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천국(산상수훈)과 함께하지 않고, 우리(저희) 천국(산상수훈)과 함께 하신다. (마 5:1-12)
(마 5:1, 개역)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2, 개역)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 5:3, 개역)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4, 개역)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개역)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개역)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개역)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개역)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개역)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10, 개역)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11, 개역)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개역)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 새번역)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 ㉠그, '그가'』
(마 5:2, 새번역) 『㉡예수께서 입을 열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 ㉡그, '그가'』
(마 5:3, 새번역)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그, '심령이'』
(마 5:4, 새번역)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마 5:5, 새번역)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마 5:6, 새번역)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마 5:7, 새번역)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 5:8, 새번역)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 5:9, 새번역)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 ㉣그, '아들들이라고'』
(마 5:10, 새번역)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 5:11, 새번역)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터무니없는 말'이 없음』
(마 5:12, 새번역)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제목에 너희와 저희로 용어를 구분했는데
용어 곧 단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의미를 구분짖기 위해서 잠시 사용하는 것이죠
알맹이를 말하기 위해서 껍데기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제목에 너희와 저희로 구분해서 제목으로 달았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의미를 말하고자 말이죠
물론 미테복음 5장에서는 너희와 저희가 같이 사용이 되었죠
그러나 마 13장 11절에는 너희와 저희라는 단어는 달리 사용되는 차별성을 띄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번역서에서는 확연하게 구분짖지만 개역번역에서는 그렇다는 거죠
(마 13:11,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 13:11,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다.』
(마 13:11, 공동)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마 13:11, 쉬운)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들에게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마 13:11, 한글킹) 『주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는 천국의 신비들이 너희에게는 알도록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니라.』
(마 13:11, 현대인)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마 13:11, 현대어)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마 5:12, 개역)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제가 한 15년 전 인가? 어떤 글을 읽었는데
법정 이라는 불교의 중이 산상수훈을 읽고서 그 순간 깨달았는지
맨발로 좋아라 하면서 진리를 깨달았다고 마당을 막 뛰었다고 합니다.
그때가 법정의 말로는 70년대 쯤? 중반이였다고 했지만
그 글을 보고 오히려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아 그래서 성화론자들이 무지 무지 이 산상수훈을 억수로 강조를 하는 이유가
법정을 보고 알았다 말이죠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 아닙니까!!
왜 이런 자에게는 천국이 저희 것이요 법정 것이요 가 안되는 것일까요?
법정은 정작 천국을 깨달았다고 좋아라 맨발로 막 뛰고 펄쩍 펄쩍 뛰고 있는데
왜 법정은 천국을 깨달아도
천국은 왜 법정의 것이 아니될까요?
그런 법정을 볼때마다
성화론자들이 생각이 안 날수가 없습니다.
소위 교회에 가게 되면
대부분 성화론자들의 환경이지
복음의 환경이 아니다 말이죠
마치 냄새가 달라요 달라
복음의 환경에서는 십자가라는 냄새가 나야 하는데
예수님의 피 냄새만 나도록 되어 있는 것이 교회 이어야 하는데
성화론자들에게서는 이상하게도 불교 사찰의 향 냄새가 나는 듯 하더라 말이죠
최면을 걸려고 하는 건가?
교회에서 강도의 소굴 냄새가 나요
아니 말을 잘못 말 했네요 처음부터 교회가 아니였는데 말이죠
아무튼 지금까지 다녀본 교회 치고 이런 법정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자들을 본적이 없어요
더했으면 더했지
어떻게 하면 이 산상수훈을 지켜 볼려고 또 그렇게 안 가르치는 목사가 없을 정도로
목사가 강요된 선택으로 압박을 해요 글쎄
이렇게 사기를 가득 치던데
그 속임수에 다들 최면이 걸린냥 마약에 중독이 되어 있더라 말이죠
아무튼 처음으로 다시 돌아와서
너희와 저희는 임마누엘에서 나오는 의미이지만
오늘 본문에 적용해 보면
천국이 저희 것이요 라고 선을 먼저 긋게 되면
그 나머지 것들은 너희 가 되는 겁니다.
