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44강 복음의 폐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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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10404피p144복음의폐쇄성

피44강 복음의 폐쇄성
        
[11 대구강의 6] - [피 44] - 복음의 폐쇄성
                                                                                
                                                   11,04,0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성령의 실제성은, 악령과의 대비에서!!

오늘은 교재 144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성령의 실제성을 논하자면 필히 악령과 대비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성령을 인간의 영과 마음과 정신과 연결시키는 것은, 차라리 이불을 뒤집어쓰고서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이 더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것이다. 

그동안 사람들이 악령을 인간과 대비시킨 경우들이 많았는데, 즉 "우리 인간이 악마를 이겨야 한다", 혹은 "악마와 싸워서 어떻게 해야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가?"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우리 사람의 몸과 악령을, 즉 사단을 대비시켰는데, 하지만 그것은 전혀 잘못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실제성을 우리 몸으로 어떻게 할 수 없듯이, 악령도 역시 우리 몸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녹취자 - 목사님, 실제성이 아닌 실재성(實在性)이 아닌가요? 실제(實際)는 '사실의 경우나 형편'을 의미하고, 그리고 실재(實在)는 '실제로 존재함'을 의미함)

알다시피 악령은 타락한 천사인데, 그러면 천사와 인간이 싸워서 누가 이기겠는가? 인간은 처음부터 깨지고 말았는데, 즉 인간은 천사인 악령의 상대가 결코 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1라운드에서 바로 그냥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부터 악령의 지배아래에 놓이고 말았는데, 그러니 그야말로 "너, 꼼짝마!" 라는 것이다.

◈ 인간은, 복음에 불순종을 할 수밖에 없어 !!

그것이 성경 여러 군데에 나오지만, 그 대표적인 것이 에베소서 2장의 말씀인데, 2절에 보면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순종을 하든지, 불순종을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우리가 순종하고 싶어서 순종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불순종을 하고 싶어서 불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러니 순종, 혹은 불순종을 하게 하는 영이 그 위에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권세' 라고 하는데, 즉 우리가 어떻게 거부할 수 없는 강한 힘으로 지배하고 있으니, 우리 인간은 복음에 대해서 불순종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인간의 실존이라고 할까,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악령과 결부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것도 모르고 자기가 하나님을 한번 믿어보겠다고 까불거리고 하는데, 아무리 그렇게 해봐야 악령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섬겨보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하겠다는 것은?

그러니 결국에는 악령이 원하는 바, 즉 성령인 예수님의 영을 훼방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는 하나님과 상대를 하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결국 예수님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전락을 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즉 잠시 예수님이 개입했다가 빠져버리고, 이제는 잘난 자기가 잘나신 하나님에게 직접 상대하겠다고 하는 아이디어가, 그것이 악령의 지배를 받은 자들의 공통점이라는 말이다. 

모든 교회가 거의 다 그러한데, 즉 "굳이 아들과 상대할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아버지와 상대하면 그만이지" 라고, 아주 가볍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악령이 무엇을 원하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악령은, 즉 귀신은 하나님이 계시는 줄 아는데, 그래서 믿고 떨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지만 그런 사탄이 결국 노리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의 주(主)가 되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극구 반대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주가 되어버리면 피조물은 가치가 없다는 것인데, 즉 마치 꼭두각시나 로봇처럼 되고 만다는 것이다.

◈ 그들은 왜 악령을 무시하는가?

제가 처음에 복음을 증거하고 했을 때, 수많은 선교단체에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우리가 로봇인가?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지 않는가?" 라고 하면서 반대를 했는데, 제가 그렇게 굉장히 비난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좋게 말해서, 학생들이 교회에서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아서 그렇게 했다고 볼 수 있는데 말이다.

아무튼 이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악령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자꾸만 애써 모른 척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뭐라고 하는가? 우리 힘으로 깨달음을 얻었으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자꾸만 그런 식으로 나가는데, 즉 악령을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성령은 무엇인고 하니, 열심히 기도하면 성령을 받아서, 그 받은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개혁주의도 그렇고 말이다. 과거에 성령을 받기 전에는 말씀, 즉 율법을 지키지 못했지만, 이제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무엇이 빠졌는가? 그만 악령이 없다는 것이다. 성령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악령과 대비해야 하는데 말이다.

◈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와 상대하시는가?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즉 "성령은 우리 인간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악령과 상대하신다" 하고 하면 말이 되는데, 즉 예수님은 우리가 아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악령과 상대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이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베드로가 자기가 수제자랍시고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을 목숨 바쳐 죽기까지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나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31절에 보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그러니 사단의 경우에, 지금 베드로가 하는 짓거리가 얼마나 우스웠겠느냐는 말이다. 예수님의 수제자랍시고 한다는 꼴이 말이다. 베드로는 자기 손아귀에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사단이 베드로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베드로가 사단과 싸워서 이겨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이 사단을 장악한 것이 베드로가 아니라 도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곧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사단을 상대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사단은 베드로에게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단은 결코 베드로를 함부로 지옥으로 데리고 갈 수가 없는데, 전적으로 예수님 때문에 말이다.

◈ 권사님, 뭐 하세요?

그것은 우리 권사님의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기 때문에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 것이지, 단독적으로, 즉 "예수님을 믿었으니 이제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 권사님은 커피를(?) 탄다고 바쁜데 말이다(ㅋㅋ).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뭔가 조치를 해주어야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지, 그게 아니고 "이제는 구원을 받았으니 내가 알아서 하면 되겠지" 라고 한다면, 그렇게 되면 결국은 시험에 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악마는 믿는 자도 마지막 때에 삼키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그야말로 굶주려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과 같은 상태에서, 그렇게 성도를 장악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그런데 어떻게 성도라고 봐주고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사단은 없다는 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시험에 들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 이 사람이 곧 사단이다 !!

그렇다면 여기에서 "목사님, 우리가 사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라고 질문을 할 수가 있는데, 즉 사단이 어떻게 하는지 그것이 궁금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사단의 모습이 궁금하고 보고 싶다는 것이다.

사실 사단의 모습은 우리가 봐도 인간과 별 차이가 없는데, 시시때때로 자꾸만 바뀌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사단은 그 모습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대신에 사단의 기능, 즉 사단의 목적, 방법, 이유, 취지 등등, 그런 것을 알면 된다는 것이다.

◈ 가룟 유다의 경우에 !!

사단의 취지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있는데, 즉 예수님께서 아예 "이 사람은 사단이다" 라고 지목해서 말한 자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가룟 유다인데, 이 가룟 유다는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어서, 사단의 기능을 담당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로 개입된 자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가룟 유다를 사단이 지배한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까, 우리 인간이 예수님을 안다고 했을 때, 그렇게 예수님만을 알아서는 예수님을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없고,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상관했는지, 그것을 같이 겸해서 알아야만, 그렇게 되어야 우리 모습이 가룟 유다의 생각과 일치가 되는지, 아니라면 예수님의 생각과 일치가 되는지, 비로소 우리가 확인절차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가룟 유다가 예수님으로부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게 전혀 아닌데, 즉 예수님의 기적에 동참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가룟 유다도 분명히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그도 기적을 일으켰고 권능을 행했다는 것이다.

이런 가룟 유다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니는 니 갈 길로 가거라" 라고 하셨는데, 즉 "가룟 유다야, 니는 니 일을 해라" 라는 것이다. 가룟 유다의 할 일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요 13: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요 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 십자가의 그 시발점을 가룟 유다로 !!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되어있는데, 사실상 그 시발점을 가룟 유다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 중에서 하나가, 혹은 친구 중에서 하나가 발을 들었다고 하는 것처럼, 제자가 스승을 팔아먹는 그것이 본격적인 십자가의 시발점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가룟 유다가 그 이전에는 예수님과 관련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관련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예수님의 제자인데,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가 자기 스승을 팔아먹었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십자가' 라고 하는 것이 이방인들에 의해서 공격을 당하는 것은, 물론 나중에 확산이 되면 그렇게 되겠지만, 이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과연 나는 베드로인가? 아니면 가룟 유다인가?" 라는 것이, 그것이 십자가에 다가가면 갈수록 드러난다는 것이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둘 다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것인데,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냥 자기 갈 길을 가버리고, 이 베드로는 어떠한가?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는 말인가?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신다"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게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또한 여기 2절에서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예수님을 팔아먹겠다고 하는 것은 가룟 유다의 본심이 아니라, 그 안에 누가 들어갔다는 말인가? 마귀가 들어가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즉 마귀의 일은 항상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고 말이다.

◈ 추상적 보편성과 구체적 보편성 !!

그러니 '하나님' 이라고 하는 것은, 즉 신의 존재인데, 이것을 '추상적 보편성' 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추상적 보편성'의 반대말이 '구체적 보편성' 이고 말이다. '구체적' 이라는 것은 실제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하는데, 물론 '추상적' 이라는 것은 물론 신(神)이고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구체적' 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사단은 뭐라고 하겠는가? 추상적 보편성을 강조하는데, 즉 "신을 믿으면 구원받는다" 라고 말이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항상 듣던 말이 무엇인가? 신, 즉 하나님 아버지에 관한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저는 어릴 때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말이다(ㅋㅋ).

그러나 그건 사단의 주장인데, 하지만 여기에 반해서 구체적 보편성,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것은 거의가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말이다. 기껏해야 소위 '고난주일' 이라고 해서, 잠시 언급하고 지나가 버린다는 것이다.

