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 이스라엘 족속에게 한 뿔이 솟아나게 하리라 (겔 29,17-21)

절망 속에서만 나타나는 길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요 부활이다)
십자가 속에서만 나타나는 부활

위치 이동(전이)하는 애굽 (겔 29,13-16)
에스겔 2019 2020. 12. 5. 22:33
19-74 이스라엘 속으로 위치 이동(전이)하는 애굽  (겔 29,13-16)

〈에스겔 29:17-21, 개역한글, 구약성경 1196 쪽,  찬송가 421장 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합소서 〉

(17) 제이십칠년 정월 초 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18) 인자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 군대로 두로를 치게 할 때에 크게 수고하여 각 머리털이 무지러졌고 각 어깨가 벗어졌으나 그와 군대가 그 수고한 보수를 두로에서 얻지 못하였느니라

(19)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애굽 땅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붙이리니 그가 그 무리를 옮겨가며 물건을 노략하며 빼앗아 갈 것이라 이것이 그 군대의 보수가 되리라

(20) 그들의 수고는 나를 위하여 함인즉 그 보수로 내가 애굽 땅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21) 그 날에 내가 이스라엘 족속에게 한 뿔이 솟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로 그들 중에서 입을 열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29:17, 현대어) 『[하나님의 도구인 느부갓네살] 우리가 포로로 끌려간 지 ㄱ) 27년째 되던 해 정월 초하룻날 여호와께서 내게 또 말씀하셨다. (ㄱ. BC 571년 3-4월)』
(겔 29:18, 현대어) 『'너 사람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저 섬 안의 도성인 두로를 치고자 군인들에게 말할 수 없이 고된 작업을 시켰다. 육지에서 섬에 이르는 칠백여 미터의 바다에 축대를 건설하느라고 모든 군인들은 머리가 다 빠지고 어깨가 쓸려 나갔다. 그러나 그 품삯을 그들은 두로에서 거두지 못하였다.』
(겔 29:19, 현대어)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그 품삯으로 애굽 땅을 주겠다. 그에게 애굽 사람들의 온 재산을 가져다가 군인들에게 그동안의 품삯으로 분배하게 해주게 하겠다.』
(겔 29:20, 현대어) 『느부갓네살이 두로에서 수고한 것은 나를 위해 한 것이니 내가 그 수고에 대한 대가로 애굽을 그에게 넘겨 주겠다. 나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겔 29:21, 현대어) 『그때에는 내가 이스라엘을 다시 강력한 나라로 키워 주고 위대한 통치자도 세워 주겠다. 너 에스겔아, 또 내가 네 입도 열어 놓아 내 예언자로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용기를 네게 주겠다. 그러면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다가와서 다들 기적을 요구할때에
주님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들어줄수가 없다 라고 하시면서

기적은 기적인데 아무도 원치 않는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라고 하십니다

자 이렇게 되면 인간이 원하는 신은 예수님에게서는 찾아 볼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인간의 손에 죽는
그것도 남이 아닌 반드시 나의 손에 죽는 예수님으로만 다가오시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모든 인간의 선악적인 신은 다 깨어집니다
선악을 아는 인간은 애초부터 죽어 마땅함을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내셨거든요
곧 신이 죽은 거다 라는 겁니다

이것을 죽은자의 하나님이다 라고 했지요
그리고 반드시 이 죽은 자의 하나님과 한 세트를 구성해서
산 자의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인간이 바라는 모든 인간이 바라는 신이 죽지 아니하면 안되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바랬던 신
곧 나를 투사 시킨 신은 이 십자가를 통해서 죽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거죠

고로 이스라엘이 원했던 신은 이스라엘과 함께 죽는 겁니다

이 죽음이 선행되지 않으면 십자가의 의미는 전혀 알수 없는 비밀이 되는 거죠
오죽 하면 천재들로만 구성된 성화론자들을 보면
십자가는 그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전혀 맞지가 않습니다

그런다고 주님이 포기 하시느냐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죽음 곧 해체요 심판입니다
그 심판 이라는 절망 속에서만
예수님 자신의 약속 곧 십자가가 보이도록 하시겠다 라는 거죠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니 이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고후 4:7, 개역)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3, 개역)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고후 4:4, 개역)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 4:5, 개역)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후 4:6, 개역)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후 4:7, 개역)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 개역)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개역)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개역)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개역)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2, 개역)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 4:13, 개역)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고후 4:14, 개역)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고후 4:15, 개역)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 4:17, 개역)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8, 개역)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이스라엘이 아무리 개판이 되고
아무리 심판 속에 놓여지고
아무리 해체가 되어 사라지더라도
존재는 없어질 지언정 그 기능은 여전히 살아서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그릇임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릇을 나타내는게 아니라
그릇에 담긴 보배를 말이죠

