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8. 매 맞는 진리 자리(빈자리)와 인간의 자리

본문 : 요 19: 1-42


진리가 너를 진리에 소외 시킨 것이 진리이다

지난 시간에 진리가 무엇이냐 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진리에 소외되었고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질문을 유발케 해놓고서는 넌 진리에 소외되었으니 물을 자격이 없다 라고 알려주는 것이 진리 라고 했습니다.

진리에 소외 된 것이 진리입니다.

즉 진리란 이렇다 라고 설명하지 않고
진리가 아닌 것이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가지고서
진리를 묻는 넌 진리 아냐 라는 것을 꼭 찝어서 들추어내는 식이 진리입니다.

반드시 진리 아닌 것을 가지고서 진리를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베드로 또한 소외 당한 입장이라는 것이 중요한 키포인트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소외 시킵니다. 반드시 3번 부인케 만듭니다.
너무 너무 중요한 것은 반드시 진리 아닌 것을 가지고서 진리를 설명합니다.

자 그럼 그 진리 아닌 것을 인간은 진리인냥 붙잡고 있는데

그 진리 아닌 것, 그렇게 비진리를 붙잡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 들어납니다.

진리 아닌 것을 붙잡고 그동안 그것을 가지고 자부심으로 당당하게 예수님을 죽입니다.

왜? 진리 아닌 것을 든든하게 붙잡고 있으니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겁니다.

비 진리 가 무엇일까요?

지난 시간에 오늘 제목을 여운으로 남겼습니다.

매 맞는 진리 라고요

그렇다면 인간은 매 맞는 진리 편에 서질 못합니다.

도리어 매 때리는 편에 섭니다. 그것이 인간에게서의 진리 이기 때문입니다.

매 맞는 위치와 매 때리는 위치

이 두 위치 두 자리를 통해서 진리가 아닌 비진리에 대해서 공부할까 합니다.


제가 누구랑 차 타고 가는 중에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왕이 자기 자리를 부재성 곧 빈자리로 만들었을때에
평상시에 알수 없었던 주변 인물들의 속성들이 드러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이야기를 글로 남겼는데 그 이야기도 하면서 말이죠.

예수님의 비유는 왕의 자리가 부재성으로 나타났을 때에 인간의 속성이 드러납니다.
구별이 나타납니다. 즉 거룩이란 항상 부재성으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원천 앞에 인간의 원천 또한 드러나는 겁니다. 즉 근원입니다.

그 사람이 그 순간 잘못해서 나오는 속성이 아니라
아무리 그 순간 잘하고 충성을 하고 왕을 위해 목숨을 버릴 것 같이
실제로 본인 스스로도 그런 자부심이 대단하고 그렇게 알고 있었어도
그 뿌리가 마귀이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즉 뿌리를 들추어 내는 것이 예수님의 비유요 그 비유는 부재성 곧 빈자리로써 증거 됩니다.

즉 잉여입니다.

그렇다면 그 뿌리가 마귀인 자들의 성향은 무엇입니까?

행함입니다.

뭔가를 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뿌리가 한 가족이라면 가족의 특성은 열심으로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가족의 뿌리는 설명하기 참으로 힘들지만 쉽게 할 수 있는 설명은 딱 하나입니다.

열심으로 모으거나 형성 된 것이 아닌 것이 가족이라는 겁니다.

가족은 그저 형성 된 겁니다.

이 가족이라는 하나 됨에  하나 아닌 것을 심어서 가족이 이런 것이고, 가족 아닌 것이 이런 것이다 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 두 나무를 심은 겁니다.

물론 여기서 가족이란 인간의 혈육개념의 가족개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형성한 하나 개념입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하나 개념을 주제로 삼은 것이 요한복음의 주제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미 하나 개념이 자기들끼리 형성이 되었기에 이 예수님의 하나 개념을 알 길이 없고 자기들 하나 개념에 썩어버렸기 때문에 알길이 없습니다.

