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75강 함께하심

피/피 2012. 8. 29. 11:21

피75강 함께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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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20716피p235함께하심

피75강 함께 하심
 
[12 대구강의 14] - [피 75] - 함께 하심

                                                    12,07,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당신은 선택을 받았습니까?

오늘은 교재 235페이지부터 살펴보겠는데, 여기에 보면 '선택'에 관해서 언급되어있다는 것이다. 선택이라는 것은 선택을 받은 사람만 아는데, 그런데 선택을 받은 사람이 그 선택을 안다는 것은 사실상 말이 앞뒤가 맞지 않을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택을 받지 않고도 "나는 선택을 받았다" 라고 주장할 때에,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기어이 선택을 받았어" 라고 우길 때, 그 사람이 정말 선택을 받았는지, 아니면 받지 않고도 받았다고 우기는지, 그것을 판단할 기준을 제시하기가 상당히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야곱은 선택하고, 에서는 버렸다" 라는 대목에서, 그것을 야곱에게 묻지 말고, 야곱에게 물으면 야곱은 당연히 "나는 선택을 받았다" 라고 할 것이고, 그것을 에서에게 한번 물어보자는 것이다. 에서에게 "당신은 하나님에게 선택을 받았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아마 에서도 자기가 선택을 받았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 신을 없앰으로서 !!

그러므로 그 어느 인간도 "하나님께서 나를 버렸습니다" 라고, 그렇게 본인이 그것을 수락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 어느 인간도 말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어떻게 하는고 하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 라는 것을, 그것을 원천적으로 없애는 방법을 사용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신은 없다" 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선택을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 라고, 그렇게 고민할 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선택하는 신을 없애버리고, 우리가 신을 선택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라고 나온다면, 그만 골치 아픈 일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즉 신은 하늘에 계시고, "내가 당신을 믿어줄 것인가? 말 것인가?" 라는 선택권이 본인이 가진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일상에서 바쁠 때면 "하나님, 조금 있다가 봅시다" 라고 하면서 넘어가면 되고, 그러다가 자기에게 다급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저를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면서 다가서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편리하냐는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인간이 자기 자유로 선악과를 따먹었기로 선택했다고 하면, 여기서 궁금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우리 인간이 선악과가 아닌 것을 선택할 능력이 있겠는가? 없겠는가?" 라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말이다.

◈ 인간에게는, 선악과가 아닌 것을 선택할 능력이 없어 !!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그 능력과 속성과 세력이 이미 자기 안에 들어와서 완전히 점령하고 지배하고 있는 입장에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 한 것 말고, 먹음직도 하지 않고 보암직도 하지 않고 탐스럽지도 않은 것을, 과연 그것을 선택할 수 권한이 우리 인간에게 있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은 이미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할 경우에만 선택의 대상이 되기로, 그렇게 이미 인간과 선택의 대상이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굳어져버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 자체가 이미 망가지고 고장난 것인데, 그런 고장난 것에게 어떤 선한 것을 찾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 보면, "무슨 인간에게 선한 것이 있느냐? 하나도 없다" 라고 말이다. 그게 시편에도(?) 나오는데, "우리가 주님 앞에서는 죄밖에 지을 것이 없사오니" 라고 말이다.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렇게 우리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 일체 없는데, 그런데 이렇게 "선한 것이 없다" 라고 규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선을 행해보겠다고 설쳐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모양새 자체도 선이 아니고 악이 된다는 것이다. 즉 착해보려고 애를 쓰는 것도 역시 악의 일종이라는 말이다. 착해보려고 애를 쓰는 것도 말이다.

◈ 나는, 나를 인정해주는 신이 좋아 !!

이것을 그림으로 설명해보면, 신이 이렇게 있는데 인간이 신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그게 어떤 선택인고 하니, "내가 착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의(義)라고 인정을 해주는 신과 관계를 굳게 맺기로 한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누가 선택하는가? 인간이 신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10장 3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이렇게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른다고 했는데,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알면 어떻게 되겠는가? 즉 하나님의 의를 안다면 무엇을 스톱하겠는가?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서 힘써 율법에 순종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롬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롬 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준비된 장치들 !!

그렇다면 율법이 주어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준비된 장치들이란 말이다. 즉 율법이 자기 의를 향하여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하나님의 의만이 의라는 것을 몰아주고, 그쪽으로 쏠리는 식으로, 그렇게 율법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율법의 해석을 따라간다는 것은, 율법이 지향하고 달리고 있는, 그런 움직임이 어디로 향하고 있다는 말인가?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향하고 있는데, 그 율법이 일종의 화물열차라면, 그게 어디로 행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의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 율법에 몸을 싣고서 !!

그러면 그 화물열차에 자기 몸을 싣게 되면, 자동적으로 어디로 가게 되는가?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 향하여 율법과 같이, 아니 율법 속에 빠져서 달려간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지향하는가? 자기 의는 죄가 되고, 진짜 의는 달려가고 있는 저쪽에 있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즉 오직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의만 진짜 의라는 것을, 그것을 진짜 몸이 실린 사람은 율법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혀 어렵지 않지요? 이렇게 어렵지 않고 친절하기까지 한데(ㅋㅋ), 그런데 이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성격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이미 자기가 선택한, 물론 그게 타고난 죄인데 말이다. 그렇게 죄에 의해서 인간이 선택한 신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 신은 어떤 신이고 하니, 자기가 착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쓰는 것을 인정해줄 수 있는 신을 이미 여기에 장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무엇을 도용하겠는가? 율법을 도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도용한다는 것이다.

◈ 하지만, 결국은 '사기'가 아닌가?

그러니 이런 가짜 신에 있어서 율법과 말씀은, 결국 그것을 지킬 때마다 의가 쌓이게 되고, 그것이 쌓이게 되면 가정과 사회와 교회의 축복으로 다시 되돌아온다고 하는, 그러한 체제에서 그 사람은 전혀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한 마디로 '사기'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인정하는 그리스도는, 자신들이 이러한 놀이를 하는데 있어서 약간 앞장서는 모델 케이스가 된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예수님이 열심히 살았는데, 우리도 그 예수님과 사도를 본받아서 열심히 살면, 우리도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사기라는 말이다.

이런 사기를 치는 사람들은, 결론적으로 인간들에게 제시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여러분들도 신이 될 수 있습니다" 라는 것인데, 즉 "그것은 여러분이 속으로 원하시는 바이니, 제가 교회에서 상품으로 제시하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열심히 하면 신이 될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우리도 신이 될 수 있다 !!

이것은 일반적인 종교성을 두고 이야기하는데, 남묘호랑게교나, 이름이 참 어려운데, 정확한 명칭은 인터넷에 찾아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나 천주교나 기독교나 오늘날 교회에서, 그러한 모든 종교들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우리도 신이 될 수 있다" 라고, 즉 "우리도 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경험상, 체험상 점점 더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을 만끽할 수 있다. 나는 돈보다도 내가 신이 되는 것을 더 고귀하게 여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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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묘호랑게교 - 우리말로 하면 '나무묘법연화경' 이라는 뜻입니다. 여기 '묘법연화경'이란, '법화경에 귀의한다'라는 뜻입니다. 법화경은 대승경전 중에서 하나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금강경과 함께 매우 존중되는 경전 중의 하나입니다. 남묘호랑게교는 이것을 염불(창제)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지요.
우리가 말하는 남묘호랑게교는 크게 두 파가 있습니다. 현재 이케다가 이끌고 있는 창가학회(SCI)와 일련정종(대처승단)입니다. 일련 정종은 거의 정통불교에 가깝고, 창가학회는 원래는 일연정종의 신도 조직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련정종과 창가학회가 불화가 생겨, 일연정종이 창가학회 회장을 파문하게 되었고, 그래서 신도 조직이 따로 떨어져 나와 SGI를 조직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서로 욕하고 비난하기가 철전지 원한이 맺혀있습니다. SGI 기관지인 화광신문을 보면 한번이라고 일연정종을 욕하지 않고 지나가는 일이 없을 정도로, 그리고 창가학회는 일본에서 제3당인 공명당의 중추입니다. 사실상 창가학회당이지요. - 네이버에서  (녹취자 - 우리 가게에도 종종 들려서 화광신문을 주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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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것을 목표로 해서 성경구절을 찾기 시작하는데, 그래서 그것을 자기들의 주장이 옳다고 하는 밑받침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면, 그러면 자기가 점점 더 향상이 되고 높아지는데, 그것을 거부하고 싫어할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 내 마음에 땡기는 예수를 !!

