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화 아닌게 없음
어떤 신화도 죽음과 부활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야 사람의 신이 된 선악을 더더욱 구체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의 소원이 덮친 인간 입니다. 인간 자체가 신화죠 뭐
심지어 보험 회사도 반드시 죽음을 말해야 돈을 벌지요 죽음(미래)의 대비 이니까
그래서 천국(미래) 장사를 하는 거죠
또 패자부활전 없는 이야기소설 구조 없는 것이 없죠,
항상 패자부활전이 있어야 투자금(미래=잉여)을 확보 할 수 있겠죠.
또 부활이란 여성이 봄을 타는 것과 같죠
남들 심지어 세상의 모든 만물이 꽁꽁 얼어버린 죽음과 같은 겨울 계절을 극복하고
다시 기지개를 켜고서 생명을 발산하는 봄의 계절이 바로 부활의 의미를 모두다 담고 있죠
(시대정신이라는 영화에도 나오더군요, 다 아는 사실을 영화로 까지 만드는 저 수고로움)
상상으로 안 되는 것이 뭐 있겠습니까? 다 됩니다. 그 상상을 과거에는 신화 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 뿐이지요. 그 상상을 오늘날은 현실화 시키는데 있어서 사람들은 자신들도 그 꿈을 펼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아에 집착해야 하겠지요. 상상(신화)을 담는 그릇이 없으면 그 상상의 실현 또한 무산 될테니까요.
꿈 별표 은 이루어 진다.
2 인간 그 자체의 신화화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9-01-13 22:35:04,
우연히 외국에서 제작한 진실에 대해서란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성경은 예수는 로마의 신화에서 여러가지를 모방
한 그저 허구의 신화에 불과하다 라고 말하면서 로마의 신화나 인도 기타 여러나라외 신화를 예를 들어주면서 비교하는데 그들 신화에도 죽음과 부활이 있더군요 이걸 어떻게 봐야 할까요
답변 :
어떻게 보긴요 그냥 보시면 되죠 ㅋㅋㅋ
신화란 확인불가(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잉여) 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 조차도 확인불가입니다.
어떤 민족이든 어떤 국가이든 신화 없이는 역사를 형성할 수가 없습니다.
예로 단군신화의 내용 조차도 지금 어떻게 확인 할 수가 있겠습니까?
환웅은 일종의 메시아와 같은 존재요
하늘의 아들 개념이니 성경의 내용과 다를 리가 없지요
인간의 어떤 행동이든 신화 아닌 것이 없지요
그렇기에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간의 활동도 신화가 아닌 것이 어디 있냐 라고 말한다면
할 말 없죠 뭐
실지로 지금 현대인의 모든 행위 조차도 신화적인 행동 뿐입니다.
신화 아닌 것이 없을테니까요
종교에서 빠질수 없는 요소인데 어찌 언급이 안 될 수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언급이 되어야죠
심지어
구약의 이스라엘 조차도 복음은 그들을 거부 합니다. 원가지를 짤라 내어버린다고 말이죠.
(롬 11:20, 개역)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롬 11:21, 개역)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롬 11:22, 개역)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롬 11:23, 개역)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롬 11:24, 개역)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결국 이스라엘 조차도 종교화 되었기에 짤라버리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신화 화입니다.
믿음을 신화화로 바꿔버리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이야기 구조에는 신화구조가 있고
그 신화 구조에는 믿음이라는 약속 중심이 아니라
인간을 어떻게 이롭게 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겁니다.
결국 모든 신화에는 인간의 신과 같은 품성을 자극하는 겁니다.
너도 신이 될수 있어 넌 신의 자손이야
이것이 바로 가인의 족보에서 나타난 영웅족보입니다.
여기에 비해 약속의 족보는 죽음의 족보입니다.
영웅족보의 반대인 희생제물만 쳐다보기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종교를 반드시 깨버리시는 이유는
약속이 중요하지 이스라엘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돌들을 통해서 아브라함 자손을 곧 언약의 자손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인
믿음의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신화화된 인간의 높아짐을 깨부수는 복음이 아니면
인간은 신에 대한 집착을 버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항상 종말적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 종말 조차도 묵시운동 조차도 바벨탑건립취지와 같은 하늘을 뚫고자 발버둥 하는 영웅 확장입니다. 그것이 신화 입니다.
결국 이런 쉼없는 운동 조차도 에덴동산 결핍이요
생명나무로 인해 영생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롬 1:28, 개역)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그렇기에 이런 신화들이 제발 좀 많이 많이 퍼져야 합니다.
