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7. 십자가의 어리석음(진리가 너를 진리에 소외 시킨 것이 진리이다.)

본문 : 요 18: 33-40

(요 18:33, 개역)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요 18:3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요 18:35, 개역)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요 18:36,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 18:37, 개역)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요 18:38, 개역)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요 18:39, 개역)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요 18:40, 개역)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지난 시간에 주님의 일하심은 죽으시면서 까지 베드로의 가면을 벗기시는데 일관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다 이루시고자 하는 십자가의 피와 관련이 있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창조 곧 천지창조인 잉여와 감사와 은혜는 바로 이렇게 주님께서 발가벗기시고자 하는 형상에게만 해당되는 새피조물입니다.

새피조물이란 이전 것이 분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 것이 지나갔다는 겁니다.
지나갔다는 것은 베드로에게서 나올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나온 겁니다.

마치 바울이 예수 밖에서 결코 정죄함 뿐인 율법 뒤에 숨어서 가장 악마짖을 했습니다.
그랬던 예수 밖에 정죄함 뿐인 정죄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전형적인 바울이

바울에게서가 아닌 예수님께서 예수 안으로 끌여들여서 예수님에게서난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의 사랑으로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 안 결코 정죄없음 과 예수 밖 정죄함 뿐임의 차이를

전형적인 원수를 가지고서 차이를 드러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피조물은 이전 것과 이전 것이 지나간것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것을 변화 곧 창조 전과 창조 후 곧 손 대심과 손 대지 않으심의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시간에 살펴본바로 새피조물이 아닌 자는 누굴까요?
가야바입니다.

주님이 손을 대지 않기에 안식이라는 은혜가 없기에 자아 스스로 그 은혜를 지킬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지킬려는 은혜를 누가 깹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소경으로 만들어서 다시 눈 뜨게 할려는 은혜를 베풀려고 하니까?
누가 그런 안식의 손길을 막고자 합니까? 가야바 무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헌피조물입니다. 즉 고착화 되었다는 겁니다.
이 고착화 된 것을 비현실이라고 했고 변화된 새피조물을 현실이라고 했습니다.

즉 현실이란 딱딱하고 고착화된 고정화 된 것을 깨뜨리는 겁니다.

그리고 흐물흐물 물컹물컹한 새피조물로써 변화시키는 겁니다. 곧 빈자리입니다. 잉여자리

그러나 그 고착화 된 것을 더 확대된 것이 바로 빌라도입니다.

제가 비현실이 의외로 좀 황당하다 라고 표현했는데 이유인즉슨
깨끗하고 청결하고 예의적이고 거룩한 것을 추구한다 라는 의미에서 황당하다 라고 했습니다.

즉 우상은 항상 거룩을 앞장세웁니다. 더러움을 감추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하게 보이면 우상이라고 의심해 볼만 합니다.
얼마나 거룩이 없으면 자기가 자기 스스로 거룩을 몸 중심으로 치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비현실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도리어 거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거룩에 의해 다루어 지기 때문에
늘 거룩에 의해 발가벗김 당하는 겁니다. 곧 수치 요 더러움 들추임 당함입니다.

그것을 살아있는 거룩에 의한 변화입니다.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빌라도가 중간에 끼인 상황이 벌어집니다.

여기서 빌라도가 끝까지 일관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곧 이 더러운 정치게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자기가 스스로 알리바이를 형성하는 겁니다.

고 예수님과 빌라도의 차이를 우리는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또는 빌라도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과 비교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먼저 가아뱌로부터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범죄인 인수를 받습니다.
이유는 법 이라는 정당성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법적으로 행하겠다는 행함입니다.
왜냐하면 법으로 재판해서 사형시킬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고는 싶고, 법의 힘은 빌려야 하겠고, 어쩔수 없이 넘겨서 법적으로 실행하겠다는 취지입니다. 비현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면 현실은 그럼 우리가 이해가 될까요? 안됩니다. 이렇게 비현실을 깔아놓은 이유가 진짜 현실은 예수님이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현실은 비현실인 우상성을 모두 끄집어내고 들추어내고 그 차이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인간의 이런 악마성을 다 들어내지 못하는 현실은 가짜 현실 곧 비현실 입니다.

