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78강 여성성 120903

피/피 2012. 9. 15. 09:57


피78강 여성성 12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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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대구강의 17] - [피 78] - 여성성

                                                    12,09,0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240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인간에게 있어서 '~있다' 라는 말은, 반드시 '누구를 위하여', '누구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시 135:4)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사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 누구를 위하여, 누구로 말미암아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여기 있거든" 라고 하면, 그냥 그것으로 통하는 게 아니라, "그래, 너는 누구를 위해서 있는데?" 라고, 그렇게 물을 수 있는 물음을 야기시키는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나는 여기 있어" 라고 하면, 그것은 "너는 누구를 위해서 있지?" 라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누구를 위하여' 라는 것도 빼버리고, 또한 '누구로 말미암아' 라는 것도 빼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무엇이 사라지는가? "따먹지 말라" 라는 것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재미있죠?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부터는 무엇을 거부하는고 하니, "따먹지 말라" 라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삭제해버린다는 것이다. 즉 "내가 따먹고 싶어서 따먹었는데, 그것을 누가 간섭하노? 뭐 따먹지 말라고? 그런 말을 하는 자가 누구야? 누가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하노?" 라고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을 따먹었다" 라고 생각하게 되면, 자기는 그만 자기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지시와 명령을 받는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의 독립성이 없어지고 마는데, 자유가 말이다. 즉 누군가가 지시하고 간섭하는 상태가 되는데, 그게 싫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있다" 라는 것은, 즉 처음부터 우리가 여기에 있다고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하여 있는가?" 라는 질문을 요구받는 요소가 우리 속에 처음부터 있다는 것이다. "누구로 말미암아, 누구의 힘으로 우리가 있게 되었는가?" 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있으면 무엇을 하겠는가?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하지 않는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하, 처음에 생겨날 때는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했는데, 하지만 그 뒤에는 나를 위해서 살아야지" 라는 것도 그야말로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누구를 인하여 생겼는가?" 라는 것이 첫 번째가 되고,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하여 인가?" 라는,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라는 것이다.

◈ 도시형(urban) - '나는 원한다' !!

과연 이런 사람이 있는지 여러분이 자기 주위에서 한 번 찾아보라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가 있는 사람을 말이다. 찾기가 정말로 쉽지가 않을 텐데, 그러니 결국은 이렇게 존재의 이유와 사명이 없다는 것이 그만 대세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이 대세가 되면 나중에 '도시'가 되는데, 영어로는 'urban' 인데 말이다. 그것이 무엇이고 하니까, 서로가 한 통속이 되어서 하나의 집단, 즉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데, 즉 "우리끼리 살자.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고 살자. 우리가 하고 싶은 데로 하면서 살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는 원한다" 라는 것인데, 그게 전부라는 말이다. 그 외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는 것이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는 것은, 이런 "나는 원한다" 라는 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구체화시킨다는 것이다. 즉 "나는 이런 것을 원한다" 라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나는 이것을 하고 싶다", 혹은 "나는 행동에 옮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말인데, 아무튼 "내가 원한다" 라는 것이다.

◈ 성경이 말하는 남녀(男女)는?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말이 조금 복잡하게 들어가니 조금 쉽게 하기 위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이 세상에서 말하는 것을, 둘 다 이야기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무엇인고 하니, 남성이 여성을 낳고 여성이 남성을 낳는, 그런 방식이라는 말이다.

그게 어디에 나오는고 하니, 고린도전서 10장에 싶은데, 11장에 있네요. 한 껏 틀렸는데 말이다(ㅋㅋ). 여기 3절 이하에 보면 "남자의 머리는 여자이고, 또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11절 이하에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않고,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고전 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
(고전 11: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고전 11: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고전 11:10)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고전 11: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고전 11: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그런데 지금 사도바울이 시간이 남아서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가? 성경이 그래도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한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상식적으로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의 영감이란 것이 근본적으로 무엇인고 하니, "남자가 여자에게서 났고,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 라는 이야기가 전혀 돈이 안 되는 이야기인데, 왜 그런 이야기를 기록해놓았느냐는 것이다.

◈ 자기, 날 사랑해?

사실상  돈이 안 되는 이야기는 모두가 다 쓸데없는 이야기인데, 물론 청춘남녀들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 날 사랑해? 응, 사랑해. 아이, 좋아. 정말 좋아? 졸라 좋아" 라고 하는데, 하지만 결혼한지 40년이 지나면 뭐라고 하는가? "자기, 날 사랑해?" 라고 하면, "지금 시간이 9시인데, 돈도 안 벌어오고 뭐하노? 어서 안 나가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남자가 9시가 지나도 집구석에 그냥 있으면, 그 곳이 여자로서는 자기 영역인데, 그 영역에 이질적인 물질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9시 이후에는 여자만의 시간인데, 그때는 자식이고 뭐고 간에 모두 다 귀찮다는 말이다. 그래서 "동창회를 가든 어디를 가든 말이다. 괜히 집에서 점심이나 달라고 하지 말고, 제발 나가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나갔다가 그냥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참새가 밖에 나갔다가 먹이를 하나 물고 들어오는 것처럼, 돈이라도 물고 들어오라는 것이다. 밖에 나갔다가 들어올 때마다 말이다. 그러니 무엇을 해야되는가?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에 가서 일당이라도 받아와야 하는데, 돈 많은 박근혜가 3만원을 줄지 또 어떻게 알겠느냐는 것이다. 그게 집에 여자로서는 무엇인고 하니, 박근혜가 준 것이 아니라, 남자라면 밖에 나가서 입에 뭐라고 물고 들어오라는 것이다. 사랑한다느니, 하는 그런 케케묵은 소리는 그만하고 말이다. 그런 것이 밥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현대인들은 왜 성경말씀을 보지 않는가?

바로 그런 분위기에서, 목사가 와서 고린도전서 11장을 펴놓고, 남자가 어떻고 여자가 어떻고 한다면,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는 것이다. 돈도 생기지 않는데 말이다. 요즘 사람들이 왜 성경을 보지 않는고 하니, 이유는 간단한데,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처음에 강의를 뭐라고 했는고 하니, "내가 왜 있는가? 내가 누구를 위해 있는가?" 라는 문제가 아예 삭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는 말이다. 그게 아예 없으니, 그저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말미암아, 자기 영광을 위해서, 그게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말이다. 

(요 12: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요 12:4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요 12: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 I wanted !!

물론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도용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오랜만에 영어를 해보면, "I wanted" 라는 것인데, 즉 "나는 원한다" 라는 것인데, 무엇을 말인가? 돈을, 힘을, 권력을, 인기를, 명예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자기가 받겠다고 하는데, 그런데 누구를 위해서, 누구를 말미암아서, 왜 그렇게 살아가야 하느냐는 것이다. 일단 만들어주었으면 그만이지, 만들어 줘놓고는 왜 그렇게 말이 많으냐는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자꾸만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만들었는데, 하지만 자식의 경우에는, 일단 그렇게 만들어주었으면 그 뒤에는 부모도 귀찮다는 것이다. 물론 잔소리도 듣기가 싫고 말이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본색이란 말이다.

◈ I wanted '돈까스' !!

그게 하나님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나가는데, 그런데 성경에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1장처럼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면, 전혀 돈도 안 되는 소리를 말이다. 이것을 공부한다고 해서 누가 돈까스를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제가 왜 돈까스를 언급하는고 하니, 이 강의를 녹취하시는 분이 돈까스 가게를 한다는 것이다(ㅋㅋ).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간단한데, "니가 원하지? 하지만 니 원대로 되지 않아"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는 살고 싶지? 하지만 나는 너를 죽일 거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하고, 또한 살고 싶어하는 우리 인간에게 말이다. 인간이 힘을 원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너의 그런 희망을 절망으로 바꿀 거야" 라고 하시고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즉 우리가 누구를 위해서, 누구를 말미암아서 있는지,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제대로 된 노선으로 우리를 집어넣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철로가 있으면, 거기에 기차가 달리는데, 그것도 아주 빠르게 달린다는 것이다. 요즘 고속열차는 시속 300km까지 나온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300km의 그 기차가 무엇을 만나야 하는가? 철로를 만나야지 300km가 나오는 것이지, 만약에 철로밖에 있다고 하면, 300km는 고사하고 밀어도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철로가 있어야 달린다는 말이다.

