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 모압 족속 심판 (겔 25, 8-11)

암몬 족속 심판 (겔 25, 1- 7)
에스겔 2019 2020. 10. 25. 09:30
19-68 암몬 족속 심판 (겔 25, 1- 7)

(에스겔 25: 8-11, 구약성경 1189 쪽, 찬송가 202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 )

8,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모압과 세일이 이르기를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일반이라 하도다』
9, 『그러므로 내가 모압의 한편 곧 그 나라 변경에 있는 영화로운 성읍들 벧여시못과 바알므온과 기랴다임을 열고』
10, 『암몬 족속 일반으로 동방 사람에게 붙여 기업을 삼게 할 것이라 암몬 족속으로 다시는 이방 가운데서 기억되지 아니하게 하려니와』
11, 『내가 모압에 벌을 내리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25:8, 현대어) 『[모압 족속에 대하여] 나 여호와가 말한다. 모압 족속은 에돔 족속과 한편이 되어 이렇게 비웃고 조롱하였다. `유다 백성이라고 해도 다른 이방 족속들보다 더 잘된 것도 없구나!'』
(겔 25:9, 현대어) 『그러므로 내가 모압의 모든 산 위에 견고하게 세워진 도성들을 원수의 손에 넘겨 주어 허물어 버리겠다. 온 나라가 자랑하던 벧여시못과 바알므온과 기랴다임 같은 도읍들을 모조리 허물어 버리겠다.』
(겔 25:10, 현대어) 『내가 암몬 족속의 땅을 동쪽 사막의 원주민들에게 넘겨 주듯이 모압 족속의 영토도 그들에게 넘겨 주어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서 암몬 백성을 지워 없앨 것이다.』
(겔 25:11, 현대어) 『내가 이렇게 모압 백성을 심판하면 그제서야 네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아니 남의 나라 멸망하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인줄 네가 알리라 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왜 자꾸 이 말씀을 반복 하시는 것일까요?

지난 주 암몬의 멸망에서도 그랬듯이
모압도 그러합니다.

심지어 이 전의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그랬다 말이죠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것일까요? 개콘의 불편의 진실 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그 유행어도 그렇구요

도대체 왜 이러는 걸 까요?

납득이 된다면 그거 가짜 하나님이다 라고 했습니다.
아니 그러면 납득, 이해, 이성적, 논리적, 합리적,
이 기준은 도대체 뭡니까
인간이 내세우는 납득과 이해 또는 이성과 논리, 합리성 조차도
사실은 그때 그때 분위기에 따라 다르다 말이죠

누구 말 마따나 ‘그 날의 분위기’
결국 자신의 신체성이 날짜 곧 시간과 공간 곧 장소에 따라 다 달라지는 판국인데
그래서 인간은 다수성으로 객관화 시키는 겁니다.
다수가 인정하는 것으로 기준을 삼는다 말이죠
이것이 법이 되는 거죠
누가 누가 더 선악적으로 하나님과 같은가?
그날의 신체 중에 누가 더 하나님과 가까운
아니 모든 인간을 줄로 세워서 더 나은 인간인가 그 신체성으로 법을 구성하거든요

객관성도 사실은 없죠
주관 주관이 모여서 객관적이다 라고 치자 

바로 이 [그렇다 치자] 라는 것이 민주주의 이거든요

민주주의란 그저 상대적으로 나온 것 뿐입니다
진리가 아닌데 미친 듯이 이 민주주의에 목숨 거는 멍청한 자들이 있어요
그 대표적인 자가 바로 가룟유다 아닙니까
즉 모든 유대인의 대표성이다 말이죠
마찬가지로 유대인은 모든 민족의 대표성이거든요

그러니 민주주의야 말로 이런 사기가 또 없다 말이죠
바로 독재에 반대해서 나온 것이니까 말이죠

독재 곧 왕 제도인 거죠

민주주의 처음 출현한 그 때 이전의 만약 1000년 전에는 왜 나오지 않냐 말이죠
머리가 나빠서?
아닙니다 분명히 그런 사상은 다 나왔다 말이죠
그럼 왜 먹혀들지 않았던 것일까요?

네 바로 그겁니다
편했다 라는 겁니다.

