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79강 용서 120917

피/피 2012. 10. 17. 13:27

79강 용서 1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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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20917피p244용서

피79강 용서 120917
 
[12 대구강의 18] - [피 79] - 용서


                                                    12,09,1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244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다. 용서)  용서가 가능한 신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특이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서로가 서로를 마주하면서 그냥 존재할 뿐이지, 용서하고 용서를 받는 사이로 성립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너는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으면 그만이다.

◈ 사랑보다 먼저, '용서' !!

여러분은 용서가 좋은가요? 아니면 사랑이 좋은가요? 사람들은 용서보다는 사랑을 더욱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용서한다' 라고 하면, 자기가 수세에 몰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기분이 나쁘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용서해줄 게" 라고 하면, "니가 뭔데 나를 용서해주노?"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너를 사랑해" 라고 하면, "그럼, 마땅히 사랑해야지" 라고 하고 말이다.

아무튼 용서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쁜 이야기인데,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죄를 지은 적이 있습니까?" 라고, 그렇게 감정적으로 불쑥 튀어나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용서하는 신은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오히려 주고받는 신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자기가 해준 만큼 복을 받는 그런 신을 말이다.

그것은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누가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평등하게 있으면서, 즉 이사를 왔다고 상대가 떡을 나눠주면, 자기도 제사를 지냈다고 떡을 주고 말이다. 서로가 평등한 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옆집은 자기를 용서해주고, 자기는 그 용서를 받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큰소리를 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용서를 받은 입장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이사를 하든지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다면, 우리도 이사를 해야될 입장인데, 즉 우리 인간은 신으로부터도 자유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용서든 뭐든 그런 것을 따지지도 말고, 즉 자기는 용서를 받기도 싫고 하기도 싫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용서가 없고 그냥 사랑만 있는, 그러한 하나님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 용서는, 특이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에서만 !!

마태복음 6장에 있는 주기도문을 보면, 12절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되어있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그렇게 가르쳐주심으로서, 예수님 자신 안에 숨어있는 하나님을 소개할 때, 이 '용서' 라는 것을 가지고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용서라는 것이, 일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발췌해내는 것이 아니라, 매우 특이한 민족인 구약 이스라엘만이 알고 있던, 그들만이 알고 있던 특이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모든 계시가 개시된다는 것이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성도는, 새 이스라엘 !!

신약에서는 성도를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새 이스라엘' 이라고 하는데, 'NEW' 라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오늘 교회, 혹은 성도라고 하니, 정말 성도가 된 자들은 무엇을 놓치면 안 되겠는가?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특이하고 독특한 면을 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름 자체가 '새 이스라엘' 이니 말이다. 그러니 기존 이스라엘을 알아야 새로운 이스라엘이 무엇인지 알던지 할 게 아니냐는 것이다. 즉 "아하, 새 이스라엘은 구약 이스라엘의 전통과 그 완성도 속에 포함되어있구나"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새 이스라엘을 모르고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하겠다는 것은 무엇인가? 도중에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몽땅 다 빼버리고, 그렇게 계시를 다 철수를 시키고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는 식으로 나오는 것과 전혀 똑같다는 것이다.

◈ 비나이다, 비나이다 ??

교회에 나오는 연세가 많은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을 보면, 그분들이 나름대로 평생을 살아온 고집이 있어서, 성경말씀을 이야기하면 실컷 듣고서 뭐라고 하는가? "그건 그렇고, 그래도 내 손자가 이번에 시험을 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빌면 되겠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치 옛날에 삼신 할매에게 자식을 달라고 빌 듯이 말이다.

물론 교회에 나오는 것은, 용돈도 주고 밥도 공짜로 주고 하니 좋다고 나오는데, 그런 것은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는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들에게 성경말씀을 하나라도 제대로 가르치려고 하면, 강력한 반발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지금 이 나이에 무슨 성경공부를 하겠습니까? 머리가 이미 돌이 다 되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되겠는가? "머리가 다 돌이 되었습니까? 그러면 몰라도 넣어드리겠습니다" 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목사도 그냥 대충하고 넘어가면 되겠는데,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말씀인데, 도대체 성경말씀이 무엇이라고 증거하고 있는가?

요한복음 5장 39절을 살펴보면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면, 그것이 곧 영생이다" 라고 하는데, 즉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식합니다. 돌이 다 되었습니다. 들어가도 모릅니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같이 휘말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 안 됩니다. 내려가세요 !!

얼마 전에 401번 버스를 탔는데, 운전기사가 아주 단호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장님이 버스를 탔는데 태워주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이 양반이 자기가 장님이라고 무조건 무임승차를 한다는 것이다. 시에서 차비가 다 나오는데 말이다. 그래서 401번 운전기사들에게 소문이 다 났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장님이라고 불쌍해서 그냥 태워주었는데, 그런데 그 뒤로는 시도 때도 없이 그냥 공짜로 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401번 버스 기사들이 모여서 의논하기를, 돈을 내지 않으면 그 사람을 태워주지 않기로 서로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불로동에서 무임승차를 하는 그 양반을 말이다. 그런데 마침 그 장면을 제가 버스 안에 있다가 목격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때 기사가 단호하게 하는 말이 "안 됩니다. 내려가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결합' - 용서에 입각한 사랑 !!

그것을 보고 제가 무엇을 느꼈는고 하니,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단호한 면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나이가 많으니 좀 봐주자" 라고 했을 때, 물론 우리는 얼마든지 봐줄 수 있는데, 하지만 그것을 그 사람을 망치는 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할머니, 옛날 할머니가 알았던 하나님은 상식적이고 무속신앙에서 나온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것은 안 됩니다" 라고 하면서 수정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수정해주어야 하는가? 특이한 민족 이스라엘이 맺었던 하나님과의 그 관계, 참으로 특이하고 특수한 관계인데 말이다. 그러한 관계로 교체가 되어야 새로운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과 그냥 막 먹으려고 덤벼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까, 용서에 입각한 사랑이 나온다는 것이다. 용서는 사랑을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해석한 뜻이 무엇인고 하니, '결합'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평소의 우리 생각과는 다른데, 즉 예수님에게 구원을 얻고 그냥 내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이렇게 큰사랑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줄행랑을 놓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는 "이리와, 니는 이제 나하고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사는 거야. 니는 내빼면 안 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가끔 찾아 뵙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아쉽고 필요할 때는 신을 찾다가, 그것이 해결이 되었다 싶으면 그만 잊어버리고 다시 자기 생활에 몰두하다가, 또 다시 자기가 하던 일이 제대로 풀리리 않으면 신을 찾는다고 하면, 그게 도대체 무슨 결합이고, 또한 그게 무슨 동행이냐는 것이다. 그게 아닌데, 결합이나 동맹은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다.

◈ 사사기가 보여주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사사기가 나오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 좀 어렵다 싶으면 찾아와서 비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가? 엉뚱한 사람을 사사로 만들어서 일방적으로 도와주니, 그래서 형편이 좀 풀린다 싶으니 헤헤거리면서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는데, 그렇게 해서 무슨 신을 섬기는가? 결합의 신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다룰 수 있는 신, 즉 아주 편리한 신인데 말이다.

인간의 손에 놀아나는 신, 뇌물을 주면 받아먹고 복을 주는 신, 그러한 신이 이스라엘 주변에 포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셨는데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께서 숨어있는 하나님을 드러낼 때는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하심으로서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과 진짜 하나님의 차이를 니가 아는가?" 라고 묻는 식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고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말고 다른 신을 또 다시 공부해야 하는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타고난 본성이 곧 다른 신이니 말이다. 타고난 본능이 말이다.

◈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우상입니다 !!

제 강의 가운데서 사람들이 제일 알아듣지 못하는 부분이 무엇인고 하니까, "신을 바꾸세요. 하나님 자체가 이단입니다" 라고 하는 대목인데,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기존 교회에서 뭐라고 하는가? 기존 하나님은 일단 맞고, 그 부록으로 다른 종교에서 몰랐던 것이 기독교에서 첨가가 된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행함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지만, 십자가를 믿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을 기존의 신 개념에다가 첨가를 하게 되면 완벽하게 아귀가 맞아떨어진다고, 그렇게 가르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다른 종교와 차별화가 되면서도,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신 개념을 긍정하고 호응해줌으로서, 그 사람을 신자로서 접수할 수 있다는 목회적 아이디어가 수립된다는 것이다.