◈ '언약' 이란 이름의 철로 !!

그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밑에 있는 이 세상에다 '언약' 이라는 이름의 철로를 깔아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잘 나가는지 모르는데, 하지만 우리는 언약 바깥에 있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싶어도, 영 말씀이 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로가 없으니 말이다.

아무리 "주여, 제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고 하다가, "에이, 열심히 해도 소용이 없네. 앞으로 안 해"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매일 그런 식인데, 열심히 하겠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좀 도와주면 좋은데, 그런데 응답이 없으니, 자기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삐쳐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철로가 깔려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만이 언약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언약이 장착될 만한, 그런 설치를 따로 해야한다는 것이다. 바깥에서의 언약은 문자가 되어버리는데, 물론 지금도 성경을 문자로 보는 사람들이 대다수인데, 신학자들은 물론이고, 교회에서 목사부터 시작해서 다 그렇다는 말이다.

◈ 3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

오늘 아침에도 성경을 문자로 본 양반이 하나 죽었는데, 문선명이라고 말이다. 북한의 김일성도 그랬고,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다 문자로 푼다는 것이다. 그러니 매일같이 "교회는 부흥해야 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라는 하박국서의 말씀을 문자로 봐서, "3년 내에 우리교회가 부흥해야 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합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자기 명예와 자기 영광과 결부시켜서 하니, 전혀 자기 마음속에 철로가 깔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에 깔린 철로가 없으니, 제 아무리 성경말씀을 달달 외우고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철로를 대충 놓게 되면 부실공사가 되고 마는데, 그러니 먼저 파내기 공사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집을 짓는 기초공사를 할 때, 잘 파서 돌이 나오면 그 위에 집을 짓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언약의 철로를 놓을 때 우리의 마음을 제대로 파서, 철로가 매치될 수 있는 자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 죄인과 긍휼의 만남 !!

그게 무엇인고 하니, 주님이 우리 안에 십자가의 자리를 만드는데, 즉 파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지점이 나오게 되면, 거기에다가 언약이라는 철로를 깔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죄인과 긍휼의 만남, 바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참 쉽죠잉?

그렇게 참 쉬운데,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너무 싫어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파낸다고 하는 것, 즉 우리 마음을 후벼팔 때, 그것이 너무나 많이 아프다는 것이다. 물론 저도 예외가 아니고, 그러한 경험을 매일 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자랑거리를 차곡차곡 쌓아놓았는데, 주님이 파게 되니 그것이 와르르 무너진다는 것이다. 자기가 괜찮은 존재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깔아놓은 모든 층들이, 그런 자기 자존심이 그만 마구 파이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드릴을 가지고 와서 마구 파고 뚫으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다 깨지게 되니, 그 파이고 깨지는 아픔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동안 이러한 명예와 존경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르는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는가? "한번 보자. 십자가가 어디에 박혀있더라?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니 입으로 고백해야 할 그 시점이 어디에 있더라?" 라고, 그렇게 하시면서 파고 들어가신다는 것이다. 

◈ 주님이 버림받은 바로 그 자리 !!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신 그분이 사흘만에 부활하셨는데, 그러니 바로 그 지점, 즉 "하나님이여, 저는 버림을 받아서 당연하군요" 라고 하는 그 지점이 곧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 능력과의 접촉점이 된다는 것이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표적이 틀리면, '꽝' !!

이것은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 이번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사격선수 중에서, 그가 사격에서 이제 마지막 한 발이 남았는데, 그만 너무 떨려서 자기 표적에 쏜 것이 아니라 남의 표적에 쏘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때까지는 1등이었고 말이다. 그래서 금메달은커녕 동메달도 따지 못했다고 하는데 말이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고, 그런 일을 경험한 선수가 이번에 출전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듣고 제가 느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 사람이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금메달이 무섭다는 것이다. 그 노련한 사격선수도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니 말이다.

아무튼 자기 표적을 쏘아야 하는데, 남의 표적을 쏘면 인정해주지 않듯이, 그렇게 주님께서는 주님이 영광을 받고 기뻐하고 천국에 갈만한 자리가 이미 정해져있는데, 그러니 그 자리에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안 되고 말이다.

남의 신앙생활을 옆에서 구경하고, 그렇게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본인이 신앙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남의 신앙생활을 구경하지 말고, 안이숙 여사가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라고 했는데, 그것을 노래로 부로 부른다고 해서 자기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이숙의 신앙이지 말이다.

그러니 "저는 저주를 받아도 너무나 마땅합니다.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고 하는 고백의 자리, 그 자리가 곧 주님이 임하시는 유일한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콘크리트로 제대로 기초공사를 하고 볼트를 채우고 난 다음에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만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께서 "이것은 내가 한 것이지, 니가 한 것이 아니야" 라고 볼트를 가지고 제대로 쪼고 완벽한 공사를 한 것이 곧 십자가인데, 그러니 십자가 외에는 결코 다른 구원의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그렇게 애를 태우면서 외쳤다는 말이다.

◈ 남녀(男女)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 그런데 왜?

그렇다고 하면, 남자가 무엇이고 여자가 무엇인가? 즉 "남자가 여자에게서 났고,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 라고 하는 것이 무슨 소리인고 하니, 볼트를 가지고 십자가를 채우고 쪼는데, 그렇게 십자가를 제대로 쪼기 위해서 준비된 우리의 일상들이, 즉 우리의 모든 모습들이 있는데, 육적인 모습들과 영적인 모습들이 말이다. 바로 그런 것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제가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고 했는데, 하나는 무엇인고 하니,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우리는 왜 존재하는지, 즉 '누구를 위해서', '누구로 말미암아' 있느냐는 것이다. 그 다음 두 번째로는 무엇인고 하니까, 아예 그것을 벗어버리고,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할뿐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영어로 "I wanted" 라는 것인데, 즉 "하나님이고 누구고 간에 더 이상 나에게 간섭하지 말라.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꼴리는 대로 할뿐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두고 '도시형(urban)' 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녹취자 - 요즘 아이들 입을 통해서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 다시 정리하면 !!

제가 지금 처음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래서 먼저 십자가를 이야기했고, 남자와 여자를 이야기했고, 그리고 두 번째의 도시형을 이야기할 차례인데, 성경 이야기부터 먼저 정리를 해보자는 것이다.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말이다. (예, 오랜만입니다)

성경에서 있어서, "남자에게서 여자가 났다" 라고 했을 때에, 즉 "남자 → 여자" 라는 것이다. 그런데 뭐냐하면, "여자가 없이는 남자가 나지 않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만들었다" 라는 것은 도시형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오잉, 그게 무슨 이야기야?" 라는 것인데, 즉 "산부인과에 가면 여자가 아이를 낳지 남자는 낳은 것이 아닌데, 그런데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왜 남자에게서 여자가 났다고 하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라는 것은 'OK'이고 말이다. (녹취자 - 그런데 목사님, 8절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에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게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를 낳았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여자가 남자를 낳았다는 것도 사실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OK'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성경에서 의미하는 바를 모른다는 것이다.

(고전 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
(고전 11: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
(고전 11: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고전 11: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 성경형과 도시형 !!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도시인이 이야기하는 것의 차이점을 다시 살펴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있다" 라는 것은 안에 무엇이 담겨있는고 하니까, "내가 누구로 말미암아", 그리고 "나는 누구를 위하여" 라는 것이 그 안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을 유발할 수 있는 내용이 말이다.

여기에 반해서 도시형은 무엇인가? 이것은 자립형이기 때문에 무엇이 없어진다고 했는가? "내가 누구로 말미암아" 라는 것이, 그리고 "나는 누구를 위하여" 라는 것도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돈이 안 되니 말이다. 돈도 안 되는데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도시형의 입장에서 성경말씀을 바라볼 때는 '이해불가' 라는 것이다. 고음불가가 아니고 말이다(ㅋㅋ).

그런데 이러한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어디로 몰리는고 하니, 그것이 십자가로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제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십자가로 어떻게 연결되는가?" 라는 것인데, 아직까지 이 부분을 설명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게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다.

◈ 일단, 도시형부터 !!

