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56강 둘째 사망

피/피 2012. 8. 29. 10:42

피56강 둘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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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11003피p179둘째사망

피56강 둘째 사망

[11 대구강의 18] - [피 56] - 둘째 사망
                                                                                
                                                   11,10,0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79페이지부터 보겠는데,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인데 말이다.

**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전 15: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하시리니
(고전 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 하나님의 원수가 없으면?

여기 26절에 보면,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는가? 제일 나중에 멸망을 받을 원수가 누구라는 말인가? 우리가 모른다고 치고, 즉 (   )에 묶어놓자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 원수를 발 아래에 두시고 왕 노릇을 하시는데, 그러니 주님의 왕 노릇은 반드시 원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원수가 없다면, 물론 왕 노릇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영적전쟁은 전혀 우리의 소관이 아닌데, 우리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문제인데, 즉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보기에, "실제로 그런 일이 있겠는가?" 라고 할지 몰라도, 우리 인간은 사실 그런 것에 대해서 따지고 들고 말고 할 주제조차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전혀 끼여들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 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그래서 '하늘나라'의 경우에도, 그 하늘나라를 불교신자에게 물어보면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살기가 좋은 곳이라고 하지 싶은데, 하지만 예수님께서 볼 때는 무엇인가? 집주인이 세간을 가지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도둑놈이 쳐들어와서는 그 집주인을 묶어놓고서 그 세간을 자기가 가지고 가버리는 것, 그것이 곧 하늘나라라는 말이다.

이 하늘나라를 두고서 어려운 말로 '역동성' 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영어로는 '다이나믹(DYNAMIC)' 이라고 하고 말이다. 이 '역동성' 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사람은 그 대상이 고정되어야만 뭔가 안정이 된다는 것이다. 고정이 되어야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어떻게 하는가? '김치' 라고 하면서 찍는데, 그때는 가만히 서있어야 제대로 찍히는 것이지, 어떻게 하면 안 되는가?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역동적으로 운동력을 가지고 움직이게 되면, 설령 그것을 찍는다고 해도 또렷한 것이 아니라, 희미하게 그 움직임만 찍히게 된다는 것이다.

◈ 하늘나라는, 관찰이 대상이 될 수 없어 !!

그래서 하늘나라는 사람의 대상으로 잡히지 않는데, 즉 관찰이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잡았다' 라고 여기면 그만 놓쳐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마 오겠나?" 라고 여기면 와버리고, "가지 않겠지?" 라고 하면 가버리고 말이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흔히 선교단체에서 많이 써먹는 구절이 있는데, 즉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라고 말이다. 그러면 이게 무슨 의미인가?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렇게 영접하는 것이 그때 한 번만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고,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홀연히 찾아오셨다면, 그러면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굴복을 해야되는 대상인데,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찾아왔다고 해서 친구처럼 여기고 마구 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전혀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이 우리를 소유하고 관리해야지 말이다.

◈ 이스라엘의 천년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성경이 어렵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소유의 대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소유하신다고 하는, 그 방식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시는데, 남쪽 유다가 BC 586년에 망했으니, 역사를 대충 천년정도로 보면 되는지 싶은데 말이다.

그러한 역사가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소유하는 것이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임하는지 모르겠다" 라고 하지 말고, 이스라엘 역사를 보라는 것이다. 그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으니 말이다.

하나님은 꾸준히 일을 하시는데, 즉 선지자를 통해서, 가난한 자를 통해서, 핍박을 받는 자를 통해서 계속 이야기를 해주어도,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을 비롯해서 방백들, 즉 가진 자들은 하나님을 자꾸만 소유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이니, 하나님은 떠나지 마세요"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되고 말았는데, 즉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구분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자꾸만 하나님을 소유해서, 자기들 옆에 있는 이방나라들과 비슷하게 나라를 만들어서, 자기들의 힘으로 버티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이방나라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직접 왕이 되는 나라를 만들려고 하시는데, 하지만 인간들은 사람을 왕으로 삼아서, 그리고 하나님은 뒤에서 후원해주는 식으로, 그러니 자기들이 주체가 되고, 하나님은 자기들이 하는 일에 스폰서가 되어주면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방나라적 사고방식을 그들은 천년동안이나 이어왔는데, 그래서 그들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율법을 주어도 나라꼴이 개판 !!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율법을 주어도 나라꼴이 안 된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러니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즉 성신으로, 성령으로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의 천년 역사가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허송세월인데, 반면에 성도의 입장에서는 그 하나 하나가 다 참으로 귀한 세월이란 말이다. 즉 '아하, 이래서 안 되는구나. 또 저래서 안 되는구나" 라고 말이다. 그러니 율법을 지키는 것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다. 즉 율법을 지키는 것 때문에 다윗을 핍박하고, 또 율법을 지키는 것 때문에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 말이다.

◈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

하지만 그런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지지 않고 선지자들의 핍박과 고난 가운데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벨의 피로부터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라고 하셨는데, 여기에 나오는 사가랴가 바로 선지자라는 것이다.

(눅 11: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그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뜻과 맞추려고 왔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이 오히려 그들을 돌려 쳐죽였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이 따로 있고, 인간들의 본성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 교회는, 고정될 수 없어 !!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이 생각하는 교회가 있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교회가 따로 있다" 라는 것과도 똑같은 말인데, 그건 초대교회도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다. 초대교회의 역동성이라고 할 때는, 고정된 교회를 교회라고 하지 않았다는 의미인데, 즉 모였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가 모이고 말이다. 그러면서 사이좋게 지내다가 또 싸우고 말이다.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뭔가 변화무쌍한 것을 교회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가이오의 집' 이라고 해서, 거기에 도대체 몇 명이나 모였겠는가?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으니, 사도바울이 모인 사람들의 이름도 다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는 뭐가 어떻고, 또 누구는 뭐가 어떻고" 라고,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수천 명이 모였다고 하면 일일이 어떻게 다 기억을 하겠는가? 물론 요즘은 그런 목사도 있다고 하는데(ㅋㅋ), 아무튼 그때는 몇 명이 되지를 않았는데, 그렇더라도 그들이 지체들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머리이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교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가면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전부를 다 교회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전체를 두고 하나밖에 없는 교회라고 하는데, 즉 "내 교회, 니 교회" 라는 게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 자체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히브리서도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다.

◈ 십자가를 전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드러나 !!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원수라고 했을 때, 그런 하나님의 원수가 있을 때만 예수님께서 왕으로, 혹은 그리스도로, 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다 같은 뜻인데, 아무튼 예수님이 주가 되려고 하면, 원수가 발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는 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 "예수님의 원수가 누구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라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원수도 모르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여자의 후손이 그냥 나타나는 게 아니고, 뱀의 후손이 나타날 때 여자의 후손이 비로소 등장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제가 칠판에 적어보겠는데, 즉 "하나님의 원수란, 예수님과 가까이 있을 때 드러난다" 라고,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서 예수님과 가까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까이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까이 할 때 하나님의 원수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전하게 되면, 거기서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인지 알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십자가를 없애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원수가 맞는지 아닌지, 즉 양의 탈을 쓴 이리인지 이리가 아닌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양아치인지 양무리인지 말이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하게도 십자가를 전하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가 드러나고 만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을 때, 이 세상의 제대로 된 모든 실체가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죄가 무엇인지, 원수가 무엇인지 말이다. 또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지금 바지가 내려갈 까봐 신경이 조금 쓰이는데, 인천의 구 목사님이 지난 번 동영상 강의를 보면서 이 바지 때문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고 하는데 말이다. 물론 바지가 내려가도 주님의 일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그냥 조금 민망스럽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ㅋㅋ).

