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침략한 이스라엘 정복기 (1: 1)

 

()을 심판하는 심판 주의 전쟁. 그의 의(심판)를 구하라 그의 나라의 침략

 


(
1:1, 개역)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11:12, 개역)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1:12, 새번역)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 또는 '침례자' 또는 '폭행을 당한다' 또는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약탈한다'

(11:12, 공동) "침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 어떤 사본에는 12, 13절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12]침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줄기차게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애써 힘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차지한다. [13]그 나라에 대하여는 요한까지의 모든 예언자와 율법이 이미 예언했던 것이다."

(11:12, 쉬운) 침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있게 성장하고 있다. 힘있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11:12, 현대인)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침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침략하는 사람이 그 나라를 빼앗는다.

(11:12, 현대어) 침례 요한이 설교하고 침례를 주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공격 받아왔고 공격하는 자들이 힘으로 지배하려고 하였다.

 

 

오늘부터 마태복음을 시작하겠습니다.

격주로 마태복음과 그동안 해 오던 이사야를 번갈아 가면서 할려고 합니다.

 

주일예배는 이사야 1장을 시작했는데요

갑자기 마태복음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또 이렇게 나대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1장의 시작을 보고 이런 생각이 났거든요

묵시의 시작 말이죠

 

초반부터 묵시로 출발해요 이상 곧 환상 곧 계시 말이죠

그런데 어쩜 마태복음 1장이 생각이 났는지

 

결국 묵시의 출발에 있어서

역사는 갈기 갈기 찢겨지는 식입니다.

 

그러니 그 앞에서 역사를 주장 또는 자랑 할 수가 없다 말이죠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럼 이 묵시가 떳가 곧 예수 그리스도가 떳다 라는 말은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먼저 있었고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 증상으로써

역사는 슬프도다 이스라엘이여 라고 외치는 죄인의 자리에 놓여지는데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1장의 족보입니다.

 

소위 역사 라고 우기는 남자들의 세계가

완전히 뒤짚어 져서

다섯 여자의 세계로 뒤 바뀌게 됩니다.

 

결국 껍데기는 남자의 세계로써 남자의 세계가 진짜인줄 알았는데

그건 그림자였고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듯이 그림자였고

 

진짜 실상은 이 다섯 여성으로 인한 이스라엘이 이어져 왔다는 겁니다.

단절의 단절로써 말이죠

 

모계사회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모계는 역시나 남성적인 사고방식인 힘 곧 육의 사고방식이지요

곧 선악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이 다섯명의 여성의 차이성 곧 구별 구분된 거룩성은

바로 남자들로부터 정죄받아 부정한 여자로 취급받는데

오히려 그 부정한 여자로 인해 남자들이 살게 되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구체적 보편성이라고 하는데

또는 부정의 부정인데

 

곧 성령이 부어진 족보는

내가 죽이고자 했던 그 여성이 도리어 나를 살리는 구원자로써

역사의 사고방식인 선악을 깨뜨리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죽은 여성이 길을 트여준다는 겁니다. 막힌 담을 헐더라 말이죠

죽음에서 길을 여는

사막에서 샘이 넘치게하고

광야에서 꽃이 피게 하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이 의를 펼치는 자가 바로 다섯 여성이다는 겁니다.

 

소위 천국열쇠를 베드로에게 줬잖아요

베드로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베드로가 땅에서 열면 하늘에서 열리는

소위 구약으로 치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곧 복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12:2, 개역)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12:2, 새번역)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왜 아브라함이 마태복음 11절에 언급이 되는줄 아시겠습니까?

소위 제 1호 공무원이다는 겁니다. 공적인 자유를 수행할 자인 복의 근원으로써 말이죠

그럼 왜 노아는 믿음의 조상이 아니고 왜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이 되질 않을까요?

 

노아는 전쟁 대상을 규정하고 있지

전쟁 실행 당사자가 아닙니다.

전쟁 1호 군사가 아브라함이다 말이죠

 

노아는 셈 야벳 함을 낳고 라고 마태 복음 1장에 기록이 되지 않습니다.

 

(1:2, 개역)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요

즉 공적인 자유를 실행할 공무원 군인 군사 1호 이다는 겁니다.