(요 18:31, 개역)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요 18:32, 개역)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여기에 빌라도가 그런 의도를 알고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풀어주고자 하는 취지로 심문합니다.
진정으로 타인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함이 아닌
자신이 이 애매한 정치게임에 말려들지 않고자 하는 처세술입니다.
이것이 빌라도에게서는 유일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 현실이 바로 예수님에 의해서 깨어집니다. 곧 우상이요 비현실임이 말이죠.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마침 딱 떨어지게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잡게 되어 예수님을 시험 합니다.

그들에게서는 이것이 유일한 현실입니다. 대세가 자꾸 예수님에게 기울어질까봐 그저 그 기울어지는 분위기를 자신들에게로 돌리는데 정신팔려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라는 거룩을 쥔 선민으로써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은 여인을 어떻게 하는지 율법적인지 (거룩인지) 예수님을 시험 합니다.

(요 8:3, 개역)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요 8:4, 개역)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요 8:5, 개역)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것은 비현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율법을 쥘 수 있거나 율법을 지킬수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더 나아가 율법을 좀더 우세하게 지키면 남을 정죄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예수 밖에는 정죄함 뿐이다는 겁니다.

고맙게도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그 참현실인 예수 밖에는 정죄 뿐이다 라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자 저들 말대로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할까요?
당연하죠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죠.
그래서 돌을 던지라고 합니다. 단 죄가 없는 자만

아무도 못 던집니다. 이유는 예수 밖에는 다 정죄 받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정죄 받아 마땅한 인간이 다른 사람이 율법을 어겼다고 정죄하거나 더 깊게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혔다 하더라도 정죄할 수 없다는 겁니다.

아니다 정죄 해야만 한다 라고 자신만만하면 돌을 던지라고 예수님은 말씀 하십니다.

땅에 뭔가를 쓰자 돌을 들었던 자들이 다 물러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여인에게 묻습니다.

(요 8:10, 개역)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 개역)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정죄하는 자가 없다고 하니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도 또 토를 다는 놈들은 예수님이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했으니 죄짖지 말아야 한다고 또 행함을 강조합니다. 바로 그 따위 사고방식이 바로 죄를 또 짖는 사고방식입니다.

예수님 께서 정죄 문제를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 정죄 문제 때문에 예수님은 현실 곧 발가벗겨짐을 당하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달려가십니다.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피조물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또 죄 짖지 말라 라는 명령어를 지키게 되면 육체에 따라 판단을 나서는 또 다른 육체가 생겨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 중에는 그런 판단할 자가 없고 도리어 딱 두 인물 뿐이다 라고 합니다.

(요 8:12, 개역)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3, 개역)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요 8:1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요 8:15, 개역)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요 8:16, 개역)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요 8:17, 개역)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요 8:18, 개역)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그 두 사람이 세상에나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위해 증거할 뿐이다 라고 모든 인간을 배제 시켜버렸습니다. 창조처럼 인간은 그 창조에 배제 당할 뿐이고 다 이룬 창조를 그저 안식만을 누릴 뿐입니다. 이 여인처럼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판단과 창조 자체에 관여하고자 합니다.
대상이 되고자 하지 않고 놀랍게도 대상을 삼고자 하다 보니 결국은 예수님을 대상 삼아버립니다.

예수님에 의해 대상으로 여김 당하지 않는 것은 모두 비현실이요 우상입니다. 곧 탐심입니다.

빌라도가 이 탐심 곧 비현실에 사로잡혀서 소외 된 줄도 모르고 예수님을 대상으로 삼아버렸습니다.

빌라도 : 너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 : 그 말은 너가 스스로 하는 말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그렇게 너에게 한 말이냐?

라도 되래 묻습니다.

빌라도 :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너를 넘긴 것은 너의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다. 도대체 무슨 짖을 했길래?