◈ 그래서 마귀는, 예수님 자리에 하나님을 !!

아무튼 예수님과 가까이하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를 알 수가 있는데, 그러니 그 원수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게 되면, 자기 정체가 탄로가 나기 되기 때문에, 그렇게 정체가 탄로 나지 않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하는고 하니, 예수님의 자리에다가 무엇을 집어다 넣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집어넣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불교와도 손을 잡을 수가 있는데, 물론 이슬람교도 가능하고 말이다. 그렇게 불신자들과도 다 손을 잡을 수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가 어떻게 있을 수가 있겠는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은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

왜 마귀가 그렇게 하는고 하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말이다. 사랑인데, 거기에 무슨 원수가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니 원수를 니 몸 같이 사랑하라" 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 안에는 원수가 없다는 의미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집어넣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사실 하나님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고, 그 속에는 하나님을 잘 믿는 자기 자신이, 즉 자기 몸이 들어있어서, 그러니 그런 사람의 원수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해꼬질(해코지?)을 한 놈인데, 즉 자기가 세운 교회나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 피해를 주는 것들이 바로 원수가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은, 자기 원수에게 관심이 !!

그러니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원수가 되고, 오늘의 원수가 내일의 동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정치판' 이라고 하는데, 이런 정치판은 하나님이 개입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몸이 주인공이 되는데, 그래서 당도 바꾸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자기의 원수가 되는데, 그런 자기 원수에 대해서 감정을 품게 되고, 그러니 예수님을 죽인 원수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각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에게는 조금만 해를 끼치면 '와락' 달려들고 말이다. 그만큼 인간은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인데, 바로 그것을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하나 하나를 다 보여준다는 것이다.

◈ 선지자 - '니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다' !!

이번 수요일에 예레미야 설교를 하면서 그것을 살펴보았는데, 즉 빌라도가 예수님을 자기편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잘 보이면 자기가 알아서 다 덮어주겠다고 말이다. 그것이 곧 정치판의 모습인데,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원수를 드러내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주가 되니 말이다. 그래서 "니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다" 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와 시드기야 왕 사이도 마찬가지인데, 왕은 선지자를 자꾸만 회유하려고 하고, 반면에 선지자는 그런 회유에 말려들지 않고 천상회의에서 본 것을 그대로 전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가 죽도록 고생하지만 말이다. 아니, 죽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미가야 선지자도 같은데, 아합 왕과 여호사밧 왕에게 미가야는 하늘에서 일어난 일을 그대로 전한다는 것이다. 그때 왕 쪽에 400명의 선지자가 있었지 싶은데, 400명이 맞지요? 시효가 다되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무튼 400명과는 다르게 미기야는 혼자서 '아니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왕들이 좋게 하려고 해도, 선지자들이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진짜 왕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도의 왕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인데, 그러면 성도라고 하면 왕이신 예수님의 말을 들을 뿐이지, 다른 사람들의 말은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적어도, 사망은 이겨야 !!

그런데 여기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마지막 때 멸망을 받을 원수는 무엇인고 하니까, '사망'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당연히 왕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런데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가? "니, 그러면 죽는다" 라고 하는, 죽음의 말을 듣고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말을 듣고 살아가는 보통 인간을 무엇으로 바꾸시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가는 성도로 바꾸는 작업으로 인해서,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투입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원수는 고린도전서 15장서 사망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가 적어도 무엇은 이겼다고 해야 예수님께 속했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의 원수가 사망이니, 그러니 사망을, 즉 죽음 정도는 이겼다고 해야 예수님께 속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냥 죽으세요 !!

그러므로 목사가 설교하면서 다른 것은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데, 살아보려고, 살아보려고 온 사람들에게 목사가 뭐라고 해야 되겠는가? 교인들에게 조금은 미안하지만, "그냥 죽으세요"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죽으면 삽니다" 라고 하면, 그것 말고 달리 할 이야기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금요철야기도회를 하는 시간에, 그렇게 밤을 지새우면서 살려고 온 교인들에게 기도회를 인도하는 목사가 "그냥 죽으세요" 라고 하면 누가 기도하러 오겠는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서 살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서 살았습니다" 라고 해야, 헌금 이야기도 넣어가면서 그렇게 해야만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런데 "그냥 죽으세요"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에 !!

어제 오후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왠지 가을이 되면 일찍 죽은 사람이 부러워지는데, 가을이 되면 떠나고 싶다는 것이다. 스데반 집사님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죽겠다' 라는 것인데, 우리가 그분을 거론할 때는, 그냥 핍박을 말하면 안 되고,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서, 어떤 핍박을 받는가?" 라는 것이다. 그분은 죽음을 초월했는데, 즉 "죽어도 좋습니다" 라고, 그런 핍박을 받을 때 스데반 집사님을 연결시킬만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성도가 아닌 자들은 자기에게 해코지를 하면 다 원수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니, 죽인다" 라고 해도, 그렇게 한다고 해서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오히려 주님께서 죽이기 위해서 보낸 천사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사도들은 죽는 것이 겁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싸웠던 것이 있는데, 즉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싸웠다는 것이다. "그래, 맞다. 인간들은 죽음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라는 것 때문에 싸웠다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말이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왜 그런가? 십자가의 피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거기에 무슨 행함이 들어가는지 모르겠는데,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장사를 하겠다는 속셈밖에 되지 않는데, 그렇게 교회 장사를 하겠다는 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 그것을 원수가, 즉 사망이 보면 빙그레 웃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마귀가 "니가 밥 먹고 살려고 하는구나. 그래, 내가 살려주게"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 것은 마귀가 다 알고 있는데, 마귀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고, 물론 인간도 다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속여도 마귀는 속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무엇이 나쁜 짓인가? 그런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쁜 짓이라는 말이다.

◈ 아빠, 죽을 준비하세요 !!

우리 대구강의를 녹취한다고 수고하시는 인천이 있는 구 목사님은, 그 양반은 죽으려고 돈까스 집을 한다는 것이다. 살려고 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자식도 3명이나 되니, 돈까스 집을 열심히 해야 겨우 입에 풀칠이라도 하는데,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멘!)

◈ 그런데,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사망을 !!

아무튼 고린도전서 15장 26절에서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라" 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 인간이 사망을 손댈 수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제일 마지막에 멸망을 받을 원수라고 했으니, 우리 인간이 멸망을 시킬 그런 대상은 아니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닌 다른 분이 오셔서 사망을 멸망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 도 예수님은 사망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몸소 죽으셨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사망을 이기려고 한다면 자기는 죽지 않아야 하니 말이다. 그것이 인간들의 사망을 이기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전혀 다른데, 오히려 사망에게 삼켜버린 바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그 사망을 뚫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사망이 인간 세상에서 겁을 주려고 했던 모든 원칙과 법칙과 규칙과 율법과 같은 것들이 어떻게 되는가? 모두 다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믿음만이 사망을 이길 수가 있어 !!