◈ 종교란, '공통점 찾기(로고스)' !!

그것을 이번 여름수련회에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그 하나님은 어디에서 나온 하나님이라고 했는가? '로고스' 라고, 여기서 'DIALOG' 라는 것이 대화라는 의미인데, 대화는 서로 통한다는 것이고 말이다. 바로 거기 'LOG' 라는 것이 곧 '로고스' 라는 말이다. 즉 "너가 알고 있는 것과 내가 알고 있는 것의 공통점 찾기" 라는 것인데, 거기에서 종교가 나온다는 것이다. 공통점 찾기에서 말이다.

* A : 니도 신을 알지?
* B : 그럼 알지.
* A : 어떤 신인데?
* B : 자비롭고, 복을 주시고, 사랑도 해주시지.
* A : 그래, 나도 그런 신이야.
* B : 그러면 우리는 형제네.
* A : 반갑네.
* B : 나도 반가우이.

그래서 다이아로그, 즉 각자 각자 가지고 있던 자기 안에 들어있다고 여기는 신적인 거룩과 선함과 양심적인 것, 혹은 동양철학에 의하면 '측은지심(惻隱之心)' 이라고, 이런 인간들의 타고난 하나님의 성품을 끄집어내는데, 삼강오륜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삼강오륜이 무엇인가? 부부간에 결속도 시키고, 부자간에 결속도 시키고, 또한 나라의 아비인 임금과의 관계, 형제와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를 결합시키는, 그런 본드역할이 서양 쪽으로 보면 로고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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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은지심(惻隱之心) - 四端(사단)의 하나,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
맹자가 독창적으로 주창한 인성론으로 ‘사단설(四端說)’, 혹은 ‘성선설(性善說)’이라고도 한다. 성선설이란 사람의 본성은 ‘선(善)’이라고 보는 학설이다. 맹자에 따르면, 사람의 본성은 의지적 확충에 의해 덕성으로 높이는 단서를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다.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마음이 4단(四端)이며, 그것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근원을 이룬다. 맹자의 정치사상 핵심은 왕도정치인데, 그게 가능한 것은 사람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고 보고, 그 마음을 확대하여 나가면 ‘인의예지’ 네 가지 덕을 완성하여, 다시 이 덕행으로 천하의 백성들을 교화시킴으로써 왕도정치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1. 惻隱之心(측은지심) : 인(仁)에서 우러나오는 것. 불쌍히 여기는 마음
2. 羞惡之心(수오지심):의(義)에서 우러나오는 것.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
3. 辭讓之心(사양지심):예(禮)에서 우러나오는 것. 사양하는 마음
4. 是非之心(시비지심):지(智)에서 우러나오는 것.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   -- 두산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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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강오륜(三綱五倫)
유교(儒敎)의 도덕사상에서 기본인 3가지 강령(綱領)과 5가지 인륜(人倫).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하며, 글자 그대로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다.
오륜은 《맹자(孟子)》에 나오는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5가지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道)는 친애(親愛)에 있으며,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인륜(人倫)의 구별이 있으며,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뜻한다.
삼강오륜은 중국 전한(前漢) 때 거유(巨儒) 동중서(董仲舒)가 공맹(孔孟)의 교리에 입각하여 삼강오상설(三綱五常說)을 논한 데서 유래되어, 한국에서도 뿌리가 박혀있는 윤리도덕이다. -- 두산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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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수련회 때 한 것이 다시 기억이 나지 싶은데, 그 안에 하나님도 역시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이고, 그 은혜로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치 화초에 물을 주듯이 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용서가 왜 필요하냐는 것이다. 그야말로 얼토당토 않는 소리인데,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고, 그 존재하는 화초에 물을 주듯이 사랑으로 하면 된지 않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자식도 그렇게 키우고, 부부사이도 그렇게 밤마다 사랑으로 유지가 되는데, 새삼스럽게 용서가 무슨 말이냐는 것이다.

◈ 여보, 나는 당신을 용서한다 !!

만약에 아내가 저녁에 퇴근한 남편을 보고, "나는 당신을 용서한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만 부부싸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사랑과 전쟁' 이란 드라마에 나올 만한 내용인데(ㅋㅋ), 즉 "나는 너를 용서해" 라는 말을 들으면, 일단 남편은 움찔하는데, 사고를 치지 않는 놈은 없으니 말이다. 속으로 "저 여편네가 어떻게 알았지?" 라고 하면서도, 시치미를 떼면서 "내가 잘못한 것이 뭐꼬? 안 그래도 피곤한데, 와 그라노?" 라고 하면서 한바탕 전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이와 반대로 생각하면, 신랑을 출근을 하다가 들어와서는 집에서 청소를 하는 마누라를 보고 "너를 용서하겠다" 라고 하면, 여자가 뭐라고 하겠는가? 바로 열을 받아서 "와, 뭔데? 출근을 하다가 말고 이게 무슨 짓이고? 일하기 싫나? 그러면 내가 벌러 나갈까?"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의를 다시 하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사랑은 좋지만, 용서는 싫다"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제대로 풀려 가는데, 즉 정상적인 관계인데 말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매일같이 이야기하면서, 그런데 그게 무슨 죄가 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용서' 라고 하는 테마를 공부하기가 사실상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교재를 다시 살펴보자.

** (다. 용서)  용서가 가능한 신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특이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서로가 서로를 마주하면서 그냥 존재할 뿐이지, 용서하고 용서를 받는 사이로 성립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너는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으면 그만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돌이 나무를 용서할 수 없고, 바다가 미꾸라지를 용서할 이유도 없다. 각자 존재하는 대로 존재하면 그만이다. 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천지를 창조했다는 어떤 존재로서 신이라는 관념을 설정할 수는 있으나, 그 신은 저 하늘에 있고, 인간은 이 땅에서 그냥 그대로 존재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돌이 있고 나무가 있고, 혹은 바다가 있고 미꾸라지가 있다면, 서로 친하게 지내면 될 것이지 용서할 관계는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니, 돌이 나무에게 죄를 지은 것이 있는가? 아니면 바다가 미꾸라지에게 죄를 지은 것이 있는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느냐는 말이다.

◈ 목사님, 왜 내가 죄인입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복음은 좋은데, 애당초 내가 죄를 지은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문턱을 넘으면 되는데, 자기가 죄인이라는 문턱을 말이다. "목사님, 다른 것은 다 수긍이 되는데, 그런데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도저히 수용이 되지 않습니다" 라고, 즉 자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야만 하는 죄를 지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임재범도 그런 말을 했는데, 누구인지 혹시 아세요? 제법 실력이 있는 가수인데 말이다. "어떤 죄도 달게 받을 테니까, 저 여자를 내게 허락하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노래가사가 말이다(ㅋㅋ).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어떤 죄가 있어서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튼 "내가 무슨 벌이든 다 받을 테니, 저 여자만 내게 주세요"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챙길 것은 챙기겠다는 말이다. 

◈ 용서란, '군말하지 않기' !!

그러면 여기에서 용서가 무엇인지, 그 해답은 나왔는데, 결국 용서는 무엇인고 하니, "아무 것도 너는 챙길 자격이 없음을 니가 수용하는가?"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용서를 안다는 것은 "더 이상 군말은 하지마" 라는 주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아이쿠,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령을 받아야만 가능한데, 즉 "주여, 왜 내 인생을 이렇게 조져놓습니까?" 라고 하는 군말을 하지 않기라는 것이다. "왜 나를 이렇게 병들고 아프게 합니까? 해도해도 너무 합니다. 남들은 다 저렇게 건강하게 다니는데, 저는 이게 뭡니까?" 라고 하는 말을 하지 않기, 그게 바로 용서가 무엇인지 아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아브라함아, 너희 부부가 수고를 좀 해라 !!