빌라도는 가장 현실적으로 보통 재판에서 가장 법적으로만 판단하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이쪽 저쪽 이야기를 다 들어보고 합리적인 정당한 판단만 내리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고소꺼리에 합당한 죄를 찾고 만약 죄가 없으면 풀어주면 그만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상입니다. 빌라도의 이런 재판에 대하는 태도가 잘못이 아니라 문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재판권을 쥐고 있다는 겁니다. 배제 당하고 소외 당해야할 입장인줄 모르고 여전히 임금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상좌에 앉아있고 그것을 대중들은 의식해서 예수님을 고소한 겁니다. 왜 상좌에 앉은 재판할 권이 있다고 여긴 것일까요? 이것이 비현실인 우상 곧 탐심입니다. 탐심이 단순히 욕심 부리는게 아닙니다. 죄를 모른다는 자체가 탐심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보고도 도리어 묻고 있습니다. 왕이냐고? 그래서 예수님이 니 말이냐 다른 사람 말이냐 라고 되래 묻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알려준 것은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6장
즉 그 고백의 자리에 너가 앉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혈율이 아니요 라고 했으면 혈육이 왜 아닌지 그 뒤에 내용이 나타납니다. 그 빈자리에 덮썩 앉게 됩니다. 그래서 지적을 받습니다. 홀라당 벗김 당합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얼마나 베드로는 억울할까요?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둘의 관계에 늘 소외 당해야만 하는 일이 벌어짐 앞에서
왜 그 둘 사이의 자리에 앉으면 안되는지 지적을 당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임금의 자리에서 덮썩 앉아서 임금에게 도리어 재판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재판하고 있습니다.

현실 앞에서 비현실의 차이를 명확하게 고맙게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감도 못잡습니다. 그저 자기 주변의 보이는 것만을 볼 뿐입니다.
그러니 억울하게 보일지 몰라도 정작 하늘에서 보게 된다면 자신이 지금 건방지게 어떤 자리에 앉아있는지 상상도 못할 겁니다.
반역의 자리입니다.

이것이 선악의 자리요 우상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저 자기 살길 자기 변호 자신의 처신만을 가장 적절하게 추구할 뿐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생뚱맞은 대답을 하십니다.

(요 18:36,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의 왕이냐 라는 질문을 역이용해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그 나라 그 왕에 대해서 증거하시면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요 18:37, 개역)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그럼 당연히 빌라도처럼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물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요 18:38, 개역)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요 18:39, 개역)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요 18:40, 개역)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자 진리가 뭘까요?

여기서 마태복음을 빌려서 살펴보면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은 한마디도 아무런 답변이 없습니다. 마 27장.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다시는 아무 말씀도 대답치 않은 것에 빌라도가 기이히 여겼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15장.

놀랍게도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줄려고 적극적인 개입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집니다. 이유는 예수님을 디기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가 위협 당했기 때문입니다. 자리를 사수 하기 위해서 그냥 대충 넘어갈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악마입니다. 지난 시간에 놀랍게도 거룩을 가장 거룩 답게 쥐고 있는 것이 악마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거룩은커녕 더럽기 짝이 없는 자임을 들추임 당해야 하는데
절대로 그럴수 없어서 더더욱 거룩으로 포장하고 거룩으로 자아를 휘감아 버려야 하는 겁니다.

어쩔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죄 받을 수 밖에 없는 예수 밖의 특징입니다.

이런 소외와 배제에 인간은 끝까지 참여와 일치성과 개입을 주장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손으로 예수님을 재판하는 왕의 자리 까지 앉게 되는 겁니다.
재판관의 자리에서 내려 앉아 도리어 재판 당해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런 답이 없습니다. 넌 배제 당했다는 겁니다.

흔히 우리는 주님의 일에 우리 자신을 자꾸 개입할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의 일은 배제 당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곧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우리를 어떻게 배제 시키는지 그 배제하심에 배제당하는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정과 욕심과 육을 십자가에 못 밖히는 겁니다.

(요 19:6, 개역)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요 19:7, 개역)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요 19:8, 개역)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요 19:9, 개역)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요 19:10, 개역)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요 19:1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요 19:12, 개역)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요 19:13, 개역)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요 19:14, 개역)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요 19:15, 개역)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요 19:16, 개역)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요 19:17, 개역)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요 19:18, 개역)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요 19:19, 개역)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빌라도는 괴로워하고 두려워 하게 됩니다. 일이 간단하지 않고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말려들지 않겠다는 것이 더욱더 말려들게 되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빌라도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평가를 들으면서 과연 그 평가가 맞는가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편에 서서 무조건 빌라도를 미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빌라도 보다 더욱더 중립에 서고자 한 사람이 어디있는가 하는 점에서
거의 그런 성의도 살펴봄도 없이 매도 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그것 또한 악마성이라고 봅니다. 마치 예수님의 편에 선 냥 느껴질 것 같지요?
아닙니다.

