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0. 처소 완성

어둠(광야)을 거쳐서 나온 빛(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 나라)이라는 출처 완료

홈페임(상처)을 통한(거쳐서 그것을 가지고서) 불가능한 자랑꺼리 십자가용서.

찢으셨으나 싸매시는 모순으로 다가오는 십자가라는 불륜(걸림돌)의 완성

본문 : 요 21장


오늘은 요한복음 21장 마지막 장으로 그동안의 요한복음 공부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39. 예수님의 부활 vs 죄의 소원으로서의 부활

지난 시간에 두 부활의 차이성에서 살펴봤습니다.
곧 두 부활은 두 메시아 이고 두 하나님이고 둘의 차이성입니다.
그 두 차이의 기준은 십자가입니다. 구원용 십자가가 아닌 그것은 인간이 조작해낸 십자가요, 심판의 십자가만이 그 둘의 차이성을 벌려놓는 겁니다.

제가 이번주에 참 재미있는 영화를 봤는데 바로 애플시드 라는 일본 에니메이션입니다.

그리고 방금 이 글 쓰기 전에 회복이라는 기독다큐영화를 꼭 보고 난 뒤에 이 글을 쓰고자하여 좀 전에 다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 중에 강이아빠랑 나눈 이야기도 마침 오늘 이야기 할려는 것과 다 연관이 되길래 언급하고자 합니다.

먼저 애플시드 라는 일본에니메이션은 아바타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늘 인간은 조화와 융합을 꿈꾼다 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곧 화목입니다. 화해 또는 회복, 하나 됨, 일치성

일본에니메이션 중에 공각기동대라는 영화도 그렇고(이것을 참고로 해서 나온 영화가 메트릭스입니다.) 또 에반겔리온 이라는 영화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결국 믿을 구석은 자기자신 밖에 없다는 소리입니다. 다만 그 나 라는 존재는 때로는 옳은 일에는 희생도 하고자 일방적인 선택에 뛰어들기도 하겠지만 때로는 조화와 융합 곧 타인을 의식한 것이겠죠. 그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후회없는 자신을 이루는 미래의 유일한 희망이 된다는 겁니다. 미래 곧 부활을 그런 자아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분모로써의 자아라는 욕망 덩어리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것을 죄의 소원이 덮친 자아부활 부활로써의 자아)

바로 그런 내용으로 역시나 애플시드 라는 영화도 그렇게 전개 됩니다.

종말이라는 미래를 대비하는 인간의 자세는 조화와 융합이냐?
아니면 새로운 것을 맞이하기 위한 헌 것들의 파괴냐?
종말 숙제를 푸는 인간의 지혜와 선택은? 뭐 이런 식입니다.

어떤 영화이든 종말을 다루는 양상은 결국은 파괴 보다는 조화와 융합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것이 훨씬 상처가 덜하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종말 앞에서도 인간이 얌전하고 겸손해야지 그때도 까불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방금 본 회복이라는 영화는 상처로 출발을 합니다. 그 상처가 어쩔수 없는 과거의 역사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된 인간의 과거의 모습이지만, 앞으로의 미래는 도리어 그 상처가 싸매어 지는 회복으로 다가온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이 메시아의 다시 오심으로써 다큐는 설교 한편의 방식으로 전개 됩니다.

(호 6:1, 개역)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겔 37:1, 개역)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겔 37:2, 개역)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겔 37:3, 개역)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겔 37:4, 개역)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 37:5, 개역)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겔 37:6, 개역)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 37:7, 개역)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겔 37:8, 개역)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겔 37:9, 개역)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겔 37:10, 개역)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겔 37:11, 개역)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겔 37:12, 개역)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겔 37:13, 개역)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37:14, 개역)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겔 37:15,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37:16, 개역)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겔 37:17, 개역)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겔 37:18, 개역) 『네 민족이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거든』
(겔 37:19, 개역)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겔 37:20, 개역) 『너는 그 글 쓴 막대기들을 무리의 목전에서 손에 잡고』
(겔 37:21, 개역)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간바 열국에서 취하며 그 사면에서 모아서 그 고토로 돌아가게 하고』
(겔 37:22, 개역)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겔 37:23, 개역)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케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 37:24, 개역) 『내 조상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겔 37:25, 개역)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겔 37:26, 개역)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겔 37:27, 개역)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겔 37:28, 개역)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있으리니 열국이 나를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자 오늘 본문은 바로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그 만남으로 인한 구체적인 대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물음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처소 개념입니다.

이번 2010년 십자가마을 겨울 수련회 주제가 요한복음을 다룬 것인데 그것이 바로 처소 개념입니다.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10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요한복음구득영재정리.zip

교재 제목이 “어디서 왔느냐” 라는 겁니다. (요 19:9) 빌라도의 물음입니다.