물론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 해답은 간단한데, 하나님께서 이삭을 낳기 위해서 아브라함 부부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뜻인데,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야, 내가 너희 부부를 사용해야 되겠다. 더 이상 군말 없지?" 라고 하면,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앞으로 니가 백살 이상을 사는데, 살아봤자 니 인생은 나에게 이용만 당하는 인생이다. 어떻게 불만이 없나? 인정하겠나?" 라고 하면, 아브라함은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태풍이 연달아서 올라오던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이 자기를 이용하는 것인데, 즉 "하나님의 자기 백성 이용하기" 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백성을 위함이 아니라, 백성의 왕으로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주변물을 깔아놓는다는 것이다. 즉 중심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똘마니로서 그렇게 깔아놓는다는 말이다. 

◈ 처소, 여호와 삼마 !!

그런 똘마니와 주인의 만남을 출애굽기 15장에서 '처소' 라고 하는데, 이 처소개념이 성전개념이 되고, 이 성전주변에 마을이 형성되는 것을 두고 '여호와 삼마' 라고 해서, 그것이 에스겔서 48장의 마지막 끝 부분에 결론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출 15: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겔 48:35)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 척이라 그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 이 성전을 헐라 !!

그리고 이 성전을 두고 요한복음 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 라고 하시는데, 그게 참 어려운 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성전을 허는 능력이 곧 성전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인간들이 46년 동안 지어도 다 짓지 못한 그 성전을 허시는, 바로 그 헐겠다는 취지가 사건으로 발생하는 장소가 곧 성전이라는 말이다.

(요 2: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우리 몸이, 곧 하나님의 성전 !!

그리고 그 장소가 바로 죄 많은 우리 몸인데,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우리 몸을 두고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거룩한 사건이, 즉 십자가 사건이 '나' 라고 하는 죄밖에 모르는, 철저하게 숯 덩어리와도 같은 우리 몸이 놀랍게도 그 빛나는 거룩한 성전으로 변화가 된다는 것이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여기 '숯 덩어리' 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속속들이 시커멓지 않은 것이 없는, 전부가 다 새까맣다는 의미에서 숯 덩어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또 그 다음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고 하니, 누구를 너무 그리워해서 자기 마음이 숯 덩어리와 같이 새까맣게 탔다고 했을 때, 그렇게 자기 자신의 응축된 심정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는 것이다.

◈ '용서'는 하나님의 지우개 !!

물론 여기서는 첫째 전자의 의미인데, 우리의 전부가 다 전혀 여백이 없이 완전히 까맣다는 것이다. 마침 여기 모니터를 보니 잘 보이는데, 모니터가 그야말로 완전히 새까맣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께서는 바로 그 새까만 것에다가, 자신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새 이스라엘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집이 있어서, 그 새까만 곳에다가 우리도 나름대로 색칠을 하는데, 하얀 색도 칠하고, 빨간 색도 칠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나름대로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데, 그렇게 그림을 그려놓고는, 자기가 그린 그 그림을 되돌아보면서 감상하면서 여유를 즐긴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반칙인데,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주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우리의 어설픈 그림을, 즉 우리가 칠한 그 인위적인 색깔들을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폭력으로 지우시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심으로 지우신다는 것이다. 용서하심으로 말이다.

그러니 이 '용서' 라는 지우개는, 우리 속에 끼어있는 이물질을 지우는 개념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너를 용서했다" 라고 함으로서 우리를 교만하지 않게, 즉 "저는 용서를 받아야 될 자가 맞습니다" 라는 반응을 유도하시는데, 매일같이 우리가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회계장부가 곧 용서장부로 !!

그러니 직장에서 회계장부를 정리하면서도 수시로 "주여, 저는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라고 고백해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회계장부를 정리하면서 "야, 내가 사장이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하면서, 또 다른 현실을 끄집어내는데, 마음을 높이는 그 마음을 말이다.

그러므로 회계장부를 정리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용서장부로 본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건이 계속해서 유효하게 터지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운전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그러니 모든 일에 있어서 용서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 속죄, 대속, 화목 !!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해보겠는데, 조금 어렵더라도 양해를 해시고 말이다. 성경에서 용서를 이야기할 때는, '속죄' 라는 말을 하는데, 즉 '속죄', '대속', '화목', 이렇게 3가지가 이루어질 때 용서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속죄, 대속, 화목을 사람들에게 임상실험을 하기 이전에 어떻게 하시는가?

보통 제약회사에서 약을 하나 만들 때 어떻게 하는가? 먼저 실험을 하게 되는데, 그 실험을 할 때는 어떻게 하는고 하니, 먼저 토끼나 쥐에게 하는데, 주로 하얀 쥐를 가지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먼저 쥐에게 해보고 나서 효과가 있으면, 그 다음에 사람에게 실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임상실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양인가? 사람인가?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것을 어디에 먼저 쓰는고 하니, 양에게 쓴다는 것이다. 그것도 흠이 없는 어린양에게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즉 유월절 밤에 나올 때 모세가 백성들에게 무엇을 당부했는가? 이웃집의 양을 잡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식구처럼 기르던 자기 집안의 양을 잡으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집안은 갑자기 잡아야 될 양이 하나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잡아야 될 그 양과, 나머지 잡지 않아야 될 사람이란 이름의 나머지 식구들이, 즉 식구들은 멀쩡한데, 같은 식구라고 여겼던 양이 죽었을 때, 그때 바로 대신해서 죽는다고 하는, 즉 '대속' 이라는 의미로 끈끈하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웃집이나 남의 집에 있는 양을 잡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대표성이, 즉 그 집안의 대표성이 그만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임상실험을 할 때, 물론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양을 잡았지만, 그런데 애굽의 집안은 어떠했는가? 양이 아닌 사람을 실제로 잡았는데, 천사가 유월절 밤에 말이다. 그러면 무엇과 무엇이 같다는 말인가? 양과 사람이 같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방향을 틀어서, 즉 "양이 사람이다" 라는 것에서 "사람이 양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잡은 양은, 사실은 양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말인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양이 죽음으로서 죽어야만 될 자기 집안의 장자는 살았으니, 그러면 "그 장자를 대신하신 것은 양이 아닌 어떤 분, 어떤 사람이라는 말인가?" 라는 것, 그것이 곧 복음이고 기독교라는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스라엘은 매우 특수한 민족이고, 그 만들어진 시작부터가 숨어있는 하나님과의 특이한 관계로서 나아간다는 것이다.

◈ 내 대신에 다른 사람이 죽었다 !!

그리고 이 유월절이 확대된 것을 두고 '모세언약'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 모세언약 이전에도 언약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노아언약'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아언약 때는 무엇을 잡았는가? 마찬가지로 그때는 정결한 새를 잡았다는 말이다. 

(창 8: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다시 말해서, 방주 안에서 한 식구로 일년 이상을 심판 속에 있었는데, 그 중에서 더러운 양을 잡는 게 아니고, 더러운 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끗한 새를 잡아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더니만, 하나님께서는 그 방주의 취지를 진실에 더 가까이 보여주는, 더 풍성해진 의미로서, 시간을 따라서 십자가의 의미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내용이 점점 더 증가하고, 그 증가된 내용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고 기쁜 소식인데, 이것이 이기주의적 발상인지를 모르겠지만, 결국 기쁜 소식은 무엇인가? "내 대신에 다른 사람이 죽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자기가 숙제를 하지 않았는데, 그 벌은 다른 아이가 대신해서 받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 오늘은 니가 어린양이다 !!

아마 복음을 전하는 교사라고 하면, 그런 식으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지 싶은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학생들에게 숙제를 엄청나게 많이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숙제를 하지 않은 학생들을 불러모아놓고서는, 그 중에서 한 놈만을 골라잡아서 집중적으로 마구 조져버린다는 것이다. "오늘은 니가 어린양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숙제를 하지 않은 자들에게 말하기를, "너거들, 이 친구에게 미안하지? 이게 바로 대속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대속을 그렇게 증거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아이만 손해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나중에 따로 빵집에서 만나면 된다는 것이다(ㅋㅋ).

이것은 마치 조금 전에 말한, 회사에서 회계장부를 정리하는 어느 경리직원의 경우처럼, "나는 용서를 받아야 돼" 라고 하는 자세, 그것이 바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항상 복음적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냐는 말이다.