가인이 이마표 받고 퍼지듯이 바벨탑 무너짐으로 그 바벨탑 사고방식이 옆으로 넓게 퍼져나가듯이
이제 인간은 자기 사는 곳 자기 영역을 바벨탑으로 만들어 가면서
늘 영웅담의 이야기를 펼침으로써 그 한마디 한마디 이야기 속 마다 신화가 아닌 것이 없듯이
헛된 허망한 이야기로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그 속임수에 깊숙이 빠져 살도록
눈과 귀와 막혀진 상태로만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 상태가 이미 지옥이고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딤전 1:4, 개역)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딤전 4:7, 개역)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신화 자체가 인간 잇기입니다. 바벨탑 이죠. 인간 자체가 바벨탑 그 자체로써
인간과 인간을 잇는 그 공동된 관심사가 신화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족보 곧 역사와 연관된 겁니다.
반대로 믿음이란 그 역사를 차단하고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족보 자체가 이어질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이어지는 족보의 반대의 족보를 형성 합니다.
끊어진 족보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족보요
예수님의 족보는 결국 인간의 족보를 겨냥한 정면 도전입니다.
끊쳐짐의 족보다 라는 거죠.
누가 봐도 끊쳐진 저주 받은 족보가
그런 시각으로 볼 수 밖에 없는 족보를
모조리 다 지옥 보내기 위해서 형성된 족보가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그렇기에 신화란 인간이 신이 되고파 하고
신의 영역을 탐내고 흉내내는 모든 것들을 다 담고 있습니다.
이미 구약 이스라엘 역사 속에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의 부러운 신체제 왕제도체제 경제체제 종교체제 사회체제 그 모든 것이 부럽고 따라하고파서
항상 여호와 이름 들먹이면서 썩어버립니다.
이 혼합주의가 바로 인간의 특징이요 언제든지 핑계를 댈수 있는 놀라운 정치술 처세술이면서
자기도 변호하고 신을 빙자하면서 신도 변호하면서 자기의 욕망도 언제든지 정당화 할수 있도록 처신하는 겁니다. 그것이 이미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딴 곳에서 살펴 볼 필요 없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특히 그들의 모든 것을 그대로 답습한 바리새인을 통해서도
다 드러나고 있습니다. 멀리 갈 것 없지요.
결국 신화란
어쩌면 죄의 소원이 덮쳐진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를 다스리고 싶은 모든 인간들의 소원
그것이 신화 속에 모든 것이 짜깁기가 되어서 혼합된 채로 무의식화 된채로
퓨전화 된 채로
보다 조금 더 나은
조금이라도 더 낫고 좋고 높고 크고 선하고 진리답고 지혜로운 것이라면
뭐든지 자기 쪽으로 끌어들여서 반드시 흡수 통합 지식습득 하여서
흉내내고자 하는 그야말로 채워도 채울수 없는 영원한 결핍의 갈증에 놓여진 것이겠죠.
보암직 먹음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모든 것들이
바로 인간의 신화 속에는 다 있습니다.
결국 인간 일기장 인간 역사 인간 기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것이 악마의 역사입니다.
정말 정말 성경말씀대로 제대로 쫏겨난 증거이고
제대로 생명나무에게서 차단된 증거입니다.
차단 되었기에 금기된 것을 더욱더 목말라 하는 겁니다. 그 어떤 것도 채울수 없는 결핍 그 자체가 된 거죠. 인간 자체가 다니엘서에서는 우상이라고 헛된 허망한 것이라고 증거 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이 어깨 동무하여서 인간의 재료로 세워진 탑이 바벨탑이듯이 말이죠,
정말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신화가 지금 모든 문화 영화 예술 모든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있고 그 힘으로만
하루 하루를 버텨가면서 미래를 꿈꿉니다.
신 되기 가 없으면 인생은 의미가 없는 겁니다.
우상이 아니면 인간은 자기 가치를 못 느끼고 자살하고 맙니다.
유일한 소망이 바로 신화입니다.
신화로만 역사를 형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온갖 좋은 것들을 짬뽕해서 말이죠.
지금의 기독교가 신화화 된 이유도 그러하지요
본능이니 말릴수가 없습니다.
박살난 자만이 유일한 빛을 본 자입니다.
아들의 소원이 덮친거죠.
(눅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그래서 아들의 소원 외에는 알길이 없는 차단 된 것을 불가능한 것을
인간들은 조직신학이라는 둥 역사신학이라는 둥 성경신학이라는 둥 온갖 용어를 붙여가면서
교리를 통해서 눈에 보이는 교회와 그 교회를 보호한다는 자기자신을 자꾸 신화화 하고 있는 겁니다.
