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겔 17,22-24)
종말(공백)을 선물, 하나님 자신을 기업으로 주심
(겔 17:22, 개역)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또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빼어난 산에 심되』
(겔 17:23, 개역)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지라』
(겔 17:24, 개역)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겔 17:22, 현대어) 『[시온산에서 다스릴 왕]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 나는 또한 몸소 저 송백 끝에 돋은 순들 가운데에서 연한 가지를 하나 꺾어다가 이스라엘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어 놓겠다.』
(겔 17:23, 현대어) 『이스라엘 한가운데에 있는 그 높은 산 위에 내가 그 가지를 심어 놓고, 거기서 많은 가지들이 뻗어 나오고 열매를 맺어 훌륭한 송백으로 자라게 하여 온갖 짐승들이 그 나무 밑에 깃들이다. 모든 종류의 새들이 그 가지의 그늘 속에 보금자리를 치게 할 것이다.』
(겔 17:24, 현대어) 『그러면 그제서야 나 여호와가 높은 나무는 낮추어 놓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싱싱하게 푸른 나무는 말라 죽게 하되 마른 나무는 다시 싹이 나게 하였다는 것을 온 세상 모든 나무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나 여호와가 이 말을 하였으니 내가 모두 이룰 것이다.'』
인간의 죄란 딱 하나 곧 선악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행세 합니다.
그런 인간이
곧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선물하게 되면 졸지에 두 하나님이 생기게 되는 거죠
하나의 하나님을 포기해야 하는 입장에 놓여진 겁니다.
맞습니다.
진짜 하나님을 선물 하는데 있어서
다른 하나님인 인간은 자신을 포기 아니
삭제 당함을 격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종말을 선물 하심이라고 표현해 보았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는 하나님 이신 예수님 자신을 선물하심에 있어서
인간 속에 있는 가짜 하나님 곧 마귀죠
이 마귀가 어떻게 발악을 하면서 물러나야 하는지를
오냐 똑똑히 보여 주마 라고 다가오시는 겁니다.
그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미리 앞당겨 누리게 하시는 선물
곧 공백 즉 십자가를 선물 하시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모든 인간의 하나님관이 다 꺠어지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의 하나님관이 다 들통당하도록 되어 있는 거지요
오늘 본문에 높은 자 낮추시고 낮은자 높이신다
높은 나무
나무 라고 표현이 되어 있는데
(눅 1:52, 개역)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겔 21:26, 개역)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관을 제하며 면류관을 벗길지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
이것은 앞의 수수께끼와 연관 된 거죠
백향목 나무 가지 라고 나오죠
또 포도나무로도 나옵니다.
(겔 17:5, 공동) 『그 지방에서 난 ㉠종자를 찾아 버드나무 심듯 물이 콸콸 흐르는 강가, 갈아놓은 밭에 심었다. / ㉠시드키야를 말한다.』
(겔 17:6, 공동) 『움이 돋고 보니, 그것은 포도나무였다. 뿌리를 땅에 박고 낮게 옆으로 퍼지며 덩굴은 그 독수리에게로 뻗었다. 포도덩굴이 되어 가지가 뻗으며 움이 돋았다.』
마침 지난 주에 마태복음에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라고
높은 마음 곧 천국에서 누가 큰 자입니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였다 말이죠
즉 모든 종교에서의 천국은 큰 자 만이 가는 겁니다.
겸손도 커야 하고
선함도 커야 하고
착한 일도 커야 하고
낮아진 마음도 커야 하겠죠
이것이 악마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그 토록 인간이 가고 싶어하는 천국이 바로 마귀의 세계 이다는 거죠
이런 인간에게 즉 큰 자 만이 천국에 간다 라는 이런 악마의 세계에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신다 라고 말이죠
그리고서는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즉 한마디로 말해서 어린아이와 같은 낮아진 마음은 이 세상에 통용이 될 수가 없어요
분명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큰 자 입니까? 라고 물었다 말이죠
결국 인간에게서의 천국이란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두 번째 시험에 나오는
종교 곧 문화 죠 오늘날 문화
이 종교와 문화는 독자적으로 설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권력과 결탁이 되어 있다 말이죠
지난 주 녹음에서도 언급했지만
아하스 왕이 절대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 라고 했다 말이죠(왜?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겠다고 해서 말이죠)
그래놓고 애굽과 손잡고 연합군을 형성하더라 말이죠
결국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언급한 이유가 바로 정치적인 권력과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린아이 임마누엘 아기를 구할 턱이 없지요
권력이 안 되니까 말이죠
바로 이것이 임마누엘의 뜻입니다.
