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76강 성령

피/피 2012. 8. 29. 11:22

피76강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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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20813피p234성령

피76강 성령 120813
 
[12 대구강의 15] - [피 76] - 성령

                                                    12,08,1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234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성령님은 인간지반을 통째로 깨뜨려버린다. 그 대규모 지진은 창세 전에 예정해 놓으신 지진이다. 이 작업은 인간이 관여하지 못한다. 인간들에게는 항상 비밀이다. 이 작업은 성령님에 의해서 수행되는데, 그 과정에서 인간은 한시도 성령님으로부터 부정당하지 않을 때가 없다. 창세 전부터 있었던 비밀이 오늘날 인간의 근간을 흔들어버리는 것이다.

◈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 !!

사람이 어디에 있는고 하니, 여기 가운데 이렇게 사람이 있으면, 위에는 하늘이 있고, 또한 아래에는 땅이, 즉 지반이 있다는 것이다. 동양에서도 사람 '인(人)' 자를 그런 식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 이렇게 사람이 있으면, 위에는 하늘이 있고, 사람을 포함이 이 기반이 땅인데, 그러면 죽은 자는 어디에 있겠느냐는 것이다. 죽은 자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물론 엘리야의 경우는 특이한데,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으니 말이다. 에녹도 그렇고 말이다. 하지만 죽었다고 해서 모두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아니고, 죽은 자도 어디에 모여있지 싶은데, 그러면 죽은 자는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상상을 하기를, 여기에 이렇게 땅이 있는데, 이 땅 밑에 또 하나의 뭔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 위에도 뭔가가 있고 말이다. 그렇게 땅 밑에 뭔가가 있고, 하늘 위에 뭔가가 있다는 것은, 그 중간에 있는 사람들이 상상한 것인데, 땅 밑에 있는 것을 두고 '음부(陰府)'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음부는 죽은 사람, 즉 사자(死者)의 집합장소라는 것이다.

그렇게 음부를 사자의 집합장소로 규정해놓고, 그리고 하늘에서는 비가 오는데, 또한 해와 달이 있고 말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서울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즉 세상에서의 농사는 자기가 짓는데, 그런데 해와 달은 어떠한가?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닌데 거기에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인간에게는 일종의 두려움이라는 말이다.

◈ 그런데, 자네는 누군가?

해를 보고서 "자네는 누군가?" 라고 했을 때, 즉 "당신은 누구 때문에 거기에 있는가?" 라는 것인데, 그렇게 묻는다는 것은 미지의, 즉 모르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모르는 것이 있다고 하면, 굴복을 하든지, 정복을 하든지, 그렇게 둘 중의 하나인데, 그런데 인간은 너무나 약하니 굴복하는 쪽으로 나가자고 해서 어떻게 하는가? 해와 달을 만든 자가 있을 것인데, 그것을 '조물주' 라고 부르고, 또한 '신' 이라고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만든 것은 따로 있고, 살아갈 집은 우리가 만들면 되고, 또 곡식도 우리가 손질하면 되는데, 그런데 우리 사람이 손질하지 않았음에도 있는 것, 그것은 하나의 공포라는 것이다. 자기 관리하고 자기가 다스릴 수가 있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가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닌 것이 있다고 하면, 그런 것은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만 저쪽에서 자기를 쥐고 흔들 수 있기 때문에, 그때는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말이다.

◈ '은혜'에 대한 심각한 왜곡 !! 

그렇게 보면 사람이 산다는 것은 간단한데, 즉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자기가 선택을 하고, 그 바깥에 있는 것은 그냥 신에게 맡겨서, 즉 신에게 아부하고 부탁하고 빌어서, 그렇게 해서 신에게 혜택을 입고자 하는 식으로 하는데, 그것을 '은혜' 라고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모르는데, 복음에서 은혜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에서 시작해야하는데, 교회나 천주교나 절이나 종교단체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자기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그런 자기 것은 따로 있고, 거기에서 추가적으로 공짜로 주는 것을 은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것은 자기 죄를 알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바쳐서 거기에 대한 보상을 더 타내기 위해서 간다는 것이다. 그러한 교회를 이단이라고 하고 부정하고, 그것은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상 너무나 당연한데,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익을 보려고 가는데, 나보고 그런 이익을 포기하라는 것인가?" 라고 하면서 오히려 화를 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데, 그래서 그 나머지 것도 가지고 싶은데, 하지만 그것은 자기 힘이 미치지 못하니 신을 통해서 그것마저 소유하기 위해서 교회에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된다는 말이다.

◈ 인간이 신을 품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곧 '죄' !!

그런데 그러한 것을 두고 이단이라고 하면, 그것은 누구를 보고 이단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가? 뭔가 신에게 빌어서 더 얻고자 하는 자기 자신을 두고 이단이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할 때, 그것은 우리가 신을 품고 있는, 즉 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자체가 곧 죄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신을 안다는 것 자체도 죄인인데, 그 죄가 무엇인고 하니, '신'과 '나' 사이의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신에게 빌어서 뭔가를 얻어내겠다는 것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닌데, 그런데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면,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화를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목사는 어떻고, 저 목사는 어떻고" 라고 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거기에 다녀서 복을 따내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즉 얻을 것을 챙기면 그것으로 게임오버라는 것이다. 어느 교회든, 어느 목사이든, 그런 것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는 자기가 챙길 것만 챙기면 된다는 말이다. 

◈ 그래, 그게 다 잘못이야 !!

그런데 그러한 두고 이단이라고 하고, 잘못된 교회에 다닌다고 해버리면, 상대방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면 내가 시도하는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인가?" 라고 하면서 화를 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래, 그게 잘못이야. 그래서 죄인이야.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다 잘못된 것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평생동안 교회에 설교시간에 들었던 것이 다 거짓말이란 말인가?" 라고 나오는데, 그러면 "교회가 거짓말을 하기 이전에 너부터 거짓말쟁이다. 니가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찾는 심보자체가 걸러먹었다" 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런 심보가 모여서 오늘날 교회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 교회를 비판하고 추적해보면, 그 안에 모인 사람들의 심보가 얼마나 이기주의적인지, 그런 것이 모두 드러난다는 것이다. 물론 똑똑한(?) 사람은 아는데, 교회비판이 곧 본인비판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 사람은 그 다음부터는 말을 섞지 않는데, 그냥 외면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 천국은 확정되었다 !!

사도바울과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에스겔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천국은 확정되었다" 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문제였는데, 즉 천국은 이미 확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늘에 떠있는 해를 보고, 그 해가 너무 뜨거우니 에어컨을 달아서 좀 시원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우리가 손을 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규정이 되고 확정되어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번에 미국에서 화성에 우주선을 보내서 손대기 시작했는데, 그러면 화성은 이제 다 조져놓았다는 것이다(ㅋㅋ). 

◈ 성도는, 목격자 !!

그렇게 천국은 우리 인간이 손을 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당시로서 확정되고 규정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선지자들이, 그리고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외치면서 살아가는 모든 것은 무엇인고 하니, 천국의 모든 내용과 거기서 일어난 일이 확정되었으니, 그 나머지는 간단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는 살아가면서, 천국의 확정된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전파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냥 그것으로 끝인데, 그것을 두고 '목격자' 라고 하는데, 즉 본 것만 증거하면 된다는 것이다. 목격자로서 말이다. 아무 것도 더 보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더 설친다고 해서 천국의 인원수가 더 늘어나고 하는 게 아닌데, 물론 자기가 나태해서 천국에 갈 사람이 가지 못하는 것도 없고 말이다. 천국은 이미 주님의 솜씨로서 확정이 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우리 인간의 솜씨를 더 가미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확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목회자들이 쓸데없이 걱정을 하는데,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와 천국은 서로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인간들이 손을 대야 하는데, 형광등이 맛이 가면 갈아야 하고, 음식물 쓰레기가 나오면 버려야하고 말이다. 하지만 천국은 전혀 손댈 필요가 없는데, 그러니 형광등이 깜박깜박하는 교회를 증거하는 게 아니라, 확정되고 손댈 필요가 없는 천국을 증거하면 된다는 것이다.