그런 사망을 어떻게 해서든 벗어보려고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무려 600가지가 넘는 율법을 만들었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간단한지 모르는데, 즉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란 말이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자기 자신을 믿는 게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할 때는, "예수님께서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이 땅에 오셨는가?" 라는 것을, 그것을 보다 더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지상에서의 생명과 사망은 천국을 지탱하는 구조인 의와 거룩의 기준이 반영된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사망이요,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생명이다. 그래서 기쁜 소식, 즉 복음이란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이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천국을 지탱하는 구조로서 의와 거룩 !!

여기에 "지상에서의 생명과 사망은, 천국을 지탱하는 구조인 의와 거룩의 기준이 반영된 것이다" 라고 하는데, 무슨 뜻인고 하니, 사람들이 말하는 "살았는가? 죽었는가?" 라는 기준은 하늘나라에서 통하겠는가? 통하지 않는데, 그러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엇이 산 것인지, 또 무엇이 죽은 것인지, 거기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산 자와 죽은 자가 나누어진다는 것은, 그 기준을 땅에서는 찾을 수 없고, 하늘나라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의'와 '거룩' 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 교재에 보면 그냥 의와 거룩이 아니라, '천국을 지탱하는 구조'로서 의와 거룩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지탱한다'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천국은 그냥 하나님이 계신다고 해서 천국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적어놓은 것인데, 즉 그냥 하나님이 계신다고 해서 천국이 아니고, 천국은 '주되심'이 만들어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아들의 나라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아들의 나라가 되려고 하면, 그 천국을 새삼스럽게 만드는 기준이 이 지상에 주어졌고, 또한 그 기준에 의해서 예수님이 따라오셨고, 또한 예수님이 지상에서 천국을 이루는 구조인 의와 거룩을 성취시킬 때, 그때 비로소 천국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국을 그냥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보면 안 되고, 하나님께서 일을 하셔서 완성된 나라가 천국이란 말이다.

◈ 그러니 지옥도, 천국과 병행해서 !!

그것은 지옥도 마찬가지인데, 천국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지옥도 없다는 것이다. 천국과 병행해서 지옥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이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즉 복음을 거부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다. 그것을 분명히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쁜 짓을 해서 지옥에 가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간다는 말이다. 만약에 나쁜 짓을 해서 지옥에 가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고 하니,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는 어떻게 되는가? 그야말로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땅에 나타나는 우리 인간들의 현상을 두고서 천국과 지옥을 결정지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천국은 무엇인고 하니, 여기 교재에도 있지만, 기쁜 소식, 즉 복음이란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관심을 좋은 나라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좋은 나라의 주인공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그렇게 항상 예수님께 관심을 두어야 모든 문제들이 제대로 풀리게 된다는 것이다. 즉 "복음은 하나님의 의(義)다" 라는 것에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래서 기쁜 소식, 즉 복음이란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두 번째 사망에 관한 내용이 그것을 말해준다.

◈ 원수의 보편화가 곧 '사망' !!

여기에 보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두 번째 사망에 관한 내용이 그것을 말해준다"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사망이다" 라고 했을 때,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괴물을, 즉 '적그리스도'와 같은 것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그 원수를 보편화를 시키고 말았는데, 즉 '사망'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사람이라고 하면 그 누구든지 죽는 것에 대해서 겁내는데, 즉 죽음을 겁내지 않는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맨 마지막 원수인 죽음이 이 인간 세계를 빈틈없이 뒤덮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아침에 양 사방에 안개가 자욱할 때, 우리가 그 안개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개가 우리보다도 범위가 더 넓으니 말이다. 온 천지에 다 안개가 끼어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벗어나느냐는 것이다. 

그와 같이, 사망이 안개처럼 온 천지에 자욱하게 끼어있는데, 우리가 그 안개를 어떻게 벗어나겠는가? 아주 넓고 고급스러운 명품 아파트에 살면 벗어날 수가 있는가? 제 아무리 경치가 좋은 곳에 별장을 지어서 폼을 잡고 살아도, 그 안개를, 즉 사망을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암(CANCER)의 경우에 !!

'암(CANCER)' 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참 재미있는 놈이라는 것이다. 암이 우리 몸 바깥에 딱지처럼 붙어있으면 떼어내면 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피부암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위암이나 간암이나 다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췌장암은 더 깊이 있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 몸에 내부라는 것이 있는가? 위암의 경우에, 이렇게 이렇게 위가 있으면, 이 위에서 일부의 세포가 교류를 하다가 그만 일방적으로 다른 세포를 잡아먹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암세포라고 하는데, 즉 원만하게 서로 잘 지내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독자적인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해서, 그것을 확장시켜버리면 암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만 전부가 된다는 말인데, 그러면 그 암세포만 살고 나머지는 다 죽는다는 것이다. 물론 결국은 자기도 죽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위의 일부에 암세포가 있으면, 이것도 알고 보면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나름대로 하나의 막인데, 왜냐하면 위도 하나의 막이니 말이다.

◈ 막(膜)과 막(膜)의 얽힌 구조가 곧 '인간' !!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본성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은 없고, 막과 막에 얽힌 하나의 정글과도 같은, 즉 그런 막과 막의 얽힌 구조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 속에 인간이 없다는 말이다. 그냥 막들로 구성된 세포들의 연결조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암세포와 '나'와의 관계는 무엇인고 하니, 그 암이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 "나는 나다" 라고 주장한 것이 얼마나 허풍이었느냐는 말이다. '내 '몸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암의 입장에서 보면 허풍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나는 없고, 사망이 나의 왕이다" 라는 것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암에 걸린, 그런 말기암 환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죽음이 왕인데, 그러니 "죽음이 왕노릇한다" 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으려고 해도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종교 이야기가 아니고, 교리 이야기가 아니고, 또한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도 병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러니 성경은 실재의 리얼리티인데, 즉 "암이 왕이다" 라는 것은, 성경에서 "사망이 왕노릇한다" 라는 것과 똑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두 번째 사망이 !!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첫 번째 사망이라고 하면, 성경에 보면 두 번째 사망이 나오는데, 그게 무슨 뜻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사망을 하나만 없애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둘 다를 없앴다는 것이다. 그러니 표면적으로 보면,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인간들이 보기에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죽은 몸이 산 몸이 되었으니, 첫 번째 사망에 대해서만 십자가가 효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보기에는 말이다.

그것이 전부라면 "야, 예수님이 저렇게 죽었다가 살았으니, 나도 그렇게 되겠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두 번째 사망이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사망이 말이다. 이것은 우리 몸에 관한 것이 아니고, 죄에 관한 것인데, 즉 하나님의 저주에 관한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았다" 라고 하는, 그런 소설과 같은 이야기는 사실 나사로도 그런 적이 있었고, 또 에녹도 있고, 그리고 엘리야는 죽지도 않고 하늘나라로 갔다고 하는데, 그래서 아무리 찾아봐도 시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 이전에도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 예수님은 두 번째 사망에도 관여를 !!

