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5. 쓴 잔(현실) 앞에서 나타나야만 하는 보편적 단독성(비현실)로 나누심

본문 : 요 18: 11-28

오늘부터 글로써 공부를 할까 합니다.

지난 시간에 34강 유일한 현실인 아버지 께서 주신 잔 이라는 제목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도통 인간이 원하는 일치성을 모두 비켜가는 식입니다.
요15장부터 “하나 됨” 이라는 의미를 그렇게 강조를 해 놓고선
너무 너무 철저하게 모순 되는
철저하게 아버지로부터의 버림받음을 유일한 하나됨이라는 현실로써 증거합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주신 잔 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미리 알 듯이 그 쓴 잔, 그 고통의 잔, 그 십자가의 죽음이 유일한 현실이요
아버지(하나님)와 아들(예수님)은 하나 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이 하나 됨이라는 유일한 현실에 반대되는 것은
모조리 비현실이라는 겁니다.

현실이라는 기준이 낯설게 설정이 됨으로써 인해 비현실이라는 우상이 설정이 됩니다.

우상은 곧 버림받지 않는 모습입니다. 고난의 잔을 거부하는 것이 비현실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고난의 잔을 기준으로 해서 세상을 봅시다.
누구나 봐도 세상은 그야말로 우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의 잔을 당연히 거부할테니깐요.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현대의 교회를 보자 라는 것입니다.
교회 중에 이미 막장 교회는 세상 보다 더 악하기에 어린아이도 다 아는 바입니다.

소위 대중에게 건전하고 정통적이고 이 악하고 타락한 교회 속에서 그래도 거룩함을 유지할려는 그런 교회를 보자 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항상 그 당시의 가장 의로운 자를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늘 개혁할려고 하고 늘 회개를 할려고 하며 늘 말씀에 순종할려는 그 자를 향해서 말이죠.

왜 그런 자들이 독사의 자식들이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바뀐 기준에 의하지 않고 자기들이 포착한 자기들의 기준에 완벽했기에 독사의 자식들인 겁니다.

놀랍게도 그 바뀐 기준에 의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바뀌 기준이 기준으로 서지 못하도록 가장 격렬하게 반항하며 거부한다는 점입니다.

차라리 그 기준이 아예 없었다면 차라리 받아들였을 것인데
(차라리 소경이였다면 고침을 받을텐데 본다고 하니 소경인 겁니다. 모든 것을 판단할줄 아는 생생하게 보는 눈뜬 소경을 예수님은 새롭게 악마의 자식으로 새로 창조한 겁니다.)

자기들의 기준을 놓으면 그 기준에 의해 정죄 받게 되니 놓지를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새 기준은 예수님 자신 마저도 쓴 잔으로써 죄인으로 오신 몸을 못 밖는 기준입니다.

정말 정말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기준입니다. 그 유일한 현실에 예수님은 그 잔을 마십니다.

버린다는 그 기준에 예수님 조차도 버림받는 기준입니다.

자 그러면 당연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주변인물들은 그런 예수님이 버림받는다는 유일한 현실을 거부하고 버림받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지키고 사수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버리는 유일한 현실이 벌어지든 말든 어쨌든 예수님을 나의 손으로 지켜 내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을 지키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은 진짜로 진짜로 선하거나 의롭거나 사랑이거나 믿음의 마음일까요?

그럼 반대로 예수님이 저 원수들의 손에 넘어 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네 네 유일한 현실이 쓴잔을 마시는거 맞습니다. 그러니 얼른 체포하세요 라고 방관하듯이 행동하는 것이 옳다는 논리가 되지 않는가? 라는 주장은 과연 옳을까요?

문제는 인간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하나 되었다는 그 현실에 소외 당한 입장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모릅니다.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님이 버림받지 않도록 지키겠다 라고 지켜본들 지켜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또 반대로 예수님이 버림받는 유일한 현실에 나는 빠질란다 라고 하늘의 뜻에 순응한다고 여겨본들 유일한 현실에 개입이 되질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랬든 저랬든 소외 당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소외 당한 흔적들이 우리의 몸에 상처처럼 홈이 패이도록 하시는 현실입니다. 넌 소외 당함 이라고 이마에 표가 매겨지듯이 표가 찍힌 흔적이 있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지키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든 상관 없이 말입니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자면 구약의 불뱀 사건을 통해서 보면 됩니다.

늘 불평만을 하는 이스라엘에게 불뱀에 물리도록 하여서 죽을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겁니다.

