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71강 마음

피/피 2012. 8. 29. 11:11

피71강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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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71강 마음

[12 대구강의 10] - [피 71] - 마음

                                                    12,05,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믿음으로 노아는 …' !!

이제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221페이지부터 보자.

** 신앙이란 상대적으로 세상을 정죄하기 위해서 등장되었다.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여기에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런데 구약 자체에서 구약을 바라보게 되면 이런 내용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노아는 …" 라고 했을 때, 우리의 선입관은 무엇인가? "노아는 믿음을 가졌다" 라고 나오는데, 하지만 그게 틀렸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이렇게 "노아는 믿음을 가졌다" 라는 식으로 이 본문을 이해하고 싶은 것은, 자기가 이렇게 변함없이 있고, 그런 자기 자신이 믿음을 가지는 식으로, 즉 평소에 우리가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안일함을 노아에게 전가하는, 즉 "노아도 이런 믿음을 가졌을 거야" 라고, 그렇게 노아도 자기와 같은 믿음을 가졌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이해해버리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란 말이다.

◈ 노아도 '나'를 위해서 ??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를 했지만 다시 한번 더 하면, '나' 라고 하는 것이 여기에 이렇게 있다면, 그렇게 자기가 여기에 존재하는데는 여러 가지 과정이 있는데, 즉 "나만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런 저런 것들은 내가 여기에 있기 위해서 있다"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계시는 것은 나를 키워주기 위해서 있다"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엄마가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물론 엄마가 그렇게 이야기한 것은 일종의 자존심인데(?), 왜냐하면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이해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사람은 자기가 살아있는 이유와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자살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런 삶의 목적이 나름대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고 하면, 그런 살아가는 이유를 자기 주변에서 찾아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주변에서 찾아보니, 엄마도 자기를 위해서 있고, 또한 아빠도 자기를 위해서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 나오게 되면, 당연히 노아도 자기를 위해서 있고, 물론 예수님도 자기를 위해서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 라는 것을 자기가 관리해야하기 때문에, "나는 믿음을 갖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천국에 가고 싶은데, 그래서 그런 믿음을 가지면 갈 수 있다" 라고 하는 계산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렇게 믿음을 가지고 싶어하는데,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노아를 보니, 그 노아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노아는" 라는 성경말씀을 그만, "노아는 믿음을 가졌다" 라는 식으로 해석을 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 히브리서 11장 - '믿음이, 노아를 노아 되게' !!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믿음이 노아를 노아가 되게 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 뒤에 나오는데, 즉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라고 하는데, 여기서 "세상을 정죄했다"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노아가 개인적으로 믿어서 구원을 받으려고 하면, 굳이 세상을 정죄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니는 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자" 라고 하는 것이지, 세상을 정죄하기 위해서 노아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 노아는, 세상을 정죄하기 위해서 !!

강의를 다시 해보면, 사람은 자기가 존재할 이유를 찾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하는데, 결국 궁극적으로 "나만 잘살면 그만이다" 라는 것이다. 자기만 잘 되면 되는 것이지, 남들이 하는 그런 꼴 보기 싫은 것들은 그냥 눈을 감고서, "그 인생이 그 인생이라" 라고 방치하면 끝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경우에,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물론 예수님의 믿음인데,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사용하시되 이 세상을 정죄하기 위해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노아가 개입되었다면, 노아는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고 하니, "내가 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노아가 진짜 성령으로 믿음을 받았다고 하면 말이다.

이러한 것을 한국교회에게 전하게 되면, 그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그만 입을 벌어지고 마는데, 왜냐하면 모두가 자기 믿음 하나를 가지기 위해서 교회에 왔는데 말이다. 즉 "당신이 믿음을 가지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게 하나님의 뜻이고 싶어하는 종교적인 욕구에 불과한데, 그래서 성경해석을 당신 마음대로 했습니다" 라는 것이다.

사람이 믿음을 가지게 되면, 그만 자기 영역이 구축되어서 갑자기 자존심이 생기게 되는데, 그러므로 복음은 무엇인가? "당신이 믿음을 가졌는지? 믿음이 당신을 가졌는가?" 라는 것을 측정하는 기준은 오로지 복음밖에 없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 - 왜 나를 욕하노 ??

그래서 사람은 예수님에게 대해서 이야기하면, 즉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라고 하면, 마치 자기에 대해서 욕하는 것으로 듣는다는 말이다. "아하, 예수님이 그런 분입니까?" 라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왜 자기의 믿음을 칭찬해주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가는 말과 듣는 귀가 그 방향이 전혀 다른데, 서로 일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사들에게 "예수님은 이러 이러한 분입니다" 라고 하면,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그것을 해서 교회가 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방향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안다고 해서 개척교회를 성공할 수 있는가?" 라고 나오니 말이다. 이번 5월 30일에 교회설립예배를 드리는 곳에 제가 또 순서를 맡아서 가야하는데, 그러니 걱정이 앞선다는 것이다(ㅋㅋ). 

우리가 간단하게 생각하면 되는데, 사람의 마음은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내 마음은 내가 다스린다" 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우리도 그렇게 여겼던 시절이 있었는데, 즉 "내가 어떻게 내 마음을 다스리느냐에 따라서, 내 행동도 다스려지고, 그래서 대인관계도 신사적으로 맺을지, 아니면 막 대먹은 인간이라고 할지, 그것은 내가 마음을 다스리기에 달렸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스리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라고 여겼다는 말이다.

◈ 도대체 '내 마음' 이란 것이 있는가?

우리가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성경말씀을 보니 뭐라고 하는가? 고넬료가 그렇고, 베드로도 역시 그러한데,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을 다스린다"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찾고자 하는 것과 상관없이, 성경은 사실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자기 마음을 자기가 다스리지 못한다고 하면, 결국 자기 마음이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게 곧 성령인데,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 통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인데, 그런 성령께서 오게 되면, 우리 마음에 성령이 오게 되어서, 이제는 그 성령께서 "니 마음은 엉터리다" 라는 것을 계속해서 지적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처음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는, 자기가 자기 마음을 다스려서 예수님을 믿기로 작심을 해서 믿은 줄로 알았는데, 왜냐하면 목사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말이다. 즉 "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손들고 앞으로 나오세요" 라고 하니 말이다. 그렇게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 여러분, 나 예뻐?

결혼식을 하는데 하객들이 왜 오는가? 주례사가 "여기 계시는 여러분은 이 결혼식의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는데, 물론 그것이 세상적으로 보면 맞는 말인데, 하지만 따지고 보면 자기들 둘이 결혼하는데 증인으로 서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증인으로 서면 잘 사는가? 이혼을 하고 싶어도 하지 않고 끝까지 사는가? 굳이 이혼을 하지 않아도 한 것으로 여기고 그냥 참고 사는 것이지, 그게 원만한 가정이 되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하객도 없이 결혼식을 했는데, 실제로 우리교회에서 하객이 한 명인가 두 명이 참석하고 결혼식을 한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나이가 50이 넘어서 결혼식을 하려고 하니, 조금은 부끄러워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말이다(ㅋㅋ). 그러니 결국 결혼식은 증인이 되라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자랑하려고 하는 것인데, 예쁜 드레스를 좀 봐달라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결국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구원은, 하나님의 자기 과제물 !!

아무튼 "내 마음은 내가 다스린다" 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나중에 성령을 받고 나서 성경말씀을 보니 뭐라고 하는가? "주께서 성령을 주실 때만, 그 다음부터 내 마음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어서, 그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사랑하는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나의 의(義)는 전혀 없고, 오히려 죄인으로서 경건치 않고 하나님의 원수가 된 자였는데, 오직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서 나를 의인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과제물로서, 그런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작업에 말려든 것으로, 내가 채택된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오늘은 무엇을 가지고 놀까?

