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48강 외부와 내부

피/피 2012. 8. 29. 10:22

피48강 외부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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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48강 외부와 내부

[11 대구강의 10] - [피 48] - 안과 밖
                                                                                
                                                   11,06,0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질문 - ???

* 답변 - 그러니 목사가 설교를 하는데 있어서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만을 해야 하는 것이지, 그런데 만약에 그런 자본주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을 하면 교인들이 거부한다는 말입니다.

* 질문 - 신학학위 자체가 신학은 고사하더라도, 성경말씀은 제대로 연구하는 것이 되어야만 하는데, 그런데 그것마저도 전혀 아니고 모든 것이 무조건 교회부흥에 집중에 하니, 그게 도대체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목사님, 그렇지 않습니까?

* 답변 -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의 기본이 무엇인고 하니까, 교회를 살리기 위한 신학인데, 즉 교회를 보조하는 학문이 그만 신학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 질문 - 제가 신학논문의 제목을 좀 살펴보았는데, 전부가 교회부흥과 관련이 되어있더라는 겁니다. 목회도 그렇게 하고 말입니다. 물론 그나마 그 신학도 엉터리이지만, 아무튼 그런 신학조차도 하려고 하는 자들이 없다는 겁니다. 아무튼 최종목적이 교회발전인데, 즉 자본주의적인 사고라는 겁니다.

* 답변 - 물론 그러한데, 자본주의적인 사고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일단 자본이 있어야 진리이든 아름다움이든 간에 성립이 된다는 겁니다. 돈이 있어야 말입니다.

* 질문 - 그러니 권력이 돈이라는 것이죠? 돈이 곧 권력이고, 또한 정의이고 말입니다.

* 답변 - 물론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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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간이 되어서 시작하겠는데, 교재 161페이지를 살펴보자.

** 이제 세상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조로 짜여진다.

◈ 가해자와 피해자 !!

여기에서 "이제 세상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조로 짜여진다" 라는 문장이 맞는 말인데,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는 그 뜻을 다 풀어내지 못한 문장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상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조로 짜여진 것은 맞는데, 그런데 처음부터 이 세상 자체는 피해자가 아니고 그냥 가해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해자는 이 세상 바깥에서 와야만 하는데, 그런데 이렇게 바깥에서 온다고 하는 그 '바깥' 개념이 우리 사람에게는 성립이 되지 않는고 하니, 인간은 바깥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내부를 가지고 '자기' 라고 본다는 것이다. 내부를 가지고 말이다.

◈ 가난과 부의 규정이 !!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의 관심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 바깥에 있는 것을 얼마나 자기 내부로 끄집어당기는지, 그것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많이 끄집어당기면 자기는 부자이고, 그와 반대로 적게 끄집어당기면 자기는 가난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가난한 자와 부자의 규정이 그만 어떻게 되고 마는가? 즉 "내 바깥에 얼마나 잘사는가? 못 사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얼마나 잘 사는가? 못 사는가?" 라고, 그렇게 결정을 짓는다는 것이다. 자기 안에서 말이다.

◈ 그런데 인간의 몸을 칼로 회를 뜨면 ??

그런데 그것을 용기를 내어서(?) 회를 뜨는 칼로 한번 회를 쳐보자는 것이다. 어제 낮에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도려내게 되면 살점 하나 하나가 이렇게 슬라이드처럼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부는 없어지고 전부가 무엇만 남아있는가? 외부인 바깥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껍질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한 개, 두 개, 세 개라고 하면, 이러한 세 개가 모여서 하나의 몸통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몸통을 이루었는데, 그런데 그것을 잘라보면 내부는 전혀 없고, 이렇게 바깥으로 둘러싸고 있는 외부만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여기에 이렇게 우리 몸의 아주 조그마한 세포가 있다고 하면, 이 세포의 안은 전부 바깥의 영향을 받아서, 즉 세포는 외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이렇게 세포가 20조 개가 모여있으니 하나라고 여기지만, 이 몸을 이렇게 잘라보면 전부가 다 외부와 외부의 접촉에 의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사람의 몸이 그렇다는 말이다.

◈ 결국, 몸은 해체가 되는데 !!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그러면 자르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우리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시작해서 결국에는 어떻게 되는가? 죽음에 이르는데, 그것은 곧 몸의 해체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한 줌의 재가 되고 마는데, 그렇게 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재는 털어 버리고 나면 나중에는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즉 껍데기만 공중에 발산될 뿐인데, 그러니 산산조각이 나서 다 흩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먼저 외부가 있고 그 결과로서 우리의 내부가 형성이 된다고 하면, 그러니 우리 몸은 외부에 의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 내부에 제 아무리 뭔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외부에서, 즉 바깥에서 어떤 조치가 취해지면, 거기에 따라서 우리 내부도 바뀔 수밖에 없게 되어있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 무슨 이런 똥고집이 다 있는지, 한번 들어왔다 싶으면 내어놓을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 욥의 경우에 !!

그런 것이 욥기에 보면 나오는데, 즉 사단은 우리 인간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단이 뭐라고 하는가? 이 사단의 생각이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과 얼마나 같은지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사단이 말하기를, "욥이 지금 하나님을 믿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렇게 욥이 믿음은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은 하나님 덕분에 자기 내부가 형성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데,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즉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믿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단이 말이다.

그러면 사단은 어떻게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게 살기 때문인데, 그리고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하나님도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그러나 욥만은 그렇지 않다" 라고 나오신다는 것이다. 욥만은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사람이란 무엇인가?" 라고 할 때, 그 출발점을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하는가? 즉 누구에게 한 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사단에게 들어야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성도가 무엇입니까?" 라고 할 때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즉 주의 말씀에게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주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을 외면한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당연하게 사단이 이야기한 것만 고스란히 남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성경말씀을 이야기하면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라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사단아, 보아라.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다 내 뜻대로 산다" 라고 하셨다면, 사람들이 익히 아는 이야기를 해도 그것이 교회가 되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도, 욥만은 그렇지가 않다" 라고 하셨을 때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과 욥과 구분하는 기준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욥 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욥 1:7)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욥 1: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 당신, 아직도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일반적인 사람들이 호응하는 소리를 교회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무엇을 제시해야 하는가? "저 사람이 과연 신앙인인가?" 라는, 그 기준만을 제시해야하기 때문에 말이다. 어떻게 꼬드겨서 자기 교회의 교인으로 만드는 게 아니고 말이다. 즉 "저렇게 10년을 교회에 다녔지만 신앙인이 아닐 수도 있다" 라는 기준을 매일같이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사단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을 둘 다 제시해서 "아직도 어느 쪽에 속합니까?" 라고 하는 것을 매일같이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아직도 우리교회에 그렇게 나오십니까? 이제 그만 가시죠" 라고 말이다. 물론 "어서 오세요" 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제 그만 가세요" 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냥 그렇게 그쪽으로 가시지. 우리교회에는 와봐야 환영해주는 사람도 없고, 10년 동안을 다녀도 계속해서 '아직도 믿습니까' 라고 따지는데, 왜 그렇게 자꾸만 나오십니까?" 라고 말이다. 즉 "이제는 우리편입니다" 라고, 그렇게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사람들 속에서 계속해서 사단의 세계가 나오고 있다는 말이다.

◈ 욥기 - '욥은 자기 자신을 관리하지 않는다' !!

욥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욥은 자기 자신을 관리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이게 정말이지 욥기의 진수 중의 진수라는 것이다. 욥은 그저 탄식하고 원망할 뿐이지, 자기가 자기 신앙을 관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욥의 신앙을 누가 관리하는가? 물론 주님이 하시는데, 심지어 사단이 와서 욥에게 시험을 하겠다고 시도할 때도,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까지는 허락을 하시지만, 그러나 마지막 지점에서는 욥의 생명을 건들지 못하게 하시는데, 즉 욥은 살아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욥이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있다는 의미인데, 즉 하나님께서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욥의 생명은 사단에게 넘겨줄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욥은 그 이유도 모르고, 그 내막도 모르고, 그냥 욥은 당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욥은 자기의 모든 재산이 다 날아갔는데, 요즘 말로 하면 욥 안에 있는 내용물이 다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욥은 자식도 10명이나 있고, 가축과 재물이 아주 풍성했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그만 날아가고 말았다는 말이다. 이틀 사흘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말이다.

