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 이란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첫번째 질문 2009-01-21 20:35:07,
야곱과 에서를 비교하면서 육에 속한 사람을 만나보면 속이 강하고 타협하지 않고 딱딱하고 유연성이 없다 완강하고 고집이 세다
또한 영에 속한 사람을 만나보면 속이 부드럽고 유연성이 있으며 온화하다 야곱이 팥죽을 산것은 기회를 누린것 뿐이지 속인건 아니다
이것은 천국은 주어지는것도 있지만 침노해서 얻어지는 원리도 있다는것이다 라고 합니다
두번째 질문 2009-01-21 20:49:47,
그리스도가 심겨지면 우리안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올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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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손으로 십자가에 죽였던가에 대한 육의 소욕의 실상들을 낱낱이 고발당하는 성령의 조명빨에 의해 고백이 튀어나오도록만 되어 있습니다. [예수 밖]의 내막이 들통나지 않는 가운데, 건너뛰고, [예수 안] 으로 들어갈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자기숙제가 되어버리는 대상이 된 우상 예수가 되는 거죠. [예수 안]은 전적인 예수님의 숙제로 그 결과만 우리는 누릴 뿐입니다. 지적 당하고 징계로써 사생아와 차이내는 겁니다.
(육의 자랑은 반복이 가능하지만-기념비화 되었기에
성령의 일이란 다시 되돌려 재생이 불가능 합니다. 이미 삭제된 단회성이기에 리바이벌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인격이란 성령의 일의 반대죠. 죽음을 다시 반복하는 것은 말이 안되죠. 선지자는 한 번 죽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두 번 죽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악령에 속한 자는 반드시 육을 자랑해야 하기에 다시 되돌려반복보기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의 새로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격 놀이 게임을 벌리는 겁니다. 이미 선점했기에 다시는 나올 것이 없기에 과거의 경험만을 우려먹는 게임이 바로 인격 놀이죠. 간증이 바로 그런 식입니다.)
바로 그런 원수를 왜 또 이유도 없이 조건도 없이 무조건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가 에 대한 성경의 모든 비밀을 밝혀 알려 주십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위의 질문의 내용처럼 성화론자들이 의도적으로 종교적인 생산물로써 그리스도의 인격을 갖추게 되면 그 상대적인 그리스도의 인격을 갖추지 못한자를 보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라고 성전 즉 교회에서 반드시 육의 자랑을 늘어놓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부자청년이 모든 재산을 못 버린것에 대한 예수님의 몰아 붙임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자신은 재산을 버렸다 라는 조건을 갖춘 것을 과시하게 되어 이때다 이런 기회 없다. 그동안 예수님에게 책망만 밭았는데 드디어 좋은 기회다 라고 예수님이 유발치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자청년의 상대적인 자기의 조건을 그 순간 놓치지 않고 육의 자랑을 늘어 놓게 되는 겁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부자청년을 십자가의 정신인 이웃사랑과 율법의 원래 취지인 이웃환대법 약자보호법 의 원래의 율법의 뜻을 말해 준 것인데
베드로는 그것에는 관심 없고
부자청년이 갖추지 못한 조건은 자기는 갖추었다 라고 나오게 되니까
베드로 역시 율법의 정신의 취지를 모르고
법을 쥔 조건 갖추어 천국에 들어갈려는 그런 부자청년의 마음
바로 법을 쥔 마음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라는 그 주님의 명확한 의미에
도리어 반대로 생각하게 된 겁니다.
바로 그런 것처럼 질문 속의 내용 또한 부자청년이 근심하고 돌아서니까
반대로 베드로가 자기 육의 조건을 내세우듯이
지금 그리스도인의 인격 이라는 조건을 갖춘 것을 자꾸 억지로 짜깁기 해서라도
천국을 탐내는 것을 (그 쪽에서는 침노 라고 표현했네요) 정당화 하겠다는 취지인 겁니다.
부자청년의 천국단절의 마음이나
베드로의 조건 갖추기해서(그리스도의 인격 못 갖추면 안된다는 조건) 상대적인 조건을 내세우는 것이나
둘 다 역시나 천국과 상관 없는 짖만 골라서 한 겁니다.
에서를 분석하고
야곱을 분석해서
그들의 선택과 미움의 조건을 따져서
자기유익이 되는 천국 가기 유리한 방향으로 조건 갖추겠다는 그 발상은
이미 마귀의 하수 노릇을 한 유대인이 다 써먹은 방법입니다.