(요 19:9, 개역)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요 19:10, 개역)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요 19:1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어떤 장소 어디서 왔는가? 또는 출처 너의 근원 너의 뿌리 너의 원천이 무엇이냐?
진리가 무엇이냐???
라는 겁니다.

처소란 무엇인가 라는 겁니다.

저는 이 의미를 지난 시간에 성령의 소욕으로 설명을 했고 그 성령의 소욕은 그 반대인 죄의 소원에 덮쳐진 인간의 소욕으로써 그 대조성과 차이성으로써 설명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처소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더 지난 시간에는 빌라도의  진리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예수님이 답을 하시지 않음으로써 진리에 소외 시키는 것이 진리임에 대해서 살펴 봤습니다.

장소란 항상 시간과 같이 연관시켜서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이 역사를 운운할때면 항상 그 역사의 시간을 담은 그릇과 같은 공간이 동반이 됩니다.

즉 영역이지요 필드? 터전 마당

제가 사도행전을 살펴보면서 특정공간 장소인 예루살렘을 살펴봤습니다.
예언서에 예루살렘 곧 시온에 대해서 언급했다면 인간들은 이 예루살렘이라는 특정장소에 대한 집착은 거의 중독 수준에 해당 될 것입니다. (회복이라는 영화도 실제 공간인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에스겔 37장을 근거로 해서 이 영화에서 자신들의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얼마나 마귀적인지?)

그것이 교회 또는 성전 이라는 특정 장소에 집착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심지어 바벨탑을 건설하는 이유는 진리에 소외 됨에 있어서 절대로 가만히 못 있겠다는 겁니다. 우리 손이라도 하나님을 설득 시켜서 소외 안 되게 해 달라는 입장에서 바벨탑을 건설하는 겁니다.

그러나 가차 없이 부셔 버리십니다.

저는 이것을 요한복음을 21장 으로 마무리 하면서 주제로 삼고자 합니다.

바로 찢어버리시는 그 상처 홈페임입니다.

강이아빠랑 만나서 나눈 대화들이 바로 이 주제 였습니다.

상처 라는 찢으심 앞에

가인의 제사는 그 상처를 봉합하기 바쁩니다.

빨리 빨리 그 상처를 꾸매고 매꾸어 넣어서 그 상처의 흔적을 없애버리고자
그 상처난 자국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채워 나갑니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지키는 자 입니까? 라는 너 동생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
놀랍게도 지킴을 당하는 자는 부재성 곧 없는 자리로써 증거 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성경 전체의 해석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비유 중에서 한 예로 든 것이 일만 달란트 탕감 한 임금의 비유인 용서의 왕 중에 왕 비유에서 정작 탕감받은 자는 없는 빈자리입니다.

용서 받은 자는 없는데 용서의 왕중왕을 드러내는 비유라면
누가 해석 할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비밀입니다. 비밀
해석 불가능입니다.

그 외에도 많습니다. 강도만난 자와 선한사마리아인 비유 에서도 정작 강도는 없습니다. 부재성입니다.

또 도적이 가구를 늑탈 한다는 천국비유에서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은 추상적입니다. 그 없는 부재성을 세간 가구를 통해서 즉 열매를 통해서 나무를 들추어내는 방식입니다. 나무라는 주체를, 소욕성을, 뿌리를 밝혀내는 겁니다. 즉 감추어진 것을 밝혀내는 겁니다.

(마 12:22, 개역)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마 12:23, 개역)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마 12:24, 개역)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마 12:25, 개역)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마 12:26, 개역)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 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마 12:27, 개역)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 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마 12:28, 개역)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9, 개역)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마 12:30, 개역)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마 12:3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 12:32, 개역)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 12:33, 개역)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바로 그 일에 성령이 주체로써 활동한다는 겁니다.

이 성령이 일하시는 내용이 바로 찢기입니다.

늑탈입니다.

빼앗음입니다.

불륜입니다.

