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77강 율법과 사랑

피/피 2012. 8. 29. 11:23

피77강 율법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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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77강 율법과 사랑 120827

[12 대구강의 16] - [피 77] - 율법과 사랑

                                                    12,08,2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236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율법을 통해서 모든 인류를 죽음과 저주의 심판 아래 두신 그 작업이, 이제는 십자가를 앞장세운 성령님의 활동에 의해서 전체적으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율법을 통해서 !!

여기에 '율법을 통해서' 라고 되어있는데, 성경해석이 의외로 간단한데, 율법을 먼저 깔아놓으면 된다는 것이다. 마치 컴퓨터를 시장할 때 윈도우를 먼저 깔아놓듯이 말이다. 그렇게 율법을 먼저 깔아놓고 사랑으로 낚아 올린다는 것이다. 쉽지 않습니까?

이렇게 율법을 먼저 깔아놓고 사랑으로 낚아 올려서 구원을 시키게 되면, 여기에는 무엇이 들어가지 않는고 하니, 인간의 몸부림, 즉 인간의 종교적인 열심과 같은 것은 여기에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종교는 아무런 소용이 없게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가인이 아무리 제사를 드리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것도 소용이 없는데, 물론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소용이 없고 말이다.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그러면 무엇인가? 가만히 있다가 그냥 지옥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깔아놓은 것이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 깔아놓은 바탕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 율법이라는 것이다. 마치 컴퓨터에서 윈도우와도 같은 소프트웨어인데, 하드웨어가 아니고 말이다.

바로 그 율법을 통해서 모든 인류를 죽음과 저주의 심판아래에 두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건짐을 받는 사람들은 특징이 있는데,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분명히 저주아래에 있었는데, 어떻게 생명을 얻게 되었지? 아하, 나는 사랑을 받았구나" 라고 하는 고백들이 쏟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구원받은 사람에게만 말이다.

그러니 "당신은 어느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까? 직분이 무엇입니까?" 라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 앞에서 전혀 무의미한 질문이라는 말이다. 목사든, 집사든, 평신도든 간에 말이다. 그런 것은 전혀 소용이 없는데, 신앙생활을 한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아니면 모태신앙인지, 그런 것도 전혀 그렇고 말이다.

◈ 새로 다시 시작해보면 !!

새로 오신 분이 있어서 다시 하겠는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만드신 지구라고, 아니 우주라고 보면, 이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는가?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율법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즉 율법으로 이렇게 먼저 깔아놓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 안에서는 율법이 마구 펄펄펄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을 소개하면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우리 인간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숨이 꼴까닥 넘어가는 것을 죽음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을 말이다.

◈ 라헬의 해산하는 고통 !!

그런데 오후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가? 베냐민을 낳았던 라헬의 입장에서 죽음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녀는 '해산의 고통' 이라는 것이 아이를 낳을 때 아픈 그 고통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율법으로 미리 깔아놓은 심판과 저주 아래에 있다고 하는, 그런 연결점의 고통이, 바로 그것이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계속해서 진행되면서 밝혀지는데, 물론 나중에 십자가에서 모두 다 밝혀지지만 말이다.

그러면 그 밝혀진 것이 무엇인가? 율법대로 죽었기 때문에 저주가 주어지는데, 십자가가 아픈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십자가가 아프다고 하면, 도대체 어느 정도라는 말인가? 아픈 것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치아를 뽑아서 아픈 사람, 대상포진에 아픈 사람, 아이를 낳아서 아픈 사람, 각자가 다 나름대로 아프다는 것이다. 고통이 다 그렇게 다르다는 말이다.

◈ (전화벨이 울리면서) 지금은 강의 중 !!

여러분도 고통스럽지요?(ㅋㅋ) 아무튼 라헬이 아기를 낳으면서, 그렇게 자기가 아기를 낳는 것이 아픈 게 아니고, 그 해산의 고통을 다른 개념으로 새롭게, 즉 '죽음' 이라는 말로, 그것이 곧 자기 죽음인데 말이다. 그렇게 '죽음' 이란 개념으로 새롭게 피어나도록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라헬이 서로 사랑하도록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라헬은 남자를 잘못 만났는데, 라헬은 야곱이 보통 남자인 줄 알았는데, 즉 사랑한 게 죄라는 것이다(ㅋㅋ). 라헬은 그 남자의 주님의 계시 때문에 태어난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가 마음이 끌려서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남자로 인해서 라헬은 계시의 자녀를 낳고 자기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시의 아들을 낳고는 말이다.

그것도 베노니에서 베냐민으로, 여기서 '베노니' 이란 이름은 슬픔의 아들인데, '베냐민' 이라는 이름은 슬픔과 기쁨이란 차원 자체를 뛰어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원래는 오른손의 아들이란 의미인데, 그 주님의 오른편에 주께서 나타나시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 35:16)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신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창 35: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창 35: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  'ZZZZZZ' !!

주님의 오른편에 주께서 나타나시는데, 그 숨어있던 오른편에 나타나는 도약대, 이것을 지난 수련회 시간에 했는데 말이다. 구약의 신은 단 하나의 유일한, 즉 '유일자(唯一者)' 라는 것이다. 안양에 계신 집사님이 생각하는데 말이다(ㅋㅋ). 그 유일자에서 다이빙을 하는 도약대로 나왔는데, 그것을 오용익 목사님은 'ZZZZZZ' 라고 표현했고 말이다.

그렇게 빠져 나와서 "주께서 내 주에게" 라고, 그런데 그렇게 유일신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도저히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가 전혀 아닌데, 인간의 아이디어에는 그러한 신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가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그러면 그런 유일신에서 빠져 나온다고 해서 그 유일신이 깨어지는가? 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 주께서 내 주에게 !!

그것은 바로 "주께서 내 주에게" 라고 해서, 여기서 하나님이 두 분이 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지상에서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알았던 하나님은 이 등장한 주로 인해서 깨져라"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 주가 하나님의 원수를 겨냥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는 무엇을 몰라서 원수인가? 'ZZZZZZ' 라고, 즉 주님에게서 또 주님이 나온다고 하는 몰라서 원수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창세기 2장에서 아담 옆구리에서 ZZZZZZ' 라고, 즉 아담 옆구리에서 여자가 나오는 것처럼, 또한 신랑에게서 신부가 나오는 것처럼, 그리고 주님에게서 교회가 나오는 것처럼, 바로 그와 같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주님에게서 주님이 나온다" 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단순히 모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르는 상태에서 행동하는 그 모든 것들이, 주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죄가 된다는 것이다. 모르고 하는 모든 것들이 말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다" 라는 소리인데, 사실은 죄 가운데 태어났는데 말이다. 아담 자체가 '죄 뭉터기' 라는 것이다. 왜 더러운 걸레를 삶아보면 시커먼 물이 올라오는데, 아마 남자들은 빨래를 삶은 것을 잘 모르지 싶은데, 물론 저는 가끔 하는 일이지만 말이다(ㅋㅋ). 

◈ '율법의 욕조' 현상 !!

그렇게 우리 자신을 녹이게 되면, 즉 율법에 녹아지게 되면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죄가 시커멓게 올라온다는 것이다. 율법에 녹여져서 말이다. 그러니 그 율법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고 할 수가 없는데, 자기 몸에서 빠져 나온 액체, 고체, 기체가 거기에 다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자기를 녹이는 시료액도 없이 독자적으로 냉장고 속에 있으면, 그야말로 딴딴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는 건전하다고 여기지만, 하지만 끄집어내어서 시료액이나 100도가 넘는 물에 집어넣게 되면, 가지고 있던 자기의 색깔들이 다 빠져 나온다는 것이다.

왜 옷도 삶아보면 싸구려는 옷에서 물이 다 빠지는데, 옷 색깔이 말이다. 그러면 남은 것은 죄밖에 없는데, 그렇게 죄로만 형성되어있는 자기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의 욕조' 현상인데, 즉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옆에 계시고자 하는(?), 그렇게 주님을 주님이 되게 하기 위한 사전조치로서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 '율법이 없다' 라는 의미는?