[먼저]=저희 라고 영역을 긋게 되면 [그 나머지]=너희 로 남는 영역으로 구분 짖는다 말이죠
왜? 천국이가 먼저 저희 라는 따로 영역을 구분지으니까
그 외의 것들은 너희 가 되는 거죠
그러니
마음이 가난해야 천국에 가는게 아니라 천국이 저희 것이 되는게 아니라
다 이렇게 가르치는 성화론자 아닌 놈이 없어요
마음이 가난해야 천국이라고
아닙니다.
마음이 가난해서 천국이 되는게 아니라
천국이 마음이 가난한 자를 새롭게 생성, 생산해 낸다는 겁니다.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니까
자꾸 울려고 해요
그럼 복이 됩니까?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니까
너는 죄 지을 줄 모르는 죄인이 아니고
나는 죄를 지을 줄 아는 죄인이니까
그런 죄인 이라는 조건을 자기 쪽에서 갖 추었다고 우겨요
그렇게 하면 죄인 됩니까? 성령도 없이 지 스스로 되는 죄인이라면
성경에 일부러 맞출려고 말이죠
그게 바로 의인 아니냐 말이죠
자기 잘 낫다고 하니
어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그런 속임수가 먹혀들꺼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기가 차요 기가 차
그렇게 한다고 쳐도 오래 못가요
울어야 복이 되는게 아니라
복이(천국이) 우는 자를 새롭게 새로 생산해 내는 겁니다.
그러니 너희와 저희로 구분 짖는 것은 천국이가 하고 있지
인간이 하는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실천해서 지켰다고 하니 그렇게 죄인이 되었다고 하니
악령이 들어간자가 다 이래요
또 성화론자 치고 이렇게 안 가르치는 놈이 없을 정도이다 말이죠
완전 사기꾼들이예요 글쎄
불의한 재판관 질문을 해 주신 분 덕분에
작년이였던가요? 탕자 질문해 주신 엄집사님 덕분에
성경을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글쎄
어떻게 탕자와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의미가
탕자와 연결이 될 줄
꿈에도 몰랐다 말이죠
자 그렇게 되니
성경 말씀이 안 풀리는 곳이 없이 다 뚫려요 시원시원하게 고속도로 달리는 기분이다 말이죠
또 불의한 재판관 질문 덕분에 고레스 왕을 메시아로 삼은 것과 연관이 된 줄 꿈에도 몰랐다 말이죠
그러니 모조리 다 십자가와 연관이 되었는데 막연하게만 알았지
이렇게 예수님이 꼼꼼하게 십자가라는 의와 공의와
곧 예수님의 피와 연결이 깊이 깊이 되어 있었는 줄 몰랐다 말이죠
핵소름이 돋더라 말이죠
우와 우와 입에서 연거푸 우와 우와 입이 안 다물어 지더라 말이죠
그러니 고레스 왕을 메시아로 삼은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게 되면
천국이 저희 것이 아니게 된다 말이죠
마치 어중이 떠중이를 사사로 구원자로 삼아 이스라엘을 구원했는데
그 어중이 떠중이를 사사로 삼은 것에 못 마땅하게 여기게 되면 말이죠
지옥이 저희 것이요 가 된다 말이죠
실제로 사사기가 바로 그런 내용으로 채워지잖아요
왜? 우상이 약속에 의해 들통당하게 되니까 말이죠
정결한 자를 왜 재판관으로 삼지 않느냐에 대한
선악의 사고방식이 우상인줄 모를꺼다 말이죠
이스라엘에게만 해당 될까요?
