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41강 생존층과 약속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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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10228피p139약속층과생존층

피41강 생존층과 약속층

[11 대구강의 3] - [피 41] - 약속층과 생존층
                                                                                
                                                   11,02,2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약속 층, 그리고 그 대항마인 생존 층 !!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139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하나님의 약속 층에 대항에서 인간 세계에 생존 층이 형성되어있다.

지금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자연은 그냥 있는 것인데, 물론 사람들은 자기 것이라고 하고, 또한 하나님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자연을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를 하는고 하니,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 주어진 세계이다"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자기 생존을 위한 세계로서 말이다.

◈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

하지만 성경말씀인 창세기 3장을 펼쳐보면 그게 아닌데, 즉 "이 대자연은 사람들을 저주하기 위해서 주어진 환경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이 땅에서 밭을 갈아야만 하는데, 그러한 모든 것이 에덴동산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에덴동산에서는 넉넉하게 살았는데, 그런데 거기서 추방되고 난 다음에는 이 자연세계는 누구 말만 듣는가? 우리는 이 대자연이 죽었다고 여기는데, 그것이 아니라 누구의 말을 듣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만 듣는데, 그래서 이 자연세계에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데, 그러면 그것이 누구를 죽이기 위해서 나느냐는 말이다.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난다는 것이다.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자연세계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장치가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그래서 "힘들어도 살아야지 어떻게 하겠노?" 라고, 생존층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교재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이 자연세계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생존을 위해서 있다고, 그렇게 오해하고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 층에 대항에서 인간 세계에 생존 층이 형성되어있다" 라고 말이다.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도 어떻게 하는고 하니까, "주님이 어떤 입장에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가?"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성경말씀을 봐서 내가 이 자연세계에서 어떻게 보다 잘 살 것인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이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약속층에서 벗어나서, 우리 인간의 본심, 즉 "어떻게 해서든지 생존해야지" 라는 일념으로 성경말씀을 바라보기 때문에, 거기에서 잘못된 교회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하시면 잘 살 수 있습니다" 라는 인간의 욕구를 들어주는 교회들이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하나님의 약속 층에 대항에서 인간 세계에 생존 층이 형성되어있다. 이 두 층의 만남에서 '피'가 발생한다. 마태복음 4장에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그 생존층 속의 본질을 경험케 하셨다. 악마로부터 시험을 당하는 대목이다. 배고픔을 당하고,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을 거쳐 세상 전부를 지배하고 삼키고 싶어하는 속성까지 다 경험케 하신다.

신약성경인 마태복음 4장을 보면 광야가 나오는데, 일단은 그 광야를 교회로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 광야에 누가 나타나시는가?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데, 물론 이 광야는 예수님께서 나타나기 이전까지는 그냥 광야인데 말이다.

(마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 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4: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마 4: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 4: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 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 4: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 4: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 아니, 광야에서도 마귀가?

방금 말한 것은 다시 반복하면 다음과 같은데, 즉 사람들은 생존의 층으로 보지만 하나님은 약속의 층으로 보시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광야인데, 그렇게 서로 나란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광야에 예수님이 등장하게 되니, 여기서 누가 나타나게 되는가?

바로 사단이, 즉 악마가 등장한다는 말이다. 참으로 신기하지 않는가? 그러니 현재 환경은 무슨 환경인고 하니, 그 터는 곧 광야라는 것이다. 그냥 평범한 광야라는 말이다. 흙과 자갈과 바람이 있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악마가 주인노릇을 할 줄은 그야말로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악마는 언제 나오는가? 예수님의 복음만 전하게 되면 '톡' 하고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말이다.

◈ 목사님, 물이 새서 불편했지요?

그러니 복음을 모르는 자들끼리 있을 때, 거기에서 마귀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서로 도와주면서 사이좋게 지내는데, 즉 윗집에서 물이 새면 아랫집에서는 수리를 좀 해달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윗집에서 수리를 해주면 아랫집에서는 고맙다고 하는데, 물론 윗집에서는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그런 정이 넘치는 곳에 무슨 마귀가 있느냐는 것이다. 서로 좋은 이웃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윗집에서 그만 물이 아닌 복음을 떨어뜨리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만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즉 물은 얼마든지 용납이 되지만, 복음은 단 한 방울도 안 된다는 것이다.

◈ 아, 어렵도다 !!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면 목회는 끝났다고 보면 되는데, 교인들이 모두 나가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교회에는 아직 나가지 않고 버티는 분들이 계시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복음을 전하게 되면, 그러니 이 세상을 생존층이 아닌 약속층이라고 말만 해도 뭐라고 하는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어렵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교회 교인들은 아직까지(?) "목사님, 쉽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논리입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다른 교회에 가서 그것을 이야기하면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러분도 복음을 한번 전해보면 알 수 있는데, 그들이 과연 알아듣는지를 말이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복음이 있는데, 그런데 왜 성경말씀을 그렇게 삐딱하게만 보는가?" 라고 하는데, 우리가 매일같이 듣는 소리가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주셨는데, 그런데 왜 자꾸 부정적으로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말이다(ㅋㅋ).

◈ 왜 복음은 삐딱이 인가?

하지만 왜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이러한 광야에 예수님이 등장하게 되면, 그러면 사람이 함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만 사단인 악마가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단이 나타나서 예수님에게 요구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 광야는 약속층이 아닌 생존층이다" 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가 첫째로 하는 말이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라는 것인데, 즉 "예수야, 이 광야에서 당신도 밥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말이다. 그렇게 생존층을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해서 일단 배가 부르고 나면 그 다음에는 뭐라고 하는가? 그 다음은 '인기' 라는 것인데, 즉 배가 부르고 나면 그 다음에는 남들이 자기를 우러러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 '마아슬루'의 욕구설에 의하면 !!

그것이 '마아슬루(매슬로?, Maslow)' 라는 심리학자의 욕구설에 보면 잘나오는데, 그것을 잠시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의 제일 밑바닥에 있는 욕구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곧 동물의 욕구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제 아무리 고상해도 전쟁터에 나가서 삼일만 굶게 되면 그야말로 짐승이 되고 마는데, 그때는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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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슬로 [Abraham H. Maslow, 1908~1970] - 미국의 심리학자·철학자. 인본주의 심리학의 창설을 주도하였으며,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에서부터 사랑, 존중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기실현에 이르기까지 충족되어야 할 욕구에 위계가 있다는 '욕구 5단계설'을 주장하였다. 즉 "생물학적(생존) 욕구 -> 안전 욕구 -> 소속감과 애정 욕구 -> 존경 욕구 -> 자아실현 욕구" 라는 것이다. 주요 저서에는 《존재의 심리학 Towards a Psychology of Being》,《최상의 인간 본성 The Farther Reaches of Human Nature》등이 있다.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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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제일 밑바닥에는 생존의 욕구가 있는데, 그러한 욕구가 차곡차곡 채워지게 되면 제일 위에는 무슨 욕구가 있는고 하니, 그 제일 꼭대기 바로 밑에는 사랑을 받기 위한 욕구가 있는데, 그래서 부잣집에서 우울증이 많이 걸리고 자살도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부부사이에 불화가 많아서 이혼도 많이 하고 하는데, 그것은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해서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서로가 자기를 사랑해달라고 하는 욕구인데, 그러한 조건에 미흡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이라는 것이다.

◈ 인간의 최고욕구는, 자아실현 !!

그런데 이것보다도 더 높은 곳에, 즉 제일 높은 단계에 가면 무슨 욕구가 있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자아실현의 욕구' 라는 것이다. 마아슬루가 주장한 이러한 욕구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인정이 되고 또한 통용이 되는데, 그래서 회사나 기업체나 학교에서 정신교육을 시킬 때 이것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자아실현의 욕구인데, 이것을 쉽게 말하면, 즉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도를 닦으면서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것인데, 티벳의 달라이라마도 그러한 경우이고 말이다. 즉 "내가 곧 신이다" 라는 것이다. 복음을 잘못 이해를 해서, 자기는 좀 깊이 있게 들어간다고 하다가 그만 이렇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즉 자아실현의 욕구로 말이다. 즉 "나는 나다" 라는 것이다.

그 자아실현의 욕구 밑에 있는 것이 사랑을 받기 위한 욕구인데, 그런데 사랑을 받는 것이 원활하지 않으면 사랑은 치우고 "그래, 나는 나다" 라고, 그만 도피하듯이 위에 있는 욕구로 올라가고 만다는 것이다. 즉 뭔가 귀찮은 것이 있으면 피해버린다는 말이다.

◈ 생존, 인기, 권력의 소유 !!

지금 여러분 가운데서 웃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데(ㅋㅋ), 즉 자기가 편한 것이 최고라는 말이다. 진리이고 뭐고 간에 자기를 힘들게 하면 무조건 전부가 다 자기의 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자기를 힘들게 하면 자기의 적이라는 말이다.

