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50강 죽음과 몸

피/피 2012. 8. 29. 10:28

피50강 죽음과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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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50강 죽음과 몸

[11 대구강의 12] - [피 50] - 죽음과 몸
                                                                                
                                                   11,07,0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65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도 부정(비거룩)의 경로를 통과하지 않고 출생한 자는 아무도 없다. 인간의 출생자체가 육적 더러움의 작품이다. 이 더러운 여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지 않으려면 다음과 같은 의식이 행해져야 한다.

(레 12:6) 자녀간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거든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년 된 어린 양을 취하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취하여 회막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레 12:7)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자녀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 죄를 품고 있는 율법 !!

이것이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되는 말씀인데, 즉 여인이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를 낳는 과정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 더럽다는 것을 주님께서 길목을 지키면서 지적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 주님 : 니, 아기를 낳았지?
* 인간 : 예, 낳았습니다.
* 주님 : 이제 너는 약속의 땅에서 못산다.
* 인간 : ???
* 주님 : 니가 더러운 것을 낳았잖아.
* 인간 : 예.
* 주님 : 그렇다면 이 깨끗한 땅에서 더러운 것과 살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지?
* 인간 : 주의 약속이 임해야 합니다.
* 주님 : 옳지. 잘 아네.
* 인간 : 감사합니다.
* 주님 : 주의 약속대로, 레위기의 말씀대로, 모세언약대로 제사를 드리면 너는 정결하게 될 것이다.
* 인간 : 예,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모세언약 속에서 더러운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깨끗한 것으로 바꾼다고 하면, 그 더러운 것은 어디로 가있는가?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방을 하나 청소하더라도 더러운 먼지는 다 털어서 쓰레기통으로 넣어야 하는데, 마차가지로 그 더러운 것이 어디로 가있느냐는 말이다. 지금 모세율법을 가지고 깨끗하게 했기 때문에, 더러운 것은 율법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율법의 완성이 십자가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의사의 경우에는 환자의 병을 담당하는 것이 아닌데, 즉 감기에 걸린 환자가 왔을 때, 의사가 그 감기를 자기가 가지고 가서 환자를 낫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 약을 골라주어서 자생력을 키우게 한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해야 !!

그런데 사람은 자기를 깨끗케 했다면 그 깨끗케 한 것에 그만 스톱이 되어서, 자기를 더럽게 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구원론적 입장에서 성경을 보는 방법인데, 하지만 예수님의 입장으로 보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 구원론적이 아니라 "아하, 예수님이 나의 죄를 가지고 가신 것이 확실하구나. 그것이 곧 예수님의 죽음이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모든 성경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모세율법도 그렇고, 그 뒤에 나오는 모든 언약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새언약도 그렇고 말이다. 도대체 사람들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의미로 율법이 주어졌는데, 그런데 이것을 계속해서 반복하다가보면 그만 이제는 율법에 대해서 시큰둥하게 되고, "나도 율법에 대해서 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속에서 계속해서 죄가 나오게 되는데, 그런데 10년 전에 한번 용서를 받았다고 해서, 그렇게 자기는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 자기에게만 관심을 둔다는 말이다. 그렇게 오직 자기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을 '방종', 혹은 '막산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에만 관심을 두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주님께서는 어떻게 이 일을 처리하시는고 하니, 우리 가운데 사건을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우리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나는 전에 죄 용서를 받았는데, 왜 이런 어려운 일이 생기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 그림으로 다시 하면 !!

다시 하겠는데,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예수님께서 여기에 계시고 우리가 여기에 있다고 하면, 율법은 예수님과 같이 있는데 말이다. 그 율법이 와서 우리 죄를 가지고 가는 경우에, 우리에게는 죄가 없어지면서 죄는 율법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거룩한 율법이 죄를 품게 되니 조금 이상하지 않는가? 거룩한 율법이 죄를 품게 되면, 덜 거룩인가? 아니면 거룩이 깨어지는 것인가? 깨끗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율법이 그만 망쳐지는 것인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즉 우리의 죄를 율법이 가져가게 되면, 졸지에 우리는 깨끗하게 되지만 율법은 더럽게 되는 것인가? 선한 율법인데 말이다. 그 선한 율법이 악한 율법이 되었는가?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율법 안에 무슨 장치가 있다는 말인가? 율법 안에는 죄가 들어와도 그 죄를 의로 바꾸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기능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 안에, 즉 말씀 안에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는 것이지 단독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율법 안에는, 죄를 의로 바꾸는 기능이 !!

그렇게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죄를 의로 바꾸는 기능이 그 안에서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려고 하면, 우리에게서는 계속적으로 죄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율법 안에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아놓고는 다시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 버리는데,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주변에 사건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의 본색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의인이고 나는 바르게 살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힘든 일이 일어나는가?" 라고 불평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 주님께서는 "니가 율법에 대해서 해석을 어떻게 했는지 다시 한번 되돌아봐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잠시(?) "아하, 그렇군요"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죄를 가지고 간 모습에 대해서, 율법의 완성이 예수님이니 그 율법을 새언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렇게 율법이 우리 죄를 가지고 갔으면, 우리는 눈꼬리를 우리 자신에게 돌리지 말고, 우리 죄가 율법 안에 있음에 대해서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 죄가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의가 되는 것에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나는 죄가 없다. 빠이빠이!" 라고 하면서 눈길을 주지 않고서 자기 나름대로 가버리게 되면, 그 뒤에는 고무줄이 달려있어서 우리를 잡아당기게 되는데, 즉 사건을 일으켜서 "너의 자리는 그곳이 아니고 바로 여기 이 자리야" 라고, 그렇게 주님께서는 사건을 일으켜서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 사건이 무엇인고 하니, "너의 몸은 너의 몸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다" 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을 작업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 모든 문제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말이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렇게 죄를 지을 때마다 사건을 일으키고 하지 말고 한꺼번에 해결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라고 질문을 할 수가 있는데, 그렇게 한꺼번에 처리하는 방법이 교재 167페이지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교재 167페이지를 한번 찾아보자.

** (4) 죽음의 의미 - 죽음의 의미는 두 가지 요소의 결합이다. 내가 죽게 된 것과 내가 누구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의 결합이다. 인간은 누구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기 이전까지는 아직 죽음의 의미를 모르게 된다. 

거기 제목이 무엇이라고 되어있는가? '죽음의 의미' 라고 되어있는데, 바로 이 부분을 이종분 집사님의 남편이 돌아가시기 전에 읽고, 그렇게 죽음에 대해서 정리하시고 아주 흐뭇하게 여기셨다고 하는데, 물론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옆에서 간호하면서 지켜보던 집사님이 그렇게 저에게 이야기를 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말이다.

◈ 죽음의 의미 !!

여기 교재에 나오는 죽음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은 죽을 때가 되어야만 비로소 자기의 본성을, 즉 살아있을 때는 미쳐 몰랐던 말이다. 그렇게 자기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기의 모습을 알겠다고 하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으로 죽음의 세계에 그냥 끌려 들어간다는 것이다. 진짜 자기 모습을 말이다.

그럴 경우에 성도의 모습은 어떠한고 하니, 바로 '쉼'이 되는데, 그것이 진짜 자기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기 이전에는 무엇인가? 쉬지를 못한다는 것인데, 왜 그런가? 진짜 자기 모습은 죽음인데, 그것을 애써서 부인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니야. 아닐 거야. 나는 살아서 마땅한 존재야" 라고 우겼던 감격이 있었기에 말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보는 것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그 차이점, 바로 그 차이점으로 인해서 우리는 발악을 하고 아우성을 치면서 한 평생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자에게는 바로 그런 감격을 없앰으로서, 우리는 처음부터 어떻게 되는가? 우리 몸이 우리 몸이 아니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그러니 죽는 것도 주님의 것으로서 죽는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을 때만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도 당연히 주님의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살아있다고 얼마나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는데, 즉 "이 살아있는 몸은 나의 것입니다. 저 인간의 몸은 저 인간의 것이듯이, 내 몸은 내 것입니다" 라고 말이다.

