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74강 엄위와 자비

피/피 2012. 8. 29. 11:21

피74강 엄위와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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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20702피p230엄위와자비

피74강 엄위와 자비
 
[12 대구강의 13] - [피 74] - 엄위와 자비

                                                    12,07,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부자와 거지' 이야기 !!

오늘은 교재 230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거지 이야기가 나온다. 부자는 지옥에 떨어져서 비로소 자기보다 먼저 계신 분에 의해서 자신의 인생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부자는 지옥불에 사는 것이 결코 자기 취향도 아니었고 선택도 아니었다.

(눅 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눅 16: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눅 16: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눅 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눅 16: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눅 16: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눅 16: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눅 16: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눅 16: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눅 16: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눅 16: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눅 16: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눅 16: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 부자와 거지 이야기를 논의할 때, 과연 이것이 천국과 지옥 이야기인지, 아니면 부자와 거지 이야기인지, 거기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견해를 달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심사가 천국과 지옥에 있다고 하면 개인 구원에 대해서, 즉 "내가 어떻게 하면 내세에 내 인생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부자와 거지 나사로 가운데서, 천국에 간 거지가 도대체 어떻게 천국에 갔는지, 그러니 그 관심사가 거지가 천국에 어떻게 갔는지, 거기에 있다고 하면, 그렇게 그 관심사가 장차 미래의 장소에 있다고 하면, 그렇게 성경말씀을 보는 관점이 서로가 다를 것이란 말이다.  

◈ 어떤 분을 받들어 모시기 위해서 !!

그런데 저는 이 부자와 거지 이야기를 어떻게 보는고 하니, 방금 장소와 두 가지 다를 이야기했는데, 이렇게 둘 다를 포함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게 뭐냐하면, 장소가 있어서 사람이 그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을 받들어 모시기 위해서 그 장소가 있다고 하면, 굳이 천국에 들어가려고 생각하지 말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것, 거기에 주안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상에서는 어떤 장소가 있다고 하면, 화가 나도 차를 몰고 가면 되고, 기분이 좋아도 그렇게 가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영화관에 들어가는데 그냥 돈을 주고 들어가면 되는 것이지, 자기가 화가 나고 말고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얼굴이 예쁘지 않다고 해서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 과연 천국도 그러하냐는 것이다. 천국도 어떤 지리적인 장소가 있다고 하면, 그곳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자기의 인격됨과는 상관이 없이, 그냥 "어, 여기에 천국이 있네. 한번 들어가 볼까?" 라고 해서 들어갈 수 있고, 또한 저기에 지옥이 있다고 하면, "지옥에 가자" 라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것이 과연 천국이고, 또한 지옥이냐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데, 그러니 분명 인격과 관련되어있다는 것이다. (인격??)

◈ 거지 나사로, 천사, 아브라함 !!

이것을 그림으로 설명해보면, 여기에 거지 나사로가 나오고, 또 부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그냥 천국에 간 것이 아닌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거지 나사로와 천국, 즉 아브라함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곧 천사인데, 즉 악마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 천사가 와서 거지 나사로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가? 그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데, 그러면 천사, 아브라함의 품, 거지 나사로, 이것을 천국이나 지옥은 생각하지 말고, 이 3가지를 모으면 무엇이 되겠는가?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 이 3가지 요소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는 "천국이 어디에 있지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혹은 "내가 어떤 인격을,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라는 것에 관심이 있는 반면에, 성경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위해서 거지 나사로는 거지로 살아야 하는데,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다" 라는 것에 모두 다 포함이 되어있는데, 우리를 어떻게 만들었던, 우리가 어떻게 살았던,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이익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자신의 이익과는 상관이 없다" 라는 말 자체가 성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한 평생을 살았는데, 나에게 이익이 없다" 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성경에서 거부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또한 "나는 이렇게 살았더니만, 나는 이런 행복을 누렸다" 라는 것도 성경에서는 역시 기피하는 것이고 말이다.

◈ 오직 '예수님을 위하여' !!

성경에서는 거지 나사로, 천사, 아브라함, 이 3가지를 모음으로서, 즉 이런 이야기를 내뱉고 있는 지상에는 예수님을 위해서 이 3가지를 모음으로서, 천국은 그 다음에 이렇게 모아진 것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만들어 가신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브라함조차도 말이다. 놀랍지 않은가? 아브라함조차도 "나는 천국에 와야 돼" 라는 주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누구의 때를 보기를 간절히 기다렸는가? 예수님의 때인데, 그렇다면 이 거지 나사로가 "나는 거지라서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할 수 있는가? 없는데, 물론 아브라함도 "나는 양을 쳐서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할 수 없고 말이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그러니 이것은 직업의 문제나 인격의 문제가 아니고, 오직 '예수님을 위하여' 거지는 거지로 살아야 하고,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으로 살아야 하고, 또한 천사는 천사로서 자기 역할을 감당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을 위하여' 말이다.

◈ 나는 만들어졌다, 나는 내 것이다 !!

제가 이런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는고 하니까,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라고 할 때에, 우리는 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오해하기를, '만들어졌음'을 자꾸만 반복하는데, 그런데 그 중간에 감추고 있는 게 무엇인고 하니, "나는 만들어졌다" 라는 것인데, 그 의미가 바로 "나는 내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뜻이라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속성이 있는데,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들어진 것으로 하나님의 계산이 끝났고, 그 다음에 선악과를 따먹고 말고 하는 것은 누구 소관인고 하니, 자기 소관이라는 것이다. 마귀가 또 그렇게 부추기고 말이다.

그런데 아담은 무엇을 몰랐는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는 내용이 창조 속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아담은 몰랐다는 것이다. 아담은 "나는 만들어졌다" 라고 여겼지, "말씀의 세계가 만들어졌다" 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말씀대로 만들어졌다는 생각은 하지를 못하고, 즉 말씀이 자기보다 크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나만 만들어지면 돼" 라고, 그렇게 여겼다는 것이다.

◈ '피노키오'를 아세요?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이태리 동화에 보면 나오는데, '피노키오' 라고 말이다. 알다시피 이 피노키오는 원래 나무인형이었는데, 그런데 어느 장난감을 만드는 할아버지가 자식이 없어서 간절히 기도를 하니, 천사가 와서는 나무로 된 인형들 중에서 하나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어서, 그것이 바로 피노키오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동화에 보면 피노키오가 그만 나쁜 아이들의 꾀임에 빠져서 서커스를 하는데 놀러가서는, 거기서 나쁜 길로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도 듣지를 않고, 물론 아버지라기보다는 자기를 만들어준 분인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되어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데, 이 부분은 구약성경의 요나 이야기와도 짬뽕이 된 것 같은데 말이다. 그리고 그 물고기 뱃속에서 자기를 구하러 온 아버지를 만나서 같이 탈출을 하게 되고, 그렇게 개과천선을 해서 나중에 아버지에게 효도한다는, 그런 내용이라는 말이다.

◈ 아담은, 말씀과 더불어 만들어졌기에 !!

다시 이야기를 하겠는데,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어놓았는데, 그런데 아담은 자기가 말씀과 더불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왜 큰 나무를 옮길 때 보면, 그냥 나무만 덜렁 뽑아서 옮기는 게 아니라, 거기 밑에 보면 흙덩이도 함께 둘둘 묶어서 옮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커다란 트럭에다 싣고 간다는 말이다.

그 흙덩이가 곧 말씀의 토양인데, 그리고 위에 삐쳐 나온 것이 아담이라고 하면, 그 아담은 어디에다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말인가? 말씀에 뿌리를 두지 않으면 아담은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서 2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아들아,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악한 자가 되어서 멸망의 길로 간다. 그러니 말씀을 들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 같으면 "나는 나인데, 왜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라고 할텐데, 그러면 우리는 이 토양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니가 살았다고 하는 것은 산 것이 아니라, 니가 말씀에 둘러 쌓인, 말씀이 만들어낸 작품이 될 때이다" 라고, 즉 말씀으로 인해서 맺게 낸 열매가 될 때 비로소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지혜가 곧 생명나무 !!