추상적 보편성은 이방 민족들도, 즉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자들은 모두가 다 믿는 것이란 말이다. 심지어는 절의 중들도 넘어지면 뭐라고 하는가? "아이쿠, 하나님 아버지!" 한다는 것이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기도를 하라고 하면 누구에게 하겠는가? 추상적 보편성인 신에게 기도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어쩌고저쩌고" 라고 하면서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 너무나도 구체적인 예수님 !!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이 땅에 직접 오셨고, 직접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너무나도 구체적인 그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각도 없고, "역시 그 아들을 보낸 아버지가 최고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추상적 보편성으로 곧 바로 가버린다는 것이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귀신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알고 덜덜 뜬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알고 믿고 떠들면 구원을 받는가? 천국에 갈 수 있는가?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천국에 귀신들이 우글우글하지 싶은데 말이다. 무슨 천국이 공동묘지인가? 

그러면 사단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기준이 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즉 "니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끝까지 사랑하고, 그렇게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죄가 용서되어야 구원을 받는다" 라는, 그런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반발하게 하는 것이 곧 사단이라는 말이다.

왜 반발을 하는가? "나는 뭐고, 33살을 먹은 나사렛 청년은 무엇인가?" 라고 하는데, 즉 모두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우수한 문학가와 우수한 철학자들이 뭐라고 하는가? 이런 자들이 하나님을 인정하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길이 없어서 그냥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추상적으로 얼버무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싫어하는데, 즉 "예수는 목수의 아들이고, 막달아 마리아와 도망을 가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잘 살았는데, 그런데 그러한 예수를 사도바울이 부활을 했다고 그만 구라를 쳤다" 라고, 그렇게 온갖 이야기들을 다 만들어서 한다는 것이다. 진짜 구라는 누가 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ㅋㅋ).

◈ 사랑이 곧 신이다 ??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것이 '브라만교' 라고, 즉 인도의 힌두교이고, 또한 거기서 나온 불교인데, 그러한 종교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신은 사랑이기 때문에, 곧 사랑은 신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나 불교나 차이점이 없다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백 번 맞는 말인데, 하지만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는가? 즉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떻고, 우리의 죄가 어떻고 하면, 그들은 그만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다 수용을 하지만, 그러나 너무나 구체적인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는 안 된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이렇게 열심히 착하게 도를 닦고 있는데, 그러한 자기들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만, 그러나 이렇게 팔만대장경만 붙들고 있는 자기들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는 것이다. 죄를 지을 기회조차도 없는데 말이다.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간통죄도 성립이 안 되고, 또한 빗자루로 마당을 쓸다가도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않으려고 얼른 피하는데 말이다. 

◈ 십자가가 아니라면, 인간은 죄를 몰라 !!

그래서 어제 오전설교 시간에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죄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가 이 땅에 내려와야 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라면, 우리 인간은 자기가 왜 죄인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까 불순종을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했는가? 에베소서 2장 2절에, 즉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라고, 즉 지금은 이렇게 불순종하는 악한 영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서 목사님이 보이지를 않는데, 몸살감기에 걸렸다고요?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가룟 유다와 베드로가 다 같이 예수님에게 배신을 때렸는데, 사실 둘 다 배신을 했다는 점에서는 우리는 즐거운데, 왜냐하면 우리도 돌아서면 항상 배신자이기 때문에 말이다.

◈ 배신자여, 배신자여♪

그래서 성이 '배' 씨이고 이름이 '신자' 라는 분에게는 참으로 미안한데, 그런 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노래도 있는데, 즉 "배신자여, 배신자여♪" 라고 하는 말이다. 얼마나 간절하게 배신자 씨를 부르는지 모르는데, 아마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 같은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원수 된 자들이고, 경건치 않은 자들인데, 그렇게 우리가 죄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를 흘림으로 말미암아서, 아버지도 의롭고 아들을 믿는 자도 다 같이 의롭게 되었는데, 바로 이 점에 대해서 사단은 강력하게 거부한다는 것이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렇다면 사단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의 존재를 인정하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뿐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보편성은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종교성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사단은 그런 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가룟 유다의 경우에는 "니는 니 갈 길을 가라" 라는 것이고, 반면에 베드로의 경우에는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한다" 라는 것인데, 즉 예수님께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말씀하신다는 말이다.

◈ 사랑의 종결자, 예수 그리스도 !!

그러니 결국 구원이란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과정이나 인식이 전혀 아니고,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을 끝까지 사랑으로 마감한다고 하는, 그렇게 사랑의 대상이라고 하는 종결자인데, 즉 자기 사랑을 완수하는 그분을 주님이라고 찬양하는, 바로 그것이 구원의 마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구원이 어떻게 우리 인간의 숙제로 전환된다는 말인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그냥 배신자에 불과한데, 한 평생을 살아도 말이다. 즉 은혜를 받고 뒤돌아서면 자기밖에 모르는 배신자라는 것이다.

◈ 사랑과 긍휼 !!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랑을 무엇으로 표현하는가? '긍휼'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하면서 오해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식과 부모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등으로 사랑을 생가하기 때문에, 그냥 주고받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흥사들이 이 사랑에 대해서 뭐라고 구라를 치는가? 사랑에는 3가지 종류가 있는데, 즉 남녀간의 애정인 '에로스', 친구간의 우정인 '필레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랑인 '아가페'가 있다고 말이다. 여기에 부모와의 사랑을 '스텔고' 라고 하는데, 그러나 헬라철학에도 그렇게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 플리즈, 사랑을 주세요 ??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긍휼'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긍휼은 무엇인가? 상대방이 "사랑을 주세요" 라고 해서 사랑을 준다면 그것은 긍휼이 아니라는 것이다. 긍휼, 즉 "불쌍히 여긴다" 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이 사랑을 달라고 해서 주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상대방은 전혀 아무런 철딱서니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데, 그런데 불쌍히 여기서 건져주신다는 말이다. 일방적으로 말이다.

그래서 에스겔서 16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아무 것도 모르고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이스라엘을 내가 건졌다" 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창녀처럼 돌아다니는 이스라엘을 말이다. 그들에게 고운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다는 것이다.

(겔 16:8)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16:9) 내가 물로 너를 씻겨서 네 피를 없이 하며 네게 기름을 바르고
(겔 16:10) 수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띠우고 명주로 덧입히고
(겔 16:11) 패물을 채우고 팔고리를 손목에 끼우고 사슬을 목에 드리우고
(겔 16:12) 코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나니

사랑과 긍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은, 자기가 사랑을 받을 만해서 받는다는 것인데, 즉 "내가 그동안 그렇게 투자를 했더니만, 드디어 저 여자가 나를 사랑을 고백하네" 라고 말이다. 그것이 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긍휼은 무엇인가? 상대방이 전적으로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데도, 그런데도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도달해서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 인간은, 구원받을 자격도 없는 죄인 !!

제가 그것을 '개혁주의 신학의 이단성' 이라는 글에서도 밝혔지만, 즉 "우리는 전적으로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을 정도로 죄인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죄인은 죄인이지만, 구원받을 자격은 있다" 라고 여기는 것은 전혀 잘못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을 이 세상적이 기준으로 생각하니 일어나는 현상인데, 그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긍휼은 무엇인고 하니, 전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사랑을 하시는데, 그것도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거친다는 것이다. 그분이 누구인가? 그냥 예수님이라고 하면 다 아는 이야기인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즉 자기 아들을 버림으로서 긍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 사랑한다. 이제 천국에 올라오너라 ??

예를 들어서 다음과 같이 보면 되는데, 즉 집에 아들이 하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길거리에 있는 거지를 불쌍히 여겨서 아들을 삼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들을 그대로 집에 두고서, 또 다시 집에 데리고 와서 아들을 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버려서 길거리에 있는 거지를 아들로 삼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조치, 그것이 곧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것인데, 그냥 "사랑한다. 천국에 올라오너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나는 너를 사랑한다. 어느 정도 인고 하니, 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버리기까지 사랑한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그 긍휼하심을 받은 사람은 그야말로 미안하기 짝이 없는데, 물론 횡재이고 로또인데 말이다. 그래서 생명의 면류관도 반납하게 하는데, 왜 그런가? 그것을 쥐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매일 순간순간이 긍휼의 연속인데, 그것을 왜 챙기고 있느냐는 말이다.

◈ 구원은, 버림받은 효과 !!

그래서 내린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구원은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문제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효과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 효과로 말이다.

지난 시간에 '딩'하고 울리는 종소리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즉 종은 저쪽에서 치는데도 그냥 가만히 있는 자기에게 종소리가 들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종이 있는 원천지에서 들려오는 효과라는 말이다. 그래서 종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예수님 중심으로 간다는 것에 대해서 사단은 어떻게 하는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믿는 자들을 삼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굶주린 사자처럼 말이다. 눈에 보이기만 하면 집어삼키려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지금도 설치고 있다는 것이다.

◈ 다시 한번, 성령은 악령과의 대비에서 !!

그러니 이렇게 교재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우리가 성령을 이야기할 때는 어떻게 해야한다는 말인가? 인간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악령과 대비해서 "아하, 이분이 성령이고, 이것이 악령이구나"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악령과 대비해서 말이다.

우리도 알다시피 가룟 유다에게는 악령이 들었는데, 그 악령은 성령에 의해서 살아가는 예수님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곧 악령과 성령과의 싸움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이전에는 말이다. 그 증거가 바로 광야에서 예수님과 사단과의 만남이란 것이다.

아니, 예수님이 자진해서 스스로 광야로 가셨는가? "내가 광야로 가서 도를 닦아야지" 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려서 가셨다는 말이다. 즉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세우셨다는 것이다. 

