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 독수리 비유 해석 (겔 17,11-21)

(렘 31:21, 개역)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렘 31:22, 개역)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겔 17:11,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17:12, 개역) 『너는 패역한 족속에게 묻기를 너희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하고 그들에게 고하기를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과 방백을 사로잡아 바벨론 자기에게로 끌어가고』
(겔 17:13, 개역) 『그 왕족 중에 하나를 택하여 언약을 세우고 그로 맹세케 하고 또 그 땅의 능한 자들을 옮겨 갔나니』
(겔 17:14, 개역) 『이는 나라를 낮추어 스스로 서지 못하고 그 언약을 지켜야 능히 서게 하려 하였음이어늘』
(겔 17:15, 개역) 『그가 사자를 애굽에 보내어 말과 군대를 구함으로 바벨론 왕을 배반하였으니 형통하겠느냐 이런 일을 행한 자가 피하겠느냐 언약을 배반하고야 피하겠느냐』
(겔 17:16, 개역)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바벨론 왕이 그를 왕으로 세웠거늘 그가 맹세를 업신여겨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그 왕의 거하는 곳 바벨론 중에서 왕과 함께 있다가 죽을 것이라』
(겔 17:17, 개역) 『대적이 토성을 쌓으며 운제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멸절하려 할 때에 바로가 그 큰 군대와 많은 무리로도 그 전쟁에 그를 도와주지 못하리라』
(겔 17:18, 개역) 『그가 이미 손을 내어 밀어 언약하였거늘 맹세를 업신여겨 언약을 배반하고 이 모든 일을 행하였으니 피하지 못하리라』
(겔 17:19, 개역)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가 내 맹세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
(겔 17:20, 개역) 『내 그물을 그 위에 베풀며 내 올무에 걸리게 하여 끌고 바벨론으로 가서 나를 반역한 그 반역을 거기서 국문할지며』
(겔 17:21, 개역) 『그 모든 군대에서 도망한 자들은 다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남은 자는 사방으로 흩어지리니 나 여호와가 이것을 말한 줄을 너희가 알리라』

(겔 17:11, 현대어) 『[비유의 해석] 여호와께서 또 내게 말씀하셨다.』
(겔 17:12, 현대어) 『`너는 이 반항만을 일삼는 백성에게 이렇게 내 말을 전하여라. `너희는 이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하겠느냐? 그렇다면 그 의미를 내가 직접 설명해 주겠다.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와서 왕과 고관들을 붙잡아 바벨론으로 데려가고』
(겔 17:13, 현대어) 『그 대신에 이스라엘 왕족 가운데서 한사람을 택하여 협정을 맺고 충성할 것을 맹세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는 이 땅의 쓸 만한 인물들을 모조리 잡아가』
(겔 17:14, 현대어) 『이 새 왕이 고개를 들고 일어서서 독립할 여지를 아예 없애 버리고 단순히 나라를 존속해 나가기 위하여 협정이나 잘 준수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겔 17:15, 현대어) 『그런데도 이 새 왕은 협정을 무시하고 애굽 왕에게 밀사들을 보내 많은 군마와 전차를 거느린 막강한 군대를 파견하여 자기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니 그 일이 잘되겠느냐? 협정을 파괴하는 자가 성공할 수 있겠느냐? 그런 짓을 하고서도 형벌을 모면할 수 있겠느냐? 그가 자기 목숨이나 건질 수 있겠느냐?』
(겔 17:16, 현대어) 『나 여호와가 확실히 살아있음을 걸고 맹세하지만 그는 절대로 죽음을 면할 수 없다. 자기를 왕으로 세워 준 바벨론 왕 앞에서 한 맹세를 무시하고 협정을 파괴하였기 때문에 그는 그 왕의 도시 바벨론에서 죽을 것이다.』
(겔 17:17, 현대어) 『바벨론 군대가 밀어닥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장벽을 쌓으며 공격 진지를 구축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할 때에, 애굽 왕이 아무리 막강한 군사력과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있을지라도 전쟁에서 그를 살려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아예 병력을 끌고 도와주러 오지도 않을 것이다.』
(겔 17:18, 현대어) 『그런데도 이 새 왕은 자기가 한 맹세를 무시하고 협정을 파괴하였다. 그가 협정을 맺고서도 지키지 않았으니 결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겔 17:19, 현대어) 『나 여호와가 확실히 살아 있음을 걸고 맹세하지만 그는 내 이름을 두고 맹세하고 협정을 체결하고서도 지키지를 않았으니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게 바친 맹세를 무시하고 나와 맺은 협정을 파괴한 것이기 때문이다.』
(겔 17:20, 현대어) 『그러므로 내가 그의 머리 위로 사냥하는 그물을 던져 그를 사로 잡겠다.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내 심판대 앞에 세워 놓겠다.』
(겔 17:21, 현대어) 『그러면 그의 군대에 뽑혀 나온 자들도 모두 잡혀 죽을 것이며 살아남은 자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그때서야 이 모든 것을 선포한 이가 나 여호와라는 것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다.』

