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809 피30강 신 의식 : 하나님 나라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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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00809피p108신의식

피30강 신 의식 : 하나님 나라의 확장 
 
[10 대구강의 12] - [피 30] - 신의식(神意識)
                                                                                
                                                          10,08,0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신호를 포착하라 !!

오늘은 먼저 교재 108페이지를 살펴보자.

** 이제 해석 불가능한 계시는 없고, 일단 그 뜻을 알았다면 실천 불가능한 명령이라는 것도 없게 되었다.

무슨 말인가?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그런데 실천 불가능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특히 바리새인들이 그러한데 말이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방금 읽은 그 위에 나오는데 말이다.

일단 교재를 살펴보자.

** 아무리 신께서 은밀하게 감추어놓은 정보라고 할지라도, 일단 인간을 향하여 표현했다고 한다면, 그 정보를 포착할 수 있는 신호를 인간에게 보인 것이라고, 인간들은 믿어보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신의 신호가 있다고 하면, 그렇게 ‘있다’ 라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 인간들이 잘만 하면 끄집어낼 수 있다고 보고, 그렇게 끄집어낸다는 것은 실천이 가능하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실천 가능한 명령이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피조물 안에 있는 신의 능력을 긍정하게 되면, 이제 남은 사항은 인간 본인의 노력에 의해서 얼마나 깊고 넓게 신적인 속성을 파악해 내느냐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 잠시 ‘신의식(神意識)’에 대해서 !!

지난 시간에 한 것을 복습해보면, 시간도 한 달이나 지났으니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 그렇게 항상 분명한 것부터 시작하는데, 즉 하나님이 계시는 것은 알겠는데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신에 대한 의식, 즉 ‘신의식(神意識)’ 이란 것인데, 이런 신 의식이 있다는 것은 신이 우리 인간에게 심어주었으니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신이 없는데 신 의식이 있을 리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의식의 특징인데, 신의식과 피조물의 의식이 다른 점은, 피조물 의식은 무엇인고 하니, 요정이나, 일각수(一角獸), 즉 뿔이 하나 달린 괴물, 해태, 그리고 용과 같은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 의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저런 것은 원래 없지만, 그래도 좀 생겼으면 좋겠다” 라고 상상할 수가 있는데, 충분히 그럴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 의식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신 의식은 피조물에 관한 것이 아니기에, 즉 “왜 우리가 이렇게 사는가? 달과 별은 왜 그 자리에 있어야 되고, 지구는 왜 이 자리에 있어야 되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태양이 아닌 여기 지구에서 태어났는가?” 라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면, 피조물의 수준에서는 그 자체로 그야말로 도토리 키 재기라는 것이다.

그러니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데, 그러니 피조물인 우리 인간을 초월해서, 신이 있어서 그 신이 내려보는 식으로 설명을 해주어야만, 우리는 “아하, 이 자리는 나의 자리이고, 이 자리는 너의 자리구나” 라고 되는데, 그렇게 모든 것이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 ‘신의식’이 곧 ‘하나님의 형상’ !!
 
그러니 이런 신 의식이 있다는 것은, “인간보다 신이 먼저 계셔서, 인간을 만들 때 자기 의식을 심어주셔서, 그래서 신 의식이 있다” 라고, 이것을 보통 ‘신 의식’ 이라고 하고, 또한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형상’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다른 말로 하면, 이 지상에서, 즉 교회에서 나타났던 모든 신학은 언제나 이 개혁주의 신학 안에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개혁주의 신학에서 ‘이렇다’ 라고 하면, 기존의 신학에서는 다 ‘그렇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 겸손한 개혁주의 신학 ??

그러니 개혁주의 신학은 그냥 하늘에게 뚝 떨어진 신학이 아니라, 기존 신학에 말하는 좋고 건전한 성경적인 모든 것을 다 모아서 ‘개혁주의’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개혁주의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갱신하고 또 갱신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좋은 것을 더 차곡차곡 쌓아서 점점 더 발전하고, 진보하고, 더 풍성해 보이는 신학을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완료된 의미가 아니라, 그야말로 계속해서 개혁해나간다는 의미에서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개혁주의 신학의 취지를 살펴보면 얼마나 겸손한지 모르는데, 그래서 공부를 꽤나 한 사람도 이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서 반박을 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낮추고, 계속해서 개방된 상태로 열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건방지게 “이제는 다 되었다” 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멈추지 않고 활짝 열어서, 새로운 것이 오면 얼마든지 수용해서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그 마음가짐 자체가 너무나 겸손한데, 그런데 어떻게 그런 신학을 비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곧 개혁주의의 자긍심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 판넨베르그의 경우에 !!

그러므로 이런 신 의식이 있다는 것은 이미 관계가 이어졌다는 것인데, 그런 관계의 밧줄을 따라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게 되면 신의 사상에게 도달한다는 것이다. 판넨베르그와 같은 신학자가 대표적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정용섭이 이 양반을 추종하고 말이다.

어제 오후설교를 마치고 나니 저의 아내가 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제가 한 설교에 대해서 시비를 걸었는데,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왜 설교시간에 실명을 거론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제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사실은 제가 교인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대신해서 주었기에 오히려 고마워하지 싶다는 말이다(ㅋㅋ). 아닌가요?

제가 왜 실명을 거론했는고 하니, 그렇지 않고 김 모씨, 이 모씨 등등, 그렇게 말하면 감질만 난다는 것이다. 도대체 주님 앞에서 무엇이 겁나고 두려우냐는 말이다. 꾸며내서 말하는 것도 아니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데 말이다. 조용기는 실명을 거론하면서 다른 사람은 하지 않으면, 그것은 움츠린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정요섭 씨의 경우에, 이렇게 신으로 올라가는 연결된 밧줄, 그 선을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역사’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역사의 끝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것이다. 얼른 들으면 참 은혜스러운데 말이다. 그렇게 역사의 끝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이지만, 그러나 아직 우리는 그 끝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끝과 지금 우리 사이에는 역사가 이어져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역사가 있는 한 아직 계시는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 판넨베르그 - 계시는 종결되지 않았다 !!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아직 계시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인데, 즉 계시는 종결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아직 주님이 재림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은 이런 주장에 매료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래서 무릎을 치면서 “야, 참으로 옳은 소리이다. 진작 좀 하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못하지? 한국의 보수주의 목사들은 왜 판넨베르그와 같은 주장을 하지 못할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가? 기존의 총신이나 장신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계시는 종결되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계시는 종결되었는데, 그런데 판넨베르그의 경우에는, 역사가 아직 남아있으니 종결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둘 중에서 누가 맞느냐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 차영배 - 성경과 계시를 구분해야 !!

여기 “계시가 종결되었다” 라는 것은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인데, 칼빈을 비롯해서 미국의 워필드나 메이첸과 같은 자들이 주장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총신의 ‘차영배’ 라는 교수가 있는데, 이왕 실명이 거론되었으니 그냥 팍팍 밀고 나겠는데 말이다. 이 양반이 무엇이라고 주장했는고 하니, 계시와 성경을 구분했다는 것이다.

제가 이 분에 대해서 비판한 글이 장로님이 편집한 ‘성경신학의 세계’에 있었지 싶은데,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굉장히 글이 긴데, 어떤 교수는 그 글을 보고는 칭찬이 늘어졌는데, 비판을 제대로 했다고 말이다(ㅋㅋ). 즉 계시는 종결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물론 성경은 종결되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주장해서,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말이다.

◈ 순복음으로 돌아가자 ??