◈ 기적은, 예행연습이 없어 !!

성경말씀에 나오는 기적들을 보면 사전에 미리 예행연습을 하는 법이 없는데, 예수님이 실로암 연못가의 소경을 고치실 때 미리 연습을 한 적이 있는가? "소경아, 여기 수돗물에 한번 씻어보아라. 이 물이 아니지 싶은데, 그러면 생수에 씻어보아라. 그것도 아닌데, 그러면 실로암 연못에 한번 씻어볼래. 아하, 이 물이 맞구나" 라고, 그렇게 하셨느냐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손수건으로 죽은 사람을 살렸을 때, 열 번 이상을 던져서 그 중에서 하나가 제대로 걸려들었는가? 또 모세가 홍해바다를 가를 때, 여러 번을 여기 저기를 쳐서 그 중에서 하나가 되었는가? 그리고 여리고 성의 경우에도 한번 돌고 나서, 안 되니 또 돌고, 그렇게 해서 일곱 번을 돌았는가?

◈ 단번에 !!

기적은 그야말로 '단번에 이루심' 인데, 그게 히브리서에 나오는데 말이다. 즉 기적은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로서 단번에 다 이루심을 그림자로 미리 보여주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단번' 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단번에' 라고 하는데, 가위바위보를 하고 말고 하는 그러한 삼세판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히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러므로 욥의 재산을 날리는 것도 단번에 다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거들을 낼 때,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되면 그만 실신을 하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욥도 실신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 1차는 실신이고, 2차는 실성인데, 즉 돌아버린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미치고 마는데, 교회를 아무리 다녀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 나는 껍데기입니다 !!

그때 욥이 하는 유명한 말이 있는데, 즉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자기 자신은 주님이 주신 것을 담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임을 고백한다는 말이다.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욥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예를 들어서, 은행금고의 서랍에다 다이아몬드를 담는다고 해서 그 다이아몬드가 그 서랍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금고의 서랍을 열고 다이아몬드를 넣어놓고, 나중에 다시 그 서랍을 열고 찾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 서랍이 고집을 부려서 열리지 않는다고 하면, 즉 "내 것이니 가지고 가지마" 라고 나온다면, "무슨 이런 서랍이 다 있노?" 라고 하면서, 그 서랍은 그만 폭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서랍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우리 인생은 소모용이고 소비용인데, 즉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게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소모가 되어야만 하고, 또한 소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사단의 생각이 곧 나의 생각 !!

욥이 바로 그런 고백을 하는데, 그러니 그런 고백을 하는 욥의 경우에, 기존의 사단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단의 생각은 무엇인가? 벌써 잊어버렸지 싶어서 다시 하겠는데, 사단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자기 내부를 위해서 외부를 이용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자기에게 건강을 주고 재산을 주니, 하나님께 고맙다고 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렇게 사단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욥 1: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 1:10)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욥 1: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사단이 그렇게 이야기한 것은 바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그런 인간의 생각이 누구의 생각과 일치한다는 말인가? 그게 곧 사단의 생각인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사단의 생각과 일치가 된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사단이 왜 사단이고 왜 악마인가? 즉 왜 하나님을 배반했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몽땅 다 빼앗기기 싫다는 고집 때문에, 그 사단이 하는 행사가 바로 타락된 천사로 변했다는 것이다.

◈ 임마, 따먹어 !!

그리고 선악과의 경우에도, 그 선악과가 원래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데, 그러면 가까이 가서 "참, 먹음직스럽고 보기에도 좋구나" 라고 하면 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으니 말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했으니, 우리는 따먹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단이 뭐라고 부추기는가? 그것을 따먹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우리 내부로 삼켜버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소유로 있는 것을, 그 선을 넘어서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다. 자유를 말이다.  

◈ 인간으로부터의 자유, 신으로부터의 자유 !!

이 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먼저 하나는 인간으로부터의 자유가 있고, 두 번째로는 신으로부터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것은, 신분적으로 이제 누구의 종이나 부하도 아니고, 이제부터는 자기만의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하는, 그런 신분적인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해결된 것인데,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만 있으면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 때문에 사장 밑에 있는 것이지, 그 돈 문제만 해결되면 언제든지 회사를 박차고 나가서 따로 자기 회사를 차리면 된다는 말이다. 그게 신분적인 자유인데, 그러니 과거 중세시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때는 양반과 쌍놈이 있어서, 쌍놈은 제 아무리 돈이 많고 해도 양반으로 올라갈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정치적으로 해결이 되었는데, 그런데 지금 인간들은 무엇까지도 시도하는고 하니, 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신으로부터의 자유는 일단 신에 대해서 인정을 하는데, 그리고 이 신으로부터의 자유는 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성품을, 소위 하나님의 형상을 누구의 것으로 만들면 되겠는가? 자기 것으로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 결국에는 '성화론' !!

그러므로 이 신으로부터의 자유는 결국에는 성화론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성화론으로 말이다. 그러니 더 이상 주님에 대해서 믿지 말고, 물론 처음에는 믿을 만한데, 그 다음에는 믿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행함에 나서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의 자유는 모두 어디에서 나왔는가? 선악과를 따먹은 누구의 심보라는 말인가? 당연히 사단의 심보인데, 즉 신에게 얽매이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니 사단의 주장은 신을 버리자는 게 아니라, 신과 괜찮은(?)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수 가르쳐주신다면 그 가르침을 받아서, 그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우리 인간도 하나님과 대등한 관계에 있을 수 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이제 저도 거의 비슷하게 하지요? 그 다음에는 또 무엇을 가르쳐주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그것을 또 실천에 옮겨서 "하나님, 이제는 저도 제법 하나님을 따라가지요?" 라고 하고 말이다.

◈ 악마가 보고 싶은가? 당신이 곧 악마 !!

그게 무엇인고 하니, 그게 곧 사단이고 악마라는 것이다. 그러니 악마가 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보라는 것이다. 행함을 이야기하면 그게 곧 악마라는 말이다. 악마가 뭐라고 하는가? "언제까지 우리가 그렇게 시키는 대로 해야하는가? 이제는 우리도 스스로 설 수 있지 않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당신은 무슨 배알도 없고 자존심도 없는가?"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다.

하지만 천국에 들어간 백부장이 자기 자존심을 챙겼는가? 강도나 세리나 창기가 어디 자기 자존심을 챙겼느냐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자기 자존심을 챙길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행위로 옮겼다고 할 경우에, 인간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의 경우에 !!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 앞에서는 당당하지만 말이다. 결코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가 없는데,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다고 하는 자기 자리가, 자기 아들인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지시에 의해서, 그런 자리 자리조차 전혀 남아있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즉 수양을 가져다가 자기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을 때, 그것은 곧 자기 자리도 모두 다 바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죽고 살고 하는 것이 다 누구의 손에 달렸다는 말인가? 자기가 이삭을 바치고 말고 하는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즉 수풀에 수양이 걸려있고 하는 것은 전혀 아브라함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수풀에 수양이 걸려있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자기 아들을 고스란히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가 되고 말이다. 여호와 이레가 없었다고 하면,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몹쓸 아버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은 불가능성을 뚫는 것인데, 물론 우리가 뚫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주께서는 그런 불가능에 대해서 잉계점, 즉 한계점을 주어놓고서 우리로 하여금 "도저히 우리 힘으로는 뚫을 수가 없나이다" 라고 하는 고백을 늘어지게 하게 해놓고는, 주께서 그 다음순서를 진행했을 때, 우리는 "아하, 더 이상 나를 믿어서는 안 되겠구나" 라고 하는 것을 혹독하게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아주 혹독하게 말이다.