(삼하 6:6, 개역)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삼하 6:7,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 6:8, 개역)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렘 39:1, 개역) 『유다 왕 시드기야의 구년 시월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그 모든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치더니』
(렘 39:2, 개역) 『시드기야의 제십일년 사월 구일에 성이 함락되니라 예루살렘이 함락되매』
(렘 39:3, 개역) 『바벨론 왕의 모든 방백이 이르러 중문에 앉으니 곧 네르갈사레셀과 삼갈르보와 환관장 살스김과 박사장 네르갈사레셀과 바벨론 왕의 기타 모든 방백들이었더라』
(렘 39:4, 개역) 『유다 왕 시드기야와 모든 군사가 그들을 보고 도망하되 밤에 왕의 동산길로 좇아 두 담 샛문을 통하여 성읍을 벗어나서 아라바로 갔더니』
(렘 39:5, 개역) 『갈대아인의 군대가 그들을 따라 여리고 평원에서 시드기야에게 미쳐 그를 잡아서 데리고 하맛 땅 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올라가매 왕이 그를 심문하였더라』
(렘 39:6, 개역) 『바벨론 왕이 립나에서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였고 왕이 또 유다의 모든 귀인을 죽였으며』
(렘 39:7, 개역) 『왕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 하여 사슬로 결박하였더라』


인간의 죄는 딱 하나입니다.
바로 선악을 아는 것이 죄입니다.
이것이 어떤 증상으로 나타나는고 하니 바로 우상숭배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상이 과거 모세 때는 돌이나 나무로 만든 것을 염두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이미 창세기에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 말이죠
가장 표피 끄트머리가 돌이나 나무이지
그 속을 조금 파면

호세아 때는 (분열왕국 시대의 배경인 북이스라엘에 활동한 선지자)
음란한 마음을 우상숭배라고 했는데
앗수르가 혼혈정책으로 인해 북이스라엘이 이방여자와 결혼케 만들어 혈통을 섞어버리게 하니
여기서 벗어날 자들이 없다 말이죠

그리고 바리새인 때는 곧 신약 때는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했는데
돌이나 나무를 우상화 하던가요?
이방여자와 결혼 했나요?
오히려 사마리아 구역을 삥 둘러가잖아요!
우상을 안 섬겼잖아요
아 그런데 돈을 사랑한다고 하더라 말이죠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긴다 라고 하시더라 말이죠
돈 안 사랑하는 자가 어디있습니까?
그리고 다다음 글 이사야에서도 언급하겠지만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을 우상의 도성으로 만들어 버립니다.(강도의 소굴)그리고 그들이 지키는 율법 조차도 다 우상화 곧 자기를 위한 구원으로 곧 우상으로
최종적인 도착점이 되는데 있어서
예수님과의 충돌은 곧 인자와 우상(선악)으로써
그들은 도리어 우상의 대변자로 나서게 됩니다.(독사의 자식)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교회의 목사들이 우상의 대변자로 나서고 있다 말이죠
눈에 보이는 것을 섬기도록 하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방식과 똑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는
그 동안 불의한 재판관 비유가 고레스와 연관이 되지 않나 싶었는데
아 맞더라구요