예를 들어서, 이렇게 여러 가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있는데, 거기에서 "오늘은 무엇을 가지고 놀까? 어이쿠, 여기에 기차가 있네. 이것을 가지고 놀아야지" 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장난감은 그때 그 시간에 그 아이에게 채택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선택이 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그 아이는 즉흥적으로 선택을 했겠지만, 예수님은 창세 전부터 선택을 하셔서 구원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라고 하는데, 모르는 자를 부른 것이 아니고, 미리 아신 자를 불렀다는 말이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불교의 경우에는 !!

하지만 이런 외부적으로 부르고 선택하는 것을 차단시키고, 인간들의 문제는 인간들끼리 해결하자고 나온 것이 곧 불교인데, 그러니 불교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럴싸하면 그럴싸한 것이라고 여겨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서로가 서로를 보기에 "그것은 참 훌륭하다. 부처님 같다" 라고 하면, 그러면 그게 곧 진리이고 해탈이고, 극락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끼리 납득이 되는 것끼리 모아서 어떤 종교를 만들어서, 그것으로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자는 것이 곧 불교라는 말이다. 요즘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완전히 불교가 다 되고 말았는데, 복음은 다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내 마음은 주께서 다스린다" 라고 하면,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마음만이 그러한가? 그것이 아니라, 화를 내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담하고, 심지어는 주님을 향해서 원망하는 마음까지도 누가 다스리는 가운데 있는가? 예수님께서 다스리는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 열심히 헤엄을 치시는 예수님 !!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그런 예를 들었는데, 이렇게 풀장이 있다고 하면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헤엄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주변에 걸치고 앉아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이 헤엄을 치니 그 파도에 의해서 물살이 와서 닿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분개이고 원망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가만히 있는데 자꾸만 물결이 자기에게 와 닿는데, 그래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러한 일어나는가?" 라고 하면서 찾아보니 중간에 누가 헤엄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헤엄을 치고 있으니 그 파장이 퍼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평소에 예수님이 헤엄을 치고 있다는 것을 자꾸만 잊는데, 자기가 헤엄치면서 놀고 있는데 정신이 팔려있지, 예수님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가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고 계속해서 꼬인다고 하면 어떻게 하는가? 물리학에 보면 '간섭(干涉)' 이라는 것이 있는데, 즉 파(波)가 이렇게 양쪽에 두 개가 있다고 한다면, 양쪽에서 그 파가 서로 만나게 되면 중간에서 서로 상쇄가 되어서 없어지고 하는데, 그것을 두고 '간섭'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자기가 헤엄을 치는 것과 예수님이 헤엄을 치는 것이 서로 만나게 되면, 자기가 생각했던 미래가, 즉 "한 달 뒤에는 이렇게 되고, 일 년이 지나면 이렇게 되고" 라고 예상했던 것이 그만 어긋나게 되면 뭐라고 하겠는가? "누구야? 나의 아름다운 미래를 방해하는 자가 말이야" 라고 하면서 달려든다는 것이다.

◈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나빠요 !!

그러니 결국은 무엇이 나쁜가? 저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은데, 기대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다.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다. 무엇이 기대를 하면 그렇게 되는데, 우리가 아무리 기대를 하지 않는 척을 하지만, 사실은 다들 기대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곧 원망이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기대를 하지 않을 수도 없고 말이다.

그러면 그런 기대를 어떻게 바꾸는고 하니, 이것은 하나의 요령인데 말이다. 즉 기대를 하고 나서 그 기대가 깨어질 날을 기다리면 된다는 것이다(ㅋㅋ). 그래서 깨어지지 않으면 그것이 축복인데, 그러면 감사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 기대가 깨어지지 않으면 기적이고, 물론 깨어지면 당연하게 여기면 된다는 것이다.

◈ 예수님 자체가 곧 '선(善)' !!

왜 그런가? 풀장에서 자기만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에서 예수님께서 헤엄을 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만약에 이 세상이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고 하면, 자기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목적을 이루면 되는데, 하지만 목적을 모두 다 이루시는 분은 누구인고 하니, 예수님만이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어느 글에선가 본 적이 있는데, 오스카 쿨만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말이다. 제가 쓴 글인지도 모르겠는데(ㅋㅋ), 그게 무슨 내용인고 하니, 즉 "'이것은 옳다' 라고 생각한 것은 내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하지만 내 마음은 나쁘다고 여기만, 그것을 예수님이 시키면, 시키는 그 자체가 옳은 것이다" 라는 것이다.

◈ 베드로야, 돼지고기를 먹어라 !!

사도행전 10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는데, 즉 베드로가 보니 보자기에 쌓여서 하늘에서 뭔가가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왕이면 주님께서 베드로를 살살 달래가면서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그의 체면이나 경건에 손상이 되지 않는 음식을 주면 참 좋은데, 그게 주로 야채종류의 건강식품이 아닌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아예 먹지 말라고 목록에 나와있는 것을 들이 대니, 그게 오징어나 돼지고기나 송충이와 같은 것인데 말이다. 그런 것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는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3번씩이나 약을 올리고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또 빌립보에서 고낼료가 보낸 부하가 찾아왔는데,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여, 저는 거룩하기 때문에 평생동안 이런 것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정도로 열심히 제 딴에는 경건을 추구했습니다" 라고 하는, 베드로의 그 딱딱한 것에다가, 거기에 주님께서는 주사바늘로 찔러서 밑둥치부터 무너지도록 만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먹으라고 하면 먹는 거야" 라고, 즉 "내가 선하다고 하면 선한 것이야. 니가 유지하려는 것이 선한 것이 아니고, 내가 선하는 것 자체가 선하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베드로는 "선하다, 혹은 선하지 않다" 라는 것을 판단할 자격조차도 없다는 말이다.

(행 10: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 시더라
(행 10: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행 10: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행 10: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행 10: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행 10: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행 10:15)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행 10: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행 10: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행 10: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행 10: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행 10:20)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 인간의 선한 논리를 공격하시는 주님 !!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나' 라는 것을 먼저 구축해놓고는, "선한 내가, 그런 선한 행동에 나서면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보신다" 라는 논리자체를 전개하는데, 바로 그러한 논리를 주님께서는 무너지게 하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인이었는데,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의인이 되었다. 그러니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그런 열매를 맺게 되면 점점 더 의인이 되어간다. 그러니 그런 의의 행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 속에 깔려있는 근본적인 사상인데, 이게 무슨 문제라는 말인가? 오히려 이것을 반대하면 사탄의 역사이다" 라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들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 자체를 공격하신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을 믿을 때만 주님의 마음이 아니라, 믿고 난 뒤에는 주님의 마음으로 넘어갔는데, 그러한 주님의 마음은 무엇인가? 우리 속에서 나오는 모든 '육신의 기대' 라는 것은 자기의 잘남을 위해서 다시 회수하게 되어있는데 말이다.

우리 자신이 처음에 예수님을 믿을 때는 "나는 죄인이고, 주님은 의인이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러한 몇 마디의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왜 나의 몸을 가진 그것이 나의 의로 되돌아오는가?" 라는 것을 낱낱이 다 밝혀지도록 평생동안의 세월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 평생을 보내게 되면, 어떤 순간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남은(?) 인생전체가 주님의 의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남자가 이유도 모르는 체 그만 갇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갇히 방에 군만두가 들어오는데, 물론 남자는 하루만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했겠지만, 무려 15년 동안 군만두가 나온다는 것이다. '올드보이'가 생각나지요? 성경에 있는 게 아니고 영화 이야기인데 말이다(ㅋㅋ).