마치 지난공부의 주제처럼 진리를 항상 자신을 개입하는 식으로 진리를 파악했지
진리를 자신을 소외 시키는 방식으로 진리를 안 경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소외 시키지 진리도 아닌 주제에 자신을 소외 시킨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정작 진리가 외부에서 찾아와 자신을 소외시킬려는 순간에는 적극적으로 방해 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제가 아고라 라는 영화를 보고 어떤 블로그에서는 이런 표현을 했더군요, 기독교인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그렇다면 그 뉘앙스가 기독교의 폭력성이나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는 차원으로 메시지를 담았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마치 인간의 이중성을 지적하는 듯한 양심의 소리처럼 말이죠.

그러나 아닙니다. 인간은 이중적이어야 합니다. 일중적 이다는 것이 말이 안됩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은 늘 인간이기 보다 하나님을 곧잘 흉내를 냅니다.

제가 또 본 영화가 히틀러 악의 탄생이라는 영화인데 인간의 이중성을 다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양심의 소리를 일중성 일관성 하나된 마음이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자기 가족도 한 마음도 안되는 판국에 국가민족을?
말도 안되는 소리죠.

심지어 자기자신 조차도 아침 다르고 점심 다르고 저녁에 다른데? 무슨 수로 일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소외 그 소외 된 그 자체를 수용하기는커녕 격렬히 반항하다 자기자신을 못살게 괴롭히는 겁니다. 하나 될 수 없는 나에 집착 하면서 말이죠. 이것이 정신병입니다.

그러면 대뜸 이렇게 반문 합니다. 그럼 다중적인 자아를 다듬지 않고 내버려 두어라 라는 말인가?

그럼 언제는 안 내버려 뒀을까요? 지금까지 안 내버려 둬서 그런 것입니까?

문제는 누가 외부에서 자극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는 식으로 말이죠. 자신은 늘 이중적이면서 남들은 이중성적이면 안된다는 식으로 자꾸 외부에서 자극을 줍니다. 히틀러 라는 영화를 보니 딱 그거였습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자극입니다. 외부에서 덮친 자극 이였습니다.

그래서 댓글을 다시 하나 달려다가 말았는데 이 문구를 적고 싶었습니다.

히틀러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 외부에서 덮친 비현실과 현실이 있는데
주변의 환경이 저런 인물을 반드시 만들고야 마는 것이고
또 하나는 70이레를 보여주기 위해서 반드시 히틀러는 그렇게 나와줘야만 했다는 겁니다.
마치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이 밤에는 짐승 낮에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 악마가 나타나줘야 그 어두움을 배경으로 깔고 나오는 빛이 의미가 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중성을 고발하고 반성하고 선의 방관이 악을 꽃피운다 라고 양심선언하자 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 이중성이 우리 본성이고 히틀러가 그 본성을 우리 대신 표출해 준 것인 겁니다.

그래서 고마워 해야죠. 히틀러가 고마운게 아니라 저런 괴물을 가지고서 우리의 가면을 벗겨주시는 빛이 활동이 고맙고, 그런 일에 우리는 소외 당한 입장이라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감사할 것이 없고, 저런 자존심 상하는 지적에 수긍해 버린다면 우리가 할 것이 없다고 우기는 자들에게는 직접 개입을 한다는 점입니다.

감사할 필요 없이 머리 숙여 무릎 꿇을 필요 없이 직접 자신의 양심을 다듬고 직접 자신의 이중성을 다듬으면 저런 괴물이 되지 않고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심지어 개혁주의나 기독교나 모든 종교가 저런 식으로 사기를 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이 없는 겁니다. 부쓰래기가 되기 싫다는 이유와 동일합니다.

히틀러는 인간의 방관이나 히틀러 자신의 잘못 때문에 나온 인물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의 계시를 위해 동원된 그릇입니다.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은 토기장이를 위해 동원되는 겁니다.

그런데 늘 힐문 하기를 긍휼의 그릇 진노의 그릇으로 나누지 말라는 반발성입니다.