(눅 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눅 4: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 성도는, 예수님의 판박이들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의 공생애는 예수님 본인의 의사는 없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데로 때가 되면 광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는 것도 성령의 인도하심이고, 부활도 역시 그렇다는 말이다. 태어나신 것도 역시 성령의 힘이고 말이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요단강에서 성령을 받으신 바로 분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러니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자들인데, 즉 예수님의 '판박이'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캠벨(?)' 이라는 화가가 똑같은 통조림을 그렸듯이, 그렇게 같은 그림을 되풀이하는 것인데, 그렇게 예수님의 복사판으로 만들어져 간다는 말이다. 물론 예수님은 죄가 없지만 죄인으로 가셨지만, 우리는 죄가 있는 채로 죄인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께서 예수님과 성도를 인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악령에서 헤어날 길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 성령께서 대신 기도하심으로 !!

그러니 사도바울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기도하라" 라는 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 "성령! 성령! 성령!" 이라고 하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독자적으로 행동하면서 살지 말라" 라는 것이다. 기도는 언제나 의존인데(?), 즉 "주여, 이런 일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 의미라는 말이다.

로마서 8장 26절에 보면 성령의 탄식이 나오는데, 즉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라고 말이다. 성령께서 어떻게 탄식을 하시는가? 그냥 탄식도 아니고, 또한 말할 수 있는 탄식도 아니고,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탄식이라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탄식 말이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다시 말해서, 우리는 무엇을 빌어야 될지도 전혀 모르는 철딱서니가 없는 자들인데,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28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거기에 우리가 끼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소급해서 성령의 공로로, 즉 주님의 공로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을 높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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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순서 - 오직 예수님만이 몰고 오신 현실 (요17장) !!

지금부터는 박윤진 성도님의 글을 가지고 하겠는데, 이것은 여러분이 일찍 오면 먼저 하려고 했는데 말이다. 아무튼 제가 다른 사람의 글을 가지고 공부하기는 이번이 태어나고 처음이지 싶은데(ㅋㅋ), 물론 철학이나 다른 것들은 한 경우가 있었지만, 복음에 관해서는 처음이라는 것이다.

제가 왜 이렇게 자신 만만하게 이 글을 소개하는고 하니, 그분의 글이 너무나 완벽해서(?)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글 제목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몰고 오신 현실' 이라고 되어있는데 말이다. 먼저 그분을 잠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저는 지금부터 약 20년 전에 만났는데, 김포근처에서 성경공부도 같이 했다는 것이다. 그때가 그분이 20대 초반이었는데, 그러니 지금은 40대인데 말이다. 직업이 무엇인고 하니, 서울 여의도에 있는 '상장기업협의체' 라는 곳에 과장으로 있지 싶은데 말이다. 학력은 서울대학인지, 아무튼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온 것으로 알고 있고, 그리고 한 달에 한 두 번씩 서울의 어느 카페에서 모임을 갖고 있는데, 즉 교회라는 말이다.

그분이 이번에 정말로 완벽한 글을 썼는데,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렇다는 말이다. 먼저 5페이지를 살펴보겠는데, 5페이지와 6페이지에 보면 그림이 5개 나오는데, 성경의 엑기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성경이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지를 보여준다는 말이다.

제가 읽어가면서, 먼저 1페이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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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7장은 마치 산 정상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들이 관계라는 용어 속에 충만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17장에서 왼쪽을 보면 16장 이전 말씀들의 깊은 뜻이 모두 다 보이는 듯하고, 오른쪽을 보면 18장부터 시작되는 체포, 재판, 십자가 사건, 부활 사건 등이 숨가쁘게 전개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마치 산 정상에서 굽이쳐 흐르는 강줄기를 바라보는 듯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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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7장에서 '산 정상' 이란?

여기 보면 "요한복음 17장은 마치 산 정상과 같습니다" 라고 하는데, '산 정상' 이라는 것은 어떠한고 하니, 그 위에는 꼭지점이 있고, 양쪽으로 면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 산 정상에는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 예수님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있는, 그런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바로 산 정상이라는 것이다.

이쪽 편에서 올라가서 저쪽 편으로 내려오는데, 저쪽 편에는 십자가가 있고, 이쪽 편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해서 그들과 함께 살아왔던 공생애라는 말이다. 즉 예수님의 지상생활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16장과 17장인데, 그리고 18장 순서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17장 이전의 모든 말씀은, 여기서 모든 말씀이니, 이것은 말씀뿐만 아니라 무엇도 포함하는가? 말씀, 설교, 기적, 병 고침 등등이 나온다는 것이다. 특히 이것이 요한복음이니, 요한복음 2장에 보면 하나님이 행하신 유명한 첫 번째 기적이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게 하는 것인데, 그 기적을 행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 인간은, 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싫어하는가?

아까 한 것을 다시금 해보겠는데, 사람들은 추상적 보편성을, 즉 '신(神)'을 믿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추상적이 아닌 실제 역사에 등장하는 구체적 보편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구체적 보편성을 말이다. 그런데 추상적 보편성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막상 구체적 보편성으로 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하나님이 그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즉 동일한 하나님인데도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연코 반대하는데, 참으로 희한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런데 그 하나님이 막상 이 지상에 내려오니까 어떻게 하는가? 전혀 믿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도대체 그렇게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가까이 다가오면, 친근감이 있어서 오히려 더 잘 믿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사람들은 추상적 보편성을 믿으면서도, 그 추상적 보편성에서 작용하는 구체적 보편성을 예수님에게서 모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찾는다는 말인가? 각자의 본인들의 경험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각자 개개인의 체험담에서 말이다.

◈ 인간은, 자기 체험에서 보편성을 !!

그 대표적인 것이 저주와 축복인데, 이런 저주와 축복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는고 하니, 예수님과의 관계로 여기지 않고 양(量)으로 본다는 것이다. '음메메' 하는 양이 아니고 말이다(ㅋㅋ). 즉 많이 모으면 축복이고, 그것이 조금이라도 적어지면 저주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전혀 예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들은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기적이 구체화가 되었다고 보는데, 그렇게 되면 문제가 무엇인가? 자기 것이 있으면, 그런 자기 것의 확대와 확장으로 저주와 축복을 보게 되니, 그러면 자기 것은 전혀 부정을 당할 이유가 없다고 여기는 바로 그러한 오해, 즉 자기 것 자체가 말이다. 그러니 자기 것을 몽땅 다 잃어버릴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이 십자가에서는 다 깨어지는 이야기인데, 하지만 그들은 산 영을, 즉 십자가의 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께서 그저 자기 것을 채워만 주시면, 자기는 그것이 바로 자기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하는 증거로 수집하겠다고 하는, 그렇게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 그러면 예수님의 구체적 보편성은?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벌리시는 구체적 보편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그냥 벌리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과 대비를 하면서 하시겠는가? 기존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던 축복이,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곧 저주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는 식으로 기적을 베푸신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이 기적을 요구할 때는 요나의 기적, 즉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반면에 사람들이 기적을 포기했을 때는 다시 기적을 베풀어버리신다는 것이다. 

◈ '가나 혼인잔치'의 경우에 !!

가나 혼인잔치에 있어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뭐라고 했는가? "예수여, 지금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라고 하니, 예수님이 처음에 뭐라고 하셨는가? "엄마, 진작 이야기하지" 라고 하셨는가? 그게 아니라 "여자여,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즉 지금 이 결혼식과 예수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이다.

(요 2: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요 2: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요 2: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요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지난 토요일에 영천에서 실제로 결혼식이 있었는데, 제가 주례를 하고 내려오는데 만약에 거기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목사님, 음식이 모자랍니다" 라고 했다면, 예를 들어서 말이다. 사실 그때 실제로도 음식이 많이 모자랐는데, 하객들이 너무나 많이 와서 말이다.

그래서 제가 말하기를 "아니, 그것하고 주례하는 저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것은 저기 혼주와 의논을 해야지요"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놓고는 호텔에 전화를 해서는 "여기 음식이 모자라니 500만원치만 더 갖다 주세요" 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말이 좀 됩니까? (ㅋㅋ)

그렇게 되면, 처음에 먹든 사람들은 맛이 좀 덜한 것을 먹다가 뒤에 온 사람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야, 음식이 더 좋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처음에 그들이 원했던, 즉 "결혼식은 준비된 손님만 만족해야 한다" 라고 하는, 그런 차원에서의 기적과 다른, 즉 똑같은 구체적인 현상이 일어나면서도 전혀 질이 다르고 노선이 다른, 그런 기적을 이야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 '오병이어'의 기적의 경우에도 !!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오는데, 즉 예수님께서는 모여든 백성들이 배가 고플 때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밥을 먹여놓고는, 그들이 밥을 먹게 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뭐라고 하시는가? "너희들은 기껏해야 밥 먹고 고맙다고 하려고 나를 찾았지?" 라고 하면서 꾸중을 하신다는 것이다. 

26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라고, 즉 "어떻게 모든 것을 육적으로 판단하는가? 진짜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떡을 먹는 차원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아는 게 곧 하나님의 일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이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 소유가 아닌 '믿음'의 문제 !!

그러니 이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흉내내라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는 일마다 쪽쪽 다 믿어야 될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뒤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셔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즉 믿어야 될 문제인데, 하지만 인간들은 그러한 믿음이 없으니 자꾸만 소유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 6: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그래서 예수님의 이런 소리를 듣고는 모두가 떠나고 말았는데, 두 번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아니했다는 말이다. 즉 고객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일단 자기의 소유를 포기하지 않고, 자기가 알아서 판단한다는 것이다. 축복과 저주를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는데, 지금 박윤진 씨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 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 17장의 게세마네 기도 이후, 숨가쁘게 전개되는 18장 !!