왕제도가 편하지 않고 불편했다면 벌써 갈아 엎어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라는 거죠

자 이렇게 우상이란 편하기 짝이 없어요
불편해지면 편한 쪽으로 인간은 제도를 바꾸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 당시 천재들이 없었겠냐 말이죠
무식하지 않아요 너무 너무 똑똑해요
왜 그런데 그들이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을까요?
편하거든요

다수가 말이죠
그 당시 다수는 귀족이나 계급이 높은 자들이니 사실은 소수죠

정작 다수는 노예 아닙니까
엄청난 수 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들을 다 교육시켜 보세요
기존의 왕 체제를 유지하는 비용
국가 운용에 쓰이는 비용으로는 택도 없어요
자원은 엄청나게 소비 될 것이고 말이죠

학교 개념도 근대의 나폴레옹 때부터 초등학교 오늘날의 초등학교가 운영이 국가적으로 의무화 된 것이지
마을 집단의 교육은 마치 농사 교육 수준 밖에 안되는
기본적인 인간의 도리를 가르치는 수준 밖에 안된다 말이죠
그것으로도 충분했으니
전혀 불편하지 않았거든요

국가로 들어가야만 국가로부터 배우는 전문 학문을 하게 되는
모든 것이 국가 중심이지
개인적인 학문은 할 수가 없는거다 말이죠
국가 차원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왕 제도 중심인 거죠

이것 또한 얼마 되지도 않아 끝난거다 말이죠
한 2-300년전 밖에 안되요근대의 시작을 18,9 세기로 보니까
지금 21세기
동양은 20세기에 와야 겨우 시작이였고
아직도 반 정도 쯤은 여전히 왕 제도 이지요
최근에 태국에서 왕 물러가라 라고 나올 정도이니
그 동안 뭐 했을까?
불편하지 않았다 라는 겁니다.
편했다
그런데 이제는 불편해졌다
불편하면 인간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말이죠

오늘 본문과 도대체 무슨 연관성이 있어서 민주주의를 언급하느냐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실은 불편함과 편안함을 두고 말하는데 있어서
가장 예를 들기 쉬운 것이 민주주의라서 그렇습니다.

자 그럼 초창기 민주주의는 그랬고
또 상대적으로 민주주의가 불편함에 맞서서 
상대적인 편안함으로 자리 잡은 것이 바로
공산주의와 대조를 이루는 데 있어서 다수성이 된 겁니다.

항상 상대적이다 말이죠

자 그럼 지금 현대 21세기 
코로나로 세상의 체제가 바뀐다고 하는 자들과
아직 멀었다 라고 하는 자들의 이 변곡점인지 아닌지 하여튼
바로 최근의 이전 까지는
이 민주주의가 무엇과 상대적인 불편함에 편한함으로 합리화 되었는가

물론 공산주의와 상대를 이룰 때 공산주의는 인민민주주의라고 해버리니까
민주주의는 자유 민주주의 라고 자유를 또 강조했다 말이죠
공산주의는 이 자유
개인의 자유를 허용할 수가 없으니 못 쓰게 되어버렸고 말이죠

그랬던 공산주의로 이제는 해체가 다 되었다 말이죠
북한이야 뭐 사이비 종교 체제이니까 제외하고서
중국 또한 공산주의도 아닌거죠

네 자본주의입니다.
이슬람 국가요?
대중에게는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해 놓고서는
지도층들은 철저한 너무 너무 철저한 자본주의입니다.

일당백 강박씨 였던가요? 
(강박이 외자 이름인줄 알았는데 강 박사라고 줄여서 했더군요
본명은 검색하면 나옵니다)
아니면 지구본 연구소의 어떤 학자였던가?

과거에 민족을 구분하는 그 기준이 뭔가?
대부분 혈통성 이라고 했는데?
가만히 보니  

종교 곧 신앙 곧 믿음으로 민족을 구분했다 라는 겁니다.

언어도 아니요
국가 뭐 민족이나 같다고 봤으니까
족보 도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라는 신앙으로 민족을 구분했다는 겁니다.

