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52강 나의 죽음

피/피 2012. 8. 29. 10:32

피52강 나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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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52강 나의 죽음

[11 대구강의 14] - [피 52] - 나의 죽음
                                                                                
                                                   11,08,0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68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그런데 이상한 일은 사람들이 일반적인 현실에 대해서는 무서워하지 않으면서, 유독 자신이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마치 새삼스러운 일인 것처럼 무서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꽃이 피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수평선에 해가 떠오르는 것을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장례식에 가서 남이나 친지의 죽음에 대해서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단지 장례비용만 걱정할 뿐이다.

◈ 오직 '나'의 죽음만이 두려워 !!

여기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우리 인간은 꽃이 피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데, 동시에 꽃이 지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수평선에 해가 떠오르는 것을 무섭지 않고, 또한 해가 지는 것도 무섭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남의 장례식에 가서도 무서워하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독 무엇에 대해서만 겁을 내는가? 자기가 죽는 것에 대해서만은 겁을 낸다는 것이다. 즉 죽음 자체를 겁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은 것을 겁낸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 라는 것에 대해서 겁을 낸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누구에게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남의 죽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사라지는 것은 겁나지 않는데, 다만 자기만 살아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죽음을 겁내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반드시 자기 죽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 여기에 악마가 개입하면 !!

바로 여기에 악마가 개입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 악마가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겁을 내지 않는데, 하지만 그 악마가 자기가 죽는 것은 대해서는 겁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해도 우리는 전혀 감이 없는데, 즉 "아이고, 괜히 설치다가 돌아가셨구나" 라는 정도이지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죽은 것은 겁이 나지 않지만, 그러나 자기가 죽는 것은 겁이 난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악마가 우리의 눈길을 예수님으로부터 돌리게 하기 때문인데, 누구에게로 말인가? 바로 그것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게로 눈길을 돌리도록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든 하나님이든 간에 니가 더 중요하다. 내 말이 맞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맞아요" 라고 하는데, 그것을 계속해서에게 우리에게 각인을 시킨다는 것이다. 즉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만들어진 나는 나에게 제일 중요하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2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 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든 자기가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데, 그래서 악마의 종까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다시 말해서, 마귀의 종이 되는 한이 있어도 자기를 죽이지 않는다고 하면, 그렇게 자기는 누구의 종이라도 될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인데, 그래서 부모가 자식에게 꼼짝을 못하고, 가장은 회사에 가서 꼼짝을 못하고 하는데, 물론 그 모든 것이 회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함이란 말이다.

◈ 마귀 - '너냐? 예수님이냐?'

그러므로 마귀는 "너냐? 예수님이냐?" 라고 했을 때, "니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하다" 라는 것에다가 초점을 맞추도록, 마귀는 계속해서 압박을 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부터 그렇게 유혹을 했는데, 즉 "따먹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한가? 아니면 니가 신이 되는 것이 중요한가?" 라고 말이다.

물론 우리는 이미 성경말씀을 보고 있으니 정답을 알고 있는데, 자기가 신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따먹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금지의 말씀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말씀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이 중요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즉 머리는 뻔히 알지만 하지만 우리의 감정은 자기가 신이 되고싶어하는 불뚝 성질, 그 성질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해보면, "내가 죽는 것이 나에게 겁이 나기 때문에, 내가 나를 죽이는 것도 있을 수가 없다" 라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나를 죽일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주장하는 바인데,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죽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는 예수는 죽일 수 있는 여지가 우리에게는 항상 남아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욕하지만, 하지만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은 우리의 대표자라는 것이다. 그들은 세리와 창기가 아닌데, 그들은 강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막가는 밑바닥의 인생을 사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이 그러한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애를 썼겠느냐는 말이다.

◈ 내가 죽으면 나의 역사도 죽는다 !!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는데, 즉 "내가 죽으면 나의 역사도 죽는다" 라고 말이다. 무슨 뜻인가? 현재의 자기가 죽은 것은 아깝지 않지만, 자기가 지나온 역사가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날아가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살한다는 말이다.

자살을 하면 누구는 죽는가? 자기는 죽지만, 그러나 무엇은 남는다는 말인가? 자기가 살아온 역사는 영광스럽게 남아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자살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자기가 살아온 그 흔적을 현재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귀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자기가 신이 되고자 하는 그 모든 예정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 자살 - '자기를 위한 헌신' !!

그러므로 인간의 자살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고 자기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인데, 즉 자기가 신이 되고 자기가 거기에 신도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유일한 신은 '나' 라는 것이고, 또한 유일한 신도는 '나'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엎어지고 순교함으로 말미암아서 한 사람의 신도는 확보가 된 셈인데, 즉 자기가 지옥에 가더라도 그런 자기를 예쁘게 봐 줄 사람이 한 사람은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이런 사고방식이 전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음은 바로 그때부터 시작이 되는데, 그러니 죽음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이 곧 죽음이란 말이다. 자기 사랑에 너무 몰두하다보니 주님의 영광까지 챙길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즉 "이것이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라는 것이 우선이지,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라는 것까지는 챙길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 믿음이란? '다른 손길이 나를 열심히 끌고 다님을' !!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라고 하는데, 그 믿음은 무엇인가? 자기가 자기를 다룰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분께서 자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믿음이란 말이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다시 말해서, "내가 나의 영광을 위해서 나에게 무슨 조치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데리고 나말고 다른 분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다른 손길이 나를 열심히 끌고 다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바로 그것이 믿음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힘은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로부터 오는데, 끊임없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주께서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영광을 돌리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영광을 돌리는 게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이 둘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모르는데, 결코 우리 자신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한국교회에서 주장하는 소리인데, 우리는 전혀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오직 영광이 되게 하시는데, 누가 그렇게 하신다는 말인가? 예수님이 개입하게 되면, 우리가 그 어떤 짓을 하든지 간에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영광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 죄인으로 규정시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

어떻게 말인가?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을 시켜서 말이다. 즉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시키고, 그렇게 규정을 시킨 그분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서, 그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되게 자들과 하나의 세트가 되게 하셔서, 그렇게 해서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죄인이 되게 만드시는 그분께서, 자신의 십자가의 피와 죄인이 된 우리를 뭉쳐서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돌아서면 자기 자랑만 늘어놓을텐데 말이다. 그게 무슨 영광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즉 주께서 찾아오시면 우리는 무엇을 해도 죄가 되는 죄인이 되고, 또한 십자가가 보이게 만드는, 그러한 하나의 세트로 만들어서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의 세트로 만들어서 말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한다고 하면서 돈을 내라고 닦달을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교회에 봉사하고 헌금을 해서 영광이 되게 한다면, 그 공로는 결국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역시 나는 훌륭해!" 라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자기에게 귀환하게 된다는 것이다.

◈ 누구야? 나의 역사를 건드리는 놈이 !!

그렇게 자기에게 돌아가는 그 귀환의 경로를 단칼에 자르기만 하면, 우리 인간은 그만 발작을 일으키는데, 즉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헌금을 했는데, 감히 누가 그것을 죄라고 말하는가? 누구야? 도대체 누구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주님의 십자가로서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그런데 그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가만히 있고, 자기가 헌금한 것을 끄집어내어서 잘라버리면 난리를 피우고 발작을 하는데, 물론 그런 발작은 그 속에 있는 마귀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즉 "이 사람은 내 사람인데, 누가 내 사람을 건드렸어? 내가 철저하게 길을 들여왔는데, 평생동안 나에게 속한 죄의 종으로서 말이야" 라고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 잘난 체를 하는데, 그것을 그것을 죄라고 규정해버리면, 그 속에 있는 마귀가 당연히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자기 사람으로 만든 그 역사가 있으니 말이다. 수십 년을 교회에 다닌 역사, 교회에 봉사한 역사가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은 그 역사를 날아가게 하는데, 하지만 인간은 자기는 날아가도 자기 역사만큼은 날아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다.

◈ 그러나, 내가 죽는다는 것은?