물론 율법은 처음부터 만들어졌는데, 그런데 그 율법을 알려준 것은 아브라함 언약 이후에 430년이 지나서였다는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이 주어졌는데, 그러면 "율법이 없었을 때 그들은 과연 죄인인가? 아닌가?" 라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갈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무슨 말인고 하니, 율법이 와서 우리가 죄인이 되었는데, 그러면 소급해서 그 율법이 오기 전에, 율법이 없었을 때는 과연 죄인이라는 것이 성립되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 제 강의를 들어보면 율법이 없었을 때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목사님, 그게 어디에 나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잠언서 8장에 나오는데, '지혜' 라고 말이다. 물론 요한복음 1장에도 나오고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말씀으로 만들었는데, 그러면 "율법이 있다, 없다" 라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면, 그런데 "율법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우리 인간이 사는 세상에 구체적으로 '팍팍팍' 찍어서, 그렇게 율법이라고 구체적으로 찍어서 준 것은 모세가 처음이라는 것이다. 

(잠 8: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잠 8:23)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
(잠 8: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잠 8: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 숨어있던 율법이 문자화가 되고, '팍팍팍' !!

아브라함이 십계명은 받은 적이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율법이 있구나" 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율법이 있었는데, 숨어있던 율법이 문자화가 되어서 드러나는 율법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자화가 된 율법이 새언약에 의해서 우리의 심령 속에 '팍팍팍' 찍혀져서, 그것이 영적으로 우리 심령 속에 살아있는 율법이 되면, 우리는 무엇을 해도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 목사님, 사도바울의 권면이나 명령도 율법입니까?

그것이 아름다운 추억인지 슬픈 추억인지 모르겠지만, 과거 십자가 마을이 갈라지던 시점에 들었던 질문이 생각나는데, 즉 "사도바울의 권면이나 명령도 율법입니까?" 라고 말이다. 자기 딴에는 심각한 질문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아직도 율법이 자기 바깥에 있어서 자기가 지켜야 한다고 여기는 부류인데, 물론 지금도 개혁주의의 성화론에서는 다 그렇게 주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 안에서 우리가 지키고 말고 할 차원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서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살아있다는 것을, 그것을 그런 사람들은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한데, 성령을 받지 않아서 말이다.

그렇게 성령을 받지 않았으니, 자기가 예수님을 믿고 의인이 되어서, 그 의를 발휘해서 자기 쪽에서 지키면 지키는 것이고, 지키지 못하면 못 지키는 것으로, 그렇게 지키고 지키지 못하는 기준을 자기 행함에 두고, 그렇게 자기 행함을 동원시켜서 그것을 성사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혀 아닌데, 율법이 이미 우리 속에서 폭발해버린다는 말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연 안식일을 지켰는가?

거기에 대한 증거를 대보면, 제가 질문을 하겠는데, 이런 어려운 것들은 그렇게 질문을 주고받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 때 안식일이 있었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켜라" 라고 했을 때, 그들이 처음에 과연 안식일을 과연 지켰는가? 지켰다는 것이다.

민수기 15장에 보면 실제로 그런 장면이 나온다는 것이다. 안식일에 그만 나무를 했던 어떤 사람이 등장하고, 그리고 그를 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돌로 쳐서 때려죽였을 때, 비로소 이스라엘 공동체는 율법을 지킨 것이 된다는 말이다.

(민 15:32)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민 15:33)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왔으나
(민 15:34)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민 15: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민 15:36)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그를 쳐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

◈ 만약에, 안식일에 나무를 하지 않으면?

잘 들어보세요.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안식일에 나무를 하러 가서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하면, 그래서 그 다음에 안식일에 나무를 하러 가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안식일을 과연 지킨 것인가? 지키지 않은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이다.

제가 질문이 어렵다고 했지요? 만약에 안식일에 나무를 하러 가지 않았다고 하면, 이전에는 나무를 하러 가면 돌에 맞아 죽었는데, 그런데 그 뒤로는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게 과연 지킨 것이냐는 말이다. 그게 이사야서와 미가서 등에 나오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무엇인고 하니, "안식일이 빨리 지나고 언제 평일이 돌아와서 산에 나무를 하러 가지? 그리고 언제 그것을 팔러 성밖에 나가지?"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러한 마음이 과연 안식일을 제대로 지킨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라는 것이다. (녹취자 - 아, 전도사 시절 생각이 절로, ㅋㅋ)

이제 답변이 나오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사람들은 그때 바깥에 있는 그 "안식일을 지켜라" 라는 문자를, 자기 영혼이(?) 그때 시키는 대로 하면 그 순간은 지키는 것이 되는데, 하지만 창조 때부터 율법으로 만들어졌는데, 그런데 아브라함 때부터 430년 뒤에 율법이 주어지니, 사람들은 율법이 새로 시작된 줄로 오해를 했다는 것이다.

◈ 율법의 온도를 높여라 !!

하지만 율법은 자기들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율법이 있었는데, 모세에게 율법을 주기 이전부터 말이다. 쉽게 말해서, 그들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면 지키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식일에 나무를 하지 않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을 더욱 더 깊이 율법의 세계 속으로 끌고 들어갔는데, 즉 잠수케 하셨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 빨래를 삶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삶는 온도를 더욱 더 높였다는 것이다. 온도를 50도 정도로 하니 빨간 김칫국물은 빠져 나왔는데, 60도로 높이니 커피자국도 빠져 나왔다는 것이다. 물론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말이다(ㅋㅋ).

그렇게 해서 나중에 온도를 100도까지 높이니 모든 자국들이 다 빠져 나왔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가스불 온도를 조절해서, 결국은 궁극적인 율법의 밑바닥까지 모두 다 드러낸 사건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다.

◈ 내 150억을 돌리도 !!

구약의 민수기에서 사람들이 오해한 그 오해를 예로 들어보면, "먹을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라고 누가 말씀하셨는가?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셨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고, 그런데 십자가 마을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말이다. 그러면 누구 말이 맞는가?

자기 형편이 몹시 어려울 때 "먹을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라는 말씀대로 잠시 그렇게 생각했는데, 힘들어도 감사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150억이 생겼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떤 드라마처럼 그 150억을 또 날리게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처음에 없을 때는 컵라면 하나로 족한 줄로 알았다가, 갑자기 150억이 생기니 "아이쿠, 말씀을 잘 지키니 복을 받았네" 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150억이 또 날아가게 생겼는데, 그러면 과연 범사에 감사하겠느냐는 말이다. 감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어려울 때 "먹을 것 입는 것으로 감사합니다" 라고 한 것이, 물론 자기는 나름대로 지켰다고 했지만, 그 온도가 아직 30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견딜만한 온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온도를 더 높이게 되니, 동일한 환경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원망이 나온다는 것이다. "내 150억을 돌리도!" 라고 말이다.

◈ 주님께서는 성도를 가지고 놀아 !!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가지고 논다는 것이다. 성도를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은 좋은 의미에서 가지고 논다는 것인데, 나쁜 의미에서 가지고 놀면 지옥에 가고 말이다.

그렇게 좋은 의미에서 가지고 노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모든 순간에 율법이라는 욕조에 푹 잠겨있는데, 즉 바깥에도 율법이 있고 자기 내부에도 율법이 가득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안과 밖으로 율법에 물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어디를 가더라도 죄 된 행동이 나오게 되는데, 물론 이론상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 행동으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고아원에 가서 누구를 도와주는 것은 착한 일, 그리고 누구를 욕한 것은 나쁜 일, 그렇게 실천에 있어서는 착하고 나쁘다고 하는 것을 가린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내가 성경말씀대로 범사에 감사한 것이니 착한 일이고, 그리고 이것은 내가 시기를 했으니 육의 열매이다" 라고, 그렇게 자기 행동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 그래, 마누라가 없는 것으로 여겨야지 !!

그리고 "아내가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라는 말씀은, 물론 그것을 남자들이 지킬 때가 있는데, 마누라가 잔소리를 많이 할 때는 그렇다는 말이다(ㅋㅋ). "그래, 마누라가 없는 것으로 여겨야지" 라고 말이다. 그런데 집안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마누라가 친정 일로 집을 비우는 바람에 그만 빨래도 밀리고 청소도 제대로 되지 않고, 그만 집안이 개판이 되고 말았다면, 그때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끝나도 마누라는 있어야 돼" 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버너의 온도를 얼마나 올리느냐에 따라서 마구 왔다갔다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 혼자서 율법을 지켰다가, 말았다가 한다는 것이다. 혼자 의인이 되었다가, 혼자 죄인이 되었다가 하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 율법을 왜 깔아놓았는가? '사랑' !!