예수님의 비유에서 상당한 부분이 불의한 재판관이나
불의한 청지기 이나
이런 비유가 왜 난해한 내용이였는지
그러고 보니
다른 비유는 안 그러냐
좀더 쉽다고 생각했는데
우와 다 엉터리로 봤구나
도리어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기준으로 해서 새로 봐야할 판국이구나
오늘 본문도 그러합니다.
수수께끼의 해석이거든요

즉 인간의 죄는 딱 하나 선악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를 위한 구원을 펼치지 때문에
악을 선택하는게 아니라 선을 선택한다 말이죠
아니 누가 부정을 택하는 자가 어디 있겠냐 말이죠
다들 긍정을 택하겠지요

바로 그런 선악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악이기에
그 선악에 전도 된 십자가를 보여주시고자
이런 사건을 벌리시는 겁니다.

소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모든 인간의 행동들은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된 모습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에게 전쟁을 벌리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구약 출애굽기를 통해서 애굽과의 전쟁을 목격했습니다.
그 전쟁이 이제 한 나라가 아닌 전체 주변 국가로 퍼져서 펼쳐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전쟁 속에서의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바로 선악이라는 우상이 튀어나오는 거지요
바로 정치적인 상황인 닫힌 모습이다는 겁니다.
인간 자신이 하나님 됨에서 그 너머의 십자가의 사랑을 못 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왜? 철저하게 닫혀 있기에

그러니 자기를 위한 구원 밖에 모르는 겁니다.
그 너머의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는 거죠

그러니 죄인 만드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구원을
닫힌 상황에서만 보고자 하지
그 너머의 구원은 구원으로 안 본다는 겁니다.

어떻게 불뱀에 다 물려 죽게 되었는데 
인자를 쳐다보면 다 낫게 되냐 말이죠
말이 안되는 비현실이다 말이죠

닫힌 상황 너머의 긍휼의 세계는
아무리 들따 볼려고 노력해도
선악에 이미 갇혀 버린 이상
이 제한적인 시선 너머의 세계는 못 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바로 그런 선악의 대표인 바리새인과 충돌하심으로써
그 선악의 너머의 세계를 침투시켜서
천국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
심지어 유대인은 다른 민족은 절대로 못 들어가고
자신들 선민들만 들어갈수 있다는 그 천국이
예수님의 소개로 인한 천국은
도저히 가고 싶은 마음이 없을 정도로
다들 거부하는 천국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 조차도 인간의 선악 곧 하나님과 같이 됨의 연장선인
선악의 연장선의 천국이다는 거죠
모든 종교가 다 이래요
그 모든 종교의 대표성이 바로 유대교 이니까 말이죠

지금 현대의 최고의 종교는 불교입니다.
왜냐하면 해체주의 이거든요
모든 것을 다 해체해요

신도 해체하고
천국도 해체하고
그 천국의 너머 조차도 해체 하는
자아도 해체하여 무자아를 추구하는
그런데 자아를 해체하는 그 자아는 결국 해체를 못 해요
인간을 신으로부터 떼어놓는데 성공했는데
그 인간을 인간 자신으로부터 떼어놓는데는 성공을 못해요
더 딜레마에 빠졌어 ㅋㅋㅋ

오늘 본문이 딱 그런 상황 곧 닫힌 상황입니다.
선악을 유감없이 들통당하게 되는 상황 말이죠
뭘 해도 죄 밖에 없다 라는 말은
뭘 해도 인간은 선악 밖에 안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들통당한게 아니라 늘 그랬 었 었 다 라는 거죠

시드기야 마지막 남유다 20대 왕이
바벨론과 전쟁을 벌리기 위해서
애굽과 손을 잡습니다.

이것은 아주 아주 당연한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아니 포로 잡혀 가는
나라가 쫄딱 망하는 것이 낫겠습니까?
아니면 나라가 망하지 않도록
지푸라기 라도 잡고 싶은 짐승이 될 지언정 나라를 지키는 것이 낫겠습니까?

두 말 하면 잔소리죠 나라는 지키는 것이겠죠

그래서 우상숭배자 바벨론을 물리치기 위해서
역시나 우상숭배자 애굽과 손을 잡습니다.

우상을 해결하고자 우상과 손 잡고 있는다?