물론 이렇게 말하면 그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왜 자기 신앙의 흔적이 날아가지 않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은혜로, 즉 주님의 역사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주님의 은혜로, 즉 성령의 역사로 이루지게 되면, 그 결과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현재 자기가 죽는다는 것, 그것이 곧 결과라는 것이다. 그 경로가 순간 순간 다 결과인데, 아무튼 그 결과가 흐르고 흐르게 되면, 지금 자기가 있는 현재의 모습이 곧 결과인데,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에 가서 죄인으로 들어가는데, 그 성전에서 마중 나오는 것은 어린양 피인데, 그렇게 해서 그 안에서 영광이 될 때, 그것이 곧 성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정리가 되면 쉬운데, 하지만 돌아서면 자꾸만 이런 것을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인간은 협박을 당하면서 살고, 자신이 또한 자신을 협박한다. 악마의 위협을 피해서 기껏 마련하고자한 안전하고 그럴싸한 미래의 자아상이 도리어 지금의 자아상을 협박한다.

◈ 자신이 또한 자신을 협박하는 인간 !!

여기에 보면 "자신이 또한 자신을 협박한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런 표현을 자꾸만 하니 이것을 숲(?)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책이 어렵다는 의미?), 하지만 진짜로 자기가 자기를 끊임없이 협박한다는 것이다. 즉 "니가 그렇게 살면 벌을 받는다" 라고, 그렇게 자꾸만 협박한다는 것이다. 벌이 없는데, 저주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못 살게 굴고 힘들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마귀가 들었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악마를 피했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우리 인간은 결코 악마를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성도라고 해도 악마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사탄은 마치 우는 사자와 같이 택한 자라고 해도 삼키려고 그렇게 찾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협박에서 벗어난 고요한 자리가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결단코 없다는 말이다. 

◈ 인간은 거짓 속에서 비로소 휴식한다 !!

어제 오전에 설교를 하면서 너무 어려워서 그냥 스치고 지나갔는데, 일일이 설명하기는 엄두가 나지 않아서 말이다. 물론 주의 깊게 들은 사람들은 알았겠지만, 대부분은 그냥 넘어갔지 싶은데 말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거짓 속에서 비로소 휴식한다" 라고 말이다. 무슨 의미인가? 사람은 진실이 다가오면 견디지를 못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거짓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같은 거짓말을 하는 인간이 다가오게 되면, 굉장히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 그 주변에 깡패나 사기꾼들이나 창녀들이 있는 골목에 가면 왠지 자기가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런 거리를 가다가 누군가가 창녀의 꼬임의 빠져서 집으로 들어가면 "이런 인간아, 왜 그렇게 사노?"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면서 정작 자기는 편안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자기는 그런 것에 휩쓸리지 않으니 얼마나 의롭고 경건하고 착해 보이느냐는 것이다.

◈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하지만 사람들이 수녀원에 가면 어떻게 되는가? 너무나 골치 아픈데, 그래서 거기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날씨가 제 아무리 더워도 항상 무엇을 뒤집어쓰고는 뭐라고 하는가? "우리는 이렇게 고추를 무공해로 잘 키워서 고추장을 만들어 노숙자들을 도와주고 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또한 "우리는 부모를 떠나서,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우리는 아이들은 귀여워하지만, 그러나 결혼도 하지 않고 내 자식을 키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버린 아이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돌봅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그러니 그런 곳에 간다는 것은 괜히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거짓 속에 들어가면 신이 나는데 (수녀들이 사는 곳에 제일 거짓 소굴인데?), 노래방에 가면 더 큰 소리도 떠드는 인간들도 있고, 또한 술집에 가면 개 같이 구는 놈들도 있고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여우 정도는 되지만 그런 개가 아니라고 여기니 말이다(ㅋㅋ). 아무튼 거짓 속에서 살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한데, 그렇게 짐승들과 같이 어울려서 살면 말이다.

◈ 인간은, 거짓의 보자기에 싸여서 태어난다 !!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 자신이 그런 거짓의 더미 위에서 태어났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서 휴식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어제 설교시간에 말하기를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났지만, 우리 인간은 거짓 위에서 태어났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보통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그림을 보면, 아기 예수님이 말구유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가? 지푸라기 위에 보자기에 싸여서 있다는 말이다. 아무튼 그림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거짓말의 보자기에 싸여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거짓말이 정겹고, 이상하리만큼 굉장히 친밀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래서 농담도 못하고 유머도 이해하지 못하는, 야구로 말하면 커브나 슬라이드가 아닌 오로지 직구 하나만으로, 그렇게 바른 소리만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그야말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 이라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너무나 힘이 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거짓 속에서 휴식을 취하지만, 하지만 그런 거짓의 자리에서 마귀에게 계속해서 협박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악마가 하는 말이 무엇인가? "나 신세가 그게 뭐냐?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려라" 라고 말이다.

그게 교재 169페이지에 나오는데, 한번 살펴보자.

** 악마의 사주에 의해서 내가 나를 쉴새없이 협박을 하는 것이다. "너 신세가 그게 뭐냐?" 라고 다그친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죽어버려라!" 라고 강하게 추궁한다.

◈ 그러니, 그냥 자살해 !!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지금 니가 더 이상 살면 너의 찬란한 역사마저도 욕을 먹게 하니, 그 찬란한 역사를 고이 남기는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 지금 니가 퇴폐하고 점점 더 타락해 가는 그 시점에서 너 자신을 없애버려라" 라고, 그렇게 악마가 속삭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치매에 걸린 노인네들도 자살을 하고 하는데, 자기의 찬란했던 그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다가 보니, 지금 자기의 꼴이 너무나도 대조가 되니 말이다. 추억 속의 자기 자신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찬란한 과거를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서 지금의 자기 자신을 죽여버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사진을 찍지 않으려고 하는데, 귀신이 나온다고 말이다. 늙은 자기의 모습을 보면 귀신인지 인간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ㅋㅋ).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무엇인고 하니, 악마는 우리 인간이 하는 일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마는 무엇을 무기로 삼아 우리 인간을 협박하는가? 그것을 제가 칠판에 크게 써보겠는데, 우리 서로가 제발 잊지 말라고 말이다.

◈ 악마가 유혹하는 무기는? 그것은 곧 '수치' !!

그것이 바로 '수치' 라는 것인데, 즉 악마는 우리 인간이 수치스러워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안다는 것이다. 망가져도 혼자서 망가지면 수치스럽지 않은데, 그래서 부도를 낸 자들은 미국이나 호주 등에 이민을 간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곳에는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즉 수치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탁소를 해도 괜찮고, 노가다를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멕시코의 수수농장에 팔려가서 거의 노예생활을 한 것처럼, 그것을 '에니깽'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견딜만한데, 물론 떡뽁기 장사를 해도 괜찮고 말이다. 왜 그런가? 자기의 역사를, 즉 자기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자기가 서울대를 나왔는지, 아니면 이화여대를 나왔는지, 그런 것을 묻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데 가면 그야말로 밑바닥에서부터 살아갈 수 있는데, 물론 그렇게 하다가 점점 성공을 하게 되면 한인교회에 기어 나오곤 하는데, 즉 "나도 이제 좀 내세울 것이 있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는 수치스러워서 한인교회에도 나가도 않고, 현지인들이 다니는 교회에 그냥 묻혀있다는 것이다.

◈ 악마 - '수치스럽지? 그렇지?'

그러니 인간이 무슨 행동을 하기만 하려고 하면 마귀가 따라붙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니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되면 니가 수치스러운데, 그렇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이겨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원래 죄인이거든, 왜?" 라고 해버리면 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렇지, 그게 걱정이야. 내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되면 수치스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데" 라고 하니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단지 주님 앞에서만 얼굴을 들지 못하면 되는데, 그러니 사람 앞에서 얼굴을 들고 말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마귀는 수치를 무기로 삼아서 유혹을 하는데, 그 버릇이 바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들의 수치를 가리우기 위해서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기껏해야 무화과 나뭇잎이지만 말이다.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않는가? 팔꿈치는 수치스럽지 않고, 이마는 수치스럽지 않고, 귓볼은 수치스럽지 않고, 왜 거시기가 수치스러우냐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다 말이다. 나중에 그 부분을 주님이 치마를 만들어서 입혔다고 하니(?), 분명히 하체가 부끄러웠다는 것인데 말이다. 모두가 다 같은 피부인데, 왜 그 부분만 수치스러우냐는 것이다. 발가락은 그냥 내놓아도 괜찮은데 말이다. 

◈ 이슬람의 경우에 !!

