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9. 예수님의 부활 vs 죄의 소원으로서의 부활

본문 : 요 20장


지지난 시간에 진리가 너를 진리에 소외 시킨 것이 진리이다
라고 했고

지난 시간에 매 맞는 자리에서의 진리 라고 했습니다.

진리가 어디 있습니까?

죽음의 자리 공포의 자리 지옥의 문을 여는 자리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매맞는 자리에서 모든 인간의 심판을 완료 했습니다.

곧 인간의 미래는 이제 심판 뿐입니다.

인자가 다시 오신다는 뜻은 심판자들의 주 로써 오심을 말합니다.

그 인자가 모든 인간에게 죽임을 당한 분이다는 뜻입니다.

즉 십자가는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죄의 소원을 덮친 겁니다.
예수님을 죽인 모든 인간에게 죄의 소원을 뒤짚어 씌우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동안의 십자가에 대한 인간들의 해석에 정반대죠

구원은커녕 십자가로써 심판의 보편성을 이루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보편성을 성령의 일이라고 합니다.

이제 육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의 일에 심판 받는 정당성이 바로 십자가로써 이루어진 겁니다.

땅 땅 땅 판결 곧 법적 효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힐문할자 없습니다.

토기장이는 바로 이 십자가를 완료 하고자 모든 창조물 곧 시간 공간 모든 것을 이 십자가 창조에 유일한 은혜 창조에 집중하도록 응축 되도록 한 겁니다.

이 응축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유일한 하나의 응축 점으로 튀어나옵니다.

바로 행함 곧 선악에 대한 지식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반응은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에게서

그런 하나님은 싫다 라는 겁니다. 비로소 인간들의 하나님 곧 우상이 튀어나옵니다.

이 십자가 로써만 튀어 나온 겁니다.

그렇기에 마귀나 우상이나 가짜하나님, 가짜 예수님, 거짓 선지자, 삯꾼 목자, 악령이 씌인 사람을 찾을려고 한다면 딴곳에 갈 것이 아니라 교회에 가보면 아주 아주 정상적이고 교양있어 보이고 정상적인 가정을 이룬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에 가보면 다 있습니다.

누가 봐도 딱 보기에 비정상적인 이단 말고(그들은 어차피 이단이기에 티가 나지만)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아주 정상적이고
정통적이고 역사적이고 그야말로 흠 잡을데 없는 그런 교회에 가봐야
제가 말한 그런 죄의 소원이 덮쳐진 자들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토기장이 곧 창조주가 이룬 십자가 때문입니다.

구원 이라는 안경으로 보면 알 수 없습니다. 구원용 십자가는 가짜입니다.
마치 가인이 자기 구원을 위해 이마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난 이후에 모든 사고방식이
자기 구원용으로 하나님을 해석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토기장이가 이룬 십자가 곧 심판용 십자가 또는 나무에 달린 인자 라는 안경으로 보면
모든 것이 반대로 보입니다.

강이아빠랑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유대인들이 일종의 지혜를 자기 구원용으로 다 해석했기에
그 지혜는 곧 자신들의 신앙이 되겠지만 실제로는 처세술이 됩니다.
어느 정도로 이런 처세술이 먹혀드는고 하니
인간 세계에서도 먹혀들고
하나님의 세계에서도 먹혀드는 것이 그들의 지혜입니다. 양다리 걸치기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그들 탈무드 구성은 묻는자가 있고 그 물음에 답하는 지혜자가 답변하는 형식인데

질문이 이겁니다.

왜 신은 인간의 눈동자를 검게 만들었는가?

답변은 어두움의 자리에서 빛을 바라보라는 것이 신의 뜻이다 라는 답변입니다.

아주 명쾌한 지혜죠

문제는 그들이 그렇게 답변을 하고
그 답변으로써 지혜자의 자리에 앉아버리니까
정작 어두움의 자리는 부재성으로 남아버린다는 겁니다.

우아 멋진 답변입니다. 라고 사람들이 그 지혜의 답변에 감탄할 때
그 답변자가 아닙니다 정작 저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라고 말해버리면

방금 말한 그 지혜는 부재성으로 남아버립니다.

그러나 방금 그 지혜를 답변자가 말했기에 그 빈자리를 인간들은 빈자리로 남겨둘수가 없고
방금 답변한 자를 그 부재성의 자리에 앉혀버린다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납니다.
지혜를 그 답변자처럼 지혜에 자리에 앉혀버림으로써
자신도 지혜를 소유하고자 하는 정당성을 추구하게 됩니다.

