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 악한 짐승을 땅에서 그치게 하는 화평의 언약 (겔 34,25-28)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므로 이제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한 목자 내 종 다윗을 세워 그들을 먹이는 왕이 되리라 (겔 34,23-24)
에스겔 2019 2021. 4. 18. 10:10
19-91 한 목자 내 종 다윗을 세워 그들을 먹이는 왕이 되리라 (겔 34,23-24)

〈에스겔 34:25-28, 개역한글, 구약성경 1205 쪽,  찬송가 453장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

(25)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지라
(26)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27)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엣목을 꺾고 그들로 종을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겠고
(28) 그들이 다시는 이방의 노략거리가 되지 아니하며 땅의 짐승의 삼킨바 되지 아니하고 평안히 거하리니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

(겔 34:25, 현대어) 『그때에는 내가 그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어 그들이 평화와 안전을 누리게 해주겠다. 내가 그 땅에서 흉악한 짐승들을 없애서 그들이 어디서나 안심하고 살 뿐 아니라 숲 속에서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하게 누워 잘 수 있게 해주겠다.』
(겔 34:26, 현대어) 『내 성전의 사방에 펼쳐진 땅에 언제나 알맞게 이슬비를 내려 주고 복된 소나기도 제때에 내리게 하여 그곳을 비옥한 곳으로 만들어 주겠다.』
(겔 34:27, 현대어) 『그러면 모든 과일나무들이 많은 열매를 맺고 농토는 풍성한 수확을 내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수들 때문에 걱정할 필요도 없이 고국 땅에서 안전하게 살게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이 메었던 노예의 멍에를 부러뜨리고 탄압자들의 폭력에서 그들을 해방시키면, 그제서야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겔 34:28, 현대어) 『그때가 오면 그들이 다시는 다른 나라 백성들에게 잡혀 죽거나 흉악한 짐승들에게 잡혀 먹히지 않고 아무런 두려움이나 근심 없이 자기들의 땅에서 살게 된 것이다.』


지난 주에 한 목자 다윗을 세워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된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틀렸지요 정작 지난 주 본문은 정작 백성 보다
종을 개입 시켜 버립니다
한 목자를 세워서 나의 종 다윗을 왕으로 세워서 그들을 먹이시겠다 라고 하십니다


아니 에스겔 때는 이미 다윗이 죽은 지가 언젠데 다윗을 세우시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까
네 맞아요 존재가 아니라 기능입니다
왕 참된 왕이다 라는 거죠

그 왕이 무슨 기능을 하는고 하니
물론 다른 왕은 안됩니다 오로지 다윗이어야 합니다
다윗만이 사울왕 보다 더 나은 왕이니까 말이죠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니까 말이죠

이 다윗 왕이 무슨 기능을 하는고 하니
네 맞아요 눈물을 씻겨주는 겁니다 이것을 희년 복음이라고 합니다
즉 언약 약속 곧 예루살렘에서 오는 말씀이다 라는 거죠
그럼 시온에서 나오는 율법에 의해서 대신 심판받아 더러운 죄악을 거룩으로 옮기는 작업이 바로 다윗의 자손인 꺽으신 뼈로 초상집에 있는 지혜로 완성했다 말이죠
무엇을? 율법의 완성을 말이죠
그러니 절대 저주(심판)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절대 사랑(용서)는 없는 거죠

이 간극 이 공백이라는 하나님의 의만이 나타내는 자가 바로 다윗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목자와 양의 관계성이 맺어지는 거죠
목자는 양을 위해서 죽고
반대로 삯꾼은 양을 잡아 먹는 거죠

오늘 본문에 화평의 언약을 세운다 라고 하면 보통
잘 되는 가운데서 더 잘되게
복된 가운데서 더더더 복 되게 하는 그런 의미에서 화평의 언약이 아니라

원수 됨에서 막힌 담을 허는 식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 원수 됨에서 빼내는 것이 바로 약속의 피 인데

이 약속의 피 곧 언약의 피의 기능이
바로 못된 짐승으로부터 상치 해치 당하지 않도록

네 바로 그겁니다 이거 말할려고 이렇게 밑밥을 깐 겁니다

수치를 당치 않는 것이 바로 구원 곧 언약의 피입니다

그렇다면 수치 속에 들어가 봐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마치 주의 오른손 이라는 구원의 손은
바로 하나님의 발등상에 의해서 원수로 들통 당하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셈입니다