◈ 나는 용서를 받아야 됩니다 !!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나는 주님의 사랑을 받았어" 라고 한다면, 그것은 심히 수상하고 또 수상하다는 것이다. 정말로 수상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자기가 복 받은 것을 자랑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 말고, 자기 자랑이 아니라, "나는 용서를 받아야 돼" 라고 해야 한다는 말이다.

소위 예수님을 제법 믿는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주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나는 복을 받았어요" 라는 이야기는 하지만, "나는 용서를 받아야 됩니다" 라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뭔가 냄새가 나는데, 가짜 이스라엘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황 전도사님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얼마 전에는 이 집사님도 돌아가셨고 말이다. 그런 장례식에 갈 때마다 다른 교회 교인들을 많이 만나는데, 그러면 자꾸만 옛날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제가 종교인으로 살던 그 모습이 말이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잠재적으로 그러한 것들이 남아있음을 느낀다는 말이다.

◈ 면류관을 벗으세요 !!

다만 다른 점은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한다는 것을 느낀다는 점인데, 물론 우리가 이 땅에서 종교인으로 살아간다면 전혀 하자가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면, 문제는 천국에는 그런 사람을 전혀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에게 욕을 하든 무엇을 하든 그것은 상관이 없지만, 제가 답답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천국에서는 그런 사람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천국에는 자기 면류관을 쓰고 돌아다니는 인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설교시간마다 "면류관을 벗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주님 앞에서 면류관을 쓰고 폼이나 잡고 돌아다닌다면, 그것은 마치 패션쇼와도 같은데, 그런 이 세상 교회에서 하던 짓거리는 천국에서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그런 벗으라는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욕을 바가지로 들어먹어도 말이다.

◈ 천국은 마치 !!

제가 어느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즉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그냥 말씀하시면 되는데, 그런데 꼭 뭐라고 하는가? 아침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오후 3시에 온 사람을 줄줄이 열거하신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천국에 어떻게 가야 되는지, 거기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 정답을 오후 5시에 온 사람만이 안다는 것이다. "천국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그냥 공짜로 갑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침 10시에 온 사람은 뭐라고 하겠는가? 그 소리를 듣고 화를 낸다는 것이다. 아침부터 와서 열심히 일한 자기는 무엇이 되느냐는 것이다. 상급이라도 좀 줘야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상급을 주장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 20: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마 20: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마 20:3)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마 20: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마 20:5) 제 육 시와 제 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마 20:6)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마 20: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그래서 제가 한국교회를 보면 참 답답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상급을 이야기하면 교회부흥은 되는데,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하면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하면 말이다. 그런데 그게 세월이 지나서 나이가 들면 봉사를 하고 싶어도 체력이 달려서 못한다는 것이다.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그런 것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적금으로 들었던 상급을 오히려 빼먹을 판이라는 것이다.

◈ 교회인가? 쓰레기장인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장도들이 기도할 때 어떻게 하는가? 과거에 쌓아놓은 것을 빼먹는 식으로 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자기가 집을 팔고 헌금을 해서 제 아무리 예배당을 잘 지어도, 여기 대구에도 보면 얼마나 크고 화려한 교회들이 많이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단 한 명이라고 천국에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런 인간 쓰레기들을 모아놓으면 냄새만 풍기는데, 세상에 그렇게 수십 수백 억을 들여서 짓는 사치스러운 쓰레기장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쓰레기장을 그렇게 화려하게 지어서 무엇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런 자들을 만나보면 "복을 받았습니다. 사랑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지, "저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장례식장에서나 명절에 다른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을 만나보면, 기껏해야 한다는 소리가 "옛날에 한번 용서를 받은 적은 있는데, 지금은 아니야" 라고 하고 말이다.

◈ 과연 대속과 속죄가 유효한가?

그렇다고 하면, 이 "속죄, 대속, 화목" 이라는 것에 있어서, 화목이 무엇인고 하니, 대속과 속죄를 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도 좀 어려운데 말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과연 대속과 속죄가 유효한가?" 라는 점인데, 그것을 검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서 검사를 하는가? 하나님께서 검사를 하시고 합격이라는 표시를, 즉 '참 잘했어요' 라는 도장을 받으면 되는데, 그게 바로 화목제사라는 것이다. "어이, 이리와 봐. 우리가 이번에 최선을 다해서 양을 잡았으니 하자가 없겠지?" 라고 하면, "그래, 우리는 완벽했어" 라고, 그렇게 자기들끼리 아무리 완벽하고 하자가 없어도, 그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들끼리 아무리 유월절에 완벽하게 양을 잡았다고 해도, 자기들끼리 그것이 맞다고 생각해도, 전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들은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아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겠지만, 하지만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는 것이 결코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 '화목'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

어린양을 어떻게 잡든, 즉 칼질을 좀 삐딱하게 하든, 혹은 피를 발라야 하는데, 거기에 살점이 조금 섞이든, 그런 식의 완벽함이 아니라, 그 안에 '화목' 이라는 것이 있음을 주께서 인정해줄 때,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넘어간다는 것이다. 심지어 양을 잡은 가운데서도, 양을 잡는 행위가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도록 빼버리는 것이 화목이라는 제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게 로마서 3장에 나오는데, 즉 '율법 외에 한 의'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이심으로서 그분이 화목제물이 되셨는데, 그 화목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셨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복음의 비밀은?

제가 복음의 비밀을 알려드리겠는데, 즉 진리가 무엇인고 하니, 주께서 다 이루었음을 믿는 것, 바로 그것이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 이루셨는가? '속죄, 대속, 화목' 이라고 하는, 이 3가지가 모두 다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 인간이 제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또한 우리 인간이 잡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우리 인간이 장소를 마련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들어가는 비용도 우리 인간이 조달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적어도 구약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 구약은 일종의 임상실험 !!

왜냐하면, 구약은 일종의 임상실험인데, 즉 소나 개나 돼지를 잡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림자인데, 진짜 사람을 잡는 것은, 그것은 구약 전체가 하나의 모형이기 때문에, 이것은 마치 제약회사가 완제품 약을 만들기 이전에, 미리 실험해보고 수정하는 작업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 이스라엘은 우리에게는 참 고마운데, 왜냐하면 우리가 당해야 될 실험을 그들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그래서 이방인들은 그런 임상실험을 통해서 만들어진 제약회사의 특효약인 성령을 그저 먹음으로서, 율법도 없이 의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율법이 없이 말이다.

그러니 이런 횡재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얼마나 고마우신 하나님인지 모르는데, 그런 생각만 해도 입가에 띄워지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미소가 띄워지는 순간에는 이 세상의 근심걱정이 모두 사라지고 없는데, 그 순간만큼은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용서하심만 생각난다고 하면, 그래서 입가의 미소가 있는 그 순간만큼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말이다. 반대로 우리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기만 생각하니 그렇다는 말이다. 누가 자기 미소를 받아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썩소인가? ㅋㅋ)

◈ 형식이 진실을 둘러싼다 !!

이것을 조금 더 해보면, "형식이 진실을 둘러싼다" 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빠져 나오지를 못하도록, 틈이 생기지 않도록 말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일종의 형식인데, 그 형식이 얼마나 세밀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도저히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말이다.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서 40일 동안을 있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율법이, 특히 제사장의 복장을 보면 얼마나 자세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는데, 얼마나 세세하게 되어있는지, 그 치수까지도 일일이 다 재어서 가르쳐주셨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형식을 통해서, 즉 뭔가 아무 것도 없는데 자꾸만 형식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 구약은, 마치 사무라이 영화처럼 !!

왜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를 보면, 지금은 아니지만 제가 어릴 때 그런 영화들이 한국에 많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런 영화를 보면, 여기에 일본식 조그마한 집이 있는데, 그 주위를 시커먼 두건을 쓰고 복면을 한 자객들이(닌자?) 스치고 지나간다는 것은, 즉 지붕 위에도 올라가고, 옆에 있는 언덕에도 올라가는 것은, 그 집에 뭔가 자객이 암살해야 할 중요한 인물이 들어있다고 하는 의미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구약도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처럼 뭔가 하나의 초점에다, 즉 '형식' 이라는 집에 자객들이 여러 곳에서 집결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형식만을 보지 말고, 그 형식의 방향성이 과연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그것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가장 극단적인 저주가, 곧 십자가 !!

