 하면, 결코 사랑을 받은 자신에게 관심을 두기보다는, 사랑을 하신 주님 쪽으로 방향이 정립된다. 

◈ 십자가를 아십니까? 정말, 십자가를 아십니까?

이런 긴 문장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십자가를 아십니까? - 압니다" 라는 것에 그치면 안 되고, "당신이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 자기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아십니까?" 라는 것까지도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자기가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당연한 본능이지만, 하지만 그러한 것이 바로 주님 앞에서는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대속물이 되신 그 가치를 드러내는 방식이라는 말이다.

◈ '대속물' 이라는 의미는?

그러면 이 '대속물' 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여기에 이렇게 우리의 몸이 있고, 또한 주님의 몸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당연히 주님의 몸을 가지고 가시는 것, 그것이 곧 대속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을 할 때, 즉 유월절 밤에 죽음의 사자가 찾아와서 각각의 집에 들어가서 맏아들을 데리고 가는데, 그런데 어떤 집에는 어린양의 피가 있어서, 그 피를 보고 그 집의 맏아들은 살려준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관계, 그 관계를 두고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믿음은 개나 소나 믿는다고 믿음이 아니라, 대속물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속물이 없다고 하면 믿어지지 않는 것이 곧 믿음인데, 그러면 자기 자신이 과연 대속물이 될 수 있는가? 당연히 없는데, 그래서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식을 사랑하면서 자기 자식에게 모든 희망을 다 걸고 살아가는 것, 그것은 당연히 비언약적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믿음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다.

◈ 어느 장애인의 경우에 !!

예를 들어서, 어떤 장애인이 조그마한 수첩에다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다 적어놓고는, 그것을 달성하게 되면 하나씩 표시를 한다고 하면, 이것은 실제로 있었고 TV에도 소개된 것인데 말이다. 이 사람은 서울시 시청에서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공무원이라는 것이다.

그만 양쪽 다리도 다 없고 팔만 하나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체에서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몸과 머리와 왼 팔 하나만 달랑 붙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나머지는 의족을 모두 다 하고 있고 말이다. 지금은 36세로서 10년 동안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데, 10대 때 그만 기차사고를 당해서 그런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수첩에 보면 어떤 것들이 적혀있는고 하니,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일일이 적어놓았다는 것이다. 한라산 등반하기 등등 말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를 달성하고 나면 일일이 줄을 긋는데, 즉 "나는 이루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런 끔찍한 사고를 당해도 그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뭔가를 이루었다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는데, 그런데 그 사람은 계속해서 누구를 바라보는가? 세상 속에서 살다보니 계속해서 '인간 대 인간'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상적인 다른 사람들은 보니 등반도 하고 잘하니, 그것이 부러워서 "남들처럼 나도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그런 가상적인 목표물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세상적인 목표에 자기의 모든 인생을 다 바친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이 세상 사람밖에 더 되겠느냐는 말이다. 기껏 아무리 잘나봐야 그런 남들, 즉 세상 사람밖에 더 되겠느냐는 것이다.

◈ 과연 희망을 그 어디에?

'달인' 이라는 말이 한 때 유행을 했는데, 그 달인이 기껏 흉내를 해봐야 무엇을 하겠는가? 이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밖에 무엇을 더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장애인 공무원이나 달인의 경우에 여전히 자기 자신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가련하게도 말이다. 희망이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속물이 되신 주님에게 희망을 두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에게는 "주여, 저희 희망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라는 것이 전혀 성립이 되지 않는데, 그래서 우리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라는 말씀을 실감할 수밖에 없는데, 즉 육이 제 아무리 망가져도 역시 육에 지나지 않지, 누가 도와준다고 해서 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것을 우리가 많이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예수님께서 자진해서 자기 목숨을 하나님 아버지를 위하여 내어놓은 것처럼, 성도도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게 된다. '내어버림'의 현상이다.

◈ 성도는, 항상 바닥을 바라보면서 !!