그러니 교회에서 사기를 치게 된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진짜 예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 맞는, 즉 자기가 믿을 만한 예수를 원한다는 것이다. 가짜라도 좋으니 말이다. "내 마음에 땡기는 예수를 믿고 싶다"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신을 믿을 때 비로소 그 마음에 평안함과 안정감을 얻게 되니 말이다.

그러니까 외부에서 사기를 치는 놈들도 물론 문제이지만, 그렇게 사기를 치는 교회만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사기를 치고 거짓말을 하는 교회가 필요악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기만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필요악으로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를 들어서, 육신적으로 성호르몬이 너무 심하게 분비되어서, 아이이든, 어른이든, 할머니이든 간에, 여자가 보면 달려드는 사람에게는 사창가가 필요악이라는 것이다. 악은 악이지만, 꼭 필요한 악이 된다는 말이다. 만약에 그런 것마저도 없다고 한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 자기의 그런 정욕을 배설할 수 있는 곳에 가서 돈을 주고 배설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적절하게 이용한다", 혹은 "내가 그것을 필요로 한다" 라고 하면, 과연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이 진리이겠는가? "아담에게 선악과가 필요하다" 라는 말을 우리가 이해한다고 보고, 즉 "아담과 하와가 저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다" 라는 것은 이해하자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리인가? 즉 "내가 필요한 것이 과연 진리인가?" 라는 것이다.

◈ 손이 가요, 손이 가 ♬

하지만 사람은 진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필요한 것에 먼저 손이 간다는 것이다. "손이 가요, 손이 가" 라는 CF도 있는데 말이다. 새우깡인가?(ㅋㅋ). 그렇게 인간은 자기가 필요한 것만 다 챙기게 되면, 진리라는 것은 더 이상 귀찮아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실수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진리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필요한 것을 원하지 진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한 자들에게 예수님은 자기가 진리라고 말을 해버렸으니, 그러니 그들은 "당신은 더 이상 필요 없어요" 라고,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그런 의미라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진짜 예수님은 필요가 없는데, 하지만 교회가 장사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필요가 있는 하나님, 필요가 있는 예수님, 필요가 있는 성령님, 그리고 필요가 있는 삼위일체로 바꾸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럴 때 장사가 된다는 말이다.

◈ 비를 맞으면서도 위로 받기 위해서 !!

어제 주일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무슨 내용인고 하니, 비가 오는데 사람들이 그만 우산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우산도 없이 위로를 받기 위해서 교회에 온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어렵게 사는데 도와주세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위로를 받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은 수 천명이 모여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자기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진리를 그들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리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대규모로 움집을 했다는 것이다. 수 십억을 들여서 예배당을 엄청 크게 지으면서 말이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의심스러우면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아서 물어보라는 것이다. "당신은 여기에 왜 왔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내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왔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뿐이라는 말이다. 진리와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아쉬운 것을 얻기 위해서 오는 것이지 말이다.

◈ 무속신앙과 불교의 조우 !!

그러니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옛날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나라에 무속신앙이 먼저 있었는데, 무당이 중심이 된 제천의식이 있고 말이다. 그런 샤머니즘이 우랄 알타이어 계통으로 몽고를 거쳐서 우리나라에 구석기 신석기 시대를 걸쳐서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가는 곳에는 모두 종교가 있는데, '베르알타인(?)' 이라고 해서, 인간은 아닌데 인간과 비슷한 모습이 나오는데, 지금 스페인 근처에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2만년 전으로 추정되는 알타미라 동굴에 보면 그림이 있는데, 거기에 종교적인 의식을 그려놓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이 있는 곳에는 종교가 있는데, 아담의 아들 가인도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종교는 어쩔 수가 없는데, 그런 종교가 구석기 신석기 시대를 거쳐오면서 무속신앙이 되었는데, 그런 무속신앙과 불교가 결합이 되어서 칠성신을 섬긴다는 것이다. 북두칠성을 말이다.  

그래서 오래된 사찰은 대부분이 칠성신과 관련이 있는데, 불교 당국자들이 이것을 알아도 어쩔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게 장사가 되니 말이다. 절은 효험이 있어야하지, 깊은 진리는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병이 낫고 방언을 하고, 그렇게 효과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절에서 방언을 한다고 하니 이상하게 들리지 싶은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절에서도 하는데, 순복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 민중들이 원하는 것을 !!

민중들은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몸이 괴롭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지면, 그것을 딱히 어디서 도움을 받을 곳이 없기 때문에 초월자, 즉 신에게 기댄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는 전 세계 모든 곳에서는 그런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기독교의 2000년 교회사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민중들이 교회를 원해야 교회가 유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유지된 교회의 역사가 곧 교회사인데, 그러니 진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것이 역사가 되고 전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통만 되어도 제가 이런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그것을 '정통' 이라고 우긴다는 말이다. 즉 "이것만 옳다" 라는 것인데, 나쁜 것들은 모두 다 버리고 좋은 것만을 끌어 모아서 소위 '정통'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무엇인고 하니, 다른 것은 전혀 섞지 않은 '정통 원조 신당동 떡뽁이' 라고, 그렇게 되는데(ㅋㅋ), 다른 것은 섞지 않은, 퓨젼이 아닌 말이다. 그리고 저기 대구 삼일동에 가면 '진짜 80년 역사의 따로 국밥집' 이라고, 옛날 본점 옆에 있다는 것이다. 한 그릇에 오천원이고 말이다(ㅋㅋ).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전통 !!

아무튼 이런 것들이 전통이고 또 정통인데, 그런데 이런 전통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전통도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구약성경에 정통했는데, 방금 문자가 왔는데, 7월 휴대폰 요금이 24,000원이라고 말이다(ㅋㅋ).

예를 들어서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보면 '70인 장로'가 나오는데, 그러면 역사가 몇 년인가? 그때가 BC 1400년경이니, 예수님 당시를 원년으로 보고, 그러니 무려 1400년의 정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80년이 아니고 말이다.

(출 24:1)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출 24:2) 너 모세만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

(민 11:24)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고하고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민 11: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 하지만, 그 역사와 전통이 예수님을 !!

그것을 두고 '산헤드립' 이라고 하는데, 즉 70명의 종교인들, 그것도 귀족 종교인들의 집합체로 해서, 즉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내용적으로, 형식적으로, 제도적으로, 시스템적으로, 절대로 우리는 말씀을 포기할 수 없다" 라고 해서, 성경에 있는 그대로 그것을 지켜내었다는 것이다.
 
어느 누가 그것에 대해서 시비를 걸겠는가? 그것을 신약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공회' 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바로 그 공회에 잡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들이 역사와 전통과 정통을 지키는 것은 결국은 누구를 잡아죽인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죽이기 위해서, 그래서 그들은 전통과 정통과 제도와 형식을 마치 신주단지를 모시듯이 철저하게 지키면서 자기들의 고귀한 역사와 전통을 키워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그러니 역사와 전통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란 말이다. 왜 그런가? 교회가 사기를 전통이라고 위장할 수 있기에 말이다.

◈ 어린양의 생명책 !!

하지만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실 때 어떻게 되겠는가? 사실은 구름을 타고 오기 이전에 십자가로 이미 끝이 났는데 말이다. 아무튼 마지막 구름을 타고 오시면 이러한 사기꾼들을 예수님의 생명책에서 모두 다 제하여 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것도 역시 어려운데, 하나님(예수님?)의 생명책이 아닌 어린양의 생명책이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양의 생명책인데, 왜 그런고 하니, 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어린양이 하셔서 새롭게 만들어진 피조물인데, 그러니 이 생명책에 있는 자들은 어린양께서 생명책의 명단을 보고, 즉 아버지와 의논한 택한 자의 명단을 보시고 자신을 어린양으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책에 기록되어있는 자들은 무엇만 바라보고 사는가?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보는데,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을 본다는 것이다. 이해가 안 됩니까?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을 본다고 하면 얼굴이나 키나 몸무게를 보는데, 그런데 그런 것은 아무리 쳐다보아도 예수님이 어린양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양은 십자가의 숨겨진 지혜이니 말이다.