◈ 인간의 몸은 기호(記號)이다 !!

여기서 어려운 표현을 하나 하겠는데, "인간의 몸은 기호이다" 라고 말이다. 이것을 설명해드리겠는데, 여기서 말하는 기호는 문자와 언어가 다 포함이 되는데, 상징으로서 말이다. 물론 이런 그림도 포함이 되고 말이다. 그렇게 "인간의 몸은 기호이다" 라는 말을 여러 사람들이 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즉 여기에 담긴 취지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몸은 몸이 아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인간은 몸은, 즉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라는 말이다. 즉 자기 몸은 자기 몸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어서 하나의 기호라는 것이다. 즉 일종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호' 라는 것을 '껍데기' 라고 보면 제일 쉽지 싶은데, 즉 "내 몸은 하나의 껍질이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껍질이라고 하면 그 다음에 무엇이 튀어나오겠는가? 껍질이 아닌 알갱이는 무엇인지, 그것이 궁금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 몸의 알갱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권력' 이라는 것이다.

◈ 우리의 몸은 '부표(浮漂)'와도 같아서 !!

다음과 같은 예가 제일 쉽지 싶은데, 여기 강에다가 부표를 하나 띄운다는 것이다. 스티로폼에 깃발을 하나 꽂아서 말이다. 강이 아니라 수조라고 하면, 그런데 이 수조에 계속해서 물을 붓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물이 차면 당연히 이 부표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물이 빠지면 내려가고 말이다.

바로 이러한 부표를 우리의 몸으로 보자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 부표는 하나의 상징이고 기호이니까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부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증거하기 위해서 떠있는 것이 아니라, 물의 높이가 어느 정도 되는지, 바로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깃발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하듯이 우리 몸은 우리 몸을 알리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를 떠오르게 하고 가라앉게 하는 것은 바로 자기 밑에 있는 어떤 권력이 있어서, 그 권력이 올라오면 자기도 폼을 잡고, 그 권력이 내려앉게 되면 같이 쭈그러진다는 것이다. 즉 조금 일이 잘 되면 "나는 역시 이 정도는 되어야지" 라고 하면, 일이 꼬이면 "인간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 한 달에 100만원을 번다고 하면 !!

그 권력을 쉽게 말하면 욕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나' 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욕심에 따라서 늘 바뀐다는 것이다. 한 달에 100만원을 번다고 하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100만원을 버는 것을 가지고 무슨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할지 몰라도, 나이가 60이 넘어서 한 달에 100만원을 벌면 주위에서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60대 아줌마를 누가 100만원을 주고 고용하겠느냐는 말이다.

물론 20대나 30대에 100만원을 준다고 하면 회사를 뛰쳐나가겠지만, 그들은 최소한 300만원은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 60이 넘어서 100만원을 번다고 하면 "야, 아직도 내가 가치가 있네. 내가 보통 아줌마가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도, 인간의 마음이 참 간사한데 말이다. 자기는 그렇게 100만원을 받고 즐겁게 일을 하는데, 그런데 누군가가 낙하산을 타고 와서는 똑같은 일을 하는데 300만원을 준다는 것이다. 졸지에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 부표는 그대로 가만히 있는데, 그런데 똑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이 300만원을 받으면 살짝(?)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이전에는 "하나님, 이 정도면 만족합니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자기 주위에다 이런 저런 사람을 둘러버리게 되면, 자기는 그야말로 졸지에 완전히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100만원을 그대로 받고 있는 것인데도 말이다.

◈ 인간은, 욕망이 아닌 권력구조에 의해서 !!

이것이 바로 '대비' 라는 것인데, 심리학에서 말하는 '착각'이고 말이다. 왜 우리가 어떤 그림을 보게 되면, 똑같은 것인데도 하나는 길어 보이고 다른 하나는 짧아 보이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자기 주위에 꼬부라진 것들이 있으면, 자기는 아무리 반듯하다고 해도 다같이 꼬부라져 보인다는 것이다. 눈의 착각으로 인해서 말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인간의 몸은 하나의 기호인데, 그런 기호는 사적인 욕망에 의해서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권력의 구조에 따라서 하나의 포인트를 차지하는, 그런 기호에 불과하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 혼자 산 속에 있을 때는 자기가 도사이고 천사처럼 여겨지는데, 하지만 노래방에 가보라는 것이다. 남들은 모두 다 3곡씩 부르는데, 자기는 노래도 모르고 해서 겨우 한 곡만 부르면, 그 도시는 그야말로 짜증나는(?) 도사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말이다.

◈ 왜 생명나무와 선악과인가?

처음부터 그런 것이 바로 인간이라고 하는 증거를 대보라고 하면, 창세기 3장에서 인간 곁에 셋팅이 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생명나무가 있었고, 또한 선악과나무가 있었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에 수많은 나무들이 있었지만, 그런데 우리 인간과 셋팅이 되는 나무는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바로 이 두 종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 (그때 핸드폰 벨이 울리면서) 여보세요. 지금 강의중입니다 !!

죄송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위한 에덴동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인간을 위한 에덴동산이라고 하면, 이런 두 종류의 나무는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있더라도 중요한 나무는 아니라는 것이다. 포도나무나 배나무와 같은 것만 있어도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의 운명을 쥐고 있는 두 종류의 나무가 있는데, 이렇게 인간의 운명을 쥐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오야붕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결코 에덴동산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 주님의 군화발에 까이게 되면 !!

어제 낮시간 초반에 무슨 설교를 했는가? 우리 인간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제가 하나님을 잘 섬길 테니 제발 이 자리만큼은 손대지 마세요" 라고 하는데, 그런데 거기서 주님이 우리의 정강이를 차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면서 그만 꼬꾸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빌립보서 2장 10절에 보면 나오는데, 즉 "모든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라고 말이다. 그러니 누구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말인가? 정강이를 걷어찬 주님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이다. 주님에게 말이다.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옛날에는 군대에 가면 군화발로 촛대뼈를 까이고 했는데, 그런데 주님의 방법은 군화발이 아닌 십자가로 까버린다는 것이다. "저는 성화가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십자가에 까여서 무릎을 꿇게 되면 "이건 내가 행했습니다. 성령을 받아서, 은혜를 받아서 행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무릎을 꿇은 사람의 입에서는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런 자기 자리까지도 다 싹쓸이를 당하니 말이다. 그게 바로 빌립보서 2장 10절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 두 개의 자아 ??

그런데 행함을 강조하는 행함주의자들은 그렇게 촛대뼈를 까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김대식 집사님의 글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있는데 말이다. 주님이 야단을 치니 자기가 자기를 뒤로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야야, 걱정하지 마라. 내가 지켜줄 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죄악 된 자아는 뒤로 감추고, 앞에 나서는 것은 "주님이여, 이것을 행했잖아요" 라고 하는 식으로, 자기가 자기를 방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아가 몇 개인가? 두 개인데, 하나는 방어용인데, 즉 "회개합니다. 반성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걱정하지 마라. 내가 지켜줄 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앞에서는 십자가를 내세우면서 회개한다고 하면서도, 뒤로는 자기의 죄를 감추고서는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자기의 모습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가지고 그 감추어진 모습을 좀 보자고 하면 보여주지를 않는데, 그러면서 화를 낸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데, 그런데 주님에게서 촛대뼈를 까인 적이 없으니 무릎을 꿇을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 다시 설명을 하면 - '셋팅' !!