그래서 잠언서 8장(13장?)에 보면 이 말씀의 지혜를 두고 '생명나무' 라고 표현하는데, 그러면 이 말씀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물론 여호와로부터 왔는데, 그러니 생명나무와 여호와가 서로 관련이 있다는 것이 여기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잠 11:28)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잠 11:29)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라 미련한 자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되리라
(잠 11:30)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잠 11:31)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물론 창세기 3장에서의 생명나무는 하나님과 관련이 있다고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데, 그런데 잠언서에 들어오면 생명나무가 곧 지혜이고,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나는 지혜와 더불어서 했다" 라고 하심으로서, 그 생명나무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즉 어린양을 가까운 곳에서 반사시켜주는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 생명나무와 어린양의 보좌 !!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생명나무도 많이 있고 어린양의 보좌도 나오는데, 물론 그 보좌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앉으시는 자리인데, 그런데 거기에서 나오는 물이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흐르는 물이 강물이 되어서 좌우에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게 감나무나 포도나무도 전혀 아니지 싶은데, 그게 도대체 무슨 나무인가?

대답을 못하는 것을 보니 모두들 아직 가보지 않은 눈치인데(ㅋㅋ),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토양이니 우리는 가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곳이 우리의 고향이고, 우리가 거기 출신이라는 말이다. 아마 다들 봤지 싶은데,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렇지 말이다. (아멘!!)

(계 22: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그러면 그 생명나무가 어떻게 해서 자라는가? 생명수로 인해서 자라는데, 그게 없으면 말라죽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생명수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추적을 해보니, 어디에서부터 흘러나오는지 말이다. 그렇게 해서 그 원천을 따라가 보니, 어린양의 보좌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 생명수로 인해서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우거져 자라고 있다는 말이다.

◈ 생명과 죽음은 서로 짝을 이루어서 !!

그것을 미리 앞당겨서 에덴동산에서 보게 되면, 그 에덴동산에 4개의 강이 흐르고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생명나무가 생명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반대로 이야기를 하는데, 즉 "이것을 따먹으면 너는 죽는다" 라고 말이다.

(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 2: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 2: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창 2: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 2: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창 2: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니 이 생명과 죽음, 죽음과 생명은 서로 짝을 이루어서, 그렇게 같이 있어줘야만 생명이 왜 생명인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불신자와 짝을 이루어서 살아야 하고, 또한 복음을 아는 사람은 이단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 십계명에 왜 다른 신들이?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했는데, 그것이 마치 저의 귀에는 어떻게 들리는고 하니까, 십계명 중에서 제1계명으로 들리는데, 즉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말이다.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출 20: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출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 다른 신에게서 나온 것은 복음이 아니고, 진짜 하나님에게서만 복음이 나오는데,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들 속에서, 그런 수풀 속에서 유일한 여호와를 이야기했듯이, 복음이 아닌 수풀 속에서 진짜 십자가 복음만이 증거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짝을 이루기 위해서 그러한데, 그렇게 생명과 죽음, 죽음과 생명이 짝을 이루면, 그게 바로 창조의 세계라는 것이다. 즉 악이 있고 의가 있고, 지옥이 있으면 천국이 있고, 악마가 있으면 천사가 있다는 말이다. 그게 원래 창조의 세계라는 것이다.

◈ 구약에서의 창조는?

그렇다고 하면 이 창조세계에 있어서 주인공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물론 지금은 나타났지만 구약시대에는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는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해서, 즉 그림자만(?) 등장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밤에 어느 초가집에서 호롱불 아래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다면, 그것을 바깥에서 본다면 그냥 얼렁얼렁 그림자만 보인다는 것이다.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말이다. 문 창호지에 그렇게 비치는데, 그러니 일종의 이미지이고, 그게 곧 구약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뭔가 분명히 활동을 하기는 하는데, 뚜렷하게 윤곽을 알 수 없고, 그림자만 비추어진다는 것이다. 

◈ 더욱 더 디피컬트하게 말해서 !!

지금 덥습니까? 그래도 견딜만하지요? 그러면 어려운 것을 하겠는데(ㅋㅋ), 구약의 창조는 예수님께서 나타나지를 않는데,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배후에 숨어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보기 원했는데, 그것은 이삭이나 야곱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숨어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언약은 무엇인고 하니, 창조가 그냥, 이왕 어려운 것 더 어렵게 하겠는데, 창조가 그냥 존재가 그냥 '있음'으로 인해서 있다는 것이다. 해가 있고 달이 있고 말이다. 즉 무엇이 있으면 거기에 '있음'을 가져다 붙인다는 것이다. "달이 있다", "해가 있다", "사람이 있다", "뱀이 있다", "악이 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사야 65장(11장?)에 보면, 젖먹이 아이가 사자굴에서 사자와 함께 노는데, 즉 "젖먹이 아이가 있다", 그리고 "사자가 있다" 라고, 그렇게 젖먹이 아이와 사자가 있는데, 그들이 서로 친하게 논다는 것이다. 그것이 낙원에 대한 묘사인데 말이다.

(사 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사 11: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사 11:8)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 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사 65: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렇게 서로 '있다' 라고 했을 때, 천국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 '관계' 라는 것이다. 서로 있다고 하는, 그 연결되는 관계라는 말이다. 즉 사이좋게 지냈다는 것이다. 젖먹이 아이와 사자가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있음' 이라는 것은, 그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여러 가지의 '있음'이 있어서 상호연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현대사회 - 관계가 아닌 '나' !!

사실 이것은 어려운 내용이 아닌데, 그런데 왜 어렵게 들리는고 하니, 오늘날 현대인들의 경우에는, 봉건사회에서 벗어나 근대주체사상이 발달해서, 그래서 '나' 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 있음으로 인해서, 너가 있어야 한다" 라는 것은 관계를 말하는 게 아니라, 결국 자르고 자르고 나면 무엇만 남아도 괜찮다는 것인가? "나만 잘되고, 나만 건강하고, 나만 잘되면, 그러면 모든 관계는 다 끊어져도 상관이 없다" 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로켓을 발사하는 과정과도 같은데, 왜 미국 나사에서 우주로켓을 발사할 때 보면, 처음에는 옆에 거치는 것들이 많이 붙어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주에다 로켓을 제대로 발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렇게 처음 주변에 붙어있는 것들은 모두 다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나'가 되기 위해서는 잠시 동안 주변에 있는 것들을 이용한 것뿐이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젊은 아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결혼을 해도 그렇고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자기 자신을 위해서 결혼을 했고, 그 결혼을 하고도 여전히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되는데, 하지만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결혼을 하게 되면 '나' 라는 것이 아닌 '우리'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러한 것은 없고, 결혼을 해도 '나', 또한 결혼을 하지 않아도 역시 '나' 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식을 결혼시킨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늘 아슬아슬하고 염려가 되는데, 그것은 바로 근대주체사상으로 인해서 그런 일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 잠시, '근대주체사상'을 !!