홈페임이라는 상처를 인간들은 허용을 하지않습니다. 그래서 그 상처를 빨리 봉합하고 빨리 아물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처난 수치를 빨리 빨리 들키지 않도록 더더욱 깊숙이 꽁꽁꽁 감추어 놓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 상처난 홈페임으로 갈라진 틈 사이를 더더욱 벌려 버리는 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또 흔히 달란트 비유라고 하는 종말 비유 3가지 중에 하나인 충성된 종과 악한 종에 대한 비유는 정작 충성된 종은 주인으로부터 주어진 일에 잃어버릴수도 있음을 감수하고서도 주인이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일에 들어가는데, 똑똑하고 지혜롭기 짝이 없는 악한 종은 그 잃어버릴수 있는 돈을, 위험에 감수하지 않고자 원금 그대로 감추어 버립니다. 이것은 사고방식이 한 쪽은 장사를 해서 잃게 되든 안잃게 되든 상관없이 자신이 이미 찢겨진 자로써 주인이 있다는 사실로써 충성할 수밖에 없는 관계성이고(그것이 약속임=마치 갈렙이 약속의 시선 때문에 거인 아낙자손이 우리 밥이다 라는 시선과 같은 왜? 자기 시선이 찢겨졌기에 약속의 시선이 덮쳤기에), 반대로 잃으면 안된다라는 원금사수를 외치는 자는 주인이 있다 라는 종의 의식이 아닌 주인 따로 나 따로의 의식이 있기 때문에 약속 조차도 내가 지키면 약속이고 내가 못 지키면 약속이고 뭐고 소용없다는 따로국밥의 의식이니 가인처럼 찢겨지면 안된다는 의식이고 홈페이지 않고자 또는 그 결핍조차도 자신이 맥구어 넣어야 하는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지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아낙 자손을 보니 도저히 그 불가능함 앞에서는 자기가 자신을 손대는 능력 밖에서는 불평이 나오게 되니 모세를 무릎꿇게 해서 약속이 틀렸다 라고 돌삐들고 죽일려고 하는 겁니다. 자신은 찢겨지면 안된다는 겁니다. 약속은 나를 위한 것이지 나를 시험들게 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광야란 그 자아를 찢기 위해서 믿음직 스럽게 뺑뺑이 돌립니다. 죽어라 자아야 제발 죽어라 자아야 라고 찢는 사건들만 광야에서 미쁘게 벌어지는 겁니다. 이미 종말(미래완료)가 덮쳐지지 않은 자는 약속을 아무리 자기 힘으로 쫏아도 청함을 받기만 했을 뿐이지 택함을 받지 못해서 탈락케 하고자 뺑뺑이 돌리기, 찢어버리는 홈페임 앞에서 견딜수가 없는 겁니다. 무슨 수로 자기 힘으로 견딥니까? 아무도 못 견딥니다.)

찢어짐이 없이는 화목케함이 없습니다. 막힌담을 허물지 않고서는 여전히 막혀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입니다.

무덤을 여는데 있어서 인간들은 빨리 그 무덤을 봉합할려고 합니다. 그 벌어진 틈 사이를 빨리 매꾸고 봉합해서, 실로 꾸매서 자신의 수치와 자신의 구경꺼리 됨을 빨리 빨리 제거 할려고 합니다. 마치 가인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이마표입니다. 이 이마표를 그 따위 사고방식인 가인의 사고방식을 널리 널리 퍼트려 버립니다.

가인과 반대의 행동입니다.

오히려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살인자를 퍼트려 버립니다.
오히려 그 상처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더 갈라진 틈사이를 쩍쩍 벌려서 더 이상 수습 못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왜 제가 이런 내용을 강이아빠랑 나누고 오늘 본문과 연관시킬려고 하는가 하면은

베드로에게 부활 하신 예수님이 다가와서 다짜고짜 묻는 말인 그 물음이 바로

(요 21:15, 개역)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너 베드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는 물음인가 라는 겁니다.

뚱딴지 같은 물음 아닙니까?

저는 여기서 빌라도의 질문과 연관 시키고자 합니다.

예수 당신 어디서 왔느냐?
또는 진리가 무엇이냐? 라는 진리찾기 질문입니다.

여러분 가인의 살인 문제도 진리 또는 사랑 때문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또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심문 당한 것도 유대인으로부터 죽임 당한 것도 다 진리와 사랑 때문에 벌어진 겁니다.

그 진리와 사랑에 인간은 철저하게 소외 당한 겁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소외 성입니다.

이 소외 성을 가지고서 차이성을 드러낸 겁니다.

구약을 통하지 않고서는 신약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약이라는 답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약이라는 문제를 문제 자체를 이해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질문인 문제와 답에 철저하게 소외 당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은 모른채 문제지 만을 먼저 받았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이라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답을 안다고 우기는 그 사기성과 완악함을 우리는 격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더했으면 더했지 우리 또한 이스라엘의 완악함에 못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더 세밀하게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 여호와 하나님이 낸 상처로 인한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주 그리스도로써 또는 메시야 로써 부활하심으로써 또 심판주로써
그 상처낸 그 갈라진 틈사이를 봉합하러 오신 겁니까? 아니면 더욱더 쩍 쩍 벌려놓으시려고 부활하신 겁니까?

이스라엘을 버리신 분입니다.

봉합일까요? 벌리심 일까요?

왜 제가 애플시드 라는 영화를 보면서 아 이거구나 라는 생각을 했는고 하니
모든 인간 속에 들어간 가짜 하나님 가짜 부활 가짜 예수는 한결같이 봉합의 달인들입니다.