바로 지혜 곧 진리를 이런 인간의 어리석음을 가지고서 진리 자신의 진리를 추구합니다.
곧 소외입니다.

지혜를 답변한 그 자가 지혜에 소외 당하면서 답변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 부재의 자리에 대중들의 요구로 처세로 앉게 되고
소외는커녕 적극적인 개입으로 인해서 자신도 뭔가를 행했다는 성과 또는 정의로 진리에 딴지를 걸면서 지혜를 누락시키면서 지혜를 이용해 자신이 그 부재의 자리에 앉게 된다는 겁니다.

아벨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보십시오.

아예 그들의 처음자리는 죽음입니다. 심판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 처음자리인 부재성에 있지 않고 그 반대의 자리에서 자꾸 출발을 할려고 합니다.

그것을 죄의 소원의 자리 라고 합니다.

자 저는 지금 이 죄의 소원과 부활을 이제부터 말할려고 합니다.
제목을 이렇게 하고자 합니다.

모든 인간은 종교적입니다. 즉 선악적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낸 종교 곧 신은 항상 부활적입니다.

부활을 말하지 않는 종교는 종교로써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불교라는 종교는 인간에게서 신을 떼어놓고자 자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 자체가 신으로써 군림한다는 것에서 손을 못때고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죄의 소원이 덮쳤거든요.

얼마나 무소유를 소유하고 싶었으면 죽을때까지도 이미 죽어버린자들에 까지도 무소유 무소유 라고 외치면서 소유할려고 할까요?

해탈을 소유하고 싶어서 모든 것으로부터 해탈을 하겠다고 외쳤을까요?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다 가면입니다.
즉 부활에 탐심 때문에 모든 교리를 중첩적으로 방어막을 세우는 겁니다.
마치 애굽과 같은 모습입니다.

최종적인 인간 구원을 꿈꾸고 그것을 정당화 하는 교리를 또는 신학을 또는 신앙을 또는 행함을 중첩적으로 방어막을 형성한 애굽의 10가지 신들처럼 말입니다.

결국 인간 구원이 최종적인 목적인 겁니다. 장자 죽음은 곧 인간의 부활에 대한 재앙인 겁니다.

애굽의 10가지 재앙은 인간 구원을 막는 겁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꼿아버린 십자가는 인간 구원을 막는 겁니다.

즉 첫 번째로 소외입니다. 구원에 대한 소외입니다.
진리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에 철저한 소외입니다.
적극적인 막아섬입니다. 걸림돌입니다. 실족케 함입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두 번째는 소외로 끝나는게 아닙니다.
적극적인 단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막아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공격을 받습니다.
심판을 받습니다.
죽여버립니다.

소외 당한채로 있다면 그 차이로 우리 인간에게서 소외 당한 예수님만 택함 참여 받은 분만 부각이 되고 그것으로 끝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심판주로 다시 오십니다.

모든 종교에서의 부활의 신은 심판주가 아닙니다.
예수님만 심판주로 오시고자 부활하신 겁니다.

그러니 이 예수가 믿어진다? 또는 심판주로써 주를 믿는다? 불가능 합니다.

부활 곧 구원은커녕 진리는커녕 아예 소외 시키고 이제는 소외시키는 것만이 아닌 아예 심판하고자 죽이고자 다시 살아나셔서 다시 온다는 겁니다.

이거 얼마나 살벌합니까?

두 번째로 끝나는게 아닙니다.
세 번째로 그 심판으로써 그 공격함으로써 분휴작업에 놓고자 분류를 이루십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이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거룩이란 분류작업입니다.

어떻게 분류 하나요?
심판받을자와 심판받지 않을자 로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받을자가 역전이 됩니다.

아까 말한 두 번째에 심판주되신 인자에게 미리 앞당겨 받은 심판받은자가
즉 죽어버림을 당한자가 목베임을 당한자가

도리어 세 번째 상황에서는 역전이 되는 겁니다.
누구의 믿음 때문에?
목베임당한 그들의 믿음 때문에 ?
천만의 말씀

심판주의 믿음 때문입니다.

이 심판주가 분류 작업에 직접 나서고 창조를 한다는 겁니다.
그 기준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때문에 죽음을 당하고 심판받은 저주받은자가

분류작업에서는 긍휼을 입게 되고
그렇지 않고 심판받지 않았다고 저주 받지 않았다고 여기던 자가 그 강퍅함에 진노의 그릇으로 분류 된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까요?