그 양반이 이런 주장을 하면, 순진한 사람들은 그냥 “아하, 계시가 문제로구나” 라고 여기는데,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학자나 교수가 입을 열었을 때는 모두가 다 나름대로의 노림수가 있는데, 이 양반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까, “순복음 교회 쪽으로 돌아가자” 라고 하는,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순복음 교회, 즉 조용기의 교회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교회가 부흥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데 지금 합동측이 요모양 요꼴이 된 것은, 이 계시론에 있어서 융통성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차영배 교수가 하는 말이 말이다. 무슨 융통성인고 하니, 자꾸 성경이 종결되었다고 하니, 개혁주의는 성경을 이성적으로 가르칠 생각만 하지, 각 사람 사람에게 주어지는 체험적인 지금 이 시대의 놀라운 하나님의 성령의 계시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계시가 종결되었다” 라고 하니, 사람들은 계시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 줄로 아는데, 하지만 이러한 틈새를 이용해서 순복음 측에서 장로교 교인들을 끌어 모아서 교회를 확장시켰다는 것이다. 그것이 조용기라는 말이다. 즉 계시는 종결되지가 않았고, 성령께서는 지금도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순복음에서 주장해서, 장로교와는 차별화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장로교에 다니면 그야말로 답답한데, 기독교의 용어로는(?) 컬컬한데 말이다. 오랜만에 이런 말을 써보는데, 그런 답답하고 컬컬한 영혼이 순복음에 가서는 시원함을 맛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화끈하데 한번 놀아보자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교회를 키운 것이 조용기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쪽에 빼앗긴 교인들을 빼앗아오려고 하면, 우리도 뭔가 열린 마음으로, 즉 “계시는 지금도 체험이 된다” 라고 해서, 답답하고 컬컬한 것을 치우고 시원하게 한번 해보자고, 그런 식으로 차영배 교수가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녹취자 - 차영배 교수는 전도사 시절부터 성령의 은사를 강조했는데, 그래서 설교를 하면 너무 내리쳐서 강대상이 종종 부셔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의 외할아버지가 그 강대상을 고쳤다고, 저의 외할머님이 저에게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차영배 교수는 네덜란드의 캄펀 신학교에서 유학을 했는데, 삼위일체 신학을 공부했고 말이다. 그 학교에는 유명한 ‘바빙크’ 라는 신학자가 있었는데, 히딩크가 아니고 말이다(ㅋㅋ). 그런데 차영배 교수가 바빙크를 너무 추종하니 학생들이 ‘차빙크’ 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는 것이다.

◈ 소위 ‘문화사명’에 대해서 !!

그런데 바빙크의 주장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연계시가 크고 안에 특별계시가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특별계시에 너무 머물러 있지 말고 자연계시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문화사명’ 이란 것인데, 즉 교회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바깥으로 나가서 온 세상을 변혁시키는 사명이 기독교인들에게는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네덜란드 개혁주의의 특징인데, 이런 문화 사명자로 자처해서 신학을 외친 사람이 바로 숭실대학교의 김영한 교수인데, 이왕 실명으로 나가는 것 그냥 계속해서 나가자는 것이다. 저를 보고 계룡산에서 하산했냐고 비아냥거리던 양반인데 말이다(ㅋㅋ). 이런 문화사명을 조금은 다르지만, 아무는 그런 식으로 주장한 사람이 또한 영국 출신의 ‘존 스토트’ 라는 사람이고 말이다.

그들이 노리고 있는 고객이 있는데, 바로 젊은 대학생들이라는 것이다. “시련은 있으나, 실패는 없다”, 혹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라는 식인데, 주로 ‘IVF’ 라는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움직였는데 말이다. 그렇게 해서 성경공부를 한 자들이, 처음에는 일반 대학교에 다니다가 나중에는 전공을 버리고 외국으로 나가서 신학을 공부해서, 지금은 신학교의 교수들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들의 모임이 바로 제가 얼마 전에 가서 ‘70이레’를 가지고 복음을 전했던 ‘개혁신학회’ 라는 단체인데, 물론 거기서 최고 고수는 김영한 교수가 되는데, 그래서 그들이 모이면 그 양반의 자리는 따로 마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ㅋㅋ).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
 
아무튼 이렇게 개혁주의 신학은 “계시는 종결되었다” 라고 하는데, 그들이 왜 그러한 주장을 하는고 하니,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뜻은 무엇인고 하니,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두 가지로 나눈다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이다. 여기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음으로 해야되고, 그렇게 믿음으로 실천으로 옮기게 되면, 이 실천에 대한 결실이 나오는데, 그 결실은 보이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라는 것은, 보이는 것의 실적을 가지고 ‘접촉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누구와 누구의 접촉점인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인간의 접촉점이란 말이다. 그러니 “야, 진짜 하나님이 있는 것이 맞구나!” 라는 것은 보이는 실적을 가지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보이는 실적은 보이는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의 숫자인데, 그리고 헌금액수의 증가이고 말이다. 그러니 사람의 숫자는 곧 돈의 액수가 된다는 것이다. 접촉점, 바로 그런 것을 시도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접촉점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결실이나 열매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나온 이론이 무엇인고 하니까,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을 본 따서, 즉 “하늘나라는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열심을 다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이 ‘확장’ 이라는 것은 무엇과 연관이 있는고 하니, 숫자와 영토인데, 즉 정복이라는 말이다.

◈ 개혁주의의 모토 - 하늘나라의 확장 !!

이렇게 ‘하늘나라의 확장’ 이라는 모토가 세워지게 되는데, 그런데 지금 한국의 보수계열의 구약성경 신학자들의 모임은 다 이것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온 사상이 바로 ‘임마누엘’ 이라는 것인데, 즉 하늘나라의 개념을 에덴동산에서부터 끄집어내어서 전부가 다 하늘나라를 어떻게 확장시키는지, 즉 미미했던 작은 민족에서 세상 끝 날까지 하늘나라가 확장되는 여기에 사명을 두고, 성도는 이 마지막 때에 이 땅에 출현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론을 펼친다는 것이다.

설교를 천 번을 하고 만 번을 하고, 신학서적을 천 권을 찍고 만 권을 찍어내어도 남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곧 ‘하늘나라의 확장’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확장’ 이라고 해버리면 언제나 미완료로 남는데, 도대체 얼마나 해야 확장이 끝이 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확장은 끝없이 된다는 것이다. 미완료로서 말이다.

◈ 시공간적인 미완료 !!

그런데 이 미완료는 공간적인 미완료가 아니라, 그러한 공간적 미완료 앞에는 반드시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판넨베르그가 이야기한 것처럼 시간적인 미완료가 있는데, 그러니 시공간적인 미완료라는 것이다. 즉 “이만하면 되었다!” 라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미완료의 상태에서는 목사가 교인들을 족쳐야 하는데, 물론 실적 위주로 말이다. 그러니 부교역자나 전도사들은 무엇을 못하면 교회에서 추방이 되겠는가? 실적을 올리지 못하면 바로 쫓겨나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주일학교를 맡아서 50명에서 30명으로 줄어버린다면, 그것은 그만 하늘나라 확장에 저촉이 된다는 것이다. 50명에서 60명이 되고 70명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30명으로 준다고 하는 것은 하늘나라 확장에 그만 역행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성령이 보이는 사람과 접촉이 되어서 실적을 이루어낼 때, 그것이 바로 손에 잡히는 하늘나라가 된다고 본다는 말이다.