◈ 어린양의 피가 아니면 !!

그런데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본다는 것은 무슨 어린양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인데, 피를 흘린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어린양을 볼 때마다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자기가 바로 이 세상 죄의 일부로서 합류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어린양의 피가 아니면 우리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라는 것을 항상 연결시키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아침 7시든, 밤 10시든, 새벽 3시든 간에 말이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4장 4절에 보면 "어린양이 인도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간다" 라고 되어있는데, 왜냐하면 어린양의 신부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 가는 곳마다, 거기서 그들이 하는 행동들마다, 그것은 누가 도대체 시켰다는 말인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이 어린양이 시킨 것이란 말이다.

(계 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계 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 선택의 기준은? - '함께' !!

그런 사람이 곧 선택된 자들인데, 그러면 "선택이 되었는가? 안 되었는가?" 라는 그 기준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선택이 되었다고 큰 소리를 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즉 목소리가 큰놈이 선택된 것이 아니라, 교인들을 천 명이나 모은다고 선택된 것이 아니라, 물을 뒤집어쓴다든지 부흥회 때 손을 들고 앞에 나온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선택에 대해서 무엇으로 결정한다는 말인가? 과연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여기고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그렇게 늘 엮여져서 살아가는지, 그것이 곧 문제라는 것이다. 어떻게 말인가? '함께' 말이다. 즉 "함께 살아간다" 라는 것이다.

여기서 '함께' 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고 하니,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 어떻게 하셨는가?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구약을 보면서 무엇을 빼먹고 보는가? "주님께서 함께 하셨다" 라는 것을 빼버리고 보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나오는가?

그것은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신머리가 왜 저렇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혜를 주시고,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너게 하시고, 또 여리고 성을 와장창 무너지게 하시고, 그리고 광야에서 만나를 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주셨는데, 그런데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단 말인가?" 라고, 우리는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빼버리고 구약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야말로 답답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함께 하셨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서 그들의 죄악을 노출시켰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왜 아말렉은 이스라엘을 공격했는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군을 하면서 광야생활에 몹시 지쳐있는데, 그런데 그러한 피곤에 빠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아말렉 족속이 나타나서 처음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출애굽기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지만, 사무엘상(신명기?)과 같은 곳에서는 그들의 공격은 비겁한 것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피곤한 틈을 타서 약자들을 공격했다고 말이다.
 
(신 25:17)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신 25:18)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신 25: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

그렇다면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치도록 한 것은 누구인가?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함께 하신 하나님' 이라는 말이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노골적으로 최초로 덤벼든 민족이란 말이다. 즉 아말렉이 그렇게 공격했을 때, 그냥 "하나님이 치셨다" 라고 하지 말고, "함께 하신 하나님이 치셨다" 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출 17:7)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출 17:8)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출 17: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그러면 여기서, '함께' 라는 말을 빼버리는 것과, '함께' 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집어넣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함께' 라는 것을 넣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들만의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주님이 당하시는 고난이 된다는 말이다.

◈ 인간배후에 숨겨져 있는 악마를 !!

그렇게 주님이 당하는 고난이 되어버리면, 그 다음에 어떤 논리가 전개되는고 하니, 그렇게 공격을 한 아말렉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아말렉이 겁도 없이 감히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그만 공격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말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인간 대 인간' 이란 차원에서 복수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배후에 숨겨져 있는 악마를, 즉 하나님의 원수를 치는 차원에서 복수를 감행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원수를 치는 차원에서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주어진 것만을 자꾸 챙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수하심에 나섰을 때의 그 방법들을 조사하게 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속성이, 즉 하나님의 의도와 의향이 거기에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 적은 '인간 대 인간'의 차원에서 복수가 이루어지면 안 되고, 즉 인간의 복수심은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치게 하셔야, 그래서 적을 붙여주신 것도 하나님, 또한 당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당한 우리를 보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너거들은 가만히 있어. 내가 복수해줄 게" 라고 나서시는 하나님, 이러한 하나님 속에서, 즉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있고, 또한 하나님의 원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3부류가 아닌 4부류인데 말이다.

◈ 고만고만한 것들 !!

지금 우리가 구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거기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는데 말이다. 여기에 이렇게 두 부류의 인간이 있는데, 즉 선택을 받은 하얀 인간과 받지 못한 까만 인간이 말이다. 여기 선택을 받지 못한 인간 배후에는 무엇인고 하니, 진짜 시커먼 하나님의 원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커먼 하나님의 원수가 1번이고, 까만 인간이 2번이고, 하얀 인간이 3번이고, 그리고 그 배후에 숨어있는 하나님이 4번인데,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숨어있는 하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5번이라고 보면 되고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칠 때, 그들이 칼로 공격을 했다면 이스라엘도 역시 칼로 공격하면 되는데, 왜냐하면 모두가 같은 인간이니 말이다. 인간의 사고방식이 다 거기서 거기인데, 특별히 어디 다른 것이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 주여, 북한을 불쌍히 여기소서 ??

예를 들어서, 우리가 "북한을 멸망시키자" 라고 했을 때, 그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북한이 미사일을 가지고 있고, 무선신호를 마구 교란시키고, 컴퓨터로 중요 사이트를 해킹하고, 또한 핵폭탄을 터트린다고 위협하는 것이 그들의 무기라면 무기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우리의 대처는 무엇이겠는가? 1번 '기도', 2번 '불쌍히 여김', 그렇게 나온다면 되겠느냐는 말이다. 그게 아닌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평소에 하던 대로 하면 되는데, 즉 얼른 국방부 장관이 미국에 부탁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주고 무기를 사면 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인간들이 사용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적들도 인간이고, 거기에 얻어맞는 우리도 역시 인간이라면, 인간의 생각이 모두 고만고만한 것이지, 거기에서 무슨 새로운 것이 나올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무슨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는가?" 라는 말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참으로 재미있는 게 무엇인고 하니, 구약에서 보면 한나가 사무엘을 낳아서 하나님께 바쳤는데, 그런데 그것과 어떤 아주머니가 아들을 낳아서 신학교에 바친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모두가 고만고만한 아이디어라는 말이다. 우리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마리아가 임신을 했고, 그래서 그 아이를 하나님께 바쳤다는 것이다. 세례요한의 경우에도 그러한데, 그의 엄마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데, 물론 그녀는 나이도 많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천사의 지시대로 나중에 서판에 글을 쓰고 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혹시 여러분은 주위에서 그런 아주머니를 보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식으로 해서 아이를 낳는 경우를 말이다. 그렇게 해서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데, 즉 성령으로 잉태하는 아주머니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들이 하나님께 바치고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은 모두가 고만고만한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을 가지고 구원받을 수는 없는데, 그런 것으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그것이 선택을 받은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선택을 받았다고 하면서 매일 같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 자기가 받은 기적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하지만 그러한 것이 선택받은 증거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진짜 선택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나오는고 하니, 자기가 무엇을 해도, 즉 아무리 헌금을 하고 기도를 하고, 그렇게 해도 그것이 결코 선택의 요건이 될 수 없음을 고백한다는 말이다. 헌금을 하고 전도를 하고, 기도를 하고,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는 착하게 살겠습니다" 라고 해도, 그것이 선택되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개척교회를 하면서 생고생을 해도 말이다. 

그런 것들은 다 고만고만한 것들인데, 종교단체에서 다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절에서도 하고 말이다. 그러니 "마음을 낮추고, 그리고 자기 몸만 챙기지 말고, 그 몸을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칩시다" 라는 것들은 다른 종교에서도 다 하는 이야기하는 말이다.

◈ 힐링캠프를 아십니까?

요즘은 치유가 인기인데, 물론 치료는 의사가 하고 말이다. 이 치유에 대해서 불교에서 책들이 마구 발간이 되는데, 혜인인지 헤밍웨인지 몰라도 말이다(ㅋㅋ). 남의 돈을 빼먹으려고 하면 그래도 약간의 도움은 주어야지, 그냥 내놓으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기를 쳐도 도움을 조금이라도 상대방에게 주어야지, 돈을 강탈해도 양심에 가책도 덜 되고 말이다.

교회에서 하는 것도 다 그런 것인데, "가정에 화평을 줄 테니, 돈을 내라"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들은 다 고만고만한 것인데, 그것이 전혀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시편 8편에서 뭐라고 하는가?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것이다. 그런 젖먹이가 바로 선택을 받았다는 말이다.

