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 죄인 중의 괴수(병든 자)만의 외침의 고백

건강한 자(의인)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외침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눅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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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가복음 1장 40-44절
제목 : 제사장의 제물
듣기 : 음성 , 보기 : 동영상



제사장의 제물

2008년 3월 30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40-44

(막 1:40)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막 1: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께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막 1:42)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막 1:43)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막 1:44)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마가복음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시면서 제자들을 뽑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뽑으시는 이유가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누가 누구를 낚는다는 말은 제 3자가 들으면 참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낚여야 살고 낚이지 아니하면 죽는다는 논리가 단단하게 깔려있는 주장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다시 말해 낚이지 그냥 살면 그 자체로 이미 멸망은 당연하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낚이기 싫은 사람은 이 말만 듣고 있어도 인격 모독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런 말들이 듣기 싫어 평생 교회를 버리기로 마음 먹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5장에서 보면, 설사 사람이 죽어서 무덤에 가더라도 그 무덤까지 다 열리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심판받는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이러니 고집스럽게 예수님을 버리더라도 멀리가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통치 범위에서 벗어날 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아시기 때문에 제자들을 통해서 낚는 방식으로 구원하시기를 원했습니다. 문제는 버림받는 자가 아니라 낚인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께서 어떤 식으로 낚느냐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그 낚는 방식과 내용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람 낚음을 생각못하고 그저 자신이 횡재하고 행운을 챙기는데 급급합니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는 전문이라고 하니, 그 예수님의 능력으로 인해 제 것이 혜택입기를 원해서 예수님에 대한 좋은 소문이 돌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큰 오산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 이유는, 인간이 평소에 힘을 끌어모으는 방식을 예수님이 사용해주셔서 본인들이 힘이 부쳐 미쳐 얻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대신 얻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을 다오”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추구하고 얻고자 했지만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는 마음 두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이든 누구든 이용할대로 이용해먹겠다는 의식 뿐이었습니다. 즉 나에게 이익이 되면 그만이지 않느냐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누구신가 하는 점입니다.

병을 고쳐주실 때, 물론 그저 주시는 은혜로 고쳐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그저 준다는 은혜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를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아품과 희생과 괴롬과 슬픔, 고난 같은 것들은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저 얻어 챙기만 그만이다는 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문둥병을 고쳐주실 때, 예수님은 단순히 병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모세 율법에 나와있는 법과 견주어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속성을 지니시고 평소에 사람들에게 병도 고쳐주시고 귀신을 추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 율법에는 무슨 내용이 나옵니까?

레위기 14장에 보면, 문둥병자가 병이 깔끔하게 낫게 되면, 제사장에 가서 다음과 같은 절차를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겁니다. 즉 아직 살아있는 두 마리의 새를 잡아다가 한 새는 흐르는 강물에서 피를 내면서 죽게 하고, 나머지 한 마리의 새의 날개 쭉지에서는 방금 죽었던 그 새에서 나온 피를 발라서 저 먼 푸른 창공에 훨훨 날려보내는 의식입니다.

분명이 두 마리의 새는 잡혔을 때 살아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마리의 새는 하나님의 법에 걸려들어서 불쌍하게 피 흘리면서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죽은 자의 피는 나머지 한 마리의 새에게 자유를 제공합니다. 바로 이 제물과 예수님의 병고침이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억울하게 대신 죽은 새는 예수님을 뜻하고, 그 죽은 새의 피 덕분에 산 새는 문둥병자를 뜻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람 낚은 원리가 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낚인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은 죽을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즉 예수님의 피 없이는 절대로 이 세상에서 구원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압니다. 레위기 12장에 보면, 인간이 어느 정도로 죄인인가가 근원적으로 잘 나와있습니다.

여인이 아기를 배태해서 낳게 되면 자궁에서 몸 밖까지 경로를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막 출산을 마친 여인에게 죄를 씻을 수 있는 제사를 바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 이유는, 방금 그 여인은 자신의 잠복되어 있던 죄로 인해 또 죄악을 품을 자식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여인인자 죽어야 될 죄인을 생산하는 기계요 공장과는 같습니다. 자꾸만 하나님 보시기에 더럽기만 한 자식만 자꾸 생산되는 겁니다.

해산한 어머니에게 더러움을 씻을 수 있는 의식을 행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원래부터 여인이 죽을 죄인이었음을 분명히 해두기 위함입니다.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또 세상을 죄로 물들 자식을 낳은 것입니다. 죽음이 여인을 장악하고 있음은 여인이 해산하고 난 뒤, 자식이 통과한 그 경로를 위하여 죄씻음의 의식을 행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문이라고 했습니다. 문이란 일종의 차단막입니다. 문만 열면 이 인간에서는 상상도 못할 빛이 쏟아집니다. 그렇게 되면 이 인간 세계에서 나름대로 구분지어놓은 선과 악의 기분은 다 색깔을 잃습니다. 왜냐하면 어두움 속에서는 모두가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문을 통과한 빛을 받게 되면 그것이 곧 그 사람의 운명이 됩니다. 지상에서 창녀니 수녀 하는 구분은 다 무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빛을 받은 자와 용서를 받지 못한 자의 차이날 뿐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용서받은 것이 없는 자는 자신의 자존심 이외에 달리 내세울 것이 없는 쪽으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종이학을 천 번을 접어야 실제 살아있는 학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받지 못한 자들에 하는 집념이요 오기입니다. 양이 많아지면 질적으로 도약한다는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용서받은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내보이고 비칠 것은 우리 날개 쭉지에 묻혀있는 피뿐입니다. 피로 구원받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를 낚으려 오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하시고, 그 피로서 낚였음에 다른 어떤 자신의 행함도 자랑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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