여기에 양보가 없습니다. 약속을 위해

즉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이 두 양쪽 그릇이 피 터지게 서로 충돌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부재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씨뿌리는 비유인데
땅의 속성을 씨앗이 뿌려짐 즉 근원(처음자리,뿌리)을 파해치는 씨앗이 뿌려짐으로써 가차이 내려옴으로써 땅의 속성들이 다 들어나는 겁니다.

평상시 유대인 혈통이다 아브라함 자손이다 라고 우겼던 자들이
자신들의 뿌리가 아브라함이거나 유대인이 아니였다는 것이
바로 씨앗의 뿌려짐 즉 천국의 직접 내려옴에 의해 들통이 나는 겁니다.

십자가란 바로 천국의 부재성입니다.
천국 자체가 고정화 되지 않고 우리 곁으로 직접 내려왔다는 겁니다.
이것을 천국 자체가 천국 스스로를 빈자리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 빈자리라는 의미는 비워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낮추셨다 천국 스스로를 낮추셨다 라는 의미입니다. 또 낮추었다 라는 의미는 상대적으로 인간이 찾아 갈 천국이란 없다는 뜻입니다.

천국 스스로가 낮추셔서 직접 내려오지 않으면 인간에게 찾아오지 않으면
천국에 갈 자가 없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종교가 거짓인 이유입니다.
심지어 기독교도 이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으니 얼마나 거짓 됩니까?

직접 찾아온 천국입니다.

또 웃기는 것이 어떤 성화론자 개혁주의는

어떤 부분은 직접 찾아 왔지만 많은 부분은 우리가 찾아가야할 의미도 있다 라고 구라를 칩니다.

성경 어떤 부분도 또 어떤 의미도 우리가 찾아가는 의미 없습니다.

모든 의미가 직접 낮아지신 찾아오심입니다.


자 이 찾아오심 앞에 인간들의 솔직한 반응은 바로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아서 라는 표현입니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바로 이 의미가 바로 잃어버림 이였다는 겁니다. 이 잃어버림이 잉여요 남은자요 처음자리요 부재성이요 빈자리요 뿌쓰래기 라는 의미입니다.

즉 스스로 독자적으로 설수가 없다는 겁니다.

찾아와 주지 않는 분이 없다면 되찾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죄인이란 구원자가 만들어 내지
환자는 의사가 만들어 내지

죄인 스스로가 환자 스스로가 만들어 내질 못합니다.
죄인이 있다는 뜻은 구원자가 있다는 뜻이고
환자가 있다는 뜻은 의사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죄인과 환자란 구원자와 의사를 위해서 반드시 형성이 되는 겁니다.
죄인은 구원자를 위해 있는 겁니다. 환자는 의사의 영광을 위해 있는 겁니다.
(여기서 단서가 누가복음에서 붙습니다. 많은 이방인 다수의 문둥병자 중에 한 문둥병자.
많은 이방 과부 중에 한 과부 라고 단서가 붙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야 당연히 인간들이 자신이 죄인 된 것 조차도 자기 공력인냥 떠벌리기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다는 말을 반드시 자기유리한 쪽으로 이용한다는 것을 알기에 은혜를 더하고자 죄를 더 할 수는 없다 라고 한 겁니다. 죄 조차도 예수님이 규정하는 죄만이 죄입니다. 죄도 아닌 것을 아무리 죄 지어도 은혜가 더하여지지 않습니다.)

실로암에서 소경을 고쳤습니다. 그 소경은 빛되신 예수님을 위해 동원된 소모품입니다.
빛을 위해서 소경이 된 겁니다.
그런데 빛을 위해서 소경이 되지 않고 본다고 하니 그 당대의 의인들의 거룩은 쓸모짝도 없는 거룩이요 성화된 삶인 겁니다.
아무리 남을 위해 평생을 살았어도 그 소경의 외침을 그들은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소경이였더면 고침을 받겠지요.

즉 스스로 내부의 성화가 관건이 아니라, 외부에 누가 찾아 왔느냐로 뿌리가 밝혀지는 겁니다.

