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38강 안개와 같은 존재와 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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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01227피p132안개와같은존재와언약

피38강 안개와 같은 존재와 언약
 
[10 대구강의 20] - [피 38] - 안개와 같은 존재와 언약
                                                                                
                                                   10,12,2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인간이 '내일'을 기다린다는 것은?

오늘은 교재 132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곧 도덕적인 갈등으로 인해서 자꾸만 내일의 더 나아짐을 기약하는 것으로서, 자아의 정체성을 미래의 책임으로 지연시켜 나가는 그런 미완료적 자아가 아니라, 예수님의 완성에서 제공되는 안도감 속에서의 자아이다.

사람이 '내일'을 기다린다는 것은 단순히 내일이란 날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즉 지금보다 어떤 식으로든지 더 나아지기를 원하는 것인데 말이다. 이것을 보다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지금보다 내일이 더 나아지기를 원하는 것을 '소망'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때 무슨 말을 하면서 누군가가 들어옴) 커피고 뭐고 간에 지금 기다리다가 10분이나 늦게 시작했는데(ㅋㅋ), 아무튼 사람이 지금 이 시점이 있는데, 오늘이 12월 27일인데 말이다. 그러면 내일은 당연히 12월 28일이 되는데, 모래는 12월 29일이 되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27일과 28일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단순하게 24시간을 더 보태는 것이 아니라, 즉 사람은 그렇게 날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28일이 되면 그냥 비어있는 28일이 아니라, '나'를 상정하는 28일, 즉 '나'와 관련되어 있는 28일이란 말이다. 29일도 역시 '나'와 관련이 되어있는 29일이란 말이다. 사람은 항상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으니, "1월 7일은 그냥 오겠지" 라고 하는데, 그러나 1월 7일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1월 7일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지?" 라는 것과 결합해서 1월 7일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

이것을 두고 칸트는 '인식의 틀' 이라고 했는데, 즉 인간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먼저 하나는 시간 속인데, 즉 28일과 29일은 시간이란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공간 속에 있는데, 즉 기후나 날씨, 풍토, 문화와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그쪽 지방에 갔을 때 그들이 어떻게 받아주겠는가?" 라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적 인식은 창세기 4장에 보면 나오는데, 즉 가인이 자기 동생을 죽여서 하나님에게 벌을 받을 때 어떤 벌을 받았는가? 자기가 살던 동네에서 쫓겨나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벌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남의 동네에 가서 어떤 벌을 받을지, 거기에 대해서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는 생각하기를 "아니, 남의 동네에 가서 그냥 살면 되지, 그것이 무슨 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 가인은 그것을 두고서 '저에게는 그건 너무나 심한 벌입니다' 라고 오바할 필요까지 있을까? 사형을 시키는 것보다 그렇게 퇴출을 시키는 것이 훨씬 더 가벼운 벌이 아닌가?"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 4: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창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그런데 인간이 어떤 공간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우리 인간은 그냥 "나는 산다" 라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누구로부터 산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즉 "무엇이 있음으로서, 그래서 산다" 라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 대구에서 살다가 진주로 이사를 간다고 하면, 그러면 당장에 "그러면 니가 거기서 무엇을 하면서 먹고살래?"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니 진주지방의 특산물이 무엇이며, 거기에서 장사할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만약에 진주에서 옷가게를 한다고 하면 대구에서 하면 되는데 굳이 진주까지 왜 가는지, 그런 의문점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은, 자기 한 몸이 그냥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 한 몸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기를 규정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나는 언제까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면서 산다" 라고 말이다.

◈ 그것이 곧, 악한 생각 !!

그것이 야고보서 4장에 나오는데, 즉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라고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그것이 교재에도 나오는데,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서 칭찬을 하시는가? "니가 앞으로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겠다" 라고 것이 바로 '악한 생각' 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왜 그것이 악한 생각인고 하니,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기겠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유이지만, 하지만 근본적으로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까, '나' 라는 것이 안개라는 사실을 그만 놓치게 된다는 말이다.

(약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 4: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약 4: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약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 유아러 '안개' !!

그렇다면 안개는 무엇인가? 성경에서 안개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안개는 알다시피 수증기 뭉치인데, 그래서 안개의 특징은 "아, 이것이다" 라고 해서 막상 만지게 되면, 만져지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즉 속에 담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푹신푹신하면서도 마치 유령과 같은데, 그래서 아침에는 끼어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만 한 시간 정도 지나게 되면, "한 시간 전에 여기에 뭐가 있었어?"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안개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곧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우리 인간을 이런 안개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안개 속에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포함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고 하니, "어느 도시에 가서 이익을 보려고 하지 말고, 주께서 살려주시면 사는 것이고, 주께서 죽여주시면 죽는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 이유는, 우리는 근본적으로 안개이기 때문이란 말이다.

◈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

이렇게 안개라고 하면 선입관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안개라고 하면 무슨 수로 사는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4장 15절에서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자꾸만 빼버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를 보고 안개라고 하면 엄청나게 기분 나빠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안개가 아닐 경우에만 "며칠 뒤에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한다" 라는 것이 서로 하나의 세트가 되어서 맞아떨어지는데, 그런데 12월 27일에 안개가 된다고 하면, 그러면 12월 28일에는 무엇이 되는가? 역시 안개인데, 그러면 12월 29일에는? 역시 안개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목표를 세우고 소망과 비전을 갖는다고 하는 것이, 이미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는 입장에서 나온 허망하고도 악한 생각이란 말이다.

◈ 안개는, 발전이나 성장이 허용되지 않아 !!

그래서 12월 31일에 송구영신예배를 드린다고 하면, 그 예배의 기본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고 하니까, 우리는 안개라고 하는 것을, 즉 우리는 어떤 계획과 어떤 소망을 가질 권리가 없음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 집안의 건강과 사업을 위해서, 그런 복을 받기 위해서 모인다고 하면, 그것은 동해의 간절곶과 같은 곳에 가서 떠오르는 해와 달을 보고 비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데, 그러니 그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생각이란 말이다. 

그러니 이 안개에는 발전이란 것이 허용되지 않는데, 물론 지금보다 더 성장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고 말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명령이나 지시와 같은 것들이 나올 때, 그러한 것을 어떻게 여겨야 하겠느냐는 것이다. 특히 사도바울의 서신서의 경우에 말이다.

◈ 사도바울의 명령의 경우에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자면, 여기에 이렇게 인간이 있으면, 사도바울이 참으로 명령을 많이 하는데, 에베소서나 갈라디아서 등의 경우에 말이다.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간에 복음을 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서로 사랑하라. 어둠의 자녀들을 본받지 말고,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명령들이 많다는 것이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
(엡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엡 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엡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러한 명령들이 주어질 때, 이것들은 구약의 율법에 있는 육적인 이스라엘에게 주는 명령과 동일한 명령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명령들은 여기에 있는 인간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 인간'을 향해서 주신 명령이라는 것이다.

◈ '영적 인간'이기에 !!

그렇다면 이런 영적 인간은 무엇을 품고 있는고 하니까, 제가 조금 전에 이야기한 "인간은 안개이다" 라고 하는 것을, 그러한 자기 실존에 대해서, 즉 자기 힘으로는 자기의 계획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안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되고 싶은 대로 하나님께서는 결코 들어주시기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영적 인간이란 것은, 뭔가 모호하고 신비롭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주변에서 누가 자기를 장악하고 있는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꽉 잡고 있는 그런 관계를 두고서 영적 인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쉽게 이야기한 것이고, 조금 더 어렵게 말해보면, 육적인 인간은 그 주변에 예수 그리스도의 장악이 없는 것이고, 즉 예수 안에 있지 않은 것을 두고 육적 인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서, 영적 인간이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 아래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도구로 여겨서 사용하시는 관계 속에 있을 때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렵게 말하면, 여기에 이렇게 우리 몸이 있는데, 60조의 세포로 구성되어있는 말이다. 이렇게 머리도 있고 만져지는 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적 인간은 이렇게 자기 몸으로 하는 것, 그것을 '행함' 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기 몸으로 행하는 것이 아닌, 자기 안에 집어넣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행한 것에 의해서 자기의 몸은 움직이게 되어있다고,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영적 인간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교재 133페이지를 살펴보자.

