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 에돔 족속과 블레셋 족속 심판 (겔 25,12-17)

모압 족속 심판 (겔 25, 8-11)
에스겔 2019 2020. 11. 1. 08:36
19-69 모압 족속 심판 (겔 25, 8-11)

(에스겔 25:12-17, 구약성경 1190 쪽, 찬송가 383장 환란과 핍박중에도 )

1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돔이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았고 원수를 갚음으로 심히 범죄하였도다』

13,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손을 에돔 위에 펴서 사람과 짐승을 그 가운데서 끊어 데만에서부터 황무하게 하리니 드단까지 칼에 엎드러지리라』


1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손을 빙자하여 내 원수를 에돔에게 갚으리니 그들이 내 노와 분을 따라 에돔에 행한즉 내가 원수를 갚음인 줄을 에돔이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15,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블레셋 사람이 옛날부터 미워하여 멸시하는 마음으로 원수를 갚아 진멸코자 하였도다』


16,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블레셋 사람 위에 손을 펴서 그렛 사람을 끊으며 해변에 남은 자를 진멸하되』


17, 『분노의 책벌로 내 원수를 그들에게 크게 갚으리라 내가 그들에게 원수를 갚은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니라』


(겔 25:12, 현대어) 『[에돔 족속에 대하여] 나 여호와가 말한다. 에돔 족속은 유다 백성들에게 더할 수 없이 처참한 보복을 하여 제 스스로 무거운 죄를 쌓았다.』
(겔 25:13, 현대어)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들을 치러 가겠다. 내가 에돔 땅에서 사람이나 짐승이나 닥치는 대로 죽여 그 땅을 폐허로 만들어 버리겠다. 그러면 데만에서 드단에 이르기까지, 북쪽 끝에서 남쪽 끝에 이르기까지 에돔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칼에 찔려 죽고 남쪽의 국경선을 넘어 멀리 드단의 사막으로 도망 간 자들까지도 칼에 찔려 죽을 것이다.』
(겔 25:14, 현대어) 『내가 에돔에게 내리는 이 형벌의 심판을 내 백성 이스라엘을 시켜서 집행하겠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붙잡혀 칼에 맞아 죽을 때에 나의 분노를 사서 보복을 당한 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겔 25:15, 현대어) 『[블레셋 족속에 대하여] 나 여호와가 말한다. 블레셋 족속은 옛날부터 적개심을 품고 이스라엘을 미워해 왔기 때문에 원수를 갚아 유다 백성을 다 없애 버리려고 하였다.』
(겔 25:16, 현대어)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들을 치러 가겠다. 블레셋 백성을 멸망시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여 버리겠다.』
(겔 25:17, 현대어) 『내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있는 대로 퍼부어 철저하게 원수를 갚아주겠다. 그러면 그제서야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도 깨닫게 될 것이다'』


먼저 첫 번째로 볼 내용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
이방나라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의 뜻이 나타나는 계기가 됩니다

즉 드디어 이방나라 자신들에게 이스라엘을 복수 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으로 보더라 말이죠

(요 1:9, 개역)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0, 개역)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1, 개역)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12, 개역)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개역)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 1:14, 개역)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은 오로지 이스라엘 곧 [하나님께로 난 자들]에게만 펼쳐집니다
이것의 증거, 증상으로 [사람의 뜻으로 난 자들]과의 충돌을 벌리시는 겁니다
곧 육체 혈통 이겠지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라는 것이 신약에서 실체로 나타났다면
구약에서는 어떻게 그림자로 나타났을까요

지금 이스라엘이 심판을 당하니까 옳타구나 라고 이방나라가 다 달려듭니다
특별히 오늘 에돔은 곧 에서의 후손들이지요 동생 야곱의 형 [에서] 말입니다

두 사람은 원수지간이지만 쌍둥이 형제입니다
즉 이 두 나라의 뿌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에 뿌리는 두고 있습니다

(창 25:21, 개역)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창 25:22, 개역)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창 25:23, 개역)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창 25:24, 개역)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
(창 25:25, 개역)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창 25:26, 개역)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