(시 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시 8: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 왜 다윗 앞에 골리앗이?

어디에선가 다음과 같은 강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즉 "다윗 앞에 골리앗을 배치시켜 놓았는데, 무슨 의미인가?" 라고 말이다. 3미터가 넘는 그 인간을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윗은 이미 철수를 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즉 다윗의 자기 행함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이스라엘은 언약의 택한 백성이니, 할례를 받지 못한, 언약이 없는 저쪽이 저주를 받도록,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게 함께 하신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되겠지만, 하지만 이스라엘은 결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누구의 나라인가? 함께 하신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국민들의 나라가 아닌데, 즉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나라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아닌 아브라함 링컨이 그런 헛소리를 했고(ㅋㅋ), 누가 뭐라고 해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것이란 말이다.

◈ 이스라엘아, 지금 니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아는가?

그러니 이러한 모든 배치가, 즉 다윗 앞에 골리앗이 등장한 것도 누구를 보여주기 위함이란 말인가? "이스라엘, 너는 왜 제대로 하지 못해?" 라고 하면서, 이스라엘에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아, 지금 니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아는가?" 라고, 그렇게 누군가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도드라지게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생활은 무엇인가? "내가 잘났다" 라는 게 신앙생활이 아닌데, "나를 선택하시고, 내가 오늘밤에 죽어도 낙원으로 보내시는 분이 나와 함께 있습니다" 라는 것을 도드라지게 증거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시는가?

그야말로 절망적이고 난감한 상황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일어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다윗 앞에 골리앗이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요즘 우리교회 컴퓨터도 동영상 강의를 제대로 올리지를 못하는 난감한 상황의 연속인데 말이다(ㅋㅋ).

◈ 소년 다윗은, 다윗이 아닌 하나님 !!

그건 그렇고, 이렇게 소년 다윗이 등장했을 때, 우리는 그 소년 다윗을 다윗으로 보면 안 되고 장차 오실 예수님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으로 말이다. 그런데 사울은 골리앗을 이기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소년 다윗을 그야말로 경상도 말로 새피하게 보았는데, 즉 시시하게 보았다는 것이다. 꼬맹이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비단 이 사울뿐만이 아니라, 다윗의 형들도 역시 문제인데, 그들이 다윗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좋게 여겼는가? "얘들은 가라. 이런 어른들이 전쟁을 하는 위험한 곳에, 니가 여기가 어디라고 왔노?" 라고 하면서, 형들이 얼마나 다윗을 구박했느냐는 말이다.

◈ 신데렐라는 어려서 ♬

그러니 신데렐라 동화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놀림을 받았더래요. 샤바 샤바 아이샤바, 얼마나 울었을까? 샤바 샤바 아이샤바, 왕자님은 언제 만날까?" 라고 말이다. 사실은 그것이 놀림이 아니라 구박인데 말이다. 그렇게 구박을 받다가 12시에 신발 한 짝을 잘못해서 벗어놓는 바람에 그만 졸지에 왕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 정도가 아니라, 소년 다윗이 왔을 때, 그 소년 다윗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소년 다윗의 모습으로 화신(化身?)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제가 베드로를 공격한 것도 무엇인고 하니, 귀신들이 베드로를 꼬드겨서 "니, 저 사람을 알지?" 라고 해서, 그래서 공격했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변신이란 말이 아니라,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무가치하게 만들고, 또한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들고, 오직 증거할 것은 예수님의 피밖에 없음을, 그것을 알게 하는데 동원된 사람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주께서 파견시킨 자들이라는 말이다.

◈ 매일같이 '안 된다' 라는 상황이 !!

이것이 바로 언약이 적용되는 그 모든 현장에서 공통적으로 예외 없이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희한한데, 성도는 바로 그런 것을 느끼는 맛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안 된다' 라는 상황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물론 여기에서 '안 된다' 라는 것은 자기 일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주님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라는 마음가짐이 일어나지 않는 이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 그런데 그것이 일어나게 만드는, 즉 마음을 낮추는 일들이 일어났을 때, 바로 그것이야말로 기적이라는 것이다.  

성도는 그런 기적 속에 있고, 그것은 곧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라는, 즉 옛날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함께 있다" 라고 해서, 자기 자신을 도와주는 식으로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쓸모 없는 쪽으로 몰아세우는 기능을 하면서 함께 하신다는 말이다. 그런 기능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소년 다윗이 등장하면서 숨어있는, 즉 골리앗의 배후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은 함께 하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그 원수는 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 다윗이 할 수 있는 것은 창도 아니고 활도 아닌데, 그러면 무엇인가?

인간이 구원을 받는 방식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도 한, 그런 인간의 그 어떠한 아이디어에서도 전혀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구약에서 언약이 함께 있어서 일률적으로 진행되어지는 말씀의 전개라는 것이다.

◈ 교회사의 경우에 !!

그러면 이것을 교회사에 적용시키면 어떻게 되겠는가? 교회사에서 삼위일체나 사도신경과 같은 교리들을 줄줄이 만들어내었는데, 그리고 개혁주의도 나중에, 즉 루터와 칼빈 이후에 교회의 전통을 정통으로 행사하면서 그런 것들을 만들었고 말이다.

그렇다면 교회사가 왜 이러한가? 이 교회사에 나오는 모든 내용들은 기껏해야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것들이란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런 것들을 전통이나 정통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진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만 원하는데, 그래서 자기에게 도움을 주면 그 신을 믿어줄 용의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타고 난 죄악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타고 난 죄악이란 말이다.

교회사에 사기를 당한 것을 우리가 굳이 납득하려고 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왠지 속고 싶어하는, 즉 "나를 속이더라도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그런 평소의 마음가짐이 오늘날 교회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 교회만 부흥 발전되고 있고 말이다. 그러니 제발 자기를 좀 속여달라는 것인데, 그런데 속이지 않고 진실을 말하면 어떻게 나오겠는가? "당신을 미워할 거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이스마엘과 그 모친 - '이것이 인생이다' !!

야곱과 에서로부터 본격적으로 출발하는 선택은, 물론 하나님의 선택은 아브라함에게 있지만 말이다. 선택이 된 것과 선택이 되지 않은 것은, 물론 이삭도 있는데 말이다. 왜냐하면, 이삭은 선택이 되었고 이스마엘은 혈통적으로 분명히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지만 버림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어떤 기준으로 버림을 받는지, 그리고 누가 버림을 받는지, 그것은 함께 있는 그분께서 결정할 문제이지, 아브라함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냥 육으로만 행사하는데, 즉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데, 사랑하지 않는 씨받이가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그 여자를 좋아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남자가 제 아무리 여자를 밝혀도 아무나 집적거리지는 않는데, 역시 조강지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자기 후손과 함께 한 사람을 버리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디 아브라함이 조강지처를 버리겠는가? 씨받이가 아들을 낳았다고 해서 말이다. 조강지처가 씨받이를 구박할 때 아브라함은 그냥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래서 하갈과 이스마엘은 쫓겨나서 '이것이 인생이다' 라는 TV 프로에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보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사람들이 모두 다 나오는데 말이다(ㅋㅋ). 

아니 누가 아이를 낳고 싶어서 낳았는가? 주인이 아이를 낳으라고 해서 낳았는데, 그런데 아이를 낳으니까 그 아이와 더불어서 구박하고 그만 쫓아내어 버리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함께 있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아이가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데 난데없이 아이가 생겼다는 것이다. 아니 90살이 넘은 노파가 아이를 낳을 줄 어떻게 알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럴 것 같으면 여종을 건드리지 말지, 왜 건드려놓고는 본처가 아이를 낳았다고 여종을 무시하느냐는 말이다. 무슨 그런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인 일이 다 있느냐는 것이다.

◈ 선택은, 전혀 인간 쪽에서 근거를 만들 수 없어 !!

그러니 이 '선택' 이라는 것은, 그 선택을 우리 인간 쪽에서 만들어내고 감 잡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전혀 그런 것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사람이 선택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선택의 근거를 내 쪽에서 전혀 만들어낼 수 없고, 나는 그런 자격도 전혀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그런 사람이 말이다.  

선택의 근거는 따로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즉 창세 전에 이미 성부와 성자의 약속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어떻게 재롱을 부린다고 해서 선택이 되는데 보탬이 된다든지 하는 것을 아예 죄라고 간주해버린다면, 그런 사람이 바로 선택된 자이고 또한 구원받은 자라는 것이다.