** 따라서 신약성경에 와서 성령의 바람에 의한 되모음은 자아를 다시 독립시키기 위한 되모음이 아니라, 개인적인 존재 의미를 해체시켜서 주의 몸의 기능에다가 재편성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거룩한 왕 같은 제사장이요, 선지자가 된다(벧전 2:9). 이들이 기대할 상속분은 하나님 그 자체이다.

(민 18: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 주의 몸의 기능 !!

여기에 보면 "개인적인 존재 의미를 해체시켜서 주의 몸의 기능에다 재편성하기 위함이다" 라고 하는데, 여기서 '주의 기능' 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그러면 상당히 모호하고 흐릿해지는데, 그러니 '주의 몸의 기능' 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주의 몸의 기능' 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몸과 동일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즉 육신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장로님도 몸이 있고 이근호도 몸이 있는데, 그런데 제가 그만 제 몸이 안개인 줄 모르고, "나는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익을 보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로님의 몸이 이렇게 저의 몸에 압박을 가하면서 붙어서 "이제 니 몸은 니 소망을 위해서, 니 욕망을 위해서 쓰여지는 몸이 아니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누구 몸입니까?" 라고 하니까, 장로님이 "내 몸을 위해서 니 몸은 쓰여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제가 이것을 강조하는 취지를 여러분이 아셔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몸이 있는데, 이 몸에서 행함이 나오니까 말이다. 즉 머리에서 팔 다리에 명령을 내리고 해서 행함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편하게 생각하기를, 우리 몸을 가지고 "주를 위해서 산다"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주를 위해서 산다" 라고 하면 안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 '주'가 또 하나의 하나님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표현이 참 모호한데, 그래서 주가 아닌 "주의 몸을 위해서 산다"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를 위해서 사는 것과 주의 몸을 위해서 사는 것이 어떤 차이점이 있는고 하니까, '주' 라고 하면 하늘의 붙박이 별처럼 그냥 쳐보기만 하면 되지만, 주의 몸이라고 하면, 그 몸은 어디에서 활동하는 몸인가? 실제로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장로님의 몸과 저의 몸이 있다고 하면, 장로님이 "이제부터 너의 몸을 챙기는 것 말고 내 몸을 챙겨라"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주의 몸을 위해서 우리의 몸이 사용되어지는 것을 두고 '영적 인간'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예수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면 무엇인고 하니까,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그 어디에서나 "주님 같으면 어떻게 했겠는가?"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과거에 그러한 책도 있었는데 말이다. 즉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집사님이 학원을 하시는데, 그러면 "예수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여기면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만약에 가정주부라고 하면 역시 "예수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여기면 된다는 것이다. 자녀교육은 어떻게 했고, 신랑에게는 어떻게 했는지 말이다. 바로 그러한 점을 묻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목사님, 그것을 묻지 않으면 안 됩니까?" 라고 한다면, 묻지 않으면 영적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데, 즉 영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주님의 몸을 위해서 산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알아서 잘해서 그 다음 절차로서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 그렇게 하면 주가 되는 줄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항상 주님께서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자기가 할 때는 독자적으로 해서 "이 정도만 하면 괜찮겠지" 라고 해서, 자기가 한 업적을 들고 와서 "주님, 이 만큼 해내었습니다" 라고 해서, 그렇게 바치면 주님께서 흐뭇해하는 줄로 오해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영적 인간이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육적 인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인간인데, 즉 자기의 행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면 복을 받을 줄로 아는 말이다.

◈ 영적 관계 !!

반면에 영적 인간은 어떤 관계에 있는고 하니, "함께 있다" 라고 하는 '영적 관계' 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영적 관계 속에 사도바울의 명령들이 주어지게 되면, 그것은 자기의 발전이 아니라 주께 해야될 숙제를 주신 것이라는 말이다. 자기 발전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명령에 오게 되면, "아하, 내가 스스로 성화가 되고 발전이 되어서, 그 발전된 모습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흐뭇해하시겠지. 그리고 사람들은 '아이쿠, 예수님을 그렇게 열심히 믿더니만 사람이 다 되었네' 라고 칭찬을 해주겠지" 라고, 그렇게 여긴다는 것이다.

◈ 주님은, 자기 숙제를 자기가 직접 하심 !!

하지만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은 그것이 아니고, 그러한 명령들은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과제이고 숙제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숙제를 누가 하겠는가? 주님께서 자기 숙제를 자기가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맡기시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어떤 원수를 한 놈 만났는데, 물론 과거 같으면 죽이고 싶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어떤 마음이 드는고 하니, 그 원수가 불쌍히 여겨져서 자기 집에 온 그 원수를 잘 대접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야, 예수님을 믿더니만 성화가 되어서, 드디어 성령의 열매를 맺네요. 온유하고 화평하고 원수도 사랑하고, 이제는 참 예수님을 잘 믿네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뭐라고 상대방에게 이야기해야 하겠는가? "예, 그렇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되고, "주께서 자기 명령을 자기가 이루었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주님 자신의 명령을 말이다.

그러면 상대방이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은 어디에 갔습니까?" 라고 한다면, "나의 정과 욕심은 주께서 일을 하시면서 늘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라고, 그렇게 자기의 정과 욕심은 십자가에 못을 박음으로서, 자기가 행한 것이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차단시키는 체계 안에서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라는 말이다.

◈ 성령의 열매는, 그 주체가?

여기에서 성령의 열매를 다시 한번 설명하면, 이것은 참 중요한데 말이다. 성령의 열매는 그 열매의 주체가 누구인가? 성령인데, 그러면 누구는 아니란 말인가? '나'의 열매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왜 빠져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죄인이기 때문에, 즉 무엇이든지 행해놓고는 그것이 자기의 과시와 자기 주특기로 항상 상정하는 버릇, 그런 육적인 버릇이 있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는 그런 성령의 열매를 훼방한 죄인으로서 곁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죄인이었지만, 주께서 나를 통해서 자기의 하실 일을 주의 뜻대로 이루셨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 도덕적인 발전은, 안개에게 의미가 없어 !!

제가 지금까지 강의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도덕적인 발전은 안개에게 의미가 없다는 것인데, 그런 일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영적이 아닌 독자적인 육이라고 하면 성립이 되는데, 즉 빤질빤질한 육, 아주 참한 육, 건전한 육, 남에게 감동을 주는 육,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리 건전하고 남에게 감동을 준다고 해도, 그것은 육일뿐이지, 그것이 영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영적 관계' 라는 것은, 주의 몸의 기능을 위해서 자기 몸이 사용되어지는 관계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 일을 누가 하시는가? 물론 우리가 알다시피 성령께서 하시는데, 그것을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신'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재 132페이지에도 보면 나오는데, 한번 살펴보자.

**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신'의 활동이 하나님의 전체 백성들을 하나로 묶는 일을 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이 벌리시는 언약적 작업에 집단화시켜서 동원이 되었다.

◈ '여호와의 신'과 '성령' !!

구약에서는 이렇게 '여호와의 신'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여기서 성령과 여호와의 신이 어떻게 다른지, 그것을 살펴보고자 하는데, 물론 같은 분이 아니냐고 하면, 같은 분이 맡기는 맡는데, 하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이 다르다는 말이다.