물론 그 무리 중에 불평을 아주 적극적으로 하는 자도 있고 중간 정도 그리고 아주 소극적으로 하는 자도 있습니다.

또 그런 불평하는 자만 있는게 아닙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순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하는 자도 있고 중간 정도 그리고 아주 소극적으로 하는 자도 있을겁니다.

문제는 막상 불뱀에게 물렸을때에 그 상황이 이전처럼 계속 주장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막상 불뱀에게 물렸을때에 반전 되어 주장할 수도 있고 계속 그대로 주장하는 이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불뱀의 의미를 보편적 단독성이 목적입니다.
그런 여러 다양한 것들을 한 대 묶어버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불평을 했든 순응을 했든 상관없이 불뱀에게 모조리 다 물리도록 하여서
예수님과 하나님의 하나 됨 곧 유일한 현실인 고난의 잔(버림받음) 앞에 철저한 소외인
보편적 단독자로써 그 고난의 잔에 소외 당한자로 서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보편적 단독자 라는 표현은 응축된 점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즉 커튼(묵시 또는 계시) 열어 재끼고 커튼 뒤에 응축된 점이 오게 되면
인간이 아무리 다양한 형태로 자신만의 사적인 개성을 갖추어도
묵시(응축된 점)에 의해서 모두다 하나의 형태로 모아지게 된다. 응축된 점(비계시=짐승)이 된다.

결국 예수님과 예수님이 마실 잔이 현실로써 다가오면
인간이 아무리 팔아 먹고 또는 그 잔을 못 마시도록 거부해도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계시에 반응을 나타내어야 할 비계시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실이 왔기에 비현실의 자리에 놓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 가 계시로써 샛별처럼 뜨게 되면
아무리 애굽나라 왕인 바로 왕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라고 연관성이 없다고 우겨도

반드시 그 샛별과 같은 어린양의 피를 드러내기 위해
보편적 단독자로 애굽왕을 세워 반드시 필히 바로왕과 애굽군사로 인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강퍅케 해서라도 말이다.

(출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출 14:8, 개역)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출 14:9, 개역)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 친데 미치니라』
(출 14:10, 개역)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출 14:11, 개역)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출 14:12, 개역)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출 14:13, 개역)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출 14:14, 개역)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5, 개역)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출 14:16, 개역)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출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출 14:18, 개역)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여기서 웃기는 것이 이스라엘은 그럼 뭐냐 라는 것이다.

분명 담대하게 나아갔다는 말은 믿음으로 나아갔는데 8절
뒤에 죽음이 따라오게 되니 이제는 원망하게 된다. 11절 12절
비로소 부르짖음에 형성 되니까 10절
구원을 보라고 한다. 13절 그러자 구원자의 등장이 나타날것이며 곧 구원당할자는 자신의 자기구원에 소외 이다. 그리고 그 구원자를 가만히 서서 구경하여 보라는 것이다.

그 구원자의 구원 일에 인간은 소외 당했다. 그 소외 당함이 구원 당함이다.

그리고 반드시 또 다른 한 쪽은 강퍅케 만들어 두 패로 갈라버리겠다는 것이다.

이 창조의 일에 인간은 철저하게 소외 당했다. 그 소외 당함이 보편적 단독성에 놓이는 것이다.

한쪽은 긍휼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도리어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그릇이 되고
또 한쪽은 강퍅케 해서 반드시 그 강퍅케 된 결과로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것이다.

여기 북치고 장구치시는 주님의 혼자만의 일에 (계시) 인간은 그저 긍휼의 그릇으로 만들어짐을 당할 뿐이고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어 짐을 당할 뿐이다.

이것이 토기장이의 권한이다. 따질 수가 없다. 즉 소외다.

그렇기에 계시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보편적 단독성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릇이 될 수 밖에 없다.
토기장이의 기쁨에 의해 동원되는 그릇으로 보편화 되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베드로는 그 그릇 당함에 놓여져 있을 뿐인데 자기 사적인 생각을 좋은 뜻으로 여긴냥 개입한다. 소외 당해야 할 입장이다는 것을 보여줄 수 밖에 없는데 반대로 행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검을 도로 넣으라고 하신다. 그리고 말고의 귀를 붙여 버린다.