이런 자아실현의 욕구가 사실은 제일 밑바닥인 생존의 욕구 안에 들어있는데, 마치 안테나와도 같이 말이다. 왜 옛날에 라디오나 자동차의 안테나를 보면 안에 다같이 들어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뽑아내면 딸려 나오는데, 그렇게 해서 하나의 길다란 안테나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의 욕구들이 사실은 다같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간에 보면 가족의 욕구나 같이 사는 욕구도 있는데, 그러한 욕구들이 같이 뭉쳐져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욕구에 대해서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시험을 하는데, 그래서 처음에 먼저 생존의 욕구를 가지고 시비를 건다는 것이다. 즉 제대로 밥을 먹고서 살아야 그게 사람이지,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것이 짐승과 도대체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그 다음 두 번째로는 '인기' 라는 것인데, 즉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해주고 알아주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소위 '존재감' 이라고 하는데, 즉 이 세상에서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가 말이다.

이러한 두 자기의 경우에, 우선 우리가 교회에 나왔을 때를 보자는 것이다. 자기가 어려울 때에 교회에 나와서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 밥도 먹기 힘듭니다. 취직을 시켜주세요. 결혼도 하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것이 해결이 되고 나면 뭐라고 하는가? 교회에서 누가 더 인기가 있는지, 바로 그런 시합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이 무엇인가? 물론 누가복음에 보면 마태복음과 달리 두 번째와 세 번째가 바뀌어 있는데, 이 둘을 같이 취급해도 괜찮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권력, 즉 '소유' 라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다 가진다는 것이다. 나쁜 것이 아닌 좋아 보이는 것을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야, 이것이 참으로 좋구나" 라고 하는 것을, 바로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즉 '권력의 소유' 라는 말이다.

◈ 마귀는 마귀다워야 !!

바로 이러한 세 가지가 뭉쳐서 오늘날 교회의 설교내용이 되는데, 쉽게 말해서 강단에 마귀가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마귀의 말이 듣고 싶어서 사람들이 수천 수만 명이 구름처럼 몰려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마귀의 말이 듣고 싶겠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 안에 마귀가 있기 때문인데, 즉 자기 자신이 곧 마귀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듣기가 싫고, 마귀의 말이 그립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가 마귀를 만나려고 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마귀는 마귀다워야 한다" 라는 글을 썼는데, 마귀가 예수님처럼 겸손해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마귀는 마귀처럼 굴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사람들이 이 세 가지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데, 즉 먹는 것이 해결되고, 인기가 오르고, 또한 권력을 잡으려고 말이다. 그래서 직분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교회는 생존의 층을 비롯해서 자아실현의 욕구를 달성하는 장이 되는데 말이다.

◈ 예수님은 왜 마귀의 제안을 거부했는가?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것을 다 거부했다는 것이다. 즉 마귀의 제안을 다 거부했다는 말이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다" 라고 하셨는데, 즉 이 세상을 약속층으로 만드신다는 말이다. 생존층이 아닌 약속층으로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혀 그것이 아니라, 자기 인기가 높아지면 교회에 나오고 인기가 떨어지면 나오지 않는데, 즉 이 세상의 것을 가지면 나오고, 가지지 못하면 나오지 않고 말이다. 이러한 모든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 우리 인간 속에는 악마가 있어서, 자기도 자기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전혀 조정이 안 된다는 말이다.

◈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이러한 세상에서 그 어떤 인간이라고 해도 이것을 전혀 이길 수가 없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즉 "너희들이 되지 않는 것을 내가 해줄게" 라는 것인데, 단 거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할 때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사실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말인데, 즉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라고 하신 말씀이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쉽게 생각하는데, 하지만 과연 그러한지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 '사람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의 차이점은?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즉 '사람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하도 쉽다고 하기에 과연 그러한지 제가 물어보았는데 말이다. '사람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제가 이번에 동해가 아닌 서해바다를 건너가서 강의를 했는데, 그들에게 참으로 난처한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낭낭한(?) 질문들을 해놓고서 일단 희망을 주었는데 말이다. 즉 "제가 이런 낭낭한 질문을 하는 것은 이미 해답이 있습니다" 라는, 그러한 뜻을 품고 있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방금 제가 한 질문은 상당히 어려운 것인데, 즉 '사람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의 차이점은 분명히 있는데, 하지만 거기에는 매우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사람의 모든 것' 이란 것은, 일단 사람은 껍데기로 보고,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두고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인간도 모두가 다 죄인임을 드러내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그 차이점을 알았지 싶은데 말이다. 즉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모든 것을 다 죄로 규정하지만, 구원은 받지 못해 !!

그래서 보편 구원론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데, 즉 사람의 모든 것을 다 끄집어낼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해서 그것이 죄라고 규정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끄집어낸 사람들을 다 십자가로 구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반드시 지옥에 갈 사람도 있어야 하고, 그것도 많은 숫자가 지옥에 가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은 작은 숫자라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게 작은 숫자를 모으니까 많아졌는데, 그러니 천국에 많은 사람들이 왔다는 것은(?) 그만큼 모았다는 것이지, 전혀 인구 비례로 따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노아의 경우에도 어떠한가? 자기 8식구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모든 것' 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그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미 주께서 그것을 모두 죄로 규정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닌데, 이미 죄로 규정한 사람들 중에서 일부만 구원을 하기로 하셨다는 것이다. 즉 99마리의 양은 그냥 두고 한 마리만을 건지신다는 말이다.

◈ 인간은, 자기만 편하면 최고 !!

그런데 이런 것을 모르게 되면 성경을 보면서 뭐라고 하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다고 해놓고, 왜 구원은 특별한 자, 즉 남은 자에게만 주어지느냐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오해를 하게 되면, 나중에는 결국 성경말씀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아이쿠,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성경책을 덮어버린다는 말이다.

본인이 알려고 하지 않고 그렇게 모르겠다고 하면서 넘어가게 되면,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조금 전에 말한 '자아실현' 이라는 것이다. 즉 "나만 편하면 최고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자아실현이 곧 우상인데, 즉 자기 자신이 바로 우상이 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을 섬겨야 하는데, 그만 예수님을 믿는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사람의 모든 것 속에 포함이 되어있어서, 이 모든 것은 무엇으로 드러나는고 하니, 바로 '죄'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 성령께서 왜 예수님과 마귀의 만남을?

그래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단을 만나도록 성령께서 주선을 하셨는데, 즉 사람의 모든 것은 그 어느 것도 전혀 마귀를 이길 수 없다는 입장에서, 그것이 곧 죄라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자기 혼자서 제 아무리 똑똑하고 깨끗하다고 해도, 그것이 결코 마귀를 이길 수 없는 입장이라고 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귀의 손아귀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다음 주일설교 내용이라서 너무 길게 하면 안 되는데, 물론 일주일이 지나서 또 하면 되겠지만 말이다(ㅋㅋ). 그러니 우리 인간은 혼자서는 그야말로 훌륭하고 완벽한데, 하지만 문제는 마귀를 대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마귀와 대적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그것은 복음을 알게 되면, 그러면 마귀와 싸울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 복음 앞에서 마귀는 우리에게 하나 하나 지적을 하는데, 즉 "너는 돈밖에 모르고, 어떻고 저떻고"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그래, 맞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모든 정죄함이 예수님 안에서 이미 정죄함이 아니라 의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고백하게 하도록 하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의 때문에, 바로 그 의의 힘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능력이나 똑똑함이 아니고 말이다. 오직 주님의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에, "나는 주님 앞에서 그 어떤 것도 의가 아니고 죄입니다. 죄인 중에서 괴수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이러한 차이를 알 수가 있는데, 즉 "아하, 그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주님의 그 구원이 얼마나 큰사랑인지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말이다.

◈ 다시 정리해보면 !!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이렇게 두 가지 층으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하지만 이러한 자연세계가 그대로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들은 이 세상을 생존층으로 일방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즉 에덴동산에서 그만 추방이 되고 난 뒤에는 그만 자포자기를 해서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것, 그냥 버티고서 살아야지. 믿을 것은 이 대자연밖에 없어" 라고 버티면서 살아가기로 작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가 이 세상을 생존층으로만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약속층이 핍박을 받고 미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4장에 보면, 생존층 때문에 약속층이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게 곧 이 세상에서 벌어진 첫 번째 살인사건이었다는 것이다.

◈ 인간은, 타인으로 인해서 사는 존재 !!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 형이 자기 동생을 죽였는데, 왜 죽었는가? 인물이 못나서 죽였는가? 말썽을 피웠는가? 아니면 형에게 대들기를 했는가? 도대체 왜 죽였느냐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동생 때문에 자기가 못난 존재가 된다는 말인데, 그러니 결국 인간은 무엇인가? 자기가 아닌 타인으로 인해서 사는 존재라는 게 밝혀진다는 것이다. 타인으로 인해서 사는 존재임이 말이다.

