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총정리 = 총알받이 완성

봉합불가로서의 부정적인 처소 완성 = 죄인 완성


요한복음은 빛과 어두움의 대립 또는 영과 육의 대립 충돌입니다.

자 이런 차이성이라면 우리는 쉽게 요한복음을 알수 있습니다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인고 하니
그 빛의 자리에 정작 예수님이 아닌 인간이 그 자리를 앉아버렸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부재성으로 뒤바뀐 취지와 이로 인해 인간의 악마성이 대비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두움의 자리에서 홀로 빛 되심을 드러내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영의 자리에 앉아버려서 도저히 육을 입고 오는 예수님을 알아먹을 길이 없어졌습니다.

도리어 자신들의 영의 세계에 예수님을 철저하게 소외 시키는 방식으로 요한복음에 나타난 인간들의 일관되고 통일적인 모습이 드러납니다.

왜 이렇게 위치자리가 뒤 바뀐 것일까요?

자 이런 배경을 깔고서 요한복음을 살펴보면
아무리 봐도 예수님은 인간들이 볼때에 무조건 부정적인 존재로만 인식이 될 수밖에 없고
거기에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예수님 또한 그들에게 절대로 포착되지 않는 밉상 미움 받는 짖만 골라서 악마처럼 인식 될 수 밖에 없도록 만 행동하십니다.

서로가 서로를 악취라고 주장하고 할수 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쌍둥이 외침에서 누구 말이 맞는가 라는 겁니다.)

마치 물과 기름처럼 도저히 썩일수 없는 방식으로만
너가 동 하면 나는 서 하고 너가 서 하면 나는 동하겠다는 식으로만 일관 합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고 하니

인간에게 씌인 비닐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뭔가 씌여진 꽁깍지 씌여진 존재.

제가 아주 재미있는 영화를 토요일 밤늦게 보다가 주일날 교회에서 잠이 와서 혼난적이 있는데

그 영화 제목이 바로 [내게 너무 가벼운 그녀]입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인간은 뭔가 씌였다 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주인공에게 한 심리상담가가 몇몇의 단어로 최면을 걸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추녀가 미녀로 보이고 미녀는 추녀로 보이고
고도 비만의 뚱뚱녀가 날씬녀로 보이고 정말 몸매 잘 빠진 날씬녀는 비쩍 마른 쭈굴쭈굴 할머니처럼 보이는 겁니다.

실제로 이 영화의 취지가 어떤 단체의 상황을 영화로 표현한 것인데
미국 사회에서의 장애인과 소위 사람들이 생각하는 외모에서 반대로 보이는 자들에 대한
시선을 바꾸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그런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외모에 대해서 언급했던 이유가 이 영화처럼
사실상 최면 또는 꽁깍지 씌여서 살아가는 것임을 알수 있게 된 겁니다.

이 영화의 취지도
결국 인간은 꽁깍지 씌인채로 살아가는 겁니다.
(외모만을 보는 사람은 외모찾고, 외모 찾는게 당연한데 뭔가 씌여 외모 안보게 된자는 외모 안따지고 산다는 두 패거리 양쪽을 인정하자. 다르다 라는 차이성을 인정하자 라는 취지였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특히 요한복음은 그 차이성을 양립으로 인한 서로의 존중과 이해 상호인정이 아니라
오로지 충돌 곧 전쟁으로 어떤 주체끼리의 내기? 소욕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을 원인은 원인 끼리 놀고, 결과는 결과 끼리 노는 식이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제가 어제 [포화 속으로] 라는 영화를 보면서 요한복음의 총정리 제목과 일치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결국 총알받이 완성이다는 겁니다. 그냥 죄인 완성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 하는 그런 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지독한 미움 당하는 죄인입니다.
(성화론자들이 버럭 화를 내는 아직도 죄인이냐 말인가? 라는 그 죄개념이 아닙니다.
나의 행동 여부로 인한 죄가 아니라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아무런 이유 없이 죄수복을 입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면서 죄인의 모습으로 내려 오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야 당연한 것이지만 그분은 죄인의 자리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재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 죄수복을 입게 되는 겁니다. 이상하게도 거부하는 쪽이 있다면 수상한 겁니다.
종말의 옷을 입은 겁니다. 발가벗겨짐을 당하는 총알받이 옷을 입게 된 겁니다. 아 이렇게 예수님이 총알받이가 되셨구나 라고요)

죄인이라는 피조물 결과물은 자신이 지독한 미움을 받는 것을 결정한 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가 세상을 악하다 라고 했다는 그 이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 한다고 했습니다.