지금 여호와 하나님이 우상섬기는 문제로 인해서
심판을 하고 있는데 말이죠
(이 얼마나 모순이 되는 뫼비우스의 띠 같냐 말이죠
사실은 우상을 칠려고 주님 쪽에서 우상을 일으킨 겁니다.
그럼 그 우상은 누구 입니까? 나 죠 나
나 개인 입니다.
이 나 라는 우상, 자아 라는 우상을 치실려고
바벨론을 일으켰다 말이죠

선악은 주님 혼자만 알 면 되지
내가 알 필요가 없어요
바로 그런 입장에서
율법 곧 시온에서 나오는 율법은 무조건 이유 없이 심판하시는 겁니다.
왜? 나는 우상 이니까
그 우상에 대한 심판으로 끝내셔도 되는데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말씀이 우상에 의해 죽은 나를 다시 살리시는
긍휼을 베푸시고자
창조주로써 나타나셨다는 겁니다.
너 창조주 알어? 모르지
내가 알려주마 라고
이 사건을 벌리시는 겁니다.

창조주가 누구십니까?
장대 높이 달린 인자야?
에이 그게 무슨 창조주 입니까
때려 죽어도 선악에서는 안 보이니까
불뱀에게 물려 죽이시니까
주의 성소에 들어가 보니까 비로소 보인다 말이죠
그 주의 성소(시편 73편) 속에 들어가게 해 주시는 사랑이 아니면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듯이
사랑을 받지 못하면
도통 무슨 소리인줄 모르고
그 빈공백을 엉터리인 행함으로,
자기 의로움으로 채우고 마는 겁니다.
인애와 자비가 아닌 (남은자, 이스라엘 집단이 아닌)
번제와 제사로 꽉꽉 채운다 말이죠 (개인의 자질, 개인 구원으로 채우는) )

주님의 심판 속에서 자신을 구원하는 길은 뭐 밖에 없습니까?
네 맞습니다 양사방을 둘러봐도 우상 밖에 없습니다.
선악을 너머 서는 구원은 저 바깥에 있지
자꾸 선악 안에서의 구원 밖에 모르는 겁니다.(저 세리, 매국노 악마 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자기 개인을 선으로 보는)
바로 그런  닫힌 상황에서의 구원은 백날 해 봐도 소용없는 헛짖이다는 거죠

바로 그런 의미에서 바리새인들이 율법 지키고
유대인들이 말씀을 실천하고(율법사의 이웃사랑실천)
오늘날 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종교인들의 교리 실천은
그야말로 닫힌 상황이다는 거죠

그 대표적인 한 예가 바로 이웃 설정이다 라고
얼마전에 언급 했습니다.
사람이 이웃을 설정하는 그 기준이
한 민족, 하나의 민족, 같은 민족
한 뿌리, 하나의 뿌리인 민족, 같은 뿌리인줄 알았는데
그렇게 국가가 형성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말이죠
종교에 의해서 이웃이 설정이 된다는 겁니다.
시아파와 수니파에 대한 강의 속에 나오더라 말이죠 정영진의 경제의 신 ? 맞나?

누가 더 하나님 다운 교리인가
누가 더 이웃 다운 종교인가
누가 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교파인가?

바로 이것이 정치적인 상황인 닫힌 상황이다는 거죠

선악 안에 갇혀서 철저하게 복종하는 겁니다.
죽기를 무서의 종노릇 하는 종속 관계이다는 거죠

그런 선악을 너머서는 십자가의 사랑은
죽음을 너머서는 겁니다.

주님은 이미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으셨다 라고 선언 하시면서
이런 사건을 벌리시는 겁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은 자신의 죄악
곧 우상숭배를 들통당하도록 되어 있는
죄인으로써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신 또한 우상숭배자들 이기 때문이거든요

그 우상을 치시는데 있어서
곧 선악을 치시는데 있어서
우리의 판단은 선악을 못 넘어서는
선악에 닫혀진 상황을 격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 즉 악을 저지르지 않겠다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겠다 즉 선을 끝까지 지키겠다 라고 나오는
선악을 유감없이 우상을 유감없이 내 뱉고 있지

예수님의 활동은 어떻게 하시는 것인가 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자꾸 죽겠다 라고 나오시니까 말이죠

죽음 너머를 못 보는 겁니다.