이슬람교의 골수분자인 '시아파'에 속한 자들의 경우에, 거기서 여자들이 어떻게 옷을 입고 다니는지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 여자들은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으로 칭칭 감아서 몸을 전혀 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굴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온통 시커멓게 해서 말이다. 마치 장례식을 치르는 시체처럼 말이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여자들이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날씨가 너무 더우니 말이다. 즉 햇빛을 피하는 그늘이 있어서 좋다는 것이다. 머리부터 그렇게 천으로 칭칭 감으니 말이다. (어휴, 너무 더울 것 같은데, 그것으로 검은 천으로? ㅋㅋ)

그리고 그렇게 자기 몸을 가리우게 되면 사회적으로 성화가 되었다고 보는데, 즉 아주 경건한 여성으로 대우를 받아서 좋아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대가 만든 문화가 그 인간의 성스러움과 더러움을 결정짓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 시대의 문화를 따라가게 되면 거룩한 자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속된 인간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그 안에서 자기가 못나도 괜찮다는 것이다(ㅋㅋ). 즉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든지 해도 다 가리우니 남들이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집에 가서는 벗지만, 밖에 나가서는 숨길 수가 있으니 아프간이나 그쪽의 여성들도 그리 싫어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란의 골수분자들도 그렇고 말이다. 

◈ 이슬람교에서는, 여자 자체가 곧 수치 !!

그런데 이슬람에서는 왜 이렇게 하는고 하니, 이슬람에서는 여자 자체가 수치라는 것이다. "소는 누가 키울 것인가?" 라는 코너처럼(개콘?), 여자들이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들 문화에서 왜 여자 자체가 수치인가? 즉 그렇게 수치스럽다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것은 곧 남자가 아니라는 것인데, 즉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수치스럽고 부끄럽다는 것이다. 남자보다 힘이 센 것도 아니고, 남자보다 아는 것도 없고 말이다.

여기서 여자가 남자보다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는데, 왜냐하면 여자로 태어나면 아예 교육을 시키지 않으니 말이다.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처럼 말이다. 여자는 서당에도 보내지 않았는데, 그러니 당연히 무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글자도 모르고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무식하다고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여자로서의 당연한 길이라고 보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매일같이 보는(오잉?) 신사임당의 경우에는 아주 도발적인 것인데, 왜 그런가? 만약에 그 여자가 양반집 여자가 아니었다고 하면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즉 "건방지게도 여자가 왜 이렇게 똑똑하지? 이게 어디서 까부노? 맞아죽을라고!" 라고 말이다.

◈ 페미니즘 -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 것이다' !!

그래서 소위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여성주의자들의 경우에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 것이다" 라고 하는데, 즉 여성들도 분명히 태어날 때는 여성이라는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그런데 주도권을 쥐고 있는 남자들이 여자를 여자답게(?) 만들었고, 또한 여자들은 거기에 순응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이제는 우리 여성들도 깃발을 들고 일어나자"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여성들도 얼마든지 남자들에게 못지 않게 똑똑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페미니즘 운동을 주동하는 여성 철학자들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 여성들은 마치 달과 같아서 !!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여성들이 호응을 하겠는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편한 것이 좋으니 말이다. 여기서 '편하다' 라는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여성들에게는 사랑을 받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마치 달과 같은데, 이 달을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서 반사를 시킨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보름달도 만들어지고 말이다.

그렇게 여성이라는 것은 이렇게 사랑의 주체가 점선으로 되어있는데, 그것은 누군가가 사랑을 했기 때문에 여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가 사랑을 했다는 증거로서 여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창세기 2장과도 맞는데, 즉 남자의 사랑을 받으라고 여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이 남자처럼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매일같이 사랑을 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자기가 대시를 해야만 되고, 먼저 사랑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을 받는 여성성은 없어지고, 그만 남성성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 왜 수치가 하체에 있는가? 그것은 곧 '다름' !!

지금 '수치' 라는 것이 무엇인지,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즉 왜 수치가 하체에 있는고 하니, 정답은 바로 이것인데, 즉 '다름' 이라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거기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즉 '차이성' 인데, 그런데 사실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가 서로 하체가 달랐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처음에는 왜 부끄럽지 않았는가? 이게 오늘 강의에서 어려운 부분인데, 그래서 성경은 일부러 창세기 2장에 보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넘어가면 뭐라고 하는가?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벌거벗음을 알고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서 입고, 또한 하나님이 부르시니 숨었다는 것이다.

(창 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 달라도 한 몸인데, 그런데?

그것이 바로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데, 우리가 이것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 창세기 3장을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창세기 2장 마지막에 그렇게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라는 내용을 왜 집어넣어 놓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부끄러움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주어야만, 성경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이 더욱 더 풍성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이렇게 '다르다' 라는 것이 한 몸이 되는데 방해가 되는가? 되지 않는가? 달라도 한 몸인데, 그런데 죄를 짓고 난 뒤에는 "너는 너, 나는 나" 라는 것으로 갈라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요소는 함께 있을 수 없는데, 그래서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그렇게 따로 있으면서도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요소를 가리워주어야만, 나머지 요소가 무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 잠시 50년대 여성들의 풍경을 !!

물론 남자와 여자가 다른 부위가 가슴도 있지만, 그러나 가슴은 하체에 비해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옛날에는 여자들이 결혼만 해서 아이만 낳게 되면 가슴은 거의 다 드러내놓고 살았다는 것이다. 젖도 그냥 남들이 다 보는데서 먹이고 말이다.

한복의 경우에도 상의가 얼마나 짧은지, 젖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나는 아들을 낳았다" 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보도 외국인들이 너무 신기해서 사진을 찍고 했는데, 그래서 요즘도 50년대의 그런 사진들이 있다는 것이다. 여자들이 젖을 다 드러내놓고 있는 말이다.

제가 어릴 때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하나의 문화이기에 전혀 흠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분유가 없어서 항상 젖이 필요했는데, 그러니 요즘처럼 복잡하게 무엇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이 그냥 아이가 울면 바로 꺼내서 물리면 된다는 것이다. 항상 따뜻하게 보관도 되고 말이다(ㅋㅋ). 그러니 길거리가 그냥 수유실인데, "이제 울지마!" 라고 하면서 걸어가면서 젖을 먹인다는 것이다. 물론 젖을 줘도 계속해서 울면, 한 대 얻어맞기도 하고 말이다.

특히 젖을 먹이는 여자들은 양장이 아닌 주로 한복을 입었는데, 그것도 허름한 한복을 말이다. 그렇게 한복을 입고 젖을 내놓고 다녔는데, 그것을 보고 욕을 하는 사람도 없고, 그것이 그냥 일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양장 옷이 나오면서부터 깔끔을 떤다고 아이도 바로 업지 않게 되었는데, 그러한 모습들이 아쉽게도 다 사리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도 포대기로 조카들을 업어주곤 했는데 말이다(ㅋㅋ).

◈ 예수 안에서는, 부끄러움이 없어 !!

아무튼 그건 그렇고, 이렇게 '다르다' 라는 것이 한 몸이 되는데 지장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전혀 지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지장이 없기 때문에 한 몸이 아니라, 달라도 역시나 한 몸이라는 것이다. 달라도 한 몸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 예수 안에서는 결국 무엇이 없다는 말인가?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악마가 이렇게 주님과 우리가 한 몸인 것을 깨려고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느냐는 말이다. 악마는 여기에다가 '수치' 라는 것을 심어놓았다는 것이다. 즉 "니가 그런 짓을 하면 수치스럽지? 그렇지?" 라고, 그렇게 악마가 속삭이고, 때로는 협박을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 안에서는 어떠한가? 강도의 경우에, 자기가 강도 짓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 제가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라고 했는가? 세리와 창기가 천당에 가면서, 자기들이 그런 짓을 한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했는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주님은, 우리의 고백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용서를 !!