(요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그 이유는 너희가 미워서가 아니라 나 예수를 미워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요 12:25, 개역)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 15:18,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 15:19, 개역)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23, 개역)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요 15:24, 개역)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요 15:25, 개역)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야말로 미움 작렬 입니다. 그 미움을 미리 앞당겨 받는 옷이 옷 곧 처소가 바로 종말의 옷 종말의 무리. 총알받이 입니다.)

요 7:7 이 말이 뭔 말입니까?
(요한복음은 그야말로 미움작렬 서로 서로의 양쪽 패에게 지독한 미움 퍼붓기 입니다. 그래야 전쟁이 성사가 됩니다. 질투가 성사가 됩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빼내기 곧 전리품이라는 긍휼과 자비와 은혜가 피어나는 겁니다. 홈페임 속에서 새것을 끄집어 내는 방식 입니다.)

중간에 낑겼다 라는 겁니다.

누구처럼(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 두 양쪽의 실상 실체를 보여주기 위한 미끼로써 숨어있는 근원을 양쪽 실체를 보여준다는 겁니다.

거기에 동원 된 것이 바로 잉여물입니다.

두 양쪽의 숨어있는 것이 뭡니까?

한 쪽은 죽음이라는 무기를 들고 있는 마귀 이고
또 한 쪽은 그 죽음이라는 무기가 허구임을  그 죽음의 실체인 두껑을 확 열어재껴 버립니다.

자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허구를 들고서 마귀가 모든 사람들을 장악해야만 하고 그 장악 당한 상황이 기정 사실이 될 때라야 예수님이 육으로 오심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영의 자리와 빛의 자리에 앉아서 호령하고 있는 왕의 자리에 앉아
모든 백성들을 쥐락펴락 하는 입장에 놓인 겁니다.

재미있게도 이것은 마귀가 그러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허락한 바입니다.

결국 마귀는 지금 하기 싫은 짖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정작 죽음이라는 무기를 쥐어도 자신은 이 죽음이라는 무기가 허구임을 압니다.
그런데 그 허구를 심는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원치않아도 하는 겁니다.

결국 마귀는 빠져나갈 구석이 없습니다.

마귀로써의 자족은 그저 자기 일에 충실했다 그거 뿐입니다.

충실해 봤자 주님이 등떠밀어서 했는 것이니 결국 본인이 취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일은 실컷 해놓고

남 다 좋게 해 주는 식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마귀가 얼마나 예수님을 싫어할 수 밖에 없는가 말입니다.

결국 죽음이라는 의미는 마귀가 보여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십니다.

죽음이란 인간에게서 발견하는게 아닙니다.
예수님에게서만 발견 되는 것이 죽음입니다.

저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웃깁니다. 저주 받았다 심판받았다
또는 나는 왜 팔자가 이 모양인가 신으로부터 저주 받은 것이 아닌가? 라고 투덜 댑니다.

그러다가 좀 잘 된다 싶으면 자신이 신으로부터 축복 받았다고 또 까불 까불 거립니다.

결국 축복의 여부도 저주의 심판의 여부도 모조리 자기를 원인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저주의 의미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죽음이라는 저주는 누가 와야 비로소 풀립니까?
마찬가지로 축복이라는 사랑은 누가 와야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겁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이런 저주와 사랑의 의미를 아무에게나 알려주지 않고자 비밀로써 오십니다.
비밀이라는 것은 숨어있는데
아무에게나 포착되지 않고 보이질 않는다는 겁니다.
그럼 누구에게만 보이겠다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 마음대로입니다.