평생을 포도나무 탈 양의 탈을 쓰고 살아 본들, 원래 뿌리가 가시나무요 늑대이다면
아무리 양을 잡아먹어 본적 없는 늑대라고 해본들 늑대는 늑대입니다.

차라리 저 늑대입니다. 주여 고쳐주소서 라고 하면 됩니다.

거룩한 양 같이 살겠습니다 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왕의 자리를 잃어버림 또는 낮아지심 또는 비워두심 곧 부재성

등으로 등장하게 되면 인간들의 본색 뿐만 아니라 그 뿌리가 드러납니다.

그것을 종말이라고 하는데 차라리 그 종말 앞에서 저 죄인이요 늑대입니다 라고 하는 자가

도리어 양이였고

아무리 봐도 자신은 늑대도 아니요 죄인도 아닌 삶만 살았다 라고 자부했기에

나는 양 됨에서 벗어난적 없다고 한 자들이 이상하게도 모두 늑대로 염소로 들추어지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팔을 어긋맞게 하는 그 자체도 부재성 때문입니다.

희한합니다. 형 에서가 아무리 저는 동생입니다 라고 해도 자신은 형이라고 우길 수밖에 없고, 동생 야곱은 아무리 나는 형이요 장자이다 라고 우겨도 소용 없습니다. 동생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약속의 부모 라고 해도 그것을 바꿀 수 있는 부모도 없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낳은 순서를 바꿀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주님의 개입에 비로소 교체 됩니다. 이제야 그 어떤 부모도 또 그 당사자도 개입 할 수 없습니다. 주 되심이 뜬 이상 개입은커녕 철저하게 소외 당하는 겁니다.

야곱이 지가 장자 하고파서 장자 빼앗았나요? 아닙니다.
누가 빼앗아라 라는 식으로 개입 된 겁니다.
정작 빼앗고 보니 그 개입자가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것이 그 뒤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부터 야곱 당사자는 장자권에 의해 소외 당합니다.
장자권을 아무리 손에 쥐고 있고 소유 하고 있어도 장자권 자체가 야곱을 소외 시킵니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가 우리를 소외 시키는 겁니다.

장자권이든 천국이든 인간의 개입으로 들어갈 수 없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자권이요 약속이요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이든 약속이든 또는 언약이든 또는 장자권이든 뭐든
우리의 소유권 된 냥 착각토록 만들어 철저하게 개입케 해 놓고서는
철저하게 소외 시키는 방식 부재성 낮추심(광야) 잃어버림 잉여 처음자리 전리품 등등의 어리석은 십자가의 방식으로만 곧 창조의 방식으로만 약속 스스로 약속을 이루시는 겁니다.


자 여기에 빌라도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주 중요한 문구가 있습니다.

(요 19:10, 개역)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요 19:1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빌라도는 자신의 사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싶어 앴습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알리바이만 형성하고 이 상황에서 손 때고 싶었기에 손을 씻는 짖도 합니다.

자기는 빠지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가 누구를 두려워 하는 고 하니

자기 뿌리를 두려워 합니다.

곧 다수의 대중인 인간입니다.

그 다수의 인간들이 자신을 그 자리에 세워줬고
그 자리에 앉혀놓고 그 자리를 유지시켜 주고 있습니다.

부재성이 아니라 빈자리가 아니라 잃어버림이 아니라 잉여가 아니라
철저한 손익계산에 의한 법과 법의 연결이요 타협이요 인맥구축이요 정치활동인 겁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이 상황을 모면해 볼려고 빠질려고 한다는 것은 대중들이 이미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빌라도 또한 저들의 다수 대중의 술수에 말려들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빌라도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대중이 왜 세워준 겁니까? 앉히게 한 겁니까?

빌라도는 단순했습니다. 정치 잘 하라고?

천만의 말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앉혔던 겁니다.