요즘들어 노래 오디션 프로그램이 얼마나 많습니까? 먹방처럼 엄청나게 많은데
갑자기 종민이 때문에 연애프로그램도 마구 마구 쏟아지죠
그 정도로 사랑이 없다는 거죠먹을게 없다는 겁니다
배고프다는 거죠
먹어도 먹어도 허기져요
풍요 속의 빈곤이다 말이죠
빈부 차가 커서 부요한 삶을 위해 그렇게 노력해서 성공 했는데
나머지들이 다 잉여 찌그래기 99점 99999프로인데
성공해 본들 이들과 나눌수가 없어서
오히려 더더욱 빈곤해요
부자가 되면 될수록 말이죠
갑질이 너무 너무 마음이 빈곤하니까
허 하니까 나오는게 갑질 아니냐 말이죠
풍요라고는 조그만치도 없으니 말이죠
자 이렇게 텔레비에서 세뇌 시키듯이
가장 낮은 욕구인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가 티비를 도배를 한다 말이죠
그 정도로 차갑다는 현실을 환타지로 마약으로 극복 할려고 한다 말이죠
노래도 그렇게 안 즐거우니까 노래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한다 말이죠
즐거워 하란 말이야
그런다고 즐거워 지냐 말이죠
맛과 음악이 만약 단 한가지의 맛 단 한가지의 음악이라면 아마 아무도 안들을 껍니다.
맛은 오로지 예수님의 살과 피 맛, 떡 하나의 맛 밖에 없고
다들 듣기 싫어하는 새노래, 딱 하나 만의 노래인 새노래 밖에 없다면 말이죠
그런데 너무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지금 나오는 노래와 기존의 노래들지금까지 나온 맛과 새로운 맛들이
우리의 욕망과 너무 너무 잘 맞아 떨어진다 말이죠
무궁무진한 욕망이 말이죠. 다양성 말이죠
그런 노래 그 다양한 노래라는 욕망에 오직 단 한가지 곧새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자는 지옥이다 라고 하게 된다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지 못하는 자는 지옥이다 라고 단 한가지의 맛만 외친다면 말이죠
(요 6:52, 개역)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개역)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6,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6:57, 개역)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 6:58, 개역)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새노래만 나오는지를 보는 심사위원이 심사하게 된다면
아무도 천국 갈자가 없게 된다 말이죠아니 노래 자체도 부를려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꺼다 말이죠
이 새노래를 가르치는 곳도 배울 곳도 부르는자도 아무도 없다 말이죠
그런데 천국이 그런 자를 새롭게 만들어내서 부르도록 하겠다 하더라 말이죠
즉 모든 다양성이 이 단 하나의 노래 새노래 앞에서 다 깨어지더라 말이죠
모든 맛 모든 음식이 이 단 하나의 맛주님의 살과 피라는 양식에 의해서 다 깨어지는 겁니다.
어떻게?
앞의 글 이사야 41장에서
약속은 반드시 우상과 한 세트로써 증거되고 그 차이를 벌린다 라고 했거든요
그러니 새노래는 기존의 노래와의 차이성으로 증거될꺼 아닙니까?