예수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알죠 저 한테만큼은 알려 주십시오
라는 것을 유발케 하면서 그런것들이 안 먹혀든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오십니다.

결국 비공개 속에 공개로 오는데 예상치 못한 자들에게 공개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나타내심] 이라고 합니다.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 말은 한 쪽은 숨기시고 한 쪽은 나타낸다는 겁니다.

왜 이런 두 패 가름이 있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예수님 마음대로 이다 라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마음대로 이다 앞에서 졸지에 소외 당하기 때문에 화를 낼 수 밖에 없는 근거가 되는 겁니다.

가인의 죄란 정작 아벨의 제사 받음 앞에서 가인 자신의 제사는 소외 당했다 라는 것에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웃깁니다. 만약 가인의 제사를 받아야 만 한다는 조건이 성립이 된다면 그것은 결국 가인 마음대로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죄 맞죠


여기서 더 깊게 들어가면 그렇게 아벨의 제사를 받았다 손 치더라도
소외 라는 입장에서 자기멋대로가 안 먹혀들게 되니 아벨을 소외 곧 찢어버립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인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볼때에 동생 아벨을 살인했다 라고 사적인 죄 관을 우리가 볼수 있겠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로써  창조 자체가 피조물에게서는 자유요 마음대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마음대로가 창조주의 고유성이 되지 못하고
그 마음대로를 판단하는 선악이 졸지에 생겨버림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대로를 거부할 수 있는 자기의 마음대로가 있게 된 겁니다.

그러니 두 마음대로가 있을 수가 없게 된 겁니다.
한 쪽이 마음대로가 형성이 될려면 다른 한 쪽은 소외가 마땅한 겁니다.
그런데 그 소외는 곧 한 쪽의 마음대로임에 있어서
여기서 반기를 들게 된 겁니다.

결국 창조에 대한 거부인 겁니다.

왜 이 개인가정의 문제로 취급하지 않고
모든 인간의 문제로 취급하면서 살인문제를 다루는고 하니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죽였다 라고
성경은 모든 인간에게 뒤짚어 씌우는 씩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결국 이 아벨의 족보에 뛰어듬으로 인해서
그 말이 맞다는 것이 증명이 된 겁니다.

죽음이란 인간에게 해당 되지 않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에게만 해당 되는 사항으로써
그 죽음은 바로 생명을 보여주기 위한 죽음인 것입니다.

인간은 죽는 것이 아니라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그런 흙으로 돌아가는 입장에서 죽음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운운하는 경우는
오로지 그 흙된 인간이라는 장막 껍데기에 예수님의 죽음의 흔적이 있을 경우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상관도 없으면서
죽음이니 생명이니
저주니 사랑이니
미움이니 편애이니
심판이니 구원이니 따위를 운운하는 것은 결국 자기의 우상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고맙게도 요한복음 때문에 이제는 반대로 해보는 겁니다.

놀랍게도 우리보다 훨씬 똑똑하고 우리보다 훨씬 지혜롭게 우리보다 훨씬 믿음좋고
우리보다 실천력 훨씬 뛰어난 유대인이나 바리새인들이
여전히 우리의 옛버릇을 고수하고 있으며
그런 모습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 빼고 모든 인간에게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고맙게도 요한복음 때문에 반대로 위치를 잡아보면
이렇게 됩니다.

빛의 자리에 정작 유대인 바리새인들이 다 차지하고 있습니다.
서로 앉을려고 난리입니다.

거기서 빛되신 예수님 마저 떠밀려서 졸지에 인간이 다 앉아버리는 바람에
어두움의 자리에 예수님이 앉게 됩니다.

자 그럼 공식이 이렇게 되겠지요.