선택이 되었기 때문에, 이 선택은 우리가 아까 화물차 이야기를 했는데, 그 화물차에 올라타서 우리가 고스톱을 치든지 아니면, 밥을 먹든, 아니면 술잔을 기울이든지 간에, 그 화물차의 방향은 어디로 향하고 있다는 말인가? 누가 뭐라고 해도 어린양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 기관차가 내뿜는 연기로 인해서 - '삑, 삑' !!

그러니 기관차가 어린양이 아니고, 기관차가 움직일 때 '삑' 하면서 내뿜는 연기가 뒤에 있는 객차로 오는데, 그러면 그 연기가 무슨 연기인가? "어린양이 니 때문에 죽었다" 라고 하는 연기인데, 그것이 퍼지게 되면 고스톱을 치다가도, 또한 밥을 먹다가도 그만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인데 말이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앞에서 불어오는 어린양의 그 연기가 2012년도 객차에 있는 우리에게 불어오면, 그것을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향기' 라고 했는데,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게 '악취' 라는 것이다. 즉 어떤 사람에게는 향기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악취라는 말이다.

(고후 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후 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 라일락 꽃 피면 봄이면 ♬

봄에 88고속도로를 타고 놀러가다가 창문을 열어보면, 4월에는 라일락, 5월에는 아카시아인데 말이다. 그런 향기가 들어오면 차안에 있는 방향제 냄새는 그만 역겹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우리가 마음의 창문을 열어놓고, 우리가 지금 어린양의 보좌를 쳐다보면서 88고속도로를 타고 가는데 말이다(ㅋㅋ).

그렇게 가면서 우리는 무슨 냄새를 맡는가? 어린양의 향수를 늘 만끽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도가 일상을 살아가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그런데 그러한 향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향기에 너무나 취해서(?), 갑자기 지금 자기가 신경을 쓰면서 하는 일에 그만 너무 몰두하게 되면, 그만 그 향기도 맡아지지 않고 걱정근심만 몰려오게 된다는 것이다.

◈ '나'를 보다가, '주님'을 보다가 !!

자기가 꼭 이번 일을 이루어야 값어치가 있는 인간이 되는데, 그러니 "주여, 그렇게 하려면 제가 착해야하지요? 얼마든지 착해질 용의가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 다음부터는 자기 의를 쌓게 되고, 그 쌓인 자기 의를 복으로 바꾸어서 쿠폰으로 만들고, 그 쿠폰을 가지고 하늘나라 매장에 가서는 "제가 이렇게 착한 일을 했으니 여기에 해당되는 복 주세요" 라고 해서, 그렇게 자기 소원을 빨리 달성하기 위해서 힘을 키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되게 하는 것이 바로 함께 계신 주께서 일부러 하시는 것인데, 왜냐하면 주님의 향기를 또 다시 만끽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롤러코스트를 타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즉 "나를 보다가, 주님을 보다가, 또한 주님을 보다가, 나를 보다가" 라는 식으로 말이다.

◈ 추억의 '풍선뽑기'를 아십니까?

아마 여러분도 알지 싶은데, 옛날에 학교 앞의 문방구에 보면, 소위 '풍선뽑기' 라는 것이 있었는데, 돈을 내고 자기가 밑에 있는 번호를 하나 뽑으면 위에 있는 풍선들 중에서 하나가 걸린다는 것이다. 풍선들이 아주 큰 것도 있고 적은 것도 있는데, 물론 '꽝'도 있지만 말이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이것이 바로 '착한 일 목록' 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무슨 일이 꼬인다 싶으면, 밑에서 하나를 뽑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안식일 지키기' 라는 것을 뽑으면, 거기에 해당되는 경품이 위에 있는데, 풍선이 하나 걸리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런 식으로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하는 일이 다 잘되면 어떻게 하는가? 이런 것을 너무나 시시하기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굳이 그런 것을 하지 않아도 잘 먹고 살아가니 말이다. 그런데 먹고살기가 힘든다 싶으면 다시 이런 뽑기를 하는데, 제일로 좋고 큰 풍선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마귀가 만든 게임인데, 그러니 이것은 "니가 죽으면 모두 다 소용이 없어. 하나님이고 뭐고 다 필요가 없어"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런 사기를 어떤 면에서는 우리 몸이 원하는데, 즉 아담의 몸인 우리 몸이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 선택을, 다시 정리해보면 !!

다시 정리를 해보면, 이스라엘은 분명히 선택을 받은 자들인데, 왜냐하면 "택하신 백성이고 족속이요" 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선택을 받은 그들은 정작 하나님의 선택의 의미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들 좋아라고, 즉 자기들을 위해서 선택한 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에서 누렸던 부귀영화를 잊지 못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들은 지옥에 가는 길에 널려있다는 것이다. 천국으로 가는 길에는 그런 향기가 아니라, 라일락이나 아카시아 향기가 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애굽에서의, 그런 우리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세상적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들인데, 그것이 곧 마귀들이 우리 인간을 가지고 노는 것들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 어려울 때는 빌고, 괜찮다 싶으면 잊어버리고, 또 필요하다 싶으면 찾고 말이다. 하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는 좋은 것들은 누가 가지고 있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인데, 즉 모압, 암몬, 블레셋 등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주변 국가들이 그야말로 이스라엘을 포위하듯이 둘러싸고 있는데, 그들이 그런 찬란한 문화를 일구고 있다는 것이다. 소위 유행을 선도한다고 할 수 있는데, 만약에 이쪽에서 시쓸루(?) 패션으로 옷을 입으면, 이스라엘 쪽에서도 따라 입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속옷이 비치는 패션인데, 예를 들면 그렇다는 말이다(ㅋㅋ). 

◈ 이스라엘 - '나도 씨스타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 !!

무슨 말인고 하니, 그 당시 주변국가들은 철기문화인데, 그런 철기문화를 가진 자들끼리 소통을 이루어서 선진문화를 이루고, 아직까지 이스라엘은 구닥다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이스라엘의 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교회에는 관심이 없고, 동시대의 젊은이들이 원하는, 즉 'K-POP'과 같은 것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중동국가에 가보면, 머리에 희잡을 둘러쓰고도 K-POP을 따라서 하는데, 즉 씨스타의 노래를 따라서 부른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웃기는 장면이기도 한데, 이란과 터키, 그리고 아프리카 등도 여기에 다 빠져있다는 것이다.

◈ 함께 하신 주님은, '노출'을 시키면서 !!

그러니 이게 무엇인고 하니, 사람의 본성은 죽을 때까지 제 아무리 억누르고 해도 감출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노출시키는 식으로 어린양을 증거하는 것이 우리와 함께 하신 주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편한데(?), 노출시키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즉 "사실은 내가 이런 것을 하고 싶었는데, 나는 예쁜 것을 좋아해" 라고 하면, 주님은 우리가 그런 예쁜 것을 좋아하는 것을 격려하신다는 것이다. "해봐, 해봐, 그래 해봐" 라고 말이다. 그래서 열심히 해보다가 사기를 당하고, 또 해보다가 망하고, 그래서 삐치곤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온갖 것들을 모두 다 겪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어떤 것보다도 어린양의 향기가, 즉 어린양의 피가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데, 그런 자가 곧 선택을 받은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버림을 받지 않은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선택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게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 '창세 전 선택'에 대해서 !!

그 다음에 하나 더 살펴볼 것은, 교재 230페이지 이하에 나오는데, 즉 '창세 전' 선택에 대해서 알아보자는 것이다. 즉 "창세 전에 선택했다" 라는 것인데, 교재 231페이지를 보자.

**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능력이다. 선택하시는 능력이다. 인간은 창세 전의 일을 알지 못한다. 이는 인간이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하기를, "목사님, 창세 전이면 어떤 시간입니까?" 라고 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창세 전에 시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데, 만약에 시간을 우리 인간이 만들 수 있는 물체라고 하면, 그냥 부수어 버리면 없는 것이 되는데 말이다. 하지만 시간은 물체도 아니고 사물도 아니라는 것이다.

◈ 시간, 코끼리, 사랑 !!