여기서 근대주체사상이 무엇인지 잠시 살펴보면, 단적으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자 한다는 것이다. 14세기에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고 하니, 그 당시에 교회가 돈을 버는 기관으로 전락했는데, 그래서 그때 사람들은 토지와 돈이 생기는 관계 때문에 교회에 다녀주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유럽에서 다른 관계로 인해서, 즉 교회를 거치지 않고 무역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는데, 베네치아나 피렌체와 같은 곳에서 말이다. 그런 곳에서 무역을 해서 돈을 왕창 왕창 버니까, 그때부터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최고다" 라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는 "역시 돈을 버는 것이 최고구나" 라는 식으로 되었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눈이 밝아져서, "이제 굳이 교회에 얽매이지 않아도, 다른 식으로 돈으로 벌면 된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러니 "굳이 교회에 가지 않아도 된다" 라는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교회에 가지 않아도 말이다.

중세의 십자군 운동으로 말미암아서 세상에 대해서 그런 눈을 뜨게 되었는데, 즉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지배아래에 있는 세상이 아니라, 자기들도 자기 능력에 따라서 돈을 벌면 왕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즉 자기들도 귀족이 되어서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드디어 감 잡았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 밑에 왕이 있고, 그 왕 밑에 백성이 있었는데, 그런 관계를 봉건사회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그만 날아가 버리고, 이제는 근대국가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너'와 '나'가 법적인 상거래로, 즉 계약서 관계로 맺어지는 나라가 곧 오늘날 대한민국이고 전 세계의 국가라는 것이다.

◈ 바로크와 로코코 !!

옛날 프랑스에는 귀족들과 왕만이 누리는 고급문화가 있었는데, 그것을 '바로크' 라고 하는데 말이다. 이 바로크는 '기괴하다' 라는 의미인데, 유럽에 해외여행을 가보면 알 수 있는데 말이다. 그게 프랑스 궁전에서의 최고급 문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근대에 들어와서는 "니만 누리나? 나도 누리자" 라고 해서, 대중문화로 바뀌게 되는데, 그게 '로코코' 라는 것이다. 더 화려하게, 더 자극적으로 말이다. 그래서 세계여행의 유럽 편을 보면, 이런 바로크나 로코코, 그리고 로마네스크, 고딕체 등이 많이 나오는데, 이런 것들이 다 신과의 관계가 끊어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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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크 [baroque] 원어는 '찌그러진 진주' 라는 뜻의 포르투갈어에서 유래한다. 르네상스 전성기가 지난 16세기 말부터 17세기까지 유럽 건축미술의 한 특징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요즘은 장르와 시대에 한정하지 않고 어느 시대의 예술이든지 그 비슷한 특징이 나타나면 이를 가리켜 '바로크 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7세기 유럽의 바로크 풍은 르네상스 시대의 특징인 질서와 균형, 조화와 논리성과 달리 우연과 자유분방함, 기괴한 양상 등이 강조된 예술양식이다. 바로크는 단순히 자유분방함과 불균형만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최소한의 질서와 논리가 유지되기 때문에 더욱 바로크적 특성이 발휘되는 장점이 있다. 전통적 표현방식을 자의식이 강조되는 모더니즘 내에서 활용하려는 급진적 노력의 결과로 나타난 양식이라고 설명한 학자도 있다. 정지· 안정 상태를 피하기 위하여 기이한 이미지나 논리 등을 사용함으로써 기괴, 난해, 궤변, 기상천외의 효과가 드러난다. 영국의 형이상학파 시인들(존 던, 조지 허버트 등)을 ‘바로크 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 시인들의 작품에서 이러한 바로크적 특징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현대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간혹 바로크한 면들이 발견되지만 그들은 대부분 기괴 또는 기상천외한 면들만 강조할 뿐 바로크 예술의 근간인 질서와 논리를 수용하는 태도가 부족하다. - (드라마사전, 김광요 外, 2010, 문예림)

※ 로코코(rococo) 18세기 프랑스에서 생겨난 예술형식으로 어원은 프랑스어 rocaille(조개무늬 장식, 자갈)에서 왔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이 특징이다. 로코코는 왕실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주아의 예술이다. 유희와 쾌락의 추구에 몰두해있던 루이 14세 사후, 18세기 프랑스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로코코란 개념이 서양 예술사에 전문용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40년대로 추정되며, 좁은 의미에서 로코코란 루이 15세 시대(1730-1750)에 유행했던 프랑스 건축의 내부장식, 미술, 생활용구의 장식적인 양식을 의미한다. 그후 이 국한된 의미를 벗어나 예술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후기 바로크를 이어주는 건축과 서양미술의 한 예술양식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로코코는 바로크나 르네상스처럼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조라고 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18세기는 로코코뿐만 아니라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등이 병존하는 시대이며, 이 시기에 유행하고 나타난 예술양식들은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받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로코코는 문학사에서도 우아함, 수려함, 경쾌함이 특징인 18세기 문학작품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드라마사전, 김광요 外, 2010, 문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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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가 아닌 '나' !!

그러니 과거에는 관계가 중요했는데, 이제는 무엇이 중요하다는 말인가? '나' 라는 존재가 중요한데, 즉 "내가 나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저 사람이 나에게 필요하다면, 그 필요한 조건아래에서 저 사람은 나에게 귀한 존재가 된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방이 자기 입맛에 맞지 않고 어긋난다 싶으면, '나' 라는 존재를 살리기 위해서 '저' 라는 존재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외면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 그 얼마나 살벌하냐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세상은 사랑이 없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사랑은 너무나도 일방적 요구라는 말이다. 사랑은 자기 위주가 되지 않을 때만 사랑이 성립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일단 "나는 내 위주로 살래" 라고 딱 붙잡아놓고는, 즉 "나는 내 위주로 사는데, 그런데 나를 나처럼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 거야?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야 하는데, 나를 나만큼 위해주는 사람은 왜 없는 거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를 자기만큼 사랑해줄 사람을 찾는 것은 일종의 집착이라는 말이다.

◈ 하지만, 성경에서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어 !!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정리하면, 인간이 말하는 사랑과 소망과 믿음이라는 것은 관계 중심이 아니라 무슨 중심인가? '나' 라는 존재 중심으로 전환이 되었는데, 그런데 성경에서 그런데 존재, 즉 '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경우에는, 단 한 사람밖에 없는데, 한 사람이 아니라 그분들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게 누구인고 하니,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사이에는, 즉 성부, 성자, 성령, 이 세 분 사이에는 하나님을 위한 관계로서 맺어져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아들 사이가 되는데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인간들이 알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는데, 그리고 신랑과 신부의 경우에도, 그것을 예수님 위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이 세상에서는 그런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영원히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원히 말이다.

◈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

왜 영원히 사용할 수 없는가? 그것은 바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인데, 그러니 인간들이 알고 있는 부자관계, 부부관계와 같은 것은 다 어디에 들어있는고 하니, 죽음이라는 것에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결혼을 해야하고,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집이 있어야 하고,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금도 산부인과 병원에서 어린아이가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전체를 한 바구니에 담는데, 죽음이라는 바구니에 말이다. 반면에 하늘나라는 생명이라는 바구니에 담겨야 하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죽음이 있는 내가 천국에 가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사고방식이 바로 자기 중심의 존재중심에서 나온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 다시 한번 정리하면 !!

크게 어렵지 않지요? 시원하지요?(ㅋㅋ) 그래도 다시 한번 정리하면, 원래 창조는 그 배후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러면 그 예수님 앞에서 이 세상에는 생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도 역시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이사야서 45장에 보면 "나는 빛도 지었고 어두움도 지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그러니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존재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이 다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는 마치 자기가 신이 된 것처럼, 자기가 자기 존재에 대해서 신경을 쓰니까, '나'를 위한 가정, '나'를 위한 국가, '나'를 위한 행복, '나'를 위한 소망 등등, 그렇게 자기 것이 마구 쏟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워담는데, 그 바운더리가 무엇인고 하니, 죽음이란 바운드리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복을 받았다" 라고 하면, "옳지, 죽음으로 가는 복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나는 로또에 당첨이 되었어요" 라고 하면, "옳지, 죽어라" 라고 하고 말이다. 그렇게 담는 바운더리가 죽음인데, "나는 저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요" 라고 해도, "그래, 사랑을 나누어라. 그것도 죽음이라" 라고 하시고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가 개입되어야 하는 관계인데, 하지만 우리가 주장하는 관계는 자기 존재가 우선이고, 그래서 "나를 기쁘게 할 사람이 누구인가?" 라고 찾다보니, 그런 식으로 모아놓은 그 관계, 그것을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일방적으로 붙여놓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몽땅 주워담아서 뭐라고 하시는가? '죽음' 이라고 표현하신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운 이유는?