바로 이런 우는 자가
잃어버린 자가
이 약속의 피를 바라보는
환자가 의사만을 부르짖듯이 말이죠

그런데 이미 구원받았다 선민이다 의인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이 화평의 언약이 필요가 없는 거죠
고로 의인이 범죄케 하시는
양과 염소를 팔을 어긋맞게 하시는 종말을, 끝을, 곧 예수님의 죽음을 끌어당기시는 겁니다
인간이 율법을 왜 지켰는고 하니
가짜 죽음이 깔려있어서 이다는 겁니다
즉 나는 이유 없이 살아야 한다 라는 거죠
그 존재성을 기능성 곧 비존재가 깨뜨리는 겁니다
비존재는 죽은자 이거든요
꺽으신 뼈 이거든요

그러니 남을 7번 용서 했다는 둥
십일조 냈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저 세리와 같이 토색하지 않았다는 둥 하는 겁니다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이다는 말은
곧 나는 이유 없이 무조건 살아야 한다 라는 
나는 죽으면 안된다 라는 겁니다

바로 그 죽음이
죽기를 무서워서 평생 종 노릇하는 모습이다는 거죠

아이고 그것도 죽음이가 라고 두 번째 사망이 있는 줄 몰랐지 라고
첫 번째 죽음의 바닥을 뜯어버리는 겁니다
바득을 뜯어내어 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왜 그것을 붙잡고 기절하냐 말이죠

아삽이 하나님을 믿지고 않고 욕하고 성도를 핍박함에도 불구하고
잘 먹고 잘 죽어서
배아파서 실족해서 죽게되었다 라고 시편 73편에 나오잖아요

(시 73:12, 개역)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시 73:13, 개역)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시 73:14, 개역)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시 73:15, 개역)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시 73:16, 개역)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시 73:17, 개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보니
오히려 이들은 이미 심판받은 자 이더라 말이죠
시체를 보고 왜 배 아파하고 시기하고 기절하냐 말이죠

하나님의 성소 곧 성전은 제사장의 기능이 있다 말이죠
더러움을 거룩으로 옮기는 기능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다 말이죠

이 약속의 이름이 우리는 수치를 당치 않게 하는데 있어서
사망의 골짜기 곧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첫 번째 죽음의 바닥을 뜯는 실상 곧 사망 권세를 이기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이름을
한 목자를
다윗 왕을
화평의 언약의 피를 발림 받고자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고자 말이죠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기에 부자가 될려고 하고
심판의 자리에 갈수가 없는 겁니다

(시 1:1, 개역)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개역)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3, 개역)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 1:4, 개역)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 1:5, 개역)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 1:6, 개역)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우는 자리
심판 받아 마땅하다고 외치는 회개의 자리
상한 심령의 자리
초상집에
종말의 자리에
두 번째 죽음을 당하지 않는 자리에
수치를 당치 않는 자리에

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 곧 거룩은
바로 이 양과 양 사이

(겔 34:22, 개역) 『그러므로 내가 내 양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거리가 되지 않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라는 심판의 자리가 그 기준으로써 펼쳐지는 겁니다
이 공백의 자리가 주인공 곧 주체이다 말이죠

(사 25:8, 개역)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눈물을 씻겨 주고
수치를 제거해 주시는 그 주인공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이
한 목자가
이마에 바르시는 어린양의 피가
그 공백의 자리에 있거든요

이것만이 사망의 바닥을 뜯어내시는
진짜 죽음이요 진짜 절대저주이기에
다른 죽음은 죽음 축에도 끼이지 못하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입니다

이 수치 제거를 구원이라고 하지

내 쪽에서 
인간 쪽에서 율법을 지켜서 쌓은 역사와 시공간의 교리를
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짜진리이고
진리가 아니라 계급 이라고 하지요 그 계급으로 질서를
혼돈의 시대에 질서를 잡았다고 자부할 뿐이지
주님 앞에서는 그것도 이미 이전의 것
즉 사망의 권세에 해당 될 뿐이다 라는 겁니다

이 사망의 권세를 멸하러 오셨는데
사망의 권세를 멸하지도 못하면
도리어 사망의 권세로 질서를 지켰다
계급을 유지해서 망나니 됨을 막았다
방종을 못하도록 유지했다