절에서 도를 닦는 중들이 왜 지옥에 가는고 하니까, 예수님이란 타인이 존재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자기만 들여다보고 있는데, 즉 "나는 역시 훌륭해"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겉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고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자기만 바라보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세우지 못하는데, 즉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말이다. 이것이 어디 절의 중들만 그러하겠는가?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세워야할텐데, 목사 앞에, 장로 앞에서 "니가 잘았니? 내가 잘났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매일같이 사람과 비교하다가보니, 타인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가 결국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보다 좀 더 낫다 싶으면, 거기서 미움이 발생하게 되고, 그런 미움 때문에 자기가 힘들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타인을 죽이게 되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자기가 편해지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에게 죄가 주어졌음을 애써서 감추려고 한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약속은 아벨의 '피'로 생존층에 !!

하나님의 약속은 바로 그런 식으로 이 생존층에 들어오는데, 즉 동생인 아벨의 피로서 말이다. 그렇게 들어와서 늘 상 핍박받는 모습으로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하지만 노아는 죽지 않았는데요?" 라고 할지 몰라도, 물론 노아가 죽지 않았지만, 그런데 그렇게 큰 방주를 지어놓았는데 아무도 오지 않으니 노아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요즘 말로 하면, 수천 평의 예배당을 지어놓았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식구들만 모여서 덜렁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 자식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아버지, 이게 뭡니까? 목회가 이런 것입니까?"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아무도 오지 않는데, 요즘 유행하는 말로 '노바디' 라는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노바디이든 아니든 간에 일주일 이후에 홍수는 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이냐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오게 되어있고, 아무도 그것을 믿는 사람은 없고 말이다. 그냥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다같이 생존층에 몰입하게 되는데, 그러니 약속층을 믿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답답해하고 애통해해도 말이다. 롯의 경우에, 그가 아무리 소돔과 고모라의 일로 인해서 자기 마음이 아프고 상해도, 하나님의 스케줄에 맞추어서 반드시 소돔과 고모라에는 유황불이 떨어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게 되어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아무리 애를 태워도 말이다. 주님의 약속은 전혀 차질이 없이 그대로 이루어지는데, 물론 지금도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 성도는, 약속층과 생존층에서 죽을 맛 !!

제가 서울강의에서 했는지 어디서 했는지 잘 모르겠는데, "즉 목회자들은 약속층과 생존층에서 죽을 맛이다" 라고 말이다. 생존층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오기는 오는데 그것을 전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해서 약속층을 전하려고 하니, 자기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오지를 않고 나가버리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경계선에 있는 자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인데, 하지만 그것이 바로 성도들이 가야만 하는 일종의 평균대라는 것이다. 체조선수들이 외줄 타기를 하듯이 하는 말이다. 성도들은 그렇게 그 좁은 길로 가야 하는데, 비록 양 사방이 낭떠러지라도 말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그렇게 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기도원에 가서 도를 닦아서 생존층을 잊어버리는 모르겠는데,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 나가서 복음에 빚진 자로서 증거해야 하는데,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이 사도행전 마지막 28장에 나오는데, 즉 사람들이 떠나간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아서 그렇게 전해도 말이다.

◈ 성공한 전도는?

그러니 설교를 엉터리로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자의 설교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한다" 라고, 이 세상이 그렇다는 말이다.

(행 28: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행 28: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행 28: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행 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행 28: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행 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그러니 전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면 이런 사실을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데, 즉 성령을 받은 사도바울이 전해도 사람들이 듣지 않더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했다고 여기는데,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곧 성공한 전도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외부에는 '물의 구조'(노아언약)에 의해서 자연의 은총과 보호를 받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악령에 의해서 여전히 악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 노아언약의 경우에 !!

그러니 노아홍수 이후에 사람들이 악해도, 즉 이 세상에 선인과 악인이 산다고 할지라도 이제 다시는 물로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무지개 언약' 이라는 것이다. 그게 곧 노아언약인데 말이다.

노아언약이 무엇인고 하니, 복음을 모르는 세종대왕, 복음을 모르는 강감찬 장군, 복음을 모르는 을지문덕 장군도 어떠한가? 그들은 따뜻한 햇빛과 대지를 적셔주는 비가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르고 그냥 좋다고 하면서, 즉 창조주의 영역이라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면서도 그들은 혜택을 입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혜택을 입었지만 그 안에서는 내부적으로 무엇이 자라는고 하니까, 저주받을 자들이 자라나고 있다는 말이다.

◈ 두 갈래의 길로 !!

그것이 창세기 9장에 보면 어떻게 나타나는고 하니까, 구원을 받은 노아식구가 그만 둘로 갈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는 셈과 야벳의 계열인데, 그것을 소위 '셈 라인' 이라고들 하는데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쪽은 어디인고 하니, 일명 '함 라인'으로, 즉 함과 그의 아들인 가나안 계열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갈라지면서 그것이 성전(?)에 잘 나오는데, 즉 하나님께 복을 받은 라인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들은 그저 덮어주심의 은혜로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라인이라는 것이다. 그쪽이 바로 축복을 받은 라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얼레리 꼴레리, 우리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벌거벗었어요" 라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의 허점을 마구 드러내는 쪽은 어떠한가? 그것은 저주를 받은 쪽이라는 것이다. 즉 '저주라인' 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둘로 나누어지는데, 그게 창세기 9장에 있는 내용으로서, 아마 여러분도 잘 알지 싶은데 말이다.

(창 9: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창 9: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창 9:20)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창 9: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창 9: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창 9: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니 성전(?)이라는 것은 하나의 사태인데, 즉 심판사건이 일어나고 난 이후에, 이 심판사건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거기서 무엇을 드러내는고 하니, 이 심판은 하나님의 손해보는 장사가 아닌데, 그렇게 심판을 함으로서 미처 알지 못했던 두 가지의 갈래가 조금 더 또렷하고 뚜렷하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의 경우에 !!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아브라함의 경우에, 아브라함에게서 자식이 나올 때,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나오면 모두가 다 구원을 받는 줄로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저주받은 자가 나오게 되는데, 즉 '이스마엘'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삭의 경우에도, 이삭은 누가 보더라도 다 구원받은 가정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 이삭의 가정에서 저주를 받은, 즉 창세 전부터 미움을 받기로 작정이 된 가정이, 즉 가문이 나오는데, 그가 곧 '에서' 인데, 이 에서가 나중에 나라가 되면 에돔이 된다는 것이다. 이 에돔과 이스라엘은 서로가 앙숙인데, 즉 지겹도록 서로 싸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마지막 성경인 말라기 1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라고 하는데, 그래서 서로가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은 에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말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말 1: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 미움도 사람도 없이, 통합하는 하나님 ??

방금 제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합하는 개념인데, 그러니 신은 가장 윗대가리인 가장 높은 곳에 있어서 모든 것을 통합하는 개념이란 것이다. 즉 산의 정상 부분이 신이 계시는 곳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은 어떤 분인고 하니,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는 하나님이 바로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미움도 없고 사랑도 없는, 그런 둘 다 통합하는 것은 사람들의 상상 속에 있는 하나님인데, 즉 자기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낸 조작된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게 곧 우상이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철학의 하나님이고, 또한 과학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자연적으로 인간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또한 주권사상의 하나님이고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주권사상이라는 것이 없는데, 단지 언약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언약은 하나로 합치는 것이 아니라 둘로서 쪼개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서로 대비를 시키는 것인데, 천국과 지옥으로, 또 지옥과 천국으로 말이다. 양과 염소도 물론 그렇고 말이다. 그렇게 서로 대비를 시키는 것이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구나. 흐흐흐" 라고 하는, 그런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산타클로스와 같은 하나님은 없다는 것이다.

이번에 중국강의에서 산타클로스 이야기를 하니 사람들이 이해를 잘 하던데, 제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직접 다 그리고 했는데, 그게 동영상으로도 촬영이 되어서 아마 십자가마을 사이트에도 올릴 수 있지 싶은데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차갑든지, 덥든지'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그렇게 구별하는 것은, 너무나도 이 세상의 생존층에 파묻혀서 자기 생존에 불리할까 싶어서 은근히 약속층을 감추어서 자기를 위장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니 지금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그건 아마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것이지 싶은데 말이다.

◈ 왜냐하면, '심판주'이기에 !!

아무튼 하나님이라는 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고상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렇게 두 조각으로 나누어지는 것인데, 서로 섞일 수가 없는 말이다. 서로 화해하면서 손잡고 할 문제가 전혀 아닌데, 오히려 날카롭게 갈라지면서 찢어지는 문제라는 것이다.