그런데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첫 번째 사망뿐만이 아니라 두 번째 사망에 대해서도 관여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은 죄 때문에 죽는다" 라는 사실인데, 여기에 비해서 첫 번째 사망은 "인간은 암에 걸려서 죽는다" 라는 것이다. 즉 아파서 죽는다는 말이다.

거기에 비해서 "죄 때문에 죽는다" 라고 하는 것은 두 번째 사망이란 것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라고 하더라도, 죄가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두 번째 사망에 저촉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사망에 말이다.

병원에서 말기암 환자들에게 임종을 편안하게 맞이하도록 해주는 사람들을 '호스피스' 라고 하는데, 그들은 아무리 그렇게 열심히 해도 첫 번째 사망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호스피스가 아무리 "할아버지, 죽어도 천국에 갑니다. 그러니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세요" 라고 해도, 그것은 첫 번째 사망에 관한 것인데, 즉 "지금은 아프지만, 나중에 괜찮습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첫 번째 사망은, 하나의 사인에 불과 !!

하지만 주님에게 있어서 첫 번째 사망은 하나의 사인에 불과한데, 그러니 진짜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사망이란 말이다. 즉 "할아버지는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하면, 그런 몸으로도 발끈하면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라고, 마지막 복음도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의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가지고 가셨습니다" 라는, 그 기쁜 소식도 그들에게는 짜증나는 소식으로 들린다는 말이다.

그것은 병원에 있는 환자들뿐만이 아니라, 길거리에 있는 노숙자들이나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역시 마차가지인데, 그러니 사람들은 이미 두 번째 사망 가운데 놓여있다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지옥에 가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원래 저주를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늙어 죽을 때 믿으면 되지 ??

제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면서 안타까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늙어서 죽을 때 믿으면 되지 않는가?" 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직까지 자기가 첫 번째 사망인 몸의 죽음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 자체가 곧 저주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가 머물러 있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아무 힘도 없을 때, 그때 교회에 나오겠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저주받은 모습이냐는 말이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래서 예수님은 "죄로 인해서 죽고, 의로 인해서 사셨다" 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이 로마서 4장에 나오데, 4장 25절 말씀인데, 다같이 찾아보겠습니다.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 범죄함과 의롭다 하심 !!

여기서 말하는 '범죄함'은,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에 의한 범죄이고,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에 의한 범죄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누구라도 범죄함이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다 들어가니 말이다. 즉 모든 인간은 다 범죄를 했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들은 두 번째 사망의 차원에서 보면 도저히 의를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범죄했기에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으로 의인이 되었는데, 놀랍게도 의인이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義)인데, 그런데 그 의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범죄할 때 죄를 지어서가 아니고,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범죄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말하는 의도 역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의가 아니라는 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행해서 의로운 것이 아니고 말이다.

우리가 의(義)의 종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의미와 취지를 드러낼 때, 그 의(義)의 증인으로, 즉 종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증인으로 살아가려고 하면, 기존의 우리가 과거에 생각했던 의는 다 잘못된 기준에서 나왔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180페이지를 보자.

** '두 번째 사망'에 관한 내용은, 인간세계에서 자체적으로 나올 수 없는 견해이며, 인간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외부에서 침투할 경우에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 예배당이 곧 묘지 !!

여기에 보면, "두 번째 사망에 관한 내용은, 인간세계에서 자체적으로 나올 수 없는 견해이다" 라고 하는데, 왜 두 번째 사망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가? 왜 그런고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망이라는 것 자체가 동그랗고 아담한 묘지에 가서 꽃을 꼽아주면서 애도하는 것,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며칠 전에 고 최진실의 추모 3주기가 행사가 있었는데, 가까운 지인들과 그녀가 살아있을 때 다니던 교회의 교인들이 공원묘원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했는데 말이다. 다들 검은 옷을 차려입고 모여서, 고인과의 지난 만남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다. 

저는 그 모습을 TV를 통해서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고 하니, 저기 묘지에서 그렇게 모여서 행사를 할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교회의 예배당에 모여서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게 예배당에 모여서 "아이쿠, 다들 죽었네. 이제 교인들이 지옥에 가는구나" 라고 말이다. 그러니 묘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당이 곧 묘지라는 것이다.

◈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이미 죽은 자 !!

그게 빈 말이 아니고, 복음적으로 보면 이미 다들 죽은 자인데,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미 다 죽었다는 것이다.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들은 모두 죽은 자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런 공동묘지에서 쫓겨났다고 해서 그렇게 서러워할 이유가 없는데, 오히려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이 우습지 말이다.

자기 자신의 죄 문제가 십자가와 맞닥뜨려져서, 그 죄가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해결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교회도, 그 어떤 목사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들을 겁내는고 하니, 그만큼 확신이 없다는 말이다. 아니,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죽어서 그렇게 예수님이 구원을 했다는데, 도대체 어느 놈이 자기 행위를 가지고 시비를 거느냐는 것이다.

그게 바로 마귀의 자식이고,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이다. 악마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짓거리를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십자가로 구원받은 형제를 고발하는 것은 악마라는 것이다. 행함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해도 마귀라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해보면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해보면, 사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하나는 늙어서 죽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암과 같은 질병으로 죽던지 말이다. 둘 다 똑같이 우리 몸의 죽음을 의미하는데, 바로 마귀는 바로 그것을 가지고 우리를 협박하는데, 그러면 그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으러 십자가에 죽고 다시 십자가에서 부활함으로 말미암아서, "아하, 우리 몸은 죽을 몸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사실 이런 죽을 몸을 죽게 하는 것도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역시 그것도 감사할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몸이 늙고 아파서 죽는 것이 처음 사망이라고 하면, 그러면 그 다음의 사망은 무엇인고 하니, 죄로 인해서 죽는 것이 둘째 사망이라는 것이다. 이 죄는 곧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그것 자체가 곧 죄인데,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게 되면 무엇이 있는가? 영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의로움을 받았다고 하면, "행동을 어떻게 올바르게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라고 하면서 시비를 걸지 말라는 것이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물론 남이 자기를 지적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기가 자기 자신을 먼저 그렇게 다그친다는 것이다. "이런, 내가 이런 행동을 다 하다니?"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원래 니가 그런 행동을 해!"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사람이, 배신을 당하게 되면 !!

어제 오후시간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사건과 사태가 들이닥치게 되면, 그 사건과 사태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매너를 지키고 점잖을 빼도, 그럴 때가 따로 있지 말이다. 아무리 점잖을 빼도 몸이 아픈 남편이 미친 듯이 달려들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디서 이런 괴물이?" 라고 하면서 후라이팬으로 내리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가 사랑했는데, 거기에 배신을 한번 당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손에 쥔 것이 후라이팬이든 벽돌이든 마구 던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것은 성경책에나 있는 것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자기가 그렇게 사랑을 해주었는데, 그 사랑에 배신을 당하게 되면,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죽이고 싶다는 것이다.