그럼 기존의 노래는 뭡니까? 마치 우상처럼
섬처럼 각종 문화 다양한 언어 다양한 신들이라는
이 개성
개인 개인 마다의 그 개인의 특징들과 그 매력들 개인의 자질들 등등이
우상으로써 섬으로써 각자의 성 캐쓸 성벽을 쌓아서 자기만의 노하우를 형성한 것을
약속은 그 모든 개성들을 다 깨어부셔서 한 가지로 만들어 버리더라 말이죠
뭐로? 불도져로 울퉁불퉁한 각종 산들의 뾰족 뾰족 키가 다 다르게 튀어나온 것들을
불도져는 모든 개성을 말살해서 다 밀어서 평평하게 만들어 버리더라 말이죠
그렇게 해서 그 평평하게 개성을 모조리 밟아버린 그 평탄한 길 위에
예수님이 즈려 밝고 가도록 말이죠
우상을 다 깨부수셔서 그 위로 즈려 밟고 가도록 말이죠
그것이 계시록에서 납작하게 엎드리게 되니까
일곱촛대 사이로 흰옷 입은 분이 흰옷을 질질 끌고 지나갈 때
감히 얼굴을 못 쳐들정도로 납작하게 엎드려질 정도로 눈이 부시더라 말이죠
(계 1:13, 개역)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 2:1, 개역)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계 2:1, 새번역) 『"에베소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 말씀하신다. / ㉠또는 '천사'』
(계 1:13, 쉬운) 『그 촛대 사이에 ‘인자’라고 느껴지는 예수님 같은 분이 서 계셨습니다. 그분은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계셨습니다.』
(계 1:12, 개역)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계 1:13, 개역)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 1:14, 개역)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계 1:15, 개역)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계 1:16, 개역)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계 1:17, 개역)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계 1:18, 개역)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계 1:19, 개역)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계 1:20, 개역)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개성이 어디있어요 울퉁 불퉁 첩경의 산이 어디있어요 다 불도져로 밀려서
평평하게 평탄케 되었는데
우상이 어디 있냐 말이죠 각종 다양한 문화, 성격, 다양한 언어 그런거 없다 말이죠
모조리 다 엎드려져서 죽은 자 같이 평평하게 되더라 말이죠
그러니 새노래 앞에서 기존의 개성만점인 기존의 노래는 다 사라지게 되더라 말이죠
사람을 기쁘게 하는 노래는 그 정도로 다양성이 넘치는 개성만점 매력 만점의 노래이지만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노래는 그 모든 다양성과 개성 그리고 매력들을 모조리 다 깡그리 무시하고
모조리 다 말살시키는 노래이다 말이죠
이 새노래를 부르게 되면 아마 스튜디오, 촬영 세트장 불지르고 난리가 나겠죠?
어딜 감히 목수의 아들 주제에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낭독해? 노래해?
너 죽어 볼래 라고 골짜기로 몰아서 떨어뜨려 죽일려고 할꺼다 말이죠.
산상수훈이 그런 식으로 사건을 유발 시키는 겁니다.두 패로 갈라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산상수훈 해석은 성화론자나 법정처럼 춤추고 날 뛰고 하겠지만
그런데 사람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산상수훈 해석은
그야 말로 화로다 화로다 라고 곡하는 소리가 울려퍼질꺼다 말이죠
왜? 산상수훈이 그 사람을 불도져처럼 밀어버리니까
납작 엎드려져서 마른 오징어 연탄불에 구운것처럼 평평케 되니 말이죠
국수 뽑는 기계에 넣어 돌려버리면 납작하게 되듯이
그 앞에서 나는 울어서 복 받을 거야
나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도록 성화할 거야 라는 그 개성들이
우상으로 밝히 보이게 되니
이런 속임수도 안 통하구나 라고 울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변론자 변호사 앞에서
나는 사장이고 회장이고 교장이고 목사이고 라는
자신만의 고유한 직업이나 특성 개성들이
변호사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그저 죄인으로써 밖에 변호사 앞에 선다 말이죠
물론 가짜 변호사는 오히려 필요하겠죠
진짜 의사 앞에는 환자로써 밖에 설 이유가 없어요
개성 그거 개나 줘 버려요개성 모조리 다 무시합니다.
개인의 특성들
그 어떤 개성 따위도
역사가 뭐 어떻니? 저떻니?
신앙생활 20년 50년 100년 그런 역사 따위가
의사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이
그저 단지 환자 라는 이거 하나로만 의사 앞에 서듯이
변론자 앞에서는 오로지 단 하나
죄인으로써만 서도록 되어 있듯이
천국 앞에서는 오로지 회개 자
곧 이것을 우는 자
심령이 가난 한자 – 회개 곧 죽은자가 되었는데 뭐 내세울꺼리가 있냐 말이죠
세리는 주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고
바리새인은 반대로 내세울 꺼리가 많았다 말이죠
우상숭배자 이기 때문에 개성이 넘쳐요
십의 일조 했오 이레게 두 번 금식했고 뭐 했고 뭐 했고
세리가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성화론자 곧 산상수훈을 지킬려고 하는 자들에게 알려주니까
화를 내요
막 짜증을 내요
이상하다 심령이 가난한 것을 지킨다고 해놓고서는 왜 짜증을 낼까?