산업혁명 이전에
르네상스 이전까지만 해도
신의 전쟁의 대리자가 인간이였으니까 말이죠

지금도 거의 비슷합니다.
곧 신앙이란 불편하면 떠나도록 되어 있거든요

자 여기서 오늘 본문에 들어갑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 이라는 민족은
주변 나라의 눈에 가시 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것들을 뽑아버릴까?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서 쫓겨난 이방민족 가나안 족속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과도 상관이 없는 이방나라도 마찬가지 이더라 말이죠

왜 이렇게 이스라엘은 아름다운 그림에 하나의 검은 얼룩처럼
마치 이빨에 낑긴 새빨간 덩어리진 꼬추가루 덩어리처럼
눈에 응시가 되어서
모든 시선을 빨아들이는
얼룩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너무 너무 불편하거든요

모든 민족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된
이 우상을 누리기 바쁜데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이 저 안 보이는 곳 다른데 가서
지들끼리 나라 세우고 지들끼리 예배 드리면서
자기들 편한대로 종교를 세워
하나님을 믿고 살면 끝 아니냐 말이죠

왜 가나안 땅 이라는 마귀 나라 한 복판에
지옥 한 복판 중앙에
이방나라 족속
우상 숭배자들 그 한 복판에
약속의 나라를 세워야 하느냐 라는 겁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약속의 땅으로써 말이죠

애굽을 멸망시켜서 출애굽해서
그들 말 마따나
예배 드리면 될꺼 아니냐 말이죠
저 우상숭배를 하는 민족이 없는 땅
쌔고 쌧을꺼 아니겠냐 말이죠

오히려 정반대로 거인족속이 있는
네피림 거인족의 후예인 아낙자손의 땅
그 가나안 땅에 왜 들어가냐 말이죠 왜??????

(민 13:33, 개역)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왜 교회를 음부의 권세 한 복판에 왜 세우냐 말이죠 왜 왜 왜 ??????

(민 14:9, 개역)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자 열명의 정탐꾼이 거짓말 한 겁니까?
아니잖아요

본 그대로 꾸밈 없이 이야기 합니다

그들과 우리의 키 차이를 말이죠 메뚜기 라는 키와 거인의 키 크기를 말이죠
거짓말 아니잖아요

빨리 나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편하다 말이죠
즉 이 말은 가나안 땅 정복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니
긁어 부스럼 만드는 더 더 더 불편한 일이 계속해서 생기게 되니
첫단추부터 사실 그대로 인정하자 라는 겁니다.
이것이 편하고
이것이 민주주의 다수 열명의 가나안 정탐 보고서를 제출한 거다 말이죠

듣도 보도 못한 땅
그저 맹목적으로
그런 땅이다 라는 말만 듣고 왔으니까 말이죠
그 땅에 대해서 미리 아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으니
그 땅에 대한 자세한 내용들을 보고서로 제출 한 겁니다.

문제는 항상 배신자가 있다는 거죠

배신자

참선지자는 그야 말로 배신자 이다는 겁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로써 대중의 다수성을 깨뜨립니다.
편안함을 깨요 깨

분위기 쏴 하게
얼음처럼 냉소적을 삐딱하게 나와요

거짓선지자는 저 10명의 정탐꾼이라고 볼 수 있고
참선지자는 딸랑 한 명의 그것도 배신자 그것도 삐딱한 불편한 진실을 외치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라고 나와요

도대체 왜 이러는 것입니까?

그야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버렸으니
다른 소리를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바로 동행입니다

(민 14:9, 개역)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 땅에 대해서 미리 이야기 하면 미리 알고 있으면 그거 동행 아닙니다
한 몸 아닙니다.
또 따로 내가 내 스스로 아내가 되겠다 라고 나서서
남편을 여자가 선택할려고 하게 됩니다.

남편이 여자를 아내로 만드니까
즉 한 몸이 되니까
즉 동행 하니까

졸지에 다들 불편하지 않는 편안한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저 열명의 다수주의의 민주주의에
졸지에 불편하기 짝이 없는 반대의 불편한 진실을 외치는 배신자가 되고
얼룩이 되는 겁니다.