오죽 죽이고 싶으면 이혼을 하겠는가? 계속 같이 살다가는 죽일까봐 싶어서, 그것을 미리 방지하는 차원에서 이혼을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살인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즉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다 바쳤는데, 너는 그것을 이용해 처먹어, 이 나쁜 놈아!" 라고 하는, 그러니 전혀 용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하고, 배신을 당하게 되면, 그렇게 이용을 당하면 얼마나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모르는데, 그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격파괴'의 문제인데, 그렇게 인격이 파괴되면, 그냥 가만히 있을 위인이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평소에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사랑했단 말인가?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 그 부추김이, 진짜 '사망' !!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두 번째 사망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우리 인간은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도저히 그것을 해결할 길이 없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이 죽는 것만 사망이 아니라, 그렇게 우리를 죽도록 부추기는 악마의 모습도 역시나 사망이라는 것이다. 아니, 그것이 진짜 사망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저주를 받도록, 우리가 지옥에 가도록, 그렇게 부추기고 부추기는 그 어떤 세력 자체가 말이다.

◈ 욥에게 누가 부추기는가?

그래서 욥기를 보면, 욥을 누가 부추기는가? 가만히 있는 욥에게 마귀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아들을 죽여보세요. 딸을 죽여보세요. 재산을 빼앗아보세요. 몸에서 종이가 나도록 해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을 원망할 겁니다" 라고, 마귀가 그렇게 부추긴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마귀에게 길들여진 것이 있어서, "하나님, 이렇게만 안 해주시면 하나님을 잘 섬기겠습니다. 그것까지는 제가 참을 수 있는데, 이것만은 안 됩니다. 그러면 저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런 짓은 누구를 닮았는가? 그것은 바로 마귀가 하는 짓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런 복음의 깊이를, 성경말씀의 현실성을 어떻게 외면하겠는가? 그러니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하지만 우리는 이런 복음을 듣기 싫어하고, 성경말씀을 그만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계속해서 꿈과 환상 속에 있기를 원하는데, 마치 자기가 만든 세계에서 자기가 춤을 추는 것처럼, 그렇게 평생을 갇혀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죽음을 차분하게 맞이하겠다는 여유 만만함도, 둘째 사망의 턱을 넘으면 다 소용이 없는 가식이 된다. 끝은 당연히 끝이다. 하지만 죽었다고 해서 '끝'은 아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

사람은 죽을 때도 폼 나게 죽고 싶어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순신 장군이란 것이다. 즉 "얘들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폼을 잡아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두 번째 사망이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다. 지옥에 가서도 그런 폼을 잡으라는 것이다. 흔히들 장렬한 죽음이라고 하는데, 그런 죽음은 없다는 것이다. 전부가 초라한 죽음이지 말이다.

그러니 히브리서 9장 27절의 말씀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 심판이 있는 것도 정하신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더 옳지 싶은데, 왜냐하면 심판도 역시 정해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28절에 보면, 죄와, 즉 심판과 상관이 없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두 번째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곧 예수님으로 인해서 구원받은 자들인데 말이다.   

그렇게 심판과 상관이 없는, 즉 심판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참 좋지 싶은데 말이다. 그런데 막상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 과연 그것이 좋을까요? "아우, 나는 저 아파트에 살아봤으면 참 좋겠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에게 물어보라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좋은지 말이다. 그 사람은 다른 걱정에 휩싸여있다는 것이다.

◈ 온 몸과 마음에 구멍이 뻥뻥 !!

어제 오후에 설교한 것처럼, 온 몸과 마음에 구멍이 뻥뻥 뚫려있다는 것이다. 비싼 아파트를 사놓고 값이 떨어졌다고 인상을 쓰고 있고 말이다. 또한 관리비가 너무 비싸다고 찡찡거리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뭔가 잡았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그 잡은 것이 자기에게는 마치 무엇과 같은가? 꼼보자국처럼, 달의 분화구처럼 그렇게 엉망진창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우리가 살아온 온 천지가, 우리의 삶 자체가 그야말로 상처투성이이고, 또 멍투성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K1' 선수도 아니면서 말이다. 교회에 가서는 목사에게 상처를 받고, 또 집에서는 마누라에게 상처를 받고, 가끔은 딸에게도 상처를 받고 말이다. 

◈ 주님의 '잘라냄'의 작업 !!

어제의 경우에도 주일오전 설교를 다하고 나서, 또 다시 누가 상처를 받지 않았는지 걱정이 슬며시 되던데, 교회에 왔다가는 끝나자마자 그냥 후딱 가버리고 하니까 말이다.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하는 것도, 그것도 아버지가 탕자에게 허락한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설교를 마치고 생각해보니, 거기에 걸리는 사람이 어디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무엇인가? 무엇을 억지로 '믿어라' 라고 하는 게 아니라, 바로 잘라내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즉 주님의 일은 '잘라냄'의 작업이란 말이다.

◈ 구약에서 '하나님의 동행하심' !!

그 예를 지금부터 들어보겠는데, 잠시 성경말씀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게 레위기 17장인데, 여기에 사망과 관련된 구약의 내용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게 어렵기 때문에 미리 설명을 하자면, 구약에서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뭐냐고 하면, 아까도 들었지만 여러분의 기억력을 환기시키는 의미에서 다시 하겠는데 말이다.

이런 하나님의 동행하심에 대해서 누군가가 "목사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 것이 동행하시는 겁니까?" 라고 한다면, "그것은 구약을 통해서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구약에 무엇이 있는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인데,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나라가 자기들의 소유인 줄로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다" 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그들을 치는 쪽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면, 모세의 경우에는, 즉 모세언약을 보면, 이스라엘 안에는 제사가 있는데, 그 제사에는 피가 있다는 것이다. 즉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상번제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동행하는 방식인데, 그러니 "십자가로 동행한다" 라는 것은, "너의 죄 때문에 내가 늘 죽는다" 라는 것을 같이 보여주는 방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단 아시고, 레위기 17장을 살펴보자.

(레 1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 17:2)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시다 하라
(레 17:3) 무릇 이스라엘 집의 누구든지 소나 어린 양이나 염소를 진 안에서 잡든지 진 밖에서 잡든지
(레 17:4) 먼저 희막문으로 끌어다가 여호와의 장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 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레 17:5) 그런즉 이스라엘 자손이 들에서 잡던 희생을 회막문 여호와께로 끌어다가 제사장에게 주어 화목제로 여호와께 드려야 할 것이요
(레 17:6) 제사장은 그 피를 회막문 여호와의 단에 뿌리고 그 기름을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할 것이라
(레 17:7) 그들은 전에 음란히 섬기던 수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 이는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레 17:8) 너는 또 그들에게 이르라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혹시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 번제나 희생을 드리되
(레 17:9) 회막문으로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리지 아니하면 그는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레 17:10)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 17:12)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 중에 아무도 피를 먹지 말며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라도 피를 먹지 말라 하였나니
(레 17:13) 무릇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 먹을 만한 짐승이나 새를 사냥하여 잡거든 그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을지니라
(레 17:14)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레 17:15)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을 먹은 자는 본토인이나 타국인이나 물론하고 그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고 그 후에 정하려니와
(레 17:16) 그가 빨지 아니하거나 몸을 물로 씻지 아니하면 죄를 당하리라

◈ 끊쳐지리라, 끊쳐지리라, 끊쳐지리라 !!