여호와의 신은 구약의 모세율법대로 행하시는 신인데, 이 모세율법을 다른 말로 하면 '모세언약' 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모세율법대로 행하시는 신이 여호와의 신이라고 하면, 거기에 비해서 성령께서는 새언약을 적용시키는 신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새언약을 적용시키면 이 새언약 안에는 주인공이 있는데, 그 새언약을 이루신 주인공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인데,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살과 피로 다 이루셨는데, 그런 예수님의 살과 피로 세운 새언약을 증거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신은 여호와께서 주신 율법을 증거하지만, 반면에 성령은 누구를 증거하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모두 이루셨다는 것을 증거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가 뭔가 잘못을 해서 자기 스스로 "이것은 죄야" 라고 자책하고 낙담할 때, 그때 성령이 오게 되면 무슨 소리를 하시겠는가?

성령께서 오셔서 "지금 너 왜 그러고 있지?" 라고 하면, 그 사람은 "예, 제가 지금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아무래도 지옥에 갈 것만 같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성령께서는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여겨야 하는가? 그것은 성령께서 다 이루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그렇게 성령께서 이야기하신다는 것을, 즉 성령께서는, "성령인 내가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우리는 주의 몸을 위한 기능이지, 성령을 위한 기능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소개하는 것이 곧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란 말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나오는데, 즉 "내 뒤에 보혜사가 오게 되면, 그 보혜사가 내게 대해서만 증거하는데, 그가 진리 가운데로, 내게로 이끈다" 라는 것이다.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요 16: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요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 성령은, 예수님께로 이끄시고 !!

그렇게 예수님께로 이끄는 것에 대해서 교재 132페이지에 계속해서 나오는데,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림으로 설명하겠는데 말이다. 우선 성령부터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일반 죄인들을 이끄신다는 것이다. 예수님 쪽으로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의 몸의 기능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은 자기 몸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성령께서는 자기 몸을 그리스도의 몸이 행하신 것을 증거하는 도구로서 사용하도록, 그렇게 이끄신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란 말이다.

◈ 여호와의 신은, 모세율법으로 이끄시고 !!

여기 비해서 여호와의 신은 무엇인고 하니, 제가 방금 구약에서 모세율법대로 움직이라는 신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구약의 여호와의 신은 이스라엘을 상대로 해서 이스라엘을 어디로 이끌겠는가? 이스라엘을 모세율법으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끌게 되면 이스라엘은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자기들 이스라엘 국가가 지금 진행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즉 모세언약대로, 모세율법대로 진행이 되고 있다는 것을 여호와의 신이 중매를, 즉 매개체가 될 때 비로소 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세율법대로 된다고 하면, 그러면 그 다음에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모세율법대로 된다" 라고 하는 것은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것과 동일한 것인데, 다른 말로 하면, "믿어라, 순종하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너희는 그것을 믿고 순종하면 된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백성들이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비록 모세율법은 없지만, 인간적인 의미에서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는 자들을 그 주변에 포진을 시켜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이 바로 그 방법이란 말이다.

◈ 왜 약속의 땅에 아낙자손들이?

그게 신명기 1장에 보면 나오는데, 즉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약속의 땅에 정탐꾼들을 보내는데, 만약에 우리 같으면, 그들이 이미 사전에 이스라엘에게 겁을 먹고 했으니, 그곳이 텅텅 비어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냥 폼만 잡고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꽉 차있다고 해도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고 하니, 인간대 인간으로 붙어서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그 땅은 반드시 누구의 땅인고 하니, 이스라엘의 땅도 아니고 여호와의 땅이란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자기 땅을 찾아가시는데, 그 뒤에 똘마니로 따라가는 것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끄시니 말이다.

(신 1:24) 그들이 앞으로 가서 산지에 올라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그곳을 정탐하고
(신 1:25) 그 땅의 과실을 손에 가지고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우리에게 회보하여 이르되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더라 하였느니라
(신 1:26)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즐겨 아니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여
(신 1:27)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고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붙여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신 1:28) 우리가 어디로 갈꼬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로 낙심케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 하나님, 믿습니다 ??

그래서 그들은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큰 소리를 치면서 장담을 했는데, 그런데 막상 눈에 띠는 것은 가나안 사람들의 강력한 군사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맞닿게 되니,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만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우리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자기들 딴에는 "믿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하지만, 그런 믿음과 순종은 자기들끼리는 잘 통할지 몰라도,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순종은 육적인 것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는 보여주기 위해서, 육적으로 너무나 강력한 군대를, 그래서 그들이 완전히 기가 죽을 만한 군대를 그들 주위에 배치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성도를 다룰 때도 역시나 동일한데, 즉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믿습니다. 찬양합니다. 홀로 영광을 받으소서" 라고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결코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인간적으로 좌절할 수밖에 없고, 기가 죽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도 헛방이구나. 내가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네. 나는 이제 그만 믿을래" 라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으로 우리 사람 속에 있는 육적인 것을 들추어내신다는 말이다.

◈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그래서 로마서 3장에 보면, 모세율법이 주어진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들추어내어서 입을 막고 저주 아래에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니 까짓 것이 주님을 사랑하고 무엇을 믿고 순종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니가 가지고 있는 죄의 발현에 불과하다" 라고, 그렇게 지적을 하신다는 것이다.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죄의 가장 깊숙한 부분은, '나의 이름' !!

그런 우리 인간의 죄 가운데 가장 깊숙이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위한 것인데, 그 자기 이름을 한 글자로 '나'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결국 "나를 위한 나" 라는 말이다. 그 중간에 예수님이든 하나님이든, 그 누구를 집어넣든지 간에 "나를 위한 나" 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담으로부터 선사를 받은(?) 육의 본질인데, 그러니 '우리' 라는 것은 사실상 성립이 되지 않고, '나' 라는 것만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수' 라는 집단을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에게 복속하도록, 그렇게 여호와의 신께서 몰고 가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몰고 가면서 떨어질 사람은 떨어지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전도라는 게 가장 잘 되었을 때가 언제인고 하니, 결국 천국에 가지도 못할 인간을 떨쳐낼 때, 그때가 가장 잘 되었다는 말이다. 그때가 가장 작품이 잘 나왔을 때인데, 어중이떠중이를 다 데리고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노아방주의 경우에, 방주가 아주 크고 하니 적어도 3,000명 정도는 들어갈 줄 알았는데, 물론 노아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방주를 개업하고 손님을 초대했는데, 막상 몇 명이나 왔는가?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자기 식구만 탔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방주의 문을 닫는 것을 연기했는가? 손님을 많이 태워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때가 되니까 8명의 노아식구만 있더라도 문이 닫혔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인데,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을 보여주는데 있어서 말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장 극명하게 제대로 잘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최고의 전도가 된다는 것이다. 자기 식구만 구원을 받는 것이 말이다.

성경에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런데 주위 교회에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고 한다면, 그러면 조금 전에처럼 기가 죽고 만다는 것이다. 아무리 순종이고 믿음이라고 해도 다 헛방이고, 결국은 우리 속의 무엇인고 하니, 자기 이름, 즉 자기 이름을 건 자존심의 싸움, 승부 걸기와 같은 것들이 어느 새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발각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 '씨 뿌리는 비유'에 있어서 !!

어제 설교를 하고 나서 제 아내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제 아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씨 뿌리는 비유'에 있어서 씨가 가지고 있는 생명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제가 이야기를 했는데,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제 아내가 하는 말이, 씨만 그런 것이 아니라 씨와 밭의 상호간의 협조가 있어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미리 설교시간에 의도적으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밭은 거기 생명에 대해서, 즉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데 있어서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래서 제가 그 부분에 대해서 보충설명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씨 뿌리는 비유'에 있어서 그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이 듣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겠다. 그리고 제자인 너희들조차도 하나님께서 알게 하지 않으면 내가 하는 말의 취지를 모르는데, 그런데도 너희들이 안다고 하면, 그것은 복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하시면서 시작한 말씀이, 바로 이 '씨 뿌리는 비유' 라는 것이다.