빌라도는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그것은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 중에 수제자 라는 표현이 없습니다만 베드로를 그런 의미로 예수님은 자주 사용하시는 소모품으로 활용하시는데 그 수제자 됨이 예수님을 세 번 버리기 위한 수제자 였던 겁니다.

베드로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저 안타까워서 제일 가까이에 근접까지 했지만 역시나 예수님이 옳았습니다. 제일 가까이 따라와도 제일 가까이 따라온 것 때문에 더 역으로 예수님을 격렬하게 거부 합니다. 나는 저 사람을 모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야 진노의 그릇 도 , 또 긍휼의 그릇 도

자기 쪽에서 어떻게 할 수가 없는겁니다.
우리 숙제가 아닙니다.

오로지 토기장이의 몫입니다.
그저 토기장이가 이미 미래를 결정한 입장에서 채워넣는 방식이
결과적으로 완료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지금 우리 삶이든 베드로 삶이든 빌라도 삶이든 결정난 사항을 사건으로써 나타나는 것 뿐입니다.

어렵게 길게 말할 것이 아니라
쉽게 말해서

빌라도가
자신의 자리를 믿고 떠드는 그 소리

용서하여 석방 자유케 하는 권리
십자가에 못 박는 사형시킬 권리가 있다 라는 그 소리에

예수님은 아랑곳 없이 양보없이 외칩니다.

(요 19:10, 개역)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요 19:1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위에서 주지 않았다면 나를 해할 권리가 없다 라고

이에 오늘 핵심입니다.

왠 뚱딴지 같은 소리일까요?

누가 누구를 지금 걱정해 주는 겁니까?

눈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은 하룻 강아지입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모든 권세를 쥔 범 호랑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눈에 보이는 상황을 반대로 해석 합니다.
모든 인간의 해석을 뒤짚어 엎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하룻 강아지 빌라도 에게 내어주겠다 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호랑이 예수님을 풀어주겠다는 둥 잡아먹겠다는 둥 협박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보기에도 역전인데 그럼 눈에 보이는대로 호랑이 빌라도 이라면

대중을 무서워 하지 말고 하룻강아지 예수님을 갈기갈기 찢어 그 날카로운 호랑이 이빨로 찢어 잡아먹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도리어 큰소리는 예수님이 칩니다. 자신이 호랑이 이기 때문에 내어주겠다 라고 말이죠.


왜 제가 호랑이 또는 강아지 라고 표현했는고 하니

아무리 호랑이가 낮아져도 내어줘도 호랑이는 호랑이입니다.

뿌리가 이미 결정된 겁니다.

아무리 강아지가 호랑이 흉내를 내어서 호랑이 짖을 해도 강아지는 강아지입니다.

그 상황을 표현한 것이 빌라도가 백날 그런 짖을 해도
그 자리를 떠날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도리어 그릇대로 그릇 값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표현 한 겁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럼 또 우리가 의문되는 문구가

바로 뒤의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라는 문구입니다. 빌라도가 죄가 없네 라는 생각에 전면배치 되는

나를 넘겨준 자의 죄가 더 크다 라는 정반대의 사고인 말씀입니다.

결국 죄란 예수님이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그것도 지금 그 순간에 죄 짖는 행위가 아닌

창세전에 결정난 죄입니다.


그럼 다들 대뜸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럼 우야라는 말인가?
우리보고 어떻게 하란 말인가?
어쩌한 말인가?

제가 또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하면서 가인이 뒤짚어 씌움 당하는 식이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사실은 어떻게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뿌리에 이미 결정나버렸기 때문에
저절로 나오고 뿌리에 따라 저절로 나오지 않는 문제입니다.

아주 쉽고 너무 너무 쉬워서 나오지 않는 무시꺼리 버린돌 취급 당하는 꺼리가 잉여꺼리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아벨의 제사를 받은 주님께 동참하면 됩니다.

이게 불가능입니다.