그러니 그것을 한꺼번에 다 알자는 것인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처음부터 율법을 깔아놓았다고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율법을 깔아놓았는데, 그러면 왜 깔아놓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까부는 것을, 그렇게 우리가 폼을 잡는 것을 주님이 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가 평소에 짓밟고 있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사랑을 말이다.

우리는 맨 날 "율법을 지켰다" 라고, 그렇게 자기의 잘난 것만을 측정하는데 급급했지, 정작 지켜도 주시고 지키지 못해도 주시는 그 사랑, 그 사랑이 자꾸만 우리의 기억과 느낌에서 소외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지킬 때는 없지만 말이다.
 
◈ 어린아이와 같이 아니하면 !!

제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갈수록 점점 더 느껴지는데 말이다. 그게 바로 "니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말씀인데, 그 말씀을 제가 잊을 수가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사도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믿는다" 라고 하는데, 그것과 연관이 된다는 것이다.

(마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막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눅 18: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말씀과,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했는데, 그렇게 믿음으로 살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고 하는 생각을 우리가 가지겠는가? 가지지 않겠는가? 가질 가능성이 농후한 존재라는 것이다. 자기 입맛에 맞는 말이다.

그래서 저는 이 복음서 말씀과,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한 말씀을 서로 연결시켜 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로마서의 그 말씀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그런 경향이 우리 속에서 계속해서 피어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되었지" 라는 생각이 자꾸만 떠오른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말씀을 의도적으로 밀어내면서 말이다.

그러면 그 두 가지를 연결해보면 간단한데, 즉 "니가 만든 믿음 말고, 내가 너에게 선물로 준 믿음으로만 의인이 된다" 라는 것이다. 그 선물이 오게 되면, 그 선물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고 하니까, "니가 어린아이와 같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라는 것이 담겨서 믿음으로 온다는 것이다.

◈ 아하, 저는 어른과 같군요 !!

그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이 보따리에 담겨서 믿음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집어넣어지는데, 그러면 주의 모든 말씀은 율법이 되는데, 율법이란 것은 천지창조를 받쳐주는 것인데, 그래서 그 율법이 깨지면 멸망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천지창조를 하신 주님의 모든 말씀 자체가 율법의 완성이니, 그 말씀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주여, 어린아이와 같이 않으면 천국에 가지를 못하는데, 또 저는 어른과 같군요" 라고, 그렇게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죄인이 되는데, 그러니 그 말씀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놓치고서는 "주님, 믿습니다" 라고 나온다고 하면, 그 '믿는다' 라는 것은 자기 자랑거리가 되고, 그것이 곧 자기가 구원을 받는 근거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어제 오후예배 시간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능력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저도 사람이니까 다 아는데, "주님, 믿습니다" 라는 것을 자꾸만 되풀이하고 있음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최면을 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간단하게 정리하면, '율법과 사랑' !!

이런 저런 이야기를 다 하려고 하니 복잡하게 느껴지는데, 그래서 간단하게 해보면, "율법을 깔아놓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합니다" 라고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우리의 개인적인 몸부림이나 행위는 거기에 전혀 껴들 수 없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가 되는데, 하지만 이렇게 정리를 해주어도 "나는 무엇무엇을 했는데, 그것으로 구원이 되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또 껴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이 오게 되면, 그렇게 껴든 것도 죄임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또 그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데, 즉 "내가 헌금을 한 것이 왜 죄인가?" 라고 말이다. 헌금을 한 것 자체가 죄가 아니라, 자기가 헌금을 한 것을 아는 것이 곧 죄가 된다는 것이다.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라는 말씀을 우리가 가위로 왜 잘라버리는고 하니, 그것도 분명히 주님의 말씀인데 말이다.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마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맹세인데,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는가? "맹세하지 말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맹세하지 말라" 라고 하신 것은, 우리의 주체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는 자아에 불과하고, 주체는 주님이 만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인간, 그리고 참새와 들풀 !!

참새의 주체가 참새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닌데, 물론 들풀의 주체가 들풀을 먹여 살리는 게 아니고 말이다. 간단한 문제인데, 누가 먹여 살리는가? 하나님께서 먹여 살리는데, 그런데 인간만큼은 자기의 주체가 자기를 먹여 살린다고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들풀보다 못하고, 또한 참새보다 더 못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어떤 참새가 되어야 하고 자기가 어떤 들풀이 되어야 하는지, 그것을 참새와 들풀은 누구에게 맡기는가?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르시는 분에게 맡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떠한가? 참새와 들풀처럼, 그렇게 맡길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 가만히 있으면, 돈을 가져다주는 데가 없다 !!

제가 누구를 만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그렇게 심방을 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여러 소리를 할 것도 없는데, 가장 심각한 것은 "내 한 몸과 우리 가족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밥을 먹고 살 것인가?" 라는 것인데, 바로 그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종교, 기독교, 십자가, 복음, 교회 등등, 그런 것은 모두 걷어치우고 딱 깨놓고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몸뚱아리가 있어서 밥을 달라고 야단인데, 제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으면 이런 것을 다 기억하겠느냐는 말이다. 그것을 문장으로 적어보면, "가만히 있으면, 돈을 가져다주는 데가 없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ㅋㅋ).

지금 직장생활을 하면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런 것을 느끼지 못하는데, 그런데 갑자기 사장이 불러서 "지금 회사 형편이 참 어려우니, 그 동안 수고한 것은 알지만 집에서 좀 쉬어주세요" 라고 한다면, 그러면 뭐라고 하겠는가? "예,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방금 우리집에 둘째가 태어났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장이 다시 "참 미안하지만, 회사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다른 사람은 괜찮은데 왜 나에게만 그렇게 합니까?" 라고 하면, 그러면 다시 "다른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퇴직금은 섭섭하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아마 다른 좋은 회사에서 당신같이 능력이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할겁니다. 그리고 우리회사도 형편이 좀 풀리면 바로 부르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럴 때는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율법이고 간에,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놀면 돈을 줄 사람이 없다" 라는 것인데, 그것보다도 더 확실한 진리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게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마누라가 아무리 말씀이 좋다고 하면서 성경공부를 다녀도, 남편이 돈을 벌어다주지 않으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남편이 놀고 있으면 자기가 나가서 생활비를 벌든지 해야지 말이다. 어떻게 한가롭게 고상한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데, 남편이 벌어다주니 다닐 수가 있다는 것이다(ㅋㅋ).

◈ 과연 누가 더 심각한가?

아무튼 그 사람은 심각한데, 사실 직장에서 잘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기는 교회에 너무 소홀히 하고 십일조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벌을 받았다고 여기고 말이다. 그러니 그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심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장에서 잘린 것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당신이 당신에 대해서 심각한 이상으로 주님께서는 더 심각하게 지금의 현실을 바라보시고, 이끄시고 계십니다" 라고 말이다. 즉 "당신이 당신의 인생을 아무리 심각하게 여겨도, 당신의 인생을 더 심각하게 여기는 분이 계십니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자신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 가장 심각하고 진지하게 걱정하고 염려를 많이 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설치고 나서니, 주님께서 뭐라고 하는가? "그러면 니 마음대로 해봐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래, 니 몸을 니 것이라고 우겨봐라. 하지만 아닐 걸" 라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복음을 알고 믿음도 좋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무슨 복음이고 믿음이냐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복음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6장에 나오듯이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이제는 니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인데 말이다.

주님의 것이 지금 직장에서 잘렸다고 하면, 과연 누가 심각하겠는가?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고 있으면, 그러면 토기가 토기를 심각하게 보는 이상으로 누가 심각하게 보겠느냐는 것이다. 당연히 토기장이가 토기를 더 심각하게 보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저는 그런 믿음이 없습니다 !!

그 정도 이야기가 되었으면 다음과 같이 나와야 하는데, "목사님, 저는 그런 믿음이 없습니다" 라고 말이다. 사실 처음부터 "저는 그런 믿음이 없습니다"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을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결정해야 하는데, 자기가 믿음이 없는 것이 심각한 문제인지, 아니면 직장에서 잘린 것이, 그래서 누가 돈을 한 푼도 가져다주지 않아서, 그게 심각한 문제인지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 근원을 다시 찾아주기 위해서 주께서 그런 사건을 일부러 만드셨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면 성도이고, 반면에 그 동안 믿은 것은 다 헛것이고 앞으로 믿지 않겠다고 하면, 그것은 사실 처음부터 믿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사가 되어서 교회에서 4군데 정도 쫓겨나게 되면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영광이고 뭐고 없는데, 또 다시 어느 교회에 가서 월급을 받고 살아야할지, 그게 가장 현실적이고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직장에서와 똑같다는 말이다.