(마 13: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마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 13: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 결코 밭의 보탬은 없어 !!

그러니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밭의 속성은, 절대로 밭의 보탬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밭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밭의 특징인데, 이 열매맺는 밭은 내부적으로 아무런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냥 씨앗이 자기 생산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마치 씨앗이 운동장 같은데(?), 그렇게 뿌린 대로 열매를 다 맺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앞에 먼저 이야기한 밭들은 저항력이 있는데, 즉 뭔가 고요한 자기만의 것이 있어서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돌이 있다든지, 또 가시떨기가 있다든지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씨 뿌리는 비유를 왜 말씀하셨느냐는 것이다. 

◈ 나는 내 것이 있다 ??

사실은 제가 어제 설교를 할 때 새로 오신 분이 있어서 설교를 과격하고 심하게 하지 못하고, 굉장히 완화시켜서 부드럽게 했다는 것이다(ㅋㅋ). 그게 무엇인고 하니, 여우도 굴이 있고, 참새도 자기 집이 있지만, 그런데 인자는 머리를 둘 곳도 없다고 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여우도 굴이 있고, 참새도 자기 집이 있다는 것을 한 마디로 줄여보면, "나는 내 것이 있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런 사람은 하늘나라에 합당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예수님의 뜻인데, 왜냐하면 자기 것이 있다고 하니 말이다.

◈ 목사는 자기 교회가 있기에 !!

그래서 목사에게 있어서 제일 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교회가 있다는 것인데, 즉 자기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우도 굴이 있고, 참새도 자기 집이 있지만, 인자이신 예수님은 머리도 둘 곳이 없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자기 것이라고는 일체 없는데, 그러면 누구만 있는가? 오직 예수님만 계신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예수님도 자기의 예수님이 되면 안 되는데, 즉 예수님조차도 자기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전혀 자기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뒤에 보면, 다른 사람이 의미를 또 몰라서 묻는데, 즉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고 오겠습니다" 라고 하니,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겠는데, 가족에게 작별인사는 하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게 인간의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냐는 것인데, 무슨 짐승도 아니고 말이다. 그 정도는 용납해줄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눅 9:57)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눅 9: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눅 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눅 9: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눅 9: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 하늘나라에 합당한 인간은 없어 !!

그러니 결국 무엇인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말이다. 그것은 어떻게 왜곡할 수 없는, 그 어떤 트릭도 쓸 수 없는 그대로의 모습이 무엇인고 하니, 그 어느 누구라도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인데, 그렇게 합당치 않으면 않을 줄 알면 되는데, 물론 그럴 인간은 없지만 말이다.

그러면 결국 이 '밭' 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즉 씨앗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밭이라는 것이다. 밭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씨앗에 합당한 밭은 이런 밭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 인간은, 하나의 뽀드락지이고, 묵은지 !!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자기가 알아서 그냥 자란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기가 속해 있는 어두운 세상의 작품이다" 라는 것이다. 즉 일종의 '뽀드락지' 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피부에 돋아나는 말이다.

그렇게 세상이 만든 작품이기에, 제가 설교하면서 세상에 젖었다고 해서 그것을 '묵은지' 라고 표현을 했는데, 그야말로 이 세상에 푹 젖어서 세상맛이 들대로 왕창 다 들었다는 것이다. 이 세상과 너무나 똑같은 말이다. 묵은지, 참 괜찮은 표현인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교회에 나오면서 누구의 것을 챙기는가? "주여,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러니 제 것을 챙기겠습니다. 복을 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자식, 자기 남편, 자기 교회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의 교회가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물론 자기 교회는 부흥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은 자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제 아내가 다 듣고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 취지는 알겠는데 논리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그 취지는 알겠는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비교하기 위해서, 즉 열매를 맺지 못하는 책임은 밭에 있는 것이지, 예수님인 씨앗의 책임은 아니라는 말이다.

◈ 성도는, 예수님이 얼마나 귀한 보물인지를 !!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개나 돼지에게 귀한 진주나 보물을 던지지 말라" 라는 것인데, 즉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자들에게 주지 말라고 하는 것은, 진주가 진주답게, 또한 보물이 보물다운 것을 보여주기 위한 밭은, 그러한 대상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구원을 받은 것은, 구원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성도에게 찾아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얼마나 귀하고 대단한 것인가를, 즉 예수님의 소중함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껍데기, 혹은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말씀대로 하면 그릇인데, 즉 도구로, 그런 용도로 쓰여지기 위해서 성도가 있다는 말이다.

◈ 믿음은, 소유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당했음을 !!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구원을 받는 법은 없는데, 흔히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두고 믿음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믿음은 그런 소유가 아니라 반대인데, 즉 있는 것도 강탈당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믿음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유를 당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집에 주인이 있는데, 그 주인이 얼마나 힘이 센지 그 집에 있는 집기나 가구나 그 주인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런데 어느 날 밤에 강도가 와서 주인을 그만 꽁꽁 묶어놓고는, 그 동안 주인에게 묶여있는 가재도구를 들고 나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태복음 12장 29절에 나오는데, 이것을 두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다" 라고 하셨는데, 즉 예수님이 강도이고 집주인은 마귀인데, 그래서 그 마귀를 묶어놓으니까 비로소 가재도구는 과거에 집주인에 묶여있던 관계는 청산되고, 이제는 새롭게 강도에게 강탈을 당한다는 것이다.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 인간들은, 왜 게임에 열광하는가?

이런 것이 믿음이라고 하면, 이 믿음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를 당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쉬운가? 소유를 당할 때는 무엇이 사라져야 하는가? 자기 것이 없어져야 하는데, 사람이 자기 것이 생기게 되면 그 다음에는 남의 것과 비교에 들어가는데, 즉 경쟁에 들어가고 승부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하나의 게임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게임과 승부에서 자기의 존재가치를 느끼는데, 즉 "저 사람을 이겼기 때문에 나는 이 정도 수준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혹은 "저 사람보다 못하기 때문에, 엄매 기죽네" 라고 하고 말이다. 그렇게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어떤 게임과 승부를 가지고 자기를 구축하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여전히 누구의 것이 있다는 말인가? 자기 것이 있으니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사업을 하다가 망했다고 하면, 그만 한강에 가서 뛰어내리려고 하는데, 왜 그런가? 바로 그것은 사업을 해서 망하지 않은 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다같이 망했다고 하면 그렇게 하지 않는데, 남들은 망하지 않고 자기 혼자 망했기 때문에 뛰어내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목숨과 자기의 모든 것은 자기 노동의 대가로 주어진, 즉 "내 것이다" 라는 사고방식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특히 이런 것은 개척교회를 하는 목사들은 명심을 해야만 하는데, 복음만 전하면 되는데 그만 교회를 소유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기도하고 철야하고 낙타무릎이 되어서, 그렇게 열심히 한 대가로서 하나님이 주신 자기 교회라고 우긴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 교회가 되지 않으면 나가버리는데, 자기 교회가 아니더라도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 성령께서는, 살해당한 하나님의 이름을 !!

그러니 결국 가장 기본적인 '나의 이름' 이라는 것인데, 즉 '나의 명예', '나의 위신', '나의 체면', '나의 자존심'과 같은 것이 우리 인간 속에 있으니, 그런 인간의 이름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살해당하고, 성령께서는 그렇게 살해당한 것을 우리의 코앞에 딱 들여대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창자국과 못자국을 들여대니, 도마가 뭐라고 하는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인간은 언제 제일 행복한가?