여기 4절, 9절, 10절, 14절에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끊쳐지리라' 라는 것인데, 즉 '끊어진다' 라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꼬드기기 위해서 안달이 난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천국에 넣어주지 않으려고 안달이 났다는 것이다. 끊어내려고 말이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몰라도,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 가서, "내가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억지로 참석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오기 싫은 사람은 오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가 참석한 것이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하나님은 끊어내지 못해서 난리인데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방법인데, 누구의 안면을 봐서, 어르신이 어떻고,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전혀 그런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복음이 듣기 싫으면 안 오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오라고 하는 것은 안타까워서 하는 말인데, 그냥 집에만 있어봐야 자기 세계만 망상으로 만들어서, 그런 세계에 푹 빠져서 살아가니, 그러니 교회에 나와서 그런 모든 껍데기를 다 부수라는 말이다.

요즘 안 목사님의 기도제목이 무엇인고 하니, "오늘도 말씀으로 깨어지게 하소서" 라는 것인데, 물어보지 않아도 다 안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왜 그런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고 하니, 우리 인간은 돌아서면 포근한 자기 동굴만 챙긴다는 것이다. 자기 동굴만 말이다.

◈ 피와 생명은 일체이다 !!

그렇다면 여기 레위기 17장에서, "피와 생명은 일체이다"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간단하게 말하면, "피 때문에 산 생명은, 피 때문에 살았기 때문에, 그 생명은 너희의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누구의 것인가? "피로 값 주고 산 내 것이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 생명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다고 해서, 살아있는 우리의 소유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방식이라는 말이다.

(레 17:14)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그러므로 "피를 먹지 마라", 혹은 "피를 흘리지 마라"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이 장소에는 내가 흘린 피만 필요하다" 라는 것이다. 즉 "희생제물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피를 흘려도 하나님인 내가 흘리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염소이고 양이니 그렇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피와 생명이 일체라고 했는데,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그 피가 흐른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그들 속에 생명이 흐른다는 것인데, 그러니 그 생명은 누구 것인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수와 싸워서 새롭게 만든 하나님 자신의 소유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것' 이란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피를 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나가라' 라는 것이다. 즉 "너희는 아브라함의 기업을 잇지 못하고, 내 백성에서 끊어지리라" 라는 것이다. 그렇게 나간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배짱이 얼마나 두둑한지 모르는데, 그 누구도 감당이 불감당이라는 것이다.

◈ 물 심판이 도와주어야, 방주가 !!

노아의 경우에도, 그 큰 방주에 달랑 자기 식구 8명만 태우고 문을 닫았는데, 그러니 노아의 배짱이 보통이 아닌데, 그 배짱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싫으면 말고, 닫아!" 라는 것인데, 완전히 똥배짱이라는 것이다. 물론 노아가 닫은 것은 아니지만, 약속의 시간이 되니 방주의 문이 알아서 닫혔는데, 그게 아마도 자동문의 시작이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그렇게 주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아버렸는데, 그런데 이 방주에는 선박엔진이 따로 없기 때문에 스스로가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이 없으면 구원이 없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하나님의 물 심판의 도움으로 방주는, 드디어 구원의 방주로서의 티가 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구원의 방주로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물 심판으로 홍수가 나야 만이 방주는 물위에 뜨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물이 없으면, 그게 무슨 방주이겠느냐는 말이다. 웬 정신이 나간 양반이 그냥 나무를 가지고서 아주 열심히 만든 아주 커다란 집에 불과하지 말이다. 그러니 물 심판이 도와주어야만, 방주는 물에 뜬다는 것이다.

◈ 그러니, 가룟 유다가 있어야 !!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주되심에는 마귀가 도와주어야 하는데, 즉 가룟 유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지옥이 있어야 천국이 천국 값을 하는데, 그래야 거지 나사로가 빛이 난다는 말이다. 제가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닌데,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진짜 현실 말이다.

그러니 노아홍수가 있었는지 몇 천년이 되었다고 해서, 없던 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노아홍수는 분명히 있었는데, 그래서 노아의 여덟 식구만 구원을 받았고 말이다.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인데, 불 심판이 있다고 했으면, 반드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을 보면, 항상 기도에 힘쓰라고 했는데, 구원의 날이 가깝다고 말이다.

(롬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죽음을 차분하게 맞이하겠다는 여유 만만함도, 둘째 사망의 턱을 넘으면 다 소용이 없는 가식이 된다. 끝은 당연히 끝이다. 하지만 죽었다고 해서 '끝'은 아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끝'을 끌어다가 인간세계에 덮어버린다.

◈ '끝'이 과연 무엇인가?

여기에 보면, "예수님은 또 다른 '끝'을 끌어다가 인간세계에 덮어버린다" 라고 하는데,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끝은 무엇인가? 자기가 바라보는 시선의 마지막이 끝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자기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 마지막이 끝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에 이렇게 사람이 있고 절벽이 있다면, 지금 자기는 단단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서있는데, 하지만 절벽 끝을 지나게 되면 그 단단한 땅이 없으니, 즉 디딜 곳이 없으니 그만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거기로 가게 되면 '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질 수밖에는 없는데, 그래서 그것을 '위험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홍해바다가 겨우 갈대밭 ??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는 그것을 '붕' 뛰어넘어 버리는데, 그 절벽을, 즉 위험한 곳을 지나게 간다는 말이다. 그것이 구약의 출애굽기에서는 '홍해' 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홍해바다 앞에 섰을 때,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따라오고 그야말로 진퇴양란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 홍해바다에 길이날 줄이야, 그야말로 상상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물론 바다에 길이 나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렇게 잘 흐르던 물분자가 그만 벽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것을 믿지 않고, 조수간만의 차이로 육지가 드러나서 갈대밭 정도를 건넌 것으로, 그 넓은 바다가 아니고 말이다.

현대의 모든 신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하는데, 그냥 못 믿겠다고 하면 되는데, 말을 그렇게 돌려서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애굽의 군사들이 갈대숲에 빠져서 죽었다는 말인가?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건너갔는데, 애굽의 군사들은 빠져죽었다고 하는, 그 차이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신학자들이란 작자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 144,000명이 유리바다를 건너서 !!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홍해바다를 유리로 되어있는 '유리바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유리 아래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그 유리 밑에는 활활 타는 지옥의 불길이 있다는 것이다. 심판이 말이다. 바로 그 심판의 유리바다를 144,000명의 성도가 건너오게 되는데, 이것을 요한계시록이 정말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말이다. 

(계 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이런 것이 다 예수님의 십자가 효과를 보여주는데,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는 것인데,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끝인가?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끝은 종말에 보게 되면, 즉 마지막에 와서 보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있어왔던 그 모든 상황들이, 즉 악마에게 매여있던 세계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세계로 옮겨졌기 때문에, 이전에 있던 이 세상 자체가, 거기에 약국도 있고 식당도 있고 교회도 있는데, 그런 것 전부가 무엇인고 하니, 끝이고, 종말이고, 지옥이 된다는 것이다.

◈ 이 세상이 곧 '도가니' !!

저는 이것을 가지고 '도가니' 라고 부르고 싶은데, 즉 금속을 만들어내는 펄펄 끓는 뜨거운 불 속의 도가니 말이다. 그러니 어디에 도가니가 따로 있는데 아니고, 이 세상 자체가 곧 도가니라는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조금 더 오래 살아봐야 무엇인가? 맨 도가니에서 도가니로 옮겨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도가니탕?)