그러니 요나가 아무리 개판 5분전처럼 니느웨 백성 안 망하냐 라고
정작 이스라엘이 망해야 함을 못 보고
남의 티끌을 볼 뿐이지 정작 이스라엘의 대들보를 못 보는 입장에서
왜 내가 저 망해야 할 민족 개같은 이방민족에게 약속을 증거하는 선지자가 되어야 하냐
알았다 알았다 어차피 망할 것 빨리 망했뿌라 라고
삼일의 간극을 하루로 자기 마음대로 좁혀서 증거했다 말이죠
귀한 진주를 개 돼지에게 던지기 싫어서 말이죠

그런데 정작 개 돼지는 요나가 아끼고 아끼는 이스라엘 이였다 말이죠

그러니 오히려 요나가 악마처럼 니느웨 백성을 잡아서 어서 심판하라고 잡아오니까
정작 주님은 니느웨 백성을 피옷으로 정결케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들이 자력으로 회개할 리가 없다 라는 것을 요나는 너무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이거 주님의 자작극이지요 라고 따집니다
차라리 날 죽여라 라고 말이죠

요나 마저도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몰랐다 라는 거죠
마치 열심히 특심인데 나만 남았다 라고 외치는 엘리야처럼 말이죠

네 맞아요 몰라야 됩니다
그래야 새언약으로 기준이 바뀐 것을 알게 될테니까 말이죠

비로소 선지자들 요나나 엘리야나 그 이후의
거짓선지자와의 차이가 나는
한 세트로써 등장되는 참선지자들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즉 보배죠
보배를 담은 그릇으로써
보배를 증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망해야 한다는 것을 외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거짓선지자는 이 한 아기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즉 죽은자의 하나님이요 다윗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교리나 종교처럼 형성했다고 착각하는
그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구하도록 되어 있어야만 하기에
그것 밖에 못 보도록 되어 있으니까 말이죠

그러나 산 자의 하나님은 이 한 아기 이신 예수님과 연결되는 입장에서
참선지자들이 출현하는 겁니다.

결국 거짓선지자들은 구약에서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상태에서 출현하도록 되어 있고요

자 그럼 왜 예수님과 연관 되어야만 합니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요 부활이기 때문이다 말이죠
이것이 말로만 끝나는게 아니라

너 내가 여호와 인줄 알게 해 주마 라고 계속해서 지금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 말은 그래 내가 생명인줄 너 모르지 오냐 생명인줄 알게 해 주마 라고 하시면서

결국 예수님만 여호와만 생명이기에
나머지는 다 죽여 버리는 겁니다
그 1번 타자로써
하나님의 집부터 먼저 심판을 실행하신다 말이죠
왜? 심판 주가 누구신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이스라엘 이기에 말이죠

그러니 이스라엘은 죽어야 합니다
마치 베드로가 자신의 믿음이든 뭐든 다 바닥이 나서 탈탈탈 털려서
더 이상 자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 아예 없는 절망 속에
스올 속에
큰 물고기 뱃속에
큰 바다 어두움 무저갱 지옥 속에 놓여져야만 하듯이 말이죠

이것이 왜 그런고 하니
새언약이 광야에서 꽃이 피도록 하시겠다 창조주가 너 누군지 모르지
오냐 알려주마 라고 하셨으니까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마치 베드로처럼 자신의 믿음이든 모조리 타 털리고
심지어 목숨까지 다 털려야 생명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으니까 말이죠
베드로 본인 개인이? 아니지요
공명 곧 주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때에
반드시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내시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이 살아서가 아니라
죽어서 나타내도록 하시겠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보배를 담은 그릇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그릇은 깨뜨려야 제맛입니다 즉 본래의 기능이 그것이다 라는 거죠
자 이제부터 접시를 깨자 라고 김국한의 노래처럼 말이죠

성화론자들 즉 거짓선지자들 십자가와 무관한 자들의 특징은
이 그릇을 자꾸 반짝 반짝 빛나는 유리그릇으로 만들려고 해요
왜? 보배를 담았다고
그런데 정작 보배를 쳐다보는게 아니라
다들 반짝 반짝 빛나는 유리그릇을 쳐다본다 말이죠

아니 죽이시기로 작정이 된 그릇이
살리시기로 작정이 된 그릇으로 깨뜨리면 안될걸 이라고 나오게 되니
이게 무슨 놈의 그릇이라는 기능을 나타내겠냐 말이죠

(고후 4:11, 개역)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매일 매일 죽음에 넘기우도록 되어 있는 자들이 사도 이거든요
이것이 날로 날로 새로운 
비록 육체는 후패하여 죽지만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롭도다 말이죠 왜? 내가 아니라
내가 생명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생명을 나타내니까
그러니 그릇은 깨는 맛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귀하디 귀한 유리그릇이 되어버린 성화를 해 버린 자들은
성화를 했다는 그 이유로 어떻게 그렇게 귀하디 귀한 것을 깨뜨릴수가 있겠냐 말이죠
아까워 미칠 것인데 말이죠

지난 주 마태복음에서 성전으로 맹세하는 것은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만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라고
성전 종사자들이 이미 유대사회를 그렇게 가르쳐 버렸다 말이죠
습관화 되어버릴 정도로 즉 우상화 되어버린 겁니다.