다시 말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인데, 그런 상한 심령으로 우리는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쉽게 말하면, 사람이 언제 행복한고 하니,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았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에 쌀 한 톨이 없고 돈이 한 푼 없어도,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되면, 그 동안 살아온 것도 너무 과분하다는 것을, 그래서 내일 무엇을 하고 모래는 무엇을 할지,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자기가 이렇게 존재하는 것 자체가, 심지어 자기가 들풀이 되어서 어느 집의 아궁이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지금도 이렇게 기르시고 키워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자기 힘으로 산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곧 죄라는 말이다. 그러니 "제가 이렇게 길러주셨는데, 그 길러주신 은혜를 잊어버린 것이 곧 죄이었습니다" 라고,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 라는 말이다.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했을 때, 그 앞에 무엇이 있는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라고 염려하는 이방인들을 먼저 깔아놓고, 그렇게 이방인들을 먼저 깔아놓게 되면, 그 나라와 그 의라는 것의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추구하는 것과 너희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이런 격차가 있다는 말이다.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이방인이니, 그것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네" 라고 하면서 버리는 것이 아니고, 양쪽을 다 가지고 오게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눈만 뜨면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라는 것이 기본적 바탕으로 깔려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해결이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고, 안 되면 원망하고 말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이방인의 것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는데, 그러니 결국은 그러한 이방인의 것이 깔려 있는 이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선이란 것이다. 즉 주님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버릴 수가 없는데, 즉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라는 것을 버리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죄' 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그렇게 죄라고 알려주는 그 능력이 바로 그 나라와 그 의에서 나온 능력이라는 것이다. 성경해석이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나도 사랑을 받고 싶어 !!

그러므로 그 나라와 그 의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셔야만 하는 것인데, 주님이 그렇게 주시게 되면 이방인적인 사고방식이 죄 그 자체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목사들이 목회를 하는 것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라고 하는 일종의 생계수단인데, 그러면 목사는 그것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는 목회를 밥을 먹고 살기 위해서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라고 말이다.

선교사가 멀리 타국에 선교를 하려고 가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선교사들은 그렇게 먹고 사는 것에다 하나 더 보태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저도 사랑을 받고 싶어요" 라는 것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에게 제발이지 관심을 좀 가져달라는 말이다.

부교역자의 설움이 바로 그런 것인데, 자기가 당회장에 되어야 비로소 교인들의 모든 관심이 자기에게 쏠리는데, 그게 곧 2인자의 설움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남의 밑에 있다가 개인사업을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개척교회이고, 또한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교재 132페이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신'의 활동이 하나님의 전체 백성들을 하나로 묶는 일을 하셨다.

◈ 서로의 다름을 통해서 '하나임'을 !!

그렇게 묶는 역할을 하니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신을, 즉 성령을 받게 되면 눈이 발을 보고 "너는 쓸데없어" 라는 소리를 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하나로 묶어주니 말이다. 즉 서로가 경쟁하는 비교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통해서 하나를 보는 관계라는 것이다. "어, 다르네" 라고 하면서, 그렇게 다른 것끼리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른 것이 어디에서 나오느냐는 말이다.

◈ 아담은 여자를 통해서 남자가 !!

그것은 어제 오후설교를 시간에 했는데, 그것이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었는데 말이다. 즉 "나와 다른 인간이 등장할 때, 아담은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 라는 것이다. "어, 저렇게 생긴 게 다 있네. 이름을 여자라고 할까? 그런데 누가 만들었지? 왜 생겼지? 하나님이 만드셨구나. 그러면 나는 뭐지?" 라고, 그렇게 하면서 비로소 아담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남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남자와 여자가 되면 분명히 두 몸이 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렇게 남자와 여자가 합쳐져서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그렇게 한 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개입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개입이 되는 것만이 언약이고, 반면에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음행이고 간음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간음적 행위가 된다는 말이다.

◈ 결혼도,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간음' !!

그러니 인간적인 음행과 간음을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여자를 선택하면 그것이 간음인데, 자기 아내라도 말이다. 물론 남편감을 자기가 선택해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고 말이다. 왜냐하면, 결혼을 해도 누구를 위한 남편이고 아내인가? 역시 주님을 위한 남편이고 아내인데, 그런데 자기 좋아라고 아내를 선택하고 남편을 선택한다면 그게 간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결혼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한 남자로서, 여자로서 다가오게 될 때, 그러면 그때 '나'는 누구인가? 여자 편에서 볼 때, 하나님이 개입한 남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 그 남편과 아내는 두 몸이 아니라, 한 몸이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것을 주례사를 할 때 해야하는데, 그러면 하객들이 어렵다고 하면서 밥을 먹으러 가니 곤란하다는 것이다(ㅋㅋ).

그래서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내가 개입했는데, 왜 자꾸만 니가 개입했다고 우기는가?"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이혼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이혼을 해야할 때는 해야한다는 말이다. 자기가 개입했다고 우길 때는 말이다.

(마 19:6)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그렇다고 해서 "이혼을 하라" 라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은 한 몸은 한 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혼을 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게 고린도전서에 보면 나오는데, 즉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거부하면 신경 쓰지 말고, 그 남편과 이혼하라" 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목사님, 그게 어디에 있죠?)

다시 말해서, 가정이 복음의 개입으로 될 경우에만 의미가 있는 가정이기 때문에, 그런 남편과 아내에게만 복종하고 순종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남편과 아내에게 복종하는 것은, 자기 가문, 즉 '나의 것' 이라고 하는 하나의 간음적 행위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은, 끊임없는 탈락작업을 통해서 !!

그러니 이렇게 이스라엘이 단결력으로, 즉 자기의 이름이나 신념으로 뭉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신으로 하나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깨어져 버린다는 말이다. 즉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끌고 가실 때는, '이스라엘' 이라는 인간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됨을 끌고 가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끊임없는 탈락작업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되게 하시는 작업이란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끌고 가시면서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네모난 얼음 덩어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하는가? 조각가는 끌을 가지고 그것을 주위에서부터 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작품이 나오는데,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치는 작업에 우리가 너무 당황스러워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교회는, 노아 8식구만 있어도 !!

그러니 교회라고 하면,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 복음이 아닌 것을 가지고, 즉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람을 모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방주에 노아 8식구만 들어가는 것처럼 치는 작업을 하신다는 말이다. 복음으로 말입니다. 즉 교회는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복음만 전한다면 몇 명이 모이든지 간에 분명히 교회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요소들을 끌어 모아서, 즉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세력을 모으게 된다면, 즉 돈이나 헌금이 강조되고, 고딕체 건물을 짓기 위한 힘을 모으기 위한 단결심을 발휘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단체로 지옥으로 갈 자들의 모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 말이다. 즉 혼자서 가도 되는 지옥을 그만 단체로 모아서 가는 경우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만약에 이러한 교회에 우리가 가게 된다면 대번에 퉁겨나게 되는데, 그들로부터 저주를 받고 말이다. 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당신이 하는 말은 맞는데, 전혀 교회부흥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너무 서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선지자들도 그런 고난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정작 자기는 복음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도 교회에서 퉁겨 나왔다고 우기는 자들이 있는데, 그런 자들은 참으로 곤란하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성깔이 더러워서 그런데 말이다. 그래서 이런 자들은 자기들끼리 패를 만들어서, 자기 패에 들어오지 않으면 다 밀어내고 만다는 것이다.
 
◈ 고라 자손들의 경우에 !!