다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라는 말은
아무리 구약에 예언이 되어 있더라도(호세아)
정작 죽음 에서는 다 탁 걸려서 넘어져 버리니까
넘어 서는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탄아 썩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 라고 욕 먹는 거죠

사람의 일은 결국 끝까지 정치적이고 선악적이며 우상적인 사단의 일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여기에 반해 하나님의 일이란
십자가의 사랑을 말씀하시고자
이렇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일을
곧 공백을 만드시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생각 이라는 단어는 아브라함을 생각하라 라고 했듯이
지난주 이사야 말씀으로 치면 야 정신차려 술에서 깨어나 뺨을 때리면서 말이죠
정신 똑 바로 차리라 라는 말입니다.
술을 먹여 취하게 해 놓고서는 야 정신차려 라고 하는게 어디있냐 말이죠
여기 있습니다. 뱀에 물리게 해서 죽도록 해 놓고서는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라 라고)

이 공백에 의해 곧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꼬추 짤리듯이
마음 판의 할례를 당하게 되는 거죠
선악을 짜르겠다 라고(손할례는 도리어 선악을 도리어 붙이고 있는 셈)

지난 주에 시드기야는 오늘 본문처럼 두 눈이 뽑혀서 평생 감옥에 살게 된다 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정치적은 안목에서 파악했다 말이죠
곧 선악으로 말이죠

다윗도 그런적 있지요
백성의 수를 세다가 그만

(대상 21:1, 새번역) 『사탄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일어나서, 다윗을 부추겨,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게 하였다.』

(대상 21:17, 새번역) 『그 때에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었다. "이 백성의 인구를 조사하도록 지시한 사람은 바로 내가 아닙니까? 바로 내가 죄를 짓고 이런 엄청난 악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백성은 양 떼일 뿐입니다. 그들에게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주 나의 하나님! 나와 내 집안을 치시고, 제발 주님의 백성에게서는 전염병을 거두어 주십시오."』

괜히 애먼 사람만 죽어나간 거지요
그러나 사실은 다윗 개인을 다루시는게 아닙니다.
억울하게 죽은 개개인들의 죽음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집단 구원이기에
개인의 죽음을 주님은 무시합니다.
개인의 죽음을 너머선
선악을 너머선
주님의 용서의 바다 속에 놓여진 입장이기에
뭐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한다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역시나 개인을 인정하는 셈이고
집단 조차도 집단이 아니라 개개인이 모인 개인의 다수일 뿐인거죠
소위 그런 공동체 개념은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은 오로지 한 몸
그리스도의 몸 뿐입니다.
하나에서 나온 여럿 곧 이스라엘 집단입니다.
개개인의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
집단의 인애와 자비입니다.(공동체와 아무런 상관 없습니다. 개인의 희생 또한 강요하지 않습니다.)

시드기야의 안목은 곧 정치적인 상황의 안목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 사탄의 안목입니다.

곧 언약에 대한 반발인거지요
어떤? 주님 꼐서 바벨론 왕을 나의 종으로 삼았다 에 대한 반발 말이죠

어떻게 우상숭배자가 주님의 종이 되냐 말이죠

불의한 재판관에게 과부가 자신의 원한을 호소하며 귀찮게 하잖아요
기도에 대한 비유인데

(눅 18:1, 쉬운)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예수님께서 언제나 기도하고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눅 18:6, 쉬운)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말한 것을 들으라.』

(눅 18:1, 개역)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눅 18:2, 개역)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눅 18:3, 개역)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눅 18:4, 개역)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눅 18:5, 개역)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눅 18:6, 개역)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눅 18:7, 개역)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눅 18:8,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저는 불의하다는 재판관 보다

(눅 18:3, 개역)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도대체 이 과부의 원한이 뭔가?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이 뭔가 라는 점입니다.