아니 생각을 해 보세요
우상화 되었다 습관화 되었다 라는 것은
개개인 이라는 자아가 생겨버렸다 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기능 자체가 존재가 아니라 기능이기에
개개인이 생길수가 없는 비존쟁 곧 기능이다 말이죠
그런데 존재가 되어버리면 개개인이 생기고
자아가 생기고 
자아가 생기면 저 놈과 내 놈과 말씀을 지키는 정도가 차이가 나고 
차이가 나면 간극이 졸지에 생겨요
너는 못 지킨놈 나는 잘 지킨 놈 이라고 말이죠

이게 개인이 생기니까 장난 오락 종교가 되고 사람의 수 666 짐승이 된다고 했다 말이죠
성화론자들이 그것을 부추기고 있는 겁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개인 개념이 없어요
아니 생각을 해 보세요

약자보호법
시형제 결혼법
이웃 환대법 등등을 무식하게 법으로 지키는 개념으로 봐 버리면
개인의 차 가 생기겠지만

그렇게 되면 종교 오락 게임이 되겠지만

약자보호법 자체가
시형제 결혼법 자체가
이웃 환대법 자체가
개인 이라는 존재
자아라는 개별성을 인정 안하겠다 라는 취지 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무식하게 그 법을 지키는 나와 그 법을 안 지키는 너가 갈려 버리니까
이것이 오락이 되어버리니까
마땅히 죽어야 할 자임을 모르게 되는 겁니다
모르니 자꾸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바라고
거짓선지자가 소통꺼리로써 유통된다 말이죠

마땅히 죽어야 한다 라는 참선지자는 오히려 단절이 되구요
사도들 보세요 죽이시기로 작정이 된 단절로 치닫고 있거든요

매일 매일 죽음에 넘겨진다 라고 하잖아요

거봐요
성전에 맹세하는 것은 아무것도 안 일어나는 단절이고
성전에 바친 금으로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만 소통이 되어요

거짓선지자는 소통이 되지만
참선지자는 소통이 안 됩니다 단절입니다 아무것도 안 일어나요
막 죽여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말이죠
그런데 거짓선지자는 온갖 협박공갈을 다 합니다
거짓선지자 건드리면 삼대가 망한다는 둥 7대가 망한다는 둥
그 사기가 또 먹혀 들어요 글쎄

이 글 다음 글 마태복음에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킨다 라고 하잖아요
돈 안되는 것은 다 걸러내요
성전으로 맹세하는 것은 돈 이 안되기에 걸러냅니다

그러나 성전에 바친 금으로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이유는
돈이 되는 낙타 이거든요 벤츠 최고급 차 비싼차 돈 되는 인간이거든요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요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다 말이죠
얼마나 다행 입니까 가짜임을
거짓선지자임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으니
속을 놈만 속아야 하거든요

괜히 1300년 전에 죽은 애굽광 바로왕을 끄집어 낸게 아닙니다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끄집어 내었고
그 애굽왕에게 위치 이동한 애굽 곧 바벨론에게 
이스라엘은 망해야 합니다
거짓선지자니 뭐니
일송정 푸른 솔은 선구자 이니 뭐니
모조리 불도져로 밀어서 평평하게
잘 지킨놈 못 지킨놈 모조리 평준화 해 버리는 겁니다
그래야

자아
개인이 없어요

그 불도져가 어디서 나오느냐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듯이
오늘 본문 뿔이 모든 자아를 빵꾸멍 뻥뻥 뚫어버려서 자아를 없애버리는
그 뿔이 어디서 나오느냐 구원의 뿔이 말이죠
바로 이스라엘 속에서 나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시범 조교로써
너거들이 심판주에게 이렇게 당하도록 되어 있다 라고
미리 조교 이스라엘이 당하는 겁니다.

이것이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보여주시는 방식입니다.

인간은 이런 약속의 방식
새언약의 방식 원치 않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말이죠

이것이 선악관념 인데
자신의 출발지를 자기 태어난 출생으로부터 보고 있다 말이죠
이스라엘의 출생지가 어딥니까?
환도뼈 뿌싸뿌가 그 틈에서 태어난 것이 이스라엘이다 말이죠
그 틈이 역사라는 시공간이 아니라
그 간극은 바로 야곱의 죽음의 자리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출발지는 곧 종말
곧 역사의 끝에서 출발한다
곧 죽음에서 출발해요 글쎄

율법을 준 이유는 뭘 해도 죽어 마땅한 자 이다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는 그 죽음의 자리에서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봐 버렸으니 더러운 백성으로써 나는 타 죽어 마땅하구나 라고
이 죽음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 이스라엘 이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처음자리 이거든요 첫사랑의 자리 이거든요

이것을 우리가 모르니까
1,300년 전에 죽은 애굽왕 바로왕을 끄집어 내어서
즉 그 당시 모든 사람에게 소통이 되는 
최초의 자칭 토기장이 라고 창조주의 자리에 앉은 놈을 쓰레기 통에서 끄집어 와서
(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인잔치 하이라이트를 앞두고
지옥에서 지옥사자들을 풀어버리시잖아요
목베인 영혼들을 의도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죠
그들이 신부 곧 다다음글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열매요 기업인
포도송이의 즙 이니까 말이죠)