이것은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모든 모세언약과 선지자들의 모든 말씀이 어느 장소에 집결하는가? 그게 곧 '십자가' 라는 것이다. 제가 서울의 의존교회에서 강의를 하면서, 저주 가운데서 가장 극단적 저주가 바로 십자가라고 했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사람의 몸이 있는데, 이들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튼 그 사람들에게 묻기를 "당신은 어떤 저주를 받으면 가장 힘들고 무섭겠습니까?" 라고 말이다. 물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지 싶은데, 몸이 아픈 것, 이혼한 것, 사업에 망한 것 등등을 말이다. 물론 지옥 불도 무섭다고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개념은, 사람이 자기 몸이 있으니, 그 몸이 아프고 불편하다고 느낀 것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은 무엇인가? 우리 몸이 아픈 게 지옥이 아니라, 우리 몸이 아무리 건강하고, 죽을 때도 고난이 없어도, 돈이 많이 있어도, 그게 지옥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진짜 저주가 어디에서 나오는고 하니까, 그게 곧 십자가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신, 바로 그 십자가 말이다. 그것이 진짜 제대로 된 저주라는 말이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생일 저주합니다 ♬

욥의 경우에도 임상실험 대상자인데, 욥도 어떤 의미에서는 참 불쌍한데 말이다. 지옥에 갈 인간들을 멀쩡한데, 정작 천국에 갈 자신은 온갖 고난을 혼자 다 받고 있으니 말이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자기 생일을 다 저주했겠는가? 자기 생일에 가위표를 그려놓고는 '저주를 받은 날' 이라고 적어놓았다는 것이다. 그게 욥의 카렌다인데, "생일 저주합니다, 생일 저주합니다♪" 라고 말이다.  

욥은 바로 그런 심정인데,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욥은 실험 중이기 때문에, 즉 장차 올 십자가라는 진실을 미리 앞당겨서 임상실험에 들어간 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 생일을 저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생일을 저주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자기 존재자체에 대한 저주이고, 그런 존재자체에 대한 저주라는 것은, "'나' 라는 존재자체가 죄 덩어리다' 라는 것인데, 아까 본 모니터처럼 말이다. 그렇게 그야말로 시커먼 덩어리인데, 그것을 나중에 다윗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모친의 죄 가운데 태어났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전에도 말한 적이 있었는데, '뽕듀이(?)' 라는 프랑스 요리를 보면, 빵에 치즈를 가득 가득 묻혀서, 그만 치즈범벅이 되어서 먹는다는 것이다. 물론 제가 직접 먹어보지는 않았지만(ㅋㅋ), 그렇게 우리가 '죄' 라는 치즈 속에서 빠져 나왔으니, 우리 몸에는 그런 치즈 덩어리가, 즉 죄 덩어리가 그대로 붙어있다는 것이다.

◈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

그래서 다윗은, 자기가 사람에게 범죄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했다는 것인가? 오직 하나님께만 범죄했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성령을 자기에게서 가두어가지 말라고 하는데, 이 얼마나 놀라우냐는 것이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그러니 명절이나 장례식장에서 가서 "우리는 복 받았습니다" 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서로 하려고 교회에 나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장에 "니만 복을 받았나? 우리교회는 이런 복을 받았다" 라고 나오는데, 그런 복의 배틀게임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저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우리 조 권사님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다음 주에 멀리 가신다고 하는데, 거기서 한바탕 배틀을 벌려보라는 것이다(ㅋㅋ). 

◈ 용서를 받은 쪽, 용서를 받지 않은 쪽 !!

주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속해있는 환경이 그 얼마나 적그리스도적이고 비복음적인지를, 그것을 보는 즐거움도 한번 누려보라는 것이다. 즉 축복을 많이 받은 쪽과 받지 않은 쪽이 아니고, 용서를 받은 쪽과 받지 않은 쪽이 있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만이 품고 있고 알고 있는 축복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냥 받아 챙기기만 하면 되는데, 그래서 그런 것만을 자랑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라는 말이다. "아이쿠, 우리 자식놈은 내가 그렇게 공부를 하지 말라고 해도, 자기는 공부가 제일 쉽다고 하면서 시험만 치면 수석합격을 하고, 그리고 우리 딸은 누구를 닮았는지 보는 사람들마다 이쁘다고 입을 대니, 정말로 골치가 아파요" 라고 말이다.

◈ 형식을 모으면 숨겨진 내용이 !!

그러니 형식이 옥죄이듯이 꽉꽉 쪼이는데, 물론 어떤 사람은 제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이 목사는 형식을 버리라고 한다면서?" 라고 시비를 거는데, 하지만 형식을 왜 버리느냐는 것이다. 형식이 모아져야 그 안에 숨겨진 내용이 나오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형식인데, 그것을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모든 것이 형식이라는 말이다. 왜 그게 형식인고 하니, 진짜 죄인으로 다가가게 하기 위한 행동을 보여주기 때문에 말이다. 물론 그 행동 하나하나가 죄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 내용, 즉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나름대로의 저주받을 죄를 순간순간 짓고 있다는 것이다. 

◈ 대속(代贖)과 속죄(贖罪) !!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 하나 하나를 다 모으게 되면, 점점 더 어디로 가는고 하니까,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는, 그게 곧 대속인데 말이다. 즉 우리 자신이 그렇게 버림을 받아야 하는데 주께서 대신해서 버림을 받는 것, 그것이 바로 '대속' 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속죄'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제물의 영향을 받는데, 즉 대속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인데, 그러니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죽는다고 하는, 병이 들든지 차에 바쳐서 죽는 게 아니고 말이다. 오직 죄 때문에 죽는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이 속죄의 경우에는, 이러한 것이 참 어려운데 말이다.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즉 그냥 죽는 것이 있고, 또한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있는데,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그냥 죽는 것은 힘이 빠져서 죽는 것이고, 죄 때문에 죽는 것은 저주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 죽어라, 이 놈아 !!

그러므로 우리가 힘이 빠져서 죽는 것은 자기가 알아서(?) 죽는 것이지만, 하지만 "죽어라, 이 놈아!" 라고 해서, 그런 취지가 담겨있는 죽음이 곧 속죄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흔히 형식으로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은 속죄의 죽음을 죽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주께서 우리를 적극적으로 "죽어라, 이 놈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믿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니가 힘이 빠지면 죽어라!" 라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즉 조심 조심스럽게 살다가, 차 조심을 하다가 나중에 힘이 빠지면 죽으라는 것이 아니고, "죽어라 죽어, 이 놈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속죄, 그 대속인데, 하지만 그런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진짜 대속과 진짜 속죄를 인정해줄 때, 비로소 주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은, "이제 임상실험은 끝!" 이라는 의미인데, 쉽게 말해서, "그동안 내가 너를 이용 잘했다" 라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만족함을 얻을 때 주어지는 것이 곧 화목인데, 하나님과 결합이 되어서 더불어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양식으로 말이다.

◈ 한 가족, 한 패밀리 !!

그 양식이 곧 생명인데, 그러한 생명이 같이 나누면서, 우리가 주 안에 주는 우라 안에, 그렇게 주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이니, 우리도 하나님과 예수님과 같이 하나가 되는 하나의 가족, 한 패밀리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요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 십자가는, 현실의 핵심 !!

바로 이러한 것이 난해한 사상이나 철학 등이 아니라 그야말로 실제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왜 엉뚱한 생각을 하느냐고 안타까워했다는 것이다. 즉 사도바울이 말한 눈앞에 보이는 십자가는 사상이나 관념처럼 인간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현실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오늘 같이 이렇게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이 현실, 그 현실의 중앙지점에는 십자가가 있다는 말이다. 이런 비바람에 참새가 얼마나 많이 떨어져서 죽겠는가? 그러니 그 참새를 키우는 것도 다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으로, 그렇게 참새를 비롯해서 모든 것이 다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형식만 모아놓으면 무엇이 되는고 하니, 이게 상당한 중요한데, 저는 그것을 '철로'로 본다는 것이다. 이런 철도노선이 되는데, 제가 왜 노선이라는 말을 하는고 하니, 우리가 이 노선에 관여해야 하는데, 이 노선을 다른 말로 '언약' 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 노선에 합류하지 않으면,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란 계보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두 언약 !!