◈ 사도바울의 경우에 !!

그것이 바로 사울의 경우에는, 사울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도록 만들어놓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잡아가게 해놓고, 그리고 그 다음에 또 다시 혈기 당당하게 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잡으려고 하는 바로 그 찰나에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두 번 다시 사울로 하여금 "내가 나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처지였다" 라고 하는 말을 못하게 만드는, 바로 그것을 사울의 경우에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구원을 받은 것은, 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서 받았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바로 그러한 것을 믿는 자만이 의인이고, 그런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즉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니 여기에 무슨 행함이 추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무슨 그런 묘수가 다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게 곧 사단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말이다. 마귀니까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다. 목사들이 왜 행함을 집어넣는고 하니, 행함이 없으면 교회가 되지 않기 때문인데, 그래서 제가 개혁주의 신학을 공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그러면, 교회는 누가 키우는데 ??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이근호 목사처럼 가르치면 교회는 어떻게 되는가? 교회는 누가 키우는데?" 라고 하는데, 그러니 결국 무슨 문제인가? 교회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게 막 살면 예배는 누가 참석하고, 헌금은 누가 하는가?" 라고, 결국 교회 문제라는 것이다. 주님이 보고 싶은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내가 이 땅에서 교회를 이렇게 열심히 키웠습니다" 라고 하는, 그러한 성과가 주님보다도 더 귀하고, 그것이 보고 싶다는 것이다. 자기 행함과 그 열매가 보고 싶다는 것이다. 주님보다도 말이다. 주님의 십자가 행하심과 그 열매가 바로 죄인인 자기 자신인데, 그런데 그것이 전혀 마음에 차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무슨 의미인가? 주님은 주님이고, 먼저 자기가 목사로서 뭔가 행했다고 하는, 그런 자기 성과가 보고 싶다는 말이다. 자기가 이렇게 초라하게 시골에서 그만 늙어죽을 수는 없다고 하는, 그런 악마의 속마음이 야망으로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도 나름대로 신학을 알만큼 아는데, 그런데 이렇게 시골구석에서 쪼들어가면서 전혀 인기도 없이 늙어 죽을 수만은 없어" 라고 하는, 그런 자기 내부에 관한, 즉 '내 것'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자기 것에 대한 집요함이라는 말이다.

◈ 다시, 욥기를 살펴보면 !!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욥기의 경우에 이 욥기를 보는 독자들은 분명히 마음을 놓고 안심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단의 이야기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욥이 고난을 당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러면 그 앞에 있는 것을 가위로 한번 잘라보자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과 사단의 이야기가 없이, 바로 욥이 재산이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모두 날렸다고, 그렇게 욥기가 시작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우리는 욥 편에 서겠는가? 아니면 욥의 친구 편에 서겠는가? 먼저 하늘의 내막을 모른다고 하면 말이다. 분명히 우리는 욥의 친구 편에 서게 된다는 말이다.

◈ 욥아, 회개해라 ??

그렇게 해서 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즉 "욥아, 니가 모르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인데, 그런 하나님의 선하심이 착한 자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게 되어있는데, 니는 누가 봐도 벌을 받은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런 벌을 받은 결과로 나타나는 죄를 지은 원인은, 분명히 벌을 받은 당사자가 원인이지 맞다. 왜냐하면, 우리는 벌을 받지 않았는데 니는 받았잖아. 그러니 욥아 그만하고 이제 회개해라" 라고 하는, 그것이 곧 욥의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의 논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욥기 마지막 부분에 보니 어떻게 되는가? 그런 논리가 바로 인간이, 즉 사단이 가지고 있던 논리로서, 하나님을 그것을 모두 다 끄집어내신다는 것이다. 욥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끄집어내어서는 완전히 모두 다 엎어버리는데, 즉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사단의 생각, 즉 죄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너희들이 욥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 욥아,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수송아자와 수양을 잡아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는 제사를 드려주어라" 라고 하면서, 그렇게 욥기가 끝을 맺는다는 것이다.

(욥 42: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욥 42:8)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 욥의 사건이 터짐으로서 !!

그러니 만약 욥이 예수님이라고 하면, 물론 만약이 아니라 욥 안에 실제로 예수님의 영이 들어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욥이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결국 우리는 무엇인가? 즉 이 땅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하늘을 쳐다본다고 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욥과 같이 기존 사단의 생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어떤 사건이 하나 터져서, 그 사건으로 인해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그런 엉터리들을 우리가 주변에서 주워 모았고, 그런 자들과 합세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얼마나 방해를 했는지, 즉 우리가 바로 사단의 짓을 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들춰내기 위해서 욥을 대표적으로 해서, 욥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다 끄집어냄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욥이 끄집어내는 것에 대해서 욥의 친구들이 안타까워한다는 것은, 이미 그들도 자기만의 것을 놓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극히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인물들이라는 것이 발각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주여, 사랑합니다 ??

다시 말해서, "주여, 사랑합니다" 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왜 나를 사랑하는데?" 라고 하면, "주님께서 주셨으니 사랑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누구의 생각인가? 사단의 생각인데, 그런데 그것은 누구나 다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누구나' 라는 것에 욥은 포함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포함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니고 포함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데, "욥은 그렇지 않다" 라고 말이다. 사단은 "욥도 그렇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욥은 그렇지 않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사단은 뭐라고 하는가? "욥도 같은 인간인데, 뭐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까? 욥도 역시 그렇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러면 좋다. 우리 내기를 해보자" 라고 하는 것이 곧 욥기라는 말이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자기 정체를 밝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자기가 주의 일에 있어서 방해자이고 가해자임을, 그것을 날마다 알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알아 가는 것이 단회적 사건으로 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우리가 연습을 한다고 해서 신앙인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내가 곧 가해자 !!

그래서 단회적으로, 단칼에 우리 몸을 완전히 조각을 내어서, 즉 우리의 내부라는 것은 외부의 것이 담겨져 있는 것이지, 우리의 내부는 전혀 우리 내부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내부를 잘라보면, 전부가 외부와 외부의, 그런 껍질로서만 구성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즉 "내 것은 없다" 라는 것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의사들인데, 특히 외과 의사들이라는 말이다. 그들이 수술을 하면서 뭐라고 하는가? "야, 이것을 잘라서 여기에 붙이면 되겠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의사는 인간의 몸을 하나의 삼겹살로 보는데, 아니면 등심이나 아롱사태와 같은 종류로 보던지 말이다.

그러한 의사에게 인간의 몸에 무슨 내부가 있겠는가? 그냥 고깃덩어리인데 말이다. 두뇌를 해부하는 사람에게 무슨 내부가 있겠는가? 세포와 세포의 연결인데, 그것도 전기적 신호인 (+)와 (-)로 자극이 되어서 정보가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인데, 거기에 무슨 하나님이 들어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몸은 전부가 다 아담에 속했기에 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하나로 뭉쳐서 사는 것은 무엇인가? 주께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즉 우리를 살리는 것은 주님이 주신 생명뿐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 녹매교회의 설교- 사단이 충만, 충만 !!