구약 사울의 경우에 처음부터 왕이 되려고 했는가? 아닌데, 오히려 겸손해서 행구(baggage) 사이에 숨어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숨어있는 사울을 왕이 되게 하셨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에서 뭐라고 하시는가? "사울이 왕이 되는 것은, 너거들이 하나님의 왕 되심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라고, 즉 인간들이 인간 왕을 요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삼상 12:6)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을 세우시며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는 여호와시니 …
(삼상 12:12) 너희가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의 너희를 치러 옴을 보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실지라도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
(삼상 12:13) 이제 너희의 구한 왕 너희의 택한 왕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왕을 세우셨느니라

만약에 우리 같으면 결코 왕을 세우지 않았을 것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워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숨어 계시는 이 세상에는 생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도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저주와 죽음과 심판도 있어야 하니, 그러한 것들을 바구니에 담으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사울이 있어줘야 다윗의 의미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자기 자신을 보면 되는데, 즉 죽어 가는 '나'와 살고 있는 '나'가, 그렇게 둘 다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몸 속에서 말이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해체되어 가는 '나'와, 그러면서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데, 그런 '나'가 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그리고 우리 몸은, 자기가 후패해간다는 것을 알아야, 자기 속에 있는 이질적인 것, 즉 하나님이 주신 것이 얼마나 신나고 좋으냐는 것이다. 갑자기 하나SK카드 광고가 생각하는데 말이다(ㅋㅋ). 그것이 뭔고 하니까, '나' 라는 존재와 그렇게 둘로 나누어졌기 때문에, '나' 라는 존재에서 출발하면 안 되고, 그렇게 둘로 갈라지게 된 관계 앞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일단 '나' 라는 것이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나온다면, "예수님은 나의 시다바리밖에 되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즉 마귀가 만든 예수님이란 말이다. 그러니 "이미 너는 살았고" 라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니가 이것을 믿는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요 1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요 11: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예수님만을 존재로 인정할 때 !!

여기서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죽었다', '살았다' 라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을 존재로 인정할 때 나오는 것인데, 우리 존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하는데, 또 마르다는 예수님을 붙잡고 하소연을 해야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러면 왜 예수님의 생명이 자기 존재보다도 더 우열하고 소중하고 고귀한 것인지, 그것을 후패해가고 있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마음껏 발산시키겠다는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세상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데, 여기 밖에 보면 마트에도 가고 사람들이 돌아다니는데 말이다. 그 사람들이 왜 사는가? 그들을 주님을 위해서 산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이래도 내가 살아야한다" 라고 하는데, 누가 그렇게 하는가? 자기가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 위주인데, 하지만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되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초코렛 복근을 거부한 어머니 !!

어제도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가 교회에 가기 위해서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그런데 어떤 남자가 윗통을 벗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서 버스를 타지 않고서 앞만 보면서 씩씩거리면서 무작정 걸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걷는 것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걸은 것인가?

그것은 아닌데, 그냥 몸이 움직이는 데로 갈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어머니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다 그렇다는 말이다. 어린아이가 배가 고프면 무조건 엄마의 젖을 향해서 돌진하는 것도 몸이 그렇게 만든 것인데, 그러니 어린아이도 하나님의 창조계획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 내 인생은 나의 것 ??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이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더 이상 간섭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없는데, 만약 그렇게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하면, 그것은 선악과를 손댄 악마의 심보가 그대로 작용해서, 그래서 그런 일들이 생긴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도 마귀는 "이제는 니가 알아서 해라" 라고 하는데, 즉 "이전에는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의인이니 의를 행해야지" 라는 것은 마귀의 속삭임이란 것이다. 우리가 그 어떤 행동을 해도 우리의 의지대로 되는 법은 없는데, 여태껏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다 말이다.

과거에 미스코리아였고, 요가활동도 있던 유명한 어느 40대의 연예인이, 자기 집도 고급 빌라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만 남의 지갑에 손을 대어서 절도죄로 잡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표를 훔쳤다고 하는데 말이다. 물론 경찰서에 가서 처음에는 부인을 했지만, 수표를 바꾸는 장면을 CCTV로 보여주니 그제야 시인을 했는데, 그래서 경찰관이 "사는 형편도 괜찮은 것 같은데, 왜 그런 짓을 했습니까?" 라고 물으니,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내가 책임질 수 없는 내 팔자를 !!

이것을 글자로 한번 적어보면 "내가 책임질 수 없는 팔자를, '나' 라는 것이 들어가게 되면, 그 팔자를 내가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것이 인간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담이 했던 짓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아담이 했던 짓 말이다.

다시 반복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은 예수님과의 관계 때문에 아담을 만들었는데, 즉 말씀의 흙덩어리가 밑에 붙어있어야 나무가 살 수 있는데, 그 말씀에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는 것이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귀가 와서 그만 그 흙을 털털 털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니가 알아서 할 수 있다. 먹으려고 하면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대상이 되고 말았는데, 그렇게 마귀가 자꾸 아담의 자유의지를 꼬드겨서, 아담이 그만 "에라이 씨, 먹자" 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 문제를 두고 마귀가 얼마나 고민을 했겠는가? 하지만 책임은 예수님께서 지는 인생을 두고, 그만 악마가 꼬드겨서 자기가 스스로 책임지는 인생이 되게 했으니, 그게 얼마나 불쌍하냐는 것이다. 해결책도 없는데 말이다.

만약에 우리 어머니가 20대라고 하면 그렇게 했겠는가? 아니, 50만 되어도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이쿠, 몸이 참 좋으네" 라고 하지 말이다(ㅋㅋ). 그것이 바로 시넵스 신경세포가 망가지니 그러한데, 아무튼 그냥 몸이 가는 데로 갈 뿐이라는 것이다.

◈ 거지 나사로의 경우에 !!

거지 나사로가 "내가 빨리 거지가 되어서 구원을 받아야지" 라고 한 것이 아닌데, 자기도 한번 살아보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 재산을 왕창 다 펀드에 몰빵을 해서 거지가 되었을 수도 있고 말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도 만드시고, 부유한 자도 만드셨는데, 그게 잠언서에도 나오는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팔자가 한 쪽은 부자팔자이고, 다른 한 쪽은 가난한 팔자이기 때문에, 그런 남의 팔자를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즉 부자가 되었던 가난하게 되었던, 그 존재 자체를 자기 자신이 평가하고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새롭게 집어넣은 그 관계, 즉 트럭에 실린 그 나무를 살리기 위해서, 마귀가 털어 버리려고 하는 그 흙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젖게 하셔서, 다시 그 나무를 생명나무로, 그렇게 생명이 피어나도록 멋지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생명나무에 둘러 쌓일 때,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십자가의 고마움을 은혜를 뽑아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이 오시면, 즉 주의 영이 오게 되면 이러한 일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말이다.

◈ 구약은 일종의 '실루엣' !!

다시 정리하면, "거지 나사로, 아브라함, 천사, 이들은 다 어떻게 하면 지옥에 갑니까?", 혹은 "천국에 갑니까?"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속성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인데, 이 구약은 일종의 '실루엣'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어른어른하는 그림자라는 말이다. 