◈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

그렇다면 천국의 내용이 무엇인가? 성경에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간단히 묘사되어있는데,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어린아이를 벗어나서 어른이 되려고 하는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이 그런 말씀하셨는데, 그 뒤에 나온 말씀이 무엇인고 하니, "천국은 아버지와 아들의 계시를 받은 자만이 들어간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눅 18:15)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눅 18: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눅 18: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 어린아이는 자율권이 없는데, 그래서 부모가 이끄는 대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나선다" 라고 하면, 그것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인데, 그런 어른행세를 해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국은 그런 어른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시키는 대로 하니 왔습니다" 라고, 그런 고백을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의 집합이 곧 천국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대로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자기에게 어떻게 손질을 하던지, 간섭을 하던지, 조종을 하던지, 절제를 하던지, 그런 식으로 해서 반듯한 작품을 하나 만들려고 하는 시도는, 그런 것은 규정된 천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확정된 천국과는 말이다.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

그러면 이렇게 "천국이 확정되었다" 라는 사실을 누가 처음 알았는고 하니, 예수님이 오셔서 전하니 처음 알았다는 것이다. 천국에 손대지 말고, 필요한 것은 지상과 천국을 이어주는 길이라는 것이다. 즉 완전한 세계와 불완전한 우리, 그 사이를 이어주는 길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하셨는데, 즉 예수님께서 길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거기에 가게 된다는 것이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렇게 예수님만이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기 때문에, 베드로는 자의에 의해서 순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이 조금 어려운데,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길이라고 하니, 베드로가 살짝(?) 오해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즉 "나는 천국도 알고 이 세상도 알기 때문에, 나는 길만 필요한데, 그래서 길만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길이 예수님이라고 하니, 나는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가겠다" 라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베드로는 자기가 상상해서 지어낸 천국을 가지고, 그것을 잇는 길을 예수님이라고 오해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길을 가지고는 전혀 해석이 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길 개념은 그때 그때마다 새롭게 생성되는데, 그러니 우리가 길이라고 확정하고 다가서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아하, 이게 길이구나" 라고, 그렇게 드러내는 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평생동안 길이고 천국이고 뭐고 간에 없는데, 즉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고서는 말이다.

◈ 스피노자 - '모든 규정은 부정(否定)이다' !!

다시 정리를 해보면, 천국은 확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확정되었다는 말인가? 이끄시는 대로 따라 가기면 하는 되는 분에 의해서 말이다. 그 이끄시는 분은 자기 자신이 곧 길인데, 그분이 오셔서 비로소 길이 되게 할 때, 그러면 그동안 우리가 하늘과 땅을 이어준다고 여겼던 그 길은 그만 부정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명한 철학자인 스피노자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규정은 부정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아주 함축된 말을 했는데,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규정되었다' 라는 것은 사람들이 부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규정된 것은 부정되는 것으로 말이다.

바꾸어서 말하면, "천국이 확정되었다" 라고 하면 주위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니만 똑똑하나?"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즉 부정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천국이 이렇게 확정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면, "니만 천국을 아는가?" 라고 하는데, 그게 곧 부정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다" 라고 규정하게 되면, 주위의 사람들은 "니만 길이가?" 라고, 그렇게 미규정(?)이 되고 미확정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여서 서로 사이좋게 의논을 해보자" 라고, 그렇게 나오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만 한 사람이 튀어나와서는 "나는 하늘에서 살다가 여기에 내려왔다. 그래서 내가 곧 길이고 진리이다" 라고 확정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그래, 니만 잘났나?" 라고, 그렇게 부정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깜박깜박 형광등인가? 확정된 천국인가?

그렇게 천국이 확정되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쳐다봐야 되는 것은 그 확정된 천국인데, 아까 형광등이 깜박깜박하는 것을 두 글자로 무엇이라고 했는가? 그게 교회인데, 그러면 교회는 분명히 확정되지 않았는데, 그런데 그런 교회를 붙들고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바보짓이냐는 말이다.

천국은 이렇게 확정이 되었는데, 그러면 아내는 확정이 되었는가? 남편은 확정이 되었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처나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어디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는가? 천국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마누라는 없는데, ㅋㅋ)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 사도바울의 경우에 !!

선지자가 바로 그런 자들인데, 자기 마누라가 죽어도 울면 안 되고 말이다. 그렇게 아니고 자식이고 간에, 심지어 사도바울은 설교를 하면서 아주 심한 말을 했는데, 군사로 나서는 사람은 어디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했는가? 가족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딤후 2: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이 어디 평일에 강의할 때는 과격하게 하고, 주일날 자기 교인들에게 설교할 때는 조심조심 교인들을 달래가면서 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무엇이 아쉬워서 그렇게 하겠는가? 그에게는 이미 천국이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확정된 것을 전하면 되지, 어디 사람을 달래가면서 건수를 올려서 특별수당을 받을 일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천국에서 말이다. 물론 그런 주장을 하는 목사도 있다고 하는데, 천국에도 수당이 있다고 하면서 구라를 치는 놈이 말이다(ㅋㅋ).

그러니 천국의 사람은 우리가 모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령께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즉 없는 것도 있게 하고 죽은 자도 살려낸다는 말이다. 바짝 마른 해골도 살려내는데, 굳이 사람들을 찾아다닐 필요도 없이 공동묘지에 가면 되는데, 그러한 것도 주님의 군대가 된다는 것이다. 주님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확정된 영역이니 말이다.

◈ 베드로의 경우에도 !!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가 고넬료를 꼬드기려고 사전의 모의를 했는가? 기도를 빡시게 하고 말이다. 그런 것이 전혀 없었는데, 그냥 우연한(?) 만남이었고, 오히려 베드로는 가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방인에게까지 왜 가느냐는 말이다. 그런 곳에 가지 않아도 여기도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보따리 속에 있는 것을 먹으라고 하니 베드로는 먹었고, 또한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가라고 하니 갔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들을 다 살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 10: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행 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행 10: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행 10: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행 10: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행 10:6)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행 10: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행 10:8)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행 10: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 시더라
(행 10: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행 10: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행 10: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행 10: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행 10: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행 10:15)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행 10: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행 10: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행 10: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행 10: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행 10:20)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 성령을 받은 자들이, 성령을 받아야 될 자들을 !!

그것은 바로, 확정된 천국은 확정된 자만이 갈 수 있고, 그렇게 확정된 자들만 가기 위해서는 지금도 확정적으로 일하시는 주님이 홀로 일을 하셔야 하고, 그렇게 주님이 홀로 일하시는데 있어서, 주님의 능력을 받아서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사도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도들이 곧 성령을 받은 자들인데,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가 "아하, 그게 주님의 뜻이군요. 그럼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는 아무도 천국에 넣어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자들이 성령을 받아야 될 자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말이다.

설교하는 도중에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겠는가!" 라고 하면 듣는 사람들이 얼마나 화를 내겠는가? "저 목사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모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쫓아내려고 하는구나" 라고 말이다. 즉 "당신은 성령으로 시작이 어쩌고 하는데, 그 성령이 뭡니까?" 라고 하면, "그것도 모르면 가시고!" 라는 식이란 말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그러니 배짱도 그런 배짱이 없는데,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면 또 "아볼로는 뭐고, 게바는 무엇인가?" 라고 나올 것이고 말이다. 도대데 사도바울이 무슨 배짱으로 그런 말을 하느냐는 것이다.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니 이렇게 "천국이 확정되었다" 라는 것 자체는 매우 대단한 것인데, 인생의 모든 고민은 이것으로 끝인데, 굳이 보험을 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오늘 죽어도 오늘 천국에 가고, 또 내일 죽어도 내일 천국에 가는데, 그런 천국이 확정이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은 그 확정된 것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지상의 생명을 가지고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 다시, '규정은 부정이다' !!

여기에서 "규정은 부정이다" 라는 것을 조금 더 이야기해보면, 즉 "규정되었다는 부정적으로 세상에 등장한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미 한 쪽이 이렇게 확정이 되었으면 서로서로 의논해서 하는 것이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천국이란 확정된 개념이 오게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거기에 대해서 반발해야 된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녹취자 - 목사님, 스피노자가 그런 의미로 사용한 것은 아니죠?)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들이 사도바울에게 "니가 확정이면 우리는 이단이다" 라고 하면, 사도바울은 "그래, 이단이 맞거든"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는 것은, "다른 복음은 복음도 아니고 이단이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번 런던 올림픽 여자펜싱경기에서 우리나라의 신아람 선수는 분명히 1초가 남았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심판이 보기에는 1분이 1초라는 말이다. 즉 심판 마음인데, 선수는 경기에 신경을 써야지 심판에게 신경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이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말이다. 상대방 선수가 어느 나라인지 모르겠는데, 스웨덴인가요? 아마 그 선수가 점수를 내지 않았으면 심판은 1시간이든 2시간이든 기다렸지 싶은데, 2시간이 1초라고 하면서 말이다(ㅋㅋ).