이게 안 풀리면
불의한 재판관도 안 풀리는 거죠

사람은 원수 곧 마귀 때문에 죽습니다,
자기 죄악 때문에, 선악이지요,
어떤 철학자는 산소 때문에 살고 산소 때문에 죽는다 왜? 녹슬 듯이 노화가 되니까
그러니 철학자 에게서는 죄 라는 것이 없어요
오히려 철학자들은 종교는 자꾸 죄책감을 심어서 장사한다 라고 합니다.
그러는 자신들 또한 죄책감을 해체하면서 인기 스타가 된다 말이죠
선악을 넘어서는 자신은 못 넘어서는 겁니다.

(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의 소원이 주체인데 그 주인의 종인 주제에 어떻게 주인을 넘어서냐 말이죠
갇혔는데

(눅 18:3, 개역)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러니 자기자신을 자기의 원수로 보는 자는 없다 말이죠
그 원수를 갚아 달라고
기도

하나님께 기도 하는 자는 더더욱 없구요

원수는 타인이지
어떻게 자기자신임을 확신하면서
기도까지 하겠냐 말이죠

우상 문제 해결해 달라고
상한심령이 되는 자는

자기자신을 원수로 보는 자 밖에 없어요
그런 시선은 자기 자신 스스로가 가질수 없어요
율법에 의해 죽고 말씀에 의해 다시 살려주심을 당하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 밖에 없다 말이죠

그래서 동원이 되는 것이 불의한 재판관 이다는 겁니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호소 할 정도이면
자기자신의 죄악을 아는 자 밖에 없어요
그리고 외칩니다 고쳐 달라고

저 이런 하나님의 일
전체 숲은
주님은 시온산의 산당을 부수시는데
그리고 약속의 땅을 청결케 하시는데
누구의 손을 빌려서 합니까

성경 말씀은 개인이 없어요
개개인이 모인 공동체도 없어요
오로지 그리스도의 몸 곧 이스라엘 밖에 없어요
그래서 바벨론 왕을 통해서
청소를 하십니다.

아마 시드기야는 오히려 이 나라가 저 우상숭배자들로부터 더럽혀 짐을 당한다 라고
그래서 끝까지 맞서서 싸우겠노라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노라
끝까지 십자가에 같이 달려 죽겠노라 라고 나온다 말이죠

자 그렇게 되면
뭐를 모릅니까

원수 됨을 몰라요

그리고 원한도 몰라요

아마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이런 소리 하는 사람 없을 겁니다.

제발 원한을 품으세요 라고
원한을 품지 않으면
저기가 하나님의 원수임을 모르는 자입니다.
원한을 품는 자 만이
낙심하지 않고 기도를 해요

그러나 그 어떤 누구도 선악을 품고 있는 이상
자신을 불의한 재판관에게 까지 호소하면서
우상숭배자 에게 까지 호소하면서
원수 갚아 달라
원한을 풀어달라
그 원수 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라고 하는자 있겠냐 말이죠

오늘 본문을 보니 딱 불의한 재판관이 생각 나네요
마찬가지로 귀찮게 한다 라는 부분에서는

(눅 18:5, 새번역)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
(눅 18:5, 공동)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눅 18:5, 쉬운) 『이 과부가 나를 귀찮게 하니 그의 간청을 들어 주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눅 18:5, 킹흠정) 『이 과부가 나를 괴롭게 하므로 내가 그녀의 원수를 갚아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항상 와서 나를 지치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자꾸 누가 생각났는고 하니 모세가 애굽왕 바로를 귀찮게 하는 부분
내 백성 내 놔라 라는 부분이 생각나서
애굽왕 바로왕 또한 불의한 재판관이 아닌가 해서
자꾸 꼿혔었는데
이제서야 풀리네요
푸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하는 것이니까

결국 제가 그 동안 놓친 부분이 바로 선악이 유일한 인간의 죄이다 라는 의미를 자꾸 놓치다 보니
헷갈렸다 말이죠

고레스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선악에서는 개인

자아 로 출발 하는 해석을 한다 말이죠

그러니 과부 또한 나 자신과 접목 시키는 방식 아닙니까
한 개인으로 본다 말이죠

아닙니다

이스라엘 집단 그냥 집단이 아닌 언약의 집단
곧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의 몸들이다 말이죠

그러니 개인의 원수요
개인의 원한이 아니라
예수님의 원수요
예수님의 원한인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원수
그리스도의 몸의 원한