다시 설명을 하면, 우리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안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주변 환경에 부딪치게 되니, 자기는 자기를 지킨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자기를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기호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자기 몸 자체가 기호이기 때문에, 그 기호는 자기 말을 듣지 않는데, 즉 자기가 어느 조직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 기호는 성질이 빨간색이 되었다가 파란색이 되었다가, 그렇게 마음대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도 말했지만 '셋팅'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뭔가가 선악과와 생명나무 사이에서 셋팅이 되어있기에 주도권이 전혀 우리 인간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결정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생명나무는 천국에 가도 없어지지 않는데, 그러니 우리는 천국에 가서도 생명나무로 둘러쳐져 있는, 즉 우리는 천국에서도 역시 하나의 기호가 된다는 것이다. 어린양의 보좌에서 나오는 생명수를 마시면서 살아가는 기호로서 말이다.

그런데 그 기호가 바로 자기 몸을 위한 자기 기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슨 기호인가? 대신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기호로서 등장하는데, 바로 하나님께서는 애초부터 우리 인간을 이러한 취지로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인간을 말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라고 하는데, 누가 인간을 위로해주겠는가? 결국에는 자기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자기를 위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 하나님 → 인간 → 개미 → 벌레 !!

여기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한번 들어보면, 그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인간이 신을 믿던 부처를 믿던 그 무엇을 믿던 간에, 인간이 믿을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안에 있는 '신성(神性)'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신성이 자기 안에 있으니 그 신성보다 큰 것이 '나' 자신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보너스인데, 보너스치고는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여기 이렇게 개미가 있는데, 이 개미는 벌레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잡아먹으려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개미가 벌레를 보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역시 인간이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보는 벌레의 의미와 개미가 보는 벌레의 의미가 같겠는가? 물론 다르다는 것이다. 즉 개미는 인간이 보는 벌레의 의미는 전혀 모르고, 개미 자신의 입장에서만 벌레를 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벌레는 무엇을 하는고 하니, 자기보다 작은 벌레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벌레는 자기보다 작은 벌레를 본다고 자기가 개미에게 잡아먹힐 줄도 모르고, 거기에만 정신이 팔려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벌레의 자기 영역이고 자기 번지(자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개미는 벌레를 보고, 그 벌레는 다른 작은 벌레를 보는데, 그렇다면 그 인간은 누가 바라보고 있는가? 여기서 성령을 받은 자는 주님이 바라보는데, 하지만 성령을 받지 않은 자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성격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바라보고는 있는 것을 신도 같이 봐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신은 자기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는가? 자기가 다룰 수 있는 범위 내에 신이 있다는 것이다. 즉 "주님이여, 제가 이 개미를 밟을 수도 있지만 밟지 않습니다. 제 곁에 계시는 주님이 잘 보고 계시죠?"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보는 영역에 일방적으로 신을 잡아당긴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우상'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우상의 특징은 무엇인가? 전혀 거부감이 일어나지 않는데, 즉 거친 돌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상에게는 걸림돌이 없는데, 즉 자기의 행함을 깨는 돌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서로가 이야기하고 소통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예수님인데, 그런 예수님을 인간이 만들었고, 그것이 곧 우상이라는 말이다. 인간을 지켜보는 신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바라보는 신, 바로 그런 신을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 십자가가 등장하게 되면 - '죄', '죄', '죄' !!

그런데 여기에 난데없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시는데, 그렇게 되면 십자가로서 인간과 개미와 벌레를 모두 다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런 십자가로서 인간을 보니, 우리 인간은 말로만이 아니라 졸지에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죄가 없으면 십자가가 발생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그동안 보았던 개미는 무엇이 되는가? 죄가 되는데, 물론 개미가 벌레를 잡아먹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죄가 되고, 그 벌레가 작은 벌레를 먹는다는 것도 죄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인간이 숨쉬는 것조차도, 그런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죄가 된다는 것이다.

◈ 다윗의 경우에 !!

하지만 이것을 우리 인간은 결코 깨달을 수가 없는데, 그래서 다윗은 뭐라고 했는가? "내가 주께만 범죄했사오니"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의롭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 반성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모든 것을 주님에게 맡기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주님의 그 다음 절차가 있다는 것이다.

다윗과 바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다윗은 어떻게 했는가? 아플 때는 그렇게 슬퍼하다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옷을 아주 말끔하게 차려입었는데, 즉 "아이는 죽었고" 라고 하면서 끝내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아이는 자기가 다룰 아이가 아니라 주님이 다루시는데,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다윗 자신도 역시 그 아이처럼, 즉 그 아이를 죽이신 분이 바로 다윗을 찾아온 주님인데, 그러니 다윗 본인도 죽이고 살라고 하는 것은 누구 소관이란 말인가? 바로 그 아이를 죽인 주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식도 자기 자식이 아니라 주님이 자기를 통해서 낳은 자식인데, 바로 그 자식이 누구인가? 여디디아, 즉 솔로몬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내용이 성경말씀에 왜 들어있겠는가? "인간아, 너의 본색을 좀 알아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인간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 선악과와 생명나무와 인간과, 예수님 !!

에덴동산에 이렇게 선악과나무가 있고 생명나무가 있는데, 인간이 여기 사이에 끼어있고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선악과를 지배할 수도 없고 생명나무도 역시 지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양쪽 다로부터 추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어서 죽게 되었고, 생명나무는 따먹지 못하게 되었고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추방이 되어서 이 땅에 살아도, 이 생명나무가 있는 이상 이러한 셋팅의 조건에서 계속해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셋팅의 관여와 지배를 말이다.

그렇게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남자에게 저주하고 여자에게도 저주했는데, 그런데 또 누구에게도 저주를 했는가? 바로 뱀에게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뱀과 남자와 여자는 서로 같은 운명으로서 이 세상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뱀도 역시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뱀은 우리의 오야붕처럼 행동을 해야되고 말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뱀과 남자와 여자가 서로 같이 있는 이 세상에 끼어 들어서, 주님만이 사흘만에 탈출이 가능하고, 다른 사람들은 불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탈출하신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하심으로 말미암아서, 마귀가 마지막으로 노리는 무기를, 즉 "인간아, 너는 죽음을 모르지. 그러니 내 말을 들으란 말이야" 라고 하는 것을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죽음 뒤에도 이런 것이 있단다" 라고 하시면서 부활을 소개하신다는 것이다.

◈ 부활을 소개하시는 예수님 !!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장에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라고 하셨는데, 바로 그런 세계를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 그것이 곧 복음증거라는 말이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니 그렇게 복음이 증거되려면, 먼저 우리는 마귀 안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힘으로 벗어날 수가 없는데, 주님의 복음의 실행되는 능력이 우리의 허락도 없이 그냥 계속해서 발휘가 되면, 우리는 매일 같이 마귀를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은 무엇인고 하니, 교재 167페이지에 나오듯이 '죽음' 이라는 것이다. 죄를 짓고 난 뒤에 용서를 받고, 또 죄를 짓고 난 뒤에 용서를 받는 것이 너무 번거럽다고 하면, 그러면 한꺼번에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은 무엇인고 하니, 죽음을 알게 되면, "아하, 그게 죽음이었구나. 그러면 나는 이미 생명나무를 따먹고 살았네" 라고 하는 안심과 안도와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 강도의 경우에 !!

그런데 그게 아니라 죽음을 자꾸만 미완료로 남겨두게 되니까 불안해하는데, 그러니 장차의 죽음을 미리 당겨버리자는 것이다.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했을 때, 오늘밤까지 기다리지 말고(?),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 사람은 오늘밤이 아니라 그 순간 이미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다. 강도의 경우에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강도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오늘밤이 도대체 언제인가? 새벽 2시인가? 그때가 되어서 믿음이 없어지면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이미 그 말씀에 자기에게 적용이 되면, 즉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는 말씀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왔으면, 우리가 기다리던 말던 상관없이 이미 일방적으로 주님의 말씀이 출발해서 약속대로 성취하는 지점까지 우리를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말씀이 우선이지 우리가 전혀 우선이 아니라는 말이다.

◈ 죽음의 자리가, 인간 본연의 자리 !!