제가 오늘 아침에 녹매교회의 설교 동영상을 보았는데, 구득영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하셨다는 것이다. 즉 "선악과를 따먹고 그냥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나무가 두 개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사단은 한 나무에 주목했는데, 선악과나무 열매를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무가 두 개 있다고 보셨는데, 그런 두 개의 나무가 다 우리 인간 손에 잡히지 않은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두 개의 나무가 다 말입니다" 라고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를 따먹고 나서 다른 하나를 얼른 보호하셨는데, 그때 그 남은 하나의 나무가, 이 쪽에서의 회복할 수 없는 저주를 회복시키는 나무로 오셨는데, 그래서 천국에는 선악과나무는 사라지고 생명나무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국은 선악과와 생명나무 관계로서만 설명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 주께서 하늘에서 생명의 떡으로 오셨기에, 물론 살과 피로서 오셨지만 말이다. 그렇게 생명으로 주님이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앞에서 우리 인간의 선악적인 행함은 아무런 짝에 소용이 없고, 가해자의 역할을 할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성경말씀에서 말하는 세계와 얼마나 다른 세계를 염두에 주고 살아가고 있는고 하니, 그러한 것이 다 외부에서,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 배운 것이란 말이다. 모든 것이 다, 드라마, 뉴스, 스포츠 등등, 그 모든 것이 다 그렇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다 사단의 생각인데, 그런 사단의 사고방식이 흐르고 넘친다는 말이다. 즉 충만, 충만하다는 것이다.

아예 부흥이 되었는데, 전부가 다 악마의 생각으로 말이다. 가정이나 교회나, 그 모든 구석구석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야구장을 가든, 축구장을 가든 말이다. 물론 정치판도 그렇고 말이다. 사단이 얼굴을 내밀지 않은 곳에 없는데, 특히 지역 유지가 결혼식을 하면 반드시 국회의원 화환이 등장하듯이,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마치 선거를 앞둔 국회의원과 같은데, 즉 "저는 사단인데요. 한 표 부탁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또한 전부가 다 교회이고 말이다.

◈ 예수님은, '피해자'로서 가해자인 이 세상을 접수 !!

그래서 이 세상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가해자밖에 없는데, 그런데 이러한 세상을 주님이 접수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접수할 때, 피해자로서 접수하신다는 것이 아주 기이한 현상이라는 말이다. 피해자로서 말이다. 힘이나 권력으로서 접수하시는 게 아니라, 피해를 입은 사람으로서 접수를 하신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곧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때문인데, 그러면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아버지께서는 죄가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일부러 죄를 만들어내시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즉 지옥에 갈 사람은 복음을 전해서 기어이 지옥으로 보내고 마신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은 죄를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그렇게 죄를 유발시켜놓고 지옥으로 보내는데, 즉 점잖은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서 반드시 지옥에 보내고 마신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작업을 함에 있어서 한 치의 오차나 차질이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즉 전혀 작업에 하자가 없고, 완벽하게 일을 다 처리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단을 드러내는데는 아주 정확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목사는 복음만 전하면 된다" 라는 것이다. 심방이든 뭐든 간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만 전하면 되는데, 오직 복음만 전해서 기어이 교인들이 그 복음에 반대하도록 하면 된다는 것이다. 말을 하다보니 조금 이상하게 되고 말았는데,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교인들의 입에서 "목사님, 이제 복음을 아니 다른 것을 좀 전해주세요" 라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말이다. 즉 "마이 묵었다 아이가. 이제 고마해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을 두고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가 마저 채운다고 했는데 말이다.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제 교재 162페이지를 살펴보자.

** 이제 세상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조로 짜여진다. 하나님은 약속 성취를 위하여 세상을 이런 식으로 몰고 가시는 것이다. 약속을 위한 편성이다. 이렇게 해서, 이 세상 그 누구라도 이 편성 바깥에 존재하는 자는 없다.

◈ 약속을 위한 편성 !!

무슨 뜻인가? 약속을 위한 편성 바깥에 존재하는 자는 없다는 말인데, 이것을 보다 이해가 잘 되도록 간단하게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이라고 하면, 이 세상에는 가해자만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에 보면 이런 세상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신다는 말이다.

아브라함 이후에 본격적인 언약은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주시는데, 그때 모세라는 사람에게 주게 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도 이름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모세언약부터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소개하신다는 것이다. '여호와' 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 '여호와' 라는 것은 무엇과 관련이 있는고 하니, 구체적인 하나의 인물과 상대를 해서 거기에 언약을 집어넣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게 곧 이름인데, 즉 "나에게 직접 언약을 넘겨주셨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 산이 무슨 산인가? 시내산에서 그게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시내산에 언약이 흐르게 되면, 여기에는 이렇게 언약이 '쫙' 퍼지게 되는데, 마치 잉크를 한 방울 물에 떨어뜨리면 퍼지듯이 말이다. 그렇게 퍼지게 되면, 그게 곧 거룩한 나라인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을 끌고 다니시는 하나님 !!

그러면 이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그냥 가만히 두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나라에 이리저리 끌고 가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끌고 가는가? 약속의 땅으로 끌고 가시는데, 그런데 그 약속의 땅에는 언약이 있으니, 그 약속의 땅의 영향력이 결국은 이 세상 끝 날까지 이어진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소소한 민족들이 등장하는데, 즉 블레셋과 같은 말이다.

지금은 '가자(GAZA)' 라고 하는데, 그것이 곧 팔레스타인이란 말이다. 그러니 블레셋과 팔레스타인은 서로 같은데, 즉 블레셋을 영어로 발음하니 팔레스타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블레셋과 암몬과 아람 등등이 등장하다가, 나중에는 앗수르가 등장하고, 이제 제일 마지막에는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바벨론이 끝인데, 그 뒤에 로마가 나오고 해도 전부가 다 이 바벨론의 새끼들이란 말이다. 즉 용이 있어도 여러 마리가 아닌 한 마리의 용인데, 그 용에서 대가리가 나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리가 문제가 아니라, 한 마리의 용이라는 것이다.

◈ 악마가 보고 싶다 !!

그러니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처음에 에덴동산에서 아담부부를 꼬드겼던 바로 그 뱀이, 드디어 이제 실체(實體)를 갖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이 그 얼마나 신기한 일이고, 또한 우리가 기다렸던 바가 아니냐는 것이다. "악마가 보고 싶다" 라고 하는 영화도 있는데, 그 악마가 이제 실체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악마를 보여주시는데, 그런데 그 악마를 보여줄 때는 반드시 복음 전도자에게만 악마가 구체적으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즉 악마는 복음 전도자를 미혹하고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게 곧 악마라는 것이다. 그러니 중립적(?) 입장에서 악마를 보려고 한다면, 아무리 해도 그렇게 해서는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곧 악마인데, 어떻게 악마를 보느냐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바다를 제대로 보려고 하면 바깥 해변가에서 보아야 보는 것이지, 그렇게 않고 바닷속에 빠진 물방울이 무슨 수로 바다를 보느냐는 말이다. 자기가 튀어서 오를 수도 없고 말이다. 즉 바닷속에 빠진 물방울은 바다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 바다 전체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다전체를 보려고 하면 바닷속에서 나와서 해변가에 있어야 하듯이, 과거에는 애굽에 있었는데 이제 거기에서 벗어난 언약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전에 있던 세계가 언약이 없이 움직인다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오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끄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무엇인지 알도록 말이다. 즉 "세상이 궁금하다" 라고 하면, "이젠 가르쳐주마"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과연, 이스라엘은 100퍼센트 언약에 순종하는가?

그런데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이스라엘 속에 언약이 들어왔을 때, 과연 "100퍼센트 이스라엘이 이 언약에 순종하는가?" 라는 점인데, 하지만 이스라엘 내부에서 반(反)언약적인 요소가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비(非)언약적인 요소가 말이다.

그리고 언약은 무엇인고 하니, 기계적으로, 즉 율법을 문자적으로 보는 것이 언약이 아니라,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하나님의 성신이 와서 해석하는 것, 그 둘의 사이의 충돌에서 비롯된 바로 그것이 율법의 진수가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이 참으로 어려운데, 무슨 뜻인고 하니, "율법에 대해서 알았으니 이제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이 맞다" 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가 알고 있는 문자적인 해석을 하는 자들이 있는 반면에, 성신이 임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라고 나대다가(설치다가?) 순교를 당하고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는, 그렇게 그 틈새에서 새롭게 삐져(삐쳐?) 나오는, 바로 그런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 문대니까 삐져 나오는, 바로 그것 !!