악마들이구나 라고 알았다 말이죠
제가 이런 것을 직접 격은 것이
저들 말 마따나 수준 낮은 박목사 같은 성화론자들이랑 부딧힌게 아니라
수준 높은 성화론자들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 자들이랑 부딧히면서 알게 된 거다 말이죠
아무리 봐도 우상숭배자들인데
가장 안 그런 듯이 말하고 있으니
이런 인간의 속임수를 왜 보여주셨는지를 알게 해 주시더라는 겁니다.
우는 자
목마른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심령이 가난한 자
온유한 자
긍휼히 여김을 받는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는
세상에 없습니다.
없다고 하니 또 막 짜증을 내요 글쎄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 내는지를 알 볼려고 하고
기존의 것에서 찾을려고 해요 글쎄 그러니 짜증을 내지요
새롭게 창조해 내시니까
그 새로운 피조물 앞에서
자기가 맹글어 낸 심령이 가난한 자 될려고 산상수훈 지킨자들과
그 새롭게 만들어낸 자와 충돌을 시키는데 그것이 바로
우상과 약속과의 충돌처럼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로써 비유로 알려주시는 겁니다.
자 그럼 우리는 바로 약속의 자리에 가지 말고
왜 우리는 우상의 자리에서 저런 바리새인처럼
우상적인 기도 외에는 나오지 않는 것인가 라는 것을 봐야
울 것 아니냐 말이죠
화로다 화로다 나여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비로소 개성이고 나발이고 다 날라갈 것 아니겠냐 말이죠
어 그런데 지키면 지킬수록 개성이 막 쌓이고 그런 것을
옳다고 마구 마구 주님께 바치겠다고 하니까
내 마당만 밟는다고 고개를 돌리고 귀를 막고 눈을 막 막아요
우상만 가지고 오니까
평평하게 다림질 당한 것은 못 가지고 오더라 말이죠
주렁 주렁 너희는 나한테 보이러 온다 라고 우상을 마구 마구
산상수훈 지켰다는 것을 주렁 주렁 달고 보이러 오더라 말이죠
누가 그딴 것을 가지고 오라고 했냐 말이죠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 곧 인애와 자비인데
주님이 싫어하는 우상
번제와 제사이다 말이죠
누가 많이 바쳤니 누가 많이 충성봉사했냐 라는 둥
누가 많이 기도했냐 라는 둥
그 따위 온갖 울퉁 불퉁 자신만의 개성들
특징들
그런거 왜가지고 오냐 말이죠
누가 노래 잘 부르고
누구는 매력적으로 부르고
심사위원들 까지 다 사기꾼들이더라 말이죠
주님의 새노래는 간단 합니다.
불 속에서 못 부르면 가짜이다 말이죠
아니 입술도 혀도 목도 개성도 보이스 칼라도 모조리 불 속에 다 타버리는데
누가 부를수 있겠습니까?