그것은 일단 제쳐놓고, 먼저 도시형부터 설명을 하자면 다음과 같은데, 현대인의 말로 '도시형' 이라고 했는데, 사실상 옛날에도 인간은 집단을 이루어서 살았다는 것이다. 최근 발표에 의하면, 20만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호모 사피엔스' 라고, 즉 '생각하는 인간'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들이 유럽의 '네안데르탈인' 이라고, 그런 인간도 있는데,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서 퍼져나갔는데, 20만년 전에 올라와서 일 만년 전까지 계속해서 퍼졌다는 것이다. 칠레의 저 남쪽까지, 그렇게 해서 전 세계에 퍼졌다는 말이다. 그리고 3천년 전에는 폴리네시아까지, 호주까지 퍼졌고 말이다.

이들 호모 사피엔스, 즉 지혜로운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이들이 소위 '집단형' 이라는 것이다. 요즘 현대인들은 혼자 살고 싶어하는데, 그런데 고대인들은 왜 집단형으로 살고 싶어했는지, 우리가 '집단형' 이라고 할 때, 그런 집단형의 증거들이 모두 있다는 것이다.

◈ 부여의 '영고(迎鼓)' !!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가설들이 있는데, 사냥을 할 때 혼자의 힘으로 부족해서 그렇다든지, 아이를 낳고 난 다음에 키울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든지, 그런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구체적인 것까지는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없고, 옛날 우리나라를 한번 돌이켜보자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동맹(東盟)' 이란 제천의식이 있었는데, 그리고 부여에는 '영고(迎鼓)' 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은 서울 용산의 국립박물관에 가면 상세하게 잘 나와있는데 말이다. 여기서 '영고' 라고 했을 때, '고(鼓)'는 북을 의미하는 것이고, '영(迎)'은 영접한다는 의미인데, 그러니 "북을 영접한다" 라는, 그런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북을 영접하는가? 북은 바로 집단형으로 모으는데 있어서 소리는 내는 악기라는 것이다. 북을 두드리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소리를 내어서 집단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런데 부여에 있어서, 이 부여는 고구려 위에 있다는 것이다. 부여에 관해서는 최수종이 나온 '대조영' 이라는 TV 드라마가 있었는데, 또 '주몽' 이라는 고구려 드라마도 있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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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고(迎鼓) - 초기 부족 연맹체 국가인 부여(夫餘)에서 행했던 집단적 제천의식. '영고'에 관한 기록이 《삼국지》<위지(魏志)> 부여조에 전한다. 추수를 마친 12월에 온 나라의 백성이 동네마다 한데 모여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회의를 열었는데, 의식직전에 '맞이굿[迎神祭]'을 벌였다. 며칠 동안 계속 노래하고 춤추며 음주를 즐기고, 죄가 가벼운 죄수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초기 부족 연맹체 사회는 이전의 수렵생활이 지속되었으나 이미 농경사회로 진입한 상태였다. 그래서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추수가 끝나면 하늘에 감사하는 제천행사가 여러 곳에서 열렸다.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天)', 삼한(三韓)의 '농경의례(農耕儀禮)' 등과 같은 일종의 추수감사제였다. - 두산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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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맹(東盟) - 고구려에서 매년 10월에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고 가진 제천의식. 동명(東明)이라고도 한다. 전 부족이 한자리에 모여 국정을 의논하고 시조인 주몽신(朱蒙神), 즉 동명신(東明神)과 생모 하백녀(河伯女)를 제사지낸 제천의식이다. 동맹은 풍년을 빌고,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늘에 감사하는 농제(農祭)이기도 한데, 여러 귀신, 사직신(社稷神), 영성(靈星)에게도 제사를 지냈다. 중국문헌인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고구려 나라 읍락(邑落)의 남녀들이 밤에 모여 서로 노래와 놀이를 즐기며 10월에 제천을 하면서 국중대회를 여는데 그 이름을 동맹이라고 한다”고 하였고, 《후한서(後漢書)》 <동이전>에도 “10월에 제천의식을 가지는데 밤에 남녀가 모여서 창악(唱樂)을 하고 귀신 ·영성 ·사직을 제사하기를 즐겼는데, 그 이름을 동맹이라 하더라”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서 동맹은 원시 종교적인 민속의식인 동시에 정치적인 의의도 컸다. 제천의식은 부여의 영고(迎鼓), 예(濊)의 무천(舞天)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일종의 추수감사제이다. 이것은 상고시대 부족들의 종교 ·예술 생활이 담겨 있는 제정일치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 두산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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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모신(地母神)님, 우리 집단을 살려줘요 !!

그렇다면 이 '영고'는 북을 어디에 묻는고 하니, 땅에다가 묻는다는 것이다. 이 땅은 '지모신' 이라고 해서, 여기서 '모'는 어미 '모(母)' 라는 것이다. 즉 '지모신((地母神)' 이라는 것이다. 지금 제가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말이다.

아무튼 이것을 도시형으로, 즉 "누구로 말미암아" 라는 것과, 또한 "누구를 위하여" 라는 것을 없애버리고, "I wanted" 라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산다" 라는 쪽으로 했을 때, 그들의 신에 대한 섬김, 그것을 제가 주일오후 시간에 '제의적(祭儀) 상징성' 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여기서 '상징성' 이라는 것은 바깥에다 테두리를 친다는 의미인데, 그렇게 함으로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은 이 테두리로 관리하고, 또 대화에 나선다는 것이다. 물론 안에 있는 것은 숨겨놓고, 바깥에 있는 테두리를 가지고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상징성이 나중에는 형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신은 다른 신이 아니라, '지모신(地母神)' 이라고, 즉 엄마와 같은 땅인데, 혹은 '땅' 이라는 이름의 엄마이고 말이다. 이 지모신이 개인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집단을 살린다는 것이다. 개인이 아닌 집단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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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모신 [mother goddess, 地母神] - 대지의 풍요성, 생명력이 신격화된 것. 부신적 성격을 가진 상천신(上天神, 천부)에 대립한다. 그리스 신화의 대지 여신 가이아는 태초에 카오스 다음으로 탄생하고, 자신이 낳은 천공신 우라노스와 결혼해서 신들의 조상이 되었다. 그리스인은 최고의 인류도 대지에서 태어났다고 믿었다. 이처럼 대지를 만물을 낳아서 키우는 위대한 모신으로서 숭상하는 신앙은 세계의 농경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그 외에도 이름 그 자체가 문자대로 <지모(地母)>를 의미했을 가능성이 강한 데메테르를 비롯해서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등 유력한 여신의 대부분에 <지모신>의 성격이 인정된다. 인간의 생활에 관련된 <지모신>의 가장 중요한 작용은 그리스에서는 데메터에 특히 현저한 것처럼 대지에서 나는 작물의 풍요를 보증하는 것으로, 이와 관련해서 아프로디테나 게르만의 프레이야 등에 볼 수 있는 애욕적 성질도 <지모신>의 대부분에 공통된다. 데메테르는 딸인 사자나라의 여왕 페르세포네와 떼어낼 수 없는데, 지하, 즉 <지모>의 태내에 있는 명부에 사자들을 맞이해서 그 주인이 되는 것도 세계의 많은 <지모신>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이다. 이와 관련되어서 가끔 발견되는 것이 <지모>의 태내에 맞이된 사자가 <태아>로 돌아가, 재생할 수 있다는 신앙이다. 우라노스와 가이아, 제우스와 헤라, 또한 인도신화의 디아우스와 프리티비 등에서 볼 수 있는 <천부(天父)>와 <지모(地母)>의 부부관계도, 비를 <지모>를 수태시키는 <천부>의 정액으로 보는 관념과 결합해서 세계에 분포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중요한 신화에, 태고에 서로 꼭 껴안아서 세계를 암흑으로 하였던 <천부>와 <지모>의 분리를 테마로 하는 이야기도 있으며, 그리스와 폴리네시아에 매우 유사한 형태가 발견된다. - 세계종교백과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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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벌을 받는데, 그 벌이 무엇인고 하니, 집단에서 외톨이가 되는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인이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모르는데 말이다. '외톨이야' 라는 시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외톨이가 되면 어떻게 되는가? 기존의 집단신으로부터, 즉 우리 마을의 신, 우리 집안의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는 상징성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창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창 4: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 4: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 4: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 4: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창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이것을 쉽게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데 말이다.