마치 에서 쪽과 야곱 쪽을 그렇게 찢었는데, 그런데 한 쪽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고 또 다른 한 쪽은 미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가 사람을 만들어놓고, 그 만든 사람을 미워하느냐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미워하시는가? 이것은 조금 더 어려운 이야기인데 말이다. 그것은 곧 예수님 자체를 심판주로 세우기 위해서인데, 그러면 심판주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당연히 심판을 해야하는데, 즉 예수님에게 이미 모든 세상 심판에게 넘겨졌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즉 사랑을 받고 미움을 받을 사람을 구분짓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차후에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띄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지옥에 가는 역사적 사명을 띄고 말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아무리 천국에 가려고 해도 주님께서 그만 밀어버리는데, 그렇게 해서 밀리는 쪽이 행함을 주장하는 쪽이고, 그래서 십자가에서 그만 가루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제가 이번에 사이트에 올린 '개혁주의 신학이 왜 이단인가?' 이라는 글에 보면 잘나오는데, 바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는가? 우리의 기본적인 타락된 몸에서 나오는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붙잡고 있는데, 그렇다보니 이런 이야기들이 낯설게 느껴지고, 듣기는 들어도 자기 몸과 제대로 융화가 되지 않는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이런 심판을 생각하지 않으면 성경말씀을 이해하기가 전혀 곤란하다는 것이다. 심판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면 말이다. 그래서 전도서 마지막 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잊지 말라" 라고 하는데, 그리고 또한 초반부에서는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고 말이다.

(전 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
(전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외부에는 '물의 구조'(노아언약)에 의해서 자연의 은총과 보호를 받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악령에 의해서 여전히 악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불의 구조'로 변할 시점에 와있다. 모든 것이 바뀌기 전에 '불의 구조' 안에서 살아남을 새로운 인간의 창조가 시급하다.

◈ 물의 구조와 악령 !!

그러니 여기서 인간들은 물의 구조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싶은데, 그것이 곧 노아언약이란 말이다. 그런데 내부적으로는 어떠한가? 악령에 의해서 여전히 악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대자연의 세계가 겉으로는 물의 보호를 받고 있는데, 즉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는 말이다. 그것이 곧 은혜인데, 그런데 내부적으로는 악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악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는데, 즉 악이 있기 때문에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처럼, 여기서 억울한 '피'가 발생된다는 것이다.

◈ '복을 주신다' 라는 의미는?

이 억울한 피를 제단으로 모시고 온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데, 이런 게 참 어렵다는 말이다. 이것이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데 이야기인데 말이다. 즉 제단을 쌓고 피를 바르면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임해서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출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 라는 것은, 그러한 상황을 그대로 팽창시키고 되풀이하겠다는 의미인데, 그래서 십자가의 복을 받게 되면, 그 십자가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영원토록 되풀이가 된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를 받는 것이 곧 복을 받는 것이라는 말이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즉 하나님의 희생하심을, 하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그 죽으심을 되풀이해서 받으니,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떠서 받는 복은 이 십자가의 복밖에는 없는데, 그래서 "주여, 오늘도 주님의 용서하심 가운데서 시작하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주는 사라지고 축복만 오니 말이다. 성도는 그렇게 하루를 시작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을 크게 보게 되니 그런 생각이 다 든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바깥으로는 물의 보호를 받고 안으로는 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악이 있다는 것은 억울한 피가 발생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난번에 제가 개혁주의협회에서 주관한 세미나에서 '70이레' 강의를 하는데, 제 옆에 있던 교수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노아언약에서 왜 피가 발생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그런 무식한 신학자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피가 나오고, 그 피를 제단에 뿌리는,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임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바로 '모세언약'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모세언약이니 당연히 제사법과 율법이 주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 잠시, '성막'에 대해서 !!

제가 이번에 중국에서 4일 동안 강의한 것은 지금 잠시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성막'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성막에는 이렇게 지성소가 있고, 바로 옆에 붙어서 그 지성소의 두 배 크기의 성소가 있고, 이렇게 바깥에는 제단이 있고, 그리고 동쪽으로 이렇게 문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의 크기가 어떻게 되는고 하니, 동서로 그 길이가 100규빗으로 약 50미터가 되고, 그리고 폭이 남북으로는 50규빗이라는 것이다. 그 높이는 5규빗인데, 나중에는 이것이 무려 60규빗까지 높아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 바깥뜰에 있는 제단에서 어린양의 피가 관통해서 어디서 만나는고 하니,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이 언약궤에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데,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믿어서가 아니라, 주의 이름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주의 이름은 우리의 죄와 만나게 되는데, 그러니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반드시 자기의 죄와 만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냥 멀쩡하게 피를 받는다는 것은, 그것은 아파트 각 단지를 돌면서 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피를 받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피에는 반드시 가해자가 동반이 되어야 하는데, 즉 자기가 가해자의 입장이 되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피는 효과도 없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즉 "내가 죽었습니다" 라는 것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복음을 이야기하면 부정적으로 말하느냐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약속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하는고 하니, 이 세상은 우리를 위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즉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이기 때문에, 즉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세상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절이 되고 마는 것인데, 자기 잘난 맛에 모이는 것이 무슨 교회냐는 말이다. 복음을 모르고, 예수님의 피의 의미를 모르는데 말이다. 그것은 갓바위이고 동화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피가 있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 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엇인가? 모두가 하나같이 자기 잘난 맛에, 심지어 예수님의 피까지 믿어주는 그 잘난 맛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여기서 이렇게 제사법이 성립이 되면, 그 다음에는 십계명과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진영으로부터 무엇을 끌어 모으는고 하니, 즉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죄를 끌어 모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죄를 말이다. 마치 지남철이 이렇게 가운데 있으면, 그 주위의 쇠붙이들이 마구 달라붙듯이 말이다.

◈ 아니, 탐내지 말라니요?

그러니 율법이 주어지게 된 것은 우리의 죄가 하여금 더욱 더 죄가 되게 하기 위함인데, 즉 십계명을 줌으로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이 십계명의 제일 마지막 계명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하이라이트인데, 즉 "탐내지 말라" 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눈으로 보는 것이 있고 귀로 듣는 것이 있으면, 그런 모든 것이 탐이 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특히 남자들의 경우에는 자동차인데 말이다. "나는 이 레조가 뭐꼬?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거리에는 K5, K7가 폼을 잡고 다니는데, 자기가 무슨 구석기 시대에 사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여자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가방과 옷이 그 대표적인 것인데, 즉 '액셔셔리' 라는 것이다. 50만원을 예상해서 백화점에 갔는데, 그런 것은 옷도 아니라는 것이다. 100만원짜리가 옆에서 빛이 나고 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50만원짜리만 생각해도 좋아서 잠아 오지 않았는데, 그러니 괜히 백화점에 갔다는 것이다. 물론 아파트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교회가 곧 지옥 대기소 !!

이렇게 탐심은 잠재가 되어있는 우리의 본능인데, 즉 죄라는 것이다. 그런 죄를 까발리는 것은 법인데, 즉 죄는 죄 그대로 오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피와 만나자는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약속의 층에 우리가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곧 사랑이란 말이다. 즉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그렇게 죄를 끄집어내어야 하는데, 그런데 요즘 교회는 그게 아니라 그만 칭찬 일변도로 나가버리니, 사람을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더 피가 없는 세계로, 용서가 없는 세계로, 즉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세계로 가버린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자기 잘난 세계가 곧 지옥이고 말이다. 거기에 앞서서 모인 곳에 교회인데, 그러니 요즘 교회가 곧 지옥 대기소라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를 다시 살펴보자.

** 이제 '불의 구조'로 변할 시점에 와있다. 모든 것이 바뀌기 이전에 '불의 구조' 안에서 살아남을 새로운 인간의 창조가 시급하다.

◈ 물의 구조에서 불의 구조로 !!

그러니 물의 구조에서 이제는 불의 구조로 변할 시점에 와있다는 것인데, 즉 물로 가득한 세계에서 주께서 어떻게 하는고 하니, 말을 바꾸어서 해보겠는데, 노아홍수 때 온 세상이 무엇으로 가득했는가? 온통 물로 뒤덮여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뒤에 그 물이 거두어졌는데, 하지만 물이 가득 차 있던 그 성전은(?)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물의 심판을 받는 성전이 그대로 있어주어야 보호를 받는, 즉 은혜라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홍수를 당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멀쩡하지? 세상에 주께서 보호를 하시는구나. 이렇게 악인들이 버글거리고 있는데도 홍수심판이 없는 것을 보니, 이제 다시는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말이구나. 이런 복을 다 받다니!"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나중 신약에 와서보면 불의 구조인데, 하지만 당장 불바다가 되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렇게 불바다라고 하니 서울이 생각나고 또 평양이 생각나지 싶은데 말이다. 사실 평양에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주어야 지방경제가 살아나는데 말이다. 핵폭탄을 발사해서 서울인구가 천만 명 정도 날아가고 땅값이 내려갈 때, 그러면 공장을 지어도 겁이 나서 지방에 짓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부흥이 되고 얼마나 좋으냐는 말이다(ㅋㅋ).

이렇게 불로서 심판을 해야만 되는데, 그런데 주께서 자꾸만 지연을 시킨다는 것이다. 사실은 약속의 스케줄대로 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때는 불로서 심판이 되는데, 노아 때는 물로서 심판한 것처럼 말이다.

◈ 이 세상은 말씀으로 지어졌기에 !!