구약성경 민수기 17장에 보면 그러한 자들이 등장하는데, 즉 고라 자손들이라는 말이다. 그들이 열을 받아서 뭐라고 했는가? "모세 너거 집안끼리 모두 다 해쳐먹어라. 대통령에서 국무총리까지 모두 다 말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럴 때 누가 화를 내었는가? 하나님께서 화를 내셨는데, 그래서 그만 땅이 갈라져서 고라자손들은 그만 죽어버리고, 또한 전염병이 돌아서 엄청나게 많은 자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몇 명이나 죽었는지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말이다. 그게 17장이 아니고 16장에 나오는데, 전염병이 돌아서 14,700이나 죽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땅이 갈라질 때, 모세가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했는가? "주여, 땅이 갈라져서 저 놈들을 삼켜주세요" 라고 말이다. 오히려 모세는 그 반대였는데, 즉 "저들은 철이 없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설치고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셨다는 말이다.

(민 16:32)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속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민 16:33)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민 16:34)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가로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고
(민 16:35)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인을 소멸하였더라 …
(민 16:47) 아론이 모세의 명을 좇아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민 16:48)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
(민 16:49)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칠백 명이었더라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원수를 갚는 것은 누구에게 있는고 하니, 바로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경우에, 자기가 먼저 흥분하고 화를 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오로지 주님의 몸의 기능만 감당하면 되는데, 그것이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여겨서 설치면 안 된다는 말이다.

◈ 모세의 경우에도 !!

모세가 그렇게 하다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즉 하나님께서는 바위를 가리키라고 했는데, 그만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쳤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기 백성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인데, 그들이 자기 말이 먹혀들지 않는다고 흥분해서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흥분한 인간은 하늘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라고 하시면서, 그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천국에는 들어갔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변화산에 보면 모세가 분명히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거룩한 백성이란, 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거룩한 군대로 조립해서, 인간적인(?) 모든 것은 언약대로, 즉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끄신다는 것을 보여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약속은 무엇인고 하니, 보통 우리는 약속을 믿는 것처럼 여기지만, 그러나 진정 그게 여호와의 신에 의해서 주어진 약속인지, 그게 아니라면 자기의 신념으로 인한 것인지, 즉 "하면 된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가정이나 직장에서 자기가 우려할 만한 일이 터지게 되면, 주님을 원망하고 낙담하는지, 즉 욕을 하고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 와서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으로 다시 돌이킬 수 있느냐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 기능을 누가 하는고 하니, 신약에서는 성령께서 말씀으로 다시 돌이키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힘으로 돌이킨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데, 우리는 도저히 우리 힘으로 돌아설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말도 안 되는 오기와 객기가 있어서, 한번 삐치게 되면 다시 돌아서려고 하면 부끄러워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133페이지를 살펴보자.

** 이 말씀은 구약 때, 제사장과 레위지파를 두고서 하신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나머지 12지파는 이 레위지파가 벌리는 일에 주목해야 한다.

(민 18: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 제사장과 레위지파의 경우에 !!

여기서 갑자기 레위지파 이야기를 왜 하는고 하니, 제사장과 레위지파는 철저하게 무엇만 바라보고 사는 자들인가? 그게 여기 민수기 18장 20절 말씀에 나오는 것인데, "1번, 땅을 바라보고 산다. 2번, 사람을 바라보고 산다. 3번,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산다" 라는 것 중에서 몇 번인가? 오직 약속만 바라보고 산다는 것이다. 

자기 직업이 있어서 자기 먹을 것을 챙기고 나서, 그 여분의 남아있는 것으로, 그런 취미생활로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다고 하면 굶어죽을 자들이란 말이다. 그 하나님의 약속이 그 당시의 십일조인데, 물론 지금은 없지만 말이다. 그 당시 십일조는 반드시 농토가 있어야 하는데, 십일조는 개인이 오퍼상을 하는데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십일조 - 이 땅은 나의 땅이 아닙니다 !!

말이 나온 김에 여기서 십일조의 조건을 말해보면, 십일조는 첫 번째로 땅과 관련되어 있는데,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 땅이 인간의 노동으로 결실을 맺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이 열심히 땅을 갈아서 나온 생산물은 십일조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양을 구제역 예방접종을 해서 열심히 키워봐야, 그런 것은 십일조에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십일조라는 것은, "이 땅은 나의 땅이 아닙니다" 라고 하는, '의'와 '신'과 '인'에게 관심이 있을 때, 그때 더불어서 주어지는 것이 곧 십일조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즉 "나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그냥 놀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밭에 가보니 곡식이 익어있었는데, 그것은 아무리 봐도 제가 제 힘으로 밭을 갈아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주께서 주신 겁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십일조는 모든 것이 주님 것임을 드러내는데, 전혀 자기의 소유가 아니고 말이다. 모든 것이 다 주님 것인데, 그 중에서 제일 잘 된 앞부분을, 즉 10분의 1을 잘라서 주님께 바쳐드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십일조의 의미라는 말이다.

총알의 경우에 그 앞에 보면 색깔이 다른데, 원래 총알은 노란색인데, 그 앞부분은 빨갛다는 것이다. 군대를 갔지 오지 않으면 모르는데, 물론 빨리 갔다온 분들도 이해가 안 되지 싶은데(ㅋㅋ), 그러니 빨간 것이 지향하는 것을 뒤의 것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즉 10분의 1이 가는 곳에 10분의 9가 따라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10분의 1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드린다는 것은, 뒤에 덩달아서 뒤따라가는 10분의 9도 역시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즉 밭에다 그냥 던져놓았는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고 하는, 그렇게 모든 것을 주께서 하셨다고 하는 것을 인식하는 경우에만, 그리고 나서 십일조를 드리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 헌금이냐? 뇌물이냐?

그래서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헌금은 반드시 "이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고 하는 의식이 없다고 하면, 그런 상태에서 헌금을 하면 뇌물이 된다는 것이다. 복음에 대한 감사인데, 즉 자기에게 재산을 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말고, 자기에게 재산이 있으나 없으나, 십자가의 복음으로 천국에 가게 된 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없는 헌금은 마치 창기가 자기 몸을 팔아서 바치는 더러운 돈이라는 말이다. 헌금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기쁨으로 해야만 하는 것인데, 즉 돈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저는 돈이 있으나 없으니 주님 때문에 삽니다" 라고 하는 마음이 생길 때만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 헌금이 많이 나오든 적게 나오든 간에, 그것은 목사가 신경 쓸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헌금이 적게 나오면 "아하, 교인들이 바쁘다보니 복음에 관심이 없구나" 라고 하면 되고, 반면에 많이 나오면 "아하, 요즘은 복음에 좀 신경을 쓰는구나" 라고 여기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성질이 급해서(?) 참지를 못하고, 크리스마스에 하는 헌금, 부활절에 하는 헌금 등등, 그렇게 법적으로 정하게 되면, 목사나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봉투에 자기 이름을 써서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목사가 교인들을 상대로 앵벌이를 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 십일조를 다시 정리하면 !!

십일조를 다시 정리하면, 첫째는 땅인데, 그 땅을 하나님께서 그냥 키우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냥 키우시는 것인데, 이것을 좀더 세밀하게 말하면, 자기가 아침에 눈을 뜨니까 몸은 건강한데 할 일이 없어서 밭에 나가서 호미를 들고 조금 밭을 갈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알아서 호미를 들고 설친 것이 아니라, 주께서 건강을 허락하지 않았으면 자기는 그런 힘도 없었는데, 주께서 그런 힘을 주셔서 가능했다는 것이다.

또한 자기가 호미를 들 힘이 있어도 아침에 눈을 뜨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텐데, 눈을 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그것 또한 자기가 아침에 할 일이 많았다고 하면 몰라도, 그것이 아니었기에 호미를 들고 밭에 가서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밭에서 수확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모든 절차에 무엇을 집어넣는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집어넣는데, 그러면 그 땅은 온전히 주님의 땅이 되는데, 이것을 신약시대에 사는 오늘날 모든 성도의 일상적인 삶에다 적용을 시킬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신약시대에서는 땅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는 모든 일들을 말이다.