 

노아는 그 전쟁 기획에 누구와 누구를 겨냥해서 싸운다는 것을 설계한 분의 기획을 선포하고 있지요

 

바로 함입니다. 함과의 전쟁입니다. 함과 가나안을 대상으로 하는 전쟁으로써

왜 싸워야 하는지의 그 이유를 설정하고서

거봐라 이 놈들과 전쟁해야 하는 이유를 알겠지 라고 외치고

뒤로 빠지면서 누락 됩니다.

 

함과 가나안을 규정한 이유가 뭡니까?

 

은혜 모독입니다.

 

즉 다른 말로 선악을 추구했다는 거죠.

 

생명을 모독하니까 선악이라는 행함을 따지더라 말이죠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따지는 겁니다.

선악적으로!!!

저게 무슨 은혜받은자 인가 라고 말이죠

 

술쳐먹고 발가벗어 벌거벗은 몸으로 누워있는데???

 

그런데 이 노아 덕분에

은혜 입은자 덕분에 구원받아 놓고도

선악 윤리 도덕으로 따지더라 말이죠

 

일만달란트 용서 받아 놓고도 내 돈 띠 먹고 도망친놈을 감옥에 가두니까

누구의 용서

누구의 생명

누구의 은혜가 무색해 지냐 말이죠?

 

그래서 용서의 용서의 왕은

이 은혜를 모르는 자와의 전쟁선포를 하시는 겁니다.

적폐청산을 시작하시더라 말이죠

 

자 이제 함과 가나안과 전쟁을 개시 하는 줄 알겠지? 라고

노아가 동원이 되었고

그 전쟁 선포에 이어서 전쟁 군사 1호로써

아브라함이 함 땅에 투입이 되어서 가나안 땅까지 정복하는

군사 1호가 되는 겁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바로 신약으로 치면 교회 곧 하나님의 영적군사의 1호가 된다 말이죠

교회가 되는 겁니다. 교회

 

그런데 이 교회가 남자가 아니라 여성성이다고 했지요?

남자로 싸우면 힘과 힘으로 싸우게 된다 말이죠

 

그래서 꼬추를 짤라야 합니다. 할례입니다.

힘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이름으로 싸우는 겁니다.

이름

 

이름 이게 뭔데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글자 기호에 불과하다 말이죠

 

그런데 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 거는 자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이름 때문에 복의 근원이 되냐 못 되냐가 좌우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전쟁무기이거든요

 

저들 함과 가나안 땅 사람들의 무기는 칼과 창에 있지만

아브라함은 이름으로 싸웁니다.

 

마치 거인 골리앗과 소년 다윗처럼 말이죠 말도 안되는 전쟁입니다.

 

이것을 이사야 1장 식으로 하자면

 

슬프도다 아리엘이여 이스라엘이여 라고

죄인의 자리에서 오로지 외칠 것은 긍휼을 베푸실 의의 이름만 외칠 것 밖에 없는

이 이름만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기능 곧 군사의 기능인데

이사야 딸랑 혼자 그 이스라엘 기능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 이사야를 죽이면서 도로 배우게 되죠

그가 나보다 옳았다 라고

마치 시아버지 유다가 며느리 다말에게 배우듯이

의를 배우는 겁니다.

의를

 

죽였다가 다시 살리시는 의

거룩을 배우는 겁니다.

 

이 의가 아니면 전쟁을 할 수가 없어요

의의 이름으로 하는 전쟁이기에

이미 이긴 전쟁입니다.

미래완료를 미리 앞당겨서 싸우는 의의 전쟁 믿음의 전쟁이거든요

믿음이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게 못한다 말이죠

 

그러니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써 믿음으로 싸우는 겁니다.

저들은 그 반대인 힘으로 싸우고 말이죠

 

믿음 믿음 자꾸 카니까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신앙 신념으로 이해하시는데

그 반대입니다.

 

남을 7번 용서 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신념입니다.

곧 교리 플러스 실천입니다.

실천 못하면 교리는 바보가 되는 거죠

 

그 반대입니다.