* 원주민 : 아저씨, 이리 좀 와보소. 못 보든 아저씨인데?
* 가  인 : 왜 그러세요?
* 원주민 : 이름이 뭡니까?
* 가  인 : 저는 가인입니다.
* 원주민 : 어디에서 왔어요?
* 가  인 : 저쪽 동네에서 왔습니다.
* 원주민 : 그 동네에 살지, 여기에 왜 왔어요?
* 가  인 : 그쪽 동네 신에게 쫓겨났습니다.
* 원주민 : 그러면 신에게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요?
* 가  인 : 예, 그렇습니다.

◈ 당신은 저주의 바이러스 !!

이렇게 되면 아주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저쪽 동네에서 신에게 저주를 받은 자가 이쪽 동네로 오게 되면, 그것이 그만 전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일종의 매개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물론 요즘도 그렇지만 말이다. 옛날에 촌에서 살던 사람들이 대구근처에 살고 있는 친척들을 찾아와서 식모살이를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럴 때 식모살이로 보낸 어린아이의 엄마가 와서 뭐라고 하는가? "아이쿠 아제요, 잘 봐주소. 내가 가르친 것도 없는데, 그러니 가르쳐가면서 밥이나 먹여주면 참 좋겠네요" 라고 하면서, 그렇게 사돈의 팔촌까지 다 찾아서 오곤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옛날에는 집단을 이루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그 집단에서 그것을 수용해주지 않는다면 그만 나그네와 과부가 되고, 그렇게 소외가 되면 전혀 법적인 혜택을 입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나그네와 과부 개념이 아닌데, 오늘날의 개념이 조금 난점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요즘은 혼자 살면 '싱글족' 이라고 해서 꽤 괜찮다는 것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그것이 아니고, 혼자 산다는 것은 자기 쪽의 신으로부터, 즉 자기 쪽의 집단으로부터 범죄인으로 취급을 받아서 저주를 받은 행색이, 그것이 곧 떠돌아다니는 행색이라는 것이다. 그런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오면 그 사람 혼자서 오는 게 아니라 저주가 묻어서 오는데, 그런 저주가 묻어서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며느리를 하나 잘못 들여서 집구석이 그만 망한다는 것이다. 

◈ 결혼인가? 시집인가?

그러니 옛날에는 결혼이 아니라 시집을 가는 것인데, 즉 '시집' 이란 집단에 합류하고 시집에서 섬기는 신을, 그 시집의 전통과 관행과 관습에 합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합류를 하면서, 그 시집에서 대대로 섬기던 신에게 받던 축복이 있는데, 그 축복에 숟가락만 하나 덜렁 얹으면 미안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혼수를 해서 오는데, 이제 슬슬 결혼의 내막이 풀리는데 말이다.

그렇게 숟가락만 들고 오면 미안하니 혼수를 해서 오는데, 시누이에게는 이불도 하나 해주고 말이다. 그렇게 오면, 시집에서는 "혼수를 한번 보자. 으흠, 배운 집안이구만" 라고 하는데, 혼수를 보고 배운 집안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집안에 받은 축복을 나누어 받을 수 있는 자격자로서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결혼이 아니라 그야말로 시집 사람이 되는 것인데, 그러면 친정에는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친정에 가면 그쪽 귀신을 섬기고 그쪽의 축복을 받는 것인데, 물론 그것은 축복도 아닌데, 항상 자기 집안이 받아야 축복이라는 것이다. 저쪽이 받으면 오히려 쓸데없는 축복으로, 즉 저주로 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저쪽 가정에서 여자가 하나 탈출하는 셈이니까, 우리 집안에서 그 여자를 받아주는 대신에 그 여자는 완전히 시집 사람이 되어서, 이제는 시집의 종교로 귀화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종교를 바꾸고 시집 사람이 되어서, 이제는 시집에 있는 집안 귀신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조상귀신을 대대로 섬기는데, 물론 그 책임을 시어머니가 담당하고 말이다. 그리고 새로운 며느리가 왔을 때는, 그것을 자기가 받은 그대로 전수해서 집안의 뼈대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가문으로 살아가다가 죽게 되면 나중에 열녀문을 하나 받게 된다는 것이다. 표창장을 말이다.

◈ 땅의 신에게 잘 보여야 !!

그것이 성경에 다 나오는 이야기인데, 성경은 그 당시의 문화와 풍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어느 특정 민족을 지칭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공통점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모든 민족이 말이다. 

아무튼 지모신, 즉 엄마와 같은 땅이, 여기서 말하는 엄마는 개인적인 엄마가 아닌데, 그 엄마는 집에 있고 말이다. 집단의 엄마는 땅인데, 왜냐하면 그 당시는 산업시대가 아닌 농경시대이니 말이다. 농경시대에는 농사만 잘되면 되는데, 그러니 땅의 신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복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참 잊어버렸는데, 이 '영고' 라는 제사의 상징성은, 즉 제의적 상징성은, 신에게 바치는 것은 말이다. 이제 생각이 나는데 '해모수' 라고 말이다. 왜 드라마 주몽에 보면 해모수가 나오는데, 이 해모수는 하늘에서 보낸 신이라는 것이다. 하늘에서 보낸 해모수가 땅에 있는 지모신과 결합하는 것이, 북소리로서 하나의 집단을 형성한다는 말이다.

◈ 단군신화의 경우에 !!

그것이 고구려인데, 그것은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고, 먼저 고조선의 신화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잘 알다시피 단군신화라는 것이다. 이 단군신화는 태극산에, 지금의 백두산이지 싶은데 말이다. 거기서 신과 인간이 만날 때, 이 단군이 무엇인고 하니, 그 당시 살았던 씨족집단의 제의적 상징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특히 '곰' 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하늘의 기를 품어가지고 지상에 있는 우리 집단에게 축복을 주는 것인데, 거기에 중매인으로서 '단군' 이란 무당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등장해서 우리 집단의 축복성을 상징성으로, 즉 우리 마을이 여기에 이렇게 있다고 하면,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테두리를 쳐버린다는 것이다. 

◈ 성경에 없는 이야기는 없어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은 성경에도 없는 이야기를 왜 자꾸만 합니까?"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런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 무엇이라도 해야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사람은 종교가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무엇이라도 말이다.

그렇게 사람은 뭔가를 외부에서 관계할 때, 만약에 신을 도입하지 않으면 뭔가 이상하게 불안해하고, 안정감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뭔가 테두리라도 둘러쳐서 신과 교합했다고 하는 인정샷을 받던지 해야, 그렇게 해야 안심이 된다는 말이다. 

만약에 기독교가 없다고 하면, 그러면 종교가 과연 없었겠는가? 사람은 무엇이라도 해야하는데, 바로 그 무엇이 조금 전에 말한 부여의 영고의식이나 고조선의 단군신화라는 것이다. 물론 고구려의 동맹의식도 그렇고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보니까 제의적 상징성이 나왔는데, 즉 "우리 집단은 신께서 보호해야한다" 라는 것이다.

◈ 다시 '지모신'에 대해서 !!

이것은 구약의 이방나라의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는데, 그러니 우리도 꼭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바알 자체가 '지모신' 이니 말이다. 즉 신에 대한 부활과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언제 하는고 하니, 10월에 하는데, 10월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인데 말이다. 즉 지모신이 죽는다는 것이다. 땅이 말이다.

왜 그런가? 가을에 수확을 다 해버리면 더 이상 땅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땅은 어디까지나 수확이 될 때까지만 필요하고, 그 다음부터는 기껏해야 물을 대고 얼려서 썰매나 타고 놀아야 하니, 더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냐는 말이다. 수확을 다 끝내고 나면 말이다.  