사실은 죽음의 자리가 우리 본연의 자리인데, 그런데 죽지 않는 것처럼 여기고 그 자리에서 자꾸만 탈출을 하려고 하니까, 주님은 그 자기의 자리에다가 우리를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께서 자기의 자리에 우리를 집어넣을 때 비로소 무엇이 보이는고 하니, 동대구에 가면 지붕이 열리는 나이트클럽이 있다고 하는데, 혹시 가본 분이 계십니까? (ㅋㅋ)

그런데 그렇게 지붕이 열리는 것을 보려면 그 클럽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주님의 자리에 있어야만 영생의 문이 항상 열려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어떻게 하는가? 매일 같이 도망을 치고 또 친다는 것이다.

◈ 베드로 - '울게 하소서' !!

베드로의 경우에 닭이 세 번이 울었는데, 그렇게 닭이 우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랑'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베드로의 경우에 "너의 자리는 닭 울음이라는 책망을 받아야, 그게 바로 너의 자리이다" 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그렇게 주님을 부인할 때, 닭을 준비해서 울게 해주신 주님의 그 사랑, 그게 얼마나 크고 놀라운 사랑이냐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야, 니가 나를 모른다고 부인한 그 자리가 바로 너의 자리였었어" 라고 하면서 닭이 운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진짜로 닭을 바라보면서 "울게 하소서" 라는 노래를 간절하게 불러야 하는데(ㅋㅋ), 그게 헨델의 작품이지 싶은데 말이다.

그렇게 항상 우리들 곁에는 닭이 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꼬끼요, 그 자리가 아니야, 아니야" 라고 말이다. 그러니 베드로는 닭을 우는 것을 가지고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데, 즉 "주여, 또 다시 저의 본래 자리를 찾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말이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그 자리 말이다. 바로 그 자리가 주님의 사랑을 만나는 자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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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델 - 영화 파리넬리中 '울게 하소서'
가혹한 운명과 자유의 탄식 가운데 울도록 나를 버려두오.
탄식, 자유의 탄식 가운데.
숙명은 나의 영혼을 영원한 고통 속에서 울게 하지만, 사랑하는 이여, 나를 버려두오.
자유의 탄식 가운데. 오직 자비로서 나의 번뇌를 부수고 슬픔이 사라지게 해주오.
오직 자비로서 나의 번뇌를#!J#!J#!J.
가혹한 운명과 자유의 탄식 가운데 울도록 나를 버려두오.
자유의 탄식 가운데#!J#!J#!J.
내 영혼의 고뇌를 부수고 안식을 주오.
탄식, 자유의 탄식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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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뢰침은, 땅과 벼락의 만남 !!

이번에 아프리카 우간다의 어떤 학교에 벼락이 떨어져서 학생들이 무려 23명이나 죽었다고 하는데, 그러니 보통 센 벼락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고 하니, 학교에서 피뢰침을 설치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다른 나라에서는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왜 피뢰침을 설치하지 않았느냐고 다그치겠지만, 하지만 우간다의 학교에는 피뢰침을 살 돈이 없다는 것이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우간다가 가난한 나라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피뢰침을 말하고 싶다는 것이다. 피뢰침은 알다시피 땅과 벼락의 만남인데, 그러면 피뢰침이 좋다는 것은 언제 아는가? 벼락이 칠 때 아는데, 그때 피뢰침이 없으면 벼락에 맞아서 죽는다는 것이다.

◈ 우리는 자리는, 벼락이 치는 자리 !!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피뢰침 밑으로 계속 계속해서 밀어 넣는데, 닭을 동원해서라도 말이다. 물론 닭은 자기 마음대로 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울어야 하고 말이다. 그러니 말씀대로 항상 그 자리에, 주님의 벼락이 치는 그 자리에,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다메섹의 가는 그 자리에, 또한 십자가에서 우리가 죽었던 바로 그 자리라는 것이다.

그게 요한계시록 11장에 의하면 두 증인이 죽은 자리인데, 애굽이라고 하고, 또는 소돔과 고모라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곧 십자가의 자리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벼락을 맞아봐야 피뢰침의 필요성을 안다는 것이다.

(계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
(계 11: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계 11: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이제 교재 166페이지를 살펴보자.

** 죽음이란 인간 개개인마다 붙어있는 상표와도 같다. 그 상표에 기재된 내용이 곧 인간의 운명이 된다. 이것이 인간에게 붙어있는 '이름'의 의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동일하게 하나의 이름으로만 부르신다. 그것은 사망자에게 붙는 이름이다. '아담아!' 곧 '흙아!' 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 나는 흙이다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이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있는데, 그 인간의 이마에 레떼르가 있다는 것이다. 레떼르라고 하니 표현이 좀 그러한데, 일본 사람들이 라벨을 그렇게 부른 것인데 말이다. 아무튼 '죽음' 이라는 라벨이 우리 인간에게 붙어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리스도의 인' 이라고 하는데, 즉 일찍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인이 하나의 상표로서 붙어있으면, 그 사람은 자기 본연의 가치는 다 날아가 버리고 이마에 붙어있는 상표, 즉 '예수님의 것' 이라고 하는, 즉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름을 부르시는데, 이 아담에게 '아담' 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언제인가? 물론 하나님께서 처음에 만드시면서 이름을 붙였는데, 그러면 그 아담의 의미가 언제 드러나느냐는 것이다. '흙' 이라는 의미가 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흙에서 만들었기에 '아담' 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그 이름의 진정한 본래 의미는 이 아담이 이마에 땅을 흘리면서 살다가 결국에는 죽을 때, 즉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라고 할 때, 그때 드러난다는 것이다. 아담이니 아담으로 돌아갈 때 말이다.

그러니 "나는 가수다" 라고 하지 말고 "나는 흙이다" 라고 해야하는데, 흙이니 흙의 꼴갑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흙이면서 아닌 체를 하면 안 되는데,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흙에서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흙으로서 흙의 기능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환상 속에 있지만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람이 하나님과 만난다. 그것이 곧 죽음과의 만남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논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죽어 마땅한 이유를 찾아 따지는 일이다.

◈ 십자가 안에서 늘 죽어야 !!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인데,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이전에는 자기가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자기는 인간이 아니라 흙이었음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곧 죽음과의 만남이라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이 살아있다고 여기고 하나님을 만나면, 자기 자신의 죽음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죽음인가? 물론 하나님의 죽음이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살아있어서 우리 자신과 만나게 되면, 하나님은 살아있고 우리는 죽음이 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인데,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고 할 때 말이다. 십자가가 살아있으면 자기는 살아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 안에서 늘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게 곧 십자가와의 만남이라는 말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니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함인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죽음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있는데, 더 살기 위해서 살아있는 게 아니고 말이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려줌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에 의해서 말이다.

◈ 성도의 삶이란?

이렇게 "나는 흙이다. 죽음이다" 라고 되어버리면, 자기가 죽을 때만 발견할 수 있는 그 죽음이 벌써부터 모든 생활 속에서 발휘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도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곧 성령의 삶이고 말이다. 그런 성령의 삶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고, 죽음의 삶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는 날마다 죽고, 주께서 날마다 살려내는 삶, 그것이 곧 성도의 삶이라는 말이다. 다른 성도의 삶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는 말씀으로 우리를 죽이고, 또한 그 말씀으로 우리를 살리는데, 또한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행하지 못해서 우리는 죽어서 마땅한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행하심으로서 우리는 살린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감사함으로 말이다.

"항상 기뻐하라" 라는 말씀의 경우에도, 우리는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해서 우리는 죽어도 너무나 당연한데, 그런데 그 말씀을 다 이루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서, "항상 기뻐하라" 라는 말씀을 위해서 우리는 또 살아나서 항상 기뻐하게 된다는 것이다.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것이 어려운가? 해결이 다 되었다는 것이다. 골치가 아프고 말고 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어려운고 하니, 자기 자신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한데, 그러니 그 말씀을 늘 따라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염두에 두지를 않고 말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계시지 않고 자기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티를 내려고 하니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르는데, 귀신같은 자기를 빼돌리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너를 지켜줄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불교나 영주주의는 무엇인고 하니까, "내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나를 지켜줄 자가 없다" 라는 것인데, 아까 영주주의를 하다가 이렇게 옆으로(?) 흘렀는데 말이다.