화목의 달인들입니다. 상처를 꾸매고 맥구어 넣고 채워넣는데 달인들이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저는 지난 시간에 인간 소원으로써의 부활이다 라고 했습니다.
즉 죄의 소원입니다.

마귀가 씌여진 모든 인간들이 꿈꾸는 부활관은 바로 이 융합과 화목과 조화로써의 부활이요 그것이 곧 죄의 소원인 육의 소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소욕은 그 반대입니다. 새것이라는 새상품이 있기 때문에
때문에 때문에 ~~~~
그 갈라진 틈을 꾸매거나 맥우어 넣는 채워넣음이 아니라
오히려 쩍쩍 벌려서 아예 그 자리를 부재성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럼 죽잖아? 라고 하겠지요. 바로 그겁니다.
죽으라고 쩍쩍 벌려버리는 겁니다.
왜? 새상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처소 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이라는 처소를 예비 약속 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종말의 영인 성령이 하는 일
십자가의 영이 하는 일은 봉합이 아니라 아예 쭉쭉 찢어버리는 겁니다.

쭉쭉 찢어버려서 나온 결과물이
베드로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다짜고짜 말입니다.

(요 21:15, 개역)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바로 베드로 자신이 예수님을 쭉쭉 찢어버린 상처를 염두하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죄책감을 벗어난 길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육체는 땅땅땅 판결이 난 육체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여 예수님을 원수에게 넘긴 육체임을 말이죠.

바로 이런 육체임을 예수님이 들추어내지 않으면 그것은 가짜 사랑입니다.
바로 그런 육의 소욕으로 가득찬 육임을 고정화 시켜주지 않는 사랑이면 안되는 겁니다.
사랑만이 유일하게 지적을 하는 겁니다.
즉 사랑만이 쭉쭉 찢어버리시는 겁니다.

마치 영화에 나오는 엑스맨 이라는 주인공이 손에 날카로운 칼들이 쭈빗쭈빗 튀어나와서
베드로의 육체를 엑스 라고 갈지자(之)로 지그제그 zigzag 난도질 하는 것처럼

성령이라는 예비된 처소가(처소가 하는 일은 우리 주체인 자아를 난도질해서 없애버리는 빈터로 빈자리로 만드는 일에 일체양보없는 겁니다.)
성령의 소욕으로 채우시는 겁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묻습니다.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즉 니 쪽에서 다가오는 사랑 내가 쭉쭉 찢어버렸고 그 상처를 다시는 봉합시키지 못하도록 아예 두 개로 만드는 죽여버렸다 라는 겁니다.
상처 때문에 난 두 양쪽의 패 갈라짐이 움푹패임을 복구 시킴으로써 하나가 될 수 있는데
그 하나 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다 없애버리도록 아예 어떤 봉합기술도 소용없도록 갈라버렸다 라는 겁니다.

더 이상 싸맬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처소입니다. 새몸이다는 겁니다. 성령의 전인 처소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령의 전을 새록 새록 매일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반대로 매일 매일 찢겨지고 그 찢겨진 상처로 봉합하고자 하는 싸매고 복구 시킬려는 그 회복력이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음을 겨는 새로운 사건들이 매일 매일 성령의 전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처소가 마련되었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이란 이제 너거들 죽었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사도바울의 외침은 딱 하나 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 아닙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님이 부활 하셨다 라는 외침 뿐입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주가 되셨다 라는 말은 너거들 이제 다 죽었다 라는 뜻입니다.
그 심판 주를 만난 자는 사는 겁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래서 이 심판 주를 베드로는 지금 만남을 당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원했던 만남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만남으로 인해 원하지 않는 물음을 받고 있습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즉 예수님이 받은 상처 곧 찢겨짐 갈라짐을 통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못 만나게 하겠다 라는 단절성 차단성 차이성 갈라지는 분류 구분 두패나누기입니다.

어떤 두 패? 너 쪽에서 사랑하는 것을 거부하고 내 쪽에서 사랑하는 것만 이루겠다는 이 둘 사이를 영원히 못 건너도록 쩍쩍 영원히 벌려 놓겠다 라는 두 패 나누기입니다.

그래서 괴롭게도 그것을 세 번 씩이나 묻습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원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투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쓰리

자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이 질문을 들어야 합니다.

그냥 아닙니다.
방금 내가 예수님을 세 번 씩이나 부정해 버린 그 사건을 근거로 해서 말입니다.

왜 이런 질문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또는 베드로 에게 하실까요?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것은 사랑은 여기에만 있다 라는 출처 문제를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출처 근원 원천 뿌리 문제입니다.
열매의 나무 문제입니다.
나무를 보면 열매를 알수 있습니다.
그 감추어진 나무의 실상을 통해서
그 나무와 열매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함입니다.