그러니 신을 모셨다가, 즉 북을 어디에다가 숨기는고 하니, 여기 땅을 파서 북을 묻었다가, 그 위에 수확된 곡식을 쏟아 부어서 달래준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봄이 되어서 북을 파내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늘에서 신이 내려오는데, 그러면 지모신이 다시금 힘을 얻어서 농사를 지을 때 잘 되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소위 '땅파기' 라는 것인데, 그런 땅파기가 무엇인고 하니, 고구려의 '동맹' 이라는 것인데, 이 동맹은 다른 말로 하면 '수혈(竪穴)' 이라고 해서 구멍인데, 즉 동굴이라는 것이다. 땅 속에 동굴을 파서, 그 동굴에서 지모신의 기가 나온다고 여겨서, 그것을 축제로 즐긴다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10월에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천의식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하늘은 아버지이고 땅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축복을 품으면 하면 누가 도와주어야 하는가?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어야, 그래야 땅인 어머니가 품은 아이가 제대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옛날 고대인들은 이 세상의 자연질서를 어떻게 보았는고 하니, 남녀간의 문제나 부부관계를 확대시켜서, 대자연도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것이 더불어서 빙글빙글 돌 듯이, 그렇게 같이 돌아가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 몸이 대자연의 일부라는 말이다. 그러니 일부를 조사하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전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천문학도 마찬가지인데, 지구를 조사해서 그것을 기반으로 화성이든 목성에 탐사선을 보낸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우주의 일부라고 한다면, 그 우주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분석하면 되는가? 우주의 일부인 자기 자신을 분석하면 다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

그것이 바로 구약에 나오는 이방 민족들의 종교라는 것인데, 즉 종교적 상징성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본받았는가? 바로 이스라엘인데, 그러므로 십계명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는 것이, 단순히 명칭이 바알이 아닌 여호와로 바뀐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인생관 자체가 여호와의 언약을 통해서 주는 것과, 자기 몸에서 발산되는 죄악 된 것과는 서로 맞지가 않다는 것을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시로서 계속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도시형에 있어서 제의적 상징성이라는 것은, 아까도 말했지만 개인은 용납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용납이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집단에서 받은 축복을 뜯어먹는 입장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집단의 축복을 축내는 식으로 개인이 나가면 저주를 받은 입장이란 것이다. 즉 "야, 어디 소속이야? 뭐, 소속이 없어? 그러면 저주를 받은 인간이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도 교회도 없이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말이다.

◈ 남자가 여자를 낳았다 !!

그런데 성경에서는 무엇인가? "남자가 여자를 낳았다" 라는 것인데, 그리고 그 뒤에 "여자가 없이는 남자가 없다" 라고, 하나의 부록처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남자가 여자를 낳았다" 라는 부분인데, 그렇게 고린도전서 11장 8절에서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라고 했을 때, 그것이 성경의 본래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고전 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
(고전 11: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
(고전 11: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고전 11: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 여자는, 여자가 아닌 '여성성' !!

아브라함이 누구를 낳았는가? 이삭을 낳았는데, 즉 아브라함은 남자이고 이삭이라는 자식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라고 했을 때, 누가 빠지고 없는가? 사라도 없고 리브가도 없다는 것이다. 여자의 역할이란 것이 하나의 도구나 매개체 정도인데, 즉 잠시 사용했다가 그만 내쫓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남자만 남는다는 것이다.

(마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그렇다면 왜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여자와 후손과 뱀의 후손인데,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여자는 여자로서 다가서는 게 아니고, '여성성' 이라는 것이다. 즉 '여자다움'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여자는 여자다움을 표출해야 될, 그러한 것이 정보로서 여자 안에 담겨있는데, 즉 여자 자체는 껍데기이고, 그 안에 들어있는 여성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여성성을 구체화시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여자가 남자를 만나게 되면 남자를 사모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창세기 3장 15절(16절?)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그렇게 남자를 사모해서 자식을 낳게 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자식은 여성성의 발현이 된다는 것이다. 즉 여성성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여자가 남자를 사모하게 될 때, 남자의 경우에는 그 여자를 지배하면서 그 다음이 중요한데, 남자가 그만 죽고 만다는 것이다. 즉 아담이 이마를 땀을 흘리면서 그만 나중에 흙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생명과 죽음 !!

그러니 남성성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죽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는 이름이 무엇인가? 하와인데, 그 뜻이 바로 '생명'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죽어야 될 것이 건방지게도 살아야 될 것을 지배하면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데, 그런데 그 껍데기가 벗겨지면 그 안에서 무엇이 솟아오르는고 하니까, 여성성이, 즉 생명이 도드라지게 올라온다는 것이다. 그 올라온 것이 바로 자식이고 말이다.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 3: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그래서 구약에서 여자가 임신을 하지 못한다든지, 혹은 자식을 낳더라도 문제가 있거나 죽게 되면, 그 여자는 여성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래서 저주를 받은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동침도 못하고, '으악' !!

그것이 아비멜렉의 경우에 나오는데, 그 아비멜렉 추장은 사라가 너무 이쁘서, 그 할머니가 왜 이쁜지 아직도 미스터리인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너무 이쁘서 동침을 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동침도 하지 못하고 어떻게 되었는가? 바로 그 동침할 뻔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집단에 대대로 저주가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까 집단을 이야기했는데 말이다.

(창 20:1)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창 20:2)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창 20: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 주께서, 인간들의 사고방식을 이용해서 !!

이 정도가 되면 여러분에게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와야 하는데, 즉 "아까 목사님이 인류문화에서 있어서 집단이 어떻고, 도시가 되어서 동맹과 영고의식을 하고 했는데, 그러면 그게 성경적으로 옳다는 말입니까?" 라고 말이다. 옳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용하시는데, 즉 인간들의 사고방식을 주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들의 사고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거기에는 집단의 축복이란 것이 있는데, 주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아비멜렉 가문의 모든 여자들을 어떻게 하시는가?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요즘 같은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은 다 개개인의 개별자인데, 즉 "니 행동으로 인해서 나에게 저주가 오는 것은 없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추장이라고 해도, 그 양반이 다른 외부 여자와 동침할 뻔했다고 해서 그 집단에 속한 여자들이 모두 다 임신을 하지 못한다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엮여서 그러한 파급효과가 생기느냐는 것이다. 무슨 그런 저주가 다 있느냐는 말이다. 현대적 사고방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연좌제도 아니고 말이다. 

쉽게 말해서, "시집을 갔으면 그만이지, 도대체 언니 때문에 왜 내 임신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야? 왜 그 책임을 나에게 묻지?" 라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의 인과관계를 따져서 성립이 되면, 법원에 고소라도 해서 보상이라도 받으면 되는데, 하지만 그것이 성립되는가? 그게 전혀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데, 개별자이니 말이다. 시동생이 사고를 쳐서 형수가 임신을 못한다는 것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 나그네 설움 !!

하지만 옛날에는 개별자 관계가 아니라, 개별자라고 여기는 그 자체가 무엇인가? 그것은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서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신세인데, 즉 개별자는 가장 비천한 인생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회라는 것이다. 그 당시 사회가 말이다.

◈ 아사셀 염소 !!

구약 레위기에 보면, 대속죄일에 아사셀 염소를 잡는데, 그 염소에 어디로 보내는가? 잡아서 죽이지를 않고 살려서 광야로 보내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광야에 숨겨놓은 애인이라도 있다는 것인가? 그게 아닌데, 즉 광야에 누가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부터 뚝 떨어져서 나갔다" 라는 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출발지를 강조하는데, 모가지에 소형 발신기를 달아서 염소가 어디로 가는지, 그것을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어디로 가는가?" 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디로부터 떨어져나갔는가?" 라는 것에 초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복 받은 곳에서 떨어져서 분리된 것을 저주라고 하는데, 우리가 이런 배경들을 이해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레 16:5)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 제물을 위하여 수염소 둘과 번제물을 위하여 수양 하나를 취할지니라
(레 16:6)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권속을 위하여 속죄하고
(레 16:7) 또 그 두 염소를 취하여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레 16:8)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레 16:9)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레 16:10)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 여성성의 후손 !!

다시 살펴보면, 창세기 3장 16절에서, 약속을 이루는데 있어서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떤 특정한 남자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여성성 자체가 여자가 남자를 사모하도록 하는데, 그렇게 여자가 남자를 사모함으로서 아들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자식을 말이다.

그렇게 자식을 낳게 될 때, 우리가 생각할 때는 당연하게 여자가 아들을 낳는 것인데, 그런데 성경은 여성성이 자식을 낳은 것으로, 그리고 그 여성성이 자기가 사모하는 남자를 죽였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여성성의 후손'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여성성의 후손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고 하면, "바로 이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편에 배치되어있는, 즉 여성성을 공격하는 저쪽의 모습이 나타날 때, 이쪽의 모습도 덩달아 그 정체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 12장에서 !!

특히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하늘에 붉은 용이 있는데, 그 용이 예수님이 있는 쪽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예수를 낳은 여자라고 본다는 것이다. 누가 말인가? 그것이 하늘에서 내어쫓긴 옛 뱀인데 말이다. 거기서 '옛'을 빼면 뱀만 남는데 말이다.