왜 이 두 나라의 출발을 형제지간으로 그것도 쌍둥이로 태어나게 하셨을까요?
결과적으로는 원수지간인데 말이죠

(마 10:36, 현대어) 『ㄱ) 사람의 원수는 바로 그 집안 식구이다 (ㄱ. 미7:6)』
(미 7:6, 한글킹) 『이는 아들이 아버지를 존경하지 아니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여 일어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를 대적하여 일어남이니, 사람의 원수는 자기 집안 사람들이니라.』

(마 10:32, 개역)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마 10:33, 개역)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개역)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개역)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7, 개역)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개역)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구원 과 멸망 곧 축복과 저주를 깨뜨리기 위한 겁니다
그래서 형제지간으로 등장하는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축복(구원)과 저주(멸망)이

사람의 뜻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곧 말씀, 계시에서 좌우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이들은 동원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럼으로 둘 다 축복 받은 자도 아니요
둘 다 저주 받은 자도 아닙니다
오히려 둘 다 딱 달라붙어서(쌍둥이)
축복과 저주가 같이 붙어서 서로 대비되는 가운데 
구별작업(거룩, 하나님의 의, 질투의 사랑)에 의해서 등장시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이 축복과 저주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축복과 저주가 인간을 선택하는 입장이다는 겁니다
대상물로 삼는게 아니라 대상물로 도리어 당하는 거죠

그러니 이스라엘이 표출하는 축복과 저주가 다르고
에돔이 표출하는 축복과 저주가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나타내야 하고
바대로 에돔은 육정, 혈통, 사람의 뜻에 의한 축복과 저주를 나타내야 한다는 거죠

이 두 나라 두 족속이 먼저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축복과 저주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말이죠

자 그럼 여기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첫 번째와 연관된 두 번째로써

구원 곧 수치를 가려주심의 의미가 뭐냐 라는 겁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구원은 멋들어진 배불러 터진 구원입니다
수치와 무관한 구원관을 모든 종교에서 펼치더라 말이죠
이것이 바로 666 짐승입니다

바로 짐승의 세계에서 소통되는 구원이 매매
즉 사람들에게 먹혀드는 말이 되는
무슨 말인지 말귀를 알아먹는 소통이 매매가 된다 말이죠

그럼 자동적으로 이런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들의 구원은
매매 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단절로써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네 맞아요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은 심판 속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이 기회를 주변의 이방나라가 놓칠 리가 없지요
즉 인간들의 구원관 축복관이 마구 마구 튀어나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저주 상태
멸망 상태에 있으니까

맞물려서 자신들이 그 땅을 조금이라도 차지하고 (에돔)
그 동안 미워 죽었는데 에라이 죽었뿌라 라고 죽일 기회로 삼듯이 말이죠 (블레셋)

특히 에돔은 마치 솔로몬 재판의 두 기생의 한쪽 기생처럼

(겔 25:12, 현대어) 『[에돔 족속에 대하여] 나 여호와가 말한다. 에돔 족속은 유다 백성들에게 더할 수 없이 처참한 보복을 하여 제 스스로 무거운 죄를 쌓았다.』

다른 번역과 달리 현대어에서는 제 스스로 라는 의미로 표현했다 말이죠
마치 스스로 깨닫고 자살하는 가룟유다처럼
자기 숙제를 펼치더라 말이죠
축복과 저주를 가르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자기 숙제는 결국 원수갚기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얼마나 독립군 가룟유다는 로마에 대한 원수 갚기라는 소망에
그런 자기 의에 모든 열정을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가득채웠겠냐 말이죠
그런데 그 원수 갚기를 예수님이 안 들어주니까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겁니다

(신 23:7, 개역)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덕분에 객이 되어, 나그네가 되어 동행을 보게 되었으니 애굽 곧 정착민이 손해를 본 겁니다.)

네 맞아요

가인의 제사가 생각나죠
죄의 소원이라는 자기 숙제
죄에 대한 원수 갚기
그런데 누가 자기자신을 미워할 자가 어디 있겠냐 말이죠
성령이 아니고서는 회개를 못하고
도리어 회개의 달인이 되어버리는 자기 의를 쌓게 될텐데 말이죠.