곧 어디서 라는 처소 문제입니다.

그녕 성령이 아니라 약속한 성령 이라고 했을 때에
이 처소된 성령은 약속 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다른 약속은 해당사항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약속한 성령을 이루기 위해서 곧 처소를 이루기 위해서 뿌리 근원 원천을 이루기 위해서 인자는 훼방을 받아야 합니다.

인자는 비록 훼방 받아도 인자가 이룬 약속은 훼방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을 인간이 훼방할 수가 없습니다.
훼방 당하는 성령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약속을, 다른 처소를, 다른 근원, 다른 나무를, 다른 부활을 늘 꿈꾸기 때문에 성령 조차도, 약속 조차도 거부하면서 자신의 처소를 꿈꿉니다. 그 처소 때문에 가인처럼 이마표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어디서” 라는 장소문제로써의 출처를 새로 판을 갈아 엎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라는 이제 묻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말씀 지킴의 량과 질을 묻지 않습니다.

오로지 약속을 묻습니다. 출처만을 묻습니다. 곧 처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너 어디서 왔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납니다.

어릴적 꼬마들이 이런 놀이를 합니다.

두 패로 나누어서

뭐였더라? 노래를 불렀는데?

아 참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라는 두 영역 다툼의 형식의 놀이인데 한 사람씩 빼 내 가는 놀이입니다.

지금 다 까먹어서 어떤내용인지 구체적으로 모르겠는데

아무튼 예수님이 원수의 성문을 여심으로써 무덤을 비워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봉합해 버린 그 원수의 성문이 들통이 나게 되고
그로 인해 두 영역의 다툼이 이제 본격적으로 실행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봉합해 버린 인간들에게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투입이 되어서
아름다운 선전인 그 원수의 성문을 여는 일을 함으로써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도리어 핍박 하면 할수록 감당할 수 없는 증인으로 인해
더욱더 확장의 증식이 응축점(원수의 성문)이 마련됨으로써
거룩한 전쟁이 본격화 되는 겁니다.

어디서 왔는가?

라는 베드로를 향한 질문에

베드로는 비로소 뻔뻔 스럽게 대답합니다.

나의 출처는 사랑입니다.
나의 처소는 사랑입니다.
저는 사랑이 낳은 사랑의 피조물입니다 라고

그야 말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답을 합니다.

바로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는데 똑같이 대답한 자가 있습니다.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너 어디 출저니?
너 어디서 왔니?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라는 여호와의 시험에, 질문에

아브라함은 뻔뻔스럽게

이스마엘 낳았습니다 라고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도리어 그런 행함의 실적들을 다 날라감을 당하고 이삭을 약속으로 낳았습니다. 라고 뻔뻔스럽게 대답합니다.

그래서 뻔뻔 스럽게

다윗이 이 믿음의 의미를 비로소 무릎을 치고서는
아브라함이 이랬구나 하면서
뻔뻔 그야말로 뻔뻔스럽게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야 장군 고의적으로 죽이고
이름없는 아이를 회개 금식 기도로도 살려내지도 못하고서는

뻔뻔스럽게 춤추고 먹고 마시고 했던 겁니다.

자기 내부에서 그 질문에 대답할 것들이 없음을 비로소 안 겁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믿음, 할수 있는 모든 행함, 할수 있는 모든 사랑,
할 수 있는 모든 힘으로 예수님을 지키고 사수할려는 그 열심히 도리어 세 번 부인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은 안 따라 주는 겁니다.
한 순간에 새는 바가지 임을 알게 된 겁니다.
그것을 알아야 새는 장독대를 깨뜨릴수 있는 겁니다.
새는 바가지임을 모르면 여전히 또 기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부에서 그 질문에 답할 길이 없기에
외부에서 오는 겁니다.
그 질문에 답할 것이 옵니다.

그것을 뻔뻔스럼을 통해서 외부에서 왔단다 라고 외쳐야 합니다.
내 속에서 내 내부에서 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라고 그런 근거를 대고서는 외부에서 왔다 라고 뻔뻔스럽게 외쳐야 하는 겁니다.

베드로 보십시오 얼마나 유치하고 뻔뻔스럽고 낮짝이 두꺼운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를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어처구니 없게도 주님께서 안다고 주님을 걸쳐놓고 당돌하게 답변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 사랑하는지 주님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라는 답변입니다.

참 나!! 이거 완전 억지요, 모순이요, 말도 안되는 소리 아닙니까?
이 말도 안되는 얼굴에 보통 철판을 깐 것이 아닌 이 답변만이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외부에서 덮어버린 사랑을 제대로 아는 자의 답변인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고집은 끝까지 자기 내부에서 사랑했던 것들을 모아서 답하고자 하는 완악함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제가 강이아빠랑 나눈 대화가 이겁니다.

