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6. 깨끗함으로 숨어버리는 우상(비현실) vs 더러움을 드러내는 화목제물의 피

본문 : 요 18: 28-32

(요 18:27, 개역)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요 18:28, 개역)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요 18:29, 개역)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요 18:30,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 18:31, 개역)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요 18:32, 개역)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요 18:33, 개역)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지난 시간에 제목을 고난의 잔(현실) 앞에서 드러나는 우상 이라고 헸습니다.
곧 우상이란 비현실인데 그 비현실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 비현실의 내막은 의외로 황당합니다.

극도의 깨끗함과 청결과 생생한 살아있음의 정당성 찾기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닭 세 번 우는 사건에 이어 예수님을 가야바에게 끌고가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도 살펴 봤지만
이 가야바 라는 인물이 베드로의 닭 우는 사건과 반드시 역어지는 방식으로 말씀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대제사장 가야바 라는 인물의 배경 속에서 베드로의 닭 우는 사건을 주님은 의도적으로 깔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지난 여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마을 여름 수련회 다니엘 스가랴 강의입니다.

하이라이트 였던 8강 9강 쯤에 한 점에서 또 다른 점으로써
아니네요 지금 확인해 보니 마지막 강의에 나오네요

스가랴에 의하면 사방에 성도를 다 흩어서 그 성도를 공격하는 비언약의 세력이 있고 그 비언약 세력을 유발케 해서 천사들이 활동을 순이 주동합니다. 주님의 성도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그 비언약 세력을 심판합니다.
흩어진 성도들을 전우주의 성전화를 이루고 ‘순’이 목자로써 흩어진 성도를 모으지 않고 그 흩어진 그 상태로써 성전으로써 미끼작용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흩어진 상태 그대로 성도를 괴롭힌 자들을 모을 필요 없이 그 흩어진 상태로 전 지역의 지옥화인 겁니다.
(마귀의 터전)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베드로는 미끼 역할을 한 겁니다. 어떤 면에서죠? 더러운 죄를 지적 당하는 겁니다.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성도란 자기 속에 더러운 것을 지적 당하는 겁니다.
이것이 성전입니다.

성령의 전은 늘 겉사람은 후패 당하고 속사람은 새롭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회개나 금식이나 눈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그래서 먹고 마시니까 신하들이 정신차리라고 한 겁니다. 다윗은 알았습니다. 자기 속에 성령이 없음을, 그래서 비로소 성령을 구합니다. 정직한 영을 구합니다. 즉 구한다 라는 것은 없다 무능하다를 전제로 한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반대로 악령의 전은
자기 속에 더러운 것을 지적 받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축척해온 깨끗함을 끄집어 내어서 자기가 자기를 변호하는데 바쁘다는 겁니다.
이것을 미쁘다의 반대말인 시험 이라고 늘 자주 공부속에 강조 했습니다.

즉 자기의 깨끗함을 비로소 위기때에 쌓아온 마일리지처럼 활용을 한다는 것은
반대로 더러움을 지적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뜻입니다. 상대적으로 말이죠.

베드로가 닭 우는 사건으로써 지적을 받게 되는 것이
의도적으로 가야바 라는 인물을 배경으로 깔고써 벌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수련회 강의를 그런 의도로 말한 겁니다.

결국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감당 못할 사랑을 퍼붓는 방식이 자기쪽에서 사랑을 하겠다는 모든 마일리지를 닭 울음 앞에서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다윗언약은 바로 사랑의 터 위에서 형성된 상한심령의 작품이지 다윗의 작품이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다윗처럼 사랑이 동일하게 주어지는 겁니다.

자 그러면 상대적으로 가야바와 가야바를 잇는 힘으로 응축이 된 자들의 성향들은 어떨까요?

마치 출애굽 할때에 애굽왕을 건드리게 되니 상대적인 우상으로 자신들의 변호하고 방어막을 형성합니다.

그런 인간이라는 최종적인 우상을 보호하는 그 힘의 시스템을 하나 하나 허물어 버리는 것이 10가지 재앙입니다. 그 열은 그들의 우상들입니다.

누가 우상을 더러운 것으로 인간의 보호막으로 형성하겠습니까?

인간이 신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들로만 형성합니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것들이 어떤 겁니까?

다산이라는 능력 생명탄생의 풍요로움
물 이라는 생명수
태양이라는 빛

등등 이 모든 것은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주는 선악의 요소들입니다.

출애굽 때에도 그랬듯이

지금 베드로와 상대적인 가야바 그리고 그 가야바의 배경을 잇는 빌라도 역시

선악적인 요소로 자신을 방어하기에 급급합니다.

즉 깨끗함으로 방어막을 형성하고 자신에게 피를 묻히지 않는 방향으로 남의 손을 빌려서 피를 흘리는 방식입니다.

참 이상하죠?

자신에게는 정작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 남의 손을 빌려서 피 흘리는 방식은 뭘까요?