우리의 소유로써의 인생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인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방적으로 독선적으로 정해버린 인생입니다.
그 인생에 본이 되고자 주틀이 되고자 모든 인생의 본으로써 판을 찍어버렸습니다. 응축점입니다.

(요 12:25, 개역)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자기 것으라고 소유감이 되는 것들을 미워하라는 겁니다.
미움 곧 부정 곧 심판하고 단절시키고 소외시켜버리 라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소외 시켜 버려라?
그럼 자살 하라는 말입니까?
오히려 자살은 적극적인 자기개입인데?

결국 이 소외는 자기 속에서 내부에서 찾을수 없습니다.
외부에서 기준이 다가와야 합니다.
외부에서 다가오는 기준? 이것도 불가능이지요?

그런데 그 불가능한 기준이 세워졌습니다.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2000년전의 과거 사건으로 무시해 버립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무시 당했다는 것은 인간은 그렇게 역사를 해석하는 자신의 시선을 포기 못하겠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이 인간의 소원을 뒤짚어 엎어버린 것이 십자가에서의 부활입니다.

즉 부활은 취소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취소 되지 않았다?
십자가 말입니다.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부활이 도리어 증폭시켜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간들의 종교인
교회사를 보면 이 증폭이 된 십자가를
도리어 인간이 손댄 부활신학으로 이 증폭된 십자가를 치워버릴려고 발악하는 교회사로만 채워버리고 있다는 것에서 저는 너무 너무 기쁠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말씀 그대로 인간에게는 아무리 교회 속에 숨고
기독교 속에 숨고 해도 그 죄의 소원이 취소 되지 않는 구나

십자가는 더욱더 또렷하게 명료하게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무엇을? 죄의 소원이 덮친 인간의 악마성을 말입니다.

소위 거룩하다 라고 한 것을 인간이 소유한 모습을 보면
모두다 다 악마적인 것이 아닌 것이 없다 라는 것을 말이죠.

결국 죄의 소원이 덮침으로써 부활을 논한 인간들의 부활은 그야말로 탐욕 그 자체입니다.
그것을 죄의 소원이 덮쳐지지 않았음을 감춘채로써 드러내고 은폐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인간들의 소원인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했습니다.
죄의 소원이 감춰지고 은닉된게 아니라 도리어 까발리고 공개해버리고
아예 그것을 근본과 처음자리와 기준으로 삼아버린 겁니다.

인간들이 부끄러워서 감춘 것을 숨겨버린 것을 그 어리석은 것을
예수님은 그 수치를 할례 하듯이 공개해버리고
그 껍데기를 홀라당 다 벗겨진채로써 기준으로 처음자리로 삼아버리셨습니다.

결국 십자가는 그 십자가에서의 부활은
육은 십자가에 못 박겠다는 뜻입니다.

육은 십자가가 창조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창조하지 않은 것을 은혜 속에 집어 넣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럼 창조한 것은 무엇입니까?
어리석은 십자가에서 잉태된 겁니다.
긍휼의 그릇으로써 분류된 겁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에서난 것만 믿음으로써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경은 그 믿음에 반대된 것을 행함이라고 합니다.
행함이란 육체에서 난 육체의 소유의 산물이라는 겁니다.

육체 밖에서 육체 외부에서 개입한 것은 믿음이라는 겁니다.

나 의 밖에서 벌어진 사건이 외부에서 내부로 개입해 쳐들어 왔다는 겁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곧 미래가 외부에서 시간을 거꾸로 거슬려 쳐들어 온 겁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바라본 것이 바로
이삭이라는 자기에게서 난 자식이 아니라
하늘에서 난 자식 이삭 때문에 알게된 겁니다.
그 어두운 아브라함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이삭의 죽음입니다.
제물됨입니다. 하늘에서 난 자만의 믿음 곧 십자가에서의 죽음입니다.
(죽임당하는 제물되는자가 살았다고 하는 자를 죽은자로 규정시켜서 다시 살리고,
그 죽음의 두껑을 여는 자가 바로 하늘에서 난 죽음이 묻지 않는 미래의 완료자 곧 약속의 사람이다는 것입니다)

(롬 4:17, 개역)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8, 개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 4:19, 개역)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롬 4:20, 개역)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 4:21, 개역)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롬 4:22, 개역)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롬 4:23, 개역)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롬 4:24, 개역)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25, 개역)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죽음이 시간에서 해석 될 수 없는 역사에서 해석 될 수 없는
오로지 미래에서 완료에서 해석되는 동일한 죽음으로써의 아벨의 죽음이요 예수님의 죽음이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유일한 창조의 기준이요 잉태입니다.