바로 그 자기내부에서 말씀을 실천한 봉합술로써 맥구어채운 것들로써 내세우는 것들을 쭉쭉 찢겨지는 그 내용물을 거치는 과정을 통해서 출저를 보게 된다고 말입니다.

가인에게 죄의 소원이 덮쳤습니다.
그리고 아벨이 어디있느냐 라는 질문에 내가 아우 지키는자입니까? 라는 답변으로 [지킴당하는 자]가 졸지에 공중으로 날라가버립니다. 공중분해됩니다. 마치 생명나무 부랴부랴 철거당하듯이. 사실상 죽임당합니다.
그럼으로 인해 아벨을 상처내고자 홈페이게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가인 자아에게 그 홈페임의 상처가 되어 그 벌어진 상처의 틈사이를 맥구어 넣고자 이래 저래 봉합하기 바쁩니다. 그래서 이마표도 받고 또 성을 세우고, 또 영웅들을 낳아서 자기 방어막으로 아무리 삼아도(그것이 필드. 영역. 처소가 됨 = 애굽 10가지 신의 방어막 재앙) 그 벌어진 틈을 멕구어 넣을 것이 없습니다.

그 결핍은 더더욱 벌어지고 채울수가 없지만 그 결핍이라는 큰 구멍은 점점점 더 벌어짐으로써 막을 길도 없습니다. 그 지옥의 구멍을 졸지에 예수님에게 뒤짚어 씌운 겁니다. 아벨을 죽였듯이 이 결핍을 너 때문에 생긴 것이다 라고 말이죠.

(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를 인간이 짖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인간을 다루고 삼켜버려서 죄가 장악해 버렸습니다.
그 결핍을 채울 길이 없는 지옥의 소원에 갇혀 버린 겁니다.

인간 자체가 지옥 구멍처럼 뻥 뚫혀진 겁니다. 인간이 지옥덩어리 결핍체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다윗도 죄의 소원이 덮쳤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똑같이 죄의 소원이 덮쳤습니다.
사도바울에게도 똑같이 죄의 소원이 덮쳤습니다.

도저히 빠져 나갈수 없는 죄 아래 갇힌바 된 겁니다.

가인을 포함해서 네 명 (다윗, 베드로, 바울)과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은 빠져나올수 없는 죄의 소원에서 한발자욱도 벗어날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명에게 말도 안되는 것이 외부에서 찾아왔습니다.

일방적인 용서입니다.
조건부의 용서 아닙니다.
앞으로는 죄를 짖지 말라 라든지?
앞으로는 새생명의 삶을 살아라 라든지?
앞으로는 성화만 하라 라든지?
따위의 조건 갖추어 완료 되고 조건미달의 미완료 되는 그런 용서가 아닌

무조건적인 용서가 옵니다.

그것은 출처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출처인 어디서 곧 처소가 아디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 처소는 반드시 가짜 처소를 가짜 출처를 거쳐서 다가옵니다.

그 가짜 처소는 다윗에게 덮쳐진 죄의 소원과 대비된 소원의 상처를 거쳐서 온 겁니다.

베드로에게 덮쳐진 사탄아 물러가라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 그 죄의 소원과 대비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상처(쩍쩍 갈라진 뼈)를 거쳐서 온 겁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십니까? 너가 핍박하는 예수 이다. 라는 핍박 받는 예수를 거쳐서 죄의 소원과 대비됨의 차이성으로 바울에게 또 다른 소원이 덮쳐진 겁니다.

결국 죄의 소원을 거치지 않고서는 다른 소원을 알길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뻔뻔스럽다 라고 표현한 겁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미쁘다 라는 겁니다.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데, 어리석기 짝이 없는데 그 어리석음을 가지고서 그 어리석음이 옳았다 라는 고백을 외쳐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믿음이 가는 것들, 충분히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고 설명이 되는 것들을 외치면 될 줄로 아는데 그것이 바로 시험들게 한다는 겁니다. 즉 남을 넘어뜨리는 겁니다.

누룩이 바로 바리새인의 가르침인데 충분히 납득이 되고 믿음이 가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것(사람의 일) 곧 비현실적인 것으로 설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것(하나님의 지혜인 어리석은 십자가)인 유일한 현실인 예수님의 죽음을 가지고 (도리어 실족케 하는 십자가 죠= 유일한 미쁘심 그러나 전혀 안믿겨지는 믿을수도 없는) 증거하는 것이 유일한 시험에 들지 않게 하는 악에서 구하는 미쁜 말이다 라는 겁니다.