◈ 인간의 숨어있던 죄를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예수님을 믿을 때만 십자가를 알아서, 그래서 의인이 되면 되는 줄 아는데, 즉 "이제부터는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착한 사람이 되면, 그런 바른 행동을 한다면 나는 그 얼마나 착한 사람인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평소에 자기가 기대했던, 즉 "내가 이렇게 훌륭하고 거룩한 존재이다" 라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까지도 도용해서 무장하려고 하는 음흉한 의도가, 그러한 것이 성령께서 직접 와서 때리게 되면 왕창 다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나쁜 짓을 해서 사업을 다 날리고 말았는데, 그런데 이제는 성령을 받았으니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어서 착한 사람이 되면, 그러면 분명히 주께서 자기를 사용하신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복음을 알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면 이제는 자기의 하는 그 모든 일이 의로운 일이 된다고, 그런 생각들을 신학생이나 목사들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곧 죄인 줄을 모르고 말이다. 그러한 생각이 곧 숨어있던 죄인데 말이다.

◈ 'A','B','C','D'를 비교할 이유가 없어 !!

여기 풀장에 A라는 사람이 앉아있고 라는 B사람이 앉아있고, 그리고 C라는 사람이 앉아있다고 하면, 그리고 여기에 예수님을 헤엄을 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물결의 여파가 각 사람에게 미치는데, 하지만 그 영향이 각각 다 다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몸체가 다 다르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각자가 다 다른 식으로 죄를 고백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A는 B와 비교할 이유가 없고, 또한 B는 C와 비교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죄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D라는 목사가 나타나서 교인들을 보고 "죄를 회개하시오" 라고 하면, 자기도 같은 입장이면서 말이다. 그러니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서 먼저 자기 죄부터 고백해야 하는데, 자기는 그만 숨긴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 뻔한 스토리인데 말이다. 

우리 인간은 순간적으로 돈을(?) 이길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게 인간성이 나빠서가 아니라,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또 탐스럽기까지 한 것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 그 맛을 보게 되면 그 다음에는 협박이 들어오는데, 즉 "이왕 버린 몸 아이가? 이왕 버린 몸인데 한번 더 버리면 어떻노?"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이왕 버린 몸인데 한번 더 버리자" 라고 해서 얻은 것이 자기 정당성이고, 곧 자기 의라는 것이다. 그러니 "죄인이기에 어쩔 수가 없다. 나 같은 인간이 죄인이구나" 라고 정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다들 나쁜 놈인데, 뭐?" 라고 하게 되면, 자기 정당화의 핑계가 된다는 말이다.

◈ 구약에는, '노아가 세상을 정죄한다' 라는 부분이 없어 !!

우리가 노아를 이야기하면서 "예수님께서는 노아를 이렇게 다루셨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정죄하기 위해서" 라고 할 때, 그런데 이게 창세기 6장과 7장에 나오는가? 구약에 그런 내용이 전혀 나오지를 않는데, "이 세상을 정죄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 말이다. 즉 히브리서 11장에 있는 내용들이 구약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약에서 재해석한 것인데, 곧 예수님과 엮어서 구약을 해석했다는 말이다. 이전에 예수님이 없을 때는 자기가 구약을 해석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을 앞장 세워서, 예수님이 해석을 하시면 믿음이니,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약의 노아는 옛날의 과거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구약을 접수했다는(?) 말은, 우리는 노아와 함께 있는 처지가 된다는 것이다. 노아가 증거하면 살았던 그 세상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인데, 즉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파는, 바로 그러한 세상이라는 말이다. 노아 때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다.

(마 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 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마 24: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 지금이 곧 노아의 때 !!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말씀의 상황이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파는 말이다. 인자가 임할 때도 그러하다고 하셨는데, 무슨 말인가? 노아 때 홍수가 임할 것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는데, 인자가 임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노아 때 8명의 식구가 구원을 받았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심각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야, 다른 사람들은 바보같이 왜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는가?" 라고 할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째서 노아는 이 세상을 따르지 않았을까? 참으로 이상하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보면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라고 하는 말씀이 실감이 나는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아는 언약을 받았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언약 속에는 무슨 기능이 있는가? 이 세상을 정죄하는 기능이 있어서, 즉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그 행위를 통해서, 그가 방주를 만들기 위해서 '쓱쓱' 나무를 자르고 '툭툭' 못질을 할 때마다, 그것이 곧 세상을 정죄하는 하나의 음향으로서 퍼져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무엇을 위해서 하라는 말인가? 언약을 위해서 하는 것인데, 즉 주를 위해서 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나만 구원을 받으면 되지" 라는 것이 성경에서는 전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역사란 무엇인가? 바둑이다 !!

우리가 "역사란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하면 잘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가운데 다음과 같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제가 바둑에 상당히 흥미를 느끼는데, 바둑에는 바둑판이 있고 또 알이 있다는 것이다. 5만원만 주면 괜찮은 것을 살 수 있는데, 물론 요즘은 바둑이 인기가 없어서 둘 사람이 없는 것이 문제인데, 혼자 두면 좀 그렇고 말이다(ㅋㅋ). 

그런데 문제는 "과연 그게 바둑일까?" 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아하, 그렇구나" 라고 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바둑판이 있고 알이 놓여져 있으면, 그게 곧 역사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바둑판과 바둑알이 없다고 했을 때, 그때 만약에 두 사람이 돌을 번갈아 가면서 서로가 하나씩 놓으면서 영토 따먹기를 한다면, "야, 그것 참 재미있겠네" 라는 논리와 아이디어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 바둑을 두는 것 이전에 그 바둑의 논리가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생각이 먼저 있었다는 말이다. "심심한데 우리 서로 땅따먹기나 하자" 라고 해서 시작을 하면, 결국에는 서로 싸우고 마는데, 그만 엉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평화롭고 이성적으로, 즉 "내가 한번 하고 니가 한번 하고, 그렇게 해서 얼마나 재주를 부리느냐에 따라서, 서로 똑같이 한번씩 해도 내 땅은 넓어지고 니 땅은 좁아지고,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승리했다고 할 것인데, 그러면 참 재미가 있겠다" 라고, 그래서 중국에서 바둑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땅을 차지할 때, 자를 가지고 선을 그어서 나누는 것은 서양방식이고, 이에 반해서 동양방식은 무엇인고 하니, 이 우주전체가 다 땅이기 때문에 "나도 돌을 하나 놓고, 너도 돌을 하나 놓고, 그렇게 해서 돌과 돌 사이에 둘러 쌓인 면적을 각자의 영토라고 간주하자" 라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의 영토가 너무 넓다고 여겨지면 그 안에 뛰어들어서 자기 영토를 만들어서 상대방의 영토가 확 줄어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바둑이 되었다는 말이다.

◈ 먼저 인간의 마음과 생각이 있어서 !!

사실은 바둑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다 그러한데, 예를 들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빌딩을 서울의 용산에 짓는다고 하면, 그것을 나이가 많은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를 한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제가 만약에 그 건축가라고 하면, 그 용산의 빈터를 먼저 보고, 그리고 서울시의 전체를 다 보았을 때, 그러면 그 전체에서 랜드마크가 될 정도라고 하면, 당연히 "야, 서울이라고 하면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야" 라고 할 정도의 건물을 지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그런 건물이 있는가? 없는가? 없다는 것이다. 즉 역사는 없다는 말이다. 역사는 없고 "야, 어떻게 올리면 사람들이 '서울은 그 건물이다' 라고 할까? 100년 동안 그렇게 잊혀지지 않을 건물을, 서울전경사진을 찍어도 항상 그 건물이 들어가는, 그런 멋들어진, 항상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건물이 없을까?"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지으면 그게 곧 역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인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먼저 인간의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마음과 생각이 역사를 만드는데, 그렇다면 역사의 끝은 어디인가? 그것은 쉬운데, 인간의 마음을 주워 모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언제 인간의 마음을 다 주워 모으는가? 사실은 굳이 모을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미 다 모아졌다는 것이다.