예를 들어서, 이렇게 식빵 두 개 사이에 하얀 생크림을 발라놓고, 그 식빵을 그냥 곱게 두면 되는데, 그런데 아이들이 와서 그만 식빵을 문대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그 네모만 식빵 슬라이드 가에 무엇이 삐쳐서 나오는가? 그만 생크림이 뿌지직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해서 삐져 나온 것이 곧 언약의 진수라는 말이다. 즉 문대니까(문지르니까?) 빠져 나온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예를 들어서, 기드온이 300명을 데리고서 미디안을 쳐부수었는데, 그렇다면 이 기드온이 메시야인가? 그게 아니면, 기드온에게 전쟁을 할 때 자기들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고 불평을 한 에브라임 사람들의 지도자가 메시야인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한 둘의 다툼 가운데서 삐쳐 나온 것, 즉 "아하, 여호와께서 하셨구나!"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자 사울이 다윗을 공격하는데, 그렇다면 다윗이 메시야인가? 그게 아니라면 사울이 메시야인가? 물론 둘 다 아닌데, 그래서 다윗이 뭐라고 하는가? "내가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하셨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삐져 나온 것,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다윗은 자기 부인이 되는데, 즉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라고 말이다.

◈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낫게 했는데, 그러자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뭐라고 하는가? 베드로와 요한의 경건과 열심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다고 했는데,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뭐라고 하는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물론 앉은뱅이가 믿음이 좋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또한 베드로와 요한을 추종하는 자들이 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행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 3: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행 3: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행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피해자'의 입장에서 !!

그렇다면 이렇게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라고 하는 그 틈새에서 무엇이 발생하는가? 주께서 믿음을 주셔, 즉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앉은뱅이가 나았다" 라고 함으로서, 그렇게 주님이 등장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주님이 삐져 나오는데, 그런데 그렇게 주님이 삐져 나오기 위해서는 항상 복음에 의해서 살아가는, 즉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 땅에서 피해자의 입장에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말이다.

◈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

그래서 사도바울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가 자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너무나도 자기 병이 고통스러워서 자기 몸에 있는 사단의 가시를 빼달라고 3번이나 기도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가 마지막으로 받은 응답이 무엇인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는 것이다.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이러한 긴 이야기를 세 글자로 줄이면 무엇인가? '족하다' 라는 것인데, 이러한 것을 액자에 넣어서 걸어놓으라는 것이다. 혹은 '만족하다' 라고 하든지 말이다. 그런데 저는 그러한 성경구절을 걸어놓은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하면 된다' 라고 하는, 그런 조폭들이나 좋아할 만한 것을 액자로 만들어서 걸어놓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내 은혜가 네게 족하기 때문에, 내가 위대하다" 라는 의미가 전혀 아니라, 자기 안에 사단의 가시가 새삼스럽게 들어온다고 할지라도, 그것마저도 주님의 은혜로 족하다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상대방을 바라보면서, 자기에게 없는 것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해서 그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각자 각자 성도에게는 사단의 가시가 다 있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가 남의 사정을 다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는 주님의 은혜가 족합니다" 라고 하는, 바로 그런 이야기가 그리워진다는 말이다. 주님의 은혜가 말이다.

◈ 인간은, 마귀가 준 자유를 !!

다시 말씀을 드리면, '자유' 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두 가지가 있는데, 즉 인간으로부터의 자유와 신으로부터의 자유가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유에 개입되는 것은 마귀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이 마귀에 의해서 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는데, 그 순간 그만 이미 사단의 종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죄의 종, 율법의 종, 사단의 종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거기에 그렇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어버리니 인간은 율법의 종이 되었고, 또 사단을 보내니 사단의 종이 되었고, 그리고 죽음이 찾아오니까 인간은 죽음의 종이 되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또한 죄가 오니 죄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나무로 오신 것은, 현재 우리 상황이 우리의 힘으로 이 4가지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음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사랑과 자유를 주신다는 것이다. 즉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자유' 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에게 속한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똘마니가 된 것을 그야말로 축복으로 여겨야 한다는 말이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바울은 !!

그래서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면 대부분이 어떻게 시작하는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바울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얼마나 영광스럽게 생각하는지 모르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말이다.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뭐라고 하는가? 자기가 사기를 당했다고 너무 고소고발을 하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그런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도의 신분은 천사도 부러워서 미친다는 것이다. 성도의 신분은 그렇게 귀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겨우 돈 몇 푼 때문에 그렇게 분란을 일으키고 하면 주님께서 주신 그 은혜가 값이 떨어지고 마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가 결국 주님의 가해자로 가고 만다는 것이다. 주님은 피해가 되고 말이다. (녹취자 - 목사님, 오히려 그것이 맞는 코스가 아닌가요?)

◈ 아하, 그렇구나 !!

그러니 주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 내부에서 벌써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조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우리 속에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왔다고 하는 표시라고 여기고 감사히 여기면 되고 말이다. 즉 "아하, 드디어 내 속에 사단이 아닌 다른 것이 들어오셨구나. 그런데 그분은 우리를 사단으로부터 해방을 시키려고 오셨구나" 라고 말이다.

물론 우리는 죄에서, 율법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는데, 그런데 주께서 십자가를 알게 해주셔서, 우리가 벗어나지 못한 것을 벗어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벗어나지 못한 것을, 주께서 찾아오셔서 말이다.

◈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

제가 광주에서 그런 강의를 했지 싶은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어도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지라고 하면 빠진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 주님은 믿음을 설명할 때는, 항상 우리가 우리가 이루지 못하는 것에다가, 즉 절벽에 우리가 밀어 부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절벽에 밀어 부치면서 "야, 니가 이 절벽을 통과해서 저쪽으로 갈 수 있는가?"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해야하는가?

(마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 주님 : 야야?
* 성도 : 예.
* 주님 : 저기 절벽으로 좀 가줄래?
* 성도 : 예?
* 주님 : 저 절벽으로 통과해서 저 건너편으로 갈 수 있나?
* 성도 : 주여,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저는 못합니다.
* 주님 : 정말로 못하지?
* 성도 : 예. 정말 못합니다.
* 주님 : 그런데 만약에 되면 니가 했다고 할래?
* 성도 :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이 하신 것이 무엇인가? 바로 '죄용서' 인데, 그러니 이 죄용서, 즉 죄사함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 모르는데, 카퍼필드가 만리장성을 통과하는 마술보다 더 신기하다는 것이다. 분명히 안 되는데, 자기에게 죄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 그런데 뜯어보니 죄가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언약의 효과인데, 즉 십자가 피의 효과라는 말이다.

만약에 이것을 안다고 하면, 신학박사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박사라고 해도 피만 증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안 되니, 즉 성령을 받지 못해서 이것을 모르니, 이것을 지식으로만 알고 있으니 엉뚱한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 행함으로 죽음을 뚫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 중요한 것은, 복음전파의 사명 !!

양 사방에서 짱돌이 날아오는데 설교할 인간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스데반 집사는 그것을 알면서도 설교를 했는데, 왜 그런가? 그는 이미 죽음을 뚫었기 때문에, 돌에 맞아 죽는 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사명은 돌에 맞아 죽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돌에 맞든지 말든지 하는 것은 저쪽에서 할 일이고, 자기의 할 일은 무엇인가? 어떻게 폼 나게 돌에 맞아서 죽느냐가 아니라, 오직 복음의 전파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복음을 전파하는데 교인이 3명밖에 없다고 하면, 그것은 전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교인이 많이 있었는가? 그게 아닌데, 알렉산더와 같은 자는 핍박을 하고 했는데, 물론 그를 옹호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정 들자 떠났다는 것이다. 기껏 오래 머문 곳이 에베소서에서 일년 반 정도인데, 대부분이 그렇게 떠돌이로서 살았다는 말이다. 물론 저는 떠나고 싶어도 갈 곳이 없는데, 불러주는 곳도 없고 말이다(ㅋㅋ).