언약을 설명할 때, 이 언약에는 반드시 두 개의 계보를 말한다고 해서 '두 언약' 이라고 하는데, 갈라디아서 4장에서 말이다. 즉 사라 계보가 있고, 하갈 계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제 주일오전시간에는 구조라고 했는데, 마치 치킨을 탁탁 들어올리듯이 말이다.

(갈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그러니 아주 비정하고 냉혹하고 차갑다는 것이다. 그 틀에 맞추어서 칼질을 해버리는데, 두리뭉실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잘 믿고, 아주 잘 믿고, 약간은 덜 믿고 하는,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아예 곽을 떠버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두 개의 노선이 나오는데, "언약노선인가? 아니면 언약 바깥의 노선인가?" 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언약 바깥의 노선에서는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보아도,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비 언약노선의 성경해석법 !!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해드리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언약의 노선인지 아닌지 어떻게 확인하는고 하니, 그것은 "언약의 노선에 들지 않은 자들이 어떻게 성경을 해석하는가?" 라는 것을 알면 된다는 말이다. 즉 언약의 노선에 들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말이다.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고 하니, 그게 성경에 다 나와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과 그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마엘과 그 모친의 경우에 참으로 불쌍하다는 것이다. 남의 집에 식모살이를 하려고 왔는데, 그런 식모살이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약을 그렇게 했는데, 그만 주인과 동침을 하게 되어서 아이까지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있는가? 당연히 주인이 다 알아서 해주어야 하는데, 잠자리를 같이한 남자가 책임을 지는 것이 인륜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어떻게 했는가?

◈ 동양철학 - '인륜은 곧 천륜' !!

동양철학에서는 "인륜은 곧 천륜이다"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의 진리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질서를 통해서 신의 질서를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게 이방종교, 즉 우상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즉 "질서를 찾되, 있는 것과 있는 것 사이의 공통적 질서를 만들어내면, 그것이 곧 신의 질서이다" 라고, 그렇게 그들은 장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태양과 달과 같은 천기뿐만이 아니라, 인간대 인간의 관계, 또 가족과 가족의 관계에도 인륜이 있고, 그 인륜이 곧 나타난 천륜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륜을 어긴 인간은 천륜을 어긴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를 낳아준 부모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은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지옥에 간다는 것이 언약 밖에 있는 자들의 특징인데, 즉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접근해나가겠다는 것이다.

◈ 불교는 왜 효도에 관심을?

불교가 부모효도에 굉장히 관심을 두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정작 석가 본인은 그만 가출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왕자의 자리를 포기하고 집을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어디 과연 부모가 좋아했겠는가? 자기는 그렇게 해놓고, 정작 불교에서는 효도를 하지 않으면 염라대왕에게 간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왜 그런가?

불교가 제 아무리 교리를 내세워도, 민중들이 가지고 있는 인륜에 호소하지 않으면 종교자체가 확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주 특이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여자도 머리를 깎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교도 자기들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인륜과 천륜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인륜과 천륜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거나 버리지 말고, 즉 "나는 저들과 상관없다" 라는 식으로 나오지 말고, 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이해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언약노선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다.

◈ 또라이들의 합창 !!

그러므로 "언약노선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한 마디로 미친 짓이고 또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인륜과 천륜을 버리고 싶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초(超)인륜, 초(超)천륜, 그렇게 나간다는 말이다. 즉 자식이 미워서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또한 부부생활이 권태롭고 갱년기가 와서 마누라와 이혼을 하고 예수님을 쫓는 것도 아니고, 이것은 도저히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륜과 천륜은 자기 쪽에서 어떻게 조정이 가능하지만, 그러나 인륜도 아니고 천륜도 아닌 하나님의 계시는, 그것은 태고적부터, 아니 창세 이전부터 있어서 쳐들어왔다는 것이다. 아무리 도망을 쳐도 따라오는데,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이다.

◈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그들이 예수님이 보고 싶어서 기도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둘이 나란히 사이좋게 가는데, 거기에 예수님이 왜 낑기 드느냐는 것이다. 따라와서는 "내 다리 내놔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 유령인지, 천사인지, 사람인지 구별도 안 되게 다가와서 "너거들 무슨 이야기를 하노?"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눈을 떠보니 그 양반이 예수님이었다는 것이다.

(눅 24: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눅 24: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눅 24: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눅 24: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 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 …
(눅 24: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눅 24: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러니 이것은 마치 귀신이 달라붙듯이 달라붙었는데, 도저히 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겨우 떼 내었다 싶으면 또 찾아오니 말이다.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라는 것이다. 다메섹으로 내려가고 있는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덮쳐서, 졸지에 그만 인간을 다 버려놓고 말았다는 것이다. 결혼도 하지 못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만들어놓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서울에서 설교하면서 그런 말을 했는데, 즉 하나님의 자기 백성은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것이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게 바로 철로노선에 가있는 자들인데, 그게 곧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통 채로 하나님이 만드신 나라라는 말이다.

◈ 저주의 노선에서도 용서, 구원, 십자가, 천국개념이 !!

지금부터 어려운데, 이렇게 노선이 두 개가 있는데, 물론 하나는 천국에 가는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저주받은 노선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다리를 잘 타야 하는데, 물론 그래도 안 되지만 말이다. 물론 두 개의 노선은 간단한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용서, 사랑, 구원, 십자가, 언약 등등이 구원받지 못한 노선에서도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뿜어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고맙게 여겨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 구원받지 못한 노선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약, 구약, 삼위일체, 천사, 예수님, 구원, 천국, 지옥 등등, 그런 것들을 구원받은 노선에서 고스란히 모두 다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렇게 그것을 받아들여서, 그것이 우리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다른 노선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런 것들을 우리 쪽으로 마구마구 뿜어내도록 하셨음을, 거기에 대해서 감사히 여기자는 말이다. 그러니 거기에서 오늘 공부하고 있는 '용서'도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245페이지를 보자.

** 구약 이스라엘의 성막구조와 제사제도는 죄를 유발하는 구조이다. 흠 없는 제물이 불길 속에서 태워지고 피를 흘려야 하는 그 상황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제도이다. 시내산 위에서나 가능한 거룩의 큰 구조가 산 밑까지 진격한 것이다. 말씀을 앞장세우고 잠입한 것이다.

** 이로서 산 밑의 일상은 죄의 일상이었고, 자신들만의 삶 덩어리이었다. 이것은 더러운 짓이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서 자신들의 집단 내부에 거룩을 모셔야했다. 용서를 해주신다는 신의 자비도 철저하게 죄의식의 배경을 전제로 한다.

◈ 용서도, 죄의식을 배경으로 !!

여기에 보면 "용서해주신다는 신의 자비도 철저하게 죄의식의 배경을 전제로 한다" 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반발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에게 하는 말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목사, 당신 무슨 매일같이 죄만 생각하나?" 라고 말이다. 그런 소리를 제가 수천 수만 번은 들었지 싶은데, 하지만 죄를 이야기하지 않고 과연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다시 읽어보겠는데, 즉 "용서해주신다는 신의 자비도 철저하게 죄의식의 배경을 전제로 한다"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 죄의식을 먼저 깔아야, 즉 소프트웨어가 먼저 제대로 깔려있어야만 컴퓨터가 돌아가도 제 기능을 발휘하면서 돌아가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그 깔린 프로그램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가 무엇을 해도 죄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먼저 깔아야 그 위에 용서이든 사랑이든 구원이든, 어떻게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깔지 말고 이야기하자는 것인데, 즉 "우리는 무엇을 해도 죄인이다" 라는 것을 빼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흔히들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으로서 용서하지 못할 죄도 없고, 용서받지 못할 인간도 없다고 생각하지 십상이다. 하지만 요한일서 5장 16절에 보면 다음과 같다.

(요일 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 그러므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엄연히 있다. '용서되지 못할 죄'가 따로 있어야 할 이유를 염두에 두고 용서의 본질이 파악되어야 한다.