이렇게 요한복음 17장의 산 정상에서 저 아래를 보니 무엇이 보이는가? 즉 18장을 보니까, 굽이치는 강줄기가 보이는데, 즉 체포, 재판, 십자가 사건, 부활 사건 등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도 숨이 가쁘게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요한복음 17장이 예수님의 게세마네 기도인데, 그 이후부터 시기가 아주 촉박하게 진행되는데, 즉 사건들이 촘촘히 이어진다는 것이다. 결코 느긋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치 여행을 하듯이 슬슬 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 잡혀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세상적으로 말하면, 이제 예수님 본인이 소멸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자기 자신이 소멸된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가꾸고 다듬고 했는데 말이다. 그동안 자기에게 들인 공들이 다 어디로 가버리는가? 모두가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것을 가장 무서워하고 두려워한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일은, 곧 예수님의 죽음 !!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무엇인가? 그냥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는 정도가 아니라, 여기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게세마네 기도를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특수한 사명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명 중의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 자신이 죽어야만 하나님의 일이 된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알아채는 것이 곧 복음을 아는 것이라고, 그렇게 박윤진 씨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어떤 기적을 베푸느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요나의 기적처럼,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진짜 기적이라는 말이다. 거기에 비하면 물위를 걷고 하는 것은 시시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병 고치는 시시한 기적, 귀신을 쫓아내는 시시한 기적,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시시한 기적에 매료되지 말고, 진짜 기적인 예수님의 죽음에 올인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부이니 말이다.

◈ 제발, 돈 좀 내라 !!

울산인지 대전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강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말이다. 어떤 교회에 가면 목사가 교인들에게 뭐라고 윽박지르는고 하니, 즉 "성경에 기적이 분명하게 나와있는데, 여러분들은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그런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던 기적을 경험해보지 못합니까?" 라고 말이다.

그런 설교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르는데, 즉 "그러한 초대교회의 경험도 하지 못하면서, 즉 그렇게 믿음도 없으면서 어떻게 천당에 갈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는 것인데, 그러면 목사가 그렇게 말하는 의도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다. 목사의 본심이 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돈을 좀 내라" 라는 소리인데, 즉 "초대교회에서는 서로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나누어 쓰고 했는데,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자기 것만 챙기고 교회에 시간을 바치지 않고 헌금을 하지 않는가?" 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 뭔가 조금 이상한데, 그건 아닌데?" 라고 하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잘못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체계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지는 않았으니, 그것을 꼭 집어서 끄집어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 그것을 알려주마 !!
 
그래서 제가 그것을 지금 알려드리려고 하는데, 사도바울이 말한 기적은 무엇인고 하니, 초대교회에서 행했던, 즉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우리를 죽게 하셔서, 그렇다고 자살을 하라는 것은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죽게 하셔서 동시에 죽게 한 그것 안에서 그리스도를 끄집어내는 반복적인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8절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능력이 바로 진정한 성령의 능력이란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날마다 살고 날마다 죽은 것인데, 병을 고치고, 부동산을 사서 투기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소유물이 곧 나이고, 내가 소유물이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그야말로 매일 발 품을 팔아서 먹고살았는데, 그런데 어느 날 시가 쪽으로부터 엄청난 땅을 유산으로 받고 난 뒤에는 그런 일을 전혀 하지 않는데, 졸지에 수백 억이 생기고 나니 하루에 버는 3만원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다. 재산이 있는데 굳이 그런 일을 왜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수백 억의 땅을 주게 되면, 우리는 무엇으로 바뀌는고 하니, 마치 "나는 가수이다" 라는 것처럼, "나는 돈이다" 라는 것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나는 성도이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나는 200억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 200억을 관리하기 위해서 엄청 예민해지는데, 바로 그것이 인간이란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나는 (   )이다" 라고 했을 때, 이 (   ) 안에 무엇이 들어가는가? 그만 자기 소유물의 종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에릭 프롬의 유명한 책이 있는데, 즉 '존재냐 소유냐' 라고 말이다. 그러니 결국 인간은 자기 소유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을 철학에서는 '존재의 소유권' 이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자기의 소유물과 일치가 되어서, 즉 "소유물이 곧 나이고, 내가 소유물이다" 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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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리히 핀카스 프롬(Erich Pinchas Fromm, 1900년 3월 23일 ~ 1980년 3월 18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태인 독일계 미국인 사회심리학자이면서 정신분석학자, 인문주의 철학자이다. 주요저서는1947년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있고, 1976년에의 《소유냐 존재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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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는, 예수님의 소유물 !!

우리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하니, 성령께서는 날마다 이 전체를 두고 죄인으로 규정을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께서 이렇게 죄인으로 해주는 것을 고마운 줄로 알아야 하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소유물을 교회에 바치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지만 그게 자기 자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내가 돈이 될 수 없고, 돈이 내가 될 수 없다" 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이니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주신 분도 주님이기 때문에, 우리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는 200억을 받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받지 않으면 저에게 가지고 오라는 것이다(ㅋㅋ).

그러므로 주께서 주신 것이니 감사하게 받기는 받되, 하지만 함부로 자기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즉 200억이 있으나 없으나 우리는 여전히 주의 것인데, 그것이 계속해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해보면 그것이 잘 되지 않는데, 즉 매일같이 노가다를 하다가 졸지에 200억이 생긴다면 미쳤다고 그 짓을 계속해서 하느냐는 말이다. 집에서 인형 눈알을 붙이다가, 200억이 생긴다면 그것을 붙이겠는가? 하나 붙이면 겨우 20원을 주는데 말이다. 200원도 아닌 20원을 말이다.

◈ 결국,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 !!

박윤진 씨는 여기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즉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서 모든 것이 다 판정이 난다고 본다는 말이다. 물론 박윤진 씨가 이런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제가 살을 좀 붙여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산 정상에서의 예수님과 아버지라고 한다면, 요한복음 1장에서 16장까지 제자들이 올라오는 것의 목표점도 역시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이고, 또한 거꾸로 십자가로 올라와도 역시나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렇게 성립이 되는데, 그것을 아까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구체적 보편성' 이라고 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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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 우선, 예수님의 경우 아버지가 아들(예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과 상호연결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영광 따로 아버지의 영광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아버지의 영광은 공유된 영광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광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신 분과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광은 단순히 자신의 몸에 고정되고 마는 소유의 객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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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인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17장 1절의 말씀을 박윤진 씨가 참으로 예리하게 보고 있는데, 즉 "우선, 예수님의 경우 아버지가 아들(예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과 상호연결이 되어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흔히 교회에서 하는 말이, 즉 소교리문답에서 피조물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피조물인 우리는 아무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피조물은 거기에서 제외가 되어있다는 말이다. 율법을 지켜서 영화롭게 하겠다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이고, 그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아버지 나름대로의 영화롭게 하는 원칙은 오직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만 성립이 되는 것이지, 우리와 관련된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상대해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런 개혁주의 신학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이라고 하면 안 되는데, 거기서 '사람'을 빼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뭐라고 해야하는가? "죄인의 목적은 무엇인가?" 라고 하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가 만약에 인간이라고 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상대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지만 이 세상에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만 있는가? 전적으로 죄인만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구체적 보편성인데, 즉 이 세상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보편화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죄인밖에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즉 "죄인인데 무엇을 할까요?" 라고 한다면, 그것은 죄인을 죄인이 되게 하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예수님을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게 여기에 나오는데, 계속해서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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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영광은 인간의 몸을 벗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영광은 자신의 몸이 발산해대는 욕구충족이기에 그러합니다. 자신의 욕망이 긍정적으로 채워지는 것 중 가장 황홀하게 완벽하게 충족된 것을 인간들은 영광이라고 하기에, 그 영광은 죄와 같은 명찰을 붙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충족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몸을 가지신 채, 아버지와 영광을 공유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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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영광은?

여기에 보면 "인간의 영광은 인간의 몸을 벗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 박윤진 씨가 이러한 말을 할 때는, 자기가 40년의 인생을 살았는데, 그 인생의 모든 것을 다 걸고서 자신 있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의 영광은, 자기 몸뚱아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이다. 아무리 사랑을 하고 싶어도, 지금 이빨이 아파서 볼이 퉁퉁 부어있는데 무슨 사랑이냐는 말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일요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시어머니는 하루종일 몸이 아파서 집에서 끙끙거리지, 남편은 주차장에서 그만 성질을 못 죽이고 싸워서 경찰서에 가있지, 아이들 밑에도 돈이 들어가야지, 아파트 중도금도 내야되지, 또한 자기는 토요일까지 직장에서 죽도록 일을 해야지,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몸으로서는 한계를 느낄 수밖에는 없는데, 언제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느냐는 말이다. 이것이 비단 이 사람만의 일이겠는가? (누구지?) 이것은 우리 인간이라면 살아가면서 모두가 다 겪는 일들인데, 그래서 이러한 것을 '보편성'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신정아' 라는 여자를 아는지 모르겠는데, '신정환' 말고 말이다(ㅋㅋ). 그 여자가 쓴 '4001' 이라는 책에 보면, "내가 교도소에 살 때 나오던 벌레들이 새 집을 사서 들어갔는데도 여전히 나오더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렇게 손으로 눌리면 죽을 벌레가 왜 저렇고 살려고 하지? 그리고 나는 왜 이 땅에서 이렇게 살려고 애를 쓰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초반부에 나오는데, 자기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박사학위도 사기를 쳐놓고 말이다.

그래서 박윤진 씨는 이러한 일들을 염두에 두고서 "인간이 생각하는 영광은 자신의 몸이 발산해대는 욕구충족이기에 그러합니다" 라고 하는데, 이제 겨우(?) 40대 초반의 남자인데 아주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솔하게 말이다.

그 다음에 보면 "자신의 욕망이 긍정적으로 채워지는 것 중에 가장 황홀하게 완벽하게 충족된 것을 인간들은 영광이라 하기에" 라고 하는데, 그 영광을 교회에서는 축복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금요철야 기도회를 할 때 이런 것이 바로 기도제목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목사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자기는 자기대로 기도한다는 것이다.

◈ 독생자의 영광 !!