도리어 원수는 주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해야 할 판국이니 말이죠.

(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의 제사 조차도 원인이 아닌(유목이냐 정착 농업이냐가 아닌)
결과로써 의문의 반복이냐 아니면
편파해석인 아들의 소원이 덮쳐짐이냐 라는 겁니다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눅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눅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것도 아버지의 소원이 아니라
아들의 소원일까요? 그것은 다음 글 마태복음 주께서 내 주께
다윗이 자손에게 어떻게 주여 라고
다윗의 자손에게 주여 라고 했느냐에서 언급하겠습니다.

(마 22:41, 개역)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 22:42, 개역)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개역)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개역)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자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축복이 아닌 저주
구원이 아닌 멸망의 자리에 놓여졌을때에

이방나라 곧 에돔 특히 형제지간이였던 혈통 육정 이였던 에돔은
사람의 뜻에서난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유감없이 드러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누구와 맞물려 있는 상태에서?
네 맞아요 이스라엘
그것도 멸망당한 이스라엘과 맞물려서 말이죠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 에돔은 자신들의 축복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돔은 바벨론을 도와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위해 연합군을 형성하게 되는 거죠

유유상종이라꼬 그동안 이스라엘을 미워했던 블레셋이랑 짝짝꿍이 맞아떨어진 거죠

그런데 이방나라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의 특별함을 말이죠

지난 주에 뭐라고 했습니까? 마태복음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과 함께 언급했던
이 특별한 이름의 특별함이 뭐냐 라는 거죠

바로 질투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그냥 사랑은 자기 사랑 때문에
인간이 자기를 자기가 사랑하기 때문에 그 동안 눈에 가시였던 이스라엘을 미워할 뿐이지
그 미움은 그 시기는 질투도 아니요 시기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말이죠

자기, 자아가 있는 한 자기를 사랑함이지
질투해서 나오는 미움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울리는 꽹과리 이다는 거죠

질투의 사랑은 자아를 없애요
이스라엘을 없애요
그 이스라엘을 바다 깊은 스올의 무저갱 속에서
자아가 없애고 그 심판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뛰어들어서 그 속에서 생명을 나타내신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내가 부활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이죠

그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다 라고 며느리 룻이 외치잖아요
십자가에 달려 죽는 하나님이 내 하나님 이라고 말이죠
이것이 다윗이 다윗의 자손에게 주 라고 표현하는 의미입니다
다다음글 모세의 날에 곧 애굽에서 빼내어 바다 속에서 끄집어낸 자가 누구뇨? 어디 계시뇨 라고 묻는 그 분이다 라는 겁니다

이 분을 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자아가 삭제 당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 이스라엘의 특별함은 자신의 특별함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특별함으로써
다른 나라 이방민족에게서는 전혀 특별하지 않는 그저 일반적인
오히려 얼룩이요 허물이

어리석고 미련함이

십자가의 지혜로써 모든 지혜와 능력을 다 무너뜨리더라 말이죠

그러니 솔로몬 재판의 진짜 어미는
이 특별한 이스라엘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곧 아기에게 처한 죽음에 뛰어드는 겁니다
내 죽을께 너 살아라 라꼬

오히려 가짜 엄마 기생은
오늘 에돔처럼

왕이 아기를 죽이니까
나도 그 왕의 지혜에 동참하겠다 라고
오늘 본문 에돔이 혈육으로써 형제지간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죽이시니까
나 에돔도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고자 이 이스라엘 멸망에 참여하겠노라 라고
또 시드기야처럼 (애굽과 손 잡고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라고 블레셋과 싸웠듯이)
에돔 또한 블레셋과 손잡고 그 동안 속국에서 벗어나 내 나라 독립은 내가 이루겠다 라고 나서는 겁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여고냐처럼 포로 잡혀 가니까 도리어 복 받고 말이죠

도통 인간에게서 나올수 없는 축복과 저주이다 말이죠
저주 받은 것이 축복이 되고
축복이라고 여겨졌던 것이 저주가 되는 것처럼 말이죠

(렘 24:1, 개역)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로 내게 보이셨는데』
(렘 24:2, 개역)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더라』
(렘 24:3, 개역)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악한 것은 극히 악하여 먹을 수 없게 악하니라』

(렘 24:8,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거하는 자들을 이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 같이 버리되』

심판과 저주는 다른 민족이 아닌 이스라엘만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주가 안되기 위해서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라고 나오는 자들이
축복 축복을 외치는
평강 평강을 외치는 거짓선지자 이다는 겁니다
절대로 이스라엘 망할 리가 없다 라고 말이죠
이스라엘의 특별함을 오히려 거짓선지자는 일반으로, 들포도로 취급한 겁니다.