◈ 어떤 자가 가해자인가?

지금 제가 '가해자'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 교재에 나오는 것은 가해자의 인물상이나 그의 정신상태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어떤 자가 가해자인가?" 라는 것이다.

교재 162페이지를 살펴보자.

** 가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지만, 아벨은 가인에게 버림을 받은 자이다. 따라서 이 세상은 사람에게 버림받은 자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로 양분된다. 이 양분을 위하여 하나님마저 사람에게 버림을 받은 분으로 오시게 되었다. 사람이 버린 하나님이야말로 참 하나님이시다. 사람에게 환영을 받는 하나님은 악마가 보내준 메시아이다.

계속해서 살펴보자.

** 그래서 참 하나님은 인간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는 이유를 한 보따리를 들고 나타나시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는 모두 한 통속이 되어서 가인의 길을 간다.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한 것을 숨기고 사는 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신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았다는 증거로 힘을 과시한다.

(창 4: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창 4: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 죽여버릴 거야 !!

여기 창세기 4장 23절 이하에 보면 라멕이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즉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어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가인의 7대 후손인 라멕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든지 우리에게도 이런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여러 수십 수백 번을 순간적으로 말이다. 즉 "누구야? 나를 건드리는 놈이. 그만 죽여버릴 거야. 하지만 내가 성질이 좋아서 참는거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성질이 좋아서 참는다는 것이지, 그 "그만 죽여버릴 거야" 라고 하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에이, 더러버라. 술이나 한 잔 먹자" 라고 하는데, 그러니 한 잔의 술로서 참는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에 다니는 경우에는 "주여, 주여!" 라고, 그렇게 참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참을 문제가 아니라, 즉 참는다고 해서 라멕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생각이 떠오른다는 자체가 라멕과 동일하다는 말이다. 물론 참는다고 해서 자기 성질이 전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 777 … ∞ !!

그리고 여기 24절에 보면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 라멕이란 사람은 가인이 없었다고 하면 "나를 건드리는 놈은 벌이 7배이다" 라고 했을 것인데, 그런데 가인이 있기 때문에 "나를 건드리는 놈은 벌이 77배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라멕의 그 다음 사람은 무엇인가? "나를 건드리는 놈은 벌이 777배이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완전히 빠찡코에 있어서 대박 숫자인데, 수박이 3개 동시에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밑에서는 동전이 줄줄 쏟아지고 말이다(ㅋㅋ). 그렇게 해서 자꾸 나가면, 이 7이 그만 어떻게 되겠는가? 무한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로마서 -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

그래서 로마서에서 이 믿음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복수하는 마음' 이라고 했는데, 즉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마음이라는 말이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믿음에 대해서 정확하게 잘 표현했는데, 그렇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일터 !!

어제 설교시간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 몸은 하나님의 일터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일터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우리의 몸에 무엇을 불러들였는가? 우리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즉 우리 자신을 공격하고 모함하는 요소를 일부러 끌어당겼다는 것이다. 주께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다 불뚝 성질이 있어서 갑자기 뭐라고 하는가? "나는 죽이려고 하는 놈은 77777배의 벌을 받는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터져 나오고 보니, 누가 언약을 방해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내가 손을 좀 봐야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 자신의 복수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주님을 대신해서 자기가 나서서 복수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우리는 주님의 소유가 아니라, 평소에 자기 것이라고 숨겨놓았던 것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꼬깃꼬깃 숨겨놓았던 것이 말이다. 즉 "이것은 내가 손을 좀 봐야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라고 하면 심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데, 우리 자신이 알아서 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주께서 친히 복수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께서 친히 복수하신다는 것은, 우리 원한을 주께서 갚아주신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우리의 원한은 복음과는 무관하게 개인적으로 우리 자신의 성질이 더러워서 원수를 갚겠다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런 것이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 주님의 복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해 !!

그러므로 우리가 복수를 원한다고 해서 주님이 곧이곧대로 다 해주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복수는 언약적인 입장에서 해주게 되는데,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감정적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성질이 너무 급해서 그런 것도 전혀 구분하지 않고 복수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언약적인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말이다. 그러니 진짜 주님의 복수는 우리를 그만 부끄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웃집 아줌마가 안식교에 다니는 것을 보면 "저거, 언젠가 한방 먹이고 말거야" 라고 하고 있는데, 그런데 자기 집 수도가 그만 고장이 나서 끙끙거리고 있는데, 그 아줌마가 친절하게도 호수를 길게 연결해 가지고 와서는 "아저씨, 이 물이라도 좀 쓰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친절한 복수, 즉 이단은 이단이고, 얻어먹을 것은 얻어먹어야 한다는 것이다(ㅋㅋ).

자기가 몸이 아파서 끙끙거리고 있는데, 그런데 아무도 와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 교인이 찾아와서 돌보아줄 때,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때는 "그래도 이단은 잘 만나야 돼"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은가?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희망대로 복수를 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피해를 주님이 갚아주시는 게 아니라, "나는 피해자이다" 라고 우기는 우리 자신이 오히려 주님에 대해서 가해자 행세를 하게 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닌데, 우리는 늘상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는 아니라고 하지만, 주님을 힘들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일들이 항상 발생하기 때문에 제가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에 과연 경건한 자가 있는가?" 라는 것인데, 자기는 경건하다고 하지만, 살펴보면 하는 짓들이 다 가해자가 하는 짓이라는 말이다.

◈ 성도는, 율법에 대해서 아주 민감해 !!

성령을 받은 성도는 물론 율법에 대해서는 자유롭지만, 하지만 이 율법에 대해서 아주 민감하고 감수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해도 거기서 자기 죄를 찾기 때문에, "주위 환경이 그런데 어떻게 하겠노? 할 수 없지" 라고 하면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일이 다 주님의 은혜인데, 그렇게 모든 것이 은혜라고 하면, 그 모든 것에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죄가 개입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죄가 어떻게 거기에 개입이 되어있기에, 주께서는 그것을 십자가의 은혜로서 갚아주는 식으로, 그렇게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지, 바로 그것을 찾기 위해서 자기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결코 자기 행동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어쩌란 말인가? 내가 막 살겠다고 하는데, 그런데 니가 왜?" 라는 식으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성도는, '막 살게' 되어있어 !!

그렇게 "나는 막 산다" 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막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말을 또 이해하지 못하지 싶은데(ㅋㅋ), 즉 막 사는 것을 전혀 자기 자랑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때문에 막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 대해서 관리하고 조심하게 되면, 자기는 막 사는 존재가 아니라고 우기는, 오히려 교만한 인간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막 산다" 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기어이 최후까지 살아남아서 자신은 결코 죽어서도, 버림을 받아서도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리려고 한다. 그래서 '피'를 잊고 산다.

라멕은 가인보다 자기 자신이 더 소중한 존재라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가인의 벌은 7배이지만 자신의 벌은 77배이니 말이다. 즉 11배나 자기가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다가 7을 하나 더 붙이면 어떻게 되는가? 무려 111배나 더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가인과 같은 존재는 모두 다 없어져도 자기는 기어이 살아남고자 하는 것, 바로 그것이 '라멕' 이라는 말이다. 우리도 굳이 남에게 어떤 구체적인 해꼬지를 하지 않아도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라멕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충만 충만한가? 정말로 그렇지 않은가? 

◈ 라멕 - 어디, 나에게 손을 대 !!

그러니 우리는 남이 건드리게 되면 "어디, 나에게 손을 대" 라고 하는데, 바로 그렇게 777배나 되는 벌을 누가 대신해서 갚아주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해꼬지를 한 인간에게 777배나 갚아주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니가 친히 심판을 하지 말라" 라고 했으니, 그러면 우리는 그 심판을 누구에게 맡기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맡기게 되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777배나 갚아주시는가? 턱도 없는 소리인데,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고 있느냐는 말이다.