(계 12: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계 12: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계 12: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계 12:4)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계 12: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
(계 12:9)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
 
그러니 그 뱀의 저쪽에 있는 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물론 요즘 같으면 교회, 혹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라고 하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즉 어머니로 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저쪽 뱀의 실체가 등장하면, 이쪽의 실체도 같이 등장한다는 말이다. 

◈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

조금 어려워서 쉽게 해보겠는데, 이럴 때를 대비해서 생각해놓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말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인봉(印封)'이 무엇인고 하니까, 봉인했다는 말인데, 그러면 무엇을 봉인했다는 말인가? 천사가 뭔가를 봉인을 했는데, 세상의 질(質)을, 세상의 성격을 봉인했다는 것이다. 즉 "세상이 이렇게 돌아간다" 라는 것을, 그런 세상의 질을 봉인했다는 말이다.

그것을 사도요한이 뜯어낼 수가 있는가? 물론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울고 있는데, 그런데 누가 와서 그 일곱 개의 봉인된 것을 뜯어내는가? 어린양이신 예수님인데, 바로 그 봉인된 것을 뜯어보니 뜯을 때마다 천사가 나온다는 것이다.

(계 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계 5: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계 5: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계 5: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계 5: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 봉인을 뜯으면, 천사와 악마의 일부가 !!

그렇다면 천사가 도대체 어디에 숨어있었다는 말인가? 예를 들어서, 이렇게 편지봉투가 있다고 하면, 여기 겉면에 이 봉투를 붙이는 파라핀이 7개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봉투가 7겹으로 되어있는데, 즉 봉투 안에 봉투가 있고, 또 봉투 안에 봉투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뗄 때마다 그 안에서 내용물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옛날에는 두루마리였지만 편지봉투로 여기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천사가 도대체 어디에 숨어있다는 말인가? 여기 편지봉투에서 거의 바깥부분에(?) 있는데, 그러니 파라핀을 떼게 되면, 즉 인을 떼게 되면 천사가 나오면서 거기에 덩달아서 뱀도 자기 정체의 일부를 살짝 드러낸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4분의1, 그 다음은 3분의1, 그런 식으로 점점 더 많이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완전하게 모두 다 공개하게 되면 남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쪽은 십자가이고, 저쪽은 악마가 나온다는 말이다. 그 악마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옛 뱀, 곧 마귀라고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고, 혹은 악마라고도 한다는 말이다.

◈ 우리의 모든 생각은, 악마의 생각이기에 !!

그렇다면 예수님이 그것을 뜯기 전에 우리 인간들은 왜 몰랐는고 하니, 우리는 그 자체가 봉투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질을 모르는데, 이 세상에 대해서 알 필요도 없고 또한 몰랐다는 것이다. 그냥 자기 몸 하나 제대로 챙기면서 살아가면, 그것이 잘 사는 것이고, 그게 곧 행복한 삶이란 말이다. 마치 TV드라마처럼 말이다.

보통 드라마는 결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려야 끝나는데, 그것도 주로 훈남 재벌과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팬들에게 시달려서 종영을 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인데, 우리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요한계시록의 봉인이 뜯기지 않은 상태에서 생각하는 모든 것이란 말이다.

그러면 이러한 사고방식을 무엇을 가지고 뜯는고 하니, 이것이 바로 이렇게 뱀으로 둘러 쌓여져 있었는데, 그런데 뱀의 바깥 영역에서 활동하시던 주님께서 이 땅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면서 그 실체가 모두 다 뜯겨져 나온다는 것이다. (녹취자 - 목사님, 요한계시록 해석이 기가 막힙니다)

◈ 남성은 없고, 여성성만 !!

그렇게 되면 창세기 3장 15절에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여자와 남자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남성은 없는데, 여자의 후손이라는 여성성만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성성 대 뱀', 즉 악마성과의 대결장이 곧 성경내용이고, 그게 하나의 현실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창 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러므로 이 '여성성' 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여자가 남자에게 지배를 받으면서도 결국은 기어이 자식을 낳게 되는데, 그렇게 반드시 자식을 낳아야만 그게 곧 복이라는 것이다. 물론 남자와 여자는 모두 다 죽어버리고 말이다.

◈ 사무엘의 등장은?

한나가 첩 브닌나에게 그렇게 구박을 받았는데, 그래서 한나가 기도하면서 외칠 때 주께서 주신 것이 무엇인가? 사무엘인데, 그런데 한나가 사무엘을 낳았을 때 찬양한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이 사무엘은 남자가 아니고 메시야인데, 그러니 여성성, 즉 '여자의 후손'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임신을 하지 못하게 하신 것은, 한나가 자기 자식을 낳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한나' 라고 하는 껍데기를 통해서 메시야를 미리 보여주는 여성성을, 그것을 한나의 몸에 담아서 바깥으로 태어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게 누구인고 하니, 곧 사무엘인데, 바로 그 사무엘의 예언을 통해서 메시야가 나오고, 그 메시야가 다이렉트로 다윗의 출생과 관련이 되어있고, 또한 이 다윗의 출생은 다윗의 자손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윗의 자손과 연결이 말이다.

◈ 숨어있는 여성성 !!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현재 도시형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 부분이 오늘 강의의 하이라이트인데, 그 여성성은 숨어있다는 것이다. 지배받고, 고난받고, 학대를 받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이 세상은 무엇으로 바뀌는고 하니까, 여성성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성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말이 있는데, "아버지가 날 낳으시고 어머니가 날 기르시니" 라고 말이다. 그러니 아버지가 낳은 자식에게 엄마는 무슨 노릇을 한 것인가? 엄마는 식모노릇을 하다가 그냥 죽어버리고, 그 자식은 누가 낳은 것으로 쳐준단 말인가? 아버지가 계속해서 낳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는 시집을 갔으니 말이다.

그렇게 시집을 가게 되면, 자식을 낳아도 그 자식은 엄마 호적이 아닌 남편의 호적에 오르게 되는데, 그래서 외국에서는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자의 성을 따른다는 것이다. 노벨상을 두 개나 탄 여자가 '마담 퀴리' 인데, 원래 그 여자의 이름이 '마라' 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면 모르고 누구의 부인으로 불러야 아는가? 퀴리 집안의 부인으로, 그렇게 남성성이 지배한다는 말이다.

◈ 그런데 성경에서 왜 남성성이?

그러면 처음부터 성경에서 아예 남성은 조져버리고 여성을 부각시키면 되는데, 그런데 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는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가? 그것은 바로 여성성이 낳은 자식이란 것은, 남성성을 죽이고 부정하는 힘에서 그러한 자식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여성성은 숨어있는데, 숨어있는 것이 남성성을 죽이고, 그 다음에 죽음 속에서 비로소 생명이 잉태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악마가 다스리는 이 현실세계에다가, '언약' 이라는 철로를 깔아버린다는 것이다. 현실세계 속에 말이다.

◈ 마태복음 족보에 나오는 '여성 4인방' !!

그러므로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보면 어떠한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라고 하시면서 족보가 계속해서 잘 나가다가, 그만 족보가 단절된 듯한 느낌을 줄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누가 들어있는가? '다말에게서', '라합에게서',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마리아에게서' 라고, 뭔가 특이한 의미를 지난 여성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마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마 1: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 1: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마 1: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마 1: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마 1: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마 1: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마 1: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마 1: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마 1: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를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마 1: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마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

그렇다면 여성이 들어가서 낳은 자식은 어떠한 자식인가? 그것은 남성이 낳은 자식이 아니라, 여성성에서 나온 후손이기 때문에, 그래서 남자가 아닌 '여자의 후손'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여자의 후손에서, 즉 여자가 무엇을 앉는가? 그것이 이사야서에 보면 나오는데, 여자가 아들을 앉는다는 말이다. 여자가 아들을 말이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숨겨진 여성성 속에 복음의 비밀이 !!

그런데 여자가 아들을 낳을 때는, 그 배후에는 이 세상에 군림하던 이 세상의 모든 남성들은 다 죽고, 숨어있던 여성성이 기존의 남성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남성을 여성의 품에 앉게 만드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이 현실 속에, 즉 우주에 담겨있는 비밀이라는 것이다. 숨겨져 있는 비밀, 즉 복음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남자가 여자를 낳았으니, 여자는 "내가 남자 밑에 있다" 라는 표시로서 머리에 수건을 쓰는데,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을 남성성 위주로 다시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또한 남자의 명예를 위해서 여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여자에게 최고의 영광스러운 칭호라는 말이다.