왜 이런 '내어버림'의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주님의 몸과 같이 붙어있으니 그러한데, 내어버렸다는 것은 자기에게서 떠난 생활을 한다는 것인데, 즉 "내가 나의 소유물이다" 라는 것에서 놓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벗어난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벗어나겠는가? 주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떨어지는 생활을 하도록 만드시는고 하니, 그것은 곧 "바닥을 보며 산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바닥에 어디까지 내려가는지, 물론 그 바닥을 터치할 수는 없는데, 만약에 터치를 하면 바닥이 아니니 말이다.

주식의 경우에, 흔히 증권사에서 고객을 꼬드기려고 "이제 바닥을 쳤습니다" 라고 하는데, 부동산의 경우에도 그렇고 말이다. 하지만 성도는 바닥을 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쳤다고 생각하면 바닥은 더 내려가니 말이다. "이게 내 인생의 마지막 바닥이다" 라고 하면, 그게 어느 새 멀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는 바닥을 치는 것이 아니라, 바닥을 바라보면서 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의 기대를 걸지 않는 인생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물론 우리 힘으로는 그렇게 살 수 없고, 주님께서 그렇게 바닥을 보여주시면서 살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도 자기 일이라고 항상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 어찌 나에게 이런 일이?

예를 들어서, 교통사고의 경우인데 말이다. 아주 큰 화물차가 그만 빗 길에 미끄러져서 중앙 분리대를 넘어서 상대방 차선까지 막고 말았는데, 그런데 그만 상대방 차선에서 차가 와서 박고 말았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 교인도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나쁜 짓을 한 놈도 아니고 말이다.

중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버스운전사가 운전을 하고 있는데 쇠붙이가 유리창을 깨고 날아와서 그만 자기 몸에 박혀서 내장이 파열되어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게 버스내부 카메라에 다 잡혔는데, 아마 신속하게 조치를 하지 않았다면 승객들도 많이 다쳤을 텐데 말이다. 그러면 그 버스기사는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그렇게 쇠붙이가 총알처럼 자기 몸에 날아온 것인가?

◈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

시편 74편에 보면, 그 구절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녹취하는 구 목사님이 제발 구라를 좀 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던데 말이다(ㅋㅋ). 역시나 74편이 아니고 73편인데, 물론 이 정도면 양호한데 말이다. 거기에 뭐라고 되어있는가?  

여기 2절을 살펴보면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자기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는 부러워했다는 것이다. 악인들을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건강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 것을 보고 자기가 미끄러질 뻔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신앙이 좋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라고 하는 것이 평소에 자기 노림수로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씨가 나빠서 그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타고난 것인데, 즉 "신앙이 있다고 하면, 적어도 이 정도는 주님께서 알아서 해주셔야지" 라고 하는, 그러한 생존의 보장정도는 바라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얄밉게도 그것을 믿음이 좋은 자기에게 주지 않고, 믿음도 없고 하나님을 욕하기까지 하는 자들에게 주어버리니, 거기서 믿음이 잠시 "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을래" 라고, 잠시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잠시가 6개월, 2년, 심지어 10년을 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어찌 나에게 이런 일이?" 라고 하면서 말이다.

(시 73:1) [아삽의 시]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시 73:2)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시 73: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시 73: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시 73: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시 73: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시 73: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시 73: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시 73: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 고난과 말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