그런데 선악을 출발하게 되니까
하나님이 된 자기로부터 출발 하니
모든 상황이 정치적인 상황
곧 우상으로 밖에 안보이니까 선악으로 해석할 줄 아는 자기를 위한 해석으로 마침이 된다 말이죠 귀결 된다 말이죠

그러니 불의한 재판관
불의한 청지기
이 불의
이 부정함 때문에
선악을 아는 우리가 다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시드기야가 두 눈이 뽑히듯이 걸려넘어진다 말이죠
역시나 애굽을 의지해서
바벨론에 저항한다 말이죠

주님이 세운 종에게 말이죠

도리어 불의한 재판관 바벨론 왕이여
내 원수를 갚아주오
내 원한을 풀어주오
당신이 재판관 아니오
재판관 이름 값을 하오 라고 나와야 한다 말이죠

그래 뭔데?
니 원수 누군데
니 원한 뭔데

나의 원수는 우상을 자꾸 세우는 나 요 (애굽과 손 잡는 나 요)
나의 원한은 원통한 상한 심령은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다는 것이요

만약 애굽왕 바로왕에게 모세가 귀찮게 하는 모습은 이렇습니다.
나의 원수인 선악에서 벗어나도록 유월절 어린양 희생제사를 드리게 해 주오
나의 원한은 희생제물 되시는 주님을 보고도 상한심령이 되지 못하는 상황을 깨뜨려 주오

자 이렇게 되면 누가 걸려드는 겁니까?
미끼를 물어 버린 것이 되냐 말이죠
당사자 애굽왕 아니냐 말이죠

그러니 언약성취에는 반드시 마귀가 동원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애굽 왕을 통해서 주님은 영광 받으신다 라고 하셨으니까 말이죠

언약이란 기존의 힘으로 버티는 정치적인 상황 곧 선악에서
도리어 약자로써 희생당하는 어린아이(인자 – 누구 누구의 아들) 모습으로
이 현실 세게에 흡집을 내면서 홈 파기를 펼치시고 있다는 겁니다.

바로 바로왕이 무시했던 그 이름
여호와가 누구관데? 라고 무시한 그 이름을 펼치신다 말이죠

그러니 애굽왕과 애굽 군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
바로 언약의 진수(가장 핵심적인 본질)입니다.

(출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여기에 목이 곧은 백성은 이 우상숭배에서 무관할까요?
아니지요
그러니 광야에서 이 목이 곧은 백성의 목을 부러뜨리시는 낮추심이 펼쳐진다 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로 잡혀 가는 것이 언약 곧 창세 전에 기록된
전체 그림인데
인간은 부분 부분만 보기 때문에 전체 그림을 못 보기 때문에
자신에게 모욕적인 일들이 펼쳐지면 안된다 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문제를 선악으로 풀려고 하지

십자가의 피로 풀려고 하지 않아요
모르면 바벨론 왕 불의한 재판관에게 맡기면 된다 말이죠
그 일을 하라고 재판관 세웠듯이
바벨론 왕에게 우상 파괴 시켜 달라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교회 장로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대부분 아닙니다
그저 교회 정치나 하는 자들이다 말이죠
그런 자들에게 교회 운영이나 맡기고
대장 시켜 주면 좋아라 하고 칼을 마음껏 휘두른다 말이죠
지 마음 대로 하게 냅뚜고
목사는 제발 교회 신경 쓰지 말고
교회 신경 쓰라는 놈은 이미 세웠잖아요
그러니 제발 말씀만 신경 쓰라 말이죠
즉 죽으라 말입니다.
안 죽고 삐죽 삐죽 살아 있으니
쓸데 없는 교회나 신경을 쓰더라 말이죠

남 한테 맡길려고 하니까 불안해 미치거든요
혹시나 잘못된 교회가 될까봐
이미 잘못된 교회인데 뭘 새삼 스럽게 더 나빠질려고 ㅋㅋㅋ

이미 하늘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졌다 말이죠
그러니 땅에는 그림자로써 엉터리 교회만을 나타낼 수밖에 없는
죄인의 모습일 수 밖에 없다 말이죠