주님 쪽에서 성화를 퍼붓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성화를 해서 거리두기 간극두기 간극벌리기 구분짖기 구별짖기 하는게 아니라
주님 쪽에서 성화 곧 구별짖기를 하신다 말이죠
저들의 손에 죽도록 말이죠

그것이 바로 좋은 무화과 나무가 여고냐 이고 (8세 18세)
반대로 애굽과 반드시 손 잡고 애굽에게 배신당하는 나쁜 무화과 나무가 시드기야
남유다 마지막 왕이다 라는 겁니다.

바로 이 어린아이와 같이(죽은자) 되지 않으면 천국에 결단코 갈 수 없다 말이죠
베드로가 자꾸 시드기야가 될려고 하고
예수님은 반대로 베드로를 세 번 부인케 만들어서라도 여고냐 곧 죽은자 어린아이와 같이 만들려고 해요

누가 기업을 얻는
누가 열매가 되느냐 라는 겁니다
새 언약이라는 십자가의 혜택을 (이건 다다음글 이사야서 이고)

오늘 본문에서 언급된 구원의 뿔에 빵구멍 뻥뻥 뚫리듯이 (떽지 사람의 일 손떼, 사탄의 일 손떼. 하나님의 일에 맡겨라 말이죠)
불도져에 쭈우욱 밀려서 평준화 곧 개인이 없다 말이죠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때려죽어도 버리지 않겠다 라는
그 개인이 필요가 없어요
왜? 그 개인 
그 자아를 불도져로
구원의 뿔로
이스라엘 속에서 나온 뿔로 
뚫어버리고 (총 맞은 것처럼 ? 즉 죽인다 말이죠 황무지로 만들어버린다 말이죠
죽은자 만들기 말이죠)
밀어 버리고 해서
빵층 1층 제로 층으로 평평하게 다리미질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끝에서
죽음에서 출발하는 이스라엘 이다는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이다 말이죠

싫어? 그럼 싫으면 그 자리 이방인으로 대신 채워서
새 이스라엘로 출발한다 말이죠

이방인을 이방인 그대로 출발하시는게 아니라
새이스라엘로써 출발 시키시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주님은 오로지 이스라엘만 구원하신다 라는 거죠

존재로 보는 놈들은 왜 남의 족속의 신을 믿냐 라고 따지는 김용옥과 같은 놈인거죠
그래놓고 요즘은 또 다시 하나님을 자신은 사랑한데요 글쎄
이랬다 저랬다 ㅋㅋㅋ
개인 이라는 자아가 있는 놈들의 특징입니다 거짓선지자 인 거죠

거짓선지자는 자아에서 출발 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자녀는 개인이 없어요
오히려 자아의 죽음에서 출발하기에
끝에서
종말에서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러니 주님은 여호와 자신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창조주가 누구인가를 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곧 약속의 민족을 어떻게 합니까
네 맞아요 오늘 본문처럼 심판하십니다
그래야 그 속에서 구원의 뿔이 나오거든요

베드로를 세 번 부인하도록 만들어야
그 베드로 속에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만드시는
신부로 만드시는
신랑의 죽음 보다 강한 시기의 사랑
질투의 사랑이 나오거든요

자꾸 우리 인간은 선악 때문에
즉 개인이 있어서
자아가 있어서
자아가 해체 되지 않아서 자꾸 선악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윤리 도덕 등등으로 깨작 깨작 장난치더라 말이죠
그러니 개인의 성과주의처럼 개개인의 능력치는 자꾸 내미는 겁니다.

아이고 그것도 큰 거가
누구 코에 붙일려고

적어도 일만달란트 16만년 일해도 못 갚는 빚 같은 사랑
이 얼마나 위험한 사랑 입니까 질투의 사랑 입니까
겨우 남을 7번 용서한 것으로
이스라엘을 깨작 깨작 인도 할꺼냐 말이죠
그게 소경이 아니도 뭐냐 말이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거다 말이죠

7에 70번의 용서 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것이 깨작 깨작 장난 치는 자들과 차별이 되는
아무것도 심지도 않고서 거두는 약속의 땅의 원리로써만
이스라엘을 움직이시는 맏물
이스라엘을 장자로
하늘에 속한 자로써 맏물로 삼으신
하늘에 바쳐진 자이다는 거죠

그러니 맏아들이 깨작 깨작 장난 치는 자로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아야 할까요

아니면 망나니 탕자를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아야 할까요

탕자와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 
그의 손의 양이라 ㅋㅋㅋ
만 생각하면 어떤 분의 질문 덕분에 이것이 연결 되는 줄
끝에서 시작하는 것이 탕자 아닙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탕자 말이죠

그분 질문 아니였으면 이것이 별개의 문제로 여전히 봤을텐데
오히려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단절 된 것이 오히려 더 잘 붙고

아무리 가차이 따닥 따닥 철썩 철거머리처럼 붙어 있는 것들은
정작 멀어지더라 말이죠

유대인이 얼마나 주님과 멀고도 먼 사고방식으로만 일관하는지
오늘날 교회들이 이렇잖아요 너무 너무 멀리 멀리 떨어져 있어요
낙타 약대를 삼켜먹기 바쁘다 보니
하루살이를 멀리 멀리 떨어뜨려 버리는 겁니다.