아니 이방나라가 저 이스라엘 얼룩을 뽑아버리고 싶어서 환장 했는데
정작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 얼룩 제거에 나서고픈
이스라엘 스스로가 자신의 기능인
이스라엘 특이성 곧 동행을 거부하는 식으로

이 딸랑 한 명 갈렙의 증거를
이 딸한 한 명 에게 보내심을 받는 참선지자를
베신자로 제거할려고 하는 겁니다.
불편하거든요

민주주의가 아니거든요

지금 현재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민주주의는 공동체 운동이라는 표현으로 활동 합니다.
결국 독재는 빨리 망하지만
민주주의는 안 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멸망을 자꾸 보류시킨다는 겁니다.
어차피 둘 다 망하는 것 이지만
민주주의는 지연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어서 빨리 망하느냐 아니면 조금이라도 멸망을 지연, 보류, 연착 시키느냐 
그 차이일 뿐 이라는 겁니다.

이 둘 다 우상적인 국가의 속성인 거죠
이런 사고방식에서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해석불가 이며 눈에 까시인 얼룩이다는 겁니다.

그런 와중에 망했으니
그것도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 신으로부터 망하는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멸망시키는 하나님을

이 둘의 관계를 보고
아이고 꼬시다 라고 안나오고는 못 배기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래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마 나 여호와 임을 암몬 이제 모압에 까지 알려주시겠다 라는 겁니다.

우상과의 차이로써
이스라엘과의 차이로써

이스라엘 조차도 몰랐던 이스라엘의 기능으로써 말이죠

지금 이스라엘이 마치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깔려 죽는 입장에서
그것을 비웃고 하나님 한테 저주 받아서 망하는거 맞지요
저는 저주 안받았지요? 라고 나오는 판국에

그 다음 니 차례이다 라고 지난주 암몬 그리고 오늘 모압 그리고 다음주 에돔, 두로, 애굽,
이방 전체로 확대 된다 말이죠

이런 이방의 멸망을 보고 이스라엘 또한 아이고 꼬시다 라고 할 입장이 못되도록
이미 벌써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부터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먼저 시작이 되었으니까 말이죠

그럼 왜 이런 심판을 퍼붓느냐 라는 겁니다.

내가 여호와 인줄 알리라
너 이스라엘 너 내가 여호와 인줄 몰랐지
어무이 말마따나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모를 턱이 있나
창조주를 모를턱이 있나

몰라서 지금 심판 당했다 말이죠

어라 그러니까 이방나라가 아이고 꼬시다 라고 나오니까
그래 너도 암몬 너도 내가 여호와인줄 알려주마
어 그래 너도 너 모압 너도 이스라엘 망하는 거 보고 꼬시다 라고 했으니
내가 누구인줄 알려주마

그런 입장에서 이 심판의 기준이 뭔가 라는 것이
이스라엘도 이방인도 알아야 할 판국입니다
모르면 매를 더 버는 거죠 뭐

(겔 25:8, 개역)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모압과 세일이 이르기를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일반이라 하도다』

모압이 유다 족속이 이방과 다를줄 알았는데 일반이네
특별함이 없네 뭐

일반이네 라고

일반과 특별함이 차이가 없다 라고
일반이
모압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평가를 합니다

여호와를 믿는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뭐 대단한 줄 알았는데
이방신을 믿는 이방나라와 뭐와 다르냐 라는 거죠

그들의 기대치는 결국 우상이라는 선악적인 사고에 의한 기준이다는 거죠

바로 이런 기준에 대한 주님의 심판이 바로 이스라엘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들은 잘못 보고 있는 거죠
잘못 보고 있으니까 너도 심판받아라 라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조차도 특별함이고
그 특별함을 못 보는 이방인에 대한 심판도 특별함 이다는 거죠

그럼 이 특별함이 뭡니까
바로 하나님의 거룩입니다 의입니다

또 제가 걱정 되는 것이
아 거룩 이라고 다들 무릅을 치면서
아하 그럼 그렇지 라고 [나도 그 거룩 안다] 라고 나올까봐 걱정인데

모릅니다
아니 알면은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모를턱이 없잖아요
너 내이름 모르지
아는데요 여호와
거봐 모르잖아
내가 내 이름 알려주마 라고 심판 하신다 말이죠

너 하나님의 의 곧 거룩 모르지
아는데요 
거봐 모르잖아요
내가 내 거룩을 알려주마 라고 나오시는 겁니다

그럼 그 거룩이 뭔가?
하나님의 의

바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입니다
그러니 잃어버림 때문에 심판 하시고
다시 그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도통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믿음이래요 글쎄