그리고 여기에 보면 "그러나 예수님은 몸을 가지신 채, 아버지와 영광을 공유하고 계십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부분인데 말이다. 즉 예수님의 몸이 영화롭게 변화될 때, 그것만이 아버지의 영광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려서 너무나 연약하게 채찍에 맞는 것도 아버지의 영광인데, 그것을 무슨 영광이라고 하는고 하니, 요한복음 1장에서 '독생자의 영광'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러니 이게 참 어렵다는 것이다. 빛과 같이 번쩍 번쩍 빛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그런 영광을 한 몸에 앉고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독생자의 영광이, 그러니 그야말로 연약하고 연약한 그것이 지상에 구체화가 된, 즉 구체적 보편화가 된 영광,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이다. 바로 그러한 영광이, 몸에서 나온 인간의 죄의 영광과 대결구조로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예수님이 가신 길이라는 말이다.

◈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그런데 그것이 과연 우리와 관련이 없겠는가?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나를 따르라" 라고 하셨는데,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데, 자기의 관을 들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보면 되는데, 물론 그 관 속에다 자기를 집어넣고 말이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황야의 무법자 (A Fistful Of Dollars, 1964) !!

1960년대에 나온 영화인 '황야의 무법자'에 보면, 시리즈가 계속해서 나왔는데 말이다. 얼마나 재미가 있었는지 모르는데, 그 마지막 편에 보면 '장고' 라는 주인공이 무엇을 들고 등장하는가? 관을 들고 나온다는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 역할을 맡았지 싶은데 말이다.

그런 모습으로 장고가 등장하자 멕시코 갱들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어이, 니가 죽으려고 관을 들고 오나?"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관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까, 기관단총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보면, 그 관 속에서 총을 꺼내어서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적들을 모조리 다 박살을 내어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제가 그때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몰랐지만,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나서 보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 관을 자기 뒤에 매달고 간다는 것이다. 마치 장고처럼 말이다. 그것이 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들의 모습이란 말이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서 말이다. 물론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기에 성령께서 날마다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 라는 것을 더욱 간추려서 이야기하면, "과거를 십자가에 소급해서 해석하라" 라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를 말이다. 즉 "아하,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라고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아하, 저런 것도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이 그러한 사건을 벌리셨구나" 라고, 그렇게 깨달아가면서 살아가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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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어떤 자들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구조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셨다는 것이고 아들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주체가 아버지와 아들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마치 축구선수끼리 주고받는 공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영생 또한 아버지와 아들만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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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주체가 아버지와 아들로 !!

박윤진 씨는 요한복음 7장 2절을 어떻게 해석하는고 하니까, 그것이 위에 나와있는 내용인데 말이다. 즉 "주체가 아버지와 아들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라고 하는데, 즉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주고받고 주고받고,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누가 끼어들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이 자기 의사로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고, 다만 누구만이 할 수 있는고 하니, 분명히 없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의 독생자 영광을 증거하라고 끼워준 자들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지나 개나 모두 다 머리를 쳐들고 와서는 "여기가 교회입니까?" 라고 하면서 끼어든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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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그렇다면, 영생은 무엇입니까? 그냥 이 육체의 목숨이 끊이지 않고 계속 생존하는 것입니까? 영생의 권한을 부여받은 아들의 영생에 관한 정의(定意)는 참으로 놀랍고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가, 영광을 공유하고 서로 누군가에게는 영생을 주고 누구에게는 주지 않기로 주고받으신 완전 폐쇄된 것이므로, 도대체 인간 쪽에서 어떻게 그 분들을 객체 삼아 탐구하고 알아챌 수 있단 말입니까? 벽, 엄청난 벽에 부딪치고 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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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그냥 축구공에 불과해 !!

그래서 박윤진 씨는 철저하게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이 전혀 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3절의 말씀으로 보는데, 즉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과의 관계가 아니라 철저하게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인데, 바로 그러한 관계 속에 우리가 있는데, 물론 우리는 스스로 끼어들 수는 없고, 우리는 다만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에 있어서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것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철저히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놀아날 뿐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예수님과 아버지가 서로 주고받는 축구공이라는 말이다.

◈ 아버지와 아들은, 완전히 폐쇄된 구조 !!

또한 여기에 보면 "왜냐하면, 참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가, 영광을 공유하고 서로 누군가에게는 영생을 주고 누구에게는 주지 않기로 주고받으신 완전 폐쇄된 것이므로" 라고 하는데, 즉 '완전 폐쇄된' 것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전히 폐쇄된 구조라는 말이다. 이런 표현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지 모르는데 말이다.

무슨 뜻인가? 오직 아버지가 던진 공으로만 주고받는 것이지, 공인 주제가 "이제는 제가 공이 되겠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완전히 폐쇄가 되었는데, 그 관계가 말이다. 그러니 도저히 인간 쪽에는 접근이 안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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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생은 곧 참 하나님과 아들을 아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17장에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참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 2절에서 자신과 영광을 나누시고, 자신에게 어떤 인간들과 영생과 만민지배권을 주신 분이 바로 참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 하나님이 단독으로 어떤 분이라고 소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계속 나옵니다만, 참 하나님의 개념은 반드시 그가 보내신 아들과 연결될 때만 등장합니다. 그림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 A -----> 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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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진 씨는 여기 그림을 [ A -----> B ] 라고 그렸는데, 물론 저라고 하면 이렇게 그리지를 않고, 예수님을 소문자 'a' 라고 하고, 그 다음에는 점선으로 해서 하나님을 대문자 'A'로 그린다는 것이다. 즉 [ a -----> A ] 라고 말이다. 아참,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대문자 'B'이니 그것을 소문자 'a' 라고 하면, 하나님을 대문자 'A'로 하고 말이다. 그러면 그림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 A -----> a ]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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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가 창조주이다, 선하다, 사랑이 많다, 하여튼 굉장한 존재이다. 그런데 그 A는 특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특정(特定)합니까? 그 대단한 A가 보낸 자가 바로 B이다. 이미 육체로 특정되어 계신 예수님(B)에 의해 A가 자연스럽게 특정되는 것입니다. B를 통해서 A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A가 여호와로 특정되어 있지 않느냐, 이스라엘의 그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키신 그 분으로 A를 이미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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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에 의해 A가 자연스럽게 특정됨 !!

여기서 '특정' 이라는 것은, "정해져 있다" 라는 의미인데,  박윤진 씨도 여기에서 "B를 통해서 A를 이해할 수 있는" 라고 하니까, 대문자 'B'를 소문자 'a' 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박윤진 씨가 펴는 논리가 무엇인고 하니, 사람들이 여호와를 안다는 말인가? 모른다는 말인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완전히 폐쇄되어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므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질문도 성립되지 않는데, 즉 그런 질문조차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완전히 폐쇄된 것이기에, 우리가 알아서 끼어들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고마운 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인데, 즉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말이다.

이제 조금 넘어가서, 3페이지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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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그림에서 A(참 하나님) ----->B(예수님) 이지만, 결국 A가 참 하나님이라는 증명은 A <------ B(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즉, "A가 참 하나님이다" 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아니면, 여전히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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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알려주지 않으면, 참 하나님을 알 수 없어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처음에 제가 이야기한 것 같이,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으로 증명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A <------ B]로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증명해줄 경우에만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있는데, 하지만 예수님이 알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참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이 바로 이 글의 취지라는 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자 제자 중 하나인 빌립이 뭐라고 하는가? "아버지를 우리에게 바로 보여주세요"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내가 곧 바로 아버지를 보여줄 수는 없고, 지금 나를 보았으니 그것이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러니 자꾸만 나에게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징징거리지 말라. 나를 보았으면 이미 아버지를 본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곧 바로 나아가는 고속도로는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길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그 길도 예수님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모든 길도 다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갈 자가 없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요 14: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 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요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이제 계속해서 4페이지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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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참 하나님과 '그냥'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 아니라,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인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예수님 스스로 인간의 앎이 되는 방식의 영생이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비로소 생명까지 주관하고 계신 참 하나님이 실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생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참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이 예수님 안에서 그의 죽음으로, 즉 사랑으로 죄인 속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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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보내신 자'인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 !!

여기서 박윤진 씨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참 하나님과 '그냥'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 아니라,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인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알려고 접근하는 것은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우리가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아무리 하나님을 알려고 해도 전혀 소용이 없음을 말이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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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는 예수님의 앎이 덮쳐 온 것입니다. 이 덮침의 의미는 원래부터 성도의 용도가 예수님만이 참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성도는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발견되어지는 것입니다. 원래 참 하나님 안에 있었던 자들을 참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으로 보내셨고,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만 성도가 성도로써 발견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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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는, '덮쳐진 사람' !!

이렇게 성도가 '덮쳐진 사람' 이라고 한다면, 성도에게 있어서 본인의 고유의 사명이라는 것은, 그런 존재의 의미는 이제 사라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덮쳐졌으니 말이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이 참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신 자임을, 그것만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되는 새로운 피조물이 곧 성도라는 말이다.

그러니 성도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직장생활을 하든, 아니면 개인 사업을 하든, 그 무엇을 하든 간에 "오직 예수님만이 참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신 자이다" 라는 것을, 그것만을 증거하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참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신 자임을 말이다.

그 다음에 또 중요한 문제가 나오는데,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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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인이 예수님의 피와 결합하여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자체가 예수님 안에서만, 피 안에서만 참 하나님 안에서 원래부터 있었던 자로서의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예수님의 피와 결합되어 또 다른 독자적 영역을 갖게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도가 원래 있었던 참 하나님의 자리가 바로 예수님의 자리가 현재 보여주고 있는 사랑의 자리였음을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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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는, 처음부터 예수 안에 있기에 !!