바로 그 뻔뻔스러운 미쁘심(십자가의 모순, 불륜, 어리석음, 실족케하는 넘어뜨림)을 거쳐서 사랑을 외치기 때문에 아무도 안믿도록 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상처를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홈페인 갈라진 틈을 더욱더 쭉쭉 찢어서 벌려버림으로써 그 속에서 미쁘기 짝이 없는 미쁨 중에 미쁨이

다윗을 회개 때려치우고 노래를
기도 때려치우고 신나게 춤을
금식 때려치우고 배불리 먹음을

뻔뻔스럽게 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바리새인 금식 기간에
먹보요 술꾼이요 세리와 창기와 죄인의 친구로다 라는 소리를 꼭 일부러 바리새인에게 들을 수밖에 없는 그 뻔뻔스러운 별명을 지음 안 받고는 못배기도록 자신을 어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잔칫날에 누가 금식하고 기쁜 노래 울려 퍼지는 혼인잔치에 누가 초상집 슬픈노래를 부리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혼자 신랑신부 결혼식 잔치를 벌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부러 회개하는 금식 눈물 흘리는 날에 말입니다.

또 반대로 예수님이 우실 때에는 인간들은 예수님을 찢어죽이는 페스티발을 엽니다. 어쩜그리 우리는 예수님과 안맞는지? 차라리 안 맞음을 인정하는게 어떨까요?
우리가 아무리 맞추어도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어떤 일치점도 비켜갑니다.

왜 이렇게 삐딱할까요?

처소 곧 출처를 들추어내기 위해서입니다.

너거들의 출처는 도저히 예수님과 출처가 다르고 차이가 나는 악마가 너희 아버지 임을 들추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출처가 다름을 모르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길이 없습니다. 그저 어제까지 친하게 지내는 인물로만 볼 뿐입니다. 다름 뿐만 아니라 그 차이를 극대화 시킵니다. 그래서 상처를 더 벌려버리셔야만 하는 겁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가 그들의 아버지요 출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출처 바꾸기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처소를 약속하신 겁니다.

제자들이 바꿔 달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도리어 자신의 출처가 자신이 생각한 것과 안맞을까봐 늘 걱정할 뿐입니다.

그 시험이 바로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가 나를 넘어뜨릴려고 하는 시험

곧 출처 만들기 인  십자가 라는 잉태의 장소 완료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믿음직스러운 성전 율법 하나님을 고수하는 터를 사수하는 겁니다.

이 둘이 서로 충돌 되는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출생지를 바꿔버리고자 모든 인간들을 십자가에 못 밖고자

저주의 길로 갑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들을 절대로 어두운 저주의 길로 가는 것을 허용치 않고 또 예수님 조차도 못가도록 막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특징입니다.
인간들의 해석에서의 빛이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어두움이요
인간들의 어두움인 유일한 저주인 십자가가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유일한 생명의 장소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반대로 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서?

상처를 난도질 하면서

무엇을? 저들이 생각하는 빛, 하늘, 하나님, 선함, 행함, 의미있는 것들

모조리 상처내고 그 상처를 봉합도 못하도록 쭉쭉 찢어버리면서 말입니다.

다윗과 베드로와 바울은 고백합니다.
더 이상 봉합하고자 해도 아예 못하도록 극과 극으로 벌렸기에
내가 손댈 인생은 이제 날라가 버렸다고

그러니 춤추고 노래하고 먹고 마시고 할 뿐인 겁니다. 뻔뻔 스럽게 말이죠.

죄의 소원이 덮쳐진 자욱을 가인처럼 봉합하고자 결핍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 홈페인 자욱을 그대로 더더욱 찢겨지면서 나 이런 원수도 용서받았노라 라고 외치면서 돌아다니는 겁니다. 그것을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 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손 댄 작품입니다 라고 말이죠.

무엇이?

홈페임이 말입니다.

찢으셨으나 싸매어주신다는 것은

성화론자들 주장처럼
자기부인 했고 자기부인을 지켰다면 언젠가는 다시는 자기부인할 꺼리가 없어져야 합니다.
자기부인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부인을 못하기 때문에
자기부인 할수 있는 내부의 능력이 아예 없기에
외부에서 자기부인하도록 자기부인할 꺼리 곧 원수성을 계속 유지케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일입니다.

바로 그것이 홈페임입니다.

그 상처를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인 수치를 빨리 빨리 제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 수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 받았다 라는

죄수 복을 빨리 벗어버려서 의인의 옷을 갈아입고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죄수 복에 빨간 도장인 피를 발려서
이런 죄수임에도 불구하고 피까지 발렸다 라고

죄의 소원을 거쳐서 아들의 소원의 두 흔적을 둘 다 보이면서 증거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처소, 출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처소, 가짜 처소
거짓 악마의 자식은 그것이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면을 쓰고서 양의 탈을 쓰고서
죄수 복을 빨리 벗겨버린, 상처를 후다닥 봉합해 버린 숨기움으로 속이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출처를 인간의 손에 맏기질 않고 손수 이루심으로써

인간이 손 대지 않은 그 출처로써

죄의 소원을 거쳐서 아들의 소원을 증거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잉태된 자입니다.