아냐 내 교회는 반드시 바른 교회 만들 거야 라고 하니까
시드기야처럼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으니까
괜히 바벨론에게 달려들다가
두 눈 뽑히고
자기 보는 앞에서 자식이 죽임 당하는 꼴을 보게 된다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해서라도 징계가 있다는 것은
이미 예수님 께서 다윗의 노선으로 오시기 때문에
심판이 있지

이런 심판 조차도 없는 개같은 이방인 왕들은
이미 주님께서 내버려 두신 사생아 이다 말이죠

그러니 개인 개개인으로써 볼게 아니라
언약이 어떻게 이스라엘 곧 그리스도의 몸을 다루시는가
그리스도의 머리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통해서

주변 나라의 활동 하나 하나가
심지어 이스라엘에게 닥쳐지는 이 상황 하나 하나가
모두다 주님의 십자가의 피 언약과 연관 되어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 이 피 용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창조하심에 있어서
반드시 우상문제 죄문제 곧 선악문제는
반드시 한 세트로써 구성이 되어 나타나기에
주여 저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상한심령의 자리에서
죄인의 자리에서
원수의 자리에서
이 구원자
구원의 빛을 보게 하시는 겁니다.

정작 18살에 딱 3개월 10일 곧 100일만에 왕 자리에서 포로로 잡혀감 여호야긴(여고냐)는
저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되돌아 온다 말이죠

이 여고냐가 바로 연한 가지 이다 말이죠

불의한 재판관 비유에서 주인공이 재판관 입니까 과부 입니까?
과부 이다 말이죠 제목만 저래요
마찬가지 독수리 비유에서 주인공이 누굽니까? 독수리 느부갓네살 왕 입니까
18살 이면 얼라 취급 받는다 말이죠 여전히 20살이 안되었으니까
포로 잡혀간 여고냐 입니까?

자 그럼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과부가 주인공이 되겠지요
사실은 과부의 기도 가 주인공이고
더 정확하게 말해서
기도 곧 기능이 주인공이고 그 주인공의 증상물이 과부
곧 여고냐 곧 이스라엘 이다 말이죠

그러니 기도 라는 상한심령인 이 언약은 이 묵시는
역사를 철거하는데 있어서
역사가 철거 당해서 인간은 죽는게 아니라
역사를 철거 하시는 이 희생제물 되시는 상한심령 되시는 예수님의 눈물을 안 쳐다봐서 죽는거다 말이죠

그러니 어머니 말 마따나
죄를 지어 보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용서를 쳐다보게 되지
죄 안 지으면 쳐다보겠냐 말이죠

아프니까 의사를 찾지
안 아프면 의사를 안 쳐다본다 말이죠

어떻게 해서든 이스라엘 만큼은 왜? 존재가 아닌 기능이니까
이 언약의 약속을 퍼붓는 매를 대시는 사랑을 펼치신다 말이죠

기도 곧 성령의 놀라운 탄식은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시는 이 주님의 긍휼이 덮쳐져서 나타나기에

18세 여고냐는 백합목의 끝 가지 연한가지로써
누구 누구의 아들로써
잡혀 가서 보호를 받고

반대로 어른이다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는 자는 곧 시드기야처럼 말이죠
자기 잘난 맛에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듯이
인자를 구하지 않는
희생제물 덕분임을 모르는
그래서 은혜를 버리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이스라엘 멸망 조차도 은혜인데)
우상과 손 잡는 선악을 추구하는 이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왜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이미 언약 곧 십자가의 피 용서가 다루고 있는 이스라엘이기에
이 땅에서의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선악 선악이라는 판단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실상인 이스라엘의 의미를
주님 쪽에서 새롭게 하시고자
새신부로써 말이죠

베드로는 이런 신부 됨은 꿈에도 몰랐죠
비로소 닫힌 상황에서 벗어나 외부에서 주어지는
슬픔 대신 희락
재 대신 화관
근김 대신 찬송의 옷을 입히시고자
희생물의 가죽옷으로 오셨음을
그거 입혀 주실려고
마귀에게 잡혀 오라고
베드로는 이 사랑에 의해서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이미 다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의 피 언약을
베드로에게 퍼 붓고 계십니다.

이런 이유로 지금 에스겔에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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