◈ 인간의 숨겨진 마음 - '지상에서 하늘까지' !!

왜 그러한가? 창세기 11장에 보면 바벨탑이 나오는데, 그때는 언어가 같았기 때문에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음을 모으는데 큰 애로사항이 없었는데, 그런데 그들이 마음을 모아서 한 것이 무엇인가? '지상에서 하늘까지' 인데, 그렇게 이 지상에서 저 높은 하늘까지 이르려고 한 것이 곧 숨겨진 인간의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창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창 11: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창 11: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 11: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창 11: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 바벨탑은 악마의 선동으로 !!

그런데 나중에 신약성경을 보니 거기에 비밀이 있었는데, 지상에서 하늘까지 바벨탑을 쌓는 내막이 무엇인고 하니, 이미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악마가, 이 땅에서 사람들을 선동해서 다시 땅에서 하늘을 향해 공격하는 형식을 띄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인간들은 몰랐는데, 하늘에서 성자께서 직접 뛰어내려와서, 그렇게 아들로서 올 때, 미처 다른 사람들은 그 예수를 시시하게 보았지만, 악마는 그것을 유념해서 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동방박사들부터 조지기 시작하는데, 그 당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이 다 죽었다는 것이다.
 
◈ 영적싸움이 예수님의 출현과 더불어 이미 !!

이것은 인간의 착함이나 윤리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즉 "인간이 얼마나 깨끗한가?" 라는 것이 아니라, 영적싸움이 예수님의 출현과 더불어 이미 시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리아가 임신할 때부터 수상한데, 예수님은 남녀간의 관계로 태어난 게 아니고, 물론 석가모니는 그렇지만 말이다. 예수님은 남자가 없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자의 후손 같은데, 여자의 후손 같은 것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마리아가 아기를 낳았다" 라는 것이 중요하지만,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기가 여자를 통해서 태어났다" 라는 것이, 그것이 창세기 3장의 '여자의 후손' 이라는 말씀의 차원에서는 더욱 더 합당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항상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데, '내 마음'이니, 그런 마음이 모이면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예수가 되었던 종교가 되었던 무엇이 되었던 간에, 항상 '땅에서 시작해서 하늘까지'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자" 라고 한다는 말이다.

◈ '그리스도의 영' 인가? '윤리와 도덕' 인가?

그것이 우리 속에 항상 끓고 있는 본성인데, 그런데 주님의 관심은 무엇인고 하니까, "굳이 하늘까지 갈 필요가 없이 너희들 속에 하늘이 있다" 라는 말이다. 즉 "천국은 너희들 안에 있다" 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안에 천국이 있다고 해서, 우리 자신을 분석한다고 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이질적인 요소가 우리 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이 '그리스도의 영'을 무엇으로 바꾸는고 하니, 그만 윤리와 도덕과 양심으로 바꾸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지만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리스도의 영은 악마와 원수가 되지만, 윤리와 도덕과 양심으로 전환이 되면 원수가 있는가? 없는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착한데,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나 어질고 희생적인데 도대체 무슨 원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오게 되면 원수가 있는데, 그게 곧 악마라는 것이다. 십자가 자체는 그것을 싫어하는 반(反) 십자가로서 원수가 있지만, 하지만 그것을 윤리와 도덕으로 바꾸게 되면 원수가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다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는 것보다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니, 마귀는 당연히 그것을 이용해서 성경말씀을 십자가 중심이 아닌, 즉 "당신도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라는 것으로 모두 다 전환을 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니 인간들이 말하는 순수, 논리, 정의, 국가 등의 개념이 다 그렇다는 말이죠?

물론 그러한데, 마귀가 그렇게 다 바꾼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제 주일오전설교에서 언급을 했는데, 즉 영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바꾸어야 해석이 된다고 했는데 말이다. 가룟 유다 속에 무엇이 들어갔는가? 사탄이 들어갔는데, 그 사탄은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현실이란 것은 돈과 경찰(현찰?)이 동원되는 것, 그것이 진짜 마음에 와 닿고 실감이 나는 현실이지, 그것 외에 다른 현실은 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서, 돈도 안 되는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율법해석에 대해서, 그러한 예수님의 논리에 대해서 아무리 이야기를 하고 지적해도 관심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신학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즉 돈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돈이 동원되면 사람들은 꼼짝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인가? 바라바인가?" 라고 했을 때, 그 누구도 감히 "예수를 내주세요" 라고 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은 한 발자국도 악마가 쳐놓은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어떤 인간도 거기에서 벗어날 위인은 없다는 말이다. 신학을 하던 무엇을 하던 간에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논리자체가 이미 정죄의 대상이 됩니까? 이미지를 땅위에 세우면 실제화가 되는데, 즉 선악과를 따먹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또한 따먹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생길 때부터 이미 정죄의 대상이라는 말입니까?

방금 좋은 질문을 했는데,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있었는데, 그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렇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 하게 하느냐는 말이다. 차라리 줘도 먹지 않을 정도의 그런 선악과를 만들었다고 하면, 인간이 따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선악과를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누구의 은혜로 존재하는지, 즉 인간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데, 예수님은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 한 것을 말이다.

◈ 예수와 반(反) 예수 !!

그러므로 예수님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반(反) 예수를 말해야 하는데, 그 반(反) 예수가 누구인가? 악마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악마를 의식하지 못하고 자기 몸만 간수하면, 즉 자기 몸만 편안하면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예수님이 어떻고, 악마가 어떻고", 또한 "악마가 어떻고, 예수님이 어떻고" 라고, 자꾸만 그 구조에 집어넣으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이 귀찮은데, 먹고 싶으면 먹고, 탐스러워 보이면 탐을 내고, 그렇다가 나중에 깨지는 것은 나중 일이고 말이다. 일단은 그렇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논리라는 것이 어떠한가? 인간들 자기 딴에는 엄청 똑똑해 보일지 몰라도, 하지만 마귀가 보면 웃기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들이 마귀를 제쳐두고 예수님을 제쳐두고,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생각을 해서 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나중에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렇게 하다가 갑자기 인자가 오면 불바다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불바다가 된다는 것이 평소의 사람들 생각 속에는 들어올 수가 없는데, 하지만 성도에게는 사태를 일으켜서, 평소에 자기가 스스로 생각한 그 기대치가 실망으로 바뀌면서 주님 앞에 원망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분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이제 더 이상 예수님과 놀지 않을 거야"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 사사기의 경우에 !!

그러한 현실에 대해서 이미 구약의 사사기에서 적나라하게 다 보여주고 있는데, 즉 처음에 이방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았는가? 그것이 아니라 "형님, 그동안 제가 바쁘다가 보니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해서 죄송했습니다. 그러니 이것만 받고 그만 물러가 주세요" 라고 하면, "으흠, 까불지마" 라고, 서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처음에는 인간적인 방법을 다 사용해서 대우를 해주었는데,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방나라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압박을 가하니 그제야 뭐라고 하는가? 난처해하다가, 난감해하다가, 절망을 하다가,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그러다가 나중에 어떻게 하는가? 결국은 "천부여, 손들고 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삿 6: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삿 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삿 6: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 하나님은 왜 방앗간 주인을?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는가? 다름이 아닌 방앗간 주인을 불러서 일을 시키려고 하는데, 그런데 방앗간 주인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하거라, 못합니다", "하거라, 못합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방앗간 주인은 하는 말은, "하나님이여, 내 몸만 편하면 되었지, 내가 무슨 애국자도 아니고, 특별히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니고,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사방에 널려있는데, 그런데 하필이면 왜 나를 가지고 그러십니까? 왜 굳이 나를 찾아왔습니까" 라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냥 찾아왔다. 아무나 찾아도 되는데 너를 찾아왔다. 그러니 더 이상 시비를 걸지 말고 바알 신상을 부수어라" 라고 하는데, 그러자 그는 사람들이 너무나 무서워서 몰래 밤에 부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기드온인데 말이다.