◈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

그러니 모든 교회의 목회나 설교는 아주 간단한데, 모토는 ‘하늘나라의 확장’ 이라는 것이고 말이다. 즉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을 받았는데, 물론 그 힘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면 안 되고, 그것을 어디에 써먹어야 하는고 하니, 말로만 하지 말고 저쪽에서 실적을 내놓으라고 할 때, “이번 달에는 몇 명을 전도했고, 버스를 잘 돌려서 또 몇 명을 더 데려왔고, 또한 이웃교회에서 돈 있는 양반을 몇 명이나 빼내왔고” 라고 하면서, 그런 식으로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실적을 올리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여러분이 우리교회에 오게 되면,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제공이 되는 축복이 기다립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축복이 무엇인가? 서울대학에 합격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또한 좋은 신랑과 신부를 만나고, 바로 그런 것들의 비율이고 또한 숫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서울대학에 몇 명이나 보내었는지 숫자로 보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항상 무엇인고 하니,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인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다고 말로만 하지 말고 실적을 내놓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실적을 말이다.

그래서 어떤 분이 이야기한 것처럼, “십자가 마을이 진짜 진리라고 하면 숫자가 왜 그렇게 적은가?” 라고 말이다. 실제로 저쪽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왜 그런 소리를 하는가? 하늘나라의 확장개념이 머리 속에 꽉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이단의 천지라는 말이다.

◈ 김성수 목사의 경우에 !!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해보면, 이러한 모든 것을 비판한 양반이 바로 김성수 목사인데(누구?), 그러니 참으로 대단한데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런 모든 것을 다 비판한 그 양반이 제시한 복음은 무엇인고 하니, 놀랍게도 없다는 것이다. 김성수 목사가 주장하는 복음이 말이다.

그분은 십자가의 의미도 모르는데, 다만 “이것은 아니다” 라고 이야기하면 된다는 것인데, 즉 “우리 속에서 이러한 것들이 일어나는데, 그것만 아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아하, 이런 것은 나쁜 것이구나. 또 이러한 것은 복음이 아니구나” 라고 말이다. 그것이 곧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교회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귀도 참으로 교묘하다는 말이다.

◈ 피 - 한 남자의 죽음 !!

아무튼 이 ‘피’ 라는 것은, 우리 이 교재에도 나오지만, 한 남자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죽은 한 남자를 두고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아들’ 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 아들에게서 뭔가가 나온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데, 그 아들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데, 그 아버지와 그 아들의 관계로 맺어버리면 끝난 이야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와서, 다시 아버지에게로 가면 끝이란 말이다. 즉 아버지가 아들을 주(主)로 만들어버리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뭔가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건지려고 하는데, 그런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아들이 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죽여서 다시 살리는 것, 그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로마서 10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를 사람들이 모르는데, 우리는 여기 밑에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와서 다시 가버린다는 것이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우리는 당연히 저주를 받아서 지옥에 갈 죄인인데, 그러면 구원은 무엇인가? 아버지와 아들이 하시는 일의 영향력에 의해서, 즉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 일의 영향력에 의한 파급효과를 받은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즉 아버지께서 아들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파급효과라는 것이다.

◈ 칼바르트의 ‘이중 선택설’ !!

이 부분에 대해서 칼바르트가 아주 대담하게 이야기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물론 조금 위험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세를 주었으니, 이제부터는 구원을 받고 받지 않는 것은 아들에게 있다” 라고 했는데, 이것을 소위 ‘이중 선택설’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게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고, 또한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라는 말이다. 즉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선택했고, 그 다음에 때어버리고, 아들이 다시 자가기 원하는 자들을 선택한다는 내용인데, 그게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 5: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 그것은 주님의 고유업무 !!

그렇게 아들이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구원한다는 것이 바로 구약의 주님이 해야될 업무인데, 즉 그런 일이 바로 구약의 주님이 하셔야 될 고유업무라는 것이다. 주님의 고유업무 말이다. 즉 자기가 원하는 자를 건지고, 그렇지 않은 자를 건지지 않는 게 예수님의 고유업무인데, 그러니 거기에 다른 누구도 관여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까,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만 찾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동네방네 다니면서 모든 사람에게 다 기적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만 베푼다는 것이다.

(눅 4: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그 사람이 구원을 받고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즉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 건지려고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자만 건지려고 왔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구약의 주(主) 개념과 합치가 된다는 말이다. 즉 그러한 권한만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은 무엇만 살피면 되는가? 아버지와 아들이 어떤 관계인지, 바로 그것만 살펴보면 되는 것이지, “왜 나를 구원하지 않습니까?” 라고, 그렇게 닥달을 내면서 시비를 걸 수 있는 권한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는 말이다.

◈ ‘남은 자’는 오직 은혜로만 !!

‘남은 자’가 ‘남은 자’가 되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는데, “나는 남은 자이다” 라고 남보다 먼저 손을 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은혜로 되는 것이란 말이다. 그것이 남은 7,000명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그냥 은혜로 건짐을 받는데, 그러니 그런 자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그냥 주님이 오셔서 건져주셨습니다” 라고, 아주 편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이 열을 받아서 “너, 죽어!” 라고 해도, 그것은 자기가 하는 이야기와는 상관이 없는데, 그래서 “죽이든 말든 알아서 하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이야기하면 죽이지 않겠지” 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구원받은 것은 바로, 그게 곧 ‘목격자’ 인데 말이다. 즉 “내가 목격한 것은 주께서 나를 건졌다” 라는 것뿐이지, “죽인다. 안 죽인다” 라는 것은, 즉 교회가 부흥이 되고 안 되는 것은, 우리가 관여할 바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확장하자. 눈에 보이는 실적이 있어야 돼” 라고 하는 것은, 전혀 예수님의 생각도 아니고, 그러니 성도에 거기에 신경을 쓸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다시 강조를 하지만, “구원이 되고, 안 되고” 라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이 하실 문제라는 것이다.

◈ 주님의 일은 반드시 정상적으로 !!

제가 어제 오후설교시간에 실명을 거론하면서 마지막으로 제시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한국교회가 어떻든 간에 주님이 보시기에는 모든 것이 정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믿어야만 하는데, 지금 한국교회가 어떻게 되든, 이단천지가 되던 말던 간에, 그러한 것은 전혀 우리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라는 말이다.

노아방주에 9명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해서 주님이 실망을 하시겠는가? 9명이 들어가면 안 되고, 8명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8명만 말이다. 10명이 오면 2명은 주님이 쫓아내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실 권한이 주님에게 있고, 주님의 일은 말씀대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코 차질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주님의 일은 차질이 전혀 없으니, 그것을 우리가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빌립보서 4장의 말씀처럼, 우리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말이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소유냐? 봉사냐?

저도 목사랍시고 목회를 하는데, 목사이기 때문에 항상 생기는 갈등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소유냐? 봉사냐?” 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봉사를 하다가도 힘이 생기게 되면, 그만 소유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이렇게 봉사를 하는데, 누가 알아주지 않는가?”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봉사가 아니라, 진짜 봉사, 즉 장님이 되고 마는데(ㅋㅋ), 물론 영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10년을 봉사했으면 그 다음날에도 봉사를 하면 되는데, 그런데 10년을 봉사한 것이 봉사가 아니라 그만 자기 실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느 날 봉사정신은 그만 사라지고, 이 ‘봉사’ 라는 빌미를 통해서, 즉 ‘섬겼다’ 라는 것이 모여서 구축이 되는데, 즉 힘의 집중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러면 자기만의 어떤 영역을 고수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가 수백 번을 강조했지만, 들을 때는 “아하, 그렇구나” 라고 하는데,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돌아서면 자기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전혀 알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이런 일들이 우리 가운데서도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 10년을 봉사해도 !!