◈ 과연 누구의 원수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심판은 예수님이 행하신 십자가와 관련이 되어서, 하나님은 그렇게 심판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사사로운 원수를 갚아주는 식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저의 돈을 떼먹은 그 인간도 보니까 잘만 살고 있던데 말이다(ㅋㅋ). 

예를 들어서, 바람이 나서 마누라를 버리고 처녀장가를 간 놈을 보라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본 마누라가 얼마나 이를 가는지 모르는데, 즉 "니가 어디 잘 사는지 한번 보자" 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신이시여, 저 놈을 고소합니다. 제발이지 복수해주세요"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놈과 그년이 어떻게 사는가? 매일같이 싸움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알콩다콩 자식을 줄줄 낳고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사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쪽은 그만 복수심에 불타서 완전히 꼬라박은 인생이 되어버리고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세상은 예수님 중심의 피해자와 가해자인데, 그런데 우리는 자기 중심으로 피해자와 가해자를 편성하게 되니, 이런 엄청난 오해가 또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는 말씀도 보지 않고, 예수님에게도 관심이 없고, 그리고는 자기가 피곤하면 하나님께 달려드는데, 즉 "왜 하나님은 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습니까? 저를 건드리면 벌을 77배나 받아야 하는데, 도대체 이게 뭡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니 복음을 아는 목사라고 한다면 얼마나 환장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제발 주님의 자리에 와서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아무리 외쳐도, 전혀 주님의 자리에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꼭 자기 자리를 고수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놈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아무리 당겨도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기어이 최후까지 살아남아서 자신은 결코 죽어서도 버림을 받아서 안 되는 존재임을 알리려 한다. 그래서 '피'를 잊고 산다. 하지만 하나님은 피에서 '피의 자식'을 부활시킨다.

(창 4: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 Son of Blood !!

여기 교재에 보면 '피의 자식'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저도 이러한 용어를 사용한 기억이 지금은 없는데 말이다(ㅋㅋ). 그러면' 피의 자식' 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여기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죽은 아벨 대신에 누구를 주시는가?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시는데, 그러니 이 셋은 피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교회인데,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라고 한다는 것이다. '피의 자식', 즉 'Son of Blood' 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저에게 영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신 영어 선생님도 계시지만, 그래도 이렇게 중요한 용어가 나오게 되면 영어방언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ㅋㅋ).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 모세의 경우에 !!

이런 피의 자식과 대비되는 것이 혈통의 자식인데, 그래서 아브라함 언약에 보면 할례언약이 있다는 것이다. 이 할례언약에 준해서 십보라가 자기 남편인 모세를 보고 뭐라고 하는가? '피 남편' 이라고 했는데, 자기 남편이 아니고 말이다. 십보라가 삐친 것 같은데(?), 즉 "아이쿠, 당신은 이제 피와 같이 살아라" 라는 의미에서 피 남편이라고 했다는 말이다(ㅋㅋ). 그렇더라도 아무튼 남편이 살았으니 다행이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목사님, 그게 ??

물론 알았는데, 그래서 자기 자식의 고추 끝을 잘라서 모세에게 던졌다는 것이다. 그때 모세는 그야말로 눈동자가 돌아갈 정도로 완전히 맛이 간 상태였는데, 그래서 "가만히 있어봐라.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 것이 있지 싶은데, 그게 뭐지? 맞아. 우리가 자식놈의 할례를 행하지 않았어" 라고 해서, 그래서 십모라가 자식에게 할례를 행해서, 그 잘린 자식의 고추 끝을 모세의 생식기 앞에 던졌는데, 그러자 모세가 무사히 회복이 되었다는 것이다.

(출 4:20)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출 4: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출 4: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출 4:24)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출 4:25)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출 4:26)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당할 뿐 !!

그러니 십보라가 알았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십보라의 경우에, 자기 가정이 결코 자기 중심이 아니라 언약 중심으로, 즉 피의 언약이 지배하는 가정임일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좋아서 고백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아무튼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감격해서 한 것은 아니고 말이다.

나중에 이런 십보라의 모든 행적을 보게 되면, "어쩔 수 없었다" 라고 요약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것이 언약적으로는 더 순수하다는 것이다. 기쁘게 반기는 것보다 말이다. 왜 그런가?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당할 뿐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구원을 받는 것이지, 먼저 손을 들고 좋아서 "예수님, 어서 오세요.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은, 그런 인간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찾아오시니 "주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천국에 가야되는군요" 라는 것인데, 이게 요즘 말로 하면 무슨 의미인가? "주님,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미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라는 것인데, 즉 자미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강구 게를 먹어도 별로이고, 거제도 가물치를 먹어도 그렇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연세가 많은 분들의 깊은 지혜인데, 촐랑거리는 20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인네들은 일찍 잠자리에 든다는 것이다. 물론 젊은 아이들은 재미가 있어서 새벽 2시까지 잠을 잘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예배시간에 지각하고 말이다(ㅋㅋ).

◈ 셋 - 피의 자식인 아벨의 부활 !!

그러니 하나님께서 셋을 주신 것은 피의 자식인 아벨을 부활시키는 것인데, 물론 이것은 저의 의견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김이곤 교수의 책(신의 약속은 파기될 수 없다?)에도 보면 나와있다는 것이다. 즉 셋이 살아가는 인생은 아벨을 보여주기 위한 부활체이기 때문에, 셋은 자기 인생이 있는가? 그게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아벨을 대체하기 때문에 말이다.

◈ 이근호, 너의 인생은 이제 없어 !!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인생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가? "이근호, 너의 인생은 이제 없어" 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요?" 라고 하는데, 왜 그런가? 주님께서는 "이미 너는 죽었고, 나와 함께 부활했기 때문에 너의 인생은 없는 거야"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바로 그럴 때 그 관계를 두고 '의(義)의 관계' 라고 하고, 우리는 '의(義)의 종'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도 자기가 죄가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게 곧 의가 된다는 말이다. 재미있지요? 즉 우리가 무엇을 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죄가 되기 때문에, 그게 곧 의의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의의 종이 되고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는데, 그러니 라멕이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고 라멕은 한꺼번에 뭉쳐버리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뭉쳐서 그들을 이 땅에서 불의 심판이 아닌 물의 심판을 받아서 마땅한 집단으로서, 그렇게 그들은 묶어진다는 것이다. 마치 농부가 볏집을 하나의 단으로 묶듯이 말이다.

그렇게 묶는데, 그런데 이쪽은 무엇인가? '죽었더라, 죽었더라' 라는 것 속에서 '살았더라' 라는 것이 그만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하나님의 초점은 무엇인고 하니까, 기존의 큰소리를 치는, 즉 "나에게 덤비는 놈은 벌이 77배이다" 라는 것은 그냥 놔두고, 그런 쓰레기와 같은 인간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노아'는 어느 계통에서 나왔는가?

그렇다면 진짜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노아가 과연 어느 계통에서 나왔는가? 라는 것인데, 어느 계통인가? 가인이 아닌 죽은 아벨의 계통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벨이 죽어도 전혀 게임이 끝난 것이 아닌데, 그것은 전반전에 불과한 것이고 이제 본격적인 게임은 후반전부터 시작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죽어도 사는 것, 바로 그렇게 죽어도 산다고 하는 노아언약을 알려주기 위해서 애초부터 아벨은 이 땅에서 죽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계획이라는 것이다. 즉 가인에게 아벨이 죽으면 그 피가 땅에 묻히게 되고, 그래서 땅이 하나님에게 호소하게 되면, 땅은 저주를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저주가 된다는 말이다.

◈ 아벨은 죽어야만 !!