십자가는 바로 이런 인간의 보편적공동성(응축된 점)을 끄집어내어야만 하는 겁니다.

결국 십자가는 베드로처럼 더러운 죄악과 저주로 돌진하는데 있어서
모든 인간은 그 십자가 앞에서 드러나는 양상은 바로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겁니다.

만약 십자가가 더러운 죄악으로 달음박질 하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인간은 유별스럽게 극도록 깨끗함을 다 끄집어낼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매 순간 순간 마다 법이란 가끔식 자신이 이용해 먹는 순간으로써 동원하지
1초 1초 마다 법과 깨끗함을 다 소진해 버리면 정작 자신의 위기에 순간에는 더 이상 방어할 법과 거룩이 없어지게 되니 당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왜 인간들이 거룩한 법과 율법의 명령어를 지키는 것일까요?
딱 하나입니다. 자기 방어입니다.

즉 남을 사랑하는 율법의 완성이 아니라 율법의 미완료 상태로 고수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완료자가 나타날까봐 두렵고 그 완료자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죽을려는 입장에 놓인 겁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도 그러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갚겠다고 복수극을 펼치시는 겁니다.

가야바나 빌라도나 유대인 이나 심지어 제자들이나 모든 육의 반응은 딱 하나입니다.
응축된 점으로써 십자가를 대하는 자리에 놓이게 된 겁니다.

한 마디로 원수성 우상성입니다.

그러나 그 원수성은 그들 스스로는 몰라야 됩니다.
또 모르도록 자신들의 깨끗함에 자신을 똘똘똘 모든 마일리지 붕대로 소비시키면서 감아야 하는 겁니다.

베드로는 다행히도 남을 7번도 용서 못하는 마일리지가 참으로 짧은 붕대로 금방 탄로가 났고 붕대 감을 꺼리도 닭에게 다 빼앗긴 입장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힘이든? 교회의 힘이든? 직분의 힘이든? 역사의 힘이든?
또는 빌라도 처럼 그 자리에 앉기 까지의 정치적인 힘이든? 국가의 힘이든?

자신을 보호하고 구원할 수 있는 마일리지를 많이 쌓으면 쌓을수록 그 붕대로 자신을 감기에 충분히 충분히 자신도 흡족할 정도로 많게 될 겁니다.

실지로 그들은 십자가가 자신들의 그 무화과 나뭇잎을 벗기는데 있어서
발가벗겨지기는커녕 예수님을 도리어 육체의 껍데기를 벗기는데 성공했습니다.

발가벗겨지는 할례를 마음판의 할례 당하는 십자가를 거부하는데 성공한 겁니다.

베드로만 바보처럼 비천한 저 닭보다 못한 자로써 홀라당 벗김을 당한 겁니다.


자 요한복음 18장 1절부터 가야바 무리들이 요 18장 28절에 종교적인 실제적인 법적효력이 없는 곳이(종교재판) 아니라 실제 국가적인 법적 효력이 되는 로마 총독의 관정으로 갑니다.

(요 18:28, 쉬운)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 그들은 예수님을 데리고 가야바의 집에서 로마 총독의 관저로 갔습니다. 때는 새벽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몸을 더럽히지 않고 유월절 음식을 먹으려고 총독의 관저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요 18:29, 쉬운) 『그래서 빌라도가 직접 밖으로 나와 유대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무슨 죄목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는 거요?"』
(요 18:30, 쉬운)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이 범죄자가 아니라면 총독님께 그를 넘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 18:31, 쉬운)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직접 그를 붙잡아다가 당신들의 법대로 재판하시오."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요 18:32, 쉬운) 『이로써 예수님께서 자신이 어떠한 죽음을 맞을 것인지에 관해 전에 하셨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상대방을 죄인으로 몰기 위해서는 명분과 죄목을 찾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벌리신 사건에서는 늘 그랬지만
인간들의 선악에 잡힐 꺼리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저들은 극도의 자신의 깨끗함 마일리지를 소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자기 방어에 더욱더 충실해 지는 겁니다.

죄목이 될만한 것을 찾을 수 없고
그렇다고 딱히 명분이 될만한 것은 없으니

결국 종교를 떠나서 인간이라면 같은 공통점인 악 바로 선악이라는 공통점에서 답을 찾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딱 하나입니다.

자신들이 똑같이 로마인과 같이 생각하는 것 그것에 대한 두려움 그거 하나입니다.

곧 대중 다수의 혼돈입니다.

그냥 이유없이 무조건 이 사람 예수 하나만 죽여달라는 요청에 거부하면 이유없이 데모를 밀어붙여서 로마 정치인들이 싫어하는 혼돈을 야기 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로마 쪽도 만만치 않습니다.
저들 유대인들이 명분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죄목도 없는 무조건 이유없이 밀어붙이는 대중혼돈의 방식에 로마 쪽은 저들과 상관없이 로마 스스로를 방어하는 그 방어의 명분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빌라도는 우리가 재판할 어떤 근거도 없다 라고 데리고 가서 너거들 끼리 해결하라는 겁니다.