우리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이 봉사하고 할 때는 정말 감사한데, 물론 내일 그 사람이 어떻게 나올지,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처음 오신 분이 주일학교 시간에 참석해서 다같이 박수를 쳐주고 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감격스럽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비록 자기 아이가 거기에 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정말로 고맙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의 마음속으로 드는 생각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도 일종의 봉사라고 보는 것인데, 왜냐하면 봉사는 강요나 강압에 의하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누구를 의식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터져 나오는 것이 봉사이니 말이다.

그러니 “아마 저 사람은 얼마 가지 않아서 이제 그만 둘거야” 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 정신, 그 첫 사랑이 유지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면서, 그런 마음이 계속해서 되기를 마음속으로 바랄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바라는 것도 이근호 목사 개인의 뜻이지, 주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말이다(ㅋㅋ).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자기가 봉사했다는 것이 하나의 권력으로 작용하게 될 때, 그게 얼마나 가슴 아픈지 모른다는 것이다. 만약에 자기가 10년 동안 교회에 나왔다면, 그 다음 주에 나오면서, 그렇게 10년 동안 나왔다는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렇게 한 것은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나왔기에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 다음 주에 교회에 나오지 않은 핑계를 대면서 하는 말이 “내가 10년 동안 나와주었는데, 왜 지난주에 안 나왔다고 닥달을 하는가?” 라고 한다면, 자기는 잊었다고 하지만 10년 동안 교회에 다닌 것이 그만 자기 소유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근거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주님이 요구하시는 봉사는?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봉사를 하게 하는데, 물론 처음에는 조금 쉬운 봉사를 하게 하다가, 나중에는 어떻게 하시는가? 제자들이 아무리 하려고 해도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봉사를 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인데, 그때 주님은 제자들과 이별을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그때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라고 찬송가를 부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들이 하는 짓이고 말이다. 제자들이 아무리 ‘헥헥’ 거리면서 예수님을 따라 가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경우에는 그만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를 하고 말았는데, 그렇게 삐쳐서 떨어지게 만들었는데, 바로 그때 주님은 잔인하게도 하시는 말씀이 “닭아, 니가 이제 울 때가 되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니가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나를 부인하리라” 라는 것이 분명히 말씀인데, 즉 그것이 말씀 속에 포함이 되어있으니, 이제는 닭만 족치면 된다는 것이다. 즉 “닭아, 이제는 울어라. 그래야 베드로와 만나지”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론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닭에 관한 것을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자기는 닭과 상관이 없다고 여겼기에 말이다. 즉 베드로에는 눈에 보이는 예수님이 중요하지, 보이는 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것을 사용하지만, 하지만 우리 자신과 상관없이 눈에 보이는 닭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말씀의 세계 속에서 우리가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해서, 즉 오직 예수님의 말씀성취의 영향력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되었음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고 “니가 나를 사랑하는가?” 라고 묻는 것이, 바로 그것이 새삼스럽게 “베드로야, 그 사랑을 실천하라” 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베드로가 주님의 사랑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인데,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치 서경수 목사님의 설교처럼, “이제는 니가 손을 벌리고 띠를 띠고, 마치 오징어처럼(?) 어정어정 거리면서 원치 않는 길로 잡혀갈 것이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마저도 무엇인가? 말씀성취이고, 곧 사랑이 된다는 것이다.

(요 21: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그럴 때 과연 베드로가 자기 소유에 집착하겠는가?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니들은 모르지?” 라는 식으로 말이다. 어림도 없는 이야기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는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라고 했는데, 여기에 그런 깊은 의미가 들어있다는 말이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봉사는, 성령의 역사로만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다시 요약해보면, 봉사는 누구의 강압에 의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자발적으로 스스로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 그것을 저는 성령의 역사라고 믿고 싶은데,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말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의 역사로 볼 때, 모든 공로가 봉사한 사람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사람이 자발적이고 기쁨으로 봉사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방금 말한 것처럼, 주일학생들이 찬송할 때 같이 참석을 해서 찬송을 하고, 또 박수도 같이 쳐주고 말이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참으로 떨리고 감격스러웠는데, “도대체 얼마 만에 느껴보는 봉사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성령께서 어떻게 하실까?” 라는, 즉 “그 사람에게 어떤 방면으로 또 다시 봉사를 하게 하실까?” 라는 것은, 그것은 하늘나라가 주님의 나라이지 우리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전적으로 주님에게 일임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봉사를 하면서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라는 것이 실감나고, 또한 금식을 하면서도 “금식을 한 적이 없는 것처럼 티내지 말라” 라고 하는 그 말씀이, 진짜 봉사를 하고 금식을 하는 사람에게만 이해가 되는데,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만이 말이다. 하지만 남을 의식하는, 즉 남에게 자기가 어떻게 비추어지는지,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 자들에게는 그 말씀 자체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진도를 나가겠는데, 교재 108페이지를 보자.

** 피조물 안에 있는 신의 능력을 긍정하게 되면, 이제 남은 사항은 인간 본인의 노력에 의해서 얼마나 깊고 넓게 신적인 속성을 파악해 내느냐는 정도의 차이뿐이다. 적게 발굴하면 지옥행이요, 많이 발굴하면 천국행이 된다.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만큼 모른다, 모자란다, 실수가 빈번하다, 오류가 많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겸손의 모습이 아니다. 더 높은 긍정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웅크리는 모습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인간들이 신보다 지혜가 뒤떨어진다는 그 사실 자체가 내재되어 있는 신을 향한 야심만 자극할 뿐이다. 이렇게 되면 그 어떤 인간이든 궁극적으로 악하지 않다. 왜냐하면 적극적으로 절대선으로 상승하는 그 와중에 놓여있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

◈ 언젠가는 먹고 말거야 - 치토스 !!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설명을 해보자면, 지금 비록 처져있지만 노선이 같은 노선이라고 하면, 앞서간 선배들, 즉 한경직 목사나 주기철 목사, 그리고 테레사 수녀와 같은 자들 말이다. 너무나 선을 많이 행해서 앞서 가 있기 때문에 도저히 뒤따라갈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비해서 이렇게 뒤쳐진 자들이 있는데, 비록 공부는 많이 했지만 뒤에 처져있는 김성수 목사와 같은 경우인데 말이다. 그러니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비록 그렇다고 해도, 같은 노선이라고 하면 긍정적으로 희망은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들이 앞서간 자리에 도달할 수가 있다는 것인데, 즉 따라잡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따라잡을 수 있다고 하면, 그것도 하나의 여운이고 미완료인데, 즉 희망이라는 말이다.

◈ 성화론의 특징은, ‘웅크림’ !!

바로 이런 사고방식을 지옥에 가는 인간들이 내포하고 있는데, 그러니 이러한 인간들이 봉사를 해도 그것은 봉사가 아니라 내부적인 자기 힘의 축적인데, 물론 그 힘의 축적은 실적의 축적으로 이어지고 말이다. “부족합니다. 모자랍니다. 저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건 전혀 겸손이 아니라 웅크리는 것이란 말이다. 즉 “언젠가는 한번 보자. 나도 그 자리에 갈 수 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일종의 노림수인데, 이것이 바로 성화론이란 말이다.