오죽 하면 어떤 유명한 목사가 이것을 따라할까봐 미리 걱정을 해요
얼마나 거룩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부조리 불의하면 그럴까요?
불의란 결국 인간 속의 기준을 건드리는 것이거든요

네 맞아요 선악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같이 된 그 하나님을 건드려요
법을 건드려요
우상을 건드려요 글쎄

이것이 여호와 이다는 겁니다
그 여호와 몰랐지? 내가 알려주마 라고
사랑은 곧 하나님의 의는 바로 이 선악을 건드리겠다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을 건드리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심판 하시는 겁니다

다들 모르죠 당연히
왜 그러는지
해석 자체가 안되는 식으로
비밀
비유로 말이죠

마치 사랑하는 자식을 버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출하시는 겁니다
이 특별함 때문에 다들 심판 속에 놓여지는 겁니다

이삭을 버리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신났겠냐 말이죠

알뜰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두 조각 그림 곧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고자 칼을 쥐는 장면을 조각한 
두 사람의 조각 작품을 이야기 한 내용을 본 적이 있는데(이 두 조각가는 서로가 시기와 질투가 장난이 아니였다고 하죠)

blog.naver.com/hasselwisch/221424427370

아무런 감정의 요동 없이 이삭을 바치는 조각품 [기베르티]의 [이삭의 희생] 작품과 

[브루넬레스키]의 동명 작품 [이삭의 희생] 작품 
곧 떨림과 두려움으로 구원을 이루는, 이삭을 바치는, 이삭을 버리심으로써 특별함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바로 그런 조각의 내용이 오히려 더 특별하게 보인다 김영하 작가가 말하더라 말이죠
(저 블로그의 사진은 좀 흐릿해서 좀 더 선명한 사진을 찾았는데
기베르티 와의 차이는 천사가 아브라함 손목을 잡았고 이삭의 목이 뒤로 젖혀진 꺽여진 상태라는 것)

t1.daumcdn.net/cfile/blog/27437D36567553572B

네 맞아요 이것도 그림자입니다

실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버리시는 십자가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의요
이름이요
특별함입니다

인간이 부르짖는 하나님은 특별함이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겠다 라는 일반성이 담겨져 있거든요
우상입니다.

여호와 이름은 인간이 부르는 이름이 아닙니다
부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르짖음바 된 이름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다 라는 것만 남기고 모조리 부수시는 질투의 사랑을 담은 이름입니다
이 이름을 담은 박스가 바로 인자 라는 박스입니다
에스겔은 인자로써 이 질투의 사랑을 펼치는 여호와의 이름을 우리에게 증거합니다
빨리 항복하라 라고
니 이름을 유일하게 삭제 시키는 이름이라꼬

다른 신들은 인간의 이름을 오히려 높여주고 사수해 주고 이런 신인데
알짤 없어요 이스라엘 조차도 이름 삭제 시키는 이름이다는 겁니다.
모든 이름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름 이다는 겁니다.
거봐 예수님 죽였지 너 생명책에 기록될 자격 있어 없어 
없습니다 삭제 되어도 마땅합니다
라고 나와야 할 판국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누구도 흉내 조차도 못 냅니다
인간이 따라 할까봐 걱정하는 목사는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겁니다
언 놈이 십자가를 따라 하냐 말이죠

17년 선고 받은 이명땡 정부때 였나? 아 노무땡 정부때 였군요
사학 비리로 인한 사학법개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목사들이 펼쳤는데 
어떤 목사가 십자가를 지면서 
삼보일배 하는 놈들처럼 따라 하던데
십자가에 발통이 달렸더군요
우와 그 유명한 교회의 목사가 완전히 맛이 간 놈이구나 라고 했죠

장난을 해요 장난을 (그들은 돈이 줄어들 판국이니 심각하죠)

양탈무리 사모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라고
뻘건 글씨를 점점점 크게 적는 
여고괴담의 점 점 점 도 아니고 말이죠
아무튼 그 이후에 맛이 가서 미친 듯이 설쳐대는 것을 봤는데

종교 게임에 빠지니까 이기지 못하면 막 희숙대리를 부려요 막 부려요 막

바로 이것을 깨뜨리고자 오는 것이 바로 여호와 이름
곧 하나님의 의, 거룩인 십자가 이다는 겁니다.