그렇다면 이렇게 물로 심판하고, 또한 불로 심판하는 것을 한 마디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베드로후서 3장 5절에 보면, "이 세상이 말씀으로 지어졌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모르는데 말이다.
 
(벧후 3: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벧후 3: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벧후 3:6)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여기서 "말씀으로 지어졌다" 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글자로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게 무슨 글자인가? 하나님의 계시의 글자라는 말이다. 즉 성경말씀으로 이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즉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라는 말인데, 다르게 표현하면, "너희들이 말씀이 가지고 있는 새로움을 아는가?"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그런데 그런 말씀에 관심이 없는데도 어떻게 그게 신자인지, 저는 개인적으로 그것이 참으로 모호하고도 궁금하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았다면 반드시 말씀에 관심이 있고, 그러면 이 세상이 말씀으로서 지음을 받았음을 알게 되고, 그러면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데, 그렇다면 자기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는 반드시 이 말씀에 근거해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 사건인가? 존재인가?

어제 오전시간에 야고보서 설교를 하면서 안개 이야기를 했는데, 즉 그런 물방울이라도 있다가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안개의 차원에서 우리 인간을 존재로 보지 말고 사건으로 보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로 보게 되면 면적이 있게 되는데, 즉 넓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거기에다 역사를 기록하게 되는데, 마치 일기장과 같이 말이다. 즉 "내가 7살 때 무엇을 했고, 20살 때는 무엇을 했고, 30살 때는 성령을 받았고(?)" 라고 하는, 그런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두께가 있고 넓이가 있으니 역사로 기록이 되는데, 하지만 성경말씀은 뭐라고 하는가? 우리 인간은 그러한 존재의 면적이 아니고, 있다가도 없고, 또한 순식간에 나타나는 '사건' 이라는 말이다. 즉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라고 하는데, 그래서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 4: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약 4: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런데 사건이 아닌 역사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주의 뜻은 그만 사라지고 누구의 뜻만 남게 되는가? 자기 뜻과 자기 소망과 자기 희망에 거기에 기록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에서 이러한 것을 두고서 "다 악한 것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사건인데 왜 자꾸만 존재로 보느냐고 한다는 말이다.

장로님에게는 좀 죄송한 표현이지만, 나이가 90이 되어서 죽게 되면, 결국은 살아온 것이 하나의 사건으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서 장로님,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도 자기가 오랜 동안을 살아온 것 같지만, 막상 살아보면 뒷꽁지는 사는 족족 다 날아가 버리고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고맙기도 하고 말이다. 50년을 살면 50년이 날아가고, 60년을 살면 60년이 날아간다는 것이다.

◈ 점점 더 면적과 두께가 줄어드는 인생 !!

그렇게 해서 남는 것은 조금만 날씨가 흐려도 온 몸 구석구석에 아프지 않는 곳이 없는, 즉 처음에는 자기가 몸을 가졌지만, 나중에 몸이 자기를 가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젊었을 때는 자기가 원하는 데로 자기 몸을 움직일 수가 있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면 몸이 자기의 상전이 된다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여주어야 하고, 아프면 파스를 붙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방 파스를 말이다. 오 목사님이 꼭 그렇다고 말하기를 곤란하지만, 아직 나이가 50도 못되면서 말이다(ㅋㅋ).

그러니 점점 더 면적과 두께가 처음보다 줄어든다는 것이다. 나중에 90이 넘으면 그냥 똥오줌만 사는 하나의 선으로 남게 되는데, 즉 하나의 사건으로 말이다. 젊었을 때는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말씀을 할까?" 라고 하다가, 나중에 나이가 들면 "오늘은 똥을 사지 않았을까?" 라고 하면서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잘나갔던 시절은 모두 다 떠나가고, 남는 것은 하나의 선인데, 그 선이 사라지면 점이 되고, 그 다음이 죽는 순간이라는 말이다. 즉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 그런 자기 자신을 믿었다는 것이 얼마나 통곡할 일인지 모르는데, 그러니 존재를 사건으로 그렇게 해주시는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를 사건화시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서 사건화가 되는 인간이지, 자기 존재의 면적을 자랑하고 주님과 의논해서 협상하는, 그런 존재로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협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 마태복음 21장의 무화과나무의 경우에 !!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의 경우에, 무화과나무는 자기가 하나의 존재로서 5월경에 열매를 맺으려고 폼을 잡고 있는데, 그런데 주님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만 배가 고팠다는 것이다. 하필이면 그때 말이다. 그래서 무화과나무를 쳐다보니 아직 때가 아니라서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 예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서 말라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무화과나무가 왜 저주를 받았는가? 그것은 바로 무화과나무의 경우에, 때가 되던 되지 않던 상관없이 주님을 위한 나무이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 주님이 배고파하시는데 왜 열매를 제 때 제공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저주를 받고 말았다는 것이다.

(마 21: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마 21:19)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그것이 바로 인간이고, 우리 피조물의 운명이고 팔자라는 것이다. 거기에서 더 원할 것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오직 주님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주를 위한 모습이 없다고 하면 저주를 받아도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약속, 즉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하는 자로서, 그렇게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부질없고 쓸데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간음한 여인의 경우에도 !!

어제 설교시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즉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의 경우에, 누가 봐도 그 여자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간음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미래에서 보면 그 여인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인데, 왜냐하면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의 사건으로서 터진 여인이기에 말이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그 여자만을 보았지, 그 여자가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 그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관계가 있는 여인으로서 이 땅에서 간통이라고, 그렇게 남들이 이해하는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제가 지금 간통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두둔을 하든지 말든지 간에 모든 인간은 그렇게 그 여인과 같은 간통은 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하지만 다른 죄가 또 다들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여인이 간음한 죄까지도 용서를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우리도 그녀와 똑같이 죄인이고, 그리고 우리도 용서받지 아니하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 여인이 먼저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인에 말하기 전에 먼저 땅에 글을 썼는데,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 예수님을 떠난 것이 곧 문제 !!

물론 예수님께서 땅에 쓰신 글의 내용은 알 수가 없는데, 그들이 지은 각각의 죄를 지적한 사항인지, 아니면 모세율법인지 말이다. 아무튼 여기서 그들은 자기들이 죄인임을 알고 떠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참 재미있는데, 우리가 알기에는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면서 오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했는가?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라고 함으로서, 그들은 그 이전에는 자기들에는 죄가 없다고 여기고는 돌로 쳐서 그 여인을 죽이려고 했는데, 하지만 주님이 땅에 쓰신 글을 보고 나서는 그만 자기들은 죄가 있은 것으로 발각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들켰다고 하면 주님에게 와야하는데, 그런데 그들은 들었던 돌을 놓고 그만 다 가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에 있는가?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는가?" 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가버린 것이 문제인데, 도대체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주님이 없는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없는 곳에는 누가 있는가? 자기 자신이 잘났다고 하는, 그런 자기의 잘남만이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에게 오면 죄가 발각되고, 반면에 주님이 없는 곳에서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고 말이다.

바꾸어서 말하면, 복음이 있는 교회에서는 자기 죄가 드러나니, 그만 복음도 없이 자기 집에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여전히 자기 죄는 감추어진 채로, 자기는 그만 잘난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요 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요 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요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 8: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 8:7) 저희가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요 8: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 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 자기 죄를 깨닫는 복을 받아야 !!

우리교회에 나오고 싶어도 교인들이 자꾸만 "장로님, 장로님!" 이라고 하는 바람에 오지 못하는 분이 있다고 하는데, 하지만 성도라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죄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장로가 아닌 말이다. 즉 어떻게 해서 자기가 죄인인지, 그것을 더욱 더 많이 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까 두 번째로 '인기'를 이야기했는데, 그런 인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평판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남들 앞에서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데, 예수님이라는 진정한 타인 앞에서 말이다. 도대체 장로직분이 뭐라고 말이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데, 결코 장로직이 천당에 보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장로가 되는 복을 받을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즉 자기가 간음한 여인이고, 자기가 깡패이고, 자기가 세리임을, 그런 자기 죄를 깨닫는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러한 복을 받았다고 한다면, 주님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자기 죄를 발각시켜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이미 용서가 준비되어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왔다" 라고 하는 것은, 이미 용서까지 해주시겠다는 것이 내포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재 139페이지 하단에 나오는 '새로움' 이란 것인데, 잠시 교재를 살펴보자.

** 새로움이란 '저주가 걷힌 환경'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허락하신 것도 '땅의 저주가 걷힌 안식의 땅'이었다. 그래서 노아라는 이름의 뜻도 '땅의 안식'이었다.

◈ 과연 무엇이 '새로움' 인가?

그러므로 이 새로움은 기존의 우리가 생각하는 새로움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새로움은 무엇인고 하니, 기존에 알고 있던 것에서 더욱 더 개선되는, 즉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새로움은 오히려 기존의 것이 더욱 발전하는 것인데, 그것을 두고서 새로움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경우에는 무엇인가? 기존의 것을 용도폐기하고 처분하는, 바로 그런 새로움을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기존의 것을 부수는 말이다.