이제 성화론이 좀 이해를 하지 싶은데, 이 성화론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웅크리는 것인데, 즉 3보 전진을 위해서 2보 후퇴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성화론은 항상 미완료인데, 그러니 이런 성화론자들에게 “당신은 지금 죽습니다” 라고 하면 겁을 내는데, 왜냐하면 앞서 간 자들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자기는 어떻게 되는가?

지금 당장에 죽으면 자기가 천국에 갈지 못 갈지 모르는데, 그게 곧 미완료이고 말이다. 설령 천국에 간다고 해도 어떻게 가겠는가? 팬티바람으로 가서, 즉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천국에 가더라도 수준을 높여서 가야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벌거벗고 가게 된다면 부끄럽지 않느냐는 말이다.
 

◈ ‘칭의’ 다음에 ‘성화’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고 하니,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칭의(稱義) 다음에 성화(聖化)인데, 그러니 칭의로 구원을 받으면 부끄러운 구원이니, 성화를 해서 자기가 값이 좀 더 나가도록 품질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영화(榮華)의 단계에 들어가면, 그 영화의 영광스러운 레벨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왕 천국에 가는 것, 레벨이 좀 더 높은 곳에 가서 천국에서도 VVIP 대우를 받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인간들이 천국에 가겠는가? 오히려 그런 인간들을 위해서 지옥이 있는데 말이다. 어떻게 천국에 갈 자들에게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겠느냐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런 인간들을 받아줄 리가 만무한데, 그야말로 자기밖에 이기주의의 전형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나쁜 인간들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칭의’ 다음에 ‘성화’ 라고, 누가 그런 것을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제가 보기에는 분명히 루터와 칼빈이지 싶은데, 물론 그 이전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였고 말이다. 왜냐하면, 축적이 되니 말이다. 사실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칭의의 의미도 제대로 모른다고 볼 수 있는데, 만약에 칭의의 뜻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 뒤에 성화를 도저히 가져다 붙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칭의’ 라고 하는 것은, “나는 니가 한 것에 대해서 일체 묻지를 않겠다” 라는 의미인데, 즉 “내가 흘린 피에 근거해서 너에게 값없이 영생을 주겠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주님께서는 일체 묻지도 않겠다고 하는데, 건방지게 왜 인간들이 나서느냐는 말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자꾸만 쥐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재 109페이지에 나오는데, 한번 살펴보자.

** 성화론자들은 자기 안에 다음과 같은 신의 속성이 발휘되고 있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선, 본질, 이성, 생명, 예지, 지혜, 덕, 축복, 진리, 영원성, 혹은 위대함(권세), 사랑, 평화, 통일성, 완전성 등등, 그들은 이 속성들이 신에서 나왔다고 외부로 알리고 자아 스스로 다짐하려고 한다. 

여기 이렇게 “선, 본질, 이성, 생명, 예지, 지혜, 덕, 축복, 진리, 영원성, 혹은 위대함(권세), 사랑, 평화, 통일성, 완전성” 등과 같은 눈에 보이는 리스트가 나오는데, 여기서 ‘선’ 이라는 것은, 자기 속에 신의 속성이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신의 속성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있는 이런 용어들이 개혁주의 신학에 나오는데, 사실 이런 것을 빼고는 개혁주의 신학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먼저 ‘선(善)’에 대해서 !!

이것을 한번 따져보겠는데, 먼저 ‘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우리 손에 선이 있다고 하면 과연 그것이 선인가? 또한 우리 안에 본질이 있으면 그것이 본질인가? 우리의 몸은 말씀층(?)이 되어서 본질을 다 뜯어내어 버린다는 것이다. 양파껍질에 본질이 어디 있는가? 즉 양파껍질은 하나씩 다 뜯어내면 남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냥 껍질 덩어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뜯어내는 말씀 덩어리이지 본질이 없는데, 즉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없는데 본질을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뭔가 괜찮은 덩어리 하나가 있어서, 그것을 광을 내고 보물처럼 잘 간직하자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것은 건드려도 되는데, 자기 본질은 건드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화를 내고 말이다.

그런데 “본질을 버려라” 라고 하면, 그렇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조각 조각을 내어서 접어서 어디에 집어넣는가? 두 번 다시는 들키지 않는 곳에 숨기는데, 그 어떤 목사가 와도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하다가 들키고 말았는데, 즉 좋으신 하나님을 이야기하다가, 그만 그런 하나님은 없다고 말이다. 아무리 숨겨도 십자가 피 앞에서는 다 들통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본질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냥 흙이란 의미인데, 즉 우리 인간은 흙덩어리에 불과한 것이지 본질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본질이 없다고 했을 때,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너와 나의 구분이 없다”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는 나가 아니기 때문에, 나부터 우선이고 그 다음에 너다” 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너’와 ‘나’의 구분이 되지 않고 동등이 되어버리면, “나부터 먼저이다” 라고 하는, ‘나 위주’ 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왜 너부터 하면 안 되는가?” 라는 것이 ‘나’ 속에 포함이 되어있지 않는데, 즉 “왜 내가 먼저가 아니라, 저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하는가?” 라는 이유를 ‘나’에게서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됩니까? 

그러므로 가정에서 남편이나 마누라나 자식을 대할 때, 또한 교회에서 집사님이나 권사님을 대할 때, 그냥 보지 말고 반드시 예수님을 거쳐서 보자는 것이다. 이것도 수십 수백 번을 이야기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거쳐서 보게 되면, “저 양반은 왜 내 앞에서 얼쩡거리지? 주님이여, 왜 그런가요?” 라고, 그렇게 한 번씩 주님에게 물어보자는 것이다. 그 양반에게 곧 바로 시비를 걸지 말고 말이다.

또한 “왜 이번에는 피아노 반주자가 예배시간에 못 왔지?” 라고 주님에게 물어보자는 말이다. “이런 농땡이 반주자야!” 라고 하지 말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응답에 저쪽이 아니라 자기에게 떨어지는데, 즉 “니가 왜 신경을 쓰나?” 라고 말이다. 그러니 자꾸만 예수님에게 물어보자는 것이다. 자꾸만 남편 탓이나 자식 탓만 하지 말고 말이다.

◈ 그 다음 ‘이성(理性)’에 대해서 !!

그 다음에 ‘이성’이 나오는데, 이 이성은 무엇에 지는가? 감정에게 지게 되어있는데, 그런데도 이러한 이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무엇을 빼돌렸다는 말인가? 실제 자기의 분통은 그대로 숨겨놓고서 이성만 내세운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십자가 마을에 올라온 박윤진 성도의 글을 보자면, 거기에서 뭐라고 하는가? 사람들이 흔히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즉 “부모를 사랑한다” 라고 해놓고, 그 내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사랑하는데, 그런데 이 ‘억지’ 라는 것은 감정이지 이성이 아닌데, 그러니 “나는 억지로 아버지를 좋아하는 척을 합니다” 라고, 그렇게 남들은 속여도 본인은 전혀 속일 수가 없는데, 그러니 그것이 무슨 사랑이냐는 말이다.