어이 썩 물렀거라
애들은 가라
하루살이는 가라 라고 말이죠
돈 되는 놈만 오라는 겁니다.

돈 되는 귀티나는 여사장 같은 분이 오니까 딱 달라붙어서
온갖 아부를 다 떨어가면서 손님 모시듯이 하는지

그러니 그 첩경
울퉁 불퉁 높은 산 움푹파인 웅덩이 이 간극을 모조리 평평하게 다리미질 해 버리면
니 잘났니 내 잘났니 라는 입이 쑥 들어가는 겁니다

바로 이 질투의 사랑을 이 큰 것을 구하라 말이죠
어쭈 안 구한다 라고??
오늘 이스라엘이 안 구하든 말든 구하도록 부르짖도록 만들겠다
어떻게? 1300년 전에 죽은놈 애굽왕 바로왕을 다시 쓰레기 통헤서 끄집어 와서
강퍅케 만들어서 안 부르짖고는 못배기도록 만들어서
이 구원의 뿔을 나타내시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마치 구하지도 않았는데 구한바 되고
찾지도 않았는데 찾은바 된 이방인의 구원처럼
이스라엘 조차도 그 죽음의 자리에서
구원의 뿔을 부르짖도록 만드시는
바로왕의 강퍅케 하심 덕분에

이 구원의 뿔
브로큰 애로우 
부러진 화살 무차별 폭격
한나와 마리아의 기도가 바로 폭격요청이다 말이죠
요나가 십자가를 향해서 기도한 것처럼 말이죠
그 무저갱, 스올 속에서 말이죠 
죽은자의 자리에서 말이죠

뜨인돌이 나와서 다 뿌써버리는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 없이 말이죠

결국 이스라엘은 아무리 자기자신을 위하여 살고 죽고자 해도
그럴수가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출발지를 자신이 태어난 날짜 곧 생일로 잡아서 출발해도
이스라엘만큼은 그럴수가 없기에
스스로 생일을 저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다윗 자기자신을 위해서 다위의 자손을 외친게 아니다 말이죠
아버지를 위해서 자식이 태어난 게 아니라
도리어 다윗의 자손이신 다윗의 주를 위해서
다윗이 태어나야만 하는 이스라엘의 기능을 해야하기에
다윗은 왕 자리에서 쫄딱 망하고
도리어 어린아이 자리에서 태어나야만 했던 겁니다.
그래야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
곧 누가 창조주이신가 라는 것을
다른 나라는 다 자기가 창조주 라고 애굽왕을 따라하기 바쁘지만
다윗은 그럴수 없습니다 왕의 자리에 내려와서
내려온다는 것이 쉽지 않고 불가능하죠 네 맞아요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죽음의 자리인 어린아이와 같은 죽은자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위해 태어난 자였었음을 외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율법은 그래서 가입이 된 겁니다
죽으라 라꼬
애초부터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선악으로 백날 해 본들 함량미달이기에
율법은 도리어 우리는 죽음의 자리에서 출발하도록 하는
몽학선생 기능을 하는데
도리어 율법을 가지고 장난 치는 놈들은
자신의 출생지를 자기자신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니
역사와 묵시가 충돌하는 그 현장에서도 조차도 어두운 소경 티를 팍팍 내는 겁니다.

선악은 나를 없는 나를 다시 소환 하지만
율법은 없는 나를 없는 자리에서 출발하여서
예수님을 말하도록 하는 이스라엘로 삼으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또 어릴적 불렀던 부흥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로 시작하는
가스펠이 흥얼거려지는데
정작 그 내용은 완전히 거꾸로 이해하면서 다들 불렀던 겁니다
황무지를 새롭게 해 달라는 내용인데
이 세상이 타락했으니까 말이죠
부흥케 해 달라고 말이죠

부흥이라는 단어는 그야말로 다른나라는 몰라도 한국은 무지 집착하고 있죠
즉 탐심이라는 우상성을 많이 가득 담았다는 겁니다.
가사에도 나와요 우상성을 깨뜨려 달라고
그런데 그 노래 자체가 우상성이예요

노래 전체를 거꾸로 부르고 있어요
황무지를 새롭게 해 달라고 하는데
성경은 특히 오늘 본문은 도리어 황무지로 만들어 달라는 의미입니다.
제발 이스라엘 쫄딱 망하게 해 달라고
그래야 그 망한 이스라엘 속에서
그 황무지가 된 이스라엘 속에서
무엇이 나타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곧 부활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가 나오는 겁니다.