빛 (바리새인) vs 어두움 (예수님)
선택 (유대인) vs 버림 (예수님)
구원 (유대인) vs 심판 (예수님)
사랑 (율법사) vs 원수 (예수님)

하여튼 모든 좋은 창조의 자리에 정작 창조주는 밀려버리고 피조물들이 다 앉아버리고
도리어 소외된 피조물의 자리에 정작 피조물은 없고 예수님 혼자만 딸랑 등떠밀려 앉혀져 버렸을때에

바로 그 예수님이 앉은 자리가 바로 십자가의 자리 였고
인간들이 때려죽어도 싫어하는 자리 였음이 드러나는 겁니다.
아무리 인간이 기독교를 다니고 종교를 가지고 백날 믿는다고 해도
십자가의 자리는 베드로가 도망칠 정도로 극구 반대의 버림의 자리요 소외의 자리입니다.

바로 이렇게 어떤 인간도 앉을 수가 없는 그 자리가 바로

창조의 자리인 겁니다.

자 이렇게 운을 띄우고 요한복음 1장을 들어가면

마치 창세기 1장 1절처럼 처음시작 창조시작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창세기와 다른 점은 이미 모든 인간들이 창조에서 소외된채가 아니라
저마다 다 한 창조 한다고 손과발 소매를 걷어붙여 한 창조 거들겠다는 심뽀에
모조리 비켜가면서 등장하는 시작하는 요한복음의 창조인 겁니다.

모조리 비켜가는 것은 딱 한 길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라는 것이 이미 설정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소외 또는 버림 이라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그 설정에서

예수님이 벌리시는 길은 딱 하나 뿐입니다.

인간의 창조에서는 다른 모든 것은 모방해도
도저히 이거 딱 하나는 모방 못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겁니다.

물론 자살할 수 있다고 우길수도 있고
남을 위해서 사랑마저도 실천할 수 있도록 내어줄수 있다고 우깁니다.

그런데 그런 심뽀 조차도 정작 창조자 곧 하나님과의 일치성에 해당되지
하나님과의 차이성인 버림은 아니다 라는 겁니다.

본인이 하나님이기에 또는 하나님과 동일하기에
일치하고자 하기에 그런 행동 따위를 한다는 겁니다.

여전히 그 하나님의 자리는 부재성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창조성에서는 십자가란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 창조성을 십자가에 둔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자신들의 창조성을 십자가에 둘려고 해도 해도 도저히 안되는 것은
마치 죄의 소원이 씌인 가인이 선을 넘듯 죄의 문턱을 넘을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결국 인간은 그런식으로 죄아래 갇혀서 죄에게 농락당하는 주제에
죄를 자기가 실수로 짖니 안짖니 어떤 행동으로 죄 지었다 안 지었다 라는 그 죄의 장독대에 빠져버린 상태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죄를 다스릴 정도가 될려면

죄라고 규정하는 법을 깨뜨려야 하고 그렇게 규정짖는 구조를 깨뜨려야 하는 겁니다.
깨뜨리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난 따로 법을 설정해서 하겠다 라고 해본들
그 따로 법을 설정하겠다 라는 것이 오냐 내가 해줄게 하고 가입된 율법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에 딱 드는 법은 이미 율법 속에 다 있는 겁니다.

더군다나 타인과 대중들이 다 공감까지 다 해버렸으니 빼도박도 못합니다.

율법 일점 일획이라도 빼거나 더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셈인 겁니다.

그럼
이런 죄의 소원을 다스리고
또 넘어서며
또 깨뜨릴자가 누가 있느냐 라는 겁니다.

즉 하나의 조건만 완성하면 안됩니다.
그렇다고 그 하나의 조건 조차도 완성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을 다 완성 할 자는 이 땅에서는 없도록 율법 자체가 그렇게 사람들의 완악성을 근거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뭔 말인고 하니 율법 자체가 나 보다 더 율법 잘 지키는자 없지 라는 인간 지 마음대로 해석 한다는 그 완악성을 근거로 해서 지어졌기에 올무가 되는 식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외부에서 개입만 하면, 여기서 또 외부 라고 하니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는데 그 다른 사람은 외부가 아닙니다. 똑같은 한 아담입니다.