우리는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새 처소 새 출처로써 완료되었습니다.

그 흔적으로 과거의 원수된 죄의 소원이 덮친 육체를 가지고서(거쳐서)
그 상처와 그 홈페임과 그 갈라진 저주의 틈사이에서 나온 새출처인 십자가를 통해서

성령의 전을, 완료된 그리스도의 몸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뻔뻔스럽게
죄의 소원이 덮쳐 예수님을 죽인 그 원수성을 가지고서(거쳐서)
이런 죄도 용서 받았다 라고 외부에서 온 사랑의 소원을 당당하게 외치는 겁니다.

왜냐하면 출처, 처소, 근원, 고향, 본향, 뿌리, 나무 때문입니다.

선악나무를 거치지 않고서는 생명나무를 알수 없고
죽음을 거치지 않고서는 생명을 알수 없고
어두움을 거치지 않고서는 빛을 알수 없고
슬픔 저주 심판 거치지 않고서는 복을 알수 없고
배고픔 거치지 않고서는 배부름의 안식을 알수 없도록 하셨듯이

도저히 봉합할수 없는 상처 홈페임의 쭉쭉 찢어버리심

거치지 않고서는

외부에서 마련된 새 처소를 알길이 없습니다.

그 새처소가 미래에서 덮친 자는
더 이상 자기의 육체를 위한 시험들 꺼리에 미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뻔뻔스럽고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말도 안되는 예수님의 앞뒤 안 맞는 질문에 말입니다.
방금 배신 당해 놓고도 비현실적인 질문을 합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3번씩이나 말이죠. 집요 합니다.

베드로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합니다.
내부가 박살이 났으니 비로소 외치는 고백입니다.

죄의 소원이 덮쳤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아들의 소원이 덮쳐서 외쳐지는
본인도 예상못한 뻔뻔스러운 외침입니다.

내가 주님을 억수로 사랑하는지를, 주님께서 억수로 잘 알잖아예?
내가 주님을 억수로 사랑하는지를, 주님께서 맹글어 놓았으니 어쩔수 없어예?
참나 내가 주님을 억수로 사랑하는지를, 내보다 주님께서 더 잘 아시면서?

바로 이런 외부에서 결정난 사랑의 내용물인
십자가의 흔적으로(말도 안되는 모순인 십자가의 불륜 : 어리석음. 상처, 홈페임)
먹이라 치라 먹이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사도행전에서 살펴봤듯이 베드로는 성령으로부터 저렇게 찢겨짐을 당하면서
교회에 증거합니다.

베드로 본인이 당한 그 내용을 에스겔이 대언하듯이 하는 겁니다.
베드로 본인이 방금 전까지의 바짝 바짝 말라 비틀어진 심히 가득한 폭삭 주저앉은 뼈다귀처럼 마른뼈에서 생기입음을 당한것처럼 원수의 자리에서 사랑이 뛰어듬을 당하는 겁니다.

이제 인자(홈페임의 흔적을 앞세우는)는 사랑에게 난도질 당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겔 37:1, 개역)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겔 37:2, 개역)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겔 37:3, 개역)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겔 37:4, 개역)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 37:5, 개역)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겔 37:6, 개역)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 37:7, 개역)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 참으로 우리는 진리에 소외 당함이 마땅하고
우리의 육체가 난도질 당함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대신 소외 당하셨고
주님이 대신 난도질 당했습니다.

그 난도질 당하는 상처를 취소 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확대 증식 시켜서

이제 우리가 사랑에 의해 난도질 당하는

원수의 성문을 활짝 열고 다니고
무덤을 활짝 열어재끼고
상처를 봉합할려고 종교의 화목이 아닌

이 걸림돌인 십자가가 옳았습니다 라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소리를 뻔뻔스럽게 외칠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미쁘기 짝이 없는 아름다운 소식을

저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이 십자가 복음을

만방에 전하도록
우리의 몸을 난도질 하여 주시고
그 찢겨진 상처를 더욱더 쭉쭉 벌려주시옵소서

우리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아들 예수님을 쭉쭉 찢으신 그 화목제물을

우리는 뻔뻔 스럽게 증거하고 자랑하고 노래하고 기뻐할수 있도록
미쁘기 짝이 없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매일 매일 그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그 어떤 근거도 나에게서 찾을수 없는 뻔뻔스러운 답변으로 화답케 하옵소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십니다.

이 고백 외에는 다른 고백이 없도록

우리 입술을 찢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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