니 하나님과 내 하나님이 다르다 말이죠
한 쪽 아하스 왕의 하나님이란 권력이 되기에 정치는 이 권력과 손을 잡아야 하거든요
종교는 말이죠
신땡지가 대구에서 정치꾼들과 손을 잡았듯이 말이죠
여기에 상대적인 종말의 하나님은
어린아이를 구해요 글쎄 임마누엘을 구해요
전혀 힘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란 그저 우는 자입니다.
살려주세요 라고 부르짖는 젖먹이 이다 말이죠
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이기 때문이거든요
성전 곧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에
두 사람이 기도 합니다.
하나는 곧 바리새인은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하나님께 감사하다 라고
하나님을 언급해요
이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 정도가 아니라 마귀입니다.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자기를 위하여 의탁할 수가 있으니까 말이죠
그러나 세리는 심판의 하나님을 외칩니다.
주여 살려주세요 라고 말이죠
이 심판의 하나님을 품은 자가 바로 성도 이거든요
이스라엘은 종말의 단체입니다.
특급상품이다 말이죠
그런데 다른 종교에서나 믿는 그런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그런 하나님을 소통이 된다면
주님이 말라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러 왔겠습니까
절대로 인간과 인간 끼리
그 사이에서 통용이 되지 않는 하나님이 바로
심판의 하나님 이거든요
정 소통 하고 싶으면 심판 받아라 말이죠
소통은커녕 단절이 되어요 뚝뚝 끊어집니다,
그러니 존재는 곧 소통은 아예 안 되는 겁니다,
오로지 기능 만이 됩니다.
곧 이스라엘만 되어요
왜? 이스라엘이 종말의 단체 이거든요
죽어야 사는 자들이다 라는 겁니다.
산다 라는 것은 소통 아닙니까
죽다 라는 것은 단절 아닙니까
그러니 산 자의 하나님을 외치는
이스라엘의 종말성은
이 심판 속에 놓여짐으로써 외치는 하나님이다는 거죠
아 그런데 심판의 주를 품는게 아니라 외치는게 아니라
선악을 아는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서
그런 하나님을 외치니
자신을 투사한 하나님 말이죠
그러니 당연히 종교적으로 곧 두 번째 마귀 시험
나는 절대로 이유 없이 죽으면 안된다 라는
문화죠 오늘날 문화
이것은 반드시 정치와 결합이 되었기에
반드시 높아야 하는 겁니다.
낮아짐을 견딜수 없어 해요
왜? 소통이 안되는 어린아이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인정을 못 받거든요
권력이 안되요
아무런 힘이 없어요 힘이
그러니 시드기야 왕은
자기를 낮추는 몽둥이 역할을 하고 있는 바벨론에게 대항을 하는 거죠
마치 바리새인 때의 유대인
여러 파들이 있었죠
열심당원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 독립운동가로 나서는 겁니다.
가룟 유다도 여기에 해당 되구요
그러니 세리와 같은 매국노 에게
정죄하는 그 자부심은 얼마나 대단하겠냐 말이죠
꼭 매국노에게만 해당 될까요?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모두다 다 해당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몇 번 남을 용서 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서도 나옵니다.
7번 까지 했었다 라는 거죠
얼마나 어렵게 7번 까지 했는지 모릅니다 라고 나오는 겁니다.
이게 정치입니다.
졸지에 7번이 남에게 인정 받고픈 하나의 교리 실천이 되어버렸고
결국은 정치가 되어버린 권력이 된 겁니다.
바리새인이 십의 일조 그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이
마치 권력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죠
행함은 권력이 되어요
권력이 안되는 행함이 없어요
그러나 믿음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무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웃끼게도 믿음 조차도 권력이 되어버리는 것 보면
그 사회를 마귀가 얼마나 장악했는지가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포도나무인 시드기야가
선악으로 판단 해서
여전히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이스라엘을 구하고자 하는 기특한 마음에 의해
망하는 겁니다.