그런데 이 시편 73편이 왜 있겠는가? 무엇 때문에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느냐는 것이다. 유명한 시편 119편에 보면, 여기 68절에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고난을 당하기 이전에는 천지를 모르고 깨춤(?)을 추면서 마구 돌아다녔는데, "이것이 다 내가 믿음이 좋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남들에게 떠벌리면서 다니다가, 하지만 막상 고난을 당하게 되면, 그런 고난이 믿음이 좋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말씀에 대해서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데, 즉 "말씀이 내가 좋아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그 대속물을 인해서 있는 것이로구나" 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코 우리 자신이 훌륭한 존재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래서 말씀이 주어지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은 말씀을 지켜서 그 덕택으로 한 평생을 편안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했는데, 그러한 것이 다 타인을 의식한, 즉 이 세상을 너무나 의식한, 자기가 이 세상의 일부이고 이 세상에서 살아남고 싶어하는 욕망에 장단을 맞추어서 그런 헛짓을 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남의 시선이 그렇게도 두려운가? 물론 어릴 때는 그렇다고 해도, 어른이 되면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시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 119:68)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시 119:69)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
(시 119:70) 저희 마음은 살쪄 지방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사랑이란 것은 자기 자신이 떨어져 나가도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인데,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사랑은 친절이 아니다" 라고 말이다. 사랑한다고 하면 자기가 가진 것이 다 와르르 무너져야 하는데, 그래야만 그 다음에 타인이 자기 자리에 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처음에 청춘남녀가 사랑을 할 때는 정말로 그러한데, 상대방의 이에 끼인 고춧가루도 다 떼어준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빨에 고춧가루가 끼어있어도 공주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ㅋㅋ).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자기의 것이 없으니 비교대상이 없는데, 무조건 다 쓸어 담는다는 것이다. 즉 "당신이 나의 것을 모두 다 차지하고 가져가도, 내가 이렇게 당신에게 주게 된 것만 해도 행운이고 영광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사랑인데, 그러니 "당신을 사랑해" 라는 말 속에는 그것이 모두 다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쳐들어와서 나의 모든 것을 다 가져간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빼앗기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뻐"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랬던 그들이, 드디어 이혼을 할 때는 어떻게 하는가? 서로가 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즉 반지 하나라도 자기의 것이라고 하면서 주판알을 살벌하게 퉁긴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왜 그런가요?" 라고 물으면, "그것은 바로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가 다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사랑의 관계인가? 소유의 관계인가?

아무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관계로서만 나타나기를 원하시는데, 물론 우리는 소유의 관계로 주님과 흥정을 하려고 하고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의 소유방식은 실패로 끝이 나고, 물론 참으로 감사한 일인데 말이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어도, 돌아온 탕자라도 사랑하시는, 즉 주님의 가락지와 입히시는 옷으로 만족하도록, 그렇게 수시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의 세계 속에 있도록, 그렇게 데리고 가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순간만큼은 우리 전부가 다, 즉 누가복음 15장 16절, 마태복음 2장 6절 등등, 그 모든 말씀이 거기에 다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7장의 변화산도 거기에 있고,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도 거기에 있고 말이다. 또 마태복음 24장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기 직전의 모습도 거기에 있고 말이다.

그리고 양과 염소 이야기도 거기에 있고, 또 "쟁기를 들고 뒤돌아보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라는 말씀도 이해가 되고, 또 "사람들이 장가가고 시집갈 때 인자가 갑자기 들이닥친다" 라는 말씀도 납득이 되고 말이다. 또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라는 히브리서의 말씀에 대해서도 "옳소" 라고 동의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기쁨으로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것이 없을 때, 비어있을 때라는 것이다. "창세 전에 선택했다" 라는 말씀도 그렇게 기쁨이 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리산에 놀러가도 사랑을 챙기고 가야하는데, 그리고 저 멀리 괌에 여행을 가더라도 물론 다른 것도 챙겨야 하지만, 사랑도 챙겨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디 여행을 가면 믿음까지도 다 버리고 가려고 하는데, 즉 "이번에 한번 놀아보자. 예수든 뭐든 다 잊고 한번 제대로 멋드러지게 놀아보자" 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성도의 몸에는 예수님의 사인이 있다는 것이다. 즉 "너는 내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노래방에 가더라도 주님의 몸으로서 간다는 것이다. 즉 먹든지 마시든지, 괌에 가든 그 어디를 가든 간에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도망을 쳐도 결코 주님의 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지금까지는 육에서 만들어낸 것을 이야기했는데, 이제 교재 226페이지를 살펴보자.