이렇게 구약은 신약의 실루엣인데,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지옥에 보내는 거룩이 있고, 또 천국에 보내는 거룩이 있다는 것이다. 지옥에 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라고 하고, 천국에는 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여기서 로마서 11장을 찾아보겠는데, 22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롬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 엄위와 인자 - '찍히는 바 되리라' !!

여기 마지막 부분에 "찍히는 바 되리라" 라고 하는데, 찍기는 누가 찍고 또한 찍힌 바는 누가 된다는 말인가? 여기서 찍을 수 있는 분은 진짜 존재이고, 반면에 찍히는 것은 존재도 아니면서 존재 행세를 하는 피조물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창조주가 찍으면 찍히는 바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찍혀봐야 그 안에 하나님의 '엄위(嚴威)'가 들어있는지, 아니면 그 안에 하나님의 자비가, 즉 '인자(仁慈)'가 들어있는지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찍혀야 그런 표시가 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자는, 인자(人子)가 아닌 인자(仁慈)이고 말이다. 

로마서 9장에도 그런 말씀이 있는데, 토기장이가 하나는 귀히 쓸 그릇으로,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으로 만드는데, 그런데 토기가 왜 토기장이에게 덤벼드느냐는 것이다. 주제파악도 하지 못하고 말이다. 존재라고 해서 다 같은 존재가 아닌데, 즉 만들어진 존재가 있고, 만든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서로 맞먹으려고 하느냐는 말이다.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 하나님, 한번 알아 맞춰보세요 !!

인간들이 하나님과 맞짱을 뜨려고 하는데, "하나님, 지금 제가 볼펜을 던졌는데 몇 바퀴를 돌았지요?" 라는 식으로 말이다. 혹은 볼펜을 던지기 전에 "하나님, 제가 던질지, 던지지 않을지 알아 맞춰보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음 주일 낮 설교시간에 써먹어야 하겠는데 말이다.

그렇게 찍어봐야 그 안에 엄위가 들어있는지, 인자가 들어있는지, 무서움이 들어있는지, 자비가 들어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주님께서는 이미 아시는데, 우리 당사자는 그것을 모르고 말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엄위가 들어있도록 해서, 즉 인간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천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발로 차버린다는 것이다.

◈ 인자(仁慈)가 없으면 안 돼 !!

다시 말해서, "니가 인자도 없이 무슨 낯짝으로 들어온다는 말인가? 간도 크네. 인자도 모르고 사랑도 모르면서, 자기 행위만 좋아하면서, 어디로 들어온다는 말인가? 오히려 너에게는 무서움이 들어있으니 지옥으로 가라. 어서 빨리 가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래도 자꾸만 머리를 들이대면서 넣어달라고 하는데, 마치 아이들이 과자를 사달라고 해서 사주지 않으면 사줄 때까지 머리를 들이대듯이 말이다. 그러면 엄마가 참다 참다가 뭐라고 하는가? "너, 오늘 집에 가서 두고보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사람들이 왜 자꾸만 교회에서 떼를 쓰는지 모르겠는데, 자기를 넣어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왜 넣어주어야 하는가? 그러한 인간들이 뭐라고 말이다. 물론 자기는 나름대로 손들고 "이제 주께 옵니다" 라고 했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답답해서 손을 든 것이란 말이다.

주님께서는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받은 인자만 내놓아라" 라고 하시는데, 즉 받은 은혜만 내놓으면 된다는 것이다.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죄에 대해서 받은 용서함만 내놓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내놓지 못하는데, 왜 그런가? 어디 받은 게 있어야 내놓을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 제가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

그러니 매일같이 교회에 와서 무엇을 내놓는가? 자기 교회의 전통, 자기가 전도한 것, 기적을 받은 것, 그리고 십자가를 알고 복음을 안다는 것, 그런 것들만 내놓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놓으려고 하면, "저는 십자가를 아는데, 그것도 역시 죄입니다" 라는 것을 내놓아야 제대로 내놓는 것이란 말이다.

복음은 무엇인고 하니, 존재를 따로 있고, 자기는 허물 허물한 존재인데, 그러한 예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나' 라는 존재를, 즉 "나는 이런 인간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님을, 그것을 아는 자가 곧 복음을 아는 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를 해보면, 먼저 배후에 예수님이 계셨고, 그것이 실루엣으로 구약에서는 심판으로 나타났고, 즉 사울에게는 악신이 임하고 다윗에게는 성령이 임했다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실 구분작업을 구약에서는 미리 실루엣으로, 즉 그림자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 너무나 애잔한 이스마엘 !!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이스마엘의 경우에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불쌍하냐는 말이다. 정말 불쌍하다는 것이다. 아이를 낳게 해놓고 돌보지도 않고 말이다. 그 양반의 이름이 누구인고 하니까,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무책임한 남편이냐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식을 밴 아내를 버리는, 그러한 인륜에 어긋난 짓을 했는데, 하지만 그런 인간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도 그와 같은 노선에 있다고 하면, "너거들도 역시 인륜에 어긋난 자가 되어라" 라는 것이다.   

(창 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창 16: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창 16: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은 버리고 이삭은 챙기는데, 하지만 둘 다 같이 데리고 살면 안 되는가? 그것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오늘 교재본문과 관련이 있는데 말이다. '있음'은 항상 하나님의 있음과 관계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알아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언서 29장을 찾아보겠는데, 드디어 깊고 깊은 내막이 나오는데 말이다. 26절과 27절 말씀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잠 29:26)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잠 29:27)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정직한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

여기 27절에 보면 '작정'이 나오는데, 즉 예정이 말이다. 그 뒤에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정직한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미움과 사랑, 즉 사랑과 미움이 이미 작정되어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저기 계시고, 나는 여기에 있다" 라고 해서,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닌데, 하나님의 계획이 먼저라는 것이다. 작정이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계획이 먼저 있는 것은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그 계획 속에 제가 들어있으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꾸만 자기 존재를 생각하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것이 아니야. 내가 사랑하면 너는 사랑을 받고, 내가 미워하면 너는 미움을 받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 저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우리는 그런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그런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 존재가 아닌, 아들을 예정하심으로서 !!

이것이 성경에서 제일 난해한 부분인데, 자기가 여기에 이렇게 존재하고, 또 하나님은 저기에 존재한다고 하면, 그러면 존재와 존재끼리 서로서로 거래하면 되는데, 즉 "믿어라. - 예!", "섬겨라. - 예!", "회개하라. - 예!" 라고 말이다. 그렇게 무엇이든지 시키는 데로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미리 아신 자를 부르셨다" 라는 것이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래서 그 하나님의 예정의 내용을 뜯어보니,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존재를 예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랑하는 자를, 즉 자기 아들을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라고 하셨는데, 즉 성령을 통해서(?) 나왔다는 것이다.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따라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오게 되는데, 자기가 무엇을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먼저 기뻐함을 입은 자를, 즉 주께서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향해서 손을 내민 것이 아닌데, 그게 이사야서에 나오는데, 즉 "손을 내밀지 않는 백성에게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라고 말이다. 강제로 믿게 하겠다는 것인데, 억지로라도 말이다.

(사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사 42:7)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 언약 -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주고받은 이야기' !!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어부가 고기를 잡을 때는 고기가 알아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부가 강제로 고기를 낚아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낚아채겠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이미 끝난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 중간에 누가 개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주고받은 이야기를 두고 두 글자로 '언약' 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 언약 때문에 사랑을 받는 자만 있으면 안 되고, 미움을 받는 자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둘이 있어야 예정이란 말이 성립되니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아담은 오해를 했는데, 즉 "창조가 되었으니, 이제부터 모든 결정은 내가 한다" 라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그 밑둥치에 있는 공포를 보지 못해서 그러한데, 주변에서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말씀의 세계라는 것을 보지 못해서 말이다.