그렇다면 외부란 다른 아담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출신성분이 다른 겁니다. 하늘에서 난 자를 말합니다. 난 자 라고 했다면 태어났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태어났다 라는 것은 땅의 언어로써 한계점이 있고 하늘에서 난 자 라는 개념은 결국 죽으시러 이 땅에 와야만 하는 자를 두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출처인 그 근원과 뿌리와 근간이 하늘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을 거룩 이라고 합니다.

결국 율법은 이 거룩을 근거로 만들어 진 겁니다.

거룩 거룩 하니까 깨끗함이라고 착각하는데 아닙니다. 하늘의 출저를 두고 말하는 겁니다.
결국 상대적으로 땅의 출처를 둔 자들은 아무리 말씀 지키고 아무리 말씀을 실천하고 율법지켜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출생의 근원지 꼬리를 아예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처소 문제가 바로 출생지를 아예 바꿔버리겠다는 취지입니다.
그럼 그 출생지는 어디가 됩니까?

(요 1:13, 개역)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로 난 자들 이다는 겁니다.

어 뭔가 다르지요 차이 나지요?
뭐가 차이 나나요?

인간 자체가 하나님이 되어버렸기에 자신이 자신을 근원지로 삼고 자신이 자신을 원인으로 삼는 그 사고방식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갇혀 버린 자인데
그 갇혀버림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율법까지 가입이 되어서 죄아래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도록 이중 삼중으로 자물쇠가 채여진 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 괴물인데

(히 2:14, 개역)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 2:15, 개역)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그 출처를 바꿔치기 교체작업을 하겠다 라는 겁니다.
그냥이 아니라 자신의 출처를 삭제 당하는 그 아픔을 고스란히 격도록 해서
이동함으로써 그 차이성을 뼈 속 깊히 박아버리겠다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로 난 자

라는 하나님이라는 출처가 새로 생겨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전에 알던 하나님이 아닌 겁니다.

새로운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새언약이라고 합니다.
어느정도로 새로운가 하면
구약에서 하나님이 강하게 나오면 나올수록 인간들은 그것마저도 힘이 된다 싶어서 다 흡수 빨아들여서 다 자기것으로 만들려고 발악에 발악을 한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구약의 하나님 마저도 다 캐취(포착) 했다는 식으로 나올 정도입니다.
어느 정도인고 하니 모든 흉내를 다 낼 정도입니다. 무섭게 하면 무서운것도 흉내로 일치
관용과 자비로 하면 그것도 흉내로 일치, 질투와 투기로 하면 그것조차도 일치.

사실은 단 하나도 캐취한적 없습니다. 힘을 쫏는다는 것을 알기에 착각토록 만든 겁니다.
내용은 애초부터 관심 없고 외적인 겉은 다 쪽쪽 빨아서 카피해서 저장한 겁니다.

자 그런데 새 하나님은 바로 그런 하나님을 다 흡수했다고 자부하는 그 엉터리 캐취 해석으로 가득한 그 자들 손에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 가짜 하나님을 찢어버리시는 겁니다.

그럼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대변하는 자로써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쳐버리는 식입니다.

3자 입장에서는 (물론 3자의 영역이란 있을수 없지만 3가지 역할로써 본다면)

하나님 스스로가 자신의 언약을 치면서 그 쳐버린 깨진 그 틈사이 홈페인 그 찢어진 자리에서 새언약을 완성하시는 식으로 창조를 이루시는 겁니다.

쉽게 이해되도록 말한다면
예수님 자신이 어제의 하나님을 지금까지 이어와서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하나님을 쳐버려서 그 찢어진 그 틈사이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의미를 드러내는
유일한 잉여성을 보여주더라 라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매일 매일 새로운 겁니다.

하나님 자신이 자기부인을 해서 나온 잉여성이기 때문에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한 번만 우연히 더 나은 경우가 아니라

매일 매일 이 전 것 보다 더 나은 경우를 계속 계속 나타내는 잉여는
이 십자가의 방식 뿐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란 구원용이 아니라.

스스로 찢어버리는 그 찢어짐에서 새것을 뽑아내고 창조하는 기존 것의 부정의 십자가
곧 심판용 이다는 겁니다.