**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사람은, 자기 사정을 남에게 이야기할 때 반드시 자신의 고생담을 전면에 내세우기 마련이다. 자신은 상당한 고생을 겪었다고 과장한다.

◈ 두 개의 시간관 !!

이것을 조금만 더 설명하겠는데, 이렇게 인간이 있다고 하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육에서 나온 시간관이 둘러싸고 있고,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곧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시간관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시간관을 먼저 설명하면, 그것은 바로 태초, 즉 창세 전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창세 전에 예수 안에서 선택되었다" 라는 것이 곧 그런 의미인데, 즉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 라는 원칙이 말씀이 생길 때 같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사랑한다" 라는 것이 천지창조의 필요요건으로서 창조 때 이미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개구리를 만들고 두꺼비를 만들 때는 야곱을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코스모스를 피어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의 시간관에서는 이미 과거 현재 미래가 오직 예수님의 몸에서 따라서만 표현되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의 몸이 하신 그것이 곧 과거가 되고 현재가 되고 미래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이 하신 그것이 말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육에서 나온 시간관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몸에서 일어난 그것이 과거가 되고 현재가 되고 미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개의 시간관이 서로 포개져있다는 것이다. 두 개의 시간관이 말이다.

◈ 인간의 과거는?

그렇다면 80이 된 치매에 걸린 노인이 있다고 하면, 그러한 노인과 예수님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없는데, 그냥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인네들에게는 말하기보다는 들어주는 것이 중요한데, 외로우니 마구잡이로 튀어나오는데, 그러면 그것을 흘리지 말고 귀담아 들어서 정리해보자는 것이다.

그게 무슨 내용이겠는가? 당연히 자신의 과거 이야기인데, 그것이 초를 치는 간단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머니가 자기 고생한 과거를 줄줄 털어놓을 때, 그러면 그때 "그 당시에 어머니가 그만 나를 버리고 도망갔잖아요" 라고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자기 과거를 이야기할 때, 그 과거는 어떤 과거인가? 무슨 내용은 빠지겠는가? 자기의 부끄럽고 실수한 것은 빼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과거는 일종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슨 기술인고 하니까, 자기를 잘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그동안 누적되고 숙달된, 그러한 감추어진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한 두 해를 익힌 기술이 아닌데, 이렇게 할 때는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할 때는 저렇게 하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의 약점을 가려서 자기 자신이 잘난 존재임을 으스대고, 그렇게 자랑할 만한 것들이 하나의 과거로서 자리잡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이가 80이 된 노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이가 20살이 되던 12살이 되던 간에 말이다. 엄마가 잘못을 지적하면 그 아이는 뭐라고 하는가? "그래도 내가 7살 때는 엄마를 도와주었잖아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과거를 끄집어내어서 반격을 하는데, 물론 처음에는 서툴지만 점점 더 자기의 약점을 감추는 기술이 발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괜히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과거는 현재의 자기 잘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고, 또한 미래라는 것은 자기의 영광을 더 보태기 위해서 상상하기 위한 것이 곧 미래가 된다는 것이다. 즉 현재 자기 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자기 미래상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 기존 인간의 시간관에 예수님의 선택이 오게 되면 !!

바로 이러한 시간관이 우리 인간에게 구축되어있는데,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 몸의 선택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쪽 자기 몸의 시간관은 자기 몸이 선택한 것이고, 반면에 예수님 몸의 시간관은 예수님의 몸이 선택한 것인데, 그러니 이런 두 가지 시간관 중에서 하나의 망상이 되고 하나는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아는데, 어느 것이 현실인가?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과거 현재 미래가 현실임을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어릴 때 초등학교를 어디를 다녔고, 그때에 까불다가 넘어져서 선생님이 일으켜 세워주고 하는, 그런 모든 것은 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임을, 즉 예수님께서 선생님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소급해서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재해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시간관에 스며들게 되면, 졸지에 우리들의 과거사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곧 자기 의(義), 즉 자기의 죄임이 들통나게 된다는 것이다. "아하, 그동안 내 자랑만 했구나" 라고 말이다.