◈ 넘 어려워 - '당신의 얼굴은 꽃입니다' !!

지금까지는 쉬운 것을 했지만, 이제부터는 어려운 것을 해보겠는데, 어려운 것을 할 때는 항상 예를 먼저 들고 하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남자가 여자를 보고 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당신의 얼굴은 꽃이요, 당신의 눈동자는 호수요, 당신의 허리는 개미입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진짜 그 여자의 얼굴이 진짜로 꽃이고, 그 여자의 눈동자가 호수고, 그 여자의 허리가 개미이겠느냐는 것이다. 그냥 그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하다가보니 꽃과 호수와 개미가 등장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다들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표정이 좀 거시기한데 말이다(ㅋㅋ).

◈ 'thing' - '그 무엇' !!

그것이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영어로 써보겠는데, 영어가 더 적당하지 싶어서 말이다. 영어로 'thing' 이라고 하는데, 즉 '그 어떤 것', 혹은 '그 무엇' 이란 의미라는 말이다. "당신의 허리는 개미허리이다" 라고 했을 때, 표현이 좀 야해도 이해해주시고(ㅋㅋ), 아무튼 "저 여자의 허리가 저렇게 가는데 어떻게 표현하지?" 라고 했을 때,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그 무엇, 즉 "허리가 가늘다" 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다.

그렇게 허리가 가늘면 그것을 보고 입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입으로 표현한다" 라는 것도 어려운데, 그런 것은 나중에 다시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말이다. 일단 입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그것을 개미허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같은 것인가? 같지 않다는 것이다.

◈ 야, 미치겠다. 저것을 화폭에 담아야 하는데 !!

화가이신 김 집사님이 사물을 보고 그림을 그릴 때 "야, 미치겠다. 저것을 화폭에 담아야 하는데, 어떻게 담지?" 라고 하면서, 그것이 안 되면 찢고 다시 그린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화가라는 직업은 오래가는데, 왜냐하면 그 간격이 매워지지 않으니 말이다.

손님이 "이 그림이 참 좋네요. 얼마입니까?" 라고 하면서 살려고 하는데, "안 팝니다. 이 그림은 미완성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다시 "그래도 참 좋은데, 그냥 저에게 주세요" 라고 하면, "정 그렇다면 알아서 하세요. 하지만 저는 이 그림에 대해서 100프로 만족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예술가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든지 음악을 하든지 간에 말이다. 

여자의 허리가 아무리 날씬해도 개미허리만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무엇'에 대해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위협'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위협, 즉 공포이고, 불안정, 혹은 불안감이라는 것이다. 평생을 따라오는 공포라는 말이다.

우리가 "교회에 다닌다,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 라고 해도, 믿지 않으면 그만인데 말이다. 하지만 죽고 난 다음에 어디로 가는가? 그건 곧 죽음인데, 그러니 뭔가 자기 내세에 대해서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뭔가가 분명히 있는데, 손에 잡히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이, 모르겠다. 천국이라고 하자' 라고 했을 때, 그것이 과연 일치가 되겠느냐는 말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천국과 진짜 천국이 같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안 된다는 것이다. 마치 개미허리와 여자허리가 다르듯이 말이다.

◈ 왜 인간이 표현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가?

여기서 제가 어렵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왜 우리 인간이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이 진짜와 일치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한번 따져보자는 말이다. 왜 우리 인간이 표현하는 것은 어떠한가? 기도를 예를 들어보면,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주님께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말을 조심해야지. 사람에게 하는 게 아니니, 표현도 욕설이나 이상한 소리를 하면 안 돼. 그러면 고상한 소리를 해야하는데, 어떤 단어가 있지? '거룩하시고' 라는 것이 있지. 그런데 그런 것을 이전에 다 해봤는데, '경건하시고' 라는 것도 식상하고, 더 고상한 것이 없을까?"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thing', 즉 '그 무엇' 이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이 과연 자기가 표현할 수 있는 것과 일치가 되는가? 그렇게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기가 더 잘 아는데, 즉 여전히 뭔가가 미흡하게 남아있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미흡함이 말이다. 

◈ 하나님의 변화를 고정된 우리 몸이 담을 수 없기에 !!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움직임, 즉 하나님의 생성과 변화를 고정된 우리의 몸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화를 시키기 위해서 '딱' 잡으려고 하기 때문인데, 하지만 우리 쪽에서는 그 전체를 도저히 담을 수가 없는데, 그래서 미흡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 나는 부족해. 하나님은 무한하지만 나는 유한해" 라는 말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지식으로 사는 것이 아닌데(?),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조금 전에 했는데, 또 잊어버렸지요? 사람이 지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어도 돈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로 인해서 불안해하고 공포를 느끼는데, 그래서 우리는 돈을 벌어야 되고, 그렇게 무엇이라도 하기 위해서 설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게 너무나 명백한데, 백수가 되어서 집에 가만히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는 문을 열고 돈을 던져주는,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가끔 빌딩옥상에서 돈을 뿌려주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ㅋㅋ). 하지만 그 다음날에도 그게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어, 내가 누구지?

거기에 있어서 우리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자신이 고정되고, 그 주님의 변화를 고정된 자기가 잡아서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인데, 그렇게 없다고 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대화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뻔한데, 자기도 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그렇게 같이 움직이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떤 손해와 불이익이 일어나는고 하니까, 즉 자기가 움직이게 되면 무엇을 놓치는고 하니, 그만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 내가 누구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이 목사님, 잘 있지요?

예를 들어서, 부산의 어느 목사님은 택배 일을 하시는데, 얼마나 바쁜지 모른다는 것이다. 작은 트럭으로 집집마다 가는 것 말고, 큰 화물차로 짐을 옮기고 하는데, 주로 밤중에 움직인다는 것이다. 밤에 잠도 자지 않고 계속해서 운전을 하니, 그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쁘게 움직일 때, 과연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생각하겠는가? 그게 아닌데, 그러면 무엇만 생각하겠는가? "어서 이 물건을 제대로 배달을 해야하는데, 그리고 저쪽 창고에 있는 물건도 빨리 처리해야하는데" 라는 생각만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할 일을 놓치면 안 되니 말이다.

만약에 버스 기사가 마약을 해서 해롱해롱 거리면서 운전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손님은 제대로 탔는지, 할머니는 자리에 앉았는지, 차 문은 제대로 열리고 닫혔는지, 그런 것을 제대로 확인이 되겠느냐는 말이다. 신호등이 바뀌어도 아무런 생각도 하니 않고 멍하니 있다고 하면, 그러니 그런 사람은 결국 운전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돈 버는 것에 몰입하게 되면 !!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우리가 어떤 변화에 몸을 싣게 되면 과연 무엇을 잃어버리고 포기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 자기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해야하는지, 그리고 주님은 누구인지, 그런 것들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해야만 돈을 번다고 한다면,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서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하면, 그 순간에는 가장 소중한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그만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변화에 휩쓸리게 되면 말이다.

그런 식으로 하루종일 힘들게 일을 하다가 나중에 피곤해서 쓰러져서 잠자리에 누우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왜 이렇게 살지? 이것 말고 다른 일은 없나? 정말로 힘들어서 미치겠다. 내가 그래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민주화 운동도 했는데, 도대체 이게 뭐야? 무슨 알바 인생도 아니고 말이야" 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 아이쿠, 내 신세야 !!