◈ '까'라고 하면 '까' !!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주님께서 까라고 하면 우라는 까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주님 쪽에서 확정된 것이지, 우리 쪽에서 된 것이 아니니 말이다. 확정도 되지 않은 것들이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제 아무리 "예수님, 제가 목숨을 바쳐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아서라 베드로야, 니가 아무리 그렇게 폼을 잡고 또 잡아도 닭이 울기 전에 3번 나를 부인하게 되어있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우리 쪽에서의 확정이 아니고, 주님 쪽에서의 확정이라는 말이다.

◈ 확정된 것은 교회가 아닌 '천국' !!

요즘 십자가 마을에 질문을 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자꾸 자기 쪽에서 확정을 지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전에 늘푸른 교회의 어느 집사님도 계속해서 뭐라고 하는가? "나도 예수님을 믿는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자기에게 확정된 것이지, 증거해야 될 분의 확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교회가 문제가 아닌데, 왜 자꾸만 형광등이 깜박깜박하는 자기 교회를 이야기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 마을도 역시 십자가 마을을 증거한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인데, 십자가 마을 자체를 증거하면 안 되고 이미 확정된 천국과 예수님을 증거해야 한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그런데 사람들이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안다" 라고 했는데, 아무튼 우리는 확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께서 이미 규정한 것이 모든 부정으로 나타나는데, 그래서 우리는 "어, 주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전혀 다르네" 라고 하는데, 당연히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요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고대 신화적 세계관의 경우에 !!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강의를 해보면, 인간이 여기 중간에 있으면 위에는 하늘이 있고 그 밑에는 땅이 있다는 것이다. 땅 아래에는 음부가 있고 말이다. 그리고 하늘에 인간이 만들지 않은 해와 달이 있는 것을 봐서는, 그것을 통채로 하나님 나라로 보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손을 댄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렇게 저 쪽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인정해준다는 것은, 여기 이쪽은 인간의 나라임을 인정해달라는 것인데, 그리고 그런 인간이 죽으면 땅 밑에 있는 음부에, 즉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3가지로 나누었는데, 그것을 고대신화적 세계관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 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뒤집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들은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육체는 음부로 내려가는데,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을 중간으로 잡아서 말이다. 물론 그 당시 고대인들도 고민이 많았는데, 이 세상에 대해서 확정된 진리를 구축하려고 하니, 보이는 대로 수집해서 확정을 해야하니 말이다. 그래야 자식들이 "아버지,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어요?" 라고 하면 해줄 말이라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조직신학이 다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모세의 율법까지도 믿겠다고 했는데, 그러니 그 얼마나 신이 났겠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땅 밑이 아닌 시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을 만났으니 말이다. 그리고 떨기나무에도 불이 붙었고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모든 것들을 통해서 자기들 생각이 옳다고 여겼다는 말이다.

◈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 ??

그런데 예수님은 어떠한가? 하늘이 아니라 지상에 내려오셨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발상은 기존의 모든 형성되어있던 세계관에 그만 찬물을 끼얹어버리는 것이라는 말이다. 즉 인간들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이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강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즉 여기에 이렇게 커다란 연꽃잎이 있는데, 거기에 인간들이 빌딩과 아파트를 세우면서 인간사회를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늘 위가 어떻고 땅 밑이 어떻고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연꽃잎을 돌돌 말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전에 누군가가 이렇게 돌돌 말린 음식을 점심시간에 대접한 적이 있었는데 말이다.

◈ 하지만, 인간은 갇혀있기에 !!

이것을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갇혀있다' 라고 하는데, 즉 "너거들이 하늘을 말하고 음부를 말하지만, 하지만 그것마저도 이렇게 보자기로 싸서 들면 들리게 되어있다"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갇혀있어서 말이다. 이 꽃잎 위에서 아무리 멋있고 아담한 교회를 세우고 해도 다 갇혀있다는 것이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런데 이렇게 '갇혀있다' 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성령이 오시니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성령이 오면 아는고 하니, 이런 기존의 세계관에 속해 있다가 탈출한 분이 있는데, 마치 로케트가 발사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게 누구인고 하니, 바로 예수님인데,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탈출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고 난 다음에 부활하셨다고 했는데, 정말로 이런 것이 어려운데 말이다. 

이것을 제가 여러 번 설명해도 듣는 사람들이 감을 잡지 못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에녹이나 엘리야도 그렇고, 베드로의 장모도 그렇고 말이다. 엘리사의 경우에는 무덤 가의 뼈다귀들도 살았고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을 당시에 무덤이 열리면서 살아난 자들도 있고 말이다. 

◈ 부활인가? 소생인가?

그러면 그들은 왜 부활의 첫 열매가 아니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여전히 자기 세계관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여기에 있고, 하늘은 위에 있고, 또 땅은 아래에 있다고 하면, 그리고 죽으면 영혼은 하늘로 가고 육체는 땅에 묻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했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늘에 있던 영혼이 죽지 않고 다시 온다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러한 세계관이, 즉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의 경우에도 영혼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그 영혼을 다시 불러내어서 지상에 있던 육체와 다시 결합을 해서 여동생들에게 나타났다고,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 천국은, 부활의 새로운 세계

하지만 그것이 과연 부활이냐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분명히 "나를 위해서 죽어도 살겠고" 라고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하지만 그건 부활이 아니고 결국 소생이라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그냥 살아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들의 세계관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죽어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바늘귀보다 더 좁은 말이다. 그렇게 들어오고 난 뒤에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그만 돌돌 말아버리는데, 왜냐하면 부활하고 난 뒤에는, 즉 부활의 첫 열매라는 것은 부활의 새로운 세계가 확정되었다는 것인데, 그 부활의 새로운 세계를 다른 말로 하자면 '천국' 이라는 것이다.

◈ 천국은 누가 만드는가?

사람들은 자기 세계에서 하늘로 올라가면 그게 천국인 줄로 아는데, 하지만 천국은 누가 만드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야 비로소 생기는 것이 곧 천국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뭐라고 하는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천국이 없는데, 왜냐하면 아직 예수님께서 주가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마 3:1) 그 때에 세례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우리가 전제를 깔지 말고 주님의 계획에 일임해야 하는데, 그러면 주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셔서 주가 되게 하셔서, 그래서 아들의 나라로 만드는 것으로 승부를 하겠다는 것이 주님의 계획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골로새서에 보면 나오는데, 물론 사도바울도 그 이전에는 몰랐다는 것이다. 그냥 하늘을 향해서, 여호와를 향해서 소리를 외치면 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 인간은, 기껏해야 '회심곡' 정도 !!