중요한 부분이라서 다시 하겠는데, 가인이 아벨을 죽이면 아벨은 죽게 되어서 피를 흘리는데, 그 피는 땅을 적시게 되고, 또 땅은 하나님께 호소하게 되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을 위해서 이런 피 묻은 땅을 저주하게 되는데, 그런 저주로 인해서 이 땅의 모든 사람을 다 죽이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저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다 죽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여기에 한 사람이 개입하게 되는데, 그게 누구인고 하니, 바로 '노아' 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아의 뜻이 무엇인고 하니 '안식' 인데, 즉 땅을 안식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해야 될 증거물로서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창세기 5장과 6장의 테마인데, 그것이 나중에는 9장까지 이어지고 말이다. 그러니 간단하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은 심판을 당하는데, 바로 그렇게 심판을 당하는 이유를 알려주기 위해서 심판에서 면제를 받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세언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즉 애굽에서 심판을 받아야만 마땅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애굽에서 속하지 않고 애굽이 심판을 받기 전에 튀어나와야 하는데, 그래서 '출애굽'이 되어야 하는 인사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곧 이스라엘인데, 그렇게 이렇게 튀어나올 때의 능력이 어느 정도의 능력인고 하니, 하나님마저도 이기는 능력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 누가 하나님을 이길 수가 있는가?

도대체 누가 하나님을 이길 수가 있는가? 그런데 '이스라엘' 이란 이름자체가 무슨 뜻인가? "하나님마저도 이겼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하나님마저도 이기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과 저주에 대해서 전혀 이길 수가 없고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창 32: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초라하고 촌스러워서 보여도 우리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마저도 이긴 사람으로서, 바로 그렇게 우리가 성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자가 곧 야곱인데, 즉 '이스라엘' 이라는 말이다.

◈ 144,000명은, 量이 아닌 質에 관한 숫자 !!

그 이스라엘의 12지파에게 이미 그리스도의 인(印)이 박히게 되는데, 그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4,000명이라는 것이다. 12지파 곱하기 12지파에 1,000인데, 즉 12지파, 12지파, 12지파, 그렇게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인이 이마에 박힌 자들이라 전파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주 특별하고 특수한 자들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12지파인 144,000명은 양(量)이 아닌 질(質)에 관한 숫자인데, 그 144,000명에게 공통적으로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발견하게 되면, 그러한 공통점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144,000에 속한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이니 이만희의 주장처럼 숫자로 따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 안에 언약적인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666도 마찬가지인데, 그러니 요한계시록의 숫자는 양이 아닌 질에 관한 내용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께서 살게 하시는데, 그래서 "나는 이전에는 축구를 좋아했는데,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싫어한다" 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믿고 난 뒤에 축구를 좋아하지 않을 수는 있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더 좋으니 말이다. 하지만 축구를 하지 않음으로서 신앙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도대체 자기가 공을 차는 것과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다 이루었다. 이제 공은 차지 마라" 라고 하셨는가? 그게 아니라, "니가 공을 차던, 그 무엇을 차던 간에 내가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것이 십자가인데 말이다.

◈ 다 이루었다. 하지만 ??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 다만 죄는 짓지 말라" 라고 하셨는가?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죄를 지으면 십자가는 그만 무효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그런 십자가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와 흥정을 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직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전혀 거기에 끼워들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바로 그렇게 "다 이루었다" 라고 작품이 곧 우리 자신인데, 그러니 주님께서는 우리와 흥정을 하자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니가 나 예수를 믿고 착한 일을 할래? 말래? 만약 착한 일을 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라고 흥정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다 이루심의 결과물이 곧 성도라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아예 소급을 해버리는데, 즉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원인까지도 소급을 하시는데, 그래서 결과물을 보게 되면,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결과물이 곧 우리가 된다는 것이다.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 그냥 살아도, 그게 곧 막 사는 것 !!

그렇다면 이러한 생각이 우리에게 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도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을 해도 죄라는 것이다. 즉 막 살아도 죄이고, 막 살지 않아도 죄인데, 그러니 가만히 있어도 막 사는 것이기에 일부러 막 살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그냥 살아도 그게 막 사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막 산다' 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왜냐하면, 그런 말을 해야 가짜가 마구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다들 그냥 조용히 있는데,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순간 여기 저기서 마구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 셋 - '나의 나 된 것은 아벨 덕분입니다' !!

아무튼 여기서 '피의 자식' 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부활한 본인의 피의 자식인 셋이 아벨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가인이 죽인 사람은 벌이 7배지만, 셋을 죽인 사람은 77배이다" 라는 말을 과연 셋이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오히려 "나의 나 된 것은 아벨 덕분입니다" 라고 나오지 말이다.

그것이 바로 가인의 노선과 차이가 나는 것인데, 즉 라멕이 말한 것과 말이다. 그러니 노아의 경우에 "내가 잘나서 방주를 만들었다" 라고 주장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처음부터 아벨의 피로 말미암아서, 즉 그 피로 인해서 노아가 된 것이기에 말이다. 그러한 은혜가 없는 노아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믿음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 !!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의 경우에도, 예수님이 없고 십자가가 없는 우리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십자가를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없으면 그런 십자가를 믿는 믿음도 우리에게서 전혀 발생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신앙이란 것은 자기 직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된 것은 은혜입니다" 라고 하는 것을 매일같이 그것을 깊이 있게 온 몸으로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외면하는 그 순간 우리는 무엇이 되는가? 라멕이 되는데, 즉 "누구야, 나를 건드리는 놈이?" 라고 말이다. 즉 "나는 내가 공을 들여서 이만큼 살았다" 라고 우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외부와 내부를 구분해서 자기 '내부'를 가진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욥기에 나오는 사단의 생각이고 말이다. 자기 내부를 따로 챙기고 있는, 즉 "하나님,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제발 손대지 마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

물론 욥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욥의 생명만은 사단이 손대지 못하게 하셨는데, 오늘날 신약시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는, 그런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고 한다는 것이다.

(히 11: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히 11: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그렇게 고난을 받는 것을 애굽의 보화보다도 더욱 귀하게 여기는데, 그것은 행함에 관한, 즉 우리의 실천의 문제가 아니라, 주께서 믿는 자를 그런 믿음에 맞추어서, 우리의 인생을 그렇게 몰고 가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몰고 가면 우리가 내뱉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아픔과 고통 가운데서 그렇게 내뱉는 것도 되지만, 갑자가 재산이 수 천억으로 불어났다고 하면, 아니면 어떤 권력이 있는 조직체의 우두머리가 되던지, 수 천명이나 되는 큰 교회의 당회장이 되었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그렇게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감사 !!

제가 울산에서 출애굽기를 강의하면서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까, "많은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람이 없다" 라고 말이다. 그때 예를 들기를, 어떤 사람이 한 달에 건물 임대료만 1억을 받을 때도, "주여, 정말로 모자람이 없군요" 라고,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출 16: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출 16: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출 16: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출 16: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런데 그게 아니라, "주여, 너무나 많아요"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갈 만큼 딱 맞게 1억을 주시네요" 라고 해야하고 말이다(ㅋㅋ). 이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폭삭 모두 망해서 하루에 단돈 2천 원을 벌어도, "저에게 딱 맞게 주시네요" 라고 하면 되고 말이다.

그러니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그냥 주시는 것이니, 항상 거기에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고 하는 말씀이 잔잔하게 증거되라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험악한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가인이나 라멕처럼 이 세상에 대해서 한이 맺힌 것이 가득가득 차서, 그야말로 불뚝 성질을 내면서 짜증으로 24시간을 보내면서 원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더러운 성질조차도 주께서 십자가를 돌아보게 하는 순간, 주께서 창세 전부터 예비하신 주님의 사랑과 긍휼하심과 그 은혜가 얼마나 고마운지 다시 깨닫게 됩니다. 이런 고마움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저희들이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07,02 오후 7시 30분에 마침.

                                                        요즘 십자가마을이 많이 시끄럽군요. 탱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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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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