부잣집 마나님이 그만 신랑 회사가 부도가 나고 난 뒤에, 야식을 하는 식당에 가서 앞치마를 두르고   밤새도록 설거지를 하면서, 과거에 60평 짜리 최고급 아파트에 살던, 그렇게 잘나가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도대체 뭐라고 하겠는가? "내가 이게 뭐지? 내 신세가 왜 그렇게 되었지?" 라고 생각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성경말씀, 성경말씀이라고 해도, 이렇게 턱하니 여유롭게 앉아서 성경을 펼쳐서 볼 때 이해가 되는 성경말씀은, 그것은 일시적으로 "내가 편하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에 맞춘 성경말씀이지, 자기가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손에 습진이 다 생기고 하면서 볼 때의 성경말씀은 다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말씀은 '나' 라는 것이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존재임을, 하루에 12번도 더 뒤집어 버리는 말이다. 그렇게 뭔가 '나' 라고 정해놓은 것이 없다는 사실, 그래서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기게 되면, 즉 200억의 돈이 생기면 또 다시 골프나 치면서 돌아다니고, 그러다가 또 다시 망하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유일하게 고정되신 '그분' !!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말씀을 볼 때는 껍데기가 아닌 깊숙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더 깊이, 더 깊이 말이다. 그러면 거기서 누구를 만나는가? '나'는 고정되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고정되신 분, 그분이 누구인지 여러분도 이제는 알지 싶은데 말이다.

사울이란 인간이 예수를 믿는 자들을 따라다니면서 그렇게 분주하게 할 때, 그래도 여전히 동일하게 고정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만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기를 믿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루에 12번도 더 바뀌는 자기 자신을 믿는다면 말이다.

그러니 구원은 고정된 분으로부터 오는데, 그분이 우리를 마치 꼭두각시처럼 데리고 논다는 것이다. 인형놀이를 하듯이 말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오늘은 무엇을 하고, 내일은 무엇을 하고" 라고 하면서 가지고 노는 것이지, 복을 따내기 위해서 자기 쪽에서 애를 쓰는 것은, 그것은 자기를 믿는 것이지, 결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아하,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어도 결국 똥이구나 !!

따라서 믿게 되면 무엇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믿음 속에 있으면 있는 것도 어떻게 되는가? 마치 안개를 잡는 것처럼, 자기가 가진 것도 가지지 않은 게 된다는 말이다. 즉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들어가는 것도 결국에는 똥이 되어서 나온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맛이 있는 것도 잠시 맛이 있는 것이지, 그 다음부터는 어지간한 것도 그것 때문에 그만 맛이 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 라는 것이 변화 속에, 즉 파도의 포말 속에 휘말려 들어가는 셈이 되어서, 자기 것이라고 할 것이 도무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랑할 자기 것이 말이다. 자기 것이 있어야 자기 자랑을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언제 바위에 부딪쳐서 산산조각이 나게 될지, 그런 것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럴 때 과연 우리가 "믿음이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주께서 이끄십니다" 라는 것이 믿어지는 그 믿음, 그것만은 우리가 그 어떤 변화를 겪고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더라도, 주께서는 그것으로 인해서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즉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라고 되어있는데, 그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그런 믿음의 사람은 주님께서 만드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서 주님께 바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다시 정리하면, 'thing' 이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표현을 해도 다 헛짓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이여!" 라고 해도, 그 하나님은 'thing', 즉 '그 무엇'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 'thing' 이라는 것과 자기가 표현하는, 그런 자기의 고정된 것 사이에는 항상 갭이 있어서, 거기서 위협이 오고 공포가 오고, 그래서 불안감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

그런데 요한일서 4장에 보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라고 되어있는데, 왜 그런가? 그 사랑으로 인해서 '내 것' 이라는 그 자체가 없는데, 그런 것이 의미가 없음을 알 때, 자기가 걸치고 있는 옷부터 시작해서 시계, 목걸이, 손톱, 발톱 등등,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주님의 것이라고 느껴질 때, 그 1, 2초간에 우리는 두려움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는 깡패들이 와서 잡아가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의 창작물이 되었으니 말이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게 불과 1, 2초밖에 되지 않지만, 하지만 그 1, 2초가 어떠한가? 불꽃놀이도 1, 2초밖에 되지 않는데, 하루종일 하면 그것도 지겹다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팍, 팍' 터지는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불꽃놀이를 너무 경험하지 않는 분들도 있는데(ㅋㅋ), 하루에 1, 2초 정도는 터져 주어야 하는데 말이다. 두려움이 없고, 무서움이 없는 그 짧은 순간,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우냐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대상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이유도 없이 두렵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자기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어도 두려워지는데, 자기가 가진 것을 잃어버릴까 싶어서 두렵다는 말이다.

◈ 현숙 씨, 늦둥이라도?

저는 자식이 하나밖에 없는데, 그런데 만약에 자식이 3명 정도가 된다고 하면 어떨지, 그렇게 상상을 해봤는데, 참 바쁘지 싶다는 것이다. 아침에는 첫째 걱정, 점심때는 둘째 걱정, 저녁때는 셋째 걱정, 그렇게 잠시도 쉴 틈이 없지 싶다는 것이다. 여기서 걱정한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의미인데, 그러니까 온 종일 기도를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는 것이다. 가끔은 신랑도 걱정해주고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하다가 틈틈이 시간이 나면 드라마를 봐야 하는데, 그렇게 드라마를 보다가 그만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믿음의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드라마에 빠져서 너무너무 재미가 있으니, 그 순간만큼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자식걱정, 신랑걱정, 부모걱정을 하면서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하는데, "어머님, 잘 계십니까?" 라고 하면, "그래, 왜?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라고 하면서 단번에 끊어버리고 말이다. 그렇게 "오늘도 무사히!" 라고 하면서 살아가는데, 자식이 많으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 더 낳을까? (ㅋㅋ)

이제 '사랑'으로 들어가겠는데, 교재 237페이지를 보자.

** 사랑으로 인한 선택이다. 누구를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사랑이 사랑을 던진 대상을 다시 주워담는 식으로 선택하신다.

◈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사랑 !!

사랑은 생각보다도 그 개념이 어려운데, 물론 율법도 어렵다는 것이다. 율법은 아예 이 세상 전체를 저주와 심판 아래에 깔아놓았다는 것이다.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부터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죄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랑은 무엇인고 하니까, 이것이 율법보다 더 어려운데, 거기에는 이유가 다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을 깨어보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율법이 들어있는데, 그게 완성의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은 와야 아는 것인데, 그 사랑을 모른다고 치면, 즉 인간은 사랑을 모른다는 것이다. 율법도 모르는데 어떻게 사랑을 알겠느냐는 말이다. 자기 사랑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만을 가지고 그 율법의 완성을 어떻게 정의하는고 하니, 율법에 보면 이웃사랑이 나온다는 것이다.

◈ 율법의 '이웃사랑' !!

그리고 또 하나의 사랑이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율법에는 두 가지 사랑이 있는데, 이웃사랑이 있고, 그것보다도 더 큰사랑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다급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웃사랑인데, 그 이웃사랑이 바로 우리와의 접촉점이라는 것이다.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오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다루고 있음을 우리가 잊으면 안 되는데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서기관을 다루어서 질문을 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입을 열어제쳐서 말이다.

(눅 10: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 10: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눅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눅 10: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눅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 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 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 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 율법사의 질문에는 두려움이 가득 !!

그렇다면 여기서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것을 응용해보면,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하는데, 그러면 무엇이 해결되지 않아서 질문을 하는가? 'thing' 이란 것과 지금 자기가 느끼는 것과 갭이 발생해서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갭은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을 준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불안하니 말이다. 그렇지 않나요? 배워서 이럴 때 써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 뭐라고 하는가? "선한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제일 큽니까?" 라고 하는데, 즉 'thing' 이란 것, '그 무엇' 이란 것, 즉 정답인데 말이다. 그런 진리와 일치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데, 그 간격을 질문으로 메운다는 것이다. 그러니 질문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무서움과 두려움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 아, 알았어요 !!

만약에 질문을 하다 그 중간에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두려움이 그만 사라지고 마는데, 그러면 욥처럼 재를 뒤집어쓰고, 그것으로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질문을 하다가 "아, 알았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모두 기뻐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목사님, 알았어요" 라고 하면, 하지만 그게 표현이 되는가? 표현은 되지 않는데, 알기는 알았는데 말이다. 'thing' 이란 것, '그 무엇' 이란 것, 즉 정답을 말이다. 그것을 굳이 표현할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갭이 없으니, 즉 두려움이 없으니 말이다. 즉 "나는 모른다" 라는 것에서 오는 걱정근심이 없다는 것이다.

◈ 이런 기분 처음이야 !!