(고후 11:14, 개역)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렘 6:14, 개역)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반대로 축복은커녕 저주 속으로 들어가자 라고 외치는 자가 참선지자 였다 말이죠
세례요한처럼 여호와의 이름에 동행케 하고자 물 속으로 세례, 참예 집어넣는 겁니다.
마치 불 붙지 않도록 마른장작에 물 뿌렸던 엘리야처럼 말이죠
큰 지진 큰 번개 라는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에서 나타나는게 아니라
듣길 듯 말 듯 다들 무시할 수밖에 없는 세밀한 음성이라는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라고 
이 십자가를 다들 무시하는 이 하나님의 죽음을 참선지자는 증거하더라 말이죠.

그리고 이방나라는 요나의 표적이 보일 리가 없기에 
거봐 하나님 뜻대로 되잖아 라고 동원이 되는
반대자로써 동원이 되는데 그 반대가 오히려 찬성이 되는
발람 선지자는 분명 저주 했는데 도리어 축복이 되는
기생 가짜 엄마가 솔로몬 왕의 판결에 박수를 치면 칠수록
도리어 자기 목이 날라가게 되는
과거 모세의 날 곧 애굽처럼 당하는 겁니다.

이 여호와 이름이라는 특별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마귀(짐승) 까지 다 동원이 되는 겁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민족이 블레셋 아닙니까 짐승이지요

바리새인이 실로암 소경에게 도리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는 꼴인 것처럼 말이죠
괜히 도와줘 놓고서는(이름 알려주는) 심판 받는 겁니다. 물론 도와준적 자체도 없었지만요.

결국 인간이란 어떻게 해서든 축복을 자기 쪽으로 끌어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특별함이다 라고 인식하고 이 특별함이 아닌 것은
일반이라고 모압처럼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축복관이자 종교적으로는 구원관이다 말이죠

그런데 축복과 저주는 이미 주님 쪽에서 미리 정해주셨다 말이죠
이 말은 인간은 복 달라고 할 자격 자체가 없다 라는 겁니다
오로지 주의 주 되심을 말하기 위한 축복과 저주로 갈라지는 구별이다는 것이지요
마치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축복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 라는
기준이 바로 산 자의 하나님 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산 자의 하나님을 말하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도리어 죽음의 자리에 놓여지는 특별함이 바로 동행이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특별성을 도리어 버리는 자들이
우상숭배자 이다고 했지요
바벨론 여자들이 간구 기도 하듯이 말이죠

이사야 사칠팔

(사 47:8, 개역)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우리는 바벨론 여자처럼, 이들 우상숭배자들처럼
내가 먼저 있었고
그런 나의 자리에 복을 채워나가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임금삼고자 따라잡으니까
예수님은 도망 치시는 겁니다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 주님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도리어 그런 인간들로부터 자기자신을 끄집어내시고자
자기가 자기 팔로 구원하시는 겁니다

(사 63:5, 개역)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사 63:5, 킹흠정) 『내가 보니 도와주는 자가 없었으며 또 떠받쳐 주는 자가 없었으므로 내가 이상히 여겼노라. 그러므로 내 팔이 내게 구원을 가져왔으며 내 격노가 나를 떠받쳤느니라.』

(사 63:5, 한글킹) 『내가 보았으나 도와주는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 붙들어 주는 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겼도다. 그리하여 나 자신의 팔이 내게 구원을 가져왔고 내 분노가 나를 붙들었도다.』