그래서 건너온 사람들은 무엇만 생각하는고 하니, 자기가 개척한 교회를 자랑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를 건너게 한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너희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쁘고 기쁜,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물론 요즘과 같이 경기도 안 좋을 때, 돈까스 집에 손님이 단체로 몰려오면 기쁘기는 기쁜데,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기쁜 것은 십자가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큼 더 기쁜 것은 결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이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데, 교회가 장사가 잘 되는 것을 좋아하지, 십자가는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사실 예수님의 목숨을 누가 빼앗아간 것인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아들을 아버지께서 말이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는,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다고 말이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삭을 죽이려고 덤벼든 것이 누구인가? 아버지인 아브라함인데, 즉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들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당황스러운데, 평소에 자기가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지 모르는데 말이다. 그러면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왜 죽이는가? 그것이 곧 홍해바다 이야기이고 십자가 이야기인데, 바로 이러한 것이 핵심이 되어서 성경말씀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 겨울수련회는, '하나님과 우상의 차이점'으로 !!

그래서 이번 겨울수련회에서는 성경말씀 전체를 통으로 해서, 진짜 하나님과 우상의 차이점에 대해서 언약적으로 뚫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말이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찬성에 1표!)

* 질문 -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를 활용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물론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는데, 그건 그렇고, 이러한 것은 자기가 교회를 두 번 나왔든지 20년 동안을 나왔든지 간에,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제 자신이 왜 그렇게 욕을 얻어먹어야 되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욕을 하는 자들의 심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교재를 계속해서 보자.

** 예수님이 아버지께 받은 일은 딴 것이 아니었다. '내가 죽어야 남이 산다'는 원리를 달성하시는 일이었다. 이 방법 외에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자신이 죽지 않고 성사되는 하나님의 일은 없다. 다른 방도가 없음이 분명하기에 예수님은 마지막 결의를 다졌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아버지는 아들을 버렸고 !!

지금 여기에 나오는 마태복음 26장 39절의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이야기인데,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아버지는 아들을 버렸고, 또 아들은 그것을 수용했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보면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는데, 그러면 아버지의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제발, 죽어라"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죽어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니 말이다. 그렇게 자기 아들을 죽이는 하나님이야말로 참 하나님인데, 그러니 십자가가 빠진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죽음의 하나님이란 말이다.

그런데 악마가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그런 가짜 하나님을 만들어놓았는데, 그래서 저는 감히 말할 수 있는데, "한국교회 전체가 다 이단이다" 라고 말이다. 만약에 십자가의 복음을 아는 목사나 성도라고 하면, 도저히 그런 한국교회에 그냥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데모를 하든지, 쫓겨나든지 무슨 수가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용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부가 한 통속이고 이단이라는 말이다.

이제 교재 181페이지를 보자.

** 본인이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 저주 속으로 들어가야만, 이로 인한 대속의 사랑이 자기 백성에게 퍼져나갈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이 행해야하는 말씀의 원리이다.

(사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 아들은 그것을 수용했다 !!

여기 이사야 53장 12절을 보면,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라고 하는데, 즉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일부러 죽으셨음을 보여주는데, 죄도 없으신 분이 말이다. 그래서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께서 관리해주지 않으면,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가 있는가? 없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아무리 바르고 살고 착하게 살아도, 또한 산 속에서 한 평생을 도를 닦아도, 그런 것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다.

◈ 이 세상은, 십자가의 소용돌이 !!

그러니 복음은 종교가 아닌데, 기독교는 종교일지 몰라도 말이다. 요즘은 정말 "그것은 신앙의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냥 현실입니다" 라고 하고 싶은데, 하도 신앙이라는 말이 남발이 되니까 말이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소용돌이로 돌아가는데, 그러니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소용돌이가 아니니 말이다.

하나의 중심을 향해서 빨려 들어가는 것인데, 즉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모든 권세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 주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권세를 자기의 택한 백성에게 영생을 주는데, 거기에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 대구 우사인 볼트대회 ??

이번 대구에서 세계육상대회를 하면서, 온 천지에 널려있는 사진이 누구 사진이었는가? 다 '볼트'의 사진이었는데, 그러니 그 우사인 볼트가 없으면 육상대회가 빛이 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세계육상대회인지, 우사인 볼트대회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보면 이 세상의 중심이 도대체 누구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인데, 그게 바로 아버지가 아들을 버렸다고 하는 그 사건이란 말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버리듯이 말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버렸다고 하는 것, 그렇게 십자가가 중심이 되어서 이 세상 모든 것이 돌아간다는 말이다.

비단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갓바위를 비롯한 모든 절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이상한 조류(소용돌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자신이 죄인으로 취급을 받아서 저주를 당하는 것만이 아버지의 세상 사랑임을 예수님은 아셨던 것이다. 자신을 위한 생명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서 죽어야 될 생명이었다. 이로서 예수님과 성도와 하나님은 모든 죽음 속에서 대화를 하신다. '내가 죽어서 남이 사는' 것에 관한 대화이다.

(요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여기에 보면 "내가 죽어서 남이 산다" 라고 하는데, 그런 대중가요의 노랫말도 있었지 싶은데, 혹시 기억이 나지 않나요? 모르면 말고(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러니 죽음 바깥에서는 예수님을 찾을 수 없고, 따라서 죽음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죽이시는 그 죽은 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모든 인간은 저주스럽게 죽어서 마땅하다.

◈ 이 세상의 자랑거리, 그러나 !!

이 세상에서의 자랑거리가 무엇인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오래 동안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곧 자랑거리라는 것이다. 건강도 그렇고, 재산도 그렇고 말이다. 그런 것들이 다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자기가 오래 동안, 편안하게 잘 살아가는데 보탬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로 그런 것이 이 세상에서는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즉 "나는 너보다 더 오래 동안 살 가능성이 많지? 그렇지? 그러니 나는 너를 이겼어" 라는 의미인데,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의 자랑거리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서울에서도 비닐 하우스에서는 사는 사람들이나, 종로 3가의 뒷골목이나, 서울역의 노숙자들의 경우에, 그런 사람들을 보면 무엇을 느끼는가? "아, 살기는 사는데, 이게 사는 게 맞나?" 라고 여기게 되는데, 그것을 두 글자로 '가난'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교만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살아있는데 가난한 것이 아니라, 넉넉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이 어리석은 자여 !!

그런데 누가복음 12장에서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어리석은 자'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여!" 라고 한다는 것이다. 어떤 부자가 "내가 평생동안 먹을 것을 쌓아놓았다" 라고 하니 말이다. 그 부자는 왜 어리석은가? 하나님께서 오늘밤이라도 데리고 가버리면 그만이란 것이다.

(눅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는 어떤 안전장치도 없는데, 즉 우리의 목숨을 누가 가지고 가겠다는 것에 대한, 그것에 대한 어떤 대비책도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주인이 와서 다시 가지고 가겠다고 하는데, 거기에 무슨 대비책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아는 것이 곧 마음을 낮추는 것인데, 반면에 모른다면 어리석은 자이고, 교만한 자이고, 또한 자만한 자라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가난하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오히려 가난하면 더 지독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부자가 아니니 말이다.