하지만 그것은 갇혀있는 상태인데, 그것을 두고 "율법에 갇혀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이 율법을 참고로 해서 상상하면 기껏해야 그 정도라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그 정도밖에 되지를 않는데, 그 율법이 이방인에게는 양심이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양심적으로 생각하는 천국과 지옥은 '그 정도'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김영임 씨가 어버이날에 부르는 '회심곡' 인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 효도하면 극락에 간다고 하는데 말이다. 인간이 양심껏 생각한다는 것이 그 정도인데, 즉 부모님에게 효도하면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효도하면 손해본 것을 모두 보상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부모에게 보험을 잘 들어놓으면 된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자기 부모에게 잘해주는 것이 곧 누구에게 잘 해주는 것이 된다는 말인가? 자기에게 잘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차곡차곡 업을 쌓으면 되는데, 쉽게 말해서 불교와 유교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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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심곡 가사(총 7부 중에서, 2부 부모님 은혜)
억조창생 만민 시주님네 이내말씀을 들어보소
이세상에 사람밖에 또 있나요 이세상에 태어나신 사람사람마다
홀로 절로 낳노라고 거들대며 우쭐대도 불법 말씀 들어보면
사람마다 임자절로 아니낳습니다.
제일에 석가여래 공덕받고 어머님전 살을빌고 아버님전 뼈를받고
일곱 칠성님전에 명을받고 재석님전에 복을빌어
석달만에 피를 모으고 여섯달만에 육신이 생겨
열달십삭을 고이채워 이내 육신이 탄생을 허니
그 부모가 우릴 길러낼제 어떤공력 드렸을까?
진자리는 인자하신 어머님이 누웁시고 마른 자리는 아기를 뉘며
음식이라도 맛을보고 쓰디쓴것은 어머님이 잡수시고
달디단것은 아기를 먹여 오뉴월이라 단야밤에 모기빈대 각다귀 뜯을쎄라
곤곤하신 잠을 못다 주무시고 다떨어진 세살부채를 손에다들고
왼갓시름을 다던지시고 어리둥실 날려주시며
동지섣달 설한풍에 백설이 펄펄 날리는데 그 자손은 추울세라
덮은배 덮어주고 발치발치 눌러주시며 왼팔에는 젖을 물려놓고
양인양친이 그 자손의 엉덩허리를 투닥이며 사랑에겨워 하시는 말씀이
금자동아 은자동아 금이로구나 만첩청산에 보배동아
천지건곤의 일월동아 나라에는 충신동아 부모님전 효자동아
동네방네 귀염동아 일가친척 화목동아 둥글둥글 수박동아
오색비단에 채색동아 채색비단의 오색동아, 은을주면 너를사고
금을주면 너를사랴 애지중지 기른정을 사람마다 부모은공 생각허면
태산이라도 무겁지 않겠습니다.
나아하아 ~  ~ 헤나네 열의열 사십소사 나하아 ~ 아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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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번 여름수련회에서 북한의 정치구조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북한은 마르크스주의와 조선시대의 유교전통의 만남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어제 TV를 보니까 북한의 여자들이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바로 그것이었다는 것이다.

북한사회는 유교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을 보면서 "야, 유교가 곧 마귀로구나" 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는데, 가부장제도가 역시나 그렇고 말이다. 여자는 남자를 섬겨야 된다고 하는, 그런 것들이 전통적으로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 부활의 세계인가? 산 자의 세계인가?

아무튼 이 부활의 세계라는 것은, 아무도 부활의 세계에 들어간 자가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어린양의 보좌가 성립되어야, 비로소 부활의 세계가 성립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엘리야나 예수님을 믿고 죽은 사람들이 간 나라는 부활의 세계가 아닌데, 그냥 산 자의 세계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관점에서 보면, 산 자의 세계나 부활의 세계나 천국이 다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러나 주님의 계획이란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자꾸만 "우리는 죽어서 어디에 갑니까?" 라고 하지 말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증거해야 하는 것은 "죽으면 좋은 곳에 갑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프로젝트를, 주님의 계획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 천국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이 !!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들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을 만드신 분입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면서, 그 십자가의 효과와 효능에 대해서, 그것이 곧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할 때, 거기서 말하는 복음은 십자가를 말하는데, 즉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예수님의 피를 증거함으로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그것을 확정한다는 말이다.

◈ 이스라엘은, 포로로 잡혀있는 백성이 되어야 !!

어떻게 해서 그런지, 그것을 조금만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은데, 즉 애굽나라가 그냥 있을 때는 그냥 애굽나라인데,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 주목을 받으면서, 이 히브리인들은 갇혀 지내는 특수 민족이 된다는 말이다.

애굽의 바로 왕이 모든 백성들에게 골고루 대해주면 출애굽은 있을 수가 없는데, 그런데 바로 왕이 미쳤는지 갑자기 어떻게 하는가? 바로 왕이 히브리인들에게 엄청 압박을 가하니, 여기에서 히브리인들의 위상이 갑자기 부각이 된다는 것이다. 갇혀 있는, 즉 포로로 잡혀있는 백성임이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포로로 잡혀있는 백성이란 점이 성립되어야만, 신약에서의 구원, 엑소더스, 구출, 혹은 탈출과 같은 개념이 나온다는 것이다. 

◈ 언약적인 개념들이 새롭게 생산되어야 !!

방금 제가 한 말을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새로운 개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생산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런 개념들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가면서, 거기에서 언약적인 개념들이, 즉 구원, 죄 용서 등의 개념을 새롭게 만들어내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끼리 모여서 "죄 용서는 이런 것이다" 라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그런 것은 우리가 지어낸 것이니, 그것은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 제가 순교해서 천국에 가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자기 생각을 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 되는데, 그렇게 해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이다.

먼저 개념이 성립되어야 하고, 그 개념을 성립하신 그분에 의해서 우리는, 그 개념에 합당한 백성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주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디로 가는가? 가나안 땅으로 가는데, 물론 표면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 잠시, 주일오후예배를 드리겠습니다 !!

그런데 어제 오후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그들이 가나안 땅에 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간다고 했는가? 가나안 땅이 아닌 약속의 땅에 가야하는데, 그런데 철없는 히브리인들은 가나안 땅에 부동산을 접수하러 간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조성하셨는데, 어제 오후시간에 설교한 것을 간단하게 리바이벌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는 원주민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 땅이기 때문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은 무슨 개념을 짊어지고 있는가? 탈출, 구원, 그것도 "어린양의 피 때문에 살았다" 라는 새로운 개념을 짊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자기들 아이디어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가나안 10족속(7족속?)인 원주민들은 그런 아이디어가 있는가? 없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룩이 아니고, 하지만 이스라엘 족속들은 그러한 개념이 뒤덮여 있으니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방적인 것인데, 그러니 함부로 "에이, 더러워"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언약의 새로운 개념이 도입될 때만 "더럽다, 세속되다, 거룩하지 않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성경에서 말하는 '음란' 이란 무엇인가?

성경에 '음란' 이라는 말이 분명히 나오는데, 하지만 예레미야서에 보면 음란이 무엇인고 하니,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는데도 자꾸만 이 음란을 개인의 가정사 문제로 돌리는고 마는데,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음란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서 3장에 보면 이 음란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2절에서 "네 눈을 들어 자산을 보라. 너의 행음치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렘 3:1) 세상에서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본부가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않겠느냐 하느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렘 3:2) 네 눈을 들어 자산을 보라 너의 행음치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렘 3:3) 그러므로 단 비가 그쳐졌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 집단적 구원 !!

여기에 음란, 행악, 창기 등이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이 음란의 문제에 있어서 땅을 인격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처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의인화'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성경을 개인의 가정문제와 결부시키지 말라는 것인데, '집단'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탈출할 때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으로 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몸, 즉 집단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가나안 땅은 '새로운 개념'에 의해서 !!

그것이 곧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들어가고자 하는 그 땅은 하나님의 새로운 개념인데, 제가 지금 '새로운 개념' 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데, 그것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 새로운 개념에 의해서 그 땅은 더러운 땅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인 가나안의 원주민들은 어떠한가? 원주민들은 자기 아내밖에 모르는데(?), 전혀 음란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나도 착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새로운 개념이 오면 어떻게 되는가? 그게 곧 음란이 되고, 간음이 되고, 또한 간통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교회에서 설교를 하니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데, 성경전체의 개념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데, 그런데 인간들의 세계관에, 즉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또 내가 있다. 그래서 내가 하늘에 올라간다" 라는 것을 그대로 붙들고 있으니, 거기에 언약개념을 집어넣으니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옛날의 이야기인데 왜 하는가? 지금은 무엇을 하면 복을 받는지, 그것을 이야기해야지"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교인데, 갓바위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성경을 동원해도, 그런 식으로 나가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교인들이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수상하다는 의미인데(ㅋㅋ), 지금도 그렇게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 앞으로 계속 언약궤만 앞장세워라 !!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개념을 짊어지고 여리고 성에 들어가는데, 그때 주님은 다짐에 다짐을 했는데, 즉 "여리고 성은 니 세계가 아니다. 언약을 앞장세울지 말지를 결정해라. 언약을 앞장세우고 들어간다면, 칼과 활과 무기는 모두 버리고 언약궤만 앞세우고 들어가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알았지?" 라고 말이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라고 했는가? "예, 그렇게 살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하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들이 과연 그렇게 했는가?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방나라의 칼과 활을, 즉 그들이 가진 것들을, 그렇게 주변 나라들을 부러워하고, 정작 자기들 앞에 있는 언약궤에는 별 관심도 없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들의 개념자체가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른다는 차원에서 바라보았는데,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그 가나안 땅은 포도송이를 두 사람이 들고 갈 정도였는데, 거기에 그만 '훅' 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자기들이 보기에 너무나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 했다는 말이다.