◈ 다시, 영지주의에 대해서 !!

이 '영지주의'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신을 저 멀리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여기에 이렇게 있고 말이다. 그래서 자기가 신에게 가까이 나아갈 때는, 자기가 자기를 위로하고 북돋아주지 않으면 아무도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자기를 격려하고, 자기가 자기를 절제하게 하고, 자기가 자기를 욕심부리지 않게 해서, 그렇게 자기가 자기를 점점 더 들어올려서 신에게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힘이 빠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5미터를 올라갔다가 10미터를 내리 꼴아 박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다음에는 15미터의 착한 일을 더 해주어야 그 수준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행함주의자들에게 "나는 날마다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라고 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들이 행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에 말이다. 그러니 행함주의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성경말씀에서 자기들이 행할 수 없는 것은 다 빼버린다는 것이다. 물위를 걷는 것, 또한 겨자씨 만한 믿음으로 나무를 바다에 빠트리는 것과 같은 것은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를 지키지 않으면 누구도 자기를 구원해주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 누가 나를 구원해주지?

그러니 그들에게 구원자는 누구인가? 본인이 바로 구원자라는 것이다. 본인이 예수님을 믿고, 본인이 교회에 다니고, 그렇게 본인이 알아서 다 해야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찾아오는 법이 없는데, 물론 주님께서 찾아오신 적도 없었고 말이다. 마치 자폐증 환자와도 같은데, 그 영혼이 얼마나 피폐가 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마치 전기와 가스와 모든 것이 다 끊어진 아파트 안에서 갇혀 있어서, 그 안의 세계로 완전히 빠져 들어가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물론 아침에는 직장에 나가기는 하는데, 다시 그 안으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자기를 가두어버리는데, "너는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자기 목을 걸어놓고는, "이것은 하면 안 되고, 이것은 해야된다" 라고, 그렇게 자기가 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간음한 여인의 경우에, 그런 여인이 용서를 받으면 그런 행함주의자들에게는 난리가 나는데, 간음한 여인이 용서를 받고 난 다음에 자기가 또 자기 목숨을(?) 내어놓았는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무엇인가 켕기는 것이 있고 주저하는 것 자체가 있다는 말은, 신앙 자체를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도구일 뿐 !!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데, 다만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무엇이든지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필요할 때만 쓰일 뿐이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하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있는 권한은 이미 성령이 오고 난 다음에는 이미 우리에는 허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어떤 것을 하더라도 복음과 상관이 없는 것은 주께서 시킨 적도 없고, 그런 쪽으로 주님이 인도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본래의 모습인 죽음의 모습으로서 주님에게 쓰임을 받으면, "죽은 너희들은 내가 날마다 이렇게 살려내잖아" 라고 하는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무릎을 꿇고 있는데, 주님의 군화발에 초대뼈를 까여서 너무나도 아파서 어루만지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한 두 번이 아니라 평생을 까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한 대를 맞으면 더 이상 맞지 않으려고 방어를 하곤 하는데, 그러면 또 다시 까여서 무릎을 꿇고 말이다. 그것이 평생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 살펴본 교재를 다시 한번 보자.

** 사람이 하나님과 만난다. 그것이 곧 죽음과의 만남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논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죽어 마땅한 이유를 찾아 따지는 일이다.

(민 4:19) 그들이 지성물에 접근할 때에 그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너희는 이같이 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이 들어가서 각 사람에게 그 할 일과 그 멜 것을 지휘할지니라
(민 4:20)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 것은 죽을까 함이니라

◈ 제사장이 왜 성소에서 죽는가?

여기 교재에 나오는 민수기 4장의 말씀이 곧, 하나님과의 만남이 죽음이라고 하는 증거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제사장이 성전에 들어가서 죽는다는 것이다. 제사장에 있어서 성전은 자기의 직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컴퓨터도 놓여있고 말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자기 업무를 하면 되는데, 그런데 제사장은 자기 직장에서 자기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곳이 자기 직장인가? 주님의 직장인가? 주님의 직장인데, 그런데 제사장인 아론의 아들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자기가 좀 오래 다녔다고 폼을 잡다가, 즉 주님께서 명하지도 않는 일을 하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침부터 한 잔을 했는지 몰라도, 그래서 성전에도 음주측정기가 있어야 하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그 이전에는 제대로 일을 했는데,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는 불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려고 하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려고 하니 그렇게 된 모양인데 말이다. 그동안 그렇게 성전에서 일을 열심히 했으면 좀 봐줄 만도 한데,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의 법을 어겼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평생을 부렸던 수족 둘을 그만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제사장 티오도 채우지를 않고서 말이다.

그러니 목사의 경우에도 그냥 평신도로 살면 되는데, 그런데 어느 날 교인이 '목사님!' 이라고 하면, 그것은 이제 초대뼈를 까일 각오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사실 주님만이 목회자인데, 왜 사람을 두고서 목회자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다같이 평신도로서,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면 그만인데 말이다.

오직 택함을 받은 자만이 구원을 받는데, 사람을 많이 끌어 모은다고 해서 더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또한 사람을 많이 모으지 못했다고 해서 구원에서 삭제되는 법도 없고 말이다. 그러니 목사는 일종의 평신도로서 가르치는 은사를 발휘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주님이지 목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평생을 해야하니, 참 답답하기도 하고 말이다.

이제 교재 167페이지를 살펴보겠는데, 여기 '죽음의 의미' 라고 나오는데 말이다. 강의 처음에도 조금 살펴보았지만, 이제는 남자든 여자든 간에 우리가 중병에 걸려서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꽂고 있는데, 옆에는 심장 박동기가 돌아가고 있고, 이제 그야말로 가기 일보직전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죽는 순간인데 이 부분을 본다고 가정을 해보자는 것이다.

교재 167페이지를 살펴보자.

** (4) 죽음의 의미 - 죽음의 의미는 두 가지 요소의 결합이다. 내가 죽게 된 것과 내가 누구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의 결합이다. 인간은 누구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기 이전까지는 아직 죽음의 의미를 모르게 된다. 

◈ 아니, 내가 누구를 죽이고 싶어한다고?

여기서 죽음의 의미를 두 가지 요소의 결합으로 보는데, 즉 "내가 죽게 된 것"과 "내가 누구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의 결합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앞의 것은 어느 정도로 이해가 되는데, 그런데 뒤에 나오는 "내가 누구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 이라고 할 때는, 그것이 상당히 생소한 이야기가 아니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우리의 솔직한 심정은 무엇인고 하니, "아니, 왜 내가 누구를 죽이려고 한다는 말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가 생각하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서 덤탱이를 씌어서 죄인으로 몰아세우려고 하면 되십니까?" 라는 것이란 말이다. 여러분, 그렇지요?

여기서 성경말씀을 한 곳 찾아보겠는데, 죽어가면서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죽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남을 죽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기는 자기 혼자 죽는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자기가 죽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그러니 무척이나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닙니다. 지금 제가 죽을 놈이 아닌데 왜 죽습니까?" 라고 하는데, 자기가 죽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죽는 것만 억울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7장 19절과 20절을 찾아보겠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요 7: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요 7: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 율법에 대한 특심이 예수님을 !!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미쳤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없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은 귀신이 들렸구나.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한단 말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가?