교리 자체가 없어요 이미 완료 되었는데 무슨 놈의 실천 무슨 놈의 숙제가 있냐 말이죠?

 

그저 그 반대로 용서함을 받기만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여리고성 뺑뺑이 돌면서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즉 의가 덮쳐지니까 회개의 자리에 놓여지는 겁니다.

슬픈 자리에 놓여지는 겁니다.

 

우리 죄가 붉어져야지만 그때 가서 회개하는게 아니라

덜 붉으면 아직 회개 까지 안가는게 아니라

 

그런 원인 있는 결과를 따지는 식이 아니라

조건을 갖추는 식이 아니라

 

그 반대로

흰눈 같이 희게 만드시는 남은 씨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

곧 예수 그리스도가 떳다 라는 그 이유로

무조건 나는 우리 죄가 붉습니다 라고 뭘 해도 죄 밖에 없는 죄인 중의 괴수

곧 슬프다 불의한 나라입니다 라고 외치는 자리에 놓여져서

회개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의의 이름을 외치는 군사이다는 겁니다.

 

이상한 전쟁군사이다 말이죠 이상한 공적인 자유를 외치는 공무원이다 말이죠

770번 용서 받아야할 죄인입니다 라고 외치면서 뺑뺑이 도는 것이

이들이 하는 전쟁입니다.

 

왜 그럴까요? 누구로부터 배웠다?

며느리 다말로부터 배웠거든요

의를 배웠다 말이죠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주님의 도를 배우고

주님의 의를 배우고

 

의를 배웠다 말이죠 누구에게? 다말에게

이 다섯명의 여성으로부터 배운 겁니다.

무엇을?

 

의를 배웠다 말이죠

 

그렇게 의를 배우니까 말도 안되게 임신을 했뿟네

약속을 임신했어요

그리고 그 약속이 태어나는데

바로 이 세계를 허물어 뜨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겁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게 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다 말이죠

저분이 처음과 나중으로 안 보이면

또 육의 족보를 따지듯이

육의 조건

선악의 조건을 따지게 된다 말이죠

 

선악의 조건은 소위 사망 아래에서 사망에 갇혔기에 따지는 겁니다.

부자 곧 돈이 없으면 죽는다

자꾸 뭐뭐 없으면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라는 결핍에서 나온다 말이죠

 

선악이 말이죠

 

그럼 생명은 그 반대죠

우리가 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선악나무는 없고 생명나무만 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진짜 생명이다면 자꾸 사막 속으로

광야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 사막에서 생명수를 넘치게 못하면 가짜 생명이고

광야 라는 죽음 속에서 꽃길을 내지 못하면 가짜 생명이다 말이죠

 

그래서 생명은 십자가의 지혜를 펼치는데

선악은 이 십자가의 지혜를 어리석다 라고 하고

거리끼는 걸림돌로 여기는 겁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로써

이 다섯 여인이 남자들의 족보 속에서 거리끼는 걸림돌로써 들어가는 겁니다.

남자들은 이 다섯 여자를 종용히 끊고자 하듯이 단절 시킬려고 했는데

도리어 이 여인들로 인해서 생명나무에 접붙임 당하게 되었다는 거죠

 

분명이 죽은 태 였던 여자들이였는데

개같은 이방인 여자인데

창기 세리 죄인 중의 괴수 같은 여자인데

 

이들에게서 거룩 곧 의가 의로움이 펼쳐지고

정작 율법의 껍데기를 지키는 남자들에게서는

사망을 이겨야 하는 이스라엘이 기능이 추호도 나타나지 않더라 라는 겁니다.

기껏 강도 만난자의 시체와 같은 피 흘리는 부정한 시체와 같은 부정함을 만지지 않는 식으로

거룩 껍데기를 치키는데 달인들이였지

 

추호도 공적인 자유가 그들에게서는 안 나왔다는 거죠

 

그런데 기생 라합이 아니다 며느리 다말이 글쎄 기생 라합의 거짓말처럼 부정함으로

 

시아버지의 부정함을 씻어내는 겁니다.

십자가의 저주 곧 대신 맞으심으로

우리의 붉은 죄악을 흰눈 같이 희게 하시더라 말이죠

 

이렇게 이스라엘을 정복하시는 겁니다.