그 심판의 자리를 완성 하신 것이 바로 처소 이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꾸 착각하기를 성령을 자꾸 내 편으로 끌어당기면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이 그랬듯이 성령 조차도 손아귀에 쥘려고 하는 가인제사가 되는 식입니다.

성령에게 내비둬
즉 성령이 임의로 분다고 일부러 표현한 이유는
상대적으로 성령을 붙잡을려는 인간의 종교적인 악마성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처소 라는 창조의 자리도 인간은 자기가 만들어서 기여이 자기가 자기를 원인으로 하는 것을 만들어 내겠다는 심뽀를 염두하고서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창조의 자리 마저도 인간이 만들어 내고야 말겠다 라는 것이
놀랍게도 신학입니다.
교리입니다.

초신자를 다루든 기존교인을 다루든 그 다루기의 교본으로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이 얼마나 악마적입니까?

자기를 원인에 두겠다는 것은
나오지도 않는 젖을 먹이겠다 라는 겁니다.

아무리 젖을 짜도 나오지도 않는데
끝까지 쥐고 있는 이유가 뭘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솔직하게 말씀하십니다.
내려와서 이런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 풍성한 젖에 물리자

그런데 그 풍성한 잉여의 젖은 창조의 젖은 딱 하나 십자가다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산다.

사람들이 기겁을 합니다.

너는 나보다 더 젖이 더 안 나올 것 같은데 왜 그런 섬득한 소리를 하는가?

예수님은 자신을 처소로 삼아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지옥과 천국의 심판 기준으로써 확정되는 심판주가 되었다 라는 보증수표를 줄때까지

이중 삼중으로 어떤 누구도 그 풍성한 생명의 젖줄을 손 못대게
차단 하십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처소로 삼았다 라는 말은
곧 생명의 근원으로 삼았다 라는 뜻으로써 너거들 원천을 갈아치우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소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거들의 안식처요 도피처인 너거 하나님은 가짜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믿는 하나님은 결국 자기 좋으라고 믿어낸 가짜 믿음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탓할 자가 나타나지 않은 이상은 넘어갈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문제 삼고 탓할 자가 나타난 이상은 이제 집을 옮기지 않으면 이사하지 않으면 다 죽여버리겠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 소리는 누구에게만 심각하게 들립니까? 이방인은 아예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일부러 유대인들 들으랍시고 유대인이 믿는 하나님을 겨냥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죽을려고 환장한 거죠. 예수가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까불까요?

그것은 예수님 눈에만 보이는 겁니다.
젖도 없이 젖을 먹이니
풍성한 젖을 줘도 안 먹는 것은 완악함 때문이다 라는 겁니다.
여전히 자신의 젖의 가능성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가능성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믿는 하나님은 다름을 차이성으로 드러냅니다.

그 차이성을 보고 다들 화들짝 놀랍니다.
아무리 봐도 믿겨질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믿는 버릇대로 믿을 수 있는 대상 조차도 안 되는
믿기의 달인의 대상이 되지를 않으니까 말입니다.

믿는 그 믿음 조차도 매일 매일 부정해서 나오는 더 나은 믿음이니

기존의 믿음으로는 감당이 안되는 겁니다.

더 나은 믿음이 떴다면 기존 믿음은 제이 엠 절망을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새 하나님 곧 새 언약이 떳다면 기존 옛언야에서는 제이 엠 절망이라는 단절성을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아니 자신의 젖에 대해 여전히 희망이 있는데
아무리 외부의 타인의 젖이 풍성해도 그 젖을 쳐다라도 보느냐 말입니다.

자신의 젖이 바짝 말라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하나님도 바짝 얼머붙어야 합니다. 우상이란 약속을 성취 못한다는 뜻입니다. 성취 못하면 그거 가짜입니다.
자신의 그릇도 바짝 깨 부서져야 합니다.

자신이 불뱀에게 물려 온 몸에 독에 퍼져 있어야

비로소 저 장대 높이 달린 구리 놋뱀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은 그런 의미에서 불뱀을 풀어버렸다 라고 보시면 됩니다.