다음과 같은 것을 한번 비교해보면, 즉 "시간이 없다" 라는 것과 "코끼리가 없다" 라는 것과, 그리고 "사랑이 없다" 라는 것과의 차이점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코끼리가 없다" 라는 것은, 먼저 코끼리가 있어줘야 없다는 말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를 들어서, "도깨비가 없다" 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도깨비는 있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혹시나 뿔이 달린 도깨비를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ㅋㅋ). 무슨 말인고 하니, 도깨비는 이 세상에 있어본 적도 없는데, 그러니 "도깨비가 없다" 라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실체' 라고 하는데, 원래 내용이 없으니 있고 없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도깨비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코끼리가 없다" 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코끼리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우리 동물원에는 코끼리가 죽고 없다" 라고 말을 한다는 것이다.

◈ 사랑은 있는가? 없는가?

그런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러면 "사랑이 있다", 혹은 "사랑은 없다" 라는 것은 어떻게 되는가? 사랑이 물체인가? 사랑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덩치도 없는데, 그런데 자기에게 사랑이란 감정이 있었던 적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사랑이 변했는데, 그 사랑이 변하면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되는가? 그만 미움으로 변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은 그 자체는 없는데 무엇은 있는가? 대상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사랑이 있다", 혹은 "사랑이 없다" 라고 하는 게 아니라, "누구를 사랑하는데?" 라고 하면, "나는 은정이를 사랑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대상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 사랑이 없어지면, 이제는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흔히 자식을 보고 뭐라고 하는가? 말을 듣지 않으면, "정말이지 밉다, 미워. 무자식이 쌍팔자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88세 된 할아버지를 확보하라 !!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88세를 먹은 할아버지가 차에 부딪친 것 같은데(?), 아주머니는 보닛 위에 엎드려서 앞에 있는 차를 가로막고 있고, 또 남편은 차 앞 타이어에 옆에서, 그렇게 도로에 털썩 앉아있다는 것이다. 경찰관이 와도 말이다. 또 동생은 "형수요, 왜 이러십니까?" 라고 하고, 그야말로 가관이라는 말이다.

아마도 그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렸다고 하면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을 텐데, 서로 돈을 내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미루고 말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그와 반대가 되어서 너무나 귀하신 몸이니 서로 모셔가려고 싸운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사람이 코끼리보다도 더 못한데, 그래도 코끼리는 바나나라도 던져주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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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내용(주일낮설교)(7,15) - 어제인가, 언젠가 뉴스를 보니 경기도 성남경찰서에서 참으로 해괴망측한 일이 벌어졌어요. 큰아들 집에 멀쩡하게 잘 있는 88세가 된 자기 할아버지를 그만 둘째 아들이 납치를 해서 자기 집에다가 모시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 정보를 입수한 큰아들이 납치신고를 해서 경찰서에 가서는 할아버지 빼내고, 그리고 둘째 아들도 그 낌새를 알고 경찰서로 차를 타고 가는데, 그런데 큰며느리는 자동차 본 네트에 드러눕고, 큰아들은 자동차 앞 아스팔트에 눕고 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 할아버지가 현재 시가로 약 60억 상당의 상가건물을 가졌는데 월수입이 천만원씩 나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미국에서 살다가 큰아들이 상가를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돈을 빼낸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안 되겠다 싶어서 자기가 한국에 나와서 할아버지를 그만 자기 아파트로 데리고 온 거예요. 그래서 큰아들이 성남경찰서에다가 납치신고를 한 겁니다. 그러니 모가지는 그대로 두고 행동은 그대로 다 나왔어요. 몸입니다. 이 몸이에요. 강감찬은 우리가 관심이 없지요? 역시 예수님도 관심이 없습니다. 옛날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데, 관심이 없어요. 예수도 옛날 사람이고 관심이 없습니다. 이 내 몸이 원하는 기적은 나한테 도움이 되고 이익이 될 경우에만 믿습니다. (녹취자 - 사건내용이 너무 왜곡이 되어서 실었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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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을 느끼는 '나' 자신이 있을 뿐 !!

그렇다고 하면 다시, "시간이 없다" 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사실 처음부터 "시간이 있다" 라고 여긴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있다" 라고 하면 이야기하면 안 되고, "시간을 느끼는 내가 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시간은 연속적인 변화를 이어주는 의식인데, 그러니 만약에 변하지 않는다고 하면 시간을 느끼겠는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거 강남의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그때 무려 16일 동안이나 갇혀있었던 청년이 뭐라고 했는가? 그 분야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웠는데, 자기는 불과 10시간을 갇혀있었다고 느꼈다고 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콘크리트에 깔려서 그것만 보고 가만히 누워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지각은 주변 환경에 변화를 하게 되어있는데, 뇌신경이 말이다. 그러니 '나' 라는 것은 없는데, 세포 덩어리이기 때문에 말이다. 이 세포 덩어리를 그냥 '나' 라고 이름을 붙이니 '나'가 있는 것이지 말이다. 그러니 몸체, 즉 세포 덩어리만이 있다는 것이다. 그 세포 덩어리가 지금 자기가 살려고 하다가 보니 엄청 바쁜데, 그래서 항상 주변의 것과 교류하면서 버티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적응을 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삼풍백화점에서 무너진 채로 깔려 있는 그 청년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는 것이다. 햇빛도 전혀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가운데 말이다. 그러니 자기는 10시간 정도로 생각하면서 지루하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나중에 나와서 보니 무려 16일이나 지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평소에 얼마나 착각 가운데 살아가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왜 지루하고, 또 빠른가?

그것을 반대로 해보면, 변화가 자꾸 일어나게 되면 시간이 5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무려 3시간이나 지난 것과도 같이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변화를 너무 많이 겪게 되면 말이다. 어떤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즉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변화를 동시에 경험한다든지 하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선을 보게 되면 그 시간이 참으로 답답한데, 마치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하는 5분의 광고시간이 지루하듯이 말이다. 불과 5분인데 말이다. 그런데 수학시험을 치르다가 보면 언제 50분이 다 지나갔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 시간은, 인간의 몸에 대한 한계 !!

그러므로 "시간이 있다, 없다" 라는 것 자체를, 그것을 우리 인간의 몸에 대한 한계로 보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이 시간을 느끼니 말이다. 그렇다면 '창세 전' 이라는 말이, 사실은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면 이게 누구에게 어려운 말인가? 이미 기존의 시간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는 이 '창세 전' 이라는 말이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이다. 자기 몸이 있으니 말이다.

◈ 하필이면 왜 '창세 전' 인가?

그러니 성경에서 이렇게 '창세 전' 이라는 말을 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인간 세계에 이러한 시간관을 가지고 잠입해서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해서 들어오실 때부터 예수님의 말과 인간의 말은 서로 섞일 수 없고, 소통이 되지 않으며, 또한 납득이 되지 않는 식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또한 무엇도 납득이 되지 않겠는가? 예수님의 죽음도 납득이 되지 않고, 또한 예수님의 권능도 납득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때 빌라도가 "니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죽는다"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나의 명령만 떨어지면 하늘의 천군 천사가 내려와서 나를 구출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자 빌라도 뭐라고 했는가? "진리가 무엇이냐? 가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내가 안 가르쳐 줘" 라는 말도 하지 않고 말이다.

(요 18: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요 1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요 18: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 18: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요 18: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 교회는 학원이 아니기에 !!

그러니 우리가 신학을 알고 문장을 외우고 명제와 같은 것을 외운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은 시간 속에서나 써먹을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서 주님께서 "야, 너는 참 머리가 좋구나" 라고 하면서 좋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님의 능력이 임해서 하는 것이지, 우리가 어떤 자격을 갖추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학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술자격증을 주는 그런 학원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주님이 모이게 해주어야만 교회인데, 그래서 나갈 사람은 나가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이스라엘이 아닌데,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나갈 사람들이 섞여있다고 하면, 그들을 내보내기 위해서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나 애를 많이 쓰셨는데, 즉 "안 될 놈은 안 돼. 나가!" 라는 말이다.

그러니 안 될 놈은 나가주어야 하는데, 자꾸만 약속의 땅에 들어오지 말고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들에게 창세 전의 계획을 미리 주어서,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입맛에 맞지 않으면 나가달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창세 전의 일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고 싫다고 하면 말이다. 