대중들은 잘 모르기에
목사들은 반드시 악령을 받아서 그런식으로라도 가르쳐야
교회에 붙잡아 놓을 수 있기 때문인 겁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신앙적으로 보이겠지만
바로 그것이 악마가 씌여진 전형적인 모습인 거죠.
안그래도 이 질문을 받고 오늘 들은 수요설교와 완벽하게 정반대 이구나 라고 생각 했습니다.
악의 세계는 자기 멋대로 행동 못하고
반드시 성령의 소욕에 의한 육의 소욕을 드러내는 일들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① 교회 라는 사람들의 손으로 지은 그 내막들이 낱낱이 드러나지 않으면
[① (행 7:46, 개역)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행 7:47, 개역)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행 7:48, 개역)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행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행 7:50, 개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행 7:51, 개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 7:52, 개역)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 7:53, 개역)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즉 성령의 집과 상대적인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과 대립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령의 집이란 사람 자체로써 사람들이 죽어감으로써 성령의 집을 이루는 겁니다. 즉 선지자의 핍박받음과 고난 당함과 죽임 당함 이것이 성령의 전이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전 즉 처소란 인간들이 이룰수 조차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으로써 성전을 건축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고 하니 마치 하나님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왕을 세우겠다 라는 취지와 그에 따른 현상이 나타나는 원리와 같습니다. 결국 그 왕이 백성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갈취 하게 되는 겁니다.
똑같이 오늘날 교회는 주님의 자녀를 핍박 하는 터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원리와 같은 겁니다. 이것이 바로 광야(성령=육의 소욕 단절)교회의 원리와 인간의 손으로 지은 교회의 차이점입니다. 사도행전 7장의 취지는 바로 그런 취지인 겁니다. ]
② 성령의 집의 의미를 드러내는데 모호해 지는 겁니다.
[② (행 17:24, 개역)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5, 개역)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행 17:26, 개역)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행 17:27, 개역)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 17:28, 개역)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행 17:29, 개역)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행 17:30, 개역)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1, 개역)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결국 주님이 직접 세우시는 성전은 회개의 전입니다. 즉 죽어마땅한 자임을 아는 죽음에 뛰어드는 자입니다. 단절에 뛰어드는 자입니다. 심판에 뛰어드는 자입니다. 저주에 뛰어드는 자입니다. 그 불 속에서만이 참 생명이 있음을 새 창조가 있음을 비로소 보는 자입니다.)
참 재미있게도 성화론자나 종교꾼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에서와 야곱의 비교에서도 잘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해석한 겁니다.
일부러 롯처럼 만들어서 구원하는 방식이 편애 받은 자 이고 (잉여=원인 없는 결과 이기에)
반대로 부자청년이나 베드로처럼 조건 갖추어 보겠다는 발상이 도리어 천국단절의 의미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야곱을 의도적으로 약탈자로 만든 겁니다.
약탈자 강도도 구원받을 정도로 너무 너무 쉬운 구원을
너무 쉽기 때문에 가장 어렵게 된 이유가
바로 같은 원리로 장대 높이 달린 구리놋뱀 쳐다보기만 하면 고침을 받는 구원을
너무 쉽다는 이유로 무시했기에 따로 조건을 갖추겠다는 겸손함이 도리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결과입니다.
결국 너무 너무 겸손함이 지옥을 부른 결과죠.
저런 에서와 야곱에 대한 해석의 발상이 너무 너무 놀라울 정도입니다.
아무나 그렇게 해석 못하는데 딱 지옥가기 좋은 해석만 골라 했군요
맞아요 지옥 아무나 못 갑니다.
지옥 가기로 작정된 자만이 갑니다.
지독한 미움은 이유나 조건이 없습니다.
즉 악령의 일 또한 잉여적인 겁니다. 원인 없이 나타나는 결과인 겁니다.
지금 자본주의가 반드시 그렇게 더욱더 구체화 되듯이
반드시 오늘날 기독교들의 저런 해석 또한 더더욱 그렇게 구체화 되는 해석으로만 흘러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잉여 답죠
결국 육의 싸움은 없습니다. 영의 싸움 뿐입니다. 인간의 손에서 떠난 사건들 뿐인 겁니다.
(그래서 새롭다(신상품이라는 뜻이 아니라 영적이다 라는 뜻입니다.) 라는 의미이기에 육에서 떠난 문제요 영적인 존재들에 의해서 다 정해진 바 이다 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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