너는 말고의 귀를 짜를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바울이 사단의 가시를 뽑아달라고 빼내달라고 할 권리가 없다는 취지이다. 아무리 세 번식 기도해도 소용없다. 도리어 낮추시고자 하심을 알게 되어 약함에 강한 주님을 보게 되고 은혜가 족함을 보게 된다.

약한 자로써 약함을 담은 그릇의 보편단독자가 되고

강퍅한 자로써 강함을 담아 진노의 그릇으로써 보편적 단독자가 됨으로써

한쪽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다른 한쪽은 완악한자의 형상을 숨어있는 형상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보편적 단독성의 자리를 마련하러 죽음의 자리를 마련하고자 십자가로 돌진하신다. 마치 너의 가면을 벗기겠다 라는 취지다. 너의 가면을 벗겨보니 긍휼을 창세전에 입은자였고 또 너의 가면을 벗겨보니 창세전에 버림받기로 작정된자였다 라는 것을 규정짖는 자리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니 베드로가 막을 입장이 못 된다. 창조를 막다니 말이 안되죠. 몰라서 그런 것 뿐이다.
그러나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린다 라는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알 길이 없는 것이다. 다행히 주님은 그런 허물을 나중에는 다 잊어버리는 삭제케 하기 위해 다시 찾아오신다. 반드시 죽었다가 살아난 모습으로 베드로의 죽음의 자리를 마련하고서 말이다.

바로 이런 내용들을 다 담아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죽음의 자리다.

그 부정이 우리를 살린다.
(그러나 마귀와 마귀와 합한자는 적극적인 방해를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

잃어버림 당치 않게 하기 위한 잃어버림 당하신다. 그 부정의 자리를 대신 치른 것이다.
그 대신 치르심을 아는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그 자리로 우리를 몰아가시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죽음 보다 강한 사랑은 죽음의 자리에 가 봐야 안다. 그래야 그 차이를 알 것이 아닌가?


이제 오늘 본문을 살펴보자.

요 18: 12부터 보면

(요 18:12, 개역)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요 18:13, 개역)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요 18:14, 개역)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이 부분에서 방금 은혜를 받는다.
왜 그런고 하니?

저들의 완악한 마음을 주님께서 응축된 점으로 형성시켰다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수님을 잡아 결박시키는 안나스 라는 자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이라는 것이다.

마치 인간들은 자신만의 역사를 형성하고 그 역사가 자신들의 뜻에 움직이는 듯이 여긴다. 그 뜻에 신을 부적처럼 끌어당긴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결혼과 인간관계를 역는 그 모든 것이 십자가라는 죽음을 위해서 미리 각본된 응축된 점으로써 결혼한 줄을 모를 것이다. 힘과 권력을 쥐고자 결혼했다고 여기지만 아니다. 도리어 예수님의 죽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결혼한 것이다.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또 이 말을 하는 가야바가 이 말을 과연하고 싶어서 하게 된 것일까?

그렇다고 그들의 그런 모습이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심판의 근거가 되도록 뒤짚어 씌움을 당하는 것이다. 어쩔수 없이 빼도박도 못하도록 진노의 그릇 역할을 반드시 하도록 진노의 그릇 다움에서 못 벗아난다는 뜻이다. 일거수일투족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유일한 현실을 드러내는것에 모두다 하나의 응축된 점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보편적 단독성이라고 한다.

(요 18:15, 개역)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요 18:16, 개역)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요 18:17, 개역)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요 18:18, 개역)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요 18:19, 개역)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요 18:2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요 18:21, 개역)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자 그럼 여기서 베드로 또한 응축된 점이어야 한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의 예수님과의 관계를 자기 힘으로 여전히 잇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릇이 자기가 원하는 그릇이 되지 못하도록 그 그릇은 그저 망상일 뿐이고 그 망상임을 알려주는데 있어서 주님은 의도적으로 문지기 여종을 배치해 두셨다. 이런 자들을 왜 베드로 주변에 깔아 놓고 또 구지 이런 베드로를 수치로 몰아넣는 이야기를 언급해야만 하는가 라는 점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몰고온 십자가 라는 자리와 연관성이 있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부지런히 베드로를 몰고 가신다. 베드로는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그릇이 아닌 예수님의 그릇으로 되기 위해 토기장이에게 굽혀야 한다.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자신이 진노의 그릇이 되기를 원할까?
베드로가 멋진 긍휼의 그릇이 되길 원하지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긍휼의 그릇이 되는 그 수치를 평생안고 가는 그릇이 되고 싶어할까? 평생 씹을 자들이 한 둘이가 아닐텐데?