인간의 거룩
인간의 사랑
인간의 말씀 지킴 곧 율법 지킴은 이 질투가 없다 라고 지난 주 녹음에서 언급했습니다

진짜 원수는 자아 인데

(사 63:4, 개역)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사 63:4, 새번역) 『복수할 날이 다가왔고, 구원의 해가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마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4, 새번역)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 / ㉧시 110:1』

(시 110: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눅 20:43, 개역)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행 2:35, 개역)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로마 핑계 대고
에돔 핑계 대고
그들 때문에 예수님을 못 믿겠다 라고 나오는 것이 말이 되냐 말이죠
이 진짜 원수인 나 자신을 삭제 시켜 달라고 우는 자는 없어요

그래서 원수 만드시는 원수 만들기 죄인 만들기를 하시는 겁니다

가룟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는 뭡니까
없어요
가룟유다는 더더욱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라고 안 봅니다
다른 하나님의 원수가 눈에 시퍼렇게 살아있고 그들이 악행으로 유대인을 괴롭히는 판국에
원수가 자기로 보일턱이 없어요 오히려 정의로움만 불 일 듯이 더 끓겠죠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이 반드시 원수로 만드십니다
그래야 울거든요
닭을 세 번 울게 해서라도 울게 만드시는 겁니다
그렇게 포로 잡혀간 여고냐 (반대로 삼촌 시드기야는 가룟유다와 같죠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로 만들어야 비로소 원수가 자기인줄 알고 그 십자가가 옳았다 요나의 표적이 그 세밀한 음성이 옳았다 라고 외치니 말이죠

자신이 저주 받아 마땅한 자임을 아는 회개자가 우는 자가 도리어 축복받은 자로써
예수님이 기준임을 나타내고

자신은 끝까지 정의롭다 라는 의를 쌓는 자가 도리어 울지 않는 의인이 도리어 저주받은 자로써
자기 스스로 깨닫고 자기 숙제에 대한 실패로 자기가 자기를 없애버리는
스스로 심판 자체를 행사하는 겁니다

끝까지 주님의 심판자로 남기지 않기 위해서
무슨 놈의 알량한 정의인지? 말이죠
질투가 없는 정의요 질투가 없는 사랑 곧 자기사랑인 겁니다
그렇다고 질투 있는 사랑 만들려고 자꾸 원인은 자기가 할려고 하지 마세요
원인 자체가 없게 하신다 말이죠

어떤 무식한 장로는 자기 스스로 죽은자 되겠다 라고
졸지에 또 자기가 원인이 되어버리니
그게 무슨 질투 입니까

자기 스스로 우는 회개도 소용없어요
회개 눈물 금식 기도 4종 세트를 아무리 해도
주님은 그 다윗의 회개 눈물 금식 기도 거부하십니다
질투가 없어요
원수 갚음이 없어요
원수 갚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다 말이죠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화목제물을 보냈다 말이죠

운다
슬퍼한다
근심한다 라는 것은

원수가 망하면 기쁘지 왜 울겠냐 말이죠
그런데 운다 라는 것은
그 원수가 나 이기 때문에 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자꾸 주님의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려고 하니 말이죠

이것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 라는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율법 네 배나 갚으라 라고 원수에게 형벌을 퍼붓는 다윗이
정작 그 원수 놈이 너가 너 너 다윗이야 너야 너

비로소 이스라엘은 더 이상 다른 운명이 없게 됩니다
이 다윗의 운명에 이스라엘 전부를 다 집어넣습니다
우는 자로 만들고자 말이죠

여호와 이름이라는 특별함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 특별함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비로소 다윗은
이스라엘은
주께서 내 주께 라는
예수님 중심으로 세계가 축복과 저주로 나누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이 분이 복이고 나는 망해야 한다 라고 말이죠
이 예수님의 운명이 나의 운명이고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고
예수님의 다시 사심이 나의 다시 살리심 이라는
이 동행이
비로소 우상이라는 음란과와의 차이가 되는 겁니다

야동 보는 것이 음란이 아니라
도리어 야동 단 한번도 본적이 없다고 하면서
경건의 모양을 제대로 갖추어도
경건의 능력을 거부하는 자가 음란한 우상숭배자 이다는 겁니다
자기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율법을 지키고 있으니까 말이죠
성화론자 개혁주의자들이 다 우상숭배자였다는 거죠
정통 우려먹는 기존 교단들도 마찬가지이구요