다시 교재를 살펴보자.

**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사람은, 자기 사정을 남에게 이야기할 때 반드시 자신의 고생담을 전면에 내세우기 마련이다. 자신은 상당한 고생을 겪었다고 과장한다.

◈ 어이, 시끄럽다 !!

아니, 사람이라고 하면 고생을 하지 않은 자가 있는가? 대전에서 강의를 하고 밤 9시가 넘어서 KTX를 타고 오는데, 나이가 40대 초반 정도로 되어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떠든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가는데 말이다. 그래서 제가 책을 보다가 참지를 못하고 "어이, 시끄럽다" 라고 한 소리를 했는데, 그런데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겠는가? "골프를 칠까? 아니면 다른 것을 할까? 고민이다" 라고 하면서 자기 자랑을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제가 그런 소리를 하니까 "아니, 왜 반말을 하십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나이가 조금 더 든 사람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마도 같은 회사에 다니는 일행이지 싶은데, "당신이 잘못했으니 참아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잘못한 사람에게는 자기 주장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를 않는데,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다 안다는 것이다. 자기가 한 시간 동안을 계속해서 떠들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역시 나이가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은 사람은 어떻게 나오는고 하니, 대번에 "대단히 죄송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저 혼자만 욕을 얻어먹고 다른 사람은 기차 안에서 조용히 가게 되는데, 그것이 곧 대속(?)이 아니냐는 말이다. 저는 괜히 나서서 "조용히 해라" 라고 했다가 욕을 얻어먹지만, 하지만 대신 다른 사람들은 조용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그래서 이 세상은 누구 하나 대신해서 희생을 해주기를, 그런 희생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직장이든 그 어디든지 간에, 그 누구 하나를 짓밟게 되면, 그렇게 짓밟힌 사람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그 반대급부를 누리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한 면에서는 참으로 비겁하기까지 한데, 즉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라고 하면서, 사람들은 그것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곧 정치이고 이 세상인데, 그것은 기업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누구 하나라도 제발 좀 망해다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망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자기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오늘 여기 식당에 보니 콩국수를 시작한다고 붙여놓았던데, 그런데 그 식당에서 다른 곳에 가는 손님들을 다 데리고 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른 식당의 주인들이 "콩국수에서 이물질이라도 좀 나와도" 라고 한다는 것이다. 주유소도 잘 되는 곳이 있으면 "가짜 휘발유라도 좀 팔아서 걸려라" 라고 하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망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도 그러한데, 당연히 자기 교회는 망하면 안 되고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예수님의 시간과 공간으로 보게 되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그렇게 우리는 매일같이 억지를 부리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행함으로 치자면 우리는 지금 당장에 죽어도 마땅한데, 그러니 우리는 지금 덤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능지처참형을 당해도 너무나 마땅한데 말이다.

◈ 얘들아, 제발 탕자답게 살아라 !!

그러니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제발 탕자답게 살아라. 그리고 탕자의 그 고마움은 내가 챙기겠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님의 그 대속의 영광만을 높이게 하기 위해서, 그런 인식을 주신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전혀 그러한 인식이 없는데, "니 죽고 내 살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짝 긴장을 해서 매일같이 살아가는데, 그러니 누군가가 건드리면 "왜 반말을 해요?" 라고 하는데, 자기가 잘못한 것은 전혀 모르고 말이다.

그런데 주님에 의해서 이 세상을 알게 되면, 물론 그래도 여전히 자기 성질대로 살아가지만 말이다. 그러면서도 "아하, 나에게도 문제가 많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너무나 잘 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알기 때문에 주님께 영광이 되고 말이다.

이제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227페이지를 보자.