그 정도로 주님께서는, 주님의 주가 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허약하기가 짝이 없는, 즉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우리 자신을 그렇게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쓰여졌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기적이고 축복인지 모르는데, 정말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그렇게 조금 쓰여지게 되면 우쭐거리는데, 기드온도 그럴 뻔했다는 것이다. 그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기드온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자고 하면서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서 입히는 짓거리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뒤에 보면, 에브라임 지파가 그 전쟁에 자기를 참여시키지 않았다고 하면서 시비를 걸어서 서로 내란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 십자가가 아닌 부활을 좋아하는 인간들 !!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은 믿지를 못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았다고 하니, 그것은 얼른 믿고자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도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서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는 믿지 않고, 부활을 믿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가 믿어지지 않는 이유는, 일단 자기가 살고 싶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의 특징인데, 즉 "지금은 십자가는 지나가고 부활의 시대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살아나는 것은 누구나 다 좋아하니 말이다.

◈ 인간은, 임의로 세상을 날조해 !!

이것을 한번 정리해보면, 인간은 자기 중심으로 자꾸만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즉 세상을 임의로 날조한다는 것이다. "다음주 목요일에 놀러 가는데, 비가 오면 어떻게 하지?" 라고 하면, "비가 오면 가지 않으면 되지"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 목요일에 비가 오지 않고 아이가 아프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는데, 그러니 이런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질문 - 나중에는 국가나 민족이 허상으로 보이는데, 예수님만 진짜가 되고 말입니다.

그렇게 허상처럼 보여도, 그것은 자기가 은근히 기대한 것인데, 즉 허상은 그만큼 기대를 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허상이 아니기를 원했는데, 허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허상이라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그런 것을 처음부터 기대를 했는가?" 라는 것을 우리가 감추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처음부터 지적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허상이라고 알려주어도 그것을 원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올림픽 경기에서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나오면 눈물을 흘리게 되어있는데, "예수를 믿는 사람이 이런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 안 돼" 라고 해도 눈물이 마구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몸 자체가 이 세상을 만들게 되어있는데, 그러니 그 어떤 식으로 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의롭게 할 근거는 전혀 없다는 말이다.

◈ 인간의 비판은, 항상 자기 잘남이 !!

조금 전에 "이 세상을 정죄한다" 라는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는데, 우리는 이 세상을 정죄하는데 있어서 우리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는 남을 정죄하면서 자기는 빠지려고 하는 본성이 강력하다는 말이다.

누구를 비판하게 되면, 그 비판하는 강도만큼 자기는 착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데, 그러면 어떤 재미가 있는고 하니, 자기가 그렇게 믿음이 좋고 착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비판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든다는 것이다. 자기 잘남을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현상자체가 예수님에게는 정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시험은 자기를 자신을 두고서 "잘났다, 못났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인데,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걸때, 이미 그 순간은 마귀의 놀림감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잘났다, 못났다" 라고 할 때, 마귀는 팔짱을 끼고 빙긋이 웃고 있는데, "그래, 최선을 다해봐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제 교재 222페이지를 살펴보자.

** 하나님은 자기 아들밖에 모르신다. 아들의 가치만 높이기 위해서 나머지 모든 것을 치신다. 아들의 얻기 위해서 아들을 버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출 4: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나님의 복수는 이처럼 아들만 남기기 위한 조치로서 실행되기에, 인간의 사적인 복수는 하나님의 정의로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 하나님의 복수는, 아들만 남기기 위한 조치 !!

여기에 '하나님의 복수' 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복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수를 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아예 만들지를 말지, 왜 만들어 놓고서 굳이 복수를 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수에 왜 우리 인간들이 끼어 들어야만 하는지, 그런 생각도 들고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수는 무엇인가? 아들만 남기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들은 예수님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인데, 우리가 아니고 말이다. 즉 이스라엘을 아들이 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을 염두에 두고서 하는 조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주되심의 조치를 모르고,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여기니, 누구와 그만 원수가 되고 말았는가?

이스라엘이 그만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고 말았는데,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 그만 아브라함의 자손과 원수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우기던 유대인들이, 진짜 아브라함이 오고 나니 어떻게 했는가? 아브라함의 자손을 핍박하는, 그런 혈통적인 아브라함 자손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제가 얼마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뭐라고 하는가? "우리가 언제 죄를 지었는가?" 라고 말하면서,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우리는 착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았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언제 죄의 종이 되었는가? 우리는 아브라함의 혈통이고,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요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요 8: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요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
(요 8: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유대인들의 그런 논리와 신학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하는데, 유대인들이 나름대로 주장하는 원대하고 웅장한 신학이 무엇인고 하니, 아브라함 자손이 되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그렇게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해서 해석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면 죄에서 자유한, 죄가 없는, 즉 죄에 벗어난 복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의 자손과 아브라함의 혈통 !!

그런데 그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을 두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혈통'을 두고 말이다. 물론 우리가 이 혈통을 부정할 수 없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는데 어떻게 부정을 하느냐는 것이다. 분명히 그 집의 아들은 그 집 아버지를 닮았는데, 그야말로 서로가 판박이인데, 옆집 아저씨가 아니고 말이다(ㅋㅋ).

그러니 혈통자체는 우리가 부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니라면 이슬람이나 필리핀 쪽의 혈통인가? 분명히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인데,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너희들 아비는 마귀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어야하는데, 즉 "악마가 지금의 바리새인들이란 혈통을 낳았다" 라는 논리를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아브라함의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점을,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친절하게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은 어떻게 설명하셨는가? "내가 곧 아들이다" 라고 하셨는데, 즉 "내 아버지가 하나님이고, 나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우기면서 내가 아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을 보니, 그 노선이 다른 노선인데, 그 다른 노선은 바로 마귀에게서 나온 혈통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

그렇다고 하면, 인간의 혈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혈통이 따로 있고, 또한 마귀의 혈통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은 인간의 모든 혈통을 비켜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는,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혈통적 관계가 아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면 혈통은 필요가 없는가? 그것이 아니라, 혈통적 관계가 아님을 보여주는 혈통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스마엘을 낳고, 또한 이삭을 낳게 하셔서, 즉 "하갈의 자식은 아니고, 오직 사라의 자식만이 내 자식이다. 그래서 오직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 우리의 어머니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분명히 "이삭의 어머니는 사라다" 라고 언급해놓고는, 그래서 사라가 이삭의 어머니라고 알고 있는데, 그런데 뭐라고 하는가? "그것은 혈통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삭의 어머니는 사라가 아닌,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

그렇다고 하면, 혈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혈통이라고 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래서 성경에서는 '두 언약'을 집어넣는데, 그렇게 언약을 넣게 되면, 그 언약 안에 예수님이 계시니, 혈통적 차원에서 예수님을 볼 때, 그분이 인간의 혈통을 지녔지만 인간의 혈통을 따르지 않고 약속의 혈통을 따라오는데, 그것이 그대로 적용되는 사람들이 곧 하나님의 언약에 해당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받은 자들의 공통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율법을 따르지 않고, 즉 혈통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약속을 따라서 난 자들이라. 그래서 율법으로 난 자들이 약속을 따라서, 즉 성령으로 난 자들을 핍박하느니라" 라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갈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 협박을 당하는 것도 역시 나빠 !!