주님의 경우에는 다른 관점에서 한 몸이기 때문에, 직업을 문제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의 외모도 문제로 삼지 않고 말이다. 일절 그 사람의 그런 포트폴리오를 보는 것이 아닌데, 그래서 제가 어제 설교하면서 뭐라고 했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그것까지도 감안해서 용서하신다고 말이다. 그게 곧 사랑이란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결심보다도, 주님의 사랑이 더욱 더 세고 풍성하고 넓고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주님의 그런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수치를 느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우리의 육적인 것을 바라볼 때 수치스러운 것이 아닌 것이 없는데, 왜냐하면 죄인이기 때문에 말이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사랑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지만, 하지만 주님의 사랑 안에 이런 수치마저도 극복되는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 _

그래서 제가 수련회 시간에 뭐라고 했는가?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하면서도, 마치 하회탈처럼 너무나 좋아서 입이 째지는 그런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면서도 말이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사랑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에 수치스러움이 없고, 또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의인이고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분명히 다른데, 달라도 너무나 서로 다른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달라도 한 몸이기 때문에, 즉 예수님은 신랑이고 우리는 신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몸이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마귀는 왜 행함은 강조하는가?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마귀는 뭐라고 하는가? "니가 그 따위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면 때려치워라!" 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하는가? 마귀는 자기가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으니 시기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즉 자기가 천국에 가지를 못하니 아예 발악을 한다는 말이다. 즉 "너거들이 완전해야 된다. 행동도 무엇을 보여주어야 한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꾸만 행함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마귀는 우리가 그렇게 하면 덜 수치스럽고 덜 부끄럽다는 것인데, 즉 나쁜 일을 많이 하게 되면 부끄러우니, 그것을 착한 일로 덮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어디 그게 상쇄가 되고 보완이 되는가? 전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지나온 과거가 있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서른 살에 사창가에 간 것이 나이 60에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그러한 부끄러움이 어디 사라지겠는가? 목사가 되어서 사창가에 가서 전도한다고 해서, 철없던 시절에 한 짓이 어디 사라지겠느냐는 말이다. 또한 고1때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선생님에게 들킨 것이 어디 사라지겠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겠다고 하는데, 그런데 왜 우리 자신은 묻고 따지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본인이 마귀에게 물들었던 그 습관과 그 습성이 그대로 솟구쳐 나오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의 내부에 마귀가 들어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 그런데, 아브라함 이후 430년 뒤에 율법이 오게 되면 !!

그렇게 율법을 주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모든 것이 의(義)이고 사랑이지만, 하지만 아브라함 이후 430년 뒤에 율법이 오게 되면, 즉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음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이 들어오게 되면, 이 율법은 어떻게 하는가?

우리 인간들이 온 천지에 율법을 지킨다고 분주해하는 그 꼴을, 그렇게 전혀 되지도 않은 꼴을, 즉 "어떻게 바르게 십계명과 율법을 지켜서 이 수치와 저주를 벗어날까?" 라고 몸부림치는 꼬락서니를 다 노출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즉 "제가 십계명에서 7개는 지켰으니, 이제 3개가 남아있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꼬라지를 말이다.

그러니 "모든 율법을 다 지킨 것이 아니면 지키지 못한 것이다" 라고 성경말씀이 그렇게 이야기해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즉 "오늘은 여기까지만 지키고, 나머지는 내일의 숙제로 남겨두자" 라고, 그렇게 자기 수치를 자기 방식대로 해소하려고 하게 되면, 그렇게 되면 점점 더 남편이 되면 예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사랑, 그 사랑의 각도에서 점점 더 벗어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중에는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주님의 사랑이 보이지 않는데, 주님의 용서도, 주님의 긍휼하심도 보이지 않고 말이다. 그것이 곧 죽음의 골짜기라는 것이다.

◈ 인간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여주는 그림자 !!

여기 교재에도 계속해서 나오지만, 그러니 인간의 죽음이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죽음이 곧 진짜 죽음이고, 다른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여주는 죽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정답이 되는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으신 그 죽음의 그림자라고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자신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을 시켜보아야, 그렇게 되어야 우리 자신의 죽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악마가 알고 있는 인간의 약점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자기 문제로 돌려놓고서 자기 힘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 다시 정리해보면 !!

교재를 보기 전에 다시 중요한 것을 정리해보면, 왜 남자와 여자의 하체가 유난하게 다른고 하니까, 한 쪽은 툭 튀어나왔고 다른 한 쪽은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있고, 없음'을 가리움으로서, 물론 그것이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옛날처럼 하나가 되기 위한 일종의 노력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그만 그것을 모두 '확' 벗겨버리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제대로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이 아니라 가죽옷을 입혀놓으시는데, 그것이 곧 '하나 됨'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려고 하지 말고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주님과 하나가 되면, 즉 주님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모두가 다 어떻게 되는가? 한 몸이 되는데, 즉 하나의 지체가 된다는 것이다. 

(고전 7: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고전 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그래서 부부의 경우에도 어떠한가? 부부이기 이전에 먼저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면, 그것이 곧 이상적인 부부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의 몸이 되면 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게 최고의 부부라고 할 수가 있는데, 물론 그것이 꼭 저의 경우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ㅋㅋ).

그렇게 한 몸이기 때문에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또 잊어버렸지 싶은데, 그렇게 하나의 몸이기 때문에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남편과 아내가 다 영광이 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부족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래서 전적으로 주님만 바라보도록 하셔서 영광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보통 가정의 경우에, 남편에 바깥에서 무슨 일을 저지르면 아내가 수치를 느끼는데, 또한 아내가 바깥에 나가서 수다를 떨면서 돌아다니면 남편이 수치를 느끼는데, 물론 그것이 주 안에서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니고, 과거에 가지고 있던 습관, 즉 자기의 행함으로 수치를 가리우려고 하는, 그런 쓸데없는 시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수치 가운데서 악마는 무엇을 주는고 하니, 수치 다음에 공포를 준다는 것이다. 그러한 공포가 어디로 가는고 하니, 결국 "니가 그렇게 하면 죽는다" 라는 것인데, 즉 "수치스러우면 공포가 생기고, 공포가 생기면 죽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죽음을 가지고 생명을 !!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이미 니 대신에 내가 죽었다" 라고 하시는데, 즉 "이것을 믿으면 너는 살았어" 라고 나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을 가지고서 생명을 설명하시는 것이 곧 예수님의 방식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있는 생명을 가지고 더 살아라" 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는 죽었고, 또 살았거든"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십자가의 죽음이고 부활인데, 그러니 십자가가 없이는 부활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항상 부활 속에 들어가면 십자가만 있다는 말이다. 즉 "이미 죽었고" 라는 것이 양 사방에 널려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미 죽었고" 라는 것을 "죽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가 곧 살아있는 자라는 말이다. 즉 "십자가 안에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해야만, 그것이 곧 산 사람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자가 영생을 받은 자이고 말이다.

◈ 그리스도 안에서는, 수치심도 공포도 사라져 !!

그렇게 '죽었다' 라는 것이 '살았다' 라는 것으로 바뀌게 되면, 공포도 없어지고 또 무엇도 사라지는가? 주님 안에서 결코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데, 즉 수치도 그만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는 심판도 없다는 것이다. 이 심판이 두려움이 낳는데 말이다. 그게 곧 요한일서 4장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요일 4: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심판을 이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는데, 그것은 요한복음 5장에 나오고 말이다. 그렇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쉽게 말해서, 우리 발로 기어간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뭔가 덮쳤다는 것이다.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 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이 뭐라고 하는가? "위에서 주지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하늘에서 생명이 덮치게 되면 "아하, 우리는 무엇을 해도 죽은 자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주 안에서 말이다.

(요 3: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 3: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저 낭떠러지 근처에서 멀어짐으로서 죽음이 사라진 게 아니다. 언젠가는 확실한 현실로 죽음은 찾아든다. 무서워서 떠는 것이 싫으면서도, 왜 죽음 앞에서 무서워 떨어야 하는지조차 인간들은 알 길이 없다.

◈ 인간은, 왜 죽음 앞에서 무서워 떨어야 하는가?

낭떠러지 근처에서는 인간은 왜 불안해하는가? 거기서 멀어지면 과연 안전한가? 모두가 같은 땅인데 말이다. 물론 앞으로 1인치라도 더 나가면 밑으로 떨어지는 것은 맞지만, 하지만 그렇게 1인치 앞으로 더 나가는 것이 왜 무서우냐는 것이다. 밑에 아무 것도 없으면 떨어지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중력의 법칙인데 말이다. 질량의 제곱에 비례하고 거리에 반비례한다는 하나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러한 법칙에 대해서는 알겠는데, 그런데 그것이 왜 무서우냐는 것이다. 그런 공식을 분해하면 그 안에 무서움이 나오는가? 그래서 과학이 문제가 되는데, 과학은 그것이 왜 무서운지에 대해서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예찬아, 고생이 많았지. 흑흑 !!