왜죠?

바짝 말라 비틀어져 버린 무화과나무처럼 너와 너의 하나님과 너의 그릇은 말로만 마음대로 멋대로 자유 라고 우기지만

아무것도 성취한 것 없는 그저 바짝 비틀어져 버린 말라죽은 무화과나무와 같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전제 되어야

비로소 접붙임이 의미가 있으며 그 접붙임의 나무가 바로 풍성하기 짝이 없는 포도나무다 라는 겁니다.

처소는 이런식으로 마련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선지자를 보낼때에

그 땅을 풍요롭게 할까요? 젖을 풍성하게 만들까요?

천만의 말씀

예수님 자신도 선지자로써 활동을 하면
졸지에 그 동네는 바짝 말라버리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흔적을 남깁니다. 그 표적이 바로 요나의 표적입니다.

풍성한 젖으로 안 옮길래?
지금 나오지도 않는 그 젖 곧 있으면 말라버린다 라는 통보요 선전포고입니다.

아예 없는 자는 오히려 기쁜소식입니다.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7, 쉬운)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와 같은 예루살렘아, 기뻐하여라. 아기를 낳는 고통을 느껴 보지 못한 예루살렘아, 노래하며 외쳐라. 남편이 있는 여자보다 네 자녀가 더 많을 것이다."』

어떻게 남편이 없는 여자가 남편 있는 여자보다 더 나은 제사
더 나은 자녀들을 두게 된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근원출처자리를 교체해 버리겠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 남편 싸움인 겁니다. 보호자 싸움입니다. 여기에 잉여물 곧 증인으로 참관 되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근원지를 파제낍니다.

너거들의 근원 뿌리가 어디 소속인가?를 파헤치고 찢고 찢고 계속 끝까지 찢어서라도
너의 남편을, 너의 원인자를 너의 뿌리를 들추어내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이라고 했습니다.

(벧전 2:9, 개역)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 52:7, 개역)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이미 근원이 정해져 버린 이상
미래가 완료 되어 버린 이상

본으로써 예루살렘을 파헤칩니다. 처소를 파헤칩니다.

본으로써 독생자를 내어주십니다. 원수들의 손에 죄값을 치르십니다.

저들은 괜히 건드린 겁니다.

괜히 건드렸어 괜히 건드렸어 어떻게 어떻게

총알받이가 되신 분이 바로 우리의 처소 되신 예수님 이였습니다.
꼭 총알받이 모습이 아니면 우리의 어두운 눈은 띄여지질 않는 겁니다.
바로 그 총알받이 모습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출생지가 총알받이 자리로 정해져 버린 이상
우리의 운명 또한 총알받이입니다.

유일한 창조로써의 피조자리입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목 베인 영혼들이 목이 베일 때 마다 마귀는 아 괜히 건드렸네 라는 식으로 잘못 건드린 겁니다. 우리는 오히려 빨리 내 목을 쳐 달라고 다 바짝 바짝 파헤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놀랍게도 나의 목이 달아나는 그 홈페인 찢어진 자리에
예수님이 머리로써 자리 잡는 겁니다.

내 목을 친게 아니라 예수님을 쳤으니 잘 못 건드린 것 맞지요.
그럼 내 목은?
원래 없었던 목입니다.
없던 목이라고 하니 짧은 목이 아니라.
원래 머리는 부재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옛언약을 고수하면서 그 머리를 상상으로 조합을 합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 댑니다. 손 대면 손 댈수록 더욱더 자신들의 완악함을 투사한 전형적인 우상인 자기를 위한 하나님만 조작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이야 말로 인간 최고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더 모순 점이 그런 배경 속에서 그 배경을 깔고서 등장한 예수님이니
누가 이 모순 점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어리석음 인데

그런데 우리는 한가지 힌트를 얻게 된 것이 있습니다.
성령 때문에 얻게된 것이지 우리 지식으로는 알 길이 없었던 겁니다.

바로 부재성입니다.