그래서 "그게 그것이로구나"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위에서 "그게 뭔데?" 라고 하는데, 그러면 "내가 이야기를 해도 몰라. 그게 또 다른 '다 이루었다' 라는 거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다 이루었다" 라는 기분은, 설령 누가 와서 칼로 찔러 죽인다고 해도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할 정도로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누가 술을 먹고 와서 마구 두드려 패더라도, 또한 차 위에 올라가서 생쇼를 해도 그렇다는 말이다.

* 질문자 : 아하, 그게 그것이로구나.
* 방청객 : 그게 뭔데?
* 질문자 : 내가 이야기를 해도 몰라. 그게 그거야.
* 방청객 : 그건 나도 아는데?
* 질문자 : 니가 아는 "다 이루었다" 라는 것과는 또 달라.
* 방청객 : 그게 다르다고?
* 질문자 : 나도 전에는 그랬는데,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 방청객 : 그래?
* 질문자 : "다 이루었다" 라는, 이런 기분은 정말 처음이야.
* 방청객 : 참 좋겠네.

오늘 아침에 뉴스를 보니, 자동차의 블랙박스에 어떤 것이 녹화되었는고 하니, 여자 차만 골라서 술을 먹고 치에 올라가서 마구 행패를 부리던 남자가 나오던데, 여자가 얼마나 놀랐겠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thing' 이란 것이 오게 되면, 그런 미친 인간이 돌아다녀도 두렵지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적절한 조치는 하겠지만 말이다(ㅋㅋ).   

◈ 두려움 없이 '나를 보내소서' !!

스데반 집사님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는데, 그가 돌맹이가 날아왔을 때 어디 겁을 내었는가? 제발 살려달라고 했는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서 6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뭐라고 하는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분명히 두렵기는 하지만, 하지만 그 순간 옆에 있던 사람이 이사야에게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면 이사야가 과연 겁을 내겠는가?

이사야는 지금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데, 그러니 사람과 상대할 입장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있으니, 자기가 죽고 사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지?" 라고 하니, 이사야가 손을 번쩍 들고는 뭐라고 하는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왜 질문을 하는가?

지금 서기관인가 율법사인가 하는 인간이 나와서 예수님에게 뭐라고 하는가? 즉 "제일 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의 의도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는 지금 'thing' 이란 것과 일치가 되지 않으니, 예수님이 그것을 이야기해주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그것을 지켜서, 즉 그대로 행동에 옮기겠다는 것이다. 즉 자기에게 일치가 되지 않는 것을 일치시킴으로서, 그렇게 되면 "나는 일치시켰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일치되는 않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없애려고, 그래서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 덧셈이 아닌, 뺄셈 !!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율법은 누구의 몫인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몫이라는 것을 우리가 믿는데, 물론 그것은 성령이 오셔야 믿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시 설치니 말이다. 그래서 제가 어제 설교시간에 "덧셈이 아니라 뺄셈이다" 라고 했는데, 즉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으니, 그 다음부터는 어떤 것들이 거기에 방해를 해왔는지, 그것을 뽑아낸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누군가가 땅을 공짜로 주었으면, 거기서 잡초 뽑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재미로 말이다. 뽑지 않아도 우리 땅인데, 잡초를 뽑고 예쁘게 가꿀 수는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남의 땅에는 그렇게 하지 않겠지만, 우리 땅에서 우리는 즐겁게 잡초를 뽑을 수 있다는 말이다. 

◈ 지끼는 율법사 !!

아무튼 그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는가?" 라고 하니, 그가 뭐라고 하는가?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이 'thing' 이란 '그 무엇' 쪽에서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받는 인간은 그게 이해가 되겠는가? 이해가 되지를 않는데, 즉 "다른 것은 알겠는데, 이웃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라는 것이다.

물론 이 율법사는 다른 것도 모르지 싶은데, 그냥 의성 표준말로 '지끼는' 대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낀다' 라는 것이 욕이지 싶은데, 의성이나 안동 지역에서는 자기들은 풍습이라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용하는데 말이다. (녹취자 - '지껄인다'의 사투리가 아닌가요? 그러니 욕보다는 조금 고상한 말이지 싶은데요. '씨부리다' 라는 표현도 좋은데, ㅋㅋ)

아무튼 율법사는 지끼는 대로, 그렇게 속에서 나오는 대로 하는데, 즉 "이웃이 누구인지, 그것만 가르쳐주면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뭐라고 하는가? "이웃은 니 옆집에 있는 사람이다" 라고 간단하게 하면 되는데, 그런데 어디로 몰고 가는가? 이 지상층이 아닌 영적차원으로 데리고 가신다는 것이다.

물론 그 율법사를 데리고 가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말씀을 보고 있는 독자인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차원으로 데리고 간다는 말이다. 그러면 밑의 세상인 이 지상층은 어떠한가? 어려워도 조금만 더 참으시기 바랍니다. 

◈ 다시, 율법은 아브라함 이후 430년 !!

이 세상에 율법은 아브라함 이후 430년이 지난 다음에 들어왔는데,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이 세상은 율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숨어있는 세계이고, 그것이 나타날 때는 아브라함 시대에서 430년 이후에 주어졌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 할 때는 미처 설명하지 않았는데, 지금 그것을 한번 해보자는 말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무엇으로 의인이 되었는가? 그는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는데,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무섭고 두렵지 않은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세상이 아닌 원초적인 위의 세계와 관련된 것이란 말이다.

그러면 아브라함 시대부터 430년 이후에 율법이 오게 되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물론 이 세상에서 인간이 성령을 받게 되면 1, 2초 동안은 제법 티를 내지만, 하지만 아무리 성도라고 해도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이상은 죽을 때까지 여전히 이 세상의 율법에 저촉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겁을 내고 두려워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율법사는 율법에 있어서 이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궁금하다는 것은 바로, "이웃이란 것을, 율법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그 이웃을 자기 행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법을 이루겠다" 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그 자체가 곧 율법 안에 갇혀 있는 티를 팍팍 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이웃만 알려주시면, 저의 육체를 가지고 율법을 이룰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은, '사건' !!

그야말로 종교적이고 신앙적인데,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이고, 하지만 주님은 무엇인가? 이웃을 설명하시면서, 그 이웃개념을 이 세상에서의 율법에 갇힌 상태에서 찾는 게 아니라, 원초적인 원래 있었던 율법의 이웃개념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의 이웃은?" 이라고 하면서 옆집 사람을 소개시켜주는 게 아니라, 사건을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사건을 말이다. 그러니 성경해석이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닌데, 물론 저를 원망해서도 안 되고(ㅋㅋ), 주님이 그렇게 복잡하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 '사건'으로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예수님께서 "이웃이 궁금해? 응, 가르쳐 줄게. 이웃은 옆에 있는 사람이다" 라고 하시면 참으로 간단하고 좋은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이웃이 궁금하니? 그러면 내가 이야기를 하나 해줄게. 지금부터 잘 들어봐"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시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즉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제사장이 그냥 지나가고, 그 다음에는 레위인이 지나가고, 그런데 그 다음에 사마리아인은 그를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봐주었다. 그러면 그들 중에서 누가 이웃인가?" 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건' 이라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해보면 !!

여기서 다시 정리해보면, 여기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가게 가게 되면 무엇으로 연결이 되는가? 우발적 사건으로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은 마치 바람같이 부는데, 즉 육으로 장착될 수 있고 영원토록 소지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손에 잡히는 게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은 마치 바람과 같이 분다는 것이다.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바람은 우리에게 하나의 사건인데, 즉 그냥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바람아, 이리 오너라" 라고 한다고 해서 바람이 오는 법은 없다는 말이다. 바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데, 오히려 우리가 바람에 의해서 말려들었으면 들지 말이다. 그게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 "내가 실천에 옮긴다, 옮기지 않는다" 라고 할 사항에서 이미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사건이 각본대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그 각본을 우리가 지키게 된다면,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이미 고정된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십자가는, 존재가 아닌 사건 !!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를 믿을 때 어떻게 하는가? 그 십자가를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어떠한 존재라고 여겨서, 자기가 그 십자가를 손에 쥐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는 지금도 사건인데, 즉 불꽃놀이를 항상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변화가 되고, 변화가 되지 않는 분은 유일신의 옆구리에서 왔던 그분, 바로 예수님이라는 주님 때문에, 그래서 오늘날 내가 이런 변화와 존재로서 그분에게 이끌림을 받고 있다" 라는 것인데, 우리는 바로 그러한 연결점을 늘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손수건으로 사람을 낫게 했는데, 하지만 그 손수건 속에 사건이 장착되는가?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손수건으로 다른 사람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에이, 기존 손수건으로 소용이 없네" 라고 하면서 실망을 해서 발로 찼는데, 그런데 그렇게 구둣발로 차니 또 낫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구두를 벗어야 하는가? 그 구두에 기적을 일으키는 그 무엇이 묻어있는가? 이상스럽게도 뭔가 자기의 어딘가에 기적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손이든 발이든, 아니면 자기가 앉은자리이든 말이다. 바로 그런 희한한 발상, 그런 싸가지, 정말로 싸가지라는 것이다.