결국 빌라도도 유대인들의 정치술에 말려들지 않고 위기를 피합니다.

양쪽다 법을 찾아야 자신을 변호하고 자기를 지키는데 서로서로가 성공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예수님입니다.

그들이 이런 기회를 주면 본인 예수님 또한 법 뒤에 숨고 법의 변호를 받아서
자신의 깨끗한 무죄를 입증할만한 법을 내세우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그것을 말하지 않고

32절에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이상하죠

모두다 법 뒤에 숨어서 자기의 깨끗함을 내세울때에
인간이니 별수 없으니 그냥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가 의도한 바였다 라고

인간들이 깨끗하게 마무리 지은 것을

십자가는 뒤엎어버리는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합니다.

왜 인고 하니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가야바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의 유월절 지키기와
예수님이 유월절의 참 의미를 보여주는 유월절 배경을 깔아서 자신이 친히 제물 되시는 방식과의 차이성을 극과 극으로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여기에 이방인인 로마인도 즉 모든 인간도 이 유월절에 모든 인간의 대표자로써 동참케 됩니다. 십자가 라는 화목제물의 사건에 모두다 말린 셈입니다.

왜죠? 말씀에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와 그 배경으로써의 유대인
그리고 총독 빌라도와 그 배경이 되는 로마 이방인

그들이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상상도 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그렇게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대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또 예수님을 3번 부인한 베드로 또한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말씀에 응하게 하기 위한 예수님이 벌리신 자작극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누구는 미워하기로 작정 되었고
누구는 사랑하기로 작정된 이유이기에

말씀에 응하게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창조입니다. 그 창조에는 반드시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이 있습니다. 두 그릇이 나타났다면 창조의 현장이다는 겁니다. 창조가 지나간 흔적으로서 나타난 말씀의 결과물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이든 그리고 가야바와 빌라도 무리이든 여기 말씀에 응하게 하려 함 앞에 소외 당하는 입장입니다.

그들이 이런 결과를 만들고 싶어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도리어 말씀 스스로가 창조하는 것에 철저하게 창조 당하는 소외된 입장이다 라는 겁니다.

선택권이 일체 없고 자유의지 또한 일체 없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 또한 고집이 만만치 않습니다.

베드로가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너는 나를 부인할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에 거부하는 방식이 자신의 선악인 바로 깨끗함입니다.

저는 절대로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다른사람은 몰라도 나는 절대로 배신 안 때리겠다고 합니다.

바로 이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악마성입니다. 유일하게 끄집어 낼 줄 아는 것은 선악입니다.
말씀을 지키고 행하고 믿어봤자 자신의 육체에서 나오는 것은 선악입니다.

사랑이 아닙니다.

여기에 가야바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과 빌라도를 중심으로 한 로마인

모든 인간이 겨우 끄집어 낼줄 아는 최종적인 것은

바로 법적인 자기입니다.

그 자아란 선악입니다.

그 선악은 마귀가 심은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십자가 앞에서 홀라당 발가벗겨짐을 당할 까봐

깨끗함으로 일관되게 방어하는 겁니다.


얼마나 말씀이 제대로 응했으면 인간들의 반응은 어쩜 그리 동일한가 하는 점입니다.

십자가에게 괜히 걸렸어 괜히 걸렸어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뾰로룡

유일한 사랑은 십자가

우리가 극도로 거부하고자 했던
자기 사랑을 지키고자 거부했던

그 십자가의 사랑이 오히려 참 사랑이고

내가 형성한 사랑은 날 죽이는 거짓임을 보게 된 겁니다.

다윗이 베드로가 본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에 대비된 자기사랑의 거짓됨을 지적당한
제대로 지적해준 십자가의 사랑인 겁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인간 쪽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포장하는 발가벗겨지지 않는
자기가 직접 만든 무화과 나뭇잎과 자기 손으로 하는 손 할례 당으로
자기의 깨끗함을 사수하는

그래서 더러운 죄로 뛰어든 십자가의 사랑을 못보는 자가 있습니다.

그것 조차도 말씀 앞에서 응해져야할 일이기에 우리는 소외된 겁니다.

우리는 이 공부를 통해서 왜 인간이 자아의 깨끗함에 집착하고

그 깨끗함 집착이 십자가 앞에서 벗겨지지 않는 그 완악함을 보게 되는 기회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가 법으로 우리 자신을 포장하고
거룩과 신앙과 충성 봉사 심지어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자 하는 악마적인 모습인 것을 보게 됩니다.

모든 인간이 왜 이 선악에 집착하는지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된 죄 때문인 것을
십자가가 우리 눈을 비닐 벗김으로써 알수 있도록 우리 눈을 찍어 주시옵소서

그 어두운 눈이 찢어짐으로써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눈 뜨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소경이오니 주님의 사랑을 못 보고 내가 만들어낸 사랑만 고집하는 장님이오니 우리의 눈을 고쳐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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