독감백신 포비아(공포증), 코로나 포비아(공포증)은
공포 축에도 못 듭니다
북한의 핵미사일도 공포 축에도 끼이지 못합니다

진짜 두려움과 떨림은 바로 이 십자가입니다.
질투의 사랑이거든요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가루로 만든다 라고 얼마전 마태복음에서 언급했잖아요

진짜 두려운 것은 바로 죽음 보다 강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죽음 보다 강하기에
죽음에 대해서 시기와 질투를 퍼붓는다 라고 했습니다

특별함이란 바로 이 사랑입니다
이 거룩을 이 사랑을 보여주고자

주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아끼지 않고 내어주심이다는 겁니다

너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즉 인간 쪽은 모조리 다 우상이다는 겁니다
그거 깨뜨리면서 다가오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화목제물을 준비했다 라고

이 특별함이 바로 여호와 라는 이름에 담겨 있다는 겁니다

즉 우리 인간의 이름을 다 갈아버리겠다 라는 겁니다.

이 사랑이 아니면
아무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했잖아요
즉 상대적인 부르는 자인 내 이름은 삭제 당한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삭제된 이전의 이름과 차이나게
새 이름으로 갈아서 즉 여호와 이름만이 그렇게 하시거든요
죽였다가 다시 살려서
이 여호와의 이름을 담은 그릇이 바로 이스라엘이요
특별함이다는 겁니다.

그저 이방나라 모압은 특별함을 자기들 기준

그저 일반의 기준은 잘 먹고 잘 살고 복 받은 그런 껍데기만 기준으로 특별함에 못 미친다고 봤지

여호와의 이름을 담은
여호와의 의를 담은 그릇으로써 이스라엘이 지금 심판받는 모습을
전혀

그게 무슨 사랑이냐

그게 무슨 특별함이고 라고 보고 있다는 자체가

그 기준이 여전히 선악이다 우상이다 라는 차원에서
그 다음 모압 너도 벌 받아라 라고 나오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특별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이 의를 못 보는 자는

망해도 싼 겁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못 보는 자는 망해도 싸다 말이죠
껍데기 이스라엘 이니 말이죠

이것을 1년 좀 못 되었네요
올해 1월 26일에 형님네 가족과 함께 예배 도중에 이런 내용을 말했거든요
새해 저주 많이 받으세요

이게 바로 샬롬 이라는 뜻이거든요
즉 동행이다 말이죠
여호와의 이름을 담은 그릇은 이스라엘로써 샬롬이다 말이죠

어무이를 괴롭히는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라고 말이죠
이스라엘의 특이성을 며느리 룻이 봤다 말이죠
이게 무슨 어버이날의 효도 설교냐 말이죠
오히려 정반대죠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니까 섬기는 우상인거죠

어떻게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를 버리냐 말이죠

어떻게 솔로몬재판에서 진짜 엄마가 어떻게 차라리 나누지 말고 너 가져라 라고 하냐 말이죠

(왕상 3:26, 개역) 『그 산 아들의 어미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진짜 엄마 맞냐 말이죠
어떻게 남에게 주냐 말이죠
왜 버리냐 말이죠

왜 독생자 예수를 원수에게 넘겨주냐 말이죠

이게 무슨 사랑이냐
이게 무슨 하나님이고
이게 무슨 여호와냐 말이죠

네 맞아요
이해 되는 하나님은 나를 투사시킨 겁니다 반사 투영
그러니까 가짜입니다.

나를 버리시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
어무이를 괴롭히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 이요 내 하나님이다 라고
며느리 룻에게 제대로 전도 했다 말이죠

동행을 그렇게 본 겁니다.
이게 무슨 동행이냐 말이죠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동행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 께서 우리를 사랑해서
하나님 쪽에서 동행하시겠다 라고 다가오는 방식이 바로

버림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 이라는 거룩
곧 간극

공백 만들기
바로 십자가라는 삼일의 간극이다 말이죠

이 원래 창조의 원리가 아니면
우리는 우상이 깨어지지 않는 겁니다.