◈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생명과 죽음이 !!

그래서 그만 마귀가 들어가서 유혹을 해서, 자기 운명은 자기가 결정하도록 했는데, 그래서 아담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책임지겠다" 라고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니가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심으로서,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선악나무이었는데, 그런데 그것을 따먹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드디어 '생명' 이라는 말과 대비가 되는, '죽음' 이라는 존재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서,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처럼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러니 그 앞에서 다른 나머지는 모두 다 죽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바쳐서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하니,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그만 두어라. 니 목숨은 생명도 아니다" 라고 하셨는데, 즉 그런 생명도 아닌 것을 바쳐봐야 그것은 역시 죽음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니가 아무리 니 목숨을 바쳐도 내 나라에 올 수 없다" 라는 것이다.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요 13: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 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 존재가 아닌 '관계' !!

그러니 교회설립예배와 같은 그 모든 것이, 어제도 대전에서 오신 분과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옛날에 많이 듣던 이야기를 참으로 간만에 들었는데 말이다. 그것은 그냥 노는 것인데, 그런 낚시와도 같은 취미생활을 두고서 시비를 걸기가 좀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그냥 논다고 여기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건 오락입니다" 라고 하면, "아멘" 이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기어이 오락이 아니라고 우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를 몇 년을 다니고, 신앙생활을 얼마나 했는지, 그런 것과 구원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늘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는데, 그게 바로 존재가 아닌 관계라는 것이다. 그 관계는 '나' 라는 존재가 활동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관계는 일종의 끈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 끈이 우리를 잡아당겨서 구원을 받는데, 그러니 끌려가는 입장에서는 까불든지 말든지,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 끈에 의해서 결국에는 목적지까지 끌려가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 부자는 왜 부자가 되었는가?

다시 누가복음 16장으로 돌아와서, 아무튼 부자가 지옥에 갔는데, 그는 왜 부자가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기 위해서, 즉 예수님의 미워하심의, 예수님의 그 거룩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는 반드시 부자가 되어서 지옥에 가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부자가 된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고, 부자가 되어도 이런 관계를 알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부자다" 라는 자체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부자는 곧 나다" 라고 하면 그만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6장 앞에 보면 뭐라고 되어있는고 하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라는 말씀이 나오고,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거들이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그게 곧 "부자는 나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미스코리아 출신의 그 연예인이, 물론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 나중에 생활이 어려워지니 남의 지갑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부자인데, 부자가 나인데, 그런 부자인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하면서도 300만원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부자임을,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계속해서 도적질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누구이다" 라는 규정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못한데, 우리에게는 "내가 누구이다" 라는 것을 규정할 수 있는 입장과 권리와 자격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나는 나다" 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용어들을 따와서 붙이는 것이란 말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국회의원이다", 혹은 "나는 판사다" 라고 자기를 규정하지만, 그러나 하늘나라에는 국회의원도 없고 물론 판사도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나는 남자다", 혹은 "나는 여자다" 라고 규정할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하늘나라에는 남자와 여자도 없으니 말이다.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

그러므로 여기 "나는 누구이다" 라는 것에서, 그 '나' 라는 자리를 예수님으로 바꾸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라고 한 다음에 중간에 무엇을 넣어야 하는데, 아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언약이라고 했는데, 그 언약의 요소를 집어넣는다는 말이다. 즉 "나는 언약의 백성이다" 라고 말이다. 

그게 베드로전서 2장에 나오는데,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라고 말이다. 이 '택했다'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께서 택하셨음을 보여주는데, 즉 예수님과 관련된 사항이 여기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이다" 라는 것에 말이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

사도바울이 자기 자신을 뭐라고 소개했는가?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라고 했는데, 바울서신서들을 보면 그런 대목이 나온다는 것이다. 편지를 쓸 때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는 것이다. "나 사도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너희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긍휼이 넘칠지어다" 라고 말이다.

(딤전 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딤전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자기는 은혜와 긍휼이 넘쳐서 자기는 "나는 국회의원이다", 혹은 "나는 판사다" 라는 것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편지를 읽는 너희들도 나와 같은 믿게 되면 성령 안에서 나와 같은 노선의 인생이 된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 봉건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했는데, 그것은 서양의 봉건사회이고, 동양에도 이와 비슷한 사회가 있었는데, 일종의 신분사회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이런 신분사회 이전의 봉건사회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가족중심의 사회라는 것이다.

◈ 동양 - '가족중심의 사회' !!

가족은 무엇을 중심으로 되어있는가? '나'를 중심으로 해서 아버지가 있고, 밑에는 아들이 있고, 옆에 아내, 혹은 남편이 있는데, 서로는 부부사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옆에는 친구가 있고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을 근사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주는 국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5가지 관계 외에 다른 관계가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게 논어나 맹자와 같은 데 보면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이 살면 된다는 것인데, 즉 인간이 자연에 가깝게 살면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도인이 되고 군자가 된다는 것은, 이 5가지가 원활하게 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게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5가지 관계가 곧 '국가지상주의' 라는 것인데, 즉 '국가적 이기주의' 라는 말이다.

사람이 대자연 속에 살고 있으면, 물론 저기 태양에서 보면 지구는 편평하겠지만, 가까이 보게 되면 산이 있고 바다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대기의 흐름에 따라서 기후가 바뀌고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 여기 산들 사이의 계곡에 마을이 있는데, 그것을 '우리마을' 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뒷산에 있는 마을은 '남의 마을'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 우리마을에서 5가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남의 마을을 좋게 하는 것은 아닌데, 어느 마을이 좋아라고 그렇게 하는가? 우리마을이 좋아라고 하는 것인데, 그러니 인간은 그 어디에 있더라도 이기주의적 사고방식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존 홉스 - '법으로 다스리자' !!

'존 홉스' 라는 사람이 이것을 명백하게 밝혀내었는데, 즉 "그렇게 인간들 전부가 다 이기주의이니까, 이 사회가 유지되려고 하면, 그런 이기주의를 다스리는 것은 법밖에 없으니, 법으로 다스리자. 따라서 법으로 할 때는 삼권분립으로 만들어서 하자" 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이 지금에까지 이르렀고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은 아무리 국가가 크더라도, '군중 속의 고독' 이란 말이 있듯이, 인간이 자신의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남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위인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잘 하는데, 그런데 나중에 서로 알다보면 점점 더 넓혀지는데, 그게 나중에 가야가 되고 신라가 된다는 것이다. 더 넓혀지면 통일국가가 되고 말이다.

일본기업에 취직을 한 한국청년의 경우에, 일본과 한국이 축구경기를 한다면 어디를 응원하겠는가? 눈치를 보며 한국을 응원한다는 것이다. 일본인 회사동료가 옆에 있으면 일본을 응원하고, 한국친구가 오면 한국을 응원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일본 땅에서 활동하는 한국 연예인들이 "독도는 우리 땅이다" 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기가 곤란한데, 그러면 일본에서 쫓겨나고 밥줄이 끊긴다는 말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주워 모아서 한꺼번에 바구니에 담았는데, '죽음' 이라는 바구니에 말이다. 그러니 구원을 받는 것도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는다고 해도 저주와 심판으로 인해서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긍휼하심으로, 즉 "내가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는 긍휼히 여겨준다" 라고 하는, 바로 그런 하나님만이 있고, 그 외에는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출애굽기 33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출 33:18)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출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그러니 '하나님' 이라고 했을 때, 하나님 존재 자체를 생각해서, "내가 여기에 있듯이, 하나님은 저기에 있다" 라고 생각해봤자, 그런 하나님은 모두가 다 우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언약의 형태로 왔고, 또 언약이 어떻게 십자가로 완성되었는지, 바로 그러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이, 무엇을 하나 믿게 되면 !!