천국을

아리엘 예루살렘을 정복하더라 말이죠

 

이미 예루살렘에 살고 있어도

천국을 못누리고 오히려 지옥처럼

독립운동 해야 한다고 우기니까

가룟유다처럼 자살하게 되는 겁니다.

 

아니 천국에 무슨 놈의 자살이 있어요???

시온 성과 같은 교회 라고 찬양 부르면서

왜 교회 목사면서 자살하냐 말이죠?

단순히 병이 아니라 증상이다 말이죠

 

그 무리의 속성을 대변해 주는 겁니다.

 

유대인들 곧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자들의 속성이 다 그래요

오늘날 성화론자들이 그런 식이다 말이죠

자살로 내 몰아요

 

10? 20년 전에 청소년 아이가 동성 곧 성 정체에 빠지게 되니까

독실한 침례기독교 미국 가정에서 받아주지 않는 모습을 나타내니까

아이가 자살을 해요 글쎄

 

교리 플러스 실천의 종교 세계 곧 선악세계 666 세계는

조건 못 갖추면 자살로 내 몰아요

스스로 죽으라꼬

 

남을 7번 용서 못하면 자살로 내 모는 식이 바로 오늘날 종교가 된 기독교의 모습이다 말이죠

 

진짜 기독교는 정반대입니다.

자살로 내몰게 아니라

처음부터 죽은 자리에서 생명을 외칠 수밖에 없는

770번 생명을 부여받는 것이 기독교이다 말이죠

실천할게 없어요

 

지킬 말씀이 없어요

 

그저 말씀이 나를 770번 용서하는 것 밖에 없어요

 

주시는 분이지 받는 분 아닙니다.

 

신앙 신념 곧 종교는

진리의 적이다 말이죠

 

인간의 신앙심이라는 것은 복수심이거든요

반대로 예수님의 믿음은 심판의 주를 보라는 겁니다.

나의 죄를 제대로 심판 하실분 곧 제대로 고치실 분은 저분이고

거짓선지자가 퍼트리는 종교라는 신앙은 대충 심상히 고치는

그래서 부딧히는 돌에 부딧혀서 걸림돌에 넘어지는 복수심이 들통나는 겁니다.

 

이사야 1장에서 살펴봤잖아요

내 마당만 밟는다고 무수한 재물 좀 가지고 오지 말라고

? 복달라 구원해 달라는 것은

주님이 심판 주 라는 의를 외치는게 아니라

자기 건드리면 안된다는 복수심 곧 번제와 제사를 통해서 따내고야 말겠다는 신념이

오기와 복수심으로 가득찬 신앙이다는 겁니다.

 

인간은 이 복수심 오기가 없으면 하루라도 살 수가 없다 말이죠

 

바로 이런 악한 세상에 심판 주로써 이 심판이 옳았다고 의롭다고 외치는 자가

바로 오늘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옳았다고 외치는 자들인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자들입니다.

 

진리가 뭡니까? 예수님입니다.

이 진리 앞에서

우리의 꼴에 되도 않는 믿음 신앙 종교 곧 선악이지요 하나님과 같이 된

이 선악이 부셔져야만 하는 그 기쁨을 누리자 말이죠

 

나를 어떻게 정복하시는지?

이스라엘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어떻게 정복하셨는지를 보듯이

이 요나의 표적

곧 의로

아무것도 아닌 이 이름

 

죽였다가 다시 살리시는

처음과 나중 되신 이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어떻게 정복하시는지를

나를 어떻게 정복하시는 지를

정복 당하면서 즐기고 누리시면 됩니다.

 

나의 증상을 즐겨라 말이죠

어떤 증상?

770번 용서 당하는 증상

 

내가 하는 것 없어요

 

외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나를 어떻게 정복 했는지

어제는 발까지 침략했고

오늘은 다리까지 침략당했고

내일은 몸뚱아리를 정복하시는

그 증상을 누리는 겁니다.

 

마치 다섯 여인들로부터 거룩이 이어지듯이

단절로써 이어지는

불가능성으로써 이어지는

이 연합 곧 성령의 일하심을 누리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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