내가 황무지가 안되면
이스라엘이 황무지가 안되면
죽지 않으면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나타낼수가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내가 살아서 외치는 것은 오히려 저 1300년 전에 죽었던 애굽왕과 똑같은 짓만 하는 토기장이 이다 말이죠

두 주인을 어떻게 동시에 섬기냐 말이죠

(마 6:24, 개역)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미움과 사랑 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 상극을 한 세트로 다루시는데 있어서

나 자기자신이냐 ? 이것의 대표자로써 1300년 전에 죽은놈 쓰레기 통헤서 끄집어 내었고
아니면 여호와가 누구냐를 나타내느냐
이 둘을 한 세트로 삼아서 증거하시는 겁니다.
차이가 안 나면 소경인 거죠 마치 성전에 맹세하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죠
차이가 또렷히 나면 비로소 핍박 받는 거죠
대중가요 가삿말처럼 이 놈의 죽일놈의 사랑 때문에, 질투의 사랑이 벌어지는 거죠
그래서 말만 하는게 아니라
유대인 코 앞에서 개같은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제발 좀 시기 하라꼬 말이죠

시기하라꼬 벌어지는 것이 질투의 사랑 이니까 말이죠
그런데 자꾸 깨작 깨작 거리는 소경의 길을 가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인 거죠

그러니 자아의 죽음을 거치지 않고서는
여호와가 누구인줄 모르도록 하신 겁니다

자아 뿐이겠습니까? 애굽의 10가지 재앙은 결국 맏아들 장자의 죽음까지 갑니다
즉 부활까지 막겠다 라는 겁니다
죽은 자의 하나님을 막겠다 라는 겁니다.

니 백날 구원 된다 치자
노아가 다니엘이 욥이 옆에 있어서 구원된다 치자
그러나 니 자식은 때려죽어도 구원 안된다 라고 구원을 막으시는 분이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시는 기점이 되는 겁니다.

고로 이스라엘이 아무리 구원을 얻고자
어떻게 하면 구원 얻냐 라고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 라고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
개인 구원을 막으시러 오신 예수님에게는 통할 소리가 아닌 겁니다
개인 구원 따위는 없구요
그깟 개인 구원 해 주러 오신게 아니다 말이죠
아이고 그것도 구원이가
깨작 깨작 말이죠

온 인류를 구원하러 왔다 말이죠
안전빵인 99마리 버리고
도저히 너희들도 용납못하고
탕자 자신도 납득이 불가한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찾으러 왔다 라는 겁니다.
인간의 멋들어진 구원
편한 구원

다 거부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모욕적인 구원을 말이죠

그러니 이스라엘은 아무리 자기 개인 구원 소망해도 소용이 없어요
이미 그들은 보배를 담은 그릇이기에
이 그릇을 깨뜨리시면서 보배의 의미를 가치를 드러내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존재가 없어요
그저 기능 밖에 없어요
존재 있어도 소용 없어요
깨뜨려지는 그릇 기능 밖에 나타낼게 없거든요

깨뜨려지는 그릇으로써(자 이제부터 접시를 깨자 라는 노래 덕분에 쉽게 기억하네요 ㅋㅋ)
보라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로다 라는 소리만을 외치는 것이 이스라엘의 기능입니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태어나야만 하는 겁니다.
장자의 죽음 속에서 말이죠
맏아들 곧 부활을 다 막으시면서 말이죠

아이고 그것도 부활이가 깨작 깨작
그래서 일부러 삼일 늦게 가셔서
그들의 울음에 쪽팔려서 우시는 겁니다
부활의 골짜기에 산다 카면서
우냐 말이죠

부활 교리 믿는다니깐요
때려치아라 마
나사로야 나온나
야들이 부활교리 믿는다 라고 장난치고 있다
부활 보여줘라
부활이 종교신앙인지 종교오락인지
아니면 누구 라는 구체적인 인물 인지
부활은 예수님입니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나사로는 죽음 속에 머물수가 없는 겁니다
나사로 속에서 뿔이 나와서 죽음을 깨뜨려야 하거든요

그리고 인간의 부활장난을 다 깨뜨리시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활입니다
인간 쪽에서의 출발은 하나님이 하나도 기뻐하지 않는 것만 골라서 해요
금식도 기도도 회개도 눈물도 말이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관 됩니다
그러나 자기 죽음과 연관이 되어야지요
아니 죽음과 죽음이 연결 되다니요?

단절과 단절이 연결이 되다니요 말이 되냐 말이죠

이것이 바로 종말의 부활 종말의 기도 종말의 금식 종말의 눈물 종말의 회개입니다
즉 끝에서 거꾸로 오는 겁니다
이미 나의 죽음은 전제로 깔고서 말이죠
그는 흥하고 나는 망해야 한다 라는
망해야 함을 깔고서 그 위에서 주님이라는 인물이 증거 되는 겁니다.