분명 머리가 없습니다.
마치 목 짤린 몸뚱아리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머리 부재의 처소

머리 있다고 우기는 것들을 모조리 목을 쳐버리고 돌아다니는 법궤인냥

더 나은 풍요성을 보여주더라 라는 겁니다.

분명 머리 없는데 말이죠.

마치 머리 있는 것처럼 행동 하더라 말이죠.
이것이 마태복음 25장의 천국비유(3가지 종말의 상황)로써 종말에만 나타나는 종말인간 종말단체 뭐 또 다른말로 해 보면 인자 또는 사람 같은 사람

전혀 사람같지 않은데 머리 부재 이니까
사람의 형태로써 사람 보다 더 사람 같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마치 쌍둥이 인자로써 인간이라고 우기는 인간을 머리 부재인 사람 같은 사람인 종말무리가 팔을 어긋맞게 종지부를 찍더라 라는 겁니다.

분명 머리 부재인 머리 없는 것은 머리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머리 있는데 나중에 보니 머리 없음이 들통나고 (열처녀 비유)

주인이 있는데 주인 없는데 주인 있는 것 같이 행동하고
주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 없는 것 같이 행동하는 (충성된종과악한종비유 일명 달란트비유)

분명 소자에게 한 것이 머리인 나에게 했다 라고 일방적으로 덧입혀버리고
소자에게 안 한 것이 머리인 나에게 안했다 라고 일방적으로 뒤짚어 씌워 버리는 (양과염소비유)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 저 쪽 하나님과 이 쪽 하나님을 두 패로 나누어서
한 쪽은 미래완료로써 미래완료가 덮친자로써 행동 할 수 밖에 하고(더 나은 제사 : 잉여)
또 다른 쪽은 기존의 것으로써 미완료인 우상성(죄의 소원)만을 띄도록만 하는

두 쪽의 근원은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결정해 버렸다는 통보성이 바로 종말에 벌어진다는 겁니다.

그것은 소외 된 채로 우리의 처소가 이미 결정나 버렸기에
새 처소 때문에 미래완료로 덮쳐지고

저들은 헌 처소 때문에 늘 미완료로써 기존의 것으로써 죽음 또는 심판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말라 비틀어진 젖으로써 생명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죽음이 또는 저주 또는 죄 심판 미움이 내 쪽에서 떠난 문제이다면
축복 또한 구원 또한 사랑 편애 긍휼 자비 용서 또한 내 쪽에서 떠난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마음 놓고 안심하고 뻔뻔스럽게 맞길수가 있습니다.

왜?

이미 난 심판 받은자요 멸망받은 자요 저주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 말라 비틀어진 나의 젖으로써는 더 이상 더 나은 것이 하나도 나올 것이 없기에

예수님의 풍성한 그 젖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곧 후사, 기업) 나 같은 죄인도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그 다정스러운 물으심 앞에

방금 예수님 배반하고 3번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 까지 하면서 도망쳤어도

너무 너무 뻔뻔스럽고 당당하게도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나 보다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내가 주님을 억수로 사랑하는 줄 나 보다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이 잘 아십니다 라고

이 모순 된 답변을

처소 곧 원천이 교체 되어서야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왜? 이미 처소가 총알받이 이기 때문에
사랑을 마음껏 다 표현해도 모잘라는 시간 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 다
양 이다
신부 다 라고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는 것은 젖이 풍성함으로써 먹일수 있는 증식을 말합니다. 생명의 증식 곧 십자가의 사랑의 증식 방금 베드로 너가 말한 그 사랑의 풍요성에 더 나은 증식으로써 완료 되었다 라는 겁니다.)

너는 너가 출처인 사랑이 아닌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즉 출처는 여기 뿐이다. 바로 부재의 자리 홀라당 다 타버리는 자리

내가 출처인 사랑만 먹고 사는 미래의 천국을 지금 미리 앞당겨 산다고 하는 겁니다.

이 부재성이 요한복음에서 남들에게는 안 비이는
처소 자리입니다.

출처 완성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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