◈ 용서받지 못할 죄 !!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받지 못할 인간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용서를 받지 못할 죄는 무엇인가? 물론 성령을 훼방한 죄는 용서를 받지 못하는데, 위에 있는 요한일서 5장 16절에도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라고 되어있는데, 그 다음에 사도요한은 무엇을 구하지 말라고 하는가? "주여, 저들을 용서해주세요"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모든 것이 나왔음을 거부하는 죄 !!

그러면 사망에 이르는 죄가 도대체 무엇인가? 지금부터 그것을 설명해드리도록 하겠는데, 이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곧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모든 것이 나왔음을 거부하는 죄, 그것이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목사님, 저는 천국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또 주님을 믿습니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이 곧 사망에 이르는 죄라는 말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거기에 소망, 믿음, 사랑이 다 들어있는데, 성경에 나오는 것을 문자 그대로 한 것 같은데, 그런데 그 믿음, 소망, 사랑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생각하고 조사를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 믿음, 소망, 사랑을 이야기해도 !!

방금 "목사님, 저는 천국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또한 주님을 믿습니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할 때 그 출발점이 어디인고 하니, 자기가 이렇게 살아있고, 그 살아있는 자기 자신이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지고자 애를 쓴다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두 가지 노선 중에서 구원을 받지 않은 노선에서는 무엇이 죽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있다는 말인가? '나' 라는 것이 계속해서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서 나오는 축복과 저주라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유리하면 축복이고, 불리하면 저주가 된다는 것이다.

◈ 매일 죽고, 매일 살고 !!

이것은 한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지는데,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구원을 받은 노선은 무엇인고 하니, '나' 라는 것은 죽고, 오직 예수님만이 산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살려주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매일같이 살려주신다는 것은, 그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먼저 매일같이 우리는 죽는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 살려주시기 위해서 우리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되풀이되고 있음을 인정해주는 노선이 구원을 받은 노선이라는 말이다.

◈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어디서 나와야 하는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나오는 믿음이고, 소망이고,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보면,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두고 의존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강의를 했다는 것이다.

(살전 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자기 자신이 살아있는, 즉 지옥에 가는 노선의 입장에서 구원의 투구를 쓰려고 하면 간단한데, 철물점에 가서 머리 치수를 재서, 구약 때처럼 말이다. 교인들이 30명이라고 하면 그 숫자대로 투구를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좀 작게 만들고 어른들은 크게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마치 통일교 축제를 하는 식으로 그렇게 하면 되는데, 하지만 문선명이 그런 모자를 쓰고 폼은 잡았지만,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안에 시체가 들어있는데 말이다. 얼마 전에 자기가 시체임을 전세계적으로 적나라하게, 자기의 온 몸으로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잠언서의 "돼지 코에 금고리 같으니라" 라는 말씀처럼, 서로 격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잠 11:22)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으니라

◈ 구약의 형식은, 우리가 곧 해골임을 !!

그것을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무덤은 무덤인데,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페인트칠을 한 무덤 말이다. 그 안에는 해골이 들어있는데,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매일같이 거기에다가 도배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골에 도배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생명을 얻겠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구약의 형식은 우리가 해골임을 보여주는데 집결되고 응축되고 있는데, 구약의 모든 말씀이 말이다. 

아무튼 투구를 30개정도 맞추어서 쓰면 되는데, 그러면 그 투구는 누구의 몸에서 나온 것인가? 누가 살아있다는 말인가? 투구를 쓴 사람을 여전히 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온 구원의 투구는 어떻게 되는가? 투구를 쓴 사람을 매일 매일 살게 만드는가? 죽게 만드는가? 당연히 죽게 만든다는 말이다. 바로 그렇게 구원의 노선에 있는 사람과 있지 않는 사람의 노선이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 변하고, 또 변하고, 또 변하고 !!

우리 인간들은 틈만 생기면 자기 자랑을 하는데, 자기가 살려고 말이다. "나는 이것을 해서 살았다" 라고, 자기 행함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해서 복을 받았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항상 출발점을 자기가 살아있다고 하는,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 존재가 발휘하는 행함을 통해서 구원의 효과만을 챙기겠다고 주장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무엇인가? 우리를 죽이는 주님의 죽으심의 능력에서 생기는 것인데, 그래서 그 은사는 영원하단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만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영원하지 않는데, 오후 2시와 오후 4시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변하는데, 변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변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심히 수상한데, 그냥 '변한다' 라고 여기라는 것이다.

◈ 여보, 선지국이 매일 먹어도 정말 맛있어요 !!

어제 저녁에 먹었던 선지국이 참 맛있었는데,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그런 맛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음식을 만드는 주부가 왕 짜증을 내는데, "하여튼 당신은 두 끼를 넘기지 못해. 또 무슨 국을 해달라는 소리고?"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신랑과 밥상전쟁에 들어가는데 말이다.

* 남편 : 여보, 이게 어제 선지국 맛이 아니네.
* 주부 : 또 와그러나노?
* 남편 : 아니, 국맛이 변했어.
* 주부 : 또 무슨 국을 해달라고? 두 끼를 넘기지 못해.
* 남편 : 밥은 몰라도, 국하고 반찬은 매일 같으면 곤란하지.
* 주부 : 어휴, 나도 좀 살자. 매일같이 반찬투정이고, 무슨 아이도 아니고.
* 남편 : 전에는 고맙게 잘도 바꿔서 해주더니만.
* 주부 : 나도 변한다. 왜?

그렇게 사람은 늘 변하는데, 모두가 다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변해야 하고 말이다. 또한 변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으니 말이다. 가면 갈수록 그 속도가 붙는데, 그러니 어떻게 변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에는 자기가 구원의 투구를 썼다고 하면서 엄청나게 좋아했지만, 하지만 그것을 나중에는 귀찮아서 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그렇게 늘 변하기 때문에, 그러니 자기 단도리(앞가림?) 자체를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황 자체가 말씀에 속한 상황이기 때문에, 즉 말씀을 증거하라고, 말씀을 실어서 담아내기 위해서 주어진 상황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에 부딪쳐서 우리 자신이 깨어지면서 말씀이 다시금 새롭게 새롭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주여, 맞습니다. 나는 용서를 받은 자가 맞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주님은, 분류작업을 위해서 !!

그러니 사망에 이르는 죄, 즉 용서를 받지 못할 죄가 있고,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인데, 즉 하나님의 계시는 분류작업이었다는 것이다. 두 노선, 즉 두 언약 사이에 갈라지는 이 분류작업을 위해서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똑바로 하라는 말이야!" 라는 소리를 하기 위해서, "그것은 나쁜 짓이다" 라고, 그런 지적을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고 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분류작업인데, "니는 어느 편에 속했지?" 라고 말이다. "너는 이쪽 편에 속한 거야" 라고 하면서, 그 분류작업을 다시 한번 더 다지고 확인시키고 되풀이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이 찾아오신 것을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이쿠, 주님이 찾아오셨네. 나는 아직 속옷바람인데"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은 "니가 속옷바람이든 노팬티이든 간에, 나는 분류를 확인하려고 왔다. 니가 변하는 것은 니도 알고 나도 아는데, 그러니 니가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나는 너에게 희망을 걸지 않는다. 다만 니가 어느 쪽인지, 그것을 확인 차 왔어. 다만 니는 이쪽이야" 라고, 그렇게 확인시킨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 라는 말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

그러면 여기서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던지겠는데, "율법은 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왔다" 라는 것의 반대말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 말씀이 성경에 나오는데, 이게 참 어려운 질문이라는 말이다. 물론 정답은 "율법은 폐하는 것이 아니고 완성하는 것이다" 라는 것인데, 그 반대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내가 율법을 어떻게 완전하게 지키지?"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 안에 '내가' 라는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말이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그러므로 "율법은 폐하는 것이 아니고 완성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정답을, 여기 반대편의 영역까지 확대를 시켜보면, "율법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 아니고, 율법은 복음을 만남으로서 완전하다" 라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완전함을 보이신다" 라고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내가 율법을 어떻게 완전하게 완성을 하지?" 라고, 그렇게 '내가' 라는 것을 집어넣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율법을 지키지도 못할 뿐만이 아니라, 그만 그 율법 자체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주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방금 말한 두 가지 노선에 있어서, 믿지 않는 노선에는 율법을 어떻게 말하는가? "주여,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한 권면과 명령을 나름대로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라고, 그렇게 '나' 라는 것을 거기에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무엇이 깨어지고 마는가? 율법의 이미 다 이루어졌음이 그만 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율법은 이미 다 이루어졌다고 하면서도 새삼스럽게 맡기는 셈이 되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를 들어서, 엄마가 만두를 다 만들어놓고 아이에게 맛을 보라고 주는 것은, 맛있게 먹으라는 의미인데, 만두를 다시 만들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엄마, 후추가 좀 덜 들어갔어요" 라고 하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닌데, 물론 우리는 그런 대상도 못 되고 말이다. 율법이 지나가는데, 즉 아브라함 이후 430년 뒤에 율법이 주어졌고, 그렇게 율법이 스치고 지나간다는 말이다. 그렇게 스쳐 지나가면 우리는 율법의 완전함이 이미 마련되었음을 믿는데, 바로 그 믿음으로 우리가 십자가를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물론 면류관은 주님께 반납하고 말이다.