어디 자기 앞자리에 앉으면 은혜를 받고 뒷자리에 앉으면 받지 못하는가? 자기가 들고 있는 가방은 특수한 가방이고, 자기가 입고 있는 내복은 특수한 내복인가? 자기가 살던 집은 재수가 좋은 집인가? 그런 것은 그야말로 부적인데, 전혀 무당적 요소들이고 주술적인 것이란 말이다. 물론 그런 구약적인 요소가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있는데, 그것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 사건을 통한 이웃은 없어 !!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바로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는 이웃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웃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건을 말씀하셨는데, 하지만 그 사건 속에서는 이웃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웃은 없다는 말이다.

갑자기 얼떨떨한 표정들인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나요? 왜 그런고 하니, 이웃이라고 하면 딱 지정해주어야 하는데, 즉 "저 사람이 이웃이다" 라고 하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주님의 입장에서는, 이웃을 만나는 그 관계에서 이웃이 나온다는 것이다.

◈ 서 목사님은 누구의 이웃인가?

예를 들어서, "서 목사님은 다정한 이웃입니다" 라고 했을 때, 그런데 서 목사님이 미국에 가서 그만 헛소리를 한다면, 그러면 이웃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무슨 말인고 하니, 제가 보기에 서 목사님이 달라졌다고 해도, 하지만 서 목사님이 보기에 제가 달라졌다고 하면, 그러면 둘 사이에는 이웃관계가 성립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의 이웃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이웃이 되게 하셔야 이웃이 된다는 말이다. 그것마저도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주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것마저 말이다. 즉 "아하, 주님은 우리의 이웃이구나. 그러니 내가 사마리아인이구나. 내가 믿어야지" 라고 해도, 그것이 언제까지 유효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웃이 누구인지 물었는데,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도리어 질문을 하신 것인데, 그러면서 무슨 변화를 촉구하시는가? "너는 저 사람이 이웃이라고 해도, 니가 변하지 않는 한, 그것은 너에게 실효성이 없는 하나의 지식에 불과하다" 라는 점을 지적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가 질문을 하게 되면, 그 해답을 알고는 줄행랑을 놓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한 사람이 "그만 스톱, 이리와!" 라고 해서, 질문을 한 우리 자신도 변하면서, 새롭게 만들어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형성된 이웃개념을 우리에게 집어넣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서의 이웃이 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이웃으로서, 그 어디를 가도 그렇게 쓰여지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이전에는 우리가 말씀을 가지려고 했지만, 그러나 이제부터는 말씀이 우리는 가지게 되는, 그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사랑' 이라는 말이다. (녹취자 - 목사님, 이러한 것은 성령을 받아야 압니까? 똑똑해야 압니까? 넘 어려워서, ㅋㅋ)

◈ 이웃사랑 자체가, 이웃을 사랑하도록 !!

이웃사랑을 설명하는데 벌써 20분도 더 걸렸지 싶은데, 물론 시간이 문제가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정도라는 것이다.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이웃사랑은 말씀에 속하고, 율법의 완성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입장은 되지 못하고, 이웃사랑 자체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데리고 다닌다는 것이다. 

마치 시장통에서 엄마가 원하는 대로 자기 아이를 여기저기 손목을 잡아서 데리고 다니듯이, 그렇게 이웃사랑을 구현하기 위해서 우리를 끌고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나는 이웃사랑을 했다" 라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우리의 사이가 곧 이웃사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용도로서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끌고 다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죄인이고,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고 말이다. 주님이 항상 선한 사마리아인임을, 주님께서 우리 자신을 끌고 가시는 와중에, 그것이 발산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 사랑 = 이웃사랑 + 선택 !!

그러면 그것으로 이웃사랑 이야기는 끝난 것인가? 한 가지가 더 남았는데, 이웃사랑에 선택을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하나님 사랑이니 말이다. "하나님 사랑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하신다면, 제가 어렵게 답변하면 다음과 같은데, 즉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선택합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 사랑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시면 말이다. "누구누구는 사랑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곧 하나님 사랑입니다" 라고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한 쪽에서 약이 올라서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저는 하나님 사랑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답변을 하시면 사랑을 집어넣습니까? 그러면 문장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그러니 사랑자체의 개념이 무엇입니까? 사전적인 의미가 말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배제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사랑이라는 단어가 답변에 담기게 되면 그건 온전한 답변이 될 수 없습니다" 라고 반박을 한다는 말이다.

◈ 부분에 속한 자가 전체를 이야기할 때는?

과연 제가 답변을 잘못한 것일까요? 사랑이란, 말이 아니라 온 몸 자체라는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온 몸 자체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온 몸 자체이니, 자기 몸만 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몸까지도 다 합친 전체 몸이니, 그래서 주님께서는 저쪽은 지옥으로 보내고, 이쪽은 천국으로 보낸다고 하면, 그렇게 가름하고 선택하는 것이 곧 '하나님 사랑' 이라는 것이다.

왜 이런 식으로 사랑을 사랑에 집어넣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고 하니까, 부분에 속해있는 자가, 즉 부분을 가진 자가 전체를 이야기할 때는, 그 전체개념을 담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용어상 말이다. 즉 부분 속에 있는 사람이 전체를 설명할 때는, 그 전체내용을 부분 속에 담아서 이야기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다 !!

예를 들어서, 성경에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다"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런 이야기를 어떤 그레데 사람이 한다면, 그것을 틀린 말인가? 맞는 말인가? 그레데는 이탈리아의 남쪽에 있는 섬인데, 지중해에는 구브로(키프리스) 섬과 그레데 섬이 있다는 것이다. 이곳이 바로 유럽문명의 발상지라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고 하니, 디도서 1장 12절에 나온다는 것이다.

(딛 1:12)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그러면 과연 이렇게 그레데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진실인가? 거짓인가?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그레데 사람이 그런 이야기했다면 말이다. 만약에 그 말이 진실이라고 하면, 그레데 사람들이 항상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중에 한 사람은 바른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레데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 라고 말이다. "한 사람만 빼놓고 거짓말쟁이다" 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부분에 속한 사람이 전체를 이야기할 때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삼성그룹에 있는 사람이 "삼성그룹은 썩었어" 라고 이야기할 때, 자기는 어떻다는 것인가? 자기도 역시 썩었다는 것인데, 그러면 썩어빠진 사람이 하는 말도 역시나 썩어빠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썩어빠진 사람의 말을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한국교회는 모두 이단이다" 라고 했을 때, 그러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이단인가? 이단이 아닌가? 역시 이단인데, 그게 로마서에 나오는데, "모든 사람은 율법아래에 있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그런 이야기를 한 사도바울은 어떠한가? 물론 자기도 역시나 율법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고 역시 로마서 3장에서 "인간은 거짓되나 하나님은 참되시다" 라고 했는데, 그런 그런 말을 하는 사도바울은 어떠한가? 자기도 역시 거짓된데, 그러면 사도바울의 로마서도 모두 다 거짓이 아니냐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등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롬 3: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 납득이 아닌, 증거 !!

그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 'thing' 이란, 즉 '그 무엇' 이란 것과 일치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 일치성은 두려움과 공포가 없는 상태에서, 즉 '다 이루었다' 라는 상태에서, 그런 완성된 것이 오게 되면, 그것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하게 된다는 말이다. 설명이 아닌 증거를 말이다. 즉 논리로 따져서 상대방을 납득시키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본 것을 증거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입니다" 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주님께서 우리보고 증거하라고 했지, 언제 사람을 꼬드겨서 교인수를 늘이라고 했느냐는 것이다. 그런 적이 결코 없다는 말이다.

◈ 노아는, 참 잘했어요 !!