(고전 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고전 11: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고전 11: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고전 11:6)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고전 11: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그럴 때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16절인데, ㅋㅋ), 즉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기존의 이 죄악 된 세상을 경유하면서, 그 죄악 된 해석은 파괴되어버리고, 그 파괴된 것을 통과해서 빠져 나오면, 진짜 제대로 된 남자를, 그 남자가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에 의해서 우리 교회 전부는 신부가 되는 식으로, 그렇게 해서 창세기 3장 16절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 그러니, 엉터리 해석은 반드시 필요해 !!

바로 그런 완성을 위해서 엉터리 해석을 내놓은 기존의 모든 세상의 남성성은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깨어지기 위해서, 그것이 곧 죄악임을 말이다. 그러한 남성성은 이미 악마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했는데, 즉 처음에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남자와 여자가 구별이 없었는데, 둘이 한 몸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나오는 징벌 가운데 하나가,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고,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는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 자체는 일이 완료가 되고 완성이 되면 깨어져야 하는 임시적인 것인데, 그런데 그 임시적인 것이 깨어지고 난 다음에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완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완성이 됨으로서, 그 어떤 존재라도 "구원받을 때만 예수님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라고 하는 소리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야, 주님이 아니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 라고 하면서 영원히 주님의 영광을 고착화시키고 굳혀버리는 그 세계가 곧 아들의 나라이고, 천국이라는 말이다.

다시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는데, 즉 회복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때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한 몸이 되어서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없고, 사모하고 다스리고 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그때로 가고 싶다" 라고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미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죄가 있어줘야 은혜가 되는 것처럼, 그 죄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있어줘야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하늘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만 높이게 것이 천국이니 말이다. 그러니 주님은 개인적인 구원열망은 전혀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먼저 교재 140페이지를 다시 보자.

** 인간에게 있어서 '~있다' 라는 말은, 반드시 '누구를 위하여', '누구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시 135:4)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여기에 시편 135편 말씀이 나오는데, 즉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창세기 3장 16절을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소유인 이스라엘에게만 담아내었는데, 물론 그들에게 믿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들이 믿든지 말든지 간에, 지키든지 말든지 간에,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주께서 이미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찍었으면,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말씀성취에 어떤 식으로든 가입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빼도 박도 못하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기존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함으로서 진짜 이스라엘을 그 안에서 새롭게 만드는 방식으로, 주께서 그렇게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그런 내용들이 성경말씀에 담겨있는데, 그렇게 되면 나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이사야 43장 7절에 나오는데, 그 말씀도 같이 성취가 된다는 말이다.

(사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반면에 구약에서의 우상이란 '자기를 위하여'와 연관되는 신을 두고 말한다.

(출 32: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 남성성의 세계에 등장한 특이한 여성들 !!

우상은 '자기를 위하여' 라는 기존의 인간에서 출발하는데, 그 인간은 남성성의 세계라는 것이다. 남성성의 세계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고, 모두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남성성의 세계를, 그런 족보를 틀어버리면 특이한 여들이 등장하는데, 다말이나 기생 라합이나 룻과 같은 여성들이 말이다. 우리야의 아내도 나오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특이한 요소에 의해서 방향이 틀어졌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주님은, 우리의 일상성(日常性)을 건드리지 않지만 !!

어제 낮에 설교했던 것을 잠시 다시 해보면, 즉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성을 건드리지 않고 조용하게 따로 일을 하십니다" 라고 했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지하철 이야기를 했는데, 대구의 상인동에 있었던 일인데, 땅 밑에서는 지하철 작업을 하고 있고, 그 위에는 차들이 달리고 사람들도 다닌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이들이 등교하는 시간에 그만 땅 밑에서 가스공사를 하다가 가스가 터져서 위의 두꺼운 철판을 뚫고 폭발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결국은 밑에서 작업하던 것이 지표면으로 가스가 터지듯이 폭발하게 되면, 그게 곧 구원이라는 것이다.

◈ 일상성에 침해를 받은 사도바울 !!

다메섹으로 내려가던 사울이, 자기로서는 일상적인 일을, 즉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들이는 일들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구를 만났는가? 하늘에서는 번개가 치고 자기는 그만 말에서 떨어지면서(?) 눈은 장님이 되면서,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하면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행 22: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행 22: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행 22: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22: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행 22: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그러니 주님은 우리의 일상을 건드리지 않지만, 하지만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가? 오늘 강의에 의하면, 여성성이 남성성을 이미 건드려서 부수어 버리고, 그 여성성을 인해서 주의 말씀이라고 하는 새로운 예수님 중심의 남성성으로 말씀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라고 하니 형식적으로 지키는데, 그게 아까 말한 제의적 상징성으로, 즉 처음에는 제사도 잘 지내고 했는데, 계속해서 하다보면 그냥 상투적으로 하게 되는데, 즉 관행과 습관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을 말하면서 말이다. 

◈ 하나님, 저는 일만번제를 드리겠습니다 !!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이라고 하니 무슨 생각이 드는가? 솔로몬이 드렸던 제사인 일천번제인데, 실제로 일천번을 드리는 것인데 말이다. 그때 솔로몬이 하나님에게 복을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 분명히 받았다는 것이다. 엄청나게 많이 말이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우리는 어떻게 하겠는가? 솔로몬이 일천번이면, 우리는 이천번, 삼천번, 사천번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일천번을 해봐야 기껏 솔로몬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다. 만번을 하면 복을 솔로몬보다 10배나 더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상징성이 집단을 만들어 !!

왜 그런고 하니까, 사람은 상징성이 없이는 살지 못하는데, 상징성이 단체를 만들고 집단을 만든다는 것이다. 전에 강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에 대해서 말이다. 필기를 하신 분은 과거의 다른 노트를 보면 다 나오지 싶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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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에 대해서(네이버에서)
1. 상상계(거울단계) - 거울단계는 생후 6개월 내지 18개월 된 어린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기 영상을 보고 매우 즐거워하는 모습을 관찰함으로써 유래되었습니다. 상상계에서 어린이는 아직 자신과 타인의 구분하지 못합니다. 분열된 자아 때문에 상상계에서 혼란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인 상징계로 넘어가게 되지요.
2. 상징계 - 상징계는 언어와 문화로 이루어진 보편적 질서의 세계입니다. 자아가 형성될 수 없었던 상상계와는 달리 상징계에서는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그러나 이러한 상징계로의 진입은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바로 어머니라는 존재 외에 아버지라는 금기를 받아들임으로서, 상징계로의 진입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상징계로 진입한 어린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으면서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아버지의 법으로 전치하게 됩니다.
3. 실재계 - 이 과정에서 어린이는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사회로 진입을 하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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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상징이라는 것은 법과 법으로서 타인과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즉 "니 상징을 내놔. 내 상징도 낼게" 라고 해서, 서로가 같음을 확인하면 같은 소속과 집단을 이루게 된다는 말이다. 그게 사회인데, 즉 법으로 만든 상징성이라는 것이다.

◈ 법은, 그물망과 같아서 !!

이런 상징성을 만들어놓게 되면, 이 상징성은 그물과 같아서, 여기에 가발비유가 아주 적당하지 싶은데 말이다. 머리에 머리카락을 심을 때, 물론 저는 그런 경험이 없지만, 그런데 TV를 보니 대머리에 머리카락을 심는데, 가만히 보니 그 머리에 뭔가 망을 씌운다는 것이다. 저는 미처 몰랐는데, 그렇게 해서 미끄러지지 않게 고정을 시킨다는 말이다. 그 망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곧 법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7살 아이를 성폭행했다고 하면 옛날 고대라고 어떻게 했겠는가? 변호사고 뭐고 필요가 없는데, 현장검증을 할 때 그때 그냥 밟아 죽여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법정에서 구속하고 말고 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안데스 산맥에서 사는 원주민들은 지금도 그렇게 하는데, 자기 집안의 문제이니, 경찰이고 뭐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경찰이 최씨라면, 자기들은 김씨이니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가문인데, 우리나라도 민주주의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데, 우리도 원래는 가문이 기본이라는 것이다. 안동 권씨, 밀양 박씨 등등, 그렇게 모두가 다 가문인데, 그러면 그 가문의 문제는 누가 해결해야 하는가? 거기에 나라가 왜 개입하느냐는 말이다. 각자 가문이 알아서 처리하면 되는데 말이다. 