◈ 죽음의 세계가 곧 약속의 세계 !!

하지만 이 가나안 땅 밑에(?) 무엇이 있는가? 약속의 땅이 있는데,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는 땅 밑에는 무엇이 있다고 여겼는가? 음부인데, 죽은 자의 세계가, 즉 죽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죽음의 세계가 곧 약속의 세계임을 옛날에는 미처 몰랐다는 것이다. 죽어야 산다는 것을 말이다. 살아서 어떻게 가겠다고 것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활이라는 것은 죽어야, 그것도 그냥 죽으면 안 되고 십자가에 함께 죽어야만 가는 나라가 부활의 세계라는 말이다. 천국은 그렇게 확정되고 규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천국백성의 입에서는 터져 나오는 고백이라는 말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게 두렵고 무서워하던 죽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기피하고 싶었던 죽음이란 것이 어떻게 되는가? 물론 지금도 죽음은 무서운데, 하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죽이시는 죽음이야말로, 즉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살린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죽음만이 부활을 꿰차고 '콕, 콕' !!

여기에 이렇게 바늘이 있으면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이 실을 끼우고 콕콕 쑤셔서 옷을 깁든지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콕콕 쑤신 자리가 실과 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예수님의 죽음만이 부활을 꿰차고 콕콕 쑤신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쑤시면 우리는 아픈데, 그렇게 가고 싶은 수련회도 가지 못하고 말이다(ㅋㅋ).

그렇게 찔러주면 몸은 죽어도 영생을 얻는, 그렇게 영생으로 꿰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러한 바느질 수준이 아니라 아예 미싱으로 두루룩 박아버리는, 마치 누비이불처럼 말이다. 그렇게 우리의 온 몸을 마구 박아버리는데, 물론 성령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활의 세계는 우리가 예상하던 그런 세계가 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세계가 곧 부활의 세계라는 말이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라고 했는데, 그것은 그가 무엇을 알았다는 말인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죽는 것밖에 없음을 말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께서 시켜서 하는 것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그것도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주님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자기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는 날마다 죽는데, 오직 그것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확정된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데,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손을 댈 필요성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손댈 수도 없고 말이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 성신과 성령 !!

그래서 오늘 교재 234페이지에 나오듯이, "성령님은 인간지반을 통째로 깨뜨려버린다" 라고 하는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성신이 아니고 성령이라는 점인데, 이번 수련회 때 성신과 성령의 차이점을 이야기했는데 말이다. 성신은 미확정이고, 성령은 이미 확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무서운가? 성신은 인간의 가능성을 보지만, 하지만 성령께서는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그것을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을 해도 다 부질없는 짓이고, 즉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의미가 없는 것을,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서 의미를 가지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 인간은, 실수할 자격도 안 돼 !!

흔히 "내가 실수했다" 라고 하는데, 여기서 '실수를 했다' 라는 것은 '손해를 보았다' 라는 의미인데, 하지만 원래 자기 것이 없는데, 무슨 손해를 보고 말고 할 것이 있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그때 보증만 써주지 않았어도 2,000만원을 날리지 않았을 텐데" 라고 하는데, 보증을 서면 안 되는가? 도대체 그 2,000만원은 누구의 것이냐는 말이다.

그런데 그때 "아하, 내가 2,000만원 때문에 인생을 살았구나. 주님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면, 그렇게 주님은 미싱을 가지고 다시 우리의 온 몸을 마구 박아버린다는 것이다(ㅋㅋ). 보증을 서든 말뚝을 박던 간에 말이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었는데, 물론 비자금 2,000만원을 날렸다면 참으로 아까운데, 그것을 모으려고 하면 몇 년이나 걸리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없어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2,000만원이 문제가 아니라 어린양의 피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 여기에 돈이 있습니다" 라고 하면, "이게 2,000만원이가? 참 고맙다. 어서 들어오너라" 라고 하는 주님은 없다는 것이다. 즉 돈을 바쳐서 구원을 받는 방법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실제로 시편에 나오는데, "돈으로는 어떤 영혼도 살릴 수가 없다" 라고 말이다.

(시 49: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시 49:7)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시 49:8)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그러니 헌금을 하든지, 구제를 하든지, 그런 것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구원도 전혀 받지 못하는 돈 때문에 울고 웃는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馳心)치 말지어다 !!

시편 62편 10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치심치 말지어다(do not set your heart on them(NIV)" 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두지 말라" 라고 하는 의미인데, 이 본문을 가지고 언젠가 가락교회에서 설교를 하려고 하는데 말이다.

(시 62:10)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

지금 계획으로는 가락교회에서 25분 짜리 동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려고 하는데,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서 바로 보도록 말이다. 그런데 이 유투브는 사이트가 우리나라에는 없고, 필리핀이나 외국에 있다고 하는데, 물론 공짜가 아니라 돈을 주고 계약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올리려고 하는 설교본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시편 62편 10절 말씀인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재물이 늘어도 그것을 마음에 두지 말라고, 즉 재물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 있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 집사님, 헌금이 너무 적게 나왔지요?

그런데 우리는 재물이 늘어나는 것을 무엇으로 보는가? 두 글자로 '축복' 이라고 하는데, 시편 112편 10절에 뭐라고 하는가? "악인의 소욕은 멸망하리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 헌금이 많이 들어오면 뭐라고 하는가? 역시 축복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시 112:10) 악인은 이를 보고 한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하리니 악인의 소욕은 멸망하리로다

어제 우리교회에 헌금이 적게 나와서 농담 삼아서 "헌금이 너무 적게 나왔지요? 우리 약한 교회가 됩시다" 라고 했는데(ㅋㅋ), 아무튼 우리는 돈이 없으면 저주로 간주하고, 돈이 증가하면 주님이 자기를 많이 봐주는 것처럼, 그런 느낌이 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지 나사로는 하루 일당이 얼마였는가? 그 양반은 의료보험도 없었지 싶은데, 온 종일 긁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천국에 갔다는 것이다.

◈ 천국 - 상형문자, 코드, 암호 !!

그러니 "규정된 것은 부정이다" 라는 말을 제가 사용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사람들이 설치해놓은 세상 시스템 속에 하나님 나라가 직접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믿고자 해도 믿지를 못하는 전혀 예상 밖의 사태들이 그림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림으로서 말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상형문자라고 하는데, 혹은 코드나 암호라고 하고 말이다. 그러니 풀어야 하는데, 얼룩덜룩한 상형문자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천국이란 것이 우리가 소통하고 있는 개념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뭔가 얼룩이 져서 애매 모호하다는 것이다. 즉 "이게 무슨 뜻이야?" 라고 말이다. 마치 니고데모와 예수님이 대화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즉 규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성구사에 가서 액자로 만들어야 하는데, 즉 "재물이 늘어도 축복이 아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뭔가 '아니다' 라고 해주어야 확정된 것에 대한 부정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이다' 라고 하면 뭔가 개념정리가 잘못된 것이란 말이다.

◈ 십자가는, 부정의 반복 !!

그러니 천국은 언제나 이 땅에서 "무엇 무엇은 아니다" 라고, 즉 "보이는 것은 소망이 아니니" 라고, 그렇게 '아니다'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말고 주님을 사랑하라" 라고 하든지, 또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 라고 하는데,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게 과연 긍정이겠는가? 부정의 반복이지 말이다. 십자가는 한번 지고 때려치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롬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우리에게서는 끊임없이 긍정이 올라오고, 그러면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부정으로 가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령이 십자가의 영이기 때문에 그러한데, 그러니 이 십자가의 영은 미확정된 세계에서 버림받은 분의 확정된 어떤 분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그것이 로마서 8장 9절에 나오는데,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라고 말이다. 또한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이 세상 인간들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얻은 분의 영이 우리들 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이 땅의 개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 성령께서 수건역할을 하셔서 !!