* 예수님 : 너희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고?
* 사람들 : 그래, 지키지.
* 예수님 : 너희들이 하나님의 법을 모르고 지킨다고 하니, 결국은 법을 잘 지킨다고 하는 그 극단이 바로 메시야인 나 예수를 죽이는 것에서 마지막 모습을 보이게 된다.
* 사람들 : ???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예언적인 말씀인데, 즉 그들이 율법을 모르면 주님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가담이 되지 않는데, 하지만 율법을 안다고 하니, 그런 율법에 대한 열심과 특심이, 특별한 열심을 특심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특심이란 말은 사도바울이 사용했는데, 바로 그런 특심으로 말미암아서 예수님을 죽이도록, 그렇게 스케줄이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 주님이 조성한 환경 속에서 !!

그러므로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즉 "앞으로 내가 너희들을 겨냥해서 율법을 이야기할 텐데, 그 율법은 너희들이 해석하는 것과 정반대로 해석해서, 너희들이 나를 죽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정도로 내가 유도하겠다" 라는 것이다. 즉 주님이 그런 환경을 조성하시겠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움직인다고 하면, 그렇게 자기가 행동하는 것은 당연히 자기 의사에 따라서 하는 것인데, 그런데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환경이란 것이 있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원하지 않는 곳에서 자기가 남을 밀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그런 자리에 가기 전에는 그런 행동을 할 줄은 자기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막상 그곳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지게 되니, 자기가 전혀 자기답지 않은 행동, 즉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다 했지? 나는 비겁하지 않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비겁했지?" 라고 하는데, 바로 그러한 행동이 '욱' 하면서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동욱이나 병욱이만 '욱'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ㅋㅋ).

그래서 "아니, 왜 내가 그런 짓을 다 했을까? 내가 그렇게 좀생이였나? 내가 그렇게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였지? 야, 정말로 그런 나 자신이 너무나도 밉구나. 내가 미워" 라고 하는데, 하지만 바로 그런 환경을 누가 조성했느냐는 것이다. 바로 주님께서 지금도 조성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 짓밟지 않으면, 도리어 짓밟히는 세상 !!

그러니 자기가 지금 이렇게 살았다고 하는 것은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짓밟았다는 증거인데, 남들을 짓밟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에게 짓밟히는 사람도 할 말이 없는데, 왜 그런가? 그 사람이 자기를 짓밟으려고 하다가 도리어 짓밟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그 사람이 수녀같이 곱게 가만히 있는데 가서 "야, 돈 내놔!" 라고 했다면 자기 잘못이라고 인정을 하겠는데, 하지만 그게 아니라, 자기가 잡아먹지 않으면 도리어 그 사람에게 자기가 잡아먹힌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묶여져있는(?) 이 세상구조라는 것이다.

◈ 달인은 역시 '김병만' !! 

아니, 그냥 가만히 있으면 밥을 주는가? 그런 일은 없다는 말이다. TV 프로를 보아도, 달인이 되는 것도 반드시 두 세 사람의 경쟁자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냥 피자를 잘 만들면 달인이라고 해주면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수준에 있는 두 사람 이상을 불러다가 경쟁을 시켜놓고, 거기서 일등을 하는 사람에 달인의 칭호를 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얼마나 피곤한 일이냐는 말이다.

◈ 장애물들은 깡그리 없어져야 !!

집사님의 경우에는 퇴직을 했으니 집에 편안하게 있으면 되지만, 그러나 학교의 경우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비교경쟁들이 그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느냐는 것이다. 즉 2학년 3반은 성적이 올라가는데, 왜 2학년 4반은 올라가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교무실에 가서 2학년 4반 담임이 누구인지 괜히 물어보곤 하는데,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왜 묻는고 하니, "요즘 2학년 4반 담임 선생님이 정신을 다른 곳에 파는 것이 아닙니까?"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돈 값을 하라는 것인데, 제대로 하지 않으면 학부형에게 전화가 온다는 것이다. 학부형 제도는 왜 만들어놓았는지, 그냥 없애면 되는데 말이다. 그러니 자기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다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속이 시원하다는 것이다.

◈ 역시, 야구는 삼성 라이온즈가 !!

이런 말을 하고 나니까 제가 속이 다 시원한데(ㅋㅋ), 즉 자기를 피곤하게 만들고 힘들게 하는, 그런 장애물들은 깡그리 다 없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SK와이번즈가 넥센에게 매일같이 이기는데, 그러니 넥센의 입장에서는 SK와이번즈는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 최경주보다 골프를 잘 치는 인간들은 다 없애야 하는데, 그래야 최경주가 매일 일등을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혼자서 하는 일등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 한국의 보수적 집단에서는 김정일은 죽어야 한다고 하면서 매일같이 제사를 지내는데, 하지만 우간다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겐 빵이 중요하고, 또 피뢰침을 사서 학생들이 벼락에 맞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말이다. 소말리아 해적들에게도 김정일이고 미국이고 간에, 돈만 된다면 다른 것은 모두 다 쓸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자기 종족만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전쟁에 무슨 윤리가 있는가? 참으로 바보 같은 소리인데, 이 세상 자체가 곧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윤리가 있고 행함이 있고 또한 성화가 있느냐는 말이다. 진짜 바보라서 알아듣지를 못해서 그러한지, 참으로 한심하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이다.

◈ 그들은 왜 십자가 마을이 미운가?

그들에게 십자가 마을이 왜 미운고 하니, 물론 대변인은 아니지만 그 사람들의 말을 지금 제가 대신해서 다 하겠는데 말이다. 그들은 십자가 마을이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미운 게 아니라, "나도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데, 왜 너거들은 너거들이 전하는 것만을 복음이라고 우기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 마을이 없어지면 자기들만 복음을 안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일과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자기 자신이 죽는다고 해서 억울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마음속으로 살인한 것도 역시 살인죄에 해당이 되고 말이다.

◈ 여인, 강도, 세리, 창기 !!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중심이 누구인가? 오직 예수님만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주되심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자들이 그것을 인정하는 자들인가?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에 걸렸던 여인, 또한 자기 자신을 개라고 한 여인, 그리고 죄 값을 받아서 마땅하다고 한 강도도 그렇고, 그 강도는 사회적 책임이나 부모에게 핑계를 대지 않았는데, 사회가 왕따를 시키고 부모가 자기를 버려서 강도가 되었다고 말이다. 즉 "저는 마땅히 죄 값을 받아야 하고, 그래서 이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세리나 창기도 역시 그러한데, 세리는 주님 앞에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저는 금식이나 십일조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그냥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했는데, 그들이 곧 주님에게 촛대뼈를 까인자들인데, 변명이고 뭐고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 모두 내 탓이요 !!

예수님께서 소경이나 귀머거리, 절름발이를 낫게 한다고 할 때, 그들이 장애인으로서만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장애인이면서도, 하지만 자기들이 그렇게 장애인이 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그 모든 것이 자기들의 죄 때문에, 그렇게 자기 탓임을 아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애인들이 어디 있는가? 자기들이 그렇게 장애인이 된 것은, 모두가 다 사회 탓이고 부모 탓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겉으로는 아닌 척을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다 남의 탓이지 자기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자들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내 탓이요" 라고 자기의 죄를 이야기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런 사람이 말하는 죄가 무엇인가? 자기는 장애자가 되기에 합당한 죄를 지었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미리 앞당겨서, 즉 십자가 앞에서 성령을 통해서 미리 알자는 것이다. 그렇게 미리 알게 되면, 우리 자신이 바로 소경이고 귀머거리임을, 그렇게 우리가 죽어서 당연하다는 것을, 우리가 곧 닭대가리만도 못한, 즉 우리가 바로 닭 울음소리를 들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 너를 죽이고야 말거야 !!