그런데 그것이 진리는 아니거든요
실상이 오면 그것도 버려야 할 그림자일 뿐이다 말이죠

아니 그래도 그것도 어디냐
이 그림자 덕분에 우리는 경건할 모양을 갖추었지 않았느냐

네 맞아요 경건의 모양은 갖추었어도 경건의 능력을 도리어
경건의 모양을 갖춤으로 인해서 부인하더라 말이죠

오호라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화로다 나여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망의 바닥을 뜯어내기는커녕
사마의 바닥이 뜯겨질까봐
지켜왔던 경건의 모양이였다는 거죠

경건의 능력은 사정없이 뜯어내 버리거든요
그러니 뭘 해도 가짜요
뭘 해도 죄 밖에 없음을 아는
우는 자로 만드시는 겁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우는 자리에서
잃어버린 자리에서

이 화평의 언약이 올줄 누가 알았겠냐 말이죠

못된 짐승
악한 짐승이 끊이질 않는 이 땅에서
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는 요나의 표적이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 무저갱 스올 지옥 바닥
그 깊고 깊은 어두움 속에서
희망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는 그 속에서

말도 안되게 생명이요 길이요 진리요 부활이신 예수님이
아이고 그것도 심판이가
심판 축에도 못 드는 심판의 바닥을 뜯어내시고
진짜 심판을 보여주마 라고 제대로 된 절대저주 절대 심판 속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언약의 피를 이마에 바르심으로써
절대용서를 보여주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받는
이 절대사랑을 보여주시더라 말이죠

그가 바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은
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계열로 세워진 다윗으로써
그 다윗의 가문에서
언약의 피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다 라는 겁니다

다른 계열을 끊어진다는 거죠
네 사울왕은 버렸다 징계도 안한다 사생아다

그러나 다윗 너는 매를 때려서라도 징계해서
긍휼을
언약의 피를
끊어지지 않도록 하시겠다 라고
다윗의 맹세 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맹세 곧 언약 입니까
뭐 쌍방언약? 그런거 없어요
주주 관계에서는 쌍방언약일줄 몰라도 뭐 인권존중 따위를 운운하면서 말이죠
지금 주주 관계가 아니라
비즈니스 계급놀이 사업하는게 아니라 계약 따 내는게 아니라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못된 짐승을 개입시키는 겁니다
사울왕 가짜진리
이스라엘을 다 차지한
정작 다윗왕은 이스라엘 바깥에서 맴도는

아니 계급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해 본들 소용이 없는 이유가

(삼상 18:7, 개역)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삼상 18:8, 개역)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삼상 18:9, 개역)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예수님이 더 큰 능력으로 바리새인 보는 앞에서 병자를 고치시니까
바리새인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본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계급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언약의 피가 찬송을 받는데 말이죠

인간들이 그 동안 공들여서 쌓은 성화됨 거룩됨이
예수님의 만만이요 앞에서 다 무너지는 겁니다

코러스 합창단들은 오히려 이 싸움을 이 붙이시는 전쟁을 더더욱 부추기고 있고요

싸이코러스 ~~~~~~~~~~

희극은 바로 이런 간극 이런 공백을 못 만든다 말이죠
비극만이 이 공백을 만들어요

미리 비극의 자리에 앉아버리면
이 공백의 자리에
잉여의 자리에 누가 오시는지

대신 죽으시러 오신

눈물을 씻겨주시는 하나님의 의
수치를 당치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
악한 짐승을 그치게 하시는 거룩한 이름
사망을 멸하시러 오시는 화평의 언약의 피가

바로 하나님이 세우시는 다윗 왕 곧 다윗의 자손이다 라는 겁니다

이 예수님이 새언약 곧 화평의 언약의 주인공으로써 등장함으로써
그 차이로 악한 짐승 곧 사울왕과 같은
애굽왕 바로왕을 1300년 만에 소환해서
바리새인에게 집어넣으셔서

이들의 거짓진리와의 차이로써 참되신 화평의 언약을 펼치시는 겁니다

그들은 복 중의 복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는 모세의 자리에 집착하게 되고
곧 절대로 십자가라는 저주에 들어가지 말라
초상집에 가지 말라 잔칫집에 가라 라는 식인 거죠
종말의 자리에 가면 안된다 라고 말이죠