이스라엘이 특별함은 바로 이겁니다
이스라엘의 허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대신 저주 받았다 라고
저 분이 진짜 축복의 사람인 복음이다 라고 말이죠

이것을 멸망의 자리에서 외치는 겁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의 자리에서 말이죠

아무도 그 고아 과부 나그네의 자리가
특별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고아 아닌 자리
과부 아닌 자리
나그네 아닌 자리인

머리 둘곳 있는 자리에 있으셨냐 말이죠

나 죽을께 너 살아라 라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모든 사람들의 허물을 덮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이 허물의 자리에 이스라엘은 동행하는 겁니다
주님의 운명이 나의 운명이라고

다들 그 멸망을 꼬시다 비웃고 웃을때에

정작 우는 자리에서 새 일을 다 이루신
복음과 함께 동행케 하시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낮추시는 겁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이 보기에 멸망한 자 같아 보여도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요 
왜? 산 자의 하나님이 동행 하시기 때문이거든요

(고후 6:8, 개역)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10, 개역)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인간 쪽에서 동행 곧 함께하심이라는 연합을 이루는게 아니라
주님 쪽에서 이루시기 때문에
앞뒤 모순 되는
원인 없는 결과를 이루시지

인간은 뭘 해도 자기사랑을 깔고 있기 때문에
원수갚기가 깔려있기에 
자꾸 원인 있는 결과 라는 자기숙제로 이룰려고 하기에
앞뒤 모순 되는 것을 구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허물 얼룩 잃어버림의 자리라는
고아 과부 나그네의 자리에서
주님의 나타내심을 이스라엘 스스로가 할 수가 없기에
주님의 숙제로써 이스라엘의 멸망의 자리에서
주의 주 되심을 나타내시는

축복과 저주가 주의 등장으로써
여호와가 누구인줄 알리는 식으로
나타남에 있어서
이스라엘은 그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주를 나타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죄인의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말이죠

그 죄인을 부르시러 오신 구원자의 구원자 되심을 말하기 위해
환자를 부르러 오신 의사의 의사되심을 말하기 위해서 말이죠

이것이 이스라엘의 축복된 축복은 저 분이다 라고 외치는 축복의 내용입니다
나 아니요 저 분이 축복이시다 라고 말이죠

그러니 상대적인 저주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를 거부하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신 당신은 틀렸다 라고 나설 수밖에 없는 거죠
베드로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마귀 보란 듯이 사랑
질투의 사랑으로 펼치심 앞에서
베드로를 미끼로 물 수밖에 없는 원수로 드러나야 하듯이

베드로의 질투 없는 특별함이 없는 베드로 자기 사랑에서도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탈출 구원 시켜야 하고(고로 베드로는 원수로 들추어져야 하고)

그런 원수 베드로를 미끼로 삼은 줄도 모르고 마귀라는 원수가 덮썩 물고서
나타남에 있어서
수치를 마귀보란 듯이 가려주는 질투의 사랑을 나타냈을때에
이 축복의 내용이 바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발현 하시는

그가 나 보다 옳았다 라고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신다 라고
마귀를 거쳐서 나온 이 질투의 사랑에
비로소 동행 함께 하심이라는 운명
새신랑과 함께할 신부로써의 고백을 받아내시고야 마시는 겁니다.

여기에 신부가 아닌 자들이 왜 신부가 아닌지의 그 내막들이 나타남에 있어서
그들은 이 사랑이 아니라
질투의 사랑이 아니라
그저 고아 과부 나그네가 안 되게 해 달라는
저주 받지 않게 해 달라는
그런 가짜 축복을 바라는 자로써 등장 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러니 멋들어진 구원 배불러 터진 구원이 아닌
모세의 날 바다에서 건져낸 그 구원자의 구원을 구원하기 위해서
다시 이스라엘은 바다 속에 빠져 죽었다가 다시 사는
이 주님의 구원을 구원하는
구원에 동원이 되어야 하고
이 구원을 거부하는
거부자들이 애굽 때의 그 10가지 우상 재앙을 당하는 저주 받은 자로써
이 주변의 이방인들이 동원이 되는 겁니다