그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니,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오랜만에 그 산에서 내려와서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섞이려고 하니 누가 거북스러워했는가? 그의 얼굴에서 빛나는 광채로 인해서, 그게 전혀 최고급 화장발로 된 것이 아닌데 말이다(ㅋㅋ).

(출 34: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아무튼 모세의 얼굴이 너무나도 빛나기 때문에 누가 힘이 드는고 하니, 이 세상 사람들인데, 그래서 모세가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 기껏(?) 얼굴에 수건 하나를 걸쳤다는 것이다. 성령이 그 정도인데, 즉 성령 안에는 모세 얼굴의 광채가, 복음의 광채가, 즉 십자가 부활의 영광의 광채가 모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들어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감당이 되지 않으니 성령께서 수건노릇을 해서 우리 속에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증을 서고 해서 돈을 다 날려서 고민하고 있을 때, 그때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어떻게 하는가?

"야, 복음을 광채를 내가 무시했구나. 나는 이미 구원을 받은 자인데, 그런데 그 구원의 기쁨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돈 2,000만원 날린 것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다니, 도대체 내가 구원받은 자가 맞는가? 정말 나쁜 놈이잖아" 라고,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기를 당해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 그 구원의 기쁨이 물론 1초나 2초 정도 유지되는데, 그렇게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갈 때, 그것이 바로 숨겨진 복음의 광채가 잠시 비춰진 것인데, 그리고는 곧장 또 떠나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 성령님은,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기에 !!

물론 우리 욕심에는 떠나지 말고 계속해서 같이 있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두 제자가 다메섹으로 내려갈 때, 참 다메섹이 아니라 엠마오로 내려갈 때, 주님께서 잠시 나타나셨다가 이야기를 하고 떠나버리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의 누구의 소유물이 될 수 없는데, "주님이 오니 참 좋네요. 계속해서 같이 있었으면 합니다" 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기 위해서, 즉 우리는 죄인임을 폭로되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주님은 잠시 자기를 보여주시고, 우리는 또 우리의 일상생활로 돌아가서 본색을 드러내어야 하는데, 그래서 또 후회하고 안타까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것을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성신의 이름으로 하셨다는 것이다. 성신의 이름으로 말이다. 성령이 오셨을 때는 부정적이었는데, 마찬가지로 성신이 왔을 때도 그 주변에 있어서 부정적인 것들이 드러나고 밝혀졌다는 것이다.

◈ 항공모함 '이스라엘' 호가 지나가면 !!

그것을 제가 어느 강의에서 항공모함으로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말이다. 이렇게 항공모함이 있다고 하면, 이 항공모함이 얼마나 큰가? 2만톤에서 4만톤에 이르는데(5만톤이 넘는데, ㅋㅋ), 이렇게 고요한 바다에 항공모함이 지나가면 어떻게 되는가? 그 주위에 있는 바다물결이 요동을 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지나가는 곳에는 그 주위에서는 부정적인 것들이 그만 요동을 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지나가면 누가 요동치는가? 그냥 가만히 있던 사울왕이 갑자기 악신이 들려서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다윗이 지나가면 사울이 말이다.

◈ 두 증인 !!

그러니 '두 증인' 인데, 즉 성도가 복음을 전하게 되면 고요했던 주변이 그만 소돔과 고모라로 변하고 만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장소로, 즉 소돔으로 변하고, 애굽으로 변하고 만다는 말이다.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말이다. 그러니 바로 그 두 증인을 죽인 곳이 곧 애굽이고 소돔과 고모라라는 것이다. (두 증인, ㅋㅋ)

(계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
(계 11: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계 11: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그러니 복음을 전하면 완전히 뒤집어지는데, 하지만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고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너는 항공모함인 이스라엘이다" 라고 티를 내게 하면, 주위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우리를 공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위험을 안겨주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자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성경을 한 군데 찾아보겠는데, 오늘 강의를 하면서 성경말씀을 처음으로 찾지 싶은데 말이다. 고린도후서 4장인데, 7절부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

여기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라고 하는데, 즉 항공모함이라는 것이다. 왜 보트가 아니고 항공모함인가? 성령의 능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 엄청난 항공모함을 가졌으니, 그래서 "이는 능력이 심히 큰 것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일을 당해도 우겨쌈을 당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나가 어디 해변가에 빠졌는가?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자기 힘으로 기어서 나오면 되는데, 하지만 요나가 빠진 곳은 매우 깊은 심해바다인데, 큰물고기가 놀 수 있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박태환이 와도 안 되는데, 물론 순양이나 펠프스가 와도 안 되고 말이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을 다 모아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으로는 도저히 헤엄쳐 나올 수 없는 곳에 그만 빠지고 말았는데, 그리고 자기를 빠트린 배는 떠나고 없고 말이다. 거기에다가 그 주변에는 풍랑이 마구 일었는데, 그러니 그 뒤의 이야기는 더 이상 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죽었다는 말이다.

◈ 그게 곧, 성령을 받은 자들의 하루하루 처지 !!

그게 바로 무엇인고 하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하루하루 처지라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 힘으로는 전혀 대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아무 대책이 없는데, 그것을 여기 본문에서는 "답답하다, 낙심하다, 버림을 받다, 거꾸러뜨림을 당하다, 망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한 자들에게는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놀랍게도 항공모함이, 즉 성령이 있는데, 그 성령은 지극히 큰 능력인데 말이다. 그러니 지극히 큰 어둠 속에 집어넣을 때, 지극히 큰 능력이 자기를 본 때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지극히 큰 능력을 말이다.

그동안 우리는 작은 것은 작은 것으로 해결하려고, 즉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했는데,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런 것이 그만 습관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주여, 이 정도는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우긴다는 말이다.

◈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요나처럼 깊은 바다에 집어넣게 되면,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아무 것도 없는데, 그럴 때 비로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아무 것도 못한다" 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렇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 쪽에서 해결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가, 즉 성령을 받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해결책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아무리 사기를 당하고 해도, 그것도 하나님의 해결책이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라고 본다는 말이다.

◈ 그때그때마다 주께서 새롭게 만드는 인생 !!

물론 자기가 보기에는 자기 인생이 망했다고 여길지 몰라도, 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대성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성공여부는 자기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마다 주께서 새롭게 만들어내는 인생을 우리가 선물로 받는다는 것이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성도는, 주님이 만든 비빔밥 !!

어느 강의에선가 비빔밥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어제 설교시간인가요? 비빔밥을 만들려고 하면 먼저 밥을 넣고 그 위에 나물을 얹고 양념장을 뿌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현재 시점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오늘 아침에 비가 온 것도, 그 모든 것을 다 집어넣어서 지금의 '나'로 새롭게 구성하셨다는 것이다. 주께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 힘으로 했다고 여기게 되면, 하지만 나중에 어떤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그것이 전혀 우리 힘이 아니었음이 들통나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 속에 우리가 만들지 못하고 우리가 해내지 못한 분이 계신다고 하면, 그런 자만이 성령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자만이 죽음에서 부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국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만들고, 또한 그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도 자기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역시 주님께서 들어가도록 매일같이 조치를 하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말인가?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면서 말이다.

◈ 당하고, 당하고, 또 당하면서 !!

그렇게 당하고, 당하고, 당하는, 매일같이 당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지만 그런 가운데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이 거뜬히 이 세상을 이긴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고린도후서 4장 11절에서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생명은 거뜬하게 이 세상에서 빠져나갔는데, 죽음에서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 생명이 말이다. 바로 그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흘만에 부활한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작동을 하게 되면 어떻데 되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시시한 일이고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는 것이 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런데 바로 그러한 짓들이 모두 다 부질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은 우리 자신이 살려고 한다고 해서 살 수 있는 생명이 아니고, 이미 주님께서 만들어서 하늘나라에 장만해둔 생명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늘나라에 따로 있는 그 생명은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유지하는 그 목숨만을 생명으로 여기니, 아마도 우리가 고생을 하더라도 한 참을 더해야 하지 싶은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성령께서 그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 믿음 - '저는 아무 것도 믿지 못합니다'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저는 그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다시 제가 "무엇을 믿습니까?" 라고 묻는데, 물론 그러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제가 다시 "그것이 당신이 믿어서 믿어집니까? 아니면 믿고자 하지 않아도 믿어집니까?" 라고 묻는데, 그 질문이 중요한 질문인데 말이다. 