반대로 화평의 언약은
그야말로 수치를 덮어주는
악한 짐승이 들어오지 못하는 심판을 견디지 못하는 이 심판 속에
이 초상집에서 언약의 피를 발라버리심으로써
주님이 직접 다윗의 찬양대 14만 4천 이라는 새이스라엘을 단번에 세우시는 겁니다
이마에 어린양의 피 발린 자들이거든요

우는 자리에서 말이죠

그러나 악한 짐승에게 소통되는 이마의 표 666는
절대로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지 말라는 
십자가를 거부하는 완악함을 소통하고 매매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고전 16:22, 개역)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잠 8:13, 개역)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잠 8:34, 개역)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잠 8:35, 개역)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잠 8:36, 개역)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의사가 필요가 없는 자는 건강한 자입니다
즉 의사를 얻고자 하는 자는 환자 곧 죄인 뿐이다는 거죠

저주 곧 심판이 마땅함을 알기에 긍휼히 여겨달라는 자가 주님을 얻는 자 이고

이미 자신은 주님을 얻었다 라고 하는 의인은
바로 그런 패역함으로 인해서 범죄자로써 사망을 사랑하는 자로 드러나는 것이
종말 곧 양과 염소가 뒤바뀌게 하시는
화평의 언약이다는 겁니다

즉 화평의 언약이 먼저 떳기에
이렇게 팔을 어긋맞게 됨이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인간이 조건을 갖추어서 화평의 언약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조건 갖추기가 바로
가짜 진리 곧 역사와 시공간으로 쌓고 쌓은 것들이 바로
계급이 되어버린 모세의 자리라는 높은 자리였다 말이죠
바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곧 구원 또는 복이다 말이죠
나는 복 받을 만 하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는 안 먹히는 겁니다
초상집이라는 종말에서는 안 먹힙니다
종말을 단순히 시간이나 때 보다
누구 누구 라는 누구 누구의 아들 이라는 인자
곧 인물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저주이다는 겁니다

도리어 십자가는 뭘 해도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라는 인물을 참인간을 참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거든요
마치 계시록에서 24장로가 면류관을 반납했듯이 말이죠
그 저주 속에서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라고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겁니다

바로 이런 원수에게만
환자에게만

의사를 얻도록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는 둘이 된 원수가 된 것을 하나로 만드시는 겁니다

인간이 잘해서 구원 받는 것이 없고

도리어 악인들의 반발은 왜 하나님은 어리석은 지혜로써
왜 십자가로써 절대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자를 용서하십니까 라는
반발성만을 유도하시는 십자가의 피 용서로써만 일하심에 있어서

그래야 비로소 미움이 제대로 드러나는 겁니다

사랑이냐 미움이냐

인간은 주님을 사랑한 적도 없기에
미움의 대상 조차도 못 됩니다

오로지 악한 짐승은 이 참사랑에 대한 반발성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요 나를 미워하니
내가 세상을 악하다 라고 미움을 표출했기에

나의 사랑하는 자를 미워한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사랑의 구체화는 곧 미움이 구체화 됨을 통해서
그 차이로 보게 되듯이

화평의 언약은
불화의 구체화 됨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겁니다

사울왕은 버리시기로 작정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때려서라도 징계해서라도 돌이키게 해서
영원한 언약 곧 버리지 않도록 하시겠다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삼하 7:13, 개역)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삼하 7:14, 개역)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삼하 7:15, 개역)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삼하 7:16, 개역)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물론 다윗은 아브라함처럼 100살 전에 아이를 낳아야 한다 라고 집착하듯이
사람의 손으로 짖는 성전 짖기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가문인 새성전은 다윗이 지을수 없는 바로 인물이 바로 새성전 되신 예수님 이십니다
그러니 다윗의 개입 또한 아브라함의 개입이 안되듯이 불가능 합니다
가능해지면 성화론자들처럼 죽은자의 하나님이 되는 거죠
산 자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아들이 먼저 있고 그 뒤에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으로 아버지가 태어나는 종말의 방식입니다)