예를 들어서, 아이를 군대에 보냈는데, 그 아이가 훈련을 받는다고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얼굴이 시커멓게 타서는 첫 휴가를 받아서 집에 오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엄마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한번 설명해보라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말이다.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아이가 집으로 첫 휴가를 받아서 오는데, 그 속도가 얼마이고, 거리는 어떻고 해서, 그 엄마의 눈물을 설명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다 있는데, 왜 그런고 하니, 우리 인간은 마치 하나의 껍질과도 같아서 인간 내부에는 인간이 없고, 인간 자체가 그냥 외부라는 것이다.

◈ 인간은 껍데기만 있을 뿐 !!

이렇게 인간이 있다면 그 안이 있고 바깥이 있는데, 그런데 이 인간자체가 하나의 판이고 필름이라고 하면, 즉 껍질이라고 하면 인간은 전부가 다 각각의 외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쪽 외부와 이쪽 외부가 만나는 지점에서 무엇이 발생하는가? 감정이 생기고, 그렇게 해서 '나' 라고 하는 주체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방금 그 엄마의 경우에도, 자식이 군에 가서 고생을 하든 말든 자기는 집에서 드라마나 보고 있으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 눈물도 흘리지 않는데, 그런데 전방 2사단과 같은 곳에 가서 훈련을 받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거기는 드라마를 보는 안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환경이 다른데, 즉 전방부대라는 환경에 갔을 때, 이 엄마는 눈물이라는 액체를 흘릴 수 있는 하나의 껍질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인간이라는 말이다.

◈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

그런데 여기에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바울은 무엇인가? 하나의 껍질인데, 무슨 껍질인가? 예수 안에 있는 자의 껍질이란 말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그 어디를 가도 그리스도만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 좁고 좁은 사도바울의 몸 안에서 어떻게 깊고 깊은 예수 안의 세계가 자꾸만 튀어나오는지 말이다.

그것은 사도바울 몸의 면적이 문제가 아니라, 성령 안에 있으니 그렇다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그것이 성령 안에서는 오직 '그리스도 안' 만을 소개할 수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성령 안에 있으니 사도바울의 입에서 그렇게 복음이 나오고, 성령이 나오고, 십자가가 나오고,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도 나오고, 그런 모든 것이 이 껍데기에서 다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껍데기를 자기 힘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얼마 가지 못해서 모두 소진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목사들이 처음에는 신학교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졸업하고 나서 목회현장에서 "야, 이것은 제법 써먹을 수가 있겠다" 라고 하지만, 막상 해보라는 것이다. 과연 가능한지 말이다.

새벽기도까지 인도하면 그런 밑천이 얼마 가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에이, 괜히 새벽기도를 해 가지고, 잠도 못자고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수요예배까지 해서 6개월은 넉넉히 견딜 수가 있는데"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재탕 삼탕을 하다가 교인들에게 쫑코(?)나 듣는데, "목사님, 그건 한 달 전에 새벽기도시간에 이미 한 것인데요" 라고 말이다. 

◈ 주님의 현장에서, 하나의 증인으로 !!

그렇게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가지고 써먹으려고 하면 얼마 가지를 못해서 다 고갈이 되는데, 그런데 인간 자체가 그 어떤 현장에 있든지 간에 그리스도께서 조성하신 현장이라고 하면, 그런 세워진 현장에서 하나의 증인으로서 꽂혀있다고 하면, 그러면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누구라는 말인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두려워 말라. 니가 권세자 앞에서 있을지라도 너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즉 주님이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계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태복음 마지막 장에 보면 나오는데, 바로 이것이 제자들에게 있어서 부활의 개념이라는 말이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주님과 함께 있다" 라는 것보다 더욱 더 좋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 "주님은 나를 떠난 적이 없다" 라는 것인데, 부정적으로 하면 더욱 확실한 표현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떠난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그러나 주님은 결코 우리를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는 껍데기이니 말이다. 돼지고기 집에서 돼지고기 껍데기를 버리겠는가?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껍데기이면서도 우리 내부를 채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문제라는 말이다. 즉 "주님이여, 이 정도면 제가 복음을 많이 알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면서 떠나려고 한다는 말이다. 이제는 자기도 뭔가를 좀 채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채우면 오히려 다 토해내어야 하는데,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빈 몸으로 가면 주께서 가득 채워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죽음은 예수님에게 속한 문제이다. 이 문제해결에 나서시면서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죽음을 앞당겨 현실화시킨다. 즉 없는 데서 새로 생기는 것만 주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있는 내 몸을 엎어버리시는 것도 주님의 업무이다.

◈ 죽음도, 아버지의 말씀을 이루는 차원에서 !!

마귀가 뭐라고 하는가? "예수여, 이렇게 해야 삽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는가? "나는 이렇게 해서 죽을란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죽음을 항상 앞당기시는데, 즉 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죽으면 헛된 죽음이고, 아버지의 말씀을 이루는 차원에서 죽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죽음 안에 무엇이 들어있겠는가? "아버지의 말씀을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것이 포함된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죽음을 전혀 누수가 없이 우리가 몽땅 성령을 통해서 다 받아버리게 되면, 우리도 죽어가고 있으면서 그 안에서 무엇이 발현되는가? 주님께서 홀로 이루심이 우리의 죽어감 위에서 발산이 되니, 죽어가는 우리에게 그것이 곧 영생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11장의 "죽어도 살겠고" 라는 것인데, 무슨 뜻인가? 나사로가 그것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사로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와 마르다를 떠나서 죽었던 나사로는 사실상 주님의 바깥으로 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함께 있음을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함으로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즉 묵시세계에서 역사세계를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모세도, 엘리야도, 베드로도, 사도바울도 주님과 함께 !!

변화산에서의 모세와 엘리야도 사실은 주님과 함께 있었는데, 그런데 잠시 두 사람을 제자들의 눈에 보이도록 변화산에 등장을 시켰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는가? "나는 죽고 난 다음에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한다" 라고 했는데, 지금도 사도바울은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도 함께 있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경우에 뭐라고 하셨는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의 곁에는 아브라함이 있고, 이삭이 있고, 또 야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에녹도 있고, 모세도 있고, 엘리야도 있고, 베드로도 있고, 요한도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우리가 죽으면, 거기에 가담하게 된다는 말이다.

(마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

그때는 바쁜데, 왜냐하면 서로 인사를 한다고 말이다. 즉 "어이쿠, 성경말씀에서 뵈었는데, 여기서도 또 보네요. 반갑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서 보는데, 희미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러니 매개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때는 매개체는 이미 철수하고 직접 대면을 한다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고 직접 본다는 말이다.

바로 그 부활의 세계, 즉 펼쳐진 영생의 세계를, 처음 출발한 그 압축되고 응축된 지점으로 가보면, 그곳이 곧 십자가가 되고, 그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제대로 된 참된 죽음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십자가를 건너뛰고 영생의 세계를 탐내면 안 되고, 그 응축된 지점의 죽음 안에 예수님과 함께 같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이번 여름수련회 때 이것을 소용돌이로 설명한 것이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는데, 화평교회 사이트에 가면 수련회 노트에 이 그림이 나와있는데, 오 목사님이 수련회 때 필기한 것을 매 시간마다 일일이 사진으로 다 찍어서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비록 남의 노트지만 살펴보면 이번 수련회 때 무슨 강의를 했는지 알아 가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 복음에 빚진 자로서 !!

그러니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은 사람들이 미워서가 아니고, 진짜로 사랑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오죽했으면 "나는 복음에 빚진 자이다" 라고 했겠느냐는 것이다. 자기는 정작 돈을 빌린 적도 없는데, 그렇게 여기고 돈을 갚는 식으로, 그렇게 사랑으로 갚아주려고 온 천지를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물론 주님의 뜻에 의해서 그렇게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가? "니가 나를 미워한다. 싫어한다. 내 가치를 무시한다" 라고, 그러한 온갖 소리를 다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가 말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 너의 가치가 너에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님의 가치가 더욱 더 중요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치를 말이다.