물론 주님께서(?) 이성으로 “무엇을 하라” 라고 하면 우리는 그렇게 하는데, 즉 “안부 전화를 해라” 라고 하면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감정인데, 이 감정이 자기보다 더 크기 때문에, 감정을 어떻게 조절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축구도 별 것이 아니고, 야구도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하다가도, 한 골이 들어가면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돈에 대해서도, “돈은 일만 악의 뿌리이다” 라고 하면, 물론 이성적으로 수긍을 하는데, 하지만 자기 통장에 돈이 가득하게 들어있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른다는 것이다. “야, 내가 돈을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니, 돈이 이렇게 쌓이는 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속이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또 하나의 트릭을 쓰면, “나는 돈이 모이는 것을 기분 나빠해야 돼” 라고 한다면, 그렇게 해서 돈이 들어왔다고 하면, “아하, 감정적으로 기분 나빠하니 돈이 들어왔구나”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기분이 나쁘다고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얼마나 기분이 흐뭇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감정 앞에서는 자아라는 것이 어쩔 줄을 모르는데, 자아를 어떻게 배치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박윤진 성도의 글처럼, 어제의 자아가 오늘의 자아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오늘이 되면 누가 감정을 건드리게 되면 또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것이 없는 상태에서,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 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생명, 예지, 지혜 등등 !!

그 다음으로 ‘생명’을 살펴보면, 이 생명은 어디까지나 자기 위주의 생명인데, 즉 자기 목숨이 다하면 그것으로 그냥 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원래 생명이란 것은 예수님이 생명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자기 목숨과 상관이 있는지, 그러한 문제를 또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예지’를 살펴보면, 이 예지는 미리 앞으로 내다보는 지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지혜’가 나오는데, 일종의 아이디어라는 것이다. 아니 설교를 하면서 기발한 아이디어로 성경해석을 했다고 하면, 그것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즉 그것하고 구원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이다. 구원은 예수님 마음대로 인데 말이다.

그 다음이 ‘덕’ 인데, 그야말로 덕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일단 건강해야만 하는데, 즉 몸의 컨디션이 좋아야 한다는 말이다. 몸 컨디션이 좋으면, 덕을 하지 말라고 해도 덕이 나온다는 것이다. 거지가 와도 몸의 컨디션이 좋으면 천 원짜리가 아닌 만 원짜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몸이 아프면 어떻게 되는가? 돈은 고사하고 돌맹이가 날아간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축복, 진리, 영원성과 같은 것인데, 그리고 위대함(권세), 사랑, 평화, 통일성, 완전성과 같은 것은, 그것은 사실 우리 자신의 행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즉 우리의 본질과는 말이다. (조금 전에 본질이 없다고 했는데, ㅋㅋ) 그런데도 우리 인간들은 이러한 것을 자기 자신하고 엮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렇게 해서 신에 대한 해석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자기에 관한 해석이다. 신의 내막을 들추어내는 것은 곧 자아의 층을 들추어내는 작업이다. 신을 거론하지만, 실은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가 답한 셈이 된다. “나 어때?” “너 괜찮아. 훌륭해. 신의 말씀에 의하면 넌 거룩한 백성이야” “아, 흐뭇해” 자아도 모르면서 쉬지 않고 자아를 규정하기에 급급하다. 신의 말씀까지 동원하면서!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이 내리신 금지의 의미를 모른다. 두루마리 화장지의 제일 끝 부분을 힘차게 잡아당기면 당길수록 화장지의 몸통은 반작용에 의해 저만큼 더욱 멀어지는 이치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하면 할수록 어떠한가? 하나님에 대해서는 점점 더 멀어져 간다는 말이다. 마치 화장실에 있는 두루마리 화장지의 제일 끝 부분을 힘차게 잡아당기듯이 말이다. 그렇게 당기면 당길수록 어떻게 되는가? 화장지의 몸통은 반작용에 의해서 점점 더 멀어지는 이치와 같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들은 참으로 자기 안에 피어오르는 무한한 자기 긍정, 곧 자기 안에 신적인 요소가 자리잡고 있음을 무한하게 활용하기 위한 작업을 멈출 생각이 없다. 이러한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을 펼치고 연구하고 실습하고 실험해보는 것이다.

◈ 성경을 펼치고, 연구하고, 실습하고, 실험으로 !!

여기에 보면 ‘무한한 자기 긍정’ 이라는 게 나오는데, 이것을 제가 설명하기를, 수학에서 말하는 서열로서 설명했다는 것이다. 1,2,3,4,5…, 그렇게 해서 무한대로 간다는 말이다. 결국 이렇게 무한대로 한다는 것은, 그게 교재에 계속해서 나오는데, 성경을 펼치고 연구하고 실습하고 또한 실험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즉 아무튼 한번 해보자는 것인데, 그것이 맞는지 틀렸는지 말이다. 

흔히들 부흥사들이 뭐라고 하는가? “일단 믿고 바쳐봐. 참 답답하네. 바치면 복을 받아. 어린아이의 믿음처럼 한번 바쳐봐. 그렇게 해서도 안 되면 내가 책임을 질게”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 책임을 지는 부흥사는 단 한 사람도 없지만 말이다. 자기는 돈만 받고 도망가면 그것으로 그냥 끝이라는 말이다.

제가 여기서 법칙을 하나 이야기를 해드리겠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실험과 실습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 결과는 어떠한고 하니, 우리가 실험하고 실습한 그것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곳에서, 그야말로 난데없이 은혜와 복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은 바로 그런 덕분으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 전혀 예상치도 못한 먼 타인이 !!

우리는 매일같이 복을 주는 곳을 찾고, 또한 똑같은 복을 받기 위해서 똑같은 행동에 나서게 되는데, 하지만 절대로 그렇게 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는데 먼 타인이 도와주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봐야, 그분은 점점 더 도망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우리 속에서 주님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이다. 그래서 가끔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화로다. 이제는 망했구나!” 라고 할 수밖에는 없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손에 잡힐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잡히지 않는 그분이, 전혀 우리가 예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매일같이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인간은 본인의 형상을 따라 펼치게 되어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생식과 죽음의 기능으로만 인간에게 나타난다고 했다.

지금 우리가 궁금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나’의 몸에 어떤 식으로 해서 보이는 흔적을 남기는지, 그것이 궁금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까? 살아있다구요? 그러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나의 몸에, 어떤 보이는 흔적을 남깁니까?” 라고 묻는다면, 성경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이 곧 ‘생식’과 ‘죽음’ 이라는 것이다.
 
◈ ‘생식’과 ‘죽음’ !!

그러니 서로가 정반대인데, 생식은 무엇인고 하니, 생명의 창조라는 말이다. 그러면 죽음은 무엇인가? 그것을 아예 뭉개버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제 오전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과학은 집중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집중이 아니라, 쥐포를 뜯듯이 아예 해체를 하는 것, 그것이 더 큰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욕심이 많아서 해체하는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집중하는 것, 즉 “어느 것이 내 몫인가?” 라고 하는 집중에 정신이 팔려서, 평생동안 그렇게 집중할 수 있는 교육을 원하고, 그런 교육을 받은 힘으로 집중력을 발휘하면서 생긴 것이 바로 ‘나’가 되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집중을 하게 되면 인생이 그만 피곤하게 되는데, 먼저 끌어 모은다고 피곤하고, 또한 끌어 모은 것을 유지한다고 피곤하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유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욕심이 생겨서 더 끌어 모으려고 하니 피곤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뒷문을 닫아서 단속하면서도 앞문을 열어서 더 끌어 모으려고 하니 그야말로 힘이 든다는 것이다. 아무튼 일단 자기 것은 빠져나기면 안 되는데, 마치 펀드와도 똑같다는 것이다. 즉 일단 모은 것은 그대로 유지를 하면서도 더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빠져나가는 것은 전혀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이 세상에서 우리 선생님이 제일 예뻐 ??