아무리 예수님 편에 서서 빌라도를 욕하고 나쁜 놈이라고 판단해도
역시나 빌라도와 같은 사고방식인 겁니다.

즉 진리에 소외 당하고 배제 당하고 그 소외 된 자리 배제 된 자리에서 진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진리에 개입해서 적극적으로 같은 편에 섰다고 여긴다는 자체가 지난 주 처럼 악마적인 우상의 사고방식이다 라는 겁니다.

빌라도는 자신을 빼돌릴려고 빠질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개입케 됩니다.

간단합니다. 자신의 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자리가 없었다면 빠질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자리가 있습니다. 선악의 자리 곧 하나님과 같이 된 자리입니다. 왕 자리입니다.

바로 이 일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왕 자리 하나님의 자리 거들낼려고

오늘 아주 인상깊게 본 영화가 있습니다.
[아고라] Agora.2009.720p.BluRay.x264-BestHD 라는 영화인데
AD 4세기 로마의 알렉산드리아의 아고라 라는 지역에서 벌어진 일을 다룬 내용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기독교도나 이교도나 그리고 유대교나
저마다 자신들의 신이 맞다고 하면서 정작 악마짖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종교란 마약입니다. 마약 먹은 인간들의 실상은 감춘채 거룩 뒤에서 법 뒤에서 더더욱 그 악마짖을 정당화 하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영화 속에서 인간의 지식을 상징하는 도서관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서
그 도서관은 인간의 지식의 결합이요 그것은 뇌라는 중심부를 말해주며 그 뇌를 마치 선악나무처럼 풍성한 나무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결국 인간의 지식은 포착하기입니다. 신을 포착하고 별을 포착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움직인다는 겁니다. 움직이면 포착이 되질 않습니다.
포착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빠져나가버리기 때문입니다.
자리란 오히려 포착이 불가능함을 말해주는데 정작 인간들은 자리를 고정화 시킵니다.
실수로 앉다가 어 가만히 보니 여기 이 자리는 내가 앉을 자리가 아닌데 왜 내가 여기 앉는거지 라고 얼른 피하는 것인데 (이것이 성령의 은사입니다.)
인간은 실수로 앉다가 누가 자신을 주목하게 되니 그냥 눌러 앉게 되어버립니다.(이것이 선악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의 주인이 와도 피해줄려는 마음이 추호도 생기질 않는 겁니다.

포착하고자 하는 꿈을 늘 깨뜨리는 겁니다. 둘의 다른 사상이 비록 지금은 충돌이 되나 언젠가는 하나가 되는 꿈을 꿉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일치성으로 하나가 되면 아름답게 될 줄로 여기나 오히려 썩어서 악취로 고이게 되는 겁니다. 왜냐구요? 포착했기 때문입니다.

그 영화에서 기독교의 신이나 유대인의 신이나 이교도의 신이나? 다 한결같이 인간의 손에 포착 당하는 신들입니다.

그런 신들은 곧 인간 자신의 투시로 투영으로 나타난 것이기에
인간은 타인을 잡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놈들끼리 충돌하기에 포착은커녕 더더욱 달아납니다.

어떤 사상도 일치성을 이룰 사상이 없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은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둘 만의 일이고 그 일에 인간은 소외 당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포착할 생각 마라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개입 합니다. 끝까지 간섭합니다.
진리에 대한 해석을 죽어도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진리에 눈 떠 버린 이상 진리에 적극적인 개입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인간에게 포착 당하고 해석 당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아니기에 인간들이 기껏 하는 짖이 유일한 해석의 통합과 포착의 통합은 힘과 권력을 쥐는 겁니다. 즉 인간의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비진리만 잡습니다. 곧 선악입니다.

인간 자체는 비진리 자체로 태어난 겁니다. 선악덩어리.