누가 구원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게 진짜 천국이다 말이죠
누가 회개 할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다 말이죠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신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 곧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 쪽에서의 의를 갖추는 방식은
육의 혈통의 방식인 습관
역사라는 시공간이 있는
마치 아버지가 있어야 아들이 생기는 육의 방식에
영의 방식은 소위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영물은 거룩하다고 우기지만
그 반대인 처녀 혼자 아이를 낳게 되면 쌍스럽다고 가까이 하지 않을려고 한다 말이죠
거룩이라고 하면 불 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까이 갈려고 하지만
마치 몸에 좋다고 하면 호랑이 이빨이든 돌이든 다 갈아서 마셔 씨가 마를정도로 말이죠
그런데 진짜 영은
쌍쓰럽다고 근처도 안 갈려고
다들 고개를 돌려 버리고
싫어버린바 되고
흠모할 모양이 아예 없는 것이 이것이 진짜 영이지
사람들이 말하는 영은 다들 고개를 쳐들고 구름타고 오시는 메시아를 언제든지 영접할 자세가 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영이기는커녕 이게 바로 우상이다 말이죠
성령으로 잉태한다는 것은흠모할 모양이 없이 오니까
처녀가 남자도 없이 아이를 놓으면 그거 축복이 아니라 쌍스럽게 여겨서
근처도 안 갈려고 한다 말이죠
재수 옴 붙게 된다고 말이죠과부의 기도가 그런 식이다 말이죠
이게 바로 이삭이다 말이죠 아버지 없이 태어난
이 처음과 곧 육으로 나지 않은
그리고 나중 곧 이삭을 제물로 바칠때에아브라함의 우상성
곧 개성들 그 동안 고생을 무지 했어도 하나님 잘 섬겨서 복 받자 라고 했던 그 우상성이
와르르 다 불도져에 밀려서 오징어처럼 납작하게 엎드려지게끔
울 수밖에 없는 이 이삭제물이라는 화목제물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개성들
잘 낮고 못 낮고 하는 울퉁불퉁 하는 모든 것이머리에 재를 뿌려서 바짝 엎드리게 된
이 예수님의 십자가 라는 의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이 약속으로 새롭게 태어난
회개자
이 회개자의 조상 아브라함 (로마서 4장)
이 노선을 따라서 다윗도 바울도 회개자의 자손으로 새로 태어난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은 것을 믿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긴
이 용서가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 때문이였다는 것을 믿는 그 믿음 말이죠
그래서 다윗도 바울도
회개자의 자손 곧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써
땅끝에서
죽음에서
개성이 무너진 우상이 부서진 그 쟂더미 속에서 남은자로써
땅끝에서 불렀노라
(사 41:9, 개역)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사 41:9, 새번역)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데리고 왔으며, 세상의 가장 먼 곳으로부터 너를 불러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의 종이니, 내가 너를 선택하였고, 버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막 13:27, 현대어) 『그때 인자는 천사들을 보내어 땅끝에서 하늘 끝에 이르기까지 택한 사람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누가?
천국이가!!
천국이 불러낸 이 회개자가 바로 아브라함으로써 처음 나타났듯이
아브라함 자손도 이렇게 십자가로 새로 만들어 내겠다는 겁니다.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낳듯 아버지 없이
육의 전달자 없이 단절로써쌍쓰럽게 처녀 홀로 말이죠
죽였다가 다시 살리시는
주님의 의로 (두 패로 나누는 기준은 주님의 의, 율법 외에 한 의)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4, 개역)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고후 6:5, 개역)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고후 6:6, 개역)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고후 6:7, 개역)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고후 6:8, 개역)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10, 개역)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주님의 의가 곧 십자가가울게 만들어서 우는 자로 태어나게 해서
울게 (애통케, 상하고 뭉들어지게 뭉개버려서, 상한심령이 되게) 만들어서
귀신 들린 딸의 어미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 먹지 않습니까
꼭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때의 심정 곧 상한심령 애통하는 자 아닙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는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이 우시는 모습 아니냐 말이죠
이렇게 심령이 가난하게 만들어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긍휼히 여겨달라고 탕자 만들어 버리고
의에 주리고 목 마른자 곧 사마리아 개같은 이방여자 우물가의 여인 만들어서
마음이 청결한 자 곧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냐 라고 간사함이 없는 자로 만들어서
화평케 하는 자 곧 참선지자들로 인해서 서로 싸움 붙이는 검을 주러 온 자들
평화의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
또 마지막 하나가 뭐죠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 곧 참선지자가 다 해당되지만
특히 실로암 소경 날 때부터 소경이라고 부모죄냐 자기죄냐 라고
마귀들에게 신학 연구 재로 실험물건 취급받는 이 실로암 소경이 바로
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날 때부터 소경되었다고
천국이 바로 이런 자들 저희 것으로써
천국이 새롭게 생산해 내었다 말이죠
그 차이로 반드시 우상숭배자와의 차이성이 부각 되면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천국을 베푸시는 겁니다.