그런데 사람들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듣지 않고 거부하는지 저는 모르겠는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 뭔가 안다고 생각해서 그런가요? 하지만 백 날 자기 자신을 알아도, 그것은 곧 선악과의 유혹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아담과의 관계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귀가 참으로 저질이고 못된 놈인데, 왜냐하면 유혹할 때는 달콤하게 해놓고, 그 다음부터는 그 따먹은 것을 가지고 협박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협박을 하는 것도 바쁘지만, 협박을 받는 것도 역시 나쁘다는 것이다. 지옥에 갈 놈들에게 협박을 받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아무도 너희들을 정죄하지 않는다"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우리는 왜 보디가드를 두느냐는 것이다. 무슨 미련이 남아서 더 살아보겠다고 말이다. 누구에게 협박을 받는다는 것은, 그런 협박을 받을 요소가 거기에 들어있다는 말인데, 그것을 사전에 본인이 알아서 버리면 안 되는가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 죄를 짓지 마세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바로 그 옆에다가 "저는 그 어떤 죄도 용서함을 받았다" 라고 하는 주님의 사랑을 놓게 된다면, 우리가 외부로부터 협박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 욥의 경우에 !!

욥기를 보면, 욥의 세 친구가 욥을 얼마나 많이 협박했는가? 하지만 욥이 그들의 협박에 넘어갔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사람에게 협박을 받을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다 망쳐놓은 것이기 때문에, 해결을 해도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지, 인간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자꾸만 협박을 하는데, 즉 "니가 그러면 죽는다. 죽기를 무서워해서 종노릇을 하는 것을 다 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마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마귀로부터 협박을 하게 하는 것도 주님의 계책이지 싶은데, 로마서 8장에 나오듯이, 즉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라는 말씀과 같이 말이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우리는 기근이 3년만 들어도 !!

그런데 여기에 보면 환나, 곤고, 핍박이 나오고 난 다음에 기근이 나오는데, 기근이 무엇인가? 도대체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3달만 비가 오지 않아도 난리인데 말이다. 예수고 뭐고 다 필요도 없고, 각 교회마다 기우제를 드린다고 난리를 칠 것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데, 그런데 그게 현실 속으로 들어오면 너무 길다는 것이다. 너무 길어서 정신적인 상처인 트라우마로 남아서, 나중에 나이가 들어도 젊었을 때의 그것이 기억으로 남아서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고, 지금 이 정도로 자기 인생을 지킨 것에 대해서 자기 수고가 돋보인다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자기의 죄를 정죄하기 않기 위해서 돌아가신 것은 별로 귀하지 않게 여겨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남편이 사업에 망했을 때, 자기가 시장에서 고기장사를 해서 자식들을 돌보고 집안을 일으킨 것이 대단하게 부각되고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라고 하는 말씀은,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신', 바로 그 위대함을 만끽하도록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원수를 알아야만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의 복수는 아들을 남기기 위한 조치이기 때문에, 마귀를 그리스도를 향해서 복수하는데,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자기의 원수만 생각나지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부터 주님의 원수만 생각하고 자기 원수는 생각하지 않기로 우리끼리 약속을 했으면 좋겠는데, 우리끼리라도 말이다(ㅋㅋ).

바로 그러한 주님의 원수가 반(反) 십자가적이고 반(反) 복음적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피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예수님의 그 십자가 피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거짓말이라고, 그것을 계속해서 알려주는 것이 바로 반(反) 그리스도로서, 악마가 지금도 열심히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223페이지를 보자.

** 성도는 세상 사람보다 '우수한 사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을 수 없듯이, 아드님에 대한 사랑은 억누른다고 눌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예수 사랑'은 웃음과 같아서 참을 수가 없다. 이 '다름'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 우수한 사람과 다른 사람 !!

이 '피' 라는 책에서 여기에 나오는 이 한 문장만 제대로 알아도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여기에 나오는 '다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우수한가? 그렇지 않은가?" 라는 것이 상관없는 영역에 놓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착한가? 그렇지 않은가?" 라는 것을 따질 영역에 속하지 않은 사람인데, 그게 곧 '예수 안' 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그냥 터져 나오는 웃음과도 같은데, 자기를 우수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심에 대한 고마움이 그냥 마구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식장에서도, 심지어 장례식장에서도 그 고마움만 생각하면 키득키득 거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떤 웃음이 나올만한 요소가 주어져야만 웃음이 터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만 생각하면, 즉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그 사랑에 대해서 그냥 마구 웃음이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전혀 다른, 낯선 사람으로 만들어주심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로 전혀 자기가 예상하지 못한, 자기의 10개년 계획 속에 포함되지 않은 자기의 미래상인데, 즉 자기의 과거경험의 누적에서 나온 것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진, 그런 날조된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전혀 다른 사람으로 자기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자기의 아픔이 아니라, 예수님을 아픔을 먼저 이해하고 감사하는 자인데, 그게 바로 다른 사람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아픔에 대해서, 그 아픔이 바로 자기의 죄 때문에 당한 아픔임을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말이다.

◈ 교회에서 쫓겨나도 '탱큐' !!

5000명 정도가 모이는 교회의 목사가 있는데, 주일 아침에 갑자기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그러면 강단에서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교회에 관한 이야기가 과연 나오겠는가? 나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동안 자기가 성령을 받기 전에 많이 했기 때문에 말이다. 성령을 받기 전에 자기와 관련된 단체이기 때문에 교회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을 많이 썼는데, 그런데 막상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아픔을 아십니까? 그 아픔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영역을 만들고자 예수님을 이용한 것이 곧 죄였습니다" 라는 설교가 강단에서 스믈스믈 기어나올 때, 그래서 교인수가 5000명에서 갑자기 500명으로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그 목사의 웃음을 빼앗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장로가 나가라고 해도, 그것이 목사의 기쁨을 빼앗아갈 수 없다는 말이다.

◈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아십니까?

그게 곧 다른 사람이 된 경우인데, 그러면 다른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 제가 그것을 계속해서 공부하고 있는 중인데, 지금까지 공부한 결과에 의하면,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을 하자면 '공리주의(功利主義)'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공리주의가 무엇인고 하니, 어제오후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사람이 자기에게 이익이 있을 때만 잘했다고 판단하는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되면 자기에게 이익이 왔을 때, 그 이전에 했던 행동들은 모두가 정당화가 되고 합리화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1)사람은 이익을 기대하게 되고, (2)이익을 얻고 나면 그 모든 과정은 선한 일이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결과적으로 이익만 얻게 되면, 그런 이익을 얻기 위한 원인과 결과들은, 즉 그런 모든 과정들은 올바른 선택, 선한 선택이었다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익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했던 자기의 선택도 올바른 것이라고 해서, 이익도 챙기고 자기 착함도, 그렇게 둘 다 챙긴다는 것이다.

이제 세 번째가 중요한데, "(3)만약에 당장 이익이 없고 손실이 주어진다면, 나중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서 이 손실부분을 메워주실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곧 공리주의라는 것이다. 즉 천국에 가서라도 자기 손해는 보지 않겠다는 사고방식인데, 바로 이러한 공리주의가 곧 민주주의라는 말이다.

◈ 평생동안 아버지를 공양한 딸의 경우에 !!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어떤 딸이 아버지를 20년 동안이나 병간호를 했는데, 다른 자식들은 다 도망을 갔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많은 자기 유산을 몽땅 다 사회에 환원을 하고 죽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른 자식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딸은 아버지를 간호한다고 시집도 못 가고, 또 사회에서 기술도 전혀 배우지 못했는데, 그래서 앞으로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면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유류분' 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그 아버지가 사회에 전 재산을 환원했다고 해도 딸은 자기에게 돌아올 상속분의 50프로를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사회에 전 재산을 환원하지 않았다고 가정한 50프로를 말이다. 그리고 다른 자식들에게 돌아갈 유산의 20프로에서 30프로를 챙길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20년 동안 병간호를 했기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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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류분(遺留分, reserve) - 일정한 상속인을 위해 법률상 유보된 상속재산의 일정부분. 피상속인은 유언(또는 증여)에 의하여 재산을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지만, 일정한 범위의 유족에게 일정액을 유보해 두지 않으면 안 되며, 그 한도를 넘는 유증이나 증여가 있을 때 그 상속인은 반환을 청구할 수 있게 한 제도이다. 사람이 생전에 자기의 재산을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유언으로써 재산을 처분(유증)하는 것도 자유여야겠지만, 사망자 근친자(상속인)의 생계도 고려함이 없이 사망 직전에 모두 타인에게 유증하는 처분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므로 일정비율의 재산을 근친자를 위하여 남기도록 하는 것이 이 제도의 취지이다. 영국·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가 이 제도를 채용하고 있으며 한국도 1977년의 민법 개정으로 이 제도를 신설하였다.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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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이 사회가 무슨 주의인고 하니, 바로 공리주의라는 것이다. 즉 이익이 남으면 그것이 곧 선한 판단으로 여겨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이익은 결국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돈 문제인데, 즉 "돈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라는 것으로 모든 것이 판정이 된다는 것이다.