◈ 다윗의 경우에 !!

제가 왜 율법 이야기를 했는고 하니, 용서가 되려고 하면 죄가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죄가 전제가 된 그 율법에 대한 죄를 우리가 제대로 알겠는가? 모르겠는가? 물론 제대로 모르는데, 그러면 율법을 주고 무엇이 와야하는가? 성신이 와야만 하는데, 그것이 바로 다윗의 경우라는 것이다.

다윗은 자기가 율법을 안다고 여겼는데, 그래서 나단이 와서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손님이 와서 양을 잡았는데, 그만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서 했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했을 때, 다윗은 4배나 갚아주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자기는 율법을 안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삼하 12:1)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삼하 12:2)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삼하 12:3) 가난한 자는 아무 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삼하 12:4)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삼하 12:5)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삼하 12:6)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하지만 다윗에게 정작 성신이 오지 않으니, 다윗은 율법이 도대체 누구 이야기를 하라고 오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다윗은 율법의 수준을, 단순히 남에게 써먹기 위해서 온다고 보았는데, 하지만 율법은 이미 자기가 죄인이기 때문에 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이 와서는, 우리는 죄 속에 가두어지게 되었음을, 그것을 율법을 통해서 통보해준다는 말이다. 즉 율법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에 갇혀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갇혀있다는 말이다. 

◈ 그들은, 왜 복음에 대해서 반발을?

제가 아무리 이런 이야기를 해도, 복음을 떠난 목사님들이 계속해서 반발을 하고, 교인들도 역시 그러하고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쪽 노선이 '나' 라는 것이 살아있는 노선이기 때문에, 그런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의 경우에, '나' 라는 것이 살아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나' 인데, 즉 교회목사로서의 '나',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장로가 있다고 하면, 믿음이 좋은 장로로서의 '나', 그렇게 되고 말이다.

그런 자들에게 제가 "율법은 우리를 죄 아래에 가두어둡니다" 라고 하니, 목사의 입장에서는, "당신의 말이 맞고 틀림을 떠나서, 그러면 사람들이 오지 않으니, 내가 무척 힘들다" 라는 것이다. 목사는 그런 의미이고, 장로나 교인들의 경우에는 어떠한고 하겠는가? 그동안 자기가 최선을 다하고 노력한 것에 대해서, 그런 자기 자신에 너무나 실망할까봐, 그것이 싫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옥에 가는 노선에서는 둘 다 자기 부인이 되지 않고, 즉 자기 미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자기가 율법을, 또한 사도바울의 권면이나 명령을 지켜서, 하나님께 어떻게 작업을(?) 한번 걸어보려고 하는 심보인데, 그런 심보만 계속해서 남는다는 것이다.

◈ 그냥 밟아요 !!

그런데 구원을 받는 노선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물론 여기에 속한 자들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노선의 성품을 이미 다 가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니 말이다.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밟아야 한다는 말이다.

TV 예능프로에 보면, 이태리에서 우리나라에 교수로 온 예쁘장한 여자 분이 나오는데, 그녀에게 사회자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나라 남자는 이럴 경우에 큰 소리를 치는데, 술을 먹고 들어와서 말입니다. 그럴 경우에 이태리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하니, 그녀가 단번에 뭐라고 하는고 하니, "우리 이태리에서는 그냥 밟아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그게 유행어가 되었는데 말이다. (녹취자 - 목사님, 처음 듣는데요?)

이와 같이 주님도 그냥 밟는데, 즉 "주여, 제가 이런 착한 일을 했습니다" 라고 해도 주님은 밟아버린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렇게 함으로서, 직장에서 오전 10시에 회계장부를 정리하면서 자기는 어떻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말인가? "나는 용서를 받은 사람이다" 라는 것을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더 이상 군말하기 않기 !!

그러므로 "군말하기 않기" 라는 것인데,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껍데기이니 어떻게 도저히 군말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냥 밟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해도, 아브라함은 군말을 하지 않고 자기 아들을 "예, 바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드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얻은 귀한 자식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그런 선배가 있으면 우리는 아마 엄청 미워하지 싶은데, "그것도 선배라고, 자식이나 바치고 말이야"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선배를 고맙게 여기고 반갑게 여기는 것은, "아브라함, 당신도 그랬습니까? 나도 그냥 용서를 받은 자로서 만족하는데, 당신도 역시 그랬군요" 라고 한다면, 그것은 뭔가 서로가 같은 철로노선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신형 KTX에 공짜로 몸을 싣고 !!

그러면 신형 KTX가 시속 352km로 마구 달려드는데, 그렇게 해서 실려서 천국으로 달려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탈선을 하면 참 곤란해지는데, 탈선은 선이 바뀐다는 것인데 말이다. 자기는 구원받은 노선에 있다고 여겼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반대편 노선에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갑자기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아마 그것이 천안까지는 잘 왔는데, 대전에서 바뀌었지 싶은데, 물론 여기서 전라도로 빠진다고 하면 곤란하고, 그러면 전라도 사람들이 화를 내니 말이다(ㅋㅋ). 아무튼 노선이 바뀐다는 것이다. 같이 잘 오다가 말이다. 그러니 그 다음부터는 "그래도 행해서 영광을 돌려야지" 라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이태리에서는 그런 인간을 그냥 밟아버린다고 하는데, 하지만 자기는 이제는 더 이상 밟히기 싫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제 복음도 알고 십자가도 알았으니, 이제는 밟히면서 살아가기는 싫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나를 보고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고 하지 말고, 지금부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아가는 멋진 사람이라고 불러다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헌금을 해도 멋지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하고, 전도를 해도 폼 나게 하고, 그러니 전혀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제 끝으로, '쫄지마' !!

제가 끝으로 이야기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런 작업을 누가 하시는가? 성령께서는 이 두 가지 노선을 다 하신다는 것이다.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다기보다는, 진노의 그릇은 진노의 그릇답게 성령께서 몰아넣는다는 말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런 이야기를 제가 이미 20년 전부터 해왔고, 거기에 사람들이 다 수긍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철로의 문제이지 싶은데, 천사가 와서 밟으니 반항을 하고 그만 퉁겨서 나가버린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냥 밟혀도 괜찮은데, 이미 다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결코 거지 나사로가 재벌이 되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닌데, 그러니 밟혀도 괜찮다는 말이다.

복음을 알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펴게 해주시는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형편이 펴지던 쪼그라들던 간에, 그냥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부자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부자가 되어도 용서를 받으면 되고, 가난해도 용서를 받으면 그만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밟히면서 살아가는 인생, 그것이 곧 용서함을 받는 인생이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노선을 본지가 오래된 것 같습니다. 맨 날 우리 자신의 행동만 보고 살았는데, 우리의 발판을 움직이시는 분이, 가만히 있어도 끌고 가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그런 언약이라는 노선에 있음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9,26 오후 4시 45분에 마침.

                                                   옛날에는 비둘기호도 감지덕지했는데,
                                                             신형 'KTX' 라니, 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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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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