주님 쪽에서 차단 해 버리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오늘 공부의 핵심입니다. 빌라도는 차단 당했다 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근원을 빌라도에게서 찾으면 안됩니다. 예수님 쪽에서의 구별 작업입니다. 그 구별작업에 의해서 비로소 빌라도의 뿌리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뿌리를 일일이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그런데 뿌쓰래기 여인은 그 차단한 소용없는 불가능에 믿음이 외부에 덮쳐서 외칩니다.

맞습니다 주여 저 개입니다. 그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뿌쓰래기 먹지 않습니까?

즉 그 여인은 처음자리의 의식을 아는 겁니다.

십자가의 제대로 된 의미를 아는 겁니다.

그 빈자리 잃어버림 잉여의 의미를 제대로 안 겁니다.

이것이 주인이 생긴 자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생긴척 한다거나?
자신이 주인이기에 아무리 종 흉내를 낸다거나?
아무리 그 뿌리에 반대된 양의 모습을 갖추어도

뿌리가 다른 이상

이 쪽 세계에서 저 쪽 세계로 넘어올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가능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완료하셨습니다.

사망의 그늘에 주저앉은 자 흑암의 백성 개같은 이방인 곧 그들의 뿌리가 지옥인 자들에게

복음을


갇히고 포로된 자에게 눈먼 어두움 뿐인 자에게 억눌려 일어날 수 없는 앉은뱅이 에게

희년 기쁜소식을 천국소식을

이 일에 예수님은 자신을 적극적으로 개입하시고 그 개입이 소모 소비의 형태로 나타내지만


빌라도는 이 일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진리에 개입할려고 하고
그렇다고 자신을 소모 소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모 소비 조차도 자기자리를 찾기 위한 방식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소외 시켜버립니다. 문제는 소외 당하지 않을려고 하기에

기분 나쁜 자존심에 걸려 버리니까?

결국 자신이 풀어주고 해방케 할려는 그 몸부림이 도리어
이 일에 난 소외 당할란다 라고 저들에게 넘겨주는

예수님이 뒤짚어 씌우는 그 강퍅함에 걸려든 겁니다.

매맞는 진리가 인간이 자신의 수고로 예수님을 도울려고 하고 믿을려고 하고 충성할려고 하고 사랑할려고 하는 그 짖이 얼마나 악마인지를

매맞고 소모 소비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매를 대면서 소모시킬려고 하고 소비 시킬려고 하는

자기 자리(자기구원의 자리)를위해 이용할려는 그 악마성이

예수님이 고맙게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까지 까발려 발가벗겨 주십니다.

이 가면을 벗기움 당하는 자가

용서 받은 자입니다.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우리가 믿은 것이 아니요
우리가 내어줌이 아닌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이고
하나님이 죄를 제대로 지적(발가벗기셨음)하셨고
하나님이 소모시키는 실상을 펼치신 독생자를 내어주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주님은 우리를 늘 빌라도처럼 몰아가십니다.
우리의 뿌리를 들추어 내시고자 예수님은 십자가로 스스로 내어주십니다.

이 두 자리가 매일 매일 우리 눈에 펼쳐집니다.
우리는 인자가 높이 달린 그 나무. 빈자리와도 같은 아무것도 없는 그 나무를 쳐다볼것인지

빌라도처럼 사람들이 세우고 사람들이 그 높은 자리를 앉도록 하고 사람들에 의해 세운 그 자리를 볼 것인지

우리는 늘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장대를 쳐다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죄 때문에 인자 라는 희생물이 달리는 높이 높이 달린 어린양을 쳐다보는 어리석은 짖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눈에 화려한 빌라도의 자리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 두자리로 우리의 뿌리를 들추어 내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곧은 목을 꺽어주시고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못보는 목을 부러뜨려주시고
예수님의 내어주심을 못 보는 마음을 난도질로 발가벗겨 주시고
예수님의 울부짖음은 못 듣는 우리의 어두운 눈과 귀를 고쳐 주시옵소서

이 희생 앞에서도 이 화목제물 앞에서도
자기 자리만을 걱정하는 빌라도의 모습이 바로 우리 모습임을 지적 받는

사랑을 용서를 긍휼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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