내가 깨어지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기존의 이름을 이끌고 갈려고 할 것이다 말이죠
그 이름
이전 것으로 
지나간 것으로 삭제 시키고

새 이름으로
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졌으니까

곧 임마누엘
이 주의 이름인 예수의 이름으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새 이름 곧 새 신부
곧 이름을 새로 갈아버린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는

바로 이 주의 이름의 특이성읊 담는
특별함을 담은 그릇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특별함에 모압이 괜히 걸려들어야만 하는 거죠

누구였죠
이스라엘을 저주했던 이방선지자 발람 이였군요

(민 23:11, 개역)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온전히 축복하였도다』

분명 저주 했다 말이죠
그런데 축복이 나갔다 말이죠

왜죠?

이스라엘이 뭐 그리 대단하길래 저주가 먹혀들지 않는 겁니까?

바로 동행입니다

이스라엘 자체에서는 없어요
특이함이 없는 것 맞아요
없어야 합니다

모압이 일반으로 봐야 하는 것 맞아요
그렇게 일반으로 봐야
특이함이 없음으로 봐야지만
걸려듭니다

내 이름 오냐 알려주마
내 이름을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알려주는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이름이다 라고 말이죠

누구든지 저주 할 수밖에 없도록 이스라엘을 드십니다
이스라엘 조차도 그 저주가 싫어서
그 심판이 싫어서
그 버리심이 싫어서

하나님이 왕이시다 라는 아비멜렉이
약속의 땅 베들레헴을 떠났다 말이죠
다 죽고 나오미만 남았어요 두 며느리에게 너거들 땅으로 가라

하나는 갔고
하나는 남아요

왜 안가냐 말이죠

어머니와 동행하는 하나님을 봤거든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닌
산 자의 하나님을 봤다 말이죠

지난 주 녹음내용을 듣고 놀랬던 것이 바로

아 그래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씀이 바로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 이라는 뜻이구나

나는 죽고 주님이 살아야 한다 라고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라고 했던

이 공백 이 간극만들기가 바로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의 였구나 라고 말이죠

이 십자가만이 곧 하나님의 저주 만이
인간의 거룩이 얼마나 사랑이 없는
껍데기 법 법 법으로 자신을 도배한
바로 우상이였다 라는 것을

주의 이름을 바로 이 우상을 깨뜨리면서
나의 이름을 깨드리면서

모압까지 심판 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신다 라는 것을

이 이름의 특이성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로써
영원히 이 특이한 이름을 부를수 없도록 만드신다는 사실에
교육재료로써 실제로 모압이 멸망당하고
심지어 이스라엘 조차도 심판 당하게 하시면서

정작 누가 심판 받느냐

바로 하나님 자신이 심판 주이시고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심판 당해 죽는

이 십자가의 비밀을 알려주시고자 이렇게 주변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이름을 어떤 기능을 나타내시느냐에 동원이 되는 겁니다.

지난 주 암몬이나 모압 또한
가룟유다처럼

시드기야처럼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내 구원은 내가 지킨다

내 이름은 내가 이름 값 한다

이런 사고방식인 선악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은혜는 저런 사망이 왕노릇하는 세계 한 복판에서
은혜가 왕노릇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죽이시고 버리시면서 까지
동행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이게 무슨 특별함이냐
이게 무슨 사랑이냐?
사랑한다메?
나사로 사랑한다 해 놓고서
죽은 뒤에 오냐

이게 무슨 동행이냐 버리고 심판하고 저주하는 것이
이게 무슨 동행이냐 라고 할때에

선악의 법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이 여호와의 이름이
바로 그런 선악을 깨뜨리시고자
인간의 이름을 지워버리시고자 왔다 라는 사실에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저는 망해도
버림 받아도 싼 인간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그 심판은 내가 마땅히 당해야 할 심판이지 않습니까
왜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이 당해야만 하십니까

비로소 상한 심령
비로소 인애와 자비를 구하는
성령을 받은 자가 되는 겁니다.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외부에서 말이죠

이 기이한 십자가의 비밀을 주님은 듣든지 안듣든지 그냥 밀어붙이시는 겁니다
그 버림 속에서의 구원을 말이죠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는 특별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짖도록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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