그러니 ‘이 나’ 라는 것은 크면 커질수록 점점 더 커지는데, 물론 어린아이들은 이것이 작은데 말이다. 수련회에서 한 강의를 보니 기억이 나는데, 유치원생들은 자기 선생님이 최고인데, 그래서 선생님만 따라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작은데, 그러니 “이 세상에서 우리 선생님보다 예쁜 사람은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초등학교에 가면 초등학교 선생님이 좋은데, 그렇게 자꾸만 커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커진다는 것은 어린아이의 마음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어린아이 때는 모든 것이 고맙고 신비로운데, 하지만 어른이 되어 가면 고마운 것이 없어지고 누가 애를 썼다고 여기는고 하니, 자기가 그렇게 한 것으로, 그렇게 점점 더 자기에게 집중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도 일종의 중력의 법칙인데, 즉 블랙홀이란 말이다. 모든 것을 자기 쪽으로 빨아 당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인네들은 얼마나 고집이 센지 모르는데, 인간이 죽을 때 남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게 곧 ‘고집’ 이란 말이다. 태어날 때는 이름을 김겸손, 박온유, 이다윗이라고 해도, 죽을 때는 모두가 다 이름이 같은데, 김고집, 박고집, 이고집이라는 것이다. 최고집만 고집이 아니고 말이다(ㅋㅋ). 

그렇게 고집을 부릴 때는 자녀들은 그냥 “예, 예” 라고 하면 되는데, 즉 “내가 죽고 나면 이렇게 해라. 관은 이렇게 쓰고 말이다. 애들아, 잘 알겠지?” 라고 하면, “예, 예”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죽고 나서는 다 뒤집어버리면 그만이라는 말이다.

◈ 애들아, 내가 죽고 나면 !!

실제로 그런 일이 우리 집안에도 있었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을 뭐라고 했는고 하니, “내가 죽고 나면 너희 어머니를 모시는 집에서 유산을 2배로 가지고 간다” 라고 했는데, 그것을 순진무구하데도 어머님이 곧이곧대로 듣고는, 물론 순진한지는 몰라도 무구하지는 않는데 말이다. 그것을 비밀스럽게 자기 혼자 아는 곳에 간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어머님이 그것을 내어놓았는데, 그런데 고모가 그것을 보고는 ‘캥(?)’ 하면서 어디로 갔는고 하니, 법무사로 가지고 가서는 그 유언이 법적으로 아무런 효력이 없음을 증명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유산은 그렇게 개인적인 유언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골고루 자녀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자 동생이 화가 나서 ‘씩씩’ 거리고 분위기가 영 엉망이 되고 말았는데, 그때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사람의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이 있지 않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때부터 삐쳐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왜 자기의 그 억울함을 몰라주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게 억울한 일인가? 도대체 무엇이 억울하냐는 것이다.

그렇게 응집력인데, 즉 자기가 애를 썼다는 것이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신다고 애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애를 쓴 것이 아니라 재수가 없는 것인데, 즉 맏아들과 결혼한 재수 없음이란 말이다. 물론 요양원에 보내면 되지만, 과거에는 그런 것이 활성화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시대를 탓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것이 결코 남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 죽었더라, 죽었더라 !!

아무튼 이 생식과 죽음이라는 것이 성경에서 유일하게 표현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긴 흔적이란 것이다. 그래서 아담과 그 이후의 자식들은 어떠한가? “자식을 낳고 죽었더라. 또 낳고 죽었더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창세기 5장의 기본이란 말이다.

그런 원리가 밑바닥에 깔려있는데, 그러니 위에서 백 날을 까불어도 밑에 있는 원리는 변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 니가 잘났나? 잘났다구? 아이를 많이 낳았어? 그래, 내가 죽일게”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죽었더라’ 라는 게 우리 힘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그런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죽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이 마귀의 특징인데, 왜냐하면 자기가 죽는 것이 바로 자기가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장착이 된, 그 누구에게나 다 적용이 되는 확정된 하나님의 사랑의 법칙이라는 말이다. 죽는다는 것, 즉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이다” 라는 것이 말이다.

그 법칙은 지금도 우리에게 실시되고 있는데, 우리 눈가나 이마의 주름이 그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매일같이 늙어가고 있는데,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다. “주여, 오늘도 이만큼 늙었군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것이 두 가지인데, 그것이 곧 생식과 죽음이란 말이다. “태어났냐? 그러면 이제 내가 죽어줄게” 라고 하는, 즉 “아이쿠, 이제 태어났어요? 옹아리도 하고 참으로 예쁘네. 그래, 내가 죽여줄게”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그러면 예수님의 출생은?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출생은 무엇인고 하니, 다른 사람들의 출생은 아담의 자손으로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지만, 예수님의 출생은 그게 아니라, “인간은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런 죽음에서 살아난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과정이 곧 예수님의 출생부터 해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재림까지 그 모든 것이란 말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 가는 길이었고, 우리는 그 길을 비켜서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과 그 모든 사람들은 그 주의 길을 예비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주님이 그 길을 가시면, 우리는 그 길가에 늘어서서 주님이 가신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이 누구인가?”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 3: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 삭개오의 경우에 !!

마치 어부가 잡은 물고기를 칼로 그 배를 가르면 ‘쫙’ 갈라지듯이, 우리는 그렇게 갈라져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런 갈라지는 광경을 삭개오는 키가 작아서 나무에 올라가서 보았는데, 그러면 이 삭개오가 나무위로 올라가면서 자기의 작은 키와 같은, 그런 자기 입장을 생각했겠는가? 그것이 또한 우리의 모습인데 말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 키가 아니라, “지금 내 앞에 누가 지나가는가?” 라는 것인데, 그때 하나님의 아들이 지나가면 그것이 곧 우리의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야, 삭개오야 내랴와. 오늘 너희 집에 구원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눅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그러니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는가?” 라는 것인데, 제가 주일오후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유리알’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게 유리알 속에 들어가 있으면, 외부에서 보는 눈이 있고 또 내부에서 보는 눈이 있는데, 이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외부에서 말하는 죽은 자와 내부에서 말하는 죽은 자가 다르다는 말이다. 주님께서 유리알을 발로 박차고 나오면, 내부의 세계와 내부의 세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지 말고, 우리 앞에 지나가시는 주님을 바라보자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111페이지를 보자.

** ‘여자에게서 남자인 아들 나왔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은 여전히 인류역사에 안에 살아 흐르고 있음을 보이고, 이 흐름의 끝자락에 메시아가 여자가 아니라 ‘여자의 아들’로서의 남자로 등장해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계 12:5)

(계 12: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계 12: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계 12: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계 12:4)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계 12: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

이것이 참 어려운 대목인데, 여자가 아들을 낳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무엇이 어려우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남자가 아들을 낳는 경우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성경에서는 어려운데, 왜 그런고 하니, 요한계시록 12장 5절에서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 존재하지를 않는고 하니, 남자가 없다는 것이다. 즉 남자가 없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들이란 말이다.

그러면 이 아들은 어떻게 되는가? 남자가 없는 낳은 아들이 되는데, 그러면 무엇과 구별이 되는가? 기존의 남자에게서 태어난 모든 아들의 세계와는 격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주 특별한 영역이 되는데,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라는 것이 말이다.