정작 십자가의 심판을 용케도 회피하고 도망치는데 성공한 인생은
그 분류 작업의 주체자인(인간 지 스스로가 주체자가 될수 없고, 인간의 믿음이 분류할 재간이 없다. 타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토기장이에 의해 결국은 분류 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반드시 할문합니다. 창세기 때에 전혀 그 창조에 개입할수도 없었던 인간들이 이제는 토기장이의 분류작업 곧 창조 작업에 이래라 저래라 온갖 간섭과 힐문을 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성경말씀은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창조가 인간에게 납득당하는 창조가 아니다는 뜻입니다. 도통 납득이 되질 않는 창조만을 하는 분이 토기장이지 납득되는 토기장이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인간들의 생각만 비켜 갑니다.
참 재미 있게도 인간들은 자신의 믿음과 생각에 비켜 가면
될 일이 되지 않는다고 뻐깁니다.
당당해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인간들의 믿음과 생각만(여기서 믿음이란 선악입니다. 그것도 거룩으로 포장된 하나님에 대한 신앙) 비켜가도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너무 너무 잘 됩니다.

십자가가를 자랑 한다는 취지가 그런 겁니다. (지난 시간 사도행전 불가능한 자랑꺼리 십자가)

그러나 놀랍게도 십자가만 넣으면 안된다는 것이 인간들의 믿음입니다.

이 극과 극을 더욱더 격차를 벌리고 건널수 없는 강으로 만드는 것이
거지나사로 비유에서 나타난 하나님 나라입니다.

개혁주의의 해석을 보면 더욱더 격차를 좁히는 누구나 쉽게 건널수 있는 강으로 만드는 것이 인간들의 구원용 십자가, 부활용 십자가, 바리새인들처럼 조작해 낸 천국과 하나님과 같은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중재자가 필요하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 중재자가 직업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치성이 있다고 여기게 되니 돈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러나 돈으로도 못가는 나라는 예수님 나라입니다. 십자가 나라입니다. 오로지 십자가의 용서만을 기준으로 하는 나라입니다.

용서 용서 라고 하니까 쉽게 여겨지겠지만
어느정로도 그 용서가 불가능 했으면

임금님의 용서의 비유 용서의 왕 비유를 보면
그 용서가 불가능한 용서라는 것을
용서의 반대인 심판으로써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순이요 역설적입니다. 철저한 심판만이 용서의 왕 중의 왕 이라는 비유입니다.
(일만달란트 탕감한 임금의 비유 , 마태복음 18장)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좋으라고 구원과 인간 좋으라고 주어지는 부활 따위는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인간들이 무지 무지 싫어버린바 된 구원이요
인간들이 무지 무지 싫어하고 외면해 버리는 부활을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부활은 곧 십자가에 못 밖는 것 뿐입니다.
성령의 소욕의 만개입니다.
부활이야 말로 모든 것을 빼앗인 것을 말하는 겁니다.
2초 3초 빼앗기던 것을
아예 영원히 빼앗아 버렸다는 완료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소욕의 절정인 아홉가지입니다.

(갈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성령의 소욕으로 육체의 소욕을 박살 심판내어버리겠다는 뜻입니다. 빼앗아버리겠다는 겁니다.

겉은 날로 날로 후패케 되고, 속은 날로 날로 새롭게 하는 그 충돌을 성령이 육을 공격함으로써 얻어내는 양보할수 없는 소욕이 바로 십자가 라는 기준으로 벌어지는 겁니다.

성령의 소욕인 십자가의 사랑으로써 육의 사랑의 소욕을 빼앗고
성령의 소욕인 십자가의 희락으로써 육의 기쁨, 희락을 빼앗아 버리고
성령의 소욕인 십자가의 화평(전쟁:검)으로써 육의 화평을 빼앗고 검(불화)을 주십니다.
성령의 소욕인 십자가의 오래참음으로써 육의 인내심의 소욕을 빼앗고
성령의 소욕인 십자가의 자비으로써 육의 자비을 빼앗아 버리고
성령의 소욕인 십자가의 양선으로써 육의 양선의 소욕을 빼앗고
성령의 소욕인 십자가의 충성으로써 육의 충성을 빼앗아 버리고
성령의 소욕인 십자가의 온유으로써 육의 사랑의 소욕을 빼앗고
성령의 소욕인 십자가의 절제으로써 육의 절제(무소유)의 소유성을 빼앗아 밟아버리는 겁니다.