안그러면 깨작 깨작 장난쳐요
남을 7번 용서 했다 라굽쇼? 어딜 개수작이냐 오함마 갖고요
어디서 밑장 빼기냐 말이죠
주님은 손모가지 아니 목숨을 걸었는데 어디서 장난질 이냐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예수님의 죽음이 이렇게 또렷한데 어딜 속이냐 말이죠

내가 망해가는 과정이
이스라엘이 망해가는 과정이
말씀이 운동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말이죠
말씀이 살아 있다 라는
산 자의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뭐 아버지를 위해 아들이 태어나야 한다 라고
아닙니다 그것은 죽은 자의 하나님입니다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태어난 겁니다
곧 아버지는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비로소 알고
오로지 아들의 죽음으로만 기뻐하는
꺾으신 뼈로만 기뻐하기 위해
어린양을 외치라고 태어난 것이 아버지다 말이죠

시간을 거꾸로 끝에서 보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심 이라는 종말의 의미입니다.

고로 인간은 특히 이스라엘은 출생지에서 출발하는 자가 아니라
반대로 종말에서 역사의 끝에서
이스라엘의 멸망 에서부터 출 ~~~~~~~~~ 발 ~~~~ 하는 종말의 단체입니다
교회도 천국이 아니라 (인간이 외치는 천국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종말의 천국이 아니라
종교오락게임의 장난질 하는 아이고 그것도 천국이가 깨작 깨작 개수작 부르는 천국이 아니라)
교회도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종말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곧 십자가
요나의 표적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 흑암의 백성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 새이스라엘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출발도 이러했는데

의도적으로 한 세트로 붙인 
애굽의 자리가 졸지에 그들의 자리가 되어버렸으니
주님이 가만히 둘까요
다 물에 빠뜨려 죽이시는 겁니다

어라 그 물 속이라는 죽음 속이
도리어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인줄
비로소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아는 겁니다

반대로 물 바깥의 
불 바깥의 자리가 그들에게는 지옥으로 새삼스럽게 주님이 만드심으로써
오냐 애굽왕아 너 여호와가 누구관데 라고 누군지 모란다 캤제
알려주마 기다려봐

간단 합니다
부활을 다 끊어버립니다
인간의 삶의 목적인 딱 하나입니다
구원 곧 부활입니다.

그 증상물이 바로 기업 곧 열매인 거죠
그 기업을 이어받을 자 장자를 죽이면 게임 끝입니다

인간들도 호락 호락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 게임기 뿌사버렸다 라고 성전을 허물었거든요
하나님의 독생자를 죽였다 말이죠

그래 죽여라 죽여라 누가 다시 삼일 만에 다시 사는가 보자
누가 산 자의 하나님인지 보자

바로 이런 의미가 담긴 것이 임마누엘
하나님은 니 편이 아니라 우리 편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라고
이사야 딸랑 혼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으로써
그 심판 속에서 부정함을 제거 당함으로써
이스라엘 속에서 외쳤거든요

아무도 임마누엘 아기를 구하지 않겠데요 글쎄

그러든 말든 안 구하고는 못 배기도록
다윗의 운명 속에 다 집어 넣어버리는 겁니다.
개인 운명이 아니거든요
이스라엘의 운명 이다 말이죠
곧 예수님의 운명 속에 다 집어넣어버려요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은 쫄딱 멸망 당함으로써
그 죽음 속에서 구원의 뿔 되신 예수님이

남자 없이 태어나듯이
이스라엘 멸망 속에서 태어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태어난 이유는 바로 예수님을 말하기 위해
예수님을 위해서 태어난 거죠

산 소망 이니까 말이죠
요나가 비로소 무저갱 스올 지옥 속에서
성전 참 성전 되신 예수님을 쳐다보고
십자가 라는 성전의 기능을 쳐다보고
죽음 속에서 길을 생명을 진리를 부활을 곧 한 인물을 보고

황무지 속에서 생명수가 넘쳐나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마시는 겁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마땅히 심판 받아 마땅한 개같은 사마리아 여자가
그 죽은 자가 생명수를 비로소 마신다 말이죠

아무도 목말라 하지 않는 자들 속에서 말이죠
삥 둘러가는 장난치는 유대인들 보란 듯이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의 뿔은
이런 역사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종말이라는 묵시라는 뿔로써 역사를 찢으면서 말씀을 성취 하시는 겁니다.

역사를 찢지 않는다면 뿔이 말라꼬 나타나겠습니까
구멍 뚫고자 등장하는 것인데

그러니 역사의 종말 속에서만 이 뿔의 의미
말씀의 성취가 드러나는 겁니다
물론 역사 속에서만 사는 자들은
뿔이 보일턱도 없고
알리도 없고
안 보여요

한쪽 강도가 그 죽음 속에서 예수님을 보고서
이스라엘의 뿔을 보고서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는
종말의 고백을 해요 글쎄

오냐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다른 한 쪽 강도가 어라 둘이 귀신씨나락까먹는 소리하네
뭐 여기가 장난치는 장소냐?

역사를 찢고 종말의 언어
단절의 언어를 하니까
바벨탑 언어에서는 방언으로 들릴 뿐인 겁니다.