아하스 왕과 똑같이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노라 임마누엘 구하지 않겠노라
그래서 애굽과 손 잡은 거죠
이스라엘을 존재로 본 겁니다.
자기 존재를 투사 시켜서 말이죠
자신의 존재성을 투사 시켰다는 말은
선악으로 본다는 겁니다.
그러니 대상물이 되기에 숙제꺼리가 있게 된 셈이지요
그러나 어린아이는 숙제가 없어요
주님에게 다 맡겨요
숙제가 없다는 말은 도리어 대상물로 삼는게 아니라 대상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어떻게?
주님 곧 심판주의 낮추심의 대상물이 된 거죠
그러니 이 심판의 주를 품은 자가 어린아이 가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자는 자기의 존재성을 투사 시킨
그래서 이스라엘도 자기 숙제이고
절대로 망하지 않게 해야 하니까
오늘날로 치면 교회도 그렇게 절대로 망하지 않게 하고자
성화 시키고자 하듯이
개혁 시켜야 하듯이 말이죠
바로 그런 선악이 죄가 되는 겁니다.
주변 나라를 괜히 네 짐승으로 키워서 주님이 다루시는게 아니다 말이죠
이런 주님의 계획에
이스라엘은 독자적으로 따로 자신의 숙제를 구축하고 있으니
주님이 이 세상에 심판을 퍼붓고자 하시는데 있어서
도리어 방해꺼리가 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빛으로 오심에 있어서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방해하는 입장인 겁니다.
만군의 주 여호와 이신데
이 열방의 모든 나라가 주 여 라고 입술로 고백하고
모든 무릎이 꿇어 엎드리는
이 새 일을 펼치심에 있어서
이스라엘은 심술 부리면서 방해하더라 말이죠
마치 탕자의 형 맏아들이
개같은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와서 주 앞에 엎드리는 것을
맏아들 이스라엘은 싫어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처럼 말이죠
도리어 폐를 끼치고 있더라 말이죠
얼마전 뉴스를 통해서
뉴스가 아니면 부활절 이라는 것도 모를 정도로 다 잊어버렸는데
부활절 그 큰 대목에 기여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겠다고
더 웃끼는 것은 자동차 극장처럼
자동차 예배로 클락손 눌러서 아멘 아멘 외치고 있으니
다 장사 속 인데
믿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모조리 다 선악 이다 말이죠
자 그럼 그거 안 하면 그럼 믿음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뭘 해도 다 죄 짖기 밖에 없음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말이죠
뭘 해도 막살기 뿐이였다는 겁니다.
저런 것을 하는 것이 옳다 라고 여기는 것이 죄라는 겁니다.
네 맞아요 죄 아닌게 없어요
그러니 존재에 기대 걸게 아니라
종말 이라는 기능에 기대 걸어라 곧 부르짖어라 말이죠
바로 심판의 주를 선물 받는 겁니다.
마땅히 부르짖어야 할 이스라엘이
그것도 유다왕으로써 시드기야가 부르짖지 않으니까
자식을 안 잡아 먹을려고 한 것이
도리어 자식을 잡아 먹게 되는 결과가 되었고
그 정도로 어두운 눈이라는 것을 두 눈이 뽑혀서 포로 잡혀가 감옥에서 썩어 죽게 되는 겁니다.
즉 베드로가 남을 7번 용서할까요 라는 마음이
얼마나 높은 마음인줄 모르는 겁니다.
이 선악을 주님은
7에 70번 도리어 용서 받아라 라고
낮추는 마음을 선물 하시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특이성 이니까 말이죠
바로 교회 곧 성령의 전인
너 자체가 성령의 전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꾸 이스라엘 국가
눈에 보이는 성전, 교회를
자꾸 자신의 손으로 한 숙제를 자꾸 자꾸 담을려고 하니까
더더욱 완악해 지는 겁니다, 즉 높아진 마음만 되더라 말이죠
그렇게 율법을 지켜서 교회에 쌓으면 쌓을수록
주님은 일방적으로 죄를 뒤짚어 씌어서
왜 고아 과부 나그네를 신원치 않느냐 라고 다구치시는 겁니다.