◈ 찢음을 통해서 살리시는 하나님 !!

호세아서 6장에 보면, 이게 다음주일의 오후예배 설교내용인데 말이다. 즉 "내가 너희들을 찢으리라. 그러나 사흘만이 다시 살리겠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그냥 살리는 게 아니라 찢는 행위를 통해서 살리신다는 것이다. 찢음을 통해서 말이다.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산다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찢긴다는 것을 더 아까워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지금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즉 자기 몸이 여기까지 오는데 말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부도를 맞는 것을 찢어진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건 찢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돈이 날아가는 것이지 말이다. 그러면 진짜 찢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가 죄인임을, 즉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그 어떤 것도 의로운 것이 없음을, 물론 앞으로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것이 곧 찢는 것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부도를 맞은 것을 잘난척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란 말이다. 남에게 밉상을 받는 것조차도 잘난 척을 할 수 있는데, 그러니 그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찢어짐의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죄인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건 없는데(?), 여자를 밝히고 돈을 밝히는 것은 죄인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무조건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즉 여자를 좋아하고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교수준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 차리라 아이가 "엄마는 죄인이라고 하는데, 엄마는 왜 죄인이지?" 라고 하면, 엄마는 "내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것을 봐라. 그러니 죄인이지" 라고 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냥 무너진다는 말이다.

◈ 간음한 여인에게 있어서 '새로움'은?

아까 말한 간음한 여인의 경우에, 예수님께서 아무도 없을 때 그 여인을 보고서 뭐라고 하셨는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하셨는데, 즉 예수님의 용서인데, 그것이 바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말씀의 의미라는 것이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비로소 이 여인은 자유의 의미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움'의 의미라는 말이다. 즉 자기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새로움,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주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즉 우리가 무엇을 드려서 다시 갚는 식으로 받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즉 되갚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이 아니고,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해방시켜주셨다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을 증거하게 되는데, 그것이 복음이란 말이다.

◈ 우리 인간은 드려봐야, 그것이 곧 '죄' !!

그러면 왜 우리가 무엇을 드리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가? 드려봐야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들로 인해서 사도바울이나 오늘날 우리들도 많은 오해를 받게 되는데, 즉 "아무 것도 드린 것이 없이 그냥 받았다" 라고 하니,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면 그 교회는 꼬라지가 좋겠다. 아무도 헌금을 하지 않겠네. 그래도 구원이 된다면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죄 인식도 전혀 모르고, 즉 "바치는가? 바치지 않는가?" 라고 하는 행함의 차원에서 따진다고 하면, 그러한 사람에게 "당신은 바쳐야 됩니다" 라고 해도, 사실은 그렇게 하든 하지 않든 간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래도 교회에 나왔으면 교회재정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해야하는데, 그러니 헌금을 좀 하세요" 라는 말을 할 수는 있는데, 하지만 그러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약속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성령이 없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즉 성령을 받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성도의 교제는, 반드시 약속의 층에서 !!

그러니 교회를 운영하는 차원에서, 마치 회사를 경영하듯이 그런 경영차원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집에서 가계부를 쓸 때도 그런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는데, 그러니 그런 내용을 가지고 성도의 교제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성도의 교제는 반드시 약속의 층에서 되어야 하는데, 육의 입장에서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교제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육의 단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교재를 살펴보자.

** 새로움이란 '저주가 걷힌 환경'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허락하신 것도 '땅의 저주가 걷힌 안식의 땅'이었다. 그래서 '노아' 라는 이름의 뜻도 '땅의 안식'이었다. 노아의 식구가 방주에서 나왔을 때, 그야말로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게 된다.

(창 5: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 하나님의 안식 !!

이렇게 노아 식구들의 이렇게 방주에서 나와서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세계가 무슨 세계인가? 그게 곧 하나님의 안식의 세계라는 말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안식' 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하심에 대해서 스스로 만족하신다는, 그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나는 일을 참 잘했어" 라고 하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만족에 빠져있는 상태를 두고 안식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들의 만족은 전혀 아니라는 말인데, 오히려 우리들의 안식을 빼앗아서 하나님은 자기 안식에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들이 내심 노리고 있던 '나'의 안식은 주님의 안식 앞에서 찾으면 된다는 말인가? 안 된다는 말인가? 당연히 찾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천국은, 아들의 나라 !!

예를 들어서, 성경에 보면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했는고 하니, 다음과 같이 시비를 걸었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 어떤 형제들이 있었는데, 그런데 여자가 시집을 왔는데, 먼저 제일 큰형과 결혼을 했는데 죽어버리고, 그래서 동생에게로, 또 동생에게로, 그렇게 결혼을 하기만 하면 다 죽어버린다는 것이다. 여자의 팔자가 드세서 그런지 몰라도 말이다.

그렇게 해서 줄줄이 다 죽고 말았는데, 도시라솔파미레로 말이다. 그래서 결국에 제일 마지막 동생과 결혼을 했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경우에 부활해서 모두가 천국에 갔을 때,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의 남편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7명이 모두 달라 들어서 "여보, 여기야!" 라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이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이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셨는가? 천국에서는 시집가고 장가를 가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이 세상에서는 시집가고 장가를 가는 것이 안식에 관련된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행복을 보장해주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결혼을 하는 것은, 이 땅에서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사두개인들의 생각이고, 또한 우리들의 생각인데,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행복을 위한 것이 곧 천국이라고 같은 연장선에서 생각하는 잘못을 범한다는 것이다.

(마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마 22: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마 22: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마 22: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마 22: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마 22:28)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마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 22:31)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마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마 22: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하지만 이 하늘나라는 우리의 나라가 아니라 아들의 나라인데, 즉 아드님이 안식을 하신다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사랑하면 아들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는 의미인데, 즉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혜택을 입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주시는 안식의 혜택을 입어야지,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평소에 노리고 있는, 즉 "나는 이러 이러한 것을 원합니다" 라고 하면서 노리고 있다가, 그것을 그대로 달라고 천국에서 떼를 쓰면, 죄송하지만 천국에서 추방을 당하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천상에서 다시 만나면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자기가 철이 없을 때 고향에서 부모가 억지로 결혼을 시켜서, 시골처자와 결혼을 했는데, 그런데 살면 살아갈 수로 그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에 나이 40이 되어서 그야말로 "야, 바로 저 여자다" 라고 할 정도로 한 눈에 '뿅' 가는 여자를 만났는데, 진짜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말이다. 그래서 서류상 자기에게는 본처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집어넣을 수는 없고, 아무튼 그 여자를 사모하게만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교회에 나온다면 뭐라고 기도하겠는가? 만약에 "내가 예수님을 잘 믿어서, 그래서 천국에 가서 이 땅에서 미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 한을 풀어야지. 어서 천국에서 그 여자와, 이제 본처의 눈치도 보지 않고 둘이 행복하게 살아야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전혀 오산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그러한 한이 맺히고 맺혀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여기까지 이렇게 살려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라는 것이다. 경북 봉화에 그런 남자가 실제로 있었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 사람이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믿어버리면, 자기에게 지금 그런 본처가 있다는 것만 해도 너무나 감지덕지한 일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 것은 보너스로 챙기면 되는데, 인간의 욕심이 어디 가겠느냐는 말이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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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상재회 ]
                                     최진희
그대는 오늘밤도 내게 올 순 없겠지
목메어 애타게 불러도 대답 없는 그대여
못다 한 이야기는 눈물이 되겠지요
나만을 사랑했다는 말 바람결에 남았어요
끊을 수 없는 그대와 나의 인연은 운명이라 생각했죠
가슴에 묻은 추억의 작은 조각들 되돌아 회상하면서
천상에서 다시 만나면
그대를 다시 만나면 세상에서 못다 했던 그 사랑을
영원히 함께 할래요
끊을 수 없는 그대와 나의 인연은 운명이라 생각했죠
가슴에 묻은 추억의 작은 조각들 되돌아 회상하면서
천상에서 다시 만나면 그대를 다시 만나면
세상에서 못다 했던 그 사랑을
영원히 함께 할래요
세상에서 못다 했던 그 사랑을
영원히 함께 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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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교재 140페이지를 살펴보자.

**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자기 식구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입성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새로운 세계 속으로 들어왔으나, 새로움이란 내부적으로 약속층의 실현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 새로움이 없는 새로운 세계 !!

아브라함은 분명히 새로운 세계 속으로 들어왔으나, 그런데 새로움이 없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약속의 땅에, 즉 새로운 세계에 왔는데, 그런데 그 땅이 텅텅 비어 있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가? 이미 주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미 주인들이 자기를 잡고 있으니 한 평의 땅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여기는 내 영토야" 라고 되어버리면, 결국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 동네를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텐트를 치고서 장막생활을 하는, 그런 나그네의 삶을 말이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이라고 하면, 그런데 생존층에서 보면 어떠한가? 살 만한 곳이 있을 때, 그것을 약속의 땅이라고 보았는데,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물론 나중에 그 생존층도 보장이 되었지만, 그것도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으로 말이다.