이로써 주님 홀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반대로 산 자를 죽은자로 만드시는
구원을 홀로 펼치심 앞에
모든 이방나라가 동원이 되는 겁니다

이미 축복과 저주가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정해졌고
그 내용물을
증상으로써 나타내도록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이 동원이 되어서
이 십자가라는 요나의 표적이 나타나듯이 말이죠

자기 자리가 날라가 버린 것이 저주가 아니라 도리어 
이 땅에 머물수 없는 
떠나야 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써 나타나는 것이 축복이고

이 땅에서 복받아 잘 사는 것이 우상과 함께한 저주 받은 자로써
자기 자리를 저런 허구로 썩은 재물로 채우고자
등장해야할 자들이 이방나라로 나타나야 하듯이

이 모든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되시는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는 흥하고 나는 망해야 하는

망하는 자의 자리에서
저분 만이 옳았다 라고 외치는 것이 이스라엘의 특별함 이다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기도하는 내용과
한 쪽 강도의 표현을 통해서 보면
이스라엘 조차도 이방나라처럼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축복인줄 알았고
하나님도 그런 것을 원하는 줄 알았는데

정작 주님의 뜻은 누구와 동행하는고 하니
머리도 못 들고 그저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치는 세리와 함께 했고
또 다른 한 쪽 강도의 고백처럼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왜 죄 없으신 분이 이런 인간이 당하는 죽음에
이 비천한 죽음에 뛰어드셨습니까 라고
그저 긍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 밖에 없었다 말이죠

그 죄인들만 당하는 십자가의 처형에 뛰어드신 예수님을 보고

죽는 자가 죽는 자에게 축복해 달라고 하니
옆의 강도가 기가막혔던 것처럼

이 강도의 죽음
십자가 라는 저주의 죽음 속에서

이스라엘은 이 강도처럼
예수님에게 불쌍히 여겨 달라고

십자가에 같이 달리면서 외치듯이
이것이 이스라엘의 특별함 이라는 축복이고

그것이 무슨 축복이며
십자가에 달려 죽는 자에게 무슨 축복을 구하냐
자기도 자기를 구원 못하는 판국에
누가 누구를 구원하냐

그래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마 라고 다가오시는
여호와의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라는 겁니다

이 구원의 이름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 겁니다
당연히 자기 이름은 삭제 당하고
자기 자리가 삭제 당하는 자에게 말이죠

그들 고아 과부 나그네 에게만 불리워지는 이름인 겁니다

이름이 삭제 당한 자에게
예수님 본인도 이름이 삭제 당한 무시 받는 이름의 내용으로써

수치를 가려주는 구원을 펼치셔야

우리가 소망했던 그런 우상들이 다 부셔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바늘로써 그동안 못했던 우상파괴를
브로큰 애로우 로
자폭으로
자뻑 이지요
요즘 말로
자기자신에게 데미지를 입히는 신조어인데 아 생각 안나네요 ㅋㅋㅋ

자기 자신도 삭제 당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브로큰 애로우 폭격요청을 하듯이 말이죠
배 배 배신이야 배신

이런 주님의 숙제를 목격하는 증인으로써
이 주님의 새 일
주 여호와 이름의 특별함을
그 동안 얼마나 무시했는지를
여호와 이름이 펼치시는 그 전쟁 속에 놓여져서 누리는 겁니다

(이스라엘 스스로가 에돔을 미워하는 것은
질투의 사랑 축에도 못 드는
제대로 원수 갚음도 못 됩니다
하나님의 원수이지
자기 원수가 아니거든요
인간에게는 원수가 없다 라고 했다 말이죠
죄를 미워하지 않아요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늘 깔려 있으니 말이죠
그 자기란 그 자아란 없으니
원수 갚는 것은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에돔을 미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사실은 자기가 더 미워야 할 판국이니까 말이죠

이 십자가의 사랑에 늘 원수의 자리에서 용서 받는 것 뿐이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