그러므로 죽음의 의미라는 것은, 자기가 죽는다고 해서 억울해할 문제가 아니라, 더욱 중요한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자신을 제외한 다른 누구를 죽이고 싶어하는 심정으로 한 평생을 살아왔다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가 지금 죽을 값을 하고 있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 인간들 : 나는 천사처럼 살았는데, 누구야 나를 죽인 놈이?
* 하나님 : 바로 나다. 왜?
* 인간들 : 아이쿠, 그렇습니까? 저는 죽어서 마땅하군요.
* 하나님 : 암, 그렇지.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결국 똑같다는 것이다. 우리의 목숨을 주님에게 바친다고 해서, 그것을 주님이 뇌물로 받고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데, 즉 주님은 우리 목숨을 받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주님은 베드로의 목숨도 받지 않는데, 즉 "베드로야, 가지고 가라. 니가 하던 대로 해라. 다만 내가 일방적으로 내 목숨을 바쳐서 너를 구원할 테니, 니 목숨은 가지고 오지 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순교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시킬 때 하는 것이지, 자기가 알아서 순교를 한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주님께 충성하라" 라는 것은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실 일이지, 우리가 실천에 옮긴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무효(無效), 무효(無效), 무효(無效) !!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중환자 실에서 그야말로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있다고 가정을 해보자는 것이다. 즉 우리가 간암에 걸려서 침대에 누워있고, 온 몸이 너무나 아픈데, 겨우 진통제로 견디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제 곧 가기 일보직전인데, 그런 입장이라고 하면, 그것이 곧 '무효(無效)' 라는 것이다.

무효가 무슨 의미인지 알지요? 유효하지 않는, 즉 의미가 없다는 것인데, 그러면 이게 무슨 뜻인가? 주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난 것을 무효로 돌린다는 것이다. 태어나게 하신 분이 우리를 죽여버리는데, 바로 그런 틈, 즉 기간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무엇을 건지는고 하니, 즉 "이런 죄인이 이런 죄를 짓고 살아가다가, 내 덕으로 이런 죄인이 천국에 간다" 라고 하는, 그 흔적만을 주께서 건지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매직을 이렇게 쓰는데, 이 매직을 다 쓰고 나면 어떻게 하는가? 집에 보관을 하는가? 아니면 버리는가? 당연히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집에 가면 다음과 같은 비석은 없는데, 즉 "이 매직은 2011년 2월에 태어나서 장렬하게 싸우다가 7월에 죽었다" 라고 하는 말이다(ㅋㅋ). 왜 그런가? 이 매직의 태어남과 죽음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무효인데, 그것을 두고 '안개'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안개의 특징이 무엇인가? 언제 생겨나서 언제 사라는데, 그러한 것이 안개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공중에 피어나는 연기처럼, 물론 분산해서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런 움직임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즉 불이 꺼지고 나면 사라지고 없는데, 공중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라는 것은 주께서 사용하기 나름이지, 자기가 날아다닌다고 해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김안개, 박안개, 최안개, 그런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주께서 살려주시니 아이가 태어났고, 그래서 이렇게 잘 놀고 있는데, 그러니 아이나 부모나 다같이 안개인데, 즉 안개가 안개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씨 집안의 안개가 안씨 집안에 시집을 와서 아이를 낳았다는 말이다. 안씨가 맞지요? 윤씨입니까?

◈ 왜 무효인가?

아무튼 그렇게 무효인데,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왜 무효인가?" 라고 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하, 이래서 예수님만 살아있으면 되는구나" 라고 깨닫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말씀이 있음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생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생명은 우리가 아니라 말씀과 관련이 있는데, 즉 예수님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말씀이 찾아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사람은 생명나무의 혜택을 입는데, 즉 생명나무에 속하게 되고,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 '죽음의 구조'에 대해서 !!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평생동안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 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죽음의 구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지금 조금 힘이 들더라도 참으시고, 물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죽는데, 그렇게 되는 말씀의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말씀의 구조가 들어오게 되면, 우리 인간은 죽음의 구조에 휩싸여서 죽에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죽음의 구조가 없이 죽게 되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죽음의 그만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불교와 같은 곳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냥 눈만 감으면 그만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죽음의 구조 속에서 죽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죽지를 않는데, 이게 문제인데 말이다. 즉 죽지 않고 지옥에 가기 위해서 부활이 되고, 그리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 부활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의 구조가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죽음의 구조를 모르고 그냥 살아있는 것으로 보니, "아이쿠, 이렇게 힘들어서 어떻게 살겠노? 눈을 감고 그냥 꽉 죽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한강에서 청년 5명이 뛰어내렸는데, 그들은 죽음의 구조를 모른다는 말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더 편하다고 여겨서 그렇게 죽음을 스스로 택했다는 것이다.

다시 설명을 하면, 여기에 이렇게 선이 있는데, 여기에서 살아있는 것이 힘이 든다고 여긴다고 하면, 그래서 이렇게 힘든 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가? 그들은 살아있는 것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을 두고서 죽음의 세계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들이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인데, 즉 자기가 이렇게 살아있듯이, 이렇게 살아있는 평지 위에서 죽음은 무엇이라고 여기는고 하니, 자기만 없어지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 김성수 목사님의 경우에는 !!

이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까, 제가 어느 목사의 설교를 평하면서 그런 말을 했는데, 그 분의 경우에는 구원받기 이전의 틀을 구원이후에도 그대로 진행시키고 있기 때문에, 즉 개혁주의 신학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냥 깨놓고 말하겠는데, 어떤 분이 저에게 전화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목사님, 김성수 목사님과 목사님 설교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라고 말이다. 그래서 제가 답변을 하면서, 이러한 것은 십자가 마을 사이트에 올렸으면 좋겠다고 여겼는데 말이다.

김성수 목사는 어떤 사람인고 하니, 처음에 박영선 목사에게 같이 있으면서, 성령으로 구원을 받았으면 말씀을 지켜서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하는, 그런 박영선 목사의 개혁주의 신학의 노선에 매료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 가서 박영선 목사의 스타일대로 했는데,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고, 그 다음부터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말씀을 주신 것은 성령의 은혜로 주신 것이니, 그러니 말씀을 잘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그런 개혁주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미국에서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설에는 이근호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말도 있기는 한데, 그것은 본인의 입으로 확인된 바가 없으니 모르겠고 말이다. 아무튼 언제부터인가 박영선 목사를 따르지 않고, 개혁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제가 보기에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믿고 이제는 성령을 받았으니, 그러니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고 하는 새로운 자기 결심이 생기게 되는데, 그렇다면 자기는 무엇만 확인하면 되는가? 성령을 받고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고 여기면서 실제로 살아보니, 분명히 성령을 동원하고 은혜를 동원했는데, 그런데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OH, MY WIFE ??

그래서 그분이 여기에 무엇이 추가했는고 하니, 성령을 받고 말씀을 지키지 못하니, 항상 '자기 부인'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주여, 제가 말씀을 지킨다고 했는데, 제대로 지키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부족합니다.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을 추가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개혁주의를 능가하는 온전한 복음적인 삶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김성수 목사의 설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출발을 어디에서 했는고 하니, '구원론' 이라는 것이다. 즉 기존의 그 구원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부인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죄다" 라고 일러주는 것이 성령의 몫인데, 그런데 그 양반은 자기가 해보니 안 되니까, 그것이 성령의 몫이 아니라, "저는 부족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는 것을 추가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자기 구원론에 계속해서 집착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설교가 좋다고 하는데, 왜 그런가? 주님은 저만치 떨어져 있는데, 주님을 따라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영선 목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해봐도 그것도 아니고, 그래서 "아하, 나를 부인하면 주께서 해주시는구나" 라고 하는데, 그래서 저는 그것을 두고 "도를 닦는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양반이 불교와 동양철학에 대해서 공부를 하지 않으니, 자기가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동양철학적인지, 그것을 미처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의 주장이 이미 동양철학에 다 있는 것인데 말이다. 즉 자기 속에 있는 신성을 어떤 식으로든 아름답게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분의 표현대로 하면, 성령이 우리 속에 있으면 성령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은 어디에서 오는가? 십자가에서 오시는데, 그러니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즉 주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우리가 동원되었음을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이들은 자기들의 구원의 위해서 십자가가 필요하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부인도 필요하고, 성령도 필요하고 말이다.