부자 청년이 그래서 이 다구치심 앞에서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압제 하는 자로 들통이 나더라 말이죠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란 곧 그리스도의 몸이란
독자적인 따로 따로 국밥처럼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다 연결이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런데 부자청년은 자기 혼자 율법 잘 지키고 있더라 말이죠
그것은 이방인이 하는 짖 거리와 같다 말이죠
이웃 설정을 자기에게 잘 대해 주는 사람과 이웃 먹기 하는 것과 다를바 없는 거죠
더럽고 냄새나는 씻어도 씻어도 또 더러운 발가락 하나가 아픈데
손 깨끗이 씻은 손가락이 난 발가락이 아니다 라고 내 몰라라 하게 되면
그게 무슨 놈의 이스라엘이냐 말이죠
어서 손으로 발가락을 씻어주고 약을 발라 주어야지
그게 손의 기능인데
손가락 존재만 우기게 되면
평생 발가락은 누가 씻어주냐 말이죠
발가락 죽으면 손 가락 안 죽냐 말이죠
개인 구원 없어요
그리스도의 몸 구원 밖에 없다 말이죠
지금 시드기야가 그래요
아니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 빼고 유대인들 전체가 다 이래요
그러니 새로 만드셔야 했던 겁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이래요
그러니 주님은 여전히 지금도 부지런히 일하시면서
새롭게 새로 만드시는 겁니다.
늘 해체 시켜요 해체
바로 이렇게 낮추시는 낮은 자를 주님이 직접 높이시는 겁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의 눈에는 전혀 안 높아요
주님은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 높다 라고 해도
전혀 전혀
네버 네버
전혀 천국에서 높은 자로 안 보이는 겁니다.
이미 그들에게서의 어린아이는 이미 벌써 재껴 놓은 열외에 해당 되니까 말이죠
그래서 어린아이 이야기 하신 후에
예수님이
너희들이 열외를 시켜 버린
그 어린아이를
주님은 직접 친히 보호하신다 라고
그런 취지로써
99마리 양과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비유로써 언급 하시는 겁니다.
이미 열외 시켜 버려서
삭제가 되어 휴지통헤 버려진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주님은 끝까지 찾으신다 라고
자꾸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비유
잃어버린 양 비유
자꾸 잃어버린 잃어버린
잃어버린 자를 언급 하시는 이유는
마치 이스라엘에게서
고아 과부 나그네가 잊혀져 버린 그 속에서
다시 되 찾겠다 라고
그래야 이스라엘 자체가
처음자리인 고아 과부 나그네 였기에 말이죠
오늘날 교회는 특히 성화론자들은
높은 마음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잃어버린 자를 되찾는 주님의 일하심을 무시하더라 말이죠
그저 그들은 남을 몇 번 용서 하느냐 라고 그것만 관심 두더라 말이죠
아니 그럼 7에 70번 하면 될꺼 아니가 라고
자꾸 오해를 하는데
7에 70번 하라는 게 아닙니다.
또 자기 숙제로 빠져요
그 반대 이다니깐요
도리어 용서 받으라 니깐요
네 맞아요 멋들어진 구원에서는 전혀 말도 안되는 소리죠
왜? 모욕적인 구원이 되어야 하니까
성화론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마귀 이다 말이죠
하나님이 서로 달라요
심판의 주를 품지 않아요
곧 십자가의 저주를 품지 않아요
그러니 부르짖지 않는 겁니다.
지가 알아서 기도해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다고
부르짖게 하시는 분이 없어요
그래서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아요
왜? 심판의 주를 선물 받지 못해기에
여전히 자신의 숙제로 저 바벨론을 물리칠수 있다고
자기에게 기대를 걸기 때문이거든요
심판을 품는게 아니라
여전히 희망과 꿈을 품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이유 없이 무조건 높은 나무가 되어야 하고
이유 없이 무조건 푸른 나무가 되어야 한다고 여기니
이 십자가를 앞 장 세우시는 하나님을 이해 못하니까
따로 선악의 하나님을 따로 조작해 만들어서 하나님을 만들어 내고 있더라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이 십자가를 선물 하시고자
즉 낮추시고자
우상 곧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에게
이 십자가를 밀어붙이심으로써
새 일을 다 이루시는 겁니다.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참 하나님은 이 십자가만 곧 종말만 심판만 밀어 붙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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