신의 선택으로 말이지요
그래서 그 종교에 의해서 예수님은 반드시 죽으셔야 하고
예수님은 그 종교의 실체를 반드시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그 종교 곧 신화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허망한 것이라면
그 모든 신화의 대표성으로써 이미 적나라하게 들추어진 겁니다.
물론 기독교가 지금 그 짓을 따라 하지만 말이죠. 돈 때문에 빼도박도 못하도록 하신 거죠
그렇기에 왜 언약을 말하는데 있어서 이런 비언약과 대조를 이루는 지를 알수 있겠지요
모든 인간의 언어는 신화구조 곧 선악 구조 이고
여기에 대비된 언약의 언어는
십자가 라는 어리석고 미련한 언어 구조 중심으로 펼쳐 집니다.
그래서 신화로부터 반드시 공격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역사로부터 반드시 공격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를 거부할 수 밖에 없는 그 안색의 변함을
반드시 드러낼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지혜를 일방적으로 편애 하고 기쁘게 그 제물을 받아 버렸기에
나머지 모든 것들은 아무리 제사 드려도 소용없는
십자가 보다 더 나은 제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워할 수 밖에 없기에
십자가에 알 수 없는 미움을 드러낼 수 밖에 없도록 미움 자체를 심어버린 겁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신화에 대한 긍정만을 자아와 자기 주변에 칭칭칭 감아버리는 겁니다.
그것이 가인의 이마표 이었듯이 그 신화의 결집이 가인 성 에녹 성 바벨탑 국가 이것이 바로 666입니다.
상대적인 이런 인간의 결집 체제를 허무는 거룩한 전쟁 군사가 144000입니다.
동서남북 각 지파의 12지파의 진행구조 곧 일종의 움직이는 언약궤 박스 상자 모습처럼 말이죠.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은 모습입니다. 모양이 중요한게 아니라.
무엇을 그 상자 박스에 담느냐 하는 겁니다.
언약(믿음=족보의 반대, 행함의 반대,역사의 반대)을 담고 모든 비언약을 깨뜨리는 전쟁구조로써 말이죠.
그래서 반드시 비언약의 사고들 조차도 그들 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언약에 의해서 그들 움직임 하나 하나가 진행이 되는 겁니다.
그렇기에 인간들의 신화는 더더욱 퍼져야 하는 거죠. 물론 이미 다 퍼졌지만 말이죠.
예로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뒤 덮어야
한 사람의 탐욕이 개인의 욕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 얽히고 설켜서
인간이 재료가 된 바벨탑 구조 체제가 구석 구석에서 펼쳐지는 겁니다.
하늘로 세우던 그 바벨탑이 이제는 옆으로 구석 구석 퍼져서 그 바벨탑에 굴복하지 않는 자들은 가차없이 제거 되는 그런 체제가 지금 부지런히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신화화 죠
인간 자체가 신이 되기 위해서는 약한 열성들은 빨리 빨리 도태되도록 말입니다.
인간 자체가 거대한 신상으로써 우상이 되는데 있어서
약한 것들은 빨리 빨리 제거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의 어린아이도 어린아이가 아니라
천재들로써 신의 존재들로써 양성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교육도 그런 흐름입니다. 철저하게 자본주의사고에서 교육이 되어야지
자본주의를 벗어난 교육이 있을 수 없도록 말이죠.
심지어 저 촌구석 청학동도 철저하게 자본주의입니다.
말로만 유교일 뿐이지 혼합주의 자체가 자본입니다. 돈이요 유행인 거죠.
자 이렇듯이 비언약은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반드시 그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 겁니다.
자본주의 자체가 잉여로 움직이듯이
알수 없이 이유도 없이 그저 많이 챙겨야만 하고 아무리 많이 챙겨도 여전히 미래는 어떻게 될 수 없도록 불안케 만드는 것이 바로 비언약의 체제입니다.
잉여로 움직이듯이 말이죠.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죄의 소원이 양산해 내는 잉여를 서로 가지기 위해서
더더욱 그 죄의 소원을 다스리고자 저 지구 구석 구석 까지 자본주의는 다 퍼지는 겁니다.
다스리면 다스릴수록 신화가 되고 신(영웅)이라는 초월자가 되는 겁니다.
죄도 못 다스리는 주제에
무슨 살 자격이 있겠느냐 라고 몰아 뭍이는 거죠. (성화론도 이런 취지죠)
어디에도 발 못 붙이도록 하는 겁니다.
자기들만의 에덴인 소돔과 고모라로 형성 하는 거죠.
그 지옥과 같은 소돔과 고모라는 인간들의 신화만이 가득 차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생각한 신화에 대한 의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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