◈ 가문에서 잘리게 되면, '아웃' !!

그래서 제일 무서운 법이 무엇인고 하니, "그러면 너를 족보에서 제하여 버린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족보에서 이름을 빼게 되면, 우리 가문이 받은 복에서 제외가 되고 저주를 받게 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물론 요즘 젊은 아이들의 경우에는, 정말로 웃기도 않는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가문에서 제외를 시켜버리면 제사를 지낼 때 어떻게 되는가? 후손들이 그 사람을 빼버리고서 제사를 지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또한 무섭지 아니하냐는 말이다. 그러니 옛날에는 그게 곧 종교였는데, 거기에 참석하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 제사가 곧 일종의 성만찬 !!

그러한 의미에서 제사가 일종의 성만찬인데,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가 다 한 형제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술잔도 서로 나누면서 향도 피우고 한다는 것이다. 장례식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모든 것이 법의 테두리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징들, 그리고 이게 질서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질서를 누가 세운다는 말인가? 남성성이 이것을 구축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성성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 이 법을 한 글자로 '의(義)' 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유다의 며느리인 '다말' 이라는 여자의 경우에, 그 여자가 자기 시아버지와 동침을 하는 창녀도 하지 않을 그런 짓을 했을 때, 나중에 유다가 다말을 보고 뭐라고 하는가? "니가 나보다 더 의롭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창 38:25)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한지라
(창 38: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 율법 외에 한 의(義) !!

그게 신약의 로마서 3장에서는 '율법 외에 한 의(義)' 라고 하는데, 물론 그것이 요즘 사람들에게는 먹혀들지 않겠지만, 하지만 누구에게는 공포스러운고 하니,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옛 뱀, 즉 악마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이고 쇼킹한 일이라는 것이다.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그래서 악마는 모든 것을 다 우리에게 제공하면서, "제발 율법 외에 한 의는 믿지 말라" 라고 하면서, 율법적으로 교인들을 꼬드긴다는 것이다. 즉 가발 망에다가 머리를 심게 만들어서, 그 망이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도록 조치를 한다는 말이다.

◈ 고린도 교회는, 남성성이 지배하는 집단 !!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것을 두고서 뭐라고 했는가? 가짜 복음, 즉 '다른 복음'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른 성령', '다른 예수' 라고 했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분명히 누구에게 말했는가? 다른 사람들이 아닌, 고린도 교회를 보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고린도 교회' 라는 법적인 단체가 있고, 거기에는 남성성의 지도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물론 여자들은 조용히 있어야 하는데, 집에서 아이나 잘 키우면서 남편에게 배우라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의 목사와 감독은 당연히 누가 되겠는가? 남자인데, 그 남자의 중심의 남성성이 법적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 고린도 교회를 보고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저것은 교회가 아니라, 양의 탈을 쓴 악마의 무리들이다" 라고, 그렇게 양아치 마을(?)이라고, 악마의 하수인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양을 빙자한, 그게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인데 말이다.

아무튼 이러한 제의적 상징성이 형식화가 되었는데, 그 형식화를 전통으로 하기 굳히기 위해서 법을 만들었고 말이다. 이러한 법이 영국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졌는데, 그러니 그것은 누가 인위적으로 지어내어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국에서 만든 최초의 법은 누가 손으로 쓴 것이 아니라, 일종의 '관습법' 이라는 것이다. 즉 관행이고, 관습이고, 전통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하나의 가발의 망처럼 짜여져 있는데, 우리는 그 위에서 각자의 포지션을 가지고 있고 말이다.

◈ 끝으로, 주님의 사랑은 '끝까지 사랑' !!

이제 끝으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율법 외에 한 의'로 주님의 사랑을 받았는데,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신부인데, 그런데 주님은 그 신부에게는 율법으로 묻지 않고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즉 "너는 이것을 지켰는가?"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니가 나를 사랑하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여, 제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 주님은 "그래, 내가 너보다 더 잘 알지. 하지만 내 말이 그게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니가 아는가?' 라고 물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의 그 사랑을 우리가 알고 있는지를 말이다. 

베드로의 마지막 대답이 바로 그것인데,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이 사랑해줄 때, 진짜 사랑이고 그것을 느낍니다. 그러니 나 스스로는 불가능합니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니가 나를 사랑하는가?" 라고 나오실 때, 그래서 우리가 그런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면, 그런데 그게 몇 분이 지났다고 하면, 그러면 또 다시 우리에게 뭔가 굳어진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굳어진 것이 무엇이겠는가?

(요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 21: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 언약의 기찻길 !!

처음에 강의할 때, 밑에 철로가 있다고 했는데, 그런 언약의 철로가 있어주어야 말씀으로 그 철로에 볼트를 쪼이듯이 단단하게 쪼여서 그 철로가 고정이 된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런 철로도 없이 그냥 말씀을 지키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기차가 달리다가 탈선을 하듯이, 언약이란 볼트로 쪼여주지 않으면 기차는 도저히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주님의 사랑이 있는 "너를 사랑해" 라는 곳에 있다가 우리가 다시 돌아서게 되면, 이게 무슨 층으로 가게 되는가? 이게 '제의적 상징성' 이라고, 조금 어려운 용어지만 이 정도는 쓸 수 있어야 하는데, 쉽게 말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마중을 나오는 나의 멋진 모습이다" 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게 제의적 상징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징성은 형식이기 때문에, 법으로서 우리 속에서 법제화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명히 어제는 은혜를 알았는데, 오늘은 어떻게 되는가? 그게 법으로 바꾸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처음의 그 노선으로 장착시킬 수가 있겠는가? 법으로 바뀌기 이전으로 말이다.

◈ 법과 사랑 !!

그것은 바로 법을 통해서, 법을 버리는 것이 아닌데, 그것을 법의 망에다가 얹어놓고, 즉 "나는 법대로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지켰기 때문에 나는 의인입니다" 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무엇으로 바꾸는고 하니, 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법으로 인해서 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분명히 자기는 이 법과는 상관없이 의인이라고 우겼는데, 하지만 의인이면서도 죄인임을 느끼게 만들어서, 그렇게 죄인을 느끼는 그것이, 자기가 어제 알고 있던 법에서 나온 죄인인지, 아니면 자기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만드는, 법이 아닌 다른 사랑에서 나온 죄인인지를 바라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게 되면, 자기가 의인이라고 우기는 것조차도 죄임을, 그런데 그것이 자기가 의인이라고 우긴 것이 원인이고, 그래서 그 결과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 십자가의 자리, 우리가 그렇게 가기 싫어하는 십자가의 자리에서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하실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다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 언제나 그 자리, '십자가' !!

그러니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은 십자가의 관계에서 나왔을 때 깨닫게 되는데,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십자가로, 즉 "나는 빼도 박도 못하고 그 십자가에 늘 있었다" 라는 사실을, 즉 십자가에서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 갑니다" 라고 하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항상 십자가에 있었는데, 하지만 우리 마음은 그 십자가를 속히 떠나서 주님의 원수가 되기로, 하여튼 작정을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십자가를 알았으니 그 십자가를 품고 속히 그 자리를 떠나서 따로, 그 십자가를 안다는 이유 때문에, 명목상 "나는 의인이다" 라고 하는 나름대로의 자기만의 자리를 만드는 식으로 우리는 또 다시 제의적 상징성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는 또 다른 법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고 말이다. 

다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자리는 십자가임을, 즉 "여기서 떠나지마. 자꾸 떠나면 엄마를 잊어버리게 돼. 반항과 방랑은 이제 그만!" 라고 하면, 물론 우리는 "엄마, 알겠습니다. 잘 있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우리는 돌아서면 또 다시 떠나게 되고 말이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은 증거하는 역할을 감당하신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말이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자리가 이미 고정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나 남들에게 나설 때는 "내가 이 정도로 압니다. 꿰뚫었습니다" 라고 자랑거리를 만들면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그 자리를 그만 떠나버립니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십자가의 자리가 곧 우리의 자리임을 잊지 말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9,21  오전 11시 50분에 마침.

                                                          빙글빙글 도는 물레방아 인생,
                                    하지만 언제나 늘 그 자리에 주님의 십자가가 있기에,
                                                                      THANK YO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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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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