금가락지 살진소 세신발과 새옷
마귀 보란 듯이 이처럼 당다 다 다 라 당 당당당당당 당당한 복음이다 말이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겁니다.
저들이 술꾼에 먹보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아루미 별명을 붙여도
정작 죽은 자를 살리는 의는 이 의로움 밖에 없다 말이죠
죽은 자를 살리는 의 이거든요
(마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지혜는 이 행한 일로 인해 옳다 함을 얻는다 말이죠지혜로운 여인 바로 며느리 다말처럼 말이죠
저들 우상숭배자들은 때려죽어도 죽은자 가까이 못 가요
피 흘리는 강도 만난 자에게 가차이 못 가요 근처도 못 가요
더러워서
삥 둘러 갑니다 경계선을 넘을까봐 조마 조마 하면서
우상은 이렇게 경계선을 치는데
예수님은 그 어떤 인간이 쳐 놓은 경계선을 마구 마구 선을 타 넘어요 글쎄
인간이 쳐 놓은 거룩하다 쌍스럽다 선이다 악이다 라는 구분짖는 선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막 막 막 타넘어요
인간은 자기가 쳐놓은 우상이라는 경계선을 넘을까봐 조마 조마 하는 판국에
그 경계선이 무너질까봐
그 46년 동안 지은 성전이 무너질까봐 전전긍긍 하는 가운데
예수님은 막 넘어요 막 넘어
경계선이 어디있어요경계선을 다 없애 버리더라 말이죠
다 폐기처분 하는 판국에
어딜 감히 경계선을 긋고 있냐 말이죠
베트남전 이라는 다큐 티비 영화 10부작 이였던가?
앞의 부분에서 케네디 연설에 이런 말이 기억나네요
과거 로마시대였던가? 중세였던가?
성벽을 쌓은 곳은 결국은 망하더라 라는 겁니다.
그리고 성벽이 없던 나라가 오히려 오래 간다고
물론 엉터리이지만
역발상 아닙니까
성벽의 기능이 자기 보호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처음에는 몰라도 오히려 이 성벽이 나중에는 나를 무너뜨리는
보호막 아닌 보호막이였다 말이죠
처음에는 이 성벽이 자신을 지키는 줄 알았지만
나중에는 자신을 썩게 만드는 썩은 고인 물이다는 거죠
내부분열로 망하게 하는 거다는 겁니다.
우상이 이래요
성벽을 쌓듯이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고자 벽돌을 쌓아요
그러나 정작 복음은 그 어떤 경계선도 다 무너뜨린다 말이죠
개성을 없애 버려요
어딜 변론자 앞에 와서 까지
천국 앞에 와서 까지
나는 요 개성이 이렇고
회사 회장이고
수제자이고요목사이구요대제사장 이구요
귀신도 주의 이름으로 물리쳐서 사단이 하늘에서 막 떨어지는 것까지 봤고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한 이웃사랑을 실천했고요
라는 기타등등의
이런 개인적인 특성들이, 30년 40년 ... 성화 했구요
그런 기념비들 육의 자랑이 아무 쓸모 짝도 없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이였구요
이 배설물이
이 변론자 앞에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일괄처리품으로
모조리 다 환자
모조리 다 죄인오히려 죄인 중의 괴수 라고저 분만을 노래 하더라 말이죠
이거 단 하나 밖에 없도록
평탄케 만드는 것이 바로 의
곧 죽엿다가 다시 살리는 이 의 앞에서
그 따위 개성들이 무슨 소용이 있냐 라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다 말이죠
그런데 더더욱 기가막히고 코가막하는 것이
불도져로 밀어붙이는 첩경을 평탄케 한 주님의 의가 안 보이는지
오히려 성화론자들이
그것도 아주 아주 수준이 무지 무지 높은 성화론자들이
이 산상수훈을 지켰기에
더더욱 개성이 말살되는게 아니라
산상수훈을 지켰다는 그 이유로 더더욱 개성이 특별나게
자신만의 특벽한 개성을 새롭게 만들어서
주님의 의 앞에 들이내미니
이게 우찌된 심판인지
듣기는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꽈배기를 좝쌉나 청개구리처럼
더더욱 개성을 들고 오는 것이
산상수훈을 핑계로 삼더라 말이죠