◈ 우리교회를 언제 부흥시켜줄 거야 ??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존재한다고 하는 그 존재가치 때문에, 그것을 즐거워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어떻게 되는가? 어제 설교한 것처럼, 마치 몽둥이로 발람의 나귀를 패듯이, 즉 "나는 내 가치로 즐거워하는데, 너는 왜 방해를 하는가? 앞으로 가란 말이야. 이 놈의 나귀야!"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귀가 맞을 짓을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나귀가 버티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결국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 그 예수님을 우리가 몽둥이로 마구 패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주님, 우리교회를 언제 부흥시켜줄 거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주님은 맞으면서도 "니가 세상을 다 모르니 그런 소리를 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지금 주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면서 버티시고 있는데, "그쪽은 안 돼. 지옥으로 가는 길이다" 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우리의 주님이라고 하면서, 왜 우리의 뜻대로 해주지 않는가?" 라고 하면서, 마구 주님을 구타하고 있다는 것이다. 

◈ 마귀는, 예수님이 죽어도 사시는 분임을 몰랐기에 !!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마귀 손에 죽었다는 사실인데, 악마에 의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악마의 노출된 허점이라는 것이다. 악마는 "예수님은 죽어도 사는 분이다" 라는 것을 미쳐 몰랐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영원한 분이라는 사실을, 악마는 그것을 훼방한답시고 했는데, 그런데 오히려 그런 악마의 손을 빌어서, 그게 곧 가룟 유다인데 말이다. 그런 사탄의 손을 빌어서 주님께서 승리하고 말았으니, 마귀는 이제 자기가 일을 더 저질러놓았다는 것이다.

◈ 주님께서는, 마귀마저도 멋드러지게 !!

무슨 말인고 하니까, 예수님을 주 되게 하시는데, 악마는 본의 아니게 그만 더 협조한 셈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마귀도 귀한 역할인데, 이렇게 마귀마저도 주님께서는 멋드러지게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소위 신앙이 있다고 우기는 사람들을 마귀가 역사해서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도, 물론 진짜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마귀가 역사하는 가운데도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기 믿음으로 자기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주께서 하셨다는 사실이 능력이 됨을, 그게 차후적으로 성령을 통해서 믿어지게 하신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70페이지를 살펴보자.

** 죽은 현상이 없으면 사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생명을 말하기 이전에 죽음부터 말해야 한다. 순서가 그러하다.

(고후 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함이라

여기 마지막에 보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함이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죽을 것이 먼저 있어야 하고, 그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가 되어서, 비로소 생명이 되는 방법이라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 고린도후서 5장 4절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나님 일의 컨셉은 인간에 대한 '완벽한 무시'이다. 흔히 죽어있다는 것은, 이미 시체로서 물질이나 사물체로 전환되어버린 것을 연상한다. 따라서 외부에서 아무리 큰 소리로 부르고 흔들어 깨워도 깨어나지 못하는 무생물로 인식한다.

**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음이란, 비록 꼼지락거리고 부지런히 신을 찾고 경건한 생활에 매진해도, 그 도달점이 자기 자신에게로 귀환되는 현상이 일어나면 다 죽은 것이다. 즉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면 다 죽은 것이다. 달리 말해서 죄가 있는 곳에 죽음이 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러니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인간들의 사망현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들의 죽음은 이미 죽었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절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이미 죽었음을 다시금 확인하고 보여주는 절차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죽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있기에 죽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재에 계속해서 나온다는 말이다.

계속 교재를 살펴보자.

**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사망 현상은 이왕 죽었다는 현실의 엄연한 확인 현상에 해당된다. 모든 것이 쇠퇴하고 부패하는 절차일 뿐이다. 평생을 살아도 수고와 슬픔뿐이다. 인간의 본질은 행복한 웃음이 넘쳐나는 결혼식장이 아니라, 장례식장이다.

(전 7: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전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전 7: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전 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

우리 인생은 평생을 살아도 수고와 슬픔뿐인데,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러한 수고와 슬픔을 행복으로 바꾸기 위해서 아주 극단적인 방법으로 이 세상의 모든 지혜와 철학을 다 동원시킨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불교라는 말이다. 그런 불교에서 만든 것을 '절(卍)' 이라고 하는데, 요즘 한국교회가 절이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모든 것을 귀환시킨다는 말이다. 물론 마귀가 만든 단체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고 하니까, 행복한 웃음이 넘쳐나는 결혼식장이 아니라 오히려 슬픔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장례식장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전도서 7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즉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이 아무리 이런 이야기를 해도, 우리는 솔직히 어디가 더 좋은가? 잔치집에 가서 "아이쿠, 신부화장이 참 잘나왔네" 라고 하고, 또한 "이렇게 멋있는 신랑이 다 있다니, 우리 딸도 이런 신랑을 만나야할 텐데" 라고 하면서 수다를 떠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장례식장에 가서는 말도 한 마디 하지도 못하고 그냥 있는 것보다도 말이다. 거기서 괜히 엉뚱한 소리를 했다가는, 분위기 파악도 못한다고 하면서 핀잔이나 듣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장례식장보다는 결혼식장이 훨씬 더 좋아하는데, 그래서 결혼식장은 일가 친척들도 많이 오지만, 장례식장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례식장은 죽은 사람을 보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안면을 보고 체면치레로 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 전도서 7장 2절에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 뒤에 보면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장례식장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란 말이다. "나도 웨딩 드레스를 입고 예쁠 때가 있었다" 라고 하면서 자기 모습을 회상하지 말고, 장례식장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청춘 남녀의 결혼예식의 화려함 속에도, 장례식의 슬픔은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다. 한 때의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다는 것이 결코 시신의 흉측함을 대신할 수는 없다. 진실이 가장 진실답게 다가올 때가 인생에서 제일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한다면, 그 순간은 장례식의 주인공으로 시신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유사한 건강으로 회칠을 하면서 지루한 인생을 지탱하려고 해도, 진실은 죽음을 가지고 다가온다.

◈ 과연, 인생에서 제일 아름다운 순간은?

도대체 예쁜 시체가 어디에 있겠는가? 얼굴에 화장을 진하게 해서 그렇지 말이다. 진실이 가장 진실답게 다가올 때가 인생에서 제일 아름다운 순간인데, 아름다운 순간이 진실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거짓됨이 날아갈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죄로 인해서 죽어있는 모습인데, 그때가 제일 아름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 가장 적합하고도 최후로 노출된, 즉 모든 반창고가 다 떨어져버린, 그런 진짜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참, 내가 이렇게 되려고 한 평생을 그렇게 발버둥을 치면서 살아왔던가?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내가 이렇게 되려고 그렇게 살아왔던가? 내가 그때 수도요금을 깎고 한 것도 다 이렇게 되려고 했던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짜 진실은 무엇인가? 그냥 진실이 진실이 아니라 죽음을 가지고 다가온다는 것이다. (아, 최진실 !!)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내가 없어진다는 것, 정말 불쾌하고 기가 찰 노릇이다. 이렇게 손에 잡히는 '나'가 없어지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태다. 내가 없어지면 나를 어디에서 찾는가? 어디에 있는가? 대책이 없다는 점이 불쾌감을 더욱 가중시킨다.

◈ 니가 없어져야 내가 있지 !!

그러니 "너도 있는데, 왜 내가 없는가?"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가장 기가 찰 노릇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평생동안 살아온 것이 무엇이 되는가? 그야말로 헛고생이고 헛수고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니가 없어져야 내가 있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예수님이 계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동안 누가 누구를 가렸다는 말인가? 우리 자신의 옹고집이, 우리를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의 있음을 철저하게 훼방하고 가렸다는 것이다. 마치 결혼식장에서 신랑을 드러내어야 하는데, 그런데 신부가 신랑을 가리고는 혼자서 다 폼을 잡는다는 것이다.

여기 교재에서 "내가 없어지면, 나를 어디에서 찾는가?" 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누구라도 답변을 한번 해보라는 것이다. '나' 자신이 없으면, 그런 '나'를 찾을 사람조차도 없어지는데, '내'가 없다면 말이다. 하지만 찾는 분이 있는데, 그동안 '내'가 '나'를 위해서 공을 들인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고, '나'보다 더 '나'에게 공을 들였던 분이 '나'를 찾는데, 그러면 '나' 라는 것은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 가는 자아가 누구인지 알았지 싶은데, 예수님께서 살려주신 '나' 라는 것이지, '내'가 살려놓은 '나'는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죽도록 예수님을 믿은 그 나가 아니고, 주께서 예수님을 믿게 한 '나'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내'가 '나'를 지키려고 그렇게 몸부림을 치니, 힘만 든다는 것이다. 영광도 되지 않고 말이다.