◈ 어리석은 자여 !!

그래서 어제오후시간에 누가복음 12장을 설교하면서 뭐라고 했는가?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선생님, 내 형에게 말씀하셔서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모든 탐심을 물리쳐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눅 12: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눅 12: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눅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눅 12: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 12: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 12: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말씀인데, 이것을 모르면 예수님을 그동안 헛되이 믿었다는 것이다. 즉 공리주의의 사고방식으로 예수님과 접촉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라고 하는, 소위 '어리석은 부자' 비유의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너무 심한데, 농사가 안 되면 몰라도 일부로 풍년이 들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창고를 짓도록 하시는데,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는다" 라는 것만 미리 알려주어도, 조금의 그런 힌트만 주어도 창고를 짓지 않을텐데 말이다. 차라리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지 말이다(ㅋㅋ). 

그런데 그게 아니라, 천년 만년을 살 것처럼 해줘놓고는 영혼을 데리고 가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해놓고는 "어리석은 자여!"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리석은 자들이 예수님을 믿고자 할 때, 반드시 이런 역주행으로 인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니가 곧 어리석은 놈이야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를 어리석게 만들겠다는 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취지라는 말이다. 지나게나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회원수를 늘리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고 말이다. "니가 곧 어리석은 놈이야. 그러니 니 주제나 알아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면서 예수를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제발, 좀 가라. 귀찮아 죽겠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공리주의를 포기하고 무소유를 하면 되는가? 그게 아닌데, 결론은 '다른 사람' 이라는 말이다.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 재산을 남에게 희생하면 되는가? 원래 자기 것도 아닌데 무슨 희생을 한다는 말인가? 괜히 자기 생색만 내지 말이다.

사람은 뭔가 바치게 되면 항상 그것을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남에게 뭔가를 희생했다는 것이 머릿속에 남아있는데, 그것을 손가락으로 후벼파서 끄집어낼 수가 있는가? 남아있는 이미지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미 오른 손이 한 것이 박혀있는데, 왼 손이 와서 뽑아낼 수 있는가? 오른 손이 한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 예수님의 자살 !!

물론 방법이 하나 있기 한데, 조금 잔인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자기 모가지를 스스로 자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살을 하지 않는 이상 인간은 결코 착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저는 나쁜 놈입니다" 라고 하면서 스스로 죽으면 몰라도 말이다. (오잉, 자살??)

그러니 이 세상에는 착한 사람이 없는데, 그래서 이 세상이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자살을 하듯이 돌아가셨는데, 아니 자살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남이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아서 스스로 죽는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자살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분으로 자살을 하셨고, 그 자살하신 분의 영을 받아서 우리도 그냥 자살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서 자살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자살을 하는데, 그러면 주님께서는 매일같이 우리를 살려내신다는 것이다.

(요 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이제 교재 223페이지를 보자

**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그 정신은 야곱이 달성할 하늘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성취될 사항이었다. 예수님이 도리어 우리 죄인을 섬기셨다.

(마 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 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 라는 의미는?

여기에 보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을 우리가 어렵지 않다고 도저히 이야기를 할 수 없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매우 힘들고 어렵겠지만, 남은 시간에 나름대로 여기에 대해서 한번 설명을 해보자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한 것 같은데, 다시 정리를 해보면, '짝', 즉 '형제' 라는 것은 떨어지면 남남인데, 그러니 형제라는 것은 떨어진 것이 아닌데, 이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우연히 만났다가 우연히 헤어지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형제, 즉 형과 동생이라는 관계는, 형이 없는 동생이 없고, 동생이 없는 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 '형제' 라는 것은, 같은 몸에서 돋아난 것인데, 즉 지체라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같은 몸에서 돋아난 것이니,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같은 형제라는 것이다. 아무리 가까이 친구들이 있어도, 그것은 형제는 아니라는 말이다. 즉 이것은 혈통으로 묶여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묶여져 있는 혈통의 교류원리가 무엇인고 하니, 그 어떤 경우에라도 먼저 난 자가 '큰 자' 인데, 즉 먼저 난 자가 '형' 이라는 것이다. 그 어떤 경우라도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이미 고착된 것인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수정해 들어가신다는 것이다. 즉 "원인과 결과가 이러하냐? 그런데 나는 이 결과를 예상치 못한 결과로 바꾸겠다" 라고 하시는데, 그런데 그렇게 결과가 바뀌게 되면, 그러면 그 결과를 낳은 원인이 도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기존의 알고 있던 혈통에서, 즉 그 혈통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다른 원인에 의한 결과로서, 그렇게 주님께서는 만들겠고 하신다는 말이다. 말을 하면서도 참으로 복잡한데, 즉 "무조건 형은 형이고, 동생은 동생이다" 라는 것에서, 그 동생의 자리에 하나님께서 오시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동생이 형이 되고, 형이 동생이 되는데, 그런데 막연히 그렇게 되어버리면, 역시 그것은 같은 혈통 내에 머물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라도 혈통 바깥으로 벗어나야 하는데, 그렇게 되어야만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인데, 그러니 육이 아닌 영으로 나야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 영으로 난다는 것은 혈통을 벗어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 과연 우리 인간이 혈통을 부정할 수 있는가?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 인간은 바로 그 혈통으로 태어났는데, 그러니 그러한 인간의 본질인 혈통에서 삐져나온 우리 인간이 어떻게 그 혈통을 부정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라는 것은 홍길동이나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지(ㅋㅋ), 우리에게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를 해보면,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나오는데, 물론 그것은 혈통의 문제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그것을 혈통의 문제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다 혈통에서 나온다고 보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혈통에서 나오니 그 원인이 혈통인데, 그러니 인간에게서 나와서 하늘로 가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어제 오후시간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종교는 일종의 엄살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평소에 미리 어렵다고 질질 짜고 하면 진짜 어려운 일이 왔을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기지만, 하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어려울 때를 미리 예측해서 고난을 받아봤자, 그런 예상문제는 진짜 고난이 오면 모두가 다 헛수고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전에 말한 기드온의 경우처럼, 아무나 뽑아서 성령을 주어서 승리하게 한다는 것이다. 22,000명은 모두 다 집으로 보내버리고 달랑 300명만 남겨서 말이다.

◈ 하나님의 일은 혈통과는 상관이 없어 !!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혈통과는 일체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그 출발점이 혈통이라는 말이다. 즉 우리 자신이 원인이 되어서 어떠한 결과를 야기하겠다는, 그러한 아이디어를 주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물론 주께서는 그런 혈통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반대로 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혈통에서 나오지 않은 결과를 가지고, "혈통이 혈통이 아닐 수가 있다" 라는 쪽으로, 그 결과가 원인이 되어서 우리에게 다시 어떤 결과물을 야기시킬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구원을 받은 새로운 모습으로, 즉 착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그렇게 새로운 영역이 허락된다는 말이다.