불(성령) 속의 언어와
불(십자가의 영) 바깥의 언어가 다르듯이 말이죠

이스라엘은 물 속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죽음 속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기능은 그들 조차도 흉내 못 냅니다
죽음 속에서만 펼쳐지니까 말이죠

참선지자들도 베드로도
예수님의 일만달란트 용서인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모를 때
다들 장난질 밖에 할 줄 몰랐습니다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다 라고
아이고 장난 하냐

니 혼자 남았다고 어딜 감히 개 구라를 치냐

7천명 남겨놨다 우짤래

입이 쑥 들어가게 만드십니다

자 이렇게 되니 또 거꾸로 생각합니다
종말을 보여주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말 말이죠)
또 거꾸로 역사로 따집니다
큰 지진 큰 번개 큰 태풍으로 오시지 않고
세미한 음성으로
젖먹이로
임마누엘로 말이죠

아이고 큰 지진 큰 번개 큰 태풍 그것도 큰 거가
적어도 이정도는 되어야지
죽을똥살똥으로 울어재끼는 젖먹이 보다 강한 자 있으면 놔와 보라 말이죠

내 주는 강한 성이요
그 장수 누군가?
젖먹이 이다 말이죠
골리앗도 물리친
사망의 권세도 이기신

이 꺽으신 뼈를 말하기 위해서
다윗은 태어나야만 하는 겁니다

어딜 감히 회개 눈물 금식 기도 따위로 아이를 살려보겠다고 장난하냐 말이죠
무엇이 크냐 말이죠

큰거 그때는 왜 못 따지냐 말이죠
심심하면 자나깨나 제자들끼리 누가 크냐 맨날 허구한날 그 크냐 문제로 싸워놓고서는
정작 멍석을 깔아주니까
따질줄도 모르면서 도토리 키 재기 하냐 말이죠
그 의문의 반복 썩 거두어 버려라 말이죠
그 완악한 수건 썩 벗어버려라 말이죠

사라질 영광도 컸는데
영원한 영광은 오죽 하겠냐 말이죠
눈까지 다 태워버릴정도로 큰 영광인데 
왜 안 볼려고 하냐 말이죠

맞아요 눈 까지 다 태워버리니까 안 볼려고 하는 겁니다
깨작 깨작 눈에 보이는 것들로 빵깨이(소꿉놀이, 경상도 사투리) 장난 치는 겁니다.

역사로 장난 쳐요 남을 7번 용서 했다 라고
눈에 안 보이는 종말로는 행할 줄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답게 종말을 외치는 자로 만들고자
곧 인물 이지요
그 인물을 위해서 다시 태어나도록 다 죽이시는 겁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말씀의 운동력이니 얼마나 신나냐 말이죠

개인이라는 것이 없었다 라는 것이 얼마나 즐겁냐 말이죠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벗을수 있으니 말이죠
지도 안 지고 남에게 지도 못 지키는 율법 지키라고 얼마나 그 사기에 놀아났냐 말이죠
그 동안 다 그렇게 서로를 속이고 속여왔고 속일꺼다 말이죠

십자가 한 방이면 단번에 탁 잔 탁 ㅋㅋㅋ
기생충 뭔충 뭔죄 뭔수고 뭔시험 한 방에 끝
빨래 끝이다 말이죠
이 끌에서 사는 자가 이스라엘이다 말이죠
뿔로써 단번데 다 구멍을 다 뚫어버렸어요 뚫어뻥
막힌 속 답답한 의문 답답한 가슴 캬 ~~~~~~ 할명수 ~ 다 한방에 뻥 ~~~~~~~

또 의문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냐 말이죠

뿔로 다 수셔대세요 다 뻥 뻥 뻥 막힌 담을 다 허물어 버릴 겁니다

(엡 2:14, 개역)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 2:8, 개역)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개역)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10, 개역)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1, 개역)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엡 2:12, 개역)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 2:13, 개역)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 2:14, 개역)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 2:15, 개역)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6, 개역)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7, 개역)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 2:18, 개역)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9, 개역)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엡 2:20, 개역)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 2:21, 개역)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엡 2:22, 개역)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제 사람들의 종교오락게임 금식을
종말의 금식 뿔로 뻥하고 빵구멍 내 버리시고

기도 회개 눈물을
예수님의 기도로 회개로 눈물로
인간들의 기도 회개 눈물을 다 빵구멍을 내세요

성전도 불태워 버리는 가난한 과부의 전재산 헌금처럼
종말의 헌금
종말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헌금으로
성전을 허물어 버리시고
어서 어서 실상이신 참성전 되신 예수님을 외치는
이스라엘의 뿔을 나타내세요

성전은 허물어져야 제맛이고
이스라엘은 멸망해야 제맛이고
교회는 누락이 되어야 제맛이고
선지자와 사도는 피 흘려야 제맛이고
모든 피조물들은 허무한데 굴복해야 제맛이고
성도는 고난 받아야 제맛이다 ~~~~~~~~~

그 분 때문에

그는 흥하고 나는 망해야 하기에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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