여기서 박윤진 씨는 "성도 자체가 예수님 안에서만, 피 안에서만 참 하나님 안에서 원래부터 있었던 자로서의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라고 하는데, 무슨 뜻인가? 자기가 단독으로 있다가 예수님의 피에 적심으로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아예 처음부터 예수 안에, 즉 피 안에 있는 자에게만, 그렇게 예수 안에, 피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삼스럽게 자기가 피를 적셔서 성도가 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법은 인간에게 허용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박윤진 씨는 그것이 17장 8절 말씀에 나온다고 보는데 말이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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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영생의 삶이 정의되면 17장의 말씀들이 새롭게 조명됩니다.

(요 17: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 예컨대, 위의 8절 말씀 중에서 등장하는 '안다', '믿었다' 라는 말이 주어가 '저희'임에도 불구하고 저희의 내막이 읽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안, 영생 안에서 참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됨을 그대로 투사받고 있는 대상들인 것입니다. 그들만의 앎과 그들이 생산해 낸 믿음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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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 그렇게 둘이 모든 것을 다 해버리는데,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말이다.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는 말이 어렵기 때문에 그림으로 살펴보겠는데, 일일이 다 하려고 하면 시간도 모자라고 말이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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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말씀을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우선 내가 저희 안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믿는 성도 안에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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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바깥에 있는 것이 예수님이 아니라 성도인데, 그러니 성도는 자기가 알아서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먼저 이렇게 성도가 멍청하게 있으면, 성도는 원래 멍청한데 말이다. 그런 성도에게 누가 찾아오는가? 예수님께 성도 안에 들어오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의미의 그림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어렵지 않지요?

계속해서 그림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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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가 내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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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그림은 이제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시는 것인데, 이렇게 이 두 개의 경우를 합치게 되면, '성도 → 예수님 → 아버지' 라고 하는 순서로, 그렇게 점점 더 내부로 장착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음에 나오는 그림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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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두 그림을 합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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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그림으로 살펴보니 별로 어렵지 않은데, 하지만 그렇게 어렵지 않아도 이렇게 고생 고생해서 글을 써놓으면, 사람들이 귀찮아서 따지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 정도는 내가 다 아는 이야기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ㅋㅋ)

계속해서 그림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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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그림에다 21절의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라는 말씀을 감안하면 그림은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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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요한복음 7장 21절의 말씀에 의하면, 이렇게 바깥에는 성도가 있고, 그 성도 안에 예수님과 아버지께서 같이 계신다는 것이다. 성도 안에 예수님과 아버지께서 말이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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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마지막으로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는 사도바울의 "그리스도 예수 안" 이라는 말씀까지 고려해서 그림을 그려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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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여기서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예수 안' 이라는 말까지 고려하게 되면 이런 그림이 나오는데, 즉 먼저 예수님이 제일 바깥에 계시고, 그 안에 성도가 있고, 그리고 제일 안에는 예수님과 아버지가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를 해보면, 요한복음 7장 21절에 의하면, 성도 안에 예수님과 아버지가 같이 계시고, 그런데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의하면, 이 요한복음 2장 21절 전체가 예수님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성도를 막(膜)으로 해서, 즉 성도를 일종의 경계막으로 해서 바깥에도 계시고, 또한 안에도 계신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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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그림에서 성도는 안 밖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둘러 쌓여있는 형국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영역이 있고, 그 영역이 성도 밖의 예수님과 성도 안의 예수님으로 양분되어 있다는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위 그림은 성도는 안 밖으로 예수 말고는 아무런 독자적 영역이 없음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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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예수 그리스도 !!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성도는 안 밖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둘러 쌓여있는 형국입니다" 라고 박윤진 씨는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7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아주 간단한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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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피에 의해서 참 하나님, 예수님, 인간이 예수라는 이름 아래서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온전함은 한 몸을 향하신 예수님의 처절한 예배, 즉 십자가 사랑만으로 가능하게 되는 구조입니다. 위 그림은 이제 아주 단순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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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제 달랑 예수님만 남게 되는데, 물론 여기서 박윤진 씨는 성경적인 근거를 대지 않았지만, 저에게 대라고 하면 골로새서 1장 16절의 말씀인데, 즉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또한 로마서 11장 36절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에게 모든 것이 다 포함이 된다는 말이다. 누가 먼저 끼어들어서 갚는 식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그러니 먼저 주님께서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찾아오신 주님 안에만 우주가 놀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모든 것이 주님 안에서 통일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이 오셨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그렇게 박윤진 씨가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그것을 결론으로 미리 알아놓고서, 글이 참 어렵기 때문에 말이다.

다시 6페이지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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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그림에서 성도는 안 밖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둘러 쌓여있는 형국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영역이 있고, 그 영역이 성도 밖의 예수님과 성도 안의 예수님으로 양분되어 있다는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위 그림은 성도는 안 밖으로 예수 말고는 아무런 독자적 영역이 없음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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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에게, 안 밖으로 독자적인 영역은 없어 !!

여기에 보면 "위 그림은 성도는 안 밖으로 예수 말고는 아무런 독자적 영역이 없음을 뜻합니다" 라고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독자적 영역' 이라는 것이다. 박윤진 씨는 바로 이러한 점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썼는데, 즉 독자적인 영역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 따로 있고 예수님이 따로 있어서, 성도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런 식의 그림은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영생을 전혀 모르는 자라는 말이다. 영생을 모르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하게 되면, 그것은 영생을 얻고자 애쓰고, 찾아가기를 애쓰는 것인데, 하지만 그런 것은 영생이 아니라 우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게세마네 산 정상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만났던 뜻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 땅에서의 추상적인 보편성에서 나온 일반적 종교성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코 신앙이라고 할 수 없고,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독자적인 영역이 없다" 라는 것이다.

◈ 성도는, '주께만 범죄하는' 양상으로 !!

어제 오전에 제가 뭐라고 설교를 했는고 하니, 다윗이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천지가 다 주께서 손질한 것인데, 바로 거기에 자기가 놓여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남에게 피해를 주던 주지 않던 관계가 없이, 우리는 죄를 지은 채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항상 '주께만 범죄하는' 양상으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곧 우리의 한계라는 말이다.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그런 조치, 즉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그러한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까, 바로 주님의 사랑의 원천에서 튀어나온 능력의 화살이 꽂혔기 때문에, 마치 큐피트가 쏜 화살에 맞은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전혀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독자적인 영역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정죄를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다만 정죄를 할 때도 있는데, 그것은 어떤 경우인고 하니,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서만 가능한데, 그렇다면 그 복음이 무엇인가?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사단의 역사라는 말이다. 그런 자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마귀의 종이라는 것이다.  

◈ 존재한다 → 믿는다 → 구원받는다 ??

제가 강의 처음에도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이 존재한다 → 믿는다 → 구원받는다" 라는 것은, 그것은 야고보서 2장에도 보면 나오지만 마귀도 알고 벌벌 떠는 것이라는 말이다. 마귀도 하나님의 실존을, 즉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계신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신은 인격적인 하나님이고, 삼위일체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도 천당에 가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왜 천국과 전혀 상관도 없는 그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는 말이다. 교회에서 복음이 증거되고 구원을 받는 자들이 생겨나야지,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냥 교회에 놀러온다면 되겠는가? 차라리 등산을 가던지, 야구경기나 보러가지 말이다. 그러니 교회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다시 '독자적인 영역은 없어' !!

아무튼 이렇게 독자적인 영역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 이 '독자적인 영역' 이라는 것이 참 어렵고도 중요한데 말이다. 독자적인 영역이 그림에 의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안과 밖으로 누가 계시는가? 예수님이 계시기에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독자적인 영역이 분명히 없는데, 그런데 여기서 행위가 나오고 또한 행함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행위가 나오고 행함이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어떤 행위와 행함인가? 이러한 독자적인 영역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는 독자적인 영역을 주장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부정을 당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은 행한다" 라고 하는데, 그리고 나서 그냥 나가면 안 되고, 십자가를 거쳐서 그것이 죄로 드러나게 하시는 행함은, 그것은 바로 안과 바깥으로 계시는 예수님에 의한 행함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행함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가 이렇게 강의를 하는 것도 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의(義)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관계뿐입니다" 라고 하는, 그런 식의 고백이 나오게 될 때, 그것은 곧 주님에 의한, 주님께서 하신 고백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으니, 이제부터 내가 하는 것은 의롭다" 라고 한다면, 그 따위의 고백은 전혀 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

그러니 자기 자식을 키우고,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그렇게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기 한 평생을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못하고, 오직 자기 몸의 영광만 추구했던 죄인이라고 하는, 바로 그것을 깨닫게 하신 그분의 솜씨와 능력만이 의롭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사도바울 식으로 표현하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말이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니 성도의 자리에 무엇을 집어넣으면 되는가? 디모데전서 1장 15절인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라고 하면 딱 맞다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로 가야 하는데, 즉 성도의 자리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하고, 예수님의 자리에는 "나는 너를 위해서 십자가를 졌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죄인이 의인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게 십자가 자체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유일한 영광이고 의로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그것은 안과 밖으로 의로 둘러 쌓여있으니, 우리의 죄마저도 그 죄가 드러나는 능력성 때문에 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가 말을 하고 나서도 참 어려운데, 죄인이 의인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고 하니, 죄가 죄 되게 하는 것을 우리가 스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능력이 임하니, 즉 의로운 능력이 우리 안에서 활개를 치고 장악하게 되니, 바로 그 죄가 되가 하는 의로운 능력으로 인해서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 목사님,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대전에서 성경공부를 하는데, 어느 집사님께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자기가 루터의 책을 보았는데, 그 책의 내용에 보니, 루터가 교회에서 십자가를 전하니 교인들이 그만 '막 사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그래서 루터는 십자가에다가 행함을 첨가해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집사님이 저에게 질문하기를 "목사님,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 집사님께서 제대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제가 박윤진 성도님의 글을 왜 이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고 하니까, 바로 이 "안 밖으로 독자적인 영역이 없다" 라고 하는 것 때문인데, 정말이지 우리 성도에는 안 밖으로 독자적인 영역이 성립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안 밖으로 독자적인 영역이 말이다.