당하는 사람 입장은 마치 가인의 그 육체에서 나오는 우발적인 감정(육의 소욕)으로인해 자신도 알 수 없는 죄의 소원인 살인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받아주질 않으니 화 내는 것이 정당화 된 겁니다. 선악 때문입니다.

받아 주는 쪽에 들이붙어버리면 됩니다. 문제는 그것이 안되는 이유는
전혀 더 낫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신의 소유성이 더 낫게 보인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못 믿는 이유는
아무리 봐도 십자가가 더 나아 보이질 않습니다.
차라리 성령의 소욕인 십자가 보다
자신의 소욕이 십자가 보다 훨씬 더 나아보인다는 겁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은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 어리석다 라는 표현이 아주 재미 있습니다.
전혀 믿음직 스럽지 않다 라는 뜻입니다.

제가 최근의 설교를 듣다가 미쁘심 이라는 의미가 자꾸 제 귀를 더욱더 쳐버렸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 믿음직 스러운 미쁘심이
아무리 봐도
전혀
눈꼽만치도 믿음직 스럽지 않는 미쁘심

아무리 봐도 믿음직 스러운 것만 피해가버리는
미쁘심으로만 작용한 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즉 믿음직 스럽지 않다는 것은
도저히 수용불가인 어리석음의 길로만 골라 골라 가는 식이다는 겁니다.

이 미쁘심에 반대가 시험이라고 합니다.
그 시험이란 항상 자기를 위한 것이다 라고 설명한적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인간의 모습은 항상 조심 조심 조심성에 있습니다.
돌다리도 두들려 보고 건너라 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왜 조심성이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자기를 위한 이유 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시험]에 완전 반대인 것이 [미쁘심]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믿음이 들 정도로 믿음직 스럽게 여길정도로 따지고 따져보는 것이 시험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시험에 시험을 거쳐보는 것은 전혀 믿음직 스럽지 않다 라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기드온이 군사를 뽑는 사건입니다.
이것 조차도 십자가를 기준으로 한 해석이 나오는 겁니다.

유명한 박 뭐시기 목사는 숫자가 작은 쪽으로만 뽑았다고 기존의 해석을 뒤엎는 식으로 해석해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조차도 또 뒤짚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새롭게 해석한 것도 고착화 될 수 없습니다. 또 다시 뒤짚어 버리는 해석이 미래에서 계속 덮쳐야 합니다. 어제의 예수는 가짜입니다. 오늘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제의 해석 당한 예수는 고착화 됩니다.
고착화 된다는 것은 빈자리가 되지 않고 누가 앉아버립니다.
해석자가 그 빈자리를 앉아버리기 때문에
그 해석이 고착화 되어버리고
그 예수는 인간에게 해석당한 예수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탈무드 이야기를 한 이유가 이겁니다.
지혜가 해석자를 누락 시켜버리고 소외 시켜버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해석자를 그 부재성의 자리에 앉혀버리고 지혜를 소외시켜 버리기에
이런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서 진리가 외쳐지게 되니 인간들은 말려드는 겁니다.
철저한 소모품으로써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자신들이 시험에 시험을 거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열성을 제거한 우성들로만 모은 것을 고착화 시키는데 있어서

바로 그런 인간의 믿음직스러운(곧 시험: 자기를 위한)을 가지고서
그 차이로써 미쁘심을 증거한다는 겁니다.

도저히 안 믿겨지는 것으로만 미쁘심을 이루시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시험입니다.

기드온이 양털 시험을 하는 이유는 고르고 고르고 고르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런 시험에 응답하시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인간들의 시험을 배경으로 깔고 미쁘심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십자가가 유일한 예수님만의 믿음이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들의 [시험: 자기를 위한 믿음직스러운 것을 다 통합한]을
배경으로 깔겠다는 겁니다.
인간들의 가짜 믿음들이 다 십자가 앞에서 드러나는 겁니다.

그랬던 기드온의 시험이 이제 반대로 기드온이 여호와 앞에서 다 빼앗김을 당해버립니다.
다 빼앗겨 버림을 당했을때에 이제는 시험할 필요도 없이 그져 그져 그 미쁘심 앞에 다 빼앗긴채로써 여호와의 전쟁 곧 거룩의 소욕에 소유당해버리는 겁니다. 여호와의 것이 된 겁니다. 여호와의 믿음입니다. 기드온의 믿음은 시험 뿐인데 말이죠. 여호와의 믿음은 미쁘심 뿐입니다. 무조건 그 시험에 반대로만 했을 뿐인데도 말이죠.