왜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자기 마누라를 누구로 속였는가? 누이동생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해서 겨우 재산을 얻어내었는데, 그렇게 해서 얻은 재산으로 약속의 땅에서 땅을 사서 형편이 피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참으로 재미있는데, 즉 거짓말해서 얻은 돈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종자돈으로 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거짓말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약속층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하나 부지하기 위해서, 즉 생존층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종의 미끼상품으로서 자기 아내를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애굽의 바로 왕이 자기 마누라와 동침하게 되는데, 사실 건드릴 뻔한 것이 아니라, 이미 건드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뒤에 바로 왕이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하는가? 자기가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혼이 났다고 하면서, 왜 자기에게 누이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했느냐고 하면서 얼른 아내를 데리고 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벌을 내리기는커녕 재산을 주어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 생존, 생존, 생존 → 약속, 약속, 약속 !!

그러니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무엇만 이야기하는가? 그야말로 생존, 생존, 생존인데,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이용해서 약속, 약속, 약속으로 전환을 시킨다는 것이다. 꼭 우리교회 교인들 같은데(?), 그냥 먹고사는 생존층만 생각하는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는 기회로 주께서 이끄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인데, 즉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이 생존층에서 환원을 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가운데 약속층의 내막이 새로움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새로움으로 말이다.

◈ 아브라함아, 이삭을 죽여라 !!

그 중에서 하나를 예로 들면, 우리 교재에는 나오지 않지만 말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소유했는데, 그 이삭이 아브라함의 축복을 이어줄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어떻게 하시는가? "이삭을 죽여라!" 라고 하는데, 즉 자기에게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다.

아마도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으면 그가 신이 났을지 모르지만, 왜냐하면 이스마엘은 자기의 과오, 즉 자기의 육적인 열매이기 때문에, 그것을 없애버리면 몽땅 자기 착함의 열매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죽이라고 했으면 주저 없이 죽였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무엇인고 하니,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죽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삭을 죽이게 되면, 아브라함도 이삭을 죽일 때 같이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죽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이삭을 죽이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 너 자신을 죽여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그런 이삭의 살아남은 곧 누구의 살아남인가? 곧 아브라함의 살아남이란 말이다. 바로 그것을 로마서 4장에서는 "아브라함이 그 사실을 믿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
(롬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 4: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롬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 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롬 4: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롬 4: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롬 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 범죄함으로 인해서 죽고, 또한 우리의 의를 위해서 다시 살아났을 때, 그러면 그것을 믿는 성도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자기가 주님이 죽을 때 같이 죽어야 하고, 주님이 살 때 같이 산 사람으로서, 바로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게 하셨는데, 그러니 자기는 죽어지내도 너무나 당연한 살아있는 사람이 됨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약속이고, 새로움이란 말이다.

◈ 날마다 살고 날마다 죽는 것이, 곧 성도에는 '새로움' !!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기존의 아브라함에게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그 중간에 죽음의 사건과 부활 사건을 집어넣어서 당겨버린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것이 한 번이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경우에는 매일같이, 즉 날마다 살고 날마다 죽는다는 말이다. 그런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조직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곧 '새로움' 이란 말이다.

예수님께서 내일 염려는 언제 하라고 했는가?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 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오늘까지만 살아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일 일을 염려한다는 것은, 그건 우리가 내일 살아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서 여길 때 염려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즉 '내일' 이란 것은 전혀 우리 소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 '칸막이'가 쳐져있는 인간 !!

창세기 1장에 보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라" 라고 하는데, 또한 둘째 날이고 말이다. 우리는 이런 날 속에 포함이 되는데, 즉 우리는 우리의 노동이 쉬고 생각이 쉴 때, 그렇게 잠잘 때, 즉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될 때는 이미 칸막이가 쳐져있다는 것이다. 칸막이가 말이다.

이런 것이 참 어려운데, 우리는 모든 것이 '지속(持續)' 이라고 해서, 이것이 곧 베르고송의 철학인데 말이다. 즉 우리는 모든 것이 이음쇠가 없이 매끈하게 흘러가고 흘러가는 강줄기처럼 되어있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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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1859,10,18~1941,01,04) - 프랑스 관념론 철학자로 생철학, 직관주의의 대표자. 그 기본적 입장은 모든 사물의 근원으로서 '순수지속'을 주장하여, 과학적 인식에 의한 물질·시간·운동은 이 지속의 안에 보여지는 여러 형태들이며 지속의 고정화라고 한다. 따라서 이 지속 그 자체는 신비적인 직관에 의해서만 파악되고, 여기에서는 아는 활동과 실재를 창조하는 활동이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관념론적 생물학의 입장에서 생기론(生氣論)을 도입하여 생명의 자유로운 '창조적 진화'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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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속[Duration, 持續] - 하나의 대상에 계속 변화가 나타나 다양성을 보일지라도 그 대상이 그대로 자기를 유지하고 있다면 대상은 지속되고 있다고 하듯이, 시간의 경과 속에서 변화가 계속 일어나는(=繼起) 것에 대하여, 그것들을 관통하여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상태, 또는 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시간상의 길이를 의미한다. 이 용어는 특히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주목된다. 그에 의하면 어떤 반성(反省)이 가해지지 않고 직접 의식에 나타나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며 서로 상호침투하면서 내적으로 연속하는 생성(生成)으로, 이 상태는 물리학적 시간, 즉 등질(等質)적인 요소로 이루어진 외면적인 연속과는 달리 전혀 반복이 없는 진전으로서의 지속, 즉 순수지속(duree pure)이며 그것이 참된 실재라고 말한다. 여기에 생명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여 생명의 약진(elan vital)을 말할 때, 이것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이 지속이며, 지속하며 자기를 유지시키는 것이 생명이다. - 네이버 용어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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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용한 양식, 일용할 양식, 일용할 양식 !!

아무튼 하나님은 이것을 최소의 의미자료로 탁탁 끊어버리는데, 즉 마치 강정을 만들 때, 칼을 가지고 가지고 그렇게 가로세로로 자르듯이, 그렇게 칸막이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정 각각이 낱개로 떨어져서 나온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모든 것이 이어지고 이어지면서 흘러가는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탁탁 끊어버리는데, 즉 일용한 양식, 일용할 양식, 일용할 양식, 그렇게 일용할 양식에 해당되는 쪽으로 끊어버린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번 주일오후에 설교할 예정인데, 즉 우리는 칸막이가 쳐져있는 인간인데, 각각의 낱개로서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안이숙 여사님이 말했듯이,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라고 말이다. 물론 그렇게 내일 일은 모른다고 하면서도, 내일 일을 생각하니까 그런 말이 나오겠지만 말이다(ㅋㅋ). 그렇지 않은가? 내일 일을 생각하니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주신 은혜만을, 즉 "내가 어떻게 존재하지?" 라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서 오늘 또 무슨 사건을 일으킬까?" 라고, 그렇게 사건화를 시키게 되면, 그야말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라고 된다는 것이다. 물론 안이숙 여사는 이런 사실을 잘 몰랐겠지만, 그 양반의 경우에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라고 하면, 그 다음에는 "모래 일도 난 몰라요"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ㅋㅋ).

아무튼 칸막이가 쳐져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약속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그냥 약속을 주는 게 아니라, 우리를 사건으로 만들어서, 즉 약속의 사건화가 되는 인물로 만들면서 사건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런 사건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우길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어긋맞은 사건화가 된 야곱의 인생 !!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어떻게 축복했는가? 두 팔을 그냥 바로 뻗어서 했는가? 어긋맞게 했는가? 어긋맞게 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런 이야기하는 내가 곧 사건화가 된 내 인생이다" 라는 의미인데, 즉 "이렇게 바로 (교만하게) 살았던 인간이 이렇게 어긋맞게 사는 인간으로 바뀌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자기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하나의 사건, 즉 하나님의 일개 막대기에 불과하고 화살촉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인데, 즉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엇인가? 이미 그 사람은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한 자기 모든 과거전체가 하나의 죄이었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즉 지금까지 이렇게 은혜로 이끌고 있다고 일괄적으로 고백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건이 오래가면 좋은데 길어봐야 3초라는 말이다(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던 그 안목으로 죄악 된 안목으로 파괴시켜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에게는 반드시 부셔져야 될 죄악 된 환경과 더불어 내부적으로 새로운 환경이 꿈틀거리면서 같이 조성된다. 이런 불변한 동거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계속된다.

◈ 죄악 된 환경과 육신과의 불변한 동거 !!