◈ 신약시대는, 그것이 곧 일상(日常) !!

그것이 오파상이든 치킨집이든 간에, 그 모든 일들에 대해서, "이것은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겁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큰 은혜는 십자가의 피로 내 죄를 용서해주신 것이고, 저는 거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니 치킨집이 없어도, 저는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죄인을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뿐입니다" 라고 하면, 그게 치킨집이든 무엇이든 간에,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그게 '봉사'가 되는데, 그러면 그 가게는 어떻게 되는가? 이웃사랑의 전초기지가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생계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물론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러니 학원을 하는 사람을 보면 뭐라고 하면 되는고 하니, "다른 학원에서는 5만원을 받지만 당신은 10만원을 받아라. 왜냐하면, 당신이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데 5만원은 안 되고 10만원은 받아야 한다. 물론 나중에 세무서에서 물어보면 입을 다물고 5만원만 받았다고 하면 되는 거야. 당신이 받은 것은 5만원인데, 당신이 알아야 하는 것은, 물론 법적으로 일관되게 해야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법에 얽매이지 않거든" 라고 하면 되는데, 그게 곧 이웃사랑이라는 것이다. (제대로 해석이??)

이러한 것이 바로 이방인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언약적인 사고방식인데, 처음에 제가 이야기했듯이, 즉 어느 도시에 가서 자기가 살아있다고 하는 그 자체를 마치 인생에 성공했다고 여기는 사고방식, 그런 사람이 만약에 영적 인간이라고 하면, 거기에 말씀이 들이닥치게 되면 자기는 안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 ??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말씀이 없는 이방인의 경우에, 즉 자기가 살아남아야만 성공한 것처럼 여기는 사고방식을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즉 우리 속에 숨겨져 있었다는 말이다. 교회에 나오면 그게 들통이 나는데, 즉 성경말씀과 자기 실제의 움직이는 모습과는 다르니까, 그런 다름을 통해서 "아하, 죄라는 것이 말씀 앞에 서게 되니, 그게 전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항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자기가 죄인임을 말이다.

그렇게 죄가 실제적인 사항임을 알게 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는 것도 역시나 추상적인 과거사가 아니라, 지금 성령께서 자기에게 그대로 안겨주는 언약 안에서, 즉 말씀 안에서의 실제적인 현실이 된다는 말이다.

◈ 주 예수보다도 더 귀한 것은 없네 ♬

찬송가 가사에도 이런 제대로 된 내용들도 많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주 예수보다도 더 귀한 것은 없네" 라고 하는 것인데 말이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명료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찬송가 가사에 "예수님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 식의 내용들이 제법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주 예수 모신 곳이라면, 초막이든 궁궐이든 상관없이 그 어디든지 하늘나라입니다" 라고 하는데,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사는 곳이 전세이든, 월세이든, 또한 100평짜리 아파트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 어디라도 주님과 함께 있으면 천국이라는 것이다.

물론 요즘 교인들이 무슨 마음으로 그러한 찬송가를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요즘 같으면 부를 찬송이 없다는 것이다. 혹시 그런 찬송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아파트 평수를 넓혀줄지 모른다는 노림수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지만 말이다(ㅋㅋ).

그러니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라든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라는 찬송가를 보게 되면, 그야말로 "예수님만 있으면 다른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습니다" 라는 취지로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찬송가들은 어디에 밀리는고 하니, 요즘 나오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라고 하는데 그만 밀리고 만다는 것이다. 즉 자기 존재의 가치를 높이는데 말이다.

◈ 다시, 제사장과 레위지파는 무엇 없이는 안 되는가?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제사장과 레위지파는 무엇이 없이는 살지 못하는가?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게 되면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만 생계가 위협을 받아서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사기에 보면 이 레위지파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가? 자기들이 먹고 살아갈 길이 없으니까, 즉 십일조가 거두어지지 않으니, 그 당시에 사실 백성들이 십일조를 제대로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들이 먹고 살만하게 되면 무엇을 잊어버린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그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살만하면 말이다.

힘들 때는 "주여!" 라고 하면서 새벽기도까지 나오다가, 살만하면 주일예배도 그만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새로 교회에 나오게 되면 이미 짐작하게 되는데, "이 양반이 과연 일년은 나오겠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대충 보면 맞추게 되는데, 그러니 족집게 도사가 다 되었다는 것이다(ㅋㅋ). 처음에는 예배시간이 11시라도 10시 반에도 나오고 하는데, 한 달도 채 가지 않아서 11시 10분에 나온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은, '나의 나라'가 되는 과정을 !!

아무튼 레위지파와 제사장들이 먹고 살 것이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당시의 사람들이 안정된 생활 가운데 정착을 하게 되면, 그렇게 정착을 한다는 말이, 그 정착은 누구 것이 되겠는가? '나의 것'이 되는데, 그 '나의 것'이 커지면 '나의 나라'가 되고 말이다. 바로 그러한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곧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인 자기들을 위해서 살았던 것이지, 이스라엘을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즉 "'나의 나라'를 어떻게 해볼까?" 라는 것인데, 그 대표적인 왕이 바로 다윗 이전의 왕인 사울이란 말이다.

사울에게는 이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자기 나라인데, 그러한 자기 나라가 누구에게 지는가? 자기 나라이니 당연히 자기가 지켜야 하는데, 하나님이 누구를 보내셨는가? 키가 3미터가 넘는 골리앗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윗이 오게 전에 벌벌 떨고 있던 이 이스라엘은 누구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가? 블레셋의 골리앗에게 졌다는 말이다. 전쟁을 하기도 전에 말이다.

그래서 제가 이 부분을 설교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 세상에서는 반드시 골리앗이 다윗을 이긴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자꾸만 자기가 다윗에 되어서 신기한 기적을 행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골리앗이 이기는 세상이니 말이다.

◈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골리앗을 이기시는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골리앗을 이기는데, 왜 그런가? '나의 것'이 없기 때문이란 말이다. 그러니 '나의 것'이 있는 우리에게는 항상 마귀가 이기에 되어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나의 것'이 없다면 누가 이기는가? 그렇게 '나의 것'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개입한다는 의미인데, 하나님이 개입하게 되면 천하의 악마이고 천하의 골리앗이고 간에 누구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인가? 결코 성도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골리앗도 이기지 못하는 성도의 모습을 제가 소개를 해드리겠는데, 그것이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나오는데, 제가 읽겠습니다.

(계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에 보면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라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어폐가 있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여러 형제가 세상을 이기고 악마를 이기었는데, 어떻게 이겼는고 하니, 전혀 기어이 살아남아서 이긴 것이 아니고,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기에, 그것이 하늘나라에서 이긴 것으로 되었다는 말이다.

또한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도 보면 나오는데, 충성을 하되 어떻게 하라고 했는가? "죽도록 충성하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죽을 지경까지 가라는 의미가 아니고,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죽은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즉 "아이쿠, 죽을 뻔했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을 면류관을 주겠다고 하셨는데, 즉 진짜로 죽으면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그 이전에 "나는 사나 죽으나 죽의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믿으라는 말인데, 그것이 약속이니 말이다. 즉 "'죽었다, 살았다' 라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되지 않게, 그것이 너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게 하라" 라는 것이다.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 사람의 뿌리 속에는 항상 죽음이 있기에 !!