만약에 자기가 믿어서 믿는 것이라고 하면, 자기가 믿을 만한 것은 믿어진다고 하고, 그렇지가 않은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믿지 못합니다" 라는 것이 믿어질 때, 그것이 곧 믿음이라는 말이다. 아무 것도 믿어지지 않는데, 그런데 주께서 믿어지도록 조치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 믿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믿음을 설명하다가보니 말이 많이 어렵게 되었는데, 사실상 믿음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닌데 말이다(ㅋㅋ). 그런데 하도 믿음도 없는 자들이 믿는 척을 하니까, 말을 이렇게 어렵게 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믿음도 아닌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우기니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책이 있는데, 그러면 "이것이 책이다" 라고 믿어진다고 하면, "그건 지나개나(아무나?) 다 믿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믿어지도록 하셨기에 믿는다" 라고, 그렇게 고백하는 자들이 믿음이 있다는 말이다. 즉 "이것은 성령까지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믿어" 라고 하면,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생활이 아니라는 것이다.

◈ 믿음의 기본은, '자기 부인' !!

믿는다고 하면 범사에 감사해야하는 것이지, 감사할 것은 따로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따로 있다고 하면, 그렇게 되면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내가 이것을 믿을까? 말까?" 라고, 그렇게 자기가 골라잡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믿어라' 라고 명령을 해서 믿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천국에 갈 수 있는 자들에게 성령이 주신 믿음은 그 기본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부인' 이라는 것이다. 즉 "내가 믿는다고 하는 것도 내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자기 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소망하는 것도 잘못된 소망입니다" 라고 말이다. 그런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이것도 믿습니다, 저것도 믿습니다" 라고 하면 주님이 뭐라고 하시겠는가? "그래, 많이 믿어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ㅋㅋ).  

교재 234페이지를 계속해서 보자.

** 인간은 자기가 만들어내는 능력을 아무리 자기에게 적용시켜보아도 뿌리 그 자체만큼은 손댈 수가 없는 한계를 가진다. 왜냐하면 제 아무리 자기를 부정해도 그 부정의 부정이 되레 긍정으로 환영받게 되고 우대받게 되기 때문이다. 부정하기 위해서 부정해버린 것이, 결국 그 자체가 긍정으로 돌아서는 모순이 발생해버린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을 개별자로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하나'로 취급해서 다루신다. 지반이 공통의 지반이기 때문이다.

◈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

이게 무슨 의미인가? 우리 인간에게 개인적인 믿음은 없고, 예수님이 주신 선물, 즉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든 간에 말이다. 그렇게 인종이나 직업이나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공통되는 믿음의 내용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그 믿음의 내용이 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부자이든 거지이든,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어른이든 아이이든 간에,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사실, 더 시커먼 죄인이 따로 있고, 덜 시커먼 죄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구원받은 자는 자기의 잘남이나 학식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말이다. 그런 기준으로 교회를 보았을 때, 우리가 교회를 믿는다는 것이 참으로 곤란하다는 것이다. 교회를 믿는다는 것이 말이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이제 교재 235페이지를 보자.

** 인간의 자아인식은 타인과 자아를 확실히 구별시키는 개별자 의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 성령님은 과연 타인인가?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이것은 헤겔이 정리한 개념을 사용했는데, 제가 왜 이런 것을 썼는고 하니, "성령을 과연 내 바깥에 있는 타인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성령을 타인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것은 누가 잘못되게 가르쳤는고 하니, 이미 타인이 아닌 악령이 우리 속에서 그렇게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이미 여기서 우리의 중심이 선점(先占)되어있는데, 즉 우리가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나머지 모든 것은 다 외부의 것이고 손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 손님이 들어오신다. 잘 대접해드려라" 라고 말이다. 그건 악령의 음성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전혀 손님이 아닌데, 예수님이 과연 우리의 손님인가?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렇게 같이 먹고 마시는데, 과연 손님인가? 손님이 아니고 우리의 주인인데, '주(主)' 라는 것이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 당나귀의 항변 - '왜 때리십니까?'

민수기 22장에 보면, 발람 선지자가 나오는데, 그가 당나귀를 하나 부리고 있었는데, 그러면 당나귀가 주인인가? 발람 선지자가 주인인가? 분명히 사람인 발람 선지자가 주인인데, 당나귀는 그의 종이고 말이다. 물론 발람 선지자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이 당나귀가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막대기를 가지고 패주었는데, 말을 듣지 않으면 마구 패야하니 말이다.

그렇게 때리니 당나귀가 뭐라고 했는가? "주인님이 때리면 맞아야지요" 라고 했는가? 그것이 아니고, 이 당나귀가 갑자기 반항을 한다는 것이다. "왜 때리십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승마 팀이 경기를 하는데 말이 반항을 했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면 그것은 결국 당나귀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발람을 실어 나른 것이 된다는 것이다. 발람이 당나귀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나귀가 발람을 실어서 나른 것이 말이다. 그러니 당나귀가 "왜 때리십니까?"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나귀에게 시켰다는 것이다.

(민 22:21)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귀족들과 함께 행하니
(민 22:22) 그가 행함을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타고 그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민 22:23)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떠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민 22:24)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민 22:25)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민 22:26)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선지라
(민 22:27)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의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 지라
(민 22:28)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그렇다면 여기서 당나귀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발람이 아닌 주님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 순간 발람은 어떻게 되는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있어서 그만 타인이 되고 마는데, 즉 하나님에게 있어서 남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자기 자신에 대해서 '타인'이 되어야 !!

바꾸어서 말하면, 그 이전에 악령이 들린 우리에게 성령의 오심으로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자신에 대해서 타인이 되는데, 즉 자기 바깥에 있는 타인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당나귀가 되고, 우리주인으로 주님이 폼을 잡고 계시는데, 그것을 두고 "값을 주고 산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값을 주고 샀기 때문에, 너는 이제 너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렇다면 우리의 옛날 더러운 버릇, 즉 자기 밖에 모르는 것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원래 천국에 가는 자기 모습이 아니라, 쫓겨난 자기의 옛 모습인데, 그것을 우리는 날마다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주인공이 되고, 자기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좋은 하나님이라고 우기는, 그것이 자기의 타인이라고 여겨진다면, 그런 사람이 곧 성령님이 주인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성령이고 예수님이고 삼위일체이고 간에, 그런 것은 다 자기 바깥에 있는 것이 되고 마는데, 기분이 좋으면 주님에게 헌금을 하면서 알랑방구를 뀌면서 복을 더 받으려고 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삐치고 말이다. 그러니 주인공이 자기 자신인데, 모든 일의 결정을 다 자기가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면 하는 일이 다 망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 다시, '내가 타인이다' !!

다시 말씀드리지만 "내가 타인이다" 라는 것인데, 누구 앞에서 그렇다는 말인가? 주님 앞에서 말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의 주인공을 마치 누구라고 여기는가? 자꾸만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서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평생을 믿어도 십자가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십자가를 믿게 하시면, 자기가 믿는다고 하는 것은 다 쫓겨나서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께서 성령을 심어주게 되면, 이제는 자기 몸의 주인이 바꾸어져서, 설쳐도 주님이 설친다는 말이다. 자기의 옛 모습은 바깥에 나가있다는 것이다. 즉 정규직이 비정규직이 되고,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라는 것은 옛날에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인데, "사나 죽으나 내 것이로다" 라고 하지 말이다. 하지만 성령을 받는 자에게 그러한 것은 바깥에 나가있다는 것이다. 물론 바깥에서 계속해서 꼬드기고 있지만 말이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타인은 끊임없이 속삭여 !!

그러니까 "바깥에 쫓겨난 내가 나를 꼬드긴다" 라고 말할 수 있는데, "예수님을 믿어도 소용이 없지? 그러니 니가 알아서 해" 라고 말이다. 지금도 그런 속삭임이 우리가 아침에 눈만 뜨면 계속해서 울려 퍼진다는 것이다. 여름철에 매미가 울 듯이 울어대는데, 그것도 데시빌을 90으로 해서 말이다(ㅋㅋ).