칼빈이나 루터와 같은 개혁주의가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데, 그들은 뭔가 역사적으로 자꾸만 보려고 하는데, 즉 자기가 확인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확인할 문제가 아닌데, 왜냐하면 성령 안에서는 우리가 독자적으로 확인하려고 하면, 그렇게 확인하려고 하면 '주체' 라고 하는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영역을 또 다시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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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가 예수를 품고 별도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역시 예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성도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말씀은 현재 성도 안에 있는 다른 것들은 인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죄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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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 자신이 자신에게 !!

그러니 성도 안에 성도만 있고 바깥에 예수님이 있다고 하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겠는가? "애들아, 똑바로 살아라. 막 살면 안 되고, 제대로 살아. 그럼 순종해야지" 라는 말이 성립이 되겠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성도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 자기가 자기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즉 "너의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은 내가 들추어내었다. 고맙지, 그지?" 라고 말이다. 바로 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말이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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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하면 성도의 안팎을 모두 예수께서 둘러쌓고 있다는 말씀은 원래 성도는 안팎이 모두 철저한 죄 덩어리였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는 예수님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서 그 이름은 여전히 예수인 것입니다. 성도는 나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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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는 '나'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 !!

여기에 보면 "성도는 나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는데, 물론 여기에서 '나' 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몸에서 나온 엉뚱한 이미지인데 말이다. 몸에 나온 엉뚱한 이미지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몸은 늙어도, 나는 늙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맞는 말이라는 것이다.

* 질문 - 이렇게 이미 그리스도 안에 둘러 쌓여져 있으면 성도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목소리가 희미해서 질문의 내용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음)

그게 아니고, 여기 그림을 보면, 여기에 이렇게 예수님과 예수님이 둘러쌓고 있는데, 그런데 이러한 전체가 모두 성도가 되어버리면, 여기 그림에 성도를 하나 더 덧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박윤진 씨가 그린 이런 그림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도는 여기서 칸막이로 있는 것이지, 즉 예수님의 안 밖서 일종의 막(膜)으로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도 안에 예수님이 있고 바깥에 예수님이 있으니, 이 전체를 두고 성도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또 하나의 그림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아니고, 이렇게 둘러 쌓여진 성도라는 말이다. 안과 밖으로 말이다.

◈ 성도는 날마다 막(膜)으로서 !!

그래서 제가 어제 설교를 하면서 막(膜)이라고 했는데, 즉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려드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너희들은 안과 밖인데, 그런데 왜 안쪽만 알고 있는가?" 라고 했다는 말이다.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들지 않았겠느냐는 말이다. 즉 겉은 만든 것도 예수님이고, 속을 만든 것도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는 날마다 막으로서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 인간은 모친의 죄 가운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특별하게 누가 잘하고 잘못하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는 일종의 해태종합 선물세트가 되어서, 아담으로부터 받았던 육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를 포기하지 않아 !!  

그러니 우리 인간은 어떠한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기 새끼가 최고이고, 또한 자기가 잘못한 것은 숨기고 잘한 것만을 드러내어서 남과 경쟁을 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오직 자기만을 사랑하는 본성은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가 박사교회에 있을 때 일인데, 살아있을 때는 그렇게 믿음이 좋아 보였던 권사님인데, 그런데 죽을 때 뭐라고 하는고 하니, 비석을 좋은 것으로 해달라는 것이다. 죽어서 그렇게 비싼 것을 해서 어디에 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렇게 자기에 대해서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는 결론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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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피에 의해서 참 하나님, 예수님, 인간이 예수라는 이름 아래서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온전함은 한 몸을 향하신 예수님의 처절한 예배, 즉 십자가 사랑만으로 가능하게 되는 구조입니다. 위 그림은 이제 아주 단순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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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하나가 되어 !!

여기서 "예수님의 피에 의해서 참 하나님, 예수님, 인간이 예수라는 이름 아래서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나가 된다는 것은 17장에 보면 나오는데, 물론 박윤진 씨는 여기서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요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제 7페이지로 넘어가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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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예수님만이 남아서 !!

여기에 보면 그림이 하나 나오는데, 이제 예수님만 혼자 달랑 남아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혼자 말이다. 그런데 이 그림을 쳐다보는 '나'를 바깥에 세우면 되겠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골로새서 1장 16절에 어긋난다는 말이다. 즉 모든 피조물은 예수님에게 통일이 되게 되어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바깥에 "나는 나다" 라는 식으로 세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또 다시 하나님과 예수님을 세우게(?) 되는데, 그러면 하나님도 떨어져 나오고, 예수님도 떨어져 나오는데, 그러면 우리는 두 분을 섬겨야 하는데, 거기에다 삼위일체니 성령님까지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 분을 그렇게 섬기려면 얼마나 바쁘겠는가? 시아버지가 무려 세 분이나 되지 말이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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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됩니다. 참 하나님도 성도도 모두가 다 이 그림 하나로 표현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그토록 길게 예수님이라는 참 하나님과 제자, 성도의 통일체를 완성코자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통일체를 툭 튀어나오게 할 배경, 즉 세상을 밝혀내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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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은 어두워 !!

여기에 보면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토록 길게 예수님이라는 참 하나님과 제자, 성도의 통일체를 완성코자 말씀하셨을까요?"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어둡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래에 보면 6절, 9절, 11절, 14절 등등이 나오는데, 즉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세상은 너희를 미워한다. 하지만 나도 미움을 당했으니 같이 미움을 당해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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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들과 성도들은 아버지께서 세상 중에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입니다(6절).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이유는 세상을 위해서가 아닙니다(9절). 이제 예수님을 세상을 더 이상 있지 않으실 것입니다(11절). 세상은 제자를 미워합니다(14절). 18절에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신다고 하십니다. 결국 23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목적이 성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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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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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 바울은 지금껏 제가 드렸던 아주 긴 말씀을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통해 압축했습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십자가를 기준으로 세상과 성도가 '예수' 라는 이름으로 분리가 된 채 서로가 죽었다고 하는 이 형국!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몰고 오신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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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

여기서 갈라디아서 6장 14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데, 왜 사도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라고 했는데, 왜 그런가? 왜 성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 다른 것은 전혀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성도는 십자가에 박혀 있으니까, 그러한 성도에게서 튀어나올 것은 십자가밖에 없는데, 그런데 그 성도 바깥에는 누가 있는가?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러니 성도에게서 튀어나오는 십자가의 그러한 작용까지도 누가 인도했다는 말인가?

◈ 아하, 제가 죄인이군요 !!

그것은 바로, 바깥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유도하셔서, 성도로 하여금 십자가만을 증거하도록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모든 것이 성도는 살아가면서, 자기는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죄인임을 고백하게 되는데, 바로 그 놀라운 능력, 그것이 곧 복음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섬김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하지만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는가? 이것 말고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다는 말이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복음에 대해서 확신하면서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십자가가 다가와서 바로 이러한 구조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감히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서 이런 지식을 수입한 것이 아니라, 아예 저희들이 이런 모든 상황에 포함이 되어있음을, 이것까지도 다 주님의 능력인 것을, 성령의 능력인 것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04,10 오후 7시 30분에 마침.

                       장사를 하든, 야구를 보든, 녹취를 하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가득하게 하옵소서 !!

                                              그리고 박윤진 성도님, 공짜라서 그런지 더 부럽습니다 !!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몰고 오신 현실

                                                                     2011,04  박윤진


요한복음 17장은 마치 산 정상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들이 관계라는 용어 속에 충만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17장에서 왼쪽을 보면 16장 이전 말씀들의 깊은 뜻이 모두 다 보이는 듯하고, 오른쪽을 보면 18장부터 시작되는 체포, 재판, 십자가 사건, 부활 사건 등이 숨가쁘게 전개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마치 산 정상에서 굽이쳐 흐르는 강줄기를 바라보는 듯이 보입니다.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라는 분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사실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어떻게 제자와 제자들로부터 복음을 듣게 되는 자 속에서 동일하게 투영되는 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결국 하나됨이 되고 그 하나됨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십자가 사랑입니다.
 
인간은 17장에서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아버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좋아라 합니다. 그러나 17장을 천천히 읽어보면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인간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장 1절)
 
우선, 예수님의 경우 아버지가 아들(예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과 상호연결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영광 따로 아버지의 영광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아버지의 영광은 공유된 영광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광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신 분과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광은 단순히 자신의 몸에 고정되고 마는 소유의 객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광은 인간의 몸을 벗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영광은 자신의 몸이 발산해대는 욕구 충족이기에 그러합니다. 자신의 욕망이 긍정적으로 채워지는 것 중 가장 황홀하게 완벽하게 충족된 것을 인간들은 영광이라고 하기에 그 영광은 죄와 같은 명찰을 붙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충족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몸을 가지신 채, 아버지와 영광을 공유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2절)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어떤 자들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구조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셨다는 것이고 아들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주체가 아버지와 아들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마치 축구선수끼리 주고받는 공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영생 또한 아버지와 아들만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 목적이므로, 아버지가 단독으로 영생을 주기로 결정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영생을 주고 안주고의 문제는 아버지가 단독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 쪽에서 아들 쪽으로 "주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생을 주는 권한이 얼마나 막강한 것인지는 바로 뒤에 나오는 말씀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까지 주어야 영생문제가 해결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은 이제 만민 중 영생할 자와 영생 못할 자를 나누는 기준으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아들 안에 있는 모든 자는 영생을 받습니다. 영생을 주기로 두 분이 결정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만민을 다스리시므로 아들 밖에 있는 자들도 다스리시지만 그들을 다스리는 기준은 영생받지 못하는 방식으로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성도가 되기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한 결정을 하실 자가 아들로 결정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주고 받은 인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자들을 내게 주셨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내게 주신 자들은 반드시 이렇게 됩니다 라는 선포가 아들에 의해 행해질 뿐입니다. 아버지가 평가해보니 구원받은 자들에게 이러 이러한 자격이 있어서 아들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 아들이 영생 줄 권한 있음을 알릴 목적으로 인간들이 보내진 것입니다.