우상숭배를 산상수훈 덕분에 더더욱 하게 되었다고 ~~~
산상수훈 영화를 만들어서 국제영화제에서 3관왕을 받았다고 하는데
진짜 산상수훈이 오면 3관왕이라는 개성만점 특성만점이 아닌
불에 모조리 다 태어버릴 것 아니냐 말이죠
불에 다 타버렸는데도 불구하고 남겨졌다면
이것이 바로 산상수훈이 생산해 낸
심령이 가난 한 자
우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온유한 자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자
긍휼히 여기는 자
가 아니겠냐 말이죠
우찌된 것인지
저것이 윤리 도덕과 무슨상관이 있냐 말이죠
율법 외에 한 의 인
예수님을 말하고 있는데저들은 우상으로 선악으로 해석하더라 말이죠
산상수훈을 인간들이 글쎄 자꾸 자꾸 지킬려고 해요 글쎄
율법 도 못 넘어서면서
도리어 팔복을 지킬려고
경계선을 더더욱 치고 있어요 철조망을 치고
삼팔선을 긋고
성벽을 쌓고 쌓는
도리어 우상을 파괴 당하는게 아니라
자신이 파괴 당하는게 아니라
우상을 더더욱 세우고 있어요
자기를 더더욱 세우고 있어요
산상수훈 지키는 자기 라는 우상을 말이죠
그러니 나는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겠노라 라고 하는
아하스 우상숭배자와 뭐가 다르냐 말이죠
개성이 너무 너무 많아
우상이 너무 너무 많아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아
가시 나무 더라 말이죠
감사하게도 나의 숙제 없어요
천국이 나를 저렇게 일방적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선언입니다.
우는 자로 만들겠다고
닭이 울어서라도 반드시 만들겠다고
우상에게 내어주지 않겠다고
바벨론 입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이 우상에게 내어주지 않겠다는 이 임마누엘이 천국의 숙제이다 말이죠 인간의 숙제가 아니라
이 임마누엘이 하는 숙제를 구하지 않게다고 하니 원 ~~~
(사 42:8, 개역)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 주님의 숙제를 안 쳐다보고
자기도 못 지키는 짐을
자기도 안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끔
무거운 짐을 지우는 사기꾼들에게 속지 말고
그 속임수와 밝히 보이는 십자가와의 대조를 통해서
왜 예수님이 나 보다 옳았는가를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아니였다면
나 라는 우상을 누가 깨뜨리겠냐 말이죠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으니
이 십자가의 복음과
우상숭배자들의 속임수와의 차이성을
성령께서 보여주신다는 그 자체가 복이지
지키라고 준 것 단 하나도 없음을 속지 맙시다
---
어 이상하다! 마태복음 글 쓴게 없네! 날라갔나?
졸음이 막 쏟아지는 가운데 적었던 이사야 글을 먼저 올린 것도 모르고
한참을 찾았네요 ㅋㅋ
오타가 많았던 이사야 글을 수정했고
먼저 미리 못 올린 마태복음 글은 이제서야 올립니다.
'마태복음 2018'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인(미움) 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은 의 ① (마 5,20-37) (0) | 2019.01.10 |
---|---|
세상과 소금 (마 5:13-19) (0) | 2019.01.04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와 그물(생존)을 던진 죽은자 (마 4:11-25) (0) | 2018.12.20 |
성령에게 이끌려 마귀의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다 (마 4: 1-11) (0) | 2018.12.14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마 3:13-17) (0) | 2018.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