그렇게 매미는 계속해서 우는데, 즉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면 복음도 아는 것 같고 참 좋지? 그런데 집에 오면 어떻게 되지? 처자식도 먹여 살려야 하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인생 꼬라지 참 좋다. 예수고 뭐고 다 치워라. 너무 피곤하지? 신앙은 그냥 걸쳐만 놓으면 나중에 다 구원을 받아. 중요한 것은 바로 너 자신이야" 라고 말이다. 이렇게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우는데, 얼마나 귀찮은지 모른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236페이지를 보자.

** 따라서 성령님께서는 선악적 게임판 자체를 뒤엎기 위해서 인간을 개별자로 간주하게 하는 경계를 철거하는 방식으로 활동을 하신다. 그것이 바로 유일하게 예정되신 '정하신 분'을 제시하고, 이 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모든 개별자들이 실상은 '죽은 자'들임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그리스도의 사람 !!

제가 조금 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연꽃잎을 폭 싸버린다고 했는데, 즉 갇혀있다는 것이다. 그 갇혀있는 데서 벗어난 분이 곧 예수님이고, 그분의 영이 우리에게 왔다는 말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데, 그래서 "저는 아닙니까?" 라고 하면, "자네는 누구인고?"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사람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말이다. 

◈ 누가 주어(S)이고, 누가 술어(P)인가?

논리학에서 주어(S)와 술어(P)가 있는데, 예를 들어서, "나는 의사이다" 라고 한다면, '나'와 '의사'를 동일하게 보는데, 바로 그것을 주님께서는 파기시켜버린다는 것이다. 그 주어 자리에 예수님을 넣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의 것'이 되는데, 즉 "나는 의사이다" 에서 주어를 비워야하고 술어자리에 넣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인하여 나는 의사가 되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예수님 때문에 70평생을 산다" 라고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매순간이 정말 이렇게 되면 참으로 좋은데 말이다. 그렇지 않나요? 그런 인생을 살아가면 "나는 예수님 때문에 버스를 놓쳤다" 라고, 혹은 "나는 예수님 때문에 중국펀드에 몽땅 가입해서 망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누구지? ㅋㅋ).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항상 비워놓아야 하는데, 즉 "나는 타인인데, 주님이 쓰실 때만 주님께 의미가 있는 존재로서 살아간다" 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께만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자기는 '쏙' 빠지고 주님께만 의미가 있는 인생, 그런 인생을 살아갈 때는 개념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개념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의사가 되었다", 혹은 "판사가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아신 자, 미리 부르신 자, 의롭게 된 자, 영화롭게 된 자" 라고, 그렇게 개념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무슨 사업을 하고 있는가?", "건물은 몇 개나 가지고 있는가?", 또한 "골프 회원권은 몇 개나 있는가?" 라고 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 예수님이 쓰신 막장 드라마 !!

만약 예수님께서 드라마를 만들면, 거기에 앞서 보통 드라마는 어떠한고 하니, "어느 시골출신의 아가씨가 백화점 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잘생긴 남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지갑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그 지갑 안에는 100만원 짜리 수표가 무려 10장이나 들어있었고, 그것을 이 순박한 아가씨가 주워서 가져다가 주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서로 사랑의 감정이 싹트게 되었고, 결국은 이 아가씨가 재벌2세의 부인이 되었다" 라고, 그런 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만들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어떤 아가씨가 백화점 청소를 하다가 미리 정하신 자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런데 나중에 그 사람의 지갑을 찾아주었더니만 그가 바로 부르신 자였다. 그래서 그 여자는 재벌2세인 그 남자와 결혼해서 의롭게 되고 또한 영화롭게 되었다" 라고, 바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로마서 8장 30절에 기초한 드라마인데, 물론 그렇게 되면 아무도 드라마를 시청하지 않겠지만 말이다(ㅋㅋ). 젊은 사람들이 맞선을 봐도 그런 식으로 하면 참 좋을 텐데, 즉 "당신은 미리 정하신 자입니까?" 라고 하면, "예, 저는 미리 정하신 자입니다" 라고 하고 말이다. 직업이나 취미 등을 묻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ㅋㅋ).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물론 그런 말을 하든 말든 간에,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주님은 언제나 어디에 계시는가? 주님은 주어자리(S)에 앉아 계시고, 또 우리는 술어자리(P)에 있게 되는데,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간다는 말인가? 주어자리에 계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술어자리에 있으니 말이다.

이제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236페이지를 보자.

** 율법을 통해서 모든 인류를 죽음과 저주의 심판 아래 두신 그 작업이, 이제는 십자가를 앞장세운 성령님의 활동에 의해서 전체적으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성령님은, 왜 십자가를 앞장세우는가?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던지겠는데, 물론 대답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ㅋㅋ). 성령님은 하필이면 "왜 십자가를 앞장세우는가?" 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존재를 앞장세우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신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모두가 다 뭐라고 하는가? 이번 수련회 때도 언급을 했는데 말이다. 그들은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님의 존재를 앞장세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존재에서 존재로 나가는 것은 육적인 아이디어이고 육적인 안목인데, 즉 "내가 여기에 있듯이, 주님은 저기에 계신다. 해와 달이 있듯이 하나님도 계신다. 또한 우리가 여기에 있듯이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죽어서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가자" 라고 하는 것은 전부가 자기 존재에서 나온 것인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기가 주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이 그만 주어자리(S)에 있는 것이란 말이다.

◈ 그런데 신학자들은?

제가 조금 전에 무엇이라고 했는가? 주어자리(S)와 술어자리(P)에서 어디를 비워두라고 했는가? 주어자리인데, 그것이 예수님의 자리이고, 술어자리는 우리 죄인의 자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가 주어자리에 있는데, 즉 "나는 존재한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주어자리이고, '존재'가 술어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즉 "나는 존재한다. 주님도 존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하는 주님을 믿는다"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교인들을 끌어 모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인을 모으는 것은 천국의 일이 전혀 아닌데, 그것은 형광들이 깜박깜박하는 확정되지 않은 교회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있게 했다" 라고 하면, 그러면 "주님이 나를 왜 있게 하셨는가?" 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사건으로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나를 있게 했다" 라고 하게 되면, '나'는 거기서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무엇인고 하니, 성령께서 항상 십자가를 앞장세움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십자가를 앞장세운 것에 대해서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오히려 찬동하고 기뻐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곧 성도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앞장세운 것에 대해서 말이다.

◈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만이 주인공 !!

더 쉽게 이야기해서, "내가 여기에 있는데,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십자가를 믿어야 하겠다" 라고 하면 여전히 자기 중심인데,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있고, 그 십자가가 있음으로 해서 너는 뽑혀 나와야 한다" 라고 하게 되면, 그렇게 뽑혀 나온 상태에서는 자기는 전혀 주인공이 아니라는 말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주인공이지 말이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런 말을 하지 못하는데, 그렇게 되면 십자가가 우선이 되기 때문에, 자기들의 그 신학을 하는 행위가, 그 신학작업 자체가 죄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이미 완료되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면 신학을 하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그들은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는 여전히 주인공이 되어야하니 말이다.

◈ 성도는, 십자가로 인하여 된 사람 !!

그러니 우리는 십자가를 믿으려고 하면 안 되고, 십자가를 믿게 되어서 된 결과물, 즉 그러한 사람이 되면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로 인하여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믿는 사람이 아니고 말이다. 십자가 때문에 발생된 사람,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이란 말이다. 즉 십자가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야 될 사람,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 질문 - 이번에 창세기 논문을 보다보니, 목사님께서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를 믿어야 한다" 라고 하셨는데, 그래서 정신이 바짝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게 사도행전 16장 31절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우리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의 주인공이고, 우리는 그 예수님을 위해서 뽑혀 나오고 차출된 엑스트라라는 것이다. 하루에 5만원을 받는, 6시가 지나면 7만원도 받는다고 하는데 말이다. 이왕이면 7만원이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ㅋㅋ). 그래도 예수님께서 주인공이라고 하면 얼마나 좋으냐는 말이다.

(행 16: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행 16: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행 16: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행 16: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행 16: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행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 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이게 우리 인생인 줄 알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권리도 자격도 없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주인공 의식으로 살아온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십자가 피를 위해서, 천국을 위해서,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그 나라를 위해서 차출되었다는 사실만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9,14 새벽 2시에 마침.

                                     목사님, 유투브 동영상 설교가 정말 마음에 듭니다 !!
                                         녹취하시는 송재원 님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
                                                           복음을 전할 때 '딱'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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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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