노아가 자기 8식구만 방주에 태웠는데, 노아가 주님께 야단을 맞았는가? 오히려 자기 임무를 잘 수행했다고 칭찬을 들었다는 것이다. 노아가 만약에 방주에 9명을 태웠다고 하면 큰일날 뻔했는데 말이다. "노아야, 옆집에서 단 한 명이라도 더 태우지 않았지", "예, 한 명도 더 태우지 않았습니다", "아이쿠, 잘했어", "예, 감사합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노아가 하는 증거라는 말이다. 

◈ 사랑은, 곧 주님의 선택 !!

그러니 사랑은 무엇인가? 자기 주도권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사랑인데, 그러면 결국은 선택이 자기 선택이 아니고 누구의 선택인가? 주님의 선택이 우선인데, 바로 그렇게 "주님의 선택이 우선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사랑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돈이 없어서 굶어죽게 되었다고 하면, 그것은 사랑인가? 사랑이 아닌가? 대답하기가 곤란하십니까?(ㅋㅋ) 그게 곧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굶어죽지 않아야 돼" 라는 'thing', 즉 '그 무엇'과 지금 굶고 있는 자기가 일치되지 않으니, 자기가 굶을까봐 싶어서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걱정과 불안은 일치가 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니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거지 나사로처럼 굶어죽도록 우리를 선택을 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즉 하나님의 사랑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 다음부터 굶어죽는다는 것은, 물론 먹지 못해서 배는 무척 고프지만, 그러나 두려움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 이대로 가는구나. 감사합니다" 라고, 그것이 곧 주님의 사랑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밑층에서는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위층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매일매일 자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1, 2초 정도의 불꽃놀이로서 끝나버린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쉬운데 말이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나요? 

◈ 이웃사랑 - '얘야, 시집가거라' !!

자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엄마가 성령 안에 있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게 위로가 된다는 것이다. 자식이 "엄마, 큰일이 났어" 라고 해도, 엄마는 뭐라고 하는가? "얘야, 큰일은 없단다" 라고 하고, 또 자식이 "엄마, 몸이 많이 아파" 라고 해도, "너무 걱정하지마. 병원에 가면 돼.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사랑 속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룰 거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들은 것이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인상을 쓰고 찡거리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본인부터 주님의 사랑에 넘쳐서 만족스럽게 이야기를 하게 되면, 자식은 자기의 꾀(?)대로 얻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인격에서 발생되는 그 무엇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자식에 대한 이웃사랑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선택에서 무엇이 나온다고 했는가? 이웃사랑이 나오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이 첫째 계명이니 말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 사랑인데, 그 첫 번째 계명에서 두 번째 계명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먼저 자기 자신부터 주님의 능력에 휩쓸리게 되면, 거기에서 이웃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

스데반 집사님이 죽으면서 뭐라고 했는가? 정확한 멘트가 잘 생각나지 않는데, 요즘은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없는데 말이다(ㅋㅋ). 그것이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데,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게 도대체 누구의 생각인가? 스데반의 생각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렇게 활용하셨다는 말이다.

(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238페이지를 보자.

** 그러므로 지옥에 가는 자는 조금도 억울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본인의 문제는 옆에 천국에 가는 자와 견주어서 결정된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예정해놓으신 일로 십자가 앞에서 결정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하나님이 예정한 것이 무엇인지는 에베보서 1장 4절 이하에 보면 잘 나오는데, 10절까지 보면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아까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우리가 율법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했는데, 그러면 성도는 어디에서 창조되었는가? 십자가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1: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엡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 혜택, 혜택, 혜택 !!

그러므로 십자가는 전체이고 우리는 부분이 되니까, 서울, 대전, 광주, 부산, 대구 찍고, 그 어디를 가더라도 어떻게 되는가? 십자가 안의 혜택을 여전히 입는다는 것이다. 율법의 완성의 혜택을 말이다. 이웃사랑의 혜택, 선택의 혜택을 말이다.

로마서 8장 30절에 나오듯이, 미리 정했다고 하는 혜택, 부르신다고 하는 혜택, 의롭다고 하는 혜택, 또한 영화롭게 하는 그 혜택을 몽땅 다 누리면서 살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인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렇다고 하면 부활이란 것도 어떠하겠는가? 십자가 안에서 부활도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물론 밑의 세계에서는 우리의 부활은 아직 여전히 남아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의하면 이미 우리에게 다 주어졌다는 것이다. 성령을, 즉 부활의 영을 받았으니 말이다.

◈ 새로운 몸을 입고 싶어요 !!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는가? 이미 확정된 것이 있기 때문에, 즉 지금 이쪽은 허상이고 저쪽이 실상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는가? 하루빨리 이런 허구적인 것들 모두 벗어버리고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자기의 소원이었다는 것이다. 즉 이쪽 세상을 떠나서 저쪽 세상으로 가고 싶어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는데, 사도바울은 자기가 지금 육체의 몸을 입고 있는데, 그렇게 몸을 입고 있다는 것은 몸을 벗을 수 있다는 것이고, 몸을 벗는다는 것은 새 몸을 입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몸을 입은 것도 주께서 입혀주신 것이고, 또한 벗겨주는 것도 주께서 하실 것이고, 그리고 주님의 새로운 몸으로 입혀주시는 것도 주께서 하실 것이란 말이다.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후 5: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고후 5: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고후 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고후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고후 5: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고후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 일은 열심히 하되, 걱정은 하지 말자 !!

예를 들어서, 회사에서 그만 잘려서 생활비가 다 떨어졌다고 하면, 물론 가만히 있어도 돈이 들어올 곳도 전혀 없고 말이다. 그러면 무엇이 걱정이 되겠는가? 자식들은 입을 벌리고 있고 말이다.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고 하니,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두고서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도라면 말이다.

그것을 오해하면 안 되는데, 즉 "그러니 우리는 백수로 살자" 라는 것이 아니라, 트럭운전을 배우든지, 용접기술을 배우든지, 그렇게 다시 몸을 꿈지럭거리기는 하는데, 하지만 그게 걱정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주 심각하고,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자살까지 해야하는, 그러한 문제는 아니라는 말이다. 즉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심심하니 일이라도 하자"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보다도 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분이 계시니, 그러니 우리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그야말로 실질적인 문제가 아니냐는 말이다.

◈ 사장님, 안녕히 계셔요 !!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사장이 불러서 한다는 말이 "김 과장, 그동안 수고를 많이 했는데, 오늘로서 편히 집에서 쉬세요. 퇴직금도 섭섭하지 않게 넣었어요" 라고 하면서 자리를 빼라고 하면, 불꽃놀이가 없는 이상 한강에 뛰어들고 싶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천사가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너거 사장에게 내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어" 라고 한다면, 물론 다른 사람들은 환상을 보았다고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여기면 되는가? "천사가 저리 설치는 것을 보니, 그 다음 순서가 또 있는 모양이네" 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장에게 담대히 "그러면 안녕히 계셔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봅시다" 라고 하면서 회사를 박차고 나오면 된다는 말이다. 물론 다른 동료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는가? "아니, 저 양반이 왜 저렇게 좋아하지? 회사에서 잘리더니만 미쳤나?" 라고 하겠지만 말이다(ㅋㅋ).

◈ 주님의 사랑을 빼놓고, 심각한 문제는 전혀 없어 !!

그러니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 세상에서 주님의 사랑을 빼놓고는 심각한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무서움과 두려움이 없으면,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발생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서는 말이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런 것이 없다고 해서 만들어내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만들어낸다고 해서 성령의 열매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가 현재 'thing'과 서로 아귀가 맞지 않기에, 그래서 오는 두려움과 불안감, 그런 불안정한 정서와 성격,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술과 담배와 마약과 여자,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해결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매울 수 없는 그 허전함, 허탈, 권태, 지루함, 그런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때는 할 수 없이 기도를 하던지 해서 매워야 하는데, 그래서 "기쁠 때 찬양하고, 어려울 때 기도하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무엇이라도 해야하는데, 가만히 있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는데, 그런데 그 다 이루심의 의미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꽉꽉 채우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항상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무엇이 다 이루어진 것인지, 거기에 대해서는 짜증을 내면서, 아무 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고 여기고, 그렇게 자신을 심각하게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주님의 그 이웃사랑이 우리를 뒤덮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09,18 새벽 1시에 마침.

                                               도와드릴 돈이 없습니다. 다음에 오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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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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