거기에 대한 결핍인 진리를 쫏는 이유는 소외 당했음을 모르고 죄인인줄도 모르고
도리어 재판의 자리에 앉아 진리를 심판하고자 함이 목적입니다.

인간이 진리를 찾는 이유는 진리를 죽이고 재판하고 심판하고자 함입니다.

그것을 아고라 라는 영화를 보면서 느꼈습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넘기우는 빌라도의 모습도 어쩔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의 악마성을 표출하는데만 일관했지
진리에는 배제 되었음을 예수님이 제대로 증거하심이 맞습니다.

차라리 솔직하게 저는 진리를 미워하는 자입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자리에 내려 앉아 무릎 꿇는 것이 솔직한 겁니다.

그러나 약속하신 성령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이런 일을 벌리시기 위해 오신 겁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왔고
바로 그런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다고 하신 겁니다.

(요 6:39, 개역)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여기에 이 아들의 소원에 인간은 소외 당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안믿겨지기에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적극개입했던 그 빌라도는 마땅히 죄가 더 큰 겁니다.

(요 19:10, 개역)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요 19:1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요 19:12, 개역)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건방지게 예수님을 놓아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소외 당했다고 전혀 못 여기고 도리어 적극적인 개입에 자신만만합니다.

권세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꼴에 그것도 권세라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마다 자기 자리가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것도 꼴에 자리 라고? 권세 라고?

저는 꼴에 자기가 목사 이다 라고 주장하는자를 많이 봤습니다.

꼴에 목사 라고?

정작 사도는 자신의 사도 됨을 전혀 사도 같지도 않은 죽음의 자리 매맞는 자리로써 증거했는데

단 한번도 목사 다운 은사(빈자리 비켜야하는 자리)도 모르는 것들이 꼴에 목사 라는 자리는 죽어도 못 포기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흉내야 귀신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악마성을 차라리 발가벗김 당하는게 그리스도의 형상 입니다.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우리는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우리는 예수님을 빌라도처럼 재판하고 있습니다.
시험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뭐 달라 그러면 더 잘 믿겠다 라고 흥정을 하고 계약을 합니다.
그만큼 포착하고픈 겁니다. 손아귀에 잡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포착해봤자 우리는 예수님을 죽일 뿐입니다.

매일 매일 죽고 매일 매일 예수 안에서 산다는 말은

매일 매일 예수님을 죽이는 나의 살인의지를 보게 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도 안되는 철저한 모순이요 불가능한 용서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이미 받았음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리신 그 피로써 만이 고백케 됩니다.

차라리 내 기도 안 들어주고 내 해석에 해석 당하지 않고
내가 잡을려고 하고 찾고자 하는 것에 전혀 포착 당하지 않는 그런 주님이

너무 너무 고마워 할때에

감사함이 넘칠겁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감사는 어차피 피곤합니다.

그러나 감사가 아무리 봐도 감사할꺼리도 없고 환경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외부에서 감사를 퍼붓는다는 우리는 감사치 않고서는 못배기는 겁니다.

기도치 않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사랑치 않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안믿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믿기 싫어도 말입니다.

(즉 인간은 십자가(용서) 라는 묵시의 응축점에
반대편에 선 죄인의 자리에 응축이 됩니다. 이것을 다 이룬 겁니다.
이 이룬 것을 확대 시키는 것이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분류하는 작업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 우리는 예수님을 늘 죽입니다.
믿는다 라고 하면서도 정작 그런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살인 뿐입니다.
저마다 둘을 하나도 만드는 일치성을 추구하자 하면서도 정작 힘과 권세 앞에서는 살인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악마성을 감사하게도 십자가가 들추어 내주시는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인간은 악마입니다. 그런 악마라고 비로소 알려준 그 십자가가 새로 새피조물로 창조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 밖에는 정죄함 뿐입니다. 자기자리를 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런 우리의 자리를 늘 빼앗김 당하는 은혜를 불쌍히 여겨주심을 주님의 죽음을 봄으로써 어두운 눈 뜨게 하여 주시옵소서.

왜 향유를 부은 여인이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앞당겨 보여줬는지 유일한 우리의 자리임을 증거한 믿음의 자리인지를 알게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음 시간 미리 제목을 생각해 보면
매 맞는 진리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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