주님께서 살려낸다고 하는데 무슨 똥고집이 그렇게 센지, 기어이 자기가 자기를 살리겠다고 하면서 억지를 부린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가? 감사도 없고, 기쁨도 없고, 기도도 없고, 그저 자기 행함만 마구 내밀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제가 이렇게 이렇게 행했으니, 나를 구원해주어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라고, 그렇게 천국에 보내달라고 주님에게 땡깡만(고집만?) 부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가? "주님, 왜 저의 뜻대로 해주지를 않습니까?" 라고 하면서, 몽둥이를 가지고 주님을 패기만 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를 하면 !!

다시 정리를 해보겠는데, 천국에 가는 '나'는 누구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살려놓으신 '나' 라는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초등학교에 다니게 하셨고, 어떤 아리따운 여인과도 결혼하게 하셨고, 또한 오늘 아침에도 밥을 먹게 해주셨고 말이다. 물론 주님은 우리의 발걸음도 세시는데, 머리카락도 물론 뒤쪽에는 빠지고 없지만 그래도 앞쪽에는 길러주셨다는 것이다(ㅋㅋ). 바로 그분이 '나'를 천국에 데리고 가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이 땅에 태어나고, 학교에 다니고, 또한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밥을 먹는 것도 역시 '나'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나죽으나 어디까지나 주의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말씀을 떠나서 이 세상적으로 보게 되면 참으로 기가 막히는데, 즉 "내가 없어지면 나를 어디에서 찾는가?"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분해서 죽지 못한다 ??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서 "분해서 죽지 못한다" 라는 말이 있는데, 즉 자기 돈을 떼먹고 도망간 놈이 있다고 하면, 그 놈을 때려잡지 않고서는 도저히 눈을 감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옛날에 딸을 둔 부모들이 뭐라고 했는가? 딸이 시집을 가는 것을 보지 않고서는 눈을 감지 못한다고들 했는데,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서 최근에 어떤 젊은이들은 어떻게 했는고 하니, 자기들의 억울함을 풀기 이전에는 도저히 죽지 못하겠다고 버티다가, 결국에는 자기들의 억울함이 풀릴 가능성이 전혀 없으니 그만 다같이 자살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우리들은 결코 그 돈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너무나도 억울합니다" 라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의 고귀한 역사를 자기 힘으로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고 여겨서, 결국 그렇게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역사자체가 곧 죄의 역사인데, 굳이 지킬 이유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가족과 친지들이 죽은 나의 시신을 묻고서는 (혹은 인골을 뿌리고서는) 서둘러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연상해보면, 평소에 그들과 친밀하게 대화하면서 그 속에서 '나'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찾고자 했던 그 모든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가 실감이 날 것이다. 불쾌한 것은 빨리 잊는 것이 상책인가? 피 이야기도 예외가 아니다. 불쾌하다.

◈ 이제 끝났다. 돌아가자 ??

무슨 뜻인가? 장례식을 다 치르고 나서, 즉 시신을 관속에 넣어서 묻고 난 다음에 돌아가는 뒷모습이 어떠하냐는 것이다. 그냥 손을 툴툴 털고 내려가는데, "이제 다 끝났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삼일 뒤에 와서는 묘지가 잘 만들어져 있는지, 그것만 다시 확인하면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죽은 자가 그런 뒷모습을 보았다고 하면 관속에서 벌떡 일어나지 싶은데(ㅋㅋ), "이 놈들아, 거기에 서지 못해. 이런 나쁜 놈들 같으니라구!"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죽었으니 일어날 수가 없겠지만 말이다. 또는 "수고했데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제가 결혼식도 많이 주례를 했지만 장례식도 엄청 많이 치르고 했는데, 박사교회에서 정말이지 많이 했다는 것이다. 17번인가 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장례식을 하면 눈은 왜 그렇게 많이 오는지, 그리고 여름에는 왜 그렇게 덥던지, 날씨가 좋을 때 죽는 법이 없었다는 것이다(ㅋㅋ).

한번은 어느 집사님의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영천의 그 산골짜기에 상여가 가는데 땅이 얼었다가 녹아 내리는 바람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는 말이다. 또한 눈이 부슬부슬 오니, 상주를 비롯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참석한 사람들의 바램이 무엇인고 하니까, 빨리 장례식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망자에 대한 예의고 뭐고 간에 그런 것이 없는데, 물론 집에 가면 생각이 나겠지만 말이다.

◈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되풀이 !!

그런데 문제는 이웃사람이나 자기가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도 역시 똑같은 죽음이란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왜 그렇게 일찍 잊는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성령께서는 그렇게 일찍 잊어버리지 말라고 예수님의 죽음을 되풀이해서 우리에게 적용을 시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죽음을 잊지 말라. 너를 위해서 내가 죽었다. 그런데 마귀에게 속아서 수치스럽다든지, 부끄럽다고 하지를 말고, 이제는 당당하게 이 세상에 나가서 살아라.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 제발 너 자신을 스스로 협박하지 말고, 또한 스스로 심판하지 말아라. 너의 죄 값을 내가 다 치렀다" 라고, 그렇게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가지고 다가오셔서 감사와 기쁨이 넘쳐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이런 죽음에 모든 사람들이 다 싫어한다, 물론 피에 대해서 불쾌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죽음이 연상되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죽음을 대신에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생명이 넘치는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말한다는 것은, 생의 의지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된다. 사람들은 죽음 대신에 다른 것을 말하고 싶어한다. 하나님, 예수님, 삼위일체, 선교, 교회부흥, 병 나음의 기적, 결혼, 합격, 승진, 사업, 직장, 날씨, 스포츠, 연예계의 소식 등등, 이런 화제는 부담을 주지 않는다.

왜 이런 것이 부담이 되지 않는가? 이런 것들은 일단 살아있는 사람들의 활동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것이 아니라 누가 몹시 아팠다든지, 혹은 사업에 실패했다든지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것은 가능하면 숨기려고 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 대신에 누가 아팠다든지, 사업에 실패를 했다든지, 이혼을 했다든지, 시험에 낙방을 했다든지, 실직을 했다든지, 누구에게 봉변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가능한 한 감추려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듣는 자들이 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살기에 부적절한 자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 소리를 하면 듣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살기에 부적절한 자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너무 그런 것에 치중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면, 그런 자들은 '허무주의자' 라고 욕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교재 173페이지를 살펴보자.

** 살아있음을 사적인 운명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대자연과 더불어 공동체적으로 살아있음으로 알았던 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죽음의 위치를 마을의 중앙지역으로 잡았다. 망자의 세계를 중심으로 한 채, 산 자들이 그 망자의 사라진 성스런 지역을 감싸안는 형식으로 마을의 가옥구조가 짜여진다. 망자의 지역을 또 다른 세계로 통하는 입구로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가족의 선산으로 삼은 것도 같은 이치이다(창 23장)

◈ 고대인들은 공동묘지를 중심으로 !!

여기에 "고대인들은 죽음의 위치를 마을의 중앙지역으로 잡았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문화인류학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즉 옛날 고대인들이, 또는 미개인들이, 아니면 수렵생활을 하는 자들이, 그것도 아니면 소규모로 정착생활을 하는 화전민들이 자기 마을을 만들 때, 그들이 죽음에 대해서, 즉 종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런 관점으로 그들의 마을을 찾아가서 탐험하고 연구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조사해보면 그들의 공동묘지가 어디에 있는고 하니, 물론 우리의 경우에는 산 사람들이 있는 곳을 벗어나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이다. 귀신들만 모여서는 사는 곳인데, 그러니 밤에만 활동하고 낮에는 조용하다는 것이다. 산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은, 낮에는 활동하고 밤에는 자는데 말이다. 그런데 고대인들은 그것이 아니라 공동묘지가 이렇게 마을의 중앙에 있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공동묘지가 잘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간 것은 근세에 들어와서인데 말이다.

◈ 꽃보다 아름다운 세계 !!