왜 그런 이야기를 자꾸만 한다는 말인가? 자기 구원을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즉 구원을 받지 못했으니, 일단 무엇이라도 자꾸만 해보자는 식인데, 자기 부인에 또 자기 부인을 거듭하고 말이다. 그러면서 자기는 개혁주의마저도 능가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 이근호 목사의 설교와 똑같아 ??

그런데 그것을 두고 이근호 목사의 설교와 똑같다고 하는데,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똑같단 말인가? 만약에 그분이 지금이라도 십자가뿐이라고 하면 왜 강추를 하지 않겠는가? 십자가 마을에다 그 교회배너로 도배를 할 수도 있는데, 그런데 과연 십자가뿐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그곳에 모이는 자들은 모두 다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데, 자기들의 완벽함과 철저함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여러분,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십자가가 다 알아서 합니다.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라고 하면, 그들은 모두 다 떠나고 만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자기들의 행함을 이야기해주지 않으니 말이다. "김성수도 역시 똑같네" 라고 하면서 떠나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분, 구원을 받으려면 이런 행함이 있으면 됩니다" 라고 하는 뭔가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말 그대로 주님인데, 그런데 목사가 그만 주인이 되어서 주님을 어떻게 해보려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런 예수는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렇다면 이근호 당신의 말대로, 즉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가 신앙생활도 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인데, 그래서 저를 보고 '영지주의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 라고 하면 무조건 영지주의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그것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 목사님의 상상력이 부럽습니다 ??

손하진 씨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목사님의 상상력이 부럽습니다" 라고 저를 조롱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렇게 공격하는 기준을 대라고 하면 전혀 대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렇게 느꼈다고 하는 감정만 말하지 말이다. 물론 핑계인데, 하지만 자기 감정이 아닌 복음인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믿음은 말씀에서 나오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그것을 듣고 말씀을 다시금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길게 글을 쓰면서도 성경말씀은 이야기하지 않고, "이근호 목사가 어떻고, 저떻고"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전혀 자기 생각이라는 것이다. 본인이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되고, "아하, 말씀에 이런 것이 있구나" 라고 하면서, 말씀을 이야기하게 되면, 그것이 과연 다른 성경말씀과 조화가 되는지,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살펴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마을에 글을 올릴 때는 항상 성경말씀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즉 "이 말씀은 이러한데, 저는 이런 은혜를 받았습니다"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삭제를 당하지 않지, 한 달에 무려 15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운영하는데, 그러니 쓰레기 같은 글을 올리면 당연히 지워야 한다는 것이다. 조롱하고 비웃는 글들은 말이다.

◈ 십자가 마을은 죽어라 !!

다시 정리를 하겠는데, 지금 그들이 공격하는 게 무엇인고 하니, 그들이 우리를 보고 "십자가 마을은 다 죽어라"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들이 복음을 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 마을은 다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데 동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같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라고 말이다. 덕분에 저도 참 오래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저주를 해대니 말이다(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자의식은 죽음의 구조에서 버티기로 나서는 가운데 비로소 감지된다. '누구냐? 감히 나의 가치와 행복의 앞길을 막는 자가! 신, 너야?' 하지만 이렇게 해봐도 결국 죽는다. 따라서 죽음이란 인간무시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시를 당하면서 죽음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위치가 정해진다. 무시를 당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게 된다. 또한 무시를 당하면 당할수록 인간은 포악해지고,  그 맞은 편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자하심과 선하심은 빛을 발하면서 등장한다. 

◈ 무시를 당하면 당할수록, 인간은 포악해지고 !!

우리 인간에게 제일 힘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사라진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자기가 무시를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는 순간에 가장 억울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없어진다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가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는 이 땅에서 있으나마나한 존재로서 무시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시를 당하는 것이 정말로 화가 나는데, 여기 교재에서는 '포악해지고' 라고 표현을 했는데 말이다. 자기가 그렇게 포악해진다는 것인데, 물론 평소부터도 포악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세상은 망하더라도 자기는 그렇게 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가치가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 이유는 묻지 말라는 것인데, "나는 나다" 라는 것이다. 즉 무조건 자기는 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는 속에서 마그마처럼 포악함이 들어있는데, 그 누구든지 말이다. 뭐 '천사 같은 엄마, 천사 같은 딸' 이라는 말이 있는데, 웃기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 속에는 그런 천사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단지 포악할 뿐인데, 즉 우리 인간은 누군가가 자기를 건드리면 그 사람을 그만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죽이시면서 그 속에 들어있는 포악함을 드러내도록 하시는데, 즉 "야, 숨기지 마라. 내가 다 알고 있어. 포악함을 다 드러내" 라고 하시면서, 그것을 끄집어내는 과정이 곧 우리를 죽이시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 저는 예수님을 죽이고 싶습니다 !!

물론 우리도 말들은 좋게 하는데, 자기의 포악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즉 "제가 죽는 것도 주님의 뜻입니다.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라고, 성경말씀을 인용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속으로는 뭐라고 하는가? "그냥 좀 살려주시지.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죽이고 하는가? 이런 나쁜 하나님아!"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내가 차라리 하나님을 죽이겠다" 라고 나오는데,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죽여라, 죽여!"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작 예수님을 죽이면 되는데, 그런데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저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주님의 그 큰사랑을 찬양합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겉치레로 하는 소리이고, 솔직한 심정은 무엇인가? "저는 예수님을 죽이고 싶습니다" 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예수님께서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도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용서를 해주셔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과거에 용서를 많이 받았지. 그러니 이제 용서를 해주지 않아도 되지. 받은 용서만 가지고도 니가 다 알아서 하겠지" 라고 한다면,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끝까지 용서해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이 좋고 착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 자신의 약속에 의해서 말이다. 그래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겠고" 라고 하셨는데, 즉 주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믿기 때문에,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말이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끝까지 죽이고 싶지만,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죽이고 싶은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지적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셔서 두려움이 없는(?) 놀라운 성령의 닭소리를 듣게 하시는데, 즉 '꼬끼요!' 라는 닭소리를 말이다. 그러니 여유가 있으면 집에 닭을 좀 키우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데, 자기가 예수님을 죽이고 싶을 때마다 닭이 울 수 있도록 말이다. 

◈ 꼬끼요 - '너희들은 계속해서 천하의 죄인이다' !!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닭은 때가 되면 우는데, 그러니 말씀은 다 때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포악함을 드러낼 때가 말이다. 즉 중간에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우리의 입에서 주님에 대한 욕이 튀어나오는데, 그게 바로 닭이 우는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 마을이 잘나서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주님께서 계속해서 죄인이 되도록 작용하도록,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도저히 겸손을 떨 수가 없는데, 주님이 그렇게 해버리시니 말이다. "너희들은 계속해서 천하의 죄인이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에게 얻어맞고 있는데, 그런데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너거들만 복음을 아는가? 우리도 안다" 라고 하는데, 아니 누가 뭐라고 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저도 죄인입니다. 행동을 하나 할 때마다 죄를 느낍니다" 라고 하면 어떻게 지우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자꾸만 엉뚱한 소리를 하니 지우는 것이지 말이다. 즉 지우는 확실한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십자가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불리한 말을 하면 지운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십자가를 드러내면 지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십자가 마을을 운영하는 본질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 원칙에 충실할 뿐이라는 것이다.

요즘은 운영비도 없어서 힘이 많이 드는데, 물론 사건이 터지면 돈이 또 들어오겠지만 말이다(ㅋㅋ). 아무튼 주님께서 허락해주셔서 운영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곧 복음에 빚진 자로서,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증거하는 것뿐이라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저희들이 잘나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나도 못난 자들이기에 구원을 받았는데, 그런데 잘나서 구원받았다고 오해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도 주님께서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교만했는지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배치된 하나님의 조치로서 감사히 받아들이고, 우리는 그런 소리도 할 자격이 없는, 정말이지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주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11,08,10 00시 40분에 마침.

                                                                     그대 이름이 진정 '블랙스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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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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