** 쉽게 말해서 '복수하기'이다. 원수를 만들고 그 원수를 꺾는 수완을 연마하고, 여기에 갖가지 묘책과 성경에 나와 있는 명언들과 지혜문들과 교훈들이 동원된다. 예를 들면, "성실하라. 그러면 인생 성공한다. 남에게 지고 들어가라. 그러면 언젠간 인정해줄 것이다 일곱 번만 인내하라. 그러면 타인이 너를 존대할 것이다. 남의 미끼가 되더라도 대의를 위하여 살면, 너를 잡아먹은 자가 도리어 너에게 잡히리라" 등등의 처세술적 교훈과 같은 것이다.

◈ 야곱의 생존력 !!

이러한 것들이 결국은 강의처음에 말한 '생존력' 이라는 것인데, 즉 '생존의 힘' 말이다. 잠시 복습을 해보면, 이러한 생존력은 야곱에게서 나오는가? 아니면 이스라엘에게서 나오는가? 야곱인데, 야곱이 자기가 먹고살려고 얼마나 애를 썼느냐는 것이다. 20년 동안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을 앞에 두고 다른 여인과 살았다고 한번 상상해보라는 말이다. 형에게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렇게 싸웠다는 것이다.

그러한 야곱의 생존력이 그만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어떻게 되었는가? 그 생존력이 졸지에 죽음으로 바뀌어버리고, 그때부터는 생존이 아닌 생명을 위해서 살아야하기 때문에, 그 이름도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바뀌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생존에 대한 본능은 타고난 것인데, 그것은 사자나 개미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다른 동물들과 우리 인간이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데, 즉 생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마귀가 와서 뭐라고 하는가? "돌이 떡이 되게 하라. 니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니가 알아서 살아야 사는 것이다" 라고, 그렇게 마귀는 우리에게 매일같이 올바른(?) 소리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마귀가 하는 소리 중에서 틀린 것이 있느냐는 말이다. 없는데, 하지만 성경에서는 마귀가 하는 그런 모든 소리가 몽땅 다 거짓말이 된다는 것이다.

◈ 마귀가 바른 소리를 ??

우리는 그러한 것도 모르고, 주님이 거짓말을 한다고 하면서 마귀가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귀가 바른 소리를 한다고, 즉 우리는 왜 그렇게 마귀가 하는 것이 바른 소리로, 그렇게 느껴지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주님이 보시기에 거짓말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발 거짓말로 나를 좀 위로해달라" 라고 말이다. 즉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자기를 보고 예쁘다고 해주고,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자기를 주님의 훌륭한 종이라고 해달라는 것이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뭐라고 했는가? "내가 사람들의 기쁨을 구했다고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사실상 사람들에게 맞아 죽으려고 환장을 했다는 것이다.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 성도는, 이미 영의 세계에 !!

사도바울이 왜 그런 소리를 했겠는가? 사람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즉 인간이라고 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속아넘어가는 식으로, 그렇게 인간은 속는 재미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자기가 꾼 꿈에, 그것이 꿈인 줄 알면서도, 그것이 꿈이라고 속아넘어가지 직전까지는 기쁘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즐거움을 연속적으로 땜질을 해서, 그렇게 버티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자기 잘난 맛에 말이다.

그러므로 야곱에게서 나온 것은 바로 생존력인데, 그것은 악마가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약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꿀 때는, 그것은 이미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데, 그러니 우리는 이미 영의 세계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지, 육의 세계에서 타인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즉 타인들이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없는, 그러한 예수님의 사인이 들어있는 그리스도의 작품으로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말씀이 진짜 현실이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지금 망상 속에서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옵소서. 비록 그 몽상과 상상이 아무리 즐겁고 행복해 보여도, 그것보다 더욱 더 행복한 것은, 그러한 것은 몽상에 불과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살아가고 있음을, 그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곧 영원한 행복임을 깨닫고, 거기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8,10 오후 11시 30분에 마침.

                            새벽 3시에 한일전 올림픽 축구가 있는데, 그것도 역시 몽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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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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