형이 동생을 보고, 또한 동생이 형을 보고 자기가 형이 되겠다고 하면서, 그렇게 서로가 다투고 하는 것은, 이것은 둘 다 혈통적이고 육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즉 철없는 야곱과 에서 사이의 문제라는 말이다. 마치 아이들이 장난친 것과도 같은데 말이다.

◈ 인간은, 계속해서 육적인 생각만 !!

그런 것은 저 자신도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보다 못난 형이라고 여겼을 때, "저런 형이라면 지하철에 부딪쳐서 죽었으면 좋겠다" 라고, 물론 그때는 너무나 어려서 유산이고 뭐고 몰랐을 땐데 말이다. 아무튼 너무나 형이 너무 못나서 부모에게 애를 먹이니까, 동생이 나서서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그런 생각을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형뿐만 아니라 동생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야곱이 얼마나 형의 못된 짓을 보고 한탄을 했는가? 그러면 그 한탄의 대상이 결국은, 물론 그것이 형의 나이가 마흔이고 자기가 십대 초반이라면 엄두가 나지 않을텐데, 그런데 야곱과 에서는 시간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붙들고 같이 떨어졌다는 말이다.

형이 먼저 나오고 그래도 조금의 시간차이라도 있으면 몰라도, 같이 붙들고 나왔는데, 그런데 에서는 형이고 자기는 동생이니, 그것이 너무나 억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원칙은 먼저 튀어나오면 형이니 할 수 없는데, 그래서 동생은 무조건 형을 섬겨야 하는데, 왜냐하면 형은 아버지의 상속자이고, 즉 아버지를 대신하니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앞에 말한 것은 인간들의 문제이고,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 라고 해서, 결국은 무엇인가? 에서는 형이니 큰 자가 되고, 야곱은 동생이니 작은 자가 되는데,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형이 동생을 섬기도록 만드셨다는 것이다.

◈ 역시, 인간은 계속해서 육적인 생각만 !!

그러면 그 다음에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하나님의 뜻대로, 어떻게 형이 동생을 섬기는지, 그것을 주시하게 되는데, 하지만 아무리 주시해도 그것도 역시 혈통적인 관점이라는 말이다. "야, 역시 형이 동생을 섬기는구나. 형은 저주를 받고 동생은 축복을 받아서, 형이 동생에게 다스림을 받는구나" 라고, 그렇게 현상적이고 역사적으로 보게 되는데, 그것도 역시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창세기 27장에 보면 그 축복의 내용이 무엇인지 나오는데, 즉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되어있는데, 야곱이 그렇게 축복을 한다는 것이다. 형은 동생에게 빌빌 기면서 살게 되어있다고 말이다. 바로 그것이 창세기 27장 28절에 나온다는 것이다.

(창 27: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창 27: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창 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하지만 이렇게 현상적이고 역사적으로 보는 것도 역시나 혈통적이고 육적이라는 것이다. 즉 "야, 봐라.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했다. 그리고 신명기 28장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율법을 지키면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된다고 했지 않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나 믿고 반장이 되려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 죄인들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 !!

그런데 주님은 어떠한가? 머리가 아닌 꼬리를 만드는데, 주님 자신도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가 되셨고 말이다. 즉 죄인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죄인을 멀리하고 의인들끼리 단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것으로 앞장서서 구원받은 선구자로 자청하는, 그런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라고, 즉 다른 계통을 말씀하셨다는 말이다.

(마 21: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마 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 할아버지 할머님들, 만수무강하옵소서 !!

다음과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는데, 물론 저의 상상인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학생들이 제주도관광을 가서 노인정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의 거의 없지만, 아무튼 노인정에 가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에게 "만수무강하옵소서" 라고 절을 하고 나서 버스를 타고 관광을 하다가 그만 버스가 사고가 나서 학생들의 일부가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분명히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죽은 학생들의 경우에, 자기들이 더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해서 노인정까지 가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에게 "행복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 라고 하면서 절을 하고 나왔는데,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돌아서서 그만 자기들이 먼저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육적으로 어떻게 성경말씀에 대해서 증거를 찾으려고 하면,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하는 짓거리인데, 그러면 성경말씀은 무엇인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 라고 해서, 큰 자가 되겠다고 하는 방식으로 희생을 하겠다고 하는, 그러한 노림수나 꼼수도 여전히 육적이라고 지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 다시, 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 라는 법칙이?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정리를 해보면, 먼저 큰 자를 만들어서 큰 자는 큰 자의 행세를 하고, 또 작은 자는 작은 자의 행세를 하게 해놓고, 그 다음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 라는 법칙을 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육으로 만들어진 그 어떤 인간도 이러한 계시를 완성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없다는 것이다. 육적인 머리로서는 도저히 이러한 말씀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만약에 이러한 것을 육적인 안목으로 간파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육으로서도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육적인 것 가운데서도 가장 고상하고 희생적이고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것을 모두 다 끌어 모으면, 그게 모아져서 육을 탈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그 능력으로 하늘나라를 뚫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조금 전에도 바벨탑을 언급했지만, 우리 인간의 모든 성향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땅에서부터 하늘까지인데, 그것이 바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을 무효화시키고 부정하는 짓이라는 말이다. 즉 "선악과를 따먹은 존재가 생명나무도 따먹을 수가 있습니다" 라는 것을 강조하는, 그것이 곧 마귀의 장난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마귀의 마지막 모습은 결국 교회의 모습이고, 그래서 적그리스도가 교회에 있는데, 적그리스도가 성전에 앉아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경건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진선미를 집대성한 그 자리가 곧 악마가 앉아있는 자리라는 것이다.

다시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인간적으로 판단해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수는 없는데, 그러니 인간은 모두가 다 큰 자가 되고 싶어서 수작을 부리는, 그런 존재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즉 큰 자가 되고 싶어서 모두가 다 환장을 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야곱으로 하여금 인간의 집요한, 즉 작은 자이면서도 큰 자를 노리는, 그렇게 해서라도 기어이 큰 자를 극복하려는 그 심보, 그것이 곧 야곱의 심보인데 말이다. (따르르르릉) 예, 성경공부 중입니다. 나중에 제가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 죽어라, 이 놈아 !!

바로 그 야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분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셨는데, 그러면 야곱이 포기한 것이 무엇인가? "저는 나쁜 놈입니다" 라는 것인가? 그 정도인가? 야곱은 죽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무엇이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자기가 살아있으면서 자기 마음을 고쳐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아예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죽음을 십자가로서 구현시킨 것인데,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까불지 말고, 무소유와 같은 것도 주장하지 말고, 그냥 죽어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죽어도 전혀 억울할 이유가 없는데, 버스가 뒤집히든, 어떻게 되든 말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고맙게 여기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야곱이 경험한 하나님은 무엇인고 하니, "나는 죽어야 한다" 라는 것을 왜 모르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살아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새로운 사명으로 인해서, 즉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것이 야곱이라는 말이다.

◈ 이스라엘 때문에, 죽은 야곱이 이스라엘로 !!

다시 말해서, 야곱 때문에 이스라엘이 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때문에 죽은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다는 것이다. 즉 우리 때문에 우리가 산 것이 아니고, 물론 우리 때문에 예수님이 죽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예수님 때문에 죽은 우리가 살아났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예수님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죽어도 나를 위해서, 죽어도 나를 위해서" 라는 것은 이제 전혀 허용되지 않고,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증거한 말씀처럼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는 말씀만이 성도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말씀에 있는 하나님의 작업을 우리가 무시하지 않게 하옵소서. 야곱이 만났던 그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는 하나님으로, 단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났다는 것을 매일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가 엉뚱한 우리 자신의 생각에 매몰되어서 살아온 날들을 용서하시고, 날마다 주님을 위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6,27 오후 11시 20분에 마침.

육, 육, 육, 6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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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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