제가 지난번에 유럽을 갔을 때, '길강(?)' 이란 곳을 가보았는데, 여기는 오스트리아의 찰스부르크라고, 여기가 그 유명한 모차르트의 고향인데 말이다. 여기 찰스부르크에서 알프스로 넘어가는 곳에 '길강' 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거기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고, 그 호수를 건너서 교회에 가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가면 휴지도 하나 없고, 온 마을이 꽃으로 장식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특히 거기 공동묘지에 가면 항상 생화(生花)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교회에는 가기 싫어도, 이 공동묘지는 간다는 것이다. 제가 거기에 가서 일부러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말이다. 

그러니 거기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슬프고 기피할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아름다운 에덴동산으로 만들어버렸는데,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그리워하고, 그렇게 죽는다는 것이 비극이 아니라, 환희이고, 승리이고, 기쁨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하는, 그런 정신에 거기에 스며들어있다는 것이다. (녹취자 - 혹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닌지요?)

물론 교회자체도 마을의 한 가운데 있는데, 그 교회보다 더 넓은 면적을 차지는 것이 공동묘지라는 것이다. 저는 공동묘지가 그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는데, 비석도 아주 낮게 소박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름을 쓰고, 또 태어난 날짜와 죽은 날짜를 기록해놓고 말이다.

물론 거기는 천주교이니, '그리스도 안'을 '교회 안'으로 보고, 그렇게 교회 안에다 터를 잡아서 만들어놓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될 때, 죽음은 외진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친숙하고, 그리고 누구나 다 죽는다고 하는 것을 후손들에게 늘 보여줄 수 있는 교육현장이 된다는 것이다. 즉 교육을 시킬 수 있는 하나의 재료이고 증거물이 된다는 말이다.

◈ 그것은, 동양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

그렇다면 고대의 동양인들은 어떻게 보았는가? 동양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고대의 마야문명을 보면, 여기에 부락이 있다고 하면, 짚을 가지고 만드는데 말이다. 그 마을의 중앙에 항상 공동묘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고 하니, "죽은 조상덕분에 우리가 산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불신자들의 경우에 설과 추석을 제외하고도 일 년에서 제일 중요한 스케줄이 무엇인가? 바로 제사인데, 그들이 왜 제사를 강조하는가? 제사를 자주 드리면 드릴 수록 조상의 은덕을 많이 받고, 즉 사업이나 여러 가지 일들을 조상님들이 도와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사를 소홀히 하면 조상님이 화를 내어서 되는 일도 안 되게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 의하면, 귀신이 49일 동안 안 떠나고 버티고 있다고 해서, 그래서 49제(祭)를 드린다는 것이다. 더 이상 여기 구천을 떠돌지 말고 빨리 좋은 곳으로 가라고 말이다. 즉 더 이상 이 세상에서 귀찮게 하지 말라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곧 '49제(祭)' 라는 말이다. 물론 보낼 때는, 좋은 곳에 잘 가라고 정성껏 제사를 드려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교에는 무엇인고 하니까, 보통 조상들이 4대까지는 가지 않고 머물러있다고 보는데, 그래서 고조, 증조, 할아버지, 아버지까지 제사를 지내주어야 자손에게 해악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본다는 말이다. 그러니 조상은 죽어서 후손들에게 해악도 되고 복도 되는데, 그래서 살아있는 공동체로서 유지를 하겠다는 의도가 강하다는 것이다.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가 말이다.

물론 요즘은 상당히 사회적 의미가 있어서, 그런 제사가 없으면 형제간에도 서로 얼굴을 볼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도 추도예배를 핑계삼아서 형제들끼리 만나곤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만날 일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이 안타까운데, 그래서 형제들끼리 친하게 지내라고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것도 하지 않으면 부모로서 특별히 할 일도 없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일년에 적어도 3번은 모이게 되는데, 추석과 설 때에 모이고, 그 중간에는 추도예배로서 한번 더 모이고 말이다. 아무튼 부모는 자식들이 자주 만나고 해서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가족 구성원으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 범위가 더 넓어서, 대 자연과 더불어서, 심지어는 죽은 사람과 더불어서 '대동제' 라고 해서, 그 마을에 복이 내리도록 늙은 고목이나, 혹은 조금 이상하게 생긴, 그런 비틀어진 나무가 있으면 거기에 새끼줄을 걸고는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 죽은 자와 더불어 사는 것이 곧 종교 !!

그러므로 옛날에는, 그렇게 죽은 자와 더불어 사는 것이 곧 종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차라리 죽음을 긍정해버리자" 라는 것인데, 그렇게 죽은 자와 더불어 살아감으로서 죽음에서 오는 공포를 해소하려고 애를 썼다고 하는, 바로 그것이 지금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것이 곧 조상숭배이고 추도예배라는 것이다.

그러니 추도예배를 드리면서 엄마가 "야야, 너거 아버지를 잊으면 안 된다. 아버지의 은덕을 조금은 기억해라" 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아버지를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렇게 혼자 고생하면서 살고 있는 이 엄마를 기억해다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창세기 23장의 '막벨라 굴'의 경우에 !!

그런데 여기 교재에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장지인 '막벨라 굴'을 언급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막벨라 굴에 시체가 차곡차곡 모여지는 것처럼, 그런 느낌이 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막벨라 굴에 누가 들어가는가? 아브라함이 들어가고, 이삭도 들어가고, 야곱도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요셉이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서 애굽에서 해골이 되어서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요셉은 나중에 세겜에 묻히지만 말이다.

(창 23:19)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창 23:20) 이와 같이 그 밭과 그 속의 굴을 헷 족속이 아브라함 소유 매장지로 정하였더라

아무튼 막벨라 굴이든 세겜이든 간에, 그것들은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에 있는 장소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막벨라 굴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죽음보다 더욱 더 센 힘으로 이끌고 있음을, 즉 "죽음도 이긴다" 라고 하는 것이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도 있었다는 말인가? 없었다는 말인가? 당연히 있었다는 것이다.

◈ 힘들어도, 조금만 더 참으시고 !!

이런 것이 어려운데, 힘들어도 조금만 참고, 그런데 언약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현재에 있는 자리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 죽은 조상과 같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간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언약은 현재 있는 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를 떠나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디로 말인가? 막벨라 굴로 말이다.

그렇다면 이 막벨라 굴은 도대체 무엇인가? 언약을 주신 여호와의 자리인데, 즉 천국이라는 것이다. 주의 자리라는 말이다. 그것이 창세기 28장에 보면, 꿈에 야곱이 보니 사닥다리가 하늘 꼭대기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창 28: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창 28:11)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창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 왜 요셉의 해골을 애굽에서?

그러니 요셉의 경우에, 그의 해골을 모세가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애굽에서 그렇게 총리대신으로 떵떵거리면서 살았던 요셉의 인생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 언약의 나라에서, 즉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본격적으로 제대로 된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요셉의 삶이라는 것이다. 언약의 나라인 천국에 말이다.

그러니 요셉의 해골은 애굽에 두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약속이 있던 자리로 가야 하는데, 그게 무슨 약속인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했던 약속인데, 바로 그 언약이 있던 자리로, 즉 약속의 땅으로 해골을 가지고 와야한다는 것이다. 

(출 13:19)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의 해골은 어디로?

그렇다고 하면, 지금 저와 여러분의 해골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성령을 통해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날마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막벨라 굴이 무엇인가? 즉 메시야가 죽었던 자리가 어디이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막벨라 굴이 지금 눈앞에 있는데, 누가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막벨라 굴에 참여하게 되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갈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갈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강도를 보고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시는 것인데, "강도야, 내가 살려줄까? 풀어줄게. 그러니 앞으로는 강도 짓을 하지 말라" 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너도 죽기는 죽어야 돼. 하지만 죽고 난 뒤에 낙원에 가는 거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옆에 있는 강도는 뭐라고 하는가? 겁을 먹고는 "나는 죽기 싫어. 제발 살려줘. 살려주면 메시야로 인정해줄게"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살았고 !!

그러니 하나님의 부활의 언약 앞에서 이미 우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살았는데,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살았고" 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께서 살려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세상적으로 살아가면서 우리의 힘으로 수치를 가리고, 또한 잘난 척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하지만 십자가와 복음을 생각하면서 죽은 것도 유익하다고 하는 것을, 즉 죽는 것도 주님의 뜻이라고 하면, 주님의 껍데기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세계인 십자가를 증거하는, 그런 주님의 종으로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08,28 오후 10시에 마침.

                                                       임 집사님 덕분에 유명인사가 되겠구만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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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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