결국 부활이란 인간들이 자신들이 고르고 골라서 구축한 시험에 시험을 거친 인간들의 신앙의 소유욕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반대로 그 소욕을 모조리 박살을 내버리는 미쁘심으로 다가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이 전혀 믿겨지지 않는 부활로만 이루어진 겁니다.

그래서 너무 너무 미쁘신 겁니다.

인간의 부활신앙도 통하지 않는 미쁘신 부활입니다.

흔히 부활로 자유와 연관시켜서 인간들의 자유성을 주로 부활교리를 배경으로 깔고 주장합니다.

그거 가짜입니다.

자유는커녕 자유가 홀라당 다 불태움버림당한 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첫째 둘째 셋째 라고 했지요?
첫째는 자유는커녕 빼앗김입니다.
둘째는 빼앗기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공격당합니다. 도둑질 당하는 것으로 모잘라 아예 죽임을 당하는 빼앗겼다는 주체도 사라져버리는 죽임 당하는 겁니다.
셋째는 죽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없는데서 있음의 분류작업이 완료 됩니다.
빼앗김도 모잘라서 죽임당했는데 죽어버려 없는데 무슨 분류작업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거룩이라고 했습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이미 죽은자로써 다시 살리시는 그 분류작업이 없다면 십자가는 헛된 겁니다.

(롬 4:17, 개역)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8, 개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보십시오 이 정도로 양보없고 미쁘십니다.
인간들이 무시하고 무가치하다고 싫어버린바 된 것들을
전혀 믿을 구석이라고는 일체 없는 것을 가지고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미쁘심으로 다가온 겁니다.

그래서 토기장이가 거룩성으로 미쁘심으로 분류작업을 하십니다.

부활이란 바로 미쁘심입니다.
인간들이 싫어하는 것만 실행하고 증폭시키겠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전혀 믿기 싫어하는 그 십자가만을 들이대시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들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시험 하는데 일관 합니다.
고착화 된 것만을 들이댑니다.
자신들이 믿음직스러워하는 것만 애굽화 시켜 장자(최후의 보루인 자기부활)를 사수하기 위해 10가지 방어벽을 치는 것이 시험꺼리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이 그러했고 오늘날 교회가 그러합니다.
그래서 이런 원수의 문을, 껍데기를, 인간 자체를 벗겨버려야합니다. 십자가로써 말입니다.
심판의 두껑을 열어야 합니다. 저주의 문을 죽음의 맨홀두껑을 열어야 합니다.
그 문을 여는 자는 복된 여자 라고 했습니다.

이 두 소욕의 극과 극으로써 증폭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토기장이의 분류작업이 옳았던 겁니다.

부활이란 토기장이에게만 미쁩니다.
인간에게 전혀 미쁘지 않습니다. 도리어 시험에 들게 됩니다. 실족케 됩니다.

그런 시험든 인간 조차도 자신의 미쁘심에 참예케 하는 것은 십자가의 기준에 의해서 잉태된 자입니다. 우리가 원했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해서도 아닙니다.

바로 현재 지금 말입니다.

바로 그 자가 창세전에 예정된 십자가로써 낳은 피조물인 겁니다.

(롬 9:7, 개역)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롬 9:8, 개역)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9:9, 개역)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롬 9:10, 개역)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롬 9:11, 개역)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2, 개역)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9, 개역)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개역)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개역)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24, 개역)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 9:25, 개역)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 9:26, 개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9:27, 개역)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8, 개역)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롬 9:29, 개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9:30,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 9:31, 개역)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 9:32, 개역)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부활이란 이 십자가를 기준으로 이 두 세계로 이 땅에서 분류하는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하는 작업입니다.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25:29,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막 4:25, 개역)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눅 8:18,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눅 19:26, 개역)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너무 너무 고마운 작업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이루신 것을 보게 됩니다.
정작 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죽음을 너무 너무 명료하고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자 늘 시험에 빠져 삽니다.
그 시험에서 건져주시옵소서

그 주님의 부활하심의 미쁘심으로 이 시험에서 건져주시옵소서.
전혀 인간들에게 믿음직 스럽지 않으 그 부활하심이

우리 전부를 장악하고 빼앗아서
더 이상 시험 없는 곳으로
그 미쁘신 곳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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