그러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볼 때, 즉 자기가 이미 죽어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될 때, 물론 성령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데 말이다. 그것이 곧 마음을 낮추는 자의 모습이고, 교만하지 않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교만하지 않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으스대는 것을 저주하신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 전체를 한 아담으로 간주하신다. 선악과를 따먹고 저주받은 그 죽은 아담으로 보신다. 후손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 아담 안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아담으로 본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으로 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즉 "내가 나를 이렇게 봅니다" 라는 것을 주님께서는 듣지 않는다는 말이다. 김국환의 '타타타' 라는 노래에 보면, "내가 너를 모르는데, 니가 어떻게 나를 아는가?" 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물론 그것도 첫째 사망의 수준인데, 우리 인간은 결코 둘째 사망은 언급조차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교재를 계속해서 살펴보자.

** 인간이라면 모두 아담이고, 아담이 아닌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곧 아담이 죄인이면 다 죄인이고, 즉 죄인이 아닌 인간은 없다는 말이다. 아담이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모든 인간은 각자 아담의 죄 값으로 죽을 아담이 된다. 아담이 아닌 자는 아무도 없다.

◈ 너는 이미 아담으로 살아가. '끝' !!

여기에 보면 "아담이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모든 인간은 각자 아담의 죄 값으로 죽을 아담이 된다"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이게 참으로 재미있는 표현인데, '너'와 '나'가 모여서, 즉 우리끼리 모여서 아담을 만들자고 해서 아담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각각 다 아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인간을 분석하고, 해명하고, 해석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담의 분신이고, 아담의 일부이고, 또한 아담 그 자체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우리가 물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미 결정을 해버렸으니 말이다.

언약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미 그렇게 결정을 해버렸기 때문에, 인간이 거기에 대해서 관여하고 반발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즉 "너는 이미 아담으로 살아가. 그것으로 끝!", 그렇게 마치 판사가 판결을 하듯이 '땅', '땅', '땅' 했다는 말이다. 물론 아담은 피고이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아담으로, 즉 죄인으로 이미 판결을 받고 말았는데, 그러니 옷가게에 손님이 와도 누가 왔다는 말인가? 아담이 온 것인데, 그러니 주인과 손님이 이야기를 하면, 아담과 아담이 서로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타인이 나와 다른 운명을 지녔다고 볼 하등의 근거도 없다는 말이다. 타인과 구별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인간의 개별적 자아성이란 실은 허망한 상상의 산물이다.  

◈ 타인도, 이웃도 없어 !!

우리 인간에게 결국 타인이 있는가? 그런 것은 없는데, 물론 이웃도 없고 말이다. 이웃은 우리 전체가 예수님의 이웃이 된다는 말이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누가 이웃입니까?" 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니 이웃은 니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이웃은 만들어진다" 라고 했는데, 즉 이웃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옆집에 산다고 해서 이웃이 아닌데, 이웃은 구석구석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진짜 이웃은 자기가 자기를 부인할 때 발생하는데, 즉 그렇게 자기 자신을 부인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이웃이 그때 등장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어나가시는 방법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자체가 하나님의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자체가 먼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야 하는데, 마치 탕자가 되어야 구원을 받듯이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될 때 이웃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될 때,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그 예수님의 사랑 덕분에 원수에서 이웃으로, 또한 형제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혼자 이루셨고, 지금도 여전히 실시하시는 일들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죄가 있는 이상, '산 자' 라고 말하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거룩이 아닌 것은 다 죽음이다.

(출 28:43)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지어서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후손의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 아론의 할배라고 해도, 그러면 죽어 !!

여기 출애굽기 28장의 말씀을 보면, 아론과 그 아들들이 어떻게 해야만 죽지 않는지, 그런 것이 나와 있는데, 즉 하나님과 아무리 가까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과 막 먹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옆에서 섬기고 모시고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 사이는 그런 사이가 아니잖아" 라고 하면서 봐주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아론이 아니라, 아론의 할배라고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꼬드기지 못해서가 아니라 잘라내지 못해서 안달이 나신 분이니 말이다. 즉 "니가 백 날을 제사장으로 일해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여버릴 거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결국 아론도 죽는데, 그러니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살고 싶어해도, 그렇게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백 날을 그렇게 해도 안 된다. 단지 살아있는 것은 주님의 영이 임해야 되지, 그 이외에는 살아있다고 할 수가 없단다" 라는 것을 계속해서 이야기해주신다는 것이다. 즉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 죽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영,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없다면, 그 어디를 가도 죽은 자로. 즉 지옥에 가는 자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감사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성령 안에서, 오직 십자가 안에서만 우리는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 니들만 성도가? 오브코즈 !!

이런 이야기를 하면 죽은 자들이 얼마나 달려드는데, 무슨 좀비도 아니고 말이다. 그야말로 죽자고 덤벼든다는 것이다. "니만 산 자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 마을만 성도냐?" 라고 하는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모순인지 모르는데, 진짜 자기가 성도라는 자신이 있으면 들어오지 않으면 되는데, 자신이 없으니 그런 짓거리를 한다는 것이다.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교재를 보자.

** 원래 빈 몸으로 왔던 성도는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다. 하지만 평생을 살아가면서 거룩의 옷으로 갈아입는 혜택을 받게 된다. 이로서 성도는 말 그대로 '거룩' 이라는 의미로서만 존재한다. 그 거룩은 어디서 오는가?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 '거룩'은, 십자가로 계속 그 의미를 살려줄 때만 !!

이것이 무슨 뜻인가? 성도가 거룩하다는 것이 아니라, '거룩' 이라는 의미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책상 위에 꽃이 있다고 했을 때, 그래서 어떤 작가가 그것을 보고 "너는 꽃이다" 라고 했을 때, 그 꽃은 꽃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저기 산 속에 있는 꽃은 어떠한가? 그 작가에게는 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가 그 이름을 아직까지 불러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해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즉 '거룩' 이란 것은, 그 거룩을 호명한 분이 함께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데,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있음으로서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이지, 그게 아니라 "나는 이제 예수님이 거룩하다고 했어. 그러니 난 거룩한 사람이야" 라고 하면서 뛰쳐나가서 독립선언을 하면, 그것은 더 이상 거룩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거룩의 의미만 계속해서 살아남아서, 즉 십자가의 피로 계속해서 "너는 거룩해, 거룩해" 라고 할 때만 거룩하다는 것이다. 마치 작가가 책상 위의 꽃을 보고 "너는 꽃이야, 꽃이야" 라고 할 때만 꽃의 의미가 있듯이 말이다. 그건 산 속의 꽃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그렇게 그 작가가 꽃이라고 불러주었을 때 그 꽃이 의미가 계속해서 생겨나듯이, 예수님께서 "너는 십자가의 증인으로서 거룩해" 라고, 그렇게 십자가의 의미를 계속해서 부여해줄 때만, 그 사람은 거룩한 성도가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의미를 계속해서 부여해줄 때만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인데,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자꾸 잊어버리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려는 경향이 너무나 강렬합니다. 그럴 때마다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책망케 하시고, 오직 주님의 뜻대로만 살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10,08 오후 7시에 마침.

                                                      오늘도 십자가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구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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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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