그러면 창세 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선택했다" 라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말이다. 그렇게 창세 전에 예수 안에서 선택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예수 안의 선택을 위한 필요한 조치들을 하기 위해서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잘되라고, 즉 우리를 위해서 찾아오신 것이 아니고 말이다. 도대체 '예수 안' 이란 것이 무엇이지, 그것을 통보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 '예수 안'과 '예수 밖' !!

이제 마지막으로 하겠는데,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니 조금만 더 해보면, 이렇게 '예수 안' 아니라고 하면, 그러면 그 바깥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예수 바깥'이 되는데, 그 기준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즉 십자가 안에 있으면 예수 안이고, 십자가 바깥에 있으면 예수 바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십자가라는 기준에 대해서, 예수 밖에 있는 인간들이 이 십자가를 알아먹는가? 전혀 알아먹지를 못하는데, 왜 그런가? 그러니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이 십자가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 되어서, 즉 십자가가 그만 걸림돌이 되어서 사람들이 알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렇다면 여기에 '죽음'을 집어넣게 되면, 예수 안에서의 죽음은 누구의 죽음밖에 없는고 하니, 우리 죽음은 죽음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의 죽음만이 죽음이라는 말이다. '출생'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예수 안에서의 출생은 오직 예수님의 출생만이 출생이고, 우리 출생은 출생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집어넣어도 역시나 마찬가지인데, 예수 안에서 누구만 사람이란 말인가? 누구만 아담이란 말인가? 오직 예수님만이 아담인데, 즉 예수님만이 마지막 아담이란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만이 사람이고, 우리는 사람도 아니라는 말이다. 

◈ 욥은 재를 뒤집어씀으로서 !!

그런데 예수 바깥에 가면 어떠한가? 자기 죽음이 죽음이고, 자기 출생이 출생이고, 그리고 사람인데, 즉 "나는 인간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생일이 있다고 하는 것, 즉 인간의 탄생을 욥기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그것을 무효화시킨다는 것이다. 욥은 재를 뒤집어씀으로서 우리 안에 재가 꽉 차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욥 30:19)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로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그리고 욥이 자기 출생에 대해서, 그 인간의 출생부터 '나' 라는 인식자체를 뒤집어놓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의 출생만이 출생이지, 우리의 출생은 출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예수 바깥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이고, 예수 안에서는 오직 예수님의 탄생만이 진짜 탄생이라는 것이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왜 따라왔는가? 자기 생일에 자기에게 축하선물을 주면 되는데, 그런데 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려고 했느냐는 것이다. 그 머나먼 길을 말이다. 자기에게 유황과 물약과 금을  뿌리고 바치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누구에게 바치기 위해서 가지고 왔는가? 자기들 생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 미모의 '시바' 여왕 !!

솔로몬을 찾아온 미모의 여왕이 있었는데, 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데, 아하 '스바 여왕' 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스바 여왕이 왜 선물을 가지고 왔는가? 자기 체면치레를 위해서 가지고 왔는가? 그게 아니라 솔로몬의 지혜소식을 듣고 왔다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시는데,  즉 "봐라. 저 세리와 창기가 듣고 왔잖아" 라고 말이다. 그러니 창기와 세리를 누구로 보는가? 구약시대에 솔로몬을 찾아왔던 스바 여왕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개념을 다시 퍼지도록 뿌리신다는 것이다.

(마 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 21: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마치 낚시를 하듯이 그렇게 던지시는데, 그래서 그것을 물면 낚시줄을 다시 감는데, 그렇게 되면 어린양의 보좌 앞으로 쫙쫙 끌려오면서, 기존의 자기가 알고 있던 개념들이 수정된다는 것이다. 즉 "아하, 내 중심의 탄생과 인간, 이런 것들은 아니구나. 이런 것이 곧 흙이구나" 라고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흙을 흙으로 다루시는데, 흙들이 왜 그리 불만들이 많은지 말이다. 흙들의 출생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6월 27일은 어느 흙의 생일이지?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생일을 축하하고, 집에서는 자기 자식들의 생일을 축하하는데, 하지만 성도에게 무슨 생일이 있는가? 저의 생일이 6월 27일이라고 누가 알겠느냐는 것이다(ㅋㅋ). 이렇게 힌트를 주면 플랜카드도 붙이고 해야하는데, 국기게양도 좀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낌새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욥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는데, 그것이 정답인데, 즉 "나의 가치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고,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다" 라고 하면, 그것이 항상 자기 안에서 '사건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주님을 안다고 하면, 그것이 매일같이 생일인데, 왜냐하면 그게 곧 십자가의 사건이니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뭐라고 했는가? 자기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고, 이제는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는데, 그러니 사도바울은 매일 매일이 생일이라는 것이다. 즉 매일 매일 죽고, 매일 매일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다. 날마다 그렇다는 말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반복되지 않는 사건의 반복 !!

이것이 사도들에게서는 사건으로서, 즉 복음은 반복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제가 "반복되지 않는 사건의 반복이다" 라고 했는데 말이다. 가락강의에서인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즉 반복될 필요가 없는 것이 반복이라고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니 반복되지 않는데, 그런데 그것이 매일같이 우리 속에서 반복이 될 때, 그것이 곧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했던 그 지상에서의 여행, 쉽게 그것을 우리의 인생이라고 보면 되는데 말이다. 그러한 우리의 인생 여행을 주님께서 그런 방식으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그게 선택받은 자들의 모습이고 말이다.

◈ '창세 전'의 잠입으로 !!

그러니 '창세 전' 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조금 더 쉽게 해보면, 이 '창세 전'이 시간이란 의식이 있는 인간의 역사 속에 잠입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기존의 그 모든 시간이 철저하게 인간들의 자기 자신 위주였음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리고 그러한 것이 곧 죄였음을 폭로시키는 방식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 전'의 내용이 사건으로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그 역사를 군데군데 자르고 또 잘라서 마디와 마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죄를 폭로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을 한 마디로 '언약의 진행'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런 언약이 진행되면 우리에게도 역시 그와 동일한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들이 말이다. (더 어려워졌음, ㅋㅋ)

이제 교재 233페이지를 보자.

** 부엌 싱크대 안에 들어있는 음식 찌꺼기를 담아서 비커에 넣고 물을 붓고 흔들어보면, 지난 식사시간에 어떤 음식을 조리해서 먹었는지 다 드러난다. 이처럼 인간이란 천국활동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야말로 찌꺼기요, 분진이다. 성령께서 흔들어대는 대로 흔들면, 누가 천국에 갈 자인지, 지옥에 갈 자인지 다 드러난다.

(고전 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 '싱크대' 이야기 !!

여기에 부엌 싱크대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싱크대에 담긴 음식 찌꺼기를 보면 그 집이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라면을 먹었는지, 아니면 돈까스를 먹었는지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싱크대의 찌꺼기를 담는 그릇으로 보시는데, 그래서 우리를 흔들어보면, 우리가 3살 때, 혹은 30살 때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무슨 용도로 필요한고 하니, 어린양이 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데, 거기에 합류시킬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싱크대에 담긴 사람들이 무엇을 쳐다보겠는가?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울고불고하지는 않는데, 그러면 무엇인가? 그렇게 죄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담아주신 주님께 감사한다는 것이다.

◈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다윗의 일상 !!

그것을 일명 '눈물 병' 이라고 하는데, 시편 56편인가 보면 나온다는 말이다. 이 시편 56편은 다윗의 시편인데, 다윗은 그야말로 울면서 울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사울에게 쫓겨서 말이다. 그러니 우는 게 그의 일상인데, 그렇게 다윗은 매일같이 울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그 눈물을 어디에 담아달라고 하는가? 주님의 병에 담아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눈물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죄까지도 용서함을 받았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말이다.

(시 56: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시 56:9)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

바로 그렇게 주님의 하신 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우리 행동 하나 하나가 다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그런 것들을 다 잊고 싶은데, 하지만 우리의 모든 행동을 아담이 지었던 죄에서 뻗어 나온 하나의 갈래라고 간주하고, 사실은 간주하는 게 아니라 원래 그러한데 말이다. 바로 그러한 죄로 인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 오직 어린양의 행위만이 !!