결국 이것은 개인의 자질을 따지는 성화론과 반대 되는 겁니다
인간의 진리라는 가짜는 그저 계급이라는 높은 자리라는 곁길로 빠져버리지만

주님은 처음부터 이 십자가의 지혜를 밀어붙이셨습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이 십자가의 피 용서를 말이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이 화평의 언약 뿐입니다

이 원수 됨 이라는 수치를 가려주시는 십자가의 사랑이 구체화 될려면
이 원수 됨이 구체화 되는
상한심령
우는 자
잃어버린 자

지금 에스겔은 나라가 날라가 버렸습니다
이제 인간이 이스라엘을 바르게 운영해서
인간 쪽에서 복을 받을 수 있는 방식인 가짜진리는 이제 허용이 되지 않도록
주님 쪽에서 나라를 날려버렸다 말이죠

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님은 용서를 펼치십니다
화평의 원약을 펼치십니다

원수 됨 뿐인데
요나가 깊은 바닷속 스올 무저갱 지옥이라는
저주 받음이 마땅함 뿐인
저주 속 뿐인데

이 어두움 속에서 말도 안되는 생명의 길이
진리의 부활되심이 사망권세를 뚫고서 멸하고서
화목을 이루신다 라는 것은

십자가의 한 쪽 강도가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는
오로지 주님의 긍휼만을
7에 70번의 용서만을 바람에 있어서

다른 한 쪽 강도는 여전히
패역하고 완악한
남을 7번 용서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천국이냐 라고 반박하듯이
이 십자가의 피를 어떻게 해서든 못 쳐다보도록 하는
악한 짐승의 기능을 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남을 7번 용서한 적도 없기에 지옥감이 마땅합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저주 속에
이 십자가의 사형 틀에 뛰어드신 

원수를 사랑하시는 이 화목제물이 되신 주님의 사랑만을 바라보고자
주님은 이런 사태를 마련하신 겁니다

남을 7번 용서해서 죽은 자를 살릴수 있다면 지옥에서 면해지겠지요
그러나 죽은 자를 살리기는커녕 도리어 남을 7번 용서했다 라는 의인됨이
도리어 범죄를 저지르는 방종을 부추긴다는 것을

율법 지키는 것이 도리어 방종을 부추긴다는 주장을 하는 놈은 단 한놈도 못 봤다 말이죠

은혜를 더하고자 죄를 짖는 강가라는 놈들 밖에 없어요

(롬 6:1,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러니 막살면 안된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 라고 하면서 방종을 유도하더라 말이죠
범법을 저질러요 글쎄

의인의 범죄 말이죠

의인 
악인 이라는 랑그라는 남근언어 단어 문자에만 신경썻지

정작

뭐뭐 의 범죄
뭐뭐 의 돌이킴은 의도적으로 빼버렸다 말이죠
빼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미끄러지는 언어이기에
법적인 언어가 아니기에
무시 할 수 밖에 없기에

정작 앞의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뒤의 것이 중요한데
아무도 중요시
귀히 여기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주님은 바로 이런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겁니다

그들에게 내 종 다윗을 왕으로 세워서 먹이겠다 라는 것은
바로 앞의 조건을 갖춘 자들에게
전혀 맞지도 않는 다윗을 

마치 탕자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우듯이 새성전으로 주시겠다 이고

저들은 탕자 싫타
끝까지 맏아들 사울왕을 죽은 사울왕으로 이스라엘을 도배하겠노라 라고
박통령 유훈정치하듯이
높은자리로
복된 자리로
이스라엘을 도배함에 있어서

도저히 인간이 손댈수 없도록
쫄딱 망하게 하시고
공중분해 해체를 시킨 가운데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절망 속에서

요나의 표적 외에는 다른 표적을 보여주지 않으시는 겁니다

결국 악하고 음란한
악한 짐승을 따르는 대세 가운데서

주님은 이 영원한 화평의 언약을 듣든지 아니 듣든지 밀어붙이시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어떤 인간의 개입이 없이
인간의 성화 됨도 거부하시고
막살지 않겠다 라는 것도 거부하시면서

홀로 종말이라는 노아의 방주 곧 새성전을
인간의 손으로 짖지 않은 성전을 
그 화평의 언약을 지으시고 완성하시고
그 인물(방주)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집어 넣으시는 겁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요일 4:6, 개역)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요일 4:7, 개역)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8, 개역)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9, 개역)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1, 개역)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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