지금 사도신경의 경우에는 AD 200년경에 완성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전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200년경에 모았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도신경에서 믿을 것이 왜 그리 많은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라고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를 믿게 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것과 경쟁을 하게 되는데, 즉 우열을 가리게 된다는 것이다. 두 개를 다 동시에 믿을 수는 없고, 순서상 한 쪽을 앞장세우게 되면 다른 쪽은 뒤에 처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이들에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라고 물으면, "둘 다 좋아" 라는 것은 사실상 아이들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ㅋㅋ). 물론 부모도 믿지 않고 말이다. 엄마가 있으면 엄마가 좋다고 해주어야 하고, 또 아빠가 있으면 아빠가 좋다고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 다 있으면 각개전투를 해야하는데, 순서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있는가? 없는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독자적으로, 자기 존재가 중요하다고 여겼으면, 그 뒤에 하나님이 붙던, 예수님이 붙던, 성령이 붙던, 그것은 모두 자기보다 못한 것이고, 결국은 자기를 위해서 미워해야 할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 다시, 잠언서 29장을 다시 보면 !!

잠언서 29장을 다시 보면, 거기 27절에서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정직한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누가 의인인지, 누가 악인인지, 그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아무튼 이러한 관계로 이 세상이 짜여있다" 라는 것을, 그런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잠 29:27)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정직한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그러니 잠언서 전체가 "누가 의인입니까? 누가 악인입니까?" 라고 묻는, 그러한 질문 자체를 자기만 생각하고 있음을 들통나게 한다는 말이다. 즉 그런 것은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관계를 가지고 오신다는 말이다.

◈ 이 세상은 악인과 의인의 격자구조로 !!

계피가루를 넣고 계란을 넣어서 동그랗게 만드는 게 있는데, 그 위에는 격자무늬가 찍혀있고 말이다. 그게 무엇이지요? 참, 와플인데, 이제는 기억력이고 뭐고 다 날아가고 없는데, 이 와플이 위에 아무 것도 없으면 그냥 밋밋한데, 그런데 그런 격자무늬를 찍어놓으니 물건의 상품성도 제법 있어 보이고, 괜찮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격자무늬가 무엇인고 하니, "악인에게는 의인이 미움을 받고, 의인에게는 악인이 미움을 받는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미움과 사랑(악인과 의인?)이라는 격자구조가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그 어떤 인간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중요한 것은 하나만 알면 되는데, "악인이 누구입니까?" 라는 것은 물을 필요도 없고, "의인이 누구입니까?" 라는 것만을 알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인이 누구입니까?" 라는 것만 알면, 그 의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무조건 악인이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은 '의인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을 수 있는 자격이 없어 !!

그런데 사람은 그러한 것을 물을 수 있는 자격이 없는데, 왜냐하면 "의인이 누구입니까?" 라는 것을 묻는다고 하는 자체는, 그런 질문 속에는 자기는 필히 기본적으로 무엇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인가? 의인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예를 들어서, 어느 학생이 "선생님, 우리 반에서 누가 착한 학생인가요?" 라고 묻는다고 하면, 그것은 묻는 것 자체가 "선생님이 나에게 착하지 않다고 하면, 나는 선생님을 미워할 거야" 라는 것이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 질문자체가 곧 자기는 착하다고 여기고 질문한다는 것이다.

제가 이러한 이야기를 수 천 번을 했는데도 사람들이 알아듣지를 못하는데, 즉 "예수님, 도와주세요"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자기는 무조건 구원받은 자라고 여기고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물론 주님은 그런 기도를 받지도 않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그런 기도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의인 한 분만 오시면 되는데, 그런데 로마서 1장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의인인가? 모든 인간은 죄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되었는가?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물론 의인인 그분이 그냥 나타나면 우리가 잠언서 29장 27절을 해명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의인으로 오신 그분이 이 땅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다 미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 제자인 베드로에게도 미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 예수님만이, 미워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 !!

다시 말해서, 아담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누가 미움을 받았는가? 예수님이 미움을 받았는데, 왜 미움을 받았는가? 미워하는 자들이 스스로 자기들이 의인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에, 즉 잠언서 29장 27절을 보면 "악인은 의인에게 미움을 받는다" 라고 되어있는데, 즉 예수님을 미워하는 자기들은 의인이고, 미움을 받는 예수님은 그런 미움을 받아도 마땅한 짓을 했기 때문에, 즉 예수님은 악인이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죽음 가운데서 예수님을, 즉 예수님이 그 얼마나 미움을 받았으면 죽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예수님을 사흘만에 다시금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것이 다 역전되고 말았는데, 그러니 미움을 받은 그분만이 오히려 우리를 충분하게 미워할 수가 있는 유일한 자격자가 된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선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이 곧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자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고백은 "주여,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게 곧 사도바울의 고백이고 말이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참, 쉽죠잉? 그러니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죄를 지으면서 돌아다니면 안 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막 살아도 죄고, 또한 막 살지 않아도 죄라는 말이다. 그래서 "막 사세요!" 라는 그 유명한 사자성어가 만들어졌는데(ㅋㅋ),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꾸만 자기가 의인 것처럼 꾸미니까 말이다.

◈ 예수님이 사람들 손에 죽으심으로 !!

예수님께서 그냥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얻어맞고 난 다음에, 즉 사람들이 "귀찮은 인간, 이제 겨우 처리했네. 잘 죽었다" 라고 하면서 손을 털 때, 바로 그때 그 죽은 예수님을 살려냄으로 말미암아서, 비로소 생명이라는 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 즉 죽음을 저주라고 규정함으로서 생명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땅에서 예수님이 가신 그 순교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도가 가야하는 길이고 말이다. 그러니 소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를 우기는 그들에게 우리가 핍박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의인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수시로 그렇게 미워하고 또 미워하는데, 왜냐하면 '나' 라는 존재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주님은 계속해서 긍휼과 자비를 주시는데, 왜냐하면 주님에게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가 중요하니 말이다. 즉 "너의 구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에게 주어진 나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출애굽기 33장 19절에 나오는, 즉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주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나' 라는 존재보다도, 즉 우리 구원보다도 더 소중하다는 말이다. 주님의 십자가 복음이 말이다.

그러면 이제 교재 231페이지를 살펴보자.

**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능력이다. 선택하시는 능력이다. 인간은 창세 전의 일을 알지 못한다. 이는 인간이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예정인가? 창조인가?

여기에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능력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제가 퀴즈를 하나 내겠는데, "예정을 위한 창조인가? 창조를 위한 예정인가?" 라는 것이다. (녹취자 - '창조를 위한 예정'에 한 표) 조금 더 풀어서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는 예정하심을 펼치기 위해서 창조능력이 펼쳐져야 하는가? 아니면, 창조 그 자체를 위해서 예정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물론 둘 중에서 하나인데, 그 윤곽은 에베소서 1장에 보면 나와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에게서 창조가 나온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냥 창조하셔도 되는데, 창조할 때 예수님 안에서 창조하신다는 것이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창조하심으로서, 창조자체를 위해서, 즉 피조물을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위해서 이 세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무엇인가? '예수 안에서' 라고 함으로서,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님도, 창조도, 그렇게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했다는 말이다.

◈ 삼위일체에서, 성부가 오야붕 ??

그러니 여기서 삼위일체는 깨지고 마는데, 왜냐하면 삼위일체는 성자중심이 아니고 성부중심이라는 것이다. 초장기의 삼위일체는 아버지가 세 분 중에서 대표자로, 그렇게 성부가 아버지로 등장하는데, 거기에는 이그나티우스가 나오고, 아주 복잡하다는 것이다. 초창기는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나중에 뒤로 가면, "뭔가 이상해? 성부가 오야붕이 되면 성자는 어떻게 되지?" 라고 나오지만 말이다.