반면에 그 외의 사람들은 아들이 영생주지 않을 권한 또한 가지고 있음을 알려 줄 목적으로 있는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생명과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전부 넘겨주었음을 알려주기 위한 광고판 역할을 하기 위해 인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심이 아들, 예수님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3절)

그렇다면, 영생은 무엇입니까? 그냥 이 육체의 목숨이 끊이지 않고 계속 생존하는 것입니까? 영생의 권한을 부여받은 아들의 영생에 관한 정의(定意)는 참으로 놀랍고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가 영광을 공유하고 서로 누군가에게는 영생을 주고 누구에게는 주지 않기로 주고받으신 완전 폐쇄된 것이므로 도대체 인간 쪽에서 어떻게 그 분들을 객체 삼아 탐구하고 알아챌 수 있단 말입니까? 벽, 엄청난 벽에 부딪치고 말죠.

영생은 곧 참 하나님과 아들을 아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17장에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참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 2절에서 자신과 영광을 나누시고, 자신에게 어떤 인간들과 영생과 만민지배권을 주신 분이 바로 참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 하나님이 단독으로 어떤 분이라고 소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계속 나옵니다만, 참 하나님의 개념은 반드시 그가 보내신 아들과 연결될 때만 등장합니다. 그림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A -----> B

A가 창조주이다, 선하다, 사랑이 많다, 하여튼 굉장한 존재이다. 그런데 그 A는 특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특정(特定)합니까? 그 대단한 A가 보낸 자가 바로 B이다. 이미 육체로 특정되어 계신 예수님(B)에 의해 A가 자연스럽게 특정되는 것입니다. B를 통해서 A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A가 여호와로 특정되어 있지 않느냐, 이스라엘의 그 역사 속에서 여러가지 사건을 일으키신 그 분으로 A를 이미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 특정됨이 육체화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기꾼들이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에 갔다왔다, 하나님을 만났다 혹은 예수님을 만났다 등등..... 하나님의 특정화는 이름을 통한 계시였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혹은 선지자 중 일부가 하나님의 음성 혹은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꼈을 뿐입니다. 뒷모습을 보거나....

그런데 이것은 공개된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이 한 육체를 통해서만 보여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통해서 확실하게 공개되지만 그 공개는 오히려 본다고 하는 자를 보지 못하는 자로, 듣는다고 하는 자를 깨닫지 못하는 자로 만들기 위한 수순입니다. 그래서 보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라는 것을 유발해내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비로소 예수님의 육체는 그들에게 봄과 깨달음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스스로 보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들의 봄이 되어 주시고, 깨달음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과 예수님을 앎이란 바로 이러한 앎입니다. 즉, 공개되어진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수집하고 논리적으로 쭉 줄 세워 설명가능하고 이해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기능을 습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그들의 보지 못함과 깨닫지 못함을 죽이시는 방식으로 자신을 맞바꾸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의 앎이란 바로 예수님께서 스스로 우리의 인식체계를 송두리째 대체하시는 작업입니다. 인간 쪽에서 시도한 알기가 아니라, 인간의 알기를 모름으로 몰아넣는 별도의 육체가 따로 준비되어 있음 자체가 앎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육체를 가지고 계신 터라, 별도의 육체를 가지고 버티고 있는 인간과 하나된다는 것은 곧 육체의 해체, 죽음조차 초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인 것은 죽음조차 초월한 어떤 분이 지금 육체의 해체를 준비하고 계심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참 하나님은 특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가 없고 오직 예수님만 육체로 특정되어 있으므로, 예수님을 죽음조차 초월한 분으로 보내신 자가 바로 참 하나님이 된다는 역방향만 확인되는 것입니다. 결국, 참 하나님은 예수님의 육체의 죽음 통해서만 그 진가가 발휘되는 것이지요.

위 그림에서 A(참 하나님) ----->B(예수님) 이지만, 결국 A가 참 하나님이라는 증명은 A <------ B(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즉, "A가 참 하나님이다" 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아니면, 여전히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과 "그냥"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 아니라,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예수님 스스로 인간의 앎이 되는 방식의 영생이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비로소 생명까지 주관하고 계신 참 하나님이 실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생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참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이 예수님 안에서 그의 죽음으로, 즉 사랑으로 죄인 속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앎이 덮쳐 온 것입니다. 이 덮침의 의미는 원래부터 성도의 용도가 예수님만이 참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성도는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발견되어 지는 것입니다. 원래 참 하나님 안에 있었던 자들을 참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으로 보내셨고,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만 성도가 성도로써 발견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예수님의 피와 결합하여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자체가 예수님 안에서만, 피안에서만 참 하나님 안에서 원래부터 있었던 자로서의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예수님의 피와 결합되어 또 다른 독자적 영역을 갖게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도가 원래 있었던 참 하나님의 자리가 바로 예수님의 자리가 현재 보여주고 있는 사랑의 자리였음을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본래의 자신을 품고 계셨던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그제서야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참 하나님을 알게되는 것이며, 그 앎이 바로 예수님이 참 하나님을 아는 방법 그대로입니다. 거듭 말씀드리게 되는 결론은, 예수님이 참 하나님을 아는 앎이 성도에게 덮치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이렇게 영생의 삶이 정의되면 17장의 말씀들이 새롭게 조명됩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8절)

예컨대, 위의 8절 말씀 중에서 등장하는 안다, 믿었다 라는 말이 주어가 "저희"임에도 불구하고 저희의 내막이 읽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안, 영생 안에서 참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됨을 그대로 투사받고 있는 대상들인 것입니다. 그들만의 앎과 그들이 생산해 낸 믿음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8절의 말씀은 20절에서 제자들의 말을 인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 확장되는데, 여기서의 믿음도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그대로 복사되었음과 같은 말입니다.
 
참 하나님 --A--> 예수님 --B--> 제자 --C-->성도들로 도식화 할 때 B, C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A의 관계가 그대로 B와 C로 투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A의 관계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을 통해서만 명확하게 구체화 고정되는 관계이므로, B, C의 관계 역시 예수님을 통해서만 명확하게 구체화 고정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해서 명확하게 구체화 고정된다는 말을 어떤 뜻일까요?

23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23절)

위 말씀을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우선 내가 저희 안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믿는 성도 안에 계십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위 두 그림을 합치면,


 
이 그림에다 21절의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라는 말씀을 감안하면 그림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는 사도바울의 "그리스도 예수 안" 이라는 말씀까지 고려해서 그림을 그려보지요.
 

이제 23절의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된다" 라는 말씀, 그것이 왜 십자가 사랑인가를 이해하기 위한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위 그림에서 성도는 안 밖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둘러 쌓여있는 형국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영역이 있고, 그 영역이 성도 밖의 예수님과 성도 안의 예수님으로 양분되어 있다는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위 그림은 성도는 안 밖으로 예수 말고는 아무런 독자적 영역이 없음을 뜻합니다.

성도가 예수를 품고 별도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역시 예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성도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말씀은 현재 성도 안에 있는 다른 것들은 인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죄라는 말씀입니다.

정리하면 성도의 안팎을 모두 예수께서 둘러쌓고 있다는 말씀은 원래 성도는 안팎이 모두 철저한 죄 덩어리였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는 예수님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 그 이름은 여전히 예수인 것입니다. 성도는 나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피에 의해서 참 하나님, 예수님, 인간이 예수라는 이름 아래서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온전함은 한 몸을 향하신 예수님의 처절한 예배, 즉 십자가 사랑만으로 가능하게 되는 구조입니다. 위 그림은 이제 아주 단순해집니다.
 


이렇게 됩니다. 참 하나님도 성도도 다 이 그림 하나로 표현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그토록 길게 예수님이라는 참 하나님과 제자, 성도의 통일체를 완성코자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통일체를 툭 튀어나오게 할 배경, 즉 세상을 밝혀내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단어를 아주 많이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미 예수님을 자신 속에서 이루어질 우주의 통일체와 그 통일체를 공격하고 이제 공격당할 세상을 확정하는 작업을 십자가를 통해서 하시겠다는 속내를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과 성도들은 아버지께서 세상 중에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입니다(6절).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이유는 세상을 위해서가 아닙니다(9절). 이제 예수님을 세상을 더 이상 있지 않으실 것입니다(11절). 세상은 제자를 미워합니다(14절). 18절에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신다고 하십니다. 결국 23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목적이 성취됩니다.

즉,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통일체가 배양되고 있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죄의 공장입니다.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우주의 완성된 통일체가 자라는 것입니다. 왜 굳이 죄의 공장 속에서 일까요? 그래야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성도를 십자가 사랑으로 사랑하셨음이 세상과 차별화되며 의미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은 그냥 죄 덩어리다" 라고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당해보니 세상이 비로소 세상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성도를 발생시킬 뿐 아니라, 세상도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 세상은 완전한 죄와 의와 심판의 배경으로서 기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껏 제가 드렸던 아주 긴 말씀을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통해 압축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십자가를 기준으로 세상과 성도가 '예수' 라는 이름으로 분리가 된 채 서로가 죽었다고 하는 이 형국!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몰고 오신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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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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