물론 마귀도 이것을 알고 있는데, 그러니 마귀도 지혜롭고 똑똑한데, 또한 영악하고 말이다. 마귀가 이렇게 여자와 낳은 아들과 남자가 낳은 아들을 구분을 할 줄 안다는 것이다. 물론 아담 속에 있는 아들들은 마귀의 밥인데, 하지만 유일하게 여자가 낳은 아들은 마귀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 12장에 나타난 진짜 현실은?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마귀가 누구와 싸우는가? 여자가 낳은 아들과 싸운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싸움은 바로 이 싸움인데, 잘난 자기를 무시한다고 싸우지 말고, 여자가 낳은 아들이 어떤 영향력을 피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서 혜택을 입었는지, 바로 그러한 싸움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 생식과 죽음이라는 확실한 증거로서, 이것은 공자도 부처도 부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왜 죽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유도 모르면서도 주님이 주신 흔적은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태어났다. 그리고 죽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은 욥도 마찬가지인데, 욥이 뭐라고 했는가? “차라리 태어나게 말았으면” 라고 했는데, 하지만 태어남과 죽음은 하나님의 소관이지, 태어난 우리 소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난 이후에 우리 자신이 태어난 것을 알았기에 말이다.

그러니 이 성경말씀은 전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진짜 현실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공연히 “믿자, 믿자” 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서 믿는 것이 전혀 아닌데, 이것은 우리가 믿던 믿지 않던 간에 엄연한 현실이라는 말이다.

◈ 과연 누가 착각하는가?

그렇게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 사실이고 또한 죽는 것이 분명한 하나의 사실이고 현실이라고 한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다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도 역시 하나의 엄연한 현실이란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믿는 것이 착각한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 중심의 세계에서, 그런 환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다가 낙심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즉 “아하, 내가 착각하고 있었구나. 절에 나갔으면 이런 소리를 듣지 않았을 텐데, 괜히 교회에 나가서는 말이야” 라고 말이다. 그러한 엉뚱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절에 나가던 교회에 나가던,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성경을 보게 되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서 깨닫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특별히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나 더 하는 것이 아닌데,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112페이지를 살펴보자.

** 하나님은 ‘예수님’이라는 남자(아담)를 보내셔서 그에 의해서 여자를 만들게 하셨다. 이것이 교회이다. 즉 ‘그 남자에서 나온 신부’이다.

◈ 남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여자가 곧 ‘교회’ !!

그렇다면 여자가 누구를 낳았는가? 남자를 낳았는데, 즉 하나님은 여자를 통해서 남자를 낳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가 또 무엇을 만드는가? 여자를 만든다는 말이다. 여자가 남자를 낳는 것이 출생인데, 그리고 그 출생은 아담의 법칙을 따라서 죽음으로 이어지는데, 그런데 그 죽음 이후에 여자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여자는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분에 의해서 만들어진 여자이기 때문에, 그 여자를 두 글자로 ‘교회’ 라고 한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작업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인데, 즉 “죽어라. 내가 살려줄게” 라는 것이 곧 교회라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이란 남자가 여자라는 교회를 만들 때, 거기에 필요한 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교재 표지에 있듯이 ‘피’ 라는 것이다. 즉 피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이렇게 여자가 남자를 낳았을 때, 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이 여자가 낳은 남자를 어떻게 하는가? 여자가 낳았다는 이유로 인해서 핍박을 한다는 것이다. “자기만 남자가? 우리는 남자가 아니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여자가 낳은 남자로 인해서, 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이런 일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남자에 관련해서만 일을 하시고, 또한 그 남자에게서 나온 여자만 이 남자가 들어간 천국에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수님 중심이란 말이다. 그러면 기존의 여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모두가 다 여자가 아니라, 배척을 받아야만 되는 이 세상의 일반적인 남자들에게 포함이 된다는 것이다. 즉 아담의 갈비뼈이니, 남자의 일부라는 말이다.

◈ 성경에서 말하는 ‘남자’와 ‘여자’ !!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를 어떻게 이야기하는고 하니, 이번에 하는 주례사의 내용인데 말이다. 여자는 남자가 없으면 그냥 사람인데, 나이가 60이든 70이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나이 75살에 연애를 하게 되면, 그 순간 여자가 된다는 것이다. 즉 “나는 당신의 여자가 되고 싶어!” 라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의 경우에 “나는 당신의 남자가 되고 싶어!” 라는 소리는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남자는 여자 앞에다 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 서니 말이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10장에 나오는 서열인데, 즉 여자의 머리 위에 남자, 그리고 그 남자의 머리 위에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 위에는 하나님이고 말이다. 그러니 남자가 그리스도 앞에서 여자가 될 경우에만 그 남자와 함께 있는 여자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자와 함께 있는 여자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므로 여자들은 종용히 집에 가서 남자에게 배우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남자는 어떤 남자인가? 여자인 남자, 즉 복음을 아는 남자라는 것이다. 술 처먹고 개망나니 짓을 하는 남자가 아니고 말이다. 그런 남자에게는 몽둥이가 최고라는 것이다.

(딤전 2:11)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남자, 즉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교회’ 라는 이름의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그냥 남자는 어떻게 살아도 결국 망하는 남자이기 때문에, 그런 남자에게는 복종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 인간은 어떻게 살아도 망해 !!

어제 그것을 설교하면서 제가 은혜를 받은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바로 이 “인간은 어떻게 살아도 망한다” 라는 것인데, 제 아무리 검사가 되고 의사가 되어도 말이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반드시 망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박지성이든, 김연아이든, 그런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누가 뭐라고 해도 결국은 망한다는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것이 곧 교회이다. 즉 ‘그 남자에서 나온 신부’이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나온 참 하와가 된다. 이로서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서 머리가 되시고, 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늘과 땅을 잇는 중보자가 되게 하셨다.

(엡 5: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엡 5: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엡 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 5: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여기 32절에 보면 “이 비밀이 크도다” 라고 하는데, 여기서 비밀이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는, 즉 하나님께서 알려주시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게 여기 에베소서 5장에서 말하는 비밀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런데 인간이라는 하나님의 형상은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즉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속성은 생식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결국 죽는 절차까지 남아있다.

◈ 우리 몸은 흔적을 보여주는 껍데기 !!

그러니 우리 몸은 껍데기라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은 죽어서 다시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껍데기인 우리들을 사용한 것뿐이란 말이다. 그래서 마리아의 경우에, 그녀는 요셉의 아내로서 살았는데, 그때 마리아의 몸은 껍데기인데, 물론 예수님도 마리아의 유전자를 입었고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된 육체이니 말이다.

하지만 마리아는 결국 어떻게 되는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녀가 죽을 때 그렇게 요란하게 죽는 것도 아닌데, 전혀 유명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오히려 살아있을 때도 예수님으로부터 쿠사리(?)나 듣는데, 즉 “여자여, 아직 내 때가 되지 않았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한 것이 바로 마리아가 보여주는 하나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즉 “아하, 그 누구라도 태어났으면 죽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가 되구나” 라고 하는 말이다. 아무리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라고 해도 그렇다는 말이다.

◈ 그러면 왜 하나님의 형상이 흙으로?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되는고 하니, “하나님의 형상은 왜 흙이 되어야만 하는가?” 라는 것인데, 즉 인간 본성이 왜 죽어야 하느냐는 말이다.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의 차이점” 이란 것인데, 그것이 드디어 시작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도 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만드신 줄로 압니다. 그 뜻이 바로 “예수님이 누구인가?”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 줄 아는데, 우리 속에 주님의 영이 함께 있어서, 이제는 오직 주님 덕분에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감사를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09,28 오후 6시에 마침.

                                                               흙에도 열이 오르지 무진장 아프네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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