처음에 왜 그런 주장이 나왔는고 하니,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이 구절은 마치 양아치가 뭔가를 해서 자기 대장에게 바치는 것과 같은 분위기라는 것이다. "대장님, 여기에 있습니다" 라고 하면, "응 그래, 수고했어" 라고 하고 말이다. 그러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아버지가 최고이고 아들은 시다바리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고전 15: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리고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라고 해서, 서열상 하나님이 아들보다 월등히 높은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아리우스' 라는 이단이 등장하고 하는데, 물론 그렇지 않아도 다 이단들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교회사를 보면 그런 이단들이 있다는 것이다. 

(고전 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고 하니,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고 하니, 창조중심에서 하나님의 존재중심으로 보니 그런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어서는 우리가 전혀 끼어 들 수가 없는데, 인간적인 실루엣으로, 즉 그런 그림자를 가지고 자꾸만 설명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가지고, 하늘나라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자기 부부관계를 가지고 남자 하나님, 여자 하나님, 그렇게 해도 안 되고 말이다. 이란의 조로아스트교가 그런 경우인데, 그런 것들은 다 이방종교에서 나온 아이디어로서, 즉 이방종교는 이 세상의 관계를 확대시켜서 신과의 관계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 창조세계는 멸망을 당해야 제 맛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바로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한 계획인데, 그것을 위해서 창조세계가 펼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예정을 해도 어떻게 했다는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들을 택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 안에서 택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창조는 그만 빠져야만 한다는 말이다. 오늘 강의의 하이라이트가 이 부분인데, 그러니 조금만 더 참으시고, 그렇다면 일단 창조를 해놓았는데,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나머지는 다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모두가 다 멸망을 당해야, 즉 불에 타야 한다는 것이다.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이 창조할 때부터 이미 그 재질이 불에 잘 타는 것으로 하셨다고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원소는 불에 다 타게 되어있는데, 그러니 불에 타서 멸망을 당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만들었는데 말이다.

◈ 너도 번개탄, 나도 번개탄 !!

그것을 제가 설교시간에 '번개탄' 이라고 했는데, 번개탄은 불에 잘 타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런데 그 번개탄을 리모델링을 해서 케이크로 만들어서 "생일 축하합니다" 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번개탄은 불이 붙어야 그 값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번개탄과 같이 불이 붙어야만 제 맛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화장터에 가서 불에 붙지만 말이다.

그렇게 우리의 겉 사람은 그렇게 타야 하는데, 물론 지구를 포함해서 안드로메다든 뭐든 간에 우주도 다 타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에너지 자체가 모두 타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죽은 사람에게 라이터를 가지고 불을 부치면 에너지가 다 타버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할 때 그러한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말이다.

◈ 오직 예수님을 위하여 !!

아무튼 존재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인데,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것은, 그것은 마치 있어도 없는 것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없어도, 날마다 있게 하시면 있는 존재이고 말이다. 있게 하시는 것은 물론 예수님과의 관계 때문에 있게 하시는 것인데, 즉 예수님 때문에 현재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라고 했는데,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주님에게 필요해서 살려놓았다는 말이다. 우리 자신에게 필요해서 살려놓은 것이 아니고 말이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병원에서 호수는 언제 빼야 하는가?

그래서 병원에서 "호수를 뺄까요? 말까요?" 라고 하는 것도 주님에게 물어보고 해야하는데, 왜냐하면 자기 몸이 아니니 말이다. 그렇게 자기 몸도 아니면서 자기 몸으로 여기니 "호수를 뺄까요? 말까요?" 라고, 그렇게 고민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 지금 우리 아버지가 식물인간인데 호수를 뺄까요? 말까요?" 라고 하면, 주님이 뭐라고 하시겠는가? 당연히 "니 몸도 아니니, 그런 것은 니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내가 다 알아서 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돈이 떨어지면 빼지만 말이다(ㅋㅋ).

사실은 병원에서 호수를 빼는 타이밍이 언제인고 하니까, 자식들의 자존심과 체면이 거의 다 충족이 되었다 싶으면 뺀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보기에 "자식으로서 그 정도면 되었다" 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되면 뺀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남들과의 관계이니 말이다. 물론 며느리들도 돈이 많이 든다고 하면서 반발도 심하고 말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죽음의 바구니에 다 담는데, 그런 모습들까지 일일이 다 말이다. 물론 호수를 빼지 않는다고 해서 의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뺐다고 해서 더 악한 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충분하게 마음껏 우리의 죄가 발산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

마지막으로 이것만 말씀드리고 마치겠는데, 예수님을 두고 새벽별이라고 하는데, 왜 그냥 별도 아니고 새벽별이냐는 것이다. 한 밤중에 떠있는 별도 많이 있는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충분하게 어두울 때 저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첫 번째 별인데, 그 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상의 모든 것들이 다 새벽이 오기 전의 어두움 속에 파묻혔다고 하는 것을, 그것을 충분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내용인데, 즉 우리의 마음속에 무엇이 떠오른다는 것인가? 샛별이 떠오른다는 말이다. 즉 "너는 너의 마음이 어둡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그것이 바로 니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증거하기 때문이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말씀을 대할 때 그 떠오르는 샛별, 즉 새벽별을 가지고 읽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은 모두가 다 어두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모든 인간이 충분하게 예수님을 미워한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렸고 말이다.

(벧후 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벧후 1: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 마치 우리의 일상(日常)처럼 !!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훌쩍훌쩍 우는 마리아와 몇 명만이 있을 뿐이지, 이 세상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다시 과거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으로,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던 모습으로 말이다. 마치 우리의 일상처럼 말이다.

우리의 일상이 어떠한가? 우리는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면, 마치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금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떠오르는 새벽별로 인해서 충분하게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에 전혀 관여한 적이 없었습니다만, 그런데 이것이 웬 은혜이고 웬 기적인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시내산 꼭대기로 올라간 것처럼, 그리고 거기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라는 말씀을, 그것을 곧 우리의 현장에서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덮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8,30 오후 7시에 마침.

                                      20여년전(?), 대구 말씀사랑에서 첫 강의를 들을 때,
                 "목사님, 저는 선택이 되었습니까?" 라고 끈질기게 질문했던 게 생각나네요.
                                                      그런데 그게 왜 갑자기 생각나지?
                                                                샛별의 위력인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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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때쯤 91년도 였던가? 처음 말씀사랑에서 공부한다고들 해서 갔는데
처음이였는데
분위기가 험악했었죠
출구 들어가기전 공부시작하기 전에
바깥에서 누가 울부짖으면서 욕을 하고 행패를 부리는듯한 한사람이 있었는데
나중에 저 사람이 누구인데 저렇게 하느냐고 물어보니
목사였다고 하네요
목사가 행패부리고 아마 술먹고 그 공부를 방해할려고 했던 그런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참으로 에누리 없는 주님의 일하심이였습니다.

그런데 참 묘한게 그렇게 행패부리면서도 무지 무지 겁을 먹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바깥에서만 고래 고래 고함만 쳤던거죠,

더 놀라운 것은 그러든 말든 아에 신경조차도 안쓰면서 전혀 그런일이 있었나 라는 식으로
공부를 하던 분위기였습니다.

험악한 분위기는 바깥이였을 뿐이고 전혀 출구안으로 들어오질 못하더군요
누가 막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 사람은 겁을 먹으면서 그냥 고함만 치고 비틀 비틀 거릴 뿐이더라고요

그것이 대구강의 처음 갔을때 보았던 이상했던 장면이였습니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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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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