그래서 제가 어제 낮 설교시간에도 말했지만, "사람의 뿌리 속에는 항상 죽음이 있다" 라는 것이다. 즉 우리 인생은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그런 죽음이 우리의 뿌리이니, "우리 인생은 시들어 가는 화초와 같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인생은 시들어 가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고 하니, 죽음이 이미 화분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육은 죽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그런데 놀랍게도 생명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 안에서, 그 죽음을 이기는 식으로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나는 죽지만, 나는 주님을 여전히 사랑해"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다. 즉 "나는 개척교회를 하다가 망했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주님의 복음을 사랑해" 라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피' 교재 11페이지 이하에 나오는 4가지 유형의 사람인데, 아마 '피' 강의를 하면서 두 번째 시간 정도에 했지 싶은데 말이다. 그것이 바로 구약시대의 선지자의 모습이고, 또한 오늘날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 에피소드 1

** 옛날 어느 마을에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병마에 보내고 자식은 가출해서 사고를 치고 지금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복음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 에피소드 2 !!

** 옛날 어느 마을에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개척교회를 하면서 가산을 다 탕진하도록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교인들이 하나 둘씩 줄어들기 시작해서 급기야 자기 가족 외에는 단 한 명의 교인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 에피소드 3 !!

** 옛날 어느 마을에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빈민들을 위해서 산을 개간하다가 다쳐서 평생 불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 에피소드 4 !!

** 옛날에 어느 마을에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졸음운전을 하다가 막 신혼여행을 다녀온 신혼부부를 즉사케 했습니다. 합의금이 없어서 여태껏 교도소에 있습니다. 그래도 그는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오늘은 늦게 시작했기에 5분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133페이지를 보자.

** 12지파의 운명은 레위지파에게 종속되어있는 것이다. 레위지파와 제사장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어떤 일을 하기에 나머지 12지파의 운명이 이들에게 달려있는가? 레위지파와 제사장은 '거룩한 죽음'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일에 종사했다.

◈ 레위지파의 운명은?

이스라엘은 레위지파를 빼놓고 12지파인데, 합쳐서 13지파라는 말이다. 레위지파는 대표자이니 따로 빼놓아버리면, 이 레위지파의 운명은 어떠한고 하니, 12지파가 생각하기를, "우리의 운명은 레위지파가 제사를 제대로 드리는가?" 라는 것에 달려있다고 여기는, 그러한 여건에 따라서 레위지파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말을 하고 보니 문장이 조금 긴데,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관심이 없어버리면, 더 이상 약속과 말씀을 외치는 자들의 생명은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즉 전혀 생계보장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목사의 경우에, 즉 하나님께서 그 목사에게 복음을 주신 것은, 먹고 살라고 준 것이 아니라,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라는 것이다. 산성인지, 알카리성인지 알아보는 시험지 말이다.

그러니 리트머스 시험지는 자기 역할이 있는 것이지, 자기가 잘먹고 오래 살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시험지는 지금 바닥이 더러운 바닥인지, 깨끗한 바닥인지 알아보는, 즉 복음을 알고 있는지, 아닌지를 시험하고 측정하는 기능만 감당하면 된다는 것이다.

◈ 목사는, '시험맨' 일뿐 !!

그래서 제가 그것을 두고서 '시험맨' 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즉 "아하, 이 세상은 복음을 전했더니만 듣기를 싫어하는구나" 라고 하는 것만 밝혀내면 되는 것이지, "제발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싫어하니, 듣기 좋도록 좀 해주세요" 라고, 그렇게 요청하는 것은 목사의 월권행위라는 것이다. 자기 주제파악도 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목사는 복음에 빚진 자로서, 그게 로마서 1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오직 복음만 전하면 되지, 그 외친 대가로서 반대급부를 계산하는 것은 굉장히 수상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복음을 사랑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거짓 선지자와 참된 선지자의 특징이 그렇게 갈라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은 예수님을 퇴학시켰으니,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기대도 할 수가 없고 말이다.

(롬 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기쁨이 무엇인고 하니, 믿지 않아야 되는데 믿는다고 하는, 바로 그것이 환희고 즐거움이란 말이다. 물론 믿지 않는다고 하면, "혹시나 했더니, 역사나 이구만" 라고 여기면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 자식이라도 말이다.

◈ 자식의 경우에도 !!

이 세상에서 부모 마음대로 되는 자식은 없는데, 그런데 혹시 자식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고맙게 여기고 치킨이라도 하나 더 사주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식은 어디까지나 그 부모를 닮아서 육신인데, 우리가 거듭난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가능한 것이지, 우리가 열심히 복음을 공부하고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식에게도 성령이 임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지,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인간은 종교적인 인간만 될 뿐이라는 것이다. 즉 부모의 말을 듣고 교회에 다닐 수는 있을지 몰라도, 천국에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부모에게 그 자식을 붙여서 한 집에 살도록 하신 것은, 그것도 역시나 하나님의 뜻인데, 그러니 자식에게 마음껏 복음을 전해서 우리의 기본이 얼마나 세상적인지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모가 되어서 자기 자식이 아니라 남의 자식이 성령을 받아서 구원을 받은 것을 보면 화가 나는데, 그것이 얼마나 육적인 생각이냐는 것이다. 주님이 보시기에는 다 같은 자식인데 말이다. 그런데 육신의 부모는 자기 자식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직도 자기 소유에 끌려서 말이다.

그래서 자식의 경우에도, 자기 부모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 남의 부모가 구원을 받으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육적인 '나의 것' 인데, 그것이 자존심으로 구성이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의 열매라고 내뱉는 것에는 이런 더러운 불순물들이 섞여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에는 이런 것들이 섞여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것들을 차후적으로 알고, 다시 성령께서는 우리의 정과 욕심을, 즉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순간,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즉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레위지파와 제사장은 '거룩한 죽음'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일에 종사했다. 마치 이스라엘 한복판에 깊은 구멍을 파서 그 주위를 둘러싼 12지파를 그 구멍에다 매일같이 한꺼번에 함몰시키는 양상이다. 그 구멍 안에는 피가 기다리고 있다. 그 피에서만 거룩한 힘이 나온다. 이것이 축복이다.

◈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을 살찌게 !!

축복이란 무엇인가? 12지파의 그 중앙에는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에 있는 어린양에게 매일같이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다. 그 어린양에게서 나오는 피가 이스라엘을 살찌게 만드는데, 즉 "어린양의 피가 우리를 살리게 만들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12지파가 될 경우에만 제사장과 레위지파는 십일조를 받아서 먹고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하나로 모이는데, 즉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죽음마저 이기는 힘이 없이 이스라엘이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한다면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속에는 심지가 박혀있고, 그 심지를 중심으로 하나로 움직여야 하는 민족이다.

◈ 죽음마저 이기는 힘 !!

그러니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죽음에 관심이 없으면, 즉 "내 대신에 누가 돌아가셨는가?" 라고 하는, 그 희생에 관심이 없다고 하면, 그러한 하루는 이방인의 하루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심지를 중심으로 움직이는데, 예를 들어서, 이렇게 연필이 있으면 그 중앙에 심지가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심이 나오는데 말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아무리 많아도 주님께서 이스라엘로 인정하시는 것은, 여기 앞에 있는 뾰족한 '한 분' 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한 분으로 나타나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법궤인데, 그래서 그 법궤는 그 앞에서 매일같이 무엇이 이루어지는가? 어린양에서 바치는 제사인데, 즉 매일같이 피가 흘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피가 흘려지는 반복적 행위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계속해서 이방나라를 이기게 하는 죽음에서 나오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방나라는 이런 심지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해도 이스라엘에게 패배를 당하는데, 바로 그런 구조가 이스라엘 역사라는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이스라엘에게서 이 심지 자체가 뽑아지는데, 그러니 이방나라와 전혀 다를 바가 없어서 이방나라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하나님의 피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하나로 바라보게 하시고, 오직 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하루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항상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우리가 살아온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02,11 오후 10시 50분에 마침.

                        옛날에 어느 마을에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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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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