그렇다고 하면, 첫 번째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았는데, 그 어린양이 천국까지 계속해서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을 이스라엘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러니 이스라엘은 자체적으로 단합대회를 해서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즉 그렇게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항상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고 그것을 병에 담아두는, 그런 어린양의 선전하는(?) 행동에 의해서, 즉 그렇게 어린양이 행위에 나섬으로서 비로소 이스라엘이 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자들이 곧 선택함을 받는 자들이고, 그게 오늘날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자들의 왕이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기독교 내에서 사람들은 천국마저 교회로 대체해서 굳혀보려고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교회를 천국으로 말미암아서 해체하신다. 해체작업이 곧 천국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교회는 종착점이 아니다. 천국이 종착점이다.

◈ 교회가 아닌, 천국이 종착점 !!

여기에 보면, 성령님께서는 교회를 해체한다고 하는데, 교회를 그냥 두면 해체가 되는 것이 아니니, 계속해서 나무라면서 해체를 하신다는 것이다. 즉 그 해체 방법이 몽둥이를 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증거를 통해서 해체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해체작업은 살아있는데, 교회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천국은 살아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보면 "교회는 종착점이 아니다. 천국이 종착점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제가 굳이 이런 말을 왜 했는고 하니, 흔히 사람들은 교회에 오면 이제 다 되었다고 여기는데, 그런데 교회가 아니라 천국까지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 온 것을 두고 천국에 온 것으로 함부로 여기면 안 된다는 말이다. 천국은 예정된 대로 가는데, 즉 천국은 모든 것이 예수님의 피로 되어있고, 그러니 예정된 자들만 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천국은 예정된 대로 간다. 인간은 창세 전의 뜻에 대해서 전혀 배제가 되어있고 소외가 되어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와야될 자는 기어이 오게 하시고, 오지 말아야 될 자는 기어이 오지 못하게 막으신다. 천국은 이처럼 예수님께서 홀로 손수 나서서 만드신다.

(요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

여기에 요한복음 10장 26절에서 28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만하고 이번 강의는 마치겠는데 말이다. 제가 적어보겠는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모르는데 말이다. 즉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라고 하고, 그 다음에 무엇인고 하니, "믿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초등학생들에게 이야기한다고 여기고 쉽게 해보면,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말이다. 그럴 때 들려오는 그 느낌이나 뉘앙스가 무엇인고 하니, "너희들이 아무리 믿고자 하여도, 그런 너희들을 받아줄지 그렇지 않을지는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지, 너희들의 수고나 애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제가 여기서 무슨 트릭을 쓴 것이 아닌데, 정말이지 이 말씀은 그런 느낌을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다. 즉 "너희들이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내가 너희들을 나의 양으로 간주해주지 않으면, 너희들의 그런 애씀과 노력이 전혀 소용이 없다" 라고 말이다. 물론 실제로 그런 뜻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그대로 교회에 한번 전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곧 천국에 의한 교회의 해체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렇게 교회에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면, 교인들이 얼마나 크게 반발하겠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자기 교회목사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소리가 몸에 마구 배여 있기에 말이다.

◈ 왜 화를 내고 따지는가?

그렇게 되면 교인들이 "목사 당신은 왜 선교헌금을 내라고 했으며, 또한 왜 목사를 섬기라고 했으며, 목사를 섬기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했으며, 그리고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면 몸이 아프고 암에 걸릴 수 있다는 소리를 왜 했는가?" 라고, 화를 내면서 따지고 든다는 것이다.

마치 자기가 투자를 했는데, 그곳이 사기꾼들의 사무실로 드러났을 때, 이미 문이 닫힌 사무실에 투자한 자들이 모여서 따지듯이 말이다. 그런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조금 전에 무엇이라고 했는가? 사기를 당한 것은 본인이 당하고 싶어서 당했다고 말이다. 그러니 누구를 탓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그런데, 이미 자기 손을 떠난 것을 감사한다면 !!

그런데 이제 와서 주님에게 와서, 주님께서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하셨을 때, 그것은 이미 누구의 손을 떠난 것인가? 양이고 아니고, 즉 구원을 받고 받지 않고 하는 문제가 말이다. 이미 우리 인간들의 손을 떠난 것이란 말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들이 평소에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행할 수 있는 것만 믿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그 믿음에 합당하도록 행할 수 있을 때, 노력해서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믿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손을 떠난 문제에 대해서, 그것도 반갑게 고맙게 감사히 여기면서 믿을 수만 있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는데, 그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믿게 하신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란 말이다. 다른 경우는 전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부목사님, 당회장실로 오세요 !!

그리고 방금 한 이런 이야기도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설교를 마치고 나서 당회장실에서 종용히 불러서 엄숙한 분위기에서 미팅이 있게 되는데, 즉 "부목사님, 그만 나가주세요" 라고 말이다. 그러면 그 부목사가 "목사님, 제가 언저 비진리를 전했습니까?" 라고 따지면, 당회장이 뭐라고 하겠는가?

"이런 목회 초보생아, 목회는 진리를 가지고 하는 게 아니야.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란 말이야. 내가 너에게만 알려주는데, 예수와 십자가와 복음과 같은 진리를 전하면 돈이 들어오지 않는데, 사람들도 모이지 않아. 당신도 마누라와 아이가 있는데, 먹고살아야지? 나도 옛날에는 너처럼 해봤는데, 안 돼. 당신 혼자서 할 때 당신 마음대로 해도, 지금 남의 영업소에 와서 그러면 안 되지" 라는 소리를 교인들이 듣지 않는 곳에서, 장로들이 없는 곳에서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교인들이 그런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그 부교역자 편을 드는 것은 아닌데, 아무리 교인이라고 해도 사람은 다 집안과 자기 식구를 챙기지, 교회를 챙기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목사가 자기 집안만 건드리지 않으면, 교회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는 한 마디로 '이익단체' 라고 할 수 있는데, 얻을 이익이 자기에게 있으면 나오고, 그런 것이 없다고 하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꼭 돈 문제만이 아니고, 자기의 명예나 위신이나 체면과 같은 것을 달래주지 않고 위로해주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 아무리 삼계탕으로 대접해도 !!

우리교회도 역시 그러한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는가? 그들이 왜 지금 나오지 않는가? 바로 그 이유는 왜 자기를 알아주지를 않느냐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도 할 말이 있는데, "나오는 나도 알아주지 않더라" 라고 말이다(ㅋㅋ). 또한 삼계탕으로 정성껏 대접해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근호 목사의 강의를 듣던지 해서 바른 소리를 하는 것, 그게 진짜 진리 때문에 하는 것인지, 그것이 아니면 자기가 바른 소리를 하게 되면 사람들이 "야, 새로운 것이 있다" 라고 해서, 자기 팬클럽이 하나 생길지 모른다는 욕심으로 하는지, 그렇게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교회를 하나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물론 그런 것을 주께서 먼저 아신다는 것이다.

삼계탕을 대접하면서 좀 맛있게 해주면 좋았을 텐데, 사람들을 불러다놓고는 삼계탕인지, 닭곰탕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우리교회의 전통이고 정통인데(ㅋㅋ), 대접하는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또한 대접을 받는 사람들은 그렇게 받을 때는 받지만, 그 이상은 국물도 없다는 것이다. (녹취자 - 혹시 사모님이 대접을? 그냥 찜닭으로 하시지. ㅋㅋ)

◈ 우리 죄를 들추어내시는 주님께 감사해야 !!

아무튼 사람들은 무엇을 하려고 되면 반드시 거기에 대해서 어떤 보상을 원하는데, 그런 것을 자기 몸이 노리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함께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죄라는 것을 본인이 깨닫게 되고, 또한 주님께서 발각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기대할 것을 기대해야지, 자기가 얼추(?) 사기꾼이 되고 싶어하는 본색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의 향기보다도, 사람들이 떠받들어주는 것을 은근히 기대했다는 것 자체가 사기성인데, 그런 것이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자기를 반기지 않음으로서 주께서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천국이 바로 이런 곳인데, 그러니 이미 천국이 사건이 벌어져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교회에 어떤 기대를 건다고 하면 무엇이 감추어지겠는가? 지금 자기 자신을 쏘아대고 있는 십자가 사건의, 그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놓치는 결과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이렇게 우리교회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냉랭함을 만끽하고 있는데,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마을도 그렇고 우리교회도 그렇고 참으로 냉랭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사랑하고 십자가만을 듣기를 원하고, 그것 말고 다른 소리를 하면 화를 내는, 그런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9,7 오후 8시에 마침.

                                                        제 생일은 1월 4일입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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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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