여기에 보면 "성도에게는 반드시 부셔져야 될 죄악 된 환경"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환경 자체가 우리를 부셔지게 만드는데, 그런데 우리는 이 악한 환경에서 무엇으로 남으려고 하는고 하니, 하나의 사건이 되지 않으려고 하고, 존재로 버틴다는 것이다. 그러니 육신과의 불편한 동거가 계속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육신 자체가 사건을 위한 육신인데, 우리는 존재를 위한 육신인 줄 알고, 육신을 가지고 계속해서 버틴다는 말이다. 그것도 울고불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운다고 하나님이 도와주시는가? 성경에 그런 내용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신명기에 보면 가나안 정탐군들이 돌아와서 울었는데, 그래서 백성들도 모두 따라 울고 말이다. 그때 울지 않은 자가 단 두 명이었는데, 누구인가? 갈렙과 여호수아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백성들을 보고 물었는데, 즉 "야들이 미쳤지, 너희들이 왜 우는데?" 라고 말이다. 도대체 그들이 왜 울었는가? 

* 여호수아와 갈렙 : 너희들, 왜 우는데?
* 이스라엘 백성들 : 우리가 공동묘지가 없어서 여기서 죽는가?
* 여호수아와 갈렙 : 뭐라고?
* 이스라엘 백성들 : 우리는 이제 오도가도 못한다.
* 여호수아와 갈렙 : 아니야. 우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어있어.
* 이스라엘 백성들 : 노우! 그들은 너무 힘이 세서 안 돼.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런 말을 하는가? 가나안 족속들을 보고 힘이 세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그만 하나님의 사건을 잊어버리고 존재와 존재를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기가 팍 죽고 만다는 것이다. 사건이 아닌, 존재와 존재를 비교하니 말이다.

◈ 하나의 사건이기에 !!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왜소한 소년 다윗의 존재와 자이언트 골리앗의 존재로 여겼는데, 하지만 다윗은 무엇으로 보았는가? 할례를 받지 않은 민족을 처벌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서는 하나의 사건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윗의 돌맹이를 하나의 사건화가 된 돌맹이였고, 그 돌맹이 맞아 죽는 것도 하나의 사건으로 맞아 죽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그것은 모르고, "뭐라고?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라고 하는데, 그래서 자기 존재가 다윗보다 우월함을 보이기 위해서 다윗을 잡아죽이려고 하면서 그렇게 닥달을 낸다는 것이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8:7)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마치 당회장이 부교역자를 잡아먹지를 못해서 안달을 내듯이 말이다. 부교역자가 이러한 대목을 설교하면 항상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편한 동거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몸이 있는 이상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베드로가 심히 운 적이 있었다. 닭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다.

(마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닭 울음소리도 일종의 사건 !!

베드로가 왜 울었는가? 닭 울음소리를 들었기 때문인데, 즉 닭 울음소리는 일종의 사건이란 말이다. 닭이 울면서 언제 존재를 생각했는가? 즉 닭이 생각하기를 "주여, 지금쯤 울까요?" 라고 하면서 자기 존재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닭은 그냥 울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닭은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사건인데, 그런데 바로 그 사건이 무슨 사건과 연결이 되어있는가?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라고 하는, 그 말씀사건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닭 울움 소리를 닭에게 예속된 사건이 아니라 누구에게 예속된 사건인가? 말씀과 관련이 되니 말씀사건인데, 즉 말씀사건 안에는 닭 울음소리도 있고, 또한 베드로가 우는 것도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예수님은 어디에 통합을 시켰는가? 자신의 예언 속에 다 집어넣어 버렸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는 자신의 세계와 예수님의 세계가 같은 질의 세계인 것을 알았다. 자신의 세계에서 자기 의지대로 수행하면 예수님의 세계로 진입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인간들이 현재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존재의 질을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식으로 주께서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즉 베드로와는 같은 사고방식으로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냐는 말이다.

이제 교재 141페이지를 보자.

** 예수님은 미물인 닭을 움직이시는 것과 같이 그동안 베드로를 다루어왔던 것이다. 즉 베드로에게 어떤 주도권도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관찰자의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그리고 나가버렸다.

** 그는 도리어 말씀에 의해서 '관찰을 당하는 자리' 안에 있었던 것이다. 주시는 사람을 받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면서 통곡한다. 예수님께서 기도해주시기 않으면 베드로는 얼마든지 악마의 포로가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 관찰자의 자리, 관찰을 당하는 자리 !!

베드로가 관찰자의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고 하는데, 관찰자란 무엇인가? 즉 베드로는 하나의 대상을 바라보듯이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처럼 육이란 인간 중신으로 세상을 보는 체제라면, 영이란 예수님 중심으로 갖추어진 체제이다. 세상은 영적 질서가 주도한다.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인간이란 이름의 고만고만한 육들이 운영해나가는 것이 아니다.

이제 사건이 나오는데, 계속해서 살펴보자.

** 사울은 예수님의 빛에 의해서 실명했다.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예수님의 빛 앞에서 더 이상 사울은 없었다.

(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 9: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행 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행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행 9: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 사도바울에게 더 이상 경쟁은 없어 !!

예수님 앞에서 사울은 더 이상 없는데, 그러면 사울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새로운 사건이 주어졌는데, 그 사건을 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울이 사건을 품고 다니면, 사울은 자기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찾아온 사건을 증거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세상을 살기가 참으로 쉽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자신을 증거하려고 하니 타인과 경쟁을 해야하는데, 하지만 사도바울에게는 더 이상 경쟁이 있을 수가 없는데, 사도바울은 서을대학을 가지 못해서 환장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자기가 건강하고 장수하지 못해서 인생을 실패했다고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사도바울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도가 다 그러한데, 사도는 일종의 목격자인데, 즉 사건을 목격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증인' 이라고 하는데, 요한복음(?) 마지막에 보면 그런 용어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 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 성도는, '증인'이고 '목격자'이기에 !!

그렇게 증인이고 목격자이기 때문에, 성도에게 다가온 사건은 자기를 죄인이라고 지적해주는 의로운 주님의 사건이란 말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도 남에게 결코 밑지지 않는데, 그렇게 밑지지 않는 자기를 두고 "너는 처음부터 죄인이었어" 라고 지적하면서, "너는 오직 내 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 거야" 라고, 그런 소식을 알려주는 그 사건, 그것이 바로 사도나 모든 성도의 공통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것을 깨닫게 해주는 십자가의 피는 성령을 받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건은 계속해서 사건으로 남아있어야만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두께와 면적을 가지게 되면, 소위 '목회성공' 이라는 이름으로 빠지게 되는데, 자기 명예와 이름과 재산을 불리고 하는, 그런 인생성공으로 말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육적인 몸이 있는 이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데, 하지만 성령께서 그것을 어떻게 교정해나가시고 제거해나가시는가? 그것은 바로 사도바울의 권면이나 명령을 통해서, 우리는 일종의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지적하는 가운데, 즉 말씀 앞에서는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교재를 보자.

** 그에게는 오로지 메시야가 떴다는 사실만 있을 뿐이다. 그분 앞에서 사울은 더 이상 없는 존재요, 죽은 존재이다. 즉 사울은 영적계시를 알고부터 전신의 모든 힘이 다 빠져버렸다. 맥이 풀린 것이다. 마치 혼절하여 수일을 앓았던 다니엘 같다. 사울은 바울이 되고, 복음의 광채에 사로잡혀 버렸다.

(단 8:27)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이상을 인하여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

◈ 이미 주님이 지적해놓은 '자리'가 있기에 !!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또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주께서, 이렇게 사울을 그만 없는 존재로, 즉 죽은 존재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울은 바울이 되었는데, 즉 이름이 그만 바뀌었다는 말이다. 이름은 그 사람의 운명을 말하는데, 그러면 이 운명은 자기가 만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지적한 것인가? 예수님께서 지적한 자리인데, 바로 여기서 '자리' 문제가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의 자리는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지적해놓은 자리, 즉 성도의 자리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복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 자리를 고수하게 되면 주님과 그만 다투는 사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울은 바울이 되고, 복음의 광채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나 누구에게도 한 점 부끄럽지 않은 것은, 빛의 광채에서 나오는 사랑에 넋이 나가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랑으로 미쳐버린 것이다. 복음의 광채로 인해서 이 세상이라는 모든 껍질이 뜯겨나가는 그 광경을 사도바울은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고후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성도는 왜 부끄럽지 않은가?

사도바울은 왜 부끄럽지 않은 것인가? 그것은 바로 수치를 벗겨버리는 것 때문인데, 즉 이제는 주님 앞에서 자기의 부끄러운 모든 것을 다 드러내었기 때문에, 이 세상의 그 누구 앞에서도, 그 어느 자리에서도 부끄러울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 성도는 따가운 타인의 시선을 전혀 의식할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주님 앞에는 모든 죄가 다 드러난 죄인이기 때문에 말이다. 이런 수치가 없는 인생이, 바로 그러한 넉넉한 인생이 성도 앞에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인생이란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저희들 각자의 존재만 생각하면서 남과의 경쟁에서 뒤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런데 그런 것이 다 약속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훼방하는 마귀의 짓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면서, 주님 앞에서 날마다 그 어떤 죄들이 용서되었는지를 더욱 더 알아 가는 즐거움이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03,10 오후 11시에 마침.

                                           그대, '싸인'을 보았는가? '인간의 자리'도 대단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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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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