(요 18:22, 개역)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요 18:2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요 18:24, 개역)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지금 장면을 영화처럼 스크린으로 남겨보면 한번은 베드로 이야기로 클로우접 했다가
다시 대제사장 가야바로 화면을 옮겼다가 이렇게 두 장면을 서로 번갈아 가면서 교차 시키고 있다.

이것은 주님이 그냥 창조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낮과 밤을 나누시듯이 창조를 하신다는 취지다. 부지런히 긍휼히 입을 자를 긍휼케 하고자 몰아가시고 강퍅케 하실자를 강퍅케 하시고자 몰아가신다. 베드로는 도리어 자신의 수치가 다 들추임 당하는 식으로 몰린다. 그러나 저들 가야바는 자신이 백성에게 권고한 대로 자신의 뜻대로 되는 식으로 몰아붙이신다.

참 신기하다.

(요 18:25, 개역)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요 18:26, 개역)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요 18:27, 개역)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누가 이것을 집단 세례로 보이겠는가?
그러나 아브라함 자손이 되는 것 보다 돌 삐 보다 더 못한 사물로써 취급당하는 그 부정의 자리에 몰려야 예수님을 비로소 제대로 보게 된다.

자신을 위해 피 흘리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부지런히 베드로를 닭 보다 더 못 한 자리로 몰아간다.

그곳이 차마 성령이 예비하신 할례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 죽음의 자리 곧 사랑방 자리인줄 누가 알았겠는가?


다시 가야바로 화면을 옮기면

(요 18:28, 현대어) 『[빌라도 앞에 서시다;마27:1-2,막15:1-5,눅23:1-5] 가야바 앞에서 심문이 끝났을 때는 다음 날 이른 아침이었다. 그 다음에 예수께서는 로마 총독 관저로 끌려가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관저 안으로 들어가 직접 예수를 고소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면 불결해져서 유월절 양을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참 신기한게 유월절이라는 양을 먹기 위한 저들의 지키고자 하는 법이 등장한다.

그 법과 법 사이의 틈에 대제사장 가야바 무리들은 빌라도 라는 외부의 법을 이용한다. 자신들의 손에 피를 뭍힐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의 이런 계획은 자신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 같지만 정작 그들은 낚인 것이다.

그 응축된 점에 빌라도 까지 개입토록 하여서 모든 인간은 십자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에 놓였다 라는 것을 주님이 증거하고 계신다.

가야바에서 빌라도로 옮기는 것은 곧 보편적단독자로써
하나의 바벨탑을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 수직적인 하늘을 향한 죄악을
넘어뜨림으로써 수평적으로 퍼트려서 어디서든 바벨탑의 사고방식에서 못 벗어나는 것과 같다.

마치 다니엘서에서의 느부갓네살을 짐승화 시키기는 방식과 그들의 금신상을 넘어뜨림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의 역사를 그 금신상의 범주에서 못벗어나도록 응축된 점으로 만드는 보편적 단독화 시키는 것과 같다.

이렇게 육의 소욕이 제대로 구체화 되었을때에
그 차이가 나는 성령의 소욕으로써 유일한 현실인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 커튼을 열고 그 잔을 중심으로써 숨어있던 응축된 점인 육의 본성인 우상이 그 악마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왜 인간을 상대하지 않고 마귀만을 상대하시는가?

예수님 자신이 마실 잔인 아버지께서 주신 잔 만이 유일한 현실이고 나머지 그 모든 것은 소외된 허구 라는 것을 알리시고자 하심이다.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 주님은 우리 속에 있는 허구를 보여주십니다. 어제의 예수도 허구요, 어제의 나도 허구입니다. 그 허구를 조작하여서 예수랍시고 만나고자 했고 그런 가능성들로만 꿈꾸는 허구로만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로지 제대로 된 유일한 현실인 고난의 잔으로써 우리의 모든 비현실의 허상들을 보여주십니다.

그런 허상들을 붙잡고 그것에 목숨 걸고 그것에 정의와 진리라고 여기며
그것에 열심을 다하는 우리 자체가 허상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허상을 십자가에 못 밖고자 죽음의 자리를 마련하신 예수님을 오늘 새롭게 믿게 하여 주옵소서.

나를 십자가에 못밖고자 오신 예수님을 믿는 그 불가능성을 거두지 마소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음주에는 사도행전 공부하겠습니다. 매주 한 편씩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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